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4. 11.

금호미술관 영아티스트전

기분이 들뜬 탓인지 아니면 날씨 탓에 집중력이 흐트러져인지 전시 주제와 상당히 동떨어진 감상들만 마음에 남았다. 

그래도 감상은 감상이니까.


노은주 작가


노은주 작가는 파괴된 콘크리트와 철근을 마치 정물화처럼, 혹은 초현실주의처럼 그려냈는데 이는 바니타스적 정물화를 연상시킨다. 바니타스는 화려한 장신구와 황금 그리고 만개한 꽃과 함께 해골이나 꺼져가는 촛불 시들어가는 꽃을 배치하여 삶의 허무함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정물화인데, 당시의 사회가 전염병과 또 30년전쟁으로 인한 대량학살에 시달렸던 것을 생각한다면 그 염세주의의 배경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으리라.

해골과 꽃다발이 있는 바니타스 정물, 아드리안 판 위트레흐트

당시 정물화의 가장 인기 있는 소재는 과일이나 꽃이었는데 이는 이 오브제들이 풍요 혹은 화려함을 상징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신흥 계층이었던 부르주아와 유한계급은 자신의 풍요를 과시하고 싶어 했기에 이런 꽃과 과일 그림들을 거실에 걸어두곤 했다. 농경 기반의 사회에서 보리나 밀 대신 재배한 과일과 꽃은 늘 가장 사치스러운 오브제였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꽃과 과일 따위로 현대의 풍요를 나타낼 수 없다. 과일보다 자극적이고 비싼 음식은 수도 없이 널렸으며 이젠 꽃 자체보다 그것이 어느 플라워샵에서 왔는지가 더 중요하다. 양재동 비닐하우스의 장미 한 송이의 가격과 니콜라이 버그만의 장미 한 송이의 가격은 아주 다르지 않은가. 그렇다면 16-17세기의 정물 화가들이 21세기에 태어났다면 그들은 무엇을 그렸을까? 청담동을 한 바퀴 돌고 난 뒤 아마 샤넬이나 롤렉스를 그리지 않았을까? 아니면 에르메스나 파텍필립?

주기적으로 기근을 겪고 굶어죽던 중세 유럽의 서민들에게 과일과 꽃이 사치재였던 것처럼 우리에게 명품이 그렇다. 우리는 샤넬을 원한다. 롤렉스를 욕망한다. 아름다워서? 천만에. 그 사치재들이 값나가는 진짜 이유는 쓸모없는 게 희소하기 때문이다. 물건을 들고 다니기에 백팩만큼 편한 게 어디에 있는가. 하지만 에르메스나 샤넬은 백팩을 만들지 않는다. 왜? 백팩은 너무나 실용적이기 때문이다. 실용성은 우아하지 못하다, 아름답지 못하다, 그리고 우아하지 않고 아름답지 않은 것은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사실 이 모순을 설명하기엔 롤렉스가 더 적합하다. 쿼츠시계는 물론이고 0.1밀리 초보다도 더 정확한 핸드폰을 두고 굳이 불편한 기계식 시계를 고집하는 허영 가득한 저 남자들의 왼쪽 손목을 보라. 그들은 아침마다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맞추겠답시고 그 작은 기계장치의 조그마한 나사를 돌리느라 시간을 허비한다. 21세기에 사는 이들이 18세기의 선조들과 같은 불편을 누리기 위해 수백 수천만 원을 쓰고 있지 않은가. 이처럼 실용성은 그 자체로서 심미성의 적이다. 

또 샤넬과 롤렉스가 생산라인에 포드주의를 도입해 한 해 수백만 개의 제품을 대량생산하면서 판매 가격을 혁신적으로 낮춘다면 그대들은 더 이상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아름다움은 절대로 대량생산될 수 없다. 모두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름답지 않다. 이러니 쓸모가 없는 것에 수천만 원을 쓰는 것 보다 더 유혹적인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리고 명품 브랜드들은 이러한 인간의 본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내 말이 의심스럽다면 주말 아침에 백화점 앞에 길게 줄 선 남녀들을 보라. 

이런 현상은 동물들에게도 나타난다. 공작의 화려한 꼬리와 사슴의 뿔, 그리고 수사자의 갈기는 생존에 방해가 되지만 대신 이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여 성선택에서 유리하다. 이성에게 "나는 이런 쓸모없는 것을 달고서도 살아남을 정도로 강인한 개체다"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인간의 꼬리털, 뿔, 갈기는 17세기에는 꽃과 과일이었지만 21세기엔 유라시아 대륙 서쪽 끝에서 제작된 가죽 바구니와 금속수갑이 되었다. 이런 상념을 마음에 품고 17세기의 해골을 오늘날의 콘크리트 더미로 치환한 노은주 작가의 그림을 보며 비어있는 캔버스 한편에 놓인 샤넬과 롤렉스를 상상해본다.



문이삭 작가

사물을 해체하고 재조립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은 이전에도 많은 작가들을 통해 다루어졌기 때문에 이런 시도가 새롭게 다가오지는 않았고 내가 이 작가의 배경과 그 의도를 몰라 작품에 공감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 원인이 작가에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전 조영남 위작 사건(링크)으로 드러났던 것처럼 이미 대중과 현대미술의 괴리는 너무나 벌어져 이젠 양측이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운 경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나는 대중에 가까운 사람이니 내가 교감할 수 없는 작가나 작품의 경우 내 이해와 고찰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왜 현대미술을 이해하기 어려울까? 물론 그 발전사를 모르고서는 납득할 수 없는 맥락이 존재하기 때문도 있지만 그게 유일한 이유는 아니리라. 중세-르네상스 미술과 대중의 관계를 보자. 당시 그림에 숨겨져있던 수많은 도식들, 그리고 종교적 상징과 그 배경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만찬도 단순한 저녁 모임 인증샷에 불과하다. 그 시대의 그림을 정확하게 읽어내려면 오늘날의 현대미술 못지않게 수준 높은 배경지식이 있어야 한다. 반면 당시의 대중은 어땠을까. 기초교육 따윈 없이 유년/청년기의 대부분을 생존을 위한 노동으로 보냈던 이들은 현대인에 비해 지식수준이 현격하게 낮았다. 대다수는 문맹이었고 성직자들이 읽어주지 않으면 성경의 내용조차 이해하지 못해 무엇이 신성모독인지 분간할 능력조차 없었다. 귀족이 아닌 신흥 브루주아 계급이라고 뭐 그리 달랐을까. 그들과 미술의 거리는 현재 우리들이 겪는 간극만큼이나 멀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와 그들 사이의 결정적 차이가 있다. 바로 시간. 중세-근대에는 볼거리가 많지 않았다. 아주 부유한 왕과 귀족조차도 광대의 쇼나 무용수들의 공연을 매일 볼 수는 없었기에 시각적으로 즐길 거리라곤 예술가들이 제작한 회화나 조각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림 앞에 앉아 감상하고 사색하고 고찰할 시간이 월등히 많았다. 과학과 자본의 발달로 인해 회화의 경쟁자들이 우후죽순 늘어나기 전까지는. 유한계급이 늘어나며 오페라나 연극도 함께 성장했으며 풍부한 수요는 더 많은 공급을 불러일으켰다. 인쇄기술의 발달은 사람들의 볼거리를 폭발적으로 늘렸고 영상기술-대중문화-인터넷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혁명은 그에 기름을 부었다. 아마 21세기의 일반인이 10분 안에 접할 수 있는 볼거리의 양은 근대 이전 그 어떤 왕이나 파라오, 혹은 황제가 평생 본 것보다도 많을 것이다. 

그런 마당에 사람들이 미술에 더 많은 시간을 쏟을 리가 없다. 더 가까이 앉고 더 친근하게 붙고 더 세심히 바라보아야 느낄 수 있던 것들을 찾아볼 시간이 없다. 넷플릭스, 유튜브, 그리고 네이버 웹툰. 미술의 경쟁자들은 너무나 막강해서 어쩌면 작가들 본인들조차 저 세 가지 매체에 쏟는 시간이 더 클지도 모른다. 그에 따라 미술의 방향도 점점 바뀌고 있다. 오래 보아야 이해할 수 있는 작품에서 순간적인 인상만으로도 관객의 시선을 사라잡을 수 있는 방향으로. 나 역시 그런 관객의 하나일 뿐이니 작품 너머에 있는 작가와 마주 앉아 작품을 매개로 두런두런 이야기하고 그의 생각과 미술 세계를 엿볼 시간을 내어주지 못한다. 

그렇게 우리는 늘 시간이 없다. 타인을 이해할 시간이, 사색에 잠길 시간이, 누군가를 생각할 시간이, 행복을 추억할 시간이, 그리고 사랑할 시간이 없다. 현대의 자본주의적 사회는 그런 삶을 무척이나 권장하고 예찬한다. 효율이란 이름 아래 그런 여백 같은 시간들은 종종 거세되곤 한다. 하지만 그런 시간들이 없다면 도대체 삶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댓글 2개:

  1. 좋은글 언제나 감사합니다! 건강이 제일 중요한 가치에요 언제나 건강하셨으면 진심으로 좋겠습니다. 살아가는데 있어서 사랑할 시간도 부족하니까 모두를 사랑하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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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어떤 원주민이 현대인 삶의 방식에 대해 미국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가장 돌보고 함께해야 할 사람들을 두고 아침부터 밤까지 뭘 하다 오는지 그들의 삶의 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는데, 마지막 문단에서 겹쳐보이는 부분이 있네요

    언제나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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