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2. 17.

정치적 사안 총 정리

이진법과 십진법의 세계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있다/없다 밖에 구분하지 못하지만 후자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흑백세계의 인간에게 우리가 빨간색이 무엇인지 가르칠 수 없듯 지능이 낮은 이진법의 존재들에게 다면적 세상을 가르치는 것은 너무도 힘겹다. 그러니 이번엔 그 단세포들의 세계로 내려가 yes/no로 내 생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 박근혜 탄핵은 정당한가?
그렇다. 헌법에는 국회가 대통령을 탄핵시킬 절차과 권리가 명시되어있다. 그 헌법에 따른 국회의 대통령 탄핵은 정당하다.

• 대통령 하야 주장은 정당한가?
아니다. 대통령을 뽑고 하야 시키는 문제는 주말드라마 주인공 교체하는 문제와는 다르다. 헌법에 엄연히 대통령을 임기도중 갈아치울 권리와 절차가 명시되어 있는데, 광장에서 여론의 힘으로 대통령을 의지를 꺾어 물러나라고 주장하는 것은 헌법을 무시한 처사다. 우리가 박근혜에게 화가 난 이유가 헌법을 무시해서라면, 우리는 더욱 더 헌법이 보장한 절차에 따라 분노를 표출해야한다.

• 그럼 시위는 잘못되었나?
아니다. 잘못된 구호를 외치더라도, 아무리 멍청한 주장이어도 시위는 정당하다. 그 권리는 헌법에 보장되어있다. 민주주의는 정답을 찾는 방법이 아니라 다수의 의견을 가늠하는 과정이며, 나는 이것이 정치에 있어 최우선 명제라고 생각한다. 특히 어린 중고등학생들이 시위에 참가하는 것을 지지한다. 맞건 틀리건, 그들도 정치적 문제에 대해 끝없이 생각해보고 토론해보는 습관을 익히길 바라기 때문이다.

• 시위 현장에는 종북좌파들의 구호가 울려퍼진다. 시위대는 선동된 것 아닌가.
아니다. 단지 시위에 좌파들도 일부 있는 것이지 악한 의도로 종북좌파가 선량한 시위대를 선동한다고 보기 어렵다. 종북좌파들이 없었다면 시위가 없었겠는가. 촛불행사 진행이나 자금이 좌파적 단체에서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평소 시위를 주도하던 좌파들이 마침 준비되어있었을 뿐, 그걸 빌미로 일반 대중들의 의견을 좌파에게 선동되었다고 보며 무시해선 안된다.

• 폭력과 쓰레기 없는 시위는 시민의식의 성장을 보여주나?
아니다. 물리적 폭력과 쓰레기는 민주주의와 전혀 상관없다. 파리대혁명때는 엄청난 피가 흘렀지만 결과적으로 민주주의의 확대를 가져왔다. 파시스트였던 나치 독일인들과 군국주의 일본인들이 아마 가장 쓰레기를 잘 치우는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훌륭한 시민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쓰레기가 길거리에 넘쳐도 국민들이 투표만 잘하고 평소에 정치에 관심만 가졌어도 한국정치가 여기까지 오지 않았다. 이게 나라냐고 분노하는 인간들은 도대체 뉴스를 보기는 했는가. 과거에도 이런 나라였고 난 한번도 이렇지 않은 나라에서 살아본 적 없다. 본인들이 무식해서 신문도 안보고 관심끄고 살다가, 사방에서 떠드니 그제서야 알고 분노하기 시작한 것 뿐이다. sns에서 가장 정치적 포스팅을 많이 올리는 세대가 2030대인데, 그들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투표를 안하는 세대다. 주말마다 광장으로 나가 시위할 시간에 매번 투표라도 잘 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다. 삼류 국민에 삼류 정치가 따라오는 것이다. 역겨운 자위질은 그만하자.

• 표창원의 탄핵반대의원 공개는 정당한가.
아니다. 헌법에는 국민주권뿐 아니라 양심의 자유도 언급되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양심의 자유를 억압받는 쪽은 박근혜 지지자들이다. 친박의원이든 박사모든, 심지어 최순실도 국민 중 하나이고 그들은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권리를 가진다. 아무리 밉더라도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내가 존중하는 헌법의 기본정신이다. 이는 통진당에게도 박사모나 정의당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에밀 졸라는 말했다. '나는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정치적 자유를 위해 싸운다'

• 박근혜는 멍청한가.
아니다. 박근혜보고 멍청하다고 하는 인간들이 멍청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 선거에서 사실상의 민주 자유선거 사상 최고의 득표율로 대통령이 되었다. 전두환 정권이 무너진 이래 박근혜보다 더 많은 표를 얻은 대통령은 단 한명도 없었다. 그 이전에는 한나라당/새누리당을 이끌며 단 한차례도 선거에서 패하지 않아 "선거의 여왕"이라고 불렸다. 바보는 결코 이런 결과를 낼 수 없다. 박근혜가 바보라면 그 바보에게 진 야당과 박근혜에게 승리를 안겨준 유권자들은 유인원인가. "그건 박근혜의 능력이 아니라 보좌진들의 힘이었다"라고 주장한다면 왜 다른 정치인들은 그런 보좌관을 못 구하는가? 아버지의 후광때문이라면, 왜 박정희의 다른 아들들, 또 다른 대통령의 디른 아들들은 정치계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가?  박근혜는 멍청하지 않다. 그녀가 근무태만에 빠진 것은, 국민들은 대통령이 뭐하는 사람인지도 모르는 멍청이들이란 것을 알기 때문에 나태해 진 것이고, 이제껏 국민들이 비리대통령과 비리정치인들을 지지해왔으니 본인도 비리에 둔감해진것이다. 멍청한 것은 국민이다. 박근혜가 아니다.

• 도덕적으로 타락한 이들만이 정권을 잡을 수 있나.
아니다. 그들은 결코 도덕적으로 더 타락한 것이 아니다. 아마 대한민국 평균의 도덕성이나 그들의 도덕성이나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약한 급우를 두들겨 패는 학생들, 그리고 그를 방관하는 학생들이 갑질하던 우병우를 욕한다. 아이들 앞에서 담배를 태우고 음주운전을 하는 민폐어른들이 최순실을 욕한다. 자기돈으로 밥사먹는게 당연한줄 모르고 부정부패법을 없애달라고 구걸하는 기자들과 공무원들이 차은택을 욕한다. 자신의 부패는 관행이고 타인의 관행은 부패라고 욕하는, 역겨운 위선이 가득하다. 부유함이 지혜로움과 동의어가 아니듯이 무능함은 선함의 동의어가 아니다.

2016. 11. 25.

당신의 지능에 관한 불편한 사실

열살무렵 수업시간에 같은 반 아이들에게 "태양빛이 지구까지 도달하는데 8분이 걸린다. 즉 우리가 보는 태양은 8분전의 태양인 것이다"라는 내용을 발표했던 적이 있다. 대부분의 아이들 뿐 아니라 선생님까지도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고 나는 그들이 왜 이해하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지와 지식의 충돌은 으례 그렇듯이 적개심과 공격으로 번졌고, 결국 지능이 높은 아이는 지능이 낮은 다수 앞에서 입을 다물었다.

멍청한 아이는 나이가 들면 멍청한 어른이 된다. (늙어간다고 자연스레 지능이 높아지지 않는다) 그 이후로도 나는 평생토록 나보다 지능이 낮은 사람들을 상대하며 살아왔기에 그들을 구별하는 법을 잘 알고있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95%는 그 멍청한 다수에 속하고, 그들은 여러 사회적 사안에 대해 생각할 만한 지적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출신대학이 좋거나 암기력이 뛰어나다고 자신이 지성을 갖췄다고 착각하지 마라. 행복한 IQ 120의 영재보다 컴플렉스로 가득찬 아이큐 90의 아이가 더 좋은 대학을 간다. 암기력은 일부 자폐아들이 더욱 유리하다. 어린시절 지능검사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자신이 똑똑하다고 착각하지 마라. 키가 먼저 자란다고 가장 큰 아이가 되는것도 아니며 평범한 지능을 가진 아이들 100명을 대상으로 지능검사를 해봐도 객관식 테스트지의 한계상 25%는 영재로 나온다.

이런 호모 사피엔스의 95%를 차지하는 멍청이들의 첫번째 특징은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앞서 설명한 예로 돌아가면, 선생과 아이들은 빛이라는 것도 다른 모든것들 처럼 이동하는데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과, 본다는 행위는 우리의 망막이 빛을 받아들이는 행위라는 '지식"을 몰랐기 때문에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 멍청하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바로 추가 정보를 듣고나서도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을 스스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멍청한 것이다. 보통 인간을 생각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지적 자극이 아닌 권위, 즉 회초리가 필요하다. 3세기 전과는 달리 우리는 중력이 존재하고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지능이 발달해서가 아니라 학교와 권위를 가진 교사들이 그게 맞다고 주입시켰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시스템이 없었다면 99.999%의 인간은 지구는 네모라고 믿고 중력의 존재를 신경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만약 내 말에 반박하고 싶다면, 당신이 학교에서 배운 '상식'들에 대해 얼마나 의문을 던지고 검증했는지 보라. 당신은 거의 그런적이 없다. 이렇듯 비판적 사고를 펼치기엔 그대의 지능이 너무 낮다.
 
두번째 특징은 그들은 이성과 감정을 분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둘을 완벽하게 분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사실 그 둘이 완벽하게 다른 것이라고도 볼 수는 없다. 감정은 마치 어떤 부스터처럼 특정 상황에서 뇌의 특정 기능을 강화시켜주는 진화적 장치일 뿐이니까. 원시 사회에서는 합리적 판단이 감정적 충동과 다를 일이 적었다. 두려울 때 달아나는 것이 옳았고 화가 날때 상대를 한대 치는게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사회가 진화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발달하자 감정과 이성의 괴리가 벌어진다. 수만명이 맞부딪치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각 병사들은 죽음의 공포로부터 달아나서는 안되었고 다인종 사회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다름'에 대한 본능적 혐오를 억눌러야 했다. 이 일을 가능케 하는 것은 고차원의 지적활동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을 감정과 분리하는 것이 지능의 한 척도가 된다. 일례로 개나 침팬치가 분노라는 감정으로부터 자신을 얼마나 제어할 수 있을까?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옳음과 그름의 명제와 좋음과 싫음이라는 감정적 호불호를 구분하지 못한다.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이와 같은 사례는 수도없이 많다-'그는 선한 사람이야. 왜냐면 나한테 잘해주거든.'(나 하나한테 잘해주는 것이 왜 보편적인 선인가) '그녀는 너무 이뻐. 마치 천사같아'(당연히 성적 매력과 종교적 선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는 마치 수학 문제의 답을 이쁜 글씨체로 쓰여진 보기를 고르는 것 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이지만 모두가 저지르는 일이다. 그러나 멍청한 이들은 이게 어리석은 일이라는 걸 자각하지 못한다. 일례로 여기까지 이 글을 읽고 있는 이는 혹시 분노하며 내 주장을 거부하거나 반박하고 있지 않은가. 당신이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내 주장이 논리적으로 틀려서가 아니라 자기를 멍청하다고 부른게 기분이 나쁘기 때문일 것이다.(그리고 바로 그것이 당신이 멍청하단 증거다)

세번째 특징은 그들이 평범하다는 것이다. 지적 능력이야말로 인간과 다른 동물들을 구분해주는 거의 유일한 기능이며 우리 몸에서 단일조직으로 가장 많은 열량을 소비하는 것은 바로 뇌다. 따라서 지적으로 우수한 사람은 절대로 평범한 발상과 주장을 내놓을 수가 없다. 천재가 괴짜로 보이는 것은 마치 영장류들 눈에 옷을 입은 인간이 이상해 보이는 것과 유사하다. 게다가 멍청한 보통 인간은 스스로 사고하거나 다른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볼 지적 능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집단의 주장과 가치관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 예를 들면 "xxx은 강대국에게 정치적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폭력적인 방법으로 민간인들을 공격했다. 우리는 그들을 무엇이라고 부를까"라는 문제를 두고 xxx에 무자헤딘과 김구를 넣어보자. 당신의 국적이 한국이냐 혹은 아프가니스탄이냐에 따라 답은 사악한 테러리스트가 되기도, 혹은 의로운 애국자가 되기도 한다. 즉 답을 결정하는것은 당신의 뇌와 논리가 아니라 국적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당신은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다. 남들의 답을 컴퓨터처럼 찾아 베끼는 동물일 뿐이다.

그로부터 나이를 20살도 넘게 더 먹었지만 현재의 사회는 아직 10살때의 국민학교 교실과 다를바가 없다. 사람들은 여러 복잡한 사회적 사안에 대해 생각하는데에는 거의 아무런 시간도 투자하지 않으면서 앵무새처럼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데 시간을 쓴다. 같은 호모 사피엔스로서 이를 지켜보는건 매우 거북한 일이다. 코끼리에게 아무리 노력해도 바이올린을 가르칠 수 없고 사슴벌레에게 운전을 연습시킬 수 없듯, 그들 모두에게 사고하는 법을 훈련시키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한 사람이라도 무지의 동굴로부터 끌어낼 수 있다면 이성적으로 대화를 나눌 한사람이 늘어나지는 않겠는가. 어쩌면 인간이라는 종이 이성적이기를 바라는 내 소망이야말로 가장 멍청한 부분인지도 모르겠지만은.

2016. 11. 14.

트럼프, 멍청한 SNSer들을 누르다.

예상을 뒤엎는 선거결과와 함께 백인 진보층의 위선이 들어났다. 경합주, 혹은 민주당이 우세할 것으로 보였던 지역 중 진보 백인들이 주를 이룬 미시건, 위스콘신, 펜실베니아 주는 여론/통계조사와는 달리 트럼프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런 결과가 나올 가능성은 두가지 뿐이다. 여론조사의 표본과 실제의 오차가 컷거나, 아님 그 표본이 거짓말을 했거나. 하지만 미국 대선은 가장 정교하면서도 방대한 통계와 백데이터를 기반으로 여론을 조사하기 때문에 전자의 가능성은 낮다. 따라서 나는 후자의 가능성을 높게 본다. 고학력자인 북서부 백인들은 '나는 남부 촌뜨기 카우보이들과 다르다'라고 주장하며 힐러리를 지지한다고 응답했지만 실제 투표장에 가서는 트럼프를 찍었다. 개표와 함께 들어난 그들의 민낯은 텍사스 카우보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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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미국인들은 트럼프를 지지했나? 이는 국제사회에서 미국이 떠맡을 역할이 21세기에는 달라질 것을 암시한다. 미국은 세계 주요 국가 중 세율이 높은 편에 속하면서 가장 형편없는 복지 시스템을 가진 나라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국민의 세금을 각종 국제기구의 분담금과 군비에 쓰기 때문이다. 정부는 자국인들에게 '미국은 세계의 경찰"이라는 선민의식을 심어주며 과도한 부담을 강요했으나 이제는 이 모델에 한계가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인들은 세계화라는 가치를 위해 손해보며 FTA를 맺는데 이골이 낫고 더이상은 자국 군대를 해외에 파병하는데 돈을 쓰고 싶지 않다고 외친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오바마케어와 트럼프의 고립주의는 국제사회에 퍼붓는 비용을 줄이고 내국민에게 쓰겟다는 점에서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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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수많은 SNSer들이 주장하던 것 처럼 트럼프의 당선은 멍청함의 승리일까?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멍청한 것이다. 그들은 트럼프의 공약이 무엇인지 거의 모른다.(불법이민자를 추방하고 멕시코 국경에 담장을 건설한다는 것 외에는) 트럼프 본인이 이해하고 세운 정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가 내세운 두 핵심 경제공약-재정지출 확대와 금융규제 철회는 지금 현대경제가 마주한 문제들에 대한 정확한 처방이다. 대선결과에 비통해하는 노벨 경제학 수상자 폴 크루그먼(직업: 민주당원. 취미: 경제학)조차도 재정지출의 확대와 통화정책 지원을 강조해왔다. 더욱 웃긴건 트럼프를 얼간이 악마로 취급하던 SNSer들은 자기가 지지하던 힐러리의 공약에 대해선 더더욱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힐러리가 패배한 가장 큰 원인이다. (그리고 얼간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SNSer들이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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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승리로 미국마저 극우의 나라가 되었나? 천만의 말씀. 미국은 본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국가이다. 카톨릭에서 파생한 근본주의자들이 기독교고 그중에서 더 극단적인 이들이 탄압을 피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에 도착했다. 미국은 국민의 40% 이상이 아직도 창조론을 믿고, 불과 15년전만 해도 유명 아이돌 소녀가 혼전순결을 지키겠다고 선언했으며(물론 안지켰지만) 미국의 43대 대통령은 아프간을 침공하며 이를 "십자군 전쟁"이라고 명명했다.(그러면서도 서방세계는 십자군전쟁을 일컫는 이슬람 용어인 '지하드'라는 단어를 범죄와 동의어로 취급하는 이중성을 보인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든 말든 살았든 죽었든 미국인들은 본디부터 근본적 극우 극단주의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나 자신들이 세계의 경찰이라는 선민의식으로 이를 누르고 있었을 뿐이다. 참고로 북한, 시리아 등 대외정책에 있어서는 힐러리보다 트럼프가 더욱 온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에 트럼프의 승리가 전쟁을 불러올 것을 암시하는 짤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SNSer들의 무식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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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대상을 한국인들로 한정해서 보면 더욱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할수 있다. 남의 나라 대통령 선거 결과에 가장 분노하고 있는 세대가 바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투표를 안하는 세대라는 것이다. 이 정치적 3무세대(무생각/무경험/무지식)의 오지랍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나는 바로 그 3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정치는 매우 복잡한 다차원의 방정식이다. 모든 경우에 모두를 만족시키는 해 따위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다양한 가치관을 서로 재보고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후보를 선택해야한다. 하지만 2030대는 정치를 단순하게 선과 악의 대결로 바라보려한다.(왜? 생각하기 귀찮고 아는것도 없고 공부하기도 싫으니깐) 그러니 각 후보의 공약이 뭔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트럼프는 악, 힐러리는 선이라는 구도를 만든 뒤, 아하 하며 넘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겐 미 대선의 결과가 악당이 승리한 디즈니 만화영화의 결말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유아들은 시청자 게시판 대신 sns를 뻘글들로 도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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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민주당과 미국의 민주당은 아주 다르다. 하지만 프로 SNSer들은 마치 모든 나라의 민주당은 선이요, 반대인 보수는 악마들의 집단인 것처럼 떠들고 있다. 통계적으로 사람은 젊어서 민주당을 지지하다 나이들어 보수로 바뀌니,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자신들은 나이들어 악마가 된다는 말이다. 이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노래가 있다. Die young - Ke$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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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한국인들은 미국인들보다 나을까? 2년전 인터넷에 이자즈민 의원이 이민법을 발의한다는 잘못된 사실이 네티즌들 사이에서 잘못 퍼진 적이 있었다. 한국인들의 반응은 미국 레드넥 백인들과 정확하게 같았다. (링크) 저당시 반대서명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근 트럼프를 욕했을 것이다. 이 어리석음과 역겨운 이중잣대에 어찌 침을 뱉지 않을 것인가. 퉤!

2016. 11. 6.

박근혜와 멍청한 대중들

최순실과 그 관련자들은 엄정한 수사를 받아 법의 처벌을 받아야 하고 박근혜는 그에 따른 도덕적/법적 책임을 져야한다. 그리고 처벌은 여기에 그쳐야한다. 나는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에 반대한다.

박근혜의 하야를 외치는 대중들은 현 정치시스템에서 대통령의 역할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멍청이들이거나 그녀를 감정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들이다. 잘못된 결정보다 더 나쁜건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한다는 것인데, 대통령 자리가 공석이 된다는 것은 최순실을 대통령으로 앉히는 것 보다 더 나쁘다. 투표를 통해 대통령이 교체될때도 인수위를 만들어 국정운영에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준비하는 마당에 지금 대통령이 사임하면 향후 몇달간 행정적 외교적 공백은 피할수가 없다. 하지만 지금 사람들은 마치 TV 드라마에서 마음에 안드는 출연자를 하차시키는 문제를 대하듯 대통령의 하야를 외치고 있다.

대충들은 이제껏 정치적 사안에 무관심하고 공부도 안했으며 고민도 안하다 난데없이 길거리로 나와 민주주의에 관한 아름다운 문구들로 자신의 어리석음을 가리려 한다. 드라마와 뉴스를 구별 못하는 이 멍청이들은 박대통령이 하야하여 TV에 더이상 나오지 않는다면 만족하며 집으로 돌아가겠지만 최종결정권자가 없어진 대한민국 국정운영 시스템이 떠안아아 하는 것은 더 심각한 정치적 패닉 뿐이다.

이 바보들에게 상기시켜주자면, 이제까지 단 한번도 대통령의 측근이 비리와 권력남용 및 국정개입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적이 없었다. 군사정권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민주화 투사인 두 김씨 대통령의 아들들은 약속이나 한듯 나란히 수백억대의 돈을 받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형 노건평씨는 봉하대군이라고 불리며 동생의 임기 내내 뇌물을 받고 대통령의 특사에도 개입하다가 걸려 감옥에 갔고,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를 통해 돈 받은 자신의 형을 옹호하고 힘없는 사장을 비난하여 자살시켰다. 이명박은 노무현과 정치적으로 정반대지만 그 비리는 닮아있다. 이명박의 형 이상득씨도 각종 비리에 연루되어 있었고 이명박 본인 역시 BBK 내곡동 사저 등 온갖 정치적 개인적 비리에 휘말렸다.

그러나 양 김의 아들들은 다시 정치활동을 재개했고 친노들은 노무현 대통령의 비리는 쏙 빼놓고 그를 아름다운 기억들로 포장한 영화를 내놓기도 했다. 미국산 쇠고기를 먹으면 뇌가 녹는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외치며 광화문으로 몰려들던 대중은 이명박의 혐의에 대한 검찰수사가 허무맹랑하게 종결되었을땐 집에서 방바닥이나 긁으며 뒹굴다가 얼마 안가 박근혜를 찍었다. 그렇게 모든 대통령의 측근 비리에 대해 사실상의 면죄부를 줘 놓고서 어떻게 이런 일이 다시 터지지 않을것을 기대했는가.

물론 이번 사건의 경우 비리의 주인공이 무지렁이 여성이고 사이비 종교와 성적 추문이 연결되어 있어 참신한 충격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교육수준이나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해서 비리와 국정개입이 용납되는건 아니며,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 청와대에서 굿을 하든 기도를 하든 별 차이는 없다.(샤머니즘은 미개하고 기독교는 합리적이란 말인가) 그리고 헌법이 성적 자주권을 보장하는 한 미혼인 대통령이 과거에 어떤 성적 관계을 가졌든 가지지 않았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결국 이성적으로 내용만을 두고 보면 과거에 지겹도록 반복된 비리와 전혀 다를 것이 없다.

결국 핵심은 제왕적 대통령제 아래 과거의 비리를 척결하는데 무관심했던 국민들이 이런 구조적 문제를 박근혜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데에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에서 최순실 핑계를 대듯, 지금 국민들은 자신의 무관심과 멍청함으로 초래된 국정비리의 모든 책임을 박근혜 하나에게 돌리고 있다. 하지만 이런 시스템 아래선 누가 대통령이 되든 이와같은 재발할 것이며 여당이 아니라 다른 당이 집권해도 또 비리를 저지를 것이고 실제로 그래왔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자면 최순실, 우병우 등 처벌받아야 할 사람들이 엄정히 처벌 받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서 측근비리/전횡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압박을 가할 수 있는 것은 거리의 시위대이다. 그러나 시민들이 목표가 박근혜의 하야에 맞춰 혼란을 자초하면서 또다시 검찰이 권력층에게 면죄부를 남발하는 것을 방치한다면 이번 사태는 주인공만 바꾼 채 다시 재연될 것이다.

분노는 파괴적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그 파괴의 힘이 필요한 적도 있었고 앞으로도 필요할 지 모르나,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대통령 측근의 전횡을 막는 시스템의 구축이 필요할 때고, 분노만으로는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음을 냉철히 깨달아야 한다.

2016. 10. 23.

노무현 대통령은 왜 실패했는가.

그는 국민들의 요구사항을 모두 들어주면 성공하리라 믿었다. 그래서 그대로 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처참한 지지율 성적과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조롱 뿐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가장 큰 문제는 그와 그 보좌진들이 국민들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히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사람들은 집값을 잡아달라고 했지만, 우리 집값을 떨어뜨려 달란 말은 아니었다. 반미주의는 확산되었지만 동시에 미국으로의 교환학생-어학연수는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빈부격차를 줄여달라 했지만, 그러기 위해선 정권의 주 지지자들인 서울과 수도권 국민들의 부를 뺏어서 강원도로 이전해야 했다. 당연히 그것은 다수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일부 공업단지를 제외하면 한반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인 서울과 수도권에서 평등과 분배의 목소리가 높아진 건 아이러니한 일이다. 일상에서 부유층을 마딱뜨려야하는 그들은 자신이 경제적 약자라고 생각했지만, 국가차원의 통계로는 그들 역시 강자에 속했다. 집값을 잡아달라 했지만 우리나라 가계의 70%이상이 집을 보유하고 있거나 상속받을 예정인데 부동산의 전반적 하락을 누가 원하겠는가. 우리 집값은 오르고 (내가 사고싶은) 남의 집값은 빠지기를 원했던 바인데 거시정책이 어디 그렇게 작동하는가.

이와같은 대중의 모순적 요구를 읽어내지 못한 단순함의 한계가 노무현 정권의 실패의 원인이었을 것이다.

2016. 9. 28.

김영란 법이 정말 경제를 망치나?

절대 그렇지 않다. 조폭들을 단속해서 감방에 쳐 넣으면 인근 철물점과 공구점, 병원의 매출이 줄어들 수 있지만 보호비를 뜯기던 상인들의 가처분 소득은 늘어난다. 거시적으로는 사회의 불필요한 비용을 제거하여 사회의 생산성을 높인다. 따라서 조폭들을 단속하는 것은 지역경제에 악영향을 주기는 커녕 긍정적 영향을 준다.

공무원집단과 기자들은 김영란법의 폐혜를 강조하며 요식업계가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국민을 겁박한다. 그럼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뇌물/향응/접대 촉진법이라도 도입해야 한단 말인가. 거시경제를 책임진 재경부장관까지 나서서 상식에 어긋나는 주장을 펴는걸 보면 이 집단이 고하를 막론하고 얼마나 얻어먹는 일에 중독되어있는지 짐작이 간다.

김영란법은 3만원 이상의 밥을 먹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돈으로 사먹으라는 것이다. 요식업계가 그리 걱정된다면 자기 돈을 내고 먹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 모두가 그렇게 하면 요식업계의 수익도 줄지 않을 것이며 사회정의도 구현할 수 있다. 부득불 꼭 남의 돈으로 호사를 누리겠다고 주장하는 저들의 행태를 보니, 이제껏 우리 사회가 얼마나 부패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자기 밥은 자기 돈으로 사먹는게 당연한 줄 모르는 이들이 이토록 많을 줄이야.

역겨운 기분을 달래기 위해 또한번 침을 뱉는다.

퉤.

2016. 7. 24.

오만과 편견, 그리고 시기심.

가끔은 내가 너무 빛나기 때문에 주변인들의 눈을 멀게 한다는 것을 안다. 그들이 그 질투심에 눈이 멀어 나를 찌를 수 밖에 없었다는 것도.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내가 빛날 수 있던건 다른 이들이 당연히 누리는 많은 것들을 가지지 못한 댓가라는 것을. 그리고 믿었던, 내가 아끼던 사람들이 내 목 뒤에 가시를 박아넣을수록 나는 더 많은 것을 잃어간다는 것을.

가장 가까운 동료로 여겼던 이가 내게 등을 돌렸다. 그것으로 그가 어떤 이득을 보았다면 차라리 납득하기 쉬웠으리라. 여긴 원래 그런 곳이니까. 하지만 그는 아무런 댓가없이, 오히려 내가 주는 지원과 호의를 포기하면서까지 내게 등을 돌렸다.

내가 그리도 미웠나보다.

2016. 7. 14.

잘못된 브렉시트 이야기

1. 브렉시트 평가절하하기-조진서 기자의 글(링크)

이 글의 핵심은 브렉시트의 여파가 어떨지도 모르는데다 한국 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기 때문에 시장이 과도하게 반응할때 코스피를 삿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간략하게 경력을 찾아보니 글쓴이는 공대출신으로 스포츠 신문 기자로 커리어를 시작해 MBA다녀와 경영관련 잡지에서 일하며 경제분야에 대해서도 기고하고 있다. 내세울 경력이 외국계 신문사와 해외MBA등이라 그런지, 글의 서두를 '영국이 얼마나 잘난 나라인데 너희들이 함부로 그들을 평가하냐?'라고 시작하고 수백수천명의 이코노미스트들이 한 입으로 영국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가져올 것이란 예상에 반박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글에서는 자신이 맞았단 증거로 영국 주식의 반등을 든다.

브렉시트는 영국 경제에 심각한 위협이고 그와 같은 시장의 인식은 주식의 반등과는 무관하게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위 차트는 GBPUSD환율 차트인데 브렉시트와 함께 파운드는 1주일만에 약 15%하락한 뒤 현재까지 제대로 반등하지 못하고 있다. 브렉시트 직후, 전세계 시장은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 차원에서 시장 안정화 조치를 기다렸고 자산시장의 회복은 그 조치들이 매우 효과적으로 시장의 불안을 잠재웠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주식과는 달리 GBPUSD환율과 영국 국채금리는 브렉시트는 여전히 영국경제에 나쁜 영향을 줄 것을 암시한다. 그럼 왜 주식시장과 다른 시장들은 반대로 움직일까?

그 답은 아마 기업들의 회계장부에 있을 것이다. 영국은 금융 뿐 아니라 무역에서도 막대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그들의 자산이나 수익의 상당부분은 해외로부터 발생한다. 그런데 만약 어떤 충격으로 통화가 크게 평가절하된다면 대차대조표의 해외자산으로부터 평가이익이 발생하게 된다*. 해외부채가 있는 기업들은 정반대의 효과를 보겠지만 일반적으로 위험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기업들은 자산보다 부채의 환위험에 민감하니 헤지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비슷한 일이 손익계산서에서 발생할 것이다. 따라서 파운드화가 빠르게 평가절하되고 동시에 주식이 반등한 것을 두고, 브렉시트가 영국에 부정적인 사건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결론이다.

한 증권사 친구는 브렉시트 투표 직전 이뤄진 유로 2016의 예선경기에서 잉글랜드 팀이 이기자, 신난 영국인들이 유로존에 대해 거부감을 덜 가질 것이라며 주식을 샀다. 차라리 그 친구의 분석이 더 흥미롭지 않은가. 그 역시 돈도 벌었고.

*환위험이 헷지되어있지 않을 경우. 또 그 평가익을 당해 회계장부에 반영하는지의 여부는 또 다른 문제.


2. 20일이나 뒤늦은 브렉시트 이야기-장태민 칼럼(링크)

3주나 지난 신문을 유심히 읽어본 적이 있는가? 화장실에 깜박 잊고 스마트폰을 가져가지 않을때를 제외하면 그럴 일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톰슨 로이터 코리아에 정기적으로 기고하는 장태민이라는 사람은 그런 글을 쓴다. (게다가 돈을 받다니 더욱 놀랍다.) 이 사람은 보통 자기 sns에 올리기에도 창피한 개인적 소회들을 마치 시장 이야기인듯 엮어 쓰는 것으로 많은 이들에게 비웃음을 사는데 그중에서도 이번 글은 역작 중의 역작이다. 그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어 브렉시트가 언젠지도 가물가물한 시점에서 브렉시트에 대한 小史를 작성하다니, 마치 정보의 휘발성을 표현한 율리우스 포프의 작품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든다. 그동안 시장은 1)재빠른 중앙은행들의 대응이 있었고 2)지난달의 부진을 불식시키는 강한 미 고용지표와 3)이로 인한 EM시장으로의 자금유입등이 이루어졌다. 근데 이제와서 브렉시트라니. 

그의 칼럼은 시기의 적절성 뿐 아니라 내용의 부실함까지 고루 갖추고 있다.

"각국은 일상적인 환율전쟁을 벌이면서 금리를 낮추곤 했다. 각국 정부 관료나 중앙은행 총재들은 '협력'을 다짐하면서 실제로는 '네 이웃을 거지로 만들어라'는 원리에 충실하면서 통화가치 낮추기 등에 골몰했다."

2010-11년에는 각 나라들이 경쟁적으로 환율을 올렸다. 디플레를 목전에 둔 상황에서 현명한 Fed를 제외한 모든 멍청이들이 금리를 올리는 동안 환율전쟁이라는 이야기는 쏙 들어갔지 않나, 2012년 이후 자신이 마주한게 인플레가 아닌 디플레라는 것을 깨달은 중앙은행들이 대거 인하에 나서자 환율전쟁이라는 단어가 다시 등장했다. 그럼 2014년부터 금리인상을 예고해서 달러 강세를 주도한 Fed는 환율전쟁에서 패배하고 있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왜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미국의 경제만 회복하고 있는가? 


시장에 대해 잘못된 툴을 가지면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기 쉽다. 브렉시트가 영국경제에 나쁜 일이 아니라는 주장이나 파운드화가 절하되며 환율전쟁이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주장은 이처럼 잘못된 툴에 기반하고 있다. 시장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되, 그의 이야기를 곡해해서는 안된다. 

2016. 7. 7.

현대카드와 회현동 LP판 아재들 -자기의 이득이 정의인줄 아는 사람들



*    현대카드가 음악과 관련한 상품들을 파는 Vynyl & Plastic이라는 새로운 컨셉의 매장을 오픈하자, LP판매의 메카인 회현동의 상인들이 출동하여 시위를 벌였다. (현대카드의 목적은 그게 아니었겠지만)대기업이 영세상인들의 영역에 진입하여 그들 생계에 타격을 주니 그들이 분노하는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의 이익일 뿐 정의가 아니다. 시대가 몇번이고 변화하는 동안 소비자들에게 더 맞는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은 이들을 위해 소비자들은 저런 문화공간을 잃어야 하는가? 저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우리가 LP판들을 더 비싸게 주고 사야 하는가? 효율성이 낮은 사업과 산업은 더 효율적인 사업에 밀려나기 마련이다. 그래야 사회 전체가 더 효율적으로 돌아간다. 그들이 처음 가게를 열 즈음, 전차와 승용차 택시가 도입되며 수많은 인력거꾼들은 직업을 잃었다. 왜 그들은 인력거꾼들이 몰락하는것을 방치하고 값싼 전철과 택시를 이용하여 출퇴근했는가. 그들이 다시 일당 10만원을 지불하고 출퇴근시 인력거를 이용한다면, 나 역시 20%더 비싼 값에 LP들을 구매하겟다.


*    그들은 결국 자기 밥그릇을 위해 피켓을 든 것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밥그릇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신 현대카드를 비 도덕적이라고 비난한다. 소비자들이 자신을 먹여 살리는것이 정의라고 설파하는 것이다. 사실 정의를 외치는 수많은 주장들이 이처럼 이기적이다. 집값이 너무 높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집이 필요한데 현재의 비용을 지불하기 싫으니 나를 위해 가격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투기꾼들이다. 집을 가진 이들은 자신의 부가 집에 달렸기 때문에 재산권을 보장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자산가들이다. 가난한 이는 돈을 더 달라며 복지를 외치고 부유한 이는 돈이 아깝다며 덜 주겟다고 항변한다. 우리 모두는 자기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있다. 나는 그런 이기심을 미워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뱃속을 불리는 일이 정의라고 믿는 머저리들을 경멸한다.


*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저 영세상인들의 편이다. 그리고 그것은 대기업들의 과오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제조업 생산성은 세계 2위인데 비해(1위 미국) 서비스업 생산성이 형편없이 낮은 기형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대기업들이 서비스업에 진출할 수 없도록 규제로 묶여있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민정서가 대기업들의 서비스업 진출에 부정적인 이유는 제조업에서 그들이 보인 횡포 때문이다. 자동차, 철강/제철, 전자제품 등 수많은 제조업 분야에서 작은 회사가 큰 회사로 통폐합되는 과정은 순수하게 시장의 경쟁을 통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정경유착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이 과정속에서 인수기업은 피인수기업에게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지 않았고, 그 종업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국민들은 신세계가 치킨체인점에 진출하면 동네치킨을 운영하던 사장님을 높은 몸값과 복지를 주며 스카웃할거라고 기대하는 대신, 그 집을 망하게 할 거라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제조업의 통폐합과정에서 실제로 그들은 그랬다. 그러니 저 회현동 LP가게 사장들도 똑같은 두려움을 지닌 것이리라.

2016. 6. 29.

파리와 이스탄불, 그리고 한국인들의 이중성.





파리와 브뤼셀에서 테러가 일어났을땐 sns에 온갖 추모글과 사진을 올려대던 사람들이 터키에서 테러가 일어나자 이에 무관심으로 대응한다. 결국 터키 테러에 대한 추모는 연관검색어에도 올라오지 않는다. 유럽의 백인들이 십수명 죽은건 가슴 찢어지는 비극인데, 이스탄불이나 앙카라 혹은 다마스커스에서 아랍인들이 죽어가는 것은 그저 지구촌 소식 칸에 주기적으로 업뎃되는 남의 이야기 일 뿐이다. 그들에게 파리와 이스탄불은 수성과 토성 만큼이나 멀리 떨어진 다른 세상이다. 여기에 어찌 저열한 인종주의가 없다고 할 수 있겟는가. 인간이 다른 이의 죽음에 관심을 가지고 추도하는것은 좋은 일이나, 그것이 선별적으로 이루어 진다면 그것은 나찌나 다름없다. 나찌는 다른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한 사이코패스들이 아니다. 다만 특정 부류의 사람들의 고통에는 공감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이었을 뿐이다.


나는 머저리들이 인지하지도 못하고 저지르는 범죄와, 그들이 내보이는 가식 그리고 싸구려 논리에 역겨움을 느낀다. 이에 침을 뱉으리.

2016. 6. 27.

철딱서니 없는 금융 당국자들

경제주체들, 상황변화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 없다. -한국은행 총재
투자자들은 과도하게 불안해하거나 성급하게 행동할 필요 없어,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침착한 대응 필요. -금융위원장

브렉시트가 터진 후, 주말 내내 고심한 정책당국자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지금 국제 금융시장도, 대형 펀드 매니저들도, 다른 중앙은행들도 향후 시장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자국경제상황도 똑바로 파악 못하는 아시아 변방의 당국자들이 상황판단을 이미 해주고 있다. 그러면서 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들고 나온 돈은 고작 3조원 뿐.

경제고위관료들이 현 경제상황에 대해 저토록 편한 소리를 늘어놓을 수 있는 것은, 올바른 경제정책을 시행할 인센티브 전혀 없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은 잘못된 결정을 내리면 손해를 보지만, 중앙은행 총재는 4년째 인플레 타겟를 하회하고 경제전망을 수정해도 국회에 나가 몇마디 욕 먹는것으로 끝난다. 국회의원들은 경제가 나빠지면 당선에 실패하지만 남대문 공무원들의 연금은 꼬박꼬박 지급된다.

역대 가장 매파적이면서 가장 오랫동안 금리를 내린 현 한은총재는 외부기관들이 금리정책에 대해 이리저리 훈수를 두자 '통화정책에 대해 가장 많이 고민하는 사람들이 누구일지 생각해달라'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세계모두가 불안해하며 중앙은행과 정부의 대응을 기다리는 동안 알맹이 없는 립서비스로 시장을 진정시킬거라고 믿는 저 두사람을 보며, 공무원들은 통화정책에 대해 가장 고민 안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철부지들을 정녕 어찌할꼬. 

2016. 6. 26.

엿같은 테러와의 전쟁

자신과 가장 가까운 지역의 정부들을 무너뜨려놓고 어찌 난민이 없길 바라는가. 그들은 민중을 "해방"시키고 자유를 주기 위해서였다고 항변하나, 그렇다면 왜 그리도 많은 민중들이 IS에 가입하는가. 남의 나라 정부가 정의롭지 못하다며 그를 갈아치우기 위해 수많은 폭탄과 탄약을 퍼부은 이들이 난데없이 타국의 간섭을 거부하기위해 EU에서 탈퇴한다는 쇼를 벌인다.

테러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전쟁을 일으킨 국민들이 테러를 비호하는 것에 조소와 경멸을 보낼 뿐이다. 남의 집에 벙커 버스터를 터뜨려 가족들을 몰살시킨 이가, 그 친척들이 자신의 도시에 폭탄을 터뜨렸다고 비난한다. 민간인을 타겟으로 하는 테러는 더럽다고 욕하지만, 어디 전쟁의 포탄이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는가. 당장 youtube에서 검색해봐도 테러보다 수십배 더 많은 민간인 살상 현장들을 지켜볼 수 있다. 그렇게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군인보다 몇배 더 많은 민간인이 죽었다. 나는 너희들에게 동의하지 않는다. 그 싸이코패스 같은 이기심이 너무나 역겹고 적과 내 가족을 증오와 죽음으로 몰아가는 너의 무식이 너무도 혐오스럽다.

살인자들이 살인자를 욕하는 그 광기에 침을 뱉으리.

2016. 6. 25.

Brexit

으레 그렇듯이, 시장에선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차라리 눈을 감아버리고 잊어버리고 싶은(하지만 결코 그럴 수 없는) 사건들이 터지곤 한다. 바로 오늘의 브렉시트가 그랬다. 평화롭게 시작했던 아시아의 아침은 곧 패닉으로 뒤덮혔고 화면의 모든 차트와 상품가격들은 발작하듯 요동쳤다. 계좌의 손익보다도 더 큰 마음의 충격을 받았을 트레이더들은 멍한 기분으로 집으로 향하고 있으리라. 불면의 밤을 보낸 런던/뉴욕의 친구들에게는 몇시간이 더 지나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    많은 사람들은 브렉시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도 아니니 시장이 금새 회복할 것이라고 말한다.(나 역시 진심으로 그러길 원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브렉시트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있지 않은 미국의 2년 금리는 20bps나 하락했는데, 나는 적어도 지난 3년간 이런 충격을 본 적이 없다. 만약 모두가 대비하고 있었다면 왜 이런 쇼크가 오는가? 미국 이자율 시장은 또한번의 리세션을 예고하고 있었고, 이와같은 충격은 간신히 반등하던 레버리지 움직임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다.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은 주말동안 준비해 둔 시장 안정책을 내놓을텐데, 만약 조치들이 시장의 패닉을 안정시키기에 충분하지 않으면 폭락은 오늘 하루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    여로모로 지금의 사건은 2011년 여름과 닮아있다. 미국의 신용등급 강등과 영국의 EU탈퇴 모두 제도적으로 대비할 틈이 없던 상황에서 그 여파를 예측할 수 없는 일이 터졌으며, 마침 경제는 매우 취약한 지점에 있었다. 하지만 리만사태처럼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다. 리만은 근 10년간의 낙관론이 무너진 사고였고 은행시스템이 붕괴했다. 브렉시트는 그정도로 걱정할 사건은 아니다.

*    브렉시트가 더 충격적인 점은 조현증 환자마냥 분열된 영국의 맨얼굴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불과 2년전 스코틀랜드인들에게 UK에 남아달라며 눈물로 호소하던 잉글랜드인들은 EU를 떠나기로 결정했고, 잔류를 원하던 스코틀랜드인들은 UK에 속한 죄로 EU에서 같이 방출되었다. 북아일랜드인들과 뉴햄프셔인, 런던에 거주하는 삼십대의 화이트칼라는 교외 농장에서 일하는 오십살의 블루칼라와 너무도 달랐다. 스코틀랜드인은 잉글랜드에 분노하고있고, 그들 앞에서 눈물을 흘렸던 총리는 사임했다. 이제 스코틀랜드의 이탈을 어찌 막을 것인가. 그리고 불과 30년 전까지 소총과 사제폭탄으로 독립을 외치던 아일랜드인들이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United" Kingdom의 시대는 끝났다.

*     흥미롭게도 영국의 통합과 분열의 역사는 그들의 흥망성쇠와 수명을 같이했다. 약 300여년 전 잉글랜드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를 통합한 뒤, 그들은 전 세계를 제패하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이뤄냈다. 그리곤 제국을 유지할 힘을 잃게되자 스코틀랜드가 독립을 시도했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와 같은 현상은 영국 뿐 아니라 전 유럽의 문제다. 유라시아 대륙에서 가장 분열했던 지역인 유럽(한때 독일은 약 1500여개 공국으로 쪼개져 있었다.)에서 크고작은 나라들이 이리저리 뭉쳐 (상대적으로) 소수의 근대국가들로 다시 태어나자 그들은 세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현재 21세기에 그들은 미국과 아시아의 부상에 밀려 점차 세계무대의 주연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그리고 분열이 시작됐다. 그렉시트와 브렉시트 외에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신조어들이 생겨날까? 우리는 아마 EU에서 국가들이 이탈하는 것 뿐 아니라 국가에서 지방이 이탈하는 것도 보게 될 것이다. 스코틀랜드가 그 선두에 이름을 올리고 있고 그 뒤를 카탈루냐, 바스크, 롬바르드 등이 따르고 있다. 유럽인들에게 21세기는 분열의 시대가 될 것이며 잉글랜드인들은 오늘 그 첫 총성을 쏘아울렸다.

2016. 6. 6.

디케의 저울에 올려진 화투장

아침에 집을 나서며 어머니와 조영남의 작업방식이 정당한지 아닌지에 대해 현관에 서서 30분간 아야기하다 나왔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미술평론가 반이정씨의 논평이 있으니 이를 먼저 읽어보기를 권한다.(링크)

*     *     *

6월 4일, 검찰의 간단한 입장 발표가 언론에 보도되었다. 검찰은 "조 씨가 대작 화가인 송모(61) 씨에게 똑같은 그림을 배경만 조금씩 바꿔서 여러 점을 그리게 한 뒤 이를 고가에 판매한 것은 금전적 이득을 얻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대작 화가가 그린 그림을 자신의 작품인 것처럼 판매한 것은 불특정 다수의 구매자를 속인 행위라는 게 검찰의 판단이다. (중략) 조 씨는 검찰 조사에서 '팝아티스트로서 통용되는 일인 줄 알았다'고 진술했으나, 이 사건이 불거지기 이전에는 조 씨가 자신을 팝아티스트라고 표현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안다"라고 밝혔다.

이 인터뷰에서 검찰은 "화가의 그림"의 범주를 제멋대로 규정하고 있고 더 나아가 팝 아티스트 범위를 스스로 정의하고 있으며(스스로 팝 아티스트라고 한 적이 없으니 조씨는 팝 아티스트가 아니다), 그에 따른 법 집행을 예고했다.  

예술인들은 아테네와 법복입은 사람들 앞에 조영남을 방치했다. 다수의 신문 사설은 조영남을 비난하는 화가들의 인터뷰를 실었고 몇몇 미술인들은 '그는 예술가들의 고뇌를 욕보였다'고 성토했다. 그들은 조영남이 미웠을 것이다. 아마도 조영남같이 쉽게 언론의 주목을 받고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아트테이너들 모두가 미울 것이다. 어쩌면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사람들의 편견, 그리고 자기 내면의 감정들과 싸워가며 예고, 미대를 졸업하여 십수년간 작품활동을 이어와도 미술계 한켠에 자기 자리를 만들기 쉽지 않은 현실이 더욱 그들을 그렇게 몰아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영남이 미워, 그의 화투장을 변호해주지 않은 덕분에 우리는 "무엇이 그림인가"를 논할 주도권을 (미술에 대해)가장 무식한 검찰과 대중들에게 내주고 말았다.

미술인들은 (조영남이 아닌)그의 작품들을 대신해 법원에 서서, "변기 하나 사다가 제목 하나 붙이고 출품한 마르셀 뒤상보단 더 작품제작에 관여했다"고 해주지 않았고, "라파엘로도 자기 작품에 조수가 얼마나 기여했는지 밝히지 않았으니, 그도 사기죄에 해당하는가."라고 반문하지 않았으며 "표현기법 뿐 아니라 소재선정과 아이디어같은 컨텐츠도 현대미술의 핵심인데, 왜 자기 손으로 직접 윤전기를 돌리고 표지디자인을 하지 않는 소설작가들의 책은 대작이 아닌가"라는 의문들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 결과 무엇이 미술인지 (아무리 관대히 봐줘도)대충 5분에서 10분쯤 고민해 보았을 법조인들이 국가 공권력을 동원하여, 심지어 그런 고민을 해봤는지도 매우 의심스러운 대중이 여론몰이를 통해 미술과 화가를 통제하게 만들었다. 이제 모든 미술인들은 가만히 앉아서 자신의 그림이 합당한 미술인지 아닌지 법원과 SNS의 판결을 기다려야할 지도 모른다.(아마 일부 국회의원은 그림 뒷편에 조수의 작품 기여도를 명시하고 이를 문화관광부 산하기관에서 검증받는 '조영남법'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나치가 집권하던 1937년, 독일 뮌헨의 호프가르텐 회랑에서 '퇴폐예술전시회'가 열렸고, 32개의 독일 미술관에서 압수한 650점의 미술작품이 전시되었다. 당시 나치는 올바른 미술을 정의한 뒤, 이에 어긋나는 모든 기타 현대 미술, 그리고 유대인 화가들의 작품을 '퇴폐예술'이라고 규정지은 뒤 이를 억압했다. 이 전시회에는 에드바르트 뭉크나 파블로 피카소같이 대중들에게 유명한 이들 뿐 아니라 막스 베크만, 막스 에른스트,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파울 클레, 케테 콜비츠처럼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수많은 화가들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후 38년 5월 31일에는 '퇴폐예술품 압수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으며 이 새 법률에 따라 베를린 중앙 소방서 마당에서 1004점의 회화와 3825점의 그래픽이 소각되었고 그 외에 규모를 알수 없는 상당수의 작품들이 은닉되거나 해외로 유실되었다.


예술계 인사들은 미술에 대한 평가를 제복입은 이들에게 위임했을때 과거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기억해야할 것이다.


2016. 6. 4.

동물애호가들은 왜 자살하지 않는가?

(나는 지난 30여년동안 여러 애완동물들을 길러왔으며 지금도 10년 넘게 강아지를 기르고 있다. 내가 지금부터 비판하려는 것은 극단적인 동물 애호가들이다)

낭만적인 꿈은 아름답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낭만은 때때로 크나큰 비극과 폭력을 마주하게 된다. 진화한 인류인 '초인'들의 세상을 건설하려는 나치가 그러했고, 모두가 완벽하게 평등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려던 소련이 그 전철을 밟았다. 이것이 우리가 모든 낭만적인 주장들을 현실적으로 검토해야하는 이유이다.

극단적인 동물애호가들이 바로 그 21세기의 히틀러와 스탈린들이다. 이들은 실현 불가능한 목표를 내세우며 가장 빈곤한 인류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으며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들이면서 자신들을 선하다고 믿는다.(역사적으로 학살을 저지르던 집단들은 대개 자신이 정의롭다고 믿었다.) 이제부터 그들의 기막힌 무식과 신묘한 위선을 밝혀보자.

극단적 동물애호가들(동물 애호가들 중 일부겠지만)은 떠돌이 개나 고양이의 안락사는 인간을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강하게 반대한다. 또한 닭, 돼지나 젖소등의 가축들이 행복할 수 있도록  사육장의 환경을 개선해야하고 더 나아가 어떤 이들은 채식주의자로 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간과하는 것은,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이 지구 위에는 70억명의 인구가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개와 고양이의 안락사를 막고 그들을 모두 먹여 살리려면 빈곤층에 대한 생계지원과 의료복지 예산을 줄여야하고 소득세를 올려야 한다. 또한 지구상에는 약 250억마리의 닭과 총 약 30억마리의 돼지, 소와 양이 존재한다. 70억명의 인간이 총 300억마리가 넘는 가축들을 쾌적한 환경에서 키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이 대량으로 죽어 자신의 터전을 가축들에게 내어주거나, 혹은 가축들의 수를 줄여야 한다. 물론 가축의 수가 줄어들면 단백질원을 잃은 제3세계의 빈곤층이 몰살될테니, 인간이 죽기는 매한가지이다. 그렇다면 육식을 끊고 채식을 하여 동물을 보호하는 것은 가능할까? 이 또한 세가지 이유로 불가하다. 첫번째, 채식이 몸에 좋다는 통설과는 달리, 인간의 몸은 수백만년동안 동물성 단백질도 섭취하도록 진화해왔다. 채식은 식단 관점에서 일종의 편식이며, 영양 불균형을 가져온다.(대형 포유류가 없어 동물성 단백질원이 없던 오세아니아의 섬이나 남미에서 식인문화가 발달한 그 함의를 생각해보라.) 두번째, 채식을 한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동물들을 죽여야 한다. 일례로 크리스틴 마인더스마라는 작가는 한마리의 돼지가 도축되고 나서 각 부위들이 어떻게 가공되는지를 추적했는데, 햄과 베이컨 뿐 아니라 샴푸, 립스틱, 치약, 의료약품 등 총 185개의 상품들의 원료가 되었다. 우리는 동물들을 먹는것 뿐 아니라, 쓰기 위해서도 계속 죽일수 밖에 없다. 세번째,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식물도 동물과 똑같은 생명체이다. 돼지 한마리를 살리기 위해 100그루의 밀을 먹자는 주장은 어떻게 나오는가. 포유류 성애자도 아니고.

결국 현재의 70억 인류가 굶어죽거나 동물성 단백질 부족으로 심각한 면역력 저하에 처하지 않으려면 300억마리가 넘는 가축들을 키워야 하며, 이 많은 가축들을 그림 같은 풍경에서 키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동물을 좁은 우리에 가둬 도축 가능한 나이가 되면 기계적으로 도축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면 동물을 먹는 인간의 수를 줄여야하니, 그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한다. 따라서 현재 자살하지 않은 동물애호가들은 전부 다 무식한 위선자들이다.

여담이지만 영화제작장에서 동물들의 촬영시간 제한, 동물학대 처벌 등 유럽에서 가장 선진화 된 동물보호법을 도입한 것은 바로 나치였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그들은 유대인들을 절멸시킬 게획도 함께 입안했다. 나치는 결코 따듯하기만 하거나, 혹은 차갑기만 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이 무서운 것은 내 옆의 동물을 나와 다른 인간들보다 더 소중히 여겼다는데에 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을 정의롭다고 생각했으니, 힘을 얻었을 때 자신의 극단적 가치관을 망설임없이 관철시켰고 그 결과과 어떠했는지 아우슈비츠와 비르케나우에 남겨진 흔적들이 증언한다. 이제 생각해보자. 과연 우리 중의 나치는 누구인가.

2016. 5. 29.

남성과 여성에 관한 사회적 진실

*     사람들은 흔히 남성이 강하고 여성이 약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이다. 0세부터 100세까지 모든 연령대에서 빈곤, 질병, 기아, 전쟁, 공포, 비만과 같은 모든 상황에서 여자가 남자보다 더 오래 생존한다.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임신과 출산을 해야하는 여성이 남성보다 종의 번식에 더 소중한 자원이기 때문에, 여성의 노화나 자연면역력을 강화했다는 것이다.

*     남자와 여자의 뇌는 다르다. 어느 한쪽이 열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다를 뿐이다. 남성은 수리적인 능력이, 여성은 언어적인 능력이 발달했다. 우리의 유전자는 임신과 출산을 못하는 남자에게 위험한 일을 시키고, 귀한 자원인 여성은 보수적으로 행동하도록 진화했다. 또한 남자는 길을 잘 찾고, 여자는 물체를 잘 찾는다. 일례로 길을 못찾는 여자를 보고 답답해하는 남성과, 바로 눈앞에 리모컨을 두고도 못찾는 남자를 보고 답답해하는 여자를 흔히 볼 수 있다. 지능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여자와 남자는 다른 지능을 발달시킨 존재이다.(보통 지능이 낮은 사람이 IQ로 측정되는 단일지표를 신뢰하더라.) 따라서 "여자들은 머리가 나쁜가봐" 혹은 "남자들은 다 애같아"라는 말을 자주 쓰는 사람은 무식한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     결혼은 각자의 조건을 보고 이뤄지는 일종의 M&A이다. 단지 우리가 그 과정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환상을 가지도록 진화했을 뿐이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왜 현재 대한민국에서 결혼시 남성의 경제적 부담이 여성에 비해 2배이상 되는지 알 수 있다. 한국의 남초 현상은 아주 심각해서 90년대생의 경우 여자 100명당 남자 117명이 결혼시장에 뛰어든다. 여성의 가치가 남성에 비해 더 희소하니, 결합과정에서 남성이(혹은 남성의 부모가) 더 많은 돈을 부담함으로 가격차이를 메꿔주는 것이다.(따라서 남자들이 이에 대해 불평하는 것은 부당하다. 수요공급이 그렇게 된건 현재 결혼하는 여자들의 잘못이 아니니까.) 백번 양보하여 각자의 결혼은 사랑일지 모르나 통계적으로 남성이 더 많은 결혼비용을 대는 것은 전적으로 사회적 현상이다. 게다가 두 성간의 수요공급이 맞지 않을 경우, 돈으로 그 가치를 맞춰주는 현상은 흔하게 존재했다. Wedding의 wed는 원래 신부가 신랑에게 가져가는 지참금을 의미했다. 위생과 영양상태가 불결했던 유럽에서는 남성이 더 많이 죽어, 여자의 공급이 많아 여자가 돈을 부담했다. 반면 중세 유럽에 비해 위생과 영양상태가 훨씬 양호했던데다 전쟁도 거의 없었던 조선에서는 남자가 죽지 않아 초과공급이 되었고(자연상태에서는 남자가 더 많이 태어난다), 데릴사위-남자가 본가가 아닌 처가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형태의 결혼문화가 발달했다.

*     이토록 한국에서 남자와 여자의 성비가 어긋나는 가장 큰 이유는 80-90년대에 대거 이뤄진 낙태 때문이다. 군사정권은 경제발전을 위해 산아제한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는데, 이것이 유교 전통의 남아선호사상과 맞물려 여아를 대거 낙태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1977년에는 출산 1건당 낙태 2.77건이라는 주장도 있다) 결국 80-90년대 학살에서 살아남은 (여자)생존자들이 수요공급 측면에서 우위를 차지해 보상받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     (더 가야할 길이 멀지만)우리나라에서는 남녀평등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그 가장 큰 두가지 원인은 위에서 언급한 낙태로 인한 성비 불균형과 한국의 잘못된 자본주의 시스템 덕이다. 생물학적인 차이로 남자는 변동성이 큰 주식에 주로 투자했고 여자는 안정적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집에 주로 투자했다. 우리나라는 주주 자본주의가 제대로 돌아가는 나라가 아니기에(참조글: 주식의 적은 누구인가-오너가 죽으면 주식이 오른다) 주택가격이 주식가격을 크게 상회했다. 따라서 각 집안에서 여성의 발언권이 강해졌고 부인이 남편에게 용돈을 받아다 쓰는 구조에서 여자가 월급통장을 관리하는 구조로 변화했다. 아마 주변에서 아버지가 주식투자해서 크게 돈을 날렸지만, 어머니가 이러저러한 투자로(혹은 주식투자를 말린 것 만으로도) 집안의 부를 회복한 사례를 심심치 않게 보았을 것이다. 만약 주식이 일반 물가상승률을 크게 상회했다면, 주식으로 큰 돈을 번 아버지들이 집안에서 큰소리 치고 어머니는 복종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참고로 우리보다 위의 두 사건을 더 심하게 겪은 중국의 경우,  남편이 요리와 청소를 한다.)

*     우리 사회에서 지겹게 반복되는 논쟁중 하나는 아마 출산-군대이슈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논란거리가 되지 못한다. 사회적 의무인 군입대와 생물학적 기능인 출산은 같은 차원에서 비교할 수 없다. 만약 이를 인정한다면 여자들은 남자보다 평균적으로 7년을 더 오래사니 더 많은 의료보험료를 내거나, 노령연금을 더 많이 납부해야하는가. 더 근본적으로, 남녀평등의 목적 자체는 생물학적인 차이가 사회적인 차별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데에 있다. 평균적으로 남성의 근력이 더 강한 것은 맞지만, 특정 직무를 수행하는데 어떤 여성의 근력이 제약조건이 되지 않는다면 그 여성보다 남성들에게 가산점을 주어서는 안된다. 출산과 군대를 비교하는 논리는 사회가 생물학적 차이를 차별로 만들 여지를 준다. 예를 들어 의사협회가 "진료행위는 체력적으로 부담이 심한 일이니, 남자 의사만 뽑겠다." 라고 하거나, 기업체에서 "생리와 출산을 겪어야 하는 여자보다 남자 지원자를 선호한다."라고 주장하면 우리는 뭐라고 반박해야 하겠는가. 다시 말하지만 남녀평등의 목적은 생물학적 차이가 사회적 차별로 이어지지 않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     한국의 (일부)남녀는 서로의 가치관을 혐오한다. '한국여자들 된장녀야' 혹은 '한국 남자들 다 꼰대더라'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공범이다. 그 남자들을 그렇게 교육시킨 것은 그 어머니들이며, 그 여자들을 그렇게 가르친 것은 그녀들의 아버지들이다. 그들 양쪽 모두 "남자는 이래야한다/여자는 이래야한다"라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성에 따라 한쪽을 택해서 표현할 뿐이다. 꼰대같이 구는 이유는 "남자"라서가 아니라 "한국인"이라서 그럴 것인데, "한국"여자가 그 꼰대 가치관을 지니지 않는다고 할수 있을까. 그 여자는 자기 아들이 커서 여자 가방을 들고다니며 데이트비용을 다 내는 것을 보면 길길이 화를 내고 날뛸 것이다. 이제 자기가 남성의 편에 서게 됐으므로.(반대도 마찬가지)

*     우리는 일처일부제를 절대적 선으로 여기지만, 이는 자연법칙에 어긋난다. 250만년동안의 인류 역사에서 일처일부제가 보편적으로 자리잡은 기간은 지난 100년도 채 되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는 둘 다 다수의 섹스파트너를 두도록 설계되어있다.(정자의 약 50%정도는 수정 능력이 없는 기형정자들이다. 이들은 수정은 못하지만 자궁 안에서 다른 유전자를 가진 정자들이 난자에 접근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한다. 기형 정자가 이렇게나 많다는 것은 인간이 여러 섹스파트너를 두고 임신경쟁을 펼쳤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일부일처제는 인간의 본성에 맞지 않는 제도이다. 하기사, 인간의 본성에 맞지 않는 사회적 관습들-편두, 발치, 문신, 전족, 코르셋, 하이힐-을 강제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도 하다.

*     일부 여성들은 남자들의 "허세"를 싫어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여자들은(또한 남자들은) 상대의 허세에 쉽게 매료된다. 발음하다 혀가 꼬일 것 같은 이름의 시계와 뇌 용량보다 큰 배기량을 가진 차, 그리고 무게당 가격이 금보다 훨씬 비싼 명품들. 이 상품들이 불티나게 팔리는 현상은 이 상품들로 부를 과시하는 허세가 사람의 마음을 얻는데 큰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허세는 보편적으로 동물계에서 수컷이 암컷을 유혹하는데 흔히 쓰는 전략이다. 공작새의 화려한 꼬리는 생존에 아무런 도움이 안되지만, 암컷들을 유인하는데 요긴하게 쓰인다. 사자와 말의 갈기, 사슴의 뿔 역시 암컷을 유혹하기 위해 수컷이 발달시킨,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기관들이다.(즉 허세다.) 더 크게 우는 개구리와 귀뚜라미가 더 많은 번식의 기회를 가지는 것을 보면, 인간뿐 아니라 동물의 세계에서도 수컷의 허세는 매우 성공적인 유혹 기술임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수억년동안 허세를 부린 수컷들이 번식했고 허세에 끌리는 암컷들이 자손을 낳았으며 인간도(그리고 우리도) 그 후손중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타 호모사피엔스나 포유류들과는 다르게) 허세를 싫어하는 돌연변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실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99.9%일 것이다.(아마도 0.1% 정도의 돌연변이가 존재하리라.)


*     *     *

(사족)
강남역에서 한 여자가 무차별 살인의 희생자가 되었다. 그녀의 죽음에 아파하고 애도하는 사람들과, 여성혐오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또 남성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모는 일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문득 예전의 가슴아픈 사건이 떠올랐다. 몇년 전, 부유한 지역 살던 친구의 누나가 납치된 뒤 살해된 적이 있었는데 내 기억에 그녀가 희생된 자리에 사람들이 모여 추모행사를 벌여주지는 않았다. 되려 인터넷 댓글의 관심사는 그 납치된 여자가 얼마나 부자냐, 혹은 그당시 명품 가방 xxx를 들고 있어 당했다더라 정도 뿐이었다.(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또한 훨씬 잔인하고 명박하게 여성혐오 범죄를 일으킨 유영철 사건때도 그와 같은 일은 없었다.

위의 두 사건의 피해자는 부잣집 딸이었거나 매춘여성들이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의 공감과 추모를 얻지 못했다. 또한 사건이 강원도 양구에서 일어낫다면 추모행렬도 없었을 것이다. 강남역을 지나는 사람이 많기에, 또 피해자가 일반인이었기에 공감하는 사람이 저리 많은 것이리라. 사람은 이토록 '타인'에 대해 무관심하다. 여자들은 아랍세계에서 백만명의 사람이 죽어가는데도 파리에서 몇명의 희생자가 생긴 것에 더 공감하고, 남성들은 희생자가 자기 부류의 사람들이 아니라고 여자들의 추모를 이해하지 못한다.(만약 살인범이 일본 극우주의자였다고 가정해보자. 남성들은 "여자가 살해당했다"라고 생각하는 대신 "한국인이 살해당했다"라고 받아들이며 추모에 동참해 일장기를 불사르고 있었을 것이다.)

추모에 참여하는 여성들도, 자신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대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남성들도 모두 자기 자신이 선하고 옳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양측 모두에게서 나는 '나와 다른 집단'에게 얼마나 무관심하고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본다. 우리는 교감능력이 극단적으로 결여된 사람들을 보고 사이코패스라고 부르지만, 그와 같은 본성은 우리 모두에게 내재되어 있다.

2016. 5. 25.

총재님 정신차리세요

한국은행 총재는 오늘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GDP집계에는 한계가 있으며 최근 신뢰성이 떨어지고 있으므로 이 지표가 0.1-0.2% 바뀌는게 과연 얼마만큼의 차이가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총재가 이와 같은 말을 꺼낸 이유는 아마 KDI의 훈수 때문일 것이다. KDI는 어제 GDP성장 전망을 대폭 하향조정하며 한국은행이 금리 인하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총재는 기자들앞에서 위와 같은 말을 던졌지만 그 창 끝은 KDI를 향해 있다. 'GDP가 믿을만한 지표도 아닌데 그게 뭐 찔끔 변한다고 정책을 바꿔야하냐,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참견마라'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여러 글에서 말했듯이, 한국은행은 그럴 능력도 의지도 없는 무의미한 조직으로 전락한지 오래다. GDP를 신뢰할수 없다면 신롸할 만한 새로운 지표를 내놓지 못하는 한국은행이 더욱 못 믿을 조직이란 뜻이며, GDP성장률 0.1-0.2%가 의미없다면 총재는 왜 금리를 고작 0.25% 내리자는데 곤조를 부리는가?

저 조직이 정신차리긴 그른듯 하니, 아예 없애는 방안에 대해 논의해 볼 필요가 있다. 농이 아니라 진지하게 꺼내놓는 말이다.

노조나 재벌이나

매일경제와 한국경제는 24일자 신문 1면을 통해, 노동자들의 경영참여를 독려하는 김종인을 강력 비판했다. 재벌들이 회사의 경영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문들이니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요새 회사를 망친 오너가들의 작태를 보면 과연 재벌이 노조보다 회사를 더 잘 경영할 능력이 있는가 재고해 볼 필요는 있다.

동양그룹이 망하기 직전 현재현 회장의 부인 이혜경씨는 그룹내 금융사의 자기계좌에서 거액을 인출했으며 한진해운의 자율협약이 발표되기 직전 한진의 오너가는 보유 주식을 전량 매각했다. 경제지(라고 쓰고 찌라시라고 읽는다)들은 재벌들이 대주주들 보다도 더 책임감을 가지고 경영을 한다고 하지만,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회사 지분을 5%도 가지지 않은 재벌이 어떻게 나머지 95%보다 더 책임감을 가지겠는가. 책임감 측면에서는 재벌보다 노조가 더 낫다. 그들은 회사가 망하면 몰래 주식을 매각하고 도망가지만 노조는 회사와 운명을 함께한다. 지난 5년간 경영위기에 처한 대기업이 대부분 재벌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차라리 노조가 경영을 맡는게 낫지 않은가.

주주자본주의와 주주회사를 표방하면서도 오너가 경영을 독점하는 정치모델이 한반도에 존재한다. 바로 북한이다. 이 "조선민주주의인민 공화국"은 민주주의 따르는 척 하지만 사실 오너가인 김씨 일가가 나라를 지배한다. 오너가의 경영을 옹호하는 저 경제지들은 사실상 북한의 정치체제를 옹호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며 내눈에는 그들은 빨갱이들이다. 왜 국정원은 저 빨갱이들을 가만 놔두는가.

2016. 5. 16.

흐드러지다

 
 
우리가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 항상 벚꽃이 흐드러지는 날들만이 필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언젠가 그 아름다운 분홍색 꽃몽아리가 부풀어 오르다 터져오를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더이상 봄이 오지 않을 것을 깨닫게 되면 그땐 도대체 어찌할 것인가.

2016. 5. 1.

Goldbugs

많은 원시인들이 아직도 금본위제에서 벗어난 현대의 통화정책은 비현실적이고 더 나아가 사악하기 때문에 언제가 무너질 수 밖에 없다고 믿는다. 따라서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시스템을 유지하려면 종이쪼가리나 인터넷 데이터 상의 통화가 아닌 실재하는 금을 바탕으로 한 금본위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은 가치와 돈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금은 원소기호로 Au인 수많은 광물질 중 하나에 불과하며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금이 가치를 가지는 것은, 남들도 금을 소중하게 여길 것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하며 경제학에서는 이 믿음을 신용이라고 부른다. 다시말해 금을 화폐로 만들어주는 것은 실체가 아닌 신용이며, 따라서 지폐나 전자화폐를 구성하는 요소와 다를 바가 전혀 없다.

우리중 일부가 1만년 전의 지구로 여행을 떠낫다고 가정하자. 원시인들과 조우한 goldbug들은 주변 사람들이 쩔쩔매는 것을 보며 의기 양양하게 금덩이를 내밀며 식량과 교환하자고 요구하겠지만 원시인들은 주변의 짱돌을 들어 비교한 뒤, 네가 가져온 물체가 바닥의 돌보다 나은게 뭐냐며 따질 것이다. 당당한 표정으로 걸어나갔다 망신만 당하고 온 금본위제 신봉론자는 쪼그려 앉아 꼬르륵 거리는 배를 붙잡고 생각할 것이다. '내가 왜 짱돌본위제가 아니라 금본위제를 지지했더라?'

2016. 4. 26.

중앙은행과 규제

지금 사람들은 간단한 사실 하나를 잊고 있다.

경제학에서 이야기하는 통화량은 본원통화와 신용의 합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리고 어느 나라든 신용의 크기가 본원통화보다 몇배가 더 크다. 그리고 그 신용을 창출하는것은 은행시스템이다. 그러나 각국은 은행권의 신용을 규제하면서 중앙은행들의 발권력으로 신용을 본원통화로 대체하려고 하고 있다.

이와같은 노력은 성공하기 대단히 어려우며 단언컨대, 10년뒤 가장 인기있는 경제학 논문의 주제는 2011년 이후, 디플레를 촉발한 금융규제에 관한 내용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