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Outside of markets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Outside of markets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24. 4. 13.

레임덕과 데드덕의 경계에서

얼마 전 학창시절 가까웠던 친구들을 만나 저녁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병원에서 의사로 일하는 친구가 연신 술을 들이켜며 정부 정책을 비판하기 시작했고, 그 바통을 이어받아 연구원으로 일하는 친구가 핏대를 세우며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현 정부를 강력하게 지지하던 친구들이었다. 나 역시 덩달아 이 정부의 금융정책들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따지며 논쟁에 뛰어들었다. 그런 우리의 대화를 들으면서도 조용히 잘 익은 고기를 착착 집어먹던 변호사 친구가 다음의 한 마디로 대화를 정리했다. "거봐 내가 말했잖아, 검사 애들이 그렇다니까" 

*               *               *

지난 대선은 음주운전자와 초보운전자가 맞붙은 선거였다. 그리고 국민들은 고심 끝에 아무런 정치 경험이 없던 초보운전자의 손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버스의 핸들을 꼬옥 잡아 쥔 이 초보운전자는 혹시 자신이 운전에 천부적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닐까 착각하기 시작했고 이윽고 엑셀과 브레이크를 마음대로 밟기 시작했다. 조수석에 앉은 그의 보좌관들도 맞다, 운전은 이렇게 하는 것이라며 연신 박수를 쳤다. 물론 그들 역시 운전 경험은커녕 면허조차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 초보운전자는 좌회전을 했다 우회전을 했다 길을 잘못 들어 유턴을 하기를 반복했고 조수들은 전방이나 내비게이션, 혹은 승객들을 바라보는 대신 운전자의 표정만 살피고 있었다. 급가속과 급정거를 반복하는 이 초보운전자의 서툰 운전 덕에 승객들은 멀미를 하기 시작했고 기사에게 항의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기사와 그 보좌관들은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소리를 쳤다. "야 인마, 꼬우면 네가 기사해"

대통령실은 이런 묘사에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 총선에 임하는 유권자들이 느꼈던 감정은 위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2 대 108, 임기가 불과 2년 밖에 지나지 않은 여당이 선거에서 참패한 이유는 그만큼 야당의 후보들이 훌륭했기 때문이 아니라 대통령실의 현실 인식과 태도에 심각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에서 행정부는 입법이나 사법부보다도 훨씬 강력한 권한을 가졌다. 삼권분립이라고 하지만 한 쪽이 나머지 두 쪽보다 월등하게 큰 비대칭적 구조라고 할까. 중간선거가 대통령에 대한 찬반투표의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는 배경에는 이런 역학관계가 있다. 따라서 이번 선거에서 유권자들이 1번을 찍은 이유는 야당과 진보진영의 철학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이런 행정부의 독선에 브레이크를 밟기 원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몇몇 평론가들은 몇몇 형편없는 야당의 후보들이나 조국의 부상을 두고 정치지형의 한계나 유권자들의 수준을 논하지만 나는 그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투표장에 나온 사람들은 그저 대통령의 오만함과 독선을 막고 싶었을 뿐이다. 그 브레이크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는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고. 

그 대통령실이 어떤 태도로 국정을 꾸려나갔는지 돌아보자. 정치경력이 전혀 없었던 대통령은 자신이 잘 알던 검사들을 등용했고 그렇게 각 요직은 전문성이 없는 사람들로 채워졌다. 내가 거듭해서 비판했던 금감원장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대통령이 직접 추진하던 정책들은 완전히 잘못된 현실 인식에 기반한 경우가 많았다. 윤석열은 은행들의 독과점이 서민 이자 부담의 원인이라며 카르텔을 혁파할 것을 주문했지만 지방은행과 저축은행 등 사실상 100개가 넘는 금융기관들이 경쟁하는 여수신 시장에서 독과점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또 대통령실은 높은 사교육비의 원인이 교육 카르텔에 있다며 이를 타파하기 위해 엄정한 수사를 주문했지만 실제 적발된 사례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균형재정을 위해 R&D 예산을 줄였다고 발표하자 과학계가 반발했는데, 정부는 여기에도 카르텔이 있다며 칼을 빼들었다.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도 경험도 없던 이 선무당들은 각 업종을 넘나들며 사람을 잡기에 바빴다. 한 대통령실 인사는 검사 시절 해당 분야를 수사해 본 적이 있기에 전문성이 있다고 했는데 그 말은 전과자가 자신이 검찰수사를 받아보았으니 형사법 변호사 일도 할 수 있다는 말만큼이나 허황된 착각이다. 이렇게 용산 선무당들은 우우 몰려다니며 오늘은 여의도, 내일은 대치동을 돌아다니며 생사람 잡기를 반복했는데, 그리고서도 잘못을 인정하기는 커녕, 사실 수사를 해보니 네가 나쁜 사람이기에 잡았다라는 태도로 일관하기 일쑤였다.

이런 초보운전자들에게 정무감각이 있을 리가 없었다.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대통령은 유죄판결을 받은 지 3달도 채 되지 않은 김태우를 사면한 뒤 곧장 보궐선거에 내보냈다. 총선을 불과 반년도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별 가망도 없어 보이는 구청장 한 석을 노려보기 위해 전국구 지지율을 통째로 희생시키는 얼토당토 없는 베팅이 실패하자 대통령실은 무리한 승부수를 던지기 시작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도 한국을 MSCI 선진국 지수에 넣어달라고 떼를 쓰던 금융당국은 편입이 불발되자 놀랍게도 공매도를 전면 금지한다는 조치를 들고나왔다. 위기가 아닌 상황에서 공매도를 전면 금지한 사상 초유의 사태를 놓고 대내외 금융기관에서는 거센 비난이 이어졌고 시장에서는 하루 만에 매수 사이드카가 걸렸다 바로 다음날 매도 사이드카가 걸리는 촌극이 이어졌다. 십수 년간 애쓴 시장의 신뢰와 선진국 지수 편입 가능성을 깨끗하게 날려버리고도 대통령실은 주가와 지지율을 올리는데 실패했다. 마지막으로 꺼낸 의대 증원이라는 카드도 마찬가지였다. 선거를 코앞에 두고 정부는 갑자기 당장 내년부터 의대 정원을 65%나 늘리겠다고 발표했으나 2천 명이라는 수치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산출되었는지 합리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이에 반발하여 전공의들과 대형병원 의사들이 파업에 나섰는데도 정부는 주먹구구식으로 대응하고 겁박만 거듭했을 뿐 파업에 대비한 효과적인 백업 플랜을 준비하지도 않았다. 이 모든 사회적 비용을 야기한 것은 다름 아닌 정부 자신이었고 그 뒷배경에는 대통령실이 있었다. 더욱 비참한 점은 그 비용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지지율은 오르기는커녕, 되려 크게 낮아졌다는 것이다. 

아마 대통령과 그 참모들은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그렇다 치자, 그렇다고 우리가 저런 범죄자들보다 우리가 못하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현재 운전대를 잡고 있는 것은 당신들이지 이재명이나 조국이 아니다. 국민들은 이재명이나 조국을 택한 것이 아니라, 무능한데다 오만한 당신들에게 제동을 거는 것일 뿐이다. 게다가 당신들이야말로 그들을 닮아가지 않는가. 현 정부에서 계속해서 여러 인사 문제가 논란이 되었는데, 거기에 직접적 책임이 있는 인사비서관 이원모와 법률비서관 주진우는 뻔뻔하게도 텃밭인 강남과 해운대에 공천 신청을 했다. 지지율을 열심히 갉아먹은 장본인들이, 나머지 지역구들이 망하든 말든 나만 금배지 달면 된다는 당신들과 대선에서 패배하고도 정치적 책임을 지기는커녕 계양에 출마한 이재명이나 매한가지 아닌가. 

게다가 대통령은 배우자에 대한 의혹을 해명할 기회를 걷어차며 자신에게 남아있던 마지막 정치적 자산을 불태웠다. 영부인이 당선 후에도 명품백을 선물로 받은 일이 드러난 뒤에도 그는 사과하기를 거부했으며 제2 부속실을 설치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도 않았다. 이후 계속해서 이 사건의 본질은 불법 촬영과 정치공작이라며 가스라이팅을 시도하는 대통령실의 모습은 비리 의혹이 드러난 후에도 아직 법적 결론이 나지 않은 사안이라 법무부 장관을 사퇴하지 않겠다며, 되려 검찰개혁을 강하게 외치던 조국의 모습처럼 치졸하고도 초라했다. 과거 이를 두고 한동훈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국민이 볼 때 공정한 척이라도 하고 그러려면 일단 걸리면 가야 되는 것이지, 걸리고서도 "아니 그럴 수 도 있지" 하고 성내는 식으로 나오면 안 되는 것이라고.


*               *               *


예일대 심리학자 어빙 재니스는 집단사고라는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응집력이 강한 집단의 구성원들은 어떤 판단을 내릴 때 만장일치를 이루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좀처럼 반론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아예 잘못된 결론을 도출할 위험성이 있다" 그 대표적 케이스로 언급되는 것이 바로 하버드를 졸업한 엘리트들로 구성된 케네디 행정부가 설계한 피그스만 작전이다. 각 분야의 전문가와 뛰어난 에이스들이 설계한 이 작전은 과도한 낙관론을 바탕으로 불가능한 작전목표를 구상했기에 시작과 동시에 삐걱거리다 처참하게 실패했다. 그리고 윤석열과 대통령실의 인적 구성은 어빙 교수가 언급한 집단사고에 빠질 전제조건에 부합한다. 

나는 여전히 이 정부의 성공을 간절히 바란다. 사실 우리는 늘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모든 정부의 성공을 바라야 한다. 설령 우리가 지지하지 않는 정부여도. 이번 총선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레임덕과 데드덕의 경계를 오가다 간신히 살아남았다. 총선의 패배가 대통령실에게 있는 것은 아는지 선거 직후 총리와 대통령 비서실 전원이 사표를 제출했다고 한다. 유권자들은 대통령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준 셈이나 다름없다. "이 길이 맞아 인마 꼬우면 너가 기사 해" 라고 외치던 검사 윤석열에게 국민은 대통령 윤석열이 될 마지막 기회를 허락한 것이다. 대통령실이 그 서늘한 함의를 깨닫기를 바랄 뿐이다. 

2024. 2. 9.

청진기와 6펜스, 그리고 아비트라지

병에 걸린 한 남자가 신에게 애원하며 이렇게 빌었다고 한다. '하나님 이 병에서 낫게 해주신다면 집을 팔아 그 돈을 모두 바치겠습니다' 얼마 안 가 그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고 그는 건강을 회복했다. 그러자 남자는 갑자기 거액의 돈을 기부하기가 아까워졌다. 못된 생각을 하면서도 신의 벌을 받기가 두려웠던 그는 다음과 같은 꾀를 내었다. 바로 매수자에게 그 집을 시세의 1/100에 불과한 금화 한 닢에 파는 대신, 기르던 고양이 한 마리를 금화 99개에 사야 한다는 조건을 다는 것. 매수자는 상기된 표정으로 기괴한 소리를 꺼내는 집 주인과 거래하는 것이 꺼림직했지만 그래도 원하던 집을 시세보다 약간 싸게 사는지라 이 계약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집을 판 그 남자는 신이 나 교회로 달려가 금화 한 닢을 바치고 이렇게 말했다. '전 약속대로 집 판 돈을 모두 바쳤습니다 하나님' 

트레이더라면 여기서 훌륭한 아비트라지의 기회를 포착할 것이다. 고양이와 집의 가격은 반드시 왜곡될 것이니까.* 그런데 우리 현실에도 이런 기괴한 거래가 진짜로 존재한다고 한다. 바로 대한민국의 의료시장. 우리나라의 병원에서 필수의료는 바로 집이 되고, 반복된 보험진료나 비보험 항목은 고양이가 된다. 이 시스템을 이해하려면 보험과 비보험이 어떻게 다른지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건강보험 시스템은 모든 의료 행위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보험과 비보험. 필수적인 의료 서비스는 보험으로 분류하여 나라가 일방적으로 가격을 정하지만 꼭 필요하지 않은 서비스인 미용/성형 등은 비보험으로 분류하여 병원이 자율적으로 가격을 정할 수 있다. 보험으로 분류된 의료 서비스는 국민건강보험 재정에서 그 비용을 부담하는데 대략 70-80%를 보험에서 부담하고, 치료를 받은 개인은 나머지 20-30%를 낸다. 이 비율은 몇몇 항목의 경우 10% 미만에 불과한 경우도 있다.  

엄격한 고정가격제를 도입하는 여느 시장이 그렇듯이 의료시장에서도 가격의 왜곡으로 인한 문제점이 발생한다. 보험 진료는 복지의 성격을 띠기 때문에 개인이 부담하는 비중이 극히 낮은데, 심지어 그 가격조차도 비용의 대부분을 지불하는 정부가 정하므로** 보험 진료의 수가는 늘 과도하게 낮다. 따라서 필수적인 진료를 보는 병원은 다음 두 가지 행위로 손실을 보전해야 한다. 하나는 추가 비용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 보험 진료를 대량으로 하거나, 임의로 가격을 책정할 수 있는 비보험 진료를 끼워 파는 것. 집을 싸게 팔면서 망하지 않으려면 고양이도 비싸게 팔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환자도 이 시스템에 만족했다. 다른 나라였다면 약 10-15만 원어치 청구서를 받았을 진료를 단돈 만 원으로 받을 수 있으니 안 갈 이유가 없다. 목이 칼칼해서, 콧물이 나서, 그냥 회사가 가기 싫어서, 등 오만가지 이유로 한국인들은 병원으로 달려간다. 안 가는 것이 바보다. 구체적 사례를 살펴보면 더욱 이해가 쉽다, 2017년 이전 시장에서 결정된 MRI 촬영의 비급여 가격은 대략 60-70만 원 선이었다. 하지만 2018년 MRI를 보험 진료로 포함하자 심평원은 해당 진료행위의 가격을 약 27-29만 원으로 고정했고, 그중 환자가 직접 내는 금액을 그 절반도 되지 않는 8-17만 원으로 책정했다. 가격이 내려가면 수요량은 증가한다. 2017년 140만 건에 불과하던 MRI 촬영 건수는 코로나로 병원 이용이 어려운 2020년에도 무려 354만 건으로 폭증했고 이에 따라 MRI‧초음파 검사 진료비 역시 2018년 1,891억 원에서 2021년 1조 8,476억 원 10배 가까이 뛰었다.

그렇게 병원과 환자의 이해관계가 맞아 수요공급 곡선은 새로운 평형점에 도달했다. 한국인들의 연간 진료 횟수가 OCED 평균 대비 약 2.5배에 달하는 수준에서. 그렇다면 그 비용은 누가 지불하고 있을까? 바로 건강보험료였다. 공공기금이 고양이를 비싸게 사주니 집을 싸게 파는 의사도 집을 싸게 사는 환자도 모두가 만족하며 미소 짓는 것이 대한민국 의료시스템의 본질이다. 

그런데 이렇게 어찌어찌 해서 어영부영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던 이 기형적 시스템이 갑자기 붕괴하기 시작했다. 문재인케어로 보험의 영역이 급속히 확장되자 흑자를 기록하던 건강보험이 갑자기 큰 폭의 적자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이조차도 정부가 물가 상승률을 훨씬 상회하는 속도로 건강보험률을 올린 결과다. 이렇게 막대한 지출에도 불과하고 시민들은 병원을 이용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언제부턴가 대학병원 응급실은 환자들을 돌려보내기 시작했고, 엄마들은 백화점의 샤넬 매장 대신 소아과를 향해 오픈런을 뛰기 시작했으며, 동네에선 미용이 아닌 진짜 피부과 진료를 하는 병원들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참고로 동기간 경제활동 인구가 계속 증가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고령화로 인한 영향은 이에 본격적으로 반영되지도 않았다) 그렇다, 대한민국의 의료시스템은 잘못되어 있다

정부와 대중들은 의사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주장하지만 나는 그 주장에 의문을 품는다. 물론 한국의 국민당 의사 수는 OECD 평균보다 낮으니 다소 늘어나야 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수치는 10년 전에 비하면 다른 나라들보다 빠르게 개선되고 있고, 특히 서울의 경우 의사들의 수는 OECD 평균보다도 훨씬 높은데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느끼는 의료 서비스의 질은 과거보다 악화되었으며 그 추세는 서울이라고 다르지 않다. 따라서 문제의 원인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의사의 수가 부족하기보다 그 배분이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 두 가지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2024년 의료수가 인상률
첫 번째로 의료 수가의 왜곡이 커졌다. 이전부터 한국의 의료 수가는 다른 나라들보다 크게 낮았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지속적으로 물가 상승률, 혹은 병원을 운용하는데 필수적인 월세나 최저임금이 오르는 속도에 비해 수가는 현격하게 천천히 인상되었고 이 불균형은 매해 지속적으로 누적되었다. 특히 2021년 이후 기록적인 물가 상승률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의료 수가를 낮게 유지해 이 왜곡은 더더욱 커졌다. 따라서 의료시장의 참가자들은 필수진료의 수익성이 개선되기는 커녕 점점 더 악화될 것이라 예측했을 것이고, 따라서 병원의 경영진은 응급실이나 외과와 같은 필수의료에 대한 투자를 줄였을 것이다. 이런 그들의 결정은 지극히 합리적이다. 고양이를 끼워파는 집의 가격이 적정 가격보다 낮을수록 고양이는 반드시 비싸져야 하고, 그를 비싸게 사는 기금은 더욱 빠르게 고갈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괴리가 커질수록 사람들은 고양이를 거래하지, 집을 거래하지 않는다. 

두 번째는 미용시장의 급격한 성장을 들 수 있다. 미용시장의 수요는 국내뿐 아니라 관광객을 통해 국외에서도 빠르게 유입되고 있어 기존 시장의 의료 인력을 빠르게 빨아들이고 있다. 게다가 미용시장의 경우 대부분의 진료가 시장가격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집-고양이 문제의 영향을 적게 받는다. 그 결과 지난 몇 년간 필수진료과에서 이탈하는 의사들의 숫자가 빠르게 늘어나 이제 약 1/4에 달하는 의사들이 미용 혹은 연관 업종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현재 의료시장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 두 가지 사안을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첫 번째 문제는 의료 수가를 시장가격에 맞게 재조정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고, 두 번째 문제의 경우 미용시장을 의사 외 다른 의료인들에게 일부 개방하면 된다. 의사들은 의사가 아닌 의료인이 미용기기를 다룰 때 발생할 수 있는 잠재적 부작용을 우려하지만, 지금처럼 필수의료과에서 의사가 급격히 유출될 때 발생하는 부작용이 더 크지 않은가. 따라서 다른 나라들처럼 미용시장을 일부 개방하는 것이 적은 사회적 비용으로 더 큰 부작용을 방지하는 방안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 의대 정원을 늘리는 것은 빨라야 10년 후에 영향을 미치지만 이 방안들은 즉각적으로 의료시장의 구멍을 보완할 것이다.


*               *               *


왜곡된 수가를 방치하면서 급격히 성장하는 미용 의사의 수요를 일반 의사의 공급으로 대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고양이/미용 의사와 필수의료 의사 간의 격차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추가로 공급되는 의사는 대부분 고양이/미용 의사로 빠진다. 이는 순수 필수의료만 담당하는 대학병원의 응급의학과 전공의 모집률이 매년 빠르게 하락하는 현실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현상은 고양이 의사가 더 이상 빼 먹을 것이 없거나, 혹은 미용시장의 공급이 포화되어 비급여 수가가 빠르게 하락하는 시점까지 지속될 것이다. 그런데 전자의 경우 건보재정의 파탄을 의미하고, 후자의 경우 미용시장의 수요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어 좀처럼 포화에 이르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필수의료 서비스의 수가와 자가 부담률을 높이고 낮은 난이도의 미용시술의 의사가 아닌 의료진에게 개방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현재의 시스템에서 단순히 의사만 늘린다고 의료 서비스의 소비자들이 만족하지 못할 것이라는 실증적 증거도 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서울의 인구 천 명당 의사의 수는 3.6명으로 OECD 평균을 상회하고 여기에 한의사까지 포함할 경우 4.1명으로 OCED 내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하게 된다. 여기에 인구밀도까지 고려하면 서울의 의료접근성은 가장 높은 수준임을 시사하는데, 이는 별다른 예약 없이도 대부분의 진료과에서 예약 없이 병원을 찾아갈 수 있다는 우리의 경험과도 일치한다.
그렇다면 서울시민들은 의사의 수가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할까? 그렇지 않다. 의대 증원을 지지하는 서울시민들의 비율은 84.1%로 전국 평균 84.3%과 별 차이가 없었고 오히려 인구 천 명당 의사 수가 가장 부족한 충청이나 세종, 강원이나 제주보다도 높았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의 천 명당 의사의 수는 OECD 평균 보다 빠르게 증가하는데 반해(+13% vs +8%) 같은 기간 의사의 수를 늘려야 한다는 여론은 낮아지기는커녕 되려 크게 높아졌다.(84% vs 69%) 이는 시민들이 느끼는 의료 시스템의 공백이 단순히 의사의 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질에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빠르게 늘린 의사들의 수가 지방의 의료공백을 메워 전국 모든 지자체의 의사 수가 서울과 비슷해진다고 해도 국민들은 여전히 의료 서비스의 불만을 가질 것이다. 지금 서울 시민들이 그렇듯이.


*               *               *


나는 의대 증원을 반대하지 않는다. 어쩌면 의료인의 수가 좀 더 늘어나는 것이 합리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로 당장 정원의 2/3을 늘려야 할 정도로 의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그 부족을 여실히 느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과들은 우리가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으며 아주 소수의 과를 제외하고는 예약조차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정말 응급한 상황에서 의료 서비스를 찾을 때가 되어서야 우리는 그 부족을 느낀다. 응급실에서, 대학병원에서, 그리고 수술실에서. 정상적인 시장 상황이라면 우리는 얼굴에 울쎄라 써마지를 받을 때보다 응급실이나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을 때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할 것이다. 하지만 국가가 설계한 이 의료시스템은 정확하게 반대로 작동한다. 이 경우를 우리 금융인들은 시장이 왜곡되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대개 가격이 엄격하게 통제된 시장에서 나타난다.

인위적인 가격통제로 인해 경제주체들이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은 대한민국에서 매우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다. 비슷한 사례로 한국전력을 들 수 있다. 지난 몇 년간 전력 생산단가는 급격히 상승했지만 공급가격이 통제되어 있어 한전은 매년 기록적인 수준의 적자를 내야 했다. 이 구조에서 양적완화를 한다고 해서 한전의 시총이 삼성전자만큼 커지지 않는다, 전력회사의 숫자를 늘린다고 적자가 해소되는 일 역시 발생하지 않는다. 이 회사의 주가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왜곡된 가격을 바로잡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매일 퇴행하는 의료시스템의 저변에는 왜곡된 의료수가가 있다. 이 왜곡된 가격이 존재하는 한,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의사들은 필수의료 대신 피부미용과 고양이를 파는 의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의사의 수를 늘린다고 해서 그 격차는 결코 줄어들 수 없다. 

서머셋 몸은 고갱을 모티프로 하여 달과 6펜스라는 소설을 썼다. 여기에서 달은 이상의 세계를 의미하고 6펜스는 세속의 현실 세계를 의미한다. 소설에서 한때 주식 브로커였던 찰스 스트릭랜드는 6펜스를 버리고 달을 찾아 타히티까지 찾아갔지만 거기에서 나병에 걸렸다. 죽어가는 삶의 마지막 기간 동안 그는 영혼을 쏟아부어서 최후의 걸작을 그리지만, 완성된 그림은 그의 죽음과 함께 잿더미로 사라지고 만다. 한국의 의료시스템은 필수 의료를 담당하는 의료진들에게 스트릭랜드 처럼 6펜스 따위는 잊어버리고 달을 쫓아 청진기를 들고 타히티만큼 외진 바이탈과 수술실로 향하라고 한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는 스트릭랜드 같은 괴짜나 슈바이처 같이 고결한 사람은 몇 없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6펜스를 찾아 고양이와 미용의 세계로 떠났다. 일부 사람들은 왜 의료계에는 청진기를 들고 달을 바라보는 스트릭랜드가 없냐며 의사들의 도덕성을 비난한다. 하지만 내 눈에 그들의 도덕성에는 별문제가 없다. 마치 아비트라지 기회를 포착한 트레이더들이 최대한의 수익을 내기 위한 합리적 선택을 하는 것처럼 그들도 마찬가지의 경제적 판단을 내렸을 뿐이다. 만약 그들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면 70만 원짜리 MRI를 남의 돈으로 공짜로 찍는 시스템을 박수 치고 찬성하는 일반 대중의 도덕성 역시 지탄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환자를 살리는 의료 행위에 낮은 수가를 책정한 이 시스템이야 말로 가장 사악한 악마라는 것이다. 



*집을 팔려는 사람들은 반드시 고양이를 구해야 한다, 집을 사려는 사람들은 늘 고양이를 팔고 싶어한다. 따라서 둘이 지불하는 고양이의 가격은 반드시 벌어지게 된다. 이 때 집을 팔려는 사람과 집을 사려는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고양이를 사고파는 계약을 맺는다면 그는 아무런 위험부담 없이 수익을 얻을 수 있다.

**엄밀히 말해 가격을 부담하는 것은 건강보험공단이고 가격을 정하는 것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지만 둘 다 정부의 일부인 보건복지부의 관할이다.




2024. 2. 5.

신과 함께, 그리고 정의와 함께

태초로부터 정의(Justice)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철학의 가장 중요한 물음 중 하나였다. 그리고 최초의 사상가들과 철학자들이 등장한 이후 몇천 년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의를 선과 악이라는 절대적이고 이분법적인 개념으로 구별해왔다. 선한 존재가 행하는 것이 곧 정의이며, 또 그 존재는 정의를 행하기 때문에 선하다는 것. 따라서 정의를 논하는 것은 어떤 것이 더 신의 뜻에 더 맞는지를 논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태생적으로 태고의 철학은 종교와 가까이 맞닿아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신과 그의 대리인들이 다스리던 세계가 붕괴한 이후 인간 중심의 세계관이 문명의 주류로 자리 잡자 사람들은 시대에 맞는 새로운 관념을 찾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선악의 개념을 버리고 자신들의 편리와 행복을 정의의 기준을 삼기 시작했다. 이렇게 퍼지기 시작한 공리주의는 구성원들의 행복의 합을 극대화하는 것이 정의의 기준이라는 원칙을 내세웠다. 이는 18세기 말 당시 퍼지기 시작하던 자본주의적 가치관과도 대체로 일치했기에 서구사회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20세기 초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사람들은 서구사회의 한계를 경험했고 동시에 공리주의가 온전한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문제점 역시 깨달았다. 가장 유명한 공리주의자, 제러미 벤담의 경우 사회 전체의 행복을 개선하기 위해 소수의 불량배나 부랑아들을 가둘 수용소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는데, 이런 사회시스템은 가장 극적으로 구현한 것이 바로 나치였다. 국가권력을 장악한 그들은 한 명의 장애인을 보조하는데 사회적 비용이 과도하게 지출되기 때문에 그를 제거하는 것이 다수의 행복을 증진시킨다고 생각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그렇게 독일이 지배하던 유럽 전역의 소각로에서는 수도 없이 많은 장애인들과 정신질환자들, 동성애자들이 불타며 비누와 카펫, 그리고 한 줌의 재로 사라지고 말았다.

번역: 한 명의 유전병 환자를 위해 국가는 매일 5,50마르크의 비용을 지불한다
/ 그 5,50마르크는 한 건강한 가족이 하루를 살 수 있는 돈

전후 정의에 대한 논쟁은 이런 시대적 배경으로부터 출발했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도 했던 존 롤스는 해묵고 비틀린 공리주의 파편 위에 몇 가지 원칙을 재정비하여 새로운 정의론을 완성했다. 그는 정의의 개념에 무지의 베일이라는 일종의 사고실험을 도입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천국에서 한데 모여 회의를 연다고 가정하자, 그들은 자신이 부자로 태어날지 혹은 가난한 구두공의 아들로, 아니면 자폐인으로 태어날지 알 지 못한다. 어떤 사회적 지위나 배경을 가질지 모르는 상태에서 사회구성원들이 동의할 수 있는 시스템이 정의롭다는 것이다. 그의 정의론을 대입한다면 공리주의적 관점으로 장애인을 학살하던 나치의 사회시스템은 정의롭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태어나기 전 무지의 베일 상태에 있었다면 장애인으로 태어나 학살당할 수도 있는 그 시스템에 합의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는 이론이 아닌, 우리가 본능적으로 느끼는 잣대이기도 하다. 호모 사피엔스가 신이라는 존재를 창조하기도 전에 영장류들은 흑과 백, 선과 악, 아와 비아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철학자들이 공리주의라는 개념을 도입하기 전부터 사회적 동물인 우리는 개인이 아닌 공동체의 이해득실을 따져가며 규범을 마련했다. 롤스가 태어나기 전에도 인간은 공감능력을 발휘해 수천 년, 혹은 수만 년 동안 장애를 가진 개체들을 돌보고 먹여 살렸다. 철학자들이 발견하고 정의 내리기 한참 전부터 이 잣대들은 우리의 본능에 내재되어 있던 셈이다. 


*               *               *


최근 장애인 자식을 가진 한 유명인이 촉발시킨 논쟁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본능적으로 느끼는 정의의 기준과 그의 해명이 상충하기 때문이다. 당사자들과 그 추종자들은 해당 사건을 철저하게 흑백의 관점으로 끌어내리려 한다. 상대가 유죄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나쁜 사람이며, 따라서 내가 행하는 것은 정의롭다. 선 혹은 악 만이 존재할 수 있는 이진법의 세계에서 나의 정당함을 입증하는 것은 곧 상대의 불의를 증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유명인이 선고가 나온 바로 그날 대중에서 자신의 입장을 공개한 것은 해당 교사의 유죄판결이 곧 자신의 무죄판결과 동일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우리의 세상은 0과 1로만 이루어진 곳이 아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그 둘에게만 국한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 유명인은 언어폭력을 저지른 교사를 교육계에서 퇴출시켰기에 자신의 행동이 정당했다고 믿겠지만 동시에 그는 여러 장애우들과 그 부모들에게서 헌신적인 태도로 일하던 유능한 교사를 앗아갔다. 그는 장애를 가진 자신의 아들을 일반 학급에 편입하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는데, 그 결과 다수의 아이들이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덩치도 더 큰 자폐아에게 폭행을 당했다. 그리고 본인의 해명에 따르면 이런 일은 새 학교에서도 반복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의 공리주의적 본능은 그의 행동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무지의 베일 뒤에서도 이 불편한 기분은 가시지 않는다. 설령 우리의 아이가 자폐아로 태어난다고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멀쩡한 아이들이 그에게 지속적으로 얻어맞거나 노출된 성기를 보고 트라우마를 가지는 시스템에 찬성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옳지 못하다. 내가 설령 장애인으로 태어났어도 그런 제도는 옳지 못한 것이다. 그와 그의 아내는 자신의 아이에게 장애가 있기 때문에 학교와 사회 전체에게 무제한적인 이해와 인내를 요구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무제한의 인내는 부모조차도 보여줄 수 없다. 입장을 바꾸어 아들이 자기보다 더 나이가 많고, 더 힘이 세고, 더 자폐가 심한 학우들과 같은 반이 되어 폭행을 당할 때에도 그들은 자녀의 고통을 인내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런 요구는 매우 이기적이고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그의 작품들을 좋아한다. 그가 창작한 등장인물들은 매우 단순했다. 나쁜 놈은 나쁘고 착한 놈은 무슨 짓을 벌이더라도 결국 착하게 끝난다. 그래서 그럴까. 그는 이 복잡한 사람들이 다양한 사안으로 얽힌 이 문제를 자꾸 선악이라는 이진법적 시각으로 접근한다. 상대는 유죄판결을 받은 죄인이고 그를 상대하는 나는 엄청난 고통을 받았다고. 물론 나는 발달장애를 겪는 아들을 가진 그의 아픔과 상처에 공감한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보다 덩치가 큰 자폐아에게 맞아야 했던 아이들과, 그 성기를 보고 놀랐을 여자아이들과, 소송에 시달리며 폭력 교사라는 자괴감에 시달렸을 선생과, 따르던 선생님을 잃고 덩그러니 놓인 다른 장애우들과 또 그들을 눈물로 보살피며 탄원서를 쓰던 다른 부모들에게도 공감한다. 그렇기에 나는 안타까운 그의 결정과 행동을 비판할 수밖에 없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신이나 다름없는 것처럼 아이들 역시 부모에게는 신일 것이다. 장애가 있는 아이라면 더더욱. 세상 모두가 야훼에게서 등을 돌려도 아브라함이 그래서는 안 되는 것처럼 부모와 아이의 관계도 그럴 것이다. 그야말로 신과 함께.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신은 정의롭지 않다. 더욱이 그 아이가 상처입히고 괴롭히는 이들도 누군가에게 소중한 신 아니었던가. 자식을 신처럼 여기며 편들어 주겠다는 아비의 부정을 누가 뭐라 하겠나, 다만 정의까지도 알뜰살뜰 챙기겠다는 그의 무모한 이기심과 과도한 욕심에 혀를 끌끌 찰 뿐이지. 

2024. 1. 20.

재벌로 태어나서, 그리고 개고기로 태어나서.

재벌로 태어나서

다음은 실제로 대한민국의 상장사들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1 A 회사는 오너의 자녀들에게 승계를 진행하던 기간에 아무런 신제품이나 사업전략을 내놓지 않았다. 같은 기간 해당 산업은 커다란 지각변동을 겪고 있었는데, 그 중요한 시점에 A사는 5년 여가 넘는 시간 동안 아무런 전략을 발표하지 않았고, 당연히 기업의 실적과 주가는 곤두박질쳤다. 해당 회사가 정상적 영업을 재개한 것은 공교롭게도 승계가 마무리된 다음이었고 이후 A사는 공격적인 마케팅과 신제품 출시를 통해 이전의 실적과 주가를 회복했다.

#2 B 회사의 여러 사업 부문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B' 사업부문 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 회사는 해당 부문의 영업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고 따라서 회사 전체 실적도 크게 감소했다. 심지어 업계에는 B사가 이 분야의 사업을 접을 계획이라는 루머가 돌았지만 B사는 그 루머를 적극적으로 반박하지 않았을뿐더러 세간의 의혹을 증폭시킬 만큼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이후 B사는 2세의 승계에서 핵심적인 연결고리가 되었고 승계 이후 정상적인 영업을 재개하였다.

#3 C 회사는 불가피한 사건으로 충당금을 쌓아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는데, 이에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충당금을 발표하여 시장에 충격을 안겼다. 해당 분기에 실적이 크게 개선되었을 거라는 시장의 기대는 여지없이 배신당했고 보수적인 관점을 적용할 때 향후 충당금을 추가적으로 쌓아야 할 수도 있다는 사측의 발표로 인해 주가는 크게 떨어졌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실제 발행한 비용은 그보다 훨씬 작았고 그 사이 승계에 유리한 결정들이 일어났으며 이후 주가는 다시 손실을 회복했다.  

위의 회사들이 어떤 회사들인지 굳이 알아내려고 애를 쓸 필요는 없다. 각각의 사례는 한 회사들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적게는 두셋, 많게는 네다섯 회사들에서 각각 벌어졌던 유사한 사건을 하나로 합친 것이니까. 되려 이런 사례들이 손꼽힐 만큼 드물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아직도 한국 시장을 잘 모르는 것이다. 가업승계에 직면한 한국 회사에 투자할 때에는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는 것은 기초 상식에 가깝다. 기업들의 지배 구조에 가장 정통하고 그 내막을 속속들이 파악하여 수익을 내는 사모펀드나 행동주의 펀드의 리더들이 한  목소리로 상속세 개편을 지적하는 데에는 이와 같은 배경이 있다. 

나는 코리안 디스카운트의 원인이 바로 잘못된 재벌 시스템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 취지의 글을 작성한 지 거의 10년이 지났지만(링크) 시장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재벌들은 소수의 지분 만으로 회사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툭하면 배임과 횡령 혐의가 헤드라인을 장식한다. 그렇다, 아직도 우리는 재벌들이 죽어야 주가가 오르는 나라에 살고 있다. 이 디스카운트의 원인이 재벌들에게 있다는 사실은 명확하지만, 그 해결책을 논의하는 것은 조금 더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상속세율은 OECD 국가들 중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하는데 여러 유럽 국가들이 직계존속에게 가업을 상속할 경우 상당 폭의 세제감면 혜택을 주거나, 미국 등에 트러스트나 재단을 통해 절감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있는데 비해 우리나라에는 그런 제도가 사실상 전무하다. 그렇기 때문에 늘 승계 시즌만 되면 재벌들은 무리해서 배임과 비리를 저지르거나 상속세를 줄이기 위해 주가를 뺄 강한 유인동기가 생긴다. 그 과정 속에서 기업의 지배 구조는 더욱 왜곡되고 재벌들의 이해관계와 회사의 이해는 더욱 벌어지게 되기에, 다음 세대에서도 오너들은 더 강한 비위를 저지를 인센티브를 가진다.

이 시스템을 고치기 위해서는 당근과 채찍을 모두 갖추어야 한다. 위의 상속세 개편을 당근이라면, 채찍은 이사회가 소액주주들을 포함한 주주들의 이익를 보호하도록 상법을 개정하고 처벌을 강화하는 것이다. 채찍만 만들고 당근이 없다면 재벌들은 편법 상속의 이익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강한 형량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비위를 저지를 것이며*, 채찍이 없다면 재벌들은 기존의 편법도 누리고 당근도 사각사각 챙겨 먹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많은 투자자들은 이념으로 나뉘어 둘 중 한 쪽만 지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상속세가 이론적으로 주가에 영향을 줄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수많은 실례들을 애써 무시하고 있고, 또 상법 개정보다 상속세 개편이 중요하다고 믿는 쪽은 상대를 좌파 빨갱이로 몰아가며 논의를 후퇴시키고 있다. 나는 빨갱이도 아니며, 상속받을 회사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다만 몇몇 한국 주식을 보유한 소액주주의 한 사람으로서 상속세와 상법 개정 둘 다 추진하는 것이 내 이익에 부합한다고 생각할 뿐. 


*               *               *


개고기로 태어나서

한승태 작가는 자신의 체험을 담은 노동 에세이, "고기로 태어나서"에서 닭, 돼지, 개와 같은 가축들의 사육, 도축, 유통 과정을 담담하면서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그중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수평아리들을 가득 담은 바구니들은 10단 높이로 쌓았다. 마구잡이로 쌓았기 /때문에 바구니의 층과 층 사이에 끼어 눈이나 내장이 튀어나온 채 죽어있는 병아리들이 즐비했다. 병아리의 눈알은 푸른빛이 도는 검은색에 크기가 손톱만 한데 꼭 눈구멍에 블루베리가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오래 놔두면 깔린 병아리들은 압착기로 모양을 낸 것처럼 커다란 덩어리로 뭉쳐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전히 살아 있는 병아리가 있어서 살덩어리 속 어딘가에서 약하게 삐약대는 소리가 울렸다. 그런 바구니를 뒤집으면 거대한 살덩어리가 마치 스팸 한 캔을 통째로 빼낸 것 같은 모양으로 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구역질 나는 광경이었다. 바닥에는 병아리 한두 마리가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런 녀석들은 껌처럼 납작하게 찌부러져서 피부를 통해 몸속 장기의 윤곽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였다.

또 작가는 돈육 농장에서 일했던 경험을 아래와 같이 묘사한다.

비명에도 차이가 있었다. 사람이 잡아들 땐 비명이라기보다는 여유롭게 도움을 청하는 느낌으로 운다. 꼬리를 자를 때에는 이보다 강렬하지만 잠깐 운다. 자돈들이 가청 주파수의 한계치에 다다를 만큼 소리를 지를 때는 거세할 때다. 거세를 하는 이유는 카스트라토 합창단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웅취라고 부르는 수컷 특유의 비린내를 줄이고 육질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다. 꼬리나 이빨 자르는 돼지를 위해서 필요할 수 있다고 항변해 볼 여지가 조금은 있지만 거세는 오직 고기의 맛을 좋게 하려고 실시한다....수컷은 뒷다리를 옆구리에 붙도록 바싹 당겨 잡으면 항문 아래가 불록 튀어나온다. 작업을 쉽게 하려면 고환이 선명하게 튀어나오도록 손에 힘을 줘야 하는데 이때 힘 조절을 못 하면 거세에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너무 꽉 누르면 안 돼. 그러면 내장 튀어나와. 내장 튀어나오면 끝이야." 팀장은 튀어나온 부위를 11자로 자른 다음 과환을 잡아 뜯어냈다. 붉은색과 보라색이 섞인 이 작은 살덩이는 피자 치즈처럼 길게 늘어났는데 돼지의 비명 소리가 최고조에 이를 때는 바로 이 순간이었다. 자돈은 호두만 한 입을 쩍쩍 벌리고 돈사 밖에서도 들을 수 있을 만큼 소리를 질러댔다. 거세를 마친 자돈은 소독약을 바른 다음 해부학적으로 한결 더 가까워진 자매들 곁으로 돌려보냈다.

다소 그로테스크한 묘사로 가득 찬 그의 에세이는 고기로 태어나 도축되고 가공되어 우리 밥상 위에 오르는 과정이 얼마나 잔인하고 끔찍한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책을 덮은 뒤 아무리 배가 고파도 곧장 황금올리브나 족발(대)를 주문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게 다른 사람들이 BBQ에 전화를 거는 것을 막을 권리가 있을까. 얼마 전 국회가 통과시킨 개고기 특별법이 위험한 이유는 그 논지를 사실상 무한대로 확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경험에 따르면 개 농장과 닭/돼지 농장의 운영방식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돼지는 개만큼이나 지능이 높다, 닭을 도축하는 것은 개를 도축하는 것만큼이나 정서적 충격을 안긴다. 그렇다면 채식주의자들이 모든 고기 특별법을 발의한다면 어떤 근거로 반대할 것인가.

동물주의자들은 개고기를 금지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보편타당한 정의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많은 사례들을 보면 주로 유목 민족의 전통을 가진 사회가 개고기를 터부시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몇몇 문화 인류학자들은 사냥과 목축이 생활의 기반이었던 유목민들에게 개는 필수 자산이었기에 그런 터부가 생긴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흥미롭게도 중국에서도 개고기를 먹지 않기 시작한 시기는 약 6세기로 북방 유목민들이 중원으로 남하한 이후이고 만주족이나 몽골인들 역시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반면 인구밀도가 높고 주기적으로 기근에 시달렸던 농경민족의 경우 개고기를 먹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유럽 역시 인도 아대륙이나 중국, 아메리카 대륙 등에 비해 목축의 비중이 높았기에 자연스럽게 개고기를 꺼리는 문화가 자리 잡은 것 아닌지 추측해 본다.

반대의 경우로 우유가 있다. 유목 민족들은 소나 양의 젖을 먹는 문화에 매우 익숙하지만 농경 중심의 사회에서는 짐승의 젖을 먹는 것을 매우 역겨운 일로 치부했다. 흥미롭게도 이런 경향은 유전적으로도 발현되는데 전통사회에서 개고기를 먹었던 나라들의 경우 대체로 유당불내증을 가진 성인들의 비율이 높은 경우가 많다. 일례로 한국인의 경우 약 75%의 성인은 우유를 마시면 탈이 나곤 한다. 그렇다면 실리적으로, 또 상식적으로도 인간이 짐승의 젖을 빨아먹는 일부터 금지해야 하는 것 아닐까?

결국 개고기 논쟁은 옳고 그름이나 논리의 문제가 아닌 유권자들의 호오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몇몇 문화권은 개고기를 혐오하는 사람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금지한 것이고 그 대상은 문화권에 따라 돼지고기나 소고기, 혹은 생선이나 말이 되기도 한다. 보편적 공감대 아래 특정 생활양식을 금지하는 것은 어디서나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현재 한국 사회에서 개고기 금지법이 사회적 합의에 이르렀는가. 아니다, 이 특별법에 찬성하는 여론은 불과 57%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나는 이를 악법이라고 생각한다. 

상당 기간 국회에서 공전하던 이 법안은 김건희 여사가 해당 법안을 지지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여당이 전향적 태도를 보이며 통과되었다고 한다. 근래 영부인 중에서 가장 젊고 가장 활동적인 커리어를 가진 영부인이 등장하자 사람들은 큰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인기는 곧 추락했다. 물론 본인의 여러 실책도 한몫했겠지만 정상적인 사회라면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악의적 루머가 큰 역할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만약 그녀에게 비리나 문제가 있다면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이전 유력자들을 탈탈 털어 복수하는 한국 정치의 특성 상 그 진실은 몇 년 뒤에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난 그것을 파헤치는 것이 우리 사회가 당면한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여당과 협의해 상법을 개정하는 것보다 개고기 특별법을 통과시킨 일이 더 시급했던가. 또 고작 국민의 57%의 찬성 만으로 온 국민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과연 정당할까. 만약 그것이 옳다면 유권자들에게 개고기보다 부정평가가 더 높은 현 정부는 무엇이 되는가. 또 과반의 지지 만으로 오천만 유권자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옳다면, 부정평가가 60%나 달하는 영부인 한 사람의 자유를 철저히 제한하자고 주장한다면 그때 그들은 무슨 명목으로 반대할 것인가.  




*특히 회사의 경영에 강력하게 개입할 수 있는 오너의 입장에서는 현행법을 우회하여 회사의 값어치를 떨어뜨릴 무궁무진한 방법들이 있다. 애초에 신의를 다한 무능과, 영악하지만 사악한 행동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그러나 대통령은 상법 개정보다 상속세 개정을 설명하는데 훨씬 많은 시간을 할애했기에 논쟁을 촉발했다. 

2023. 10. 2.

두 번의 세계대전, 그리고 오늘날 우리

양차 세계대전은 정확하게 반대의 이유로 발발했다. 1차 세계대전 이전 유럽은 외교의 황금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100여 년간 예외적으로 평화로운 시기를 보냈다. 물론 크리미아 전쟁이나 보불전쟁 같은 군사적 사건들이 일어났지만 이전의 유럽의 전쟁들에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국지적인, 작은 전쟁에 불과했다. 오랜 평화를 누린 유권자들은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완전히 잊었고 그래서 자국의 지도자들이 전쟁을 선포하는 순간 그들은 마치 축구 경기라도 시작되는 것처럼 웃는 얼굴로 열광하며 황제와 왕에게 키스를 보냈다. 축축한 참호, 피와 화약 냄새가 가득 배긴 흙 내음, 그리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포격의 굉음으로 대변되는 이 지옥의 서막은 바로 거기서 갈려나갈 사람들의 환호로 시작되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이었다. 

빌헬름 2세가 개전 선언을 하자 모자를 벗어 환호하는 독일인들

반대로 2차 세계대전은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나 깊었기 때문에 일어났다. 1938년 독일은 체코 내에서 독일인 거주민이 다수를 차지하는 주데텐란트를 병합하겠다며 대규모의 군대를 체코의 접경에 배치했다. 또다시 독일과의 전면전을 벌일까 봐 전전긍긍 했던 프랑스와 영국은 무솔리니에게 부탁해 히틀러가 협상장에 나오도록 설득했고, 체코 영토의 30%와 500만의 인구를 독일에 넘기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뮌헨 협정을 체결했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독일인들이 히틀러와 나치의 공세적 대외노선이 옳다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는 계기를 제공했고 이로써 히틀러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강화되어 전쟁의 불씨를 키우는 꼴이 되었다. 몇몇 사학자들은 만약 연합군이 히틀러가 집권 초기에 벌였던 여러 도발에 과감하게 맞대응했더라면 그와 나치는 실각했거나 군부의 반발로 2차 세계대전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 시대의 평화를 가져왔다며 히틀러와의 합의문을 꺼내든 체임벌린,
그리고 이로부터 불과 11달 뒤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한다.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이 그것 하나뿐일까. 1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을 결정한 각 주요국들의 왕족들은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당시 영국 국왕은 하노버 왕가의 핏줄이었던 조지 5세였는데 그는 영국에 적대적인 정책을 고수하다 전쟁을 선포한 빌헬름 2세의 사촌이었다. 또 반대편 전선에서 독일에 선전포고를 선언한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는 그의 7촌 사촌이었으니 1차 세계대전은 다름 아닌 바로 혈연 간의 전쟁이었다.* 반면 2차 세계대전은 핏줄이 다르다는 이유로 불필요한 전쟁을 선포하고 학살을 벌였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스탈린의 폭압적인 정치에 반발하여 독일군을 해방군으로 반겼지만 아리아인들은 슬라브 계열의 민족들을 진정한 동맹으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우크라이나에서 나치가 벌인 만행들은 우크라이나 민족이 차라리 스탈린이 낫다며 돌아서게 만들었고 동유럽 각지에서 파르티잔들의 테러가 이어졌으며 그 결과 안 그래도 어려웠던 동부전선의 보급과 병력 수급에 차질을 주었다. 게다가 나치는 당장 전쟁에 투입할 물자와 병력이 모자란 순간에도 유대인을 절멸시키는데 철도와 인력을 우선 배정하였으니, 적어도 동부전선에서는 핏줄은 전장의 헤게모니를 온전히 지배했다. 

두 세계대전의 차이는 그뿐이 아니다. 전쟁 발발의 이유가 비교적 명확한 2차에 비해 1차 세계대전의 발발 원인은 불분명하다. 사라예보 사건이 그 단초를 제공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도에서 어디에 있는지 알지도 못할 보스니아의 한 도시에서 세르비아인 암살자가 저무는 오스트리아의 황태자를 저격한 일이 어떻게 유럽의 반대쪽에서 독일이 영국과 프랑스와 싸우게 만들었는지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1차 세계대전의 발발원인을 연구한 케임브리지의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클라크는 이를 설명하는데 697페이지나 할애하면서도 여전히 아리송했던지 이 책의 제목을 몽유병자들(sleep walkers)이라고 지었다. 연구자인 자신이 보기에도 마치 전 유럽이 몽유병에 걸린 것처럼 전쟁으로 걸어들어갔다고.     

이처럼 인류가 저지른 가장 끔찍한 두 전쟁은 전혀 다른 이유로, 전혀 다른 배경으로, 또 전혀 다른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역사적으로 인류는 너무 평화로워서, 혹은 너무 불안정해서 전쟁을 벌였고, 핏줄이 다르기 때문에, 혹은 같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벌였다. 지도자의 자신감이 너무 넘쳐서, 때로는 두려움이 지나쳐 전쟁을 벌이기도 했고 어떤 경우에는 통합을 위해서, 또 다른 경우에는 분열을 위해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래도 싸우고 저래도 죽이는 것이 인류인가. 마치 자신을 태우고 강을 건너는 개구리를 쏘아 자기 자신마저도 죽고 마는 전갈처럼 전쟁은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튀어나오는 인류 집단의 본능적 행위와도 같다.   

그리고 오늘을 돌아보자. 당신과 나는 전쟁을 겪어본 적이 없으며 전쟁을 겪었던 우리의 할아버지들은 시나브로 사라지고 없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민족주의자들과 파시스트들 그리고 맹목적인 광신도들이 채우고 있다. 젊은 세대부터 중장년까지 역사에 무지하며 이념에 가득 차, 상대가 역사에 무지하고 이념만 따진다며 비난하고 있다. 갈등은 늘어나고 있으며 사람들의 이해의 폭은 점점 줄어가며 계급 간의 대립은 너무나 첨예하다. 비단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몇몇 낙관주의자들은 세계가 경제적으로 긴밀히 연결 되어 있기 때문에 전쟁을 벌일 유인동기가 약하다고 주장하지만, 20세기 초 유럽인들 역시 정확하게 같은 주장을 펴며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어떠했는가. 그리고 다시금 묻는다. 당신과 내가 죽기 전에 우리는 전쟁을 피할 수 있을까.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확신한다. 다만 그 전쟁의 포성이 우리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을지 자신하지 못할 뿐.



*대조를 위해 생략했지만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지원하고 러시아가 범슬라브주의를 이끈 원동력은 민족주의였다. 

2023. 9. 29.

서울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왜 우리는 서울을 발전시켜야 하는가

다른 세계 주요 대도시와 비교하면 서울의 이상한 특징 하나가 두드러진다. 바로 선진 도시 중에서 인구밀도가 매우 높은데도 불구하고 도시의 평균 용적률이 매우 낮다는 것. 이런 공간구조를 가진 다른 도시들은 대개 후진국인 동남아시아나 인도, 혹은 파키스탄에 있으니 서울과는 산업구조나 그 배경이 완전히 다르다. 가장 잘 사는 도시이면서도 그 구조는 못 사는 도시들과 비슷하다니, 조금 극단적인 비유를 들자면 이는 마치 삼성이나 테슬라의 본사가 구로공단 공구상가에 입점한 것이나 포르쉐를 모는 의사가 후암동 반지하에 사는 것처럼 어색하고 낯설다. 분명 서울은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

이런 기형적 구조가 유지되는 이유는 사회가 도시계획을 어떻게 정할지 합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장이 바뀔 때마다, 또 정부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마스터플랜이 등장하고 이전의 계획은 곧장 폐기된다. 정책의 방향성이 없고 일관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서울에는 아직도 군사정권 시절에 지은 성냥갑 아파트들이 아직도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많은 지역의 개발계획이 20년 가까이 공전하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는 어떤 도시를 만들어갈지 합의하지 못했다. 우려스러운 것은 이 논의의 대부분을 도시계획에 대한 이해가 일천한 비전문가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중 많은 이들이 서울이라는 도시의 발전을 억제하고 더 나아가 해체하고 싶어 한다. 박원순 시장으로 대표되는 진보 진영은 1970년대의 후진적 공동체 사회를 지향하며 서울의 개발을 억눌러왔고, 지방에 적을 가진 정치인들과 유권자들은 쇠락하는 자기 지역구의 인위적 부흥을 위해 강제로 서울의 기능을 떼어 지방으로 보내고 있다. 일부 젊은 세대는 서울이 너무 과밀화되어 집값이 비싸기 때문에 서울을 해체해야 한다고 믿으며 어떤 사람들은 서울만 발전하는 것은 불공평하기 때문에 서울을 억제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 주장들은 한데 모여 국토균형 발전이라는 슬로건으로 예쁘게 포장되었고 이제는 그 자체가 정의가 되었다. 어떤 정책을 당위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성숙한 논의는 사라지고 순환 논리의 오류만 남는다. 서울의 확장을 막아야 한다, 왜? 서울은 확장되면 안되니까. 하지만 역사적 사례들을 종합해서 보면 서울의 기능을 축소하고 해체하는 것은 천문학적인 비용을 초래하면서도 경제성장을 막고 우리들의 생활수준을 퇴보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

에드워드 글레이저는 자신의 저서, 도시의 승리에서 도시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예찬했다. 실제로 인류 문명의 거의 모든 발견과 진보, 그리고 문화적 성취는 도시에서 이루어졌지 않은가. 인류 문명의 태동은 메소포타미아의 도시들로부터 출발하였고 서구문명의 근간 역시 에게해 인근의 도시국가로부터 출발했다. 중세와 근대에도 거의 대부분의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대도시에 거주하며 서로의 견해와 아이디어를 교류하면서 혁신과 발전을 촉진했고 이런 추세는 현대까지 이어진다. 세계의 헤게모니를 주도하는 미국의 테크 산업과 금융은 실리콘 밸리와 뉴욕으로 대표되는데 이 두 도시는 미국 전역에서도 인구밀도가 가장 높다.* 물론 도시가 인류 발전을 주도하게 된 요인에는 이런 단순히 인구수뿐 아니라 교육시스템, 거주 인프라, 그리고 자유로운 문화적 배경 등이 함께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 유무형의 인프라가 도시와 무관할까. 신과 왕의 권위에 짓눌리던 중세 유럽인들이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준다고.

이 관점에서 서울과 대한민국의 미래를 살펴보자. 한국의 1인당 GDP는 이미 3만 5천 달러에 달해 중진국의 함정을 벗어났고  한국의 여러 산업과 기업들은 이제 세계무대에서 다국적 회사들과 경쟁하고 있다. 우리의 경제구조는 노동집약적 저부가가치 산업에서 벗어나 반도체, 배터리, 전기차, 모바일 등 고부가가치 제조업에서부터 문화 예술을 포함한 서비스 산업으로 확장되었다. 이들 산업에 가장 중요한 자원은 자본도 천연광물도 에너지도 아닌 바로 사람이다. 우리의 미래는 이들을 모으고 연결하는 것에 있는 것이지, 분산하고 흩뿌리는 것에 있지 않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는 오로지 서울만이 그 인프라를 모두 갖추고 있다. 

반대로 도시를 쪼개 분산하는 것은 막대한 비용의 증가와 인프라의 쇠퇴를 가져온다. 도로, 철도, 문화시설, 그리고 민간 상업시설들의 비용 대비 편익은 인구가 감소할 때 지수적으로 감소한다. 인구 천만의 도시에 지하철 노선을 10개 설치하는 것과 인구 백만의 도시 10개에 지하철 노선을 각각 하나씩 설치하는 경우를 비교해 보라. 인구 천만의 도시에는 대형 공연과 전시가 수백 회씩 열리지만 인구가 반 토막으로 줄면 문화행사는 반이 아니라 1/10로 줄어든다. 더욱이 인구가 줄어들 것이 매우 확실한 상황에서 멀쩡히 기능하는 대도시의 기능을 억제하겠다고 아무런 인프라가 없는 산간 오지에 막대한 예산을 퍼붓는 것은 가장 확실하게 국가예산을 낭비하면서도 사회의 비효율을 극대화하는 길이다.    

이미 우리는 지방분산의 실패를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행정부를 비롯하여 국민연금, 한국전력, 도로공사, 한국거래소와 같은 공사들을 각 지방으로 이전한 결과 무엇이 나아졌는가. 십수 년간 수십 조원의 예산을 투입했지만 행정은 훨씬 더 비효율적으로 변했고 재직자들의 만족도 역시 크게 떨어졌다. 세종시와 지방의 공사 본부의 고위직들은 하나같이 대면회의를 금요일 오후에 서울에서 잡으려고 실무자들을 닦달질하고 있고 그렇게 시달리던 직원들은 매주 금요일 KTX 플랫폼에서 서울을 오가느라 무의미하게 몇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이렇게 막대한 비용과 비효율을 감내하여 얻은 것이라곤 시골 토호들의 늘어난 재산과 쓸데없이 늘어난 교통량뿐이다. 

몇몇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서울의 과밀을 해소해야 한다고 믿는 이유는 아마도 서울의 주택 공급의 부족이 출산율의 감소를 가져온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서울에 집이 모자라면 집을 더 지으면 될 일이다. 서울의 평균 용적률은 고작 1.5-1.7배로 최대 5-10배에 이르는 다른 경쟁 도시들에 비해 형편없이 낮다. 구체적으로 보면 싱가포르의 경우 도심의 용적률을 25베, 맨하탄과 홍콩은 15배, 런던 도심은 5.5배까지 허용한 데에 비해 서울은 주거용 건축물에  그 반의 반도 안되는 1.5-2배라는 매우 낮은 용적률을 적용하고 있다.(법적으로 3배까지 허용되지만 그렇게 허가가 난 주거건물은 소수에 불과하다) 이렇게 대지를 세분화하여 엄격하게 용도를 지정하는 제도는 일제시대였던 1930년에 처음 도입되어 현재와 같은 개념은 1970년대에 완성되었다고 알려졌다. 이후 약간의 변경은 있었지만 큰 틀은 그대로 이어져왔다고 할 수 있다. 즉 서울의 도시계획은 지난 세기의 낙후된 건축기술에 기반하여 짜였는데, 우리는 이를 21세기에도 그대로 적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규제들은 서울의 주거환경을 크게 악화시켰다. 서울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인구당 주택 수는 꼴찌이고 노후 주택의 수나, (일반 대중들이 선호하지 않는) 연립 및 다세대 주택의 비율도, 그리고 노후 아파트의 비율도 단연코 1등이다. 현재의 규제와 정책은 마치 사람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도시를 가장 살고 싶지 않게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도시의 주거환경이 선진국의 대도시들 보다 인도나 베트남의 도시들을 닮은 이유는 우리가 인도나 베트남 만큼 못 뒤떨어졌던 시절에 만든 규제와 제도를 금과옥조처럼 떠받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인도나 베트남만큼 후진적인 인식을 지닌 유권자들이 있다. 그들은 기껏 돈을 써가며 홍콩이나 싱가포르, 런던과 뉴욕의 마천루들을 돌아보며 멋지다며 인스타에 올릴 인증샷을 박고 나서 다시 서울로 돌아와 마닐라의 다세대 주택만도 못한 노후주택들의 개발을 규제하는 정치인을 찍는다. 우리나라가 처한 진짜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우리나라가 21세기에도 노동집약적 저부가가치 제조업에 집중하겠다면 서울이라는 고밀화 된 도시는 꼭 필요한 것은 아닐지 모른다. 차라리 인구를 공단 주변으로 고르게 분배하고 노동자들의 수를 늘리는데 나라의 모든 역량을 투자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박통 시대의 구닥다리 산업 모델로 돌아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런 방식으로 현재의 경제규모를 유지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저출산은 분명 한국 경제에 장애가 되겠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발전을 가로막는 후진적이고 미개한 정책,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이다. 세계에는 인구증가율이 극히 낮거나 마이너스로 접어들었는데도 여전히 경제성장을 구가하는 나라와 도시들이 여럿 있지만, 자국의 도시를 해체하고 인프라를 망가뜨리면서 성장하는 나라는 단 하나도 없다. 자원도 없고 자본도 없던 나라였던 한국은 사실상 인적자원 하나로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어냈다. 1970년대 한국의 경제규모는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콩고와 비슷했지만 현재는 이탈리아 캐나다와 비슷하고 한국의 기업들은 대만 일본 독일 등과 경쟁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미래를 택할 것인가. 인구가 줄어들더라도 도시를 중심으로 발전을 지속하는 네덜린드나 벨기에 혹은 여타 도시국가들을 지향할 것인가, 아니면 인구밀도만 높고 도시의 인프라는 형편없는 후진국형 모델을 지향할 것인가.  

한때 대학가에는 대기업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주장하던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그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이 나라에 반도체나 배터리, 전기차를 만드는 회사가 없었더라면 노동자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그런데 아직까지도 서울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믿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서울의 기능과 조직들을 해체하고 분해해서 전국에 흩뿌려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자신들이 지방으로 밀려날 차례가 되면 곧장 머리에 띠를 두르고 길거리로 뛰쳐나오곤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의 미래는 단순한 노동자들의 수 보다 우수한 인적 자원들을 어떻게 모으고 연결시킬지에 달렸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도시가, 특히 서울이 반드시 필요하다. 대한민국이 더 발전하기 위해선 서울의 발전을 억누를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집중해야 한다. 인구가 줄어들 것이라고 예측한다면 더더욱. 우리의 미래를 위해 해체해야 할 것은 서울이 아니라, 바로 저들의 후진적인 인식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통신기술을 발달로 사람들이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치 한 곳에 모여있는 것처럼 교류할 수 있기에 굳이 도시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다른 인간들과 직접적으로 마주치고 교류하기를 원한다. 줌이 발달했으니 친구들과 만나 술 한잔 기울이는 대신 각자 앱을 열고 마시면 된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메타버스가 발달했으니 클럽이나 바에 가지 않아도 집에서 AR고글을 끼고 불금을 보내는 사람도 없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런 히키코모리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젋은이들이 친구들과 커뮤니티를 찾아서, 중장년들이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 노인들이 편리한 인프라와 의료시설을 위해 도시를 선호하듯 현재의 과학기술은 결코 도시를 대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댓글에 쓴 내용을 본문에 추가: 청년층의 높은 실업률의 주 원인 중 하나는 학력과잉으로 인한 노동시장의 불균형입니다. 모두들 대학을 졸업해서 폼나는 대기업 사원증을 목에 걸고 싶어하지만 아직 우리나라의 고용의 대부분은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고용이 유지되는 지속일자리의 80% 이상은 제조업이 차지고 있는데 그 중 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젊은이들이 기피하는 일자리입니다. 그래서 해당 산업들은 구인난을 겪지 않나요? 일자리가 없는게 아니라 구직자들의 눈높이와 현실이 안 맞는겁니다.

청년층의 실업률을 낮추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젋은층이 현실을 직시하고 공장 가서 볼트와 너트를 조이거나 좋좋소에 취직하거나, 혹은 혁신과 경쟁이 계속되어 새로운 세계적 기업이 생기는 겁니다. 그리고 후자를 위해서는 도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저는 젊은이들이 공장에 가는 것보다 새로 탄생할 뉴 삼성, 뉴 네이버에 다니는게 더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도시에 집중해야 한다고 믿고요.

지방으로 인구를 분산한다고 전체 일자리가 늘어날 지는 심히 의문이지만(전 아니라고 봅니다) 생긴다고 하더라도 그 저임금의 일자리들은 과잉학력으로 인한 불균형에 직면한 젊은세대의 목마름을 채워주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로요.  

2023. 9. 26.

허생전 2023 (feat. 주택공급 활성화 방안)

(생략)변 씨는 본래 원희룡 장관과 잘 아는 사이였다. 원희룡이 당시 국토부 장관이 되어 변 씨에게 주택수급 문제를 해결할 인재가 없는가를 물었다. 변 씨가 허생의 이야기를 하였더니 원 장관은 깜짝 놀라면서 "그인 이인이야. 자네와 같이 가 보세"라고 답했다. 밤에 원 장관은 보좌관들도 다 물리치고 변 씨만 데리고 걸어서 허생을 찾아갔다. 변 씨는 원 장관을 문밖에 서서 기다리게 하고 혼자 먼저 들어가서, 허생을 보고 원 장관이 몸소 찾아온 연유를 이야기했다. 허생은 못 들은 체하고 "당신 차고 온 소주나 어서 이리 내놓으시오" 했다. 변 씨는 원 장관을 밖에 오래 서있게 하는 것이 민망해서 자주 말하였으나, 허생은 대꾸도 않다가 야심해서 비로소 손을 부르게 하는 것이었다. 원 장관이 방에 들어와도 허생은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않았다. 원 장관은 몸 둘 곳을 몰라 하며 나라에서 주택 공급 방안을 마련코자 하는 뜻을 설명하자 허생은 손을 저으며 막았다.


“밤은 짧은데 말이 길어서 듣기에 지루하다. 너는 지금 무슨 벼슬에 있느냐?”

“국토부 장관이오.”

“그렇다면 너는 대통령의 신임 받는 각료로군. 내가 인허가 절차를 막는 규제들을 선별하면, 네가 의회에 아뢰어 일괄적으로 폐지할 수 있겠느냐?”

원 장관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 생각하더니,

“어렵습니다. 제 이(第二)의 계책을 듣고자 하옵니다.” 했다.

“나는 원래 ‘제 이’라는 것은 모른다.”


하고 허생은 외면하다가, 원 장관의 간청에 못 이겨 말을 이었다.


"타 OCED국가들과는 달리 조선은 대규모 자본과 법인이 거주용 부동산 산업이나 리츠에 진출하기가 어려워 민간 임대시장에서 규모의 경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너는 조정에 청하여 대형 리츠회사들이 주거용 부동산을 공급할 수 있게 허용해 줄 수 있겠느냐?"

원 장관은 또 머리를 숙이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어렵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것도 어렵다, 저것도 어렵다 하면 도대체 무슨 일을 하겠느냐? 가장 쉬운 일이 있는데, 네가 능히 할 수 있겠느냐?”

“말씀을 듣고자 하옵니다.”

"서울은 세계적인 도시로 성장했지만 평균 용적률이 고작 160%에 불과해 500-1500%의 용적률을 가진 다른 국제도시에 비하면 도시계획의 효율성이 턱없이 낮다. 이로 인해 직주근접이 가능한 주택의 수가 크게 모자라 핵심지의 주택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몇 시간씩 걸쳐 출퇴근 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는 비효율이 이어진다. 서울 핵심지를 고층으로 개발하면 양질의 주택 수를 공급할 수 있는 동시에 교통량은 줄고, 또 활용할 수 있는 대지의 면적은 되려 넓어져 공원과 도로와 같은 인프라를 갖출 수 있다. 그러기 위해 비합리적인 층수 규제와 용적률 제한을 과감하게 풀고 성냥갑 시멘트 아파트를 재건축하도록 더 강력한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한다. 이렇게 제도와 규제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정부 예산을 쓰기는커녕 인허가 과정에서 세수 수입은 되려 증가할 것이고 더욱이 이명박 정부에서 그랬던 것처럼 강남을 비롯한 핵심지의 주택공급이 크게 늘어나 상급지부터 주택 가격이 장기적으로 안정될 것이다."

원 장관은 힘없이 말했다.

“안 그래도 부자감세라고 욕을 먹는데 재건축까지 대거 풀어주면 토건족이라는 비난을 누가 감당하려 하겠습니까"


허생은 크게 꾸짖어 말했다.


"부자감세가 무엇이란 말이냐? 상속세율과 소득세율이 OECD 평균을 훌쩍 뛰어넘는데다 세금을 전혀 내지 않는 면세자 비율은 40%가 넘어 주요 국가 중 가장 높은데 무엇이 부자감세인가. 그렇게 걷은 세금을 가지고 아무런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아 누구도 살고 싶어하지 않을 수도권 변두리의 맹지에 갑자기 수만 세대의 집을 짓겠다는 계획이 더 큰 재정의 낭비 아닌가. 그뿐만 아니라 지자체와 행정부가 인허가권을 무기로 삼아 이미 인프라가 갖춰진 지역의 민간 주택 공급은 틀어막아놓고, 비효율적이고 방만한 공기업 LH에게 사업을 맡겨 설계도 엉망인데다 철근도 숭숭 빠진 공공 주택을 건설하는 짓을 과연 주택 공급 활성화 방안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야말로 진정 토건족스러운 짓 아닌가. 게다가 현재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PF 사업장은 인기가 없어 사업성이 나오지 않는 것인데 그런 엉망인 사업들을, 게다가 거주용 부동산도 아닌 PF들을 일괄적으로 구제해 주겠다는 것을 딴에 주택 공급 활성화 방안이라고 한단 말이냐? 내가 세 가지를 들어 말하였는데, 너는 한 가지도 행하지 못한다면서 그래도 신임 받는 국토부 장관이라 하겠는가? 너 같은 자는 칼로 목을 잘라야 할 것이다.”

하고 좌우를 돌아보며 칼을 찾아서 찌르려 했다. 원희룡 장관은 놀라서 일어나 급히 뒷문으로 뛰쳐나가 도망쳐서 관저로 돌아갔다.


이튿날, 다시 찾아가 보았더니, 집이 텅 비어 있고, 허생은 간곳이 없었다.




2023. 8. 10.

노무현의 뇌물보다 무서운 가출

2023년 8월 10일, 법원은 정진석 의원이 과거 노무현 대통령에 관한 허위사실을 주장했다는 혐의로 징역 6개월 실형을 선고했다. 이는  검찰의 구형이 벌금 500만 원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판결이었는데, 이러한 판결을 내린 배경에 대해 법원은 "정진석 의원의 글 내용은 악의적이거나 매우 경솔한 공격에 해당하고, 그 맥락이나 상황을 고려했을 때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보호받을 수도 없다"라고 부연했다." 이어 "유력 정치인인 정 의원은 구체적 근거 없이 거칠고 단정적인 표현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 부부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했다"라고 밝혔다.


문제가 되었던 정진석 의원의 발언은 아래와 같다.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씨와 아들이 박연차 씨로부터 수백만 달러의 금품 뇌물을 받은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은 뒤 부부 싸움 끝에 권 씨는 가출하고 혼자 남은 노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 이것이 이명박 때문이란 말인가. 


논란이 되었던 위의 발언에서 사실로 인정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 권양숙 씨와 아들이 박연차로부터 금품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가 드러남
  • 그로 인해 노무현 대통령이 검찰 조사를 받음
  • 노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음

사실관계가 확인되지 않아 허위사실로 여기지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 부부 싸움
  • 권 씨의 가출
  • 노 대통령이 밤에 혼자 남음

그리고 이로 인해 정진석 의원은 명예훼손으로는 아주 이례적으로 실형 6개월의 형을 받았다. 그리고 법조인이 아닌 나로서는 법원이 정진석 의원에게 실형을 선고한 것이 합당한지 섣불리 판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군사독재자들의 피붙이들과 다름없이 부당한 뇌물을 받은 그 가족들과, 부부 싸움과 가출을 주장한 정 의원 중에서 누가 노무현의 명예를 더 많이 실추시켰는지 쉽게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 그가 그렸던 정치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               *               *

지난 2018년 경기지사 TV 토론에서 당시 이재명 후보는 "친형을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키려고 했느냐"라는 질문에 "그런 일이 없다"라고 답했지만 이후 그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형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는 것을 검토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그는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당선무효에 해당하는 벌금 300만 원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2020년 7월 대법원은 "돌발적 질문에 대해 자기방어적으로 답변한 것은 적극적으로 허위사실을 유포한 것으로 볼 수 없다"라는 논리로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 했고 이런 판결이 나오는 과정에서 김만배와 가까운 사이로 차후 화천대유의 고문으로 활동한 권순일 대법관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링크)  

게다가 지난 몇 번의 선거에서 우리는 몇몇 정치인들과 일부 방송인들이 자신의 정적이나 반대 진영 인사들에 대해 매우 모욕적인 루머를 퍼뜨린 사실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중에는 유력 대선후보의 아내가 술집 작부 출신이라는 주장이나 여자 정치인의 섹스 비디오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던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누구도 징역형을 선고받은 이는 없었다. 거짓말이 거짓말이 아니게 되고, 똑같은 허위사실도 무죄가 되던 마당에 느닷없이 정진석에게 실형이 선고되었으니, 여당이 법원이 감정적이고 편향적이라며 반발하는 것도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대한민국의 사법 시스템을 믿으려 한다. 그러니 법원이 이제부터라도 유권자들의 눈과 귀를 흐리는 거짓 주장에 단호히 대처하기로 결정했다면 그 일관성을 엄정하게 유지하기를 바란다. 또다시 권순일이 주장한 것처럼 소극적인 거짓말은 거짓말이 아니라는, 그리고 뇌물보다 가출이 더 무겁다는, 그런 궤변을 듣는 괴로운 일은 없기를 바란다.

2023. 3. 18.

고장난 기억들과 지정학, 그리고 한일회담

대한민국은 지정학적으로 너무나 불리한 위치에 있다. 알다시피 우리는 대외무역에 크게 의존하는 나라이고 그 대부분은 바다를 통해 이루어진다. 만약 어떤 정치 세력이 제주도 남쪽 항로를 봉쇄한다면 대한민국의 경제와 사회는 그 즉시 무너질 것이다. 따라서 이 나라가 수백 년 뒤에도 독립국가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둘 중 하나가 반드시 필요하다. 자유무역과 항행의 자유를 보장하는 패권국이 계속해서 세계를 지배하거나, 혹은 우리가 스스로 태평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거나. 현재 우리는 다행히 전자의 세상에 살고 있다.

자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 만약 미국이 쇠퇴하는, 적어도 압도적인 해군력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을 가정한다면, 그래서 항행의 자유가 더이상 보장되지 않는 시대가 온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경제에서 교역비중이 차지하는 비중이 낮았던 나라들도 교역로를 봉쇄당하면 무너지곤 했는데 한국이야 말해 무엇하리. 따라서 한국은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무역로를 보호할 교두보를 확보해야 한다. 그 후보로는 두 지역이 있다. 중국의 동부 해안가, 혹은 규슈를 포함한 일본의 남부 지방. 전자의 경우 상대가 너무나 막강한데다 내륙 세력으로부터 긴 해안지역을 지켜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후자의 선택 만이 남는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국력이 역전된 것은 아무리 보수적으로 잡아도 고려 초기 이후로 보이는데 그 이후 단 한 번도 한반도의 생산량이나 인구는 일본을 앞서본 적이 없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현재 한반도의 육군은 일본열도보다 앞서 있으며* 이는 두 지역의 GDP가 역전된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런 불균형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따라서 한반도의 정치세력이 장기적으로 독자 생존하려면 현재의 군사적 우위가 다시 역전되기 전에 어떻게든 이 기회를 활용해야 할지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미국이 쇠퇴하는 순간 우리 역시 위기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런 쓸데없는 가정을 꺼내는 이유는 우리의 대외전략이 현실과 국제정세에 맞춰서 이루어져야지, 특정 국가에 대한 호불호를 따라가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꺼내는 이야기 역시 그런 관점에서 읽어주기를 바란다.

*               *               *

12세기 금나라는 북송의 제안으로 협공을 펼쳐 요나라를 멸망시켰지만 이후 송나라는 약속을 어기고 되레 금의 내분을 조장하는 등 공작을 펼쳤다. 이에 금나라 황제는 분노하며 수도인 개봉을 포위하였는데 금군은 12만에 이르렀지만 도성 수비군은 고작 3만 명에 불과한 데다 송의 형편없는 전투력은 이미 잘 알려진 터라 수도에는 불안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 가운데 혜성과도 같이 구원자가 등장했으니 그의 이름은 곽경이었다. 그는 자신이 음양오행의 이치와 도술에 통달할 사람이라 도술의 힘으로 금군을 섬멸할 수 있다며 호언장담을 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당당했던지 그를 만난 황제는 단번에 그를 도성 수비의 총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그는 한날한시에 태어나 사주가 같은 7,777명의 민간인을 선발하여 육갑신병이란 이름을 붙이고 그들에게 흰 옷을 입히고 매일 하늘에 기도하며 부적에 물을 뿌리는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가만히 사주를 따져보던 곽경은 오늘이 길일이라며 갑자기 육갑신병의 총 출전을 명했다.

제대로 된 전투훈련도 받지 않은, 체격이나 군 경험이 아닌 오로지 사주팔자 하나로 선발된 고작 7천여 명의 부대였지만 용한 도사의 비술로 거칠고 야만적인 유목군대의 정예군을 무찌를 수 있다고 진심으로 굳게 믿은 황제와 고관대작들은 기대어린 눈으로 그의 출전을 반겼다. 이윽고 성문이 열리고 흰옷을 입은 육갑신병은 용감하게 금군 기병대를 향해 돌진했다. 사막과 초원, 그리고 얼어붙은 유라시아의 대지를 넘나들며 온갖 적들과 싸운 금나라 군대였지만 이런 이상한 군대를 마주하기는 처음이었다. 그들은 적잖이 당황했지만 곧 칼과 창을 뽑아 이들을 맞이했다. 잠시 후 육갑신병들의 흰 옷은 모두 빨갛게 물들었고 그들의 사지는 찢어져 사방에 널려 있었으며 송의 수도 개봉은 함락되어 불타고 말았다. 

많은 한국인들은 이 육갑신병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 이름을 닮은 찰진 욕을 떠올리며 비웃겠지만 과연 우리에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주문을 되뇌지만 실제 역사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들의 현실인식은 이 주문을 외우면 자동으로 자주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믿는 휘종만큼이나 처참하게 왜곡되어 있고, 부적을 태우며 죽창가를 부르던 곽경을 지도자 자리에 앉힐 만큼 어리석다. 과연 우리에게 미래가 있을까.

위안부 합의와 강제징용 배상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딱 그렇다. 12년 만에 처음으로 일본에서 열린 한일 단독회담은 지난 몇 년간 악화일로를 걸어온 두 나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그간 양 국이 첨예하게 대립했던 외교적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자리였다. 여러 자극적인 보도와 헤드라인에 경도된 몇몇 사람들은 이번 외교 합의를 비난하지만 그들은 애초에 우리가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뭘 얻을 수 있고 어떤 비용을 치러야 하는지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저 일본을 진심으로 증오하는 마음만 가지면 상대가 벌벌 떨며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마땅히 들어줄 것이라 기대한다. 마치 육갑신병에 의지하던 개봉의 시민들처럼. 그리고 나는 이를 병신외교라고 부르기로 했다.(링크) 이제 그 병신외교가 아닌 현실의 눈으로 사태를 다시금 돌아보자. 우리가 이길 수 있던 싸움이었던가.  

먼저 징용공 문제의 핵심을 살펴보자. 여운택 씨는 과거 일본제철의 공장에 동원되어 열악한 근무환경 속에서 고된 노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패전 후 해당 회사가 임금을 전혀 지급하지 않았으니, 밀린 임금과 손해보상을 지급하라며 일본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하지만 일본 법원은 해당 사건은 공소시효가 지났고 신일본제철은 일본제철과 다른 법인이기 때문에 배상의 당사자가 아닌 데다 해당 청구권은 한일 정부가 맺은 1965년의 합의로 종결되었다는 논리로 이를 기각했다. 이는 당시 일제가 동원한 일본인 노동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던 전후 일본 정부의 일관된 원칙이었다. 이에 여 씨와 다른 세 명의 원고는 동일한 내용의 소송을 한국 법원에 제기하였다. 법원은 1심과 2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지만 놀랍게도 2012년 대법원은 원고 승소 취지의 파기환송 판결을 내렸고 이에 따라 19년 대구법원은 일본 기업에게 배상책임을 물으며 국내 일본 기업의 자산을 동결하고 압류 절차를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이에 반발하며 한국에 대해 다분히 보복성을 띈 무역제재를 가했다. 이에 대응해 한국 정부는 지소미아를 종료할 것을 검토하고 WTO에 일본의 무역보복을 제소하기로 결정했다. 

애초에 이 문제는 대한민국 법원의 판결이 국제적 정당성, 혹은 강제성을 갖췄는지의 문제였다. 만약 베트남이 특별법을 제정하여 월남전 당시 인명/재산피해를 입은 민간 피해자들에게 한국 정부에게 변상하라고 판결하고 당시 정부에 군수물자를 납품했던 삼성전자의 자산을 동결하고 매각한다면 우리는 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또 네덜란드 정부가 하멜이 작성한 표류기를 근거로 조선 정부를 이어받은 대한민국 정부는 (현대 네덜란드 법 기준으로) 네덜란드 인을 불법적으로 억류하고 강제로 노역을 시킨 피해를 하멜의 후손들에게 배상하라며 징벌적인 추징금을 매긴다면 우리는 이를 흔쾌히 수락할 수 있을까. 국제법 전문가들은 대한민국이 존재하기 이전에 벌어진 사건을 두고, 대한민국 법원이 그 법의 적용 범위를 국외로 확대하여 외국기업에 적용한 것은 국제법과 관례에 크게 어긋난다는 사실을 지적했지만 평양 주석궁을 방불케 할 정도로 글로벌 기준은 따위는 개나 줘버린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자들과, 역사는 잘 모르겠지만 역사를잊은민족에게미래는없다는 주문 만큼은 자다가도 외울 수 있다던 대중들은 그런 문제 제기를 철저하게 묵살한 채 죽창가를 드높여 불렀다. 이 문제에 있어 한국은 마치 북한 만큼이나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다. 

게다가 우리의 현실 인식은 크게 뒤틀려 있다. 한국은 1965년 합의에서는 강제징용과 식민지배 등을 다룬 것이지 당시 드러내지 않았던 위안부 성 노예 문제는 포함되지 않았다는 주장으로 2015년 위안부 합의를 새로 맺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과거 책임을 인정하고 한국 정부가 세운 재단에 일본 정부가 예산 100억 원을 출연하여 희생자들의 명예와 존엄, 그리고 마음의 상처를 회복하는 데 쓰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그 합의를 비난하며 부정한 것은 바로 한국이다. 지난 정권에서 한국은 이 합의를 먼저 파기하겠다고 선언했다가 임기 말 또 이를 번복하기까지 했다. 그랬던 대중들은 이제 강제징용 합의가 왜 위안부 합의보다 후퇴했냐며 비난하고 있다. 하지만 2015년과 비교한다면 하나. 강제징용은 명백하게 한일협정에 포함된다는 것, 둘. 외교적 영향력을 강제할 힘을 가진 미국이 당시와는 반대로 일본의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는 점, 셋. 양국 간의 외교적 합의를 이미 번복한 전례가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번 합의안 이상의 결과를 기대하기는 대단히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대중들의 도덕의식 역시 크게 잘못되어있다. 2018년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을 받은 원고는 모두 15명인데 그중에는 정부 합의에 찬성하는 유가족들과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두 뒤섞여 있다. 하지만 국내 여론과 대중들은 두 집단의 의견을 균형 있게 받아들이지 않고,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만을 선택적으로 보도했다. 이 문제는 위안부 합의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당시 일본 정부와 위안부 합의를 협상하던 정부는 네 차례에 걸쳐 생존 피해자들에게 협상 내용과 과정을 설명했고, 당시 기준으로 생존한 46명의 할머니 중에서 36명의 피해자들이 일본이 지급한 화해기금을 수령했으며 이미 사망한 분들의 유족 중 35명이 기금을 받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하지만 대중들은 그런 사실은 철저하게 무시한 채 당시 정부의 합의안을 비난하기만 했다, 외교부가 피해자들과의 협의 없이 합의했다는 거짓 뉴스를 사실로 믿었다. 왜? 그래야만 자신들의 민족적 자존심이 채워졌을테니까. 정작 희생된 것은 피해자들이었지만 위안부 피해와 1도 상관이 없던 대중들이 실제 희생자들의 아픔을 공공재로 치환하여 희생자들에게 합의금을 거절하라는 압박을 가했다. 오로지 자신의 민족적 자존심을 위해서. 희생자들을 착취한 것은 비리로 얼룩진 윤미향과 정의연만이 아니었다. 

이 회담의 결과가 최선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면 한국 정부가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일개 사법부의 구성원이라는 작자가 오만하게도 건국하는 심정으로 선고문을 썼다며 외교분쟁을 촉발했던 순간 당신들은 런던 올림픽의 축구 경기나 보고 있었다. 향후 사태가 악화되는 것을 피하고자 행정부는 대법원에 접근해서 선고를 지연시켰는데, 유권자들은 이를 사법 농단이라고 부르며 대통령을 탄핵시켰다. 미국이 한국 편을 들어준 위안부 합의도 반대했다. 한국이 일방적으로 일본 기업의 재산을 동결/압류하겠다고 발표할 때 당신들은 조국을 따라 죽창가를 부르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불매운동을 시작했다. 현재 정부의 조치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사태가 이렇게까지 악화될 동안 도대체 무엇을 했는가. 질 수 밖에 없는 분쟁을 시작한 것은 바로 당신들이다. 

*               *               *

그렇다면 아무런 결론을 내지 않고 질질 끄는 선택도 있지 않았나. 마치 이전 정권들이 그랬듯이.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다. 푸틴이 무리한 계획에 따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유로, 구소련제 무기와 장비의 사용연한이나 러시아의 고령화를 고려하면 자국의 군사력이 정점을 지나고 있는 반면, 우크라이나는 군사개혁에 나서고 서방의 지원을 받아들이는 등 강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두 나라 사이이의 군사적 격차가 점차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분석도 있다. 그리고 비슷한 모래시계가 동아시아에서도 돌아가고 있다. 현재 미군이 추진하는 국방개혁은 2030년 이후에나 완성되는데 그 시점이 지나고 나면 중국이 미국의 봉쇄를 무력으로 돌파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중국의 인구와 경제성장률이 이미 정점을 찍고 둔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대륙이 대만을 삼킬 마지막 기회는 향후 5-10년뿐이다. 최근 미국의 고위 장성이나 전략국제문제연구소들이 가까운 시일 안에 양안 전쟁이 재발하는 것을 염두에 둔 분석을 내놓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런 사태가 벌어지면 한반도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전문가들은 중국이 미군의 역량을 분산하기 위해 북한을 이용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북한이 전례 없는 과감한 도발이나 군사행동에 나서면 한반도 내의 미군 병력과 전략 자산은 발이 묶일 것이고 그때 중국이 대만을 침공한다면 미군은 나뉜 전력으로 대응에 나서야 한다. 얼마 전 CSIS에서 중국의 대만 침공을 가정한 워게임 분석에서 한국의 지원을 배제한 것은 이런 상황을 가정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처럼 미국의 입장에서 한반도는 그저 여러 전장과 요충지 중 중 하나일 뿐이다. 한국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과대평가하지만 지난 70년 동안 한반도 내에서 미군의 배치는 점점 후방으로 후퇴하고 있으며 전략무기와 병력 역시 점차 축소되고 있다. 바이든의 취임사나 연두교서를 분석해 보아도 미국 대외전략의 최우선 목표는 중국을 억제하는 것이고 북한은 중국에 대한 레버리지, 혹은 부수적 문제로 언급된다. 그리고 중국을 압박하는 주 전선은 어디까지나 태평양 진출의 교두보인 남중국해가 될 것이다. 현재 미군의 주력은 동아시아의 북쪽에 치우쳐 있는데 이 중 상당수는 산둥성의 미사일은 물론이고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의 방사포의 사정거리 내에 있다. 이런 전제조건들을 감안하면 전략적 유연성을 위해 미군은 전략자원들을 유사시 고립될 수 있는 남한보다는 후방의 요새화된 기지로 재배치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반면 미군의 자원을 독점하기를 희망하는 일본은 워싱턴을 설득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일본은 입장을 번복하고 적국인 북한과 민족적 유대감을 느끼는 한국은 신뢰하기 어려운 파트너이기에 미국의 대전략에서 한국의 비중을 낮추고 일본을 주 동맹국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주장은 오바마가 아베 신조의 팔을 비틀어 내놓은 위안부 협정을 한국과 한국 국민들이 발로 차버렸을 때 더욱 설득력을 얻었다. 워싱턴은 이미 한국과 일본이 영원히 화해하지 못하고 반목할 경우, 무엇보다 유사시 미국이 동맹국들의 협력이 절실한 순간에 한일 양 국이 대립할 경우 미국이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하는지 답을 내기 시작했다. 지정학적으로 미국이 한국을 버리고 일본을 택하는 것은 가능할 수 있어도 반대의 경우는 불가능하다. 시간은 결코 우리의 편이 아니다.

각종 안보 협의체들이 빠르게 구성되고 작동하기 시작한 시점에 한국이 강력한 우방국 중 하나인 일본과 같은 테이블에 앉는 것은 우리들의 국익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역시 최악의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가정하며 대외전략을 개편하고 있는데, 만약 한국이 일본과 반복하는 믿을 수 없는 파트너로 남게 된다면 미국은 일본의 재무장을 강력하게 요구할 수 밖에 없고, 이미 그 초기 단계를 지나고 있다. 인구와 경제가 한국의 3배가 넘는 일본이 대규모로 육군을 재건하게 되면 한국의 미국에 대한 레버리지는 더욱 떨어진다. 이 외에도 한미일 군사협력이 절실한 수도 없이 많은 이유들이 있다. 거기에 반대할 세력은 중국과 북한, 그리고 러시아 뿐이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한일 양 국이 강제징용 합의를 발표하자 UN 사무총장은 긍정적 교류와 미래지향적 대화를 환영한다고 밝혔고 EU 대외관계청 역시 즉시 성명을 내어 두 나라 간의 긴밀한 협력은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지역을 유지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핵심 축이라고 평가했다. 워싱턴의 백악관 역시 한일 양 국의 결정을 즉각 환영하며 윤 대통령을 국빈으로 초청했고 미 상원 역시 초당적으로 이번 조치를 반긴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는 날카롭게 대립하는 민주당과 공화당이 같은 목소리를 낸 몇 안 되는 사안 중 하나였다. 반면 중국은 이 합의를 미국의 압력으로 이루어진, 피해자의 기대와는 어긋나는 합의라고 폄하했고 북한은 이번 합의를 굴욕 회담이라며 노골적으로 폄하했다. 이번 회담을 반대하고 정부의 조치를 욕하는 미개한 21세기 선조와 고종들이여, 지금 당신의 목소리가 어느 쪽에 가까운지 돌아보라. 

*               *               *

서강대 사학과 임지현 교수는 저서 기억전쟁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화 강철비에서 곽도원은 "남북이 대결로 치달아 수백만 명의 희생한 식민지의 아픈 역사를 되풀이해선 안된다"라고. 그의 어조는 너무도 결연해서 희생자 수백만 명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권위적인 수치로 느껴진다. 하지만 아시아-태평양 전쟁사의 대가 존 다우어의 통계는 다르다. 그는 2차 세계대전에서 희생된 조선인 사망자 수를 약 7만 명으로 추정한다....UN의 통계에 따르면 당시 아시아에서는 1500만 명 의 사망자를 낸 중국의 희생이 가장 컸고, ....인도네시아는 기아와 영양실조 질병 등으로 약 300만 명이 사망했다....1945년에 대기근을 겪은 베트남에서는 통킹과 안남에서만 100만 명이 굶어죽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12만 5천명, 필리핀은 12만 명, 인도에서는 약 18만 명이 제2차 세계대전 중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정작 수백만 명의 희생자를 낳은 것은 식민지의 역사가 아니라 북한과 중국의 군대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대중들의 기억은 시나브로 조작되어 6.25의 희생자 수를 일제에 덮어 씌웠고 가장 많은 한국인을 죽인 범인은 김일성과 마오쩌둥에서 은근 슬쩍 도조 히데키로 갈아치웠다. 그리고 북한이나 중국은 우리에게 배상을 하지도, 사과를 하지도 않았다. 일본의 목에는 미국이라는 목줄이 채워져 있지만 북한과 중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건국 이래 일본 정부는 대한민국 국민을 단 한 명도 죽이지 않았지만 중국과 북한은 약 삼백만 명의 사망자와 실종자를 야기했다. 후자의 위협을 막기 위해 전자와 협력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일이다. 나는 아직까지 [역잊민미]를 외치는 사람 중 역사적으로 가장 많은 대한민국 국민을 죽인 이가 누구인지 제대로 이야기하는 이를 보지 못하였다.  

2018년 평창 올림픽에서 지난 정권은 북한에게 밑도 끝도 없는 구애를 펼쳤다. 그 결과 천안함의 폭침을 주도한 김영철과 지금도 틈만 나면 남한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김여정이 특급 VIP 대우를 받으며 평화의 상징인 올림픽에 얼굴을 내밀었는데, 이런 평화 회담이 성공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을까. 그 질문에 실제 역사는 매우 부정적으로 답했다. 하지만 역사를 잊은 국민들은 문재인 정부에게 압도적으로 높은 지지율을 보냈고 스스로 안보에 민감하다고 밝혔던 2030대 역시 약 85%의 지지율을 보냈다. 그리고 어떤 결과를 낳았던가. 그리고 그때와 정확하게 같은 사람들이 일본과의 협정에 문제가 있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낸다. 혹시 그들의 현실 인식에 뭔가 하자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고 보니 사기꾼 도사에게 속아 육갑신병에게 국방을 맡긴 북송의 황제와 고관대작들도 자신들의 판단력이 정상이라고 믿지 않았던가. 금나라 기병의 칼에 그 아둔한 머리가 썰리고 그들의 창에 가슴이 꿰뚫리기 전까지는.


이 글을 모든 방구석 비스마르크들과 한국판 육갑병신들에게 바친다. 


*엄격하게 육군으로 한정할 경우

2023. 1. 14.

유시민의 타인을 고문할 자유

 전 방송인 유시민(63세)은 김어준이 TBS에서 하차한 배경을 두고 "현 정부는 자기 자유만 자유라고 하면서 반대 진영 사람들의 자유는 없앤다"라고 비판했다. 뒤이어 그는 이제 기존의 언론은 이해집단의 일부가 되어 공론장이 아닌 자기 이해를 관철하는 정보 유통기업이 되었고 따라서 이해관계로부터 벗어나 정보를 해설해 주는 방송이 필요하다며 김어준의 유튜브 채널에 구독과 좋아요, 그리고 알람 설정을 부탁한다고 했다. 

언론인으로서 책임과 역할을 충실히 이행한 사람을 아무런 이유 없이 공영방송에서 쫓아내는 것은 분명히 자유를 억압하는 일이다. 하지만 김어준이 어디 그런 언론인인가. 그가 진행한 뉴스공장은 지난 보궐선거를 앞두고 오세훈이 (땅투기의 목적으로) 내곡동의 생태탕 집을 방문했다고 주장했고, 대선에 앞서 당시 야당 후보의 배우자를 유흥주점에서 봤다는 주장을 검증 없이 내보냈다가 고발을 당하기도 했다. 두 사건 모두 명백한 허위사실이었고 또 선거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던 사건들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이태원 사고에 대해서도 허위사실을 유포하여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제재를 받지 않았나. 거기에 저널리즘이나 언론인의 사명, 혹은 윤리의식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시민은 이 일이 자유를 억압한 것이라고 정의 내렸다.

그렇다면 그가 옹호하는 자유란 도대체 무엇인가. 대중에게 거짓말을 할 자유, 정치적 중립성을 왜곡할 자유, 범죄가 들통나 자살한 성범죄자를 옹호할 자유, 야당후보의 배우자를 술집 접대부라고 모욕할 자유, 뇌물을 받을 자유, 남의 자식은 못 가게 막으면서 내 자녀들만 특목고에 보낼 자유, 그리고 이 모든 행위가 들통나도 사과하지 않을 자유. 그가 외치는 자유란 바로 이런 것이다. 하지만 그 길고 긴 리스트 중 가장 무서운 것은 바로 타인을 고문할 자유 아닐까. 

1984년 가을, 시위를 주도하던 학생들은 캠퍼스에서 네 명의 무고한 시민들을 붙잡아 학생회관에 감금하여 폭행을 시작했다. 그들은 피해자들의 옷을 벗겨 속옷만 입힌 채 폭행을 가해 온몸에 멍이 들었으며 순번을 정해 교대로 폭행에 나서는 등 가혹한 고문을 가했다. 피해자들을 여자화장실로 데려가 세면대에 물을 가득 채우고 얼굴을 물속에 처넣기도 했는데 한 피해자는 이때 이가 심각하게 부러져 한동안 음식을 먹을 수 없었고, 또 한 피해자는 지나치게 심한 폭행으로 상태가 급속도로 나빠지자 응급실로 실려갔으며 이후 심각한 정신분열증에 시달렸다. 피해자 중 하나였던 전기동 씨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은 프락치가 아니고 법대 교수님을 뵙기 위해 캠퍼스에 방문했던 지라 가해자들에게 이 사실을 교수님께 직접 확인해 보라고 했지만 그들은 전 씨의 증언이 맞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는데도 고문을 멈추지 않았다. 이에 대해 전 씨는 오히려 자신이 프락치가 아니면 그들의 고문행위가 더 큰 문제가 될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계속해서 폭행과 협박을 가한 것으로 보인다고 증언했다. 당시 핵심 수뇌부 중 하나였던 유시민은 스스로 "감금에 찬동했으며 폭행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고 직접 조사에 나서기도 했다"라고 인정했다.   

그리고 이 사건을 대하는 유시민의 태도는 놀랄 만큼 전두환과 닮아 있다. 그는 78학번으로 당시 고학번인데다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을 거쳐 복학생 협의회의 대표를 맡아 운동권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자신은 직접 폭행을 하거나 지시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마치 발포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주장하던 전두환의 비겁한 모습처럼. 또 무고한 시민들을 감금하고 끔찍하게 고문을 가한 배경을 두고 독재에 항거하던 특수한 상황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는데, 바로 그 독재야말로 북한과의 군사적 대립이라는 특수한 상황이라는 핑계로부터 탄생한 것 아닌가. 물론 몇 명의 시민을 물고문한 것과 수백 명을 죽음으로 내 몬 것은 결코 같지 않다. 하지만 수백만을 죽인 북한과 맞섰다고 수백 명을 죽인 죄가 없던 일이 될 수 없듯, 신군부에게 저항한다는 핑계로 무고한 시민을 고문해 인생을 망가뜨린 것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겠는가. 

한국 현대사의 끔찍한 과거 중 일부인 고문기술자 이근안은 자신은 자유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일했던 애국자라고 주장했다. 그가 고문했던 피해자들 중에는 진짜 간첩이나 반국가단체 소속의 인물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을 사랑하기 때문에 전두환의 독재에 반대했던 사람들, 혹은 아예 무고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범죄자로 기억하지 애국자로 기억하지 않는다. 1984년 관악산 캠퍼스의 학생회관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다. 그 피해자 중 정부의 프락치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고 그들은 가해자들과 똑같은 일반 시민들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곧 정의라고 믿던 학생들은 이근안이 남영동에서 가하던 것과 똑같은 고문을, 또 훗날 동지 박종철 군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것과 똑같은 고문을 스스럼없이 가했다. 그로부터 4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날의 가해자들 중에서 가장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들만이 남아 금배지를 달고 여의도를 오가는 동안 피해자들은 기초생활수급자로 전락하여 빈곤한 생계에 시달리고 있다. 그리고 그 사건으로 인해 실형을 살았던 유시민은 젠체하는 태도로 우리들에게 자유가 무엇인지 가르치려고 들고 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스스로를 래디컬 자유주의자라고 칭했다. 그러나 수많은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이 그렇듯 대개 래디컬리스트들은 자신이 믿는 가치와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마치 믿음 소망 사랑을 외치던 예수의 이름 아래 이교도의 목을 자르고 몸통을 말뚝에 박아 죽이던 십자군이 그랬듯이. 마찬가지로 노무현이라는 신을 믿는 한 비뚤어진 근본주의자 노친네가 주장하는 자유는 분명 우리가 이해하는, 또 대한민국 헌법에 기록된 자유와 매우 다르다. 앞서 언급한 민간인 고문 사건 이후 실형을 선고받은 유시민은 항소이유서를 작성했는데 그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법과 양심을 모두 지킬 수 없다. 이 경우 양심을 따라야 하기에 나는 반독재운동을 지켜가기 위해 언제라도 기꺼이 (의심스러운 사람들을) 연행 및 감금 조사를 하겠다" 그리고 유시민은 여전히 현재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또 그의 눈에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사람들이 보인다. 그래서 그는 서슴지 않고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모략하고, 스스로 궤변임을 알면서 궤변을 늘어놓는다. 그래도 그의 양심은 찔리지 않는다. 1984년의 학생회관에서 고문당하던 피해자들을 차갑게 내려다보던 마치 그때처럼. 그러니까 지금 이 육십 넘은 노인이 주장하는 자유란, 내뜻대로 타인을 고문할 자유를 뜻하는 것이다. 



*그가 폭행에 직접 가담했거나 지시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피해자 전기동 씨는 당시 현장에 있던 이들 중 가장 연장자로 사건을 주도한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2022. 3. 31.

올브라이트의 브로치, 앙투아네트의 목걸이, 그리고 김정숙의 까르띠에

현대사에서 브로치로 가장 유명한 여성을 꼽으라면 지난 3월 22일에 작고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을 들 수 있지 않을까. 체코의 유대계 이민자 출신이었던 그녀는 미소 대립이 첨예하던 70년대부터 세계 외교사의 거두였던 브레진스키 밑에서 일했으며 민주당 대선후보들의 외교 고문을 맡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 교수로 재직하고 유엔 대사로 임명되는 등 국제정치, 특히 동유럽과 소련 문제에 가장 정통한 미국인 중 하나였기에 여자였던 그녀가 클린턴 행정부의 국무부 장관으로 거론되었을 때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푸틴이나 김정은 같은 독재자 앞에서도 결코 위축되지 않았던, 미국판 철의 여인과도 같았던 그녀는 동시에 수려한 패션 감각으로도 유명했다. 단순히 때와 장소에 어울리는 의상을 세련되게 소화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독특하게도 그녀는 자신의 외교적 메시지를 브로치로 암시하곤 했다. 푸틴을 견제하기 위한 자리에 그녀는 미사일 모양의 브로치를 착용하였고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그녀를 독사 같은 여자라고 비난하자 그녀는 이라크를 방문할 때 뱀 모양의 브로치를 착용하는 대범함을 보이기도 했다. 평화협상이 난항을 겪을 때엔 나비나 꽃 모양의 브로치를 착용하기도 하고 2000년 평화 프로세스를 구축하기 위해 김정일을 만날 때에는 미국이 진심으로 북한과 협정을 맺기를 원한다는 신호로 심장 모양의 브로치를 착용했다. 결국 그녀는 적대 관계 종식, 평화 보장 체제 수립, 미국 국무장관 방북 등을 내용으로 하는 북·미 공동코뮈니케 발표를 이끌어냈다. 나의 브로치를 읽어라, 라는 문장은 그녀의 외교술을 상징하는 말이자 자서전의 제목이 되었다. 

*          *          *

그리고 장신구로 유명한 또 한 명의 여성으로 마리 앙투아네트를 들 수 있다. 오스트리아 출신이었던 그녀는 활달하고 사교적인 성격으로 음악과 예술을 좋아하던 공주였지만 이윽고 닥쳐올 험악한 시대는 교양과 우아함이 아닌 그녀의 피와 살을 탐하고 있었다. 어머니 테레지아 여제는 프러시아의 압박이 거세지자 가까운 협력자를 찾기 위해 오랜 적국이었던 프랑스와 혼인동맹을 맺기로 결정했고 그 적임자로 앙투아네트를 꼽았다. 하지만 그녀의 결혼생활은 시작부터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그녀는 서투른 프랑스어를 구사했던데다 오랜 적국이었던 오스트리아 출신이었던 탓에 프랑스 국민들은 그녀를 싫어했고 일부는 그녀에 대한 악성 루머를 퍼뜨렸다. 앙뚜아네트가 사실은 동성애자라든지, 혹은 시동생과 불륜 관계라든지 등등. 그런 대부분의 가십들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대중들에게 그런 사실여부는 중요치 않았다.      

그렇게 민중의 불만이 무르익어가던 시기, 그들의 분노에 불을 지핀 사건이 터졌다. 루이 15세는 자신의 애첩에게 줄 선물로 무려 200만 리브르에 달하는 고가의 목걸이를 주문했고 보석상 샤를르 뵈이머는 전 세계에서 540개의 다이아몬드를 모아 이 화려한 목걸이를 완성했다. 하지만 그 때 갑작스럽게 루이 15세가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난데없이 고가의 물건을 떠안게 된 보석상은 새 왕비 앙투아네트에게 이 목걸이를 넘기려고 했지만 재정이 빠듯했던 왕실은 이를 거절했다. 그때 사기꾼들이 보석상에게 접근했다. 그들은 왕비가 목걸이를 사도록 중재하겠다고 꼬드겼고 절박했던 보석상은 그만 속아넘어가 목걸이를 넘기고 만다. 무려 200만 리브르 짜리 보이스 피싱에 성공한 그 일당은 목걸이를 분해해 540개의 다이아들은 전 유럽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돈 떼인 채권자마냥 하염없이 대금 지급을 기다리던 보석상은 결국 왕비를 찾아가 잔금을 지불해 줄 것을 요구했고 눈이 휘둥그래진 앙투아네트가 진상조사를 명령하며 이 목걸이 사건은 만천하에 모습을 드러냈다. 왕비 앙뚜아네트는 이 스캔들과 아무런 연관이 없었지만, 대중들은 타락한 귀족들의 사치와 방탕한 생활에 충격을 받았고 그 분노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왕비에게 향했다. 이후 이 소식을 들은 괴테는 목걸이 사건을 두고 프랑스 혁명의 서곡이라고 표현하며 이후 불어닥칠 피바람을 예고했고 사형을 선고한 혁명 정부의 앙투아네트 재판에도 이 목걸이 사건이 등장했다.

*          *          *

그리고 대한민국에는 김정숙이 있다. 지난 5년간 김정숙은 약 48회의 해외순방에 나섰는데 이는 이전 영부인들의 해외순방이 약 20여 회에 그쳤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놀라운 실적이다. 게다가 코로나로 1년 7개월 동안 해외순방이 중지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사실상 그녀는 매달 1번씩 해외여행에 나선 셈이다. 무엇보다 과거 영부인들이 해외순방에서 주로 교민들을 위로하거나 현지의 문화행사를 이끈데 반해 김정숙은 주로 관광지를 중심으로 순방에 나섰으며 교민 행사에 참여한 것은 고작 3회에 불과했다. 더욱이 사람들의 이목을 끈 것은 그녀가 순방에서 자랑한 막대한 양의 의상과 장신구들이었다. 샤넬, 막스마라, 에르메스, 루이비똥, 까르띠에 등 갤러리아 명품관을 1층부터 샅샅이 털어도 모자랄 만큼의 의상과 악세사리들이 화려한 조명과 함께 영부인의 온몸을 감쌌고 특히 런던 G20 정상회의에서 김정숙은 하루에 4벌의 다른 옷과 장신구를 선보이기도 했다. 

사실 영부인이 명품 좀 입은 것이 뭐 대수랴. 그리고 단언컨대 못생기고 살찐 것은 결코 죄가 아니다. 하지만 이제까지 정치인들과 배우자들의 씀씀이에 가장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던 이들은 당신네들 아니었던가. 게다가 대중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청와대가 어떤 돈으로 그 명품들을 구매했는지 속시원히 밝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수백만 원의 누비 옷을 판매한 한 장인은 보좌관이 5만 원짜리 현금다발로 결제했다고 증언했고 청와대는 영부인의 의상비 등 특별활동비 내역은 국가 안보에 위협을 주는 일이라며 공개를 거부했다. 청와대는 계속해서 김정숙의 명품 사랑은 그저 내돈내산일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우리는 어디까지 그 말을 믿을 수 있을까. 국가행사를 관광기회로 삼고 공직자들을 여행가이드로 쓰는 영부인이 국고와 사비를 엄격하게 구분했을까? 무엇보다 공직자 재산 공개를 보면 문재인의 재산은 약 21억 9천만 원이고 그의 연봉은 약 2억 5천만 원인데 그리고 그는 그 돈으로 새 집도 짓고 명품도 사고 심지어 이혼한 딸의 생활비까지 대고 있다. 소득 편차가 매우 큰 여의도와 금융권에서 나는 문재인보다 자산과 소득이 몇 배나 더 많은 사람들을 다수 보았지만 그 어떤 욜로족들도 저런 생활 수준을 누리지는 않았다.

이 논란의 정점에는 까르띠에 브로치가 있다. 탁현민은 이 브로치가 호랑이를 표현한 것이며 이는 인도와의 외교를 위한 것이었고 수 억짜리 정식 까르띠에 제품은 아니라고 둘러대고 있다. 하지만 누가 저걸 호랑이로 보는가, 또 누가 이게 까르띠에와 무관한 디자인이라고 하겠는가. 청와대는 애써 김정숙을 올브라이트나 앙투아네트로 포장하려고 하지만 그녀는 외교 천재도, 속아넘어간 왕비도 아니다. 그녀는 그저 김정숙일 뿐이다. 대한민국 역사상 임기중 가장 많은 해외관광지를 다녀온, 동시에 가장 적은 교민행사에 참석한 영부인. 그리고 그 가운데 그녀의 남편이 우리에게 약속한 특활비의 투명한 공개나 국민세금을 아껴 쓰겠다는 말은 처참하게 짓밟혔다. 다른 많은 공약들이 그러했듯이. 

그리고 아직도 우리는 영부인이 세금을 들여 수 억짜리 브로치를 구매한 것인지 아니면 공식 행사에 짝퉁을 차고 나간 것인지 알지 못한다. 슬프게도 둘 중 하나는 진실이다. 왜 창피함은 우리의 몫인가. 

김정은 동지가 주신 풍산개는 버릴지언정 표범 브로치는 꼭 챙겨가겠다는 김정숙 여사님

2022. 3. 20.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

어느 학교에서나 수학여행을 떠나면 맨 뒷좌석은 일진들의 몫이다. 이 다섯 개의 좌석은 모든 일진들이 탐내는 명당으로 그들은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왕좌의 게임도 불사한다. 그리고 그 바로 앞 줄은 그들을 따르는 부하들의 자리이다. 당신의 학창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보라, 그렇지 않은가. 전국의 일진들이 어디엔가 모여 이런 규칙을 정하고 대대로 이 전통을 전해주는 것도 아닐 텐데 어째서 시대와 지역을 가리지 않고 일진들은 항상 뒷좌석에 앉을까? 

그 이유는 버스의 구조 때문이다. 한국 대형승합차의 맨 뒷좌석은 대개 다른 좌석들보다 조금 높게 설계되어 맨 뒷좌석에 앉은 승객들은 다른 승객들을 내려다볼 수 있다. 게다가 맨 앞좌석에는 대개 인솔자인 담임선생님이 앉기 때문에 기존 권력에 반항하는 학생일수록 선생님과 거리가 먼 뒷좌석을 선호하게 된다. 따라서 기성체제에 순응하지만 학생들 사이에서는 별다른 권력을 가지지 못한 모범생들은 담임선생님과 가까운 앞자리에 앉고 반항적이면서 또래들 사이에서는 우월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일진들은 선생님과 멀면서 또 학우들을 내려다볼 수 있는 맨 뒷좌석에 앉는다. (반면 선생님들이 동승하지 않고 뒷좌석이 솟아있지 않은 미국의 통학버스에서는 일진들이 대개 앞자리에 앉는다고 한다.)

이런 공간과 권력의 구조는 비단 수학여행 버스에 그치지 않는다.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권력자의 자리가 신하들이나 피지배계급보다 낮은 문화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심지어 통치자의 권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들의 물리적 자리도 높아진다. 이는 현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펜트하우스는 가장 높은 층에 짓지 않는가. 1층에 펜트하우스를 설치하는 시공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법정에서도 가장 큰 권위를 가진 판사는 피고나 원고, 혹은 배심원들보다 높은 자리에 있고 국회에서도 국회의장의 자리는 일반 의원들보다 높다. 건축 양식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고딕 양식과 전체주의 건축은 각기 다른 시대에 다른 집단의 주도로 탄생했지만 둘 다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존재를 억압하고 축소하고자 했고, 그와 같은 의도는 장대하고 획일적인 건물양식으로 실현되었다. 현재에도 그 앞에 선 이들은 움츠러드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이처럼 공간의 구조는 인간의 의식에 강력한 영향을 준다. 

그래서 정치구조의 변화를 만들려고 했던 이들은 마찬가지로 그 권력이 머무는 공간도 변화시키려고 시도했다. 영국의 아서 왕이 봉건제도를 확립하며 자신의 기사들을 원탁에 배치했던 일이나 주변 경쟁 국가를 모두 물리치고 신바빌로니아의 절대 지배체제를 완성한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전례 없이 높은 건축물인 바벨탑을 지은 것, 그리고 가깝게는 조선왕조의 왕권을 부흥시키려던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한 것이 그 예이다. 왜냐하면 공간의 구조는 단순히 권력지형의 부산물이 아니라, 반대로 공간 자체가 사회권력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청와대의 시작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청와대의 이전 명칭은 경무대라고 불렸는데, 이는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궁 뒤편의 자그마한 언덕에 붙인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경무대는 경복궁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제 7대 조선 총독이었던 미나미 지로는 바로 이 곳에 총독관저를 지었다. 조선의 법궁을 내려다본다는 것은 바로 조선반도 전체를 내려다보는 셈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마치 버스 맨 뒷자리의 일진들마냥. 

이후 경무대는 조선을 무력으로 지배한 권력자들의 안방으로 쭉 자리 잡았다. 일제가 패망한 이후 주한미군 사령관이, 뒤이어 이승만 대통령이 관저로 삼으며 이곳은 마치 과거의 왕궁처럼 아무나 접근할 수도 없고 함부로 다가설 수도 없는 곳으로 남아있었다. 심지어는 여당의 대표나 행정부의 장관들까지도 함부로 청와대에 들어설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이곳의 구조와 위치가 과거 국가를 무력으로 지배하던 이들의 목적에 맞게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설계사상부터가 반민주적인 공간에 들어선 인간이 민주적으로 행동하길 기대할 수 있을까.

그래서인지 몰라도 이후에 집권한 모든 대한민국의 지도자들은 비슷한 비극을 맞이했다. 그중에는 도덕적이라고 여겨진 독립운동가나 명문대를 나온 민주화운동가, 유능한 사업가, 서민 출신의 인간적인 정치인 혹은 신실한 종교인도 있었지만 모두 하나같이 권력을 남용하거나 그 힘으로 축재를 하다 들통나 역사에 오점을 남겼다.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래, 헌법이 여섯 차례에 걸쳐 고쳐 쓰이는 동안 모든 헌정 위기는 하나같이 청와대에서 발생했고 그 과정이 동일했다는 사실은 이 나라의 비극이 지도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강하게 암시한다. 과거의 한 글(링크)에서 나는 박근혜의 비극이 문재인 정부에서도 반드시 되풀이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왜냐하면 당시 분노하던 모두가 다음 권력을 누가 잡을지만 쳐다보고 있었지 이를 70년간 되풀이되던 권력의 구조적인 문제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지금의 문제도 구조적인 문제로 접근하지 않으면 이번 정부 역시 비극으로 끝날 것이다.

지난 70년간 청와대는 마치 블랙홀같이 현대 한국의 지도자들을 빨아들였다, 깊은 비극의 수렁으로. 마치 절대반지를 낀 스미골처럼 아무리 영민해 보이던 지도자들도 그 푸른 기와의 집에 한번 발을 들이고 나면 좀처럼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탐욕과 어리석음에 시나브로 젖어들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본 일부 사람들이 풍수를 언급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공간이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미신이 아닌 인지과학의 영역이다. 셰익스피어도 고개를 떨구고 주눅 들게 만드는 이 K-비극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의 권력구조를 바꾸는 것이 필요하고 마땅히 대통령의 의식에 영향을 주는 집무실이라는 공간 역시 바뀌어야 한다. 

물론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 그 원인이 청와대의 구조 하나에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혹자는 유권자들의 미흡한 시민의식이 더 큰 문제라고 할 것이다. 허나 청와대라는 블랙홀에 빠진 것이 어찌 지도자들 뿐이랴. 해방 직후 대한민국 국민들은 민주공화제를 선택했지만 구 왕조의 일가였던 전주 이씨 출신의 이승만과 이기붕을 지도자로 선택했고 그들을 전하라는 이름 대신 각하라고 불렀지 않나. 그것이 경무대가 옛 경복궁 내에 자리 잡은 것과 아주 무관한 일일까. 놀랍게도 시민이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신민으로 종복하는 모습은 21세기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번 대선을 앞두고 무식하게 쌈박질하는 영화만 찍어내는 한 감독이 민주당 대선후보를 두고 "진정으로 백성 아픔 어루만져 줄 후보”라고 일컫는 것을 보라. 스스로 백성을 자처하는 우리의 의식 역시 청와대라는 공간에 지배당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물론 청와대의 위치를 바꾼다고 해서 우리나라의 권력구조의 문제점이 단번에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이는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니까.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대통령의 비극이 대한민국에서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며 그러기 위해서는 권력구조와 개헌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대통령의 집무실을 이전하는 것은 정치구조 개편이나 개헌에 비해서는 극히 쉽고 간단한, 그저 당선인의 의지만 있다면 실현될 수 있는 첫 출발이지 않은가. 그러니 장담하건대 지금 청와대 이전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정치구조 개편과 개헌에도 반대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집무실 이전이 불가하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면 아래에 쉽게 쓰인 좋은 글이 한 편 있으니 일독을 권한다.


....지금의 청와대 터는 조선 왕궁인 경복궁의 일부이자 뒤뜰이 있던 자리입니다. 자랑스런 문화유산의 일부입니다. 일제가 경복궁 일부 건물을 허물고 조선총독부 관사를 지었던 곳입니다. 나쁜 의도에서 비롯된 터입니다. 조선총독부 관저, 경무대에서 이어진 청와대는, 지난 우리 역사에서 독재와 권위주의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제왕적 대통령 문화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리고 국민 위에 군림하는 권력기관의 상징이었습니다. 대통령을 국민들로부터 철저하게 격리하는 곳이었습니다. 심지어 대통령 비서실조차 대통령과 멀리 떨어져서 대통령 비서실장이 대통령을 만나려 해도 차를 타고 가야하는 권위적인 곳이었습니다. 그 넓은 청와대 거의 대부분이 대통령을 위한 공간이고, 극히 적은 일부를 수백명 대통령 비서실 직원들의 업무공간으로 사용하는 이상한 곳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대통령은 대통령 비서실 직원들과도 철저히 격리돼있는 실정입니다.

이전에 따른 불편함도 있을 것입니다. 경호, 의전과 같은 실무적 어려움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호와 의전까지도 탈권위주의 시대에 맞게 달라져야 합니다. 잘못된 대통령 문화의 한 장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대통령 문화를 열겠습니다. 기꺼이 국민 속으로 들어가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대통령의 권위라고 믿습니다.

지금의 청와대는 개방해서 국민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때때로 국가적인 의전 행사가 열리면 국민들께 좋은 구경이 될 것입니다. 청와대를 국민에게 돌려드리면, 북악산까지 완전 개방이 가능해집니다. 국민들에게는 새로운 휴식의 명소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이제 대통령 집무실이 청와대라는 이름을 대신할 것입니다. 청와대는 더 이상 높은 권부를 상징하는 용어가 아니라, 서울의 대표적인 휴식 공간을 뜻하는 용어가 될 것입니다.

이로써 특권의 한 시대가 끝났음을 선언합니다.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옵니다. 늘 국민과 함께 하는 새 시대 첫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7년 3월 문재인 드림

2022. 3. 17.

동물 할당제도 해주세요

 


존경하는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들과 박지현 위원장님께,

건국 이래 최초로 재집권에 실패하신데에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얼마나 다급하셨기에 성범죄로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그리고 충남지사 자리를 잃은 정당에서 바로 이어 치러진 대선에 불륜 의혹과 여성에 대한 모멸적 욕설을 내뱉은 후보를 대선에 내보내셨을까요. 그 깊은 뜻을 한낱 범인에 불과한 저 같은 유권자는 감히 짐작하기도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고 사람을 죽일 정도로 뾰족한 송곳은 주머니를 콱 찢고 나오는 법입니다. 반드시 그렇습니다. 그런 귀 당에 무궁한 발전과 영욕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번 대선의 패인을 분석하며 비대위원과 위원장님께서 내로남불이 문제라는 지적에 저는 백번 공감합니다. 구중궁궐 같은 청와대를 없애겠다고 약속하곤 5년간 거기서 잘 먹고 잘 살다 이제와서 청와대를 왜 없애냐 던 문, 아니 이름조차 함부로 부르면 안 되는 그분. 꼬리곰탕은 부자들이나 먹는 음식이라고 비난하며 소박하게 조선호텔 점심 스시 도시락을 즐겨 드시는 대변인님. 그리고 평생 반미를 외치시면서 딸은 미국에 유학 보낸, 아 한 두분이 아니시군요. 국회의원님들. 그리고 부동산은 끝났다며 과천자이 재건축으로 크게 한탕 잡수신 김수현 사회수석님까지. 내로남불이 민주당의 상징이 된 것은 결코 오해나 우연이 아닙니다. 어찌 보면 실력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 오명을 씻어낼 대응책으로 아무런 경험도 경력도 없고 입당한지 불과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26살의 미숙아를 비상대책위원장에 앉힌 것은 매우 놀라운 결정이었습니다. 사실 여성폭력을 근절시키겠다는 젊은 인재가 두 여성에게 폭언과 협박을 일삼은 분을 지지한다는 사실보다 놀랍진 않았지만요. 물론 거기에 민주적 절차 따위는 없었지요. 그게 더불어민주당이니까요. 이준석 당 대표처럼 정치경력을 쌓고 이력을 인정받아 당원투표에 의해 감투를 차지하는 것은 미제 자본주의자들의 구습일 뿐입니다. 네, 진정한 권력은 결코 선출되지 않는 법입니다. 여러분들의 얼굴 위로 프랭크 시나트라의 My Way를 부르는 김정은과 시진핑의 모습이 겹쳐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6월의 지방선거에서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지금은 그 이상의 특단의 대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귀 당에게 한 가지 제안을 드릴까 합니다. 바로 동물 할당제 입니다. 지구상에는 약 20,000,000,000,000,000,000마리의 동물이 존재합니다. 이 중 대다수의 동물들은 인간과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니 더불어민주당에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니 우리와 함께 지내는 애완동물과 가축만 세기로 합시다. 그 수는 약 300억 마리이니 인구비례로 치면 한국에는 약 20억 마리의 가축이 존재합니다. 대한민국 인구의 약 40배가 되는군요. 개개인의 노력이나 성취를 무시하고 태생적 배경만을 가지고 쿼터를 할당한다면 이 가축들에게 약 97.5%의 공천권을 주는 것이 더불어민주당의 정신에 부합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부디 이번 지방선거를 위한 공천심사에서 이 점을 반드시 고려해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제 짧은 소견으로는 이미 귀 당에 돼지와 닭대가리는 상당수 계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중 한 분은 이미 동물들과 소통에 나서셨더군요. 보통 사람으로서는 저 혈연정치를 깨기 쉽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97.5%의 비례율을 맞추기엔 다소 모자란 감이 있사오니 부디 숙고하시고 신중하게 인재, 아니 축재를 선발하여 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위 사진과 본문의 내용은 아무런 연관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귀 당의 훌륭하고 공정한 경선을 기대하며, HHMM드림

2022. 3. 13.

윤석열의 당선, 이준석의 승리

20대 대선에서 국민의힘이 승리했다. 그 공은 후보 본인을 제외한다면 마땅히 이준석 대표에게 먼저 돌아가야 할 것이다. 만약 선거에서 졌더라면 그는 두 번째로 큰 책임을 지는 위치에 있었으니 당연히 승리의 축배는 그에게 쥐어져야 한다. 반대로 민주당의 송영길 대표는 역대 민주당 대선후보들 중 가장 질이 떨어지는 후보를 업고도 박빙의 선거를 치렀지만 패배의 책임을 지고 당 대표에서 물러났다. 심지어 다리 힘줄이 끊어지고 머리가 깨지는 부상투혼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로 이야기하는 정치판에서 이긴 것은 이긴 것이고 공은 공이다. 이준석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고 그의 선거전략을 평가하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 

그가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람들이 그의 공로를 온전히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강점과 단점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역사에 가정은 없다. 또 어떻게 그의 강점과 단점을 정밀하게 계량해서 수치화할 것인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그의 선거전략을 되돌아보기에 앞서 한 가지에 동의하고 시작하는 것이 옳다. 그는 이번 선거를 승리로 이끈 사람이다, 그러니 이긴 장수는 승장으로 대우해야지 대선에서 이긴 당 대표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먼저 그의 공 부터 되돌아보자. 그는 선거 과정에서 참신한 아이디어를 도입했다. 시대 트렌드에 걸맞게 대선후보의 공약을 짧은 쇼츠 영상으로 제작해서 sns에 올렸고 또 AI 윤석열이라는 컨셉을 도입하여 대선후보나 정당 관계자들이 가볍게 언급하기 어려운 말들을 자유롭게 올리며 시선을 끌 수 있었다. 또 당내에 젊은 스피커들을 대거 등용하여 당의 이미지를 쇄신하는데 혁혁한 기여를 했다. 상대 민주당이 인적 쇄신이라며 등용한 젊은 인재들과 한번 비교해 보라. 박빙으로 치뤄진 선거에서 이런 공로가 없었다면 과연 승리를 담보할 수 있었을까?

반면 그의 전략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가 젋은남성에게 집중하느라 여성표를 끌어오지 못했고 또 선거캠프의 역량과 시간을 호남에 집중하는 바람에 충청과 경기도의 격전지에서 충분한 표를 끌어오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또한 투표 당일까지 8% 이상의 대승을 자신하는 바람에 야당 지지층의 투표율이 상대 유권자들보다 낮았고 지속적으로 단일화 무용론을 주장해 하마터면 패배할뻔했다고 비판한다.* 모두 타당한 지적이다. 

무엇보다 그가 저지른 가장 큰 실책은 자신의 지지층들의 의지를 과신했다는 데에 있다. 마지막 여론조사에서 윤석열 후보는 이재명 후보보다 약 3-6% 앞서 있었지만 실제 집단별 투표율을 반영하면 윤석열 측이 패배하는 것으로 나온다. 정세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안철수 후보 측에서도 비슷한 결과를 받아보았다고 했는데 어째서 이준석은 윤석열의 승리를 그렇게 장담했을까? 데이터를 이리저리 조합해 보면 나는 그가 세 가지를 오판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는 호남에서의 여당 결집을 과소평가했고, 20-30대 남성들의 투표율을 과대평가했으며 상대적으로 시간과 공을 덜 들인 경기/충청의 접전지역에서의 우위를 과신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호남에서의 보수표는 여론조사만큼 나오지 못했고, 여전히 20-30 남성들의 투표율은 낮았으며 여전히 접전지역에서의 표는 각 후보들이 공 들인 만큼 나왔다. 모든 수리통계 모델은 설계자의 편향에 따라 오류를 내곤 한다. 자신을 선거덕후라고 부르던 이준석은 아마 모델을 만들면서도 자신이 과거의 경향성을 완전히 뒤집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검증되지 않은 자신의 편향을 모델에 반영해 8% 이상의 승리를 자신했다. 하지만 그런 이변은 없었다. 개표함을 열고 튀어나온 결과는 8%가 아닌 0,8%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준석은 이 0.8%의 승리에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이다. 그의 공과 과가 모여 나온 결과는 결국 대선승리 아닌가. 또 이제껏 실수 없이 선거를 치룬 사례가 어디 있었던가. 그런 그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고 그의 전략을 비판하기 시작하면 그와 지지자들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결함과 실수를 부정할 수밖에 없다. 지선을 불과 3달도 채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이긴 당 대표에게 책임론을 묻는 것은 자멸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나 다름없다. 정권교체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이 개선장군에게 박수를 쳐주고 샴페인을 뻥하고 터뜨리며 축하한 뒤에 보완점을 논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독일의 전격전을 상징하는 인물 중 하나인 하인츠 구데리안은 프랑스 전선과 독소전쟁 초기 동부전에서 크나큰 활약을 펼쳤다. 한번은 그의 전차들이 지원부대가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적 영토 깊숙이 내달리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지휘본부는 여러 차례 돌진을 멈출 것을 명령했지만 그는 예하부대의 통신을 모두 끄고 명령을 받지 못했다며 그대로 전차부대를 전속력으로 돌격시켰다. 하지만 그의 승리는 결코 남성호르몬을 아무렇게나 뿜어내며 함부로 돌격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가 소련의 수십 개 대대를 분쇄하며 돌진하는 도중에도 그는 노획한 적의 전차를 분석해 소련 전차가 자신들의 전차보다 우수하다는 사실을 간파하기도 했으며 이때의 경험을 정리해 독일군의 신형 전차를 개발하는데 반영하기도 했다. 모든 유능한 지휘관들은 전투 후 자신의 전략을 평가하고 개량하기 마련이다. 이번 선거에서 이준석은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전략이 완벽했다는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 다음 선거에서의 승리를 담보하는 것 역시 아니다. 

나는 트레이더이자 투자자이지, 정치평론가가 아니기에 한 정당이나 특정 정치인의 입장을 평가하는 글을 쓰는 일은 지양하려고 한다.(사실 자주 어기지만) 하지만 과거 몇 번이고 그의 행보를 비판했던 터이니 그를 옹호할 때도 마땅히 글로 남겨야 하지 않을까 싶어 이렇게 지루한 정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각계 각층의 사람들을 대표하는 정치인이 있듯 그는 2030대 남성들을 대변하는 대표적 정치인이다. 그가 더욱 성숙한 태도로 자신의 지지층들을 대변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일부 사람들은 안철수와의 단일화가 여권의 결집을 가져와 실제로 효과가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계량화되지 못한 데이터로 이준석을 비난하는 것이 무의미한 것처럼 수치화되지 않는 가정에 기반하여 그런 주장을 펼치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또 부당하다.



P.S.

흥미롭게도 이 글의 첫 두 댓글은, 내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한 분은 이준석의 완전오류설을 믿는듯 하고 다른 한 분은 그의 완전무오류설을 믿는듯 하다. 하지만 세상에 완전히 옳거나 완전히 틀린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이준석의 어떤 행동은 잘못되었고 어떤 행동은 맞다고 믿을 뿐. 

점점 대중은, 그리고 우리 사회는 그 중간지대를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회색분자들과 중도층의 소멸은 필연적으로 날카로운 충돌을 예고하고 우리는 점점 임계점에 가까워지고 있다.

마치 샐리와 앤으로만 구성된 나라처럼.
 

2022. 3. 10.

살인자들의 선거법

사전투표를 앞두고 아버지와 식사를 하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 정부의 국정철학은 스탈린이 다스리던 소비에트 연방에 가깝다고. 제1공화국에서 태어나 정치가 폭력과 너무나도 가깝게 맞닿아있던 시기를 살아오신 아버지는 그런 험한 말을 함부로 입 밖으로 꺼내면 안 된다며 나를 나무라셨지만 나는 이들의 행태를 다른 순화된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자국민을 의도적으로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들을 달리 뭐라고 부르겠는가. 

 

다른 나라들의 확진자 증가 추이는 이미 1월 초중순에 정점을 찍었지만 한국의 코로나 환자는 아직도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주목하지 않는 사이에 매일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코로나로 사망하고 있다. 갑자기 한국에서 코로나가 악화된 주된 이유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방역을 완화했기 때문이다. 다른 해외의 사례들을 보면 바이러스 확산세가 정점을 찍기 전에 방역조치를 완화할 경우 확진자들의 수가 지수적으로 폭증했고 이런 패턴은 한국에서도 어김없이 반복되었다. 

방역을 거듭 완화한 이 조치는 그간 정부가 밝혀온 가이드라인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정부는 확진자 증가 추이가 꺾일 경우, 혹은 치명률이 현격하게 낮고 병상이 충분히 확보되어 있어 사망자의 숫자가 낮게 유지될 경우 방역조치를 완화하겠다고 밝혀왔다. 하지만 1월 16일 확진자의 숫자가 사상 최대치를 넘어 5천 명에 근접하는데도 정부는 첫 번째 완화조치를 내놓았으며 약 한 달 뒤 확진자의 숫자가 20배가 늘어나 10만 명을 돌파했는데도 두 번째 방역완화에 나섰고 그로부터 3주도 안되어 확진자가 30만에 달하는데도 다시 한번 방역지침을 대폭 완화했다. 심지어 세 번째 방역 완화는 역대 최대 사망자를 기록한 날 발표되었다, 그것도 본디 3월 13일까지 예정되어 있던 방역지침을 전례 없이 앞당겨서. 하필이면 선거가 불과 1주일 남은 그 시점에.  
지난 세 달간 정부가 급박하게 갈아치운 방역정책 덕에 코로나 환자는 세계 1위로 폭증했고 전체 세계 인구 중 불과 0.7%에 불과한 나라에서 확진자 수는 세계의 약 20%를 차지하고 있다. 위드 코로나에 따른 자연스러운 조치라고? 위중증/사망자의 수도 역대 최대치를 갈아치웠고 이대로라면 인구의 0.1%가 매달 죽어나갈 텐데 위드 코로나의 목표가 이런 것인가? 아 자랑스러운 K-ill 방역. 즉 명백하게 방역정책의 목적은 코로나 관리에 있지 않았다. 되려 확진자 수를 황급히 늘리기 위해 취하는 조치로까지 보이기도 한다.

어째서인지 정부가 내놓은 모든 방역지침들은 선거에서 여당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사망자가 폭증하는데도 방역지침을 완화한 것은 자영업자들의 지지를 받았고 선거를 불과 2주 앞두고 그들에게 몇백만 원의 지원금을 살포하기도 했다. 게다가 선거 당일 기준 약 185만 명의 확진자들이 격리되어 투표권이 일부 제한되었는데 사전투표를 꺼리던 야당 성향의 유권자들의 투표율 역시 자연스레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전방위적으로 확산되는 바이러스는 사망률이 높은 노인층, 다시 말해 야권 성향이 가장 강한 유권자들이 인구밀도가 높은 투표소를 오가는 것을 두렵게 만들었다. 살인자의 선거법. 스탈린스러운 이들의 선거전략을 이보다 더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노영민 비서실장은 재작년 여름 시민들의 집회/결사의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당시 집회 주동자들을 두고 살인자들이라며 소리 높여 비난했다. 하지만 당시 일일 사망자는 최대 6명을 넘지 않았고 확진자들의 수는 고작 300명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난 지금 정부의 적극적인 방역조치 완화로 일일 확진자 수는 천 배나 많은 30만 명을 넘어섰고 사망자의 수 역시 200명을 훌쩍 넘어섰다. 정부가 방역조치를 완화한 1월 16일이래 코로나로 사망한 환자들은 무려 3336명에 달한다. 작년 같은 기간 코로나 사망자 412명의 약 8배에 달하는 숫자이다. 이제 노영민과 기모란을 비롯한 청와대 인사들과 선거를 주도한 너희들의 면상에 이렇게 소리치겠다. 너는 살인자다.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죽지 않아도 될 사람들을 죽도록 방치한 살인자들이다. 그래, 너희는 나치나 스탈린 같은 살인자들이다. 

그리고 이제 너희들은 이에 따른 응당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2022. 3. 6.

문재인이 쏘아올린 선거참사

친여당 성향의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구성

여론이 불타고 있다. 지난 토요일 확진자들의 사전투표에서 유권자들은 자신의 투표지를 직접 투표함에 넣지 못했고 일부 투표지들이 적절하게 관리되지 않아 다른 유권자들에게 건네지거나 방치되었으며 심지어는 분실되기도 했다. 이는 1987년 직선제가 시작된 이래 단 한번도 발생한 적 없던 유례없는 대참사이다.   

조직관리의 측면에서 보면 이런 대형사고가 발생한 이유는 자명하다, 문재인의 편향된 인사 때문이지. 능력보다 친분이나 이념 혹은 특정 정치인의 편의를 봐준 사람들로 구성된 인사는 조직의 올바른 운영과 성과보다 다른 목적을 중시하게 되고 필연적으로 조직이 파행으로 운영되는 것을 방치하게 된다. 아니라고? 그 징후는 지난 총선부터 여실히 드러났다. 당시 여러 유권자들이 지적했던 것처럼 선관위의 일부 조직은 선거 절차를 준수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소수의 야권 지지자들이 결과를 조작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가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선관위는 해당 주장에 대해 매우 수동적으로 반응했으며 일부 핵심 자료를 공개하기를 거부했다. 그 음모론에 살을 덧붙이고 뼈를 입혀 키운 것은 일부 극우 유튜버들이나 편집증 환자들이 아닌 바로 선관위 자기 자신이었다.  

그뿐인가. 작년 4월 보궐선거에서도 선관위는 친여 성향의 TBS의 ‘일(1)합시다’ 캠페인은 문제 삼지 않았지만, 야당이 제시한 ‘보궐선거 왜 하죠?’ ‘내로남불’ ‘우리는 성 평등에 투표한다’ 등의 문구는 못 쓰게 하였고 심지어 오세훈 후보의 아내가 신고액보다 세금을 30만 2천 원을 더(그렇다, 덜이 아닌 더) 냈다는 사실을 선거 당일 투표장 앞에 정정내역 공고문으로 배치했다. 과연 후보의 배우자가 세금을 30만 원 더 냈다는 사실이 유권자들의 선택에 영향을 줄 사안이라 긴급하게 알릴 소식인가. 

하지만 선관위는 이 모든 논란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바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막강한 친여 인사들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선관위의 파행적 운영을 비판하는 보고서는 윗선으로 전달될 때마다 어디론가 종적을 감췄을 것이고 이 조직을 감시할 여당은 그들을 옹호하기 바빳으며 청와대는 그 조직을 개편하기는 커녕 조해주 상임위원의 임기를 연장하는 꼼수를 부렸다. 다시 묻겠다, 이 대참사가 왜 발생했냐고? 문재인의 인사 때문이다. 외교가, 부동산이, 소주성 정책이 마찬가지로 대참사를 일으킨 것처럼.

흔히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민주주의란 한 국가의 운영이 최대 다수의 의지와 신념을 반영하는 시스템을 의미하기 때문이고, 그 핵심이 바로 선거이기 때문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 절차적 정당성은 민주주의의 알파요 오메가나 다름없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는 민주주의의 역사는 모두 이 선거권을 가지기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은가.

그런 선거가 전례없는 파국을 맞이했다. 절차적 정당성에 대한 믿음 없이는 민주주의는 유지될 수 없다. 오늘 선관위는 부정행위는 절대로 발생할 수 없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선거법을 어긴 것이 부정이 아니라면 무엇이 부정이란 말인가. 그것은 아내에게 거짓말을 들킨 남편이 모텔방에서 후배 여직원과 나오다 적발된 상황에서 나는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았다는, 그런 되도않는 변명을 늘어놓는 것이나 다름없다. 유권자들의 분노는 정당하다. 

과거 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는 동쪽의 소련을 치기로 결심한다. 유럽 제 1의 인구와 자원 그리고 방대한 영토를 가진 바로 그 소련을. 하지만 전쟁 초 소련의 군대는 너무나 허약하게 붕괴했다. 개전한지 불과 3개월 만에 붉은 군대는 약 2백만 명의 전사자를 내며 서부전선의 거의 모든 사단이 붕괴했다. 이렇게 커다란 피해를 낸 데에는 독일군의 우수한 작전수행능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스탈린의 군부 숙청이 큰 기여를 했다. 자신의 권력을 공고하게 하기 위해 스탈린은 대숙청을 실시했고 이는 군 수뇌부 조차도 피할 수 없었다. 소련군 내에서 전차의 유용성을 알아차린 미하엘 투하쳅스키 원수는 물론이고 셀 수 없이 많은 장성/영관급 장교들이 시베리아 형벌지로 쫒겨나야 했다. 심지어 독소전의 영웅 주코프 원수까지도 이때 숙청의 위기를 맞기도 했으니 평범한 장교들은 어떠했겠는가. 거기에 소련군에는 정치장교라는 독특한 보직이 있었는데 이들은 주로 군사경험은 부족하지만 공산주의 사상이 투철한 사람들로 채워졌고 이 때문에 일선 부대들은 혼란에 빠지기 일수였다. 개전 초기 키예프와 하르코프를 비롯한 많은 도시가 불타고 약 400개 사단이 분쇄된 데에는 스탈린이 저지른 인사참사가 상당부분 공헌을 한 것이다.   
   
이 정부는 이념 뿐 아니라 국가를 운영하는 방식도 스탈린과 매우 흡사하다. 그가 실시한 파행적 인사는 경제, 주거, 외교, 금융, 방역을 짓밟다 이제는 민주주의의 꽃마저 꺾어 쓰레기통에 쳐박았다. 게다가 문재인 정부의 가장 큰 비위중 하나는 바로 대통령의 친구를 울산시장에 당선시키기 위해 청와대가 조직적으로 선거에 개입한 사건이다. 자 이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문재인의 선관위를 불태울 것인가, 아니면 민주주의가 불타도록 방치할 것인가.



2022. 3. 3.

사전투표하세요

 

지난 총선 이후 나는 선거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유권자와 후보의 정당한 권리라고 주장했고, 또 그런 행동을 비난하는 것은 타인의 마땅한 권리를 억압하는, 일종의 폭력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타인의 권리를 함부로 윽박지르며 억압해서는 안 된다. 설령 그 결과가 정치공학적으로 불리할지라도.

하지만 나는 사전투표에 나서는 것이 마땅히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여론조사를 보면 약 80% 이상의 유권자들이 반드시 투표에 나가겠다고 답하지만 실제 투표율은 그보다 늘 10%가량 낮다. 인간은 늘 자신의 의지를 과신하니까.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실천할 수 있었다면 우리 모두는 지금쯤 멋진 전문직에 몸짱이 되지 않았겠는가. 그뿐만 아니라 코로나가 크게 확산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의 의지를 선거 당일의 당신이 배신할 가능성이 더더욱 크다. 산술적으로도 매일 20만 명의 사람들이 코로나에 걸린다면 선거 당일 약 115만 명의 유권자들이 자가격리 중일 것이고 그중 실제로 투표에 나설 생각이었던 85만 명의 유권자들의 마음은 지금과 사뭇 다를 수 있다.

나는 나 자신을 믿지 않는다. 오랜 시간 트레이딩을 해오는 동안 내 전망은 수도 없이 틀렸으며 때때로 손절하고자 했던 자산이나 포지션을 제때 버리지 못했고 트레이딩의 원칙을 너무나도 많이 어겼다. 따라서 나는 3월 9일의 나 자신을 믿지 않기로 했다. 나는 사전투표에 나설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사전투표를 꺼리는 분들에게 나는 이렇게 권했다. 정부를 심판하고자 하는 당신의 의지보다 야당 대통령 후보를 비롯한 여러 야당 지도부의 분노가 더 크다고. 그리고 선거에서 질 경우 우리가 겪을 후폭풍보다 그들이 겪을 고난이 더 클 것이다. 그런 그들이 사전투표를 택하지 않았는가.  

사전투표하세요.     

2022. 2. 26.

코리안 싸이코

 

운동권들의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현실인식이 실제와 완전히 동떨어진, 일종의 가상현실에 기반한다는 점이다. 진중권 교수는 이를 신랄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 그들은 늘 불편한 사실을 차단하고 자신들의 매트릭스로 도피한다고. 그리고 그 매트릭스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이들의 눈에는 현실이 꿈이요, 자신들의 꿈이 곧 현실이다. 객관적인 지표로 보아도 이번 정권의 외교가 처참하게 실패했음에도 "국제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가기 때문에 세계정세를 올바르게 바라보는 훈련이 되어있는 우리 586세대가 외교를 주도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우상호 의원의 발언을 보면 그들의 매트릭스가 우리의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져있는지 알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우리가 두 발을 디딛고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는 곳은 그 매트릭스가 아니지 않은가. 북한이 남한의 영토를 포격하고 우리의 땅에서 시민과 젊은 병사들이 죽어나가며 중국이 대만의 방공지역을 매일같이 침범하는데다 러시아의 탱크가 키예프를 향해 돌진하는 바로 이 현실이다. 국제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도덕과 당위가 아닌 철과 피 뿐이다. 인류의 역사가 늘 그랬듯이. 그리고 그런 세계에 사는 정상인의 눈에 운동권들의 저런 현실인식은 미친사람의 절규처럼 들린다.

코리안 싸이코. 그리고 진짜 비극은 그 앞에 노스가 아닌 사우스가 붙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2022. 2. 7.

평창 여자아이스하키 팀을 떠올리며

지난 2018년. 집권 2년 차를 맞은 문재인 정부는 북한과의 성급한 대화에 나섰고 그 첫 희생양은 바로 여자 아이스하키 선수들이었다. 처음에는 공동 응원단과 올림픽 공동 입장만을 계획했지만 청와대의 누군가가 더 큰 상징성을 강조하기 위해 남과 북의 선수를 한 팀으로 묶자는 아이디어를 냈고 그 제안은 빠르게 현실화되었다. 북한이 평창 동계올림픽에 참가하기로 선언한 직후 남한은 북에 단일팀에 대한 제안을 했고 북한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이는 청와대의 발표로 최종 확정되었다.

개막식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서 팀 스포츠에 새로운 선수들을 편입하라는 주장은 얼핏 들어도 말이 되지 않았지만 그 순간 우리는 이념이 현실을 지배하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념은 미사일을 불상의 발사체로 증거인멸을 증거 보존으로, 그리고 전과 4+범을 유능한 대통령 후보로 둔갑시키곤 하는데 불과 23명의 어린 선수들의 꿈을 찢어놓는 것쯤이야. 엔트리에서 탈락한 한 선수가 용기를 내어 그와 같은 결정의 부당함을 알렸지만 청와대는 각하의 권위로 그들의 목소리를 침묵시켰고 그 결과 선수들은 이름조차 낯선 외지인들과 호흡을 맞춰볼 새도 없이 떠밀리듯 빙판에 올라야 했다. 청와대는 그것이 새로운 시대의 공정이라 말했다.

당시 여자 아이스하키팀은 유로 챌린지에서 3위, 삿포로 동계 아시안 게임에서 2위, 세계 선수권대회 디비전 1그룹 A에서 2위에 오르며 착실하게 성적을 쌓아가고 있었고, 또 임진경 선수와 박윤정 선수는 한국 팀에 합류하기 위해 원래의 국적을 버리고 한국인으로 귀화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들이 선택한 조국은 그녀들을 이념의 제물로 바쳤다. 결국 한국은 8개 국가가 참가한 대회에서 전패를 기록하며 개최국이 꼴찌를 기록하는 수모를 당하고야 말았다.  

당시 우리는 무엇을 했던가. 나를 비롯한 대다수의 국민들은 그릇된 철학을 가진 정치인이 젊은 선수들의 공정한 기회를 박탈하고 미래를 유린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들의 비극에 눈을 감고 다수는 허황된 평화쇼와 내셔널리즘에 한껏 취해 있었다. 거의 전 연령에서 국민들은 이념과 쇼를 위해 선수들의 꿈을 앗아간 것을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이념을 위해 소수를 희생시켜도 된다는 국민들의 허가를 받은 문재인 정부는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우리는 그 선수들이 겪었던 것과 똑같은 비극을 감내해야 했다. 처음에는 천안함과 연평도의 유족이, 그리고 현역에서 복무하던 젊은 남성들이, 그리고 집을 찾던 신혼 부부들이, 그리고 구직서를 들고 회사를 오가던 취준생들이, 그리고 저소득 노동자들이, 그리고 자영업자가, 그리고 세입자들이, 그리고 곧 온 국민들이 평창의 비극을 겪어야 했다. 그때마다 이념이라는 싸구려 독주에 한껏 취한 불량배들은 자신들의 의도는 선했노라고 국민들을 윽박질렀고 좌파 언론인들은 국민들에게 희생을 요구했다.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수구세력의 책동, 혹은 낡은 반공주의의 잔재라는 낙인이 찍힌 채 불태워졌던가. 하지만 그 희생자들의 명단에 청와대와 민주당 권력자들의 이름은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자신들의 상처를 외면하던 국민들이 같은 정치인들에게 같은 방식으로 뒤통수를 맞는 것을 본 그 어린 선수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치즘에 저항하던 한 목사의 시를 나지막이 읊지 않았을까.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누군가가 이 정부가 어디서부터 엇나가기 시작했냐고 물을 때 우리는 마땅히 한때 해맑게 웃던 그녀들의 얼굴을 떠올려야 할 것이다. 

2018년 평창 여자아이스하키팀 (남북단일팀 구성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