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그저 어질러진 검은 조각들에 불과했다. 의미없이 각지고, 찢어지고, 뾰족하게 날 선 검은 도형들. 그러나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윽고 흰 직사각형들이 온전한 모습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우리는 늘 존재를 본다. 검게 칠해지고 채워진 그 존재를. 반면 흰색은 공허한 여백이요 부재에 불과하다. 우리는 빈 것에 주목하지 않는다. 하지만 때때로 의미는 존재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재에 있기도 하지 않은가. 마치 이 그림이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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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뱃지는 정치적 아이콘이다. 세월호는 마음 아픈 사건이고 두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되는 비극이며 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일은 인도적 행위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정치가 없다. 하지만 그 뱃지가 정치적 코드로 해석되는 이유는 어쩌면 거기에 다른 죽음들에 대한 추모가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어떤 정치인들은 노란 뱃지를 달고 어떤 정치인들은 천안함 희생자들을 추모한다. 하나의 죽음에 가슴 아파하는 것은 보편적 인류애지만 다른 죽음에 눈을 감아버리는 것은 정치다. 이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존재가 아니라 부재를 보아야 한다. 마치 저 그림이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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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 현실정치로부터 단절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미술관에서 정치를 떠올리는 나 자신이 왠지 편협하게 느껴진다. 아마 금호미술관에서 문준용 작가의 이름을 본 탓이리라. 좀 더 정확하게는 거기서 정치적 의미를 찾아낸 내 탓이겠지. 하지만 정치가 덧칠된 외투를 입은 작품도 충분히 감각적 충격을 건넬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것도 바로 같은 미술관에서, 5월의 어느 날 윤동천 작가의 대형 리본상 앞에서, 가슴이 먹먹해졌던 기분이 떠오른다.
십여년 전, 그날도 그랬듯이.
오늘도 산자는 죽은자의 흔적을 뒤적거리다 흐느끼며 운다.
위, by 프랑스와 모를레
아래, by 윤동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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