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Arts and Culture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Arts and Culture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24. 4. 21.

모에화 된 라오콘-이윤성

1863년 에두아르 마네가 신작 [올랭피아]를 공개하자 관객들은 크게 분노했다. 기존의 회화에서 여성의 누드를 그릴 때에는 대부분 신화적 인물을 통해서 성스럽게 표현했는데 마네는 대놓고 창녀로 추정되는 여성의 누드를 그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새 작품은 르네상스 미술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였던 [우르비노의 비너스]의 구도와 도상을 차용했으니, 대놓고 비너스를 창녀로 바꿔 그린것 아닌가. 기법 면에서도 엄격한 인체비례와 정확한 원근법을 십계명처럼 따르던 기존 회화와는 달리 비례도, 원근법도 맞지 않는 거친 붓질로 나체를 그렸으니 보수적인 기존의 관객들과 미술계가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잘난 상류층 나으리들께서 한데 모여 헐벗은 여자의 그림을 점잖게 관음 하기 위해서는 누드화들이 성스럽게 표현되어야 했는데 마네는 대놓고 창녀를 거칠게 표현했으니 그들이 어찌 찔리지 않았을까. 이 발칙한 작가는 그렇게 유산계급의 위선과 가식을 적나라하게 꼬집었다.

이윤성-Laocoon

오늘날 이윤성의 작품들 바라보는 관객들의 마음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서양화를 전공했던 그는 미술학도들이 연습하고 배우던 고전미술의 소재들을 차용하면서도 이를 일본 만화의 기법들로, 또 매우 선정적으로 표현한다. 이번에 공개된 신작들의 소재 역시 그리스 신화-라오콘에서 따온 것인데, 헬레니즘 시대에 제작된 동명의 조각이 미켈란젤로나 엘 그레코를 비롯한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기에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이다. 그리고 작가는 발칙하게도 본래 남성인 라오콘과 그 두 아들을 여자로 바꾸어 그렸다. 이를 모에화라고 하던가. 그뿐만 아니라 본디 고귀한 인간의 정신을 표현했다는 라오콘을 야하게 뒤틀다니. 이 아이콘이 미술사에서 가치는 위상을 고려하면 이 얼마나 발칙한 시도인가. 흑백으로만 묘사된 이미지와 100호를 넘어서는 커다란 크기로 인해 작품의 섹슈얼한 요소들은 한층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이를 일본 망가처럼 표현했으니, 아무리 전시장이라지만 이 그림들을 쳐다보고 있기가 왠지 부끄럽다. 그리고 그를 통해 관람객들은 자신의 가식을 깨닫는다. 비너스나 아프로디테의 누드를 실컷 보고 즐기던 작자들이 마네의 누드 앞에서 얼굴이 벌게지며 화를 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는지 알 것도 같다. 

리히헨슈타인과 무라카미 다카시는 기존의 미술계가 낮추어보던 카툰이나 망가도 훌륭한 현대미술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들을 따라하는 무수한 아류들이 뒤를 이었다. 아트페어에 가면 터줏대감처럼 늘 있는, 비슷비슷하게 쉽고 귀여운 이미지를 공장처럼 찍어내놓고 와닿지 않는 해설만 주절주절 달아둔 채 평론가들과 수집가들의 눈에 들기 위해 아양을 떠는 그림들.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쉽게 입고 버리는 SPA 브랜드의 옷을 팔겠다고 억지웃음을 짓는 점원들을 마주하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이윤성의 작품은 발칙하게도 우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되묻는다. 왜, 유럽 미술관에 걸린 누드화들 앞에선 셀카 찍어 인스타에 올리더니 이건 못 올리겠어? 뒤샹이 모나리자로 섹드립을 날릴 때엔 꺅꺅 거리며 멋있다고 하더니 모에화 된 라오콘은 마음에 안들어? 뭐 네 눈에 고전은 고상하고 망가는 좀 없어보여? 하지만 고만고만한 취향을 가진 부자들의 눈에 들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귀여운 척 애교를 떠는 뻔한 그림들보다 도발적 질문을 던지는 그의 작품이 훨씬 더 매력적이지 않은가. 마네의 올랭피아가 그랬던 것처럼.

더욱이 우리는 문화계의 홍위병들이 몰려다니며 멋대로 예술을 재단하고, 밥줄이 간당간당한 예술가들이 그게 두려워 자아 검열을 펼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야말로 한국판 문화대혁명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작가들은 얌전한 모범생이 되어 논쟁적이지 않은 작품들만 내놓고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 예술이 그렇게 고분고분했던가. 반 고흐, 쿠르베, 세잔, 피카소, 뒤샹 등 미술사에 이름을 남긴 많은 작가들이 세상에 등장했을 때 그들은 모두 당시 미술계를 지배하던 주류에 반기를 들던 악동들이었다. 그래서일까. 요즘 들어 특히 이윤성 같은 발칙한 작가들을 만나는 것이 반갑게 느껴진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마네의 다른 작품,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관람객의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걸어야 했다고 한다. 심기가 불편한 관객들이 자꾸 우산으로 그림을 훼손하려 했기 때문이랬던가. 그리고 아마 이윤성의 전시회에도 이처럼 심기가 불편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미술의 지평을 개척하고 넓힌 것은 얌전한 모범생들이 아닌 짖궂은 악동들이었다. 거듭된 자기검열과 과도한 PC의 시대에 이윤성의 작품들은 이렇게 말하는듯 하다. 이게 불편해? 그럼 병원에 가, 미술관에 기웃거리지 말고.

좌: 이윤성의 라오콘                        우: 바티칸 미술관의 라오콘 

2024. 2. 13.

Adarashi Fantasy-최경태

구글 검색창을 열고 최경태 작가를 검색해 보자. 아, 그전에 성인인증부터. 사람들이 붐비는 지하철이나 사무실이라면 화면을 가릴 것을 강력히 권한다. 변태로 매장당하고 싶지 않다면. 20세기에 마광수가 있었다면 21세기에는 최경태가 있다고 할까. 아니 비교조차 할 수 없지, 그의 그림 앞에서는 마광수조차도 얌전한 모범생으로 보일 지경이니까. 그가 표현했던 소재들은 사회적 통념이나 규범을 훨씬 뛰어넘어 있었다. 오죽하면 표현의 자유를 금과옥조처럼 떠받드는 미술계에서도 찬반 여론이 첨예하게 대립했을까.  

1957년에 태어나 뒤늦게 미대를 졸업한 그가 민중화가로 제대로 활동해 보기도 전에 군부정권은 무너졌고 운동권의 시대 역시 막을 내렸다. 동시에 함께 연대하며 투쟁했던 사람들은 시나브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민주화 운동 경력을 스펙으로 삼아 출세 가도에 나섰고 어떤 이들은 일상으로 돌아가 집과 차를 샀다, 그리고 민중화가 노선의 막차를 탄 그만 덩그러니 남아 붓을 들었다 조각칼을 들었다 하며 방황하다 칩거를 시작했다. 그렇게 4년간 웅크려있다 새 밀레니엄이 시작되자마자 그는 세상으로 다시 뛰쳐나왔다. 헐벗은 소녀들과 함께.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가장 센세이셔널 한 포르노그래피 작가는 이렇게 탄생했다.

민중예술에서 포르노그래피로 급격히 전향한 그 배경을 두고 많은 평론가들이 다양한 해석을 덧붙였지만 그는 자신의 변신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 나라에서 화가에게 하지 말라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김일성을 그리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포르노를 그리는 것이었다고. 그리고 전자의 시대가 끝났기에 그는 후자를 택했다고. 작가는 "그래, 나는 포르노가 좋다"라고 외치며 엄청나게 센세이셔널한 작품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보고 있노라면 마광수 따위는 수줍은 새색시같이 느껴지는 그런 작품들을. 그러면서도 그는 사회와 정치를 향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김영삼이 3당 합당으로 대통령선거에 나서자 그는 김영삼의 선거 포스터와 포르노 사진들을 합성해 색정시대라는 작품을 내놓았고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을 당했던 해에는 하체를 노출한 채 다리를 벌린 여성을 작게 그려 넣고 큰 글씨로 "씹새끼들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 가결"이라고 적은 작품을 그렸다. 또 다른 작품에선 개 목걸이를 목에 걸고 팔걸이의자에 교복 차림으로 앉은 여학생의 이미지 위에 "우파 정당 한나라당은 자폭하라"라는 구호를 크게 적어 넣었다.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 공권력이 일일히 정해주던 시대를 살아온 그에게 포르노그래피란 나는 내가 꼴리는 대로 살겠다는 정치적 반항과 저항의 도구와도 같았다.

그는 결국 2001년 개인전을 연 후 음화전시 혐의로 기소되었다. 항소를 거쳐 대법원까지 간 끝에 그는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그의 작품 31점이 압수되어 소각되었다. 당시 그의 전시회 타이틀이 "여고생-포르노그라피2"였으니, 입버릇처럼 표현의 자유를 외치던 미술계와 평론가들조차도 둘로 나뉘어 격렬한 논쟁을 벌일만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 덕분에 최경태 작가는 가장 유명한 포르노그래피 작가가 되었고 이후에도 그는 서정적이면서도 폭력적이고, 도발적이며 변태라고 불릴만큼 센세이셔널한 그 작품세계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한 동료 작가는 그를 두고 이렇게 평가했다고 한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쭉 한결같이 개기는 건 (최)경태 뿐이야"

최경태 작가가 유죄판결을 받은 지 대략 20년이 지났다. 마지막 군사정권의 수장도 죽었고 공권력의 검열과 탄압은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한지 오래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사회는 더욱 자유롭고 관대하게 변했을까. 잊힌 이 작가의 옛 작품들을 다시금 둘러보고 있노라면 불편한 현실을 깨닫는다. 더 이상 자를 들고 치마 길이를 재는 경찰은 없지만 익명성 뒤에 숨어 남의 옷차림을 재단하고 린치를 가하는 인터넷 자경단의 숫자와 영향력은 전례 없이 커졌다. 국민들의 사상을 검열하고 주입하던 이들은 모두 죽고 없지만 이제 우리는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핑계로 서로가 서로를 단속하고 검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거기에 위화감을 한가득 끼얹은 것은 한때 작가와 연대하며 공권력에 대항하던 운동권 정치인들의 오늘날 모습일 것이다. 작가가 21세기에도 숨가쁘게 표현의 자유를 외치며 공권력에 뻐큐를 날리는 동안 586, 아니 이제 686 정치인들은 권위주의로 무장하고 자신들이 몰아냈던 권력자들이 했던 것과 똑같이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법안을 지지하고 사회적 린치를 조장하며 성적 폭력을 묵인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작가는 억압당하는 민중을 강간당한 여성들로 표현했는데, 그 작가를 지지한다면서 동시에 실제로 어린 여성들의 속옷 안에 손을 쑤셔 넣기에 바빴던 정치/문화계 진보 인사들의 민낯들은 이 아이러니의 표상 그 자체였다. 

그래서일까. 자칭 진보적이라 자처하던 사람들이 헤게모니를 잡아 더욱 억압적인 사회를 만들었던 그 시점에 작가는 창작의 의욕을 잃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꼴려야 그릴 수 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라고 토로했다. 2021년 2월 어느 날, 곡기를 끊고 막걸리만으로 연명하던 그는 차가운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표현의 자유가 무엇이고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지, 그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누구고 또 그 경계는 누가 정하는 것인지. 온갖 질문들을 던지고 억압자들에게 꼴리는 대로 뻐큐를 날리던, 가장 센세이셔널 했던 작가 최경태는 그렇게 우리의 곁을 떠났다.  


기자: 포르노가 더 이상 불법이 아니고 성적인 측면에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다면 작가님은 더 이상 (여고생을) 그리지 않는다는 것인가요?

작가: 예, 그리지 않을 겁니다.


2008년 Adarashi Fantasy전시 작 중에서. 
(그나마 덜 센세이셔널한 작품)


2022. 9. 24.

choc promo (by Sound Providers)

 


주식은 주식일 뿐이고 시장은 시장일 뿐이니 너무 일희일비하지 마세요.

터부 요기니, 그리고 노회.

2003년 베니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도 성대한 비엔날레가 열리던 그 해 여름. 한 동양 여성이 산마르코 대성당 광장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빨갛게 물들인 머리에 경극이나 가부키를 연상시키는 짙은 화장을 한 그녀는 곧 옷을 벗어던지기 시작했고 빨간 속옷만 입은 채 관객들 사이로 걸어 들어가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무척이나 기괴하면서도 에로틱하지만 또 어딘가 서글픈 그녀의 춤사위는 비엔날레를 찾아온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사실 정식으로 초대받지도 못했던 이 무명의 신인은 단번에 가장 유명한 한국 아티스트가 되었으니, 바로 낸시랭-터부요기니가 탄생하던 순간이었다.

여전히 사회에 엄숙주의가 만연하던 시절 미술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시절의 화가란 마치 선비나 계룡산의 도사와도 같은 것이었고 그런 이들과 결탁한 인사동의 화랑들은 카르텔을 형성하며 온 힘을 다해 퇴보하던 중이었다. 그러니 어찌 낸시랭이 이뻐 보였겠나. 젠체하던 이들은 겉으로는 그녀를 관대하게 대하는 척하면서도 그녀의 예술을 저급한, 마치 인스턴트식품과도 같다며 은근히 까내리고 있었다. 그녀가 그런 평단의 분위기를 몰랐을까. 낸시랭은 대중들과 평단에 굴복하기는커녕 근엄한 예술의 성지와도 같던 예술의 전당에 나타나 입던 바바리를 벗어던지고 다시금 비키니 차림의 육신을 대중 앞에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본 대중들은 그녀를 비난하기 바빴지만, 세상에 얌전히 순응하기만 하는 예술이란 게 어디에 있는가. 그녀는 계속해서 위선을 권위로 덮은 예술계와 관음적인 관객 모두에게 당차게 중지를 내밀었다. 

보수적이고 젠체하는 평론가들 앞에 그녀가 비키니 차림으로 등장한지 어느덧 20여 년이 지났다. 더운 여름이 가시기 시작했던 지난 8월 말 그녀의 개인전이 열린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허나 그녀의 전시를 둘러보고 난 뒤 나는 적잖이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 모두와 싸우며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펼치던 낸시랭은 온데간데없고 과거의 영광을 답습하거나, 지나간 작가들의 작품에 올라타거나, 혹은 미디어 아트나 NFT와 같이 한 물 가기 직전의 진부한 트렌드에 영합한 작품들을 보게 될 줄이야. 내가 기억하던 그녀는 결코 그럴 작가가 아니었는데,라고 중얼거리며 전시장을 나서야 했다. 어쩌면 그녀는 지쳤던 것이 아닐까. 대중의 손가락질과 싸우느라, 또 개인적인 아픔을 이겨내느라 더 이상 싸울 힘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김빠진 그녀의 작품을 바라보는 일은 마치 아버지 정수리에 난 흰머리를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서글픈 일이었다..     

하지만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여전히 몇몇 작품은 충분히 도발적이었더라. 인터넷 홍위병들과 PC라는 신을 섬기는 광신도들이 창작자들의 입을 틀어막는, 마치 중세 암흑기와도 같은 이 끔찍한 시대에 그녀가 아니라면 누가 이런 작품을 내놓을 수 있었을까. 그녀는 여전히 권태를 깨부수는 작가였고 또 충분히 도발적인 아티스트였다. 그런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어 얼마나 반가웠던지.

낸시랭_Bubble Coco Woonwoodocheop_캔버스에 유채_112.1×162.2cm_2022

낸시랭_Picnic on the plum tree_캔버스에 유채_162.1×909.9cm_2022


*그리고 그녀는 노래방 기기로 보랏빛 향기를 불렀다.

2022. 8. 28.

글, 그리고 폭력

 


오히려 글을 쓴다는 것은 일정 부분 타인의 정신과 감성을 지배하는 욕구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폭력성을 내재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행간을 따라 읽는 이의 정신은 조작된다. 육체의 하중으로 누르는 게 아니라 언어의 하중으로 누른다. 글은 내밀한 지배욕의 소산이다.


그리고 나는 그 폭력을 너무나도 사랑한다.


written by 하헌기

painted by egon schiele

2022. 8. 15.

가격의 시대

 


책방에서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고전과 명작들이 싼값에 팔리고 시대는커녕 한 계절조차도 살아남지 못할 책들이 비싼 값에 팔리고 있다. 이런 것이 비단 책뿐인가. 우리 삶에 필수적인 것들은 너무나 싼값에 팔리는데 비해 없어도 잘 살 쓸데없는 것들은 터무니없이 비싼 값에 팔리고 있다. 가격은 가치가 아니고 데이터는 지식이 아니며 또 지식은 지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영혼이나 지혜도 담기지 않은 엑셀과 모델을 돌려 튀어나오는 숫자를 가격이 아닌 가치라고 일컫는 우리는 얼마나 오만한가.

우리는 가격이 가치를 꿀꺽 삼켜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 바야흐로 값의 시대다. 가치 따윈 증발하고 그 자리에 희멀겋게 남겨진 소금기 마냥 가격만 남은 시대에 살고 있다. 나 역시 중요하지 않은 일을 하느라 중요한 일을 할 시간이 없는, 그런 모순에 빠진 흔한 바보에 불과하다. 그러면서도 좀처럼 이 어리석음을 끊어내지 못한다. 그 대가가 무척이나 혹독하리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The empire of lights 

paint by René Magritte

2022. 7. 31.

진짜 진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나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입니다. 똑바로 읽어도 우영우 거꾸로 읽어도 우영우. 기러기 토마토 스위스 인도인 별똥별 우영우. 하지만 내가 이상한 변호사라고 불리는 것은 자폐가 있거나 행동이 어눌해서가 아닙니다. 자폐아라고 하지만 나는 서울대학교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한 천재니까요. 한번 보기만 해도 모두 기억하는데 어떻게 일반인들이 저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중간고사든 변호사 시험이든 제게는 오픈 북이나 다름없어요. 게다가 저는 무척 창의적인 변호사에요. 신참인데도 불구하고 경력이 십 년이 넘는 베테랑 변호사들마저도 간과하는 쟁점을 파악하고 즉흥적으로 법정에서 변론에 나서도 훌륭하게 해내는 슈퍼스타입니다. 필드 위에 손흥민이 있다면 법정에는 저 우영우가 있는 셈입니다. 기러기 토마토 스위스 인도인 별똥별 우영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전히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무척이나 모순적인 존재니까요. 아마 여러분들도 느끼고 있을 거에요. 제 능력은 로스쿨에서나 변호사 시험을 치르는데 대단히 유리해요. 이건 장애가 아니라 사실상 초능력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어쩌면 서울법대 창설 이래 최고의 천재인지도 모릅니다. 물론 약간의 핸디캡이 있습니다. 펭수를 좋아하던 김정훈 씨나 지적 장애를 가진 신혜영 씨에 비하면 아주아주 사소한 장애이지요. 게다가 사회생활도 잘하고 직장에서는 최고의 능력자입니다. 또 얼굴까지 아주 예쁜 변호사입니다. 그래서 사내연애도 합니다. 회사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남자 직원이랑요. 심지어 사실 나는 회장님의 숨겨둔 자식이지요. 천재도 아니고 로스쿨도 못 가고 회장님 자식도 아니고 사내 훈남과 연애도 못하는 여러분들은 정말로 이런 저를 보며 동정심을 느끼십니까? 그것 참 신기한 일이네요. 아니 이 경우 이상하다고 하는 게 맞겠습니다. 

존재뿐만이 아닙니다. 제 말과 행동에도 모순이 있습니다. 저는 소덕동을 관통하는 도로의 공사를 막아달라는 사건을 맡아 승소했습니다. 왜냐하면 소덕동은 매우 아름다운 곳이기 때문입니다. 오래된 팽나무가 마을을 내려다보고 서로 돕고 웃는 이웃들이 어울려 지내는 아름다운 동네이지요. 그런 소덕동을 개발하겠다니요. 절대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그 공사를 좌초시켰어요. 아주 뿌듯한 일입니다. 이제 신도시 거주자들은 교통체증에 시달릴 것이고 이미 몇 년간 진행된 공사를 정지시킨 덕에 세금도 낭비되고 말았습니다. 무엇보다 소덕동에 거주하는 총 2513가구 중 과반이 넘는 1557가구가 개발사업에 찬성하며 보상금을 받기를 원했지만 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소덕동을 대표해서 이 일을 막았습니다. 아, 모르셨습니까? 저는 신도시에 어마어마한 땅과 건물을 가지신 최한수 이장님의 변호사입니다. 법무법인 한바다에 수임료를 내는 건 지역 유지이신 이장님이지 저 소덕동 주민들이 아닙니다. 아마 저분들은 길도 좁고 교통도 열악하고 인프라도 부족한 이 시골 동네에서 평생 사시겠지요. 네 그렇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깡촌은 계속해서 깡촌으로 남아있어야 합니다. 물론 저라면 여기에 안 살겠지만요. 여기엔 김밥집 배민도 안되고 고래인형 까페도 없어요. 그렇게 저와 부자 이장님은 소덕동의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나겠다며 어리석게도 토지보상금을 바랬던 저 1557가구의 주민들에게 따끔한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내 사정이 되면 다른 이야기입니다. 어릴 적 살던 강화도가 개발되어 친구 아버지가 보상금을 받았는데 형들이 모두 가져갔다고 합니다. 모처럼 대박이 터졌는데 그 행운을 자기들이 챙기려 하다니. 정말 나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나, 기러기 토마토 스위스 인도인 별똥별 우영우는 기지를 발휘해 그 돈을 되찾아옵니다. 네 친형들을 법정에 세우고 함정에 몰아넣어야 할 정도로 돈은 중요해요. 이건 내 돈이니까요. 돈은 매우 중요해요. 우애를 지키겠다고 돈을 포기하는건 어리숙한 바보예요. 이제 동동삼씨는 그렇게 받은 보상금으로 내 친구 동그라미에게 서울 역세권에 번듯한 신축 아파트도 사주고 비싼 도시의 물가도 걱정하지 않도록 생활비도 넉넉하게 대줄 수 있어요. 음? 지금 1557가구의 소덕동 주민들 이야기를 왜 꺼내는 겁니까? 당신은 지금 본 사건과 전혀 연관성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는 말 못 들어 보셨습니까?? 뒷통수 맞고 싶습니까?  

어린이들은 지금 당장 놀아야 한다는 개똥철학을 설파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참. 기억나십니까? 제가 첫 의뢰를 수임 받았을 때 의뢰인은 저를 못 미더워 했어요. 하지만 정명석 변호사님께서 이 몸이 서울대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라는 것을 알려줬어요. 그제서야 의뢰인은 저에게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로도 궁지에 몰릴 때면 나는 서울대 로스쿨 수석이라는 타이틀을 곧잘 써먹었습니다. 이처럼 간판의 힘은 대단합니다. 보기보다 많은 것을 설명해 주거든요. 나이키나 애플이 브랜드 마케팅에 열을 올리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저의 학부 친구들과 로스쿨 동기들은 오랜 시간 동안 남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대와 로스쿨에 왔어요. 물론 그렇게 공부해 봤자 읽기만 하면 다 기억하는 저를 이길순 없었지만요. 

어린이는 놀아야 합니다. 하지만 맨날 노는 어린이는 좋은 성적을 낼 수 없어요. 네 그렇습니다.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다고 해서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변호사는 될 수 없어요.(어린이 해방군 여러분들은 저 같은 천재가 아니잖아요?) 의사도 될 수 없어요.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지는 건 어려워요. 남들이 부러워하는 동네에 집을 사는 것도 힘들어요. 인스타에 멋진 사진들을 올리는 삶을 살 수도 없어요. 물론 그렇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배우들은 촬영이 끝나면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고층 아파트로 돌아가요. 이젠 서울대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해도 사기 힘든 집입니다. 작가들은 "어린이는 놀아야 합니다"라는 대사를 쓰고 작업하던 노트북을 덮자마자 나서 지인들에게 전문직들과 소개팅을 좀 주선해 달라고 카톡을 보냅니다. 이왕이면 서울대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한 사람이라면 좋겠어요. 물론 답장은 없어요. 시청자 여러분들도 이 드라마를 보는 이유는 나, 이상한 우영우가 변호사라서에요. 이상한 고졸경리 우영우. 이상한 쿠팡맨 우영우. 이상한 백수 우영우. 이런 드라마였다면 벌써 망했어요.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한국 드라마는 주로 세속적 욕망을 자극해요. 그걸 아주 잘합니다. 그래서 재미있어요. 근데 우리들은 참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우영우라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수퍼맨을 창조해놓고 거기에 장애를 한 스푼 얹은 뒤 장애인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요. 그리고 일반 장애인들이 겪지도 않을 상황을 가정해서 사회가 부조리하다며 따끔하게 일침을 가해요. 형들을 고소해서 보상금을 타내는 이야기를 하다, 돈 많은 이장 아저씨가 보상금을 받고 싶다는 동네 주민들의 의사를 묵살하는 이야기를 미화합니다. 나보고 서울대 로스쿨을 나온 천재라고 동네방네 광고할 때는 언제고, 또 곧장 자식을 서울대 보내려고 애쓰는 부모님들을 악당으로 그려요. 갑자기 판자촌이 아름답다며 재개발을 막던 박원순 아저씨나 특목고를 없애자면서 뒤로 자기 아들 둘은 특목고에 보낸 조희연 아저씨 냄새가 나요. 킁킁. 제 이름은 우영우, 앞에서 읽어도 뒤에서 읽어도 똑같지만 드라마는 그렇지 않아요. 앞에서 볼 땐 재미었는데 뒤에서 보니 제작자의 욕망과 컴플렉스를 얄팍한 도덕적 우월감으로 덮어 사회에 일침을 가하겠다는 의도로 범벅되어 있어요. 정말 이상해요. 아. 그래서 제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인가 봅니다.  


*          *          *


허구의 이야기를 다루는 드라마에 딴죽을 걸자면 한도 끝도 없지. 게다가 사회경험도 적고 이해도 얕은 작가들이 작품에서 드러내는 철학적 빈곤이 뭐 어제 오늘의 이야기도 아니니까. 게다가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다큐가 아니다. 하지만 오락영화와 드라마를 양산하는 작가와 감독들이 자꾸 그 선을 넘나드는 시대에 관객과 시청자들에게만 오버하지 말라고 주문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니 나도 그 선을 넘어 다큐라는 돋보기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들여다보련다. 

서울대 로스쿨, 젊은 직원들조차도 수 억의 연봉을 받는 로펌, 그리고 회장님의 숨겨둔 자식이라는 설정까지 이 드라마는 대중들의 세속적 욕망을 한껏 자극하는 장치들로 점철되어 있다. 하지만 정작 매 화에서 작가는 그 세속적 욕망을 부정하는 사건들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우리가 이 드라마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그 점에 있지 않을까. 토지보상은 드라마에서 뜻하지 않은 횡재를 의미하는 클리셰나 다름없다. 이 드라마에서는 그 사건이 두 번 등장하는데 작가는 이에 대해 이상하리만큼 모순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그 차이는 바로 관찰자의 시점에 있다. 삼형제의 난에서는 작가는 보상의 수령자의 시각에서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고 소덕동 이야기에서는 보상금 수령자가 내가 아닌 제3자니까. 우리의 불편함은 입장에 따른 작가의 태도가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에 있다. 우리가 돈을 욕망하는 것은 더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동그라미와 아버지의 입을 빌려 그 욕망을 표출한다. 하지만 수령자가 내가 아닌 타인이 되니 작가는 갑자기 도덕이라는 몽둥이를 꺼내 그들의 욕망을 매섭게 후려치기 시작한다. 마치 시기심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더 나아가 작가는 소덕동을 마치 인디언 보호구역이나 민속촌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묘사한다. 그곳에서 소덕동 주민들은 잘 꾸며진 어항의 관상용 물고기들처럼 도시에서 온 관광객들이 보기 좋도록 정겨운 시골 마을을 연출한다. 하지만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던가. 인디언들도, 또 구한말의 오지 주민들도 지하철과 24시간 편의점, 영어유치원 그리고 신선배송 서비스를 누릴 수 있다면 얼마든지 반길 것이다. 소덕동이 개발되지 않는다면 몰락하는 1차 산업에 종사하는 대다수 주민들에게 그런 편의는 허락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가는 그 사람들의 삶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마치 주말에 차를 몰고 용인 민속촌을 방문한 관람객의 시선으로 #대박핫플 #소덕동을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언제 다시 들릴지 모르는 그 관광지를 보존하기 위해 주민들의 미래를 나락으로 보내는 일조차 서슴지 않는다. 그런 시각은 오로지 자신의 옛 추억을 재현하기 위해 오징어 게임을 열어 455명의 지원자들을 폭력과 죽음으로 몰아넣은 오일남의 정서와도 이어져있다.   

작가의 모순적 시각은 드라마가 설파하는 교육관에서도 드러난다. 작가는 시스템의 정점에 있는 서울대 로스쿨과 고학력 고소득자들인 변호사를 소재로 삼아 시청률을 올리면서도 그 위치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과 경쟁에 부정적인 낙인을 찍는다. 나 역시 경쟁적인 한국 사회가 바람직한지 의문이지만, 이런 과열된 경쟁은 대중들이 가진 욕망의 결과일 뿐이지 결코 원인이 아니다. 물론 내신 5등급인 학생이 2년제 전문학교를 졸업해 소덕동 인근의 빌라에서 살며 중소기업에 다녀도 행복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밋밋한 스토리는 대중의 욕망을 자극하지 않는다. 인기 드라마에는 마치 흙탕물을 일으키는 미꾸라지처럼 대중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무엇인가가 꿈틀대야 하는 법. 그래서 작가는 스토리에 서울대 로스쿨과 고소득자들이 모인 로펌, 그리고 회장님의 숨겨둔 자식을 담았다. 그것들을 욕망하지 않는 이가 어디에 있으랴. 우리 모두는 같은 것을 바라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경쟁이 발생한다. 이를 부정하려면 욕망 또한 부정해야 하는데 제작자와 작가는 대중들의 그 욕망에 기생하면서도 그 결과물은 부정하는 이중적 태도를 취하고 있지 않은가. 앞에서 읽어도 뒤에서 읽어도 똑같고 솔직한 우영우와는 달리 드라마 너머로 보이는 작가가 앞과 뒤가 무척이나 다르다고 느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과거 권위주의의 시절, 정부는 영화와 드라마 제작자들에게 창작물에 정부가 원하는 이데올로기적 메시지를 넣도록 강요했다. 하지만 그런 메시지들이 이야기의 개연성이나 핍진성을 무너뜨리면서 등장하자 되려 설득력은 반감이 되고 시청자들은 종종 그 메시지들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곤 했다. 오늘날 이 이념적 강압은 진영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관객들의 눈은 마치 쫑긋 세운 강아지의 귀와 같아서 작가가 완력을 쓰는 순간 그 의도를 기민하게 알아채곤 한다. 작가나 감독 혹은 배우가 이념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에게도 표현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그대들에게도 그럴 자유가 있으니까. 하지만 평균적인 대중들보다도 교육 기간이나 사회문제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은 사람들이 따끔하게 일침을 놓겠다며 송곳과 대본을 들고 사회의 이곳저곳을 푹푹 찔러대는 것은 정의감이 아닌 도덕적 우월감을 내보이고 싶은 욕망으로부터 나온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의 욕망이 다른 욕망을 저열하다며 훈계하는 웃기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니 작가들은 이제라도 마음을 다잡고 차분히 앉아 훌륭한 오락 TV 드라마를 만드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이 드라마는 정말로 잘 만든 오락 드라마니까. 

2021. 11. 22.

넷플릭스 지옥, 그리고 잡담들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가 그랬나, 주입식 교육에 익숙한 한국인들은 다양한 컨텐츠를 선보일 수 없을 것이라고. 아마 그 말을 넷플릭스 CEO가 들었다면 소리내어 HAHA 웃었을 것이다. 한국 감독과 제작진은 DP에 이어 오징어게임이라는 넷플릭스 사상 최고의 흥행작을 낳았고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켰다. 그런 오징어게임을 2위로 밀어낸 것은 지난주 공개된 지옥이었다. 

사실 드라마의 연출은 다소 미흡하고 일부 에피소드들의 개연성은 떨어진다, 하지만 연상호의 스토리텔링의 정수는 특수한 상황에서 등장인물들이 겪는 아이러니와 모순을 그리며 빛을 발했다. 두 아이를 키우는 미혼모 박정자는 난데없이 찾아온 죽음을 행운이라고 부른다. 하루 종일 일해도 사랑하는 아이들을 제대로 돌볼 수가 없는, 그런 비루한 삶에 찾아온 행운. 자식들을 위해 힘겨운 삶을 이어가던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 죽음도 기꺼이 받아들인다. 자신의 죽음을 중계하는 대가로 30억을 주겠다는 냉혈한들에게 굽신거리며, 울부짖는 아들을 되려 혼내는 그녀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연필 한 자루 훔치지 않고 착하게만 자라온 정진수. 하지만 신은 그에게 지옥을 선고한다. 그것은 신의 장난일까, 장난의 신일까. 우리가 도덕과 규율을 따르는 것은 그것이 정의롭고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벌의 기준이 공정하지 않다면 어떨까. 학창 시절 수학선생님이 "오늘이 21일이지? 21번 나와서 이 문제 풀어봐"라고 외칠 때 21번은 자신이 정신봉으로 맞을 그날의 운명을 결코 공정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정의란 그래서는 안된다. 그래서 정진수는 결심한다. 신의 장난을 살짝 비틀어 정의로 만들겠노라고. 그렇게 그는 예정된 죽음을 받아들인다. 무작위로 찾아온 자신의 죽음이 그래도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데 이바지했다고 믿으며. 

형사 진경훈은 법과 질서를 믿는다. 자신의 아내를 무참히 난도질한 범인이 10년 만에 심신미약으로 풀려났지만 남편은 그에게 복수하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법과 질서를 믿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필사적으로 정진수를 추적하고 의심한다. 왜냐하면 그는 진경훈이 믿는 법과 질서를 위협하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죽음을 목전에 둔 정진수는 그를 양자택일의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당신은 이제 법 혹은 질서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고. 법을 택하면 사회적 질서가 무너질 것이고 질서를 택하면 자신의 신념을 지탱해 온 법을 어기게 된다. 정진수는 그에게 자유 의지에 따라 선택하라고 했지만 사실 애초에 그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법이 하나 뿐인 딸을 심판하게 둘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신이 정진수에게 잔인한 장난을 친 것처럼 신의 반열에 오른 정진수 역시 진경훈에게 짓궂은 장난을 던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를 처참하게 죽인 살인자를 산 채로 불태운 딸, 진희정. 그녀가 살인자의 단말마가 울려 퍼지는 한 가운데 울며 웃는 장면은 소름 끼칠 정도로 슬펐고 또 아름다웠다.


*               *               *

신의 고지를 받은 희생자들은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숨는다. 가장 고통스러운 처지에 놓인 것은 본인이지만 사후 가족들이 겪을 핍박과 박해를 피하기 위해 그들은 달아난다, 그리고 증발한다, 그리고 삶의 마지막을 아무도 없는 산골짜기에서 외로이 맞이한다. 가족도 친구도 없이 홀로. 

그들을 보며 에이즈환자들을 떠올렸다. 후천적 면역결핍증이 성적으로 방종하거나 동성애자, 마약중독자들 사이에서 퍼진다고* 믿는 대중들의 시선 때문에 양성 판정을 받은 이들은 종종 숨곤 한다. 하지만 모든 환자들이 지옥에 갈 죄를 지어 걸린 것은 아닐 것이다. 때때로 억울하게 병에 걸린 이들도 있을 것이고 그중에는 갓난아기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들을 도덕적으로 타락했다고 낙인찍으며 특정 종교는 그들의 존재 자체를 죄악으로 치부한다. 

한번 고지를 받으면 언제고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그들. 그리고 죽음의 과정은 매우 고통스럽고 외로우리라. 또 죽음 너머의 업보는 온전히 가족들의 몫이다. 주변의 따가운 시선과 사회적 매장, 그리고 과격단체의 폭력은 초자연적인 존재나 HIV 바이러스가 아닌 우리 인간들이 같은 인간에게 가하는 폭력이나 마찬가지이다. 지옥은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 누군가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               *               *

공교롭게도 드라마가 공개된 시점에 한국에서 끔찍한 사고가 발생했다. 위층의 남자가 아랫집 여성들을 대상으로 성추행과 협박을 거듭해 경찰이 출동했는데, 남편과 남자 경찰이 1층 현관으로 내려간 틈을 타서 범인인 위층 남자는 아래로 내려와 아내의 목을 칼로 찌르고 그 칼로 딸 역시 난도질했다. 그 자리에 한 여경이 있었지만 그녀는 달아났고 범인을 제압한 것은 1층에 있던 남편이었다. 드라마 내의 진경훈 형사가 겪은 것과 비슷한 사건이 실제로 벌어진 것이다. 

드라마의 후반부 내내 이어진 김현주의 액션 신이 매우 불편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화면에서 신체적 전성기를 훌쩍 넘긴(작중 시점은 2027년) 여자 변호사가 삼단봉을 휘두르고 테이저 건을 쏘며 신체 건장한 깡패들을 여럿 제압하는 동안 우리의 현실에서는 훈련을 받은 젊은 20대 여경 하나가 범인을 두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고 말았다. 드라마와 현실 사이에는 크나큰 괴리가 있다. 일부 PC 주의자들은 성별 간의 차이가 전적으로 사회문화적 학습에 기인한다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의도적으로 컨텐츠에서 남녀 간의 성 역할을 뒤섞으라고 압박하고 있고 이에 굴복한 현대의 창작자들은 개연성을 무너뜨려가면서까지 액션신을 여성 캐릭터들로 채우고 있다. 

이는 또 다른 폭력이다. 그들이 원더우면 아류의 히어로 영화들을 한 해에 수천 편을 쏟아낸다고 해서 평균 여성들의 근력이 자동으로 향상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미디어를 통해 자신들의 왜곡된 이념을 대중에게 주입한다, 그리고 그에 맞추어 현실을 개조하려고 한다. 여경의 채용 확대를 위해 체력검정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내려갔으며 그로 인한 수많은 문제점들은 묵살되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피가 튀고 뼈가 부러지는 것은 가상의 이미지에 불과하지만 자신들의 비틀린 생각을 강요하는 폭력은 현실이다. 어느 쪽이 더 해로울까. 

이 비극은 [여경] 때문에 벌어진 것이 아니다. 그 자리에 장미란이나 여자유도 메달리스트 정보경 선수가 있었다면 다른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참사를 부른 것은 자질이 부족한 사람을 여자라는 이유로 해당 보직에 배치한 잘못된 시스템이다. 그리고 공권력이 힘을 잃으면 가장 먼저 희생되는 것은 약자들이다. 그 이념주의자들의 그런 왜곡된 믿음이 인천 논현동에서 두 명의 여성 피해자를 낳았다. 역설적으로 결과적 평등을 외치는 여성주의의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여성이었던 셈이다. 



*나는 그런 선입견이 사실인지 아닌지 모른다. 

2021. 10. 23.

오징어 게임 그리고 다섯 개의 사족

 


아래 내용은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드라마가 세계적으로 흥행하게 된 데에는 456명의 참가자가 처한 현실이 우리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이 밀폐된 공간에 갇힌 것처럼 코로나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실내에 격리되었고 마음속 상자 안에 담긴 고독은 더욱 깊어졌다. 참가자들을 통제하는 진행요원들의 의상 역시 방역을 지시하는 이들이 입은 레벨 D의 방호복을 닮았다, 색상만 조금 다를 뿐. 하지만 그들이라고 뭐가 다를까. 선홍색 슈트 안에 갇힌 진행요원들이 서로 눈빛조차 나누지 못한 채 콜록대며 모스 부호로 소통하는 것처럼 우리가 교감할 수 있는 영역 역시 0과 1로 이루어진 디지털세계로 쪼그라들었다. 인터넷이 우리를 더 넓은 세계로 인도할 것이라는 바람과는 반대로 우리는 좁은 방 안으로 구속되었으며 따듯한 타인의 온기가 있어야 할 곳은 덕지덕지 붙은 악플로 도배되었다. 참가자들이 복잡하고 구불구불한 통로를 거닐며 헤메듯 우리 역시 드넓은 온라인 공간에서 길을 잃었다, 자신을 인도해 줄 누군가의 등짝을 찾아서.

이 게임의 세트장에서는 모두가 누군가의 감시를 받는다. 마찬가지로 코로나 이후의 세계에서 우리 역시 누군가의 감시에 놓여있다. 빅 테크 기업들은 당신의 구매내역과 소비습관, 검색 빈도, 인간관계, 심지어 사소한 성적 취향까지 모두 속속들이 캐내어 자신들의 광고주들에게 팔아 치우고 있다. 마찬가지로 빅 브라더는 당신의 동선과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꿰고 있으며 개인에 대한 정부의 통제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다. 그래서 홉스가 국가라는 존재에 리바이어던이란 괴수의 이름을 달아주었나 보다. 소셜미디어 회사들은 마우스를 몇 번 클릭하는 것 만으로도 트럼프 같은 막강한 정치인들 조차도 벙어리로 만들 수 있으며 빅 브라더는 당신이 런닝머신에서 어느 정도로 뛰어야 하는지까지 규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선을 넘어서면 당신은 범죄자가 된다. 어디선가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탕.  

이렇게 코로나와 금융시장의 패닉으로부터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빅 테크와 빅 브라더를 피해 세상 밖으로 나와 마주한 것은 양적완화로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자산들 가격이었다. 마치 참가자들의 숙소 천장에 붙은 거대한 저금통처럼, 내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손만 뻗으면 내것일 수도 있던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 그렇게 우리는 모두 벼락거지, 아니 탈락자가 되었다. 남은 생존자들은 한정된 자원을 두고 제로섬 게임을 벌이기 시작한다. 제한된 일자리를 두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문과와 이과가, 중년과 대졸자가, 여자와 남자가, 그리고 시민권자와 외국 노동자들이 줄다리기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가 어찌 이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에 공감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 드라마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그려낸 참으로 불쾌한 우화이며 잔혹한 동화와도 같다.

나와 겹치는 부분이 있어 그럴까, 가장 긴 여운을 남긴 등장인물은 서울대 경영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조상우였다. 게임을 거치며 소시오패스로 흑화한 줄 알았던 그에게 연민을 넘어 경외감을 느꼈던 이유는 그가 너무나 절박하고 합리적인 이유로 죽음을 택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라운드인 오징어 게임에서 그는 패배했다, 이제 그는 여느 탈락자와 같이 죽어야 했다. 하지만 기훈이 상금을 포기하고 게임을 중단할 테니 함께 집에 가자고 손을 내밀며 인간미를 내비치는 그 순간, 그는 주저 없이 나이프를 뽑아 자신의 목에 박아 넣었다. 바로 강새벽의 목을 찌른 곳과 정확하게 같은 그 자리에. 

게임이 중단된 사이 잠시 쌍문동에 들렸을 때, 아마도 상우는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을 것이다. 노모에게는 두 가지 자랑거리가 있었으니 하나는 서울대 경영대를 수석으로 들어간 아들이고, 또 다른 하나는 평생을 바쳐 쌍문동 시장 한 구석에 마련한 작은 가게였을 테지. 모진 팔십여 년의 세월을 버텨가며 살아온 그녀에게 그 둘은 마치 훈장과도 같았으리라. 하지만 이제 아들은 시퍼런 수의를 입은 범죄자가 될 것이고 늙은 그녀는 평생을 바친 그 가게가 경매로 넘어가 헐값에 팔려나가는 것을 목도할 것이다. 그래서 상우는 다시 오징어게임에 참가하기로 결심한다. 어머니를 그 지옥에서 건져내기 위하여,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것이 평생을 여의도에서 살다 몰락한 그의 마지막 베팅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믿고 따르던 알리를 속여서 배신했다. 피 흘리며 죽어가던 강새벽이 게임중단을 요청할까봐 그녀를 살해했다. 어찌 그들의 목숨과 내 사랑하는 어머니의 삶을 저울질하랴.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자신을 죽였다. 오로지 기훈의 손에 456억을 쥐어주기 위해서. 그렇다면 저 바보 같은 형이 나를 가엽게 여겨 우리 어머니를 살려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겠노라는 기훈의 약속도 계약서나 각서도 없었지만, 그는 그 가느다란 희망 하나만으로도 주저 없이 나이프를 들어 자신의 목을 힘껏 찔렀다. 선물로 60억을 베팅했다 몰락한 그는 마지막으로 그 가냘픈 희망에 목숨을 걸었다.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그는 나이프로 내가 넘지 못할 선은 없다고 답한 셈이다. 자신의 죽음 그 너머까지도. 


이 모든 장면을 묵묵히 지켜보던 프런트맨에게서 우리는 공정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외쳤다, 바깥과는 달리 오징어게임의 세계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고, 하지만 정말 그랬나. 다른 참가자들을 얼마든지 패 죽일 수 있는 깡패 덕수와 치매 노인이 함께 데스게임을 치르는 것이, 또 힘이 센 알리와 가냘픈 새벽이 같은 여성이 줄다리기를 펼치는 것이 과연 공정한가. 두루미와 여우에게 똑같이 호리병에 담긴 수프를 내어준다고 과연 여우가 그걸 공정하다고 느낄 것인가. 아니, 또 프런트맨의 머리 위에 있는 001번 참가자의 존재는 어떻고.  

그런데도 프런트맨이 이 게임이 공정하다고 믿는 것은 살아남은 자신의 과거를 정당화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그는 결코 기훈 같은 참가자가 아니었을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상우에 더 가깝지 않았을까.  함께 게임에 참가한 수백의 동료들이 죽어가는 것을 목도했고 또 그 중 몇몇은 자신의 손으로 직접 탈락시켰을 것이다. 타인의 찢긴 살점을 즈려밟고 결승선에 도달한 그의 인간성과 영혼은 이미 피범벅이 되어 만신창이나 다름없었을 거라고 쉬이 짐작할 수 있다. 무너진 그의 자아와 양심을 지탱하던 것은 역설적으로 오징어 게임이었다. 바깥세상은 불공정하고 불평등하며 부조리하지만 오징어 게임은 공정하고 평등하기에 합리적인 곳이고 거기서 살아남은 자신은 옳다는 그 믿음, 그 믿음이 없었다면 그는 진작에 무너졌으리라.

이런 사고방식은 프런트맨 뿐 아니라 오일남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서도 기훈에게 내기를 제안한다. 그리고 기훈에게 묻는다, 당신은 아직도 사람을 믿느냐고. 이처럼 그에게 게임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합리화하는 절차와도 같다. 그대들이 믿는 휴머니즘이란 얼마나 얄팍하고 희소한가, 따라서 인간성을 배신하고 의심하며 죽고 죽이고 살아온 나의 삶은 틀리지 않았노라. 그것이 오일남의 진짜 속내였을 것이다.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하면 오징어게임의 여섯 단계는 그가 걸어온 삶을 상징하는지도 모른다. 나이로 짐작건대 일제강점기에 태어났을 그는 해방과 내전을 겪었을 것이고 그 시기에 살아남는다는 것은 마치 456명의 참가자가 아수라장에서 각자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이던 1차 게임과 흡사했을 것이다. 전후 남북으로 나뉜 한반도에서는 자유 진영이냐 공산권이냐를 두고 뽑기처럼 줄을 잘 서는 것이, 또 줄다리기처럼 편을 나누어 상대를 섬멸하는 것이 생존의 관건이었다. 전후 대한민국에서는 함께 등을 맞대고 싸웠던 군인들이 쿠데타로, 개발독재의 시대에서는 호남과 영남이, 또 87년 항쟁 이후엔 YS와 DJ가 마치 오징어게임의 2인1조의 구슬치기처럼 등을 돌리고 싸웠고 서로에게 상처를 안겼다. 이후의 대한민국은 세대 간의 싸움이 되었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386들은 자신보다 먼저 태어난 산업 세대의 등을 떠밀어 떨어뜨렸고 이제 집과 일자리를 빼앗긴 MZ세대는 운동권 세대를 증오하고 있다. 마치 일렬로 서서 앞사람이 개척한 길을 따라 걷다 앞사람을 밀어버리던 5번째 다리 건너기 게임처럼. 그리고 그 모든 게임의 끝에는 가장 폭력적이고 원초적인 오징어 게임이 기다리고 있다. 마찬가지로 평생토록 잔인하게 경쟁자를 짓밟으며 살아온 오일남의 인생에 남은 재미와 기쁨이라곤 야만적인 오징어 게임 뿐이다. 뇌종양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오일남은 자신이 참가할 여섯 개의 게임을 이렇게 설계했다. 젊어서는 아들에게 변신로봇도 사주지 못하고 끝끝내 가족도 없이 쓸쓸히 죽어간 그가 그 게임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 아닐까, 아니야. 나는 잘못 살지 않았어.
  


훌륭한 연출과 각본에도 불구하고 드문드문 불편함을 느꼈던 것은 감독이 의도적으로 정치/사회적 메시지를 끼워 넣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은 삶을 찾아 탈북했다는 강새벽은 그래서 남한이 더 살기 좋냐는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고, 성기훈은 나는 열심히 일만 했을 뿐인데 경영진들이 잘못해서 회사가 부도가 났다고 성을 냈으며, 사람의 목숨을 책상 위에 떨어진 머리카락 한 올만큼이나 하찮게 여기는 VIP들은 모두 외국인 갑부들이다. 친북, 반재벌, 그리고 반외세. 그렇게 [우리민족끼리]라는 표어로 대표되는 90년대 운동권들의 유니버스가 저변에 아스라이 녹아있는 오징어 게임의 세계관은 그 시절 교련복만큼이나 쉰내를 폴폴 풍기고 있다. 더욱이 우리는 지난 5년간 그 철지난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정치인들이 사회와 시민의 삶을 어떻게 박살냈는지 겪지 않았는가, 그런 메시지들이 거북한게 당연하지   

또 황동혁 감독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실패를 사회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성기훈이 어머니의 등골을 빨아먹으며 사는 것도, 경마에 매달리는 한심한 인간인 것도, 아내와 이혼하고 딸의 생일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것도 모두 비뚤어진 사회 때문이다, 혹은 돈만 아는 자본주의 탓이라고 항변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극 중 성기훈이 근무했던 쌍용차는 리만사태 직후인 2009년 1월에 파산을 선언했는데 이후 12년간 이 회사는 대부분의 분기에 적자를 기록하며 또 다시 파산했다. 같은 시기 재규어, 롤스로이스, 벤틀리 등의 고급메이커는 물론이고 사브나 피아트-크라이슬러 같은 대중적인 제조사들까지도 부도, 혹은 경영 위기에 봉착했는데 과연 쌍용차의 부진이 경영진의 잘못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게다가 자본주의는 경쟁력이 없는 기업을 도태시켜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시스템인데, 자력생존이 거의 불가능한 쌍용차가 11년간 연명한 것은 거의 억지에 가까웠고 그 과정에서 많은 인력과 자본과 생산요소가 낭비되었다. 성기훈이라는 한 노동자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삶이 망가진 이유는 회사가 그를 해고했기 때문이 아니라 노동시장이 충분히 유연하지 못해 그가 울산이나 평택의 공장으로 재취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속했던 노조 역시 그 비합리적인 자원 배분에 일조하지 않았나.   

얼마 전 에디슨모터스가 쌍용차의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쌍용차의 인수를 검토했던 지인들에게 전해 듣기로는 일부 인수 희망자들은 회사의 브랜드가치나 기술보다 공장 부지와 같은 유형 자산에 높은 가치를 매겼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드라마를 대단히 높게 평가한다. 무엇보다 감독이 오감을 사용해 극단적인 대립을 강조하는 장면들은 너무나 매력적이다. 파란딱지와 빨간딱지로부터 출발해 추억의 유년기의 놀이는 잔혹한 살육 파티로 이어지고 파스텔 톤의 아기자기한 세트장에서 참가자들을 돈을 위해 서로를 패 죽이고 찔러 죽인다. 재즈 선율이 울려 퍼지는 동시에 화면에서는 두개골이 깨지고 뇌 조각이 흩뿌려지며 사방으로 핏방울이 튀어 오른다. 정밀한 반도체공장이나 의료현장에서나 볼 수 있을것 같은 진행요원들의 의상과 더러운 참가자들의 체육복, 심지어 색상까지도 극명하게 대조되는 진한 핑크 vs 녹색. 큰돈을 내고 쇼를 관람하는 VIP들과 큰돈을 벌기 위해 목숨을 걸고 쇼를 펼치는 참가자들. 막강한 권력으로 게임을 주최한 오일남은 동시에 게임의 참가자이며 그것도 가장 약한 치매 노인이지 않은가. 쌍문동의 수재 조상우와 쌍문동의 백수 성기훈. 그리고 1번과 456번. 도무지 어울릴 수 없는 것들을 한데 모아 잘 어우른 이 잔혹동화는 내가 본 최고의 드라마로 손꼽아도 손색이 없다, 시나리오도 연출도 미술도 그리고 음악도.

시즌 2를 기대한다. 

2021. 4. 11.

금호미술관 영아티스트전

기분이 들뜬 탓인지 아니면 날씨 탓에 집중력이 흐트러져인지 전시 주제와 상당히 동떨어진 감상들만 마음에 남았다. 

그래도 감상은 감상이니까.


노은주 작가


노은주 작가는 파괴된 콘크리트와 철근을 마치 정물화처럼, 혹은 초현실주의처럼 그려냈는데 이는 바니타스적 정물화를 연상시킨다. 바니타스는 화려한 장신구와 황금 그리고 만개한 꽃과 함께 해골이나 꺼져가는 촛불 시들어가는 꽃을 배치하여 삶의 허무함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정물화인데, 당시의 사회가 전염병과 또 30년전쟁으로 인한 대량학살에 시달렸던 것을 생각한다면 그 염세주의의 배경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으리라.

해골과 꽃다발이 있는 바니타스 정물, 아드리안 판 위트레흐트

당시 정물화의 가장 인기 있는 소재는 과일이나 꽃이었는데 이는 이 오브제들이 풍요 혹은 화려함을 상징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신흥 계층이었던 부르주아와 유한계급은 자신의 풍요를 과시하고 싶어 했기에 이런 꽃과 과일 그림들을 거실에 걸어두곤 했다. 농경 기반의 사회에서 보리나 밀 대신 재배한 과일과 꽃은 늘 가장 사치스러운 오브제였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꽃과 과일 따위로 현대의 풍요를 나타낼 수 없다. 과일보다 자극적이고 비싼 음식은 수도 없이 널렸으며 이젠 꽃 자체보다 그것이 어느 플라워샵에서 왔는지가 더 중요하다. 양재동 비닐하우스의 장미 한 송이의 가격과 니콜라이 버그만의 장미 한 송이의 가격은 아주 다르지 않은가. 그렇다면 16-17세기의 정물 화가들이 21세기에 태어났다면 그들은 무엇을 그렸을까? 청담동을 한 바퀴 돌고 난 뒤 아마 샤넬이나 롤렉스를 그리지 않았을까? 아니면 에르메스나 파텍필립?

주기적으로 기근을 겪고 굶어죽던 중세 유럽의 서민들에게 과일과 꽃이 사치재였던 것처럼 우리에게 명품이 그렇다. 우리는 샤넬을 원한다. 롤렉스를 욕망한다. 아름다워서? 천만에. 그 사치재들이 값나가는 진짜 이유는 쓸모없는 게 희소하기 때문이다. 물건을 들고 다니기에 백팩만큼 편한 게 어디에 있는가. 하지만 에르메스나 샤넬은 백팩을 만들지 않는다. 왜? 백팩은 너무나 실용적이기 때문이다. 실용성은 우아하지 못하다, 아름답지 못하다, 그리고 우아하지 않고 아름답지 않은 것은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사실 이 모순을 설명하기엔 롤렉스가 더 적합하다. 쿼츠시계는 물론이고 0.1밀리 초보다도 더 정확한 핸드폰을 두고 굳이 불편한 기계식 시계를 고집하는 허영 가득한 저 남자들의 왼쪽 손목을 보라. 그들은 아침마다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맞추겠답시고 그 작은 기계장치의 조그마한 나사를 돌리느라 시간을 허비한다. 21세기에 사는 이들이 18세기의 선조들과 같은 불편을 누리기 위해 수백 수천만 원을 쓰고 있지 않은가. 이처럼 실용성은 그 자체로서 심미성의 적이다. 

또 샤넬과 롤렉스가 생산라인에 포드주의를 도입해 한 해 수백만 개의 제품을 대량생산하면서 판매 가격을 혁신적으로 낮춘다면 그대들은 더 이상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아름다움은 절대로 대량생산될 수 없다. 모두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름답지 않다. 이러니 쓸모가 없는 것에 수천만 원을 쓰는 것 보다 더 유혹적인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리고 명품 브랜드들은 이러한 인간의 본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내 말이 의심스럽다면 주말 아침에 백화점 앞에 길게 줄 선 남녀들을 보라. 

이런 현상은 동물들에게도 나타난다. 공작의 화려한 꼬리와 사슴의 뿔, 그리고 수사자의 갈기는 생존에 방해가 되지만 대신 이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여 성선택에서 유리하다. 이성에게 "나는 이런 쓸모없는 것을 달고서도 살아남을 정도로 강인한 개체다"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인간의 꼬리털, 뿔, 갈기는 17세기에는 꽃과 과일이었지만 21세기엔 유라시아 대륙 서쪽 끝에서 제작된 가죽 바구니와 금속수갑이 되었다. 이런 상념을 마음에 품고 17세기의 해골을 오늘날의 콘크리트 더미로 치환한 노은주 작가의 그림을 보며 비어있는 캔버스 한편에 놓인 샤넬과 롤렉스를 상상해본다.



문이삭 작가

사물을 해체하고 재조립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은 이전에도 많은 작가들을 통해 다루어졌기 때문에 이런 시도가 새롭게 다가오지는 않았고 내가 이 작가의 배경과 그 의도를 몰라 작품에 공감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 원인이 작가에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전 조영남 위작 사건(링크)으로 드러났던 것처럼 이미 대중과 현대미술의 괴리는 너무나 벌어져 이젠 양측이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운 경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나는 대중에 가까운 사람이니 내가 교감할 수 없는 작가나 작품의 경우 내 이해와 고찰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왜 현대미술을 이해하기 어려울까? 물론 그 발전사를 모르고서는 납득할 수 없는 맥락이 존재하기 때문도 있지만 그게 유일한 이유는 아니리라. 중세-르네상스 미술과 대중의 관계를 보자. 당시 그림에 숨겨져있던 수많은 도식들, 그리고 종교적 상징과 그 배경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만찬도 단순한 저녁 모임 인증샷에 불과하다. 그 시대의 그림을 정확하게 읽어내려면 오늘날의 현대미술 못지않게 수준 높은 배경지식이 있어야 한다. 반면 당시의 대중은 어땠을까. 기초교육 따윈 없이 유년/청년기의 대부분을 생존을 위한 노동으로 보냈던 이들은 현대인에 비해 지식수준이 현격하게 낮았다. 대다수는 문맹이었고 성직자들이 읽어주지 않으면 성경의 내용조차 이해하지 못해 무엇이 신성모독인지 분간할 능력조차 없었다. 귀족이 아닌 신흥 브루주아 계급이라고 뭐 그리 달랐을까. 그들과 미술의 거리는 현재 우리들이 겪는 간극만큼이나 멀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와 그들 사이의 결정적 차이가 있다. 바로 시간. 중세-근대에는 볼거리가 많지 않았다. 아주 부유한 왕과 귀족조차도 광대의 쇼나 무용수들의 공연을 매일 볼 수는 없었기에 시각적으로 즐길 거리라곤 예술가들이 제작한 회화나 조각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림 앞에 앉아 감상하고 사색하고 고찰할 시간이 월등히 많았다. 과학과 자본의 발달로 인해 회화의 경쟁자들이 우후죽순 늘어나기 전까지는. 유한계급이 늘어나며 오페라나 연극도 함께 성장했으며 풍부한 수요는 더 많은 공급을 불러일으켰다. 인쇄기술의 발달은 사람들의 볼거리를 폭발적으로 늘렸고 영상기술-대중문화-인터넷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혁명은 그에 기름을 부었다. 아마 21세기의 일반인이 10분 안에 접할 수 있는 볼거리의 양은 근대 이전 그 어떤 왕이나 파라오, 혹은 황제가 평생 본 것보다도 많을 것이다. 

그런 마당에 사람들이 미술에 더 많은 시간을 쏟을 리가 없다. 더 가까이 앉고 더 친근하게 붙고 더 세심히 바라보아야 느낄 수 있던 것들을 찾아볼 시간이 없다. 넷플릭스, 유튜브, 그리고 네이버 웹툰. 미술의 경쟁자들은 너무나 막강해서 어쩌면 작가들 본인들조차 저 세 가지 매체에 쏟는 시간이 더 클지도 모른다. 그에 따라 미술의 방향도 점점 바뀌고 있다. 오래 보아야 이해할 수 있는 작품에서 순간적인 인상만으로도 관객의 시선을 사라잡을 수 있는 방향으로. 나 역시 그런 관객의 하나일 뿐이니 작품 너머에 있는 작가와 마주 앉아 작품을 매개로 두런두런 이야기하고 그의 생각과 미술 세계를 엿볼 시간을 내어주지 못한다. 

그렇게 우리는 늘 시간이 없다. 타인을 이해할 시간이, 사색에 잠길 시간이, 누군가를 생각할 시간이, 행복을 추억할 시간이, 그리고 사랑할 시간이 없다. 현대의 자본주의적 사회는 그런 삶을 무척이나 권장하고 예찬한다. 효율이란 이름 아래 그런 여백 같은 시간들은 종종 거세되곤 한다. 하지만 그런 시간들이 없다면 도대체 삶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2020. 11. 29.

위에 민쥔. 세상에서 가장 슬픈, 그리고 비싼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정치지도자는 누구일까. 그 물음에 우리는 아마 콧수염을 기른 독일(오스트리아)인이나 러시아(그루지아)인을 떠올리겠지만 정답은 마오쩌둥이다. 통계가 존재하지 않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흔히 그의 치세 아래서 약 3천만에서 최대 1억 명의 사람들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국공내전,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그리고 천안문사태까지. 여느 아시아 나라들의 근대화가 대개 그러했듯 중국의 근현대사도 피와 총탄 그리고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리고 광기의 시대로부터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말수가 적다. 와전된 말 한마디, 혹은 동료들 사이의 작은 오해가 온 마을을 도살장으로 둔갑시키곤 하던 시대였으니까. 말을 아끼고 생각을 숨기고 감정을 감추는 것, 그것이 가장 기초적인 생존법이었던 시대를 목도한 이 작가는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그 시대상을 그려냈다. 

작가가 밝혔듯이 그의 대부분의 작품은 자화상에 가깝다. 그리고 그의 그림 안에서 위에 민쥔은 필사적으로 웃는다.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온 몸을 고통으로 배배 꼬면서도, 물에 빠져 죽어가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심지어 죽음을 마주하는 그 순간에도 그는 죽을 힘을 다해서 웃는다. 웃음이 광기와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가장 훌륭한 도구라 그런 것일까. 웃는 얼굴에 침도 못 뱉는다는데 설마 총알을 박아 넣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고통과 절규가 숨겨지는 것은 아니다. 손으로 저 심연과도 같이 어두운 입을 가리고 다시 그림을 보라. 어쩌면 그것이 작가가 우리에게 진정으로 보여주고 싶은 모습 아닐까.


"위에 민쥔의 작품은 특유의 표정과 풍자를 통해 타인과 소통하려는 의지로 가득 차 있다"

-리시엔팅


그의 작품이 런던이나 뉴욕의 경매에 올라온 지도 벌써 이십여 년이 훌쩍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부자연스러운 웃음을 띠고 있다. 나는 너는, 그리고 세계는 그의 불편한 함박웃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외면한다. 그 저변의 시대상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거부한다. 이제 그의 웃음은 너무나 흔해 마치 하나의 패션이나 캐릭터상품으로 전락했고 가장 슬픈 웃음을 띤 작품은 가장 비싼 가격에 팔리고 있다.

바로 전 세기만 해도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최고의 가치라고 외치던 자유진영은 이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일당독재국가를 경제파트너로 받아들였고 전체주의와 타협했다. 자본과 물자는 끊임없이 중국의 국경을 넘나들지만 자유와 이념은 그렇지 못하다. 죽의 장막은 아직도 실존하며 새로운 도약을 이끈 구글과 아마존조차도 그를 걷어내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 장막의 뒤켠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했던 비극은 서서히 잊혀지면서도, 다른 형태로 되풀이되고 있다. 그리고 위에 민준은 그 불편한 현실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인간은 웃는 동물이라고. 그리고 인간이 짐승으로 돌변하는 시대에 그는 더더욱 웃어야 했다. 우리는 기술과 다양성이 지배하는 21세기가 이전의 시대와는 아주 다르다고 믿고 있지만 과연 그럴까. 슬프게도 이번 세기에도 위에 민쥔의 발작 같은 웃음은 멈추지 않을 것만 같다.  

김창열, the path

 

언뜻 단색화의 열풍에서 살짝 비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김창열을 빼놓고 한국의 현대미술사를 논하긴 어려우리라. 회화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조차 '아 그 물방울' 하고 알아차릴 정도로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 이미지는 그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고 이 화가는 한때 자신의 문패에 이름 대신 물방울을 그려넣었다고 한다.

물방울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냐고 가벼이 대답했지만 젠체하는 평론가들과 관객들은 수고를 아끼지 않고 억지로라도 의미를 찾아내곤 한다. 아마 각각의 해석은 다르겠지만 모두가 어떤 대조를 읽어내지 않았을까. 누군가는 수천 년을 이어온 상형문자와 순간적으로 사라질 물방울 사이에서, 어떤 이는 평면과 입체 사이에서, 또 누군가는 철저한 관념의 세계인 서예와 사실적으로 묘사된 이미지 사이의 선명한 대비를 읽었을 것이다. 마치 평안남도에서 태어나 파리에 정착한, 조부에게 서예를 사사받고 현대화가로 살아온 그의 삶과도 같이.

최근 갤러리현대에서 그의 개인전이 열렸다. 1929년 생인 이 노화가의 나이와 올해 작품활동이 뜸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어쩌면 올해가 그의 마지막 전시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부디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1972년 파리에서 한 무명의 화가가 세수를 하다 그만 캔버스에 물을 튀기고 만다. 어지럽고 좁은 아틀리에에 세면장이 따로 있을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그는 다급하게 캔버스의 물을 닦으려다 순간 물방울이 햇빛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는 것을 본다. 김창열의 물방울이 태어난 것은 찰나에 불과했지만 그의 예술세계는 마치 작품에 그려진 문자처럼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

[2021년 1월 5일 김창열 화백이 작고하셨다는 보도를 접했다. 아니기를 바랬건만. 그저 부디 편히 쉬시기를]

2020. 8. 10.

음악이 말을 잊은 시대, 하지만 아이유.

가수들의 음반판매량보다 유튜브 조회수가 이슈가 되는 오늘의 음악시장에서 가사는 예전의 지위를 이어갈 수 없었다. 초단위로 교차편집된 현란한 영상에 홀린 인간의 뇌가 노래가사의 의미까지 받아들이는 것은 무리니까. 그리하여 작사가들은 가사에서 언어를 빼내어 음절만을 남겼고 대중들은 그런 움직임을 열렬히 반겼다. 바야흐로 힙하지 않으면 멸종당하는 시대 아닌가. 그 무의미한 단어들은 가사의 일부를 넘어 이윽고 노래 그 자체가 된다.  뚜루뚜루. 짐살라빔. 으르렁드르렁 등, 그렇게 우리 시대의 음악은 벙어리 마냥 말을 잃은지 오래다. 

하지만 이런 시대에도 고리타분하게 가사에 의미를 담아내는 이들이 있다. 그중 의외의 인물로 아이유를 들 수 있지 않을까. 이따금 좋은 노래도 반복해서 듣다 보면 비로소 가사가 들리기 시작하며 일순간 음악의 장르가 유치뽕짝으로 돌변하기도 하는데 그녀의 가사는 재기발랄하면서도 진솔한 한 편의 수필처럼 자연스럽게 읽힌다.

우리의 색은 gray and blue / 엄지손가락으로 말풍선을 띄워

우리의 네모 칸은 bloom 
엄지손가락으로 장미꽃을 피워 
향기에 취할 것 같아 우 
오직 둘만의 비밀의 정원

누군가를 사랑한 기억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이라면 누구나 이 작은 기계를 쥐고 두근거렸던 적이 있으리라.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낸 뒤 그 작은 액정화면 건너에 그녀가 비치기라도 하는 양, LCD화면을 말 없이 응시하는 그 순간을 그녀는 이 네줄의 가사로 발랄하게 담아낸다. 엄지손가락으로 피워 내는 파란 장미, 그보다 더 적절한 은유가 있을까. 

말과 글에 민감한 탓인지 나는 가사가 없는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직까지 클래식 연주회에 가기라도 하면 가면 핀잔과 눈총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고 대놓고 졸곤 한다. 악기도 결국 물건일진대, 사람의 목소리가 곁들지 않으면 도통 그 진동음과 마찰음에는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마치 남우주연상 수상자가 빠진 시시한 애프터파티에 초대받고, 클라이막스 없는 지루한 영화를 보는 것 처럼. 의미의 부재를 화려한 색과 안무로 채운 시대의 한 가운데서도, 서사를 지켜내는 모든 고리타분한 뮤지션들에게 작은 응원을 보낸다. 



2020. 8. 1.

영화 1987, 훌륭한 영화 그리고 각색된 기억.

정치적 사건을 다룬 영화는 편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무엇보다 민감한 정치적 주제를 상업영화의 소재로 쓰는 감독이나 제작사 입장에서는 논란에 불을 지펴 흥행을 기대하는 마음이 없진 않을 테니까. 촛불시위 이후 등장한 남산의 부장들, 택시운전수, 자전차왕 엄복동, 말모이, 대장 김창수, 블랙머니, 한국부도의 날 등 다수의 영화들이 착실하게 그런 공식을 따랐다. 

나는 대개 보수든 진보든 그런 프로파간다적 욕망을 내포한 영화들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 영화는 다르다. 소재가 가진 힘에 의존하느라 영화 자체는 엉망이 된 수많은 진보영화들을 보라. 지루하리만큼 악역에만 특화된, 얼굴 찌그러진 배우를 적당히 골라 나까무라 다카시 혹은 허 대령 아니면 박 사장같은 뻔한 악역을 맡기고 고증은 개나 줘버린 상상의 권선징악 최루신파극에 애국을 적당히 버무린 그저 그런영화들과 영화 1987은 매우 다르다.  

영화는 처음부터 1987년의 주인공들의 시각에서부터 시작한다. 억압하는 자와 저항하는 자. 그리고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들. 특히나 영화 외적인 측면에서 내가 1987을 높게 평가하는 것은 6월 항쟁의 반대편에 서 있던 이들의 시각에서도 사건을 주시하기 때문이다. 박처장(김윤석)은 한병용 교도관(유해진)을 고문하면서 그에게 자신의 빛바랜 가족사진을 보여주며 묻는다. 너는 지옥이 뭔지 아느냐고. 그는 이북에서 나름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고 그의 부친은 굶어죽어가던 아이를 양자로 들여 가족으로 키울 뿐 아니라 학교도 보내고 결혼도 시켜줄 정도로 인덕도 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박처장이 형님으로 모시던 그 아이는 공산주의 혁명이 시작되자 완장을 차고 집안으로 난입해 자신의 양아버지이자 박처장의 아버지를 잔인하게 죽이고 어머니와 여동생까지 죽인다. 마루 아래서 그 장면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했던 기억을 떠올린 박처장은 이윽고 독기와 눈물이 동시에 어린 눈으로 한 교도관을 보며 묻는다. "너래 지옥이 뭔지 알간? 내 가족이 죽어나가는데 손가락 하나 까닥 못하고 소리도 못지르는 거, 그것이 지옥이야." (링크 나는 김윤석의 모든 연기 중 이 신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감독은 그런 박처장의 과거사를 제 3자의 시각으로 다루지 않는다. 비록 그는 정권의 편에 서서 고문하는 악당이지만 그의 기억 속에서 울려 퍼지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의 비명소리와 총소리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도 메아리친다. 그 장면에서 이제까지 박처장을 악마로, 개새끼로 또 권력의 주구로 욕하던 우리들은 갑자기 그의 눈으로 시대를 다시금 바라보았을 것이다. 남한 사람들 여덟명 중 하나가 죽거나 다치거나 실종된 내전이 끝난지 고작 30여년이 흘렀던 1987년, 당시엔 북한 공작원이 남측에 침투해 군인이나 민간인을 살해하던 일이 한해 걸러 한해 일어나던 시기였다. 박처장에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만약 한병용 교도관이, 또 박종철이나 이한열 열사가 박처장과 같은 경험을 했더라면 이전과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1980년 광주에 있던 이들이 평생 그 기억에서 자유로을 수 없는 것 처럼 1950년 휴전선의 잘못된 쪽에 서 있던 이들도 그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게 하나의 지옥이 또 하나의 지옥을 만드는 것, 그것이 1987년 6월 항쟁의 본질이라는 것이 바로 감독이 전달하고 싶었던 바 아니었을까.

영화가 개봉되던 2017년을 떠올려보자. 박근혜를 탄핵시키고 들어선 새로운 정부엔 전대협 임원들을 비롯한 운동권들이 포진했으며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은 80%에 육박했다. 적폐라는 이름이 붙으면 누구든 대중의 죽창을 피할 수 없던 시기에 개봉한 영화가, 또 정의당을 지원하고 진보적 성향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감독이 가해자였던 박처장의 시각에서 당시의 시대상을 이해하려고 한 시도에 나는 박수를 보낸다. 진정한 이해의 첫걸음은 상대의 시각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상대를 섬멸하는 것이 아니라.

예전에 평론가 이동진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잘못된 시스템을 논해야 하는 사회비판적 영화에서조차 수혜자 개인의 사악함과 피해자 개인의 불행함에만 초점을 두면서 영화를 가족영화나 액션영화처럼 만들고, 그 결과 관객들은 악한 캐릭터들을 보며 도덕적 우월감 속에서 마음껏 분노를 터뜨리다가 손쉽게 카타르시스를 얻고서 극장을 나설 뿐이다." 이제까지 쏟아진 대다수의 좌파 민족영화들이 모두 그랬다. 일본은 왜 조선을 침략했을까? 나쁜놈이니까. 군사정권은 왜 독재를 했나? 나쁜놈이니까. 그들의 세계관은 마치 5살짜리 아이들이 보는 만화영화처럼 1차원적이다. 거기에는 착한놈, 혹은 나쁜놈 만이 있을 뿐이고 착한 놈은 뭘 해도 착한놈이다. 비서를 추행해도, 돈을 횡령해도 심지어 독재를 해도. 

물론 지나친 미화가 없다고 할 순 없다. 무엇보다 강동원이 왜 별 비중도 없는 까메오로 나오나 했더니 결국 그가 알고보니 이한열 열사였다니, 그 손발 오그라드는 빌드업은 이 영화의 옥의 티지만 1987년에서 2017년으로 이어지던 당시의 열기를 생각한다면 과연 과도했던 것이 영화뿐이었을까. 성과도 없는 대통령과 전문성이라곤 하나도 없던 내각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압도적 지지를 몰아주었던 국민들은, 오늘날 이 영화가 끝난 곳과 정확하게 같은 자리에서 반독재를 외치고 있다. 보수라는 냄새만 나도 이빨을 드러내고 문재인과 여당의 인사라면 덮어놓고 환호하던 국민들에 비하면 박처장의 눈에서 1987년을 읽어낸 감독의 시도가 훨씬 더 성숙한 것 아닐까. 


*               *               *


1987년 6월 항쟁은 4.19와 함께 대한민국 민주사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사건 중 하나임을 부정할 수 없다. 평범한 여대생이었던 김태리가 거리로 뛰쳐나와 서울시청 앞 광장까지 내달리다 버스 위로 올라가 민중을 바라보는 장면은 영화에서는 너무나 감동적이지만 현실에서는 대단히 불편하다. 왜냐하면 이 장면이야말로 운동권이 1987년 민주화운동을 독점하는 방식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민주화 운동의 주역들을 내려다보는 운동권들의 뒷모습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당시 민주화운동을 주도한 것은 적폐 서울대생이고 죽은 것도 기득권인 서울대와 연대 학생이었으며 보도지침을 어기고 박종철이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보도한 것은 보수찌라시 중앙일보와 동아일보였다, 그리고 고 박종철 군의 시신에 물고문 흔적이 있었다고 증언한 것은 적폐인 의사였으며 이 사건을 은폐하려는 시도에 저항하고 끝까지 대든 것은 바로 검새였다. 결정적으로 전두환의 호헌조치에 반대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위를 주도한 것은 평범한 넥타이부대, 택시기사, 노점상 그런 서울의 평범한 장삼이사들이지 않았나. 하지만 이 영화는 철저하게 그들을 조연으로 격하한다. 이와 같은 시선은 현재 여당과 그 지지자들의 시각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들에게 1987년의 민주화 항쟁은 오로지 운동권 대학생들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그것은 반미 민족주의정신에 기인한 덕분인 것이다. 그 과정에서 유시민이 민간인 네명을 감금 폭행한 사건이나 운동권 학생들이 미국 문화원에 불을 저질러 장덕술 군이 사망하는 사건 등은 조용히 묻혔다. (공교롭게도 사망할 당시 정덕술의 나이는 박종철과 비슷했다) 그러니 1987년의 마지막은 13대 대선으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해의 이름을 딴 영화가 6월의 사건까지만 그려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애초에 이 영화는 6월 민주화 항쟁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운동권 새내기였던 87학번 김태리의 추억팔이였기에, CG로 87년의 풍경을 완벽하게 재현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영화는 그 해 하반기의 기억을 깔끔하게 도려냈다. 

하지만 모두 알다시피 1987년은 스릴러 영화보다도 더 극적인 반전으로 끝났다. 약 6개월 뒤 치뤄진 직선제 투표에서 국민들은 놀랍게도 노태우를 선택했으니까. 민주화운동의 두 거두였던 김영삼과 김대중은 한치의 양보 없이 자신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국민들이 열망하던 단일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양김의 대립은 시민들에게 이승만 하야 후 제 2공화국의 무질서와 혼돈을 떠올렸고 결국 유권자들은 고심 끝에 민주주의와 안정 사이에서 균형을 택한 것이다.* 

당시 광화문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생들이 아닌 직장인들이었다. 졸업하면 인생이 보장되던 당시 대학생들과는 달리 이 세대는 못먹고 못배웠는데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27년 전 이승만의 부정선거에 저항하며 거리로 뛰쳐나온 그날과 다름없이 서울시청 광장에서 다시 한번 민주화를 외쳤다. 하지만 그들은 오늘날 틀딱이라는 조롱을 듣고(링크)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실을 밝혀내는데 일조한 신문사, 검사, 의사들은 모조리 다 개혁당하고 있다. 동이라는 공산주의자에게 가족을 잃은 박처장이 동이와 똑같은 짓을 하던 것처럼, 박처장과 신군부에게 억압당했던 운동권 정치인들은 전두환과 똑같은 계층들을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는 아이러니는 오늘날에도 반복된다. 자,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아래 87년의 실제풍경과 영화의 엔딩을 비교해보자. 영화 1987의 가장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은 마치 동전처럼 이 한 장면으로 축약될 수 있다. 실제 민주화운동의 주인공들을 내려다보는 운동권 학생, 87학번 김태리의 등을 비추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그리고 영화 개봉 당시엔 감동과 전율을 느꼈던 바로 그 장면에서 나는 소름이 돋았다. 도대체 3년간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실제 1987년 당시 시위 장면



*혹자는 이 사건을 김영삼과 김대중의 단일화 실패로 노태우가 당선된 것 뿐이라며 폄하한다. 그 말은 사실이지만 당시 박정희 정권의 2인자였던 김종필후보도 기호 4번으로 출마해 약 8%의 득표율을 기록했던 것을 잊어선 안된다. 노태우/김종필은 총 44.7%를 득표했고 김영삼/김대중은 55.0%를 얻었으니 6월 항쟁이라는 커다란 사건을 겪고도 약 45%의 국민들이 사실상 군사정권의 후예들에게 표를 던진 셈이다. 그들 중 상당수는 바로 6개월 전 민주화운동을 지지한 사람이었을텐데도. 그 45%가 복잡한 심경으로 군부세력들에게 표를 던진 의미를 평가절하하는 것은 당시 유권자들의 치열한 고민에 대핸 모욕이며 시대상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다.

13대 대선 투표결과

2020. 7. 27.

아름다운 성추행, 그리고 천박한 도시



누군가가 내게 서울의 명소를 딱 하나만 추천해달라고 부탁한다면 나는 광화문 광장을 들 것이다. 넓은 광장의 다른 곳 말고 그 끄트머리.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그 광장의 끝에서 방문자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한때는 한국적이다, 전통적이다는 말이 촌스럽다는 말과 동의어로 여겨졌지만 2010년에 복원된 현재의 광화문을 보면 누구도 그런 말을 꺼내지 못할 것이다. 고동색 성문과 연회색 성벽과의 선명한 대조. 그리고 화려한 단청과 누각까지. 한국의 미란 국뽕이 억지로 만들어낸 개념이라고 생각했던 내게 고궁의 색도 충분히 아름답고 우아하다는 것을 가장 먼저 알려준 이가 바로 광화문이다. 뒤로 희미하게 보이는 북한산과 함께 그 문을 보고 있노라면 책과 사극에서 보았던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곤 한다.

그 순간 뒤를 돌아보면 새로운 도시를 발견하게 된다. 드넓은 광장을 중심으로 양편에 들어선 현대적 건물과 고층빌딩들. 은은한 광화문의 불빛과는 대조되는 강렬한 LED와 할로겐 빛을 동공으로 받아들이는 경험은 마치 과거에서 현대로 단숨에 넘어오는 것과 같은 충격을 선사한다. 한국이 중세에서 단 한걸음 만에 근대를 넘어 현대로 도약했다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경험해보고 싶다면 해가 지고난 직후 광화문 광장의 끝에 서서 한바퀴 돌아보라. 이 광장의 끝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 놓여있으며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처럼 평범한 방문객을 시간여행자로 탈바꿈시켜 준다. 여기에 서보기 전의 나는 서울을 몰랐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반평생 이상을 이 도시에서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               *               *

여당 대표는 이런 서울을 천박한 도시라고 했다. 나와 서울 시민은 응당 그 말에 분노해야 한다. 도시는 시민의 얼굴을 닮아가기 마련이니 그는 나와 우리의 삶이 천박하다고 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겪은 격동의 근현대사가 투영된 광화문 광장은 샹젤리제 거리나 라데팡스처럼 유명하거나 아름답지 않아도 분명히 자신만의 색을 가지고 있다. 여느 도시가 그렇듯이. 아름답지 않은 아이도 부모에겐 사랑스럽고 서투른 글도 무명의 작가에겐 소중한 것 처럼 이 도시와 우리의 삶 역시 그렇다. 그런 도시를 두고 천박하다는 낙인을 쿵 하고 찍은 이가 국민을 대표해 질문을 던진 기자에게 후레자식이라는 쌍욕을 던진 사람과 동일인이라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 아마 처음부터 그에게 우리는 후레자식이자 천박한 시민이었겠지.

그의 미적 기준은 너무나 난해해서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바로 몇주 전 서울시장이 여비서를 성적으로 희롱하며 학대하다 적발되자 자살했을때 여당의 여러 인사들은 그를 아름답다고 하지 않았나. 못생긴데다 탈모까지 온 환갑넘은 늙은이가 여비서에게 속옷사진을 보내고, 아내와 별거중이라며 추근대는 모습은 아름답기는 커녕 더럽다. 노년의 로맨스가 더럽다는 것이 아니라 노년의 성추행이 더럽다는 말이니 나이든 독자들이 있다면 상처받지 마시길. 나이와 상관없이 성범죄란 본디 추잡한 것이지만 나이든 권력자의 성범죄가 더욱 혐오스러운 것은 욕정 앞에 자신의 살아온 역사와 품격 그리고 명예를 모두 내던졌기 때문이 아닐까. 종로의 한 술집에서 시인 고은이 후배 문인들 앞에서 바지 앞섶을 풀고 자위행위를 시작한 그 순간 추락한 것은 그의 명예만이 아닌 한국문학의 자긍심이었던 것처럼 서울시장이 여비서에게 팬티 사진을 보내다 자살한 순간 이 도시의 품격도 함께 목을 매달았다. 헌데 박원순의 빤스는 아름답고 서울은 천박하다니. 저들의 미적 기준에는 분명 심각한 결함이 있다.

*               *               *

정치권 인사들의 망언을 듣는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왠지 이번엔 분노가 가시질 않아 차를 끌고 서울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한강철교를 아래를 지날때 전철이 머리 위로 굉음을 내며 지나가던 순간 나는 다큐에서 본 6.25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을 떠올렸다. 당시 폭파를 담당한 공병감 최창식 대령은 인민군 탱크가 서울에 진입하면 다리를 폭파하라는 명령을 받아 충실하게 임무를 수행했으나, 그 바람에 다리 위 수백 명의 시민들이 폭사하거나 한강으로 떨어져 물에 빠져죽고 말았다. 이후 서울을 버린 대통령에 대한 비난여론이 높아지자 정부와 군은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명령을 충실히 따른 최 대령을 군법회의에 회부해 사형을 언도한다. 이후 1962년에 유족들이 재심을 청구하여 그는 사후 무죄판결을 받고 2013년에는 국립현충원에 위패가 봉인되었다고 한다.

한강대교를 지나 몇분 더 달리면 수많은 고층빌딩으로 뒤덮인 여의도를 볼 수 있다. 이 섬은 본디 활주로로 쓰던 단단한 모래섬이었는데 일설에 의하면 섬의 명칭은 "너나 가져라"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사실인지 모르겠다만. 고층건물 중 가장 인상 깊은 건물은 트럼프월드와 파크원이 아닐까. 트럼프월드는 당시 세계경영을 모토로 내걸었던 김우중 회장의 대우건설이 뉴욕의 트럼프월드타워를 수주한 것을 계기로 이 미국의 부동산업자에게 로열티를 주고 상표권을 따내 지은 것인데 아마 그도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물론 그 직후 대우가 와해될 줄은 더더욱 몰랐겠지만. 여의도 파크원은 2008년 당시 2013년 완공을 목표로 당시로는 한국의 최고층 빌딩이 탄생할 예정이었지만 이후 들이닥친 금융위기와 통일교와의 분쟁 등으로 거의 공사 초기단계에 멈춘 채 방치되었다 최근 법적 다툼이 마무리되고 곧 완공을 앞두고 있다. 안타깝게도 건물 외골격의 빨간 띠는 포장을 뜯지 않은 필름이 아니라 건물의 디자인이라 계속 유지된다고 한다.

거기서 더 달리면 양화대교를 만나게 된다. 이 다리는 자이언티 덕에 더욱 유명해졌는데,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노래의 가사를 곱씹어보면 숨겨진 장면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택시 기사였는데 어디냐고 물어보면 항상 양화대교. 양화대교. 그런데 자이언티의 다른 노래 Click me에서 집은 강서구라고 했으니 양화대교를 건너도 한참은 더 가야 집에 도착하는데 왜 아버지는 늘 양화대교에 서 계셨을까? 삶은 힘들고 고되고. 또 아프고. 왜 택시기사는 그리고 (예전에) 가난했던 뮤지션 자이언티는 차를 마땅히 댈 곳도 없는 양화대교에 서 있었을까. 어쩌면 이 노래는 아버지가 다리 위에 서 계시다는 것이 무엇을 뜻했는지 깨달았을때 탄생한 것이 아닐까. 지나친 상상은 고소로 가는 지름길.

그 다리를 지나면 망원동과 합정에 도착한다. 망원동은 태종의 둘째아들이자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의 별장인 망원정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번잡한 이태원을 피해 사람들이 한남오거리에 몰리듯 힙스터들은 홍대보다도 망원동에 모이며 이곳을 망리단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마포와 아현이 있다. 과거 아현 고가 아래에는 세글자 이름으로 이루어진 방석집들이 즐비했다. 잘은 몰라도 어떤 방식이든 성을 파는 곳임은 확실했다. 그런 장소 특유의 시큼하면서도 서글픈 느낌이 물씬 나던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대한민국에서 최고 고소득자들이 선망하는 주거지 중 하나로 변모하여 과거의 그 음침한 기운은 온데간데 찾아볼 수 없다. 천대받는 창녀. 그중에서도 아현 굴레방다리는 나이든 창녀들이 모이는 곳이었다는데 억세게 20세기를 버턴 그녀들은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처럼 서울은 젊은이도 노인도 그리고 아버지도 딸도 열심히 먹고 마시고 즐기며 일하고 사랑하다 잠드는 일상의 터전이고 다양한 삶이 모여 하나의 도시를 이루고 있다. 사람은 떠났어도 그들의 인생은 이곳에 쌓여 하나의 서사를 이루고 있다. 그 삶은 모두 하나같이 소중하다. 누구도 어미 앞에서 그 자식이 못생겼다고 말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그 누구도 우리의 어제와 오늘을, 그리고 그것이 모인 이 도시를 천박하다고 말할 자격은 없다. 천박한 것은 국민과 서울이 아니라 반시장적인 조치로 집값을 쳐올려 시민들에게 고통을 안기고도 아집을 꺾기 싫어 수도를 이전하겠다는 괴상한 발상을 꺼낸 70먹은 노친네의 가벼운 주둥아리이다. 



아니나 다를까 민주당의 당대표 답게 이 천박한 노친네는 세종시에 영혼의 몰빵을 쳤다. 내심 손혜원과 노영민이 무척이나 부러웠나보다. 이런 후레자식.

2020. 5. 22.

미래를 예언한 영화들 3부 조커와 2020년 미 대선

1부: 킹스맨과 브렉시트 (링크)
2부: 주토피아와 트럼프 (링크)

앞의 두 편의 글은 영화가 대중의 어떤 욕망을 자극했고 또 그 욕망이 어떤 정치적 선택을 가져왔는지를 분석했지만, 이번에는 조금 관점을 바꿔서 특정 정치성향을 가진 지지자들이 일반적인 대중, 즉 유권자들을 얼마나 잘못 파악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또한 앞의 두 글은 사후 분석인데 비해 아래의 글은 올해 11월에 예정된 미국 대선에 관한 글이므로 반년 뒤 어떤 결과가 나올지 흥미를 가지고 지켜보길.

 히스 레저가 아닌 그 누가 감히 조커를 연기할 수 있을까. 하지만 호아킨 피닉스는 그런 염려를 단번에 잠재우며 자신만의 캐릭터를 완성했고 이 영화는 영화평론가들 사이에서 뿐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커다란 성공을 이뤘다. 주연배우의 연기는 물론이고 스토리, 음향, 영상 등 이 영화는 말 그대로 완벽했다. 단 하나, 엉성한 사회비판을 제외한다면.

미국정치를 잘 몰라도 이 영화가 트럼프와 공화당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뉴욕(고담시티)의 가장 후미지고 외진 곳에서부터 시작한다. 폭력이 난무하고 쓰레기가 사방에 널린, 국가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가난한 동네. 그 곳에서 돈은 교환이나 가치척도의 수단이 아닌 생존의 필수품이기에 당장 일자리를 잃으면 다음날 끼니마저 굶어야 하는 삶. 거기서 태어난 평범한 정신병자 아서 플렉이 온 도시를 뒤흔드는 비범한 빌런으로 변화한데엔 두가지 촉매가 있었다, 바로 권총과 정신상담. 아서의 동료는 그에게 호신용으로 권총 한 자루를 건네는데 결국 그는 그 총 때문에 직업을 잃어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된다. 또 고담시는 복지예산을 삭감하는데 그로 인해 아서의 정신상담이 중단되게 되어 그는 더이상 정신약을 처방받지 못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공화당과 민주당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주제 아닌가. 공화당 지지자들은 총기소유의 자유를 종교적 신념처럼 지지하는데, 영화에서 주인공이 정신적 문제를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쉽게 총을 손에 넣고 결국 네 건의 살인을 저지르는 것을 보여주는 데에는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정신상담이 중단되는 것은 ACA, 일명 오바마케어와 연관되어 있다. 오바마케어의 존치는 지난 대선에서 뜨거웠던 논쟁거리로 반대론자들은 이 법이 사실상 정부의 재정을 악화시키고 보험사의 비용을 증가시켜 결국 국민들에게 부담만을 안겨준다는 이유로 폐지를 주장했는데 반해 민주당은 저소득층을 의료의 사각지대에 방치해서는 안된다며 반드시 필요한 제도라고 항변했다. 그리고 이 영화가 의료복지가 축소된 이후의 세상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보라.

공화당에 대한 비판은 토마스 웨인이 등장하며 정점에 이른다. 여러 기업체를 거느린 CEO출신에다 장신이고 공격적 언행을 일삼는 그는 누가 보아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판박이다. 특히나 여자문제가 복잡하고 무례하며 자기중심적이걸 보면 이 의혹은 확신이 된다. 그는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아서에게 펀치를 날리고 그를 모욕하여 그를 조커로 만드는 결정적 원인들 중 하나를 제공한다. 이처럼 정치적 편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토드 필립스 감독은 그가 결국 조커의 추종자중 하나에게 살해되는 것을 보여주며 트럼프 대통령에게 은유같은 저주를 퍼붓는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조커라는 괴물이 탄생하게 된 것은 그를 방치한 잘못된 사회구조 때문이며 바로 공화당과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은 미국을 고담시로 만들 것이라는 경고를 담고 있다.(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실질적 주인공은 조커가 아닌 트럼프다) 문제는 영화를 만든 이들의 인식이 너무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데에 있다. 만약 아서 플렉이 실존한다면 그는 2016년 대선에서 누구를 찍었을까? 통계에 따르면 그는 트럼프에게 표를 던졌을 것이다. 인종, 성별, 소득수준, 최종학력 그리고 연령에 따른 트럼프 지지율을 보면(링크) 아서 플렉은 이 다섯가지 카테고리 중 연령을 제외한 다른 모든 카테고리에서 트럼프의 지지층과 일치한다. 그런 마당에 영화를 보며 아서에게 공감한 미국의 빈민층들이 과연 감독의 정치적 메시지에 공감했을까? 이 샴페인 좌파 감독이 조금이나마 현실감각이 있었더라면 아서 플렉은 이민자 가정 출신의 박사학위를 가진 고학력 20대 흑인 여성이었을텐데.
교육수준이 낮을 수록 트럼프에 대한 지지도가 높다
왜 현실의 아서 플렉은 트럼프를 지지하는가. 영화 속 아서의 비극이 일자리를 잃으며 시작했던 것처럼 미국의 빈민층은 값싼 중국산 제품과 불법 이민자들에게 밀려 일자리를 잃었다. 실업의 비극을 가져온 것은 38구경 권총이 아닌 세계화다. 또 미국의 중하류층에게 위화감을 안기는 것은 억만장자이면서도 싸구려 야구모자를 쓰고 맥도날드를 먹는 트럼프가 아니라 수백만 불짜리 대저택에 살고 제트기를 타고 다니면서도 지구온난화의 위험성을 설파하는 엘 고어나, 빈부격차를 줄이자고 외치면서 편당 수백만달러를 받고 페라리를 모는 헐리웃 배우들 같은 리무진 리버럴들이다. 그들이 기아와 빈곤을 논하며 자선파티에 모여 우아하게 브르고뉴산 와인을 따를때 트럼프는 코카콜라를 마시며 옥스포드 사전따위를 필요로하지 않는 하류층들의 언어와 트위터로 유권자들과 소통한다. 저질 농담들과 함께, 때때로 어법도 틀려가면서. 미국의 상류층들이 트럼프를 경멸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하류층들은 그를 사랑한다.  

비벌리힐즈나 웨스트우드 혹은 베니스 해안가에 사는 서부의 리버럴들은 미국의 평균적인 유권자들에 대해 너무나 무지하다. 지난 대선에서 힐리러가 패배한 것은 미국의 유권자들이 멍청하거나 인종차별주의자여서가 아니라 그녀와 그녀가 이끄는 민주당에 아무런 비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당시 힐러리의 대선공약이 무엇인지 떠올려보라. 아마 그녀 자신도 자신의 공약이 무엇인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그녀는 주요 쟁점사안에 대해 입장을 여러번 바꿨다) 힐러리를 비롯한 민주당은 유권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몰랐고 따라서 자신들이 무엇을 보여줄 지도 몰랐다. 반면 트럼프의 공약이 무엇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지 않았나, 그를 지지하든 지지하지 않든 간에. 그는 세계화가 진행되며 미국의 자본가들이 생산기지의 이전과 해외투자로 더욱 부자가 될 동안 미국의 노동자들이 직장을 잃고 새로운 아서 플렉으로 전락하는 것을 꿰뚫어보았고 따라서 리쇼어링 정책을 들고나왔다. (사업으로 인생의 부를 일군 사람이 리쇼어링 정책이 경제적 관점에서 효율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모를거라 생각하지 마라.) 그리고 영화 조커는 트럼프와는 달리 진보주의자들이 아직도 그 무지 속에 갖혀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아서 플랙의 망상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리버럴들의 망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서에게 예쁜 여자친구가 존재하지 않았듯, 좌파들이 생각하는 공화당이 야기한 카오스 또한 없었다. 지피지기는 물론이고 자기가 왜 졌는지 아직도 모르는 민주당은 다음 대선에서도 또 패배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맨하탄의 남단에서 빨간색 IRT Seventh Avenue Line를 타면 월스트리트를 지나 섬의 북쪽 끝에 도달하고, 거기에서 버스를 타면 조커가 춤추던 계단이 있는 브롱크스까지 갈 수 있다. 호아킨 피닉스는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을 연기하는 대가로 약 450만 달러의 출연료를 받았는데 이는 미국의 상위 약 0.05%에 해당하는 소득이다. 토드 필립스 감독은 이 영화를 찍으며 단순한 히어로 시리즈가 아니라 사회고발의 메시지를 담고 싶었겠지만, 그가 기획한 이야기와 실제 현실은 아서 플렉과 호아킨 피닉스의 수입 만큼이나 달랐다. 테슬라 S모델과 함께 배우고 가진 자들의 힙해보이는 패션아이템으로 전락한 리버럴리즘과 민주당이 과연 올해 대선에서 다시금 미국 대중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을까.

2020. 5. 21.

미래를 예언한 영화들 2부 주토피아와 트럼프

대중의 영화취향을 들여다 보면 그들의 정치적 선택을 가늠할 수 있다. 그 이유는 1부(링크)에서 설명했으니 생략하자.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고작 디즈니 만화영화가, 그것도 발랄하고 귀여운 토끼가 주인공인 애니메이션이 어떻게 트럼프가 힐러리를 누르고 미국의 대통령이 될 것을 예언했을까.
주토피아의 주인공 주디, 그리고 격분한 트럼프
경찰이 되는 것이 꿈이었던 주디는 각고의 노력 끝에 경찰 뱃지를 달게 된다. 하지만 딱 봐도 강력한 남성미를 뿜뿜 풍기는 포유류들이 가득한 경찰서에서 작고 가녀린 그녀에게 진짜 사건을 맡기는 사람은, 아니 동물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우연히 몇몇 동물들이 갑자기 이성을 잃고 야만적으로 돌변하는 사건을 추적하게 되었고 파트너 닉의 도움으로  함께 수사를 펼친다. 몇번의 실패와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그들은 이 사건의 이면에 모종의 음모가 숨겨져 있음을 찾아낸다. 그것은 바로 시장의 비서였던 작은 양 벨웨더가 육식동물들을 문젯거리로 만들어 사회에서 배제하기 위해 그들이 이성을 잃고 본성을 드러내게 만드는 약물을 사용했다는 것. 주디와 닉은 교묘한 연기로 벨웨더의 음모를 밝히고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된다.

귀여운 주디의 외모와 재치넘치는 위트 덕에 놓치고 지나가기 쉽지만 사실 이 애니메이션은 사회 구성원들의 생물학적 차이에 주목하고 있다. 애초에 주디에게 경찰다운 일이 주어지지 않는 것도 그녀가 생물학적으로 토끼이기 때문이었고 닉이 자신의 꿈을 버린것도 영악한 여우였기 때문이다. 하울링을 따라 하는 늑대들도, 느리게 일을 처리하는 나무늘보도, 시기심 많은 양도, 시장인 사자도 모든 등장인물들의 본성을 결정짓는 것은 바로 생물학이고 그들의 DNA이다. 애니메이션은 주디의 입을 빌려 그 점을 명확하게 지적한다.(링크) 포식자들에게는 그들의 유전자에 각인된 포악한 사냥의 본성이 존재하고 그것이 문제의 원인이었다고.

독특하게도 주토피아에서는 핍박받고 탄압당하는 쪽이 강한 포식자다. 음모를 꾸민 벨웨더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초식동물들)는 늘 무시당하지, 그래, 육식동물들은 힘이 세. 하지만 포식자와 피식자의 비율은 1:10이야, 사회 구성원의 90%가 공공의 적에 대항해 뭉친다고 생각해봐. 아무도 그들을 막을 수 없어"(링크) 자연상태에서는 피식자가 아무리 많아도 포식자를 누를 수 없다. 라이온킹에서 미어캣 열마리가 사자 심바를 학대하는 장면이 나온다면 누가 공감할 수 있을까. 하지만 민주주의 아래서는 다르다. 다수결에 의해 통제되는 주토피아에서 약하고  남성성의 반대편에 서 있는 양이 유전적으로 더 강인한 야수들을 핍박하고 통제하는 것, 그것이 이 서사의 핵심이다. 이 애니메이션은 교묘하게도 우리로 하여금 맹수가 보잘것 없는 피식자들에게 학대당하는 것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만든다.

이 애니메이션이 미국에서 연령대를 가리지 않고 큰 인기를 끈 데에는 귀여운 주디의 외모 뿐 아니라 약자가 강자를 억압하는 아이러니한 서사가 미국의 주류 대중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점에 주목해야 한다. 오늘날의 미국인들을 떠올려 보자, 그들에겐 안되는 것도 많고 말하지 말아야 할 것도 많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같은 소득수준에서도 인종에 따라 교육열이 다른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함부로 지적해서는 안된다. 심지어 어린 침팬치 수컷과 암컷들조차 성에 따라 좋아하는 장난감이 다르지만 미국의 PC들은 그와 같은 생각은 관습적 성역할을 고착화시키는 잘못된 관념이라고 주장한다. 그렇게 fireman, policeman과 같은 단어는 fire fighter, police officer로 대체되었고, 남미에서 건너오는 불법이민자를 막자는 지극히 합법적인 주장을 펼치려면 무식한 텍사스 레드넥이라는 비난을 견뎌야만 했으며, 중국에서 건너온 코로나를 중국코로나라고 부르는 것은 인종차별적이라는 비난을 듣게 되었다. 어휴 피곤해.

미국의 주류 백인들은 급격하게 늘어나는 이민자들의 숫자로 인해 계속해서 자신들의 권리가 줄어드는 데에 큰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말과 행동을 과도하게 구속하는 PC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이 극장에서 이 애니메이션을 봤을때 무엇을 느꼈을까? 주토피아는 현대 인간사회와 너무나도 유사하고 유전적 차이가 존재하는 다양한 동물들이 혼재된 도시는 다양한 인종의 용광로인 미국과 닮았다. 영화 초반부터 여러 동물들이 등장하는 추격 신을 떠올려보라. 파키스탄인이 우버를 몰고, 유태인 사업가가 승객으로 탑승하며 그 옆을 한 아시안 비즈니스맨이 바쁘게 뛰어가고 또 베네수엘라에서 온 대학생이 파트타임으로 커피를 내리는 뉴욕의 일상과 닮아있지 않은가. 이성을 갖춘 동물들의 사회, 종에 따라 각자 다른 본성을 지닌 동물들, 그리고 그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 약점이 되는 곳. 미국 어린이들에게 주토피아는 판타지 만화였지만, 어른들에게는 현실을 모방한 우화였다. 이에 열광한 미국인들이 불과 몇개월 뒤의 대선에서 입으로는 힐러리를 찍겠다고 응답하면서도 실제론 트럼프에게 표를 던진 사실(링크)과 무관하지 않다.

감독 바이런 하워드는 한 인터뷰에서 이 애니메이션이 기존의 동물 의인화 애니메이션과는 다른 작품이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영화의 대표 OST에서부터 확연하게 드러난다. 도입부에서 주디는 "In Zootopia, anyone can be anything!"이라고 외치지만 결국 영화는 "Try everything"으로 마무리된다. 당신의 배경과 상관없이 뭐든지 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같은 외침으로 출발한 영화가 그저 시도나 해보라는 무책임한 말로 마무리된다는, 그런 비관적인 전개를 발랄하게 포장한 것 뿐이라면 지나친 비약일까. 결국 생물학적 본성을 극복한 것은 끽해야 주인공인 주디와 닉 뿐이고, 주목받지 못하는 기타 모든 조연들은 그들의 DNA에 따라 살아가지 않는가. 심지어 주디의 부모조차도. 참고로 주토피아의 줄거리는 원래 더 어두운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밝고 희망적인 분위기로 바꾸라는 경영진들의 주문때문에 현재처럼 밝고 쾌활한 내용으로 바뀌었다고 하니 내 짐작이 근거없는 억측만은 아닐 것이다.

본디 더 어두웠던 주토피아의 스토리 라인

사족1: 애초에 이 글을 구상한 것은 4년 전이지만 제목만 써두고 내 게으름 덕에 완성하지 못할뻔 한 수십개의 빈 글 중 하나였다. 하지만 최근 미래를 예언한 세번째 영화가 나온 덕에 귀찮음을 이겨내고 두번째 편을 완성했다. 그런 의미에서 세번째 글은 미래가 실현되기 전에 미리 올리련다. 

사족2: 주디 너무 귀여움 ㅠㅠ 

2019. 11. 16.

영화 블랙머니 후기-정신병 상담은 129 구급센터로

네이버 지식백과에 따르면, 조현병의 대표적 증세는 바로 피해망상증이다. 이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괴롭히고 속이며 고통을 주고, 심지어는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믿는 정신병의 일종으로 피해망상증 환자들은 주관적인 경향이 강해 논리적으로 설득되지 않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더구나 망상이 계속되면서 점차 현실감을 잃어버리므로, 그 생각이 틀렸다고 설득할 경우 오히려 망상이 더욱 굳어지고 위협적인 행동을 하게 되므로 병원에 방문해 전문적인 치료를 받아야 한다. 메가폰을 잡고 영화를 찍을 것이 아니라.

과거 국가부도의 날을 보며 한국영화 부도의 날을 걱정했는데(링크), 영화계 사람들은 집단으로 외국인에게 돈 떼먹히거나 홍대에서 뭐 한대 맞은적이라도 있나, 도대체 왜 이런 편집증에 사로잡혀있을까. 영화 블랙머니 역시 그 망작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영화는 그 유명한 사모펀드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2003년에 인수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픽션이라고 하지만 감독과 배급사는 대놓고 론스타 사건을 모티프로 삼았다고 광고했다.) 이 사건은 이 블로그의 세번째 글로 다룰 만큼(링크) 한국정부와 여론이 국제적으로 추태를 벌인 사건이고, 이를 통해 수많은 투자자들은 왜 대한민국이 최첨단 반도체를 만들지만 여전히 개도국으로 분류되어야 하는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던 사건이다. 그리고 정신과 상담을 받으셔야 할 감독과 작가들은 이 영화를 찍으며 사실관계까지 왜곡하고 있다.

먼저 영화는 자산 70조짜리 은행을 고작 1.4조에 팔아치우는 것이 말이 되냐며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려 수도 없이 분노한다. 그리고 회계나 재무 수업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그 대사를 통해  영화의 제작자들이 얼마나 회계와 금융에 까막눈인 사람들인지 깨달았을 것이다-단 한줄짜리 대사에 얼마나 많은 오류가 담겨있는가. 먼저 기업의 가격은 자산이 아니라 거기서 부채를 제외한 자본에 달려있다. 10억짜리 집에 9억짜리 전세가 들어있다면 매매가는 1억이어야 하지 10억이 아니다. 게다가 영화에서 내내 BIS(자기자본비율)를 운운하면서도 이 감독은 그게 뭔지도 모른다. 자기자본비율이 8%라면* 70조짜리 은행의 자본은 대충 5.6조 정도(실제론 그보다 높다)가 되고 매각가는 그 자본에 맞게 결정되어야 한다. 이 영화를 만드신 분들의 참신한 회계법에 따르면 열배의 자산가치(700조)를 지닌 리만브라더스는 외환은행 매각가의 반값인 1.5조에 팔렸는데 그럼 리만 인수를 추진했던 이명박 가카는 론스타를 뛰어넘는 투자의 귀재셨다는 말인가.

왈가왈부 할 것 없이 기업가치를 판단할 가장 확실한 근거는 바로 주가이다. 그런데 2003년 포부터 인수를 발표하기까지 외환은행의 시가총액은 1.8조에서 2.6조로 단 한번도 론스타가 매입한 기준인 2.8조**까지 오른 적이 없다. 되려 론스타는 상반기에 거래된 수준보다 더 비싸게 매입했다. 이는 일반적인 수준의 경영권 프리미엄을 지불한 것으로 외환은행이 론스타에 헐값에 매각되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가장 강력한 반증이다. 누구든 정말로 당시 외환은행의 기업가치가 저평가되어있다고 믿었다면 그냥 증권사 HTS를 켜고 외환은행 주식을 매수하면 되지 않았는가. 확실한 저평가인데도 안 산 사람은 바보고 2003년에 바보였다면 2019년에도 여전히 바보일 테니 그들의 말은 무시해도 된다.
론스타 매각 당시 외환은행 주가
하지만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실제 상황은 피해망상증 환자들의 기억과 매우 달랐기 때문이다. 2003년 당시, 정부의 소비촉진정책 중 하나로 카드사용이 급격하게 늘어나다 부실이 커져 신용경색이 발생하자 외환카드를 비롯, 여러 카드사와 캐피탈사의 부도위험이 빠르게 증가했다. 대부분의 대형 금융기관들이 이미 대량의 부실채권 위험에 노출되어 있던 터라 외환카드를 떠안고 있는 외환은행을 매수할 후보가 없었다. 심지어 지속적인 인수 압박을 받던 국민은행의 김정태 행장은 공개적으로 "금융 당국이 외환은행 인수를 강요한다. 부실을 떠안기려는 거다. 그랬다간 국민은행도 같이 망한다"고 일갈하며 정부의 인수 압력을 거부하기도 했다. 마땅한 인수후보를 찾지 못한 금융당국은 눈을 해외로 돌렸지만 부실이 얼마나 되는지 알지도 못하는 작은 은행을 인수할 후보는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당시 론스타가 관심을 보였지만 그들은 사모펀드인 자신들의 은행 매입을 정부가 허락해 줄 것인지 반신반의했고(어느 나라나 은행의 대주주가 되는 데에는 여러 제약조건이 존재한다), 하루바삐 인수후보를 찾아야 했던 금융당국은 이 매각이 성사되도록 스스로 편법을 찾아 준 것이다.

외환은행의 주당 순이익
우여곡절 끝에 론스타는 외환은행을 매수해서 성공적으로 구조조정을 이끌었고 몇년동안 막대한 적자를 내고 부실채권을 떠안던 이 은행은 매년 꾸준히 흑자를 내는 기업으로 다시 탄생했다. 심지어 리만금융위기에도 흑자를 냈으니 HSBC같은 국제금융그룹이 왜 욕심을 내지 않았겠는가. 처음에 론스타의 외환은행인수를 반대하던 노조는 막상 외국인 행장 아래서 복지가 업계 최고 수준으로 개선되자(당시 외환은행의 여성직원 비율과 근속년수는 모두 업계 최고) 이후 론스타가 은행을 팔고 떠나는 것에 극구 반대했다. 이는 결국 주주-회사-직원이 모두 이득을 본, 교과서에 실려야 할 가장 성공적인 인수합병이었다. 자산-부채가 뭔지도 모르는 노망난 감독이 갑자기 등장해서 재를 뿌리기 전 까지는.

론스타의 실책이나 불법행위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애초에 허가를 내 줄테니 외환은행을 매입해달라고 나선 것은 은행의 파산을 막고자 했던 금융당국이었고 론스타가 제시한 가격보다 더 낮은 가격에도 외환은행을 인수하지 않겠다며 달아난 이들은 한국의 금융기관들과 그 주주들 아닌가. 모든 투자에는 리스크가 따르고 리스크가 큰 만큼 큰 보상이 있는 것이 공정한 것이다. 론스타는 아무도 떠안지 않던 위험을 떠안았고 그 대가로 큰 수익을 내었다. 어려울 때엔 콧배기도 보이지 않다 잔치판에 갑자기 뛰어들어 먹튀 운운하던 저 무리들은 과연 외환은행이 파산해서 론스타가 투자금 대부분을 날렸더라면 보상해주라고 했을까. 그 저변에 깔린 심정은 정의감도, 공정성도 아닌 그냥 천박한 배아파리즘에 불과하다.

그 천박한 감정이 지속되다 보면 피해망상으로 번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망상증에 걸린 사람들은 자신의 결함이나 불만을 다른사람에게 투사해서 그들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믿게 된다. 이 영화를 찍은 정지영 감독은 73세의 고령의 감독으로 본디 "여자의 함정",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와 같은 통속물이나 만들던 사람이었는데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하지 않다 갑자기 "남영동 1985", "천안함 프로젝트", "국정교과서 516일" 과 같이 정치색이 강한 영상들을 제작하며 충무로로 복귀했다. 혹시 이 감독은 지난 날 자신의 실패와 부진이 외국계 자본들과 그들을 옹호하는 보수진영 때문이라고 믿는 것 아닐까? 이 노인은 자신의 망상을 뒷받침하기 위해 영화에서 재경부 관료들과 론스타를 살인까지 불사하는 악당으로 묘사했는데 백번 양보해서 자본시장법을 위반했다고 해도 그게 살인은 아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쩡한 투자자와 공직자를 살인자로 몰아가는 그의 정신상태는 결코 건전하지 못하다. 그는 메가폰을 잡기 전에 정신과 의사를 만나야 했다.

혹시나 그의 치료에 도움이 될까 몇줄 더 보태고자 한다. 론스타 매각은 참여정부에서 추진된 일이고, 론스타 매각에 관여한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김진표 전 경제부총리, 변양균 전 청와대 비서실장(신정아가 처녀라고 주장했던 바로 로맨틱 가이)은 모두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등용되거나 임명된 사람들이다. 나는 그들의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꼭 론스타 사태를 비난해야겠다면 저어기 민주당으로 찾아가시라. 아니면 사실 감독이 숨겨진 꼴보수라 앞서 언급했듯 리만인수를 추진한 이명박 가카를 떠받들며 민주당 정치인들을 비난하는 것일까. 나도 헷갈린다. 그냥 나이도 지긋하신 분이 잘 모르는 금융사건은 이제 그만 다루시고 본디 전공이시던 통속물이나 계속 제작하시는 것은 어떨까. 그게 더 재밌어 보이는데.


정지영 감독의 과거작 "까"의 포스터와 네티즌 평점(3.45)
참고로 이 영화의 평점은 희대의 망작 리얼(4.23)이나 성냥팔이소녀의 재림(4.15)보다도 낮다.


*자기자본비율을 산정할 때에는 자산의 위험도에 따라 각기 다른 가중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BIS는 실제 자본비율보다 대체로 낮다.
**론스타는 지분 51%를 약 1.4조에 매입했으니 기업가치의 100%를 약 2.75조로 본 셈.

2019. 9. 21.

(故)고바우 영감

첫 연재가 언제 어디부터였는지 매체마다 주장이 조금씩 엇갈리긴 하지만 이 고바우 영감이 대한민국의 최장 시사만화라는 데에는 아무 이견이 없다. 무려 1만 4139회에 걸치는 그의 만평은 한국의 살아있는 근대사 그 자체였고 민주화의 역사가 그랬듯이 고바우 영감 역시 수많은 풍파를  겪어야 했다.

그중 가장 유명했던 것은 단연코 경무대 똥통사건일 것이다. 경무대는 청와대의 전신으로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민주주의에 대한 경험이 전무한 채, 조선이나 일제 총독부의 신민으로 살아오던 사람들에게 경무대는 뭐 경복궁이나 다름없지 않았겠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부터가 전주이씨 양녕대군파였는데. 그리고 1957년 그 권력구조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사건이 터진다.

슬하에 자녀가 없던 이승만은 부통령 이기붕의 아들 이강석을 양자로 입적한다. 친부는 부통령이요, 양부는 대통령이니 그에게 두려울 것이 무어가 있으랴. 그는 경찰서의 헌병을 폭행하기도 하고 아무런 자격 없이 서울대 법대에 편입하려 드는 등, 안하무인으로 행동하기로 유명했다. 그러던 중 그를 닮은 한 빈손의 백수 청년이 이강석을 사칭하며 경주에 나타나 온갖 접대와 향응, 그리고 금품까지 받고 다니다 적발되어 검거된 것이다. 본디 해프닝으로 끝날 사건이었지만, 아무런 공식직함도 없이 단지 대통령의 아들이란 이유만으로 온갖 특혜를 받았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공개되자 민심은 흉흉해진다.

경무대의 권위를 팔고 다닌게 과연 대통령 아들 하나 뿐일까. 그리고 거기에 상처받고 다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으랴. 지금에도 그럴진대 그 시절엔 훨씬 더했을것이다. 그러자 고 김성환 화백은 자신의 만평에서 똥을 치우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경무대에 출입하는 사람은 목에 힘을 주고 다닌다는 촌철살인을 날리다 연행되어 벌금형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이후에도 수도 없이 이런 저런 만평들을 통해 시민을 대신하여 권력자들에게 독설을 날렸다. 서슬 퍼런 박정희때는 물론이고, 사람들이 무수히 죽어나가던 신군부 시절까지도. 대머리였던 전두환을 문어에 비유하기도 했으니 그는 무척이나 고달프게 살아왔을것이다. 그 당시 정권의 탄압이 어땠는지 묻는 질문에 그는 "벌금으로 도대체 얼마를 냈는지 나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며 웃었다고 하니 기개는 물론이고 꽤나 유쾌하기까지 한 화백이었음에는 틀림없다.

그랬던 그가 지난 9월 8일 향년 87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생전 최초로 등록문화재(제538호)에 오르기도 했지만, 여전히 한국 현대언론사에서 그의 공을 기리기엔 턱없이 부족한 대우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함께 역사가 되어버린 고 고바우 영감을 마지막으로 만날 수 있는 자리가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은 9월 10일부터 10월 31일까지 ‘고바우 영감, 하늘의 별이 되다’ '김성환 화백 회고전'을 개최한다. 위에 올린 경무대 똥통 외에도 "아니 이사람 어떻게 살아남은거야?" 싶은 촌평들이 많으니 한번 방문해 보기를 권한다.

*          *          *

경무대가 청와대가 되고, 20세기가 21세기가 되었지만 여전히 두마리 봉황이 가지는 힘은 막강하다. 민주화의 두 영웅, 김영삼과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들도 약속이나 한듯 똑같이 막후에서 실세로 활동하며 돈을 받다 구속되었고 노무현과 이명박은 그들의 아들대신 형들이 돌아다니며 뇌물을 챙겨 먹다 유죄선고를 받았다. 심지어 박근혜는 가족이 없자 친구를 불러 비선실세를 맡겼다가 탄핵되지 않았나.

그리고 이제 우리는 현 정부의 실세들도 그 전임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교육부는 대통령의 아들 문준용이 제작한 허접한 제품 수백억 원어치를, 심지어 수의계약으로 사줬지 않은가. 인터넷에 올라온 그 코딩교재는 왠만한 학교의 전기과 2,3학년정도면 충분히 만들 수 있는 수준인데 아무나 저런 허접한 물건을 국가에 수백억 납입할 수 있다면 나부터 회사를 때려치겠다. 게다가 한투증권 PB는 민정수석의 아내가 부탁하자 별 실적도 없는데도 그녀의 집에 들락날락거리며 하드를 교체해주고 심지어 경상북도 영주까지 따라갔다. 먼저 PB는 그런걸 해주는 사람도 아니고, 저걸 할 줄 아는 사람도 아니다. 나와 부모님, 그리고 친척들도 PB를 이용하는데, 조국이 부동산을 뺀 전재산을 저 PB에게 맡겨도 매니저가 영주까지 따라가주지 않는다. 결국 우린 경무대의 똥을 치워도 엣헴엣헴 거리고 다니던 1957년보다 그닥 나아지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언론들은 사안을 대할때 옳고 그름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좌파와 우파로 나뉜다. 그들의 시시비비는 정의가 아닌 진영으로 갈린다. 만약 고 김성환 화백이 자유당 정권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오늘의 권력형 비리를 보면, 또 진영논리로 이를 감싸는 자칭 "시사만화가"들의 모습을 본다면 과연 고바우 영감은 뭐라고 했을까? 그 빈자리를 무척이나 안타까워하고 서글퍼하는 것이 나 하나는 아니니라.





조국의 권력비리를 대하는 한 시사만화가의 만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