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1. 18.

여의도 정치를 반기는 유권자는 없다

한국 정치에서 2021년은 그 이전 해와는 매우 다른 한 해로 기억될 것이다. 21대 총선에서 처참하게 참패한 야당은 절치부심하여 김종인과 여권 인사들을 영입하고 비주류였던 30대이자 바른미래당 계열인 이준석을 당 대표로 내세운 결과 보궐선거에서 압승하고 내년 대선을 앞두고 오차 범위 밖 지지율을 확보하는 등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그 중심에 윤석열과 오세훈이 있다면 그 반대편에는 마치 폭등하는 주식시장에서 혼자 하한가를 친 주식처럼 얼굴을 한껏 찌푸린 두 남자가 있다. 바로 홍준표와 유승민. 무엇이 그들을 정치 여정을 셀트리온처럼 시퍼렇게 물들였는가. 

오세훈과 유승민, 그리고 윤석열과 홍준표의 정치 여정은 매우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오세훈은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계기를, 유승민은 박근혜 탄핵을 주도하며 보수당의 몰락을 촉발했고 둘 다 바른미래당의 주축이었다. 홍준표와 윤석열은 둘 다 타협하지 않는 꼬장꼬장한 강골 검사인 것도 똑 닮았고 두 사람 모두 문재인을 몰아붙여 지지자들의 사랑을 얻었다. 하지만 각자의 운명은 너무나 달랐다. 오세훈이 10년 만에 서울 전 구에서 과반을 득표하며 서울시장직에 복귀한 것과는 정반대로 유승민은 당내 경선에서 한 자리수 지지율로 탈락했다. 홍준표는 이변을 일으켜 경선 초기의 격차보다 근소한 차이로 2위에 올랐지만 자신이 당 대표를 두 번 그리고 대선 후보를 한번 맡았던 당에서 한때 문재인의 칼이었던 남자를 상대로, 더욱이 당원 투표에서 버림받아 패배했다. 

유승민과 홍준표의 운명을 망친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여의도식 계산 때문이었다. 유승민은 21대 총선에서 험지 서울 대신 연고지인 대구에 출마하겠다는 의사를 여러 차례 밝혔지만 TK의 유권자들은 냉담했고, 그가 주판을 꺼내 승산이 없다는 계산을 마쳤을 때 비로소 유승민은 불출마 선언과 함께 자유한국당과의 합당을 결정했다. 선거를 앞둔 미래통합당은 그의 결정을 높이 평가한다고 했지만 그 말을 누가 믿을까. 함께 탈당을 결정한 김무성이 이미 자한당으로 복당했고 자신의 의석마저도 확보할 가능성도 희박했는데. 그리고 같은 선거에서 홍준표 역시 당의 수도권 험지 출마 제안을 거절하고 탈당해 보수의 안전지대인 대구 수성구에 출마했다. 한때의 대선후보가 탈당해서 안전빵이나 노리는 꼴이라니, 마음 졸이며 야당의 의석 수 하나하나를 손으로 세어가던 지지자들이 그 모습을 결코 좋게 볼 리가 없었다.     
 
반면 오세훈과 윤석열은 여의도식 정치가 가장 기피하는 길을 걸었다. 오세훈은 87년 6공화국이 들어선 이래 단 한 번도 보수가 의석을 확보하지 못한 광진구 을에, 그것도 상대가 정치신인 고민정이라 이겨도 본전이고 패배할 경우 엄청난 조롱거리가 되어 재기가 불투명한데도 불구하고 그 독배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그리고 임기가 고작 1년 남짓한 서울시장 보궐선거에도 출마했고, 끝끝내 그는 화려하게 부활했다. 윤석열 역시 박근혜 정부의 인사들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잡아넣은 덕에 문재인과 여당 지지자들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기수를 뛰어넘어 검찰총장의 자리에 올랐으나 그는 전임/후임자와는 달리 청와대에 영합하지 않고 여당 관계자들의 비리를 원칙대로 수사해 조국과 추미애의 정치인생을 끝장냈다. 이 두 사람에 대한 평가는 엇갈릴 수 있으나 오세훈과 윤석열이 편하게 갈 수 있는 길을 마다하고 험한 길을 택했다는 사실에 이견을 낼 사람은 없을 것이다. 즉 그 둘은 여의도의 정치인이라면 결코 택하지 않을 선택을 한 사람들이다.

연애 경험이 부족한 모태솔로들은 언제 어디서나 이성의 혼을 쏙 빼놓는 연애의 기술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녀는 바보가 아니다. 당신이 잔머리를 굴리고 어장관리에 나서는 것을 바라보는 그녀들의 눈빛은 차갑게 식기 마련이다. 그리고 홍준표와 유승민이 유권자들을 상대로 픽업아티스트를 자처하며 여의도의 셈법을 따지고 주판을 튕기는 동안 오세훈은 묵묵히 당의 험지 출마 요구에 응했고 윤석열은 자신에게 검찰총장이란 영예를 안긴 문재인을 상대로 전력을 다해 싸웠다. 무엇보다 보수층 지지자들이 윤석열을 택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이 과반을 훌쩍 넘고 여당이 폭주하는 동안 유승민은 잠행에 들어갔고 홍준표는 자신의 금배지를 찾아 떠났으며 중도층은 여전히 민주당에 표를 던졌다. 그동안 보수 유권자들과 서민과 김경률, 권경애, 진중권과 같이 문재인 정부와 대립해 온 인사들은 외로운 싸움을 계속해야 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묻는다, 그때 당신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지난 19대 대선에서 야당의 핵심 지지층은 홍준표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고 그 결과 탄핵정국에서 불리한 상황에서도 홍준표는 안철수를 제치고 2등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홍준표는 자신의 지지자들의 마음을 얻는데 실패했다. 바로 그놈의 여의도식 정치 때문에. 그리고 불과 4년 뒤 정치 지형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홍준표를 가장 지지하던 6070대는 그를 버리고 윤석열을 택했고 반대로 문재인을 가장 지지했던 2030대 유권자들은 당내 경선에서 홍준표를 택했다. 한때의 동지들이 적이 되고 한 때의 안티들이 팬이 된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단 하나의 질문이다. 우리가 가장 절박하게 싸우던 그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는가.

그리고 진보도 보수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윤석열이 아니었다면 지금 중도층이 가장 선호하는 대선주자는 바로 조국이었을거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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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논리는 이준석에게도 적용된다. 그는 혁신 보수를 표방하지만 그의 정치는 결코 새롭지도, 젊지도 않다. 그의 정치는 철저하게 당내 영향력을 넓히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고(링크) 세련되지도 못하다(링크). 그는 마치 모범생이 공식을 외워 수학 문제 풀어내듯 철저하게 여의도식 정치를 하고 있는데 과연 새 인물이 구 정치를 재탕하는 것을 새 정치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의 기대와는 정 반대로 그가 표방하는 정치는 그가 들고 온 비단 주머니의 워딩과 디자인처럼 너무나 올드하고 구태의연하다.

하지만 그의 진짜 문제는 뚜렷한 철학이 없다는 점이다. 경선 최종라운드에 오른 네 명의 후보는 모두 확고한 철학이 있다. 윤석열은 진영논리에서 벗어난 법치주의, 홍준표는 정통보수정치, 유승민은 우파적 경제/안보와 진보적 복지, 그리고 원희룡은 보수의 틀 안에서 민주화를 추구하고 있다. 하지만 이준석의 정치 철학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준석의 모호한 정치철학은 그의 삶의 궤적과도 이어져 있다. 애초에 한 사람의 가치관과 신념은 그 사람이 걸어온 삶으로부터 나오지 않는가. 금융권에서 트레이딩으로 살아남은 나와, 삼성전자에서 10여년을 일해온 친구, 외길 검사의 길을 걸어온 선배, 그리고 외교가에서 일하는 후배 등 각자의 삶에서 이룬 성취는 현재의 가치관을 대변한다. 우리가 정치인들의 말보다 과거의 행적에 집중하는 이유이다. 이준석은 과연 어떤 길을 걸어왔는가. 박근혜의 키즈로 정치를 시작하기 전 그의 이력은 거의 전무하다. 그리고 정치에 뛰어든 이래 그의 가장 큰 자산은 바로 젊음이었고, 그는 이를 무기로 자신을 받아준 정치인들을 무차별로 공격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박근혜, 그리고 안철수 이후 당내의 여러 중진들, 심지어 대선 후보를 공격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의 정치철학은 무엇일까? 바로 여의도 정치 그 자체가 아닐까. 다른 정치인들이 자신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여의도의 셈법을 따지지만, 사회생활의 첫 발을 여의도에서 내디딘 이준석에겐 여의도는 하나의 배틀그라운드이고 정치공학은 그저 그 서바이벌의 룰일뿐이다. 왜 살아남아야 하는지, 살아남아서 무엇을 할 건지 비전도 철학도 없다. 다만 그 게임을 열심히 플레이할 뿐. 

지난 5년간 우리는 삶에서 정치 외에 아무런 사회경험이 없는 운동권 인사들이 어떻게 행정과 입법을 망가뜨렸는지 여실히 보았다. 그리고 우려스럽게도 이준석은 그들과 대단히 유사한 경로를 걷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를 지지하되 비판적인 시각을 놓아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2021. 10. 31.

과연 누가 부채를 늘리고 있을까: 너나 잘하세요

태초에 아담과 하와가 있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선지 몰라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대차대조표를 작성할 회계 능력을 함께 주었다고 한다. 단둘이 있는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자신의 갈비뼈를 현물로 출자하여 하와라는 독립법인을 설립하였지만 의결권은 가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와는 선악과를 우연히 습득하여 자신의 대차대조표에 사과라는 자산을 반영했다 아담에게 무상으로 지급하였고 아담은 이를 이전소득이라 기록했다. 그리고 화폐경제가 시작되었다. 둘 사이에서는 빈번하게 화폐가 오갔으며 그들은 자신의 대차대조표에 금융자산과 금융부채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밖에 없는 에덴동산에서 그 둘의 순부채가 동시에 증가할 수 있을까?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누군가의 부채는 다른 이의 자산이기에 한쪽의 부채가 증가했다면 다른 한쪽의 자산도 함께 증가하게 된다. 그렇기에 둘의 순 부채가 동시에 증가할 수는 없다. 에덴동산에 아담과 하와가 있다면 한반도에는 정부와 민간이 있다*. 그런데 그들의 거래내역을 뜯어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왜냐하면 정작 부채를 급격하게 늘리고 있는 것은 민간이 아닌 정부며, 사실상 정부부채를 충당하는 것은 가계의 예금이기 때문이다.** 작년 한 해동안 가계부채가 급격하게 증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예금과 채권 투자 잔액은 더욱 빠르게 늘어 약 285조가 증가했고, 그 결과 순부채는 약 120조가 감소했다. 반면 정부부채는 약 120-240조***가 늘었는데 과연 무분별하게 부채를 늘리는 쪽은 누구일까?  

따라서 진심으로 높은 부채비율이 걱정됐다면 정부는 국민들을 겁박할 것이 아니라 반성문을 써야 했다.(비록 필자는 코로나 기간 동안 강력한 정부 지출을 지지하지만) 하지만 우습게도 우리는 급격하게 순부채를 늘리는 정부가 순부채를 줄이는 가계를 상대로 부채가 과도하다며 대출을 금지하는 장면을 목도하고 있다. 새로운 수장이 이끄는 금융위는 이두박근에 힘을 가득 주고 장첸을 쥐어박던 마동석처럼 폭력적으로 은행 창구의 셔터를 쾅 하고 닫으면서 무분별한 부채증가를 막아야 한다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고 있다. 하지만 친절한 금자씨가 만약 금융시장에 대한 이해도 깊었다면 금융위원회 로비를 찾아가 이렇게 외치지 않았을까? 너나 잘하세요. 

만약 채권자가 돈을 융통하지 못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응당히 채무자의 자금을 회수할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채권자는 가계고 채무자는 정부다. 그러니 정부의 펀딩이 원활하게 될 리가 없다. 채권시장 관계자들의 말에 따르면 한국은행은 이달 들어 여섯 차례의 입찰 중 다섯 번이나 발행 예정액을 채우지 못했고 국고채의 발행을 담당하는 PD들의 어려움도 가중되고 있다고 한다. 자기의 전주의 돈줄을 죄는 정부의 바보 같은 행태가 당분간 바뀌지 않을 것이니 이와 같은 정부의 자학적 슬랩스틱 개그도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돈을 빌린 채무자가 돈을 빌려준 채권자 보고 빚좀 내지 말라고 윽박질러놓곤 다음날 다시 찾아와 돈 좀 빌려달라고 애걸하기를 반복하는 것이 최근의 채권시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부채로 유지되는 경제를 바꾸어야 한다면서도 내년에도 대규모의 채권 발행을 예고한 멍청한 정부가 있고, 반대쪽엔 대출이 막혀 중도금과 전세금을 구하기 위해 자금을 인출하는 가계가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 애 먼 고생을 반복하다 결국 삼삼오오 모여 새빨개진 얼굴로 말없이 담배만 뻑뻑 피우는 채권부서 친구들이 있다. 정부는 유동성을 줄여 부동산 시장을 안정시키려고 하지만 공급이 부족한 특정 재화의 가격을 안정시키겠답시고 전체 유동성을 죄는 것은 채권시장 뿐 아니라 주식시장과 내수, 특히나 코로나로 재무구조가 크게 악화된 서비스업과 자영업자들에게 사약이나 다름없으리. 

지금이야 위통약을 집어먹는 것이 채권 담당자들 뿐이겠지만 얼마 안가 더 많은 사람들이 제산제와 아스피린을 찾게 될 것이다. 그들 모두에게 내 작은 위로를 건넨다. 부디 그대들의 고통이 오래가지 않기를.



*외국인도 있지만 편의를 위해 제외한다.
**이런 현상은 미국과 유럽을 포함한 거의 대다수의 나라에서도 발생했다.
***연금충당부채나 지방공기업을 포함하느냐에 따라 집계가 약간씩 다른데 순수정부부채만 계상할 경우 약 125조, 광의의 부채를 모두 포함할 경우 240조가 된다.

2021. 10. 23.

오징어 게임 그리고 다섯 개의 사족

 


아래 내용은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드라마가 세계적으로 흥행하게 된 데에는 456명의 참가자가 처한 현실이 우리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이 밀폐된 공간에 갇힌 것처럼 코로나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실내에 격리되었고 마음속 상자 안에 담긴 고독은 더욱 깊어졌다. 참가자들을 통제하는 진행요원들의 의상 역시 방역을 지시하는 이들이 입은 레벨 D의 방호복을 닮았다, 색상만 조금 다를 뿐. 하지만 그들이라고 뭐가 다를까. 선홍색 슈트 안에 갇힌 진행요원들이 서로 눈빛조차 나누지 못한 채 콜록대며 모스 부호로 소통하는 것처럼 우리가 교감할 수 있는 영역 역시 0과 1로 이루어진 디지털세계로 쪼그라들었다. 인터넷이 우리를 더 넓은 세계로 인도할 것이라는 바람과는 반대로 우리는 좁은 방 안으로 구속되었으며 따듯한 타인의 온기가 있어야 할 곳은 덕지덕지 붙은 악플로 도배되었다. 참가자들이 복잡하고 구불구불한 통로를 거닐며 헤메듯 우리 역시 드넓은 온라인 공간에서 길을 잃었다, 자신을 인도해 줄 누군가의 등짝을 찾아서.

이 게임의 세트장에서는 모두가 누군가의 감시를 받는다. 마찬가지로 코로나 이후의 세계에서 우리 역시 누군가의 감시에 놓여있다. 빅 테크 기업들은 당신의 구매내역과 소비습관, 검색 빈도, 인간관계, 심지어 사소한 성적 취향까지 모두 속속들이 캐내어 자신들의 광고주들에게 팔아 치우고 있다. 마찬가지로 빅 브라더는 당신의 동선과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꿰고 있으며 개인에 대한 정부의 통제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다. 그래서 홉스가 국가라는 존재에 리바이어던이란 괴수의 이름을 달아주었나 보다. 소셜미디어 회사들은 마우스를 몇 번 클릭하는 것 만으로도 트럼프 같은 막강한 정치인들 조차도 벙어리로 만들 수 있으며 빅 브라더는 당신이 런닝머신에서 어느 정도로 뛰어야 하는지까지 규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선을 넘어서면 당신은 범죄자가 된다. 어디선가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탕.  

이렇게 코로나와 금융시장의 패닉으로부터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빅 테크와 빅 브라더를 피해 세상 밖으로 나와 마주한 것은 양적완화로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자산들 가격이었다. 마치 참가자들의 숙소 천장에 붙은 거대한 저금통처럼, 내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손만 뻗으면 내것일 수도 있던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 그렇게 우리는 모두 벼락거지, 아니 탈락자가 되었다. 남은 생존자들은 한정된 자원을 두고 제로섬 게임을 벌이기 시작한다. 제한된 일자리를 두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문과와 이과가, 중년과 대졸자가, 여자와 남자가, 그리고 시민권자와 외국 노동자들이 줄다리기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가 어찌 이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에 공감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 드라마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그려낸 참으로 불쾌한 우화이며 잔혹한 동화와도 같다.

나와 겹치는 부분이 있어 그럴까, 가장 긴 여운을 남긴 등장인물은 서울대 경영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조상우였다. 게임을 거치며 소시오패스로 흑화한 줄 알았던 그에게 연민을 넘어 경외감을 느꼈던 이유는 그가 너무나 절박하고 합리적인 이유로 죽음을 택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라운드인 오징어 게임에서 그는 패배했다, 이제 그는 여느 탈락자와 같이 죽어야 했다. 하지만 기훈이 상금을 포기하고 게임을 중단할 테니 함께 집에 가자고 손을 내밀며 인간미를 내비치는 그 순간, 그는 주저 없이 나이프를 뽑아 자신의 목에 박아 넣었다. 바로 강새벽의 목을 찌른 곳과 정확하게 같은 그 자리에. 

게임이 중단된 사이 잠시 쌍문동에 들렸을 때, 아마도 상우는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을 것이다. 노모에게는 두 가지 자랑거리가 있었으니 하나는 서울대 경영대를 수석으로 들어간 아들이고, 또 다른 하나는 평생을 바쳐 쌍문동 시장 한 구석에 마련한 작은 가게였을 테지. 모진 팔십여 년의 세월을 버텨가며 살아온 그녀에게 그 둘은 마치 훈장과도 같았으리라. 하지만 이제 아들은 시퍼런 수의를 입은 범죄자가 될 것이고 늙은 그녀는 평생을 바친 그 가게가 경매로 넘어가 헐값에 팔려나가는 것을 목도할 것이다. 그래서 상우는 다시 오징어게임에 참가하기로 결심한다. 어머니를 그 지옥에서 건져내기 위하여,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것이 평생을 여의도에서 살다 몰락한 그의 마지막 베팅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믿고 따르던 알리를 속여서 배신했다. 피 흘리며 죽어가던 강새벽이 게임중단을 요청할까봐 그녀를 살해했다. 어찌 그들의 목숨과 내 사랑하는 어머니의 삶을 저울질하랴.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자신을 죽였다. 오로지 기훈의 손에 456억을 쥐어주기 위해서. 그렇다면 저 바보 같은 형이 나를 가엽게 여겨 우리 어머니를 살려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겠노라는 기훈의 약속도 계약서나 각서도 없었지만, 그는 그 가느다란 희망 하나만으로도 주저 없이 나이프를 들어 자신의 목을 힘껏 찔렀다. 선물로 60억을 베팅했다 몰락한 그는 마지막으로 그 가냘픈 희망에 목숨을 걸었다.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그는 나이프로 내가 넘지 못할 선은 없다고 답한 셈이다. 자신의 죽음 그 너머까지도. 


이 모든 장면을 묵묵히 지켜보던 프런트맨에게서 우리는 공정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외쳤다, 바깥과는 달리 오징어게임의 세계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고, 하지만 정말 그랬나. 다른 참가자들을 얼마든지 패 죽일 수 있는 깡패 덕수와 치매 노인이 함께 데스게임을 치르는 것이, 또 힘이 센 알리와 가냘픈 새벽이 같은 여성이 줄다리기를 펼치는 것이 과연 공정한가. 두루미와 여우에게 똑같이 호리병에 담긴 수프를 내어준다고 과연 여우가 그걸 공정하다고 느낄 것인가. 아니, 또 프런트맨의 머리 위에 있는 001번 참가자의 존재는 어떻고.  

그런데도 프런트맨이 이 게임이 공정하다고 믿는 것은 살아남은 자신의 과거를 정당화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그는 결코 기훈 같은 참가자가 아니었을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상우에 더 가깝지 않았을까.  함께 게임에 참가한 수백의 동료들이 죽어가는 것을 목도했고 또 그 중 몇몇은 자신의 손으로 직접 탈락시켰을 것이다. 타인의 찢긴 살점을 즈려밟고 결승선에 도달한 그의 인간성과 영혼은 이미 피범벅이 되어 만신창이나 다름없었을 거라고 쉬이 짐작할 수 있다. 무너진 그의 자아와 양심을 지탱하던 것은 역설적으로 오징어 게임이었다. 바깥세상은 불공정하고 불평등하며 부조리하지만 오징어 게임은 공정하고 평등하기에 합리적인 곳이고 거기서 살아남은 자신은 옳다는 그 믿음, 그 믿음이 없었다면 그는 진작에 무너졌으리라.

이런 사고방식은 프런트맨 뿐 아니라 오일남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서도 기훈에게 내기를 제안한다. 그리고 기훈에게 묻는다, 당신은 아직도 사람을 믿느냐고. 이처럼 그에게 게임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합리화하는 절차와도 같다. 그대들이 믿는 휴머니즘이란 얼마나 얄팍하고 희소한가, 따라서 인간성을 배신하고 의심하며 죽고 죽이고 살아온 나의 삶은 틀리지 않았노라. 그것이 오일남의 진짜 속내였을 것이다.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하면 오징어게임의 여섯 단계는 그가 걸어온 삶을 상징하는지도 모른다. 나이로 짐작건대 일제강점기에 태어났을 그는 해방과 내전을 겪었을 것이고 그 시기에 살아남는다는 것은 마치 456명의 참가자가 아수라장에서 각자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이던 1차 게임과 흡사했을 것이다. 전후 남북으로 나뉜 한반도에서는 자유 진영이냐 공산권이냐를 두고 뽑기처럼 줄을 잘 서는 것이, 또 줄다리기처럼 편을 나누어 상대를 섬멸하는 것이 생존의 관건이었다. 전후 대한민국에서는 함께 등을 맞대고 싸웠던 군인들이 쿠데타로, 개발독재의 시대에서는 호남과 영남이, 또 87년 항쟁 이후엔 YS와 DJ가 마치 오징어게임의 2인1조의 구슬치기처럼 등을 돌리고 싸웠고 서로에게 상처를 안겼다. 이후의 대한민국은 세대 간의 싸움이 되었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386들은 자신보다 먼저 태어난 산업 세대의 등을 떠밀어 떨어뜨렸고 이제 집과 일자리를 빼앗긴 MZ세대는 운동권 세대를 증오하고 있다. 마치 일렬로 서서 앞사람이 개척한 길을 따라 걷다 앞사람을 밀어버리던 5번째 다리 건너기 게임처럼. 그리고 그 모든 게임의 끝에는 가장 폭력적이고 원초적인 오징어 게임이 기다리고 있다. 마찬가지로 평생토록 잔인하게 경쟁자를 짓밟으며 살아온 오일남의 인생에 남은 재미와 기쁨이라곤 야만적인 오징어 게임 뿐이다. 뇌종양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오일남은 자신이 참가할 여섯 개의 게임을 이렇게 설계했다. 젊어서는 아들에게 변신로봇도 사주지 못하고 끝끝내 가족도 없이 쓸쓸히 죽어간 그가 그 게임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 아닐까, 아니야. 나는 잘못 살지 않았어.
  


훌륭한 연출과 각본에도 불구하고 드문드문 불편함을 느꼈던 것은 감독이 의도적으로 정치/사회적 메시지를 끼워 넣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은 삶을 찾아 탈북했다는 강새벽은 그래서 남한이 더 살기 좋냐는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고, 성기훈은 나는 열심히 일만 했을 뿐인데 경영진들이 잘못해서 회사가 부도가 났다고 성을 냈으며, 사람의 목숨을 책상 위에 떨어진 머리카락 한 올만큼이나 하찮게 여기는 VIP들은 모두 외국인 갑부들이다. 친북, 반재벌, 그리고 반외세. 그렇게 [우리민족끼리]라는 표어로 대표되는 90년대 운동권들의 유니버스가 저변에 아스라이 녹아있는 오징어 게임의 세계관은 그 시절 교련복만큼이나 쉰내를 폴폴 풍기고 있다. 더욱이 우리는 지난 5년간 그 철지난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정치인들이 사회와 시민의 삶을 어떻게 박살냈는지 겪지 않았는가, 그런 메시지들이 거북한게 당연하지   

또 황동혁 감독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실패를 사회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성기훈이 어머니의 등골을 빨아먹으며 사는 것도, 경마에 매달리는 한심한 인간인 것도, 아내와 이혼하고 딸의 생일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것도 모두 비뚤어진 사회 때문이다, 혹은 돈만 아는 자본주의 탓이라고 항변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극 중 성기훈이 근무했던 쌍용차는 리만사태 직후인 2009년 1월에 파산을 선언했는데 이후 12년간 이 회사는 대부분의 분기에 적자를 기록하며 또 다시 파산했다. 같은 시기 재규어, 롤스로이스, 벤틀리 등의 고급메이커는 물론이고 사브나 피아트-크라이슬러 같은 대중적인 제조사들까지도 부도, 혹은 경영 위기에 봉착했는데 과연 쌍용차의 부진이 경영진의 잘못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게다가 자본주의는 경쟁력이 없는 기업을 도태시켜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시스템인데, 자력생존이 거의 불가능한 쌍용차가 11년간 연명한 것은 거의 억지에 가까웠고 그 과정에서 많은 인력과 자본과 생산요소가 낭비되었다. 성기훈이라는 한 노동자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삶이 망가진 이유는 회사가 그를 해고했기 때문이 아니라 노동시장이 충분히 유연하지 못해 그가 울산이나 평택의 공장으로 재취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속했던 노조 역시 그 비합리적인 자원 배분에 일조하지 않았나.   

얼마 전 에디슨모터스가 쌍용차의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쌍용차의 인수를 검토했던 지인들에게 전해 듣기로는 일부 인수 희망자들은 회사의 브랜드가치나 기술보다 공장 부지와 같은 유형 자산에 높은 가치를 매겼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드라마를 대단히 높게 평가한다. 무엇보다 감독이 오감을 사용해 극단적인 대립을 강조하는 장면들은 너무나 매력적이다. 파란딱지와 빨간딱지로부터 출발해 추억의 유년기의 놀이는 잔혹한 살육 파티로 이어지고 파스텔 톤의 아기자기한 세트장에서 참가자들을 돈을 위해 서로를 패 죽이고 찔러 죽인다. 재즈 선율이 울려 퍼지는 동시에 화면에서는 두개골이 깨지고 뇌 조각이 흩뿌려지며 사방으로 핏방울이 튀어 오른다. 정밀한 반도체공장이나 의료현장에서나 볼 수 있을것 같은 진행요원들의 의상과 더러운 참가자들의 체육복, 심지어 색상까지도 극명하게 대조되는 진한 핑크 vs 녹색. 큰돈을 내고 쇼를 관람하는 VIP들과 큰돈을 벌기 위해 목숨을 걸고 쇼를 펼치는 참가자들. 막강한 권력으로 게임을 주최한 오일남은 동시에 게임의 참가자이며 그것도 가장 약한 치매 노인이지 않은가. 쌍문동의 수재 조상우와 쌍문동의 백수 성기훈. 그리고 1번과 456번. 도무지 어울릴 수 없는 것들을 한데 모아 잘 어우른 이 잔혹동화는 내가 본 최고의 드라마로 손꼽아도 손색이 없다, 시나리오도 연출도 미술도 그리고 음악도.

시즌 2를 기대한다. 

2021. 10. 9.

모두가 웃지는 못할 것이다

아인슈타인만큼 똑똑하지 않아도 우리의 세계가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것이다. 모든 인류는 침팬지나 보노보노보다 매력적으로 생겼지만 모든 인류가 잘생기거나 예쁘지는 않다. 반에서 모두가 1등을 할 수는 없으며 모두가 키가 크거나 싸움을 잘 할 수도 없다. 이제까지 지구에 존재한 약 천억 명의 인류 중에서 오늘날의 70억 명 거의 모두는 상위 7%에 속하지만 우리 모두가 부자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지체계는 절대적으로 상대적이니까. 마찬가지로 모두가 투자에 나설 땐 그 어느 때보다도 모두가 웃을 가능성이 낮은 법이다.

모든 회사들은 저마다의 손익계산서를 만든다. 그리고 그 손익계산서는 상당 수의 주식평가모델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바로 이전 글에서 언급했듯 우리는 비용을 간과하는 시대에 있다. 그리고 어떤 업종이나 어떤 회사들은 그 비용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주식평가의모델에서 금리라는 팩터를 변화시켜본다면 주식할인율이 현재가치를 얼마나 크게 변화시키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수익률곡선이 평탄한지 가파른지에 따라 현금흐름이 각기 다른 기업의 현재가치 역시 크게 달라진다. 하지만 많은 투자자들이 이를 간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직까지 전 세계의 실질금리는 크게 마이너스 영역에 있고 회사들의 영업이익은 빠르게 개선되었으며 코로나로 인한 타격은 예상보다 적었으니 전 세계가 다시 불황으로 회귀할 가능성은 낮지만 미국의 고용과 중국의 거시지표들 그리고 세계 통화량 모두 음의 기저효과를 마주하고 있다. 이는 위기를 겪고 회복 단계에서 늘 벌어지는 일이며 또한 지나고 나니 그 과정에서 대개 모두가 웃지는 못했더라. 어떤 주식은 지나치게 비싸고 어떤 주식은 상당히 싸다. 어떤 자산은 매력적이지만 어떤 자산은 위험할 정도로 고평가되어 있다. 그리고 늘 그렇듯, 오늘날 우리의 작은 선택은 나비효과처럼 미래의 운명을 크게 가르기 마련이다.

나는 지금이 포트폴리오를 열어 구성종목들을 재검토할 시점이라고 믿는다. 

불쾌한 인플레이션의 시대 (II) - 툰베리의 저주

글을 시작하기 앞서 당부할 것이 있다. 당신이 트레이더가 아니라면 단기적 거시경제 전망을 내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하지 말라. 그러기에 시간은 너무나 소중한 자원이다. 우리 트레이더들이야 미국의 채권 금리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리고 연준의 통화정책이 어떻게 되는지에 따라 보유 주식들의 성과가 갈리고 따라서 금이나 리츠, 혹은 다른 파생상품으로 위험을 분산하거나 집중해야 하지만 트레이더가 아닌 투자자라면 그럴 일이 없다. 게다가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일반인들의 거시경제 분석은 대부분 바닥부터 잘못되었고 전문가들의 전망은 대부분 틀리거나 매일매일 변하며, 또 정부와 교수들은 뒷북을 치기 바쁘니 죄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작년 코로나 초기와 하반기처럼 거시경제가 개별 투자자의 수익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순간은 10년에 한두 번뿐이다. 나머지 기간 동안 투자자들이 해야 할 일은 항상 우직하게 비싼 자산을 팔고 싼 자산을 사는 것, 그것 뿐이다. 이 블로그에서도 나는 최대한 트레이더로서의 단기 전망을 삼가고 되도록 투자자로서 장기적 전망에 집중하려고 한다. 트레이딩과 투자는 아주 다르니까. 아래의 글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   


*               *               *


작년 7월에 불쾌한 인플레이션의 시대라는 글(링크)을 올렸을 땐 미국의 CPI는 1% 아래였고 미국 10년 금리는 0.5% 수준이었으며 누구도 인플레이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세계는 정확하게 반대 지점에 와 있다. 많은 이코노미스트들은 연말 미 10년 국채금리가 2%에 도달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고 CPI는 5%를 넘어 2008년 이래 최대치를 기록했다. 과연 이제 인플레이션은 통제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을까.

파웰은 그 질문에 대해 단호하게 아니라고 답했다. 최근 약간 유보적인 입장을 보이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그는 기저 인플레이션 압력은 내년 상반기로 접어들며 더욱 줄어들 것이라고 예측했고 그의 주장에 의구심을 보이며 한때 1.75%까지 질주하던 미국의 10년 금리는 크게 주저앉으며 don't fight the fed라는 단순한 경고를 또다시 잊은 많은 트레이더들에게 패배를 선사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조금 다른 인플레이션 압력을 직면하기 시작했다. 치솟는 원유와 천연가스가격이 경제지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기 시작하고 있고 신조어를 베껴 쓰는것 말고는 별다른 부가가치를 생산하지 못하는 국내 경제 기자들은 그린플레이션이 닥쳤다며 호들갑을 떨기 바쁘다. 과연 파웰이 틀린 것일까.

나는 연준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동시에 장기적으로 인플레이션을 무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먼저 현재의 인플레이션 압력을 크게 셋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기저효과, 둘은 코로나로 인해 멈췄던 경제가 재가동을 시작하며 나타난 일시적인 공급 차질, 나머지 하나는 코로나 이후 정치사회적 압력으로 생산라인을 바꾸는 것. 이 중 기저효과는 빠르게 사라질 것이며 두 번째 측면도 얼마 안가 정상화될 것이다. 폴 크루그먼 역시 1970년대에는 임금 상승으로 촉발된 인플레이션 기대가 경제에 만성화되었지만 현재의 상황은 매우 다르다(링크)며 연준의 손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마지막 세 번째 요소는 세계 경제에 장기적으로, 그리고 불쾌한 방식으로 인플레이션 압력을 가할 것이다.

코로나 이전과 이후의 세계는 무척이나 다르다. 정부의 역할은 무척이나 비대해졌고 세계의 각국 유권자들은 중국에 적대적으로 변했다. 그리고 코로나를 일종의 자연재해라고 여긴 탓일까, 환경에 대한 관심과 규제도 강화되고 있다. 그리고 문제는 이 모든 변화가 결코 공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전 글에서 언급했듯 비대해진 정부는 민간의 영역을 구축하고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낮추는 수준까지 진행될 것이고(정책을 설계하는 것이 경제학자가 아닌 사실상 일반 유권자들이니까), 국제정치적 이유로 세계 GDP의 17%를 차지하는 중국을 밸류체인에서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대다수 재화와 서비스의 비용이 더 이상 최적점에 있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리고 환경에 대한 규제는 소비자와 기업, 그리고 납세자들에게 막대한 비용을 야기한다. 그리고 이는 대부분 공급 측면의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질 것이다.

최근 에너지 가격이 오르는 것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경제는 회복하니 당연히 에너지 수요가 늘어날 것이 자명한데 과거와는 달리 시추공의 숫자가 유가를 따라 크게 늘지 않고 있다. 일부는 작년 파산했거나 파산할 뻔한 관련업계가 자본지출을 늘리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주된 이유는 미래의 유가 수요가 줄어들 것이라고 추산하기 때문이다. 시추공을 뚫는 데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데 그 수익은 향후 10년간의 유가에 달렸다. 만약 2030년부터 각국정부가 내연기관 차량들을 금지한다면 10년 뒤의 원유 수요는 낮아질 것이고 그렇다면 시추/정제업체들은 투자에 나서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유가가 높아 정제마진이 커져도 모두가 10년 뒤면 그 마진이 박살이 날 것이라고 얘기하니까. 오히려 현재의 휘발유 값이 높아지게 되면 전기차에 대한 사회적 압력은 높아진다. 이는 이코노미스트들로 하여금 미래의 내연기관 수요를 더 낮게 예측하게 만들고 따라서 원유 수요에 대한 전망치를 낮춘다. 그러니 미래의 수요를 바라보고 투자에 나서는 시추/정체업체들은 머뭇거리게 된다. 치솟은 유가에도 불구하고.

뿐만 아니라 전기차, IOT, 블록체인, 클라우딩, 스트리밍 서비스 등 4차 산업은 막대한 전기를 필요로 하고 있다. 독일과 한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은 그 늘어난 전력수요를 친환경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우리가 새로운 산업인 신에너지의 효율과 생산량을 정확하게 예측해 줄어든 화석연료 생산에 알맞게 대응할 수 있다고? 당장 올해 초 텍사스에서 벌어진 전력난을 떠올려보자, 인류는 고등생명체이긴 하지만 결코 신의 반열에 오르진 못했다.

산업의 쌀이라는 철강을 생산하는 제철업계 역시 이 문제를 지적한다. 지난달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포스코는 2050년까지 탄소중립에 도달하려면 약 40조의 비용이 필요하다고 밝혔다.(링크) 이 숫자는 다소 과장된 것이겠지만 과거 장기적 사업들의 비용은 대부분 기존의 추계치를 크게 벗어났지 않은가. 그뿐만 아니라 전기차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리튬이나 알루미늄, 그 외의 다른 원자재 생산라인을 뜯어보면 대부분 환경규제의 직접적 영향을 받는다. 아니 거의 모든 원자재 산업들이 영향을 받는다. 

이런 공급충격에 의한 인플레이션은 근본적으로 70년대의 오일쇼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오일쇼크가 초단기적으로 큰 충격을 가했던데에 비해 사회/정치/규제로 인한 인플레이션은 훨씬 점진적이고 약한 충격을 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환경규제로 인한 비용이 지나치게 상승하면 정치인들과 유권자들은 현재의 환경정책을 재고할 것이고 오일쇼크와는 달리 그 속도를 조절하는 것은 우리 자신들일 테니까. 그렇기에 이를 스태그플레이션이라고 부르는 것은 심각한 과장이고 그저 다소 불쾌하다고 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하지만 현재는 대다수의 정치인들, 대중들 심지어 투자자들도 이런 사실을 잘 언급하지 않는다. 모든 관심이 구글과 아마존 넷플릭스 그리고 전기차에 쏠려있고 또 오로지 장밋빛 미래만을 그리지만 그런 정책들이 가져올 변화가 기저에서 어떤 비용을 야기하는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미 그 징후들을 목도하고 있는데도. 이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는 고작 중학교만 졸업한 채 배우기보다 남을 가르치는데 더 많은 시간을 써 온 그레타 툰베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환경전문가가 아니기에 탄소배출을 얼마나 급격하게 줄여야 하는지 이야기해 줄 수 없지만 이것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도덕적 우월감에 가득 찬 툰베리들의 목표만큼 탄소를 줄이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공급 쇼크라는 비용을 감내해야 한다고. 당신들이 쿨하게 테슬라 전기차를 사고 텀블러를 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더운 여름에 에어컨을 키지 않고 다이소의 생필품 값이 두 자릿수 퍼센티지, 혹은 그 이상으로 상승할 것인데다 해외여행은 물론 국내여행조차 줄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그레타 툰베리, 그린에너지 기업, 그리고 환경운동가들 그 누구도 이런 비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 시대의 투자 패러다임은 과거와 꼭 같지는 않을것이다. 규제로 인한 공급 측면 인플레이션에 각 중앙은행들이 과거와 같이 급격한 금리 인상으로 대응할지 의문이고 또 소비자에게 비용상승을 전가할 수 있는 기업과 아닌 기업들의 장래 역시 크게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변화는 단기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장기에 걸쳐 이뤄질 것이고 순전히 이로 인해 경제가 불황에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변하지 않았다, 이에 걸맞게 비싼 자산을 팔고 싼 자산을 사는 것. 언제 어디서나 늘 그랬듯이. 


사족: 툰베리의 sns에 올라온 이 한장의 사진은 그녀가 마주한 모순을 상징한다. 열차, 텀블러, 바나나 밀과 치즈 빵의 운송, 종이컵, 비닐, 플라스틱 등 단 한장의 사진에서 그녀가 사용하는 이 모든 제품들은 직간접적으로 석유와 탄소배출에 연관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을 누리면서 10년 내에 그녀가 원하는 수준으로 급격하게 탄소배출을 줄이려면 안타깝지만 자살 외에는 방법이 없다. 툰베리는 커서 멜서스나 타노스가 될 것인가.

2021. 10. 2.

shape of my heart


 


He deals the cards as a meditation

And those he plays never suspect

He doesn't play for the money he wins

He don't play for respect


He deals the cards to find the answer

The sacred geometry of chance

The hidden law of a probable outcome

The numbers lead a dance




내가 본 최고의 연기 중 하나는 레옹에서의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였다. 

아버지에 두들겨 맞으면서도 반항적인 눈빛을 놓지 않았던 그 작은 아이가

오로지 살아남기위해 가족들의 주검을 아무렇지도 않은척 지나던 그 작은 아이가

끝끝내 무너져 레옹의 문 앞에서 절규하듯이 매달리며 초인종을 누르던 그 순간

환하게 쏟아지는 빛과 함께 문이 열렸다, 그 작은 아이에게.

그렇게 마틸다는 레옹에게 마리아가 되었다.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1:33부터 2:15까지.

2021. 9. 22.

삶에는 퇴고가 없다

 

연휴를 맞이하여 예전 글들을 쭉 읽어내려오고 나니 얼마나 부끄러운지. 오타와 비문에 매끄럽지 않은 문장들이 꼭 내가 살아온 발자취와도 같더라. 그래서 하나하나 고쳐내려가다 에이 하고 관두고 말았다. 내가 온전하지 못한 삶을 살아온 것처럼 내 글이 온전하지 못한게 당연할 터이니.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2007년의 가을, 셔틀마저 끊긴 그 늦은 밤 학관 뒤 벤치에 앉아 미래를 고민하던 내가 있었다. 나는 작은 실수를 하나 저질렀고 그 실수로 인해 작가의 꿈을 버리고 돈이나 벌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아둔한 나는 실수에 실수를 거듭했고 어찌저찌 하여 트레이더가 되고 말았노라. 하지만 사실 나는 글을 쓰는 이가 되고 싶었다. 다시 돌아가면 나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과연 지난 십년간 내가 번 돈이 그동안 내가 쓰지 않은 글보다 값지다고 할 수 있을까.


2007년으로부터 7+7년 뒤

늦은 가을 밤, 아라리오 미술관 앞 벤치에 앉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