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9. 28.

바닷물을 들이키는 청년 창업가들

리스크를 지는 것은 현명한 일이다. 행동경제학의 여러 실험과 분석에 따르면 인간은 안정성에 과도한 프리미엄을 부여하기 때문에 적절한 리스크를 지는 것은 오히려 높은 보상을 돌려주곤 한다. 가장 안정적인 예금의 세후 수익률이 거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인플레이션을 하회하는 것을 보라. 리스크를 지는 것은 현명한 일이다. 하지만 그 리스크 역시 현명하게 져야 한다. 재산을 거의 탕진한 도박꾼이 마지막 한 패에 모든 것을 걸다 오링나는 것을 두고 우리는 그가 현명하게 베팅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도박영화의 흔한 클리셰처럼 우리 청년들은 창업이라는 잘못된 도박판으로 몰려나고 있다.

NBER(Working Paper No. 24489),
Pierre Azoulay, Benjamin Jones, J. Daniel Kim, and Javier Miranda

다음은 전미경제조사회 2018년 7월호 보고서에서 발췌한 도표로 성공한 창업가의 연령분포를 보여준다.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마크 주커버그와 같은 20대들의 창업신화들과는 달리 창업에 성공할 확률이 가장 높은 나이는 바로 35-45세로 보인다. 빈도만으로 본다면 대학생의 창업이 성공할 확률은 환갑을 넘긴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의 조사결과와 데이터를 한국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의 데이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전문성의 부재에 있다. 얼마 전 인스타에서 핫한 모 비스트로를 방문했을 때 두 가지에 놀랐는데 하나는 쉐프와 오너의 나이가 너무나 어리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음식의 퀄리티가 참으로 처참했다는 것이다. 요식업의 기본조차 모르는 아마추어들이 음식점을 개업하고 거기서 실패를 맛보는 일은 이미 TV 예능 골목식당의 단골 소재가 된지 오래다.

이는 비단 요식업에 국한된 일이 아니다. 매년 여름이면 청계천 변에는 도깨비야시장이 열리는데 시의 후원을 받은 젊은 소상공인들이 가판을 열고 자신들이 만든 수공예품들을 팔고 있다. 하지만 살 것이 없다. 젊은 창업가들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청계천고가도로가 철거되기 전 노점상들보다도 더 조악한 품질과 형편없는 디자인 때문에 도저히 지갑을 열 마음이 들지 않는다. 내 생각에 그들의 대부분은 필히 파산할 것이고 운이 좋다면 차라리 일찍 폐업해서 손실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제품이나 서비스가 형편없는 이유는 자명하다. 그들이 회사나 식당이나 공방에 들어가 기본기를 배울 나이에 제품을 생산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들의 미숙함은 그들의 잘못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와 정부가 그들로 하여금 창업을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와 멘토들이 나서서 너는 지금 창업을 할 때가 아니라, 기본기를 익히고 기술을 배울 때다. 창업은 아이디어 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너의 비즈니스 모델은 경쟁력이 없다, 와 같은 쓰린 조언을 해주지 않는다. 되려 이상한 창업지원센터를 만들어 청년들을 실패의 일방통행길로 유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대졸자들의 실업률을 줄이기 위해 청년들의 창업을 장려한다. 그렇게 폐업의 비극은 나라에 의해 대량생산된다. 이는 비단 문재인 뿐 아니라 박근혜 정권부터 이어진 문제로 정부는 최저임금을 취준생들의 생산성보다 더 빠르게 높여 그들의 취업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고(링크), 그로 인해 20대 실업률이 폭증하자 창업을 유도해 청년실업률을 낮게 유지시켜왔다. 하지만 숙련공들과 대기업 자본들이 경쟁하는 시장에, 비숙련인데다 소자본, 아니 무자본인 청년들이 뛰어드는 것은 그냥 가미가제 작전이나 다름없다.


날씨가 좋아 서울숲을 걷다 모 기업에서 후원하는 청년창업공간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시세에 맞는 월세를 감당하고 살아남을 가게는 단 하나도 없었다. 당장 이 곳의 가게들과 시장경제 맞게 월세를 내는 인근 겔러리아포레의 가게들과 비교해 보라. 이 청년들이 유동인구가 이렇게나 많은 곳에 가게를 낼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기업이 후원 덕이다. 차라리 그 자리를 일반 자영업자들에게 개방했다면 가장 많은 수익을 낼 가게들이 입점했을 것이고 또 그렇게 훌륭한 사업모델을 가진 가게들은 알바생을 고용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알바생들이 직원이 되고, 그들이 경력과 자본 그리고 인맥을 모아 새로운 장소에 분점을 내고 창업하는것 그것이 시장경제의 자연스러운 선순환 아니였나. 기업이 수십만 청년창업가 중 몇명을 뽑아 마치 부자엄마나 아빠행세를 하며 월세를 대신 내주며 자비를 베푸는 것은 낭만이나 후원이 아닌 사회적 낭비고, 또 결코 이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

숙련공 노조들의 정치행위로 인한 최저임금의 비정상적 폭등, 그리고 코로나 사태. 한낱 개인이 넘을 수 없는 두 벽의 사이에 낀 청년들은 멧돌 사이에 갈리는 콩 처럼 부숴지고 있다. 함께 정권교체를 이뤄낸 40대 운동권들은 20대를 외면하고 배신했으며 그들의 젊은 날은 그렇게 무기력하게 식어가고 있다.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마치 갈증에 못이겨 바닷물을 들이키는 조난자들처럼 대한민국의 20대는 창업시장으로 몰리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성공하는 것은 환갑을 넘긴 노인이 실리콘밸리에 입성하는 것 만큼 힘들다. 그들도 이런 현실을 모르는 것이 아니리라. 단지 대안이 없을 뿐이지. 오늘의 20대가 한국 중산층의 황금기였던 8090년대의 대중문화에 빠져드는 것이 내겐 어딘가 모르게 서글퍼 보인다.

2020. 9. 16.

스가 요시히데는 새로운 한일관계를 시작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 악명 높던 아베 신조 총리의 임기가 끝나고 그 후임자로 스가 요시히데가 일본의 행정부를 이끌게 되었다. 스가 총리의 일본은 한국과 새로운 관계를 구축할 수 있을까?

이런 희망을 가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물론 새로운 총리의 취임은 양국에게 손해인 현재의 긴장관계를 해소할 계기가 될 수 있겠지만, 한일관계를 위기로 몰아넣은 근본적 원인을 바꾸지는 못한다. 사실 일본을 오른쪽으로 몰아가는 것은 바로 우리 대한민국이며 우리의 외교정책은 이런 역학구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아마추어들이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틀린 한일관계를 아베의 개인적 성향에서 찾아왔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아베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는 A급 전범용의자로 분류되었던 극우계지만 동시에 아베는 친한파였던 아베 신타로의 아들이기도 하다. 그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는 재일교포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여 그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고 그 친밀한 관계 때문에 선조가 한국계라는 루머까지 있었다. 그 영향을 받아 그가 처음 일본의 총리로 취임했던 2006년, 아베는 첫 방문지로 한국을 꼽았고 그 해 10월의 방문에서 현직 일본총리로는 최초로 국립현충원을 참배했다. 또한 그의 아내, 아키에는 유명한 한류 팬으로 휴대전화 배경화면에 배용준의 사진을 저장하고 일주일에 한번씩 한국어 과외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으니 일본내 극우파에서 아베를 도래인(한국인)의 후손이라며 비아냥대는 것도 당연하다. 현재의 모습과 참으로 놀라운 대조를 이루지 않나. 이런 사례가 고작 아베 뿐일까. 무역분쟁을 취재하던 한국 기자들이 일본의 카메라를 사용하는 것을 지적하고, 한국 협상단에게 의도적으로 무례를 범한 고노 다로 외무대신(현 방위대신)역시 친한파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 고노 요헤이는 (공식적으로는)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바로 그 고노 담화의 주인공으로, 당시 관방장관이었던 그는 약 20개월간 조사를 거쳐 일본군이 위안부 동원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이처럼 No Japan운동의 주적 두명은 모두 한때 친한파, 적어도 지한파였던 이들이다. 하지만 지난 십여년의 세월은 그들을 반한파로 돌려놓고 말았다. 거기에 과연 우리의 역할이 전혀 없었을까. 국제 외교사를 살펴보면 적국 온건파의 입지를 악화시키는 것은 바로 아군의 강경파였다. 북한의 유화적 대외정책을 주도하던 외교라인의 숙청을 불러온 것은 대북문제에서 강경일변도의 정책을 펴던 조지 부시와 공화당이었고 2차 세계대전에서도 영국과 협상을 준비하던 히틀러로 하여금 3천여대의 루프트바페를 동원해 런던을 폭격하게 만든 것은 주전파 윈스턴 처칠 아니었나. 강경일변도로 나서는 상대에게 유화적 태도를 고집하는 것은 간첩밖에 없다. 그런 관점에서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자. 2000년 이전엔 문제가 되지 않던 욱일기는 갑자기 나치의 하켄크로이츠와 동급이 되었으며, 해방직후 반민특위가 지정한 반민족행위자는 688명에 불과했지만 그로부터 60여년 뒤인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는 모두 4,339명을 친일파로 분류했다. 지난 10년간 우리는 일본이 점점 극우적 민족주의에 가까워져간다고 비난했지만 정작 우리가 같은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과거 두편의 글을 통해 아베는 극우로 흐를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하나는 경제적 이유(링크), 또 하나는 한국(과 중국)이 일본의 두려움을 자극하고 있기 때문에(링크). 그리고 이러한 역학관계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후임 스가 총리는 아베노믹스를 계승할 것을 천명했고 한국과 중국의 잠재적 위협은 5년 전에 비해 더욱 커졌다. 몇몇 언론들은 스가 총리의 내각 인사 중 지한파/친한파를 언급하며 전향적인 관계를 점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희망은 실망만을 남길 것이다. 개인적 배경만 두고 본다면 아베와 고노보다 더 한국에 우호적이었어야 할 일본 정치가는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둘은 모두 부친의 노선을 버리고 강강파로 전향했다. 이처럼 선대의 정치적 유산을 중요시하는 일본 정계에서 지한파/친한파의 아들들이 전후 최악의 한일관계를 이끌었다는 사실은 중요한 시사점을 남긴다. 양국의 역학관계는 불과 한 세대만에 친한파를 반한파로 만들 정도로 극심한 마찰을 빚어내고 있다. 

우리는 분명히 일본을 오판하고 있다. 그렇기에 합리적인 전략을 세우고 있지도 못하다. 다시 말하지만 국가 간의 외교는 지도자 개인의 취향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힘의 논리와 실리를 좆는 게임이론에 따라 이루어진다. 명분이나 개인의 호불호에 따라 국가정책을 정하는 것, 그런 병신외교를 펴는 것은 대한민국 뿐이다. 그런 병신외교가 대한제국에 어떤 운명을 안겨주었는지 잊어선 안된다.

2020. 9. 12.

봄에는 겨울을 생각하지 마

골라인으로 질주하는 메시처럼 모두를 제치고 내달리던 나스닥이 고꾸라지기 시작하자 몇몇 사람들은 지난 3월의 악몽을 떠올리고 있다. 더블딥을 예상하는 암울한 전망에서부터 다시 한번 빅 숏을 외치는 사람들까지 시장에는 다시금 부정적 전망들이 우세하다. 하지만 한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봄에는 겨울을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 

경제도 그리고 시장도, 사계절과 같이 순환의 사이클을 겪는다. 하지만 수많은 사건사고와 헤드라인이 점멸하는 매일의 시장에 파묻혀있다 보면 경기가 순환한다는 대명제를 종종 망각하곤 한다. 마치 바닷가 모래사장에 서서 발 아래 넘실대는 물결을 쳐다보다 반복되는 밀물과 썰물을 잊는것 처럼.

하지만 봄 뒤에 겨울이 오지 않듯 해빙을 맞이한 금융시장에 또 한번의 빙하기는 오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3월처럼은. 우한폐렴으로 인한 경제충격이 컸던 이유는 2008년 9월 이래 약 11년 5개월 간 쌓였던 낙관론이 공포로 뒤바뀐 충격 때문이었고 그 와중에 각 정부와 중앙은행들이 바뀐 경제상황에 제때 발맞추지 못하며 적절한 정책을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당장 이 블로그에 지난 2월, 그리고 3월에 올린 글들을 보라. 불과 몇주 후 닥칠 공포와 불황의 쓰나미에 정부와 한국은행이 얼마나 안이하게 대처했는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투자자들은 혹시나 찾아올 지 모르는 새로운 충격에 대비하고 있으며 정부는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 충분히, 어쩌면 필요 이상으로 준비가 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과거와 같은 수준의 패닉을 기대하기 어렵다. 

Citi Surprise Index
Citi Surprise Index

위 지표는 실제 경제데이터들이 예상치를 상회했는지, 혹은 하회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로 0보다 크면 기대이상, 작으면 기대이하의 지표가 나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수치가 집계 이래 최저점과 최고점을 오가는 데에 고작 73일 밖에 걸리지 않았고 아직도 이전 최고점보다 한참 높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는 이코노미스트들의 전망이 너무 암울해 실제 지표들이 예상치를 상회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그들의 재빠른 변심을 탓해서는 안된다. 이들도 자가격리중인 일개 시민들에 불과하니까.

우한폐렴사태가 처음 금융시장에 영향을 미친 지난 1월 말에 올렸던 글(링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모두가 낙관적일 때 비관적일 수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지금은 비관론과 낙관론이 적절히 섞여있으니 크게 걱정할 시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매일 작은 파도를 지켜보아야하는 트레이더들은 10%의 움직임에 일희일비 하겠지만, 일반 투자자들은 그저 늘 해오던 일들-비싼 주식을 팔고 싼 주식을 사는 것-을 충실하게 반복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겨울에서 막 벗어난 시기에 가장 낮은 리스크는 역설적으로 겨울이지만 인간의 마음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는 늘 포탄이 같은 자리에 또 떨어질 위험을 과대계상하기 마련이라 머지 않아 시장은 하방위험을 과도하게 반영할 것이다. 하지만 잠시 찾아온 꽃샘추위에 다시 빙하기를 걱정될 때 우리는 이 말을 기억해야 한다. 

봄에는 겨울을 생각하지마.   

2020. 9. 6.

글을 퍼가실 때 출처를 명시해 주세요.

이 블로그에는 가급적 개인적인 이야기를 올리지 않으려 했지만 이번만큼은 한번 해보려고 합니다. 아주 어릴때부터 저는 읽고 쓰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심지어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을 때엔 걷는 순간에도 무엇을 읽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만큼 문자에 대한 강박이 심해 어린시절 상담을 받았던 적도 있습니다. 책을 읽으며 길을 건너다 몇번 차에 치일뻔 했거든요. 또 열살 때 처음으로 부모님께 대들어 싸웠던 기억이 납니다. 시험에서 5개 이하로 틀리면 무슨무슨 전집을 사주시기로 했는데 하필 제가 딱 5개를 틀렸더라고요. 어차피 한번 읽고 버릴 책을 뭐하러 사느냐며 다그치는 부모님께 저는 서재의 국어사전을 가져와 5개 이하라는 말엔 5개도 해당된다고 박박 우겨 그 전집을 받아냈습니다. 그래도 두번은 읽었던 것 같네요. 다른 집 아이들은 책을 안 읽는다고 혼나는데 왜 나는 책을 읽는다고 혼을 내느냐, 뭐 그런 거로 부모님과 다투곤 했습니다. 아마 제가 좀 다른 환경에 있었거나 그 시절에도 유튜브같은게 있었더라면 좀 다른 강박증이 생겼겠지만 여하튼 제 삶은 그랬습니다. 이쯤이면 이게 취미인지 병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쨋든 제 환경이 좀 안정되고 친구들이 늘어나며 사춘기가 되자 글자에 대한 강박도 좀 덜해지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며 동시에 글을 쓰는 것에 취미가 붙더군요. 중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를 지나며 제 진로나 전공과는 무관하게 글을 쓰는 것이 제 가장 큰 무기이자 기쁨이었습니다. 물론 학교 밖에서 글로 상을 타 본 적도 없고 졸업 후에도 글로 밥벌이를 하지 못했을 만큼 졸필이고 어디 내놓기엔 너무나 부끄럽지만 저는 아직까지도 그 시절의 제 글을 사랑합니다. 누군가에겐 젊은 날의 빛바랜 사진 하나가 소중한 것 처럼 제겐 그 시절의 글이 가장 소중한 기억입니다.

지금 저는 직업상, 그리고 여러 다른 이유로 제 이름으로 글을 낼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차피 다 제가 선택한 것이니 거기에 미련을 가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글은 제게 소중한, 자식같은 존재입니다. 이제 저는 자본주의에 한껏 찌들어 "내 전재산을 다 줘도 내 글들과는 바꿀 수 없다"고 말하지도 못하고, 마치 어미가 아이를 낳듯 고통으로 써내렸노라고 장담할 열정조차 잃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 글은 다 하나같이 소중한 자식입니다. 아무리 못생긴 아이도 그 어미에게만은 소중한 것처럼요. 그리고 이 블로그는 그렇게 태어난 수만 편의 글 중 일부가 세상의 빛을 보는 공간입니다. 제 가장 가까운 직장 동료들도, 제 친구들도, 심지어 제 가족들도 제가 이런 글을 쓰는건 알지 못합니다.

오딘의 양 어깨에 앉은 까마귀 Huginn과 Muninn

Huginn과 Muninn은 북유럽 신화의 주신인 오딘의 양 어깨에 앉은 까마귀로 각각 생각과 기억을 의미합니다. 이 두 까마귀는 하룻동안 미스가르드를 돌며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오딘에게 보고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세상에 대한 제 생각과 기억을 정리하고자 그 까마귀들의 이름을 본따 블로그 주소를 지엇더니 구글의 AI님께서 제 이름을 HHMM라고 달아주시더군요. 발음하기도 힘들고 무슨 신음소리같은 이 괴상한 필명은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몇번 제 글들이 카톡방과 여러 인터넷 게시판을 떠도는 것을 보았고 심지어 그 중 한두편은 친구들이 저한데도 보내주기도 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거기에 대고 이거 잘썼네, 라며 낯뜨거운 짓도 해봤습니다. 막상 해보니 그런 염치없는 짓이 생각보다 재밌더군요. 그 재미로 조국과 추미애는 사나 봅니다. 원래 제 내면에서 쓰였다 지워지고 잊혀힐, 그렇게 제가 죽으면 같이 순장되었을 글들이 세상의 빛을 보고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는 것은 기쁘고, 감사할 일이지만 자식을 자식이라 하지 못하는 제 처지가 떠올라 허탈해지곤 합니다. 물론 널리 퍼지라고 쓴 글이니 올리신 분들께도 감사하며 또 제 주장과 믿음에 동의해주시는 것도 고마운 일이라 비난할 마음도 없고 또 당연히 법적 대응 따위는 할 생각도 없습니다. 다만 글의 출처를 명기해 주신다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이 한마디를 하고자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사적인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았지만 뭐 제 글이 대부분 그렇지 않나요. 하긴 우리네 인생이 다 그런 법입니다. 나에겐 소중하고 재미있는 것들이 남에겐 별 흥미조차 없는 그런 세상. 네글자로 줄여서 안물안궁. 하지만 또 그런 삭막한 세상이기에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보며 위안을 얻고 공감을 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애초에 이 블로그는 누구에게 보여줄 생각도 없이 혼자 쓰던 곳이기에 앞으로도 독재자처럼 제 맘대로 글을 써내릴 생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웹 상의 오지나 변방과도 같은 이곳까지 찾아와 교감해주시는 것은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에도 그런 행운이 이어지기시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HHMM 드림.

2020. 8. 10.

음악이 말을 잊은 시대, 하지만 아이유.

가수들의 음반판매량보다 유튜브 조회수가 이슈가 되는 오늘의 음악시장에서 가사는 예전의 지위를 이어갈 수 없었다. 초단위로 교차편집된 현란한 영상에 홀린 인간의 뇌가 노래가사의 의미까지 받아들이는 것은 무리니까. 그리하여 작사가들은 가사에서 언어를 빼내어 음절만을 남겼고 대중들은 그런 움직임을 열렬히 반겼다. 바야흐로 힙하지 않으면 멸종당하는 시대 아닌가. 그 무의미한 단어들은 가사의 일부를 넘어 이윽고 노래 그 자체가 된다.  뚜루뚜루. 짐살라빔. 으르렁드르렁 등, 그렇게 우리 시대의 음악은 벙어리 마냥 말을 잃은지 오래다. 

하지만 이런 시대에도 고리타분하게 가사에 의미를 담아내는 이들이 있다. 그중 의외의 인물로 아이유를 들 수 있지 않을까. 이따금 좋은 노래도 반복해서 듣다 보면 비로소 가사가 들리기 시작하며 일순간 음악의 장르가 유치뽕짝으로 돌변하기도 하는데 그녀의 가사는 재기발랄하면서도 진솔한 한 편의 수필처럼 자연스럽게 읽힌다.

우리의 색은 gray and blue / 엄지손가락으로 말풍선을 띄워

우리의 네모 칸은 bloom 
엄지손가락으로 장미꽃을 피워 
향기에 취할 것 같아 우 
오직 둘만의 비밀의 정원

누군가를 사랑한 기억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이라면 누구나 이 작은 기계를 쥐고 두근거렸던 적이 있으리라.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낸 뒤 그 작은 액정화면 건너에 그녀가 비치기라도 하는 양, LCD화면을 말 없이 응시하는 그 순간을 그녀는 이 네줄의 가사로 발랄하게 담아낸다. 엄지손가락으로 피워 내는 파란 장미, 그보다 더 적절한 은유가 있을까. 

말과 글에 민감한 탓인지 나는 가사가 없는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직까지 클래식 연주회에 가기라도 하면 가면 핀잔과 눈총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고 대놓고 졸곤 한다. 악기도 결국 물건일진대, 사람의 목소리가 곁들지 않으면 도통 그 진동음과 마찰음에는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마치 남우주연상 수상자가 빠진 시시한 애프터파티에 초대받고, 클라이막스 없는 지루한 영화를 보는 것 처럼. 의미의 부재를 화려한 색과 안무로 채운 시대의 한 가운데서도, 서사를 지켜내는 모든 고리타분한 뮤지션들에게 작은 응원을 보낸다. 



2020. 8. 1.

영화 1987, 훌륭한 영화 그리고 각색된 기억.

정치적 사건을 다룬 영화는 편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무엇보다 민감한 정치적 주제를 상업영화의 소재로 쓰는 감독이나 제작사 입장에서는 논란에 불을 지펴 흥행을 기대하는 마음이 없진 않을 테니까. 촛불시위 이후 등장한 남산의 부장들, 택시운전수, 자전차왕 엄복동, 말모이, 대장 김창수, 블랙머니, 한국부도의 날 등 다수의 영화들이 착실하게 그런 공식을 따랐다. 

나는 대개 보수든 진보든 그런 프로파간다적 욕망을 내포한 영화들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 영화는 다르다. 소재가 가진 힘에 의존하느라 영화 자체는 엉망이 된 수많은 진보영화들을 보라. 지루하리만큼 악역에만 특화된, 얼굴 찌그러진 배우를 적당히 골라 나까무라 다카시 혹은 허 대령 아니면 박 사장같은 뻔한 악역을 맡기고 고증은 개나 줘버린 상상의 권선징악 최루신파극에 애국을 적당히 버무린 그저 그런영화들과 영화 1987은 매우 다르다.  

영화는 처음부터 1987년의 주인공들의 시각에서부터 시작한다. 억압하는 자와 저항하는 자. 그리고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들. 특히나 영화 외적인 측면에서 내가 1987을 높게 평가하는 것은 6월 항쟁의 반대편에 서 있던 이들의 시각에서도 사건을 주시하기 때문이다. 박처장(김윤석)은 한병용 교도관(유해진)을 고문하면서 그에게 자신의 빛바랜 가족사진을 보여주며 묻는다. 너는 지옥이 뭔지 아느냐고. 그는 이북에서 나름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고 그의 부친은 굶어죽어가던 아이를 양자로 들여 가족으로 키울 뿐 아니라 학교도 보내고 결혼도 시켜줄 정도로 인덕도 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박처장이 형님으로 모시던 그 아이는 공산주의 혁명이 시작되자 완장을 차고 집안으로 난입해 자신의 양아버지이자 박처장의 아버지를 잔인하게 죽이고 어머니와 여동생까지 죽인다. 마루 아래서 그 장면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했던 기억을 떠올린 박처장은 이윽고 독기와 눈물이 동시에 어린 눈으로 한 교도관을 보며 묻는다. "너래 지옥이 뭔지 알간? 내 가족이 죽어나가는데 손가락 하나 까닥 못하고 소리도 못지르는 거, 그것이 지옥이야." (링크 나는 김윤석의 모든 연기 중 이 신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감독은 그런 박처장의 과거사를 제 3자의 시각으로 다루지 않는다. 비록 그는 정권의 편에 서서 고문하는 악당이지만 그의 기억 속에서 울려 퍼지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의 비명소리와 총소리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도 메아리친다. 그 장면에서 이제까지 박처장을 악마로, 개새끼로 또 권력의 주구로 욕하던 우리들은 갑자기 그의 눈으로 시대를 다시금 바라보았을 것이다. 남한 사람들 여덟명 중 하나가 죽거나 다치거나 실종된 내전이 끝난지 고작 30여년이 흘렀던 1987년, 당시엔 북한 공작원이 남측에 침투해 군인이나 민간인을 살해하던 일이 한해 걸러 한해 일어나던 시기였다. 박처장에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만약 한병용 교도관이, 또 박종철이나 이한열 열사가 박처장과 같은 경험을 했더라면 이전과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1980년 광주에 있던 이들이 평생 그 기억에서 자유로을 수 없는 것 처럼 1950년 휴전선의 잘못된 쪽에 서 있던 이들도 그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게 하나의 지옥이 또 하나의 지옥을 만드는 것, 그것이 1987년 6월 항쟁의 본질이라는 것이 바로 감독이 전달하고 싶었던 바 아니었을까.

영화가 개봉되던 2017년을 떠올려보자. 박근혜를 탄핵시키고 들어선 새로운 정부엔 전대협 임원들을 비롯한 운동권들이 포진했으며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은 80%에 육박했다. 적폐라는 이름이 붙으면 누구든 대중의 죽창을 피할 수 없던 시기에 개봉한 영화가, 또 정의당을 지원하고 진보적 성향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감독이 가해자였던 박처장의 시각에서 당시의 시대상을 이해하려고 한 시도에 나는 박수를 보낸다. 진정한 이해의 첫걸음은 상대의 시각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상대를 섬멸하는 것이 아니라.

예전에 평론가 이동진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잘못된 시스템을 논해야 하는 사회비판적 영화에서조차 수혜자 개인의 사악함과 피해자 개인의 불행함에만 초점을 두면서 영화를 가족영화나 액션영화처럼 만들고, 그 결과 관객들은 악한 캐릭터들을 보며 도덕적 우월감 속에서 마음껏 분노를 터뜨리다가 손쉽게 카타르시스를 얻고서 극장을 나설 뿐이다." 이제까지 쏟아진 대다수의 좌파 민족영화들이 모두 그랬다. 일본은 왜 조선을 침략했을까? 나쁜놈이니까. 군사정권은 왜 독재를 했나? 나쁜놈이니까. 그들의 세계관은 마치 5살짜리 아이들이 보는 만화영화처럼 1차원적이다. 거기에는 착한놈, 혹은 나쁜놈 만이 있을 뿐이고 착한 놈은 뭘 해도 착한놈이다. 비서를 추행해도, 돈을 횡령해도 심지어 독재를 해도. 

물론 지나친 미화가 없다고 할 순 없다. 무엇보다 강동원이 왜 별 비중도 없는 까메오로 나오나 했더니 결국 그가 알고보니 이한열 열사였다니, 그 손발 오그라드는 빌드업은 이 영화의 옥의 티지만 1987년에서 2017년으로 이어지던 당시의 열기를 생각한다면 과연 과도했던 것이 영화뿐이었을까. 성과도 없는 대통령과 전문성이라곤 하나도 없던 내각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압도적 지지를 몰아주었던 국민들은, 오늘날 이 영화가 끝난 곳과 정확하게 같은 자리에서 반독재를 외치고 있다. 보수라는 냄새만 나도 이빨을 드러내고 문재인과 여당의 인사라면 덮어놓고 환호하던 국민들에 비하면 박처장의 눈에서 1987년을 읽어낸 감독의 시도가 훨씬 더 성숙한 것 아닐까. 


*               *               *


1987년 6월 항쟁은 4.19와 함께 대한민국 민주사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사건 중 하나임을 부정할 수 없다. 평범한 여대생이었던 김태리가 거리로 뛰쳐나와 서울시청 앞 광장까지 내달리다 버스 위로 올라가 민중을 바라보는 장면은 영화에서는 너무나 감동적이지만 현실에서는 대단히 불편하다. 왜냐하면 이 장면이야말로 운동권이 1987년 민주화운동을 독점하는 방식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민주화 운동의 주역들을 내려다보는 운동권들의 뒷모습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당시 민주화운동을 주도한 것은 적폐 서울대생이고 죽은 것도 기득권인 서울대와 연대 학생이었으며 보도지침을 어기고 박종철이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보도한 것은 보수찌라시 중앙일보와 동아일보였다, 그리고 고 박종철 군의 시신에 물고문 흔적이 있었다고 증언한 것은 적폐인 의사였으며 이 사건을 은폐하려는 시도에 저항하고 끝까지 대든 것은 바로 검새였다. 결정적으로 전두환의 호헌조치에 반대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위를 주도한 것은 평범한 넥타이부대, 택시기사, 노점상 그런 서울의 평범한 장삼이사들이지 않았나. 하지만 이 영화는 철저하게 그들을 조연으로 격하한다. 이와 같은 시선은 현재 여당과 그 지지자들의 시각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들에게 1987년의 민주화 항쟁은 오로지 운동권 대학생들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그것은 반미 민족주의정신에 기인한 덕분인 것이다. 그 과정에서 유시민이 민간인 네명을 감금 폭행한 사건이나 운동권 학생들이 미국 문화원에 불을 저질러 장덕술 군이 사망하는 사건 등은 조용히 묻혔다. (공교롭게도 사망할 당시 정덕술의 나이는 박종철과 비슷했다) 그러니 1987년의 마지막은 13대 대선으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해의 이름을 딴 영화가 6월의 사건까지만 그려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애초에 이 영화는 6월 민주화 항쟁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운동권 새내기였던 87학번 김태리의 추억팔이였기에, CG로 87년의 풍경을 완벽하게 재현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영화는 그 해 하반기의 기억을 깔끔하게 도려냈다. 

하지만 모두 알다시피 1987년은 스릴러 영화보다도 더 극적인 반전으로 끝났다. 약 6개월 뒤 치뤄진 직선제 투표에서 국민들은 놀랍게도 노태우를 선택했으니까. 민주화운동의 두 거두였던 김영삼과 김대중은 한치의 양보 없이 자신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국민들이 열망하던 단일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양김의 대립은 시민들에게 이승만 하야 후 제 2공화국의 무질서와 혼돈을 떠올렸고 결국 유권자들은 고심 끝에 민주주의와 안정 사이에서 균형을 택한 것이다.* 

당시 광화문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생들이 아닌 직장인들이었다. 졸업하면 인생이 보장되던 당시 대학생들과는 달리 이 세대는 못먹고 못배웠는데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27년 전 이승만의 부정선거에 저항하며 거리로 뛰쳐나온 그날과 다름없이 서울시청 광장에서 다시 한번 민주화를 외쳤다. 하지만 그들은 오늘날 틀딱이라는 조롱을 듣고(링크)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실을 밝혀내는데 일조한 신문사, 검사, 의사들은 모조리 다 개혁당하고 있다. 동이라는 공산주의자에게 가족을 잃은 박처장이 동이와 똑같은 짓을 하던 것처럼, 박처장과 신군부에게 억압당했던 운동권 정치인들은 전두환과 똑같은 계층들을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는 아이러니는 오늘날에도 반복된다. 자,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아래 87년의 실제풍경과 영화의 엔딩을 비교해보자. 영화 1987의 가장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은 마치 동전처럼 이 한 장면으로 축약될 수 있다. 실제 민주화운동의 주인공들을 내려다보는 운동권 학생, 87학번 김태리의 등을 비추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그리고 영화 개봉 당시엔 감동과 전율을 느꼈던 바로 그 장면에서 나는 소름이 돋았다. 도대체 3년간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실제 1987년 당시 시위 장면



*혹자는 이 사건을 김영삼과 김대중의 단일화 실패로 노태우가 당선된 것 뿐이라며 폄하한다. 그 말은 사실이지만 당시 박정희 정권의 2인자였던 김종필후보도 기호 4번으로 출마해 약 8%의 득표율을 기록했던 것을 잊어선 안된다. 노태우/김종필은 총 44.7%를 득표했고 김영삼/김대중은 55.0%를 얻었으니 6월 항쟁이라는 커다란 사건을 겪고도 약 45%의 국민들이 사실상 군사정권의 후예들에게 표를 던진 셈이다. 그들 중 상당수는 바로 6개월 전 민주화운동을 지지한 사람이었을텐데도. 그 45%가 복잡한 심경으로 군부세력들에게 표를 던진 의미를 평가절하하는 것은 당시 유권자들의 치열한 고민에 대핸 모욕이며 시대상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다.

13대 대선 투표결과

2020. 7. 27.

아름다운 성추행, 그리고 천박한 도시



누군가가 내게 서울의 명소를 딱 하나만 추천해달라고 부탁한다면 나는 광화문 광장을 들 것이다. 넓은 광장의 다른 곳 말고 그 끄트머리.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그 광장의 끝에서 방문자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한때는 한국적이다, 전통적이다는 말이 촌스럽다는 말과 동의어로 여겨졌지만 2010년에 복원된 현재의 광화문을 보면 누구도 그런 말을 꺼내지 못할 것이다. 고동색 성문과 연회색 성벽과의 선명한 대조. 그리고 화려한 단청과 누각까지. 한국의 미란 국뽕이 억지로 만들어낸 개념이라고 생각했던 내게 고궁의 색도 충분히 아름답고 우아하다는 것을 가장 먼저 알려준 이가 바로 광화문이다. 뒤로 희미하게 보이는 북한산과 함께 그 문을 보고 있노라면 책과 사극에서 보았던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곤 한다.

그 순간 뒤를 돌아보면 새로운 도시를 발견하게 된다. 드넓은 광장을 중심으로 양편에 들어선 현대적 건물과 고층빌딩들. 은은한 광화문의 불빛과는 대조되는 강렬한 LED와 할로겐 빛을 동공으로 받아들이는 경험은 마치 과거에서 현대로 단숨에 넘어오는 것과 같은 충격을 선사한다. 한국이 중세에서 단 한걸음 만에 근대를 넘어 현대로 도약했다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경험해보고 싶다면 해가 지고난 직후 광화문 광장의 끝에 서서 한바퀴 돌아보라. 이 광장의 끝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 놓여있으며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처럼 평범한 방문객을 시간여행자로 탈바꿈시켜 준다. 여기에 서보기 전의 나는 서울을 몰랐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반평생 이상을 이 도시에서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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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대표는 이런 서울을 천박한 도시라고 했다. 나와 서울 시민은 응당 그 말에 분노해야 한다. 도시는 시민의 얼굴을 닮아가기 마련이니 그는 나와 우리의 삶이 천박하다고 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겪은 격동의 근현대사가 투영된 광화문 광장은 샹젤리제 거리나 라데팡스처럼 유명하거나 아름답지 않아도 분명히 자신만의 색을 가지고 있다. 여느 도시가 그렇듯이. 아름답지 않은 아이도 부모에겐 사랑스럽고 서투른 글도 무명의 작가에겐 소중한 것 처럼 이 도시와 우리의 삶 역시 그렇다. 그런 도시를 두고 천박하다는 낙인을 쿵 하고 찍은 이가 국민을 대표해 질문을 던진 기자에게 후레자식이라는 쌍욕을 던진 사람과 동일인이라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 아마 처음부터 그에게 우리는 후레자식이자 천박한 시민이었겠지.

그의 미적 기준은 너무나 난해해서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바로 몇주 전 서울시장이 여비서를 성적으로 희롱하며 학대하다 적발되자 자살했을때 여당의 여러 인사들은 그를 아름답다고 하지 않았나. 못생긴데다 탈모까지 온 환갑넘은 늙은이가 여비서에게 속옷사진을 보내고, 아내와 별거중이라며 추근대는 모습은 아름답기는 커녕 더럽다. 노년의 로맨스가 더럽다는 것이 아니라 노년의 성추행이 더럽다는 말이니 나이든 독자들이 있다면 상처받지 마시길. 나이와 상관없이 성범죄란 본디 추잡한 것이지만 나이든 권력자의 성범죄가 더욱 혐오스러운 것은 욕정 앞에 자신의 살아온 역사와 품격 그리고 명예를 모두 내던졌기 때문이 아닐까. 종로의 한 술집에서 시인 고은이 후배 문인들 앞에서 바지 앞섶을 풀고 자위행위를 시작한 그 순간 추락한 것은 그의 명예만이 아닌 한국문학의 자긍심이었던 것처럼 서울시장이 여비서에게 팬티 사진을 보내다 자살한 순간 이 도시의 품격도 함께 목을 매달았다. 헌데 박원순의 빤스는 아름답고 서울은 천박하다니. 저들의 미적 기준에는 분명 심각한 결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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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 인사들의 망언을 듣는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왠지 이번엔 분노가 가시질 않아 차를 끌고 서울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한강철교를 아래를 지날때 전철이 머리 위로 굉음을 내며 지나가던 순간 나는 다큐에서 본 6.25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을 떠올렸다. 당시 폭파를 담당한 공병감 최창식 대령은 인민군 탱크가 서울에 진입하면 다리를 폭파하라는 명령을 받아 충실하게 임무를 수행했으나, 그 바람에 다리 위 수백 명의 시민들이 폭사하거나 한강으로 떨어져 물에 빠져죽고 말았다. 이후 서울을 버린 대통령에 대한 비난여론이 높아지자 정부와 군은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명령을 충실히 따른 최 대령을 군법회의에 회부해 사형을 언도한다. 이후 1962년에 유족들이 재심을 청구하여 그는 사후 무죄판결을 받고 2013년에는 국립현충원에 위패가 봉인되었다고 한다.

한강대교를 지나 몇분 더 달리면 수많은 고층빌딩으로 뒤덮인 여의도를 볼 수 있다. 이 섬은 본디 활주로로 쓰던 단단한 모래섬이었는데 일설에 의하면 섬의 명칭은 "너나 가져라"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사실인지 모르겠다만. 고층건물 중 가장 인상 깊은 건물은 트럼프월드와 파크원이 아닐까. 트럼프월드는 당시 세계경영을 모토로 내걸었던 김우중 회장의 대우건설이 뉴욕의 트럼프월드타워를 수주한 것을 계기로 이 미국의 부동산업자에게 로열티를 주고 상표권을 따내 지은 것인데 아마 그도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물론 그 직후 대우가 와해될 줄은 더더욱 몰랐겠지만. 여의도 파크원은 2008년 당시 2013년 완공을 목표로 당시로는 한국의 최고층 빌딩이 탄생할 예정이었지만 이후 들이닥친 금융위기와 통일교와의 분쟁 등으로 거의 공사 초기단계에 멈춘 채 방치되었다 최근 법적 다툼이 마무리되고 곧 완공을 앞두고 있다. 안타깝게도 건물 외골격의 빨간 띠는 포장을 뜯지 않은 필름이 아니라 건물의 디자인이라 계속 유지된다고 한다.

거기서 더 달리면 양화대교를 만나게 된다. 이 다리는 자이언티 덕에 더욱 유명해졌는데,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노래의 가사를 곱씹어보면 숨겨진 장면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택시 기사였는데 어디냐고 물어보면 항상 양화대교. 양화대교. 그런데 자이언티의 다른 노래 Click me에서 집은 강서구라고 했으니 양화대교를 건너도 한참은 더 가야 집에 도착하는데 왜 아버지는 늘 양화대교에 서 계셨을까? 삶은 힘들고 고되고. 또 아프고. 왜 택시기사는 그리고 (예전에) 가난했던 뮤지션 자이언티는 차를 마땅히 댈 곳도 없는 양화대교에 서 있었을까. 어쩌면 이 노래는 아버지가 다리 위에 서 계시다는 것이 무엇을 뜻했는지 깨달았을때 탄생한 것이 아닐까. 지나친 상상은 고소로 가는 지름길.

그 다리를 지나면 망원동과 합정에 도착한다. 망원동은 태종의 둘째아들이자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의 별장인 망원정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번잡한 이태원을 피해 사람들이 한남오거리에 몰리듯 힙스터들은 홍대보다도 망원동에 모이며 이곳을 망리단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마포와 아현이 있다. 과거 아현 고가 아래에는 세글자 이름으로 이루어진 방석집들이 즐비했다. 잘은 몰라도 어떤 방식이든 성을 파는 곳임은 확실했다. 그런 장소 특유의 시큼하면서도 서글픈 느낌이 물씬 나던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대한민국에서 최고 고소득자들이 선망하는 주거지 중 하나로 변모하여 과거의 그 음침한 기운은 온데간데 찾아볼 수 없다. 천대받는 창녀. 그중에서도 아현 굴레방다리는 나이든 창녀들이 모이는 곳이었다는데 억세게 20세기를 버턴 그녀들은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처럼 서울은 젊은이도 노인도 그리고 아버지도 딸도 열심히 먹고 마시고 즐기며 일하고 사랑하다 잠드는 일상의 터전이고 다양한 삶이 모여 하나의 도시를 이루고 있다. 사람은 떠났어도 그들의 인생은 이곳에 쌓여 하나의 서사를 이루고 있다. 그 삶은 모두 하나같이 소중하다. 누구도 어미 앞에서 그 자식이 못생겼다고 말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그 누구도 우리의 어제와 오늘을, 그리고 그것이 모인 이 도시를 천박하다고 말할 자격은 없다. 천박한 것은 국민과 서울이 아니라 반시장적인 조치로 집값을 쳐올려 시민들에게 고통을 안기고도 아집을 꺾기 싫어 수도를 이전하겠다는 괴상한 발상을 꺼낸 70먹은 노친네의 가벼운 주둥아리이다. 



아니나 다를까 민주당의 당대표 답게 이 천박한 노친네는 세종시에 영혼의 몰빵을 쳤다. 내심 손혜원과 노영민이 무척이나 부러웠나보다. 이런 후레자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