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2. 5.

신과 함께, 그리고 정의와 함께

태초로부터 정의(Justice)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철학의 가장 중요한 물음 중 하나였다. 그리고 최초의 사상가들과 철학자들이 등장한 이후 몇천 년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의를 선과 악이라는 절대적이고 이분법적인 개념으로 구별해왔다. 선한 존재가 행하는 것이 곧 정의이며, 또 그 존재는 정의를 행하기 때문에 선하다는 것. 따라서 정의를 논하는 것은 어떤 것이 더 신의 뜻에 더 맞는지를 논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태생적으로 태고의 철학은 종교와 가까이 맞닿아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신과 그의 대리인들이 다스리던 세계가 붕괴한 이후 인간 중심의 세계관이 문명의 주류로 자리 잡자 사람들은 시대에 맞는 새로운 관념을 찾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선악의 개념을 버리고 자신들의 편리와 행복을 정의의 기준을 삼기 시작했다. 이렇게 퍼지기 시작한 공리주의는 구성원들의 행복의 합을 극대화하는 것이 정의의 기준이라는 원칙을 내세웠다. 이는 18세기 말 당시 퍼지기 시작하던 자본주의적 가치관과도 대체로 일치했기에 서구사회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20세기 초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사람들은 서구사회의 한계를 경험했고 동시에 공리주의가 온전한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문제점 역시 깨달았다. 가장 유명한 공리주의자, 제러미 벤담의 경우 사회 전체의 행복을 개선하기 위해 소수의 불량배나 부랑아들을 가둘 수용소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는데, 이런 사회시스템은 가장 극적으로 구현한 것이 바로 나치였다. 국가권력을 장악한 그들은 한 명의 장애인을 보조하는데 사회적 비용이 과도하게 지출되기 때문에 그를 제거하는 것이 다수의 행복을 증진시킨다고 생각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그렇게 독일이 지배하던 유럽 전역의 소각로에서는 수도 없이 많은 장애인들과 정신질환자들, 동성애자들이 불타며 비누와 카펫, 그리고 한 줌의 재로 사라지고 말았다.

번역: 한 명의 유전병 환자를 위해 국가는 매일 5,50마르크의 비용을 지불한다
/ 그 5,50마르크는 한 건강한 가족이 하루를 살 수 있는 돈

전후 정의에 대한 논쟁은 이런 시대적 배경으로부터 출발했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도 했던 존 롤스는 해묵고 비틀린 공리주의 파편 위에 몇 가지 원칙을 재정비하여 새로운 정의론을 완성했다. 그는 정의의 개념에 무지의 베일이라는 일종의 사고실험을 도입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천국에서 한데 모여 회의를 연다고 가정하자, 그들은 자신이 부자로 태어날지 혹은 가난한 구두공의 아들로, 아니면 자폐인으로 태어날지 알 지 못한다. 어떤 사회적 지위나 배경을 가질지 모르는 상태에서 사회구성원들이 동의할 수 있는 시스템이 정의롭다는 것이다. 그의 정의론을 대입한다면 공리주의적 관점으로 장애인을 학살하던 나치의 사회시스템은 정의롭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태어나기 전 무지의 베일 상태에 있었다면 장애인으로 태어나 학살당할 수도 있는 그 시스템에 합의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는 이론이 아닌, 우리가 본능적으로 느끼는 잣대이기도 하다. 호모 사피엔스가 신이라는 존재를 창조하기도 전에 영장류들은 흑과 백, 선과 악, 아와 비아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철학자들이 공리주의라는 개념을 도입하기 전부터 사회적 동물인 우리는 개인이 아닌 공동체의 이해득실을 따져가며 규범을 마련했다. 롤스가 태어나기 전에도 인간은 공감능력을 발휘해 수천 년, 혹은 수만 년 동안 장애를 가진 개체들을 돌보고 먹여 살렸다. 철학자들이 발견하고 정의 내리기 한참 전부터 이 잣대들은 우리의 본능에 내재되어 있던 셈이다. 


*               *               *


최근 장애인 자식을 가진 한 유명인이 촉발시킨 논쟁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본능적으로 느끼는 정의의 기준과 그의 해명이 상충하기 때문이다. 당사자들과 그 추종자들은 해당 사건을 철저하게 흑백의 관점으로 끌어내리려 한다. 상대가 유죄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나쁜 사람이며, 따라서 내가 행하는 것은 정의롭다. 선 혹은 악 만이 존재할 수 있는 이진법의 세계에서 나의 정당함을 입증하는 것은 곧 상대의 불의를 증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유명인이 선고가 나온 바로 그날 대중에서 자신의 입장을 공개한 것은 해당 교사의 유죄판결이 곧 자신의 무죄판결과 동일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우리의 세상은 0과 1로만 이루어진 곳이 아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그 둘에게만 국한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 유명인은 언어폭력을 저지른 교사를 교육계에서 퇴출시켰기에 자신의 행동이 정당했다고 믿겠지만 동시에 그는 여러 장애우들과 그 부모들에게서 헌신적인 태도로 일하던 유능한 교사를 앗아갔다. 그는 장애를 가진 자신의 아들을 일반 학급에 편입하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는데, 그 결과 다수의 아이들이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덩치도 더 큰 자폐아에게 폭행을 당했다. 그리고 본인의 해명에 따르면 이런 일은 새 학교에서도 반복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의 공리주의적 본능은 그의 행동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무지의 베일 뒤에서도 이 불편한 기분은 가시지 않는다. 설령 우리의 아이가 자폐아로 태어난다고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멀쩡한 아이들이 그에게 지속적으로 얻어맞거나 노출된 성기를 보고 트라우마를 가지는 시스템에 찬성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옳지 못하다. 내가 설령 장애인으로 태어났어도 그런 제도는 옳지 못한 것이다. 그와 그의 아내는 자신의 아이에게 장애가 있기 때문에 학교와 사회 전체에게 무제한적인 이해와 인내를 요구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무제한의 인내는 부모조차도 보여줄 수 없다. 입장을 바꾸어 아들이 자기보다 더 나이가 많고, 더 힘이 세고, 더 자폐가 심한 학우들과 같은 반이 되어 폭행을 당할 때에도 그들은 자녀의 고통을 인내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런 요구는 매우 이기적이고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그의 작품들을 좋아한다. 그가 창작한 등장인물들은 매우 단순했다. 나쁜 놈은 나쁘고 착한 놈은 무슨 짓을 벌이더라도 결국 착하게 끝난다. 그래서 그럴까. 그는 이 복잡한 사람들이 다양한 사안으로 얽힌 이 문제를 자꾸 선악이라는 이진법적 시각으로 접근한다. 상대는 유죄판결을 받은 죄인이고 그를 상대하는 나는 엄청난 고통을 받았다고. 물론 나는 발달장애를 겪는 아들을 가진 그의 아픔과 상처에 공감한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보다 덩치가 큰 자폐아에게 맞아야 했던 아이들과, 그 성기를 보고 놀랐을 여자아이들과, 소송에 시달리며 폭력 교사라는 자괴감에 시달렸을 선생과, 따르던 선생님을 잃고 덩그러니 놓인 다른 장애우들과 또 그들을 눈물로 보살피며 탄원서를 쓰던 다른 부모들에게도 공감한다. 그렇기에 나는 안타까운 그의 결정과 행동을 비판할 수밖에 없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신이나 다름없는 것처럼 아이들 역시 부모에게는 신일 것이다. 장애가 있는 아이라면 더더욱. 세상 모두가 야훼에게서 등을 돌려도 아브라함이 그래서는 안 되는 것처럼 부모와 아이의 관계도 그럴 것이다. 그야말로 신과 함께.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신은 정의롭지 않다. 더욱이 그 아이가 상처입히고 괴롭히는 이들도 누군가에게 소중한 신 아니었던가. 자식을 신처럼 여기며 편들어 주겠다는 아비의 부정을 누가 뭐라 하겠나, 다만 정의까지도 알뜰살뜰 챙기겠다는 그의 무모한 이기심과 과도한 욕심에 혀를 끌끌 찰 뿐이지. 

댓글 13개:

  1. 불문율은 올바른 표현이 아니고 뭐라고 해야할까요....
    까치밥 정도로 포현할까요..
    사회가 고도화되니 체리피커들이 많아져서
    까치밥도 못남기는 시대가 된것 같아요..

    답글삭제
    답글
    1. 한편으로는 장애가진 자식을 둔
      부모의 마음에 들어가본적이 없기에
      영화 를 한 번 더 보고 와야겠네요..
      자식이 장애인인 부모들은 두 가지
      죄의식을 가진다고 합니다.
      하나는 사회 민폐에 대한 죄의식
      또 하나는 자식에 대한 죄의식..
      두 번째와 연결되어 부모들은
      한 가지 소원이 있다고 합니다.
      자식보다 하루 늦게 죽는 것
      상처받은 사람만 남은 재판에서
      선생님과 주호민씨 그리고 주호민씨의
      아이 그리고 반 친구들까지
      기억을 잊게해주는 침 대신
      서로에게 침 뱉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네요..
      생각이 많아지는 밤입니다

      삭제
    2. 영화는 입니다

      삭제
    3. 마더가 생략이 되네요..?

      삭제
  2. 명문입니다. 제가 추상적으로 머릿속에서만 생각했던 걸 이렇게 명쾌하게 쓰시네요. 개인적으로 좋아했고 같은 창작자로서 존경했던 사람이었지만 이번 사건으로 크게 실망했습니다.

    답글삭제
  3. 지체장애인 가족이 있고, 장애인 복지시설에서 20년정도 일한 경험을 가진 제 입장에서 보자면 일단 해당 사건의 선생님이 특수학교 교사라는 이유만으로 헌신적인 선생님이라고 보는 시각에 대해 불편함을 느낍니다. 물론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문제없고 헌신적인거 맞습니다만 실제로 특수학교 교사에 의한 학대사건이 심심찮게 벌어지고 대부분의 경우 학교에서 쫒겨나면 갈 곳이 없는 장애아들의 학부모들이 문제 삼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극히 일부만 알려지는거 뿐입니다. 일반학교에 지체장애인 자식을 보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나라에 특수학교가 절대적으로 부족해서인데 장애아-비장애아 사이에서 벌어지는 폭력사건에서 가해자의 대부분이 비장애아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장애아의 부모들은 웬만하면 자식을 일반학교에 보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아시겠지만 우리나라에서 특수학교를 일반주거지 근처에 설립하는건 매우 힘든일입니다.. 제가 일했던 시설도 거의 10년에 걸친 타협 끝에 카톨릭 교구의 중재로 100미터 주변에 아무 것도 없던 빈 땅을 사서 어렵게 설립됐었는데 지난 30년간 도시가 확장되면서 주거지가 들어섰고 지금은 쫒겨날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런 학교가 하나 사라지면 또 수백명의 장애아들이 어쩔 수 없이 일반학교로 보내지겠죠. 주모씨가 고소를 남발한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아쉬움을 느끼지만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거 같아서 함부로 비난할 순 없을거 같습니다.

    답글삭제
    답글
    1.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특수교사분에 대한
      워딩은 이해가 가질 않네요.
      그 분 그정도면 헌신적이고 또 다른
      장애아 학부모도 특수교사분께 감사를
      표했습니다.
      주씨의 경우 여러번의 교사 교체 및
      녹음기 건으로 문제가 됐던거고요.
      또한 타임라인을 살펴보면
      주씨가 좋은 부모일지언정
      좋은 학부모는 아닌걸로 사료됩니다.

      삭제
    2. 제가 그 분을 직접적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뭐라 하긴 힘들지만 재판에서 나온 객관적인 사실, 폭언만 보자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다른 장애아 학부모들이 선생님을 두둔하고 문제제기를 하는 학부모를 못 마땅하게 생각하는 상황은 위에 제가 적은 이유로 인해 유사한 사건이 벌어지면 볼 수있는 매우 전형적인 현상입니다. 이건 장애아 교육관련 빈약한 시스템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 딱 집어 누구의 잘못이라 하기도 힘들어요.

      삭제
    3. 세상에 완벽한 인간은 없고 결함이 있기에
      서로가 서로의 잘못을 용서해가며
      서로가 서로의 버팀목이 되는게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씨는 기대기만 할 뿐
      누군가의 버팀목으로서의
      역할을 거부했기에 지탄을 받고있죠.

      주씨에게 고소당한 선생님은
      주씨 아들의 선처 호소를 위하여
      바바리 피해 아동 학부모에게 찾아가
      주호민 아들을 용서해달라고 말했습니다.
      피해 아동 학부모는 그만큼 주씨 아들을 위해
      헌신하는 이유가 뭐냐고 묻자
      선생님은 “그래도 제 제자잖아요.”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게 헌신이 아니면 뭡니까?
      주씨는 그전부터 마음에 안드는 담임들을
      7번이나 교체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출장을 핑계로 피해아동에 대한
      대응이 미흡하기도 했습니다.
      이걸 모두의 잘못으로 몰고 가는게
      도통 이해가 가질 않네요

      장애인 교육관련 빈약한 시스템은
      제가 깊이 알고 있지 않아 모릅니다.
      다만 막말로 장애인 지원 맡겨놨습니까?
      계속 선생 바꿀거면 집에서 홈스쿨링해야죠.

      한가지 확실한건 댓글 쓰시는 분이 재판만 보려고 하시면
      지금 도덕에 관한 논쟁은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장애인 아동의 문제는 제쳐두고 장애인 부모로서
      받은 톨레랑스의 부채는 갚지 않고
      재판으로 가는 주호민씨가 제눈에는
      전혀 도덕적이지 않습니다.

      삭제
    4. 쉽게 말해서
      자신의 문제는 ‘좋게 좋게’ 해결하고
      타인의 문제는 엄격하게 재판가는 모습이
      체리피커이자 프라라이더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주호민씨 작품의 세계관은
      ‘좋게 좋게’였고 그 점이 실망스럽다는 거죠.

      삭제
    5. 다른 걸 다 떠나서 ‘이때까지 다른 장애아 학부모들이 교육서비스에 나름 만족해왔다고 추정할 만한 수준의 교사 하나를 잃었다.‘ 정도가 적합한 표현이 아닐까 싶어요. 주인장님께서 ‘헌신적인’ 이라고 보신 건 그 나름대로 또 독단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삭제
    6. 독단이라 함은 7명을 바꾼 주씨가 아닐까요.

      나와 내 자식은 법이 보장한 내 권리를
      최대한으로 누려야하는것른 당연하고,
      법률적으로 단순히 강제전학 보내면
      끝인 장애인 아동을 선처호소한 선생님의
      학대적 발언은 법률로서 심판받음 또한
      당연하다.
      다만 이미 장애인 아동의 잘못은
      (누군가의 호소로)
      용서받았기에 그냥 넘어가는것이 옳다.

      이게 주씨 생각인데
      저는 주씨가 악랄해보이네요.

      삭제
  4. 정말 글을 잘 쓰시네요 소름이 돋네요

    답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