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24.

터부 요기니, 그리고 노회.

2003년 베니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도 성대한 비엔날레가 열리던 그 해 여름. 한 동양 여성이 산마르코 대성당 광장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빨갛게 물들인 머리에 경극이나 가부키를 연상시키는 짙은 화장을 한 그녀는 곧 옷을 벗어던지기 시작했고 빨간 속옷만 입은 채 관객들 사이로 걸어 들어가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무척이나 기괴하면서도 에로틱하지만 또 어딘가 서글픈 그녀의 춤사위는 비엔날레를 찾아온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사실 정식으로 초대받지도 못했던 이 무명의 신인은 단번에 가장 유명한 한국 아티스트가 되었으니, 바로 낸시랭-터부요기니가 탄생하던 순간이었다.

여전히 사회에 엄숙주의가 만연하던 시절 미술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시절의 화가란 마치 선비나 계룡산의 도사와도 같은 것이었고 그런 이들과 결탁한 인사동의 화랑들은 카르텔을 형성하며 온 힘을 다해 퇴보하던 중이었다. 그러니 어찌 낸시랭이 이뻐 보였겠나. 젠체하던 이들은 겉으로는 그녀를 관대하게 대하는 척하면서도 그녀의 예술을 저급한, 마치 인스턴트식품과도 같다며 은근히 까내리고 있었다. 그녀가 그런 평단의 분위기를 몰랐을까. 낸시랭은 대중들과 평단에 굴복하기는커녕 근엄한 예술의 성지와도 같던 예술의 전당에 나타나 입던 바바리를 벗어던지고 다시금 비키니 차림의 육신을 대중 앞에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본 대중들은 그녀를 비난하기 바빴지만, 세상에 얌전히 순응하기만 하는 예술이란 게 어디에 있는가. 그녀는 계속해서 위선을 권위로 덮은 예술계와 관음적인 관객 모두에게 당차게 중지를 내밀었다. 

보수적이고 젠체하는 평론가들 앞에 그녀가 비키니 차림으로 등장한지 어느덧 20여 년이 지났다. 더운 여름이 가시기 시작했던 지난 8월 말 그녀의 개인전이 열린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허나 그녀의 전시를 둘러보고 난 뒤 나는 적잖이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 모두와 싸우며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펼치던 낸시랭은 온데간데없고 과거의 영광을 답습하거나, 지나간 작가들의 작품에 올라타거나, 혹은 미디어 아트나 NFT와 같이 한 물 가기 직전의 진부한 트렌드에 영합한 작품들을 보게 될 줄이야. 내가 기억하던 그녀는 결코 그럴 작가가 아니었는데,라고 중얼거리며 전시장을 나서야 했다. 어쩌면 그녀는 지쳤던 것이 아닐까. 대중의 손가락질과 싸우느라, 또 개인적인 아픔을 이겨내느라 더 이상 싸울 힘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김빠진 그녀의 작품을 바라보는 일은 마치 아버지 정수리에 난 흰머리를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서글픈 일이었다..     

하지만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여전히 몇몇 작품은 충분히 도발적이었더라. 인터넷 홍위병들과 PC라는 신을 섬기는 광신도들이 창작자들의 입을 틀어막는, 마치 중세 암흑기와도 같은 이 끔찍한 시대에 그녀가 아니라면 누가 이런 작품을 내놓을 수 있었을까. 그녀는 여전히 권태를 깨부수는 작가였고 또 충분히 도발적인 아티스트였다. 그런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어 얼마나 반가웠던지.

낸시랭_Bubble Coco Woonwoodocheop_캔버스에 유채_112.1×162.2cm_2022

낸시랭_Picnic on the plum tree_캔버스에 유채_162.1×909.9cm_2022


*그리고 그녀는 노래방 기기로 보랏빛 향기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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