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6. 4.

동물애호가들은 왜 자살하지 않는가?

(나는 지난 30여년동안 여러 애완동물들을 길러왔으며 지금도 10년 넘게 강아지를 기르고 있다. 내가 지금부터 비판하려는 것은 극단적인 동물 애호가들이다)

낭만적인 꿈은 아름답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낭만은 때때로 크나큰 비극과 폭력을 마주하게 된다. 진화한 인류인 '초인'들의 세상을 건설하려는 나치가 그러했고, 모두가 완벽하게 평등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려던 소련이 그 전철을 밟았다. 이것이 우리가 모든 낭만적인 주장들을 현실적으로 검토해야하는 이유이다.

극단적인 동물애호가들이 바로 그 21세기의 히틀러와 스탈린들이다. 이들은 실현 불가능한 목표를 내세우며 가장 빈곤한 인류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으며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들이면서 자신들을 선하다고 믿는다.(역사적으로 학살을 저지르던 집단들은 대개 자신이 정의롭다고 믿었다.) 이제부터 그들의 기막힌 무식과 신묘한 위선을 밝혀보자.

극단적 동물애호가들(동물 애호가들 중 일부겠지만)은 떠돌이 개나 고양이의 안락사는 인간을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강하게 반대한다. 또한 닭, 돼지나 젖소등의 가축들이 행복할 수 있도록  사육장의 환경을 개선해야하고 더 나아가 어떤 이들은 채식주의자로 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간과하는 것은,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이 지구 위에는 70억명의 인구가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개와 고양이의 안락사를 막고 그들을 모두 먹여 살리려면 빈곤층에 대한 생계지원과 의료복지 예산을 줄여야하고 소득세를 올려야 한다. 또한 지구상에는 약 250억마리의 닭과 총 약 30억마리의 돼지, 소와 양이 존재한다. 70억명의 인간이 총 300억마리가 넘는 가축들을 쾌적한 환경에서 키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이 대량으로 죽어 자신의 터전을 가축들에게 내어주거나, 혹은 가축들의 수를 줄여야 한다. 물론 가축의 수가 줄어들면 단백질원을 잃은 제3세계의 빈곤층이 몰살될테니, 인간이 죽기는 매한가지이다. 그렇다면 육식을 끊고 채식을 하여 동물을 보호하는 것은 가능할까? 이 또한 세가지 이유로 불가하다. 첫번째, 채식이 몸에 좋다는 통설과는 달리, 인간의 몸은 수백만년동안 동물성 단백질도 섭취하도록 진화해왔다. 채식은 식단 관점에서 일종의 편식이며, 영양 불균형을 가져온다.(대형 포유류가 없어 동물성 단백질원이 없던 오세아니아의 섬이나 남미에서 식인문화가 발달한 그 함의를 생각해보라.) 두번째, 채식을 한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동물들을 죽여야 한다. 일례로 크리스틴 마인더스마라는 작가는 한마리의 돼지가 도축되고 나서 각 부위들이 어떻게 가공되는지를 추적했는데, 햄과 베이컨 뿐 아니라 샴푸, 립스틱, 치약, 의료약품 등 총 185개의 상품들의 원료가 되었다. 우리는 동물들을 먹는것 뿐 아니라, 쓰기 위해서도 계속 죽일수 밖에 없다. 세번째,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식물도 동물과 똑같은 생명체이다. 돼지 한마리를 살리기 위해 100그루의 밀을 먹자는 주장은 어떻게 나오는가. 포유류 성애자도 아니고.

결국 현재의 70억 인류가 굶어죽거나 동물성 단백질 부족으로 심각한 면역력 저하에 처하지 않으려면 300억마리가 넘는 가축들을 키워야 하며, 이 많은 가축들을 그림 같은 풍경에서 키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동물을 좁은 우리에 가둬 도축 가능한 나이가 되면 기계적으로 도축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면 동물을 먹는 인간의 수를 줄여야하니, 그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한다. 따라서 현재 자살하지 않은 동물애호가들은 전부 다 무식한 위선자들이다.

여담이지만 영화제작장에서 동물들의 촬영시간 제한, 동물학대 처벌 등 유럽에서 가장 선진화 된 동물보호법을 도입한 것은 바로 나치였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그들은 유대인들을 절멸시킬 게획도 함께 입안했다. 나치는 결코 따듯하기만 하거나, 혹은 차갑기만 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이 무서운 것은 내 옆의 동물을 나와 다른 인간들보다 더 소중히 여겼다는데에 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을 정의롭다고 생각했으니, 힘을 얻었을 때 자신의 극단적 가치관을 망설임없이 관철시켰고 그 결과과 어떠했는지 아우슈비츠와 비르케나우에 남겨진 흔적들이 증언한다. 이제 생각해보자. 과연 우리 중의 나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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