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 25.

4.19혁명 세력은 어떻게 박사모가 되었나?

[먼저 불필요한 논쟁을 막기 위해, 정치인에게는 공과 과가 있고 공을 언급하는것이 과를 정당화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요새 5.18 관련 논쟁이 큰 이슈다. 거기에 따른 비상식적인 논쟁과 그 비상식때문에 묻힌 상식적인 문제제기와 같은 시끄러운 이슈들을 잠시 뒤로 하고, 모두가 간과하고 있는 모순적인 사실 하나를 끄집어보려고 한다.

87년 민주화 항쟁의 바로 앞에 등장하는 4.19 혁명, 그 1960년에 일어난 원조 민주화운동의 주역은 1925-1945년대생들로 바로 지금의 틀딱이라고 조롱받는 박사모 세대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초의 민주화 혁명을 이끌어 낸 세대가, 또 내전의 상흔이 다 낫지도 않은 시점에서 부정선거에 저항해 독재자를 물리친 그 분들이 어째서 또다른 독재자를 평생토록 옹호하고 팬클럽이 되어 그 딸 까지도 찬양하게 된 것일까? 참 아이러니하지 않나. 하지만 그 아이러니에 우리나라의 미래가 달려있다.

먼저 4.19혁명의 주체들과 현재의 박사모는 세대만 같지 같은 구성원들이 아니라고 생각할까봐 지역적 분석부터 시작하겠다. 4.19의 첫 도화선은 분명히 대구에서 시작되었다. 관제시위에 학생들을 동원하는 지침에 반발하여 대구의 고등학교 학생들은 2월 27일부터 시위를 벌였다. 구체적으로는 대구고, 경북고, 경북여고, 경북대사대부고, 계성고 등 8개 학교 총 1,200여 명이 이에 참여했다. 이후 서울 충남 광주 마산 등지에서도 시위가 일어났지만, 규모 면에서는 부산에서만 약 7800명의 중고등학생들이 시위에 나서는 등, 3.15 부정선거 전 까지 시위의 주도권은 경북경남의 학생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이후 선거 뒤 마산에서 눈에 최루탄을 맞아 사망한 고 김주열 학생(17세)의 시신이 떠오르자 마산을 중심으로 4월 11일부터 대대적으로 시위가 시작된다. 경상도 지역 중고등학교를 중심으로 한 시위는 이윽고 고려대학교 등 서울의 대학생들에게도 번졌고 전국, 전 세대의 시위로 번진 것이다. 1960년대 당시 중고등학생이었던 이들과 현재의 박사모는 세대적으로도 지역적으로도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호기심에 광화문 태극기 시위를 둘러보면 자신들이 4.19 민주화 운동의 주역 중 하나라고 주장하는 시위자들도 가끔 보인다.

독재자 이승만을 몰아낸 그들이 독재자 박정희를 응원하게 된 결정적 사건은 제 2공화국이 당대의 사회적 혼란을 전혀 통제하지 못했다는데서 출발한다. 자유당의 탄압으로 마이너 정당에 머물러 있던 민주당이 정권을 잡자, 그 둘은 신파와 구파로 나뉘어 정치싸움을 시작한다. 부패한 정부를 몰아낸 시민들은 이제 무능한 정부를 마주하게 되었고 정부는 민심과 동떨어진 정책들을 내놓게 된다. 예를 들면 국가예산이 부족하니 70만에 달하는 병력을 10만으로 감축하고, 부족한 전기를 북한에서 끌어 쓰는 대신 남한의 쌀을 북한에 수출하자는 등, 종전 후 7년밖에 안되는 시점에서 국민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정책들로 사회 혼란은 가중됐다.

그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제2공화국은 이승만 정권과 비슷한 악수를 두게 되는데 바로 민주당의 주도로 반공임시특례법과 데모규제법을 입안한 것이다. 이는 현재까지도 국가보안법의 일부에 편입되어, 집시법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전해지고 있다.(즉 국보법에는 민주당의 dna도 섞여 있다) 이처럼 시위로 탄생한 정부가 시위를 억압하는 아이러니를 보이자 민심은 장면 정권에 대해 등을 돌린다.

그 증거는 5.16 쿠데타 이후의 여론과 그 뒤에 미국의 감시로 치뤄진 제 5대 대통령선거에서 극명하게 들어난다. 국민들은 쿠데타 자체를 반기지는 않아도 4.19나 이후 12.12로 들어선 신군부를 대하던 것 과는 다르게 대규모 시위나 봉기로 대응하지 않았다. 또한 미국의 감시로 이전이나 이후의 선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공정하게 이뤄진 제 5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민주당 후보 윤보선을 누르고 당선되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민주당이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문제삼아 빨갱이라며 공격했고 이에 동조해 6.25당시 피해가 컷던 서울과 수도권 그리고 군인 표가 많은 강원도가 대거 윤보선을 뽑고, 진보적 지역이었던 전남과 경상도는 박정희를 뽑았다.

제 5대 대통령 선거 결과

당시 이승만의 부패로 행정조직이 와해되고 정치인들이 무능했던데에 비해 잘 짜여진 군대조직을 갖춘 군부는 무너진 국가시스템을 효율적으로 재건할 수 있었고 또 그 당시 낙후된 교육수준에 비해 장교들은 해외 유학생 수의 60%를 차지하는 등 상대적으로 더 엘리트였기 때문에 민심은 빠르게 박정희와 군부에게 몰렸다. 그 결과 4년 뒤 제 6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와 윤보선의 득표율은 51.4% vs 40.9%로 더 크게 벌어진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후 개헌과 부정선거를 통해 3선에 성공하고 종신집권까지 노리는 독재자가 된다.)

즉 원래 질문으로 돌아가보면 4.19 헉명세력들이 박정희에 대한 애정을 가지게 된 것은, 혁명 이후 집권한 제2공화국의 정치인들이 이승만과 다를바 없는 무능함과 부패를 보여줬기 때문이고, 그 이후 박정희와 군부가 혼란을 효과적으로 잠재우고 경제성장의 기틀을 잡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4.19 세대의 동기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역사가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젊은 세대들이 왜 여당에 대한 지지를 거두고 있는가? 민주당은 55년 전에 저질렀던 실책처럼 국민들이 자신들을 지지해서 전임 대통령을 밀어냈다고 생각한다. 이전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혐오를 자기에 대한 지지로 읽기 때문에 어느정도 비위와 부정부패를 저질러도 된다고 본다. 거기에 시위 덕에 집권한 정당이 시위를 억누르는 법안을 발의한 것을 보면, 현재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며 각종 매체를 검열하고 가짜뉴스를 탄압하겠다고 나서는 현 민주당의 모습이 정확하게 겹쳐 보이지 않는가.

30년전의 공으로 오늘의 과를 덮으려는 운동권들은 자신들보다 윗 세대의 그 복잡한 역사를 무시하고 단순화시킨다. 친일파와 이승만의 자유당, 5.16 군사정부 그리고 신군부, 신한국당, 새누리당, 자한당은 모두 똑같은 정체성을 가진 적폐세력이라고. 하지만 역사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저 정치세력들이 얼마나 서로 다른지 이해할 것이다.(되려 아이덴티티나 구성원의 변화 없이 이어져오는 것은 민주당이다, 당명도 잘 안바뀌는걸 보라) 그런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으니 민주화 선배들인 4.19세대가 박정희의 팬클럽이 된 것은 못배워서 그렇다고 본다. 또 그러니 20대 남성들이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는 이유를 못배워먹어서라고 생각하는 것 아닌가.

나는 4.19세대가 박정희의 독재와 사법살인을 비호하는 것이나, 아니면 박근혜의 정치적 비위를 옹호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변호하는 것이 아니다. 말머리에 밝혔듯 공과 과는 구분되어 평가해야하는 것이고 공으로는 과를 덮을수 없다. 다만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화혁명을 이뤄낸 18살의 앳된 소년들이 격동의 현대사를 겪으며 노쇠한 몸을 이끌고 55년만에 다시 광장에 나와 그 주름진 손으로 태극기를 흔들며 독재자의 딸을 응원하는 아이러니는 그들의 경험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한다.


게다가 그들의 경험이 나의 경험과 아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우리도 슬슬 느끼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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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민주화 시위를 벌이는 고등학생들. 이들은 오늘날의 틀딱이 되었다.

댓글 1개:

  1. 민주당이 20대 남성들이 등을 돌리는 것에 대해 배우지 못하였다고 하는걸 보고 실소를 금하지 못하였습니다. 아이러니 한것은 20대의 반이상은(90~00)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정권의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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