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9. 6.

글을 퍼가실 때 출처를 명시해 주세요.

이 블로그에는 가급적 개인적인 이야기를 올리지 않으려 했지만 이번만큼은 한번 해보려고 합니다. 아주 어릴때부터 저는 읽고 쓰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심지어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을 때엔 걷는 순간에도 무엇을 읽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만큼 문자에 대한 강박이 심해 어린시절 상담을 받았던 적도 있습니다. 책을 읽으며 길을 건너다 몇번 차에 치일뻔 했거든요. 또 열살 때 처음으로 부모님께 대들어 싸웠던 기억이 납니다. 시험에서 5개 이하로 틀리면 무슨무슨 전집을 사주시기로 했는데 하필 제가 딱 5개를 틀렸더라고요. 어차피 한번 읽고 버릴 책을 뭐하러 사느냐며 다그치는 부모님께 저는 서재의 국어사전을 가져와 5개 이하라는 말엔 5개도 해당된다고 박박 우겨 그 전집을 받아냈습니다. 그래도 두번은 읽었던 것 같네요. 다른 집 아이들은 책을 안 읽는다고 혼나는데 왜 나는 책을 읽는다고 혼을 내느냐, 뭐 그런 거로 부모님과 다투곤 했습니다. 아마 제가 좀 다른 환경에 있었거나 그 시절에도 유튜브같은게 있었더라면 좀 다른 강박증이 생겼겠지만 여하튼 제 삶은 그랬습니다. 이쯤이면 이게 취미인지 병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쨋든 제 환경이 좀 안정되고 친구들이 늘어나며 사춘기가 되자 글자에 대한 강박도 좀 덜해지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며 동시에 글을 쓰는 것에 취미가 붙더군요. 중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를 지나며 제 진로나 전공과는 무관하게 글을 쓰는 것이 제 가장 큰 무기이자 기쁨이었습니다. 물론 학교 밖에서 글로 상을 타 본 적도 없고 졸업 후에도 글로 밥벌이를 하지 못했을 만큼 졸필이고 어디 내놓기엔 너무나 부끄럽지만 저는 아직까지도 그 시절의 제 글을 사랑합니다. 누군가에겐 젊은 날의 빛바랜 사진 하나가 소중한 것 처럼 제겐 그 시절의 글이 가장 소중한 기억입니다.

지금 저는 직업상, 그리고 여러 다른 이유로 제 이름으로 글을 낼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차피 다 제가 선택한 것이니 거기에 미련을 가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글은 제게 소중한, 자식같은 존재입니다. 이제 저는 자본주의에 한껏 찌들어 "내 전재산을 다 줘도 내 글들과는 바꿀 수 없다"고 말하지도 못하고, 마치 어미가 아이를 낳듯 고통으로 써내렸노라고 장담할 열정조차 잃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 글은 다 하나같이 소중한 자식입니다. 아무리 못생긴 아이도 그 어미에게만은 소중한 것처럼요. 그리고 이 블로그는 그렇게 태어난 수만 편의 글 중 일부가 세상의 빛을 보는 공간입니다. 제 가장 가까운 직장 동료들도, 제 친구들도, 심지어 제 가족들도 제가 이런 글을 쓰는건 알지 못합니다.

오딘의 양 어깨에 앉은 까마귀 Huginn과 Muninn

Huginn과 Muninn은 북유럽 신화의 주신인 오딘의 양 어깨에 앉은 까마귀로 각각 생각과 기억을 의미합니다. 이 두 까마귀는 하룻동안 미스가르드를 돌며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오딘에게 보고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세상에 대한 제 생각과 기억을 정리하고자 그 까마귀들의 이름을 본따 블로그 주소를 지엇더니 구글의 AI님께서 제 이름을 HHMM라고 달아주시더군요. 발음하기도 힘들고 무슨 신음소리같은 이 괴상한 필명은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몇번 제 글들이 카톡방과 여러 인터넷 게시판을 떠도는 것을 보았고 심지어 그 중 한두편은 친구들이 저한데도 보내주기도 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거기에 대고 이거 잘썼네, 라며 낯뜨거운 짓도 해봤습니다. 막상 해보니 그런 염치없는 짓이 생각보다 재밌더군요. 그 재미로 조국과 추미애는 사나 봅니다. 원래 제 내면에서 쓰였다 지워지고 잊혀힐, 그렇게 제가 죽으면 같이 순장되었을 글들이 세상의 빛을 보고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는 것은 기쁘고, 감사할 일이지만 자식을 자식이라 하지 못하는 제 처지가 떠올라 허탈해지곤 합니다. 물론 널리 퍼지라고 쓴 글이니 올리신 분들께도 감사하며 또 제 주장과 믿음에 동의해주시는 것도 고마운 일이라 비난할 마음도 없고 또 당연히 법적 대응 따위는 할 생각도 없습니다. 다만 글의 출처를 명기해 주신다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이 한마디를 하고자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사적인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았지만 뭐 제 글이 대부분 그렇지 않나요. 하긴 우리네 인생이 다 그런 법입니다. 나에겐 소중하고 재미있는 것들이 남에겐 별 흥미조차 없는 그런 세상. 네글자로 줄여서 안물안궁. 하지만 또 그런 삭막한 세상이기에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보며 위안을 얻고 공감을 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애초에 이 블로그는 누구에게 보여줄 생각도 없이 혼자 쓰던 곳이기에 앞으로도 독재자처럼 제 맘대로 글을 써내릴 생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웹 상의 오지나 변방과도 같은 이곳까지 찾아와 교감해주시는 것은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에도 그런 행운이 이어지기시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HHMM 드림.

댓글 19개:

  1. 글쓴이 분께서 남들이 무언가를 가졌을떄 자기는 무언가를 포기했었다는 글이 문뜩 떠올랐습니다. 필수소비재인 낭만을 가졌던 유년기와는 다르게 낭만이 사치재가 되어가는 과정은 통과의례가 아닐까 문뜩 떠올려봅니다. 글이 도움이 많이 됩니다. 많이는 아니더라도 오랫동안 글을 써주세요. 언제나 꼭 건강하시고요!!!

    답글삭제
  2. 글 잘 봤습니다~. 자주 써주세요 ㅎ

    답글삭제
  3. 글 너무 재밌게 잘 읽고 있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답글삭제
  4. 글이 담백하네요.
    책읽는다고 혼난다라,, 세종대왕 비켜!!
    자식들 세종대왕처럼 순풍순풍 낳으시길 기다리며,,
    글 많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답글삭제
  5. 항상 감사하게 보고 있습니다 요새 글이 안올라와서 아쉽지만 그것이 더 소중함을 상기 시켜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답글삭제
  6. 흑흑 선생님 ㅠㅠㅠㅠㅠ 출처라도 제발 달고 가져가라 이놈들아

    답글삭제
  7. 닉네임이 무슨의미인지 궁금했었는데 북유럽신화에서 왔을줄은 상상도 못했네요 늘 건강하시고 여지껏처럼 다산(?)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답글삭제
  8. 훌륭한 인사이트를 공유해주셔서 항상 감사 드립니다. 앞으로는 출처 명시가 잘 지켜지면 좋겠네요.

    답글삭제
  9. HHMM님 사랑해요! 항상 행복하고 여유로운 나날만 있으시길!

    답글삭제
  10. 정말 재밌게, 그리고 감사하며 잘 읽고 있습니다. 좋은 글을 읽는다는 것 자체로 행복이 될 수 있는데, 덕분에 종종 행복을 느끼고 갑니다. 부담스러울 수 있겠지만... 앞으로도 독재적이고 좋은 글 많이 부탁드리겠습니다 :)

    답글삭제
  11. 제가 가장 좋아하는 글들을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답글삭제
  12. 작성자가 댓글을 삭제했습니다.

    답글삭제
  13. 감사히 잘 읽어보고 있습니다. 말그대로 "매일" 들어와 보는것은 아니지만, 제 브라우저 Daily 폴더에 살포시 추가되어 있습니다.

    답글삭제
  14. 항상 글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가끔 제 개인 공간에 퍼갈때는 블로그 링크와 출처를 걸어놓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부탁드리겠습니다!

    답글삭제
  15. 항상 너무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답글삭제
  16. 대학교 3학년 학생입니다.

    인생의 선배님에게서 삶의 지혜, 통찰을 얻고자 틈틈이 들어와 글을 읽고 있습니다.

    여기에 감사 인사를 남깁니다. 글을 인터넷에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답글삭제
  17. 항상 양질의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답글삭제
  18. 잘 보고 있습니다.. 인터넷공간에 이런 고수의 글은 오랜만이군요.. 학창시절 고시갤러리의 현자들을 다시 접하는 거 같아 가슴이 끓어오르네요 . 2021년 글부터 역주행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글 부탁드립니다.

    답글삭제
  19. 감사히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답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