2022. 12. 29.

이태원 참사

인간의 뇌는 좌뇌와 우뇌로 나누어져 있는데 대개 좌뇌가 작동할 때 우뇌는 움츠러들고 반대로 우뇌가 활성화되기 시작하면 좌뇌는 억제된다고 한다. 그래서 모든 트레이더들은 감정을 억누르도록 훈련받는 것이겠지, 그렇지 않으면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세상에 뇌를 한 쪽만 가진 사람은 존재하지 않듯, 이성 혹은 감정 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이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이태원 사고의 비보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 역시 그래야 하지 않을까. 순식간에 총 158명이 사망한 이 참사는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우리 사회가 이 사고를 품고 받아들이는 데엔 이성과 감성, 둘 모두가 필요했다. 사고 초기 신경정신의학회가 성명서를 발표하며 서로의 감정을 배려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이유였으리라. 사고 발생 후 나온 몇몇 후속 조치들이 다소 과도해 보인다고 하더라도 결코 불필요한 일이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감성은 이성을 마비시키곤 한다. 큰 사건이 터지고 나면 사람은 방어기제로 비난할 대상을 찾기 시작한다. 그러니 세월호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사건의 배경을 두고 터무니없는 음모론이나 의혹들이 제기된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지만 그렇다고 그 괴담들이 합리적이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또한 몇몇 언론들의 지적과는 달리 이 사고는 쉽게 예견할 수 있던 일도 아니었기에 방지하기도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분노를 해소하기 위해 손에 닿는 대로 희생양을 찾아 보복에 나선다면, 그것도 정치와 진영에 따라 누구를 희생양으로 삼을지 힘겨루기에만 열중한다면 이와 같은 비극은 되풀이될 것이다.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

인간의 이성이 암흑시대를 끝내고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18세기 유럽에서 태어난 프란시스 고야. 하지만 이윽고 그는 이성적이라던 유럽인들이 자유와 이념이란 이름으로 서로를 죽이는 야만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자유와 평등, 박애를 외치며 혁명정신을 전파하겠다던 프랑스 군은 마드리드에 진군하며 시민군을 대량으로 학살했고 계몽주의적 성향을 지녔던 고야는 이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때문이었을까. 고야는 인간의 광기와 야만을 거칠고 적나라하게 그려낸 작품을 여럿 남겼는데, 그 연작들 중 하나에 그는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라는 제목을 달았다. 

오래전 새끼를 잃은 회색 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자식을 잃은 그 암곰이 분노와 슬픔에 미쳐 숨이 멎을 때까지 눈에 보이는 모든 동물들을 찢어 죽이고 호랑이나 늑대 같은 맹수들까지도 그 곰을 피해 숨고 온 숲이 공포에 떨었다는 이야기. 한낱 짐승들에게도 자식을 잃는 고통은 단장(斷腸)의 아픔이리라. 그렇게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심정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자식을 잃은 부모들에게 감히 이성을 기대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들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감성과 공감이지만 참사가 되풀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감정이 아닌 이성이 필요하다. 문제는 우뇌가 작동하게 되면 이성이 마비되고, 그리고 고야가 경고했듯 이성이 잠들면 괴물은 깨어나기 마련이다. 유가족들은 사고의 진상을 밝혀줄 것을 정부에게 요구하고 있지만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그들이 정말로 사고의 진상을 몰라 분노하는 것이 아니며, 그렇기에 그 무엇으로도 자식을 잃은 부모를 위로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니 이제 우리는 그 분노로부터 누군가의 자식들을,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들의 분노로부터 유가족들을 지켜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머지않아 사회는 둘로 나뉘게 될 것이고 한 쪽은 유가족을 공격하게 될 것이다. 이미 그런 조짐들을 보고 있지 않은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삶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을 홀로 방 안에서 보내야 했던 20대들의 첫 축제는 어이없는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너무나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은 우연과 우연이 겹친 사고였을 뿐 누군가가 악한 의도로 저지른 사건은 아니었지 않은가. 희생자들을 잊어서는 안되고 법을 어긴 이들은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하겠지만 우리의 슬픔과 분노는 언제고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코로나로 3만여 명의 동료 시민들을 떠나보냈다. 하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은, 특히나 젊은 20대들은 남은 삶을 최선을 다해 누려야 하지 않을까. 결코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축제여서는 안된다. 나에게도 언젠가 죽음이 찾아오겠지만 그 이후에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슬픔을 이겨내고 즐겁고 행복하게 자신들의 남은 몫을 만끽하기를 바란다. 행여나 그들이 슬픔에 못 이겨 갈 곳 잃은 분노와 무의미한 증오에 휩싸인다면 부디 다른 이들이 그들을 위로하고, 다독여주고, 또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기를.  



희생자들에게 삼가 애도를 표합니다

2022. 9. 27.

미개한 환율정책, 그리고 단호한 통화정책

우리나라에는 통화정책만 존재하지 환율정책이란 괴상한 정책수단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금융을 교과서로만 배운 것이다. 그렇다, 우리나라에는 그 괴상한 환율정책이 존재한다. 하지만 물가의 안정과 지속 가능한 성장을 목표로 삼는 통화정책과는 달리 환율정책에는 별다른 원칙도, 철학도 없으며 따라서 비용은 명확한데 반해 실익은 매우 불투명하다. 이런 정책을 미개하다는 말 외에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연초만 해도 1200을 하회하던 환율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함께 상승세를 거듭했고 이에 정부는 대량의 달러를 풀어 환율을 낮추려 했다. 1분기 말부터 2분기 말까지 우리나라의 외화보유고는 약 300억 달러가 급감했는데 이 중 거의 대부분이 1200원 초반 수준에 달러를 매도하는데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1400원이 넘는 환율을 마주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보다 무려 15%나 낮은 수준에 외화보유고를 풀기로 결정한 사람은 국회에 불려가지도 않았고 책임을 지지도 않았으며 국민들에게 사과하지도 않았다. 이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시장의 향방을 알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장기적인 적정 수준의 가격이 얼마인지 추정할 수는 있다. 연초의 경제지표들을 보면 그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당시의 환율 수준이 균형가격이라고 말하긴 어려웠다. 투자금은 계속해서 대한민국을 떠났고 무역수지는 적자로 돌아서기 시작했으며 다른 주요국 통화들 역시 약세를 지속했다. 하지만 정부는 터무니없이 낮은 수준에 터무니없이 많은 외환보유고를 푸는 터무니없는 판단을 내렸다. 문제는 그런 개입은 지속 가능하지도 않고 국제수지 및 국내의 불균형을 악화시켜 경제 전반에도 악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왜 이런 미개한 정책을 펴다 외화보유고를 털어먹었을까*. 이는 그들이 무능하면서도 오만하기 때문이다. 지난 1년간 원자재 가격과 금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급변했고 한국을 둘러싼 경제환경도 크게 달라졌다. 하지만 무능한 정책결정자들은 그런 거시환경의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다.(이런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더 힘든 일 아닌가) 그저 원숭이처럼 재작년에도 그 이전에도 환율의 상단이 1200원이었으니 이번에도 비슷하겠거니 하며 멍청하고 게으른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게다가 무역수지와 자본수지가 모두 적자를 찍는 나라의 통화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일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근본적으로 루나를 풀어 테라의 값어치를 달러에 페그하겠다는 권도형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이만한 액수를 풀다니, 그들은 진심으로 자신들이 시장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믿었나 보다. 게으르고 멍청한 데다 오만하기까지 한 사람들이 내린 판단이 어떻게 좋은 결과를 가져왔겠나. 권도형이 여러 개미들의 가상자산을 깨끗하게 지워버린것처럼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며 유지해 온 외환보유고의 상당액이 몇 주 몇 달 만에 대한민국의 계좌에서 빠져나갔다.

지난 목요일, 일본 중앙은행은 엔 약세에 제동을 걸기 위해 대대적 개입을 단행했다. 한국과 일본은 모두 무역적자에 시달리고 있고 미국의 빠른 금리 인상으로 자국 통화가 달러 대비 절하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이 연초부터 지속적으로 외화보유고를 소진한 것에 반해 일본은 환율이 25% 상승한 후 대대적인 개입에 나섰다. 둘 중 어느 쪽이 한정된 외화자산을 더 효과적으로 사용했는지, 둘 중 어느 나라의 경제가 균형점에 더 빨리 도달할지 굳이 분석해 볼 필요가 있을까. 한국의 대중문화는 이미 일본을 넘어섰는데 한국의 관료들은 어찌 딴따라만도 못한 수준에 머물러 있을까.

작년 정부는 한국 시장을 MSCI 선진국 지수에 포함하고자 다방면으로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그 이유는 한국의 주식시장이 작아서도, 거래량이 모자라서도, 안보환경이 불안정해서도 아니었다. 바로 국제표준에 맞지 않는 후진적인 제도 때문이었다. 이처럼 많은 경우 우리나라가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대개 미개한 관료들 덕이다. 세계 1위의 반도체 회사를 만든 사람이 괜히 한국의 관료들을 3류라고 지칭했겠는가. 

문제는 그 관료들의 어리석은 짓이 가져온 비용들은 늘 우리 일반 국민들에게 청구된다는 점이다.


*               *               *


하지만 모든 관료가 그런 것은 아니다. 이제껏 여러 차례 한국은행의 줏대도 없고 원칙도 없는 통화정책을 비난했지만 이창용 총재가 이끄는 한국은행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전의 글에서 밝힌 대로(링크) 현재의 환경이 과거와 다르다면 중앙은행은 성장과 일자리를 희생시키더라도 인플레를 먼저 잡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정책결정권자 입장에서 매우 어렵고도 고통스러우면서도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인데 이창용 총재는 이에 대해 명확한 시그널을 내놓았다.  

중앙은행이 언변을 모호하게 할 때와 명확해야 할 때가 서로 다르다고 생각한다. 모호해야 할 때 명확하고 명확해야 할 때 모호하다 결정적인 순간에 좌고우면하던 전임자들과는 사뭇 달리 이창용 총재는 시장과 대중들에게 현 상황에서 통화정책의 우선순위가 무엇이고, 또 그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노련하면서도 군더더기 없이 설명했다. 자산 시장은 그의 명쾌한 발언들을 꺼릴지 모르나 정책결정자가 올바른 데이터와 합리적 근거를 바탕으로 자신감 있게 정책을 설명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워낙 불확실한 시대인지라, 미래에 그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 우리는 가장 어려운 순간에 가장 훌륭한 중앙은행장을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견해지만 올해 소진한 외환보유고는 전체 외환보유고의 10% 미만으로 외환위기를 촉발할 수준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하지만 당국자들이 이런 멍청한 판단을 계속한다면 먼 미래에도 안전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2022. 9. 24.

choc promo (by Sound Providers)

 


주식은 주식일 뿐이고 시장은 시장일 뿐이니 너무 일희일비하지 마세요.

터부 요기니, 그리고 노회.

2003년 베니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도 성대한 비엔날레가 열리던 그 해 여름. 한 동양 여성이 산마르코 대성당 광장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빨갛게 물들인 머리에 경극이나 가부키를 연상시키는 짙은 화장을 한 그녀는 곧 옷을 벗어던지기 시작했고 빨간 속옷만 입은 채 관객들 사이로 걸어 들어가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무척이나 기괴하면서도 에로틱하지만 또 어딘가 서글픈 그녀의 춤사위는 비엔날레를 찾아온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사실 정식으로 초대받지도 못했던 이 무명의 신인은 단번에 가장 유명한 한국 아티스트가 되었으니, 바로 낸시랭-터부요기니가 탄생하던 순간이었다.

여전히 사회에 엄숙주의가 만연하던 시절 미술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시절의 화가란 마치 선비나 계룡산의 도사와도 같은 것이었고 그런 이들과 결탁한 인사동의 화랑들은 카르텔을 형성하며 온 힘을 다해 퇴보하던 중이었다. 그러니 어찌 낸시랭이 이뻐 보였겠나. 젠체하던 이들은 겉으로는 그녀를 관대하게 대하는 척하면서도 그녀의 예술을 저급한, 마치 인스턴트식품과도 같다며 은근히 까내리고 있었다. 그녀가 그런 평단의 분위기를 몰랐을까. 낸시랭은 대중들과 평단에 굴복하기는커녕 근엄한 예술의 성지와도 같던 예술의 전당에 나타나 입던 바바리를 벗어던지고 다시금 비키니 차림의 육신을 대중 앞에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본 대중들은 그녀를 비난하기 바빴지만, 세상에 얌전히 순응하기만 하는 예술이란 게 어디에 있는가. 그녀는 계속해서 위선을 권위로 덮은 예술계와 관음적인 관객 모두에게 당차게 중지를 내밀었다. 

보수적이고 젠체하는 평론가들 앞에 그녀가 비키니 차림으로 등장한지 어느덧 20여 년이 지났다. 더운 여름이 가시기 시작했던 지난 8월 말 그녀의 개인전이 열린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허나 그녀의 전시를 둘러보고 난 뒤 나는 적잖이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 모두와 싸우며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펼치던 낸시랭은 온데간데없고 과거의 영광을 답습하거나, 지나간 작가들의 작품에 올라타거나, 혹은 미디어 아트나 NFT와 같이 한 물 가기 직전의 진부한 트렌드에 영합한 작품들을 보게 될 줄이야. 내가 기억하던 그녀는 결코 그럴 작가가 아니었는데,라고 중얼거리며 전시장을 나서야 했다. 어쩌면 그녀는 지쳤던 것이 아닐까. 대중의 손가락질과 싸우느라, 또 개인적인 아픔을 이겨내느라 더 이상 싸울 힘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김빠진 그녀의 작품을 바라보는 일은 마치 아버지 정수리에 난 흰머리를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서글픈 일이었다..     

하지만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여전히 몇몇 작품은 충분히 도발적이었더라. 인터넷 홍위병들과 PC라는 신을 섬기는 광신도들이 창작자들의 입을 틀어막는, 마치 중세 암흑기와도 같은 이 끔찍한 시대에 그녀가 아니라면 누가 이런 작품을 내놓을 수 있었을까. 그녀는 여전히 권태를 깨부수는 작가였고 또 충분히 도발적인 아티스트였다. 그런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어 얼마나 반가웠던지.

낸시랭_Bubble Coco Woonwoodocheop_캔버스에 유채_112.1×162.2cm_2022

낸시랭_Picnic on the plum tree_캔버스에 유채_162.1×909.9cm_2022


*그리고 그녀는 노래방 기기로 보랏빛 향기를 불렀다.

2022. 9. 23.

불쾌한 인플레이션의 시대 (III) - 파월은 21세기 볼커가 될 수 있을까

불쾌한 인플레이션의 시대 (I) (링크)
불쾌한 인플레이션의 시대 (II) (링크)

지난 8월 말 잭슨홀에서 파월은 매우 간결하면서도 명확한 메시지를 시장에 던졌다. 인플레이션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연준은 계속해서 강력한 조치를 취할 것이고 그로 인해 다소간의 고통이 뒤따르는 것조차도 감내할 것이라고.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경제의 과열을 방치하던 미국의 중앙은행(링크)이 이렇게 급격하게 돌아선 이유는 무엇인가. 작년 상반기 연준은 인플레의 주원인이 일시적으로 지연된 공급에 있다고 보았고 따라서 그 때문에 수요를 억제하는 것은 디플레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지난 사반세기 동안 인플레를 잠재우는 일보다 디플레로부터 경제를 끄집어내는 것이 더욱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연준은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디플레보다 인플레의 위험을 선택했던 것이다.  

하지만 판데믹의 여운이 모두 가시고 난 뒤에도 공급은 여러 측면에서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고 반면 수요는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올랐다. 5% 중반에서 안정될 것이라고 믿었던 미국의 물가는 9%를 넘기며 2차 석유파동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고 연준은 빅 스텝을 넘어 자이언트 스텝에 나서게 되었다. 그와 같은 노력의 결과 월별 CPI 변동률은 0%에 근접했고 미국의 장기 cpi 기대치 역시 2% 대로 안정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월은 인상의 고삐를 늦추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의 바로 옆에서는 가장 좋은 친구였던 중앙은행에게 뒤통수를 거하게 맞고 폭락하는 주식시장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 하지만 그의 변심에는 이유가 있다.

이전에 언급했던 것처럼(링크) 현재의 인플레이션은 장기적으로 유지될 가능성이 높고 이와 싸우는 중앙은행은 경제를 오랫동안 짓누를 것이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대로 실업률이 높아지더라도 중앙은행은 반드시 기대인플레이션을 안정시켜야만 한다. 경기가 어렵다고 섣불리 금리를 인하하거나 부양책을 사용하게 되면 기대인플레이션이 다시 고개를 쳐들 것이고 이런 사이클이 반복되면 경제는 반드시 심한 불황을 겪게 된다. 따라서 단기간의 경제적 고통을 감내하더라도 지속적이고 꾸준하게 긴축정책을 시행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그때와 같은 상황에 놓였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중앙은행들은 올바른 정책을 택할 수 있을까.

1979년 연준 의장으로 취임한 폴 볼커는 두 자릿수가 넘는 인플레이션을 잠재우기 위해 금리를 급격하게 올렸다. 그리고 그로 인해 경제가 빠르게 꺾이고 실업률은 급등했지만 여전히 인플레는 낮아지지 않았다. 물가와 싸우던 연준이 긴축정책을 이어가자 농부들은 트랙터를 몰고 연준 본부 앞에 몰려와 가두시위를 벌였고 중고차 딜러들은 차 키들을 관에 넣어 연준에 보내며 강력하게 항의했다. 여론의 압박을 이기지 못한 연준은 거의 15%에 달하는 물가 상승률을 보면서도 17%가 넘던 기준금리를 700bp나 인하해야 했고 이는 스태그플레이션을 악화시켰다. 이렇게 오락가락하던 연준은 1981년에 들어서야 과감하면서도 단호한 정책을 펼 수 있었다. 미국 경제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불황을 마주하는데도 불구하고 기준금리를 20%까지 올리며 마침내 기대 인플레이션을 안정시켰다 하지만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당시 60% 후반의 지지율을 기록했던 레이건 행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과* 10년이 넘는 시행착오 끝에 중앙은행 내에서도 단호한 정책에 대한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방공개시장위원회의 점도표(2022년 9월) 

과연 지금은 어떨까.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암묵적으로 연임이 보장되었던 연준 의장의 임기는 옐런의 시대에 처음으로 단임으로 끝났고 파월 역시 첫 임기 이후 교체될 뻔 했다 가까스로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간밤에 발표된 점도표를 보면 위원들 사이에서 2024년의 금리 전망에 대해 큰 이견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는 연준 내에서 파월이 볼커처럼 고통스러운 금리 인상을 이끌어 갈 수 있을지 의문을 남긴다. 무엇보다 레이건과는 달리 현재 바이든의 지지율은 재선에 실패한 도날드 트럼프나 카터 만큼이나 낮은데 그런 행정부가 여론의 압박으로부터 연준을 얼마나 보호할 수 있을까.

게다가 몇몇 보고서에 따르면 행정부가 재정적자를 크게 유지하는 한 긴축적인 통화정책 만으로는 인플레이션을 잠재우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현재의 행정부가 인플레이션과 싸우겠다고 주장하면서도 쉽사리 급격한 긴축에 나서지 못하는 것은 유권자들의 표를 고려하기 때문인데, 이 가운데 과연 파월은 볼커가 될 수 있을까.

지난 30여년간 경제가 어려워질 때마다 중앙은행이 공격적으로 금리를 인하할 수 있었던 것은 인플레이션 기대가 매우 낮고 안정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인플레이션을 안정시켰던 여러 조건들은 매우 크게 돌아섰거나 영영 사라졌다. 그런 환경에서는 중앙은행은 더이상 당신의 친구가 아니다. 통화정책은 경제 전반에 걸쳐 무차발적인 영향을 미치는데 현재의 인플레이션 압력이 노동시장에 기인한다면, 중앙은행은 가장 경직적인 노동시장에 영향을 줄 때까지 금리를 올려야 한다. 즉 사람들의 소득이 깎이고 일자리를 잃을 때까지, 또 고령의 노동자들이 가난해져서 은퇴를 미루도록 중앙은행은 긴축을 지속해야만 한다. 과연 우리는 그 고통스러운 인플레이션의 시대를 맞이할 준비가 되었는가.    

아마도 올해 말을 기점으로 중앙은행들은 중립금리에 도달하거나 넘어서게 될 것이니 따라서 우리는 인플레이션과의 대결에서 전반전을 막 끝낸 셈이다. 그리고 그 전반전은 투자자나 중앙은행에게 너무나 쉬운 경기나 다름없었다. 투자자들은 부채를 늘리면 돈을 벌었고 중앙은행이 금리인상은 자산 가격의 하락을 가져와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그 후반전은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싸움이 될 것이다. 부채는 투자자들의 발목을 잡을 것이고 금리는 이제 자산가격 뿐 아니라 우리의 소득과 소비에 타격을 가할 것이다. 대중들은 "자산 가격 잡으라고 금리를 올리랬지, 내 월급을 잡으라고 금리를 올리랬나"며 불만을 터뜨릴 것이고 중앙은행이 필요한 인상을 거듭할 때마다 그 반발은 점차 거세질 것이다. 코로나는 우리에게 실제적인 생존의 위협을 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런 경제적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되려 더욱 부자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인플레이션을 마주하고 있다. 세계대전 이후 최초로 세계 사망률을 증가시킨 코로나에 비하면 별것 아닌, 마치 천연두처럼 지난 세기에 멸종된 줄 알았던 인플레의 위협과 싸우기 위하여 사람들은 가난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중앙은행의 대응 여부에 따라 이 후반전은 아주 길어질 수도, 혹은 빠르게 끝날 수도 있다. 과거에 이와 같은 시대가 어떤 양상으로 펼쳐졌는지 첫 글의 마지막 문단을 다시금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친다.

[인플레이션의 초입에서는 당신이 무엇을 사는지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많은 빚을 냈는지에 따라 수익이 정해지고 당신의 근로소득이 휴지가 되는 것을 겪을 것이다. 그렇게 인플레이션의 초반부를 지나고 나면 이윽고 하반기가 시작될 것고 시대의 막바지를 향해 달릴수록 각 중앙은행들이 뒤늦게 인플레이션에 대응하기 위해 금리를 올리는 것을 겪을 것이다. 디레버리징의 시대가 오겠지만 그 시기를 완벽하게 맞춰 적응하는 투자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니 대부분의 투자자들은 포트폴리오가 레버리지 된 채 새로운 후반전을 맞이하겠지. 그제야 투자자들은 자신이 어떤 자산을 샀는지에 따라 포트폴리오의 수익률이, 더 나아가 자신의 생사가 엇갈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레이건 이후 집권 100일 차에 그보다 더 높은 지지율을 기록한 미국 대통령은 없었다.  


*               *               *


퇴고를 하고 나서 다시 읽으니 의도에 비해 지나치게 암울한 이야기만 늘어놓은듯하여 한 가지 희망적 사례를 들어보려고 한다. 히피 문화가 한 풀 꺾이고 비틀스가 해체하고 난 뒤의 미국은 건국 후 가장 음울한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주식시장의 성장은 멈추었으며 인플레이션은 지속적으로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을 위협했으며 변덕을 부리는 연준의 금리 탓에 경기의 부침은 더욱 커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신과 창조를 거듭하는 기업들은 계속해서 탄생하였고 몇몇은 오늘날까지 뉴욕 거래소에 상장될 정도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바로 세계에서 가장 비싼 기업에 오른 애플이다.      

2022. 8. 28.

글, 그리고 폭력

 


오히려 글을 쓴다는 것은 일정 부분 타인의 정신과 감성을 지배하는 욕구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폭력성을 내재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행간을 따라 읽는 이의 정신은 조작된다. 육체의 하중으로 누르는 게 아니라 언어의 하중으로 누른다. 글은 내밀한 지배욕의 소산이다.


그리고 나는 그 폭력을 너무나도 사랑한다.


written by 하헌기

painted by egon schiele

2022. 8. 15.

가격의 시대

 


책방에서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고전과 명작들이 싼값에 팔리고 시대는커녕 한 계절조차도 살아남지 못할 책들이 비싼 값에 팔리고 있다. 이런 것이 비단 책뿐인가. 우리 삶에 필수적인 것들은 너무나 싼값에 팔리는데 비해 없어도 잘 살 쓸데없는 것들은 터무니없이 비싼 값에 팔리고 있다. 가격은 가치가 아니고 데이터는 지식이 아니며 또 지식은 지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영혼이나 지혜도 담기지 않은 엑셀과 모델을 돌려 튀어나오는 숫자를 가격이 아닌 가치라고 일컫는 우리는 얼마나 오만한가.

우리는 가격이 가치를 꿀꺽 삼켜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 바야흐로 값의 시대다. 가치 따윈 증발하고 그 자리에 희멀겋게 남겨진 소금기 마냥 가격만 남은 시대에 살고 있다. 나 역시 중요하지 않은 일을 하느라 중요한 일을 할 시간이 없는, 그런 모순에 빠진 흔한 바보에 불과하다. 그러면서도 좀처럼 이 어리석음을 끊어내지 못한다. 그 대가가 무척이나 혹독하리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The empire of lights 

paint by René Magritte

2022. 7. 31.

진짜 진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나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입니다. 똑바로 읽어도 우영우 거꾸로 읽어도 우영우. 기러기 토마토 스위스 인도인 별똥별 우영우. 하지만 내가 이상한 변호사라고 불리는 것은 자폐가 있거나 행동이 어눌해서가 아닙니다. 자폐아라고 하지만 나는 서울대학교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한 천재니까요. 한번 보기만 해도 모두 기억하는데 어떻게 일반인들이 저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중간고사든 변호사 시험이든 제게는 오픈 북이나 다름없어요. 게다가 저는 무척 창의적인 변호사에요. 신참인데도 불구하고 경력이 십 년이 넘는 베테랑 변호사들마저도 간과하는 쟁점을 파악하고 즉흥적으로 법정에서 변론에 나서도 훌륭하게 해내는 슈퍼스타입니다. 필드 위에 손흥민이 있다면 법정에는 저 우영우가 있는 셈입니다. 기러기 토마토 스위스 인도인 별똥별 우영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전히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무척이나 모순적인 존재니까요. 아마 여러분들도 느끼고 있을 거에요. 제 능력은 로스쿨에서나 변호사 시험을 치르는데 대단히 유리해요. 이건 장애가 아니라 사실상 초능력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어쩌면 서울법대 창설 이래 최고의 천재인지도 모릅니다. 물론 약간의 핸디캡이 있습니다. 펭수를 좋아하던 김정훈 씨나 지적 장애를 가진 신혜영 씨에 비하면 아주아주 사소한 장애이지요. 게다가 사회생활도 잘하고 직장에서는 최고의 능력자입니다. 또 얼굴까지 아주 예쁜 변호사입니다. 그래서 사내연애도 합니다. 회사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남자 직원이랑요. 심지어 사실 나는 회장님의 숨겨둔 자식이지요. 천재도 아니고 로스쿨도 못 가고 회장님 자식도 아니고 사내 훈남과 연애도 못하는 여러분들은 정말로 이런 저를 보며 동정심을 느끼십니까? 그것 참 신기한 일이네요. 아니 이 경우 이상하다고 하는 게 맞겠습니다. 

존재뿐만이 아닙니다. 제 말과 행동에도 모순이 있습니다. 저는 소덕동을 관통하는 도로의 공사를 막아달라는 사건을 맡아 승소했습니다. 왜냐하면 소덕동은 매우 아름다운 곳이기 때문입니다. 오래된 팽나무가 마을을 내려다보고 서로 돕고 웃는 이웃들이 어울려 지내는 아름다운 동네이지요. 그런 소덕동을 개발하겠다니요. 절대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그 공사를 좌초시켰어요. 아주 뿌듯한 일입니다. 이제 신도시 거주자들은 교통체증에 시달릴 것이고 이미 몇 년간 진행된 공사를 정지시킨 덕에 세금도 낭비되고 말았습니다. 무엇보다 소덕동에 거주하는 총 2513가구 중 과반이 넘는 1557가구가 개발사업에 찬성하며 보상금을 받기를 원했지만 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소덕동을 대표해서 이 일을 막았습니다. 아, 모르셨습니까? 저는 신도시에 어마어마한 땅과 건물을 가지신 최한수 이장님의 변호사입니다. 법무법인 한바다에 수임료를 내는 건 지역 유지이신 이장님이지 저 소덕동 주민들이 아닙니다. 아마 저분들은 길도 좁고 교통도 열악하고 인프라도 부족한 이 시골 동네에서 평생 사시겠지요. 네 그렇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깡촌은 계속해서 깡촌으로 남아있어야 합니다. 물론 저라면 여기에 안 살겠지만요. 여기엔 김밥집 배민도 안되고 고래인형 까페도 없어요. 그렇게 저와 부자 이장님은 소덕동의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나겠다며 어리석게도 토지보상금을 바랬던 저 1557가구의 주민들에게 따끔한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내 사정이 되면 다른 이야기입니다. 어릴 적 살던 강화도가 개발되어 친구 아버지가 보상금을 받았는데 형들이 모두 가져갔다고 합니다. 모처럼 대박이 터졌는데 그 행운을 자기들이 챙기려 하다니. 정말 나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나, 기러기 토마토 스위스 인도인 별똥별 우영우는 기지를 발휘해 그 돈을 되찾아옵니다. 네 친형들을 법정에 세우고 함정에 몰아넣어야 할 정도로 돈은 중요해요. 이건 내 돈이니까요. 돈은 매우 중요해요. 우애를 지키겠다고 돈을 포기하는건 어리숙한 바보예요. 이제 동동삼씨는 그렇게 받은 보상금으로 내 친구 동그라미에게 서울 역세권에 번듯한 신축 아파트도 사주고 비싼 도시의 물가도 걱정하지 않도록 생활비도 넉넉하게 대줄 수 있어요. 음? 지금 1557가구의 소덕동 주민들 이야기를 왜 꺼내는 겁니까? 당신은 지금 본 사건과 전혀 연관성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는 말 못 들어 보셨습니까?? 뒷통수 맞고 싶습니까?  

어린이들은 지금 당장 놀아야 한다는 개똥철학을 설파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참. 기억나십니까? 제가 첫 의뢰를 수임 받았을 때 의뢰인은 저를 못 미더워 했어요. 하지만 정명석 변호사님께서 이 몸이 서울대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라는 것을 알려줬어요. 그제서야 의뢰인은 저에게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로도 궁지에 몰릴 때면 나는 서울대 로스쿨 수석이라는 타이틀을 곧잘 써먹었습니다. 이처럼 간판의 힘은 대단합니다. 보기보다 많은 것을 설명해 주거든요. 나이키나 애플이 브랜드 마케팅에 열을 올리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저의 학부 친구들과 로스쿨 동기들은 오랜 시간 동안 남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대와 로스쿨에 왔어요. 물론 그렇게 공부해 봤자 읽기만 하면 다 기억하는 저를 이길순 없었지만요. 

어린이는 놀아야 합니다. 하지만 맨날 노는 어린이는 좋은 성적을 낼 수 없어요. 네 그렇습니다.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다고 해서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변호사는 될 수 없어요.(어린이 해방군 여러분들은 저 같은 천재가 아니잖아요?) 의사도 될 수 없어요.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지는 건 어려워요. 남들이 부러워하는 동네에 집을 사는 것도 힘들어요. 인스타에 멋진 사진들을 올리는 삶을 살 수도 없어요. 물론 그렇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배우들은 촬영이 끝나면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고층 아파트로 돌아가요. 이젠 서울대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해도 사기 힘든 집입니다. 작가들은 "어린이는 놀아야 합니다"라는 대사를 쓰고 작업하던 노트북을 덮자마자 나서 지인들에게 전문직들과 소개팅을 좀 주선해 달라고 카톡을 보냅니다. 이왕이면 서울대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한 사람이라면 좋겠어요. 물론 답장은 없어요. 시청자 여러분들도 이 드라마를 보는 이유는 나, 이상한 우영우가 변호사라서에요. 이상한 고졸경리 우영우. 이상한 쿠팡맨 우영우. 이상한 백수 우영우. 이런 드라마였다면 벌써 망했어요.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한국 드라마는 주로 세속적 욕망을 자극해요. 그걸 아주 잘합니다. 그래서 재미있어요. 근데 우리들은 참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우영우라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수퍼맨을 창조해놓고 거기에 장애를 한 스푼 얹은 뒤 장애인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요. 그리고 일반 장애인들이 겪지도 않을 상황을 가정해서 사회가 부조리하다며 따끔하게 일침을 가해요. 형들을 고소해서 보상금을 타내는 이야기를 하다, 돈 많은 이장 아저씨가 보상금을 받고 싶다는 동네 주민들의 의사를 묵살하는 이야기를 미화합니다. 나보고 서울대 로스쿨을 나온 천재라고 동네방네 광고할 때는 언제고, 또 곧장 자식을 서울대 보내려고 애쓰는 부모님들을 악당으로 그려요. 갑자기 판자촌이 아름답다며 재개발을 막던 박원순 아저씨나 특목고를 없애자면서 뒤로 자기 아들 둘은 특목고에 보낸 조희연 아저씨 냄새가 나요. 킁킁. 제 이름은 우영우, 앞에서 읽어도 뒤에서 읽어도 똑같지만 드라마는 그렇지 않아요. 앞에서 볼 땐 재미었는데 뒤에서 보니 제작자의 욕망과 컴플렉스를 얄팍한 도덕적 우월감으로 덮어 사회에 일침을 가하겠다는 의도로 범벅되어 있어요. 정말 이상해요. 아. 그래서 제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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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의 이야기를 다루는 드라마에 딴죽을 걸자면 한도 끝도 없지. 게다가 사회경험도 적고 이해도 얕은 작가들이 작품에서 드러내는 철학적 빈곤이 뭐 어제 오늘의 이야기도 아니니까. 게다가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다큐가 아니다. 하지만 오락영화와 드라마를 양산하는 작가와 감독들이 자꾸 그 선을 넘나드는 시대에 관객과 시청자들에게만 오버하지 말라고 주문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니 나도 그 선을 넘어 다큐라는 돋보기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들여다보련다. 

서울대 로스쿨, 젊은 직원들조차도 수 억의 연봉을 받는 로펌, 그리고 회장님의 숨겨둔 자식이라는 설정까지 이 드라마는 대중들의 세속적 욕망을 한껏 자극하는 장치들로 점철되어 있다. 하지만 정작 매 화에서 작가는 그 세속적 욕망을 부정하는 사건들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우리가 이 드라마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그 점에 있지 않을까. 토지보상은 드라마에서 뜻하지 않은 횡재를 의미하는 클리셰나 다름없다. 이 드라마에서는 그 사건이 두 번 등장하는데 작가는 이에 대해 이상하리만큼 모순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그 차이는 바로 관찰자의 시점에 있다. 삼형제의 난에서는 작가는 보상의 수령자의 시각에서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고 소덕동 이야기에서는 보상금 수령자가 내가 아닌 제3자니까. 우리의 불편함은 입장에 따른 작가의 태도가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에 있다. 우리가 돈을 욕망하는 것은 더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동그라미와 아버지의 입을 빌려 그 욕망을 표출한다. 하지만 수령자가 내가 아닌 타인이 되니 작가는 갑자기 도덕이라는 몽둥이를 꺼내 그들의 욕망을 매섭게 후려치기 시작한다. 마치 시기심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더 나아가 작가는 소덕동을 마치 인디언 보호구역이나 민속촌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묘사한다. 그곳에서 소덕동 주민들은 잘 꾸며진 어항의 관상용 물고기들처럼 도시에서 온 관광객들이 보기 좋도록 정겨운 시골 마을을 연출한다. 하지만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던가. 인디언들도, 또 구한말의 오지 주민들도 지하철과 24시간 편의점, 영어유치원 그리고 신선배송 서비스를 누릴 수 있다면 얼마든지 반길 것이다. 소덕동이 개발되지 않는다면 몰락하는 1차 산업에 종사하는 대다수 주민들에게 그런 편의는 허락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가는 그 사람들의 삶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마치 주말에 차를 몰고 용인 민속촌을 방문한 관람객의 시선으로 #대박핫플 #소덕동을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언제 다시 들릴지 모르는 그 관광지를 보존하기 위해 주민들의 미래를 나락으로 보내는 일조차 서슴지 않는다. 그런 시각은 오로지 자신의 옛 추억을 재현하기 위해 오징어 게임을 열어 455명의 지원자들을 폭력과 죽음으로 몰아넣은 오일남의 정서와도 이어져있다.   

작가의 모순적 시각은 드라마가 설파하는 교육관에서도 드러난다. 작가는 시스템의 정점에 있는 서울대 로스쿨과 고학력 고소득자들인 변호사를 소재로 삼아 시청률을 올리면서도 그 위치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과 경쟁에 부정적인 낙인을 찍는다. 나 역시 경쟁적인 한국 사회가 바람직한지 의문이지만, 이런 과열된 경쟁은 대중들이 가진 욕망의 결과일 뿐이지 결코 원인이 아니다. 물론 내신 5등급인 학생이 2년제 전문학교를 졸업해 소덕동 인근의 빌라에서 살며 중소기업에 다녀도 행복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밋밋한 스토리는 대중의 욕망을 자극하지 않는다. 인기 드라마에는 마치 흙탕물을 일으키는 미꾸라지처럼 대중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무엇인가가 꿈틀대야 하는 법. 그래서 작가는 스토리에 서울대 로스쿨과 고소득자들이 모인 로펌, 그리고 회장님의 숨겨둔 자식을 담았다. 그것들을 욕망하지 않는 이가 어디에 있으랴. 우리 모두는 같은 것을 바라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경쟁이 발생한다. 이를 부정하려면 욕망 또한 부정해야 하는데 제작자와 작가는 대중들의 그 욕망에 기생하면서도 그 결과물은 부정하는 이중적 태도를 취하고 있지 않은가. 앞에서 읽어도 뒤에서 읽어도 똑같고 솔직한 우영우와는 달리 드라마 너머로 보이는 작가가 앞과 뒤가 무척이나 다르다고 느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과거 권위주의의 시절, 정부는 영화와 드라마 제작자들에게 창작물에 정부가 원하는 이데올로기적 메시지를 넣도록 강요했다. 하지만 그런 메시지들이 이야기의 개연성이나 핍진성을 무너뜨리면서 등장하자 되려 설득력은 반감이 되고 시청자들은 종종 그 메시지들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곤 했다. 오늘날 이 이념적 강압은 진영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관객들의 눈은 마치 쫑긋 세운 강아지의 귀와 같아서 작가가 완력을 쓰는 순간 그 의도를 기민하게 알아채곤 한다. 작가나 감독 혹은 배우가 이념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에게도 표현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그대들에게도 그럴 자유가 있으니까. 하지만 평균적인 대중들보다도 교육 기간이나 사회문제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은 사람들이 따끔하게 일침을 놓겠다며 송곳과 대본을 들고 사회의 이곳저곳을 푹푹 찔러대는 것은 정의감이 아닌 도덕적 우월감을 내보이고 싶은 욕망으로부터 나온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의 욕망이 다른 욕망을 저열하다며 훈계하는 웃기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니 작가들은 이제라도 마음을 다잡고 차분히 앉아 훌륭한 오락 TV 드라마를 만드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이 드라마는 정말로 잘 만든 오락 드라마니까. 

2022. 5. 15.

찰스 폰지와 스테이블 코인

1882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찰스 폰지는 동네의 한량으로 지내다 부모의 권유로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건너가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는 배에서부터 도박으로 가진 돈을 모두 탕진했고 웨이터로 일하는 동안 손님의 잔돈을 빼돌리다 해고당했으며 수표를 위조한 죄로 3년간 감옥에 가게 되었다. 마피아 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뜨내기 협잡꾼에 불과한 그가 어떻게 금융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을까?

결혼 후 성실하게 생계를 책임질 일자리를 찾던 그는 작은 광고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유럽의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자신의 광고 아이디어를 홍보했는데, 그중 한 명이 카탈로그를 부탁하며 국제반신권(IRC)이라는 작은 증서를 하나 동봉해서 보냈다. 이는 만국우편연합에 가입한 회원국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일종의 우표 교환권인데 당시 인플레이션이 빠르게 진행되었고 유럽 국가들의 통화가치가 하락했기 때문에 이탈리아에서 국제반신권을 구매해 뉴욕에서 팔면 약 400%의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이 점에 착안한 폰지는 곧장 두 대륙 사이의 차익거래에 나서며 투자자를 모집했다.

실제 발행된 당시의 국제반신권

그는 이 거래로 친구들과 투자자들에게 45일 안에 50%를, 3달 뒤에는 두 배의 수익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은행 이자가 불과 5%에 불과하던 시절에 무위험 차익거래로 연 400%의 수익이라니, 그의 사업 구상은 너무나 매력적이었고 지인들 역시 유럽의 친구들을 통해 확인한 결과 찰스 폰지의 말처럼 차익거래의 기회는 확실히 있었다. 왜 이 투자를 마다하겠는가.

하지만 그의 사업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불과 몇 센트에 불과했던 국제반신권을 유럽에서 대량으로 매집해서 미국으로 가져와 현금화하는 비용이 너무 컸다. 게다가 모집액이 약 1500만 달러로 늘어나자 그는 거의 수 억 장에 달하는 국제반신권을 구매해야 했는데 이를 미국으로 들여오려면 거의 타이타닉 호 크기의 배가 필요했던 것이다. 애초에 이 사업은 이민자들의 용돈벌이 이상으로 커질 수 없다는 결함이 있었지만 놀랍게도 그의 사업은 더욱 번창했다. 투자자들이 거의 대부분의 배당을 곧장 재투자했기 때문이다. 찰스 폰지는 그들의 돈으로 호화스러운 생활을 지속했으며 마카로니와 와인 회사에 투자하기도 했는데 이후 법정에서 그는 여기서 수익을 내 투자자들에게 배당을 줄 목적이었다고 증언했다. 일부 투자자들이 환매를 해도 그에게 투자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더욱 빠르게 늘어났기 때문에 새 투자자들의 자금으로 그들에게 돈을 내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의 사기행각은 오래가지 않아 들통나고 말았다. 작은 소송에 휘말린 탓에 그는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탐사보도에 나선 한 기자가 이 사업의 문제점을 짚어냈기 때문이다. 만약 찰스 폰지의 사업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다면 미국에서 약 1억 6천만 장의 국제반신권이 유통되어야 하지만 실제로 유통된 것은 고작 2만 7천 장에 불과했던 것이다. 게다가 설령 그의 사업이 온전하게 적법하게 돌아가고 있어도 그 이익은 미 정부의 이익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정부가 가만 둘 리가 없었다. 결국 찰스 폰지의 사기는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고 이리하여 그의 이름이 금융사에 길이길이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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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블 코인이 화폐로 쓰이는 것, 게다가 다른 가상자산을 기반으로 한 스테이블 코인이 그 역할을 하는 일은 장기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의 말을 믿으라. 가격을 매기는 일은 화폐와 금융의 영역이지 분산저장의 기술이나 알고리즘의 영역이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개발자들과 그 소수 추종자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테라의 생태계와 (마찬가지로 독자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의결권을 내세우며 경제학자들과 금융가들을 기술 문맹으로 몰아가지만 진짜 문제는 그네들이 화폐와 금융시스템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 연일 상승하는 달러의 가치에 연동하여 UST의 가치를 유지하려면 사실상 루나의 발행량을 크게 늘려야 하는데 연준이 금리를 올리는 상황에서 단기간에 루나의 수요를 유지하려면, 아니 늘리는 길은 스테이킹의 이자를 더욱 높게 올리는 것 밖에 없다. 하지만 실제 상황에서 그들은 반대로 행동했다. 애초에 이 시스템은 지속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테라의 생태계가 더욱 크게 구축되었어도, 아니면 그들이 비트코인을 더 가지고 있었어도, 혹은 공매도 세력이 붙지 않았어도 시간의 문제일 뿐 언제고 같은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가상화폐* 시장이 다시 살아나게 된 기폭제는 코로나와 양적완화였다. 각 정부들이 코로나에 무력하게 대응하는 것을 보며 거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국가에 대한 신뢰도가 낮아졌으며 빠른 양적완화는 기축통화에 대한 믿음을 약화시켰다. 그런 현상은 화폐 시스템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집단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하지만 폭발적인 양적완화에도 달러는 기타 통화 대비 교환 비만 조금 하락했을 뿐 미국 정부의 채권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수요가 높은 자산 중 하나였고 이윽고 연준이 비상조치를 거두어들이자 달러는 20년 만의 최고치로 치솟았다. 그리하여 모든 스테이블 코인들이 시험대에 올랐던 것이다. 

이 화폐 호소인들은 태생적 모순을 가지고 있다. 정부나 중앙은행으로부터의 탈 중앙화를 외치던 테라의 운명은 사실상 훨씬 더 적은 소수의 사람들의 결정에 달려있었다. 바로 더 신뢰하기 어렵고 더 통제도 안되며 화폐금융에 대해선 더더욱 무지한 사람들에게. 탈 중앙이라는 것이 더 멍청한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캐치프레이즈였던가. 또한 다른 스테이블 코인들이 살아남은 것은 역설적으로 그들의 보유고가 달러로 표시된 자산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토록 경멸하던, 무한정 찍혀 나온다던 바로 그 달러 말이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들이 미래의 통화라고 주장하면서도 이미 수십 년 전에 멸종한 금(달러) 본위제나 이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구닥다리 모델인 고정환율제를 채택했다. 그러니 그들의 미래도 테라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폰지사기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훗날엔 금태환 폐지의 쇼크나 뱅크런, 혹은 중앙은행의 탄생 등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단지 시간의 문제일 뿐. 그러니 아직도 테라의 생태계는 가능했고 또 루나 역시 성공할 수도 있었다고 믿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전한다. 찰스 폰지에게도 국제반신권이라는 획기적 차익거래나 마카로니 같은 멀쩡한 사업 모델들이 있었노라고. 마카로니 사업이 기적적으로 번창해 모든 미국인들이 폰지의 마카로니를 먹었어도 언젠가 그의 회사는 반드시 실패했을 것이고 찰스 폰지는 여전히 사기꾼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스테이블 코인에 대한 믿음은 화폐금융과 경제사에 대한 완벽한 무지로부터 출발하고 이를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 당신들은 지난 200년간 근현대 금융사에서 벌어졌던 모든 사건사고를 차례대로 답습하려 하고 있다.

탈중앙을 외치는 가상화폐의 열렬한 추종자들은 자본시장의 아나키스트들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기존의 시스템을 열등하다고 여기고 정부나 중앙은행, 금융 규제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금융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작 사고가 터지자 모두 중앙정부에 손을 벌리고 있지 않은가. 피해자들은 그들이 회피하려던 규제에 따라 책임자들을 처벌해달라고 외치고 있고 책임자의 가족들은 정부에 신변보호를 요청했다. 실제 역사에서 아나키스트들은 이상론자에 불과했고 그들은 정부의 역할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국가의 통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인간의 법과 질서를 떠나 도착한 곳은 모두가 평등한 유토피아가 아닌 약육강식의 정글이었다. 허나 자연에서 거의 대부분의 동물은 피식자에 불과하지 않은가. 

포식자를 꿈꾸던 피식자들에게 작은 위로를 바친다.    



*나는 블록체인 기술은 매우 유용하게 쓰일수 있고 또 모든 가상자산들의 내재가치가 반드시 0에 수렴할 것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는 극소수에만 해당될 것이며 또 여전히 화폐의 역할을 하지 못할것이라고 생각한다. 

**운용 방식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들이 꼭 UST나 루나처럼 폭락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수 있다. 페그를 계속 유지하면서도 화폐로서의 역할을 거의 하지 못해 사장되는 방향으로 끝날 수 있다. 


2022. 5. 12.

페그는 불가능하다

나는 블록체인이나 코인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시장에서 거래되는 특정 통화나 재화의 가격을 기축통화인 달러에 페그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수십 수백조의 외환보유고를 지녔던 수많은 국가들이 자국의 통화를 달러에 고정시키려고 했지만 그런 모든 시도는 매우 큰 고통과 함께 끝났다. 그런데 일개 개인이 그를 보장한다니.

영구기관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기술적 문제 때문이 아니다. 특허청에는 매년 수도 없는 사람들이 몇장짜리 종이쪼가리를 손에 들고서 자신이 영구기관을 개발했다며 찾아온다고 한다. 담당자가 그런 특허를 반려하면 그들은 대개 화를 내며 담당자의 이해도가 부족해서 자신의 천재적인 아이디어를 몰라준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구체적으로 살펴보지 않아도 아래 스테이블 코인의 페깅 매커니즘은 작동하지 않았고 작동할 수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https://n.news.naver.com/article/421/0006084677

그리고 우리는 역사상 가장 큰 영구기관이 폭락하는 모습을 목도하고 있다.


(위는 달러에 페그되는 스테이블 코인에 관한 것으로 기타 가상자산이나 블록체인 기술에 대한 견해가 아님을 밝힙니다)

2022. 5. 10.

쿠오 바디스 부동산(Quo Vadis Domus)

2019년 말 김현미의 마지막 대규모 부동산 대책이 발표된 이래(링크) 부동산에 대해 별다른 분석을 하지 않은 것은 이 시장이 더 이상 저평가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과도한 규제로 내가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은 크게 증가한데다 시장의 수급과 적정가치를 판단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기에 나는 부동산 상품을 분석하는 일에 시간을 쓰지 않기로 결정했다. 코로나 직후 자산시장이 버블인지에 대해 잠시 분석한 적은 있었지만 그것은 급격하게 늘어나는 통화량과 재정지출로 인해 모든 자산가격이 상승할 것이라는 차원에서 분석한 것이지 꼭 부동산에 국한된 전망은 아니었다. 하지만 미래는 달라질 것이다.

물론 인플레이션은 현재 피크를 찍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조만간 소비자물가지수 역시 고점에서 후퇴하여 하향 안정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내 전망이 맞는다면 지난 10년보다 향후 10년의 인플레이션이 높을 것이며 상당 부분은 임금과 에너지 가격의 상승과 같은 공급 측 요인에 기인할 것이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부동산은 어떻게 될까?

현재만큼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았던 1970년대의 미국을 살펴보자. 당시 미국의 소비자물가지수는 전년 동월 대비 14.8%까지 상승했는데 이런 인플레이션을 제한하기 위해 연준은 기준금리를 3%에서 20%(1980년 3월)까지 올려야 했고 그 결과 이전 10년간 연평균 약 4.4% 성장했던 미국의 실질 GDP는 3% 아래로 주저앉았으며 다우존스 지수는 1970년 800에서 1979년 말 840으로 거의 오르지 못했다. 동기간 미국의 주택 가격은 어떻게 변했을까? 미국 주택의 중위값은 $24,000에서 $55,000로 약 2.3배 상승했다. 같은 기간 CPI 지수가 약 1.99배 상승했으니 주택 가격은 당시의 주식시장이나 경제성장률이 아닌 인플레이션을 착실히 쫒아간 셈이다. 

1950-90년대의 인플레이션과 주택가격 변동
그래서 장기 차트를 그려 보면 주택가격은 대개 금리가 오를 때 상승하고 금리가 하락할 때 함께 하락한다. 반면 장기간 대규모의 투자를 바탕으로 높은 성장성을 반영한 테크 주식들이나 무형자산의 비중이 큰 회사의 주가는 금리와 반대로 움직인다. 최근 유망한 테크주들의 하락이 타업종 주가보다도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오늘날 슈퍼 고성장을 대표하는 테크 주식이 있다면 1970년대엔 Nifty Fifty가 있었다. 고성장 블루칩 50개 주식들로 이루어진 이 포트폴리오는 한때 주식 투자자들이 포트폴리오에 반드시 담아야 했던 Must have 아이템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십수 년간 잠잠했던 인플레이션 압력이 고개를 들고 연준이 이를 제어하기 위해 공격적으로 통화정책을 운용하기 시작하자 한때의 블루칩이었던 이들은 다른 업종보다도 더 급격한 손실을 기록했다. 한편 주식과는 달리 물가와 상품, 그리고 주택가격은 장밋빛 미래를 꿈꾸던 투자자들의 피웅덩이를 철벅철벅 밟으며 뛰어올랐고 1970년대는 상품가격들이 주가와 가장 크게 괴리된 시기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오늘날 대표적 성장주들의 밸류에이션은 그 시절의 Nifty Fifty보다도 높다. 아직도.*

따라서 그 역사를 거울로 삼는다면 지금 성장주들이 급격하게 하락했다고 해서 부동산이 그를 쫒아 하락할 가능성은 낮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주가의 하락폭은 수요나 어닝의 급격한 감소보다 단순히 금리의 상승을 반영한 것에 가까우니까. 하지만 오르는 인플레이션과 금리는 부동산의 수요 뿐 아니라 공급에도 타격을 준다. 장기금리가 오르기 시작하자 상당수 건설 프로젝트들의 비용이 증가해 사업이 지연되고 있고 당면한 인플레이션과 인건비 상승으로 이미 시작된 공사현장들도 멈춰섰다. 한국의 건축 인허가 건수가 급감한 것이 금리 상승이나 인플레이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성장주의 폭락이 부동산 시장에서 재현되긴 어렵다. 물론 1990년대 이후 인플레이션과 부동산과의 괴리가 벌어지기 시작했으니 인플레이션이 올라온대도 부동산이 과거만큼 그를 정직하게 따라가지는 않을지 모른다. 그리고 현재 한국의 부동산은 어떤 잣대로 보아도 저평가되었다고 볼 수는 없기에 투자에 나서기도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다루는 상품들 중에서 부동산은 인플레이션을 가장 정직하게 따라가는 자산이고 그렇기에 피터 린치나 워런 버핏뿐 아니라 험난한 인플레이션의 고비를 넘어온 우리의 부모님들이 인플레이션의 피난처로 부동산을 꼽는것 아닌가. 적어도 인플레이션의 시대에 과대평가된 성장주와 부동산을 같은 그룹으로 묶는 일은 매우 위험한 접근이다.

고전 영화의 제목으로도 잘 알려진 쿠오바디스라는 구절은 성경에 기록된 베드로의 일화에서 인용한 것이다. 로마의 박해를 피해 달아나는 베드로 앞에 예수의 환영이 십자가를 지고 나타난다. 베드로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Quo Vadis Dominus,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는 대답한다. "네가 내 백성들을 버리기에 내가 또 한 번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위해 로마로 간다." 그 말을 들은 베드로는 심히 부끄러워하며 다시 로마로 돌아가 순교를 택했다. 이 일화를 곱씹으며 베드로의 심정으로 이렇게 물을 수 있지 않을까? Quo Vadis Domus?**(부동산이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역사는 이렇게 답한다, 인플레이션의 시대가 온다면 부동산과 성장주의 길이 결코 같지 않으리라고. 

로마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십자가 형을 선고받은 베드로는 감히 자신이 주님과 같은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없다며 자신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달라고 요청했다. 그것이 더욱 고통스러운 죽음임을 알면서도. 코인이나 나스닥이 하락했다고 자신이 거주하는 주택을 파는 일은, 만약 내가 전망하는 대로 인플레이션의 시대가 온다면, 베드로처럼 자신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 될 것이다.

2000년대 미국의 주택가격 변동과 미국 5년 금리

*하지만 2000년 IT버블보다는 훨씬 낮다.

**라틴어 Dominus는 주님, 혹은 주인님을 의미하는데 이는 집을 뜻하는 Domus와 같은 어원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한다.  

2022. 5. 9.

더불어민주당과 문재인의 금융범죄를 수사하라

1. 라임

2. 옵티머스

3. 디스커버리

4. 코링크


금융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이 펀드들의 구성과정과 투자내역 그리고 실적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모두 알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이런 금융범죄는 두번 다시 존재해서는 안되며 그 관련자들은 물론이고 범죄내역을 은폐하거나 범죄자들을 옹호하려고 한 이들은 모두 준엄한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공교롭게도 그 정면에 더불어민주당과 문재인의 최측근들이 포진해 있다.

나는 한 사회에 진보와 보수 모두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진심으로. 하지만 현재의 더불어민주당이 수호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닌 범죄다. 김경률, 권경애, 진중권과 같이 그 누구보다 진보적이었던 이들이 더불어민주당과 가장 독하게 싸우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적폐라서? 꼴보수라서? 그럴리가 있나. 단순히 이 무뢰배들이 불법을 저지르고 부패했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악취가 난다.

2022. 5. 5.

인플레이션 생존법

투자에서 가장 확실하게 수익을 내는 방법은 저평가된 자산을 매입하고 고평가 된 자산을 매도하는 것이다. 단언컨대 그보다 더 확실하게 장기적 이익을 가져다주는 투자법은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람의 뇌는 반대로 작동한다.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사회적 동물인지라 우리의 오감과 이성은 주변 개체들의 편향에 쉽게 오염되기 마련. 따라서 우리의 뇌는 대중이 사는 것을 쫓아 사도록 작동한다. 하지만 모두가 매입한 자산은 역설적으로 가장 비싼 자산이다. 따라서 시장에서 모두가 웃는 날은 지속되기 어려운 법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플레이션의 시대*를 견뎌낼 투자법을 찾고 있지만 어쩌면 그 해답은 그들의 주식 호가 창에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현재와 재정/국제정세가 상당히 유사했던 1960년대의 주식시장을 되돌아보자. 한국전쟁 종전 이후 미국의 주식시장은 15년간 약 3.7배 상승하며 연평균 11%의 수익을 가져다주었지만 그 이후의 15년 동안 조금도 오르지 못하며 예금만도 못한 투자수익률을 가져다주었다. 되려 고점에서 42%나 하락하기까지 했으니 무척이나 형편없던 투자였던 셈이다. 

1960년대 후반 이후 S&P500 주가
물론 역사가 똑같이 되풀이되지는 않을 것이다. 근대적인 통화정책이 태동한 이후 중앙은행과 경제학자들은 1970년대와 같은 스태그플레이션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지 오래 연구해왔으니까. 하지만 분명 유사점도 존재한다. 국제질서가 실리가 아닌 이념으로 재편되기 시작하고 정부가 재정을 과도하게 확장하는 것, 환경규제가 원자재 가격 상승을 초래하고 있다는 사실 등. 나야 태생부터 본업까지 투자로 먹고사는 투기꾼 인지라 계속해서 주식시장을 바라보고 투자를 지속하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주식은 소망했던 것만큼의 수익을 가져다주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은 인플레이션의 시대에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노동소득에 집중해야 한다. 가장 훌륭한 투자기회는 대개 오늘날 저평가 된 자산들 중에 있다. 그리고 노동이야말로 지금 가장 저평가 된 자산이다. 자산 시장의 랠리로 사람들은 자신의 임금소득을 가볍게 여기고 있고 지금은 일반 대기업뿐 아니라 전문직 직종의 지인들까지도 본업보다 투자에 몰두하고 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의 시대가 지속되면 현재 크게 오른 몇몇 자산들의 요구수익률은 크게 재조정될 수 있으며 인플레이션을 쫓아가는 자산과 그렇지 못한 자산 간의 명암이 크게 갈릴 것이다. 반면 우리들의 임금은 인플레이션을 착실하게 따라갈 것이다. 여러 인플레이션 중에서 중앙은행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바로 wage-price spiral로 인한 인플레이션인데 미국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는 증거들이 여럿 있다.**

최근 미국에서는 저학력/저임금 계층의 임금이 고학력/고소득층의 임금보다도 더 빠르게 오르고 있으며 코로나 이후 노동시장의 공급 부족으로 이런 현상은 가속화되고 있다. (10년 전의 삼성전자 대졸자 초봉과 오토바이 배달부의 임금격차가 어떻게 변했는지 생각해 보자) 이를 설명하는 여러 가설들이 있지만 나는 가장 큰 원인은 중국 노동자들의 임금 상승과 노화에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이 경제를 개방하면서 무려 15억 명이나 되는 값싸고 숙련된 노동자들이 세계로 쏟아져 나왔고 이런 노동시장의 변혁은*** 이후 세계가 낮은 인플레이션을 누릴 수 있는 여러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중국의 노동시장은 더 이상 값싸고 젊지 않다. 그리고 여러 나라에서 시작된 반이민 정책은 노동시장의 비용을 증가시킬 수밖에 없다.

따라서 당신 앞에 놓인 여러 선택지 중에서 가장 저평가되었으면서도 유망한 자산은 바로 노동이다. 모두가 퇴근 후 주식 스터디에 나서고 새 ICO를 검색하고 전혀 모르는 지역으로 임장을 다닐 때 자신의 노동 수익률을 높이는 데에 시간을 쓰는 것이 인플레이션의 시대를 살아가는 가장 합리적인 투자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쟁자들이 고과와 승진을 포기하고 해외 주식 창을 켤 때 당신은 실적을 내는데 집중하고 승진하고 연봉을 높여야 한다. 특히나 젊은 층은 현재 자산보다도 미래소득이 더 큰 데다 동년배 경쟁자들이 회사에서의 노동을 가볍게 여기기 때문에 더욱 그래야 한다. 1960년대와 같은 시대가 반복된다면 인플레이션을 가장 정직하게 따라가는 것은 바로 당신의 월급명세서가 될 것이다. 

워런 버핏은 가장 위대한 투자자들 중 하나이다. 단기간에 그보다 더 많은 수익을 올린 사람은 수도 없이 많지만 무려 반세기에 걸쳐, 또 고작 수백 달러의 투자금부터 수백조에 다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수익을 낸 사람은 그가 유일하다. 전례 없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믿던 시기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낡은 투자법을 평가절하했지만 버핏은 살아남아 여전히 벤치마크를 상회하는 실적을 내고 있고 한때 그를 퇴물이라고 부르던 헛똑똑이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말았다. 그가 오랜 시간 동안 꾸준한 초과수익을 낼 수 있던 데에는 지독하리만큼, 때론 지루하리만큼 원칙을 따르는 지키는 투자를 지속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지난 주주총회에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인플레에 대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기술을 갈고 닦는 것입니다. 돈과는 달리 그런 기술들은 인플레이션으로 가치가 하락하지도 않고 달러의 가치가 어떻게 변하던 간에 그 노동력에 대한 수요는 항시 존재할 것 입니다"

나는 트레이더지만 정작 블로그를 통해 어떤 투자에 반드시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던 적은 몇 차례 되지 않는다. 2015년에, 그리고 문재인 집권 초기에 한국 부동산을 사라고 했던 것. 그리고 코로나 직후 최대한의 레버리지로 자산을 매입하라고 권했던 것. 그리고 2021년에도 그를 유지해야 하지만 4분기부터는 포트폴리오를 재조정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 등 단지 몇 차례에 불과하다. 물론 세부적으로는 틀렸던 것들도 많다. 비트코인에 대한 전망을 바꾼 것도 그렇고, 또 테슬라처럼 전망을 바꾸지 않았지만 (적어도 현재까지는) 완전히 엇나간 것들도 있다. 하지만 경제 사이클의 큰 흐름에서는 대체적으로 맞는 쪽에 서 있었기에 여기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겠지. 그리고 그때와 같은 확신으로 이렇게 권한다. 

"당신이 현재 가진 투자자산이 미래소득보다 작다면, 인플레이션의 시대에 자산배분에 많은 시간을 쓰는 것보다 버핏의 조언을 듣는 것이 올바른 투자라고 생각합니다"     




*인플레이션의 시대를 재차 강조하는 탓에 오해할 수 있지만 상당히 높은 확률로 미국의 CPI는 이번 상반기에 정점을 찍고 하락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8.5%에 달하는 CPI가 반토막이 나서 4%대를 기록한다고 인플레이션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인플레이션의 시대란, 경제에 내재된 인플레이션의 압력을 둔화시키기 위해 상시 고금리를 유지할 수 밖에 없는 시대를 의미한다. 2010-20년의 평균 인플레이션이 1.8%에 불과했던 것에 비하면 향후 10년 평균 인플레이션이 3%, 혹은 그 이상을 상회할 것이라는 전망은 장기금리 역시 과거의 평균을 큰 폭으로 상회할 것을 암시한다.

**연준은 해당 내용을 부인했다

***거기에 중국을 필두로 한 개발도상국의 막대한 투자가 과거 낮은 인플레이션의 근본적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가 늘 장기적 가치투자로만 수익을 내는 것은 아니다. 때론 자신의 명성이나 자본을 이용해 투자하는 대상에게서 가혹할 만큼의 수익을 얻어내기도 한다. 

2022. 4. 30.

이태원 클래스 그리고 I의 시대

 

정직하고 착한 주인공이 세상에 굴복하지 않고도 성공하는 스토리, 너무나 뻔한 클리셰로 범벅된데다 아이고야, 손발이 오그라드는 유치뽕짝을 매 화마다 4분의 2박자로 펑펑 터뜨리는 드라마. 그런데 또 이렇게 기승전결이 모두 뻔한 청춘 드라마에 울컥하고 열광하는 촌스러운 사람들이 꼭 있다. 마치 나처럼.   

진부하게 우리네 인생을 사계절에 비유한다면 내 여름의 정점은 이태원과 함께 시작되었다. 청바지를 골반까지 내려 입은 흑인 아저씨가 F로 시작하는 단어를 연신 외쳐가며 술병을 이리저리 흔들고 이색적인 군복을 입은 미군들이 두셋 조를 짜 완장을 차고 순찰을 하던 골목은 어느새 세련된 바와 이국적인 음식점들로 물들여지기 시작했고 한때 서울의 대표적 게토였던 거리가 뉴욕의 소호로 탈바꿈하던 바로 그 순간, 나와 내 또래들은 삶에서 가장 무더운 시절을 맞이했다.

나와 당신들이 이 드라마에 열광한 이유도 그 때문이지 않을까. 코로나로 좁은 집 안에 감금된 우리는 장면마다 등장하는 이태원의 골목들을 보며 그 좁은 거리를 구석구석 누비며 노래하고. 춤추고. 울고. 웃고. 사랑하고. 이별하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 모든걸 누리던 게 당연했던 시절. 한번 시작된 밤은 동틀 무렵까지 끝나지 않았으며 쌍팔년도 군사정부 시절의 계엄령 같은 영업제한을 들이미는 짓 따위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던 바로 그 시절. 하지만 한번 지나간 젊음이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그 시대에 영원한 작별을 고했다. 안녕.

그렇게 드라마 이태원 클래스는 잃어버린 시대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번듯한 대학 졸업장 한 장에 사지만 멀쩡하다면 취업도 하고 집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두 손에 꼭 쥐고 사회의 발을 들여놓은 앳된 얼굴의 청년들은 이윽고 참혹한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대학만 가면 연애할 수 있다는 말에 속았던 MZ 세대들은 이제 대학만 졸업하면 취직하고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다는 말에 또 한 번 속아, 그만 잃어버린 세대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긴 그들의 아버지들과 형들조차도 자신들에겐 너무나 당연했던, 취업 내집마련 결혼 뭐 그런 것들이 마치 에르메스 버킨백처럼 한청판 사치품이 될 줄은 몰랐겠지. 포기와 좌절을 거듭해온 이들이 전과자, 외국인, 성소수자, 고졸 인플루언서 등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로 구성된 단밤 사람들에게 공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과거에 유행하던 청춘드라마는 주로 회사에 입사하여 열심히 일해 승진하는 주인공을 그려내곤 했다. 능력을 인정받아 부서장이 되고 본부장으로 승진하고 해외 지부를 개척하는 뭐 그런 이야기들. 하지만 청춘들의 욕망은 미생에서 비정규직으로 격하되었고 불과 5년 만에 자영업자로 탈바꿈했다. 장가의 회장이 산업화시대의 성공을, 그리고 실장 오수아가 취직해서 성실하게 일하면 잘 풀릴 거라던 MZ 세대 이전의 성공을 상징한다면 그들과 맞부딪치고 싸우는 단밤의 아웃사이더들은 이태원을 누비던 젊은이들의 모습과 닮아 있다. 뒷골목 자영업자와 고졸 헤비 인스타 유저가 대기업과 싸워 이기는 스토리-이태원 클래스의 인기가 어딘가 모르게 서글픈 이유는 그것이 평균적인 MZ 세대가 꿈꿀 수 있는 욕망의 최대치라는 사실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               *               *

코로나와 함께 이태원의 상권이 몰락했던 것처럼 우리의 젊음 역시 점차 사그라들고 있고, 그렇게 바야흐로 한 시대가 가고 또 다른 시대가 열리고 있다. 새롭게 을지로와 압구정의 로데오 거리가 젊음을 빨아들이고 있으며 길거리에서는 와이드 팬츠가 스키니진을 밀어낸지 오래. 이는 감히 우리의 시대라고 부르던 지난 10년과는 달리 미래의 10년은 완전히 모습으로 펼쳐질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는 투자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판데믹에 맞서는 정부가 공격적으로 재정지출을 늘리면서, 또 정치인들과 유권자들이 자신들이 통과시키는 법안들의 잠재적 비용을 고려하지 않기 시작하면서 미래는 불쾌한 인플레이션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고 이제 세계 경제는 그 초입에 들어섰다고 생각한다. 물론 8.5%에 달하는 미국의 CPI는 조만간 잦아들 것이고 공급망 개선과 기저효과의 반전은 연준의 공격적 금리인상과 맞물려 그 절댓값은 낮아지겠지만 사회 저변에 깔린 인플레이션 압력은 장기간 정치인들과 소비자, 그리고 기업의 어깨를 짓누를 것이다. 

투자자들은 자산시장이 폭락할 것이라는 사람들과 혹은 여전히 성장주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사람들로 나뉘어 갑론을박을 벌이지만 대개 미래는 모두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펼쳐지지 않나. 인플레가 지속된다면 인해 현금 보유자들의 실질 구매력은 시나브로 녹아내릴 것이고 그를 다잡기 위한 중앙은행과 정부의 정책은 기업들에게 부담을 가중시킬 것이다. 이태원을 오가던 시절에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오늘 밤 압구정이나 을지로에 나섰다가는 아재소리를 듣기 십상인 것처럼 지난 10년간 통용되던 투자의 법칙을 미래에 적용시키는 것은 실패와 조롱으로 끝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럼 미래가 어떻게 되겠냐고? 그걸 누가 알겠는가. 나는 코로나의 타격으로 세계가 저점에 있던 2020년 4월부터 향후 경제는 인플레이션의 역습을 맞을 것이라고 예견했고(링크) 그것이 향후 투자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던 금융시장의 소수 중 하나였지만 인플레이션은 내 전망보다 더욱 빠르게, 그리고 더 강하게 밀어닥쳤다. 2020년 7월의 글에서 나는 투자자들이 얼마나 많은 빚을 냈는지에 따라 수익이 정해질 것이고 동시에 자신들의 근로소득이 휴지가 되는 것을 경험할 것이라고 예측했고(링크), 2021년 10월에는 투자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으니 기본으로 돌아가 비싼 자산을 팔고 값싼 자산을 매입해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링크) 그 이후 고평가 성장주는 평균적으로 벤치마크 인덱스를 약 15%가량 하회했다. 그리고 바야흐로 2년 3개월 만에 미국의 실질금리가 마이너스의 영역을 벗어나고 있다. 이 시점에서는 비우량 자산을 레버러지해서 매입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인플레이션은 둔화될지언정 사그라들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레버리지의 비용은 계속해서 증가할 것이다. 빚으로 매입한 자산이 저평가되었거나 우량하지 않다면 비용은 수익을 넘어설 것이고 투자자들의 고통은 배가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직은 적극적으로 디레버리징에 나서야 할 시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재는 우리는 막 인플레이션의 초입을 지났고 아직도 시장에는 잠재 인플레이션을 과소평가하는 자산들이 다수 존재하며 다소간의 급격한 경기변동을 견딜 수 있다면 그들은 충분한 수익을 가져다 줄 것이니까.    

최근의 주식시장의 부진으로 많은 투자자들이 고통받고 있다. 하지만 본디 자산시장은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기 마련이고 당신이 트레이딩이 아닌 투자를 하고 있다면 시장의 작은 사이클에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잘못된 투자를 하고 있다면 당신의 고통은 남들보다 클 것이고 또 오래 지속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태원 클래스라는 드라마가 한 시대의 시작과 끝을 보여주는 것처럼 투자의 패러다임에서도 하나의 시대가 끝났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으니까. 다시금 자신의 포트폴리오가 철 지난 시대의 방식을 따르는 건 아닌지 고민해 볼 때라고 생각한다. 

2022. 3. 31.

올브라이트의 브로치, 앙투아네트의 목걸이, 그리고 김정숙의 까르띠에

현대사에서 브로치로 가장 유명한 여성을 꼽으라면 지난 3월 22일에 작고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을 들 수 있지 않을까. 체코의 유대계 이민자 출신이었던 그녀는 미소 대립이 첨예하던 70년대부터 세계 외교사의 거두였던 브레진스키 밑에서 일했으며 민주당 대선후보들의 외교 고문을 맡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 교수로 재직하고 유엔 대사로 임명되는 등 국제정치, 특히 동유럽과 소련 문제에 가장 정통한 미국인 중 하나였기에 여자였던 그녀가 클린턴 행정부의 국무부 장관으로 거론되었을 때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푸틴이나 김정은 같은 독재자 앞에서도 결코 위축되지 않았던, 미국판 철의 여인과도 같았던 그녀는 동시에 수려한 패션 감각으로도 유명했다. 단순히 때와 장소에 어울리는 의상을 세련되게 소화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독특하게도 그녀는 자신의 외교적 메시지를 브로치로 암시하곤 했다. 푸틴을 견제하기 위한 자리에 그녀는 미사일 모양의 브로치를 착용하였고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그녀를 독사 같은 여자라고 비난하자 그녀는 이라크를 방문할 때 뱀 모양의 브로치를 착용하는 대범함을 보이기도 했다. 평화협상이 난항을 겪을 때엔 나비나 꽃 모양의 브로치를 착용하기도 하고 2000년 평화 프로세스를 구축하기 위해 김정일을 만날 때에는 미국이 진심으로 북한과 협정을 맺기를 원한다는 신호로 심장 모양의 브로치를 착용했다. 결국 그녀는 적대 관계 종식, 평화 보장 체제 수립, 미국 국무장관 방북 등을 내용으로 하는 북·미 공동코뮈니케 발표를 이끌어냈다. 나의 브로치를 읽어라, 라는 문장은 그녀의 외교술을 상징하는 말이자 자서전의 제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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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장신구로 유명한 또 한 명의 여성으로 마리 앙투아네트를 들 수 있다. 오스트리아 출신이었던 그녀는 활달하고 사교적인 성격으로 음악과 예술을 좋아하던 공주였지만 이윽고 닥쳐올 험악한 시대는 교양과 우아함이 아닌 그녀의 피와 살을 탐하고 있었다. 어머니 테레지아 여제는 프러시아의 압박이 거세지자 가까운 협력자를 찾기 위해 오랜 적국이었던 프랑스와 혼인동맹을 맺기로 결정했고 그 적임자로 앙투아네트를 꼽았다. 하지만 그녀의 결혼생활은 시작부터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그녀는 서투른 프랑스어를 구사했던데다 오랜 적국이었던 오스트리아 출신이었던 탓에 프랑스 국민들은 그녀를 싫어했고 일부는 그녀에 대한 악성 루머를 퍼뜨렸다. 앙뚜아네트가 사실은 동성애자라든지, 혹은 시동생과 불륜 관계라든지 등등. 그런 대부분의 가십들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대중들에게 그런 사실여부는 중요치 않았다.      

그렇게 민중의 불만이 무르익어가던 시기, 그들의 분노에 불을 지핀 사건이 터졌다. 루이 15세는 자신의 애첩에게 줄 선물로 무려 200만 리브르에 달하는 고가의 목걸이를 주문했고 보석상 샤를르 뵈이머는 전 세계에서 540개의 다이아몬드를 모아 이 화려한 목걸이를 완성했다. 하지만 그 때 갑작스럽게 루이 15세가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난데없이 고가의 물건을 떠안게 된 보석상은 새 왕비 앙투아네트에게 이 목걸이를 넘기려고 했지만 재정이 빠듯했던 왕실은 이를 거절했다. 그때 사기꾼들이 보석상에게 접근했다. 그들은 왕비가 목걸이를 사도록 중재하겠다고 꼬드겼고 절박했던 보석상은 그만 속아넘어가 목걸이를 넘기고 만다. 무려 200만 리브르 짜리 보이스 피싱에 성공한 그 일당은 목걸이를 분해해 540개의 다이아들은 전 유럽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돈 떼인 채권자마냥 하염없이 대금 지급을 기다리던 보석상은 결국 왕비를 찾아가 잔금을 지불해 줄 것을 요구했고 눈이 휘둥그래진 앙투아네트가 진상조사를 명령하며 이 목걸이 사건은 만천하에 모습을 드러냈다. 왕비 앙뚜아네트는 이 스캔들과 아무런 연관이 없었지만, 대중들은 타락한 귀족들의 사치와 방탕한 생활에 충격을 받았고 그 분노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왕비에게 향했다. 이후 이 소식을 들은 괴테는 목걸이 사건을 두고 프랑스 혁명의 서곡이라고 표현하며 이후 불어닥칠 피바람을 예고했고 사형을 선고한 혁명 정부의 앙투아네트 재판에도 이 목걸이 사건이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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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대한민국에는 김정숙이 있다. 지난 5년간 김정숙은 약 48회의 해외순방에 나섰는데 이는 이전 영부인들의 해외순방이 약 20여 회에 그쳤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놀라운 실적이다. 게다가 코로나로 1년 7개월 동안 해외순방이 중지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사실상 그녀는 매달 1번씩 해외여행에 나선 셈이다. 무엇보다 과거 영부인들이 해외순방에서 주로 교민들을 위로하거나 현지의 문화행사를 이끈데 반해 김정숙은 주로 관광지를 중심으로 순방에 나섰으며 교민 행사에 참여한 것은 고작 3회에 불과했다. 더욱이 사람들의 이목을 끈 것은 그녀가 순방에서 자랑한 막대한 양의 의상과 장신구들이었다. 샤넬, 막스마라, 에르메스, 루이비똥, 까르띠에 등 갤러리아 명품관을 1층부터 샅샅이 털어도 모자랄 만큼의 의상과 악세사리들이 화려한 조명과 함께 영부인의 온몸을 감쌌고 특히 런던 G20 정상회의에서 김정숙은 하루에 4벌의 다른 옷과 장신구를 선보이기도 했다. 

사실 영부인이 명품 좀 입은 것이 뭐 대수랴. 그리고 단언컨대 못생기고 살찐 것은 결코 죄가 아니다. 하지만 이제까지 정치인들과 배우자들의 씀씀이에 가장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던 이들은 당신네들 아니었던가. 게다가 대중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청와대가 어떤 돈으로 그 명품들을 구매했는지 속시원히 밝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수백만 원의 누비 옷을 판매한 한 장인은 보좌관이 5만 원짜리 현금다발로 결제했다고 증언했고 청와대는 영부인의 의상비 등 특별활동비 내역은 국가 안보에 위협을 주는 일이라며 공개를 거부했다. 청와대는 계속해서 김정숙의 명품 사랑은 그저 내돈내산일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우리는 어디까지 그 말을 믿을 수 있을까. 국가행사를 관광기회로 삼고 공직자들을 여행가이드로 쓰는 영부인이 국고와 사비를 엄격하게 구분했을까? 무엇보다 공직자 재산 공개를 보면 문재인의 재산은 약 21억 9천만 원이고 그의 연봉은 약 2억 5천만 원인데 그리고 그는 그 돈으로 새 집도 짓고 명품도 사고 심지어 이혼한 딸의 생활비까지 대고 있다. 소득 편차가 매우 큰 여의도와 금융권에서 나는 문재인보다 자산과 소득이 몇 배나 더 많은 사람들을 다수 보았지만 그 어떤 욜로족들도 저런 생활 수준을 누리지는 않았다.

이 논란의 정점에는 까르띠에 브로치가 있다. 탁현민은 이 브로치가 호랑이를 표현한 것이며 이는 인도와의 외교를 위한 것이었고 수 억짜리 정식 까르띠에 제품은 아니라고 둘러대고 있다. 하지만 누가 저걸 호랑이로 보는가, 또 누가 이게 까르띠에와 무관한 디자인이라고 하겠는가. 청와대는 애써 김정숙을 올브라이트나 앙투아네트로 포장하려고 하지만 그녀는 외교 천재도, 속아넘어간 왕비도 아니다. 그녀는 그저 김정숙일 뿐이다. 대한민국 역사상 임기중 가장 많은 해외관광지를 다녀온, 동시에 가장 적은 교민행사에 참석한 영부인. 그리고 그 가운데 그녀의 남편이 우리에게 약속한 특활비의 투명한 공개나 국민세금을 아껴 쓰겠다는 말은 처참하게 짓밟혔다. 다른 많은 공약들이 그러했듯이. 

그리고 아직도 우리는 영부인이 세금을 들여 수 억짜리 브로치를 구매한 것인지 아니면 공식 행사에 짝퉁을 차고 나간 것인지 알지 못한다. 슬프게도 둘 중 하나는 진실이다. 왜 창피함은 우리의 몫인가. 

김정은 동지가 주신 풍산개는 버릴지언정 표범 브로치는 꼭 챙겨가겠다는 김정숙 여사님

2022. 3. 20.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

어느 학교에서나 수학여행을 떠나면 맨 뒷좌석은 일진들의 몫이다. 이 다섯 개의 좌석은 모든 일진들이 탐내는 명당으로 그들은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왕좌의 게임도 불사한다. 그리고 그 바로 앞 줄은 그들을 따르는 부하들의 자리이다. 당신의 학창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보라, 그렇지 않은가. 전국의 일진들이 어디엔가 모여 이런 규칙을 정하고 대대로 이 전통을 전해주는 것도 아닐 텐데 어째서 시대와 지역을 가리지 않고 일진들은 항상 뒷좌석에 앉을까? 

그 이유는 버스의 구조 때문이다. 한국 대형승합차의 맨 뒷좌석은 대개 다른 좌석들보다 조금 높게 설계되어 맨 뒷좌석에 앉은 승객들은 다른 승객들을 내려다볼 수 있다. 게다가 맨 앞좌석에는 대개 인솔자인 담임선생님이 앉기 때문에 기존 권력에 반항하는 학생일수록 선생님과 거리가 먼 뒷좌석을 선호하게 된다. 따라서 기성체제에 순응하지만 학생들 사이에서는 별다른 권력을 가지지 못한 모범생들은 담임선생님과 가까운 앞자리에 앉고 반항적이면서 또래들 사이에서는 우월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일진들은 선생님과 멀면서 또 학우들을 내려다볼 수 있는 맨 뒷좌석에 앉는다. (반면 선생님들이 동승하지 않고 뒷좌석이 솟아있지 않은 미국의 통학버스에서는 일진들이 대개 앞자리에 앉는다고 한다.)

이런 공간과 권력의 구조는 비단 수학여행 버스에 그치지 않는다.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권력자의 자리가 신하들이나 피지배계급보다 낮은 문화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심지어 통치자의 권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들의 물리적 자리도 높아진다. 이는 현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펜트하우스는 가장 높은 층에 짓지 않는가. 1층에 펜트하우스를 설치하는 시공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법정에서도 가장 큰 권위를 가진 판사는 피고나 원고, 혹은 배심원들보다 높은 자리에 있고 국회에서도 국회의장의 자리는 일반 의원들보다 높다. 건축 양식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고딕 양식과 전체주의 건축은 각기 다른 시대에 다른 집단의 주도로 탄생했지만 둘 다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존재를 억압하고 축소하고자 했고, 그와 같은 의도는 장대하고 획일적인 건물양식으로 실현되었다. 현재에도 그 앞에 선 이들은 움츠러드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이처럼 공간의 구조는 인간의 의식에 강력한 영향을 준다. 

그래서 정치구조의 변화를 만들려고 했던 이들은 마찬가지로 그 권력이 머무는 공간도 변화시키려고 시도했다. 영국의 아서 왕이 봉건제도를 확립하며 자신의 기사들을 원탁에 배치했던 일이나 주변 경쟁 국가를 모두 물리치고 신바빌로니아의 절대 지배체제를 완성한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전례 없이 높은 건축물인 바벨탑을 지은 것, 그리고 가깝게는 조선왕조의 왕권을 부흥시키려던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한 것이 그 예이다. 왜냐하면 공간의 구조는 단순히 권력지형의 부산물이 아니라, 반대로 공간 자체가 사회권력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청와대의 시작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청와대의 이전 명칭은 경무대라고 불렸는데, 이는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궁 뒤편의 자그마한 언덕에 붙인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경무대는 경복궁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제 7대 조선 총독이었던 미나미 지로는 바로 이 곳에 총독관저를 지었다. 조선의 법궁을 내려다본다는 것은 바로 조선반도 전체를 내려다보는 셈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마치 버스 맨 뒷자리의 일진들마냥. 

이후 경무대는 조선을 무력으로 지배한 권력자들의 안방으로 쭉 자리 잡았다. 일제가 패망한 이후 주한미군 사령관이, 뒤이어 이승만 대통령이 관저로 삼으며 이곳은 마치 과거의 왕궁처럼 아무나 접근할 수도 없고 함부로 다가설 수도 없는 곳으로 남아있었다. 심지어는 여당의 대표나 행정부의 장관들까지도 함부로 청와대에 들어설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이곳의 구조와 위치가 과거 국가를 무력으로 지배하던 이들의 목적에 맞게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설계사상부터가 반민주적인 공간에 들어선 인간이 민주적으로 행동하길 기대할 수 있을까.

그래서인지 몰라도 이후에 집권한 모든 대한민국의 지도자들은 비슷한 비극을 맞이했다. 그중에는 도덕적이라고 여겨진 독립운동가나 명문대를 나온 민주화운동가, 유능한 사업가, 서민 출신의 인간적인 정치인 혹은 신실한 종교인도 있었지만 모두 하나같이 권력을 남용하거나 그 힘으로 축재를 하다 들통나 역사에 오점을 남겼다.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래, 헌법이 여섯 차례에 걸쳐 고쳐 쓰이는 동안 모든 헌정 위기는 하나같이 청와대에서 발생했고 그 과정이 동일했다는 사실은 이 나라의 비극이 지도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강하게 암시한다. 과거의 한 글(링크)에서 나는 박근혜의 비극이 문재인 정부에서도 반드시 되풀이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왜냐하면 당시 분노하던 모두가 다음 권력을 누가 잡을지만 쳐다보고 있었지 이를 70년간 되풀이되던 권력의 구조적인 문제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지금의 문제도 구조적인 문제로 접근하지 않으면 이번 정부 역시 비극으로 끝날 것이다.

지난 70년간 청와대는 마치 블랙홀같이 현대 한국의 지도자들을 빨아들였다, 깊은 비극의 수렁으로. 마치 절대반지를 낀 스미골처럼 아무리 영민해 보이던 지도자들도 그 푸른 기와의 집에 한번 발을 들이고 나면 좀처럼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탐욕과 어리석음에 시나브로 젖어들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본 일부 사람들이 풍수를 언급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공간이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미신이 아닌 인지과학의 영역이다. 셰익스피어도 고개를 떨구고 주눅 들게 만드는 이 K-비극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의 권력구조를 바꾸는 것이 필요하고 마땅히 대통령의 의식에 영향을 주는 집무실이라는 공간 역시 바뀌어야 한다. 

물론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 그 원인이 청와대의 구조 하나에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혹자는 유권자들의 미흡한 시민의식이 더 큰 문제라고 할 것이다. 허나 청와대라는 블랙홀에 빠진 것이 어찌 지도자들 뿐이랴. 해방 직후 대한민국 국민들은 민주공화제를 선택했지만 구 왕조의 일가였던 전주 이씨 출신의 이승만과 이기붕을 지도자로 선택했고 그들을 전하라는 이름 대신 각하라고 불렀지 않나. 그것이 경무대가 옛 경복궁 내에 자리 잡은 것과 아주 무관한 일일까. 놀랍게도 시민이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신민으로 종복하는 모습은 21세기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번 대선을 앞두고 무식하게 쌈박질하는 영화만 찍어내는 한 감독이 민주당 대선후보를 두고 "진정으로 백성 아픔 어루만져 줄 후보”라고 일컫는 것을 보라. 스스로 백성을 자처하는 우리의 의식 역시 청와대라는 공간에 지배당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물론 청와대의 위치를 바꾼다고 해서 우리나라의 권력구조의 문제점이 단번에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이는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니까.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대통령의 비극이 대한민국에서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며 그러기 위해서는 권력구조와 개헌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대통령의 집무실을 이전하는 것은 정치구조 개편이나 개헌에 비해서는 극히 쉽고 간단한, 그저 당선인의 의지만 있다면 실현될 수 있는 첫 출발이지 않은가. 그러니 장담하건대 지금 청와대 이전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정치구조 개편과 개헌에도 반대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집무실 이전이 불가하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면 아래에 쉽게 쓰인 좋은 글이 한 편 있으니 일독을 권한다.


....지금의 청와대 터는 조선 왕궁인 경복궁의 일부이자 뒤뜰이 있던 자리입니다. 자랑스런 문화유산의 일부입니다. 일제가 경복궁 일부 건물을 허물고 조선총독부 관사를 지었던 곳입니다. 나쁜 의도에서 비롯된 터입니다. 조선총독부 관저, 경무대에서 이어진 청와대는, 지난 우리 역사에서 독재와 권위주의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제왕적 대통령 문화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리고 국민 위에 군림하는 권력기관의 상징이었습니다. 대통령을 국민들로부터 철저하게 격리하는 곳이었습니다. 심지어 대통령 비서실조차 대통령과 멀리 떨어져서 대통령 비서실장이 대통령을 만나려 해도 차를 타고 가야하는 권위적인 곳이었습니다. 그 넓은 청와대 거의 대부분이 대통령을 위한 공간이고, 극히 적은 일부를 수백명 대통령 비서실 직원들의 업무공간으로 사용하는 이상한 곳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대통령은 대통령 비서실 직원들과도 철저히 격리돼있는 실정입니다.

이전에 따른 불편함도 있을 것입니다. 경호, 의전과 같은 실무적 어려움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호와 의전까지도 탈권위주의 시대에 맞게 달라져야 합니다. 잘못된 대통령 문화의 한 장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대통령 문화를 열겠습니다. 기꺼이 국민 속으로 들어가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대통령의 권위라고 믿습니다.

지금의 청와대는 개방해서 국민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때때로 국가적인 의전 행사가 열리면 국민들께 좋은 구경이 될 것입니다. 청와대를 국민에게 돌려드리면, 북악산까지 완전 개방이 가능해집니다. 국민들에게는 새로운 휴식의 명소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이제 대통령 집무실이 청와대라는 이름을 대신할 것입니다. 청와대는 더 이상 높은 권부를 상징하는 용어가 아니라, 서울의 대표적인 휴식 공간을 뜻하는 용어가 될 것입니다.

이로써 특권의 한 시대가 끝났음을 선언합니다.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옵니다. 늘 국민과 함께 하는 새 시대 첫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7년 3월 문재인 드림

2022. 3. 17.

동물 할당제도 해주세요

 


존경하는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들과 박지현 위원장님께,

건국 이래 최초로 재집권에 실패하신데에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얼마나 다급하셨기에 성범죄로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그리고 충남지사 자리를 잃은 정당에서 바로 이어 치러진 대선에 불륜 의혹과 여성에 대한 모멸적 욕설을 내뱉은 후보를 대선에 내보내셨을까요. 그 깊은 뜻을 한낱 범인에 불과한 저 같은 유권자는 감히 짐작하기도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고 사람을 죽일 정도로 뾰족한 송곳은 주머니를 콱 찢고 나오는 법입니다. 반드시 그렇습니다. 그런 귀 당에 무궁한 발전과 영욕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번 대선의 패인을 분석하며 비대위원과 위원장님께서 내로남불이 문제라는 지적에 저는 백번 공감합니다. 구중궁궐 같은 청와대를 없애겠다고 약속하곤 5년간 거기서 잘 먹고 잘 살다 이제와서 청와대를 왜 없애냐 던 문, 아니 이름조차 함부로 부르면 안 되는 그분. 꼬리곰탕은 부자들이나 먹는 음식이라고 비난하며 소박하게 조선호텔 점심 스시 도시락을 즐겨 드시는 대변인님. 그리고 평생 반미를 외치시면서 딸은 미국에 유학 보낸, 아 한 두분이 아니시군요. 국회의원님들. 그리고 부동산은 끝났다며 과천자이 재건축으로 크게 한탕 잡수신 김수현 사회수석님까지. 내로남불이 민주당의 상징이 된 것은 결코 오해나 우연이 아닙니다. 어찌 보면 실력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 오명을 씻어낼 대응책으로 아무런 경험도 경력도 없고 입당한지 불과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26살의 미숙아를 비상대책위원장에 앉힌 것은 매우 놀라운 결정이었습니다. 사실 여성폭력을 근절시키겠다는 젊은 인재가 두 여성에게 폭언과 협박을 일삼은 분을 지지한다는 사실보다 놀랍진 않았지만요. 물론 거기에 민주적 절차 따위는 없었지요. 그게 더불어민주당이니까요. 이준석 당 대표처럼 정치경력을 쌓고 이력을 인정받아 당원투표에 의해 감투를 차지하는 것은 미제 자본주의자들의 구습일 뿐입니다. 네, 진정한 권력은 결코 선출되지 않는 법입니다. 여러분들의 얼굴 위로 프랭크 시나트라의 My Way를 부르는 김정은과 시진핑의 모습이 겹쳐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6월의 지방선거에서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지금은 그 이상의 특단의 대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귀 당에게 한 가지 제안을 드릴까 합니다. 바로 동물 할당제 입니다. 지구상에는 약 20,000,000,000,000,000,000마리의 동물이 존재합니다. 이 중 대다수의 동물들은 인간과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니 더불어민주당에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니 우리와 함께 지내는 애완동물과 가축만 세기로 합시다. 그 수는 약 300억 마리이니 인구비례로 치면 한국에는 약 20억 마리의 가축이 존재합니다. 대한민국 인구의 약 40배가 되는군요. 개개인의 노력이나 성취를 무시하고 태생적 배경만을 가지고 쿼터를 할당한다면 이 가축들에게 약 97.5%의 공천권을 주는 것이 더불어민주당의 정신에 부합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부디 이번 지방선거를 위한 공천심사에서 이 점을 반드시 고려해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제 짧은 소견으로는 이미 귀 당에 돼지와 닭대가리는 상당수 계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중 한 분은 이미 동물들과 소통에 나서셨더군요. 보통 사람으로서는 저 혈연정치를 깨기 쉽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97.5%의 비례율을 맞추기엔 다소 모자란 감이 있사오니 부디 숙고하시고 신중하게 인재, 아니 축재를 선발하여 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위 사진과 본문의 내용은 아무런 연관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귀 당의 훌륭하고 공정한 경선을 기대하며, HHMM드림

2022. 3. 13.

윤석열의 당선, 이준석의 승리

20대 대선에서 국민의힘이 승리했다. 그 공은 후보 본인을 제외한다면 마땅히 이준석 대표에게 먼저 돌아가야 할 것이다. 만약 선거에서 졌더라면 그는 두 번째로 큰 책임을 지는 위치에 있었으니 당연히 승리의 축배는 그에게 쥐어져야 한다. 반대로 민주당의 송영길 대표는 역대 민주당 대선후보들 중 가장 질이 떨어지는 후보를 업고도 박빙의 선거를 치렀지만 패배의 책임을 지고 당 대표에서 물러났다. 심지어 다리 힘줄이 끊어지고 머리가 깨지는 부상투혼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로 이야기하는 정치판에서 이긴 것은 이긴 것이고 공은 공이다. 이준석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고 그의 선거전략을 평가하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 

그가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람들이 그의 공로를 온전히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강점과 단점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역사에 가정은 없다. 또 어떻게 그의 강점과 단점을 정밀하게 계량해서 수치화할 것인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그의 선거전략을 되돌아보기에 앞서 한 가지에 동의하고 시작하는 것이 옳다. 그는 이번 선거를 승리로 이끈 사람이다, 그러니 이긴 장수는 승장으로 대우해야지 대선에서 이긴 당 대표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먼저 그의 공 부터 되돌아보자. 그는 선거 과정에서 참신한 아이디어를 도입했다. 시대 트렌드에 걸맞게 대선후보의 공약을 짧은 쇼츠 영상으로 제작해서 sns에 올렸고 또 AI 윤석열이라는 컨셉을 도입하여 대선후보나 정당 관계자들이 가볍게 언급하기 어려운 말들을 자유롭게 올리며 시선을 끌 수 있었다. 또 당내에 젊은 스피커들을 대거 등용하여 당의 이미지를 쇄신하는데 혁혁한 기여를 했다. 상대 민주당이 인적 쇄신이라며 등용한 젊은 인재들과 한번 비교해 보라. 박빙으로 치뤄진 선거에서 이런 공로가 없었다면 과연 승리를 담보할 수 있었을까?

반면 그의 전략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가 젋은남성에게 집중하느라 여성표를 끌어오지 못했고 또 선거캠프의 역량과 시간을 호남에 집중하는 바람에 충청과 경기도의 격전지에서 충분한 표를 끌어오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또한 투표 당일까지 8% 이상의 대승을 자신하는 바람에 야당 지지층의 투표율이 상대 유권자들보다 낮았고 지속적으로 단일화 무용론을 주장해 하마터면 패배할뻔했다고 비판한다.* 모두 타당한 지적이다. 

무엇보다 그가 저지른 가장 큰 실책은 자신의 지지층들의 의지를 과신했다는 데에 있다. 마지막 여론조사에서 윤석열 후보는 이재명 후보보다 약 3-6% 앞서 있었지만 실제 집단별 투표율을 반영하면 윤석열 측이 패배하는 것으로 나온다. 정세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안철수 후보 측에서도 비슷한 결과를 받아보았다고 했는데 어째서 이준석은 윤석열의 승리를 그렇게 장담했을까? 데이터를 이리저리 조합해 보면 나는 그가 세 가지를 오판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는 호남에서의 여당 결집을 과소평가했고, 20-30대 남성들의 투표율을 과대평가했으며 상대적으로 시간과 공을 덜 들인 경기/충청의 접전지역에서의 우위를 과신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호남에서의 보수표는 여론조사만큼 나오지 못했고, 여전히 20-30 남성들의 투표율은 낮았으며 여전히 접전지역에서의 표는 각 후보들이 공 들인 만큼 나왔다. 모든 수리통계 모델은 설계자의 편향에 따라 오류를 내곤 한다. 자신을 선거덕후라고 부르던 이준석은 아마 모델을 만들면서도 자신이 과거의 경향성을 완전히 뒤집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검증되지 않은 자신의 편향을 모델에 반영해 8% 이상의 승리를 자신했다. 하지만 그런 이변은 없었다. 개표함을 열고 튀어나온 결과는 8%가 아닌 0,8%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준석은 이 0.8%의 승리에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이다. 그의 공과 과가 모여 나온 결과는 결국 대선승리 아닌가. 또 이제껏 실수 없이 선거를 치룬 사례가 어디 있었던가. 그런 그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고 그의 전략을 비판하기 시작하면 그와 지지자들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결함과 실수를 부정할 수밖에 없다. 지선을 불과 3달도 채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이긴 당 대표에게 책임론을 묻는 것은 자멸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나 다름없다. 정권교체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이 개선장군에게 박수를 쳐주고 샴페인을 뻥하고 터뜨리며 축하한 뒤에 보완점을 논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독일의 전격전을 상징하는 인물 중 하나인 하인츠 구데리안은 프랑스 전선과 독소전쟁 초기 동부전에서 크나큰 활약을 펼쳤다. 한번은 그의 전차들이 지원부대가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적 영토 깊숙이 내달리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지휘본부는 여러 차례 돌진을 멈출 것을 명령했지만 그는 예하부대의 통신을 모두 끄고 명령을 받지 못했다며 그대로 전차부대를 전속력으로 돌격시켰다. 하지만 그의 승리는 결코 남성호르몬을 아무렇게나 뿜어내며 함부로 돌격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가 소련의 수십 개 대대를 분쇄하며 돌진하는 도중에도 그는 노획한 적의 전차를 분석해 소련 전차가 자신들의 전차보다 우수하다는 사실을 간파하기도 했으며 이때의 경험을 정리해 독일군의 신형 전차를 개발하는데 반영하기도 했다. 모든 유능한 지휘관들은 전투 후 자신의 전략을 평가하고 개량하기 마련이다. 이번 선거에서 이준석은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전략이 완벽했다는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 다음 선거에서의 승리를 담보하는 것 역시 아니다. 

나는 트레이더이자 투자자이지, 정치평론가가 아니기에 한 정당이나 특정 정치인의 입장을 평가하는 글을 쓰는 일은 지양하려고 한다.(사실 자주 어기지만) 하지만 과거 몇 번이고 그의 행보를 비판했던 터이니 그를 옹호할 때도 마땅히 글로 남겨야 하지 않을까 싶어 이렇게 지루한 정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각계 각층의 사람들을 대표하는 정치인이 있듯 그는 2030대 남성들을 대변하는 대표적 정치인이다. 그가 더욱 성숙한 태도로 자신의 지지층들을 대변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일부 사람들은 안철수와의 단일화가 여권의 결집을 가져와 실제로 효과가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계량화되지 못한 데이터로 이준석을 비난하는 것이 무의미한 것처럼 수치화되지 않는 가정에 기반하여 그런 주장을 펼치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또 부당하다.



P.S.

흥미롭게도 이 글의 첫 두 댓글은, 내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한 분은 이준석의 완전오류설을 믿는듯 하고 다른 한 분은 그의 완전무오류설을 믿는듯 하다. 하지만 세상에 완전히 옳거나 완전히 틀린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이준석의 어떤 행동은 잘못되었고 어떤 행동은 맞다고 믿을 뿐. 

점점 대중은, 그리고 우리 사회는 그 중간지대를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회색분자들과 중도층의 소멸은 필연적으로 날카로운 충돌을 예고하고 우리는 점점 임계점에 가까워지고 있다.

마치 샐리와 앤으로만 구성된 나라처럼.
 

2022. 3. 10.

살인자들의 선거법

사전투표를 앞두고 아버지와 식사를 하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 정부의 국정철학은 스탈린이 다스리던 소비에트 연방에 가깝다고. 제1공화국에서 태어나 정치가 폭력과 너무나도 가깝게 맞닿아있던 시기를 살아오신 아버지는 그런 험한 말을 함부로 입 밖으로 꺼내면 안 된다며 나를 나무라셨지만 나는 이들의 행태를 다른 순화된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자국민을 의도적으로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들을 달리 뭐라고 부르겠는가. 

 

다른 나라들의 확진자 증가 추이는 이미 1월 초중순에 정점을 찍었지만 한국의 코로나 환자는 아직도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주목하지 않는 사이에 매일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코로나로 사망하고 있다. 갑자기 한국에서 코로나가 악화된 주된 이유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방역을 완화했기 때문이다. 다른 해외의 사례들을 보면 바이러스 확산세가 정점을 찍기 전에 방역조치를 완화할 경우 확진자들의 수가 지수적으로 폭증했고 이런 패턴은 한국에서도 어김없이 반복되었다. 

방역을 거듭 완화한 이 조치는 그간 정부가 밝혀온 가이드라인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정부는 확진자 증가 추이가 꺾일 경우, 혹은 치명률이 현격하게 낮고 병상이 충분히 확보되어 있어 사망자의 숫자가 낮게 유지될 경우 방역조치를 완화하겠다고 밝혀왔다. 하지만 1월 16일 확진자의 숫자가 사상 최대치를 넘어 5천 명에 근접하는데도 정부는 첫 번째 완화조치를 내놓았으며 약 한 달 뒤 확진자의 숫자가 20배가 늘어나 10만 명을 돌파했는데도 두 번째 방역완화에 나섰고 그로부터 3주도 안되어 확진자가 30만에 달하는데도 다시 한번 방역지침을 대폭 완화했다. 심지어 세 번째 방역 완화는 역대 최대 사망자를 기록한 날 발표되었다, 그것도 본디 3월 13일까지 예정되어 있던 방역지침을 전례 없이 앞당겨서. 하필이면 선거가 불과 1주일 남은 그 시점에.  
지난 세 달간 정부가 급박하게 갈아치운 방역정책 덕에 코로나 환자는 세계 1위로 폭증했고 전체 세계 인구 중 불과 0.7%에 불과한 나라에서 확진자 수는 세계의 약 20%를 차지하고 있다. 위드 코로나에 따른 자연스러운 조치라고? 위중증/사망자의 수도 역대 최대치를 갈아치웠고 이대로라면 인구의 0.1%가 매달 죽어나갈 텐데 위드 코로나의 목표가 이런 것인가? 아 자랑스러운 K-ill 방역. 즉 명백하게 방역정책의 목적은 코로나 관리에 있지 않았다. 되려 확진자 수를 황급히 늘리기 위해 취하는 조치로까지 보이기도 한다.

어째서인지 정부가 내놓은 모든 방역지침들은 선거에서 여당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사망자가 폭증하는데도 방역지침을 완화한 것은 자영업자들의 지지를 받았고 선거를 불과 2주 앞두고 그들에게 몇백만 원의 지원금을 살포하기도 했다. 게다가 선거 당일 기준 약 185만 명의 확진자들이 격리되어 투표권이 일부 제한되었는데 사전투표를 꺼리던 야당 성향의 유권자들의 투표율 역시 자연스레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전방위적으로 확산되는 바이러스는 사망률이 높은 노인층, 다시 말해 야권 성향이 가장 강한 유권자들이 인구밀도가 높은 투표소를 오가는 것을 두렵게 만들었다. 살인자의 선거법. 스탈린스러운 이들의 선거전략을 이보다 더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노영민 비서실장은 재작년 여름 시민들의 집회/결사의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당시 집회 주동자들을 두고 살인자들이라며 소리 높여 비난했다. 하지만 당시 일일 사망자는 최대 6명을 넘지 않았고 확진자들의 수는 고작 300명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난 지금 정부의 적극적인 방역조치 완화로 일일 확진자 수는 천 배나 많은 30만 명을 넘어섰고 사망자의 수 역시 200명을 훌쩍 넘어섰다. 정부가 방역조치를 완화한 1월 16일이래 코로나로 사망한 환자들은 무려 3336명에 달한다. 작년 같은 기간 코로나 사망자 412명의 약 8배에 달하는 숫자이다. 이제 노영민과 기모란을 비롯한 청와대 인사들과 선거를 주도한 너희들의 면상에 이렇게 소리치겠다. 너는 살인자다.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죽지 않아도 될 사람들을 죽도록 방치한 살인자들이다. 그래, 너희는 나치나 스탈린 같은 살인자들이다. 

그리고 이제 너희들은 이에 따른 응당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2022. 3. 6.

문재인이 쏘아올린 선거참사

친여당 성향의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구성

여론이 불타고 있다. 지난 토요일 확진자들의 사전투표에서 유권자들은 자신의 투표지를 직접 투표함에 넣지 못했고 일부 투표지들이 적절하게 관리되지 않아 다른 유권자들에게 건네지거나 방치되었으며 심지어는 분실되기도 했다. 이는 1987년 직선제가 시작된 이래 단 한번도 발생한 적 없던 유례없는 대참사이다.   

조직관리의 측면에서 보면 이런 대형사고가 발생한 이유는 자명하다, 문재인의 편향된 인사 때문이지. 능력보다 친분이나 이념 혹은 특정 정치인의 편의를 봐준 사람들로 구성된 인사는 조직의 올바른 운영과 성과보다 다른 목적을 중시하게 되고 필연적으로 조직이 파행으로 운영되는 것을 방치하게 된다. 아니라고? 그 징후는 지난 총선부터 여실히 드러났다. 당시 여러 유권자들이 지적했던 것처럼 선관위의 일부 조직은 선거 절차를 준수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소수의 야권 지지자들이 결과를 조작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가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선관위는 해당 주장에 대해 매우 수동적으로 반응했으며 일부 핵심 자료를 공개하기를 거부했다. 그 음모론에 살을 덧붙이고 뼈를 입혀 키운 것은 일부 극우 유튜버들이나 편집증 환자들이 아닌 바로 선관위 자기 자신이었다.  

그뿐인가. 작년 4월 보궐선거에서도 선관위는 친여 성향의 TBS의 ‘일(1)합시다’ 캠페인은 문제 삼지 않았지만, 야당이 제시한 ‘보궐선거 왜 하죠?’ ‘내로남불’ ‘우리는 성 평등에 투표한다’ 등의 문구는 못 쓰게 하였고 심지어 오세훈 후보의 아내가 신고액보다 세금을 30만 2천 원을 더(그렇다, 덜이 아닌 더) 냈다는 사실을 선거 당일 투표장 앞에 정정내역 공고문으로 배치했다. 과연 후보의 배우자가 세금을 30만 원 더 냈다는 사실이 유권자들의 선택에 영향을 줄 사안이라 긴급하게 알릴 소식인가. 

하지만 선관위는 이 모든 논란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바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막강한 친여 인사들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선관위의 파행적 운영을 비판하는 보고서는 윗선으로 전달될 때마다 어디론가 종적을 감췄을 것이고 이 조직을 감시할 여당은 그들을 옹호하기 바빳으며 청와대는 그 조직을 개편하기는 커녕 조해주 상임위원의 임기를 연장하는 꼼수를 부렸다. 다시 묻겠다, 이 대참사가 왜 발생했냐고? 문재인의 인사 때문이다. 외교가, 부동산이, 소주성 정책이 마찬가지로 대참사를 일으킨 것처럼.

흔히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민주주의란 한 국가의 운영이 최대 다수의 의지와 신념을 반영하는 시스템을 의미하기 때문이고, 그 핵심이 바로 선거이기 때문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 절차적 정당성은 민주주의의 알파요 오메가나 다름없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는 민주주의의 역사는 모두 이 선거권을 가지기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은가.

그런 선거가 전례없는 파국을 맞이했다. 절차적 정당성에 대한 믿음 없이는 민주주의는 유지될 수 없다. 오늘 선관위는 부정행위는 절대로 발생할 수 없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선거법을 어긴 것이 부정이 아니라면 무엇이 부정이란 말인가. 그것은 아내에게 거짓말을 들킨 남편이 모텔방에서 후배 여직원과 나오다 적발된 상황에서 나는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았다는, 그런 되도않는 변명을 늘어놓는 것이나 다름없다. 유권자들의 분노는 정당하다. 

과거 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는 동쪽의 소련을 치기로 결심한다. 유럽 제 1의 인구와 자원 그리고 방대한 영토를 가진 바로 그 소련을. 하지만 전쟁 초 소련의 군대는 너무나 허약하게 붕괴했다. 개전한지 불과 3개월 만에 붉은 군대는 약 2백만 명의 전사자를 내며 서부전선의 거의 모든 사단이 붕괴했다. 이렇게 커다란 피해를 낸 데에는 독일군의 우수한 작전수행능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스탈린의 군부 숙청이 큰 기여를 했다. 자신의 권력을 공고하게 하기 위해 스탈린은 대숙청을 실시했고 이는 군 수뇌부 조차도 피할 수 없었다. 소련군 내에서 전차의 유용성을 알아차린 미하엘 투하쳅스키 원수는 물론이고 셀 수 없이 많은 장성/영관급 장교들이 시베리아 형벌지로 쫒겨나야 했다. 심지어 독소전의 영웅 주코프 원수까지도 이때 숙청의 위기를 맞기도 했으니 평범한 장교들은 어떠했겠는가. 거기에 소련군에는 정치장교라는 독특한 보직이 있었는데 이들은 주로 군사경험은 부족하지만 공산주의 사상이 투철한 사람들로 채워졌고 이 때문에 일선 부대들은 혼란에 빠지기 일수였다. 개전 초기 키예프와 하르코프를 비롯한 많은 도시가 불타고 약 400개 사단이 분쇄된 데에는 스탈린이 저지른 인사참사가 상당부분 공헌을 한 것이다.   
   
이 정부는 이념 뿐 아니라 국가를 운영하는 방식도 스탈린과 매우 흡사하다. 그가 실시한 파행적 인사는 경제, 주거, 외교, 금융, 방역을 짓밟다 이제는 민주주의의 꽃마저 꺾어 쓰레기통에 쳐박았다. 게다가 문재인 정부의 가장 큰 비위중 하나는 바로 대통령의 친구를 울산시장에 당선시키기 위해 청와대가 조직적으로 선거에 개입한 사건이다. 자 이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문재인의 선관위를 불태울 것인가, 아니면 민주주의가 불타도록 방치할 것인가.



2022. 3. 3.

사전투표하세요

 

지난 총선 이후 나는 선거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유권자와 후보의 정당한 권리라고 주장했고, 또 그런 행동을 비난하는 것은 타인의 마땅한 권리를 억압하는, 일종의 폭력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타인의 권리를 함부로 윽박지르며 억압해서는 안 된다. 설령 그 결과가 정치공학적으로 불리할지라도.

하지만 나는 사전투표에 나서는 것이 마땅히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여론조사를 보면 약 80% 이상의 유권자들이 반드시 투표에 나가겠다고 답하지만 실제 투표율은 그보다 늘 10%가량 낮다. 인간은 늘 자신의 의지를 과신하니까.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실천할 수 있었다면 우리 모두는 지금쯤 멋진 전문직에 몸짱이 되지 않았겠는가. 그뿐만 아니라 코로나가 크게 확산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의 의지를 선거 당일의 당신이 배신할 가능성이 더더욱 크다. 산술적으로도 매일 20만 명의 사람들이 코로나에 걸린다면 선거 당일 약 115만 명의 유권자들이 자가격리 중일 것이고 그중 실제로 투표에 나설 생각이었던 85만 명의 유권자들의 마음은 지금과 사뭇 다를 수 있다.

나는 나 자신을 믿지 않는다. 오랜 시간 트레이딩을 해오는 동안 내 전망은 수도 없이 틀렸으며 때때로 손절하고자 했던 자산이나 포지션을 제때 버리지 못했고 트레이딩의 원칙을 너무나도 많이 어겼다. 따라서 나는 3월 9일의 나 자신을 믿지 않기로 했다. 나는 사전투표에 나설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사전투표를 꺼리는 분들에게 나는 이렇게 권했다. 정부를 심판하고자 하는 당신의 의지보다 야당 대통령 후보를 비롯한 여러 야당 지도부의 분노가 더 크다고. 그리고 선거에서 질 경우 우리가 겪을 후폭풍보다 그들이 겪을 고난이 더 클 것이다. 그런 그들이 사전투표를 택하지 않았는가.  

사전투표하세요.     

2022. 2. 26.

코리안 싸이코

 

운동권들의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현실인식이 실제와 완전히 동떨어진, 일종의 가상현실에 기반한다는 점이다. 진중권 교수는 이를 신랄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 그들은 늘 불편한 사실을 차단하고 자신들의 매트릭스로 도피한다고. 그리고 그 매트릭스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이들의 눈에는 현실이 꿈이요, 자신들의 꿈이 곧 현실이다. 객관적인 지표로 보아도 이번 정권의 외교가 처참하게 실패했음에도 "국제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가기 때문에 세계정세를 올바르게 바라보는 훈련이 되어있는 우리 586세대가 외교를 주도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우상호 의원의 발언을 보면 그들의 매트릭스가 우리의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져있는지 알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우리가 두 발을 디딛고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는 곳은 그 매트릭스가 아니지 않은가. 북한이 남한의 영토를 포격하고 우리의 땅에서 시민과 젊은 병사들이 죽어나가며 중국이 대만의 방공지역을 매일같이 침범하는데다 러시아의 탱크가 키예프를 향해 돌진하는 바로 이 현실이다. 국제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도덕과 당위가 아닌 철과 피 뿐이다. 인류의 역사가 늘 그랬듯이. 그리고 그런 세계에 사는 정상인의 눈에 운동권들의 저런 현실인식은 미친사람의 절규처럼 들린다.

코리안 싸이코. 그리고 진짜 비극은 그 앞에 노스가 아닌 사우스가 붙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2022. 2. 7.

평창 여자아이스하키 팀을 떠올리며

지난 2018년. 집권 2년 차를 맞은 문재인 정부는 북한과의 성급한 대화에 나섰고 그 첫 희생양은 바로 여자 아이스하키 선수들이었다. 처음에는 공동 응원단과 올림픽 공동 입장만을 계획했지만 청와대의 누군가가 더 큰 상징성을 강조하기 위해 남과 북의 선수를 한 팀으로 묶자는 아이디어를 냈고 그 제안은 빠르게 현실화되었다. 북한이 평창 동계올림픽에 참가하기로 선언한 직후 남한은 북에 단일팀에 대한 제안을 했고 북한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이는 청와대의 발표로 최종 확정되었다.

개막식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서 팀 스포츠에 새로운 선수들을 편입하라는 주장은 얼핏 들어도 말이 되지 않았지만 그 순간 우리는 이념이 현실을 지배하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념은 미사일을 불상의 발사체로 증거인멸을 증거 보존으로, 그리고 전과 4+범을 유능한 대통령 후보로 둔갑시키곤 하는데 불과 23명의 어린 선수들의 꿈을 찢어놓는 것쯤이야. 엔트리에서 탈락한 한 선수가 용기를 내어 그와 같은 결정의 부당함을 알렸지만 청와대는 각하의 권위로 그들의 목소리를 침묵시켰고 그 결과 선수들은 이름조차 낯선 외지인들과 호흡을 맞춰볼 새도 없이 떠밀리듯 빙판에 올라야 했다. 청와대는 그것이 새로운 시대의 공정이라 말했다.

당시 여자 아이스하키팀은 유로 챌린지에서 3위, 삿포로 동계 아시안 게임에서 2위, 세계 선수권대회 디비전 1그룹 A에서 2위에 오르며 착실하게 성적을 쌓아가고 있었고, 또 임진경 선수와 박윤정 선수는 한국 팀에 합류하기 위해 원래의 국적을 버리고 한국인으로 귀화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들이 선택한 조국은 그녀들을 이념의 제물로 바쳤다. 결국 한국은 8개 국가가 참가한 대회에서 전패를 기록하며 개최국이 꼴찌를 기록하는 수모를 당하고야 말았다.  

당시 우리는 무엇을 했던가. 나를 비롯한 대다수의 국민들은 그릇된 철학을 가진 정치인이 젊은 선수들의 공정한 기회를 박탈하고 미래를 유린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들의 비극에 눈을 감고 다수는 허황된 평화쇼와 내셔널리즘에 한껏 취해 있었다. 거의 전 연령에서 국민들은 이념과 쇼를 위해 선수들의 꿈을 앗아간 것을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이념을 위해 소수를 희생시켜도 된다는 국민들의 허가를 받은 문재인 정부는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우리는 그 선수들이 겪었던 것과 똑같은 비극을 감내해야 했다. 처음에는 천안함과 연평도의 유족이, 그리고 현역에서 복무하던 젊은 남성들이, 그리고 집을 찾던 신혼 부부들이, 그리고 구직서를 들고 회사를 오가던 취준생들이, 그리고 저소득 노동자들이, 그리고 자영업자가, 그리고 세입자들이, 그리고 곧 온 국민들이 평창의 비극을 겪어야 했다. 그때마다 이념이라는 싸구려 독주에 한껏 취한 불량배들은 자신들의 의도는 선했노라고 국민들을 윽박질렀고 좌파 언론인들은 국민들에게 희생을 요구했다.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수구세력의 책동, 혹은 낡은 반공주의의 잔재라는 낙인이 찍힌 채 불태워졌던가. 하지만 그 희생자들의 명단에 청와대와 민주당 권력자들의 이름은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자신들의 상처를 외면하던 국민들이 같은 정치인들에게 같은 방식으로 뒤통수를 맞는 것을 본 그 어린 선수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치즘에 저항하던 한 목사의 시를 나지막이 읊지 않았을까.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누군가가 이 정부가 어디서부터 엇나가기 시작했냐고 물을 때 우리는 마땅히 한때 해맑게 웃던 그녀들의 얼굴을 떠올려야 할 것이다. 

2018년 평창 여자아이스하키팀 (남북단일팀 구성 전)

2022. 1. 28.

주식의 적은 누구인가(II), 그리고 뒤늦은 삼프로tv 후기

굳이 어려운 전문용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아마 지금쯤이면 물적분할을 통한 지주사의 디스카운트가 어떻게 우리의 자본시장을 망가뜨리는지 모두들 깨달았을 것이다. 불행히도 작년에 이루어진 상당수의 IPO들이 신규회사의 상장이 아닌 기존 상장사들이 사업부문을 분할해 상장시킨 회사들이었고 오늘 첫 거래를 시작한 LG에너지솔루션은 역대 최대 규모의 IPO를 단행하여 화룡점정에 올랐다.

거의 대부분의 오너들이 인적분할이 아닌 물적분할을 택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현재와 같은 기형적 지배 구조에서는 물적분할을 택해야 남의 자본을 조달하면서도 오너들이 지배력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오너들이 너무나 적은 자본으로 너무나 많은 의결권을 가지기 때문에 발생한다. 불과 5%의 주식을 소유하고도 회사의 의사결정을 마음대로 내릴 수 있는 오너는 배임이나 횡령을 저지를 강력한 인센티브를 가지게 된다. 내가 회사에서 100억을 빼돌려도 그중 내 손실은 5억에 불과하니까. 대부분의 비용은 생면부지인 나머지 95%의 투자자들이 지는 셈이다. 지난 몇십 년간 마치 클리셰처럼 일간지 사회면을 장식하던 재벌들의 일감 몰아주기, 순환출자구조, 기형적인 합병비율은 모두 오너들이 투자자들의 돈으로 자신의 지배력을 늘리기 위해 자행되었고 최근 유행하는 물적분할은 강세장에 알맞은 또 다른 배임/횡령기법에 불과하다.* 

이전에도 여러차례 주장했듯(링크) 모두가 외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누군가가 5%의 지분으로 51%의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다면 어떻게 나머지 95%가 온전히 인정받겠는가. 따라서 한국 자본시장이 한 단계 더 성숙하려면 이런 잘못된 지배구조를 개선해야 한다. 아니고서는 계속해서 잘못된 인센티브와 왜곡된 자본의 배분을 재촉할 것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일반투자자들이 지게 된다, 불쾌하고 기분 나쁜 할인이 우리나라 자본시장을 짓누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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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방영되었던 삼프로tv의 세 대선후보 인터뷰는 이를 대하는 명백한 차이를 드러냈다. 한국 증시의 경쟁력을 강화할 방안으로 이재명 후보가 주가조작 세력과 대기업의 갑질 등 강자의 횡포나 불법을 근절해야 한다고 대답했다면 윤석열 후보는 자본시장의 제도를 정비해야 할 문제라고 주장했고, 안철수 후보는 한국 기업들이 선진분야로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셋 중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안 후보의 인터뷰였고 솔직하게 말해 윤 후보의 인터뷰는 끝까지 듣기가 괴로울 정도로 지루했지만 현재 한국의 자본시장에 가장 필요한 것은 윤석열 후보의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오너들이 알짜배기 사업을 연달아 물적분할로 내놓는 것이 불법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오너들이 개인적 이득을 위해 사실상 주주와 회사에 손해를 끼쳤던 수많은 사건들이 모두 불법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니 합법이었던 경우가 더 많았다. 다만 당시 미비했던 자본시장법의 틈새를 찾아 그를 이용한 것 아닌가. 이런 조건에서는 사법적 통제와 감시를 강화한다고 해도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없앨 수 없으며 오너들은 계속해서 주주들의 자본을 약탈할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자본시장의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불필요한 비용을 유발하는 제도는 폐지하고 잘못된 자본의 배분을 촉발하는 구조는 개선하도록 룰을 고치는 수밖에 없다. 아니고서는 언젠가 삼성전자는 메모리사업부를 물적분할할 것이고, 현대차는 전기차 사업부를 신설해 분할할 것이다. 

스포츠 시합을 뛰거나 경기를 관람하는 것은 재미있다. 하지만 해당 종목의 규칙을 들여다보는 것은 무척이나 따분하고 지루한 일이다. 농구의 3초 룰, 축구의 오프사이드, 야구의 보크 등.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은 스타 선수들의 시원시원한 플레이지 따분하고 복잡한 룰북이나 규정이 아니다. 하지만 메시나 스테픈 커리가 활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정하고 합리적인 규칙이 필요하다. 주식시장도 마찬가지이다. 시장에서의 정부의 역할은 플레이어가 아닌 심판이고 그가 합리적인 규제와 제도를 마련한다면 스스로의 역할을 다 한 것이다. 혁신과 발전은 민간과 기업의 몫이고, 정부가 경제성장이나 주식시장의 가격목표를 정하는 것은 계획경제 시절의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미국의 테크산업은 21세기 들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성장과 혁신을 견인했지만 이게 어디 당시 대통령이었던 오바마나 트럼프가 해당 분야에 선구자적 안목을 가지고 육성한 덕분이었던가. 반면 그 경쟁자인 중국은 국가가 주도하여 자본과 인력을 해당 산업에 쏟아부었다. 그 결과 혁신을 이끌던 창업자들은 정부의 눈치를 보거나 감옥에 가고 성장의 결실은 소수의 권력자들이 독점하였다. 지난 몇 년 간 미국보다 중국처럼 변한 것이 비단 코스피 뿐일까.  

나를 포함한 많은 투자자들이 윤석열의 인터뷰를 미치도록 따분하고 지루하게 느꼈던 것은, 물론 그의 답답한 눌변도 한몫했겠지만, 그가 선수가 아닌 심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관에서 근무하는 트레이더의 입장에서, 그리고 개인 투자자의 입장에서 한국의 자본시장에 시급하게 필요한 것은 스타플레이어가 아닌 올바른 룰과 공정한 심판이다. 득점은 민간이 하면 되는 것이다. 자산이 오르든 빠지든, 코스피가 5천을 가든 2천을 가든 잘못된 투자를 한 사람은 실점을 할 것이고 올바른 투자를 한 사람은 트로피를 들어 올릴 것이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정부는 화려한 개인기로 수비수를 제치고 사이드에서 크로스를 올려줄 스타플레이어가 아니라 상대의 변칙 플레이를 막을 룰과 심판이다. 나는 특정 후보를 지지하지 않고, 또 윤석열의 모든 공약들을 찬성하지는 않지만 대선에서 누가 이기든 간에 적어도 다음 정부는 자본시장에 대해 그런 태도를 견지하는 심판이 나타나기를 원한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겠지만.
**주관적으로 요약한 것이라 생각이 다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