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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2. 26.

아시아의 미래 5. 러시아의 진격, 주춤하는 NATO, 그리고 숨죽인 아시아.

한국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나라는 어디일까? 당연히 일본이다(링크).* 그리고 한국인들의 뿌리 깊은 반일감정의 근원이 70여 년 전의 식민 지배에서 왔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이는 없다. 당시 일본이 일으킨 전쟁과 식민통치로 인한 조선인 사망자는 몇이나 될까? 거의 대부분의 조선인 희생자는 태평양전쟁으로 발생했으며 그 숫자는 7만-12만 명이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당시 조선 인구수가 총 2500만 명이었으니 전체 인구의 약 0.4%가 사망한 셈이다. 반면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소전쟁으로 소련은 인구의 10-13%에 달하는 2500만 명이 사망했다. 연일 외신을 수놓는 푸틴의 공격적인 대외전략을 이해하려면 러시아인들의 깊은 트라우마부터 이해해야 한다.

2차세계대전 후 바르샤바 조약기구와 나토의 대립
세계 2차대전이 끝난 후 소련의 전략적 목표는 잠재적 적국인 서유럽과 소련 본토 사이에 최대한 넓은 완충지대를 확보하는 것이었고 독소전 초기의 전개 과정을 생각하면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스탈린은 이를 위해 극동의 전략적 요충지들을 미군에게 양보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최근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스탈린은 북한이 남한을 침공하면 미국이 참전할 것을 예상하면서도 김일성의 군사작전을 승인했는데, 미군이 중국으로 진군하게 되면 넓은 전선을 유지하느라 유럽의 병력을 증강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전후 소련의 공포는 서방에 집중되어 있었다.
https://m.news1.kr/articles/?2714778#_enliple
그러나 소련이 붕괴하자 스탈린의 철의 장막 역시 빠르게 해체되었다. 러시아가 위성국가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동구권 국가들의 내부 문제에 적극 개입하자 이에 시달리던 과거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회원국들은 빠르게 나토에 도움을 청했고 얼씨구나 하며 이들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였다. 폴란드나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와 같이 러시아와의 숙원이 있던 나라들은 물론이고 발트 3국의 약소국과 발칸반도의 다수 국가들도 나토에 합류했거나 가입을 기다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우크라이나까지 나토에 가입하게 되면 러시아는 아무런 완충지대 없이 나토와 곧장 국경을 맞대는 상황을 마주해야 하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러시아의 트라우마를 건드린다.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전개
독소전 개전 직후 독일군은 군대를 세 갈래로 나누어 소련을 침공했지만 동쪽으로 진군할수록 전선은 넓어지는 데다 보급선이 과도하게 길어지는 바람에 모스크바 점령에 실패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게 되면 서방의 군대는 과거 독일군의 공세종말점 바로 뒤에서 전쟁을 시작하는 셈이고 모스크바는 직접적인 위험에 노출된다. 러시아는 단 한 번도 이런 불리한 조건에서 전쟁을 치른 적이 없다. 과거 나폴레옹이나 히틀러가 러시아 침공에 실패했던 결정적인 이유가 광활한 동유럽을 가로지르는 보급선을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는데 현재 나토는 러시아에게 이 자연 장벽을 제거하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이를 받아들일 나라는 없다. 게다가 푸틴의 커리어를 고려하면 그가 지정학적 전략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할 리는 더더욱 없다.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사실상 러시아의 레드라인을 넘은 것이고 푸틴은 이에 적극적인 군사대응으로 응수했다. 2014년 그는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인 크림반도를*** 확보했고 동부 우크라이나의 친러 반군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그리고 바이든이 아프간 철군으로 지지율이 크게 하락하자 푸틴은 더욱 적극적으로 공세에 나서고 있다. 

러시아 내의 문제에 정통한 일부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실제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가능성은 낮다고 한다. 나토에 가입하려면 주변 국가들과 영토분쟁 등의 문제가 없어야 하는데 푸틴의 군사행동은 단지 분쟁을 부각시켜 나토 회원국들로 하여금 우크라이나의 가입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데에 있다고 주장한다. 유럽 국가들은 19세기 초 무분별한 군사조약 때문에 의도치 않게 전 세계가 전쟁에 휘말린 적이 있으며, 따라서 나토를 설계할 때 상호방위조약을 넣는 대신 분쟁국가가 가입하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따라서 나 역시 나토가 우크라이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러시아의 플랜 A라고 생각하지만 세상에 플랜 B 없이 움직이는 군대가 있던가. 게다가 근본적인 문제는 서유럽과 러시아가 투키데스의 함정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한 정치세력이 다른 정치세력을 굴복시키는 데에는 크게 세 가지 방법이 있다. 경제, 외교, 군사. 유라시아 대륙 서쪽 끝의 경제와 외교지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군사균형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소련의 붕괴 후 유럽의 각국은 징병제를 폐지하고 감축에 나서는 등 마치 배당금을 타 먹듯 미국이 선사한 평화를 한껏 만끽했다. 반면 무질서하게 붕괴하는 것처럼 보이던 러시아는 푸틴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 아래 안정을 되찾고 군을 재건하고 있다. 러시아가 계속해서 신무기를 개발하고 과거에 폐기했던 여러 군 프로젝트들을 재가동하는 동안 서유럽의 군사동맹은 지속적인 병력/군비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나토는 회원국들에게 GDP의 2% 이상을 군비에 쓰도록 권고하고 있지만 이를 만족시키는 나라는 미국을 제외하면 8개 국가뿐이다. 게다가 점차 서유럽과 거리를 벌리며 이슬람주의로 회귀하는 터키와 대서양 반대편의 미국을 제외하면 나토가 가진 병력의 절대적 우위는 대폭 줄어든다. 현대전은 머릿수로만 하는 게 아니라며 젠체하던 미군이 아프간에서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하자. 
https://www.nato.int/nato_static_fl2014/assets/pdf/2021/6/pdf/210611-pr-2021-094-en.pdf
이런 상황에서 나토가 동진하는 까닭은 명확하다. 서유럽의 핵심 회원국들은 군비를 확충하고 징병제로 회귀하는 대신 동유럽의 위성국가들을 대거 편입함으로써 자국의 부담을 줄이고, 또 과거 소련의 완충지대를 자신들의 완충지대로 편입하려는 것이다. 즉 쇠퇴하는 군사력을 외교와 지정학적 우위로 상쇄하겠다는 것인데 이는 매우 잘못된 결과를 낳고 있다. 나약한 동기로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는 것이 어떻게 성공하겠는가. 소련의 봉쇄정책을 이끈 조지 케넌은 나토의 팽창정책이야말로 미국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로 이는 러시아를 자극하여 상대가 미국이 가장 원하지 않던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들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2014년 크림반도 사태가 발발하자 거의 대부분의 외신들은 경제력과 첨단 무기의 격차를 언급하며 나토가 행동에 나서면 러시아가 패퇴할 것이고 서방의 경제제제로 경제적 타격을 받아 푸틴이 실각할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서방은 우크라이나가 크리미아반도를 강탈당하는 것을 눈 뜨고 지켜보기만 했고 그들이 자랑하던 경제제제는 푸틴의 권력을 약화시키기는커녕 러시아 대중들의 분노를 자극해 그의 독재를 돕기까지 하였다. 메르켈을 마지막으로 당시 러시아에 대한 강경책을 이끈 나라의 지도자들 중 남아있는 이는 아무도 없으며 정작 러시아의 경제적 위협에 시달리는 것은 천연가스에 의존하는 서유럽 국가들이다. 사용하지 않는 군사력은 의미가 없고 완벽하지 않은 경제제제는 매우 제한적인 효과를 낸다는 것을 북한의 사례를 통해 충분히 알 수 있었지만 서방은 또다시 자신들의 힘을 과대평가했고 또 실패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루지야에서 패배했고 크리미아에서 또 패배했기에 이제 우크리이나에서 다시금 패배할 것이다.

유라시아 대륙의 저 끝에서 발생하는 이 사건은 반드시 아시아의 정세에도 큰 영향을 줄 것이다. 만약 서유럽이 무너져가는 자신들의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푸틴의 제안을 모두 거절하고 지속적으로 확장에 나선다면 모스크바는 플랜 B와 C를 고려하기 시작할 것이며 그 전략에는 반드시 아시아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나토 군사력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미군의 역량을 분산시키기 위해서는 중국과 공동 대응에 나서는 것이 중요하며 이는 양면 전쟁을 사실상 포기한 미군의 방침상 둘 중 하나의 전선에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과 대만 그리고 우크라이나는 모두 신냉전시대의 최전방에 놓여있다. 미국이 셋 중 하나, 혹은 둘만 선택할 수 있을 때 그들의 선택은 어떻게 될까.

과거 역사를 보면 구 패권국과 신흥 강대국이 반드시 투키데스의 함정에 빠지던 것은 아니었다. 1등 국이 2등의 역량을 인정하고, 또 2등이 1등의 헤게모니를 용인하면 그 둘은 생각보다 평화롭게 공존하기도 한다.**** 지금 이런 지형의 변화는 유라시아 대륙의 양 끝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미중이 좀 더 온건한 방식으로 서로의 영향력을 인정한 반면 서유럽과 러시아는 좀처럼 상대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만약 또 한 번의 세계대전이 터진다면 그 주 무대는 또다시 서쪽이 될 가능성이 크다. 

과거 로마는 카르타고에게 평화 조건으로 성 안의 모든 무기를 내놓으라고 제안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사카 성을 지키는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 성 외곽의 해자를 메우라고 했다. 철저하게 수세에 몰린 카르타고와 히데요리는 모두 상대의 조건을 수락했지만 결국 적군은 철군하지 않았고 카르타고와 도요토미 가문은 멸망했다. 서방은 자신들이 로마나 도쿠가와처럼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착각하지만 러시아는 과거보다 쇠퇴하긴 했어도 카르타고처럼 완전히 패전하지도, 도요토미처럼 몰락하지도 않았다. 그런 나토가 계속해서 우크라이나라는 해자를 메우라고 강제한다면 크렘린의 차르에게 남은 옵션은 단 하나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다. 

*               *               *

이 글은 지난봄 아시아의 미래 4편으로 작성하던 내용이었지만 아시아와는 동떨어진 내용이라 미완성으로 남겨두었는데 최근의 변화를 반영한 몇몇 내용을 덧붙여 완성했다. 사람들은 세계가 무척이나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그 변화의 방향이 어디에서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대해서는 매우 둔감하다. 주식시장은 테크의 혁신에만 주목하고 잡스를 메시아이자 우상으로 여기는 스타트업들은 멋진 신세계를 외치지만 거기서 눈을 돌려 반대편을 보면 사회 내부 곳곳에 파괴적인 심리들이 응축되어 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치안도 점차 불안해지고 있으며 지난 3백여 년간의 트렌드를 거슬러 세계는 통합이 아닌 대립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나스닥이 자랑하는 테크 기술들은 인류를 통합하기는커녕 더 빠르게 분열시키고 있으며 그 결과 대중들의 불만은 끓고 있는 압력솥의 밸브처럼 삐이이 하는 소리와 함께 증기를 내뿜고 있다. 그리고 그 징후들은 유럽의 각 지방의 분리독립 움직임, 남미의 좌파 정권들의 승리, 법인세 인상, 범죄율 증가로 나타나고 있다. 역사는 이때 지도자들이 외부의 긴장을 유도하여 내부적 갈등을 해결하곤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따라서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외신이 일간지 1면을 장식하는 날들이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 가운데 문재인 정부는 계속해서 참사에 가까운 외교적 실수를 거듭하고 있지만, 우리들은 이에 별다른 관심을 주지 않는다. 따라서 다음 대선에서도 우리의 외교는 다시금 부차적인 주제로 격하될 것이고 유권자들은 생존과 번영이 아닌 이념과 기분에 따라 표를 던질 것이다. 그들이 늘 그랬던 것처럼. 구한말 열강 사이에 낀 조선의 지식인들은 조선이 독립국으로 살아남기 위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싸웠다. 일부는 친러를, 일부는 친일을 또 일부는 친청을 외쳤고 자신이 믿는 바에 따라 목숨까지 내놓기도 했다. 과연 우리는 구한 말의 그들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지만 우리는 그 말을 되뇌는 것 외에 무엇을 배웠는가.  
 


*그러나 최근의 조사에 따르면 젊은 세대일수록 일본보다 중국에 대한 비호감도가 높다.

**미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하기도 전 소련군은 한반도에 진군하여 조선 전역을 점령할 수도 있었지만 미군의 요청에 따라 진군을 멈추고 38선 이남을 미국에 할애하기로 합의했다. 19세기 러시아가 안정적인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에 영향력을 투사한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전략적 양보였다.  

***나이팅게일이 활약한 크림전쟁, 2차 세계대전의 세바스토폴 공방전 등을 떠올리면 이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확률적으로 드물다.


2021. 12. 18.

은수미는 무엇을 위해 기저귀를 입었나

이웃한 영국과는 달리 프랑스가 강력한 중앙집권적 왕권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외세의 위협 때문이었다. 인접한 정치세력들은 늘 프랑스의 비옥한 농토를 탐냈고 서유럽의 중앙에 위치한 프랑스는 끝없이 주변 국가들과 전쟁을 벌여야 했다. 그 결과 국왕은 점차 강력한 상비군을 지향하게 되었고 이는 귀족 세력을 억누르는 수단이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외부의 위협은 내부의 저항을 잠재울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따라서 통치자들은 때때로 이를 내부 정치에 활용하기도 한다. 북한이 종종 미국과의 전쟁 위험을 드높이는 것이나 반대로 과거 군사정권 시절 박정희나 신군부가 북한의 위협을 과장하던 것은 모두 내부의 반발을 무마시키고 독재를 강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외부의 적을 이용한 것이다. 이런 것이 비단 과거의 모습일까. 권력자들의 그런 비열한 시도는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민주당의 내로남불은 여기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2016년 2월 24일, 여당이 발의한 테러방지법을 저지하기 위해 민주당 의원들이 필리버스터에 나섰다. 총 38명의 의원들은 장장 192시간에 걸친 연설을 통해 헌법에 보장된 개인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고 목놓아 외쳤지만 그들의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테러방지법은 통과되었다.  이제 시대가 바뀌어 민주당은 여당이 되었고 국회에서 어떤 법도 독자적으로 통과시킬 수 있는 180석의 의석도 확보했다. 당시 필리버스터에 나섰던 의원들 중 상당수가 21대 국회와 지자체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당시 필리버스터에 참여했던 그 누구도 테러방지법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되려 테러방지법보다 훨씬 강력한 검열을 허용하는 n번방방지법 및 인터넷 검열감시법을 통과시켰다.

우리는 한때 자유를 외치던 이들이 등을 돌려 더욱 강력하게 자유를 억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촌극을 보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 17조는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고 명시하고 있으며 18조는 모든 국민은 통신의 비밀을 침해받지 아니한다고 적시되어 있다. 거기에 통신 사업자가 검열하는 것은 개인 간의 메시지가 아닌 게시판과 오픈방 뿐이니 헌법 18조를 위반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여당과 일부 언론의 주장은 기만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왜 더 제한적인 형태의 감시였던 테러방지법을 반대했는가.

과거 민주당은 테러방지법을 막기 위한 필리버스터에 나서며 장시간 연설을 이어갈 수 있도록 성인용 기저귀를 착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의원들 중에는 현 성남시장 은수미도 있었다. 그녀는 김광진 의원에 이어 3번째 주자로 필리버스터에 나서 10시간 18분에 걸친 연설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 사건을 계기로 무명의 비례대표 의원에서 전국구 스타로 떠오른 그녀는 그 유명세를 몰아 이재명의 뒤를 이어 성남시 시장직에 당선되었지만 오래지 않아 국제마피아파 조직원을 운전기사로 두고 자신의 선거캠프 인사들을 성남시 공공기관에 꽂아 넣은 데다 정치자금법 위반 수사기밀을 전달받는 대신 한 경찰관의 청탁을 들어준 혐의로 검찰에 기소되었다. 이 중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혐의는 유죄를 선고받았고 나머지 혐의들에 대한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전 국민의 통신을 감청하는 법안이 통과되는 동안 조폭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대장동을 지나던 그녀에게 다시금 묻겠다, 그날 당신이 입은 기저귀는 무엇을 위한 것이었냐고.*


*실제로 은수미 시장이 당시에 성인용 기저귀를 착용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민주당의 끈질긴 노력을 상징하던 것이 기저귀였기에 은유적 의미로 명시하였다.    



  

합리적인 백신과 합리적이지 않을 자유

합리적인 백신 

투자의 세계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위험, 혹은 리스크라고 부르는 모든 것의 본질은 불확실성을 의미하며 우리가 바라는 초과수익률은 바로 그 미지의 영역으로부터 나온다. 아무리 가치평가 모델을 정교하게 다듬어도 그 불확실성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매 순간 불완전한 정보를 바탕으로 가급적 합리적일 결정을 내리도록 노력한다. 세상은 언제나 불안정하고 우리의 정보는 항상 불완전하다.

그리고 이는 투자뿐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에 적용되는 법칙이다. 백신을 맞을 것인지, 맞지 않을 것인지를 선택하는 일도 그러하다. 우리는 mRNA 방식의 백신에 대해 온전히 알지 못하지만 현재까지 드러난 데이터로만 보면 백신을 맞는 것이 맞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다. 델타 변이의 감염재생산지수는 약 5.08로 최근 6개월간 mRNA 방식의 백신을 접종한 사람의 수가 80% 이하가 된다면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이 코로나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코로나의 치명률은 1-2%에 달하는 반면, 백신접종자 중 사망자들의 비중은 자연사망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심지어 FDA의 통계조사에 따르면 mRNA방식의 백신을 접종한 집단의 사망자(2명)보다 플라시보 약을 투여한 집단의 사망자가(4명) 더 많았지만 이는 자연상태의 사망률과 비슷하다.(링크)

반면 백신은 점막을 통한 감염을 100% 막아주지는 않지만 항체를 형성해 혈관을 통한 감염을 높은 확률로 막아주기 때문에 중증화/치사율을 크게 낮춘다. 따라서 6개월 내에 mRNA 계열 백신을 올바르게 접종한 사람의 치사율은 일반 독감 수준에 근접하게 내려오고 이런 효과는 성인뿐 아니라 12-17세의 청소년에게도 나타나기 때문에 세계 각국 정부는 모든 성인과 청소년에게 백신 접종을 권장하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mRNA가 불완전하고 검증되지 않은 기술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전쟁이 얼마나 과학기술을 빨리 발전시키는지 간과한다. 우리가 4차 산업혁명이라고 부르는 기술들-인터넷 네트워크, 인공지능, 컴퓨터, 무선통신, 원자력 등의 첨단 기술은 대부분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탄생하지 않았나. 그리고 지금 인류는 코로나를 상대로 세계대전을 벌이고 있다. 집계를 시작한 1949년 이후 매년 낮아지던 인류의 사망률은 지난해 처음으로 반등하였는데, 이는 1968년의 홍콩 독감도, 월남전도, 공산권의 기아를 불러일으킨 소련의 붕괴 때에도 없던 일이다. 전 세계에서 공식적으로 약 500만 명, 비공식적으로는 약 1500만 명이 코로나로 사망했는데 연간 사망자로 환산하면 이는 이미 1차 세계대전을 아득히 뛰어 넘어 2차 세계대전에 가까운 수준이다. 주요 선진국들은 국제적으로 공조하여 백신 개발과 생산에 필요한 엄청난 자본과 자원들을 백신 제조사에 우선적으로 공급하였고 그 결과 첫 코로나 백신은 CDC의 예상보다도 몇 달 앞선 2020년 11월에 개발되었다. 이런 전폭적 지원은 임상실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스라엘 정부는 mRNA 방식의 백신을 접종한 900만 국민들의 생체 데이터베이스를 제조사 측과 공유하기로 합의했고 현재 미국에서만 약 2억 명, 전 세계적으로 약 40억 명의 사람들이 백신을 맞았다. 그 결과에 대한 통계도 몇번의 구글 검색으로 쉽게 접할 수 있다.

물론 백신은 완전하지 않다. 그리고 먼 미래에 mRNA 백신의 숨겨진 부작용이 새로 등장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다른 제반여건 역시 변할 수 있다. 하지만 다시 말하건대 세상에 완전하고 확실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이 그렇다고 믿을 뿐이지. 현재까지 수십억 건의 데이터로 미루어 보면 백신을 접종했을때의 이득이 그렇지 않을 때의 이득보다 훨씬 크기에 나는 백신을 맞았고 부스터 샷도 맞을 계획이다**. 만약 검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두려움을 느껴야 한다면 당신은 다이어트 보조식품이나 성형외과의 상담실장 앞에서 공포에 벌벌 떠는 편이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백신사망 검색어 트렌드: 사람들은 기존의 검증된 방식으로 제작된 구 독감백신(20년 10월) 접종시기나 백신 접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던 21년 3월에 백신사망에 대한 검색 빈도가 더 높았다. 이는 백신사망에 대한 두려움이 다분히 비합리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합리적이지 않을 자유

인간은 비합리적인 존재이다. 제네시스의 가성비가 더 나을지 몰라도 우리는 벤츠를 탐하고, 또 별다른 기능이 없는 에르메스의 백을 욕망한다. 그렇기에 정부가 모든 국민들이 완전하게 합리적일 것을 강제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자 비인간적인 조치이다. 우리에겐 합리적이지 않을 자유가 있다. 그 대상이 미국 소고기이든 북한 핵이든 백신이든 간에. 

무엇보다 시민들에게 합리적인 선택을 강요하는 정부는 이제껏 과연 얼마나 합리적으로 행동했나. 전 세계 다른 나라들에 비해 우리나라가 뒤늦게 확진율과 치명률이 동시에 치솟는 것은 명백한 방역시스템의 실패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세 가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하나, AZ와 얀센 백신이 델타 변이에 취약하기 때문에 부스터 샷을 놓기 전까지 위드 코로나에 나서지 말았어야 했고, 둘, mRNA 백신을 맞은 사람들의 돌파감염률이 다른 나라보다 높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교차접종과 제조사의 가이드라인을 어긴 접종이 백신의 효율을 떨어뜨렸으며, 셋, 코로나 발발 이후 2년이 지나도록 중증 환자를 전문적으로 치료할 시설을 충분히 확보하지 않았기에 세계가 리오프닝에 나서는 동안 우리는 끙끙대며 델타변이와 싸우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첫 번째와 두 번째 실수는 방역보다 정치논리를 우선적으로 내밀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내년 3월 대선에 앞서 여당에게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문재인 정부는 여러 차례에 걸쳐 때이른 위드코로나 방침을 발표했고 이미 8월부터 확진자가 폭증하여 불안 조짐을 보였는데도 불구하고 청와대는 강경하게 위드 코로나를 밀어붙였다 이 지경에 이르렀다. 그뿐만 아니라 정부는 상반기에 백신 수급 일정이 원활하지 않은데도 공식 접종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무리해서 2차 접종분을 1차로 전용했다 백신이 모자라 접종 간격을 8주로 일괄 연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은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CDC와 백신 제조사인 화이자-바이오엔텍에 따르면 부스터 샷은 2차 접종 후 최소 6개월 뒤에 맞을 것을 권고하는데 우리나라 질병관리청은 이 기간을 절반으로 단축해 3개월 뒤부터 부스터 샷을 맞도록 권하고 있다. 내가 아는 한 이렇게 빨리 부스터 샷을 맞으라고 권고하는 정부는 오로지 한국뿐이다. 저번에는 백신의 물류일정에 사람을 맞추더니 이제는 정치일정에 사람을 맞추고 있다. 문재인은 이 비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작년 초, 코로나에 합리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던 것은 우리나라 만이 아니었고, 사실 이는 어쩔 수 없던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행히도 일찍이 메르스를 겪은 한국은 나름 합리적인 매뉴얼이 존재했고 확진자의 수가 극소수일 때 그들을 밀접 추적하여 동선을 파악하는 것은 방역에 매우 효과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임기 말년까지 아무것도 이룬 게 없어 실적에 미친 대통령이 여기에 K-방역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확진자의 수가 방역시스템이 추적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자 방역망에는 구멍이 뚫리기 시작했고 일관성이 없던 국경 통제와 방역지침은 확산세를 막는데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질병관리청은 쓸모없어진 기존의 방침을 버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각하가 치적으로 달아둔 K-방역이니까. 그 덕에 우리는 아시아에서 인구대비 일일 확진자가 가장 많은 나라가 되었다.

코로나가 터지자 자유와 인권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던 서구의 많은 나라조차도 계엄령에 가까운 락다운 조치들을 내려야 했고, 각국의 시민들은 방역이라는 공공의 목표가 개인의 자유와 충돌할 때 그 적절한 균형이 어때야 하는지 열띤 논쟁을 시작했다. 위험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마스크를 쓰지 않을 자유가 중요하다는 사람부터, 집단방역이라는 목표를 위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헌법이 허락한 범주 내에 있다는 주장까지 다양한 논의가 오갔다. 하지만 그 가운데 자유도 잃고 방역도 망한 나라가 있다. 바로 대한민국. 그 나라의 대통령이 한 일이라곤 개인의 자유를 무제한적으로 희생시키고, 방역을 핑계로 정부의 권한과 예산을 막대하게 늘리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K-방역의 본질이다.   


*아주 기초적인 옵션평가 모델에서는 이 불확실성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많은 이론들이 그렇듯 이는 어디까지나 가정에 불과하고 금융시장은 불확실성을 완벽하게 소거하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번의 큰 위기로 배웠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6개월 안에 세계 80% 이상의 인구에게 백신을 접종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백신을 맞는다고 COVID-19가 사라질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한다. 계속해서 새로운 변이는 등장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점점 치명률이 낮은 변종이 지배종이 될 것이라고 한다.

2021. 12. 3.

탄넨베르크 전투와 대선

비스마르크 사후 독일은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매우 불리한 입장에서 1차 세계대전을 치르게 되었다. 서부의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동부의 러시아를 동시에 상대해야 했던 독일은 빠르게 영프 연합군을 몰아낸 뒤 동부전선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늘 그렇듯이 무책임한 소망은 잔혹하게 배신당하기 마련이다. 러시아는 독일 수뇌부의 예측보다 빠르게 더 많은 병력으로 독일을 침공했다. 전체 80만 병력 중 약 절반이 북서전선군으로 편성되어 독일의 정신적 고향이었던 동프로이센으로 진격했는데 이를 방어할 독일 측의 병력은 고작 15만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에 당황한 군부는 서부전선의 병력을 차출해서 동부로 파병했지만 병력이 전장에 제때 도착할 확률은 매우 낮았다. 결국 탄넨베르크 인근에서 힌덴부르크 장군이 이끄는 독일 방어군 15만이 홀로 러시아 군과 조우하게 된다.

놀랍게도 이 전투는 독일 측의 압승으로 끝났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승리의 단초는 러시아 지휘부 내부의 불화로부터 나왔다. 러시아군은 전체 병력을 1군과 2군으로 나누어 각각 렌넨캄프와 삼소노프에게 맡겼는데 불행히도 이 둘은 개인적으로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를 알아챈 독일군은 두 장군이 서로 유기적으로 협조하지 않을 것을 알고* 각개격파에 나섰다. 독일군은 고작 1개 사단으로 1군을 견제하면서 나머지 병력으로 전력이 약화된 2군을 포위하여 공격에 나섰고, 군단장 삼소노프는 렌넨캄프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바로 직전까지 격전을 벌인 끝에 전략적 요충지를 점령한 1군은 굳이 무리한 기동을 꺼렸다. 독일군의 예상대로 렌넨캄프가 삼소노프의 요청을 묵살하고 움직이지 않는 동안 독일군은 2군을 섬멸하고 뒤이어 재빠르게 병력을 이동해 1군마저 포위하여 분쇄했다. 서부전선에서 출발한 보충 병력이 도착하기도 러시아 주력 부대를 모두 격퇴한 것이다.  

삼소노프와 렌넨캄프 둘 중 누구에게 이 처참한 패배의 원인이 있을까? 삼소노프는 자신의 2군이 무너지면 나머지도 후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1군이 자신을 지원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판단했을 것이고, 렌넨캄프는 삼소노프가 독단적으로 공세를 취해 포위를 자초한 것이 패배의 원인이라고 주장했을 것이다. 수많은 부대가 얽히고섥힌 전장에서는 이와 같은 내부적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명령을 하달하고 부대 간의 우선순위를 조율할 명령체계가 중요한 것이다. 둘 중 어느 한쪽의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누구에게 명령권이 있었는지 따져봐야 한다. 

지난 몇 주간 야당은 이와 유사한 갈등을 겪고 있다. 삼소노프와 렌넨캄프가 40만의 북서전선군을 둘로 나누어 싸우듯 정권교체를 갈망하던 지지자들도 둘로 나누어 각자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편들고 상대를 공격하고 있다. 하지만 이 논쟁의 핵심은 누가 옳은지가 아니다, 대신 누가 우선권을 갖는지가 핵심이다. 그리고 당헌 74조에 당무우선권을 명시한 국민의힘을 포함하여 모든 정당은 모든 대선에서 대선후보가 한시적으로 당권을 우선적으로 행사하도록 허용하고 있다. 따라서 선준위 인선에 대한 모든 권한은 사실상 대선후보가 가지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도 대선후보에게 있는 셈이다. 내가 문재인의 정치를 반대한다고 해서 문재인의 법을 어기는 것이 정당화될 수 없듯 대선후보가 행사하는 권한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어깃장을 놓는 것은 결코 올바른 처신이라고 볼 수 없다.

과거에도 후보로 선출된 대선주자와 당대표가 충돌을 빚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당권과 대권을 분리하자는 박근혜 전 대표의 주장을 정면 반박하며 당무우선권을 내세웠고 바로 지난 대선 때도 대선 직전 지지율 결집을 위해 홍준표 후보가 정우택 비대위원장의 반발을 묵살하고 당무우선권을 발동해 탈당파의 복당을 허용하고 친박 인사들의 사면을 결정했다. 그런 과거의 사례에 비하면 현재 선대위 구성의 자유는 당무우선권을 논하지 않아도 전적으로 후보의 권한에 속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른 무한한 책임 역시 후보 본인에게 있다. 

다음 대선은 세대와 세대가, 그리고 진보와 보수가, 또 부패한 좌파와 그를 혐오하는 반대 계층이 서로 맞붙는 총력전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야권은 그 도덕적으로 타락한 문재인 정부와 최전선에서 맞서 싸운 검찰총장을 대선후보로 임명했다. 그가 정치적 신인이고 여러 실수도 저지르긴 했지만 그를 최전방 지휘관으로 앉힌 이상 그의 명령체계를 존중해 줘야 하지 않나. 하지만 이상하게도 대중 선거에서 이겨본 적이 없는 이준석과 정치 경험이 가장 미비한 사람들이 가장 앞장서서 그의 정치적 미숙함을 공격하는 아이러니를 보고 있다. 그리고 이제 이들은 훈수를 넘어 적극적으로 깽판을 치고 있다. 그 결과 대선 역사상 처음으로 대선 후보가 선대위도 자기 뜻대로 꾸리지 못하는 것과 당대표가 선거운동을 포기하는 것을 목도하게 되었다. 문재인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드는 동안 이준석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당을 만들었고 이는 두고두고 그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탄넨베르크 전쟁은 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삼소노프는 포위되어 부대가 섬멸되는 것을 보며 전장에서 곧장 자살했고 렌넨캄프는 도보로 달아날 정도로 처참하게 패배하여 귀국했지만 이등병으로 강등된 뒤 군적을 박탈당했다. 반면 이 경이적인 승리를 이끈 힌덴부르크는 국민적인 영웅으로 등극해 전후 독일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렇다, 약 3천만 명의 인명피해를 낳은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에게 권력을 이양한 바로 그 파울 폰 힌덴부르크의 탄생이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히틀러

  

*과거 삼소노프와 렌넨캄프는 러일전쟁에 참전했는데 당시 탄광을 지키던 삼소노프가 레넨캄프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부하는 바람에 그의 부대는 악전고투 속에 비참하게 패퇴해야 했다. 패전 후 포로들을 교환하던 펑텐 역에서 렌넨캄프를 마주친 삼소노프가 먼저 주먹을 날렸고 사병들이 보는 가운데 두 장교는 진흙탕에서 몸싸움을 벌였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일본군에 파견된 한 독일군 대위가 이 현장을 목격했는데 그가 바로 탄넨베르크 전쟁에서 작전참모를 맡았던 막스 호프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 수뇌부는 1군과 2군의 공조가 원활하지 않을 것을 확신했고 그래서 이렇게 과감한 작전을 편 것이라고 한다. 물론 이 주장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

**이 글을 작성하는 동안 윤석열 후보와 이준석 대표 간의 회동에서 김종인을 총괄선대위원장직으로 선출하고 사실상 선거의 전권을 줬다는 보도가 올라왔다. 부디 대선까지 윤석열 후보의 정치적 미숙함과 이준석 대표의 찌질함은 더이상 보지 않기를 바란다.

2021. 11. 18.

여의도 정치를 반기는 유권자는 없다

한국 정치에서 2021년은 그 이전 해와는 매우 다른 한 해로 기억될 것이다. 21대 총선에서 처참하게 참패한 야당은 절치부심하여 김종인과 여권 인사들을 영입하고 비주류였던 30대이자 바른미래당 계열인 이준석을 당 대표로 내세운 결과 보궐선거에서 압승하고 내년 대선을 앞두고 오차 범위 밖 지지율을 확보하는 등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그 중심에 윤석열과 오세훈이 있다면 그 반대편에는 마치 폭등하는 주식시장에서 혼자 하한가를 친 주식처럼 얼굴을 한껏 찌푸린 두 남자가 있다. 바로 홍준표와 유승민. 무엇이 그들을 정치 여정을 셀트리온처럼 시퍼렇게 물들였는가. 

오세훈과 유승민, 그리고 윤석열과 홍준표의 정치 여정은 매우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오세훈은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계기를, 유승민은 박근혜 탄핵을 주도하며 보수당의 몰락을 촉발했고 둘 다 바른미래당의 주축이었다. 홍준표와 윤석열은 둘 다 타협하지 않는 꼬장꼬장한 강골 검사인 것도 똑 닮았고 두 사람 모두 문재인을 몰아붙여 지지자들의 사랑을 얻었다. 하지만 각자의 운명은 너무나 달랐다. 오세훈이 10년 만에 서울 전 구에서 과반을 득표하며 서울시장직에 복귀한 것과는 정반대로 유승민은 당내 경선에서 한 자리수 지지율로 탈락했다. 홍준표는 이변을 일으켜 경선 초기의 격차보다 근소한 차이로 2위에 올랐지만 자신이 당 대표를 두 번 그리고 대선 후보를 한번 맡았던 당에서 한때 문재인의 칼이었던 남자를 상대로, 더욱이 당원 투표에서 버림받아 패배했다. 

유승민과 홍준표의 운명을 망친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여의도식 계산 때문이었다. 유승민은 21대 총선에서 험지 서울 대신 연고지인 대구에 출마하겠다는 의사를 여러 차례 밝혔지만 TK의 유권자들은 냉담했고, 그가 주판을 꺼내 승산이 없다는 계산을 마쳤을 때 비로소 유승민은 불출마 선언과 함께 자유한국당과의 합당을 결정했다. 선거를 앞둔 미래통합당은 그의 결정을 높이 평가한다고 했지만 그 말을 누가 믿을까. 함께 탈당을 결정한 김무성이 이미 자한당으로 복당했고 자신의 의석마저도 확보할 가능성도 희박했는데. 그리고 같은 선거에서 홍준표 역시 당의 수도권 험지 출마 제안을 거절하고 탈당해 보수의 안전지대인 대구 수성구에 출마했다. 한때의 대선후보가 탈당해서 안전빵이나 노리는 꼴이라니, 마음 졸이며 야당의 의석 수 하나하나를 손으로 세어가던 지지자들이 그 모습을 결코 좋게 볼 리가 없었다.     
 
반면 오세훈과 윤석열은 여의도식 정치가 가장 기피하는 길을 걸었다. 오세훈은 87년 6공화국이 들어선 이래 단 한 번도 보수가 의석을 확보하지 못한 광진구 을에, 그것도 상대가 정치신인 고민정이라 이겨도 본전이고 패배할 경우 엄청난 조롱거리가 되어 재기가 불투명한데도 불구하고 그 독배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그리고 임기가 고작 1년 남짓한 서울시장 보궐선거에도 출마했고, 끝끝내 그는 화려하게 부활했다. 윤석열 역시 박근혜 정부의 인사들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잡아넣은 덕에 문재인과 여당 지지자들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기수를 뛰어넘어 검찰총장의 자리에 올랐으나 그는 전임/후임자와는 달리 청와대에 영합하지 않고 여당 관계자들의 비리를 원칙대로 수사해 조국과 추미애의 정치인생을 끝장냈다. 이 두 사람에 대한 평가는 엇갈릴 수 있으나 오세훈과 윤석열이 편하게 갈 수 있는 길을 마다하고 험한 길을 택했다는 사실에 이견을 낼 사람은 없을 것이다. 즉 그 둘은 여의도의 정치인이라면 결코 택하지 않을 선택을 한 사람들이다.

연애 경험이 부족한 모태솔로들은 언제 어디서나 이성의 혼을 쏙 빼놓는 연애의 기술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녀는 바보가 아니다. 당신이 잔머리를 굴리고 어장관리에 나서는 것을 바라보는 그녀들의 눈빛은 차갑게 식기 마련이다. 그리고 홍준표와 유승민이 유권자들을 상대로 픽업아티스트를 자처하며 여의도의 셈법을 따지고 주판을 튕기는 동안 오세훈은 묵묵히 당의 험지 출마 요구에 응했고 윤석열은 자신에게 검찰총장이란 영예를 안긴 문재인을 상대로 전력을 다해 싸웠다. 무엇보다 보수층 지지자들이 윤석열을 택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이 과반을 훌쩍 넘고 여당이 폭주하는 동안 유승민은 잠행에 들어갔고 홍준표는 자신의 금배지를 찾아 떠났으며 중도층은 여전히 민주당에 표를 던졌다. 그동안 보수 유권자들과 서민과 김경률, 권경애, 진중권과 같이 문재인 정부와 대립해 온 인사들은 외로운 싸움을 계속해야 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묻는다, 그때 당신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지난 19대 대선에서 야당의 핵심 지지층은 홍준표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고 그 결과 탄핵정국에서 불리한 상황에서도 홍준표는 안철수를 제치고 2등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홍준표는 자신의 지지자들의 마음을 얻는데 실패했다. 바로 그놈의 여의도식 정치 때문에. 그리고 불과 4년 뒤 정치 지형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홍준표를 가장 지지하던 6070대는 그를 버리고 윤석열을 택했고 반대로 문재인을 가장 지지했던 2030대 유권자들은 당내 경선에서 홍준표를 택했다. 한때의 동지들이 적이 되고 한 때의 안티들이 팬이 된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단 하나의 질문이다. 우리가 가장 절박하게 싸우던 그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는가.

그리고 진보도 보수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윤석열이 아니었다면 지금 중도층이 가장 선호하는 대선주자는 바로 조국이었을거라는 사실이다. 

*               *               *

이와 같은 논리는 이준석에게도 적용된다. 그는 혁신 보수를 표방하지만 그의 정치는 결코 새롭지도, 젊지도 않다. 그의 정치는 철저하게 당내 영향력을 넓히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고(링크) 세련되지도 못하다(링크). 그는 마치 모범생이 공식을 외워 수학 문제 풀어내듯 철저하게 여의도식 정치를 하고 있는데 과연 새 인물이 구 정치를 재탕하는 것을 새 정치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의 기대와는 정 반대로 그가 표방하는 정치는 그가 들고 온 비단 주머니의 워딩과 디자인처럼 너무나 올드하고 구태의연하다.

하지만 그의 진짜 문제는 뚜렷한 철학이 없다는 점이다. 경선 최종라운드에 오른 네 명의 후보는 모두 확고한 철학이 있다. 윤석열은 진영논리에서 벗어난 법치주의, 홍준표는 정통보수정치, 유승민은 우파적 경제/안보와 진보적 복지, 그리고 원희룡은 보수의 틀 안에서 민주화를 추구하고 있다. 하지만 이준석의 정치 철학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준석의 모호한 정치철학은 그의 삶의 궤적과도 이어져 있다. 애초에 한 사람의 가치관과 신념은 그 사람이 걸어온 삶으로부터 나오지 않는가. 금융권에서 트레이딩으로 살아남은 나와, 삼성전자에서 10여년을 일해온 친구, 외길 검사의 길을 걸어온 선배, 그리고 외교가에서 일하는 후배 등 각자의 삶에서 이룬 성취는 현재의 가치관을 대변한다. 우리가 정치인들의 말보다 과거의 행적에 집중하는 이유이다. 이준석은 과연 어떤 길을 걸어왔는가. 박근혜의 키즈로 정치를 시작하기 전 그의 이력은 거의 전무하다. 그리고 정치에 뛰어든 이래 그의 가장 큰 자산은 바로 젊음이었고, 그는 이를 무기로 자신을 받아준 정치인들을 무차별로 공격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박근혜, 그리고 안철수 이후 당내의 여러 중진들, 심지어 대선 후보를 공격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의 정치철학은 무엇일까? 바로 여의도 정치 그 자체가 아닐까. 다른 정치인들이 자신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여의도의 셈법을 따지지만, 사회생활의 첫 발을 여의도에서 내디딘 이준석에겐 여의도는 하나의 배틀그라운드이고 정치공학은 그저 그 서바이벌의 룰일뿐이다. 왜 살아남아야 하는지, 살아남아서 무엇을 할 건지 비전도 철학도 없다. 다만 그 게임을 열심히 플레이할 뿐. 

지난 5년간 우리는 삶에서 정치 외에 아무런 사회경험이 없는 운동권 인사들이 어떻게 행정과 입법을 망가뜨렸는지 여실히 보았다. 그리고 우려스럽게도 이준석은 그들과 대단히 유사한 경로를 걷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를 지지하되 비판적인 시각을 놓아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2021. 8. 26.

샐리와 앤 실험, 그리고 사회적 자폐아들

 


-공을 가지고 놀던 샐리가 공을 바구니에 넣고 방을 떠나 산책을 나갔다. 

-그 사이 앤은 그 공을 꺼내 상자에 넣었다. 

-산책에서 돌아와 공을 찾는 샐리는 바구니와 상자 중 어디를 열어볼까?


이 간단한 질문은 자폐증을 진단하는데 쓰이는 테스트 중 하나인데 자폐아들은 대개 샐리가 바구니가 아닌 상자를 열어볼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방을 떠나 있던 샐리가 공이 이동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폐아들은 공이 상자 안에 있으므로 샐리 역시 상자를 열어볼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자폐아들만이 이런 성향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발달단계 초기에 있는 5세 이하의 아동들도 때때로 샐리-앤 실험에서 잘못된 답을 고르곤 하는데 아직 자아개념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아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자폐아나 5세 이하의 아동뿐 아니라 성인에게서도 흔히 나타난다. 젊은 세대들은 자신들의 삼촌들이 왜 그토록 문재인 정부를 지지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반대로 삼촌들은 왜 조카들이 민주당에 반대하는지 헤아리지 못한다. 여성은 남성의 좌절에 공감하지 못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내가 일반 대중이 왜 금리 인상을 저토록 바라는지 납득하지 못하는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한국의 철수와 영희뿐 아니라 북미의 샐리와 앤에게서도 발생하고 있다. 어째서 우리는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을까.

나는 점점 파편화되는 사회가 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더 이상 나란히 앉아 TV를 보지 않으며 가족의 범위 역시 점점 좁아져 삼촌과 조카는 예전처럼 대화를 오래 나누지 않는다. 전라도 광주에 사는 큰고모와 대구 수성구에 사는 막냇삼촌이 대전에 모여 함께 명절을 쇠는 집도 줄어들고 있으며 한 자녀 가정의 비율이 늘어나 딸에게는 오빠가 없고 아들에겐 누나가 없다. 그렇게 나와는 다른 성을 가진 사람을 이해할 기회마저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동물인 그들은 외로움을 피해 커뮤니티를 찾아다니지만 이는 필연적으로 매우 동질적인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온라인 사이트든 페친 목록이든 유튜브 채널이든 정당이든 간에. 

그렇게 우리는 타 집단을 이해하는 능력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 샐리는 샐리와만 어울리며 앤은 앤들만 만난다. 그래서 바구니에 손을 넣은 샐리는 늘 화가 나 있고 상자 앞에 선 앤은 샐리를 조롱하기 바쁘다. 하지만 사회적 자폐아로 점차 퇴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둘은 매우 닮았다. 코로나로 사회활동이 극도로 제약된 지 어느덧 1년 반이 지났고 그 결과 자산 가격과 소득뿐 아니라 인간관계도 더욱 극으로 치닫고 있다. 생물학적인 바이러스에 대항하여 백신을 개발하고 항체를 형성한 우리는 조만간 집단면역에 도달하겠지만 개인과 개인이, 그리고 집단과 집단이 자발적으로 자가격리에 나선 가운데 코로나처럼 번지는 사회적 자폐증은 어떻게 극복할까.


하기야 그 흔한 sns조차도 하지 않는, 할 줄 모르는 나야말로 가장 고립된 이 아닌가.

2021. 8. 16.

통계로 보는 이준석의 속마음

  • 지난 한달동안 이준석 당 대표의 페이스북에는 총 89개의 포스팅이 올라왔다
  • 그 중 여당을 비판하거나 여당의 비판에 대응한 것은 총 14개(15.7%)
  • 반면 당내 특정 후보나 일부 당원들에 대한 공격은 총 30개(33.7%)
  • 범여권에 속하는 안철수와 국민의당을 향한 공격은 총 13개(14.6%)
  • 당 행사 홍보와 개인신변잡기에 대한 내용은 30개(33.7%)였고 정의당을 향한 공격도 2개(2.2%)를 차지했다*
숫자는 그 사람의 속내를 보다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의 전체 포스팅 중 약 절반인 43개(48.3%)가 당내 대선주자, 혹은 잠재적 동반자인 국민의당을 향한 것인데 이는 그의 주적이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집계대상을 최근 일주일로 좁히면 이 비율은 65%로 급증한다. 이준석을 대표로 뽑은 대중과 당원들의 소망은 국민의힘이 중도층을 흡수하길 바라는 것인데 정작 이 당대표는 바로 이 중도 후보들과 싸우는데 가장 많은 시간을 쓰고 있으니 지지자들과 이준석의 간극이 날카롭게 벌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준석은 자신이 당내 수구 세력과 낡은 정치와 싸우고 있다고 하지만 그가 공격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치인이 아니었거나 단 한 번도 보수당에 속한 적이 없던 사람들이다. 그는 이렇게 해야 당의 외연을 확장할 수 있다고 하지만 정작 가장 확장성이 높은 사람들과 싸우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중도우파로 분류되는 바른미래당 출신인데 이들은 한때 박근혜 탄핵에 찬성했던 사람들이라 당내에서의 입지가 탄탄하지 못하다. 하지만 태극기 부대로 대표되는 자유한국당 출신들에 비해 중도 확장성이 높은 계층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보다 확장성이 높은 정치 세력을 제거하고 나면 자신들이 당 내의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다는 계산이 섰을 것이다. 43 대 14. 이준석의 페이스북이 여당보다 범야권을 공격하는데 집중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누군가를 말로 속이긴 쉽지만 숫자로 거짓을 꾸며내긴 어렵다. 



*이는 수기로 집계한 것으로 오류가 있을수 있습니다.

역사, 그 생존의 교과서

국토가 길게 늘어진 탓일까, 일본에서는 시대가 바뀔 때마다 주요 세력이 둘로 나뉘어 큰 전투를 벌이곤 했다. 그 대표적 사건이 일본 열도를 동서로 나누어 붙었던 세키가하라 전쟁인데 전 일본의 주요 다이묘와 무장들이 대부분 출전하여 싸웠던, 그야말로 그 시대의 빅 매치였던 셈이다. 이 전투에서 패하는 진영에 줄을 잘못 서게 되면 영지를 삭감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칫하면 몰수, 혹은 가문이 모두 처형당하는 혹독한 결과를 낳았기 때문에 각 다이묘들은 신중히 진영을 택했다. 그리고 그런 전국시대 말기에 인상 깊은 족적을 남긴 두 가문이 있다. 바로 사나다와 시마즈가. 그들의 행보를 짧게 돌아보자. 


#사나다 가문

가장 복잡한 상황에 처한 다이묘들 중 하나가 바로 사나다 마사유키였다. 본래 다케다 가문을 섬기던 그는 주인이 몰락하자 살아날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처음엔 오다 노부가나에게, 그가 죽고 난 뒤 호조 가문에, 뒤이어 도쿠가와에게 복속한다.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영지를 양도하라고 명하자 그는 명을 거부하고 전쟁에 나선다. 분노한 이에야스가 토벌대를 보내지만 전략가인 마사유키는 우에다 성에서 토벌군을 섬멸한다. 하지만 이 작은 다이묘가 일본 전역에서도 손꼽히는 도쿠가와에게 언제까지 저항할 수는 없는 법. 그는 둘째 아들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인질로 보내어 중재를 부탁하고, 히데요시는 마사유키의 장남과 도쿠가와의 가신의 딸을 결혼시키며 화해를 주선한다. 고맙게 받아들여야 할 제안이었지만 전투에서도 이기고 도요토미도 등에 업은 사나다 마사유키는 호기롭게 반발하며 나도 다이묘이고 저쪽도 다이묘인데 어째서 내가 급이 낮은 도쿠가와의 가신과 사돈을 맺겠느냐며 항의한다. 결국 이에야스는 신부를 자신의 양녀로 삼아 혼인을 맺는 것으로 이 석연찮은 중재안을 받아들인다.

그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동군을 이끌고 천하를 벌이는 전투를 벌인다고 하니 사나다 가문의 고민이 깊지 않을 수 없었다. 단순히 동군의 수장과 사이가 껄끄러우니 서군에 참가하기엔 가문의 존속과 미래가 달린 일 아닌가. 그래서 그는 결심한다. 도쿠가와 측과 사돈인 큰아들을 동군에 참가시키고 자신은 도요토미의 인질이었던 둘째 아들을 데리고 서군에 참가하기로. 어느 편이 이기든 가문을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분산투자지만, 자칫하면 한솥 밥을 먹던 아버지와 형제, 그리고 가문의 중신들이 전장에서 서로를 죽고 죽여야 했던 고통스러운 결정이었다

결과적으로 동군이 승리했지만 사나다 마사유키는 불과 소수의 병사로 이에야스의 아들이 이끄는 3만 8천 명의 군대의 발목을 잡아 그들이 세키가하라에 참전하는 것을 막는다. 동군 총 병력의 약 1/3에 달하는 이들이 전장에 도달하지 못하는 바람에 동군은 서군에 비해 수적 열세에서 싸워야 했고 화가 단단히 난 이에야스는 마사유키를 죽이려고 했지만 동군에서 싸운 사나다의 장남, 노부유키의 간청으로 아버지와 둘째 아들을 유폐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사나다 가문은 살아남았다. 도쿠가와의 삼엄한 감시에도 큰아들 노부유키는 유폐된 아버지와 동생에게 지속적으로 생활비를 보내고 그들이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그렇게 살아남은 사나다 가문은 우에다와 마쓰시로 번을 지배하며 막부 말기까지 존속했으며 폐번 이후에도 메이지 정부에서 현의 지사를 지냈고 세이난 전쟁에서 공을 세워 백작의 지위에 올랐다. 


#시마즈 가문

임진왜란에서 활약하여 우리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남긴 시마즈지만 군공만으로 평가한다면 그들은 세키가하라에서 놀라운 활약을 보였다. 시마즈 가문은 사나다와는 반대로 도요토미 가문과 껄끄러운 관계여서 처음엔 동군에 합류하려고 했지만 영지가 서쪽 끝 규슈에 있었고 도요토미의 본거지인 오사카 성에 시마즈의 인질들이 잡혀있던데다 병사를 이끌고 이동하던 도중 서군의 대장, 이시다 미쓰나리가 거병하여 어쩔수 없이 서군에 합류한다.

이때 시마즈 본가는 형인 요시히사가 지키고 있었는데 동생 요시히로는 전공을 세우기 위해 형에게 지원을 요청하지만 요시히사는 단칼에 거절했고 그 결과 요시히로는 약 2천이 안되는 소수의 병력만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그러나 전투 내내 그는 거의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참전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미쓰나리가 직접 찾아와 출격을 부탁했을 때에도 딴소리를 하며 수수방관할 뿐이었다.  

망부석처럼 서있던 시마즈의 용사들이 전장에서 활약한 것은 역설적으로 전투의 승패가 갈린 이후였다. 2시간여의 전투에서 서군이 패주하게 되고 시마즈의 본대도 포위당하게 되자 후방이 막힌 시마즈군은 불과 천오백의 병력으로 전방의 팔만이 넘는 동군의 본진을 돌파하기로 결정한다. 거의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이 작전은 놀랍게도 성공한다. 혼다 타다카츠나 이이 나오마사와 같은 쟁쟁한 명장들이 그들을 저지했지만 되려 부상을 입고 물러나고 요시히로는 본진을 뚫고 오사카에 들러 인질들을 구출해 영지로 돌아갔다. 생환한 인원은 불과 수십 명에 불과하고 조카 토요히사와 다수의 중신들이 전사했지만 대장 요시히로를 무사히 탈주시킨다는 전략적 목적을 달성했고, 또 패주한 소수의 군대가 승리한 대군의 정면을 뚫어 후퇴한 이 놀라운 사건은 시마즈 퇴각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동군의 정면을 돌파한 시마즈 요시히로는 도쿠가와의 본진을 지나치면서 이에야스에게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원치 않는 싸움을 시작했다 본국 사츠마로 돌아가지만 제 본심에 대해 훗날 바로 말씀드리겠다고. 요시히로는 살아서 영지로 돌아갔지만 형 요시히사는 조카를 포함한 가문의 누구도 그를 환대하지 말라고 지시했고 동시에 도쿠가와 측과 협상을 시작한다. 요시히사는 동생이 독단적으로 벌인 일이라 소수의 병력만이 참전했고 전투에서 사실상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피해는 동군이 무리하게 시마즈군을 포위 섬멸하려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니 양해해 달라고 화의를 청한다. 이에야스는 후환을 끊어놓고자 시마즈가 다스리는 사쓰마를 평정하고 싶었고 실제로 토벌령을 내리기도 했지만, 불과 천오백에 불과한 시마즈군의 활약을 목도한 터라 시마즈의 근거지로 쳐들어가는 것이 심히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그는 불과 일주일 만에 자신이 내린 토벌령을 철회한다. 그래서 시마즈 가문은 요시히로가 근신하는 것 외에 다른 처벌을 면하게 된다.

그렇게 살아남은 시마즈 가문은 사쓰마 번을 지배하며 막부 말기까지 번성하였는데 막말 사쓰마-죠슈동맹을 이끌며 도막파의 수장이 되어 결국 도쿠가와 막부를 몰아낸다. 시마즈의 놀라운 활약을 목도한 도쿠가와 이에아스는 죽으면서도 그들이 마음에 걸렸는지 자신의 시신을 사쓰마를 향해 묻어달라고 하였는데 그의 염려는 265년이 지나 결국 현실이 되었던 것이다. 


역사는 현대를 비추는 거울일 뿐 아니라 현대인의 의식과 세계관을 형성하는 토대이기도 하다. 이번 정부에서 유난히 두드러지지만 과거에도 한국 정부가 납득할 수 없는 1차원적 외교를 펼쳐 국익을 갉아먹은 사건은 과거에도 여러 번 있었는데 나는 유권자들이 전략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점차 잃어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가장 큰 책임은 우리나라의 편협한 역사교육에 있지 않을까 한다. 우리의 교과서가, 그리고 그 교과서로 배운 대중이 역사를 바라보는 방식은 큰 틀에서 명분을 따지던 조선시대의 사대부들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은 너무나 편협하고 감정적이며 또한 비현실적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입만 산 병신외교로 이어진다.(링크)

만약 우리의 역사교육이 세키가하라의 두 인물들을 평가한다면 과연 어떻게 보았을까? 아마도 사나다 가문은 붕당에 휩쓸려 아비와 아들, 형과 동생이 총부리를 겨눈 비극의 동족상잔을 벌인 막장 집안으로, 시마즈는 유유부단하게 움직여 서군의 패배에 일조한 기회주의자들로 보지 않았을까. 실제로 우리의 역사교육은 명분만 강조하고, 또 그에 따른 별 역사적 의미도 없던 소규모의 항쟁만 조명한다. 그래서 고려든 조선이든 나라가 몰락하거나 위험한 시기를 배울 때면 어김없이 명분론과 항쟁이 교과서를 수놓는다. 물론 그중에는 임진왜란의 의병처럼 의미있는 무력투쟁도 있었지만 무신정권 몰락 후 삼별초의 항쟁이나 1930년대 이후 만주의 소규모 독립군 활동처럼 실제 역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한 사건들조차도 우리의 역사교육은 애써 의의를 부여하고 명분을 입혀 포장한다. 하지만 고려가 자주국으로 남을 수 있던 것은 고려 원종이 쿠빌라이가 왕위 계승 경쟁에서 이기는데 크게 기여한 외교술 덕이고* 전후 한국이 독립할 수 있던 것은 일본의 힘을 꺾어놓고 싶은 미국과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회복하고 싶었던 중국 측의 이해관계가 맞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나다와 시마즈의 역사를 배운 일본인과 삼별초와 조선의용대의 역사를 배운 한국인들이 국가적 위기를 마주했을 때 각각의 전략적 대응은 매우 다를 수밖에 없다. 일본인들은 마사유키나 요시히사처럼 자존심을 버리더라도 생존을 위해 전략적으로 투쟁과 협상을 번갈아가며 사용하겠지만 한국인들은 무지성으로 투쟁만 하면 된다고 믿는다. 불굴의 의지로 반항하고 대들고 싸우고 죽고 살해당하고 그래도 대들고, 그렇게 줄기차게 투쟁에 나서면 궁극적으로 소년만화와도 같은 승리가 알아서 찾아올 거라 믿는다. 그 의지를 지켜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명분과 혹독한 정신교육뿐이지 타협은 매국노 배신자들이나 꺼내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병신외교는 오늘날에도 그렇게 유구한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바로 절름발이 정신승리로 점철된 역사교육을 통해서.   

오늘은 광복절이다. 우리는 독립의 기쁨과 의의만 기념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우리가 살아남았는지 실제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 유럽 대륙만 해도 몇천 개가 넘던 정치세력들은 불과 두 세기 만에 두 자릿수의 국가들로 통합되었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독립국가로 존속한 거의 대부분의 나라들은 생존을 위해 절박하게 투쟁한 역사이고 우리는 스스로의 노력과 더불어 지정학적 여건 덕에, 또 한 강대국의 전폭적 지원 덕에 격동의 세기에도 살아남아 독립국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이런 혜택은 머지않아 끝날 가능성이 크다. 지정학 전략가인 피터 자이한은 늘어나는 재정적자와 셰일가스의 발견, 그리고 라이벌이었던 소련의 붕괴로 미국이 국제사회에 이전처럼 깊숙이 개입할 이유가 사라졌으며 먼로주의로의 회귀는 이미 시작되었다고 지적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래 미국은 세계 시장의 개방, 자유무역, 항행의 자유, 그리고 군사적 안정을 보장하였고 그 결과 대다수의 약소국들이 사실상 정치에서 지정학적 요소를 고려할 이유를 없앴다. 오늘날 그 어떤 정치인도 자국의 안정적인 석유 수입을 위하 말라카 해협에 해상 군사력을 투사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소비시장의 확보를 위해 인도를 식민지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계는 미국의 세계의 경찰 역할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미국이 석유 때문에 중동문제에 개입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미국이 수십 년간 수입해온 석유 중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는 물량은 1/5이 채 되지 않았고, 그나마 그 절반은 사우디가 동맹국 미국에 비축한 분량이었다. 미국이 중동을 지키는 것은 동아시아 동맹국의 에너지 수급 때문이었는데 미국에 안보를 가장 의존하는 한국인들 조차도 미국의 중동 침공을 줄기차게 미 패권주의라며 비난했다.

미국의 유권자들은 점점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는 세계의 경찰놀이에 자신의 세금과 재정을 낭비하는 것을 꺼릴 것이며 그러기 시작하면 나머지 세계가 태어나 누려온 당연한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은 시대가 올 것이다. 그리고 여러 이유로 지금 내 세대는 죽기 전에 그 역사를 목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날이 오면 다시금 지정학은 국가의 생존과 번영에 가장 중요한 요소로 떠오를 것이며 전략적인 외교를 펴는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의 운명은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광복을 기념하던 바로 그날, 유라시아 대륙의 반대편에서 미국의 한 동맹국이 멸망했다. 휴전 직후 남한의 상황을 떠올리면 과연 우리가 아프가니스탄과 아주 다르다고만 할 수 있을까. 국제정치를 지배하는 것은 도덕 책이 아니라 피와 철과 돈이지만 우리는 그를 잊고 있다. 지금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가장 큰 복병은 경제도, 북한도, 사회정치나 지역 대립, 성별 갈등도 아닌, 심지어 출산율도 아닌 바로 이 지지리도 못난 병신외교라고 생각한다. 역사 교육을 처음부터 재고해 볼 때이다. 



*               *               *



또 하나 안타까운 것은 일부 젊은 세대들까지도 이런 명분에 치우친 사고방식에 경도되어 있다는 점이다. 최근 이준석에 대한 논란에 대해 블로그에 달린 댓글들을 찬찬히 읽은 결과 몇몇 사람들은 이준석 사태에 대한 해답으로 젊은 남성들이 더욱 단결하여 자신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당 대표를 더 강하게 밀어줘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전 연령층에서 가장 소수인 세대가, 그리고 투표율이 가장 낮은 세대가, 심지어 세대 내에서도 남녀로 갈라진 집단이 일치단결해서 시마즈처럼 나머지 인구 장벽을 돌파하겠다는 발상은 무모함을 넘어 비장하기까지 하다. 

1600년 세키가하라에서 요시히로가 전방으로 퇴각하기로 결정한 것은 서군이 패주하며 동군 병력의 상당수가 이미 전진하여 생각보다 본진의 방어가 느슨할테니 전방을 지키는 병력이 적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판단에 기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마즈 군은 거의 전멸했으며 다수가 살아남기 위해 두셋으로 구성된 자살조를 끝도 없이 투입해야 했다. 지금 젊은 남성들 역시 전방 돌파를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행동에 나서는 이유는 이것이 실현 가능한 작전이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옳고 이준석 대표가 틀린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미안하지만 세상은 그런 명분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한국의 유권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양분되어 있으며 이제부터 펼쳐질 선거는 세키가하라 전투처럼 양 당의 총력전이 될 것이다. 거기에서 실현 가능성을 계산해보지도 않은 작전은 자살작전이 아닌, 그냥 자살일 뿐이다.



*고려는 후계자 경쟁이 벌어지던 두 후보 중에서 쿠빌라이측을 찾아가 협상을 벌였고 이를 바탕으로 쿠빌라이는 자신의 정통성을 대내외에 알릴수 있었다. 이후 원나라는 고려 원종의 요구를 모두 수용해 고려에서 몽골의 군대와 다루가치를 철수하였고 고려인들이 국호와 사직을 보존하는 것을 허가했다. 게다가 자신의 막내딸을 원종의 아들과 혼인시켰는데 그의 사위 중 비 몽골인 출신은 충렬왕 단 하나였고 제국 내 그의 서열은 7위였다.

**대만과 조선은 태평양 전쟁 발발 시점 이전에 일본의 영토로 병합되었고 심지어 조선이 병합되던 당시의 일본은 서방의 동맹국이었다. 

2021. 8. 13.

완장 찬 준초딩과 반장선거

학교는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는 곳이 아니라 사회화를 학습하는 곳이다. 그리고 중고등학교는 물론이고 초등학교에서도 반장선거를 여는 이유는 어린아이들에게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과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무, 그리고 마땅한 권리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미성숙한 아이들은 이 점을 구분하지 못한다. 반장은 학우들의 의견을 대표하는 자리이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학우들을 지배하는 왕좌가 아니다. 하지만 때때로 내가 반장이니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고집 센 아이들이 있다. 어느 학급이든 반장이 언제 환경미화를 할지, 어떤 방식으로 주번을 정할지, 그리고 급훈을 무엇으로 정할지 독단적으로 결정하지 않는다. 반장은 그저 회의를 주재하여 급우들의 의견과 합의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맡을 뿐이다. 한국에서 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아무리 늦어도 초등학교 4,5학년만 되어도 이 사실을 알지 않는가.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만이 이 사실을 모른다. 이 대표는 윤석열 캠프와는 물론이고 최재형, 원희룡 당사자들과 공개적으로 충돌했으며 윤희숙, 홍준표 등, 심지어는 아군인 유승민과도 마찰을 빚었다. 대선을 불과 반년 앞두고 모든 대선주자들과 충돌하는 당 대표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모두 그가 독단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리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지난 7월 여당 대표인 송영길과 만난 자리에서 이준석이 당의 공식적 입장을 정면으로 거슬러 전 국민에게 재난지원금을 지급하기로 독단적으로 합의한 사건은 그가 당론을 사유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마찬가지로 당내 주요 후보들과의 마찰도 당사자들과 협의되지 않은 일정이나 행사를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과정에서 불거졌다. 

그와 지지자들은 크게 착각하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재난지원금을 전 국민에게 지급하는 것이나 토론회를 여는 것이 맞느냐 틀리느냐가 아니라 그가 전례 없이 독단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린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혁신이 아닌 철저한 퇴보다. 박근혜가 당 로고를 빨간색으로 바꾸고 미래통합당이 파격적인 핑크색 로고를 동원하는 것이 혁신과 무관한 일이었듯 수십여 회의 토론회를 열고 토론배틀을 여는 것이 당의 혁신을 대변하지 않는다. 그저 철없이 신난 당 대표의 장기자랑 대회에 불과한 것이지. 게다가 지난 두번의 대선에서 유권자들은 가장 형편없는 토론자에게 표를 던지지 않았나. 

당을 장악하고 선거에서 이긴 대통령조차도 이런 독선적인 결정을 내리면 당 내부의 갈등을 유발하는데 처음으로 이겨본 선거가 내부의 당 대표 경선인 30대 중고 신인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마당에 어떻게 마찰이 없겠나, 충돌이 없기를 기대한다면 멍청한 것이고 일부러 그랬다면 사악한 것이다. 그렇게 그는 당의 이미지 쇄신과 외연 확장을 기대하는 당원들의 기대를 철저하게 배신하고 있다. 정권교체를 희망하는 국민들과 당원들은 이제 그의 입과 페북에 따라 사분오열하여 네 탓 내 탓을 다투고 있는데 책임소재를 따지기에 앞서 대선이 불과 반년 남은 시점에서 이런 사태를 초래한 것을 보면 나는 그를 무능한 당대표라고 부를 수 밖에 없다. 


그의 미흡한 리더쉽은 성적으로 드러난다. 당내의 가장 유력한 대선후보와 쌈박질을 벌이는 돈키호테 같은 당 대표의 달갑지 않은 지원 덕분에 범야권 후보들의 지지율은 하락세에 있으며 여야 1위 후보의 양자대결 결과는 뒤집혔다. 이준석 대표의 말과 페북 포스팅이 20대 남성에겐 카타르시스를 주었을지 몰라도 그들보다 수가 몇 배나 많은 중도/무당층은 그에게서 반감과 피로를 느끼기 때문이다. 이준석은, 아니 준초딩은 20대들의 홍카콜라에 불과하다.* 그리고 과거 박사모들의 청량한 홍씨 탄산음료가 어떻게 중도층을 쫓아냈는지 기억하자. 

어쩌면 일부 지지자들과 이준석 본인은 당과 후보들이 대표의 지시를 충실히 따랐다면 이런 마찰이 없었을 것이라고 옹호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리석으면서도 위험한 발상이다. 대표가 당심을 따라야 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게다가 당 대표란 자리는 합의를 이끌어내는 자리인데 이준석이 그런 노력을 조금이라도 보였던가. 태어나 처음으로 완장을 차 본 코흘리개 아이처럼 제멋대로 지시하고 자신의 지시를 무시한다며 역정을 내는 것은 성숙한 민주주의에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 이준석 대표가 당을 통솔하지 못하는 것은 그가 무능하고 독단적이기 때문이지 결코 어려서 무시당하는 것이 아니다. 나이와 정치경력과 상관없이 그런 리더는 실패했다. 게다가 자신의 무능으로 인한 실패의 원인을 타인과 사회에게 돌리는 것이야말로 여성우월주의에 적대적인 그대들이 가장 혐오하는 태도 아니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비판을 납득할 수 없다고 항변하는 젊은 꼰대들이여, 그렇다면 초등학교 앞에 서서 열 살짜리 아이에게 묻길 바란다, 내가 반장이니 내 마음대로 장기자랑도 하고 소풍지도 정하고 참가자들을 채점하고 상벌을 내리려고 하는데 학우들이 말을 안듣는다고. 인생 최대의 관심사가 초통령 유튜버의 근황인 그 어린아이들도 당신들을 힐끔 쳐다보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저씨 그러시면 왕따 돼요" 



*이 블로그를 시작한 이래 토론으로 가장 많은 댓글이 달린 글이 바로 이전에 포스팅한 이대남과 테스토스테론의 저주(링크)라는 사실과, 이 블로그의 주 방문자층이 젊은 남성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준석이 모든 20대들에게 청량감을 주는 지도 심히 의문이다.

2021. 8. 7.

이대남 그리고 테스토스테론의 저주

때때로 어떠한 현상을 이해하려면 표면의 존재가 아닌 부재를 살펴보아야 할 때가 있다. 세월호 사건을 추모하는 것은 인류애지만 그가 동시에 천안함 사건에 대해 입을 다문다면 그것은 정치인 것처럼. 최근 붉어진 한 양궁 선수에 대한 논란도 마찬가지다. 20대 남성들은 안산 선수가 sns에서 사용한 몇몇 단어들 때문에 분개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들이 화를 내는 진짜 이유는 지난 몇 년간 사회가, 그리고 주류 언론이 그들에게 엄격한 자가검열을 강요했는데 그것이 이중잣대였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지난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낸 한 선수는 자신의 팬들에게 "노무노무 고맙습니다"라는 포스팅을 올렸다가 공개적으로 사과를 했고 한 유명 유튜버 역시 해당 문구를 자신의 영상에 삽입했다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았다. 

나를 포함하여 저들의 인터넷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윗세대들이 보기에 오조오억이나 웅앵웅이 뭐가 문제냐며 젊은 남성들을 타박하겠지만 그렇다면 노무노무는 왜 문제가 되었나, 그리고 왜 우리는 그때 침묵했던가. 이대남들이 분노하는 진짜 이유는 자신들의 말과 입이 억압당하고 검열당할 때 주류언론과 윗세대들이 소극적으로, 때때로 적극적으로 동조했다는 데에 있다. 따라서 이 현상을 이해하려면 표면의 웅앵웅을 볼 것이 아니라 그 이면의 부재를 보아야 한다. 그들의 표현의 자유에 무관심했던, 우리 여론과 관심의 부재를.

그리고 지금 이 젊은 남성들은 우리가 저질렀던 것과 동일한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그들 역시 표면의 현상에 집착하느라 수면 아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또다시 정치적 오판을 내리고 있다. 그리고 이 실수는 자신들을 더욱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               *               *

공권력의 성추행을 고발하여 명성을 얻은 박원순 시장이 공권력으로 성추행을 저지르다 들통나서 자살하는 바람에 열린 보궐선거에서 오세훈 후보는 여당 후보를 57.5%대 39.2%라는 압도적인 차이로 누르며 시장직에 복귀했다. 불과 1년 전에 서울 시민들이 여당에 지배적인 의석수를 안겼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분명 이는 엄청난 변화였고 그 배경에 대해 다양한 분석이 나왔다. 그중 20대 남성들의 해석은 다분히 이색적이었는데, 오세훈 후보가 성평등 관련 질문들에 답변을 거부했는데 이런 반 페미니즘 선언이 유권자들의 전폭적 지지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런 그들의 독특한 세계관은 젊은 이준석이 제1야당의 당 대표가 되며 더욱 강화되었다. 반 페미니즘을 외치는 젊은 남성이 구체제의 인사들을 제치고 당의 얼굴이 되는 것을 보며, 집을 마련하는 것도 취직도 여의치 않았던 20대 남성들은 최초의 정치적 승리를 맛보았다. 하지만 인류사에서 가장 커다란 패배는 모두 작은 승리로부터 출발했다. 이 두 사건으로 이십 대 젊은 남성들은 오만이라는 함정에 빠졌다. 마치 그들이 너무나 사랑해 마지않는 당 대표의 페르소나가 된 것처럼. 그리고 누군가는 그들에게 경종을 울려주어야 한다.

19년 대선 총 투표수 (연령별/성별)

지난 대선은 20대 남성들의 투표율이 가장 높았던 선거였지만 그들의 정치참여도는 여전히 처참하다. 지난 대선에서 20대 남성은 고작 228만 표를 행사했는데 이 숫자는 그들이 주적으로 여기는 40대 남성의 절반에 불과하고 심지어 동년배 여성보다도 50만 표나 더 적다. 산술적으로 보면 20대 남성의 정치적 영향력은 인천광역시의 투표수와 크게 다르지 않다. 구월동의 한 주민이 선거 직후 우리 인천이 승리의 주역이라고 외친다면 그들의 현실 인식엔 크나큰 결함이 있는 것 아닐까?

이런 착각은 야당의 당 대표 선거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국민의 힘에 당비를 내는 책임당원은 약 28만 명이고 그중 50대 이상이 72.8%로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20대는 고작 3.9%, 30대는 7.7%에 불과한데 그런데도 이준석 대표는 43.8%의 득표로 2위 나경원 후보(37.1%)를 큰 표 차로 이겼다. 젊은 남성들은 젊은 당 대표라는 표면을 보고 있지만, 이 승리의 진짜 함의는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50대 이상의 보수층이 정권교체를 위해 전략적으로 30대 당대표를 밀어 줬다는 데에 있다. 즉 이준석의 승리는 20대의 지지가 아닌 중년/노년층의 양보 덕이다. 게다가 책임당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핵심 보수층이 탄핵에 찬성한 바른미래당 인사들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원들이 얼마나 절실하게, 또 전략적으로 움직였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젊은 남성들은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 그들은 50-70대들의 양보와 협력을 자신들의 승리, 즉 그들의 패배로 간주하고 있으며, 이준석 대표는 그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당내 주요 대선주자들과 대립각을 세우고 합당 과정에서 안철수와도 파열음을 내고 있다. 당내에서 다수인 80%는 외연을 확장하기 위해 양보를 하는데, 소수인 20%는 점령군 행세를 하고 있다. 각자의 옳고 그름은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선택은 대단히 위험하다. 정치적 소수가 다수를 무시하며 대립하기 시작하면 다음 양보를 기대하기 어렵고 그럼 소수집단인 2030대 남성들은 당내에서는 물론이고 사회에서도 고립될 것이다.

이런 징조는 최근 안산 선수의 페미니즘 논쟁에서 드러난다. 웅앵웅과 오조오억이 젊은 남성들에게는 중요한 주제지만 그 위 세대들에겐 정말이지 생소한 문제다. 나 역시 당신들의 분노를 이해하지만, 그러기 위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했는데 나보다 더 윗세대인 중년 노년층이 그를 어찌 알겠는가. 당신들이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들도 당신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중도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언론이 젊은 남성들의 입장을 대변하지 못하는 것은 페미니스트를 지지하는 거대한 어둠의 세력 때문이 아니라, 당신네들을 제외한 다른 세대들이 이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 사태는 고립된 소수집단이 극단적 주장을 펴면 어떤 결과를 낳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앞으로 벌어질 사태의 프리퀼에 불과하다.  


젊은 남성들이 정치적으로 실수를 저지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한때 그들은 40대 민주화 세대와 연합하여 보수정권을 몰아냈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터무니없이 오른 주택 가격과 줄어든 일자리, 그리고 교육을 잘 못 받았다는 조롱과 모욕뿐이었다. 불과 4년 전 20대 학생들은 그 어느 계층보다도 충성스럽게 문재인 정부를 지지했지만 오늘날 이들의 정치적 입장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특히 20대/남성/학생의 지지율은 4년 전 90%대에서 20%대 초반으로 주저앉았는데 이런 급격한 변화는 한국 정치 역사상 거의 전례가 없는 일이다. 처음 정치판에 뛰어든 그들은 아무런 정치적 경험도, 식견도, 배경도, 지식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과도한 자기 확신을 가지고 있고 대개 그러한 오만은 패배를 부른다. 2017년 그들의 선택이 그러했듯이.

나는 진심으로 20대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길 바라며 그들의 목소리가 나라정책에 더욱 반영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은 더욱 영리해져야 하고 좀 더 성숙해야 한다. 국민의힘 당의 책임당원들 상당수는 탄핵에 반대했던 이들이며 아직도 그들은 바른미래당 인사들을 배신자라고 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박근혜 특검수사를 담당한 윤석열을 대선 후보로 지지하고 있고 바른미래당 출신인 이준석을 당 대표로 뽑았다. 반대로 젊은 남성들은 자신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홍준표를 대선후보로 뽑고 나경원을 지지할 수 있을까. 전략적으로 유연한 계층은 과연 누구일까, 파릇파릇한 20대 청년들이 골다공증으로 골골대는 노년층보다도 더 완고하고 고집 센 이 현상을 뭐라고 설명할까?

작년 주식시장에서 20대 남성의 수익률은 평균 3.81%로 전체 계층 중에서 가장 낮았다. 이에 관한 몇몇 논문들은 그 원인으로 남성호르몬을 지적한다. 평균적으로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높은 집단의 주식 수익률이 낮았는데 이 남성호르몬이 과도한 자기 확신을 야기하고 새로운 정보의 습득을 막으며 사고의 유연성을 억제해 수익률을 낮춘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런 현상은 현재의 20대 남성들의 정치적 태도와도 일치한다. 한때 문재인을 가장 강력하게 지지하던 계층이 가장 강력한 반대 세력으로 돌아서서 특정 사상과 특정 인물을 맹목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강력한 자기 확신과 독단은 지난 2016-17년과 똑같이 닮아있다. 그 과정에서 연합해야 할 장년/노년층을 틀딱이라며 조롱하고, 그들의 양보를 철저하게 무시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기를 원한다. 그것도 야권에서 1/5도 안되는 지분을 가진 집단이, 유일하게 자신의 편을 들어줄 나머지 절대다수를 분노케 하면서. 그런 현실인식을 가진 그들에게 승리를 기대할 수 있을까? 


부디 그들의 선택이 주식수익률과는 다른 결과를 낳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나는 진심으로 당신네들을 응원하기 때문이다. 

2021. 7. 11.

젊은이들의 피로 이루어진 방역

미국의 31대 대통령 허버 후버트는 이렇게 말했다, 전쟁을 선포하는 것은 늙은이들이지만 정작 싸우고 죽는 것은 젊은이들이라고. 이 말은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말이나 다름없다. 우리의 방역은 젊은이들의 피로 이루어지고 있다.

방역의 기본은 사람 혹은 가축의 이동 통제로부터 출발한다. 방역의 효율만 놓고 보면 개인의 통제보다 더 확실한 조치는 없다. 하지만 우리에겐 방역 외에 다양한 목표가 존재한다. 개인의 자유, 경제적 영향, 종교의 자유 등. 어쩌면 극단적인 자연보호론자들은 썩지 않는 마스크를 대량생산하고 인구가 줄어드는 것을 막는 현재의 방역지침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렇기에 정부는 여러 가치와 목표를 고려해서 최적의 조치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사람마다 우선순위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한 가지 만큼은 확실하다. 모두가 방역의 비용을 동등하게 지불하고 있지는 않는다는 것.

노인들에게 인생의 어느 순간으로 되돌아가고 싶냐고 물어본다면 그들은 모두 20대를 뽑지 않을까. 그 질문에 60대로, 또는 지난주 월요일로, 혹은 3살로 돌아가고 싶다고 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시대와 문화를 불문하고 20대 청춘을 예찬하는 수필과 노래가 만들어진 것을 보면 젊음이 인생에서 특별한 시기라는 사실은 너무나 확실하다. 우리 모두가 안다. (20대만이 그 사실을 모른다.) 

그들의 하루는 우리의 하루와 결코 같지 않다. 길게 늘어진 카세트테이프처럼 지루한 노인의 하루보다, 갈 곳은 없지만 집에 들어가는 것도 싫어 부하직원에게 3차를 강요하는 진상 김 부장의 하루보다도 20대의 하루는 몇 배나 더 값지다. 그런 그들에게서 지난 일 년을 앗아간 우리는 또다시 청년들의 청춘을 빼앗으려 하고 있다. 아무런 대가 없이.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정치인들과 꼰대들은 4차 확산의 주범으로 젊은이들을 지목하고 있다. 애초에 따듯한 봄이 오고 여름이 오면 젊은이들이 야외로 몰려나올 줄 몰랐는가. 젊은 층의 확산이 걱정되었다면 50대보다 20대에게 먼저 접종하면 되었다. 백신은 나부터 맞을 테니 너희는 방 안에서 유튜브와 넷플릭스나 보고 있어라, 올 한해 더. 라고 외치는 꼰대들이여, 초기 국경 차단과 백신 확보에 실패해놓곤 K-방역 홍보에 열을 올리는 정치인들이여, 당신들의 얼굴에 비말을 뱉으리. 퉤. 

출처: 질병관리청 (링크)

더욱이 코로나에 걸려도 20대의 치명률은 고작 0.01%밖에 되지 않는다. 그들이 방역수칙을 준수하며 집에 머무는 것은 자신들을 위함이 아니요, 나이든 장년-노년들을 살리기 위함이다. 청년들은 자신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들을 희생하고 있다. 마치 후버의 말처럼 노쇠한 정치인들이 일으킨 전쟁에 투입되는 건 오로지 젊은이들뿐인 것처럼. 우리는 그들에게 커다란 빚을 지고 있음을 잊어선 안된다.

나는 이제 젊다고 말하긴 민망하고, 또 젊지 않다고 말하기엔 억울한 나이에 접어들었다. 그런 나에게 누군가 과거와 미래를 포함한 온 삶을 통틀어 딱 10년만 자유로이 뛰놀 수 있고 나머지 시간은 감옥에 갇혀야 한다면 언제를 선택하겠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20대를 들 것이다. 술에 취해 홍대와 강남역을 오가고, 친구들과 쓸데없는 이야기에 밤을 새우기도 하고, 또 울고 웃고 사고 치고 실수하고 실패하고 또 사랑했던 많은 기억들. 점차 늙어가는 나에겐 너무나 과분한 그런 것들을 젊은이들에게 허용하지 않으면 도대체 누구에게 허락할 것인가. 차라리 그들을 위해 나머지 사회구성원들이 사회활동을 줄이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러니 꼰대들이여 더 이상 당신들의 유흥과 골프, 그리고 정치적 치적을 위해 젊은이들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마라. 당신들은 이미 이들에게서 일자리를 빼앗았는데 이젠 젊음마저 앗아가려 하는가.



인생에 단 한번뿐인 젊음을 방역을 위해 희생해주신 20대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21. 7. 10.

예술인들은 왜 백치가 되었나

나는 예술가가 사회나 정치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경계한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 그들은 그 문제를 이해하고 있지 못할 뿐 아니라 종종 잘못된 방향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아니 정말 많은 경우 그렇다.  

당장 [미술가]와 [환경오염]이라는 단어를 검색해보자. 수도 없이 많은 전시회와 작품들 인터뷰들이 쏟아져 나온다. 작품을 출품한 작가들은 하나같이 도덕적 우월성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두르고 대중들과 사회를 향해 따끔한 훈계를 던진다. 너희들은 문제가 많고 따라서 변화해야 한다고. 명목상으로 너희라는 단어 대신 우리라고는 하지만 그 [우리]라는 단어에 자신들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나 느낀다. 마치 초등학교 선생님이 우리 구구단을 외워보아요, 라고 할 때 자신은 이미 외우고 있다는 것처럼. 하지만 정작 그들의 삶은 어떤가. 한 명의 미술학도를 키워내기 위해서는 방대한 양의 화학물질이 필요하다. 일부 수채화 물감에는 강한 독성이 포함되어 물감의 독성을 검증하는 국제기구도 존재하며 아크릴물감 유화 에칭 금속공예 섬유예술을 위해서는 화학물질들이 어마어마하게 필요하다. 그것들이 얼마나 유독한지 검색해 볼 필요도 없이 냄새만으로도 알 수 있다. 모르긴 몰라도 한 명의 미술가가 평생토록 배출하는 오염물질은 중국 산둥의 공장의 노동자들 못지않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 우리에게 환경오염에 대해 할 말이 있다고?

이러한 모순은 그들이 자주 언급하는 다른 사회문제-자본주의나 기술의 폐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인류 역사상 지금보다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의 비중이 더 많았던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주기적으로 기근을 겪어 인구가 줄던 고대나 중세에는 먹고살기가 바빠 생산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인구를 부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현대의 자본주의, 그리고 과학문명은 일부 계층이 생산에 직접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풍요를 가져왔고 그들 중 일부는 예술인이 되었다. 그들은 우리 사회의 그 누구보다도 가장 기술발전과 과학문명에 철저하게 목 매인 사람들이다. 어느 시대나 경제 불황이 오면 가장 먼저 굶는 것은 예술인들 아닌가. 그들은 우리 사회의 정신을 구성하고 있지만 동시에 물질적으로 사회에 기생하고 있기도 하다. 예술적 표현은 인간의 본능이긴 하지만 식욕보다 앞선 욕구는 아니다. 그러면서도 이 집단이 기술문명과 자본주의를 천대하고 심지어 공격하기까지 하는 것을 보면 생계를 책임진 어머니에게 숟가락을 집어던지는 사춘기 아이를 보듯 마음이 심히 불편하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서 괴로운 수많은 일 중 하나는 한때 사회적 문제에 활발하게 목소리를 내던 예술가들이 하나같이 입을 다물어버렸다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를 외치던 이들이 정치적 노선이 다르단 이유로 특정 배우와 작업을 꺼리고 사회 부조리를 신랄하게 비판하던 가수가 가장 부조리한 정치인을 옹호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몇년 전만 해도 정유라가 받은 말은 명백한 비리라며 노발대발하던 미술평론가들이 문준용이 받은 지원금은 정당한 예술 지원 사업이라고 주장하는 글을 읽다 보면 만감이 교차한다. 파이프를 그려놓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적어둔 마그리트의 작품을 보던 관객들의 심정이 이랬을까. 

성경에 따르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질문 하나를 던진다. 하지만 예수는 다음과 같은 현명한 대답으로 그 함정을 피해 간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문재인의 집권과 함께 갑자기 백치 아다다로 변한 예술인들은 이 구절을 마땅히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학교는 사실상 다른 학생들과 예체능을 분리해서 가르친다. 그들의 전공은 일반 학생들보다 몇 배의 훈련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예술가들은 다양한 교양 지식을 쌓을 여유가 없다.(어디까지나 평균적으로) 따라서 미술을 체계적으로 배운 적이 없는 학생이 대중에게 아그리파 소묘를 가르치는 것만큼이나 예술가들이 대중에게 사회문제에 대해 일갈하고 가르치는 것은 우스꽝스럽다. 예수의 대답처럼 권력자인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남겨두고 고흐의 것은 고흐에게 남겨두는 것이 어떨까. 고흐의 것을 카이사르에게 비비느라 자기모순에 빠져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낑낑대는 글들을 읽노라니 마음이 너무 답답하고 괴로워 맥주 한 캔을 또 따서 들이키게 된다. 그들 덕에 뱃살이 늘었다. 그게 왜 그들 때문이냐고? 뭐 어때. 바야흐로 남 탓의 시대인데. 

2021. 5. 7.

아시아의 미래 4. 문재인의 외교, 매국의 경계에서

옛날 옛적에 신흥 강대국 A가 있었다. 그리고 그를 경계하는 패권국 B, 그리고 B의 식민지인 약소국 C가 있다. A는 대담하게도 전통적 패권국인 B와 전쟁을 벌여 크게 승리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승전국인 A가 B와 맺은 휴전협정의 첫 번째 조항은 전쟁 배상도, 영토할양도 아닌 바로 C의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보장하라는 것이었다. 

약육강식의 국제사회에 저런 의로운 국가가 어디 있냐고? 이는 실제로 벌어진, 당신도 나도 잘 아는 역사이다. A는 일본, B는 청나라, 그리고 C는 조선. 청일전쟁 후 A와 B가 맺은 조약은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그 1항은 다음과 같다. [청은 조선이 완전 무결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하며, 일본과 대등한 국가임을 인정한다] 놀랍게도 승전국인 일본은 2억 냥에 달하는 전쟁배상금이나 영토나 항구보다도 먼저 조선의 독립을 요구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후 어떤 역사가 펼쳐졌는지 잘 알고 있다. 진짜 일본이 자신을 독립시켜준 줄 알았던 고종은 이듬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라고 선언했지만 그로부터 불과 7년 뒤 외교권을 빼앗겼다. 그리고 2년 뒤 열강들이 평화롭게 식민지를 나눠먹는 헤이그 회의에 특사를 보내는 촌극을 벌여 강제로 퇴위당했다. 개인적으로 한반도 3천 년 역사 중 최고의 개그는 바로 이 시기라고 생각한다. 

이 사건은 자주나 외세로부터의 독립, 혹은 중립이라는 단어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어떻게 비틀리고 왜곡될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지금의 문재인 정부 역시 자주와 중립을 외치고 있다.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자폐아처럼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중얼거리곤 하지만 한 나라의 자주와 독립은 아브라카다브라와 같은 주문을 외운다고 이루어지지 아니다. 고종이 혼자 황제국을 선언한다고 대한제국이 진짜 제국이 되는 것이 아닌 것 처럼. 앞서 세 편의 글을 통해 아시아의 미래에 대한 내 개인적 견해를 밝혔다.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문재인 정부의 대외전략을 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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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가 바이든을 sleepy joe라고 조롱한 데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정치인생은 길지만 연로한데다 오바마의 러닝메이트라는 점 외엔 워싱턴에서 특별하게 부각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의 대중적 약점을 정확하게 지적한 별칭이었으니까. 오바마가 시카고의 법조인이었고 트럼프가 기업인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졌지만 바이든은 배경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35년의 상원 의원 재임 기간 중 약 33년을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보낸 외교 전문가이고 바로 그 때문에 오바마의 부통령으로 발탁되었다. 그리고 그런 그가 이끄는 미국의 체스 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트럼프와 바이든의 외교는 매우 다르다.* 대중들은 트럼프를 대외적으로 강경파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협상가이자 비즈니스맨이다. 거친 언사와 태도는 막후에서 거래를 이끌어내기 위한 협상의 기술일 뿐, 그는 여전히 북한이나 중국을 적국이 아닌 하나의 비즈니스 파트너로 대했다. 반면 민주당과 바이든의 대외정책은 선악의 이분법에 가깝다. 민주냐 독재냐. 자유냐 통제냐. 폭력이냐 인권이냐 등. 따라서 그들의 외교에는 타협의 여지가 적다. 악당과 딜을 치는 정의의 용사는 없으니까. 트럼프가 겉으로는 거칠지만 뒤에서는 합의점을 찾아나갔다면 바이든 시대의 대중 외교는 정반대로 점잖은 외교적 수사로 충돌과 대립을 감추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다.

그 가운데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대한민국은 명백히 미국의 반대편에 베팅하고 있다. 정의용 외교부장관은 3월 블링컨 장관 방문 당시 쿼드 참여 요청이 없었다고 부인했지만 미국이 일본과 논의한 사안을 한국과 논의하지 않을 리 없다. 회담 직후 한미 공동선언을 보면 두 나라가 거의 아무런 합의를 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뿐만 아니라 현 정부는 한미 정상회담 전에 시진핑과의 정상회담을 추진하는 등 의도적으로 미국과 엇박자를 냈고 이에 대해 미국은 백신 지원국 중 한국을 제외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등거리외교는 결코 등거리일 수 없다. 형이 옆집 아들과 치고받고 싸우는데 동생이 뒷짐지고 중립을 지킨다면 형은 동생을 어떻게 바라볼까. 더욱이 동맹국들과도 투닥거리기 일쑤였던 트럼프 시대에 중립을 지키는 것과 적과 아군을 나누기 시작한 바이든의 코앞에 대고 중립을 선언하는 것은 매우 다르다. 다시 말하지만 대립의 시대에 중립을 외치는 것은 배신이나 다름없다.

배신이 뭐 어떤가. 그리고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코쟁이 양키들 뒷통수쯤이야 얼마든지 후려칠 수 있는 것 아닌가. 외교의 1순위는 친미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이익이니까. 문제는 우리가 동맹에서 이탈하면서도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데에 있다. 문재인은 노골적으로 친중 노선을 택했지만 한한령은 풀리지 않았고 국내 기업의 중국 사업은 계속 난항을 겪고 있으며 중국인 내국 관광객의 수 역시 회복되지 않았다. 외교를 보아도 중국은 전승절에 참가한 박근혜에게 푸틴 바로 다음의 의전을 제공한데 비해 문재인에겐 모욕에 가까울 정도로 의전을 낮추었다. 이런 태도는 북한도 마찬가지이다. 문재인은 친북이라는 비난을 받지만 그를 대하는 북한의 말과 행동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짜고 맵다. 이명박과 박근혜를 역적 도당이라고 부르던 조선중앙방송은 문재인을 삶은 소대가리라는 참신한 언어로 지칭했고 2차 북미대화가 수포로 돌아간 2019년 여름 그들은 역대 가장 많은 미사일을 발사했다. 외교란 득과 실을 엄정히 계산해야 하는 것인데 문재인의 대외정책은 실과 실만 낳았다. 실성한 사람처럼 실실거리며 북한 이야기만 늘어놓던 부끄러운 모습은 덤이고.

이는 기본적으로 문재인이 사모해 마지않는 중국과 북한이 호혜적이지 않는 국가라는데에 있다. 지난 2편에서 분석했던 것처럼(링크) 호전적이데다 팽창주의를 택한 중국은 주변국들과 미래를 공유하지 않는다. 강탈하려 하지. 그리고 역사적으로 이런 나라나 정치세력의 겁박이 한 번으로 끝난 적은 없었다. 로마는 경쟁자였던 카르타고에게 함선을 부수고 뒤이어 도시 내의 모든 무기를 내놓을 것을 요구했고 카르타고가 이를 받아들이자 얼마 안 가 그들을 멸망시켰다.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일부 지역을 강제합병했는데 연합국이 이를 묵인하자 그는 폴란드를 침공했다. 호전적인 나라의 요구를 들어주다 보면 상대는 부강해지는데 비해 자국의 세력은 약해지기 마련인지라 힘의 균형은 더욱 기울고 상대가 도발할 인센티브를 강화한다. 6:4의 싸움이 버겁다고 약자가 1을 양보한다고 평화가 오겠는가. 7이 된 패권국이 남은 3을 강탈하기가 더 쉬워졌는데. 역사적으로 팽창주의적 국가들의 확장이 멎은 것은 그들의 군대가 무력으로 저지되었을 때 뿐이다.

이런 실패의 배경에는 참여정부에서 밀려나 자신들의 뜻을 펴지 못한 자주파들의 고집이 있다. 노무현 정부 초기에는 대통령을 따라 청와대에 입성한 자주파와 동맹파 간의 대립이 극심했다. 참여정부의 첫 외교부장관이 경질된 이유가 한 외교부 간부가 "영어도 못하고 미국에 가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대미 외교를 하느냐"라며 자주파들이 포진한 NSC를 비난한 것이 언론에 알려졌기 때문이니 당시 갈등의 골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노무현은 미국을 무시하면서 자신의 정치를 펼칠 수 있다고 믿을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취임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이 반미 좀 하면 어떠냐"라고 발언해 큰 파문을 일으켰던 그는 말과는 반대로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위해 애썼다. 경질된 외교부장관의 후임자로 정통 외무고시 출신인 반기문을 임명했고 첫 번째 주미대사로 김영삼 정부에서 외무부 장관을 지낸 한승주를 임명했다. 그가 자신을 주미대사로 임명한다는 소식을 듣고 어리둥절해 대통령에게 "대선에서 당신을 찍지도 않은 나를 왜 주미대사로 임명했는가" 라고 묻자 노무현은 "그렇기 때문에 당신을 임명하는 것이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뒤이어 한국은 테러와의 전쟁에 나선 부시 행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지해 영국에 이어 3번째로 큰 규모의 병력을 파병했고 미국은 다분히 호혜적인 FTA로 그에 화답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과 함께 청와대에 입성한 운동권들의 철학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져있는지 빠르게 파악했고 그들 대신 관료들을 등용했다. 반면 당시 민정수석과 비서실장을 역임했던 문재인은 자신의 동지들이 밀려나는 것을 대단히 못마땅하게 여겨, 청와대에 돌아오자마자 한때 노무현이 내쳤던 인사들을 모두 모아 다시 경제, 부동산, 외교를 맡겼다. 특히 그는 애초부터 관료들과 동맹파가 정책결정에 참여할 여지를 봉쇄했다. 첫 외교부장관은 통역사 강경화였고 사상 최초로 4강 대사를 모두 비외교관 출신으로 임명했다. 심지어 주미대사로 노골적 반미주의자인 문정인을 고려했다가 미국 측의 거부로 철회하였으니 사실상 동맹외교는 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노무현의 인사와 극명하게 대비되지 않는가. 그 결과가 어땠는지는 문재인이 집권 초기에 천명한 한반도 운전자론과 베를린 선언이 어떤 운명을 맞이했는지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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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내가 진동하는 민족주의자들이 외교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하는 인물이 있다. 명청 교체기의 광해군. 그들은 21세기의 대한민국이 그처럼 중립외교를 펼쳐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광해, 남한산성, 그리고 왕이 된 남자 등. 자신이 진보적이라고 주장하는 문화계에서 광해군의 삶과 시대를 그린 작품을 쏟아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지는 해와 뜨는 해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인식은 명나라 같은 미국에 붙지만 말고 뜨는 청나라 같은 중국에게도 잘 보여야한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정말 명이 지는 해, 청은 뜨는 해 였을까. 결코 그렇지 않았다. 청태조가 후금을 세울 당시 명의 인구는 약 1.5억 명, 조선의 인구가 1500만 명인데 비해 여진족의 인구는 50-70만 명에 불과했으며 후금의 전투병력도 고작 10-15만 명으로 이는 도요토미가 조선에 파병한 병사와 일본이 실효지배한 지역의 인구 수가 더 많았다. 오늘날 우리가 도요토미의 명나라 정벌 계획을 망상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청나라의 승리를 점치는 것 역시 불가능했다. 실제로 명의 수도를 함락시킨 것은 누르하치가 아닌 명의 반란군이었고 그 잔여세력들을 후금이 완전히 평정하기까지 약 50여 년이 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이 중원을 제패하고 조선을 정복할 수 있던 것은 광해군의 잘못된 대외정책에도 일부 그 책임이 있다. 역사적으로 만주를 지배한 북방세력이 한반도를 정복하지 못하면 중원을 차지할 수 없었다. 백제/신라를 평정하지 못한 고구려가 그랬고 요나라와 금나라가 그랬다. 대제국을 건설한 몽고인들도 고려를 완전히 정복하고 나서야 남송을 평정할 수 있었는데 지정학적 특성상 한반도가 후방을 노리는 이상 중원 공략에 병력을 집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후금의 지도부 역시 조선의 충성을 받아내거나 한반도를 정벌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렇다면 조선은 이때 명과 연합하여 적극적으로 후금을 견제하나 아니면 명을 배신하고 후금과 연합해 수로로 명의 동쪽 해안선을 따라 병력과 식량을 공급했어야 했다.** 하지만 광해군은 사르후 전투에서 패하고도 북방의 병력을 적극적으로 증강하지도 않았고 명나라와 긴밀히 협력하여 후금을 견제하지도, 그렇다고 후금과 연합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다음 황제가 될 홍타이지가 조선과 협력은 불가하니 반드시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알면서도 명의 만력제가 보낸 수만 냥의 은자로 군대를 키우는 대신 사치품과 비단을 사는데 탕진한다. 반면 명나라는 미온적인 조선의 태도를 보며 조선이 청과 연합하는 건 아닌지 의심했고*** 따라서 연합전선을 구축해 다른 중원 국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북방세력을 견제할 수 없었다. 광해군의 어설픈 중립은 명도 청도 만족시키지 못했으니 만약 명이 청나라를 멸망시켰어도 결코 조선에게 우호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광해군은 중립외교를 편 것이 아니라 사실상 책임을 방기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양측의 눈치만 보면 딱 광해군같이 행동하게 된다. 미중 사이에 껴서 갈피를 못 잡고 양측을 모두 화나게 하는 문재인의 외교도 그렇지 않은가. 흥미롭게도 광해군의 무대책 엉거주춤 외교를 세련된 중립외교로 포장한 것은 바로 일제강점기의 학자들이었다. 한국사를 연구한 이나바 이와키치와 다카와 고조는 "광해군 시대의 만주와 조선의 관계"라는 논문에서 광해군이 명과 후금의 대립 가운데 어느 쪽에도 휩쓸리지 않고 중립을 지킨 택민주의자라고 찬양했다. 이 논문의 발간된 것은 1933년으로 만주사변이 일어난 직후, 일제가 만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인들에게 한만사관(조선인과 만주는 불가분의 관계)을 설파하던 시기이다. 거기에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지는 해(중국)와 뜨는 해(일제) 사이에서 알아서 잘 처신하라는 조선인들을 향한 암묵적 위협도 담겼으리라. 

그리고 흔히 매국노라는 단어는 친일파들을 일컫는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 매국노들과 비슷한 주장을 펼치는 이들을 우리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 

문재인의 외교는 분명 어리석음과 매국, 그 경계에 있다. 


*트럼프와 바이든 외교의 가장 큰 차이점은 미국의 이익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있다고 생각한다. 트럼프는 이를 경제적 문제로 정의한다. 따라서 동맹국들이 점차 군비를 축소해서 미국에게 막대한 국방비를 부담하게 만드는 것 역시 미국의 이익에 반한다. 그의 시각으로 볼 때 서유럽의 나토회원국들이나 불평등 무역을 지향하는 중국이나 얌체 같기는 매한가지이다. 따라서 그는 동맹국들과도 마찰을 빚었다. 반면 바이든은 자국의 이익을 미국식 헤게모니의 확산으로 바라보는데 이것이 미국의 냉전시대의 대외정책에 더 가깝다. 

**도요토미의 중국 정벌 계획이 육군과 해군의 합동작전으로 해안선을 따라 보급을 유지하며 중원으로 육군을 진출시키는 것이었는데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좌초되고 일본의 육군은 평양성에서 공세 종말점에 도달해 패주했다.

***임진왜란 당시 명이 조선에 조기에 군대를 파병하지 않은 것은 조선이 도요토미와 연합해 명나라를 공격할 것이라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2021. 4. 21.

아시아의 미래3. 다가오는 사무라이의 귀환

재테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위와 같은 캔들차트를 한 번쯤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캔들차트가 언제 어디서 발명되었는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캔들차트 기법은 18세기 일본의 쌀 거래상이었던 혼마 무네히사가 쌀 선물시장의 가격 움직임을 분석하기 위해 고안했다고 전해진다*. 같은 시기 조선의 경제활동의 대부분은 여전히 물물교환에 의존했다. 이는 조선과 일본이 엇비슷한 발전과정을 거치다 운 나쁘게도 개화기부터 차이가 벌어졌다는 한국인들의 편견과는 다르게 두 나라가 아주 다른 출발선상에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한반도와 일본의 경제력 차이는 아무리 늦어도 고려 시대 중반부터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일본의 농경지가 한반도의 약 2배인데다 온화한 해양성 기후의 특성상 3모작까지 가능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공업생산력도 뛰어나서 1863년 일개 지방정부에 불과한 조슈 번은 자신들이 직접 주조한 대포로 영국을 포함한 서구의 4개국 함대와 포격전을 펼치기도 했다. 승리했지만 의외의 전투력에 놀랐던 영국군은 자신들과 대적할 수준의 기술력을 갖춘 이 극동의 섬나라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이는 이후 영국이 일본을 식민지로 삼을 대상이 아닌 대등한 국가로, 더 나아가 러시아를 견제할 아시아의 파트너로 여기게 된에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우리의 교과서는 이러한 일본의 역량을 가르치지 않는다. 거기에 개량한복을 입고 이크, 에크와 같은 추임새를 읊조리며 교내를 배회하는 전교조 민족주의자들의 망상이 가미되면 그들의 근대사는 더욱더 초라하게 각색된다. 이는 일부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는데, 미개한 일본이 선진국으로 도약한 것처럼 우리도 산업화를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그 반대급부로 우리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아시아 최초로 그리고 유일하게 자력으로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는지, 또 거기에 어떤 역사적 배경이 있었는지 간과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잠재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한국인 뿐이다. 그리고 나는 이 사무라이의 후손들은 다시금 동아시아의 패자로 부상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제적으로는 당연하고 군사적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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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국방비만 천 조원을 쓰는 나라, 세계 최강의 군대인 미군과 싸워서 이기는 법이 있다. 미군을 3만 명 이상 죽이고 3년만 항복하지 않고 버티면 된다. 그러면 대개 미국의 의회와 언론이 알아서 미군을 쫓아낸다. 6.25에서 유엔군은 3년간 약 4만 8천여 명이 죽거나 실종되었고 베트남전에서 미군은 약 6만여 명이 사망하였다. 공산정권과 정면으로 맞붙은 이 두 전쟁에서 미군은 압도적인 전력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과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미국이 인명 손실을 극단적으로 기피하는 현상은 21세기 들어 더욱 심해졌다. 아프간-이라크 전쟁에서 미군 손실은 비전투원을 포함해 만 5천 명에 지나지 않고 이름만 바꾼 테러조직들이 다시 결성되고 있지만 미군은 전쟁을 매듭지으려 한다. 따라서 미국의 적국이나 단체는 스텔스기인 F22를 상대로 어떻게 방공망을 구축할 것인지, 스트라이커 여단으로부터 어떻게 요충지를 방어할 것인지 고민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3년간 3만 명의 미군을 죽일지만 고민하면 된다. 이 얼마나 손쉬운 전략적 목표인가. 

미군 역시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세계 각국에 자신의 약점을 보완해 줄 전략적 파트너를 심어두었다. 극동에서는 대한민국이, NATO에서는 터키가 전투보병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미군이 돈과 장비를 대면 동맹국이 목숨을 대는 이 간단한 구도로 미국은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하지만 최근 이 구도에도 변화가 생기고 있다. 터키는 나토의 주적인 러시아의 지대공 미사일을 도입하여 동맹국들의 신경을 긁고 있고 대한민국은 노골적인 친중/친북 행보를 보이며 미국과 이견을 노출하고 있다. 이런 변화가 지속된다면 미국이 반세기에 걸쳐 구축한 세계전략이 무너질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새로운 전략 파트너를 모색해야 한다. 그리고 유사시 극동에서 미국이 대한민국 대신 기댈 수 있는 나라는 일본 뿐이다.

일본은 육군을 육성하기에 유리한 장점들을 가지고 있다. 일본은 바다로 둘러써여 중국이나 소련이 선제적으로 공격하기 어렵고 남한의 3배에 달하는 인구와 막강한 공업 생산량 덕에 병력과 물자를 충당하기도 용이하다. 게다가 생산시설 역시 동쪽에 분포되어 있어 적이 공업지대를 파괴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육군을 육성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동맹국들 중 아무도 일본의 재무장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자국과 전면전을 펼친 일본이 대규모 군대를 육성하는 것이 불편할 것이고 또한 다른 동맹국인 한국의 반발을 가져온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심지어 일본 스스로도 자신의 재무장을 거부했다. 6.25전쟁이 터지자 미군은 일본이 육군을 재건해 극동 방위의 한 축을 맡기를 바랐지만 수상 요시다 시게루는 이를 거부하는 요시다 독트린을 공표하곤 자국 내 경제발전에 전념했다.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에게 훈도시 속까지 탈탈 털린 일본인들은 전략적으로 총칼보다 돈을 택한 것이다.

문제는 이런 역학구도가 변하고 있다는데에 있다. 태평양전쟁에 참전해 일본과 싸운 마지막 세대의 대통령인 W.H. 부시**는 2018년 사망했고 미국인들의 기억 속에서 가미카제와 진주만의 흔적은 점점 옅어져가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일본이 재무장을 거부한 것은 과거 일본군이 중앙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폭주하며 나라를 멸망으로 몰아넣었던 기억과도 연관이 깊다. 하지만 현 자위대는 그런 과격파들과는 거리가 멀고 또 자국 경제가 성숙기에 접어든 만큼 일본의 전략목표가 경제발전보다 이젠 대외 팽창에 초점을 맞출 가능성이 크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이 미국에게 위협이라면 이는 일본에겐 몸서리치는 공포라는 뜻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일본은 더욱 재무장을 서두를 것이다.(링크) 이런 변화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미일 양국의 최근 성명서를 살펴보면 명백하게 드러난다. 새롭게 출발한 바이든 행정부는 중국을 압박하는 전선을 구축하는 데 있어 계속해서 엇박자를 보이는 한국 정부보다 일본과 더욱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평화헌법의 개정과 재무장이 논의되지 않았을 리 없다. 육군이 빠진 반쪽짜리 군대로는 북한과 중국의 위협에 대응할 수 없으니까. 

우리는 일본을 노쇠하여 침몰한 국가로 업신여기는 가장 큰 이유는 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20년을 겪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 경제는 명확하게 디플레에서 벗어나 본궤도로 진입하기 직전이며 국내총생산 역시 작년 우한 폐렴의 충격에서 벗어나 올해 약 4% 성장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1980년 후반의 일본의 장기 침체가 시작된 원인중 하나가 미국의 노골적인 견제라는 점을 생각하면 중국을 견제해야하는 미국이 반대로 이젠 일본에 힘을 실어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무엇보다도 태평양전쟁 후 일본이 수백 년이나 앞선 산업 인프라를 바탕으로 잿더미와 원폭의 폐허에서 다시 일어났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들이 잃어버린 xx년 시리즈를 연장할 가능성도 낮다. 미국의 안보우산 아래서 평화라는 배당금으로 배를 한껏 불린 사무라이가 다시 칼을 쥐는 것은 시간의 문제다.  

문제는 이런 변화가 대한민국에 결코 이롭지 않다는 것이다. 미국이 한일간 분쟁이 재발할 때마다 우리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던 것은 남한의 전략적 가치 때문이었는데 일본이 그 역할을 일부 분담한다면 한국의 입지는 과거보다 좁아진다. 게다가 자칫하면 일본과 한국이 군비경쟁을 벌일 가능성도 있는데 양국의 경제력 차이를 고려하면 이는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게임일 뿐 아니라 자칫하면 미국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상황이 된다. 이는 대단히 위험하다. 지리적 여건만 보면 미국이 한국을 버리고 일본을 택할 수는 있어도 일본을 버리고 한국을 택할 순 없으니까.

한 역사학자는 한반도의 역사를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충돌로 해석했다. 대륙과 해양세력 중 어느 한쪽이 부상하게 되면 그들은 다른 한쪽을 침략하기 위해 반드시 한반도를 지나게 된다고. 그리고 지난 50년은 전통적 해양세력이었던 일본은 군대가 없는 비정상적인 상태를 자처했고 중국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주변국보다 가난한 시기를 보냈다. 그 결과 양 세력의 충돌의 기점이었던 한반도는 최대의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허니문은 끝났다. 대륙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호전적인 국가가 들어섰으며 일본열도는 히키코모리처럼 칩거하던 기간을 마치고 외부로 팽창할 준비를 끝마쳤다. 당신과 내가 살아갈 미래의 국제정세는 지난 50년과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세계 최초의 상품선물시장 역시 17세기 일본에서 태동했다.
**그는 전투기 조종사였는데 복무 당시 일본군이 포로로 잡은 자신의 동료 조종사의 인육을 먹는 사건이 벌어져 일본에 대해 비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아시아의 미래4. 문재인의 대한민국, 병신외교와 매국의 경계.

2021. 4. 20.

아시아의 미래 2. 바둑을 버리고 체스판에 앉은 시진핑

바둑과 체스. 두 게임에 내재된 철학은 아주 다르다. 체스나 장기는 기본적으로 세가 같은 두 군대가 전장에서 마주 보고 전투를 펼치는 것인데 비해 바둑은 빈 땅에 두 국가가 같은 생산력을 가지고 세를 쌓아가는 과정을 풀어낸다.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두 게임의 다른 철학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체스의 목표는 상대의 지도자를 제거하는 것인데 반해 바둑의 목표는 상대보다 많은 영토를 차지하는 것이다. 체스는 상대의 말 위로 이동해야 그를 잡을 수 있다. 하지만 바둑은 전투가 생략되어 있고 포위당한 적은 자동으로 항복한다. 체스에서는 상대 말을 잡으면 그 즉시 게임에서 소멸하지만 바둑에서는 사로잡은 상대의 돌이 훗날 나의 자원이 된다. 

이러한 차이는 소규모 유목사회의 전투와 대규모 농경 기반 중앙집권 국가의 전쟁이라는 관점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체스에서는 병종의 차이가 커서 룩과 비숍 그리고 폰은 기능이 아주 다르다. 유목 민족에게 일상이었던 소규모 전투에서는 개별 전사들의 능력과 역할이 극명하게 달랐으리라. 하지만 단기간에 농민들을 대규모로 징집해 전쟁에 내보내던 중앙집권 농경국가의 전쟁은 바둑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백대 백의 싸움에서는 한 병사의 역량 차이가 두드러질 수 있어도 수십만 병사들이 맞붙는 싸움에서는 개인이 금세 지워지기 마련. 또한 포로의 처우도 달랐다. 유목 민족의 전투에서 포로는 죽이거나 전투불능이 되지만 국가와 국가 간의 전쟁에서 확보한 상대 병력과 영토는 바둑에서처럼 훗날 나의 자원이 된다. 이를 고려하면 문헌상으로는 둘 다 오래된 게임이지만 실제 태동은 체스나 장기가 바둑보다 더 오래되지 않았을까.

요약하면 체스는 전술을 바둑은 전략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중국이 중원을 3천 년간 지배해 온 것은 전술보다는 전략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사실 전술면으로 볼 때 한족의 전투능력은 참으로 형편없었다. 그들은 상고시대부터 근대까지 유목 민족들이 남하할 때마다 한결같이 흠씬 두들겨맞곤 했으니까. 고대 중국 문화를 정점에 올려놓은 당나라도, 세계 최강의 몽고의 일부였던 원도, 그리고 현대의 중국보다도 넓은 영토를 확보한 청나라 모두 한족이 세운 나라가 아니었다. 하지만 현재 그 이민족들의 명맥은 대부분 끊기고 모두 한족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었다. 결국 중국이라는 거대한 판위에서 3천 년간 벌어진 게임에서 한족은 체스에서 지고 바둑에서 이긴 셈이다. 

하지만 현재의 중국은 그 바둑판을 걷어 차고 체스판으로 옮겨 않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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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은 미국을 상대로 한 체스에서 점차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홍콩의 일국양제는 사실상 무너지고 있으며 중국이 대만에 군사적으로 개입해도 미국은 대항할 군사적 수단이 많지 않다. 거기에 미얀마의 군사 쿠데타를 암묵적으로 지원한 중국은 곧 뱅골만으로 나아갈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으니 미국의 전통적 봉쇄 라인은 여기저기 구멍이 뚫리고 있다. 온전한 핵보유국이 된 북한을 통제하기 위해 미국은 베이징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게 되었고 남한에는 노골적으로 친중 색채를 드러낸 정부가 들어섰다. 경제적으로도 중국의 국내총생산은 2010년 일본을 넘어 미국을 추격하고 있으며 자신의 강화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국제기업들과 자신의 무역 파트너들에게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최근 H&M과 나이키가 중국 당국이 신장지역에서 벌이는 광범위한 인권탄압을 비판하자 중국 소비자들은 두 브랜드를 겨냥한 불매운동을 펼쳤고 그 불똥을 피하기 위해 몇몇 기업들은 공산당과 인민들의 입맛에 맞게 마케팅전략을 수정하는 것이 그 예이다.

과거 서구식 경제성장 모델이 완전하고 유일한 해법이라고 생각했던 수많은 자유진영의 학자들은 중국이 조만간 내부적 갈등에 직면해 자연스레 체제가 변화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들의 예언은 결코 현실이 되지 않았다. 중국보다 부자인 나라는 이제 미국 하나뿐이지만 당의 권력은 더욱 소수에게 집중되었고 IT 기술의 발전으로 여전히 국가는 국민들을 강력하게 통제하고 있다. 중국 대중들에게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더이상 낯설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천안문 시위와 같은 민주화운동이 재발할 가능성은 낮다. 중국인들은 경제발전을 이룩하고 중국의 정치적 위상을 회복한 당을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이 신뢰하고 있으며 시진핑은 그런 인기를 등에 업고 독재로 나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가 이끄는 중국은 궁극적으로 실패할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는 그가 장기적 시각보다는 단기적, 전략적 목표보다는 전술적, 즉 바둑이 아닌 체스의 방식으로 국가전략을 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세를 불리는 것이다. 바둑에는 잡을 상대의 킹도 퀸도 없다. 그저 더 많은 집을 얻는 쪽이 승리할 뿐. 과거에 시대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제국들은 모두 이 방법을 충실하게 따랐다. 로마는 점령지를 단순히 약탈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돈과 인력을 들여 수도와 도로를 설치하고 로마식 건축물을 세웠으며 로마의 법과 사치품을 들여왔다. 그리고 한번 로마의 삶을 맛본 속주의 원주민들은 다시는 야만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렇게 몇 세대가 지나고 나면 그들은 로마의 시민이 되어 자발적으로 로마의 가치관과 영토를 확장하는 군단의 최전선에 합류했다. 가깝게는 소련과 미국의 대결도 마찬가지였다. 냉전은 단순히 두 강국의 대립이 아니라 무엇이 인간을 더 풍요롭게 하는가에 대한 인류 차원의 물음이었는데 소련은 공산주의가 더 나은 삶을 가져다준다고 주장했고, 미국은 자본주의가 그 해답이라고 외쳤다. 그리고 두 강국은 70여 년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진영을 늘리고 상대 진영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애썼다. 세계 제일 강대국이 극도로 빈곤한 남한이나 월남을 지원한 것은 경제적 이득 때문이 아니었다. 미국은 단순히 자유진영의 영역을 늘리기 위해서 달러와 자국민의 목숨을 지불한 것이다. 그렇게 인류사의 대부분의 장은 바둑의 룰에 따라 전개되었다.

인간 사회에서 집단을 확장하는 가장 빠른 길은 무엇일까? 바로 사상을 퍼트리는 것이다. 호모사피엔스 외에도 개미나 벌과 같은 사회적 동물이 있고 저들도 전쟁을 벌이지만 이런 동물들의 결속력은 DNA에 기반하고 있다. 따라서 세력 싸움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길은 같은 DNA를 가진 개체를 늘리는 것 밖에 없다. 다른 유전자를 가진 개체를 아군으로 포섭하는 방법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사람은 사상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유대감을 형성하고 집단을 이룰 수 있다. 심지어 그 집단을 위해 목숨도 바칠 수 있다. 이슬람교도들이 다른인종을 같은 무슬림이라는 이유 만으로 형제라고 부르는 것을 보라. 심지어 사상은 DNA보다도 강한 결속력을 지니기도 한다. 6.25를 겪으신 옛 어르신들이 입버릇처럼 공산주의에 빠지면 형제자매도 몰라본다는 말을 되뇌시지 않았는가.

따라서 모든 제국들의 영역은 그들의 이데올로기와 함께 팽창했다. 그것이 철학이든, 종교든 혹은 사상이든. 알렉산더의 제국은 헬레니즘과 함께 확장되었고 오스만의 영역은 이슬람교와 함께, 그리고 나폴레옹의 군대는 혁명정신과 함께 커졌다. 유전적으로 마케도니아인이나 투르크, 혹은 프랑스인이 아니어도 그들이 퍼트린 사상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점령지의 백성들은 제국의 시민이 될 수 있었기에 자발적으로 입대하여 제국의 확장에 목숨을 바치곤 했다. 마치 바둑에서 내가 사로잡은 돌이 차후에 상대의 집을 메우는 것처럼. 반면 전파할 이데올로기를 갖추지 못한 제국들은 빠르게 붕괴했다.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세운 몽고의 몰락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팍스 아메리카나를 건설한 오늘날의 미국도 그렇다. 그들은 자유무역과 민주주의라는 복음을 세계에 전파하였고 거의 대부분의 나라들은 이를 자신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였다.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박정희가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와는 아주 거리가 먼 방법으로 한국의 발전을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개도국에서 벗어난 것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스템 덕분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리고 소수의 진성 친북주의자를 제외하면 미국의 방식이 번영과 발전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발적으로 미국이 퍼뜨린 가치관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심지어 입으로는 사회주의자를 자처한 조국이나 한때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신봉한 림종석 동지조차도 사모펀드를 없애고 자녀의 미국 유학을 금지한다고 하면 당장 투쟁에 나설 것 아닌가. 이처럼 집단을 확장하는 이데올로기의 힘은 너무나 강력하다.

따라서 미중대립이 어떻게 끝날지 가늠해보려면 미국에 대항하는 중국의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현대의 중국인들을 규합하는 핵심 이념은 공산주의도, 전체주의도 아닌 바로 중화사상이다. 뭘 하든 어딜 가든 중국이 최고라는 이 자뻑주의는 중국을 고립시킨다. 처음부터 중국인으로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면 이 사상을 받아들일 수 없으니까. 당장 2차 6.25전쟁이 발발했다고 상상해보자. 미국인들은 남한 사람들과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구호를 공유할 수 있지만 전선의 반대편에서 중국군이 "5천 년 중화의 영원한 번영을 위하여!"라는 민족주의 구호를 외친다면 바로 옆의 북한군은 돌격하다 말고 그들을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볼 것이다. 이제껏 인류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유전적 한계를 벗어나 국가라는 거대한 집단을 이루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집단인 중국은 유전자에 기반한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로 회귀했다.* 

그리고 그 한계는 중국이 패권국을 지향할수록 더욱 커질 것이다. 영국이 홍콩의 자치권을 언급하거나 프랑스가 티베트의 인권을 거론했을 때 내정간섭이라며 반발하던 중국은 대한민국이 사드를 배치하자 곧장 자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에게 보복했다. 19세기 영국이 홍콩을 99년 동안 빼앗아간 것을 비난하던 중국은 스리랑카가 중국 국영기업이 제공한 차관을 상환하지 못하자 스리랑카 북동부의 항구를 99년 동안 차지하는 계약을 맺었다. 이런 중국의 행보에는 아무런 철학도 원칙도 없다. 그저 무한 이기주의를 외치는 무한도전의 박명수만이 겹쳐 보일 뿐. 중국의 한 강경파는 트럼프의 관세 보복이 이어지던 시기에 환구시보에 기고한 사설에서 "트럼프는 세계의 미움을 받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미중 분쟁에서 중국의 편을 들어주는 나라가 없다"고 한탄했다. 그도 그럴것이 트럼프의 임기는 고작 4년이지만 저들의 중화사상이 앞으로 5천 년 더 지속될지 누가 알겠는가.** 그런데 과연 인류 역사에서 도전자가 동맹 하나없이 패권국가로부터 세계의 헤게모니를 빼앗아 온 적이 있었던가. 

하지만 시진핑은 이런 구조적 한계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격대지정(차차기 지도자를 이전 지도부가 결정)과 칠상팔하(68세 은퇴)원칙을 어기고 원로들이 세운 집단지도체제를 무력화하고 있으며 부패 청산이라는 명목으로 경쟁자들을 탄압하여 내부적 반발을 마주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처한 독재자들이 흔히 선택하는 카드는 외부의 위협을 부각하는 것이다. 지난 3월 18일 알래스카에서 미중 고위급 회담이 열렸는데 여기서 중국 대표가 외교적 관례를 한참 벗어난 수위로 미국을 비난한 배경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황제를 꿈꾸는 시진핑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기에 그는 단기간 내에 중국 원로들과 인민들에게 성과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는 대국적인 시각으로 전략을 설계할 시간이 없다. 그래서 그는 더더욱 전술에 매진하는 것이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중국은 늘 가장 부유한 지역 중 하나였다.  18세기까지 중국의 영아사망률은 영국보다 낮았으며 청나라가 운용하던 북양함대는 19세기 서양 열강들에 견주어도 못지 않은, 세계 10위권의 군사력을 자랑했다. 그런 중국을 최빈국으로 몰락시킨 것은 서태후의 사치도, 태평천국의 난도, 아편전쟁도, 일본 관동군도 아닌 바로 마오쩌둥이었다. 마오가 펼친 쇄국정책,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은 차례로 중국의 산업과 문화를 파괴하였고 자유진영에 속한 인도나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같은 공산국가였던 베트남과 심지어 공산주의의 종주국 소련과도 전쟁을 벌였다. 미국이 손을 내밀어 주기까지 중공은 세계로부터 고립된 외톨이였으며 그 결과 처음으로 중국은 최빈국으로 전락했다. 마오쩌둥은 정적을 견제하고 제거하는 체스 게임에는 강했지만 서구문물을 제대로 경험한 적도 유학한 적도 없어 세계사의 흐름에 어두웠던 근시안적 리더였기 때문이다.

반면 그의 뒤를 이은 덩샤오핑은 달랐다. 프랑스와 소련에서 유학하며 르노 자동차 공장에서 노동자로도 일했던 그는 중국의 미래전략을 체스보다 바둑의 룰로 이해했다. 그는 미국이 깔아놓은 포석에 따르지 않는 나라에겐 미래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흑묘백묘론을 내세우며 중국의 개혁개방을 이끌었다. 중국의 최고 국수였던 덩샤오핑은 후대 지도자들에게 두 가지 훈수를 남겼는데 하나는 1인 독재를 막을 격대지정의 원칙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앞으로 적어도 100년 동안 미국과 대립하지 말라는 유언이었다. 그가 남긴 신의 한 수는 마오 사후 40여 년간 독재자의 출현을 막고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경제성장을 이끌었다. 하지만 지금의 시진핑은 덩샤오핑의 두 가지 유산을 폐기하고 중국을 고립시키고 독재를 택한 마오의 길을 따르고 있다. 심지어 무리수를 두어 가며 정적을 제거하고 암투를 펼치는 그의 방식은 덩샤오핑의 바둑보다 마오의 체스와 너무나도 닮아있다. 과연 그 미래는 어떨까? 나는 역사 속에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민족주의를 핵심 철학으로 내세웠다가 실패한 제국이 또 하나 있다. 바로 나치 독일. 소련과의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나치는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동유럽과 소련의 동쪽 영토를 점령했는데 당시 스탈린의 공포정치에 시달리던 현지인들은 처음에는 하켄크로이츠 깃발을 흔들며 독일의 진군을 반겼다고 한다. 하지만 동유럽에서 슬라브인들을 몰아내고 순수 아리아인의 터전을 건설하려 했던 나치는 그들에게 매우 적대적이었고 얼마 안가 현지인들은 파르티잔이 되어 틈만 나면 나치의 예비대와 보급선을 공격했다. 아리아인으로 다시 태어날 수는 없었던 그들 입장에서는 공산주의자가 되어 소련 편에 서는 것 외엔 다른 선택이 없었다. 그렇게 6주 만에 프랑스를 무너뜨린 유럽 최고의 체스 플레이어였던 독일은 그렇게 동유럽이라는 바둑판에서 패배했다. 

**정작 과거의 중화사상은 현재의 중국이 택한 노선과 정확하게 정 반대였다. 일례로 조선이 건국된 후 명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정립하면서 두 나라 사이에서 분쟁이 발생했는데, 조선은 1년에 3번 조공을 바치겠다고 주장한데 비해 명은 3년에 한 번만 바칠 것을 요구했다. 황제가 주변국에게 공물 좀 작작 바치라고 주문하는 이 코메디같은 사건은 조공이 기본적으로 호혜적 무역의 성격을 가지기 때문에 발생했다. 명의 통치이념을 설립한 주자는 황제는 공물을 적게 받고 많이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에 따라 명나라는 조공을 받으면 그보다 몇 배나 더 많은 답례품을 회사라는 이름으로 제공했다. 그래서 조공이 잦아질수록 명이 적자를 보는 구조였다. 그러니 주변국들이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것을 마다할 리가 없다. 명나라의 이런 대외정책은 주변국들 내부 투쟁에서 친명파들이 득세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에서도 자주적 성향을 가진 정도전이 실각하고 친명 정책을 내세운 태종이 즉위하자 명나라는 조공을 1년에 3번 허용하겠다고 양보했다. 그렇게 주변국들은 앞다투어 볼품없는 향토품을 싸들고 명나라에 찾아가 황제의 곳간에 쌓인 비싼 진상품들을 털어왔고 자발적으로 명의 헤게모니에 복속되길 원했다. 명의 중화사상은 한족이 아니더라도 주자학을 받아들인 민족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고 심지어 경제적 혜택까지 주었다. 임진왜란 이후 조공무역에서 최혜국 대우를 받던 조선이 명이 멸망한 이후에도 소중화를 자처하며 명의 연호를 19세기까지 사용한 것을 보면 명나라가 무역에서 손해를 보는 대신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것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다.


다음편 아시아의 미래 3. 일본의 부상



2021. 4. 18.

아시아의 미래1. 대만을 지배하는 자가 한반도를 지배한다

영국의 금융사학자 니얼 퍼거슨이 다소 공격적이고 급진적인 칼럼을 올렸는데 현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하다고 생각하니 한 번씩 읽어볼 것을 권한다.(링크)

그는 미국이 다양한 전략적 목표를 지닌데 비해 중국은 단 하나의 목표, 통일된 중국을 지향하기 때문에 미국이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이 크고 그로 인해 미국, 더 나아가 서양이 지배해 온 헤게모니가 몰락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글의 마지막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대만을 지배하는 자는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선진적인 정치체제와 우수한 인력과 금융 시스템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인구와 생산력에서 밀려 세계 1위 자리를 내어준 영국에서 태어나고 수학한 그의 배경 때문일까, 미국의 몰락을 내다보는 그의 주장은 급진적으로 들리지만 적어도 대만을 지배하는 자가 한반도를 지배할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대만에서 일어나는 일은 한반도에서 반복될 것이다. 반드시.

영국과 제국의 헤게모니를 이어받은 미국이 경쟁자들을 몰락시키는 전략은 늘 같았다. 상대를 국제무역에서 고립시키는 것. 그리고 그 핵심은 바로 바다였다. 영국은 2강국기준이란 법을 도입해 2위와 3위의 해군을 합한 것보다도 더 강한 수준으로 해군력을 유지하였고 더 이상 그 준칙을 유지할 수 없었을 때 그중 한 나라(미국)와 동맹을 맺었다. 그 결과 영국과 그 후계자 미국은 세계정세를 결정지은 모든 전쟁에서 상대를 말려 죽였고 그 전쟁은 이미 시작하기도 전에 승패가 결정 나 있었다. 나폴레옹을 견제하기 위해 영국은 해양을 봉쇄했고 나폴레옹은 여기에 대항하여 당시 세계 GDP의 절대비중을 차지했던 서유럽을 봉쇄했지만 이는 애초에 불가능한 목표였기에, 그를 어긴 러시아를 정벌하려다 몰락했고, 1차 세계대전 발발 시 세계 2위의 해군력을 자랑했던 빌헬름 2세의 제국해군은 발트해와 지중해로 나뉘어 산발적인 도발 외엔 종전까지 별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도 영국은 독일의 해상무역을 압박했고 미국은 일본에 석유 금수조치를 가해 전시경제에 크나큰 타격을 가했으며 소련 역시 세계무역시장에서 사실상 봉쇄당하는 바람에 결국 경제적으로 붕괴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미국의 대중 전략이 어떻게 펼쳐질지는 쉽게 가늠해볼 수 있다.(링크) 미국은 중국을 둘러싼 우방국들의 군사거점들을 연결해 유사시 중국의 무역을 봉쇄할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항하는 중국의 세계전략은 미국의 봉쇄망에 구멍을 뚫어 활로를 확보하는 것이다. 중국의 2013년에 시진핑이 일대일로를 주창한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사족이지만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선 러시아가 반드시 필요하다. 미국은 과거 러시아를 봉쇄하기 위해 친중 외교를 펼쳤으며 마찬가지로 중국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러시아가 필요하다. 따라서 트럼프가 그랬던 것처럼 바이든 행정부 역시 러시아에 강공책으로 나서기 어려우며 이에 따라 러시아가 동부 유럽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묵과할 것이라 생각한다.)

최근 들어 항공운송산업의 발전으로 비중이 조금 줄어들긴 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물류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해운이다. 따라서 중국의 해양 진출을 봉쇄하는 것이 핵심이고 그 키는 바로 남중국해에 있다. 만약 중국에게 동북과 동남 중 하나를 택하라면 그들은 주저 없이 동남을 택할 것이다. 베이징이 지리적으로 북쪽에 있고 또 북한과의 외교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극동의 정세도 중요하지만 실리적으로, 그리고 근대화 과정에서 찢어졌던 중국의 재통일이라는 국가적 사명 때문에서라도 남중국해는 중국이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요충지이다. 

여기서 만약 중국이 대만을 확보한다면 미국의 대중 최전방 기지는 대만 대신 오키나와가 되어야 하는데 오키나와의 면적은 대만보다 1/15에 불과한 데다 대만의 동쪽 끝부터의 거리가 600km도 되지 않아 대만에 배치한 단거리 미사일로도 타격할 수 있기 때문에 전력자원을 더 후방으로 배분해야 한다. 무엇보다 유사시 경제력이 집중된 중국의 남쪽 지역을 노릴 수 있는 중화민국의 상비군 20만 예비군 160만에 이르는 우방을 잃는 것은 미군에게 결코 대체할 수 없는 뼈아픈 손실이다.

이런 대만이 없다면 미국은 대중 정책을 전면적으로 수정해야 하고 한정된 자원으로 같은 효과를 내려면 동아시아의 전략 자산들을 재배치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예산과 병력은 방대하지만 결코 무한하진 않으니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희생될 것은 단연 한국이다. 대만이 없다면 중국에 대규모 상륙작전을 펼치는 것은 불가능한 옵션*이 되고 그렇다면 한국의 지정학적 중요도도 낮아진다. 중국이 한반도와 남중국해 중 택하라면 남중국해를 택할 것처럼 미국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물론 주한미군을 철수하지 않겠지만 주력 방어선이 일본으로 후퇴하는, 위 지도에서 A에서 B로 주 봉쇄선이 이동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B가 바로 그 유명한 애치슨 라인이다. 

Acheson Line

남한 GDP와 인구의 약 절반에 달하는 대만이라는 우방을 잃는다면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미군은 국방비와 전략 자산들을 더욱 남쪽으로 재배치할 것이고 이는 결코 남한에 유리하지 않다. 한때는 공산권의 일본이라고 불리던 북한의 경제가 곤두박질친 것이 미군의 원조를 받던 남한과 군비경쟁을 펼치느라 가용자원을 국방에 몰아넣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우리의 미래는 더욱 어둡다. 남한과 북한의 경제와 인구 차이는 60배/2배지만 남한과 중국의 차이는 10배/28배에 달한다. 무엇보다 그런 상황이 되면 미국이 동북아 방위전략에서 일본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고 이는 남한의 대일 외교에서도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이미 이런 징후가 여러 군데서 드러나고 있다. 

나는 시진핑이 이끄는 중국의 헤게모니에는 근원적인 문제가 있어 궁극적으로 미국에 패배하고 세계적 패권국가로 성장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역사에서는 세계의 패권을 놓고 경쟁하다 패배하고서도 지역의 패자로 남은 사례도 많다. 과거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했지만 결국 오키나와를 자국의 행정권 아래로 편입한 것을 보라. 이처럼 중국의 패배가 꼭 한국의 승리, 혹은 독립을 의미하지는 않을 수 있고 궁극적으로 대만을 지배하는 자가 한반도를 지배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주장이 급진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글의 서두에 링크한 니얼 퍼거슨의 글을 다시 읽고 오길 바란다. 대만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 대신 고작 한반도를 차지한다는 주장은 너무나 신중하고 심지어 소박하게 들리지 않는가. 


다음 편: 바둑을 버리고 체스판에 앉은 시진핑은 어떻게 실패하고 있는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맥아더는 장개석의 중화민국군을 중국 본토로 상륙시키는 안을 구상했고 이후 이는 미군이 휴전협상에서 중공을 압박했던 가장 중요한 카드 중 하나로 사용되었다. 현재도 주한미군이 육군으로 중국의 북쪽을 압박하는 것은 힘들지만 대만까지 없다면 중국은 상륙군 방어전략을 동북방으로 집중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어렵게 된다. 그리고 특히나 베트남 패전 이후 미군은 장기간에 걸쳐 인력손실이 커질 수 있는 방어형 전략을 기피해왔다.

2021. 3. 13.

도조 히데키와 아스트라제네카

일본제국의 희생자는 중국인이나 한국인만이 아니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서 총 280-310만 명의 일본군이 전사했는데 그중 거의 절반에 가까운 120-150만 명은 아사, 혹은 기아로 인한 질병으로 죽은 것으로 집계된다. 가장 많은 일본군을 죽인 것은 미국의 함포사격도, 장개석이나 모택동도 아닌 바로 일본제국의 장군들인 셈이다. 무능한 지휘관은 적보다 무섭다는 말이 이보다 더 잘 맞을 수 있을까.

메이지유신 이래 내전을 거쳐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끈 경험 많은 군대와 장교들이 어떻게 그렇게 타락했는지 알 수 없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군 수뇌부는 세계 전사에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게 무능하고 부패했다. 예를 들면 제대로 된 보급계획 없이 정글로 수십만 명의 부대를 밀어 넣으면서 사령관인 무다구치 렌야는 "일본인들은 초식동물이라 길가의 풀을 먹으며 진군하면 된다"라고 주장했고, 한 장군은 가미카제 작전으로 수도 없는 젊고 경험 있는 조종사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뒤 자신은 위궤양을 핑계로 군 수송기에 창녀들과 위스키들을 가득 담고 온천 휴양에 나섰다. 자국 군인들을 소모품으로 여긴 것은 나치나 스탈린도 마찬가지였지만 일본 군부는 병사들이 소모품이란 개념조차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전시내각의 총리, 도조 히데키가 있었다. 관동군 장교 출신인 그는 특유의 정치 감각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총리 자리에까지 올랐는데 태평양전쟁에서 처참한 지휘능력을 보여준 최악의 상급 지휘관들은 대부분 도조 히데키의 파벌이거나 그의 손으로 임명된 사람이었다. 이 처참한 비극을 한 사람의 책임으로 몰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하나를 뽑으라면 단연 그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오명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일본군의 항복을 금지하고 무의미한 자살 작전을 옥이 부서진다는 은유로 미화하며 죽음을 종용한 이 괴물은 정작 자신의 목숨은 끔찍이 아꼈다.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 천황이 아무런 조건 없이 연합군에게 항복하자 당시 군부대신이었던 아나이 고레치카는 천황의 명에 따라 항복문서에 조인한 뒤 전통적 방식으로 할복자살하였고 천황의 항복 명령을 받아든 몇몇 고급장교들도 마찬가지로 그의 뒤를 따랐지만 도조 히데키는 멀쩡히 살아있었다. 전쟁에서 아들과 남편을 잃은 수많은 유족들과 미망인들이 그에게 죽으라며 편지를 보냈고 심지어 그를 대면한 영관급 장교 한 명도 그의 면전에 대고 죽으라고 했지만 그는 미군이 도쿄에 입성하는데도 죽기를 거부하며 꿋꿋이 살아있었다.

천황이 항복한 지 한 달 가까이가 지난 9월 11일, 맥아더 사령관은 도조 전 수상을 포함한 전범들을 모두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날 아침에 그의 자택에 헌병들이 들이닥친다. 그는 전범으로 체포되면 사형될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제서야 죽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도조는 자살하며 군복을 갖춰 입지도 못했고 사무라이의 방식으로 할복하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총알이 빗맞아 자살에 성공하지도 못했다. 무사도를 종교처럼 떠받들던 일본군의 수장이 그마저 똑바로 못하다니. 신념처럼 공기반/소리반을 외치던 박진영이 알고 보니 음치라고 해도 JYP의 연습생들조차 당시 일본인들만큼 당황하진 않았으리라. 결국 도조 히데키는 자신이 악 받쳐 죽이라고 명령했던 미군 병사의 피를 수혈받아 살아난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여러 문서들을 보면 1944년 일본 군부는 자신이 이미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 수뇌부는 병사들의 자살 작전을 강요하는 바람에 사상자의 대다수가 전쟁 후반부에 발생했다. 표면적 이유는 천황제의 유지와 태평양전쟁 이전 일본의 영토를 보존하는 것이었지만 그들의 전후 행적을 보면 가장 큰 관심사는 자신들의 전범 기소 여부였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수십만 병사들을 굶겨 죽였으며 더 나아가 1억 국민들에게 천황과 자신을 위해 죽을 것을 명령한 셈이다. 이오지마의 바위섬에서 먹을 것이 없어 포로와 전사자들의 인육을 뜯어먹으며 동굴에서 연명하다 결국 미군의 화염방사기에 불타 죽은 병사들을 두고 옥처럼 부서졌다고 예찬하던 도조 히데키, 그의 마지막이 베를린을 탈출하라던 보좌관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자살했던 히틀러의 최후보다 추잡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런 내로남불 때문이리라. 

*               *               *

그리고 우리는 도조 히데키의 정신을 이어받은 정부를 보고 있다. 나는 백신 전문가가 아니지만 그래도 다수의 구성원들이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맞는 것이 맞지 않는 것보다 우한코로나로 인한 피해를 줄이는 데 더욱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최초의 백신인 제너의 종두법보단 훨씬 안전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과학적으로 옳건 그르건 국민들은 AZ를 불신하고 있다. 그 공포의 근원이 합리적인가를 두고 따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든 공포는 비합리적이기 마련이니까(링크). 훌륭한 정치 지도자는 어떻게 그 비합리적인 공포를 잠재울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과 여당의 대응은 너무나 실망스럽다. 문 대통령은 첫 접종이 시작되던 날 마포구 보건소에 방문해 접종 장면을 지켜보았고 선거개입으로 재판 중인 김경수 경남 도지사는 모의 접종 훈련에 참여해 빈 주사기를 구경하다 왔다. 그러고서 국민들에게 불안해하지 말고 AZ를 맞으라는데 누가 그 말을 믿겠는가. 한국에서 발병하지도 않은 허구의 광우병에도 기겁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데 실제로 발생하는 부작용과 아나필락시스를 걱정하지 말라는 말은 대중에 대한 모욕이자 조롱이다. 

도조 히데키가 자국의 젊은이들의 육신을 죽인 것은 식량과 보급 없이 미군의 함포사격과 폭격이 이어지는 남태평양의 정글 속으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린 날이지만, 그들의 정신을 죽인 순간은 바로 그가 자살에 실패한 날이었다. 마지막까지 구차하게 살아남으려던 그의 비굴한 최후는 일제가 강요하던 전체주의와 무사도, 그리고 천황에 대한 믿음이 한편의 허황되고 조잡한 사기극에 지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코로나가 처음 발발한 후 문재인 대통령과 여당은 수도 없는 실책을 저질렀다. 국경 봉쇄에 실패했으며, 지나치게 일찍 경제활동을 재개했고, 백신이 나오기도 전에 의료진들과 싸움을 시작했다가 역풍을 맞았다. 방역수칙은 계속해서 엿가락처럼 변형되어 이젠 외우기조차 어렵고 정부는 K백신의 홍보에 열을 올리느라 세계 11위권의 경제대국이 백신 접종은 100위권 밖으로 밀려나 리투아니아나 페루보다도 뒤져 있다. 코로나의 극복 과정에서 정부가 보여준 역할은 태평양전쟁의 일본 군부만큼이나 무능하고 한심하고 처참했다. 그리고 청와대는 이 방대한 희극서사의 화룡점정을 찍었다. 너희는 최전방에 서서 AZ맞아라 나는 후방에서 화이자 맞을게, 라고 외치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라. 식민지와 본토의 청년들을 사지로 몰아넣던 도조 히데키의 모습과 소름끼치도록 일치하지 않는가.

세계최초로 접종을 거부한 채 남의 백신접종을 구경하는 국가지도자


2020. 12. 23.

황제 네로의 시, 그리고 문준용의 예술

율리우스-클라우디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코스. 우리에게 이런 길고 과장된 이름보다 폭군 네로라는 악명이 더 친숙한 그는 스스로를 빼어난 예술가라고 생각했다. 네로 황제는 그리스 문화에 흠뻑 빠진 나머지 무대를 온통 그리스 식으로 꾸민 뒤 직접 무대에 올라 시를 읊고 노래와 연기를 선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심지어 그리스를 너무나 동경한 나머지 속주였던 이 지역에 대한 세금까지 감면해 주었다. 

그렇게 그리스에 강박적으로 심취했던 그가 올림픽에 끼어들지 않을 리 없다. 그리스의 211회 올림픽은 서기 65년에 개최될 예정이었는데, 이 대회에 참가자로 출전하기로 마음먹은 네로는 정무를 제쳐두고 피나는 각종 예술 공연과 스포츠를 연습했지만 기대한 만큼 기량을 향상시킬 수 없자 황제의 이름으로 명령을 내려 올림픽을 2년 미뤄 67년에 개최하도록 했다. 그 올림픽에 출전한 황제는 음악 연주를 포함한 7개의 종목에서 우승했지만, 한 역사학자는 네로의 연주와 발성, 그리고 그가 작성한 시는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야유를 보내거나 공연장을 떠나면 목숨이 위태로웠기 때문에 관객들은 억지로 환호를 보냈다고 기록했다. 체육 경기에서 네로의 상대 선수는 황제를 이길 시 사형당할 것이란 협박을 받았고 심지어 전차 경기에서 네로는 전차에서 굴러떨어져 중도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심판진은 유권해석을 통해 황제에게 월계관을 수여하기도 했다.

한 번의 그리스 순회공연에서 총 1808개의 상을 받았다고 전해지는 그는 반란군에 의해 쫓겨 자살하는 순간에도 "훌륭한 예술가인 내가 죽는구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자신의 정치적 능력에 절망하는 가운데서도 스스로의 예술성만큼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던 그, 네로는 진심으로 자신을 황제이기 이전에 예술가였다고 믿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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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로는 과연 훌륭한 예술가였을까. 동시대를 살아간 타키투스는 그의 재능이 형편없었다고 기록했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없지는 않다. 무엇보다 폭군 네로의 악행이 원로원과 이후 기독교인들에 의해 과장되었다는 지적과 그가 그리스의 문화예술을 후원한 공을 분리해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어쨌든 그의 노래와 시를 접해볼 수 없는 우리가 네로의 예술가적 기질을 평가할 수 없는 일 아닌가. 하지만 네로의 공연을 지켜본 동시대의 평론가와 관객들이라고 황제를 평가할 수 있었을까. 더욱이 붉은 망토를 두르고 황금색 투구를 쓴 로마 근위대가 자신을 날카롭게 노려보며 허리춤에 찬 검을 매만지고 있는데. 네로는 자신을 황제보다 예술가라고 믿었지만 그의 예술성을 지탱하던 것은 바로 군대와 황제의 권력이었다. 

지금 우리는 바로 이 아이러니를 마주하고 있다. 대통령의 아들 문준용 씨는 파라다이스 재단과 서울시에서 각각 3천만 원과 1400만 원의 지원금을 받아 코로나가 확산되는 가운데에서도 전시회를 열어 논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는 아버지의 권력과는 무관하게 자신은 작품성으로 인정받은 예술인이라고 항변했다. 하지만 누가 이를 증명할 수 있겠는가. 그는 항상 청와대 비서실장의 아들, 제1야당 대표의 아들, 국회의원의 아들, 그리고 당선인의 아들이었는데. 매우 폐쇄적이면서도 취약한 문화예술계에서 이처럼 강력한 배경을 지닌 작가를 비평할 배짱을 가진 평론가나 화랑은 존재하기 어렵다. 있다고 해도 곧 사라질 것이다. 마치 네로의 노래에 얼굴을 찡그리고 야유를 보내다 끌려나간 이름 없는 한 로마의 시민처럼. 예술가로서의 네로가 단 한번도 황제의 권력으로부터 벗어나 비평받아본 적이 없듯 작가 문준용 역시 한번도 아버지의 후광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작품 활동이나 비평을 업으로 삼지 않는 나는 그저 관객에 불과하니 문준용의 예술성을 평가할 위치에 있지도 않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그와 비슷한 배경을 가진 미술학도들과 작가들은 내 주변에도 수도 없이 많지만 누구나 문 씨와 같은 기회를 얻은 것은 아니라는 것. 또한 나는 좋은 예술, 혹은 나쁜 예술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단지 잘 팔리는 작가와 안 팔리는 작가가 있을 뿐이지. 그런데 고작 만 38살의 신진작가가 판화를 250장이나 찍어내면서 장당 $600에 파는 것은 적잖이 당황스럽다. 국내외에서 비슷한 시세를 가진 다른 작가들의 이력이 어떤지 한번 찾아보기를 권한다. 시장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의 첫 작품을 본 것은 아직도 꽃가루가 흩날리던 2017년 5월의 봄날이었다. 새로운 계절과 함께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며 우리의 마음은 공정과 정의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있었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새로운 한 발을 내디딜 거라 믿었다. 사실 그랬지. 다만 그 한 걸음의 방향이 반대였을 뿐. 삼청동을 거닐던 나는 예술에서 정치를 읽어내는 것을 보며 나 자신이 편협한 것은 아닌지 부끄러워했지만(링크) 그 순간 예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정치와 맞닿아있었다. 


나는 율리우스 포프처럼 기술에 의존하는 예술도 훌륭한 예술이라고 믿고, 예전에 내가 박원순의 서울시가 설치한 슈즈트리를 옹호한 것(링크) 처럼 정치적 배경과 작품은 분리해서 평가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나의 불편함이 편협한 마음에서 나온 것일까 두려워 아끼는 몇몇 평론가들의 문준용 작가에 대한 평을 찾아보았고 그 결과는 아래와 같다. 그리고 그의 작품을 기억하는 나의 인상도 아래와 크게 다르지 않다.



2020. 9. 16.

스가 요시히데는 새로운 한일관계를 시작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 악명 높던 아베 신조 총리의 임기가 끝나고 그 후임자로 스가 요시히데가 일본의 행정부를 이끌게 되었다. 스가 총리의 일본은 한국과 새로운 관계를 구축할 수 있을까?

이런 희망을 가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물론 새로운 총리의 취임은 양국에게 손해인 현재의 긴장관계를 해소할 계기가 될 수 있겠지만, 한일관계를 위기로 몰아넣은 근본적 원인을 바꾸지는 못한다. 사실 일본을 오른쪽으로 몰아가는 것은 바로 우리 대한민국이며 우리의 외교정책은 이런 역학구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아마추어들이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틀린 한일관계를 아베의 개인적 성향에서 찾아왔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아베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는 A급 전범용의자로 분류되었던 극우계지만 동시에 아베는 친한파였던 아베 신타로의 아들이기도 하다. 그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는 재일교포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여 그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고 그 친밀한 관계 때문에 선조가 한국계라는 루머까지 있었다. 그 영향을 받아 그가 처음 일본의 총리로 취임했던 2006년, 아베는 첫 방문지로 한국을 꼽았고 그 해 10월의 방문에서 현직 일본총리로는 최초로 국립현충원을 참배했다. 또한 그의 아내, 아키에는 유명한 한류 팬으로 휴대전화 배경화면에 배용준의 사진을 저장하고 일주일에 한번씩 한국어 과외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으니 일본내 극우파에서 아베를 도래인(한국인)의 후손이라며 비아냥대는 것도 당연하다. 현재의 모습과 참으로 놀라운 대조를 이루지 않나. 이런 사례가 고작 아베 뿐일까. 무역분쟁을 취재하던 한국 기자들이 일본의 카메라를 사용하는 것을 지적하고, 한국 협상단에게 의도적으로 무례를 범한 고노 다로 외무대신(현 방위대신)역시 친한파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 고노 요헤이는 (공식적으로는)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바로 그 고노 담화의 주인공으로, 당시 관방장관이었던 그는 약 20개월간 조사를 거쳐 일본군이 위안부 동원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이처럼 No Japan운동의 주적 두명은 모두 한때 친한파, 적어도 지한파였던 이들이다. 하지만 지난 십여년의 세월은 그들을 반한파로 돌려놓고 말았다. 거기에 과연 우리의 역할이 전혀 없었을까. 국제 외교사를 살펴보면 적국 온건파의 입지를 악화시키는 것은 바로 아군의 강경파였다. 북한의 유화적 대외정책을 주도하던 외교라인의 숙청을 불러온 것은 대북문제에서 강경일변도의 정책을 펴던 조지 부시와 공화당이었고 2차 세계대전에서도 영국과 협상을 준비하던 히틀러로 하여금 3천여대의 루프트바페를 동원해 런던을 폭격하게 만든 것은 주전파 윈스턴 처칠 아니었나. 강경일변도로 나서는 상대에게 유화적 태도를 고집하는 것은 간첩밖에 없다. 그런 관점에서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자. 2000년 이전엔 문제가 되지 않던 욱일기는 갑자기 나치의 하켄크로이츠와 동급이 되었으며, 해방직후 반민특위가 지정한 반민족행위자는 688명에 불과했지만 그로부터 60여년 뒤인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는 모두 4,339명을 친일파로 분류했다. 지난 10년간 우리는 일본이 점점 극우적 민족주의에 가까워져간다고 비난했지만 정작 우리가 같은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과거 두편의 글을 통해 아베는 극우로 흐를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하나는 경제적 이유(링크), 또 하나는 한국(과 중국)이 일본의 두려움을 자극하고 있기 때문에(링크). 그리고 이러한 역학관계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후임 스가 총리는 아베노믹스를 계승할 것을 천명했고 한국과 중국의 잠재적 위협은 5년 전에 비해 더욱 커졌다. 몇몇 언론들은 스가 총리의 내각 인사 중 지한파/친한파를 언급하며 전향적인 관계를 점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희망은 실망만을 남길 것이다. 개인적 배경만 두고 본다면 아베와 고노보다 더 한국에 우호적이었어야 할 일본 정치가는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둘은 모두 부친의 노선을 버리고 강강파로 전향했다. 이처럼 선대의 정치적 유산을 중요시하는 일본 정계에서 지한파/친한파의 아들들이 전후 최악의 한일관계를 이끌었다는 사실은 중요한 시사점을 남긴다. 양국의 역학관계는 불과 한 세대만에 친한파를 반한파로 만들 정도로 극심한 마찰을 빚어내고 있다. 

우리는 분명히 일본을 오판하고 있다. 그렇기에 합리적인 전략을 세우고 있지도 못하다. 다시 말하지만 국가 간의 외교는 지도자 개인의 취향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힘의 논리와 실리를 좆는 게임이론에 따라 이루어진다. 명분이나 개인의 호불호에 따라 국가정책을 정하는 것, 그런 병신외교를 펴는 것은 대한민국 뿐이다. 그런 병신외교가 대한제국에 어떤 운명을 안겨주었는지 잊어선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