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대중들은 아베노믹스의 핵심은 무제한 돈풀기로 엔화의 가치를 떨어뜨려 수출을 늘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는 매우 잘못된 설명이다. 잃어버린 20년을 보내는 동안, 일본의 경상수지는 단 한해도 적자를 기록한 적이 없으며 되려 막대한 흑자를 기록해왔다. 게다가 일본이 수출하는 제품들은 주로 가격의 영향을 적게 받는 상품들이기 때문에 통화와 기업실적의 상관관계가 낮아야 한다. 하지만 알다시피 니케이와 엔화의 상관관계는 주요 수출국 중 가장 높다. 무엇보다도 수출이 전체 GDP의 1/6도 안되는데다 고부가가치 상품이 주력인 일본산업이 단순히 환율로 인한 가격경쟁력 하나 때문에 20년째 불황이라는 1차원적인 설명에 설득되기 어려울 것이다. 일본의 진짜 문제는 환율로 인한 가격경쟁력 하나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디플레이션에 있다.(환율은 그 부산물일 뿐이다) 그리고 이는 일본 중앙은행이 경제를 죽일 만큼 통화량을 억눌렀기 때문에 발생했다. 따라서 아베노믹스의 핵심은 통화량을 늘려 소비와 투자를 끌어올리는데에 있다. 여기서 환율의 움직임은 인플레이션 기대치에 따라 변하는 부산물에 불과하다. 달러엔이 폭등할때 니케이가 같이 오르는 이유는, 싼 엔화로 인해 일본 기업들의 실적이 드라마틱하게 좋아질 것을 예상해서가 아니라 통화량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공격적인 조치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통화량이 좀처럼 늘고 있지 않다.
위는 지난 30년간 일본의 M2 증가율 추이를 나타낸 차트이다. 보다시피 아베노믹스가 시작된지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일본의 통화량은 유의미한 수준으로 반등하고 있지 못하다. 95-05년에도 통화량이 현재 수준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디플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중앙은행의 조치가 아직 미흡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단기간에 신용경색을 성공적으로 막은 미국의 통화 증가율은 아래와 같다.
FED는 유래없는 강력한 조치로 폭락하던 M2 증가율을 다시 10% 수준까지 끌어올렸고 이후 디플레이션의 위협이 감소하자 통화량을 안정시켜 현재 6-7%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단순히 차트상으로도 일본과는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왜 일본은행이 본원통화를 공격적으로 늘리는데도 불구하고 통화량이 늘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아베노믹스의 성패는 바로 여기에 달렸다. BOJ의 양적 완화가 FED보다 더 공격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GDP대비 기준) 미국인들과는 달리 일본인들이 돈을 유통하지 않는 이유는 지난 20년간 그들의 삶이 이미 디플레에 맞게 변화했기 때문이 아닐까. 장기침체를 겪은 일본 국민들은 집이나 주식같은 자산을 버리고 현금을 생명줄처럼 움켜쥐고 있다.(아래 표 참조, 빨간색이 일본) 따라서 디플레이션은 대부분의 일본 유권자에게 아주 나쁜 현상만은 아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집을 팔고 월세를 내는 세입자들은 월세가 내려가니 기분좋은 일이고 더불어 엔화 강세로 해외여행 비용과 수입품들이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저렴해지니까. 월급이 오르지 않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미 일본 유권자의 60%는 55세 이상으로 미래에 받을 월급보다 현재 보유한 연금과 예금의 가치가 훨씬 크다. 아베와 BOJ가 아무리 떠들어도 60살의 노인이 은행에서 돈을 빌려 집을 사고 주식을 살 리 없다. 오히려 낮아지는 은행 금리는 기대수명이 20년이나 더 남은 노인을 불안하게 만들어 저축의 역설을 가중시킬수도 있다. 반면 인플레이션이 오면 그들은 매년 더 적게 먹고 적게 소비하며 더 작은 집으로 쫒겨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디플레를 더더욱 지지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일본의 통화량이 증가하지 않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사실 일본은 이미 90년대 중반부터 이와 같은 구조에 진입했다. 아베 이전의 총리들이 바보라서 디플레를 퇴치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인플레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지지를 잃을까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아베는 구조적 모순에 빠져 있다. 그가 성공하기 위해선, 그를 가장 열정적으로 지지하는 이들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들어야 한다. 아마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국수주의적인 언행과 정책을 펼처 국민들로 하여금 경제적인 고통으로부터 눈을 돌리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좀처럼 반등하지 않는 통화량은 국민들이 그 고통으로부터 주의를 떼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한 이코노미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적으로 일본 정치인들이 자국민에게 놀랄 만큼 잔인했다는 것, 그리고 국민들은 놀랄 만큼 그 고통을 감내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맞는 말이지만 현재의 일본은 파시스트 국가가 아닌 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아베노믹스는 실패할 것이다.
*디플레에 빠진 다른 여러 케이스를 조사한 결과, 선진국의 경우 적정 통화량은 평균 6-8%수준이며 장기간 이 수준을 하회할 경우 경제가 디플레이션에 빠지는 것으로 보인다.
안녕하세요 시간이 지난 현재에도 선생님의 과거 칼럼을 읽고있는 독자입니다
답글삭제현 시점에서 궁금한 것이 생겼는데요 2022년 8월 엔저상태로 들어간 지금 아베노믹스가 원하는 바를 이루셨다고 보시나요? 2015년대의 디플레와 브렉시트에도 꼼짝않던 엔고가 애프터코로나 이후 위기상황에서 엔저가 된 것이 일반적인 타 자산시장과 같은 흐름인지 일본의 30년 묵은 경제 흐름을 바꾼 이정표인지가 궁금합니다.
만에 하나 일본 경제의 흐름을 바꾼 것이라면 아베가 죽고나서 아베노믹스가 이루어졌다는 아이러니일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아베노믹스의 핵심은 단순히 엔화의 값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강력한 중앙은행의 이징과 재정지출로 고착화 된 디플레이션을 깨트리는 동시에 사회의 구조개혁을 달성하는, 3개의 화살로 불리는 정책이 바로 아베노믹스의 핵심이었습니다.
삭제하지만 현재 보면 일본의 CPI중 에너지와 식품을 제외한 나머지는 여전히 매우 낮습니다. 전세계가 물가상승에 시달린 덕에 최근 좀 상승하긴 했지만 여전히 1%로 엔화의 약세가 무색할 지경이네요. 반면 개혁은 여전히 요원하고 현 내각도 개헌과 같은 정치적 아젠다에 집중하고 있지, 경제구조를 어떻게 개편할 지 청사진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베노믹스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할 환경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만약 아베의 개혁이 성공했고 이미 일본에서 인플레이션 압력이 피어나는 중이라면 되려 현재의 완화적 정책은 너무 과도한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물론 현재 경제상황이 매우 급격하게 변하고 있어 현 상황이 어떤지 함부로 예단하긴 어렵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답을 알게 되겠죠.
헉..저도 엔화 평가절하의 의미를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디플레이션을 깨트린 결과로서 생각을 하고 썼지만.. 물론 이런 시선을 가지게 된 것도 전부 선생님의 글들 덕분이었습니다. 아베 2기 내각이 집권했을 시기가 제가 고등학생 때였는데 그때 환율전쟁 같은 것을 철썩같이 믿었던 시절과는 확연히 세상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습니다. 우선 감사의 말씀 먼저 드립니다.
삭제하지만 역시 환율만 보는 것이 아닌 물가와 내각 등등 접해야할 정보가 많군요.. 역시 외국어를 배우거나 정보를 더욱 다방면으로 접해야함을 느꼈습니다. 게다가 제가 종사하는 일이 일인지라 일본이 30년묵은 디플레이션을 깬다에 개인적인 베팅을 하면서 일본어를 비롯한 여러 공부를하고 있는데 소소한 요소지만 이것 때문에 개혁의 이정표가 될지 안될지가 궁금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