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7.6 업데이트)
2023. 7. 6.
아직 쓰이지 않은 글
(2023.7.6 업데이트)
2021. 10. 2.
shape of my heart
He deals the cards as a meditation
And those he plays never suspect
He doesn't play for the money he wins
He don't play for respect
He deals the cards to find the answer
The sacred geometry of chance
The hidden law of a probable outcome
The numbers lead a dance
내가 본 최고의 연기 중 하나는 레옹에서의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였다.
아버지에 두들겨 맞으면서도 반항적인 눈빛을 놓지 않았던 그 작은 아이가
오로지 살아남기위해 가족들의 주검을 아무렇지도 않은척 지나던 그 작은 아이가
끝끝내 무너져 레옹의 문 앞에서 절규하듯이 매달리며 초인종을 누르던 그 순간
환하게 쏟아지는 빛과 함께 문이 열렸다, 그 작은 아이에게.
그렇게 마틸다는 레옹에게 마리아가 되었다.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2021. 9. 22.
삶에는 퇴고가 없다
연휴를 맞이하여 예전 글들을 쭉 읽어내려오고 나니 얼마나 부끄러운지. 오타와 비문에 매끄럽지 않은 문장들이 꼭 내가 살아온 발자취와도 같더라. 그래서 하나하나 고쳐내려가다 에이 하고 관두고 말았다. 내가 온전하지 못한 삶을 살아온 것처럼 내 글이 온전하지 못한게 당연할 터이니.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2007년의 가을, 셔틀마저 끊긴 그 늦은 밤 학관 뒤 벤치에 앉아 미래를 고민하던 내가 있었다. 나는 작은 실수를 하나 저질렀고 그 실수로 인해 작가의 꿈을 버리고 돈이나 벌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아둔한 나는 실수에 실수를 거듭했고 어찌저찌 하여 트레이더가 되고 말았노라. 하지만 사실 나는 글을 쓰는 이가 되고 싶었다. 다시 돌아가면 나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과연 지난 십년간 내가 번 돈이 그동안 내가 쓰지 않은 글보다 값지다고 할 수 있을까.
2007년으로부터 7+7년 뒤
늦은 가을 밤, 아라리오 미술관 앞 벤치에 앉아.
2021. 8. 4.
빨간구두
소녀는 엄숙하고 경건한 정소에도 굳이 그 빨간 구두를 신고 가지.
그 구두를 신으면 두 발이 저절로 춤을 추게 되고
영원히 춤을 멈출 수도 구두를 다시 벗을 수도 없게 돼
그런데도 소녀는 빨간 구두를 절대 포기하지 않아
결국 사형집행인이 나서서 소녀의 발목을 잘라냈지만
잘려나간 두 발은 빨간 구두를 신은 채 계속해서 춤을 췄어
억지로 갈라놔도 절대 떨어질 수 없는 게 있어.
집착은 그래서 숭고하고 아름다운 거야.
나,
이제야 내 빨간 구두를 찾았어.
사이코지만 괜찮아 中
paint by Egon Schiele
2021. 7. 24.
에드바르트 뭉크와 뱀파이어
모든 예술가에게 저마다의 뮤즈가 있다면 에드바르트 뭉크의 뮤즈는 바로 죽음일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뭉크가 5세가 되던 해에 죽었고 몇 년 뒤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워주던 큰누나마저 세상을 떠났다. 이어지는 비극을 견디지 못한 그의 여동생은 정신병에 걸렸으며 아버지는 가족이 파괴되는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광적으로 종교에 집착했다. 노르웨이의, 아니 근대 유럽의 최고의 화가 중 하나인 에드바르트 뭉크의 음울함은 죽음으로부터 탄생했다.
때때로 사랑은 트라우마를 치유하기도 하지만 뭉크의 운명은 불행히도 정반대였다. 그의 첫사랑은 자유분방한 사교계 인사로 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연애를 지향하던 보헤미안이었으며 동시에 치명적인 팜프파탈이었다. 자신을 사랑했던 남자들이 흘린 피 내음을 마치 향수처럼 온몸에 두른 그녀가 고작 스무 살짜리 풋내 나는 그림쟁이에게 만족할 리 없지 않은가. 6년여의 연애 기간 동안 뭉크는 그녀만을 바라보고 헌신했지만 그녀는 뭉크의 사랑에 오롯이 거짓으로 응답한다. 보헤미안 부인의 주위엔 늘 욕정에 불타는 남자들이 맴돌았고 그 가운데 뭉크의 순수한 사랑은 그녀에게 가벼운 키스나 갓 구운 마들렌만도 못한, 그저 작은 오락에 불과할 뿐이었다. 철저하게 농락당한 뭉크는 마침내 그녀를 떠나면서 일기에 그녀가 자신의 생의 향기를 영영 앗아갔다고 기록했으니 그에게 실연이란 마치 죽음이나 다름없었나 보다. 마치 어린 시절 어머니와 누이를 떠나보내던 것처럼.
그의 두 번째 사랑도 깊은 상처를 남긴다. 그는 다그니 유엘과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지만 자유연애주의자였던 그녀는 베를린에서 만난 뭉크의 동료이자 건축가인 스타니스와프 프시비셰프스키를 선택한다. 그야말로 잘못된 만남의 조연이 된 뭉크는 연인이 마음을 고쳐먹고 돌아오기를 기다렸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이 러브 스토리의 비극적 조연에 불과했다. 유엘과 프시비세프스키는 얼마 뒤 결혼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그녀를 놓지 못했던 뭉크의 영혼과 작품세계는 더욱 침전한다. 심연의 어둠으로. 첫사랑의 비극이 방종이었고 두 번째 사랑이 배신이었다면 세 번째 사랑의 비극은 집착이었다. 새 연인인 튤라 라르손은 그에게 깊이 집착하고 결혼을 강요했으며 대답을 회피하는 뭉크에게 자살하겠다며 협박한다. 한 손에 권총을 쥐고 죽겠노라며 울부짖는 연인을 말리다 실수로 총이 격발되고 말았다. 그녀의 가냘픈 손을 떠난 탄환은 화가인 뭉크의 왼손을 관통했고, 화약 내음, 폭발, 그리고 비명소리에 뒤이어 그의 손가락 하나가 허공으로 날아갔다.
이후 그는 평생토록 독신으로 살았다. 그가 사랑한 모든 여자들은 일찍 죽거나 그를 배신하거나 상처 입혔으며 그에게 애정과 사랑이란 이윽고 밀어닥칠 처절한 비극의 서막에 불과했다.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뭉크는 술에 더욱 의존했고 폭음을 거듭했으며 불안 증세가 더욱 악화되어 환각에 시달리게 된다. 그의 대표작 절규는 핏빛으로 물든 하늘이 질러낸, 그 찢어질듯한 비명소리에 공황에 빠져 귀를 틀어막은 자신의 모습을 그려낸 것인데 아마도 이는 비유나 은유가 아닌 뭉크가 실제로 겪은 환각이었을 것이다.
그런 뭉크가 처음으로 겪은 실연의 고통을 캔버스에 담아낸 것이 바로 맨 처음 소개한 이 작품이다. 한 여자가 엎어져있는 남자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다. 남자가 무슨 악몽이라도 꾼 것일까, 여자는 남자를 다독이고 있고 또 그들 위로 선명하게 붉은 머리카락들이 흐르고 있다. 힘없이 늘어진 그들의 머리와는 달리 그녀의 오른팔은, 그리고 그의 왼팔은 서로를 간절히 붙들고 있다. 사방에서 밀려오는 음울한 어둠을 밀쳐낼 힘도 의지도 완전히 잃은 두 연인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서로에게 절절하게 매달리는 것뿐인 양. 이 그림의 제목이 무엇일까? 사랑하는 연인들? 절망 속에서의 사랑?
작가는 이 그림에 뱀파이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러고 보니 남자의 뺨이 다소 창백해 보이지 않은가.
* * *
나를 처음으로 미술로 이끈 것이 바로 이 그림이다. 세상에는 서로가 서로를 부수는 사이가 있다. 하지만 대개 당사자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과거 스무 살을 갓 넘긴 나 역시 그런 파괴적인 관계의 한 가운데에서 허우적대고 있었고 철부지였던 나는 그 수렁에서 어떻게 헤어 나올지 알지 못했다. 아니, 사실 빠져나올 의지조차 없었다. 그녀가 나에게 뱀파이어였던 것처럼 나 역시 그녀의 목에 이를 박아넣고 있었으니까. 그러다 우연히 이 그림을 마주쳤고, 그 앞에 우두커니 서서 제목과 이미지를 번갈아 보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마치 지도도 나침반도 없이 황무지에서 헤매다 앞서 이곳을 지난 누군가의 흔적을 찾아낸 앳된 이방인처럼. 당시 길을 잃은 이가 나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던가. 그리고 그 작은 흔적들을 따라 다시금 걷고 또 넘어지고 또다시 절뚝이며 헤매고, 뭐 그렇게 어찌어찌하다 오늘날 여기까지 왔노라. 그러니 내일도 모레도 또 다른 이들의 자취를 따라 어찌어찌 살아가겠지. 당신들도 나도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도.
Kiss(1897) by Edvard Munch |
2021. 4. 10.
0.7%의 확률
나는 트레이더다. 세상에 고작 0.7%의 확률에 베팅하는 바보 같은 트레이더는 없다. 사실상 그건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니까. 그러나 비참하게도 지난 몇 주간 나는 그 멍청한 확률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매달리고 무릎 꿇고 애원해야 했다. 0.7%이라니. 이 얼마나 하찮은 숫자인가.
절대적인 절망 앞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희망에 더더욱 매달리게 된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하게. 청천벽력이라는 말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던 그 소식을 처음 전해 들은 금요일 오후, 나도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 그 희망들을 잔인하게 잘라냈다. 날개가 있는 것은 추락하기 마련이니 희망을 품은 우리들은 결과를 받아본 순간 더욱 절망할 것이다. 그들이 의지할 사람은 나뿐이니 적어도 나만큼은 그 순간 더 절망해선 안되었다. 기업이 재무제표에서 잔존가치가 얼마 남지 않은 악성부채를 상각하듯이 나 역시 0.7%의 희망을 철저히 지워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돈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막상 겪어보니 어마어마한 의미가 있더라. 예상하지 않았던, 상상조차 해보지 않은 완전하고 절대적인 절망 앞에서 비극을 약간이라도 막을 방법은 돈에 의지하는 것 외엔 없었다. 얼마 전 의사가 내게 심부전증이 의심된다고 했는데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그날 내 심장이 그랬던 것 아닐까. 제멋대로 날뛰는 심박을 애써 무시하고 최악의 경우를 모면할 비용을 계산했다. 반쯤 마비된 머리로 어떻게 그 숫자를 도출했는지 모르겠다. 애초에 그 계산이 맞는지도 모르겠지만.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많은 것들이 몰락했다. 미국채는 폭락에 폭락을 거듭했고 빌황의 펀드는 하루아침에 파산했으며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여당의 지지도는 보궐선거에서 25개 구 모두에서 패배하리만큼 떨어졌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 무엇도 나보다 더 빨리 침몰하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0.7%란 확률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신에게 애원하는 것과 동시에 희망을 버리기를 반복하는것, 또 반복해서 숨을 쉬고 밥을 먹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신이 내 기도를 들었는지 한낱 인간인 나로서는 알 길이 없고, 버렸다고 생각한 희망은 문득문득 고개를 쳐들어 나를 더욱 괴롭혔으며 밥은 먹는 족족 체했고 별일 없이도 숨을 헐떡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이 글을 쓸 수 있기를 얼마나 간절히 간절히 바랬던가. 암울하게 글을 시작했지만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을 정도로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0.7%의 확률이 나를, 그리고 우리를 구원했다. 사실 담당자가 몇몇 특이사항을 간과하는 바람에 그 확률을 잘못 전한 것이라고 했다. 화가 나기는커녕 울음이 터져 나오도록 기뻤다. 지난 몇 주간 나는 삶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가장 혹독한 방법으로 깨닫고 있었으니 지금 그 고통에서 해방된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었다. 처음 전화를 받던 날이나 마지막 날이나 여전히 시장에서는 여러 가격들이 어지러이 점멸하고 있었고, 창밖에선 봄이랍시고 벚꽃이 피고 지고 있었으며 누군가는 가장 끔찍한 지옥에서 엉금엉금 기어돌아왔다.
이렇게 나는 일상으로 복귀했다. 삶에서 최악의 비극은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이고 언젠가는 반드시 (또) 겪을 것이며 궁극엔 나도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삶은 미쳐 생각지도 못한, 참으로 창의적인 방법으로 우리에게 비극을 선사하곤 한다. 그저 주식이 좀 빠지고 오른다고 기분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앞차가 끼어든다고 빵빵대며 부잣집 친구 놈이 전화해서 자기자랑을 늘어놓는 것을 듣는 이 삶은 얼마나 평온한가. 내 일상이 또다시 부서지기 전 남은 시간 동안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쓰고, 보고, 느끼고, 웃고, 만나고, 나누고, 사랑하겠다고 다짐한다.
2020. 9. 6.
글을 퍼가실 때 출처를 명시해 주세요.
오딘의 양 어깨에 앉은 까마귀 Huginn과 Muninn |
2019. 9. 15.
언어를 보호하는 단 하나의 방법은 그것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모든 작가는 자신만의 언어를 창조해야 합니다. 정확함과 완벽한 문체가 분명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모든 착오를 겪은 후에야 독창성의 이면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지 독창성과 같은 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독창성의 면에는 정확성-'어슴푸레한 달', '미소짓는 착한 마음', '모든 연도 중에서도 가장 불행했던 해' 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언어를 보호하는 단 하나의 방법은 그것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한때는 작가를 꿈꾸었던 내가 금융계에 발을 디딛으며 가장 힘들었던 것은 가장 흔하고 평범한 언어로 글을 써야한다는 것이었다. 푸르스트의 조언대로 나는 언어를 공격하고 공격하고 또 물어 뜯어가며 독창적인 색채를 갖추기 위해 갖은 애를 써왔지만 나만의 언어세계를 구축하는데에 실패했고 몇번의 도전이 실패로 돌아간 뒤에야 나는 작가의 꿈을 접었다.
그렇게 독창성이 없던 글을 쓰던 내가 회사에서 가장 먼저 들었던 말이 글이 너무 독특하다는 것이었으니 어떻게 내가 돌지 않았겠나. 그리고 그렇게 십여 년동안 그저 그런 글을, 숫자와 전문용어가 뒤범벅된 딱딱하고 영혼이 결여된 글을 써오고 나니 이젠 언어를 공격하는 법 마저 잊어버린듯 하다.
하지만 난 아직도 작가의 꿈을 버리지 않았노라 ㅋ
2019. 9. 9.
miscellaneous ideas for my own
- 재무제표를 분석하다 보면 대개 밑바닥에 miscellaneous라고 표기된 항목들을 발견하게 된다. 회사의 경영상태를 파악하는 데 있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너무나도 작고 사소하고 보잘것 없는 그런저런 활동들. 그런 하찮은 것들에 회계사, 재무담당자들 그리고 투자자들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모두 뭉뚱그려 miscellaneous profits/expenses라고 표기한다.
- 하지만 신중한 투자자라면 이 항목들을 뜯어볼 필요가 있다. 이따금씩 회사가 숨기고 싶어 하는 행위들의 단서가 그 속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불법이든 편법이든 그 무엇이든. 그리하여 때로는 매출액이나 EBITA가 아닌 바로 이 항목에서 그 회사의 진짜 본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 어쩌면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나는 하루의 대부분을 분석하고 투자하고 투기하며 그로 인한 결과에 웃고 울지만 그것들이 내 본질을 대변하지는 않는다. 우리 모두는 하루종일 돈을 벌기 위해 가면을 쓰고 사회적으로 쓸모있는 사람을 연기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는 그것이 자신의 본 모습이 아니라는 그 날카로운 간극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단지 돈, 혹은 권력, 혹은 명예를 좆느라 그 마찰음을 외면할 뿐.
- 그래서 나는 아무도 모를 이 곳에 진짜 내 생각들을 남기기로 했다. 회사에서는 물론이고 내 실명을 달고서는 아무데서도 할수도 없는-사실 별 쓸모도 없는 그저 그런 잡다한 이야기들. 하지만 나에게는 경제와 시장을 예측하는 것 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도 이 별볼일 없는 생각들이 더 소중하다. 그리고 그것들을 글로 기록하는 것은 대개 오로지 나 하나만을 위한, 철저히 이기적인 행위라는 것을 이해해주길 바란다.
2019. 9. 8.
희망의 가격
물론 적정가치의 10배 100배에 팔리는 주식들도 있다. 하지만 그런 주식들은 애초에 내재가치를 계산하기 어렵지 않은가. 게다가 잡주는 일시적으로 폭등하기도 하지만 결코 과대평가 수준에 장기간 머물수 없다. 하지만 로또의 기대값은 수학적으로 명확하게 확정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적정 가격의 세배라는 가격에 팔리고 있다. 이보다 더 안정적으로 더 비싼 상품을 본 적이 있는가?
그래서 나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바보들만이 로또를 산다고 생각했다. 아니고서야 누가 이렇게 비싼 프리미엄을 내고 이걸 사나. 아무리 얼빠진 동네 바보라도 "돈놓고 돈먹기, 천원 내고 삼백원 먹기"라고 외치는 야바위꾼의 테이블에 앉지는 않는다. 하지만 놀랍게도 지난 10여년간 나는 이 업계의 수백억대의 자산가들이나 명문대 박사학위를 사진 영재들이 로또를 사는 것을 보았다. 나보다 더 돈이 많은 사람도, 나보다 더 똑똑한 사람도 로또를 산다. 내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 모두는 희망을 필요로 하고 부자들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으스대며 수억의 연봉을 받는 사람들도 미래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며 늘 부족함을 느낀다. 사람은 원래 만족을 모르게 설계되어 있으니까. 게다가 수입이 큰 만큼 지출도 크기에 가족들을 위해 이런 저런 비용을 모두 빼고 남는 돈도 미래를 위해 저축하고 나면 오늘의 나를 위한 돈은 몇 푼 안남게 된다. 당신의 연봉이 5천이든, 5억이든, 50억이든, 다 그렇게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정정, 연봉 50억은 솔직히 장담 못하겠다.) 해가 진 뒤 우리 직장인들의 삶은 다 비슷하다. 연봉 5천의 김과장은 3호선을 타고 연신내로 돌아갈 터이고, 연봉 5억의 대니 킴은 포르쉐를 몰며 타워펠리스로 향하겠지만 집에 도착한 그들은 똑같이 윗집 남편, 아내 친구 남편, 딸내미 반장 아버지와 자신을 비교당하고, 비교하며 좌절한다. 서른살이 넘으면 삶의 테두리가 어느정도 선명해지고 자신의 미래도 적당히 그려지지 않는가. 그 추세에서 벗어나려면 한 번의 모험을 해야 하지만 그건 너무 위험하다. 무섭다. 따라서 작은 비용으로 삶을 바꿔줄 희망을 찾게 된다. 그 마음 만큼은 부자도 똑같지 않을까.
게다가 로또는 그런 희망을 독점한 유일한 상품이다. 천원의 소비로 인생이 바뀌진 않는다. 심지어 개폭등할 알트코인을 찾았다고 해도, 고작 천원어치를 사면 당신의 미래엔 아무 변화도 없을 것이다. 뭐 친구들에게 술 한번 사고 정말 운좋으면 좋은 시계도 하나 살수 있겠지. 천원으로는 이젠 컵라면이나 김밥한줄도 사먹기 어려운 시대이지만 그 돈으로 로또를 한장 사면 수십억 어치 상금을 받을 꿈에 부풀어 한주를 지낼 수 있는데 누가 마다하겠나. 국가는 이런 극단적 페이아웃 구조를 지닌 상품들을 사행성이라는 명목으로 금지하면서도 뒤돌아서 열심히 복권을 판다. 하기사 담배도 인삼도 그리고 카지노도 마찬가지지. 로또는 그렇게 희망을 독점하고 있다.
공급이 제한적인 독점시장의 가격은 늘 균형점을 넘어 프리미엄이 붙는다. 이렇게 부자와 빈자를 가리지 않고 3배의 프리미엄이 붙어도 불티나게 팔리는 로또는 우리 모두가 더 나은 내일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난히 고단했던 하루가 지나고 나면 불꺼진 업무지구 내 조그만한 한 편의점에 직장인들이 삼삼오오 모여든다. 대형 금융사의 등기이사도 청소부도 계산대 앞에 나란히 서서 서로 어색한 눈인사를 나눈 뒤 들뜬 마음으로 여섯개의 숫자를 세심하게 고른다. 누구는 사랑하는 이의 생일을 찍을 것이고, 누구는 자신만의 행운의 숫자를 떠올릴 것이다. 아마 그 숫자들 만큼이나 당첨금을 어떻게 쓸지 그 꿈도 다양하겠지. 그렇게 제냐 수트와 아식스 츄리닝이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들뜬 마음으로 각자의 꿈을 한장씩 들고 있는 것을 보면, 어쩌면 그 순간 만큼은 모두가 평등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희망의 값어치는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소중한 법이니까. 부자에게도, 또 빈자에게도.
*1/45C6=8,145,060
2018. 12. 16.
2016. 5. 16.
흐드러지다
2016. 4. 4.
멍청한 경제 기사의 좋은 예
'한국판 QE' 공방…"野 관치금융 vs 與 나쁜 데 가만 있냐" 링크
위 글은 연합뉴스의 이성규 기자가 4월 4일자로 작성한 기사이다. 고교 교과과정을 공부한 정상적인 학생이라면 절대로 쓰지 않을 내용을 이 기자는 무지에 대한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게 써놨다. 그 내용을 하나하나 분석해 보자.
1. 한국판 QE는 관치금융이다: 야당의 주장이야 정치적 레토릭이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경제를 담당하는 기자가 관치금융의 뜻도 몰라서는 안된다. 관치금융은 금융기관의 영업을 시장질서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규제등을 통해 정부가 멋대로 조절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형이든 미국형이든 일본형이든 QE는 기본적으로 장기금리, 혹은 리스크 프리미엄을 끌어내려 투자를 활성화하는 것이 목표이다. 즉 창구지도 등을 통해 가계부채를 억누르는 것이 관치금융이지, QE는 관치금융과 상관없다. 만약 금융당국의 금리개입도 관치금융의 영역에 들어간다면 공개시장 조작이나 한국은행의 금리결정도 관치금융의 영역에 속한다.
2. 일본 QE는 실패했다: 일본의 양적완화가 실패한 것은 신용을 늘리는 것에 실패해서 그런 것이지 QE라는 아이디어 자체가 잘못된게 아니다. 즉 은행들에게 돈을 공급하는데엔 성공했으나 가계와 기업들에게 돈을 공급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같은 일은 유로존에서도 발생하고 있다. 만약 QE라는 것이 실패했다면 가장 먼저 QE를 도입한 미국이, 신용위험의 진원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에서 가장 먼저 불황에서 빠져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3. 아베노믹스는 환율에만 의존했지, 인플레이션 퇴치에는 실패했다: 이 부분이 이 기사의 백미이다. 어떻게 이런 멍청한 소리를 부끄럼 없이 꺼낼수 있을까. 일본처럼 자유롭게 열린경제에서는 환율과 인플레이션이 같이 가기 마련이다. 게다가 앞서 여러 글에서 말했듯이 아베노믹스의 핵심은 환율이 아니다. 리플레이션이다. 이러한 기본사안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가 경제 기사를 쓰고 있다.
여담으로 예전 최경환 전 장관의 인사청문회에서도 느낀 바이지만, 생각과는 달리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경제에 대한 이해도가 상당히 높다. 강봉균 선거대책위원장이 내놓은 한국형 QE 역시 생각해 볼 부분이 많다. 미국과는 달리, 유럽과 일본에서 양적완화가 생각보다 효과를 내지 못하는 이유는 규제와 금융위기, 혹은 디플레에 대한 트라우마가 남아있는 상황에서 은행권에 돈을 공급한다고 해도 이것이 실물경제로 잘 가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그렇다고 QE가 효과 없다는 주장은 멍청한 소리다. 은행권에도 돈을 풀지 않으면 실물경제는 더더욱 유동성 압박에 시달리게 된다. 밥을 먹었는데도 살이 찌지 않으면 회충약을 먹거나 밥의 영양소가 부실한게 아닌지 검토해봐야지, 밥을 먹는게 소용이 없다고 주장해선 안된다.) 강봉균의 주장은 실물경제로 돈을 투입하는 역할을 민간은행에게만 맡길 것이 아니라, 정부정책을 통해 직접 투입하자는 소리다. 금리를 150비피나 인하할 수 있는 상황에서 굳이 QE를 생각해야 하는지, 통화정책의 대상은 불특정 다수여야 하는데, 그게 주택담보대출로 한정되면 부작용은 없는지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는 있지만 적어도 유럽/일본이 처한 문제-실물경제로 돈이 잘 흘러들지 않는다는 점(QE에도 불고하고 M2증가율은 낮음)에 대해서는 탁월한 처방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멍청한 기자들과 병신같은 블로거들은 정치인들을 욕하고 있다. 내가 확신하는 것은, 국회의원들이 기자와 블로거들보단 공부를 많이 한다는 점이다. 역시 민주주의는 위대하다.
2016. 1. 4.
Molecular Sciences Between Human Relationship
대부분의 경우 원자는 홀로 존재하는 것 보다 다른 원자와 결합을 형성하여 존재할 때 훨씬 더 안정적이다. 따라서 두 원자가 만나게 되면 에너지를 안정적으로 만들기 위해 서로를 당겨 점점 더 가까워 지지만, 반대로 원자간의 거리 r이 지나치게 가까워지게 되면 급격하게 반발력이 발생해 상대를 밀어내게 된다. 따라서 이 당기는 힘과 밀어내는 힘이 평형을 이루는 점을 계산하여 서로의 상태가 가장 안정적인 원자 사이의 "적절한 거리" r을 구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홀로 놓여지면 고독과 불안의 상태에 휩쓸린다. 따라서 그는 누군가를 향해 사람과 사람간의 거리를 좁히려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된다. 그러나 그 거리가 지나치게 좁아지면 어떤 관계든 반드시 강한 반발력을 만들어 낸다. 따라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적절한 거리가 존재하며, 홀로 존재하는 한 어떤 이는 누군가를 위하여 그 간격을 찾아 헤메는 기나긴 시간들과 외로운 밤을 지새우게 된다. (2008. 5.22)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이와 같은 경험들이 반복되면 내가 다른 이들과 잘 지낼 수 있는 보편적인 거리 r을 체득하게 된다.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그 거리를 거듭된 실패와 상처들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
그 슬픈 거리를 내가 잊지 않기를.
2016. 1. 2.
2015. 11. 26.
인간의 마음, 그리고 너의 마음.
모든 사람은 어떤 누군가를 원하기 때문에 그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들을 평생토록 반복한다. 내가 볼 수 없는 다른 이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은 낚시를 하는 일과 같다. 마치 가느다란 낚시대 끝에, 더 가느라단 낚시줄 하나를 드리우고 저 수면 아래 깊은 곳의 물고기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리는 것 같이. 그녀의 마음이 나의 바늘 근처에 있는지, 아니면 무심하게 지나치고 있는지, 혹은 그에 입맞추기 위해 기다리는 중인지 수면 위 만을 쳐다 보는 나는 전혀 알 수가 없다. 그저 낚시줄과 수면이 닿아있는 그 작은 점을 하염없이 응시하며 나의 마음속에 그녀의 마음을 그려볼 뿐.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리고 그로 인해 내가 고통 받는다고 해도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내가 그들을 만나기도 전 부터 그들의 호불호는 정해져 있었으며 나는 단지 그들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아니었을 뿐이다. 그것이 그들의 잘못일 수는 없다. 요는 내가 왜 그들에게 맞는 사람이 아닌가의 문제일 뿐이며, 또 나는 왜 가질 수 없는 것을 욕망하는가의 문제일 뿐이다. 그 댓가가 매우 혹독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2015. 11. 23.
2015. 10. 13.
2015. 8. 17.
프리다와 디에고.
깊고 지독한 사랑은 한 사람의 영혼을 갈가리 찢어놓기도 한다. 그리고 때때로 예술은 그와 같은 고통 속에서 만개한다.
2015. 5. 24.
리하르트 게르스틀의 웃는 자화상
화가의 인생을 알지 못하면 그가 그린 그림들의 의미를 모두 파악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화가들의 인생 이야기에 열광하는지도 모른다. 게르스틀의 자화상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얼핏 보면 광기어린 모습 같고, 때론 아하하하 웃는 바보 같기도 하며 어쩌면 웃는 모습이 아닌 우는 모습 같아 보이는 이 자화상에는 그보다 더 깊은 감정이 담겨 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는 타고난 미술적 재능으로 베엔나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했지만 여느 천재들이 그러하였듯이 자만에 가득해 교수들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홀로 그림을 그렸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지독하게도 싫어했던 그였지만 음악가들과는 즐겨 다니곤 했다. 그리고 그는 존경하던 현대음악의 거장, 아놀트 쇤베르크를 만나게 되었다. 쇤베르크의 가족들과 종종 어울리던 게르스틀은 이내 쇤베르크의 아내 마틸다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는 마틸다에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신경질적이고 괴팍한 작곡가 남편에게 지친 마틸다는 결국 남편과 두 아이를 버리고 열정에 불타는 25살의 젋은 게르스틀을 선택한다.
그러나 쇤베르크는 결코 마틸다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아내에게 외도를 그만 두고 자신과 두 아이에게 돌아와달라고 간절히 애원하기도 했고 때론 자살하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결국 마틸드는 두 달만에 젊은 애인을 버리고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고 만다.
존경하던 자신의 스승과, 그 스승을 버릴 정도로 사랑한 여인, 둘 모두를 잃은 게르스틀은 처절한 상실의 고통에 짓눌렸다. 결국 삶에 대한 열정과 목적을 잃은 그 갸날픈 영혼은 죽기로 결심한다. 게르스틀은 마지막으로 자화상을 한점 남긴 뒤 자신의 다른 작품들을 불태우고 목을 매달았으며, 확실히 죽기 위해 자신을 칼로 찔렀다.
고통으로 가득찬 생애의 끝자락에서 그려진 초상화 속의 게르스틀은 초점 잃은 눈으로 웃고 있었다. '이젠 다 끝이야'라고 중얼거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