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내용은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드라마가 세계적으로 흥행하게 된 데에는 456명의 참가자가 처한 현실이 우리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이 밀폐된 공간에 갇힌 것처럼 코로나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실내에 격리되었고 마음속 상자 안에 담긴 고독은 더욱 깊어졌다. 참가자들을 통제하는 진행요원들의 의상 역시 방역을 지시하는 이들이 입은 레벨 D의 방호복을 닮았다, 색상만 조금 다를 뿐. 하지만 그들이라고 뭐가 다를까. 선홍색 슈트 안에 갇힌 진행요원들이 서로 눈빛조차 나누지 못한 채 콜록대며 모스 부호로 소통하는 것처럼 우리가 교감할 수 있는 영역 역시 0과 1로 이루어진 디지털세계로 쪼그라들었다. 인터넷이 우리를 더 넓은 세계로 인도할 것이라는 바람과는 반대로 우리는 좁은 방 안으로 구속되었으며 따듯한 타인의 온기가 있어야 할 곳은 덕지덕지 붙은 악플로 도배되었다. 참가자들이 복잡하고 구불구불한 통로를 거닐며 헤메듯 우리 역시 드넓은 온라인 공간에서 길을 잃었다, 자신을 인도해 줄 누군가의 등짝을 찾아서.
이 게임의 세트장에서는 모두가 누군가의 감시를 받는다. 마찬가지로 코로나 이후의 세계에서 우리 역시 누군가의 감시에 놓여있다. 빅 테크 기업들은 당신의 구매내역과 소비습관, 검색 빈도, 인간관계, 심지어 사소한 성적 취향까지 모두 속속들이 캐내어 자신들의 광고주들에게 팔아 치우고 있다. 마찬가지로 빅 브라더는 당신의 동선과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꿰고 있으며 개인에 대한 정부의 통제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다. 그래서 홉스가 국가라는 존재에 리바이어던이란 괴수의 이름을 달아주었나 보다. 소셜미디어 회사들은 마우스를 몇 번 클릭하는 것 만으로도 트럼프 같은 막강한 정치인들 조차도 벙어리로 만들 수 있으며 빅 브라더는 당신이 런닝머신에서 어느 정도로 뛰어야 하는지까지 규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선을 넘어서면 당신은 범죄자가 된다. 어디선가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탕.
이렇게 코로나와 금융시장의 패닉으로부터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빅 테크와 빅 브라더를 피해 세상 밖으로 나와 마주한 것은 양적완화로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자산들 가격이었다. 마치 참가자들의 숙소 천장에 붙은 거대한 저금통처럼, 내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손만 뻗으면 내것일 수도 있던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 그렇게 우리는 모두 벼락거지, 아니 탈락자가 되었다. 남은 생존자들은 한정된 자원을 두고 제로섬 게임을 벌이기 시작한다. 제한된 일자리를 두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문과와 이과가, 중년과 대졸자가, 여자와 남자가, 그리고 시민권자와 외국 노동자들이 줄다리기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가 어찌 이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에 공감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 드라마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그려낸 참으로 불쾌한 우화이며 잔혹한 동화와도 같다.
나와 겹치는 부분이 있어 그럴까, 가장 긴 여운을 남긴 등장인물은 서울대 경영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조상우였다. 게임을 거치며 소시오패스로 흑화한 줄 알았던 그에게 연민을 넘어 경외감을 느꼈던 이유는 그가 너무나 절박하고 합리적인 이유로 죽음을 택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라운드인 오징어 게임에서 그는 패배했다, 이제 그는 여느 탈락자와 같이 죽어야 했다. 하지만 기훈이 상금을 포기하고 게임을 중단할 테니 함께 집에 가자고 손을 내밀며 인간미를 내비치는 그 순간, 그는 주저 없이 나이프를 뽑아 자신의 목에 박아 넣었다. 바로 강새벽의 목을 찌른 곳과 정확하게 같은 그 자리에.
게임이 중단된 사이 잠시 쌍문동에 들렸을 때, 아마도 상우는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을 것이다. 노모에게는 두 가지 자랑거리가 있었으니 하나는 서울대 경영대를 수석으로 들어간 아들이고, 또 다른 하나는 평생을 바쳐 쌍문동 시장 한 구석에 마련한 작은 가게였을 테지. 모진 팔십여 년의 세월을 버텨가며 살아온 그녀에게 그 둘은 마치 훈장과도 같았으리라. 하지만 이제 아들은 시퍼런 수의를 입은 범죄자가 될 것이고 늙은 그녀는 평생을 바친 그 가게가 경매로 넘어가 헐값에 팔려나가는 것을 목도할 것이다. 그래서 상우는 다시 오징어게임에 참가하기로 결심한다. 어머니를 그 지옥에서 건져내기 위하여,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것이 평생을 여의도에서 살다 몰락한 그의 마지막 베팅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믿고 따르던 알리를 속여서 배신했다. 피 흘리며 죽어가던 강새벽이 게임중단을 요청할까봐 그녀를 살해했다. 어찌 그들의 목숨과 내 사랑하는 어머니의 삶을 저울질하랴.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자신을 죽였다. 오로지 기훈의 손에 456억을 쥐어주기 위해서. 그렇다면 저 바보 같은 형이 나를 가엽게 여겨 우리 어머니를 살려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겠노라는 기훈의 약속도 계약서나 각서도 없었지만, 그는 그 가느다란 희망 하나만으로도 주저 없이 나이프를 들어 자신의 목을 힘껏 찔렀다. 선물로 60억을 베팅했다 몰락한 그는 마지막으로 그 가냘픈 희망에 목숨을 걸었다.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그는 나이프로 내가 넘지 못할 선은 없다고 답한 셈이다. 자신의 죽음 그 너머까지도.
이 모든 장면을 묵묵히 지켜보던 프런트맨에게서 우리는 공정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외쳤다, 바깥과는 달리 오징어게임의 세계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고, 하지만 정말 그랬나. 다른 참가자들을 얼마든지 패 죽일 수 있는 깡패 덕수와 치매 노인이 함께 데스게임을 치르는 것이, 또 힘이 센 알리와 가냘픈 새벽이 같은 여성이 줄다리기를 펼치는 것이 과연 공정한가. 두루미와 여우에게 똑같이 호리병에 담긴 수프를 내어준다고 과연 여우가 그걸 공정하다고 느낄 것인가. 아니, 또 프런트맨의 머리 위에 있는 001번 참가자의 존재는 어떻고.
그런데도 프런트맨이 이 게임이 공정하다고 믿는 것은 살아남은 자신의 과거를 정당화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그는 결코 기훈 같은 참가자가 아니었을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상우에 더 가깝지 않았을까. 함께 게임에 참가한 수백의 동료들이 죽어가는 것을 목도했고 또 그 중 몇몇은 자신의 손으로 직접 탈락시켰을 것이다. 타인의 찢긴 살점을 즈려밟고 결승선에 도달한 그의 인간성과 영혼은 이미 피범벅이 되어 만신창이나 다름없었을 거라고 쉬이 짐작할 수 있다. 무너진 그의 자아와 양심을 지탱하던 것은 역설적으로 오징어 게임이었다. 바깥세상은 불공정하고 불평등하며 부조리하지만 오징어 게임은 공정하고 평등하기에 합리적인 곳이고 거기서 살아남은 자신은 옳다는 그 믿음, 그 믿음이 없었다면 그는 진작에 무너졌으리라.
이런 사고방식은 프런트맨 뿐 아니라 오일남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서도 기훈에게 내기를 제안한다. 그리고 기훈에게 묻는다, 당신은 아직도 사람을 믿느냐고. 이처럼 그에게 게임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합리화하는 절차와도 같다. 그대들이 믿는 휴머니즘이란 얼마나 얄팍하고 희소한가, 따라서 인간성을 배신하고 의심하며 죽고 죽이고 살아온 나의 삶은 틀리지 않았노라. 그것이 오일남의 진짜 속내였을 것이다.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하면 오징어게임의 여섯 단계는 그가 걸어온 삶을 상징하는지도 모른다. 나이로 짐작건대 일제강점기에 태어났을 그는 해방과 내전을 겪었을 것이고 그 시기에 살아남는다는 것은 마치 456명의 참가자가 아수라장에서 각자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이던 1차 게임과 흡사했을 것이다. 전후 남북으로 나뉜 한반도에서는 자유 진영이냐 공산권이냐를 두고 뽑기처럼 줄을 잘 서는 것이, 또 줄다리기처럼 편을 나누어 상대를 섬멸하는 것이 생존의 관건이었다. 전후 대한민국에서는 함께 등을 맞대고 싸웠던 군인들이 쿠데타로, 개발독재의 시대에서는 호남과 영남이, 또 87년 항쟁 이후엔 YS와 DJ가 마치 오징어게임의 2인1조의 구슬치기처럼 등을 돌리고 싸웠고 서로에게 상처를 안겼다. 이후의 대한민국은 세대 간의 싸움이 되었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386들은 자신보다 먼저 태어난 산업 세대의 등을 떠밀어 떨어뜨렸고 이제 집과 일자리를 빼앗긴 MZ세대는 운동권 세대를 증오하고 있다. 마치 일렬로 서서 앞사람이 개척한 길을 따라 걷다 앞사람을 밀어버리던 5번째 다리 건너기 게임처럼. 그리고 그 모든 게임의 끝에는 가장 폭력적이고 원초적인 오징어 게임이 기다리고 있다. 마찬가지로 평생토록 잔인하게 경쟁자를 짓밟으며 살아온 오일남의 인생에 남은 재미와 기쁨이라곤 야만적인 오징어 게임 뿐이다. 뇌종양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오일남은 자신이 참가할 여섯 개의 게임을 이렇게 설계했다. 젊어서는 아들에게 변신로봇도 사주지 못하고 끝끝내 가족도 없이 쓸쓸히 죽어간 그가 그 게임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 아닐까, 아니야. 나는 잘못 살지 않았어.
훌륭한 연출과 각본에도 불구하고 드문드문 불편함을 느꼈던 것은 감독이 의도적으로 정치/사회적 메시지를 끼워 넣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은 삶을 찾아 탈북했다는 강새벽은 그래서 남한이 더 살기 좋냐는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고, 성기훈은 나는 열심히 일만 했을 뿐인데 경영진들이 잘못해서 회사가 부도가 났다고 성을 냈으며, 사람의 목숨을 책상 위에 떨어진 머리카락 한 올만큼이나 하찮게 여기는 VIP들은 모두 외국인 갑부들이다. 친북, 반재벌, 그리고 반외세. 그렇게 [우리민족끼리]라는 표어로 대표되는 90년대 운동권들의 유니버스가 저변에 아스라이 녹아있는 오징어 게임의 세계관은 그 시절 교련복만큼이나 쉰내를 폴폴 풍기고 있다. 더욱이 우리는 지난 5년간 그 철지난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정치인들이 사회와 시민의 삶을 어떻게 박살냈는지 겪지 않았는가, 그런 메시지들이 거북한게 당연하지
또 황동혁 감독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실패를 사회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성기훈이 어머니의 등골을 빨아먹으며 사는 것도, 경마에 매달리는 한심한 인간인 것도, 아내와 이혼하고 딸의 생일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것도 모두 비뚤어진 사회 때문이다, 혹은 돈만 아는 자본주의 탓이라고 항변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극 중 성기훈이 근무했던 쌍용차는 리만사태 직후인 2009년 1월에 파산을 선언했는데 이후 12년간 이 회사는 대부분의 분기에 적자를 기록하며 또 다시 파산했다. 같은 시기 재규어, 롤스로이스, 벤틀리 등의 고급메이커는 물론이고 사브나 피아트-크라이슬러 같은 대중적인 제조사들까지도 부도, 혹은 경영 위기에 봉착했는데 과연 쌍용차의 부진이 경영진의 잘못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게다가 자본주의는 경쟁력이 없는 기업을 도태시켜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시스템인데, 자력생존이 거의 불가능한 쌍용차가 11년간 연명한 것은 거의 억지에 가까웠고 그 과정에서 많은 인력과 자본과 생산요소가 낭비되었다. 성기훈이라는 한 노동자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삶이 망가진 이유는 회사가 그를 해고했기 때문이 아니라 노동시장이 충분히 유연하지 못해 그가 울산이나 평택의 공장으로 재취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속했던 노조 역시 그 비합리적인 자원 배분에 일조하지 않았나.
얼마 전 에디슨모터스가 쌍용차의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쌍용차의 인수를 검토했던 지인들에게 전해 듣기로는 일부 인수 희망자들은 회사의 브랜드가치나 기술보다 공장 부지와 같은 유형 자산에 높은 가치를 매겼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드라마를 대단히 높게 평가한다. 무엇보다 감독이 오감을 사용해 극단적인 대립을 강조하는 장면들은 너무나 매력적이다. 파란딱지와 빨간딱지로부터 출발해 추억의 유년기의 놀이는 잔혹한 살육 파티로 이어지고 파스텔 톤의 아기자기한 세트장에서 참가자들을 돈을 위해 서로를 패 죽이고 찔러 죽인다. 재즈 선율이 울려 퍼지는 동시에 화면에서는 두개골이 깨지고 뇌 조각이 흩뿌려지며 사방으로 핏방울이 튀어 오른다. 정밀한 반도체공장이나 의료현장에서나 볼 수 있을것 같은 진행요원들의 의상과 더러운 참가자들의 체육복, 심지어 색상까지도 극명하게 대조되는 진한 핑크 vs 녹색. 큰돈을 내고 쇼를 관람하는 VIP들과 큰돈을 벌기 위해 목숨을 걸고 쇼를 펼치는 참가자들. 막강한 권력으로 게임을 주최한 오일남은 동시에 게임의 참가자이며 그것도 가장 약한 치매 노인이지 않은가. 쌍문동의 수재 조상우와 쌍문동의 백수 성기훈. 그리고 1번과 456번. 도무지 어울릴 수 없는 것들을 한데 모아 잘 어우른 이 잔혹동화는 내가 본 최고의 드라마로 손꼽아도 손색이 없다, 시나리오도 연출도 미술도 그리고 음악도.
시즌 2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