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2. 26.

아시아의 미래 5. 러시아의 진격, 주춤하는 NATO, 그리고 숨죽인 아시아.

한국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나라는 어디일까? 당연히 일본이다(링크).* 그리고 한국인들의 뿌리 깊은 반일감정의 근원이 70여 년 전의 식민 지배에서 왔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이는 없다. 당시 일본이 일으킨 전쟁과 식민통치로 인한 조선인 사망자는 몇이나 될까? 거의 대부분의 조선인 희생자는 태평양전쟁으로 발생했으며 그 숫자는 7만-12만 명이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당시 조선 인구수가 총 2500만 명이었으니 전체 인구의 약 0.4%가 사망한 셈이다. 반면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소전쟁으로 소련은 인구의 10-13%에 달하는 2500만 명이 사망했다. 연일 외신을 수놓는 푸틴의 공격적인 대외전략을 이해하려면 러시아인들의 깊은 트라우마부터 이해해야 한다.

2차세계대전 후 바르샤바 조약기구와 나토의 대립
세계 2차대전이 끝난 후 소련의 전략적 목표는 잠재적 적국인 서유럽과 소련 본토 사이에 최대한 넓은 완충지대를 확보하는 것이었고 독소전 초기의 전개 과정을 생각하면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스탈린은 이를 위해 극동의 전략적 요충지들을 미군에게 양보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최근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스탈린은 북한이 남한을 침공하면 미국이 참전할 것을 예상하면서도 김일성의 군사작전을 승인했는데, 미군이 중국으로 진군하게 되면 넓은 전선을 유지하느라 유럽의 병력을 증강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전후 소련의 공포는 서방에 집중되어 있었다.
https://m.news1.kr/articles/?2714778#_enliple
그러나 소련이 붕괴하자 스탈린의 철의 장막 역시 빠르게 해체되었다. 러시아가 위성국가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동구권 국가들의 내부 문제에 적극 개입하자 이에 시달리던 과거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회원국들은 빠르게 나토에 도움을 청했고 얼씨구나 하며 이들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였다. 폴란드나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와 같이 러시아와의 숙원이 있던 나라들은 물론이고 발트 3국의 약소국과 발칸반도의 다수 국가들도 나토에 합류했거나 가입을 기다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우크라이나까지 나토에 가입하게 되면 러시아는 아무런 완충지대 없이 나토와 곧장 국경을 맞대는 상황을 마주해야 하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러시아의 트라우마를 건드린다.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전개
독소전 개전 직후 독일군은 군대를 세 갈래로 나누어 소련을 침공했지만 동쪽으로 진군할수록 전선은 넓어지는 데다 보급선이 과도하게 길어지는 바람에 모스크바 점령에 실패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게 되면 서방의 군대는 과거 독일군의 공세종말점 바로 뒤에서 전쟁을 시작하는 셈이고 모스크바는 직접적인 위험에 노출된다. 러시아는 단 한 번도 이런 불리한 조건에서 전쟁을 치른 적이 없다. 과거 나폴레옹이나 히틀러가 러시아 침공에 실패했던 결정적인 이유가 광활한 동유럽을 가로지르는 보급선을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는데 현재 나토는 러시아에게 이 자연 장벽을 제거하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이를 받아들일 나라는 없다. 게다가 푸틴의 커리어를 고려하면 그가 지정학적 전략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할 리는 더더욱 없다.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사실상 러시아의 레드라인을 넘은 것이고 푸틴은 이에 적극적인 군사대응으로 응수했다. 2014년 그는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인 크림반도를*** 확보했고 동부 우크라이나의 친러 반군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그리고 바이든이 아프간 철군으로 지지율이 크게 하락하자 푸틴은 더욱 적극적으로 공세에 나서고 있다. 

러시아 내의 문제에 정통한 일부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실제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가능성은 낮다고 한다. 나토에 가입하려면 주변 국가들과 영토분쟁 등의 문제가 없어야 하는데 푸틴의 군사행동은 단지 분쟁을 부각시켜 나토 회원국들로 하여금 우크라이나의 가입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데에 있다고 주장한다. 유럽 국가들은 19세기 초 무분별한 군사조약 때문에 의도치 않게 전 세계가 전쟁에 휘말린 적이 있으며, 따라서 나토를 설계할 때 상호방위조약을 넣는 대신 분쟁국가가 가입하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따라서 나 역시 나토가 우크라이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러시아의 플랜 A라고 생각하지만 세상에 플랜 B 없이 움직이는 군대가 있던가. 게다가 근본적인 문제는 서유럽과 러시아가 투키데스의 함정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한 정치세력이 다른 정치세력을 굴복시키는 데에는 크게 세 가지 방법이 있다. 경제, 외교, 군사. 유라시아 대륙 서쪽 끝의 경제와 외교지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군사균형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소련의 붕괴 후 유럽의 각국은 징병제를 폐지하고 감축에 나서는 등 마치 배당금을 타 먹듯 미국이 선사한 평화를 한껏 만끽했다. 반면 무질서하게 붕괴하는 것처럼 보이던 러시아는 푸틴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 아래 안정을 되찾고 군을 재건하고 있다. 러시아가 계속해서 신무기를 개발하고 과거에 폐기했던 여러 군 프로젝트들을 재가동하는 동안 서유럽의 군사동맹은 지속적인 병력/군비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나토는 회원국들에게 GDP의 2% 이상을 군비에 쓰도록 권고하고 있지만 이를 만족시키는 나라는 미국을 제외하면 8개 국가뿐이다. 게다가 점차 서유럽과 거리를 벌리며 이슬람주의로 회귀하는 터키와 대서양 반대편의 미국을 제외하면 나토가 가진 병력의 절대적 우위는 대폭 줄어든다. 현대전은 머릿수로만 하는 게 아니라며 젠체하던 미군이 아프간에서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하자. 
https://www.nato.int/nato_static_fl2014/assets/pdf/2021/6/pdf/210611-pr-2021-094-en.pdf
이런 상황에서 나토가 동진하는 까닭은 명확하다. 서유럽의 핵심 회원국들은 군비를 확충하고 징병제로 회귀하는 대신 동유럽의 위성국가들을 대거 편입함으로써 자국의 부담을 줄이고, 또 과거 소련의 완충지대를 자신들의 완충지대로 편입하려는 것이다. 즉 쇠퇴하는 군사력을 외교와 지정학적 우위로 상쇄하겠다는 것인데 이는 매우 잘못된 결과를 낳고 있다. 나약한 동기로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는 것이 어떻게 성공하겠는가. 소련의 봉쇄정책을 이끈 조지 케넌은 나토의 팽창정책이야말로 미국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로 이는 러시아를 자극하여 상대가 미국이 가장 원하지 않던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들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2014년 크림반도 사태가 발발하자 거의 대부분의 외신들은 경제력과 첨단 무기의 격차를 언급하며 나토가 행동에 나서면 러시아가 패퇴할 것이고 서방의 경제제제로 경제적 타격을 받아 푸틴이 실각할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서방은 우크라이나가 크리미아반도를 강탈당하는 것을 눈 뜨고 지켜보기만 했고 그들이 자랑하던 경제제제는 푸틴의 권력을 약화시키기는커녕 러시아 대중들의 분노를 자극해 그의 독재를 돕기까지 하였다. 메르켈을 마지막으로 당시 러시아에 대한 강경책을 이끈 나라의 지도자들 중 남아있는 이는 아무도 없으며 정작 러시아의 경제적 위협에 시달리는 것은 천연가스에 의존하는 서유럽 국가들이다. 사용하지 않는 군사력은 의미가 없고 완벽하지 않은 경제제제는 매우 제한적인 효과를 낸다는 것을 북한의 사례를 통해 충분히 알 수 있었지만 서방은 또다시 자신들의 힘을 과대평가했고 또 실패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루지야에서 패배했고 크리미아에서 또 패배했기에 이제 우크리이나에서 다시금 패배할 것이다.

유라시아 대륙의 저 끝에서 발생하는 이 사건은 반드시 아시아의 정세에도 큰 영향을 줄 것이다. 만약 서유럽이 무너져가는 자신들의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푸틴의 제안을 모두 거절하고 지속적으로 확장에 나선다면 모스크바는 플랜 B와 C를 고려하기 시작할 것이며 그 전략에는 반드시 아시아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나토 군사력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미군의 역량을 분산시키기 위해서는 중국과 공동 대응에 나서는 것이 중요하며 이는 양면 전쟁을 사실상 포기한 미군의 방침상 둘 중 하나의 전선에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과 대만 그리고 우크라이나는 모두 신냉전시대의 최전방에 놓여있다. 미국이 셋 중 하나, 혹은 둘만 선택할 수 있을 때 그들의 선택은 어떻게 될까.

과거 역사를 보면 구 패권국과 신흥 강대국이 반드시 투키데스의 함정에 빠지던 것은 아니었다. 1등 국이 2등의 역량을 인정하고, 또 2등이 1등의 헤게모니를 용인하면 그 둘은 생각보다 평화롭게 공존하기도 한다.**** 지금 이런 지형의 변화는 유라시아 대륙의 양 끝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미중이 좀 더 온건한 방식으로 서로의 영향력을 인정한 반면 서유럽과 러시아는 좀처럼 상대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만약 또 한 번의 세계대전이 터진다면 그 주 무대는 또다시 서쪽이 될 가능성이 크다. 

과거 로마는 카르타고에게 평화 조건으로 성 안의 모든 무기를 내놓으라고 제안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사카 성을 지키는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 성 외곽의 해자를 메우라고 했다. 철저하게 수세에 몰린 카르타고와 히데요리는 모두 상대의 조건을 수락했지만 결국 적군은 철군하지 않았고 카르타고와 도요토미 가문은 멸망했다. 서방은 자신들이 로마나 도쿠가와처럼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착각하지만 러시아는 과거보다 쇠퇴하긴 했어도 카르타고처럼 완전히 패전하지도, 도요토미처럼 몰락하지도 않았다. 그런 나토가 계속해서 우크라이나라는 해자를 메우라고 강제한다면 크렘린의 차르에게 남은 옵션은 단 하나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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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봄 아시아의 미래 4편으로 작성하던 내용이었지만 아시아와는 동떨어진 내용이라 미완성으로 남겨두었는데 최근의 변화를 반영한 몇몇 내용을 덧붙여 완성했다. 사람들은 세계가 무척이나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그 변화의 방향이 어디에서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대해서는 매우 둔감하다. 주식시장은 테크의 혁신에만 주목하고 잡스를 메시아이자 우상으로 여기는 스타트업들은 멋진 신세계를 외치지만 거기서 눈을 돌려 반대편을 보면 사회 내부 곳곳에 파괴적인 심리들이 응축되어 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치안도 점차 불안해지고 있으며 지난 3백여 년간의 트렌드를 거슬러 세계는 통합이 아닌 대립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나스닥이 자랑하는 테크 기술들은 인류를 통합하기는커녕 더 빠르게 분열시키고 있으며 그 결과 대중들의 불만은 끓고 있는 압력솥의 밸브처럼 삐이이 하는 소리와 함께 증기를 내뿜고 있다. 그리고 그 징후들은 유럽의 각 지방의 분리독립 움직임, 남미의 좌파 정권들의 승리, 법인세 인상, 범죄율 증가로 나타나고 있다. 역사는 이때 지도자들이 외부의 긴장을 유도하여 내부적 갈등을 해결하곤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따라서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외신이 일간지 1면을 장식하는 날들이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 가운데 문재인 정부는 계속해서 참사에 가까운 외교적 실수를 거듭하고 있지만, 우리들은 이에 별다른 관심을 주지 않는다. 따라서 다음 대선에서도 우리의 외교는 다시금 부차적인 주제로 격하될 것이고 유권자들은 생존과 번영이 아닌 이념과 기분에 따라 표를 던질 것이다. 그들이 늘 그랬던 것처럼. 구한말 열강 사이에 낀 조선의 지식인들은 조선이 독립국으로 살아남기 위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싸웠다. 일부는 친러를, 일부는 친일을 또 일부는 친청을 외쳤고 자신이 믿는 바에 따라 목숨까지 내놓기도 했다. 과연 우리는 구한 말의 그들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지만 우리는 그 말을 되뇌는 것 외에 무엇을 배웠는가.  
 


*그러나 최근의 조사에 따르면 젊은 세대일수록 일본보다 중국에 대한 비호감도가 높다.

**미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하기도 전 소련군은 한반도에 진군하여 조선 전역을 점령할 수도 있었지만 미군의 요청에 따라 진군을 멈추고 38선 이남을 미국에 할애하기로 합의했다. 19세기 러시아가 안정적인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에 영향력을 투사한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전략적 양보였다.  

***나이팅게일이 활약한 크림전쟁, 2차 세계대전의 세바스토폴 공방전 등을 떠올리면 이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확률적으로 드물다.


2021. 12. 18.

은수미는 무엇을 위해 기저귀를 입었나

이웃한 영국과는 달리 프랑스가 강력한 중앙집권적 왕권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외세의 위협 때문이었다. 인접한 정치세력들은 늘 프랑스의 비옥한 농토를 탐냈고 서유럽의 중앙에 위치한 프랑스는 끝없이 주변 국가들과 전쟁을 벌여야 했다. 그 결과 국왕은 점차 강력한 상비군을 지향하게 되었고 이는 귀족 세력을 억누르는 수단이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외부의 위협은 내부의 저항을 잠재울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따라서 통치자들은 때때로 이를 내부 정치에 활용하기도 한다. 북한이 종종 미국과의 전쟁 위험을 드높이는 것이나 반대로 과거 군사정권 시절 박정희나 신군부가 북한의 위협을 과장하던 것은 모두 내부의 반발을 무마시키고 독재를 강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외부의 적을 이용한 것이다. 이런 것이 비단 과거의 모습일까. 권력자들의 그런 비열한 시도는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민주당의 내로남불은 여기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2016년 2월 24일, 여당이 발의한 테러방지법을 저지하기 위해 민주당 의원들이 필리버스터에 나섰다. 총 38명의 의원들은 장장 192시간에 걸친 연설을 통해 헌법에 보장된 개인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고 목놓아 외쳤지만 그들의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테러방지법은 통과되었다.  이제 시대가 바뀌어 민주당은 여당이 되었고 국회에서 어떤 법도 독자적으로 통과시킬 수 있는 180석의 의석도 확보했다. 당시 필리버스터에 나섰던 의원들 중 상당수가 21대 국회와 지자체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당시 필리버스터에 참여했던 그 누구도 테러방지법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되려 테러방지법보다 훨씬 강력한 검열을 허용하는 n번방방지법 및 인터넷 검열감시법을 통과시켰다.

우리는 한때 자유를 외치던 이들이 등을 돌려 더욱 강력하게 자유를 억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촌극을 보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 17조는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고 명시하고 있으며 18조는 모든 국민은 통신의 비밀을 침해받지 아니한다고 적시되어 있다. 거기에 통신 사업자가 검열하는 것은 개인 간의 메시지가 아닌 게시판과 오픈방 뿐이니 헌법 18조를 위반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여당과 일부 언론의 주장은 기만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왜 더 제한적인 형태의 감시였던 테러방지법을 반대했는가.

과거 민주당은 테러방지법을 막기 위한 필리버스터에 나서며 장시간 연설을 이어갈 수 있도록 성인용 기저귀를 착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의원들 중에는 현 성남시장 은수미도 있었다. 그녀는 김광진 의원에 이어 3번째 주자로 필리버스터에 나서 10시간 18분에 걸친 연설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 사건을 계기로 무명의 비례대표 의원에서 전국구 스타로 떠오른 그녀는 그 유명세를 몰아 이재명의 뒤를 이어 성남시 시장직에 당선되었지만 오래지 않아 국제마피아파 조직원을 운전기사로 두고 자신의 선거캠프 인사들을 성남시 공공기관에 꽂아 넣은 데다 정치자금법 위반 수사기밀을 전달받는 대신 한 경찰관의 청탁을 들어준 혐의로 검찰에 기소되었다. 이 중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혐의는 유죄를 선고받았고 나머지 혐의들에 대한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전 국민의 통신을 감청하는 법안이 통과되는 동안 조폭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대장동을 지나던 그녀에게 다시금 묻겠다, 그날 당신이 입은 기저귀는 무엇을 위한 것이었냐고.*


*실제로 은수미 시장이 당시에 성인용 기저귀를 착용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민주당의 끈질긴 노력을 상징하던 것이 기저귀였기에 은유적 의미로 명시하였다.    



  

합리적인 백신과 합리적이지 않을 자유

합리적인 백신 

투자의 세계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위험, 혹은 리스크라고 부르는 모든 것의 본질은 불확실성을 의미하며 우리가 바라는 초과수익률은 바로 그 미지의 영역으로부터 나온다. 아무리 가치평가 모델을 정교하게 다듬어도 그 불확실성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매 순간 불완전한 정보를 바탕으로 가급적 합리적일 결정을 내리도록 노력한다. 세상은 언제나 불안정하고 우리의 정보는 항상 불완전하다.

그리고 이는 투자뿐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에 적용되는 법칙이다. 백신을 맞을 것인지, 맞지 않을 것인지를 선택하는 일도 그러하다. 우리는 mRNA 방식의 백신에 대해 온전히 알지 못하지만 현재까지 드러난 데이터로만 보면 백신을 맞는 것이 맞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다. 델타 변이의 감염재생산지수는 약 5.08로 최근 6개월간 mRNA 방식의 백신을 접종한 사람의 수가 80% 이하가 된다면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이 코로나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코로나의 치명률은 1-2%에 달하는 반면, 백신접종자 중 사망자들의 비중은 자연사망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심지어 FDA의 통계조사에 따르면 mRNA방식의 백신을 접종한 집단의 사망자(2명)보다 플라시보 약을 투여한 집단의 사망자가(4명) 더 많았지만 이는 자연상태의 사망률과 비슷하다.(링크)

반면 백신은 점막을 통한 감염을 100% 막아주지는 않지만 항체를 형성해 혈관을 통한 감염을 높은 확률로 막아주기 때문에 중증화/치사율을 크게 낮춘다. 따라서 6개월 내에 mRNA 계열 백신을 올바르게 접종한 사람의 치사율은 일반 독감 수준에 근접하게 내려오고 이런 효과는 성인뿐 아니라 12-17세의 청소년에게도 나타나기 때문에 세계 각국 정부는 모든 성인과 청소년에게 백신 접종을 권장하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mRNA가 불완전하고 검증되지 않은 기술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전쟁이 얼마나 과학기술을 빨리 발전시키는지 간과한다. 우리가 4차 산업혁명이라고 부르는 기술들-인터넷 네트워크, 인공지능, 컴퓨터, 무선통신, 원자력 등의 첨단 기술은 대부분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탄생하지 않았나. 그리고 지금 인류는 코로나를 상대로 세계대전을 벌이고 있다. 집계를 시작한 1949년 이후 매년 낮아지던 인류의 사망률은 지난해 처음으로 반등하였는데, 이는 1968년의 홍콩 독감도, 월남전도, 공산권의 기아를 불러일으킨 소련의 붕괴 때에도 없던 일이다. 전 세계에서 공식적으로 약 500만 명, 비공식적으로는 약 1500만 명이 코로나로 사망했는데 연간 사망자로 환산하면 이는 이미 1차 세계대전을 아득히 뛰어 넘어 2차 세계대전에 가까운 수준이다. 주요 선진국들은 국제적으로 공조하여 백신 개발과 생산에 필요한 엄청난 자본과 자원들을 백신 제조사에 우선적으로 공급하였고 그 결과 첫 코로나 백신은 CDC의 예상보다도 몇 달 앞선 2020년 11월에 개발되었다. 이런 전폭적 지원은 임상실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스라엘 정부는 mRNA 방식의 백신을 접종한 900만 국민들의 생체 데이터베이스를 제조사 측과 공유하기로 합의했고 현재 미국에서만 약 2억 명, 전 세계적으로 약 40억 명의 사람들이 백신을 맞았다. 그 결과에 대한 통계도 몇번의 구글 검색으로 쉽게 접할 수 있다.

물론 백신은 완전하지 않다. 그리고 먼 미래에 mRNA 백신의 숨겨진 부작용이 새로 등장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다른 제반여건 역시 변할 수 있다. 하지만 다시 말하건대 세상에 완전하고 확실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이 그렇다고 믿을 뿐이지. 현재까지 수십억 건의 데이터로 미루어 보면 백신을 접종했을때의 이득이 그렇지 않을 때의 이득보다 훨씬 크기에 나는 백신을 맞았고 부스터 샷도 맞을 계획이다**. 만약 검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두려움을 느껴야 한다면 당신은 다이어트 보조식품이나 성형외과의 상담실장 앞에서 공포에 벌벌 떠는 편이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백신사망 검색어 트렌드: 사람들은 기존의 검증된 방식으로 제작된 구 독감백신(20년 10월) 접종시기나 백신 접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던 21년 3월에 백신사망에 대한 검색 빈도가 더 높았다. 이는 백신사망에 대한 두려움이 다분히 비합리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합리적이지 않을 자유

인간은 비합리적인 존재이다. 제네시스의 가성비가 더 나을지 몰라도 우리는 벤츠를 탐하고, 또 별다른 기능이 없는 에르메스의 백을 욕망한다. 그렇기에 정부가 모든 국민들이 완전하게 합리적일 것을 강제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자 비인간적인 조치이다. 우리에겐 합리적이지 않을 자유가 있다. 그 대상이 미국 소고기이든 북한 핵이든 백신이든 간에. 

무엇보다 시민들에게 합리적인 선택을 강요하는 정부는 이제껏 과연 얼마나 합리적으로 행동했나. 전 세계 다른 나라들에 비해 우리나라가 뒤늦게 확진율과 치명률이 동시에 치솟는 것은 명백한 방역시스템의 실패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세 가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하나, AZ와 얀센 백신이 델타 변이에 취약하기 때문에 부스터 샷을 놓기 전까지 위드 코로나에 나서지 말았어야 했고, 둘, mRNA 백신을 맞은 사람들의 돌파감염률이 다른 나라보다 높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교차접종과 제조사의 가이드라인을 어긴 접종이 백신의 효율을 떨어뜨렸으며, 셋, 코로나 발발 이후 2년이 지나도록 중증 환자를 전문적으로 치료할 시설을 충분히 확보하지 않았기에 세계가 리오프닝에 나서는 동안 우리는 끙끙대며 델타변이와 싸우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첫 번째와 두 번째 실수는 방역보다 정치논리를 우선적으로 내밀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내년 3월 대선에 앞서 여당에게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문재인 정부는 여러 차례에 걸쳐 때이른 위드코로나 방침을 발표했고 이미 8월부터 확진자가 폭증하여 불안 조짐을 보였는데도 불구하고 청와대는 강경하게 위드 코로나를 밀어붙였다 이 지경에 이르렀다. 그뿐만 아니라 정부는 상반기에 백신 수급 일정이 원활하지 않은데도 공식 접종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무리해서 2차 접종분을 1차로 전용했다 백신이 모자라 접종 간격을 8주로 일괄 연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은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CDC와 백신 제조사인 화이자-바이오엔텍에 따르면 부스터 샷은 2차 접종 후 최소 6개월 뒤에 맞을 것을 권고하는데 우리나라 질병관리청은 이 기간을 절반으로 단축해 3개월 뒤부터 부스터 샷을 맞도록 권하고 있다. 내가 아는 한 이렇게 빨리 부스터 샷을 맞으라고 권고하는 정부는 오로지 한국뿐이다. 저번에는 백신의 물류일정에 사람을 맞추더니 이제는 정치일정에 사람을 맞추고 있다. 문재인은 이 비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작년 초, 코로나에 합리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던 것은 우리나라 만이 아니었고, 사실 이는 어쩔 수 없던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행히도 일찍이 메르스를 겪은 한국은 나름 합리적인 매뉴얼이 존재했고 확진자의 수가 극소수일 때 그들을 밀접 추적하여 동선을 파악하는 것은 방역에 매우 효과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임기 말년까지 아무것도 이룬 게 없어 실적에 미친 대통령이 여기에 K-방역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확진자의 수가 방역시스템이 추적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자 방역망에는 구멍이 뚫리기 시작했고 일관성이 없던 국경 통제와 방역지침은 확산세를 막는데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질병관리청은 쓸모없어진 기존의 방침을 버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각하가 치적으로 달아둔 K-방역이니까. 그 덕에 우리는 아시아에서 인구대비 일일 확진자가 가장 많은 나라가 되었다.

코로나가 터지자 자유와 인권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던 서구의 많은 나라조차도 계엄령에 가까운 락다운 조치들을 내려야 했고, 각국의 시민들은 방역이라는 공공의 목표가 개인의 자유와 충돌할 때 그 적절한 균형이 어때야 하는지 열띤 논쟁을 시작했다. 위험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마스크를 쓰지 않을 자유가 중요하다는 사람부터, 집단방역이라는 목표를 위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헌법이 허락한 범주 내에 있다는 주장까지 다양한 논의가 오갔다. 하지만 그 가운데 자유도 잃고 방역도 망한 나라가 있다. 바로 대한민국. 그 나라의 대통령이 한 일이라곤 개인의 자유를 무제한적으로 희생시키고, 방역을 핑계로 정부의 권한과 예산을 막대하게 늘리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K-방역의 본질이다.   


*아주 기초적인 옵션평가 모델에서는 이 불확실성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많은 이론들이 그렇듯 이는 어디까지나 가정에 불과하고 금융시장은 불확실성을 완벽하게 소거하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번의 큰 위기로 배웠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6개월 안에 세계 80% 이상의 인구에게 백신을 접종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백신을 맞는다고 COVID-19가 사라질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한다. 계속해서 새로운 변이는 등장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점점 치명률이 낮은 변종이 지배종이 될 것이라고 한다.

2021. 12. 3.

탄넨베르크 전투와 대선

비스마르크 사후 독일은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매우 불리한 입장에서 1차 세계대전을 치르게 되었다. 서부의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동부의 러시아를 동시에 상대해야 했던 독일은 빠르게 영프 연합군을 몰아낸 뒤 동부전선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늘 그렇듯이 무책임한 소망은 잔혹하게 배신당하기 마련이다. 러시아는 독일 수뇌부의 예측보다 빠르게 더 많은 병력으로 독일을 침공했다. 전체 80만 병력 중 약 절반이 북서전선군으로 편성되어 독일의 정신적 고향이었던 동프로이센으로 진격했는데 이를 방어할 독일 측의 병력은 고작 15만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에 당황한 군부는 서부전선의 병력을 차출해서 동부로 파병했지만 병력이 전장에 제때 도착할 확률은 매우 낮았다. 결국 탄넨베르크 인근에서 힌덴부르크 장군이 이끄는 독일 방어군 15만이 홀로 러시아 군과 조우하게 된다.

놀랍게도 이 전투는 독일 측의 압승으로 끝났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승리의 단초는 러시아 지휘부 내부의 불화로부터 나왔다. 러시아군은 전체 병력을 1군과 2군으로 나누어 각각 렌넨캄프와 삼소노프에게 맡겼는데 불행히도 이 둘은 개인적으로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를 알아챈 독일군은 두 장군이 서로 유기적으로 협조하지 않을 것을 알고* 각개격파에 나섰다. 독일군은 고작 1개 사단으로 1군을 견제하면서 나머지 병력으로 전력이 약화된 2군을 포위하여 공격에 나섰고, 군단장 삼소노프는 렌넨캄프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바로 직전까지 격전을 벌인 끝에 전략적 요충지를 점령한 1군은 굳이 무리한 기동을 꺼렸다. 독일군의 예상대로 렌넨캄프가 삼소노프의 요청을 묵살하고 움직이지 않는 동안 독일군은 2군을 섬멸하고 뒤이어 재빠르게 병력을 이동해 1군마저 포위하여 분쇄했다. 서부전선에서 출발한 보충 병력이 도착하기도 러시아 주력 부대를 모두 격퇴한 것이다.  

삼소노프와 렌넨캄프 둘 중 누구에게 이 처참한 패배의 원인이 있을까? 삼소노프는 자신의 2군이 무너지면 나머지도 후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1군이 자신을 지원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판단했을 것이고, 렌넨캄프는 삼소노프가 독단적으로 공세를 취해 포위를 자초한 것이 패배의 원인이라고 주장했을 것이다. 수많은 부대가 얽히고섥힌 전장에서는 이와 같은 내부적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명령을 하달하고 부대 간의 우선순위를 조율할 명령체계가 중요한 것이다. 둘 중 어느 한쪽의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누구에게 명령권이 있었는지 따져봐야 한다. 

지난 몇 주간 야당은 이와 유사한 갈등을 겪고 있다. 삼소노프와 렌넨캄프가 40만의 북서전선군을 둘로 나누어 싸우듯 정권교체를 갈망하던 지지자들도 둘로 나누어 각자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편들고 상대를 공격하고 있다. 하지만 이 논쟁의 핵심은 누가 옳은지가 아니다, 대신 누가 우선권을 갖는지가 핵심이다. 그리고 당헌 74조에 당무우선권을 명시한 국민의힘을 포함하여 모든 정당은 모든 대선에서 대선후보가 한시적으로 당권을 우선적으로 행사하도록 허용하고 있다. 따라서 선준위 인선에 대한 모든 권한은 사실상 대선후보가 가지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도 대선후보에게 있는 셈이다. 내가 문재인의 정치를 반대한다고 해서 문재인의 법을 어기는 것이 정당화될 수 없듯 대선후보가 행사하는 권한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어깃장을 놓는 것은 결코 올바른 처신이라고 볼 수 없다.

과거에도 후보로 선출된 대선주자와 당대표가 충돌을 빚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당권과 대권을 분리하자는 박근혜 전 대표의 주장을 정면 반박하며 당무우선권을 내세웠고 바로 지난 대선 때도 대선 직전 지지율 결집을 위해 홍준표 후보가 정우택 비대위원장의 반발을 묵살하고 당무우선권을 발동해 탈당파의 복당을 허용하고 친박 인사들의 사면을 결정했다. 그런 과거의 사례에 비하면 현재 선대위 구성의 자유는 당무우선권을 논하지 않아도 전적으로 후보의 권한에 속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른 무한한 책임 역시 후보 본인에게 있다. 

다음 대선은 세대와 세대가, 그리고 진보와 보수가, 또 부패한 좌파와 그를 혐오하는 반대 계층이 서로 맞붙는 총력전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야권은 그 도덕적으로 타락한 문재인 정부와 최전선에서 맞서 싸운 검찰총장을 대선후보로 임명했다. 그가 정치적 신인이고 여러 실수도 저지르긴 했지만 그를 최전방 지휘관으로 앉힌 이상 그의 명령체계를 존중해 줘야 하지 않나. 하지만 이상하게도 대중 선거에서 이겨본 적이 없는 이준석과 정치 경험이 가장 미비한 사람들이 가장 앞장서서 그의 정치적 미숙함을 공격하는 아이러니를 보고 있다. 그리고 이제 이들은 훈수를 넘어 적극적으로 깽판을 치고 있다. 그 결과 대선 역사상 처음으로 대선 후보가 선대위도 자기 뜻대로 꾸리지 못하는 것과 당대표가 선거운동을 포기하는 것을 목도하게 되었다. 문재인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드는 동안 이준석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당을 만들었고 이는 두고두고 그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탄넨베르크 전쟁은 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삼소노프는 포위되어 부대가 섬멸되는 것을 보며 전장에서 곧장 자살했고 렌넨캄프는 도보로 달아날 정도로 처참하게 패배하여 귀국했지만 이등병으로 강등된 뒤 군적을 박탈당했다. 반면 이 경이적인 승리를 이끈 힌덴부르크는 국민적인 영웅으로 등극해 전후 독일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렇다, 약 3천만 명의 인명피해를 낳은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에게 권력을 이양한 바로 그 파울 폰 힌덴부르크의 탄생이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히틀러

  

*과거 삼소노프와 렌넨캄프는 러일전쟁에 참전했는데 당시 탄광을 지키던 삼소노프가 레넨캄프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부하는 바람에 그의 부대는 악전고투 속에 비참하게 패퇴해야 했다. 패전 후 포로들을 교환하던 펑텐 역에서 렌넨캄프를 마주친 삼소노프가 먼저 주먹을 날렸고 사병들이 보는 가운데 두 장교는 진흙탕에서 몸싸움을 벌였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일본군에 파견된 한 독일군 대위가 이 현장을 목격했는데 그가 바로 탄넨베르크 전쟁에서 작전참모를 맡았던 막스 호프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 수뇌부는 1군과 2군의 공조가 원활하지 않을 것을 확신했고 그래서 이렇게 과감한 작전을 편 것이라고 한다. 물론 이 주장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

**이 글을 작성하는 동안 윤석열 후보와 이준석 대표 간의 회동에서 김종인을 총괄선대위원장직으로 선출하고 사실상 선거의 전권을 줬다는 보도가 올라왔다. 부디 대선까지 윤석열 후보의 정치적 미숙함과 이준석 대표의 찌질함은 더이상 보지 않기를 바란다.

2021. 11. 22.

넷플릭스 지옥, 그리고 잡담들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가 그랬나, 주입식 교육에 익숙한 한국인들은 다양한 컨텐츠를 선보일 수 없을 것이라고. 아마 그 말을 넷플릭스 CEO가 들었다면 소리내어 HAHA 웃었을 것이다. 한국 감독과 제작진은 DP에 이어 오징어게임이라는 넷플릭스 사상 최고의 흥행작을 낳았고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켰다. 그런 오징어게임을 2위로 밀어낸 것은 지난주 공개된 지옥이었다. 

사실 드라마의 연출은 다소 미흡하고 일부 에피소드들의 개연성은 떨어진다, 하지만 연상호의 스토리텔링의 정수는 특수한 상황에서 등장인물들이 겪는 아이러니와 모순을 그리며 빛을 발했다. 두 아이를 키우는 미혼모 박정자는 난데없이 찾아온 죽음을 행운이라고 부른다. 하루 종일 일해도 사랑하는 아이들을 제대로 돌볼 수가 없는, 그런 비루한 삶에 찾아온 행운. 자식들을 위해 힘겨운 삶을 이어가던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 죽음도 기꺼이 받아들인다. 자신의 죽음을 중계하는 대가로 30억을 주겠다는 냉혈한들에게 굽신거리며, 울부짖는 아들을 되려 혼내는 그녀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연필 한 자루 훔치지 않고 착하게만 자라온 정진수. 하지만 신은 그에게 지옥을 선고한다. 그것은 신의 장난일까, 장난의 신일까. 우리가 도덕과 규율을 따르는 것은 그것이 정의롭고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벌의 기준이 공정하지 않다면 어떨까. 학창 시절 수학선생님이 "오늘이 21일이지? 21번 나와서 이 문제 풀어봐"라고 외칠 때 21번은 자신이 정신봉으로 맞을 그날의 운명을 결코 공정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정의란 그래서는 안된다. 그래서 정진수는 결심한다. 신의 장난을 살짝 비틀어 정의로 만들겠노라고. 그렇게 그는 예정된 죽음을 받아들인다. 무작위로 찾아온 자신의 죽음이 그래도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데 이바지했다고 믿으며. 

형사 진경훈은 법과 질서를 믿는다. 자신의 아내를 무참히 난도질한 범인이 10년 만에 심신미약으로 풀려났지만 남편은 그에게 복수하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법과 질서를 믿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필사적으로 정진수를 추적하고 의심한다. 왜냐하면 그는 진경훈이 믿는 법과 질서를 위협하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죽음을 목전에 둔 정진수는 그를 양자택일의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당신은 이제 법 혹은 질서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고. 법을 택하면 사회적 질서가 무너질 것이고 질서를 택하면 자신의 신념을 지탱해 온 법을 어기게 된다. 정진수는 그에게 자유 의지에 따라 선택하라고 했지만 사실 애초에 그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법이 하나 뿐인 딸을 심판하게 둘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신이 정진수에게 잔인한 장난을 친 것처럼 신의 반열에 오른 정진수 역시 진경훈에게 짓궂은 장난을 던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를 처참하게 죽인 살인자를 산 채로 불태운 딸, 진희정. 그녀가 살인자의 단말마가 울려 퍼지는 한 가운데 울며 웃는 장면은 소름 끼칠 정도로 슬펐고 또 아름다웠다.


*               *               *

신의 고지를 받은 희생자들은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숨는다. 가장 고통스러운 처지에 놓인 것은 본인이지만 사후 가족들이 겪을 핍박과 박해를 피하기 위해 그들은 달아난다, 그리고 증발한다, 그리고 삶의 마지막을 아무도 없는 산골짜기에서 외로이 맞이한다. 가족도 친구도 없이 홀로. 

그들을 보며 에이즈환자들을 떠올렸다. 후천적 면역결핍증이 성적으로 방종하거나 동성애자, 마약중독자들 사이에서 퍼진다고* 믿는 대중들의 시선 때문에 양성 판정을 받은 이들은 종종 숨곤 한다. 하지만 모든 환자들이 지옥에 갈 죄를 지어 걸린 것은 아닐 것이다. 때때로 억울하게 병에 걸린 이들도 있을 것이고 그중에는 갓난아기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들을 도덕적으로 타락했다고 낙인찍으며 특정 종교는 그들의 존재 자체를 죄악으로 치부한다. 

한번 고지를 받으면 언제고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그들. 그리고 죽음의 과정은 매우 고통스럽고 외로우리라. 또 죽음 너머의 업보는 온전히 가족들의 몫이다. 주변의 따가운 시선과 사회적 매장, 그리고 과격단체의 폭력은 초자연적인 존재나 HIV 바이러스가 아닌 우리 인간들이 같은 인간에게 가하는 폭력이나 마찬가지이다. 지옥은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 누군가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               *               *

공교롭게도 드라마가 공개된 시점에 한국에서 끔찍한 사고가 발생했다. 위층의 남자가 아랫집 여성들을 대상으로 성추행과 협박을 거듭해 경찰이 출동했는데, 남편과 남자 경찰이 1층 현관으로 내려간 틈을 타서 범인인 위층 남자는 아래로 내려와 아내의 목을 칼로 찌르고 그 칼로 딸 역시 난도질했다. 그 자리에 한 여경이 있었지만 그녀는 달아났고 범인을 제압한 것은 1층에 있던 남편이었다. 드라마 내의 진경훈 형사가 겪은 것과 비슷한 사건이 실제로 벌어진 것이다. 

드라마의 후반부 내내 이어진 김현주의 액션 신이 매우 불편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화면에서 신체적 전성기를 훌쩍 넘긴(작중 시점은 2027년) 여자 변호사가 삼단봉을 휘두르고 테이저 건을 쏘며 신체 건장한 깡패들을 여럿 제압하는 동안 우리의 현실에서는 훈련을 받은 젊은 20대 여경 하나가 범인을 두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고 말았다. 드라마와 현실 사이에는 크나큰 괴리가 있다. 일부 PC 주의자들은 성별 간의 차이가 전적으로 사회문화적 학습에 기인한다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의도적으로 컨텐츠에서 남녀 간의 성 역할을 뒤섞으라고 압박하고 있고 이에 굴복한 현대의 창작자들은 개연성을 무너뜨려가면서까지 액션신을 여성 캐릭터들로 채우고 있다. 

이는 또 다른 폭력이다. 그들이 원더우면 아류의 히어로 영화들을 한 해에 수천 편을 쏟아낸다고 해서 평균 여성들의 근력이 자동으로 향상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미디어를 통해 자신들의 왜곡된 이념을 대중에게 주입한다, 그리고 그에 맞추어 현실을 개조하려고 한다. 여경의 채용 확대를 위해 체력검정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내려갔으며 그로 인한 수많은 문제점들은 묵살되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피가 튀고 뼈가 부러지는 것은 가상의 이미지에 불과하지만 자신들의 비틀린 생각을 강요하는 폭력은 현실이다. 어느 쪽이 더 해로울까. 

이 비극은 [여경] 때문에 벌어진 것이 아니다. 그 자리에 장미란이나 여자유도 메달리스트 정보경 선수가 있었다면 다른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참사를 부른 것은 자질이 부족한 사람을 여자라는 이유로 해당 보직에 배치한 잘못된 시스템이다. 그리고 공권력이 힘을 잃으면 가장 먼저 희생되는 것은 약자들이다. 그 이념주의자들의 그런 왜곡된 믿음이 인천 논현동에서 두 명의 여성 피해자를 낳았다. 역설적으로 결과적 평등을 외치는 여성주의의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여성이었던 셈이다. 



*나는 그런 선입견이 사실인지 아닌지 모른다. 

2021. 11. 18.

여의도 정치를 반기는 유권자는 없다

한국 정치에서 2021년은 그 이전 해와는 매우 다른 한 해로 기억될 것이다. 21대 총선에서 처참하게 참패한 야당은 절치부심하여 김종인과 여권 인사들을 영입하고 비주류였던 30대이자 바른미래당 계열인 이준석을 당 대표로 내세운 결과 보궐선거에서 압승하고 내년 대선을 앞두고 오차 범위 밖 지지율을 확보하는 등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그 중심에 윤석열과 오세훈이 있다면 그 반대편에는 마치 폭등하는 주식시장에서 혼자 하한가를 친 주식처럼 얼굴을 한껏 찌푸린 두 남자가 있다. 바로 홍준표와 유승민. 무엇이 그들을 정치 여정을 셀트리온처럼 시퍼렇게 물들였는가. 

오세훈과 유승민, 그리고 윤석열과 홍준표의 정치 여정은 매우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오세훈은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계기를, 유승민은 박근혜 탄핵을 주도하며 보수당의 몰락을 촉발했고 둘 다 바른미래당의 주축이었다. 홍준표와 윤석열은 둘 다 타협하지 않는 꼬장꼬장한 강골 검사인 것도 똑 닮았고 두 사람 모두 문재인을 몰아붙여 지지자들의 사랑을 얻었다. 하지만 각자의 운명은 너무나 달랐다. 오세훈이 10년 만에 서울 전 구에서 과반을 득표하며 서울시장직에 복귀한 것과는 정반대로 유승민은 당내 경선에서 한 자리수 지지율로 탈락했다. 홍준표는 이변을 일으켜 경선 초기의 격차보다 근소한 차이로 2위에 올랐지만 자신이 당 대표를 두 번 그리고 대선 후보를 한번 맡았던 당에서 한때 문재인의 칼이었던 남자를 상대로, 더욱이 당원 투표에서 버림받아 패배했다. 

유승민과 홍준표의 운명을 망친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여의도식 계산 때문이었다. 유승민은 21대 총선에서 험지 서울 대신 연고지인 대구에 출마하겠다는 의사를 여러 차례 밝혔지만 TK의 유권자들은 냉담했고, 그가 주판을 꺼내 승산이 없다는 계산을 마쳤을 때 비로소 유승민은 불출마 선언과 함께 자유한국당과의 합당을 결정했다. 선거를 앞둔 미래통합당은 그의 결정을 높이 평가한다고 했지만 그 말을 누가 믿을까. 함께 탈당을 결정한 김무성이 이미 자한당으로 복당했고 자신의 의석마저도 확보할 가능성도 희박했는데. 그리고 같은 선거에서 홍준표 역시 당의 수도권 험지 출마 제안을 거절하고 탈당해 보수의 안전지대인 대구 수성구에 출마했다. 한때의 대선후보가 탈당해서 안전빵이나 노리는 꼴이라니, 마음 졸이며 야당의 의석 수 하나하나를 손으로 세어가던 지지자들이 그 모습을 결코 좋게 볼 리가 없었다.     
 
반면 오세훈과 윤석열은 여의도식 정치가 가장 기피하는 길을 걸었다. 오세훈은 87년 6공화국이 들어선 이래 단 한 번도 보수가 의석을 확보하지 못한 광진구 을에, 그것도 상대가 정치신인 고민정이라 이겨도 본전이고 패배할 경우 엄청난 조롱거리가 되어 재기가 불투명한데도 불구하고 그 독배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그리고 임기가 고작 1년 남짓한 서울시장 보궐선거에도 출마했고, 끝끝내 그는 화려하게 부활했다. 윤석열 역시 박근혜 정부의 인사들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잡아넣은 덕에 문재인과 여당 지지자들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기수를 뛰어넘어 검찰총장의 자리에 올랐으나 그는 전임/후임자와는 달리 청와대에 영합하지 않고 여당 관계자들의 비리를 원칙대로 수사해 조국과 추미애의 정치인생을 끝장냈다. 이 두 사람에 대한 평가는 엇갈릴 수 있으나 오세훈과 윤석열이 편하게 갈 수 있는 길을 마다하고 험한 길을 택했다는 사실에 이견을 낼 사람은 없을 것이다. 즉 그 둘은 여의도의 정치인이라면 결코 택하지 않을 선택을 한 사람들이다.

연애 경험이 부족한 모태솔로들은 언제 어디서나 이성의 혼을 쏙 빼놓는 연애의 기술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녀는 바보가 아니다. 당신이 잔머리를 굴리고 어장관리에 나서는 것을 바라보는 그녀들의 눈빛은 차갑게 식기 마련이다. 그리고 홍준표와 유승민이 유권자들을 상대로 픽업아티스트를 자처하며 여의도의 셈법을 따지고 주판을 튕기는 동안 오세훈은 묵묵히 당의 험지 출마 요구에 응했고 윤석열은 자신에게 검찰총장이란 영예를 안긴 문재인을 상대로 전력을 다해 싸웠다. 무엇보다 보수층 지지자들이 윤석열을 택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이 과반을 훌쩍 넘고 여당이 폭주하는 동안 유승민은 잠행에 들어갔고 홍준표는 자신의 금배지를 찾아 떠났으며 중도층은 여전히 민주당에 표를 던졌다. 그동안 보수 유권자들과 서민과 김경률, 권경애, 진중권과 같이 문재인 정부와 대립해 온 인사들은 외로운 싸움을 계속해야 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묻는다, 그때 당신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지난 19대 대선에서 야당의 핵심 지지층은 홍준표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고 그 결과 탄핵정국에서 불리한 상황에서도 홍준표는 안철수를 제치고 2등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홍준표는 자신의 지지자들의 마음을 얻는데 실패했다. 바로 그놈의 여의도식 정치 때문에. 그리고 불과 4년 뒤 정치 지형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홍준표를 가장 지지하던 6070대는 그를 버리고 윤석열을 택했고 반대로 문재인을 가장 지지했던 2030대 유권자들은 당내 경선에서 홍준표를 택했다. 한때의 동지들이 적이 되고 한 때의 안티들이 팬이 된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단 하나의 질문이다. 우리가 가장 절박하게 싸우던 그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는가.

그리고 진보도 보수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윤석열이 아니었다면 지금 중도층이 가장 선호하는 대선주자는 바로 조국이었을거라는 사실이다. 

*               *               *

이와 같은 논리는 이준석에게도 적용된다. 그는 혁신 보수를 표방하지만 그의 정치는 결코 새롭지도, 젊지도 않다. 그의 정치는 철저하게 당내 영향력을 넓히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고(링크) 세련되지도 못하다(링크). 그는 마치 모범생이 공식을 외워 수학 문제 풀어내듯 철저하게 여의도식 정치를 하고 있는데 과연 새 인물이 구 정치를 재탕하는 것을 새 정치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의 기대와는 정 반대로 그가 표방하는 정치는 그가 들고 온 비단 주머니의 워딩과 디자인처럼 너무나 올드하고 구태의연하다.

하지만 그의 진짜 문제는 뚜렷한 철학이 없다는 점이다. 경선 최종라운드에 오른 네 명의 후보는 모두 확고한 철학이 있다. 윤석열은 진영논리에서 벗어난 법치주의, 홍준표는 정통보수정치, 유승민은 우파적 경제/안보와 진보적 복지, 그리고 원희룡은 보수의 틀 안에서 민주화를 추구하고 있다. 하지만 이준석의 정치 철학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준석의 모호한 정치철학은 그의 삶의 궤적과도 이어져 있다. 애초에 한 사람의 가치관과 신념은 그 사람이 걸어온 삶으로부터 나오지 않는가. 금융권에서 트레이딩으로 살아남은 나와, 삼성전자에서 10여년을 일해온 친구, 외길 검사의 길을 걸어온 선배, 그리고 외교가에서 일하는 후배 등 각자의 삶에서 이룬 성취는 현재의 가치관을 대변한다. 우리가 정치인들의 말보다 과거의 행적에 집중하는 이유이다. 이준석은 과연 어떤 길을 걸어왔는가. 박근혜의 키즈로 정치를 시작하기 전 그의 이력은 거의 전무하다. 그리고 정치에 뛰어든 이래 그의 가장 큰 자산은 바로 젊음이었고, 그는 이를 무기로 자신을 받아준 정치인들을 무차별로 공격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박근혜, 그리고 안철수 이후 당내의 여러 중진들, 심지어 대선 후보를 공격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의 정치철학은 무엇일까? 바로 여의도 정치 그 자체가 아닐까. 다른 정치인들이 자신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여의도의 셈법을 따지지만, 사회생활의 첫 발을 여의도에서 내디딘 이준석에겐 여의도는 하나의 배틀그라운드이고 정치공학은 그저 그 서바이벌의 룰일뿐이다. 왜 살아남아야 하는지, 살아남아서 무엇을 할 건지 비전도 철학도 없다. 다만 그 게임을 열심히 플레이할 뿐. 

지난 5년간 우리는 삶에서 정치 외에 아무런 사회경험이 없는 운동권 인사들이 어떻게 행정과 입법을 망가뜨렸는지 여실히 보았다. 그리고 우려스럽게도 이준석은 그들과 대단히 유사한 경로를 걷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를 지지하되 비판적인 시각을 놓아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2021. 10. 31.

과연 누가 부채를 늘리고 있을까: 너나 잘하세요

태초에 아담과 하와가 있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선지 몰라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대차대조표를 작성할 회계 능력을 함께 주었다고 한다. 단둘이 있는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자신의 갈비뼈를 현물로 출자하여 하와라는 독립법인을 설립하였지만 의결권은 가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와는 선악과를 우연히 습득하여 자신의 대차대조표에 사과라는 자산을 반영했다 아담에게 무상으로 지급하였고 아담은 이를 이전소득이라 기록했다. 그리고 화폐경제가 시작되었다. 둘 사이에서는 빈번하게 화폐가 오갔으며 그들은 자신의 대차대조표에 금융자산과 금융부채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밖에 없는 에덴동산에서 그 둘의 순부채가 동시에 증가할 수 있을까?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누군가의 부채는 다른 이의 자산이기에 한쪽의 부채가 증가했다면 다른 한쪽의 자산도 함께 증가하게 된다. 그렇기에 둘의 순 부채가 동시에 증가할 수는 없다. 에덴동산에 아담과 하와가 있다면 한반도에는 정부와 민간이 있다*. 그런데 그들의 거래내역을 뜯어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왜냐하면 정작 부채를 급격하게 늘리고 있는 것은 민간이 아닌 정부며, 사실상 정부부채를 충당하는 것은 가계의 예금이기 때문이다.** 작년 한 해동안 가계부채가 급격하게 증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예금과 채권 투자 잔액은 더욱 빠르게 늘어 약 285조가 증가했고, 그 결과 순부채는 약 120조가 감소했다. 반면 정부부채는 약 120-240조***가 늘었는데 과연 무분별하게 부채를 늘리는 쪽은 누구일까?  

따라서 진심으로 높은 부채비율이 걱정됐다면 정부는 국민들을 겁박할 것이 아니라 반성문을 써야 했다.(비록 필자는 코로나 기간 동안 강력한 정부 지출을 지지하지만) 하지만 우습게도 우리는 급격하게 순부채를 늘리는 정부가 순부채를 줄이는 가계를 상대로 부채가 과도하다며 대출을 금지하는 장면을 목도하고 있다. 새로운 수장이 이끄는 금융위는 이두박근에 힘을 가득 주고 장첸을 쥐어박던 마동석처럼 폭력적으로 은행 창구의 셔터를 쾅 하고 닫으면서 무분별한 부채증가를 막아야 한다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고 있다. 하지만 친절한 금자씨가 만약 금융시장에 대한 이해도 깊었다면 금융위원회 로비를 찾아가 이렇게 외치지 않았을까? 너나 잘하세요. 

만약 채권자가 돈을 융통하지 못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응당히 채무자의 자금을 회수할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채권자는 가계고 채무자는 정부다. 그러니 정부의 펀딩이 원활하게 될 리가 없다. 채권시장 관계자들의 말에 따르면 한국은행은 이달 들어 여섯 차례의 입찰 중 다섯 번이나 발행 예정액을 채우지 못했고 국고채의 발행을 담당하는 PD들의 어려움도 가중되고 있다고 한다. 자기의 전주의 돈줄을 죄는 정부의 바보 같은 행태가 당분간 바뀌지 않을 것이니 이와 같은 정부의 자학적 슬랩스틱 개그도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돈을 빌린 채무자가 돈을 빌려준 채권자 보고 빚좀 내지 말라고 윽박질러놓곤 다음날 다시 찾아와 돈 좀 빌려달라고 애걸하기를 반복하는 것이 최근의 채권시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부채로 유지되는 경제를 바꾸어야 한다면서도 내년에도 대규모의 채권 발행을 예고한 멍청한 정부가 있고, 반대쪽엔 대출이 막혀 중도금과 전세금을 구하기 위해 자금을 인출하는 가계가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 애 먼 고생을 반복하다 결국 삼삼오오 모여 새빨개진 얼굴로 말없이 담배만 뻑뻑 피우는 채권부서 친구들이 있다. 정부는 유동성을 줄여 부동산 시장을 안정시키려고 하지만 공급이 부족한 특정 재화의 가격을 안정시키겠답시고 전체 유동성을 죄는 것은 채권시장 뿐 아니라 주식시장과 내수, 특히나 코로나로 재무구조가 크게 악화된 서비스업과 자영업자들에게 사약이나 다름없으리. 

지금이야 위통약을 집어먹는 것이 채권 담당자들 뿐이겠지만 얼마 안가 더 많은 사람들이 제산제와 아스피린을 찾게 될 것이다. 그들 모두에게 내 작은 위로를 건넨다. 부디 그대들의 고통이 오래가지 않기를.



*외국인도 있지만 편의를 위해 제외한다.
**이런 현상은 미국과 유럽을 포함한 거의 대다수의 나라에서도 발생했다.
***연금충당부채나 지방공기업을 포함하느냐에 따라 집계가 약간씩 다른데 순수정부부채만 계상할 경우 약 125조, 광의의 부채를 모두 포함할 경우 240조가 된다.

2021. 10. 23.

오징어 게임 그리고 다섯 개의 사족

 


아래 내용은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드라마가 세계적으로 흥행하게 된 데에는 456명의 참가자가 처한 현실이 우리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이 밀폐된 공간에 갇힌 것처럼 코로나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실내에 격리되었고 마음속 상자 안에 담긴 고독은 더욱 깊어졌다. 참가자들을 통제하는 진행요원들의 의상 역시 방역을 지시하는 이들이 입은 레벨 D의 방호복을 닮았다, 색상만 조금 다를 뿐. 하지만 그들이라고 뭐가 다를까. 선홍색 슈트 안에 갇힌 진행요원들이 서로 눈빛조차 나누지 못한 채 콜록대며 모스 부호로 소통하는 것처럼 우리가 교감할 수 있는 영역 역시 0과 1로 이루어진 디지털세계로 쪼그라들었다. 인터넷이 우리를 더 넓은 세계로 인도할 것이라는 바람과는 반대로 우리는 좁은 방 안으로 구속되었으며 따듯한 타인의 온기가 있어야 할 곳은 덕지덕지 붙은 악플로 도배되었다. 참가자들이 복잡하고 구불구불한 통로를 거닐며 헤메듯 우리 역시 드넓은 온라인 공간에서 길을 잃었다, 자신을 인도해 줄 누군가의 등짝을 찾아서.

이 게임의 세트장에서는 모두가 누군가의 감시를 받는다. 마찬가지로 코로나 이후의 세계에서 우리 역시 누군가의 감시에 놓여있다. 빅 테크 기업들은 당신의 구매내역과 소비습관, 검색 빈도, 인간관계, 심지어 사소한 성적 취향까지 모두 속속들이 캐내어 자신들의 광고주들에게 팔아 치우고 있다. 마찬가지로 빅 브라더는 당신의 동선과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꿰고 있으며 개인에 대한 정부의 통제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다. 그래서 홉스가 국가라는 존재에 리바이어던이란 괴수의 이름을 달아주었나 보다. 소셜미디어 회사들은 마우스를 몇 번 클릭하는 것 만으로도 트럼프 같은 막강한 정치인들 조차도 벙어리로 만들 수 있으며 빅 브라더는 당신이 런닝머신에서 어느 정도로 뛰어야 하는지까지 규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선을 넘어서면 당신은 범죄자가 된다. 어디선가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탕.  

이렇게 코로나와 금융시장의 패닉으로부터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빅 테크와 빅 브라더를 피해 세상 밖으로 나와 마주한 것은 양적완화로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자산들 가격이었다. 마치 참가자들의 숙소 천장에 붙은 거대한 저금통처럼, 내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손만 뻗으면 내것일 수도 있던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 그렇게 우리는 모두 벼락거지, 아니 탈락자가 되었다. 남은 생존자들은 한정된 자원을 두고 제로섬 게임을 벌이기 시작한다. 제한된 일자리를 두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문과와 이과가, 중년과 대졸자가, 여자와 남자가, 그리고 시민권자와 외국 노동자들이 줄다리기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가 어찌 이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에 공감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 드라마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그려낸 참으로 불쾌한 우화이며 잔혹한 동화와도 같다.

나와 겹치는 부분이 있어 그럴까, 가장 긴 여운을 남긴 등장인물은 서울대 경영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조상우였다. 게임을 거치며 소시오패스로 흑화한 줄 알았던 그에게 연민을 넘어 경외감을 느꼈던 이유는 그가 너무나 절박하고 합리적인 이유로 죽음을 택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라운드인 오징어 게임에서 그는 패배했다, 이제 그는 여느 탈락자와 같이 죽어야 했다. 하지만 기훈이 상금을 포기하고 게임을 중단할 테니 함께 집에 가자고 손을 내밀며 인간미를 내비치는 그 순간, 그는 주저 없이 나이프를 뽑아 자신의 목에 박아 넣었다. 바로 강새벽의 목을 찌른 곳과 정확하게 같은 그 자리에. 

게임이 중단된 사이 잠시 쌍문동에 들렸을 때, 아마도 상우는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을 것이다. 노모에게는 두 가지 자랑거리가 있었으니 하나는 서울대 경영대를 수석으로 들어간 아들이고, 또 다른 하나는 평생을 바쳐 쌍문동 시장 한 구석에 마련한 작은 가게였을 테지. 모진 팔십여 년의 세월을 버텨가며 살아온 그녀에게 그 둘은 마치 훈장과도 같았으리라. 하지만 이제 아들은 시퍼런 수의를 입은 범죄자가 될 것이고 늙은 그녀는 평생을 바친 그 가게가 경매로 넘어가 헐값에 팔려나가는 것을 목도할 것이다. 그래서 상우는 다시 오징어게임에 참가하기로 결심한다. 어머니를 그 지옥에서 건져내기 위하여,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것이 평생을 여의도에서 살다 몰락한 그의 마지막 베팅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믿고 따르던 알리를 속여서 배신했다. 피 흘리며 죽어가던 강새벽이 게임중단을 요청할까봐 그녀를 살해했다. 어찌 그들의 목숨과 내 사랑하는 어머니의 삶을 저울질하랴.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자신을 죽였다. 오로지 기훈의 손에 456억을 쥐어주기 위해서. 그렇다면 저 바보 같은 형이 나를 가엽게 여겨 우리 어머니를 살려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겠노라는 기훈의 약속도 계약서나 각서도 없었지만, 그는 그 가느다란 희망 하나만으로도 주저 없이 나이프를 들어 자신의 목을 힘껏 찔렀다. 선물로 60억을 베팅했다 몰락한 그는 마지막으로 그 가냘픈 희망에 목숨을 걸었다.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그는 나이프로 내가 넘지 못할 선은 없다고 답한 셈이다. 자신의 죽음 그 너머까지도. 


이 모든 장면을 묵묵히 지켜보던 프런트맨에게서 우리는 공정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외쳤다, 바깥과는 달리 오징어게임의 세계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고, 하지만 정말 그랬나. 다른 참가자들을 얼마든지 패 죽일 수 있는 깡패 덕수와 치매 노인이 함께 데스게임을 치르는 것이, 또 힘이 센 알리와 가냘픈 새벽이 같은 여성이 줄다리기를 펼치는 것이 과연 공정한가. 두루미와 여우에게 똑같이 호리병에 담긴 수프를 내어준다고 과연 여우가 그걸 공정하다고 느낄 것인가. 아니, 또 프런트맨의 머리 위에 있는 001번 참가자의 존재는 어떻고.  

그런데도 프런트맨이 이 게임이 공정하다고 믿는 것은 살아남은 자신의 과거를 정당화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그는 결코 기훈 같은 참가자가 아니었을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상우에 더 가깝지 않았을까.  함께 게임에 참가한 수백의 동료들이 죽어가는 것을 목도했고 또 그 중 몇몇은 자신의 손으로 직접 탈락시켰을 것이다. 타인의 찢긴 살점을 즈려밟고 결승선에 도달한 그의 인간성과 영혼은 이미 피범벅이 되어 만신창이나 다름없었을 거라고 쉬이 짐작할 수 있다. 무너진 그의 자아와 양심을 지탱하던 것은 역설적으로 오징어 게임이었다. 바깥세상은 불공정하고 불평등하며 부조리하지만 오징어 게임은 공정하고 평등하기에 합리적인 곳이고 거기서 살아남은 자신은 옳다는 그 믿음, 그 믿음이 없었다면 그는 진작에 무너졌으리라.

이런 사고방식은 프런트맨 뿐 아니라 오일남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서도 기훈에게 내기를 제안한다. 그리고 기훈에게 묻는다, 당신은 아직도 사람을 믿느냐고. 이처럼 그에게 게임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합리화하는 절차와도 같다. 그대들이 믿는 휴머니즘이란 얼마나 얄팍하고 희소한가, 따라서 인간성을 배신하고 의심하며 죽고 죽이고 살아온 나의 삶은 틀리지 않았노라. 그것이 오일남의 진짜 속내였을 것이다.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하면 오징어게임의 여섯 단계는 그가 걸어온 삶을 상징하는지도 모른다. 나이로 짐작건대 일제강점기에 태어났을 그는 해방과 내전을 겪었을 것이고 그 시기에 살아남는다는 것은 마치 456명의 참가자가 아수라장에서 각자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이던 1차 게임과 흡사했을 것이다. 전후 남북으로 나뉜 한반도에서는 자유 진영이냐 공산권이냐를 두고 뽑기처럼 줄을 잘 서는 것이, 또 줄다리기처럼 편을 나누어 상대를 섬멸하는 것이 생존의 관건이었다. 전후 대한민국에서는 함께 등을 맞대고 싸웠던 군인들이 쿠데타로, 개발독재의 시대에서는 호남과 영남이, 또 87년 항쟁 이후엔 YS와 DJ가 마치 오징어게임의 2인1조의 구슬치기처럼 등을 돌리고 싸웠고 서로에게 상처를 안겼다. 이후의 대한민국은 세대 간의 싸움이 되었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386들은 자신보다 먼저 태어난 산업 세대의 등을 떠밀어 떨어뜨렸고 이제 집과 일자리를 빼앗긴 MZ세대는 운동권 세대를 증오하고 있다. 마치 일렬로 서서 앞사람이 개척한 길을 따라 걷다 앞사람을 밀어버리던 5번째 다리 건너기 게임처럼. 그리고 그 모든 게임의 끝에는 가장 폭력적이고 원초적인 오징어 게임이 기다리고 있다. 마찬가지로 평생토록 잔인하게 경쟁자를 짓밟으며 살아온 오일남의 인생에 남은 재미와 기쁨이라곤 야만적인 오징어 게임 뿐이다. 뇌종양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오일남은 자신이 참가할 여섯 개의 게임을 이렇게 설계했다. 젊어서는 아들에게 변신로봇도 사주지 못하고 끝끝내 가족도 없이 쓸쓸히 죽어간 그가 그 게임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 아닐까, 아니야. 나는 잘못 살지 않았어.
  


훌륭한 연출과 각본에도 불구하고 드문드문 불편함을 느꼈던 것은 감독이 의도적으로 정치/사회적 메시지를 끼워 넣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은 삶을 찾아 탈북했다는 강새벽은 그래서 남한이 더 살기 좋냐는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고, 성기훈은 나는 열심히 일만 했을 뿐인데 경영진들이 잘못해서 회사가 부도가 났다고 성을 냈으며, 사람의 목숨을 책상 위에 떨어진 머리카락 한 올만큼이나 하찮게 여기는 VIP들은 모두 외국인 갑부들이다. 친북, 반재벌, 그리고 반외세. 그렇게 [우리민족끼리]라는 표어로 대표되는 90년대 운동권들의 유니버스가 저변에 아스라이 녹아있는 오징어 게임의 세계관은 그 시절 교련복만큼이나 쉰내를 폴폴 풍기고 있다. 더욱이 우리는 지난 5년간 그 철지난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정치인들이 사회와 시민의 삶을 어떻게 박살냈는지 겪지 않았는가, 그런 메시지들이 거북한게 당연하지   

또 황동혁 감독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실패를 사회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성기훈이 어머니의 등골을 빨아먹으며 사는 것도, 경마에 매달리는 한심한 인간인 것도, 아내와 이혼하고 딸의 생일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것도 모두 비뚤어진 사회 때문이다, 혹은 돈만 아는 자본주의 탓이라고 항변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극 중 성기훈이 근무했던 쌍용차는 리만사태 직후인 2009년 1월에 파산을 선언했는데 이후 12년간 이 회사는 대부분의 분기에 적자를 기록하며 또 다시 파산했다. 같은 시기 재규어, 롤스로이스, 벤틀리 등의 고급메이커는 물론이고 사브나 피아트-크라이슬러 같은 대중적인 제조사들까지도 부도, 혹은 경영 위기에 봉착했는데 과연 쌍용차의 부진이 경영진의 잘못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게다가 자본주의는 경쟁력이 없는 기업을 도태시켜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시스템인데, 자력생존이 거의 불가능한 쌍용차가 11년간 연명한 것은 거의 억지에 가까웠고 그 과정에서 많은 인력과 자본과 생산요소가 낭비되었다. 성기훈이라는 한 노동자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삶이 망가진 이유는 회사가 그를 해고했기 때문이 아니라 노동시장이 충분히 유연하지 못해 그가 울산이나 평택의 공장으로 재취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속했던 노조 역시 그 비합리적인 자원 배분에 일조하지 않았나.   

얼마 전 에디슨모터스가 쌍용차의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쌍용차의 인수를 검토했던 지인들에게 전해 듣기로는 일부 인수 희망자들은 회사의 브랜드가치나 기술보다 공장 부지와 같은 유형 자산에 높은 가치를 매겼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드라마를 대단히 높게 평가한다. 무엇보다 감독이 오감을 사용해 극단적인 대립을 강조하는 장면들은 너무나 매력적이다. 파란딱지와 빨간딱지로부터 출발해 추억의 유년기의 놀이는 잔혹한 살육 파티로 이어지고 파스텔 톤의 아기자기한 세트장에서 참가자들을 돈을 위해 서로를 패 죽이고 찔러 죽인다. 재즈 선율이 울려 퍼지는 동시에 화면에서는 두개골이 깨지고 뇌 조각이 흩뿌려지며 사방으로 핏방울이 튀어 오른다. 정밀한 반도체공장이나 의료현장에서나 볼 수 있을것 같은 진행요원들의 의상과 더러운 참가자들의 체육복, 심지어 색상까지도 극명하게 대조되는 진한 핑크 vs 녹색. 큰돈을 내고 쇼를 관람하는 VIP들과 큰돈을 벌기 위해 목숨을 걸고 쇼를 펼치는 참가자들. 막강한 권력으로 게임을 주최한 오일남은 동시에 게임의 참가자이며 그것도 가장 약한 치매 노인이지 않은가. 쌍문동의 수재 조상우와 쌍문동의 백수 성기훈. 그리고 1번과 456번. 도무지 어울릴 수 없는 것들을 한데 모아 잘 어우른 이 잔혹동화는 내가 본 최고의 드라마로 손꼽아도 손색이 없다, 시나리오도 연출도 미술도 그리고 음악도.

시즌 2를 기대한다. 

2021. 10. 9.

모두가 웃지는 못할 것이다

아인슈타인만큼 똑똑하지 않아도 우리의 세계가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것이다. 모든 인류는 침팬지나 보노보노보다 매력적으로 생겼지만 모든 인류가 잘생기거나 예쁘지는 않다. 반에서 모두가 1등을 할 수는 없으며 모두가 키가 크거나 싸움을 잘 할 수도 없다. 이제까지 지구에 존재한 약 천억 명의 인류 중에서 오늘날의 70억 명 거의 모두는 상위 7%에 속하지만 우리 모두가 부자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지체계는 절대적으로 상대적이니까. 마찬가지로 모두가 투자에 나설 땐 그 어느 때보다도 모두가 웃을 가능성이 낮은 법이다.

모든 회사들은 저마다의 손익계산서를 만든다. 그리고 그 손익계산서는 상당 수의 주식평가모델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바로 이전 글에서 언급했듯 우리는 비용을 간과하는 시대에 있다. 그리고 어떤 업종이나 어떤 회사들은 그 비용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주식평가의모델에서 금리라는 팩터를 변화시켜본다면 주식할인율이 현재가치를 얼마나 크게 변화시키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수익률곡선이 평탄한지 가파른지에 따라 현금흐름이 각기 다른 기업의 현재가치 역시 크게 달라진다. 하지만 많은 투자자들이 이를 간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직까지 전 세계의 실질금리는 크게 마이너스 영역에 있고 회사들의 영업이익은 빠르게 개선되었으며 코로나로 인한 타격은 예상보다 적었으니 전 세계가 다시 불황으로 회귀할 가능성은 낮지만 미국의 고용과 중국의 거시지표들 그리고 세계 통화량 모두 음의 기저효과를 마주하고 있다. 이는 위기를 겪고 회복 단계에서 늘 벌어지는 일이며 또한 지나고 나니 그 과정에서 대개 모두가 웃지는 못했더라. 어떤 주식은 지나치게 비싸고 어떤 주식은 상당히 싸다. 어떤 자산은 매력적이지만 어떤 자산은 위험할 정도로 고평가되어 있다. 그리고 늘 그렇듯, 오늘날 우리의 작은 선택은 나비효과처럼 미래의 운명을 크게 가르기 마련이다.

나는 지금이 포트폴리오를 열어 구성종목들을 재검토할 시점이라고 믿는다. 

불쾌한 인플레이션의 시대 (II) - 툰베리의 저주

글을 시작하기 앞서 당부할 것이 있다. 당신이 트레이더가 아니라면 단기적 거시경제 전망을 내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하지 말라. 그러기에 시간은 너무나 소중한 자원이다. 우리 트레이더들이야 미국의 채권 금리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리고 연준의 통화정책이 어떻게 되는지에 따라 보유 주식들의 성과가 갈리고 따라서 금이나 리츠, 혹은 다른 파생상품으로 위험을 분산하거나 집중해야 하지만 트레이더가 아닌 투자자라면 그럴 일이 없다. 게다가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일반인들의 거시경제 분석은 대부분 바닥부터 잘못되었고 전문가들의 전망은 대부분 틀리거나 매일매일 변하며, 또 정부와 교수들은 뒷북을 치기 바쁘니 죄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작년 코로나 초기와 하반기처럼 거시경제가 개별 투자자의 수익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순간은 10년에 한두 번뿐이다. 나머지 기간 동안 투자자들이 해야 할 일은 항상 우직하게 비싼 자산을 팔고 싼 자산을 사는 것, 그것 뿐이다. 이 블로그에서도 나는 최대한 트레이더로서의 단기 전망을 삼가고 되도록 투자자로서 장기적 전망에 집중하려고 한다. 트레이딩과 투자는 아주 다르니까. 아래의 글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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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7월에 불쾌한 인플레이션의 시대라는 글(링크)을 올렸을 땐 미국의 CPI는 1% 아래였고 미국 10년 금리는 0.5% 수준이었으며 누구도 인플레이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세계는 정확하게 반대 지점에 와 있다. 많은 이코노미스트들은 연말 미 10년 국채금리가 2%에 도달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고 CPI는 5%를 넘어 2008년 이래 최대치를 기록했다. 과연 이제 인플레이션은 통제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을까.

파웰은 그 질문에 대해 단호하게 아니라고 답했다. 최근 약간 유보적인 입장을 보이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그는 기저 인플레이션 압력은 내년 상반기로 접어들며 더욱 줄어들 것이라고 예측했고 그의 주장에 의구심을 보이며 한때 1.75%까지 질주하던 미국의 10년 금리는 크게 주저앉으며 don't fight the fed라는 단순한 경고를 또다시 잊은 많은 트레이더들에게 패배를 선사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조금 다른 인플레이션 압력을 직면하기 시작했다. 치솟는 원유와 천연가스가격이 경제지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기 시작하고 있고 신조어를 베껴 쓰는것 말고는 별다른 부가가치를 생산하지 못하는 국내 경제 기자들은 그린플레이션이 닥쳤다며 호들갑을 떨기 바쁘다. 과연 파웰이 틀린 것일까.

나는 연준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동시에 장기적으로 인플레이션을 무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먼저 현재의 인플레이션 압력을 크게 셋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기저효과, 둘은 코로나로 인해 멈췄던 경제가 재가동을 시작하며 나타난 일시적인 공급 차질, 나머지 하나는 코로나 이후 정치사회적 압력으로 생산라인을 바꾸는 것. 이 중 기저효과는 빠르게 사라질 것이며 두 번째 측면도 얼마 안가 정상화될 것이다. 폴 크루그먼 역시 1970년대에는 임금 상승으로 촉발된 인플레이션 기대가 경제에 만성화되었지만 현재의 상황은 매우 다르다(링크)며 연준의 손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마지막 세 번째 요소는 세계 경제에 장기적으로, 그리고 불쾌한 방식으로 인플레이션 압력을 가할 것이다.

코로나 이전과 이후의 세계는 무척이나 다르다. 정부의 역할은 무척이나 비대해졌고 세계의 각국 유권자들은 중국에 적대적으로 변했다. 그리고 코로나를 일종의 자연재해라고 여긴 탓일까, 환경에 대한 관심과 규제도 강화되고 있다. 그리고 문제는 이 모든 변화가 결코 공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전 글에서 언급했듯 비대해진 정부는 민간의 영역을 구축하고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낮추는 수준까지 진행될 것이고(정책을 설계하는 것이 경제학자가 아닌 사실상 일반 유권자들이니까), 국제정치적 이유로 세계 GDP의 17%를 차지하는 중국을 밸류체인에서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대다수 재화와 서비스의 비용이 더 이상 최적점에 있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리고 환경에 대한 규제는 소비자와 기업, 그리고 납세자들에게 막대한 비용을 야기한다. 그리고 이는 대부분 공급 측면의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질 것이다.

최근 에너지 가격이 오르는 것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경제는 회복하니 당연히 에너지 수요가 늘어날 것이 자명한데 과거와는 달리 시추공의 숫자가 유가를 따라 크게 늘지 않고 있다. 일부는 작년 파산했거나 파산할 뻔한 관련업계가 자본지출을 늘리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주된 이유는 미래의 유가 수요가 줄어들 것이라고 추산하기 때문이다. 시추공을 뚫는 데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데 그 수익은 향후 10년간의 유가에 달렸다. 만약 2030년부터 각국정부가 내연기관 차량들을 금지한다면 10년 뒤의 원유 수요는 낮아질 것이고 그렇다면 시추/정제업체들은 투자에 나서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유가가 높아 정제마진이 커져도 모두가 10년 뒤면 그 마진이 박살이 날 것이라고 얘기하니까. 오히려 현재의 휘발유 값이 높아지게 되면 전기차에 대한 사회적 압력은 높아진다. 이는 이코노미스트들로 하여금 미래의 내연기관 수요를 더 낮게 예측하게 만들고 따라서 원유 수요에 대한 전망치를 낮춘다. 그러니 미래의 수요를 바라보고 투자에 나서는 시추/정체업체들은 머뭇거리게 된다. 치솟은 유가에도 불구하고.

뿐만 아니라 전기차, IOT, 블록체인, 클라우딩, 스트리밍 서비스 등 4차 산업은 막대한 전기를 필요로 하고 있다. 독일과 한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은 그 늘어난 전력수요를 친환경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우리가 새로운 산업인 신에너지의 효율과 생산량을 정확하게 예측해 줄어든 화석연료 생산에 알맞게 대응할 수 있다고? 당장 올해 초 텍사스에서 벌어진 전력난을 떠올려보자, 인류는 고등생명체이긴 하지만 결코 신의 반열에 오르진 못했다.

산업의 쌀이라는 철강을 생산하는 제철업계 역시 이 문제를 지적한다. 지난달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포스코는 2050년까지 탄소중립에 도달하려면 약 40조의 비용이 필요하다고 밝혔다.(링크) 이 숫자는 다소 과장된 것이겠지만 과거 장기적 사업들의 비용은 대부분 기존의 추계치를 크게 벗어났지 않은가. 그뿐만 아니라 전기차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리튬이나 알루미늄, 그 외의 다른 원자재 생산라인을 뜯어보면 대부분 환경규제의 직접적 영향을 받는다. 아니 거의 모든 원자재 산업들이 영향을 받는다. 

이런 공급충격에 의한 인플레이션은 근본적으로 70년대의 오일쇼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오일쇼크가 초단기적으로 큰 충격을 가했던데에 비해 사회/정치/규제로 인한 인플레이션은 훨씬 점진적이고 약한 충격을 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환경규제로 인한 비용이 지나치게 상승하면 정치인들과 유권자들은 현재의 환경정책을 재고할 것이고 오일쇼크와는 달리 그 속도를 조절하는 것은 우리 자신들일 테니까. 그렇기에 이를 스태그플레이션이라고 부르는 것은 심각한 과장이고 그저 다소 불쾌하다고 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하지만 현재는 대다수의 정치인들, 대중들 심지어 투자자들도 이런 사실을 잘 언급하지 않는다. 모든 관심이 구글과 아마존 넷플릭스 그리고 전기차에 쏠려있고 또 오로지 장밋빛 미래만을 그리지만 그런 정책들이 가져올 변화가 기저에서 어떤 비용을 야기하는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미 그 징후들을 목도하고 있는데도. 이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는 고작 중학교만 졸업한 채 배우기보다 남을 가르치는데 더 많은 시간을 써 온 그레타 툰베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환경전문가가 아니기에 탄소배출을 얼마나 급격하게 줄여야 하는지 이야기해 줄 수 없지만 이것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도덕적 우월감에 가득 찬 툰베리들의 목표만큼 탄소를 줄이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공급 쇼크라는 비용을 감내해야 한다고. 당신들이 쿨하게 테슬라 전기차를 사고 텀블러를 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더운 여름에 에어컨을 키지 않고 다이소의 생필품 값이 두 자릿수 퍼센티지, 혹은 그 이상으로 상승할 것인데다 해외여행은 물론 국내여행조차 줄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그레타 툰베리, 그린에너지 기업, 그리고 환경운동가들 그 누구도 이런 비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 시대의 투자 패러다임은 과거와 꼭 같지는 않을것이다. 규제로 인한 공급 측면 인플레이션에 각 중앙은행들이 과거와 같이 급격한 금리 인상으로 대응할지 의문이고 또 소비자에게 비용상승을 전가할 수 있는 기업과 아닌 기업들의 장래 역시 크게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변화는 단기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장기에 걸쳐 이뤄질 것이고 순전히 이로 인해 경제가 불황에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변하지 않았다, 이에 걸맞게 비싼 자산을 팔고 싼 자산을 사는 것. 언제 어디서나 늘 그랬듯이. 


사족: 툰베리의 sns에 올라온 이 한장의 사진은 그녀가 마주한 모순을 상징한다. 열차, 텀블러, 바나나 밀과 치즈 빵의 운송, 종이컵, 비닐, 플라스틱 등 단 한장의 사진에서 그녀가 사용하는 이 모든 제품들은 직간접적으로 석유와 탄소배출에 연관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을 누리면서 10년 내에 그녀가 원하는 수준으로 급격하게 탄소배출을 줄이려면 안타깝지만 자살 외에는 방법이 없다. 툰베리는 커서 멜서스나 타노스가 될 것인가.

2021. 10. 2.

shape of my heart


 


He deals the cards as a meditation

And those he plays never suspect

He doesn't play for the money he wins

He don't play for respect


He deals the cards to find the answer

The sacred geometry of chance

The hidden law of a probable outcome

The numbers lead a dance




내가 본 최고의 연기 중 하나는 레옹에서의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였다. 

아버지에 두들겨 맞으면서도 반항적인 눈빛을 놓지 않았던 그 작은 아이가

오로지 살아남기위해 가족들의 주검을 아무렇지도 않은척 지나던 그 작은 아이가

끝끝내 무너져 레옹의 문 앞에서 절규하듯이 매달리며 초인종을 누르던 그 순간

환하게 쏟아지는 빛과 함께 문이 열렸다, 그 작은 아이에게.

그렇게 마틸다는 레옹에게 마리아가 되었다.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1:33부터 2:15까지.

2021. 9. 22.

삶에는 퇴고가 없다

 

연휴를 맞이하여 예전 글들을 쭉 읽어내려오고 나니 얼마나 부끄러운지. 오타와 비문에 매끄럽지 않은 문장들이 꼭 내가 살아온 발자취와도 같더라. 그래서 하나하나 고쳐내려가다 에이 하고 관두고 말았다. 내가 온전하지 못한 삶을 살아온 것처럼 내 글이 온전하지 못한게 당연할 터이니.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2007년의 가을, 셔틀마저 끊긴 그 늦은 밤 학관 뒤 벤치에 앉아 미래를 고민하던 내가 있었다. 나는 작은 실수를 하나 저질렀고 그 실수로 인해 작가의 꿈을 버리고 돈이나 벌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아둔한 나는 실수에 실수를 거듭했고 어찌저찌 하여 트레이더가 되고 말았노라. 하지만 사실 나는 글을 쓰는 이가 되고 싶었다. 다시 돌아가면 나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과연 지난 십년간 내가 번 돈이 그동안 내가 쓰지 않은 글보다 값지다고 할 수 있을까.


2007년으로부터 7+7년 뒤

늦은 가을 밤, 아라리오 미술관 앞 벤치에 앉아.

2021. 8. 26.

샐리와 앤 실험, 그리고 사회적 자폐아들

 


-공을 가지고 놀던 샐리가 공을 바구니에 넣고 방을 떠나 산책을 나갔다. 

-그 사이 앤은 그 공을 꺼내 상자에 넣었다. 

-산책에서 돌아와 공을 찾는 샐리는 바구니와 상자 중 어디를 열어볼까?


이 간단한 질문은 자폐증을 진단하는데 쓰이는 테스트 중 하나인데 자폐아들은 대개 샐리가 바구니가 아닌 상자를 열어볼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방을 떠나 있던 샐리가 공이 이동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폐아들은 공이 상자 안에 있으므로 샐리 역시 상자를 열어볼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자폐아들만이 이런 성향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발달단계 초기에 있는 5세 이하의 아동들도 때때로 샐리-앤 실험에서 잘못된 답을 고르곤 하는데 아직 자아개념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아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자폐아나 5세 이하의 아동뿐 아니라 성인에게서도 흔히 나타난다. 젊은 세대들은 자신들의 삼촌들이 왜 그토록 문재인 정부를 지지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반대로 삼촌들은 왜 조카들이 민주당에 반대하는지 헤아리지 못한다. 여성은 남성의 좌절에 공감하지 못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내가 일반 대중이 왜 금리 인상을 저토록 바라는지 납득하지 못하는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한국의 철수와 영희뿐 아니라 북미의 샐리와 앤에게서도 발생하고 있다. 어째서 우리는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을까.

나는 점점 파편화되는 사회가 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더 이상 나란히 앉아 TV를 보지 않으며 가족의 범위 역시 점점 좁아져 삼촌과 조카는 예전처럼 대화를 오래 나누지 않는다. 전라도 광주에 사는 큰고모와 대구 수성구에 사는 막냇삼촌이 대전에 모여 함께 명절을 쇠는 집도 줄어들고 있으며 한 자녀 가정의 비율이 늘어나 딸에게는 오빠가 없고 아들에겐 누나가 없다. 그렇게 나와는 다른 성을 가진 사람을 이해할 기회마저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동물인 그들은 외로움을 피해 커뮤니티를 찾아다니지만 이는 필연적으로 매우 동질적인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온라인 사이트든 페친 목록이든 유튜브 채널이든 정당이든 간에. 

그렇게 우리는 타 집단을 이해하는 능력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 샐리는 샐리와만 어울리며 앤은 앤들만 만난다. 그래서 바구니에 손을 넣은 샐리는 늘 화가 나 있고 상자 앞에 선 앤은 샐리를 조롱하기 바쁘다. 하지만 사회적 자폐아로 점차 퇴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둘은 매우 닮았다. 코로나로 사회활동이 극도로 제약된 지 어느덧 1년 반이 지났고 그 결과 자산 가격과 소득뿐 아니라 인간관계도 더욱 극으로 치닫고 있다. 생물학적인 바이러스에 대항하여 백신을 개발하고 항체를 형성한 우리는 조만간 집단면역에 도달하겠지만 개인과 개인이, 그리고 집단과 집단이 자발적으로 자가격리에 나선 가운데 코로나처럼 번지는 사회적 자폐증은 어떻게 극복할까.


하기야 그 흔한 sns조차도 하지 않는, 할 줄 모르는 나야말로 가장 고립된 이 아닌가.

2021. 8. 16.

통계로 보는 이준석의 속마음

  • 지난 한달동안 이준석 당 대표의 페이스북에는 총 89개의 포스팅이 올라왔다
  • 그 중 여당을 비판하거나 여당의 비판에 대응한 것은 총 14개(15.7%)
  • 반면 당내 특정 후보나 일부 당원들에 대한 공격은 총 30개(33.7%)
  • 범여권에 속하는 안철수와 국민의당을 향한 공격은 총 13개(14.6%)
  • 당 행사 홍보와 개인신변잡기에 대한 내용은 30개(33.7%)였고 정의당을 향한 공격도 2개(2.2%)를 차지했다*
숫자는 그 사람의 속내를 보다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의 전체 포스팅 중 약 절반인 43개(48.3%)가 당내 대선주자, 혹은 잠재적 동반자인 국민의당을 향한 것인데 이는 그의 주적이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집계대상을 최근 일주일로 좁히면 이 비율은 65%로 급증한다. 이준석을 대표로 뽑은 대중과 당원들의 소망은 국민의힘이 중도층을 흡수하길 바라는 것인데 정작 이 당대표는 바로 이 중도 후보들과 싸우는데 가장 많은 시간을 쓰고 있으니 지지자들과 이준석의 간극이 날카롭게 벌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준석은 자신이 당내 수구 세력과 낡은 정치와 싸우고 있다고 하지만 그가 공격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치인이 아니었거나 단 한 번도 보수당에 속한 적이 없던 사람들이다. 그는 이렇게 해야 당의 외연을 확장할 수 있다고 하지만 정작 가장 확장성이 높은 사람들과 싸우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중도우파로 분류되는 바른미래당 출신인데 이들은 한때 박근혜 탄핵에 찬성했던 사람들이라 당내에서의 입지가 탄탄하지 못하다. 하지만 태극기 부대로 대표되는 자유한국당 출신들에 비해 중도 확장성이 높은 계층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보다 확장성이 높은 정치 세력을 제거하고 나면 자신들이 당 내의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다는 계산이 섰을 것이다. 43 대 14. 이준석의 페이스북이 여당보다 범야권을 공격하는데 집중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누군가를 말로 속이긴 쉽지만 숫자로 거짓을 꾸며내긴 어렵다. 



*이는 수기로 집계한 것으로 오류가 있을수 있습니다.

역사, 그 생존의 교과서

국토가 길게 늘어진 탓일까, 일본에서는 시대가 바뀔 때마다 주요 세력이 둘로 나뉘어 큰 전투를 벌이곤 했다. 그 대표적 사건이 일본 열도를 동서로 나누어 붙었던 세키가하라 전쟁인데 전 일본의 주요 다이묘와 무장들이 대부분 출전하여 싸웠던, 그야말로 그 시대의 빅 매치였던 셈이다. 이 전투에서 패하는 진영에 줄을 잘못 서게 되면 영지를 삭감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칫하면 몰수, 혹은 가문이 모두 처형당하는 혹독한 결과를 낳았기 때문에 각 다이묘들은 신중히 진영을 택했다. 그리고 그런 전국시대 말기에 인상 깊은 족적을 남긴 두 가문이 있다. 바로 사나다와 시마즈가. 그들의 행보를 짧게 돌아보자. 


#사나다 가문

가장 복잡한 상황에 처한 다이묘들 중 하나가 바로 사나다 마사유키였다. 본래 다케다 가문을 섬기던 그는 주인이 몰락하자 살아날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처음엔 오다 노부가나에게, 그가 죽고 난 뒤 호조 가문에, 뒤이어 도쿠가와에게 복속한다.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영지를 양도하라고 명하자 그는 명을 거부하고 전쟁에 나선다. 분노한 이에야스가 토벌대를 보내지만 전략가인 마사유키는 우에다 성에서 토벌군을 섬멸한다. 하지만 이 작은 다이묘가 일본 전역에서도 손꼽히는 도쿠가와에게 언제까지 저항할 수는 없는 법. 그는 둘째 아들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인질로 보내어 중재를 부탁하고, 히데요시는 마사유키의 장남과 도쿠가와의 가신의 딸을 결혼시키며 화해를 주선한다. 고맙게 받아들여야 할 제안이었지만 전투에서도 이기고 도요토미도 등에 업은 사나다 마사유키는 호기롭게 반발하며 나도 다이묘이고 저쪽도 다이묘인데 어째서 내가 급이 낮은 도쿠가와의 가신과 사돈을 맺겠느냐며 항의한다. 결국 이에야스는 신부를 자신의 양녀로 삼아 혼인을 맺는 것으로 이 석연찮은 중재안을 받아들인다.

그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동군을 이끌고 천하를 벌이는 전투를 벌인다고 하니 사나다 가문의 고민이 깊지 않을 수 없었다. 단순히 동군의 수장과 사이가 껄끄러우니 서군에 참가하기엔 가문의 존속과 미래가 달린 일 아닌가. 그래서 그는 결심한다. 도쿠가와 측과 사돈인 큰아들을 동군에 참가시키고 자신은 도요토미의 인질이었던 둘째 아들을 데리고 서군에 참가하기로. 어느 편이 이기든 가문을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분산투자지만, 자칫하면 한솥 밥을 먹던 아버지와 형제, 그리고 가문의 중신들이 전장에서 서로를 죽고 죽여야 했던 고통스러운 결정이었다

결과적으로 동군이 승리했지만 사나다 마사유키는 불과 소수의 병사로 이에야스의 아들이 이끄는 3만 8천 명의 군대의 발목을 잡아 그들이 세키가하라에 참전하는 것을 막는다. 동군 총 병력의 약 1/3에 달하는 이들이 전장에 도달하지 못하는 바람에 동군은 서군에 비해 수적 열세에서 싸워야 했고 화가 단단히 난 이에야스는 마사유키를 죽이려고 했지만 동군에서 싸운 사나다의 장남, 노부유키의 간청으로 아버지와 둘째 아들을 유폐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사나다 가문은 살아남았다. 도쿠가와의 삼엄한 감시에도 큰아들 노부유키는 유폐된 아버지와 동생에게 지속적으로 생활비를 보내고 그들이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그렇게 살아남은 사나다 가문은 우에다와 마쓰시로 번을 지배하며 막부 말기까지 존속했으며 폐번 이후에도 메이지 정부에서 현의 지사를 지냈고 세이난 전쟁에서 공을 세워 백작의 지위에 올랐다. 


#시마즈 가문

임진왜란에서 활약하여 우리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남긴 시마즈지만 군공만으로 평가한다면 그들은 세키가하라에서 놀라운 활약을 보였다. 시마즈 가문은 사나다와는 반대로 도요토미 가문과 껄끄러운 관계여서 처음엔 동군에 합류하려고 했지만 영지가 서쪽 끝 규슈에 있었고 도요토미의 본거지인 오사카 성에 시마즈의 인질들이 잡혀있던데다 병사를 이끌고 이동하던 도중 서군의 대장, 이시다 미쓰나리가 거병하여 어쩔수 없이 서군에 합류한다.

이때 시마즈 본가는 형인 요시히사가 지키고 있었는데 동생 요시히로는 전공을 세우기 위해 형에게 지원을 요청하지만 요시히사는 단칼에 거절했고 그 결과 요시히로는 약 2천이 안되는 소수의 병력만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그러나 전투 내내 그는 거의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참전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미쓰나리가 직접 찾아와 출격을 부탁했을 때에도 딴소리를 하며 수수방관할 뿐이었다.  

망부석처럼 서있던 시마즈의 용사들이 전장에서 활약한 것은 역설적으로 전투의 승패가 갈린 이후였다. 2시간여의 전투에서 서군이 패주하게 되고 시마즈의 본대도 포위당하게 되자 후방이 막힌 시마즈군은 불과 천오백의 병력으로 전방의 팔만이 넘는 동군의 본진을 돌파하기로 결정한다. 거의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이 작전은 놀랍게도 성공한다. 혼다 타다카츠나 이이 나오마사와 같은 쟁쟁한 명장들이 그들을 저지했지만 되려 부상을 입고 물러나고 요시히로는 본진을 뚫고 오사카에 들러 인질들을 구출해 영지로 돌아갔다. 생환한 인원은 불과 수십 명에 불과하고 조카 토요히사와 다수의 중신들이 전사했지만 대장 요시히로를 무사히 탈주시킨다는 전략적 목적을 달성했고, 또 패주한 소수의 군대가 승리한 대군의 정면을 뚫어 후퇴한 이 놀라운 사건은 시마즈 퇴각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동군의 정면을 돌파한 시마즈 요시히로는 도쿠가와의 본진을 지나치면서 이에야스에게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원치 않는 싸움을 시작했다 본국 사츠마로 돌아가지만 제 본심에 대해 훗날 바로 말씀드리겠다고. 요시히로는 살아서 영지로 돌아갔지만 형 요시히사는 조카를 포함한 가문의 누구도 그를 환대하지 말라고 지시했고 동시에 도쿠가와 측과 협상을 시작한다. 요시히사는 동생이 독단적으로 벌인 일이라 소수의 병력만이 참전했고 전투에서 사실상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피해는 동군이 무리하게 시마즈군을 포위 섬멸하려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니 양해해 달라고 화의를 청한다. 이에야스는 후환을 끊어놓고자 시마즈가 다스리는 사쓰마를 평정하고 싶었고 실제로 토벌령을 내리기도 했지만, 불과 천오백에 불과한 시마즈군의 활약을 목도한 터라 시마즈의 근거지로 쳐들어가는 것이 심히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그는 불과 일주일 만에 자신이 내린 토벌령을 철회한다. 그래서 시마즈 가문은 요시히로가 근신하는 것 외에 다른 처벌을 면하게 된다.

그렇게 살아남은 시마즈 가문은 사쓰마 번을 지배하며 막부 말기까지 번성하였는데 막말 사쓰마-죠슈동맹을 이끌며 도막파의 수장이 되어 결국 도쿠가와 막부를 몰아낸다. 시마즈의 놀라운 활약을 목도한 도쿠가와 이에아스는 죽으면서도 그들이 마음에 걸렸는지 자신의 시신을 사쓰마를 향해 묻어달라고 하였는데 그의 염려는 265년이 지나 결국 현실이 되었던 것이다. 


역사는 현대를 비추는 거울일 뿐 아니라 현대인의 의식과 세계관을 형성하는 토대이기도 하다. 이번 정부에서 유난히 두드러지지만 과거에도 한국 정부가 납득할 수 없는 1차원적 외교를 펼쳐 국익을 갉아먹은 사건은 과거에도 여러 번 있었는데 나는 유권자들이 전략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점차 잃어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가장 큰 책임은 우리나라의 편협한 역사교육에 있지 않을까 한다. 우리의 교과서가, 그리고 그 교과서로 배운 대중이 역사를 바라보는 방식은 큰 틀에서 명분을 따지던 조선시대의 사대부들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은 너무나 편협하고 감정적이며 또한 비현실적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입만 산 병신외교로 이어진다.(링크)

만약 우리의 역사교육이 세키가하라의 두 인물들을 평가한다면 과연 어떻게 보았을까? 아마도 사나다 가문은 붕당에 휩쓸려 아비와 아들, 형과 동생이 총부리를 겨눈 비극의 동족상잔을 벌인 막장 집안으로, 시마즈는 유유부단하게 움직여 서군의 패배에 일조한 기회주의자들로 보지 않았을까. 실제로 우리의 역사교육은 명분만 강조하고, 또 그에 따른 별 역사적 의미도 없던 소규모의 항쟁만 조명한다. 그래서 고려든 조선이든 나라가 몰락하거나 위험한 시기를 배울 때면 어김없이 명분론과 항쟁이 교과서를 수놓는다. 물론 그중에는 임진왜란의 의병처럼 의미있는 무력투쟁도 있었지만 무신정권 몰락 후 삼별초의 항쟁이나 1930년대 이후 만주의 소규모 독립군 활동처럼 실제 역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한 사건들조차도 우리의 역사교육은 애써 의의를 부여하고 명분을 입혀 포장한다. 하지만 고려가 자주국으로 남을 수 있던 것은 고려 원종이 쿠빌라이가 왕위 계승 경쟁에서 이기는데 크게 기여한 외교술 덕이고* 전후 한국이 독립할 수 있던 것은 일본의 힘을 꺾어놓고 싶은 미국과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회복하고 싶었던 중국 측의 이해관계가 맞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나다와 시마즈의 역사를 배운 일본인과 삼별초와 조선의용대의 역사를 배운 한국인들이 국가적 위기를 마주했을 때 각각의 전략적 대응은 매우 다를 수밖에 없다. 일본인들은 마사유키나 요시히사처럼 자존심을 버리더라도 생존을 위해 전략적으로 투쟁과 협상을 번갈아가며 사용하겠지만 한국인들은 무지성으로 투쟁만 하면 된다고 믿는다. 불굴의 의지로 반항하고 대들고 싸우고 죽고 살해당하고 그래도 대들고, 그렇게 줄기차게 투쟁에 나서면 궁극적으로 소년만화와도 같은 승리가 알아서 찾아올 거라 믿는다. 그 의지를 지켜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명분과 혹독한 정신교육뿐이지 타협은 매국노 배신자들이나 꺼내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병신외교는 오늘날에도 그렇게 유구한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바로 절름발이 정신승리로 점철된 역사교육을 통해서.   

오늘은 광복절이다. 우리는 독립의 기쁨과 의의만 기념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우리가 살아남았는지 실제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 유럽 대륙만 해도 몇천 개가 넘던 정치세력들은 불과 두 세기 만에 두 자릿수의 국가들로 통합되었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독립국가로 존속한 거의 대부분의 나라들은 생존을 위해 절박하게 투쟁한 역사이고 우리는 스스로의 노력과 더불어 지정학적 여건 덕에, 또 한 강대국의 전폭적 지원 덕에 격동의 세기에도 살아남아 독립국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이런 혜택은 머지않아 끝날 가능성이 크다. 지정학 전략가인 피터 자이한은 늘어나는 재정적자와 셰일가스의 발견, 그리고 라이벌이었던 소련의 붕괴로 미국이 국제사회에 이전처럼 깊숙이 개입할 이유가 사라졌으며 먼로주의로의 회귀는 이미 시작되었다고 지적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래 미국은 세계 시장의 개방, 자유무역, 항행의 자유, 그리고 군사적 안정을 보장하였고 그 결과 대다수의 약소국들이 사실상 정치에서 지정학적 요소를 고려할 이유를 없앴다. 오늘날 그 어떤 정치인도 자국의 안정적인 석유 수입을 위하 말라카 해협에 해상 군사력을 투사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소비시장의 확보를 위해 인도를 식민지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계는 미국의 세계의 경찰 역할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미국이 석유 때문에 중동문제에 개입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미국이 수십 년간 수입해온 석유 중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는 물량은 1/5이 채 되지 않았고, 그나마 그 절반은 사우디가 동맹국 미국에 비축한 분량이었다. 미국이 중동을 지키는 것은 동아시아 동맹국의 에너지 수급 때문이었는데 미국에 안보를 가장 의존하는 한국인들 조차도 미국의 중동 침공을 줄기차게 미 패권주의라며 비난했다.

미국의 유권자들은 점점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는 세계의 경찰놀이에 자신의 세금과 재정을 낭비하는 것을 꺼릴 것이며 그러기 시작하면 나머지 세계가 태어나 누려온 당연한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은 시대가 올 것이다. 그리고 여러 이유로 지금 내 세대는 죽기 전에 그 역사를 목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날이 오면 다시금 지정학은 국가의 생존과 번영에 가장 중요한 요소로 떠오를 것이며 전략적인 외교를 펴는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의 운명은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광복을 기념하던 바로 그날, 유라시아 대륙의 반대편에서 미국의 한 동맹국이 멸망했다. 휴전 직후 남한의 상황을 떠올리면 과연 우리가 아프가니스탄과 아주 다르다고만 할 수 있을까. 국제정치를 지배하는 것은 도덕 책이 아니라 피와 철과 돈이지만 우리는 그를 잊고 있다. 지금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가장 큰 복병은 경제도, 북한도, 사회정치나 지역 대립, 성별 갈등도 아닌, 심지어 출산율도 아닌 바로 이 지지리도 못난 병신외교라고 생각한다. 역사 교육을 처음부터 재고해 볼 때이다. 



*               *               *



또 하나 안타까운 것은 일부 젊은 세대들까지도 이런 명분에 치우친 사고방식에 경도되어 있다는 점이다. 최근 이준석에 대한 논란에 대해 블로그에 달린 댓글들을 찬찬히 읽은 결과 몇몇 사람들은 이준석 사태에 대한 해답으로 젊은 남성들이 더욱 단결하여 자신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당 대표를 더 강하게 밀어줘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전 연령층에서 가장 소수인 세대가, 그리고 투표율이 가장 낮은 세대가, 심지어 세대 내에서도 남녀로 갈라진 집단이 일치단결해서 시마즈처럼 나머지 인구 장벽을 돌파하겠다는 발상은 무모함을 넘어 비장하기까지 하다. 

1600년 세키가하라에서 요시히로가 전방으로 퇴각하기로 결정한 것은 서군이 패주하며 동군 병력의 상당수가 이미 전진하여 생각보다 본진의 방어가 느슨할테니 전방을 지키는 병력이 적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판단에 기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마즈 군은 거의 전멸했으며 다수가 살아남기 위해 두셋으로 구성된 자살조를 끝도 없이 투입해야 했다. 지금 젊은 남성들 역시 전방 돌파를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행동에 나서는 이유는 이것이 실현 가능한 작전이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옳고 이준석 대표가 틀린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미안하지만 세상은 그런 명분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한국의 유권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양분되어 있으며 이제부터 펼쳐질 선거는 세키가하라 전투처럼 양 당의 총력전이 될 것이다. 거기에서 실현 가능성을 계산해보지도 않은 작전은 자살작전이 아닌, 그냥 자살일 뿐이다.



*고려는 후계자 경쟁이 벌어지던 두 후보 중에서 쿠빌라이측을 찾아가 협상을 벌였고 이를 바탕으로 쿠빌라이는 자신의 정통성을 대내외에 알릴수 있었다. 이후 원나라는 고려 원종의 요구를 모두 수용해 고려에서 몽골의 군대와 다루가치를 철수하였고 고려인들이 국호와 사직을 보존하는 것을 허가했다. 게다가 자신의 막내딸을 원종의 아들과 혼인시켰는데 그의 사위 중 비 몽골인 출신은 충렬왕 단 하나였고 제국 내 그의 서열은 7위였다.

**대만과 조선은 태평양 전쟁 발발 시점 이전에 일본의 영토로 병합되었고 심지어 조선이 병합되던 당시의 일본은 서방의 동맹국이었다. 

2021. 8. 13.

완장 찬 준초딩과 반장선거

학교는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는 곳이 아니라 사회화를 학습하는 곳이다. 그리고 중고등학교는 물론이고 초등학교에서도 반장선거를 여는 이유는 어린아이들에게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과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무, 그리고 마땅한 권리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미성숙한 아이들은 이 점을 구분하지 못한다. 반장은 학우들의 의견을 대표하는 자리이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학우들을 지배하는 왕좌가 아니다. 하지만 때때로 내가 반장이니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고집 센 아이들이 있다. 어느 학급이든 반장이 언제 환경미화를 할지, 어떤 방식으로 주번을 정할지, 그리고 급훈을 무엇으로 정할지 독단적으로 결정하지 않는다. 반장은 그저 회의를 주재하여 급우들의 의견과 합의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맡을 뿐이다. 한국에서 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아무리 늦어도 초등학교 4,5학년만 되어도 이 사실을 알지 않는가.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만이 이 사실을 모른다. 이 대표는 윤석열 캠프와는 물론이고 최재형, 원희룡 당사자들과 공개적으로 충돌했으며 윤희숙, 홍준표 등, 심지어는 아군인 유승민과도 마찰을 빚었다. 대선을 불과 반년 앞두고 모든 대선주자들과 충돌하는 당 대표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모두 그가 독단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리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지난 7월 여당 대표인 송영길과 만난 자리에서 이준석이 당의 공식적 입장을 정면으로 거슬러 전 국민에게 재난지원금을 지급하기로 독단적으로 합의한 사건은 그가 당론을 사유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마찬가지로 당내 주요 후보들과의 마찰도 당사자들과 협의되지 않은 일정이나 행사를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과정에서 불거졌다. 

그와 지지자들은 크게 착각하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재난지원금을 전 국민에게 지급하는 것이나 토론회를 여는 것이 맞느냐 틀리느냐가 아니라 그가 전례 없이 독단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린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혁신이 아닌 철저한 퇴보다. 박근혜가 당 로고를 빨간색으로 바꾸고 미래통합당이 파격적인 핑크색 로고를 동원하는 것이 혁신과 무관한 일이었듯 수십여 회의 토론회를 열고 토론배틀을 여는 것이 당의 혁신을 대변하지 않는다. 그저 철없이 신난 당 대표의 장기자랑 대회에 불과한 것이지. 게다가 지난 두번의 대선에서 유권자들은 가장 형편없는 토론자에게 표를 던지지 않았나. 

당을 장악하고 선거에서 이긴 대통령조차도 이런 독선적인 결정을 내리면 당 내부의 갈등을 유발하는데 처음으로 이겨본 선거가 내부의 당 대표 경선인 30대 중고 신인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마당에 어떻게 마찰이 없겠나, 충돌이 없기를 기대한다면 멍청한 것이고 일부러 그랬다면 사악한 것이다. 그렇게 그는 당의 이미지 쇄신과 외연 확장을 기대하는 당원들의 기대를 철저하게 배신하고 있다. 정권교체를 희망하는 국민들과 당원들은 이제 그의 입과 페북에 따라 사분오열하여 네 탓 내 탓을 다투고 있는데 책임소재를 따지기에 앞서 대선이 불과 반년 남은 시점에서 이런 사태를 초래한 것을 보면 나는 그를 무능한 당대표라고 부를 수 밖에 없다. 


그의 미흡한 리더쉽은 성적으로 드러난다. 당내의 가장 유력한 대선후보와 쌈박질을 벌이는 돈키호테 같은 당 대표의 달갑지 않은 지원 덕분에 범야권 후보들의 지지율은 하락세에 있으며 여야 1위 후보의 양자대결 결과는 뒤집혔다. 이준석 대표의 말과 페북 포스팅이 20대 남성에겐 카타르시스를 주었을지 몰라도 그들보다 수가 몇 배나 많은 중도/무당층은 그에게서 반감과 피로를 느끼기 때문이다. 이준석은, 아니 준초딩은 20대들의 홍카콜라에 불과하다.* 그리고 과거 박사모들의 청량한 홍씨 탄산음료가 어떻게 중도층을 쫓아냈는지 기억하자. 

어쩌면 일부 지지자들과 이준석 본인은 당과 후보들이 대표의 지시를 충실히 따랐다면 이런 마찰이 없었을 것이라고 옹호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리석으면서도 위험한 발상이다. 대표가 당심을 따라야 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게다가 당 대표란 자리는 합의를 이끌어내는 자리인데 이준석이 그런 노력을 조금이라도 보였던가. 태어나 처음으로 완장을 차 본 코흘리개 아이처럼 제멋대로 지시하고 자신의 지시를 무시한다며 역정을 내는 것은 성숙한 민주주의에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 이준석 대표가 당을 통솔하지 못하는 것은 그가 무능하고 독단적이기 때문이지 결코 어려서 무시당하는 것이 아니다. 나이와 정치경력과 상관없이 그런 리더는 실패했다. 게다가 자신의 무능으로 인한 실패의 원인을 타인과 사회에게 돌리는 것이야말로 여성우월주의에 적대적인 그대들이 가장 혐오하는 태도 아니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비판을 납득할 수 없다고 항변하는 젊은 꼰대들이여, 그렇다면 초등학교 앞에 서서 열 살짜리 아이에게 묻길 바란다, 내가 반장이니 내 마음대로 장기자랑도 하고 소풍지도 정하고 참가자들을 채점하고 상벌을 내리려고 하는데 학우들이 말을 안듣는다고. 인생 최대의 관심사가 초통령 유튜버의 근황인 그 어린아이들도 당신들을 힐끔 쳐다보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저씨 그러시면 왕따 돼요" 



*이 블로그를 시작한 이래 토론으로 가장 많은 댓글이 달린 글이 바로 이전에 포스팅한 이대남과 테스토스테론의 저주(링크)라는 사실과, 이 블로그의 주 방문자층이 젊은 남성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준석이 모든 20대들에게 청량감을 주는 지도 심히 의문이다.

2021. 8. 7.

이대남 그리고 테스토스테론의 저주

때때로 어떠한 현상을 이해하려면 표면의 존재가 아닌 부재를 살펴보아야 할 때가 있다. 세월호 사건을 추모하는 것은 인류애지만 그가 동시에 천안함 사건에 대해 입을 다문다면 그것은 정치인 것처럼. 최근 붉어진 한 양궁 선수에 대한 논란도 마찬가지다. 20대 남성들은 안산 선수가 sns에서 사용한 몇몇 단어들 때문에 분개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들이 화를 내는 진짜 이유는 지난 몇 년간 사회가, 그리고 주류 언론이 그들에게 엄격한 자가검열을 강요했는데 그것이 이중잣대였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지난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낸 한 선수는 자신의 팬들에게 "노무노무 고맙습니다"라는 포스팅을 올렸다가 공개적으로 사과를 했고 한 유명 유튜버 역시 해당 문구를 자신의 영상에 삽입했다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았다. 

나를 포함하여 저들의 인터넷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윗세대들이 보기에 오조오억이나 웅앵웅이 뭐가 문제냐며 젊은 남성들을 타박하겠지만 그렇다면 노무노무는 왜 문제가 되었나, 그리고 왜 우리는 그때 침묵했던가. 이대남들이 분노하는 진짜 이유는 자신들의 말과 입이 억압당하고 검열당할 때 주류언론과 윗세대들이 소극적으로, 때때로 적극적으로 동조했다는 데에 있다. 따라서 이 현상을 이해하려면 표면의 웅앵웅을 볼 것이 아니라 그 이면의 부재를 보아야 한다. 그들의 표현의 자유에 무관심했던, 우리 여론과 관심의 부재를.

그리고 지금 이 젊은 남성들은 우리가 저질렀던 것과 동일한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그들 역시 표면의 현상에 집착하느라 수면 아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또다시 정치적 오판을 내리고 있다. 그리고 이 실수는 자신들을 더욱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               *               *

공권력의 성추행을 고발하여 명성을 얻은 박원순 시장이 공권력으로 성추행을 저지르다 들통나서 자살하는 바람에 열린 보궐선거에서 오세훈 후보는 여당 후보를 57.5%대 39.2%라는 압도적인 차이로 누르며 시장직에 복귀했다. 불과 1년 전에 서울 시민들이 여당에 지배적인 의석수를 안겼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분명 이는 엄청난 변화였고 그 배경에 대해 다양한 분석이 나왔다. 그중 20대 남성들의 해석은 다분히 이색적이었는데, 오세훈 후보가 성평등 관련 질문들에 답변을 거부했는데 이런 반 페미니즘 선언이 유권자들의 전폭적 지지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런 그들의 독특한 세계관은 젊은 이준석이 제1야당의 당 대표가 되며 더욱 강화되었다. 반 페미니즘을 외치는 젊은 남성이 구체제의 인사들을 제치고 당의 얼굴이 되는 것을 보며, 집을 마련하는 것도 취직도 여의치 않았던 20대 남성들은 최초의 정치적 승리를 맛보았다. 하지만 인류사에서 가장 커다란 패배는 모두 작은 승리로부터 출발했다. 이 두 사건으로 이십 대 젊은 남성들은 오만이라는 함정에 빠졌다. 마치 그들이 너무나 사랑해 마지않는 당 대표의 페르소나가 된 것처럼. 그리고 누군가는 그들에게 경종을 울려주어야 한다.

19년 대선 총 투표수 (연령별/성별)

지난 대선은 20대 남성들의 투표율이 가장 높았던 선거였지만 그들의 정치참여도는 여전히 처참하다. 지난 대선에서 20대 남성은 고작 228만 표를 행사했는데 이 숫자는 그들이 주적으로 여기는 40대 남성의 절반에 불과하고 심지어 동년배 여성보다도 50만 표나 더 적다. 산술적으로 보면 20대 남성의 정치적 영향력은 인천광역시의 투표수와 크게 다르지 않다. 구월동의 한 주민이 선거 직후 우리 인천이 승리의 주역이라고 외친다면 그들의 현실 인식엔 크나큰 결함이 있는 것 아닐까?

이런 착각은 야당의 당 대표 선거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국민의 힘에 당비를 내는 책임당원은 약 28만 명이고 그중 50대 이상이 72.8%로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20대는 고작 3.9%, 30대는 7.7%에 불과한데 그런데도 이준석 대표는 43.8%의 득표로 2위 나경원 후보(37.1%)를 큰 표 차로 이겼다. 젊은 남성들은 젊은 당 대표라는 표면을 보고 있지만, 이 승리의 진짜 함의는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50대 이상의 보수층이 정권교체를 위해 전략적으로 30대 당대표를 밀어 줬다는 데에 있다. 즉 이준석의 승리는 20대의 지지가 아닌 중년/노년층의 양보 덕이다. 게다가 책임당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핵심 보수층이 탄핵에 찬성한 바른미래당 인사들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원들이 얼마나 절실하게, 또 전략적으로 움직였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젊은 남성들은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 그들은 50-70대들의 양보와 협력을 자신들의 승리, 즉 그들의 패배로 간주하고 있으며, 이준석 대표는 그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당내 주요 대선주자들과 대립각을 세우고 합당 과정에서 안철수와도 파열음을 내고 있다. 당내에서 다수인 80%는 외연을 확장하기 위해 양보를 하는데, 소수인 20%는 점령군 행세를 하고 있다. 각자의 옳고 그름은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선택은 대단히 위험하다. 정치적 소수가 다수를 무시하며 대립하기 시작하면 다음 양보를 기대하기 어렵고 그럼 소수집단인 2030대 남성들은 당내에서는 물론이고 사회에서도 고립될 것이다.

이런 징조는 최근 안산 선수의 페미니즘 논쟁에서 드러난다. 웅앵웅과 오조오억이 젊은 남성들에게는 중요한 주제지만 그 위 세대들에겐 정말이지 생소한 문제다. 나 역시 당신들의 분노를 이해하지만, 그러기 위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했는데 나보다 더 윗세대인 중년 노년층이 그를 어찌 알겠는가. 당신들이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들도 당신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중도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언론이 젊은 남성들의 입장을 대변하지 못하는 것은 페미니스트를 지지하는 거대한 어둠의 세력 때문이 아니라, 당신네들을 제외한 다른 세대들이 이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 사태는 고립된 소수집단이 극단적 주장을 펴면 어떤 결과를 낳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앞으로 벌어질 사태의 프리퀼에 불과하다.  


젊은 남성들이 정치적으로 실수를 저지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한때 그들은 40대 민주화 세대와 연합하여 보수정권을 몰아냈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터무니없이 오른 주택 가격과 줄어든 일자리, 그리고 교육을 잘 못 받았다는 조롱과 모욕뿐이었다. 불과 4년 전 20대 학생들은 그 어느 계층보다도 충성스럽게 문재인 정부를 지지했지만 오늘날 이들의 정치적 입장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특히 20대/남성/학생의 지지율은 4년 전 90%대에서 20%대 초반으로 주저앉았는데 이런 급격한 변화는 한국 정치 역사상 거의 전례가 없는 일이다. 처음 정치판에 뛰어든 그들은 아무런 정치적 경험도, 식견도, 배경도, 지식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과도한 자기 확신을 가지고 있고 대개 그러한 오만은 패배를 부른다. 2017년 그들의 선택이 그러했듯이.

나는 진심으로 20대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길 바라며 그들의 목소리가 나라정책에 더욱 반영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은 더욱 영리해져야 하고 좀 더 성숙해야 한다. 국민의힘 당의 책임당원들 상당수는 탄핵에 반대했던 이들이며 아직도 그들은 바른미래당 인사들을 배신자라고 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박근혜 특검수사를 담당한 윤석열을 대선 후보로 지지하고 있고 바른미래당 출신인 이준석을 당 대표로 뽑았다. 반대로 젊은 남성들은 자신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홍준표를 대선후보로 뽑고 나경원을 지지할 수 있을까. 전략적으로 유연한 계층은 과연 누구일까, 파릇파릇한 20대 청년들이 골다공증으로 골골대는 노년층보다도 더 완고하고 고집 센 이 현상을 뭐라고 설명할까?

작년 주식시장에서 20대 남성의 수익률은 평균 3.81%로 전체 계층 중에서 가장 낮았다. 이에 관한 몇몇 논문들은 그 원인으로 남성호르몬을 지적한다. 평균적으로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높은 집단의 주식 수익률이 낮았는데 이 남성호르몬이 과도한 자기 확신을 야기하고 새로운 정보의 습득을 막으며 사고의 유연성을 억제해 수익률을 낮춘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런 현상은 현재의 20대 남성들의 정치적 태도와도 일치한다. 한때 문재인을 가장 강력하게 지지하던 계층이 가장 강력한 반대 세력으로 돌아서서 특정 사상과 특정 인물을 맹목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강력한 자기 확신과 독단은 지난 2016-17년과 똑같이 닮아있다. 그 과정에서 연합해야 할 장년/노년층을 틀딱이라며 조롱하고, 그들의 양보를 철저하게 무시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기를 원한다. 그것도 야권에서 1/5도 안되는 지분을 가진 집단이, 유일하게 자신의 편을 들어줄 나머지 절대다수를 분노케 하면서. 그런 현실인식을 가진 그들에게 승리를 기대할 수 있을까? 


부디 그들의 선택이 주식수익률과는 다른 결과를 낳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나는 진심으로 당신네들을 응원하기 때문이다. 

2021. 8. 4.

빨간구두



안데르센 동화 중 빨간 구두라고 알아?

소녀는 엄숙하고 경건한 정소에도 굳이 그 빨간 구두를 신고 가지.


그 구두를 신으면 두 발이 저절로 춤을 추게 되고

영원히 춤을 멈출 수도 구두를 다시 벗을 수도 없게 돼


그런데도 소녀는 빨간 구두를 절대 포기하지 않아

결국 사형집행인이 나서서 소녀의 발목을 잘라냈지만

잘려나간 두 발은 빨간 구두를 신은 채 계속해서 춤을 췄어


억지로 갈라놔도 절대 떨어질 수 없는 게 있어.

집착은 그래서 숭고하고 아름다운 거야.



나, 

이제야 내 빨간 구두를 찾았어.


 사이코지만 괜찮아 中


paint by Egon Schiele

2021. 7. 24.

에드바르트 뭉크와 뱀파이어

 

모든 예술가에게 저마다의 뮤즈가 있다면 에드바르트 뭉크의 뮤즈는 바로 죽음일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뭉크가 5세가 되던 해에 죽었고 몇 년 뒤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워주던 큰누나마저 세상을 떠났다. 이어지는 비극을 견디지 못한 그의 여동생은 정신병에 걸렸으며 아버지는 가족이 파괴되는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광적으로 종교에 집착했다. 노르웨이의, 아니 근대 유럽의 최고의 화가 중 하나인 에드바르트 뭉크의 음울함은 죽음으로부터 탄생했다. 

때때로 사랑은 트라우마를 치유하기도 하지만 뭉크의 운명은 불행히도 정반대였다. 그의 첫사랑은 자유분방한 사교계 인사로 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연애를 지향하던 보헤미안이었으며 동시에 치명적인 팜프파탈이었다. 자신을 사랑했던 남자들이 흘린 피 내음을 마치 향수처럼 온몸에 두른 그녀가 고작 스무 살짜리 풋내 나는 그림쟁이에게 만족할 리 없지 않은가. 6년여의 연애 기간 동안 뭉크는 그녀만을 바라보고 헌신했지만 그녀는 뭉크의 사랑에 오롯이 거짓으로 응답한다. 보헤미안 부인의 주위엔 늘 욕정에 불타는 남자들이 맴돌았고 그 가운데 뭉크의 순수한 사랑은 그녀에게 가벼운 키스나 갓 구운 마들렌만도 못한, 그저 작은 오락에 불과할 뿐이었다. 철저하게 농락당한 뭉크는 마침내 그녀를 떠나면서 일기에 그녀가 자신의 생의 향기를 영영 앗아갔다고 기록했으니 그에게 실연이란 마치 죽음이나 다름없었나 보다. 마치 어린 시절 어머니와 누이를 떠나보내던 것처럼.

그의 두 번째 사랑도 깊은 상처를 남긴다. 그는 다그니 유엘과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지만 자유연애주의자였던 그녀는 베를린에서 만난 뭉크의 동료이자 건축가인 스타니스와프 프시비셰프스키를 선택한다. 그야말로 잘못된 만남의 조연이 된 뭉크는 연인이 마음을 고쳐먹고 돌아오기를 기다렸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이 러브 스토리의 비극적 조연에 불과했다. 유엘과 프시비세프스키는 얼마 뒤 결혼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그녀를 놓지 못했던 뭉크의 영혼과 작품세계는 더욱 침전한다. 심연의 어둠으로. 첫사랑의 비극이 방종이었고 두 번째 사랑이 배신이었다면 세 번째 사랑의 비극은 집착이었다. 새 연인인 튤라 라르손은 그에게 깊이 집착하고 결혼을 강요했으며 대답을 회피하는 뭉크에게 자살하겠다며 협박한다. 한 손에 권총을 쥐고 죽겠노라며 울부짖는 연인을 말리다 실수로 총이 격발되고 말았다. 그녀의 가냘픈 손을 떠난 탄환은 화가인 뭉크의 왼손을 관통했고, 화약 내음, 폭발, 그리고 비명소리에 뒤이어 그의 손가락 하나가 허공으로 날아갔다.

이후 그는 평생토록 독신으로 살았다. 그가 사랑한 모든 여자들은 일찍 죽거나 그를 배신하거나 상처 입혔으며 그에게 애정과 사랑이란 이윽고 밀어닥칠 처절한 비극의 서막에 불과했다.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뭉크는 술에 더욱 의존했고 폭음을 거듭했으며 불안 증세가 더욱 악화되어 환각에 시달리게 된다. 그의 대표작 절규는 핏빛으로 물든 하늘이 질러낸, 그 찢어질듯한 비명소리에 공황에 빠져 귀를 틀어막은 자신의 모습을 그려낸 것인데 아마도 이는 비유나 은유가 아닌 뭉크가 실제로 겪은 환각이었을 것이다.  

그런 뭉크가 처음으로 겪은 실연의 고통을 캔버스에 담아낸 것이 바로 맨 처음 소개한 이 작품이다. 한 여자가 엎어져있는 남자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다. 남자가 무슨 악몽이라도 꾼 것일까, 여자는 남자를 다독이고 있고 또 그들 위로 선명하게 붉은 머리카락들이 흐르고 있다. 힘없이 늘어진 그들의 머리와는 달리 그녀의 오른팔은, 그리고 그의 왼팔은 서로를 간절히 붙들고 있다. 사방에서 밀려오는 음울한 어둠을 밀쳐낼 힘도 의지도 완전히 잃은 두 연인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서로에게 절절하게 매달리는 것뿐인 양. 이 그림의 제목이 무엇일까? 사랑하는 연인들? 절망 속에서의 사랑?



작가는 이 그림에 뱀파이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러고 보니 남자의 뺨이 다소 창백해 보이지 않은가. 



*               *               *



나를 처음으로 미술로 이끈 것이 바로 이 그림이다. 세상에는 서로가 서로를 부수는 사이가 있다. 하지만 대개 당사자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과거 스무 살을 갓 넘긴 나 역시 그런 파괴적인 관계의 한 가운데에서 허우적대고 있었고 철부지였던 나는 그 수렁에서 어떻게 헤어 나올지 알지 못했다. 아니, 사실 빠져나올 의지조차 없었다. 그녀가 나에게 뱀파이어였던 것처럼 나 역시 그녀의 목에 이를 박아넣고 있었으니까. 그러다 우연히 이 그림을 마주쳤고, 그 앞에 우두커니 서서 제목과 이미지를 번갈아 보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마치 지도도 나침반도 없이 황무지에서 헤매다 앞서 이곳을 지난 누군가의 흔적을 찾아낸 앳된 이방인처럼. 당시 길을 잃은 이가 나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던가. 그리고 그 작은 흔적들을 따라 다시금 걷고 또 넘어지고 또다시 절뚝이며 헤매고, 뭐 그렇게 어찌어찌하다 오늘날 여기까지 왔노라. 그러니 내일도 모레도 또 다른 이들의 자취를 따라 어찌어찌 살아가겠지. 당신들도 나도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도.


Kiss(1897) by Edvard Munch

2021. 7. 22.

다른 신흥국은 금리를 올리고 있을까


*

한국의 통화정책을 미국과 비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냐는 질문이 있었는데 마침 한 보고서에서 여러 신흥국 중앙은행들의 통화정책에 대한 요약이 있어 간단하게 표로 정리했다. 우리는 선진국이 아닌 EM들을 하나로 묶지만 각각은 매우 다르다. 이들을 크게 둘로 나누면 저인플레이션 국가들과 고질적으로 높은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는 나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미 인상에 나선 신흥국들은 주로 후자에 속하는 그룹으로 대부분 1차 산업의 비중이 높고 수출품의 상당수가 원자재나 농산물이다. 그리고 위의 표에서 보다시피 한국은 여느 아시아 국가들처럼 낮은 인플레이션 그룹에 속한다. 그리고 그 나라들 중 단기간 내에 금리인상을 예고한 국가는 한국뿐이며 동시에 인상을 예고한 나라 중 CPI가 가장 낮은 나라 역시 한국이다. 한국은행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매파적인 중앙은행이다.

코로나 이후 자영업자, 생산성이 낮은 서비스산업, 젊은이들과 저소득층이 타격을 받은 것은 모든 나라들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한 현상이다. 그리고 모든 나라가 자산시장의 급격한 상승을 겪었다. 하지만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은행만이 인플레이션의 압박 없이도 금리를 올리겠다고 나섰다. 오로지 자산가격을 잡기 위해. 세계에서 유일하게 무모한 도전에 나선 한국은행, 단언컨대 그 짐은 주식이나 부동산 시장이 아닌 한국의 한계계층에게 돌아갈 것이다. 대만의 국숫집보다, 폴란드의 취준생보다 그리고 태국의 여행사보다 한국의 경제적 약자들은 더욱더 고통받을 것이다. 오로지 강남의 집값을 잡기 위해.


*위 도표는 향후 1년간 금리상승에 대한 시장의 기대치를 정리한 것으로 시기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2021. 7. 16.

파웰이 이주열에게 보내는 경고

미안하게도 또 한국은행 이야기를 꺼내려고 한다. 마치 막장드라마를 보며 막장 너머 더한 막장을 보는 기분이라 다시금 이주열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까지 한국은행과 선진 중앙은행들의 대응이 얼마나 극명하게 대조되는지에 대해 몇 편의 글을 썼는데 둘의 차이가 지난 24시간보다 더 극명하게 드러난 적이 몇 없었으니까.
흰색: 미국 cpi      주황색: 한국 cpi

이번 주 발표된 미국의 6월 CPI는 5.4%으로 2008년 이래 가장 가파른 상승세 보였지만 파웰은 간밤의 청문회에서 인플레이션 압력은 잦아들 텐데 때이른 금리 인상은 큰 실수가 될 것이라며 상원의원들의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를 강력한 어조로 저지했다. 반면 불과 몇 시간 뒤 한국 시간에 열린 금통위에서 이주열 총재는 6월 CPI는 고작 2,4%에 불과하지만 금리인상은 불가피하며 당장에라도 금리를 인상할 수 있다고 예고했다. 5% 이상도 문제없다는 파웰과 고작 2%에 화들짝 놀란 이주열, 둘 사이에는 분명 거대한 차이가 존재한다.

먼저 거시적 환경을 보면 한국과 미국 사이에 극명한 차이는 드러나지 않는다. 아니 되려 표면적인 인플레이션 압력은 미국이 2배 이상 높으며, 경제성장이나 통화량 증가율, 백신 접종 속도, 소매판매 회복 등 모든 면에서 미국의 회복세가 한국을 앞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웰이 출구전략을 늦추는 핵심 이유는 바로 고용시장의 더딘 회복에 있다. 코로나 이전 6.8%였던 미국의 실업률은 아직도 높은 수준인 9,8%에 머물러 있는데 인플레이션 압력이 강하지 않다면 고용시장의 회복을 지원하기 위해서 연준은 완화적 통화정책을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반면 한국은행의 입장은 정반대이다. 자신들의 분석에 따르면 CPI가 내년엔 2% 선에서 등락할 것이니 인플레이션 압력은 없지만 회복하지 못한 내수와 고용시장을 희생시켜서라도 금리를 올리겠다고 한다. 한국은행법 제1조 1항에 명시된 이 조직의 첫 번째 존재의의는 바로 물가안정인데 그들은 물가고 고용이고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이젠 금리 인상 그 자체를 조직의 목표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아마 한국은행법을 개정해야 하지 않을까? 한국은행은 금리를 인상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그들은 계속해서 금융 불안정을 금리 인상의 빌미로 들지만 진짜 문제는 그 정책목표가 전혀 계량화되지 않았다는데에 있다. 금융 불안정을 어떤 지표로 측정할 것인가. 주식의 P/E? 주식시장의 밸류에이션은 절대적으로 보나 시계열로 보나 미국이 훨씬 높다. 주택시장의 PIR? 수급불균형으로 가격이 상승한 재화가 통화정책의 목표가 될 수 있는가. 아니면 부채 증가율? 지금 급증하는 부채는 정부로 인한 것이고 그걸 뒷받침하는 것은 급증한 가계저축률이다. 부채위험이 걱정된다면 기재부와 국회에 가서 따질 일 아닌가. 다른 중앙은행들이 정책목표를 더욱 구체화하고 시장과의 소통을 강화하는 것과 정반대로 한국은행은 한국은행법에 직접적으로 명시되지 않은*, 추상적인 대상을 정책목표로 삼고 있다.  

인플레이션 압력은 없고, 고용시장은 아직 위축되어 있고, 서비스 분야와 자영업자들은 심각한 타격을 받았지만 그것은 한국은행이 알 바 아니라던** 이주열. 그가 금리 인상을 서두르는 이유는 단 하나다. 자산 가격의 통제. 지난 금융안정보고서에서 언급한 자산이 세가지 있었는데 바로 주식과 부동산 그리고 가상화폐였다. 그러니 이주열과 금통위원들은 강남 부동산과 삼성전자, 비트코인의 가격이 오르는게 문제라서 금리정책으로 이를 잡겠다는 것이다. 지난 글에서 설명했듯(링크) 여기에는 개인적 동기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금통위원들은 개개인의 경제적 입장을 통화정책에 과도하게 반영하고 있다. 아니라고? 2017년 첫 금리인상을 불과 두달 앞두고 상도동의 아파트부터 팔아치운 총재에게 물어보라. 그리고 금통위가 전세계에서 가장 매파적인 것이 금통위원들의 예금잔액과 비율이 역대 가장 높은 수준인 것과 완전히 무관할까? 이주열과 금통위는 통화정책을 사유화하고 있다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고 앞선 글에서 여러 번 언급한 대로 자산가격을 통제하기 위해 금리를 올리는 것은 고용시장의 회복세를 막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또 다른 계급갈등을 낳는다. 당장 방역의 희생양이 된 20대 청년들을 보자. 미래의 주택가격과 주식 가격은 오를 수도 떨어질 수도 있다, 공급이 충분히 많다면 그들은 미래에 저렴한 가격에 주택을 구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지금 적절한 직업을 찾지 못한다면 그들이 미래에 적절한 직업을 가지고 소득을 낼 가능성은 극히 낮다. 실업상태에 10년 이상 놓인 청년은 결국 중년 알바생으로 전락하고 마는데 그러면 주택 가격과 상관없이 집을 사지 못한다. 지금 청년들에게 시급한 것은 자산가격이 아니라 바로 구직과 소득이다. 물론 실업의 걱정이 전혀 없는 금통위원들에겐 오르는 비트코인과 아리팍 가격만 보이겠지만.  

아마 한국은행 관계자들이 내 글을 본다면 발끈할 것이다. 과도한 자산 가격의 상승은 금융 안정을 위협할 수 있으니 초기에 통제해야 하는 것인데다 현재 추이를 보면 한국 경제가 부채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고. 그리고 미국이나 유럽과는 달리 한국은 대외변수의 영향을 심하게 받기 때문에 미국처럼 정교한 통화정책을 펴는데 한계가 있고 이번 사태는 코로나로 인한 돌발적 변수 등 현재 한국은행의 행보를 정당화할 백만 가지 이유를 댈 것이다. 사실 그들의 말이 대부분 옳다. 무엇보다 일개 트레이더에 불과한 내가 통화정책에 특화된 이 조직보다 적절한 중립금리 수준과 인플레이션 경로에 대해 어찌 더 잘 알겠는가. 하지만 내가 아는 것은 한국은행은 분명 연준과 정반대의 길로 나아가고 있으며 파웰은 자신과 반대되는 주장을 펴는 이들에게 명백히 경고했다는 사실이다.

오늘 열린 금통위는 어김없이 제한된 인원만 참석한 채 유튜브를 통해 진행되었고 배석자들은 모두 마스크를 착용했다. 작년 우한페렴이 창궐한 이래 한국은행은 계속 금통위를 유튜브로 진행하고 있어 예전처럼 기자들이 배석해 왁자지껄한 금통위를 보는 것은 아직 요원하다. 여전히 마스크를 낀 총재는 아직 금통위를 유튜브로 진행해야 하지만 경제는 정상화될 것이라고 큰소리를 땅땅 치고 있었고, 반대로 마스크를 벗은 파웰은 상원 의원들과 대면하여 인플레이션 압력은 줄어들 것이며 고용시장이 아직 취약하다고 주장했다. 두 나라가 처한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으니 한쪽이 맞고 다른 한쪽은 틀릴 수밖에 없다. 고용을 위해 인플레이션의 위험을 무릅쓴 파웰, 그리고 금리 인상을 위해 고용을 희생시키겠다는 이주열. 오늘 방역 당국은 여의도에서 발생한 코로나로 인해 국회와 여의도에 위치한 35개 금융사 전직원에게 코로나 검사를 권유했다. 오늘 낮 여의도공원의 임시검사소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섰고 뙤양볕 아래 땀을 뻘뻘 흘리며 줄 선 금융인들은 파웰과 이주열을 번갈아가며 떠올리다 아마 이 격언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Don't fight the fed

마스크를 착실히 착용하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준수하며 열린 금통위

다들 백신 맞았으니 마스크와 거리두기는 필요 없다는 미국의 상원과 연준의장,

과연 둘 중 누가 매파적이어야 할까?


하지만 트레이더로서 나는 한국은행의 실수를 무척이나 반길 것이다. 우리는 금리가 오를 때 수익을 내는 여러 방법이 있으며 또 그들이 실수를 되돌릴 때 돈을 버는 여러 방법이 있다. 또 금리가 오를때 오르는 주식이 있고 내릴때 강세로 가는 주식이 있다. 사실 그들이 실기하지 않으면 어떻게 우리가 돈을 벌겠는가. 트레이더의 입장에서 실수하지 않는 중앙은행이란 실책 없는 메이저리그의 투수처럼 까다로운 존재다. 게다가 나에겐 한은이 실기해서 성장성을 훼손하더라도 적절한 수준으로 회복할 때까지 견딜 자본과 소득도 있다. 다만 모두가 그것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뿐. 그들에게 작은 위로를 보낸다.


사족: 나는 정치인이든 관료든 모든 사람들은 개인적 동기를 정책철학에 반영할 수 밖에 없다고 믿는다. 금통위원들도 마찬가지다. 나는 3명의 총재와 수도 없이 많은 금통위원들의 구성을 보았는데 그 중 이렇게나 현금보유성향이 강한 조합을 본 적이 없다. 이런 사람들이 통화정책을 운용하게 되면 디플레이션을 지향하게 된다. 다 잘라라***. 


*한국은행법 1조 2항은 금융안정인데 과도한 금융불안정은 향후 금융안정을 위협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금융안정이 심각하게 위협받던 작년 2월 한국은행과 이주열은 무엇을 했는가. 그들은 국가경제를 신용경색으로 밀어넣으려 했다. 우리나라 국회가 좀 더 금융시장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면 청문회에서 이 점을 혹독하게 지적했을 것이다.

**정확하게는 향후 필요한 조치를 강구하겠다고 했는데, 쉽게 말해 별 관심이 없다는 말을 격식을 갖춰 말한 관용어구나 다름없다.

***실제로 자를 길은 없다.

2021. 7. 14.

금리의 온도

우리 모두는 어떤 분야의 전문가이면서 동시에 다른 모든 분야의 아마추어 혹은 초보들이다. 그리고 그 둘의 시각에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종종 다른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다 오해를 낳는다. 나 역시 금통위를 앞두고 작성된 기사의 댓글들을 보고서야 왜 일부 대중들이 금리인상을 이렇게까지 강력하게 요구하는지 그제서야 알았다. 지난 1년여간 전 세계 모든 나라들이 강력한 부양책을 사용했고 그 결과 금융시장이 발달한 거의 모든 나라에서 주가와 부동산이 고점을 경신했다.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주변을 돌라보기 시작했고 그들은 이제 자산 가격들이 마천루보다 더 높아진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자괴감을 느끼고 있고 그런 정서는 벼락거지라는 신조어를 낳았다. 전해 듣기론 모 재벌도 술자리에서 측근들에게 그런 푸념을 늘어놓았다고 하니 일반 서민들이야 오죽하랴. 

대중은 상대적 빈곤의 원인으로 느슨한 통화정책을 지목하고 있다. 우한폐렴의 지독한 상흔이 지나갔으니 어서 통화량 공급을 줄여 이 늘어나는 빈부격차의 확대를 막아야 한다고. 특히 한국에서는 끝도 없이 올라버린 집값이 사람들의 박탈감을 자극하고 있다. 규제로도 세금으로도 집값을 잡을 수 없다면 그 범인은 분명 통화정책 때문이라는 사람들의 믿음이 때이른 금리 인상 기대에 불을 지피고 있다. 하지만 이 불은 꽁꽁 언 얼음을 녹이는 동시에 바짝 마른 종이를 태워버릴 것이다. 아니 얼음이 녹기보다 종이가 타는 것이 빠를 것이다. 금리의 온도는 당신이 누구인지 또 어떤 일을 하는지에 따라 매우 다를 테니까.

부문별 대출 연체 추이를 보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먼저 가계부채의 연체율이 가장 낮고 중소법인의 연체율이 가장 높은데 심지어 주택 담보대출은 대기업 대출보다 연체율이 낮은, 사실상 대한민국에서 가장 안전한 대출 중 하나라는 것. 또 우리는 연체율의 추이에 주목해야 한다. 정부와 중앙은행의 지원으로 코로나의 타격을 가장 많이 받은 중소법인과 신용대출의 연체 추이가 지난 1년간 크게 하락했다 최근 다시 상승하고 있는데, 이는 정부가 각종 지원책들을 종료시키거나 거두어들이면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정책의 영향은 경제주체와 부문에 따라 상당히 다르게 나타난다.* 일부 대중들은 금리를 올리면 부동산의 상승세가 잡히고, 따라서 빈부격차가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지나치게 이른 출구전략은 그들의 믿음과 다른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 코로나로 괴로워하는 몇몇 중소기업들이 어려움에 빠질 것이고 사회적 거리두기로 매출이 사라진 개인사업자들이 청산될 것이며 아직 온전히 회복되지 못한 산업의 기업들도 투자를 줄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고용을 줄일 것이니 구직시장에서 소외된 청년들의 취직이 회복하는 일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주택시장이 잠시 주춤하는 동안 취약계층과 업종의 소득이 크게 타격을 받을 가능성이 매우 크고 이는 결국 빈부격차를 개선하고 서민들의 주택 구입을 용이하게 하기는커녕 반대로 악화시킬 것이다. 

흥미롭게도 내 주변 금융권 중 이른 금리 정상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주로 나이 든 자산가들이다. 한국 가계가 소유한 금융자산은 금융부채의 2.2배인데 그 상당액을 중/장년층, 그리고 노년층 자산가들이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기준금리를 올리면 자산가들의 소득은 빠르게 증가한다. 반면 가장 가난한 1분위 계층이나 젊은 층, 특히 학생들은 금융자산보다 부채가 더 많아 금리 상승은 그들의 소득을 갉아먹는다. 2020년 자료를 보면 순자산 기준으로 가장 가난한 1분위의 대출은 작년 한 해 동안 무려 21.6%가 늘어났으며 그들의 자산 대비 부채비율은 무려 81%에 달한다. 그리고 그들의 소득은 각종 보조금에도 불구하고 17.1%가 감소했다. 같은 기간 5분위의 대출은 고작 2.2%가 늘었고 부자들의 부채비율은 14.5%밖에 되지 않는다. 경제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금리 인상이 누구에게 이롭고 누구에게 타격을 줄지 너무나 명확하지 않은가.

금리를 결정하는 이들의 자산 내역을 보면 그들의 편향을 이해할 수 있다. 금통위원 중 가장 재산이 많은 임지원 위원은 약 71억의 예금을 보유하고 있고 총재 역시 16억 원을 예금에 넣어두고 있다. 조윤제와 서영경 위원도 각각 22억 원의 예금을 보유 중이고 고승범 의원도 18억이 넘는 예금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예금액은 모두 합해 반올림하면 200억이다. 이들이야말로 벼락거지란 말에 가장 속이 쓰릴 사람들이다. 불과 몇년 전에는 강남 신축을 몇 채나 살 수 있던 돈이 이젠 전셋값도 간당간당하게 되었으니 누구라도 그들만큼 예금이 많다면 경제상황을 무시하고 금리를 올리고 싶지 않을까? 금통위원들이 가장 견실한 주택담보대출의 위험성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배경엔 이러한 편향이 있다. 하지만 통화정책은 아리팍과 샤넬, 그리고 포르쉐를 소비하는 현금부자들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평균적 경제 상황을 고려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과연 코로나로 타격받은 산업과 계층이 금리 인상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건실한가. 그것도 가장 높은 단계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새롭게 실시하는 이 시점에서.

당신이 경제가 매우 견고하다고 느낀다면 코로나의 타격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금리 인상을 부르짖는 그대들은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나 역시 축복받은 그런 운 좋은 사람 중 하나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겠다. 하지만 모두가 우리처럼 축복받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벼락거지의 기분을 느끼기 싫어 때이른 그리고 과도한 금리 인상을 단행하는 것은 서민들을 진짜 거지로 만들 것이다. 각각이 느끼는 금리의 온도는 무척이나 다를테니까. 부디 나의 이 모든 걱정이 기우로 끝나기를 바란다. 

출처: KOSIS



*사실 통화정책의 영향은 동일하지만 각 경제주체들이 현재 너무나 다른 위치에 있어 파급력이 다르게 보일 뿐이다, 똑같이 초콜렛을 먹어도 당뇨환자와 일반인에게 미치는 영향이 다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