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쾌한 인플레이션의 시대 (I) (링크)
불쾌한 인플레이션의 시대 (II) (링크)
지난 8월 말 잭슨홀에서 파월은 매우 간결하면서도 명확한 메시지를 시장에 던졌다. 인플레이션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연준은 계속해서 강력한 조치를 취할 것이고 그로 인해 다소간의 고통이 뒤따르는 것조차도 감내할 것이라고.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경제의 과열을 방치하던 미국의 중앙은행(링크)이 이렇게 급격하게 돌아선 이유는 무엇인가. 작년 상반기 연준은 인플레의 주원인이 일시적으로 지연된 공급에 있다고 보았고 따라서 그 때문에 수요를 억제하는 것은 디플레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지난 사반세기 동안 인플레를 잠재우는 일보다 디플레로부터 경제를 끄집어내는 것이 더욱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연준은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디플레보다 인플레의 위험을 선택했던 것이다.
하지만 판데믹의 여운이 모두 가시고 난 뒤에도 공급은 여러 측면에서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고 반면 수요는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올랐다. 5% 중반에서 안정될 것이라고 믿었던 미국의 물가는 9%를 넘기며 2차 석유파동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고 연준은 빅 스텝을 넘어 자이언트 스텝에 나서게 되었다. 그와 같은 노력의 결과 월별 CPI 변동률은 0%에 근접했고 미국의 장기 cpi 기대치 역시 2% 대로 안정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월은 인상의 고삐를 늦추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의 바로 옆에서는 가장 좋은 친구였던 중앙은행에게 뒤통수를 거하게 맞고 폭락하는 주식시장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 하지만 그의 변심에는 이유가 있다.
이전에 언급했던 것처럼(링크) 현재의 인플레이션은 장기적으로 유지될 가능성이 높고 이와 싸우는 중앙은행은 경제를 오랫동안 짓누를 것이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대로 실업률이 높아지더라도 중앙은행은 반드시 기대인플레이션을 안정시켜야만 한다. 경기가 어렵다고 섣불리 금리를 인하하거나 부양책을 사용하게 되면 기대인플레이션이 다시 고개를 쳐들 것이고 이런 사이클이 반복되면 경제는 반드시 심한 불황을 겪게 된다. 따라서 단기간의 경제적 고통을 감내하더라도 지속적이고 꾸준하게 긴축정책을 시행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그때와 같은 상황에 놓였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중앙은행들은 올바른 정책을 택할 수 있을까.
1979년 연준 의장으로 취임한 폴 볼커는 두 자릿수가 넘는 인플레이션을 잠재우기 위해 금리를 급격하게 올렸다. 그리고 그로 인해 경제가 빠르게 꺾이고 실업률은 급등했지만 여전히 인플레는 낮아지지 않았다. 물가와 싸우던 연준이 긴축정책을 이어가자 농부들은 트랙터를 몰고 연준 본부 앞에 몰려와 가두시위를 벌였고 중고차 딜러들은 차 키들을 관에 넣어 연준에 보내며 강력하게 항의했다. 여론의 압박을 이기지 못한 연준은 거의 15%에 달하는 물가 상승률을 보면서도 17%가 넘던 기준금리를 700bp나 인하해야 했고 이는 스태그플레이션을 악화시켰다. 이렇게 오락가락하던 연준은 1981년에 들어서야 과감하면서도 단호한 정책을 펼 수 있었다. 미국 경제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불황을 마주하는데도 불구하고 기준금리를 20%까지 올리며 마침내 기대 인플레이션을 안정시켰다 하지만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당시 60% 후반의 지지율을 기록했던 레이건 행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과* 10년이 넘는 시행착오 끝에 중앙은행 내에서도 단호한 정책에 대한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방공개시장위원회의 점도표(2022년 9월) |
과연 지금은 어떨까.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암묵적으로 연임이 보장되었던 연준 의장의 임기는 옐런의 시대에 처음으로 단임으로 끝났고 파월 역시 첫 임기 이후 교체될 뻔 했다 가까스로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간밤에 발표된 점도표를 보면 위원들 사이에서 2024년의 금리 전망에 대해 큰 이견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는 연준 내에서 파월이 볼커처럼 고통스러운 금리 인상을 이끌어 갈 수 있을지 의문을 남긴다. 무엇보다 레이건과는 달리 현재 바이든의 지지율은 재선에 실패한 도날드 트럼프나 카터 만큼이나 낮은데 그런 행정부가 여론의 압박으로부터 연준을 얼마나 보호할 수 있을까.
게다가 몇몇 보고서에 따르면 행정부가 재정적자를 크게 유지하는 한 긴축적인 통화정책 만으로는 인플레이션을 잠재우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현재의 행정부가 인플레이션과 싸우겠다고 주장하면서도 쉽사리 급격한 긴축에 나서지 못하는 것은 유권자들의 표를 고려하기 때문인데, 이 가운데 과연 파월은 볼커가 될 수 있을까.
지난 30여년간 경제가 어려워질 때마다 중앙은행이 공격적으로 금리를 인하할 수 있었던 것은 인플레이션 기대가 매우 낮고 안정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인플레이션을 안정시켰던 여러 조건들은 매우 크게 돌아섰거나 영영 사라졌다. 그런 환경에서는 중앙은행은 더이상 당신의 친구가 아니다. 통화정책은 경제 전반에 걸쳐 무차발적인 영향을 미치는데 현재의 인플레이션 압력이 노동시장에 기인한다면, 중앙은행은 가장 경직적인 노동시장에 영향을 줄 때까지 금리를 올려야 한다. 즉 사람들의 소득이 깎이고 일자리를 잃을 때까지, 또 고령의 노동자들이 가난해져서 은퇴를 미루도록 중앙은행은 긴축을 지속해야만 한다. 과연 우리는 그 고통스러운 인플레이션의 시대를 맞이할 준비가 되었는가.
아마도 올해 말을 기점으로 중앙은행들은 중립금리에 도달하거나 넘어서게 될 것이니 따라서 우리는 인플레이션과의 대결에서 전반전을 막 끝낸 셈이다. 그리고 그 전반전은 투자자나 중앙은행에게 너무나 쉬운 경기나 다름없었다. 투자자들은 부채를 늘리면 돈을 벌었고 중앙은행이 금리인상은 자산 가격의 하락을 가져와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그 후반전은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싸움이 될 것이다. 부채는 투자자들의 발목을 잡을 것이고 금리는 이제 자산가격 뿐 아니라 우리의 소득과 소비에 타격을 가할 것이다. 대중들은 "자산 가격 잡으라고 금리를 올리랬지, 내 월급을 잡으라고 금리를 올리랬나"며 불만을 터뜨릴 것이고 중앙은행이 필요한 인상을 거듭할 때마다 그 반발은 점차 거세질 것이다. 코로나는 우리에게 실제적인 생존의 위협을 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런 경제적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되려 더욱 부자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인플레이션을 마주하고 있다. 세계대전 이후 최초로 세계 사망률을 증가시킨 코로나에 비하면 별것 아닌, 마치 천연두처럼 지난 세기에 멸종된 줄 알았던 인플레의 위협과 싸우기 위하여 사람들은 가난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중앙은행의 대응 여부에 따라 이 후반전은 아주 길어질 수도, 혹은 빠르게 끝날 수도 있다. 과거에 이와 같은 시대가 어떤 양상으로 펼쳐졌는지 첫 글의 마지막 문단을 다시금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친다.
[인플레이션의 초입에서는 당신이 무엇을 사는지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많은 빚을 냈는지에 따라 수익이 정해지고 당신의 근로소득이 휴지가 되는 것을 겪을 것이다. 그렇게 인플레이션의 초반부를 지나고 나면 이윽고 하반기가 시작될 것고 시대의 막바지를 향해 달릴수록 각 중앙은행들이 뒤늦게 인플레이션에 대응하기 위해 금리를 올리는 것을 겪을 것이다. 디레버리징의 시대가 오겠지만 그 시기를 완벽하게 맞춰 적응하는 투자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니 대부분의 투자자들은 포트폴리오가 레버리지 된 채 새로운 후반전을 맞이하겠지. 그제야 투자자들은 자신이 어떤 자산을 샀는지에 따라 포트폴리오의 수익률이, 더 나아가 자신의 생사가 엇갈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레이건 이후 집권 100일 차에 그보다 더 높은 지지율을 기록한 미국 대통령은 없었다.
* * *
퇴고를 하고 나서 다시 읽으니 의도에 비해 지나치게 암울한 이야기만 늘어놓은듯하여 한 가지 희망적 사례를 들어보려고 한다. 히피 문화가 한 풀 꺾이고 비틀스가 해체하고 난 뒤의 미국은 건국 후 가장 음울한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주식시장의 성장은 멈추었으며 인플레이션은 지속적으로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을 위협했으며 변덕을 부리는 연준의 금리 탓에 경기의 부침은 더욱 커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신과 창조를 거듭하는 기업들은 계속해서 탄생하였고 몇몇은 오늘날까지 뉴욕 거래소에 상장될 정도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바로 세계에서 가장 비싼 기업에 오른 애플이다.
매일 자기 전에 선생님 블로그 들락날락 하는 게 습관입니다. 인사이트 넘치는 글 자주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애독자-
답글삭제제가 게으른 탓에 완성하지 못하는 글이 태반입니다..
삭제오늘 유가 하락폭을 보니 러시아는 전쟁 수행
답글삭제가능 기간이 당초 2년에서 1년정도로 짧아진것 같습니다.
많이 배우고 깊은 통찰력을 바탕으로
삭제선생님과 논쟁을 하고싶네요
이황과 기대승처럼 말이죠 ㅎㅎ..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삭제러시아 중앙은행장의 사표가 10/3
삭제수리된다면 아마 걷잡을 수 없이
금융 전세든, 물리적 전선이든
러시아가 밀릴 것으로 생각됩니다...
전쟁이 어서 끝났으면 하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항상
답글삭제과찬 감사드립니다.
삭제과거 인플레이션을 정직하게 따라갔던게 부동산이였는데, 중앙은행의 금리인상으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내려가게 된다면 부동산도 비슷한 경로를 따라간다고 볼 수 있을까요?
답글삭제네 그렇습니다 정직하게 따라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니까요.
삭제좋은글 잘읽고 갑니다
답글삭제지금이 인플레이션 전반전을 막 끝낸 때라면 인플레이션의 시작점은 코로나 때로 봐도 될까요? 그렇다면 딱 전반전만큼만 단순하게 후반전을 치루거나 혹은 더 길어지게 되더라도 1970년대만큼 10년에 가까운 횡보장까지의 경기침체는 아직 우려할 정도는 아니려나요? 다음 10년은 제게 있어 가장 많은 근로소득을 벌 시기일텐데 이제는 우상향하는 자산으로 불리기 어려워진다는 게 .. 너무 깜깜하네요..
답글삭제처음에는 저도 그리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측면에서는 코로나 이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다만 미중 무역분쟁과 코로나로 경제지표들이 지나치게 왜곡되어 그 장기적 영향을 중앙은행이 너무 늦게 알아챈건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미국의 이야기지만요,
삭제앞서 몇 글에서 언급했듯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과 싸울때 가장 좋은 자산 중 하나는 바로 근로소득입니다. 제 예상이 맞다면 가장 많은 근로소득을 누리시면서 이 시기를 보내는 글쓴님은 운이 좋은 편에 속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 인플레이션에 대한 글 네번째는 언제 작성해주시나요? 이렇게 뻔뻔스럽게 요청드려도 되나 싶을정도네요 ㅋㅋ
답글삭제인플레이션에 대한 네 번째 글은 인플레이션을 억누르려는 중앙은행들의 노력을 정치가 방해하며 어려운 시기에 진입할 것이라는 예상이 들 때 쓰려고 합니다. 인플레이션이 언급될 때마다 우리는 주로 1970년대를 떠올리지만 실제 압력은 1960년대 중후반부터 시작되었고, 70년대의 끔찍한 인플레이션은 그를 억제하려는 노력이 충분하지 못했거나 여러 정치적 이유로 실패하며 발생했습니다.
삭제1편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현재의 시대는 그때와 너무나 닮아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연준은 1970년대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의 연준은 과연 폴 볼커가 될 수 있을까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궁극적으로 정치에 달려있으니 조금 더 지켜보려고 합니다.
위태위태한 기술주장세에서의 애플 지금의 상승세도 혹시 예견하신겁니까?
답글삭제그럴리가요, 하지만 인플레이션의 시대에 태동하여 반세기를 살아남은 회사의 저력은 참으로 대단하네요
삭제24년에 이 글을 다시 읽으니 더 재밌네요. 당시 점도표보다 높은 금리를 장기간 유지한 덕분에 (재무부 차력쇼 덕분이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요) 이 인플레이션 시대의 후반전도 끝이 보이는 것 같은데요. 지표를 보면 막상 사람들이 가난해졌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미국 지수는 올해 역대 최고를 기록하기도 했고요. 온전히 문제가 해결된 것인지, 지독한 현실을 마주하기 전의 달콤한 꿈인건지 확인하게 될 내년이 더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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