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4. 30.

이태원 클래스 그리고 I의 시대

 

정직하고 착한 주인공이 세상에 굴복하지 않고도 성공하는 스토리, 너무나 뻔한 클리셰로 범벅된데다 아이고야, 손발이 오그라드는 유치뽕짝을 매 화마다 4분의 2박자로 펑펑 터뜨리는 드라마. 그런데 또 이렇게 기승전결이 모두 뻔한 청춘 드라마에 울컥하고 열광하는 촌스러운 사람들이 꼭 있다. 마치 나처럼.   

진부하게 우리네 인생을 사계절에 비유한다면 내 여름의 정점은 이태원과 함께 시작되었다. 청바지를 골반까지 내려 입은 흑인 아저씨가 F로 시작하는 단어를 연신 외쳐가며 술병을 이리저리 흔들고 이색적인 군복을 입은 미군들이 두셋 조를 짜 완장을 차고 순찰을 하던 골목은 어느새 세련된 바와 이국적인 음식점들로 물들여지기 시작했고 한때 서울의 대표적 게토였던 거리가 뉴욕의 소호로 탈바꿈하던 바로 그 순간, 나와 내 또래들은 삶에서 가장 무더운 시절을 맞이했다.

나와 당신들이 이 드라마에 열광한 이유도 그 때문이지 않을까. 코로나로 좁은 집 안에 감금된 우리는 장면마다 등장하는 이태원의 골목들을 보며 그 좁은 거리를 구석구석 누비며 노래하고. 춤추고. 울고. 웃고. 사랑하고. 이별하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 모든걸 누리던 게 당연했던 시절. 한번 시작된 밤은 동틀 무렵까지 끝나지 않았으며 쌍팔년도 군사정부 시절의 계엄령 같은 영업제한을 들이미는 짓 따위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던 바로 그 시절. 하지만 한번 지나간 젊음이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그 시대에 영원한 작별을 고했다. 안녕.

그렇게 드라마 이태원 클래스는 잃어버린 시대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번듯한 대학 졸업장 한 장에 사지만 멀쩡하다면 취업도 하고 집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두 손에 꼭 쥐고 사회의 발을 들여놓은 앳된 얼굴의 청년들은 이윽고 참혹한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대학만 가면 연애할 수 있다는 말에 속았던 MZ 세대들은 이제 대학만 졸업하면 취직하고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다는 말에 또 한 번 속아, 그만 잃어버린 세대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긴 그들의 아버지들과 형들조차도 자신들에겐 너무나 당연했던, 취업 내집마련 결혼 뭐 그런 것들이 마치 에르메스 버킨백처럼 한청판 사치품이 될 줄은 몰랐겠지. 포기와 좌절을 거듭해온 이들이 전과자, 외국인, 성소수자, 고졸 인플루언서 등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로 구성된 단밤 사람들에게 공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과거에 유행하던 청춘드라마는 주로 회사에 입사하여 열심히 일해 승진하는 주인공을 그려내곤 했다. 능력을 인정받아 부서장이 되고 본부장으로 승진하고 해외 지부를 개척하는 뭐 그런 이야기들. 하지만 청춘들의 욕망은 미생에서 비정규직으로 격하되었고 불과 5년 만에 자영업자로 탈바꿈했다. 장가의 회장이 산업화시대의 성공을, 그리고 실장 오수아가 취직해서 성실하게 일하면 잘 풀릴 거라던 MZ 세대 이전의 성공을 상징한다면 그들과 맞부딪치고 싸우는 단밤의 아웃사이더들은 이태원을 누비던 젊은이들의 모습과 닮아 있다. 뒷골목 자영업자와 고졸 헤비 인스타 유저가 대기업과 싸워 이기는 스토리-이태원 클래스의 인기가 어딘가 모르게 서글픈 이유는 그것이 평균적인 MZ 세대가 꿈꿀 수 있는 욕망의 최대치라는 사실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               *               *

코로나와 함께 이태원의 상권이 몰락했던 것처럼 우리의 젊음 역시 점차 사그라들고 있고, 그렇게 바야흐로 한 시대가 가고 또 다른 시대가 열리고 있다. 새롭게 을지로와 압구정의 로데오 거리가 젊음을 빨아들이고 있으며 길거리에서는 와이드 팬츠가 스키니진을 밀어낸지 오래. 이는 감히 우리의 시대라고 부르던 지난 10년과는 달리 미래의 10년은 완전히 모습으로 펼쳐질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는 투자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판데믹에 맞서는 정부가 공격적으로 재정지출을 늘리면서, 또 정치인들과 유권자들이 자신들이 통과시키는 법안들의 잠재적 비용을 고려하지 않기 시작하면서 미래는 불쾌한 인플레이션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고 이제 세계 경제는 그 초입에 들어섰다고 생각한다. 물론 8.5%에 달하는 미국의 CPI는 조만간 잦아들 것이고 공급망 개선과 기저효과의 반전은 연준의 공격적 금리인상과 맞물려 그 절댓값은 낮아지겠지만 사회 저변에 깔린 인플레이션 압력은 장기간 정치인들과 소비자, 그리고 기업의 어깨를 짓누를 것이다. 

투자자들은 자산시장이 폭락할 것이라는 사람들과 혹은 여전히 성장주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사람들로 나뉘어 갑론을박을 벌이지만 대개 미래는 모두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펼쳐지지 않나. 인플레가 지속된다면 인해 현금 보유자들의 실질 구매력은 시나브로 녹아내릴 것이고 그를 다잡기 위한 중앙은행과 정부의 정책은 기업들에게 부담을 가중시킬 것이다. 이태원을 오가던 시절에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오늘 밤 압구정이나 을지로에 나섰다가는 아재소리를 듣기 십상인 것처럼 지난 10년간 통용되던 투자의 법칙을 미래에 적용시키는 것은 실패와 조롱으로 끝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럼 미래가 어떻게 되겠냐고? 그걸 누가 알겠는가. 나는 코로나의 타격으로 세계가 저점에 있던 2020년 4월부터 향후 경제는 인플레이션의 역습을 맞을 것이라고 예견했고(링크) 그것이 향후 투자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던 금융시장의 소수 중 하나였지만 인플레이션은 내 전망보다 더욱 빠르게, 그리고 더 강하게 밀어닥쳤다. 2020년 7월의 글에서 나는 투자자들이 얼마나 많은 빚을 냈는지에 따라 수익이 정해질 것이고 동시에 자신들의 근로소득이 휴지가 되는 것을 경험할 것이라고 예측했고(링크), 2021년 10월에는 투자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으니 기본으로 돌아가 비싼 자산을 팔고 값싼 자산을 매입해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링크) 그 이후 고평가 성장주는 평균적으로 벤치마크 인덱스를 약 15%가량 하회했다. 그리고 바야흐로 2년 3개월 만에 미국의 실질금리가 마이너스의 영역을 벗어나고 있다. 이 시점에서는 비우량 자산을 레버러지해서 매입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인플레이션은 둔화될지언정 사그라들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레버리지의 비용은 계속해서 증가할 것이다. 빚으로 매입한 자산이 저평가되었거나 우량하지 않다면 비용은 수익을 넘어설 것이고 투자자들의 고통은 배가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직은 적극적으로 디레버리징에 나서야 할 시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재는 우리는 막 인플레이션의 초입을 지났고 아직도 시장에는 잠재 인플레이션을 과소평가하는 자산들이 다수 존재하며 다소간의 급격한 경기변동을 견딜 수 있다면 그들은 충분한 수익을 가져다 줄 것이니까.    

최근의 주식시장의 부진으로 많은 투자자들이 고통받고 있다. 하지만 본디 자산시장은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기 마련이고 당신이 트레이딩이 아닌 투자를 하고 있다면 시장의 작은 사이클에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잘못된 투자를 하고 있다면 당신의 고통은 남들보다 클 것이고 또 오래 지속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태원 클래스라는 드라마가 한 시대의 시작과 끝을 보여주는 것처럼 투자의 패러다임에서도 하나의 시대가 끝났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으니까. 다시금 자신의 포트폴리오가 철 지난 시대의 방식을 따르는 건 아닌지 고민해 볼 때라고 생각한다. 

댓글 20개:

  1. 주인장님. 간만에 올리신 글 너무 잘봤습니다.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인장님 글을 보고 공부하면서 좋은 수익률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감사의 표현 꼭 하고 싶습니다. 한가지 궁금한점이 있습니다. 바쁘신중에도 감히 여쭤보고자 합니다. 얼마전 10y-2y 장단기 역전이 일어났습니다. 현재는 다시 플랬해졌는데, 이를 두고 경기침체가 온다. 안온다 많은 얘기가 많습니다. 10년-2년 장단기 금리 역전 시그널은 경기침체를 알리는 상당히 정확한 시그널이라고 알고 있고, 만약 경기침체가 온다면 연준은 금리를 다시 내려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정도의 금리레벨이면 채권을 매입하거나, 그 후에 연준이 금리를 내리면 다시 한번 기술주가 아웃퍼폼 할 것 같은데 이 부분은 어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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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연준이라는 조직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수십년간 쌓아온 통화정책의 신뢰도가 무너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를 감안하면 다음 불황이 어떤 방식으로 올 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기대인플레이션을 강하게 억누르지 않는다면 과거처럼 공격적인 금리인하와 양적완화로 대응하리라고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이미 그런 징후는 벌어지고 있습니다. 미국 주가가 약 20% 가량 하락한 뒤엔 연준이 다소 완화적인 메시지를 냈는데 이번엔 주가가 고점에서 그만큼 하락했는데도 연준은 계속해서 매파적인 시그널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미 2022년의 연준은 과거와 다르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성장주들은 세계 밸류체인과 통화정책, 그리고 거시환경이 지난 10년과 동일하게, 혹은 더욱 우호적으로 변할 것이라는 가정 아래 프라이싱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아닐 가능성이 크죠. 그래서 성장주 내에서도 새로운 거시환경에서 살아남는 회사와 그렇지 못한 회사가 나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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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늦은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정성스레 답변 해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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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코리안 리처드 번스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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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부동산레버리지도 고통의 시간을 보내게 될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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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과거의 사례들로 볼 때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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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최근 곡물, 에너지, 광물 등의 원자재가 뜨는게 붉은 여왕 가설과 밀접해 보여요. 남들 달리는 만큼만 딱 달리겠다는 포지션인거죠. 개인적으로 예측하는건 원자재가 2010-2016년과 마찬가지로 원자재가 하락하는 구간에서 역-골디락스 존으로 인플레는 높지만 성장률은 낮은 스태그플레이션 상태를 연준이 인정할겁니다. 폴볼커를 언급한 FOMC는 과연 금리를 어디까지 올릴 것인가 기대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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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려되는건 2010-2016 당시는 세계경기가 디플레 상태였고 지금은 인플레라는것.. I의 시대는 아마 중국 외환보유고를 털면서 끝날겁니다. 중국에서 올해 1분기 초 외국인의 채권 순매도가 처음으로 발생했습니다. 중국은 과연 서방의 금융패권을 인정할지도 궁금하네요. 청나라 채권이 생각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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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원유,천가 섹터를 2년 전부터 리서치 중인데 선생님 말씀대로 많이 올랐다는 지금까지도 지나치게 저평가 되어있습니다.
    공급측은 아무리 보수적으로 넉넉히 보아도 3년 이내에 유의미하게 늘릴 수 있는 여지가 없는 상황입니다.
    사실상 전세계적 경기침체 시나리오를 제외한다면 유가 100불 이상이 뉴노멀이 되는 게 당연한 상황이죠
    하지만 시장 참여자 대부분은 20년 나스닥 강세장 + 신재생에너지 + esg의 영향으로 원유,천가 업계를 거의 생각도 안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 기회가 있다고 봅니다.
    특히 유럽은 지나치게 설익은 신재생으로 패권을 옮긴 영향으로 결국 큰 고초를 장기간 겪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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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대학교 복학한 직후 부모님이 용산으로 임장가신다기에 따라 나섰다가 이태원에 처음 가봤는데, 녹사평부터 해밀턴까지 사람으로 미어 터지고 횡단보도 녹색불 켜지면 도로 꽉차는게 장관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외국인들도 많고, 특히 군복입은 미군들 엄청 많았는데, 미군기지 이전한 후로는 이태원에선 볼 수 없게 되었죠.

    그게 2017년 여름이었고, 그 해를 기점으로 젠트리피케이션으로 공실이 많아지면서 문제가 계속되던 와중에 이태원클래스가 방영되고 인기를 끌면서 오 이태원 다시 많이 방문하겠네? 하자마자 바로 코로나가 터진 기억이 납니다.

    코로나 한창일때 거리에 파리 한마리 없고 거리 절반이 공실일때도 봤는데, 이젠 코로나 직전 수준으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이태원이 근 5년간 다이내믹한 풍파를 겪었는데, 안정화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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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HMM님이 이태원 젠트리피케이션 관련해서 글 쓴 것도 있어요 이태원 클라쓰에도 장가골목이라는 내용으로 비슷하게 언급하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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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https://hugin00munin.blogspot.com/2017/06/blog-post_24.html?m=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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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좋은글 항상 감사합니다.
    주말 지나고 출근했는데 블로그 글 올라와 있으면 기분좋게 읽고 있습니다.
    저는 1년 반 정도 전부터 S&P 500 적립식 지수추종하면서 채권 대신 필수소비재 1/3정도 사서 리벨런싱하는데요 요즘 너도나도 지수추종(저도 마찬가지지만)적립식으로 하겠다는 서학개미들이 많잖아요? 지수추종도 철지난 투자 패러다임이 되는걸까요? 거기다가 SSO 같은 2배 레버리지 비율 섞어서 1.5배 정도의 레버리지로 적립하는데 이것도 위험이 큰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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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모두가 산 주식은 오르기 어렵습니다. 더 살 사람이 없기 때문이죠. 좀 더 정확하게는 실적기대치가 하늘 끝에 가 있는터라 실망시키기 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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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분명 메시지를 주신 거 같은데 지금까지의 10년이 앞으로의 10년과 패러다임이 다를 것이라는 것은.. 지금까진 나스탁 슨피 불패였다면 앞으로는 다를 것이라는 걸 시사하는건지.. 제 소양으로는 메시지가 안읽히네요.. 인덱스투자마저 다시 재고해봐야될 10년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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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도 일개 투자자에 불과합니다. 다만 나스닥은 밸류에이션상 위험한 구간이라 전 보유하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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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덕분에 힘든 장 너무 춥지 않게 지나고 있습니다
    매번 좋은 글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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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코인은 어떻게 될까요? 물려있는데 지금이라도 정리하는게 나으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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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작성자가 댓글을 삭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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