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8. 10.

음악이 말을 잊은 시대, 하지만 아이유.

가수들의 음반판매량보다 유튜브 조회수가 이슈가 되는 오늘의 음악시장에서 가사는 예전의 지위를 이어갈 수 없었다. 초단위로 교차편집된 현란한 영상에 홀린 인간의 뇌가 노래가사의 의미까지 받아들이는 것은 무리니까. 그리하여 작사가들은 가사에서 언어를 빼내어 음절만을 남겼고 대중들은 그런 움직임을 열렬히 반겼다. 바야흐로 힙하지 않으면 멸종당하는 시대 아닌가. 그 무의미한 단어들은 가사의 일부를 넘어 이윽고 노래 그 자체가 된다.  뚜루뚜루. 짐살라빔. 으르렁드르렁 등, 그렇게 우리 시대의 음악은 벙어리 마냥 말을 잃은지 오래다. 

하지만 이런 시대에도 고리타분하게 가사에 의미를 담아내는 이들이 있다. 그중 의외의 인물로 아이유를 들 수 있지 않을까. 이따금 좋은 노래도 반복해서 듣다 보면 비로소 가사가 들리기 시작하며 일순간 음악의 장르가 유치뽕짝으로 돌변하기도 하는데 그녀의 가사는 재기발랄하면서도 진솔한 한 편의 수필처럼 자연스럽게 읽힌다.

우리의 색은 gray and blue / 엄지손가락으로 말풍선을 띄워

우리의 네모 칸은 bloom 
엄지손가락으로 장미꽃을 피워 
향기에 취할 것 같아 우 
오직 둘만의 비밀의 정원

누군가를 사랑한 기억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이라면 누구나 이 작은 기계를 쥐고 두근거렸던 적이 있으리라.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낸 뒤 그 작은 액정화면 건너에 그녀가 비치기라도 하는 양, LCD화면을 말 없이 응시하는 그 순간을 그녀는 이 네줄의 가사로 발랄하게 담아낸다. 엄지손가락으로 피워 내는 파란 장미, 그보다 더 적절한 은유가 있을까. 

말과 글에 민감한 탓인지 나는 가사가 없는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직까지 클래식 연주회에 가기라도 하면 가면 핀잔과 눈총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고 대놓고 졸곤 한다. 악기도 결국 물건일진대, 사람의 목소리가 곁들지 않으면 도통 그 진동음과 마찰음에는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마치 남우주연상 수상자가 빠진 시시한 애프터파티에 초대받고, 클라이막스 없는 지루한 영화를 보는 것 처럼. 의미의 부재를 화려한 색과 안무로 채운 시대의 한 가운데서도, 서사를 지켜내는 모든 고리타분한 뮤지션들에게 작은 응원을 보낸다. 



2020. 8. 1.

영화 1987, 훌륭한 영화 그리고 각색된 기억.

정치적 사건을 다룬 영화는 편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무엇보다 민감한 정치적 주제를 상업영화의 소재로 쓰는 감독이나 제작사 입장에서는 논란에 불을 지펴 흥행을 기대하는 마음이 없진 않을 테니까. 촛불시위 이후 등장한 남산의 부장들, 택시운전수, 자전차왕 엄복동, 말모이, 대장 김창수, 블랙머니, 한국부도의 날 등 다수의 영화들이 착실하게 그런 공식을 따랐다. 

나는 대개 보수든 진보든 그런 프로파간다적 욕망을 내포한 영화들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 영화는 다르다. 소재가 가진 힘에 의존하느라 영화 자체는 엉망이 된 수많은 진보영화들을 보라. 지루하리만큼 악역에만 특화된, 얼굴 찌그러진 배우를 적당히 골라 나까무라 다카시 혹은 허 대령 아니면 박 사장같은 뻔한 악역을 맡기고 고증은 개나 줘버린 상상의 권선징악 최루신파극에 애국을 적당히 버무린 그저 그런영화들과 영화 1987은 매우 다르다.  

영화는 처음부터 1987년의 주인공들의 시각에서부터 시작한다. 억압하는 자와 저항하는 자. 그리고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들. 특히나 영화 외적인 측면에서 내가 1987을 높게 평가하는 것은 6월 항쟁의 반대편에 서 있던 이들의 시각에서도 사건을 주시하기 때문이다. 박처장(김윤석)은 한병용 교도관(유해진)을 고문하면서 그에게 자신의 빛바랜 가족사진을 보여주며 묻는다. 너는 지옥이 뭔지 아느냐고. 그는 이북에서 나름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고 그의 부친은 굶어죽어가던 아이를 양자로 들여 가족으로 키울 뿐 아니라 학교도 보내고 결혼도 시켜줄 정도로 인덕도 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박처장이 형님으로 모시던 그 아이는 공산주의 혁명이 시작되자 완장을 차고 집안으로 난입해 자신의 양아버지이자 박처장의 아버지를 잔인하게 죽이고 어머니와 여동생까지 죽인다. 마루 아래서 그 장면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했던 기억을 떠올린 박처장은 이윽고 독기와 눈물이 동시에 어린 눈으로 한 교도관을 보며 묻는다. "너래 지옥이 뭔지 알간? 내 가족이 죽어나가는데 손가락 하나 까닥 못하고 소리도 못지르는 거, 그것이 지옥이야." (링크 나는 김윤석의 모든 연기 중 이 신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감독은 그런 박처장의 과거사를 제 3자의 시각으로 다루지 않는다. 비록 그는 정권의 편에 서서 고문하는 악당이지만 그의 기억 속에서 울려 퍼지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의 비명소리와 총소리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도 메아리친다. 그 장면에서 이제까지 박처장을 악마로, 개새끼로 또 권력의 주구로 욕하던 우리들은 갑자기 그의 눈으로 시대를 다시금 바라보았을 것이다. 남한 사람들 여덟명 중 하나가 죽거나 다치거나 실종된 내전이 끝난지 고작 30여년이 흘렀던 1987년, 당시엔 북한 공작원이 남측에 침투해 군인이나 민간인을 살해하던 일이 한해 걸러 한해 일어나던 시기였다. 박처장에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만약 한병용 교도관이, 또 박종철이나 이한열 열사가 박처장과 같은 경험을 했더라면 이전과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1980년 광주에 있던 이들이 평생 그 기억에서 자유로을 수 없는 것 처럼 1950년 휴전선의 잘못된 쪽에 서 있던 이들도 그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게 하나의 지옥이 또 하나의 지옥을 만드는 것, 그것이 1987년 6월 항쟁의 본질이라는 것이 바로 감독이 전달하고 싶었던 바 아니었을까.

영화가 개봉되던 2017년을 떠올려보자. 박근혜를 탄핵시키고 들어선 새로운 정부엔 전대협 임원들을 비롯한 운동권들이 포진했으며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은 80%에 육박했다. 적폐라는 이름이 붙으면 누구든 대중의 죽창을 피할 수 없던 시기에 개봉한 영화가, 또 정의당을 지원하고 진보적 성향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감독이 가해자였던 박처장의 시각에서 당시의 시대상을 이해하려고 한 시도에 나는 박수를 보낸다. 진정한 이해의 첫걸음은 상대의 시각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상대를 섬멸하는 것이 아니라.

예전에 평론가 이동진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잘못된 시스템을 논해야 하는 사회비판적 영화에서조차 수혜자 개인의 사악함과 피해자 개인의 불행함에만 초점을 두면서 영화를 가족영화나 액션영화처럼 만들고, 그 결과 관객들은 악한 캐릭터들을 보며 도덕적 우월감 속에서 마음껏 분노를 터뜨리다가 손쉽게 카타르시스를 얻고서 극장을 나설 뿐이다." 이제까지 쏟아진 대다수의 좌파 민족영화들이 모두 그랬다. 일본은 왜 조선을 침략했을까? 나쁜놈이니까. 군사정권은 왜 독재를 했나? 나쁜놈이니까. 그들의 세계관은 마치 5살짜리 아이들이 보는 만화영화처럼 1차원적이다. 거기에는 착한놈, 혹은 나쁜놈 만이 있을 뿐이고 착한 놈은 뭘 해도 착한놈이다. 비서를 추행해도, 돈을 횡령해도 심지어 독재를 해도. 

물론 지나친 미화가 없다고 할 순 없다. 무엇보다 강동원이 왜 별 비중도 없는 까메오로 나오나 했더니 결국 그가 알고보니 이한열 열사였다니, 그 손발 오그라드는 빌드업은 이 영화의 옥의 티지만 1987년에서 2017년으로 이어지던 당시의 열기를 생각한다면 과연 과도했던 것이 영화뿐이었을까. 성과도 없는 대통령과 전문성이라곤 하나도 없던 내각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압도적 지지를 몰아주었던 국민들은, 오늘날 이 영화가 끝난 곳과 정확하게 같은 자리에서 반독재를 외치고 있다. 보수라는 냄새만 나도 이빨을 드러내고 문재인과 여당의 인사라면 덮어놓고 환호하던 국민들에 비하면 박처장의 눈에서 1987년을 읽어낸 감독의 시도가 훨씬 더 성숙한 것 아닐까. 


*               *               *


1987년 6월 항쟁은 4.19와 함께 대한민국 민주사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사건 중 하나임을 부정할 수 없다. 평범한 여대생이었던 김태리가 거리로 뛰쳐나와 서울시청 앞 광장까지 내달리다 버스 위로 올라가 민중을 바라보는 장면은 영화에서는 너무나 감동적이지만 현실에서는 대단히 불편하다. 왜냐하면 이 장면이야말로 운동권이 1987년 민주화운동을 독점하는 방식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민주화 운동의 주역들을 내려다보는 운동권들의 뒷모습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당시 민주화운동을 주도한 것은 적폐 서울대생이고 죽은 것도 기득권인 서울대와 연대 학생이었으며 보도지침을 어기고 박종철이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보도한 것은 보수찌라시 중앙일보와 동아일보였다, 그리고 고 박종철 군의 시신에 물고문 흔적이 있었다고 증언한 것은 적폐인 의사였으며 이 사건을 은폐하려는 시도에 저항하고 끝까지 대든 것은 바로 검새였다. 결정적으로 전두환의 호헌조치에 반대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위를 주도한 것은 평범한 넥타이부대, 택시기사, 노점상 그런 서울의 평범한 장삼이사들이지 않았나. 하지만 이 영화는 철저하게 그들을 조연으로 격하한다. 이와 같은 시선은 현재 여당과 그 지지자들의 시각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들에게 1987년의 민주화 항쟁은 오로지 운동권 대학생들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그것은 반미 민족주의정신에 기인한 덕분인 것이다. 그 과정에서 유시민이 민간인 네명을 감금 폭행한 사건이나 운동권 학생들이 미국 문화원에 불을 저질러 장덕술 군이 사망하는 사건 등은 조용히 묻혔다. (공교롭게도 사망할 당시 정덕술의 나이는 박종철과 비슷했다) 그러니 1987년의 마지막은 13대 대선으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해의 이름을 딴 영화가 6월의 사건까지만 그려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애초에 이 영화는 6월 민주화 항쟁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운동권 새내기였던 87학번 김태리의 추억팔이였기에, CG로 87년의 풍경을 완벽하게 재현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영화는 그 해 하반기의 기억을 깔끔하게 도려냈다. 

하지만 모두 알다시피 1987년은 스릴러 영화보다도 더 극적인 반전으로 끝났다. 약 6개월 뒤 치뤄진 직선제 투표에서 국민들은 놀랍게도 노태우를 선택했으니까. 민주화운동의 두 거두였던 김영삼과 김대중은 한치의 양보 없이 자신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국민들이 열망하던 단일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양김의 대립은 시민들에게 이승만 하야 후 제 2공화국의 무질서와 혼돈을 떠올렸고 결국 유권자들은 고심 끝에 민주주의와 안정 사이에서 균형을 택한 것이다.* 

당시 광화문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생들이 아닌 직장인들이었다. 졸업하면 인생이 보장되던 당시 대학생들과는 달리 이 세대는 못먹고 못배웠는데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27년 전 이승만의 부정선거에 저항하며 거리로 뛰쳐나온 그날과 다름없이 서울시청 광장에서 다시 한번 민주화를 외쳤다. 하지만 그들은 오늘날 틀딱이라는 조롱을 듣고(링크)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실을 밝혀내는데 일조한 신문사, 검사, 의사들은 모조리 다 개혁당하고 있다. 동이라는 공산주의자에게 가족을 잃은 박처장이 동이와 똑같은 짓을 하던 것처럼, 박처장과 신군부에게 억압당했던 운동권 정치인들은 전두환과 똑같은 계층들을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는 아이러니는 오늘날에도 반복된다. 자,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아래 87년의 실제풍경과 영화의 엔딩을 비교해보자. 영화 1987의 가장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은 마치 동전처럼 이 한 장면으로 축약될 수 있다. 실제 민주화운동의 주인공들을 내려다보는 운동권 학생, 87학번 김태리의 등을 비추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그리고 영화 개봉 당시엔 감동과 전율을 느꼈던 바로 그 장면에서 나는 소름이 돋았다. 도대체 3년간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실제 1987년 당시 시위 장면



*혹자는 이 사건을 김영삼과 김대중의 단일화 실패로 노태우가 당선된 것 뿐이라며 폄하한다. 그 말은 사실이지만 당시 박정희 정권의 2인자였던 김종필후보도 기호 4번으로 출마해 약 8%의 득표율을 기록했던 것을 잊어선 안된다. 노태우/김종필은 총 44.7%를 득표했고 김영삼/김대중은 55.0%를 얻었으니 6월 항쟁이라는 커다란 사건을 겪고도 약 45%의 국민들이 사실상 군사정권의 후예들에게 표를 던진 셈이다. 그들 중 상당수는 바로 6개월 전 민주화운동을 지지한 사람이었을텐데도. 그 45%가 복잡한 심경으로 군부세력들에게 표를 던진 의미를 평가절하하는 것은 당시 유권자들의 치열한 고민에 대핸 모욕이며 시대상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다.

13대 대선 투표결과

2020. 7. 27.

아름다운 성추행, 그리고 천박한 도시



누군가가 내게 서울의 명소를 딱 하나만 추천해달라고 부탁한다면 나는 광화문 광장을 들 것이다. 넓은 광장의 다른 곳 말고 그 끄트머리.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그 광장의 끝에서 방문자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한때는 한국적이다, 전통적이다는 말이 촌스럽다는 말과 동의어로 여겨졌지만 2010년에 복원된 현재의 광화문을 보면 누구도 그런 말을 꺼내지 못할 것이다. 고동색 성문과 연회색 성벽과의 선명한 대조. 그리고 화려한 단청과 누각까지. 한국의 미란 국뽕이 억지로 만들어낸 개념이라고 생각했던 내게 고궁의 색도 충분히 아름답고 우아하다는 것을 가장 먼저 알려준 이가 바로 광화문이다. 뒤로 희미하게 보이는 북한산과 함께 그 문을 보고 있노라면 책과 사극에서 보았던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곤 한다.

그 순간 뒤를 돌아보면 새로운 도시를 발견하게 된다. 드넓은 광장을 중심으로 양편에 들어선 현대적 건물과 고층빌딩들. 은은한 광화문의 불빛과는 대조되는 강렬한 LED와 할로겐 빛을 동공으로 받아들이는 경험은 마치 과거에서 현대로 단숨에 넘어오는 것과 같은 충격을 선사한다. 한국이 중세에서 단 한걸음 만에 근대를 넘어 현대로 도약했다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경험해보고 싶다면 해가 지고난 직후 광화문 광장의 끝에 서서 한바퀴 돌아보라. 이 광장의 끝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 놓여있으며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처럼 평범한 방문객을 시간여행자로 탈바꿈시켜 준다. 여기에 서보기 전의 나는 서울을 몰랐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반평생 이상을 이 도시에서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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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대표는 이런 서울을 천박한 도시라고 했다. 나와 서울 시민은 응당 그 말에 분노해야 한다. 도시는 시민의 얼굴을 닮아가기 마련이니 그는 나와 우리의 삶이 천박하다고 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겪은 격동의 근현대사가 투영된 광화문 광장은 샹젤리제 거리나 라데팡스처럼 유명하거나 아름답지 않아도 분명히 자신만의 색을 가지고 있다. 여느 도시가 그렇듯이. 아름답지 않은 아이도 부모에겐 사랑스럽고 서투른 글도 무명의 작가에겐 소중한 것 처럼 이 도시와 우리의 삶 역시 그렇다. 그런 도시를 두고 천박하다는 낙인을 쿵 하고 찍은 이가 국민을 대표해 질문을 던진 기자에게 후레자식이라는 쌍욕을 던진 사람과 동일인이라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 아마 처음부터 그에게 우리는 후레자식이자 천박한 시민이었겠지.

그의 미적 기준은 너무나 난해해서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바로 몇주 전 서울시장이 여비서를 성적으로 희롱하며 학대하다 적발되자 자살했을때 여당의 여러 인사들은 그를 아름답다고 하지 않았나. 못생긴데다 탈모까지 온 환갑넘은 늙은이가 여비서에게 속옷사진을 보내고, 아내와 별거중이라며 추근대는 모습은 아름답기는 커녕 더럽다. 노년의 로맨스가 더럽다는 것이 아니라 노년의 성추행이 더럽다는 말이니 나이든 독자들이 있다면 상처받지 마시길. 나이와 상관없이 성범죄란 본디 추잡한 것이지만 나이든 권력자의 성범죄가 더욱 혐오스러운 것은 욕정 앞에 자신의 살아온 역사와 품격 그리고 명예를 모두 내던졌기 때문이 아닐까. 종로의 한 술집에서 시인 고은이 후배 문인들 앞에서 바지 앞섶을 풀고 자위행위를 시작한 그 순간 추락한 것은 그의 명예만이 아닌 한국문학의 자긍심이었던 것처럼 서울시장이 여비서에게 팬티 사진을 보내다 자살한 순간 이 도시의 품격도 함께 목을 매달았다. 헌데 박원순의 빤스는 아름답고 서울은 천박하다니. 저들의 미적 기준에는 분명 심각한 결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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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 인사들의 망언을 듣는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왠지 이번엔 분노가 가시질 않아 차를 끌고 서울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한강철교를 아래를 지날때 전철이 머리 위로 굉음을 내며 지나가던 순간 나는 다큐에서 본 6.25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을 떠올렸다. 당시 폭파를 담당한 공병감 최창식 대령은 인민군 탱크가 서울에 진입하면 다리를 폭파하라는 명령을 받아 충실하게 임무를 수행했으나, 그 바람에 다리 위 수백 명의 시민들이 폭사하거나 한강으로 떨어져 물에 빠져죽고 말았다. 이후 서울을 버린 대통령에 대한 비난여론이 높아지자 정부와 군은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명령을 충실히 따른 최 대령을 군법회의에 회부해 사형을 언도한다. 이후 1962년에 유족들이 재심을 청구하여 그는 사후 무죄판결을 받고 2013년에는 국립현충원에 위패가 봉인되었다고 한다.

한강대교를 지나 몇분 더 달리면 수많은 고층빌딩으로 뒤덮인 여의도를 볼 수 있다. 이 섬은 본디 활주로로 쓰던 단단한 모래섬이었는데 일설에 의하면 섬의 명칭은 "너나 가져라"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사실인지 모르겠다만. 고층건물 중 가장 인상 깊은 건물은 트럼프월드와 파크원이 아닐까. 트럼프월드는 당시 세계경영을 모토로 내걸었던 김우중 회장의 대우건설이 뉴욕의 트럼프월드타워를 수주한 것을 계기로 이 미국의 부동산업자에게 로열티를 주고 상표권을 따내 지은 것인데 아마 그도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물론 그 직후 대우가 와해될 줄은 더더욱 몰랐겠지만. 여의도 파크원은 2008년 당시 2013년 완공을 목표로 당시로는 한국의 최고층 빌딩이 탄생할 예정이었지만 이후 들이닥친 금융위기와 통일교와의 분쟁 등으로 거의 공사 초기단계에 멈춘 채 방치되었다 최근 법적 다툼이 마무리되고 곧 완공을 앞두고 있다. 안타깝게도 건물 외골격의 빨간 띠는 포장을 뜯지 않은 필름이 아니라 건물의 디자인이라 계속 유지된다고 한다.

거기서 더 달리면 양화대교를 만나게 된다. 이 다리는 자이언티 덕에 더욱 유명해졌는데,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노래의 가사를 곱씹어보면 숨겨진 장면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택시 기사였는데 어디냐고 물어보면 항상 양화대교. 양화대교. 그런데 자이언티의 다른 노래 Click me에서 집은 강서구라고 했으니 양화대교를 건너도 한참은 더 가야 집에 도착하는데 왜 아버지는 늘 양화대교에 서 계셨을까? 삶은 힘들고 고되고. 또 아프고. 왜 택시기사는 그리고 (예전에) 가난했던 뮤지션 자이언티는 차를 마땅히 댈 곳도 없는 양화대교에 서 있었을까. 어쩌면 이 노래는 아버지가 다리 위에 서 계시다는 것이 무엇을 뜻했는지 깨달았을때 탄생한 것이 아닐까. 지나친 상상은 고소로 가는 지름길.

그 다리를 지나면 망원동과 합정에 도착한다. 망원동은 태종의 둘째아들이자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의 별장인 망원정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번잡한 이태원을 피해 사람들이 한남오거리에 몰리듯 힙스터들은 홍대보다도 망원동에 모이며 이곳을 망리단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마포와 아현이 있다. 과거 아현 고가 아래에는 세글자 이름으로 이루어진 방석집들이 즐비했다. 잘은 몰라도 어떤 방식이든 성을 파는 곳임은 확실했다. 그런 장소 특유의 시큼하면서도 서글픈 느낌이 물씬 나던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대한민국에서 최고 고소득자들이 선망하는 주거지 중 하나로 변모하여 과거의 그 음침한 기운은 온데간데 찾아볼 수 없다. 천대받는 창녀. 그중에서도 아현 굴레방다리는 나이든 창녀들이 모이는 곳이었다는데 억세게 20세기를 버턴 그녀들은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처럼 서울은 젊은이도 노인도 그리고 아버지도 딸도 열심히 먹고 마시고 즐기며 일하고 사랑하다 잠드는 일상의 터전이고 다양한 삶이 모여 하나의 도시를 이루고 있다. 사람은 떠났어도 그들의 인생은 이곳에 쌓여 하나의 서사를 이루고 있다. 그 삶은 모두 하나같이 소중하다. 누구도 어미 앞에서 그 자식이 못생겼다고 말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그 누구도 우리의 어제와 오늘을, 그리고 그것이 모인 이 도시를 천박하다고 말할 자격은 없다. 천박한 것은 국민과 서울이 아니라 반시장적인 조치로 집값을 쳐올려 시민들에게 고통을 안기고도 아집을 꺾기 싫어 수도를 이전하겠다는 괴상한 발상을 꺼낸 70먹은 노친네의 가벼운 주둥아리이다. 



아니나 다를까 민주당의 당대표 답게 이 천박한 노친네는 세종시에 영혼의 몰빵을 쳤다. 내심 손혜원과 노영민이 무척이나 부러웠나보다. 이런 후레자식.

2020. 7. 13.

불쾌한 인플레이션의 시대

*중요한 내용을 급하게 작성하느라 비문이 많고 생략된 부분이 많아 몇몇 부분을 수정하여 다시 업로드합니다. 또한 본문을 읽기 전 슈로더의 수석이코노미스트의 글(링크)을 참고하기를 권합니다. 비록 2년 전에 작성된 칼럼이지만 그가 지적하는 1960년대와의 특징은 당시보다 현재와 더 가깝습니다.


지난 한달간 거의 글을 올리지 못했던 것은 앞으로의 시장에 대한 전망이 정리되지 못해서, 구체적으로는 전망은 정리되었지만 투자방법을 정리하지 못해서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향후 장기간 세계가 저성장을 동반한 인플레이션, 어쩌면 스테그플레이션에 가까운 형태로 진행될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현재의 현상이 1960년대 중반 저금리가 끝나갈 무렵의 세계경제와 너무나 유사하기 때문이다. 

1930년대 대공황은 금융시장과 당시 시민들의 삶뿐 아니라 경제학에도 커다란 도전이었다. 때맞추어 등장한 케인즈라는 걸출한 학자는 급격한 불황으로 수요가 위축되었을 때 정부지출을 늘려 벗어날 수 있다는 해결책을 제시했고 미국은 그 처방을 충실히 따랐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뒤, 대공황과 같은 급격한 수요의 급감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비했고 일부 부침이 있긴 했지만 비극은 되풀이되지 않았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세계대전에서 나치와 일본을 쳐부수고 명실공히 세계 최강대국이 되었다는 미국의 자부심은 어떤 불황도 능히 이겨낼 수 있다는 자만을 낳았고 국민들 역시 그런 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정치인과 유권자들은 불황이 닥칠 때마다 계속해서 과도한 재정지출에 의존했고 전체 경제에서 정부가 차지하는 비중은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가상승률은 전례없이 낮았으며 이에 연준은 극도로 낮은 금리를 유지하며 연방정부의 채권발행을 간접지원했다.

연방기금금리

미국 CPI
하지만 우리의 역사에서 종종 황금의 시대는 예고없이 종말을 고하곤 한다. 그리고 그 시대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벨 에포크가 그랬듯이. 60년대 하반기에 들어서며 인플레이션 압력이 커지기 시작했고 이와 같은 신호를 무시하기 어려웠던 연준은 점차 금리를 올리기 시작한다. 대개 인플레이션 압력이 커지는 것은 호경기인 경우가 많아 금리가 올라도 시장과 성장률이 하락하지 않는데, 인플레이션 없는 성장기를 보낸 끝에 낮은 성장을 동반한 인플레이션의 시대가 들어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1970년대의 스테그플레이션을 두차례의 오일쇼크 때문이라고 기억하지만 이미 오일쇼크가 시작되기 전에도 미국에서는 분명 스테그플레이션의 압력이 가중되고 있었다. 세상에 언제 어디서든 널리 통용되는 황금률은 많지 않은 법인데도 불구하고 정치인들은 지출확대가 만병통치약이라고 믿었고,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는 그 믿음을 산산히 부수며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후 학자들이 내린 진단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정부의 지출은 민간에 비해 비효율적이라 정부의 비중이 지나치게 커지면 생산성을 해치는 단계에 이르른다고. 이는 경제를 위축시키면서 물가의 상승을 가져오는 스테그플레이션을 촉발한다는 것.

그리고 이런 현상은 놀랍게도 현재와 매우 유사하다.

과거 70년대의 스테그플레이션은 두가지 트라우마를 남겼다. 첫째, 인플레이션에 대한 공포. 둘째, 큰 정부에 대한 두려움.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 이래 이어진 디플레이션은 첫번째 두려움을 망각하기에 충분했고 코로나에 대한 대중과 정부의 공포는 두번째 두려움을 마비시켰다. 놀랍게도 코로나 아래서 신용위험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는데 최소한 생명의 위협은 없었던 08년의 위기가 얼마나 많은 기업들을 도산시켰는지를 감안하면 우리는 상당히 평온하게 위기를 넘긴 셈이다.(3월의 몇주를 제외한다면) 하지만 진짜 문제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올해 상반기에 우리가 보았던 정부와 중앙은행의 예외적인 대응책들이 우리의 새로운 기준점이 되었고 다시 불황이 찾아와도 정부와 유권자들은 비슷한 방식으로 경제적 고통을 회피하려 들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정부 부채가 크게 늘어날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각 정부는 인플레이션을 용인하는 수준을 넘어 조장할 수 밖에 없다. 최근 한국 정치권에서도 대규모 추경으로 인한 재정악화에 대해 찬반논란이 있었지만, 사실 우리나라는 다른 선진국에 비하면 선방한 축에 속한다. 미국은 이미 GDP의 10%가 넘는 재정지출 외에도 다른 여러 지원프로그램들을 가동, 혹은 준비중이며 재정건전성의 첨병으로 여겼던 독일은 금융지원을 포함 GDP의 30%가 넘는 프로그램을 운용중에 있다. 물론 이 수치는 상반기에 발표된 대책만을 집계한 것으로 하반기에 경제둔화가 지속되거나 우한폐렴의 2차확산이 시작된다면 더 커질 가능성이 크다. 경제성장률이 2010년 이전의 속도로 회복하지 않으면 이 수치가 가까운 미래 안에 개선될 가능성은 아예 없기에 정부가 다시 재정건전성을 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인플레이션으로 부채를 태우는 길 밖에 없다. 

여기에 두가지 부수적인 사건은 이 인플레이션이 성장에 따른 부수물에 그치기보다, 우리가 70년대에 본 것과 같이 매우 불쾌한 인플레이션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하나는 미중 무역분쟁을 비롯한 리쇼어링 정책, 또 하나는 코로나로 인한 생산라인의 다변화. 리쇼어링은 순전히 정치적이고 경제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대중의 요구로 이루어졌지만 후자는 코로나로 인해 생산라인에 타격을 입은 기업의 전문가들이 생산기지를 다변화하는데 지나치게 많은 비용을 들이며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모든 인간은 방금 겪은 사건을 과도하게 평가하기 마련이니까. 이 두 요소는 앞으로 우리가 마주한 인플레이션이 공급측면에서도 시작될 것을 암시한다.

금값으로 환산한 S&P500 지수

새로운 시대에는 구시대의 투자법이 독이 되는 경우가 흔하다. 중후장대가 그룹의 미래라고 믿었던 두산이 그러했듯이. 따라서 나는 앞으로 다가올 10년은 IT와 같은 테크주식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심지어 주식의 시대가 될 것인지도 확신하지 못하겠다. 과거 1970년대의 사례를 보면 골디락스의 시대가 끝나며 금값으로 환산한 주가지수는 곤두박질치기 시작했고 다시 전고점을 회복하는데 거의 3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리지 않았나. 스테그플레이션의 시대에서는 주식이 금이나 은, 유가, 부동산과 같은 현물을 이기지 못한다.

마크 트웨인은 말했다. 역사는 그대로 반복되지는 않지만 운율은 반복된다고. 분명 미국의 주식시장이 오랜기간 상품시장을 언더퍼폼한 시기는 굵직한 현대사들과 겹친다. 석유파동, 베트남전쟁, 케네디 암살, 브레튼우즈 체제의 종말, 미중수교 등. 하지만 우리가 마주한 미래에 그런 비극적이고 충격적인 사건들이 예정되어 있지 않다고 해도, 정부부채에 과도하게 의존하기 시작하는 정치인들과 유권자는 우리가 70년대와 비슷한 운율을 따를 것이라는 미래를 암시한다. 

무엇보다 올해 말 미 대선에서 트럼프가 재선에 실패하고 큰 정부를 지향하는 민주당이 집권한다면 이와 같은 추세는 걷잡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60년대 말-70년대에 명목금리가 인플레이션의 속도를 쫒아가지 못했던 것 처럼 디플레이션의 시대에 너무나 익숙한 세계의 중앙은행장들은 인플레이션 압력에 제때 대응하지 못할 것이며 대응하려 해도 방대해진 정부부채가 그들의 어깨를 짓누를 것이다. 

인플레이션은 이미 우리를 덮치기 시작했으며 오랜 가뭄 끝 단비처럼 세계는 그를 반길 것이나 그것이 불쾌한 인플레이션의 시대로 이어지는 이정표였다는 것을 바로 깨닫지는 못할 것이다. 이 시기에 확실한 투자는 하나다. 바로 최대한 현금을 숏치는 것. 인플레이션의 초입에서는 당신이 무엇을 사는지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많은 빚을 냈는 지에 따라 수익이 정해지고 당신의 근로소득이 휴지가 되는 것을 겪을 것이다. 그렇게 인플레이션의 초반부를 지나고 나면 이윽고 하반기가 시작될 것고 시대의 막바지를 향해 달릴수록 각 중앙은행들이 뒤늦게 인플레이션에 대응하기 위해 금리를 올리는 것을 겪을 것이다. 디레버리징의 시대가 오겠지만 그 시기를 완벽하게 맞춰 적응하는 투자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니 대부분의 투자자들은 포트폴리오가 레버리지된 채 새로운 후반전을 맞이하겠지. 그제서야 투자자들은 자신이 어떤 자산을 샀는 지에 따라 포트폴리오의 수익률이, 더 나아가 자신의 생사가 엇갈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2020. 7. 9.

절세미인(節稅美人) 노영민

많은 투자자들이 말한다, 세금을 줄이는 것이 투자의 핵심이라고. 하지만 이 남자보다 더 완벽한 투자와 절세의 기교를 보여준 사람이 대한민국 역사에 또 있었을까. 반포의 13평 아파트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명예도, 대통령도, 당도 심지어 지역구 유권자들도 가차없이 손절할 수 있는, 뜨거운 머리와 냉철한 가슴을 가진 남자-청와대 비서실장 노영민. 숨가쁘게 흘러간 그의 지난 몇일을 되돌아보자.

집값이 한여름의 수온주보다도 더 뜨겁게 달아오르던 7월의 어느날,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청와대 춘추관으로 불려들어간다. 굳게 닫힌 문 너머로 고함소리와 의자 넘어지는 소리, 그리고 연신 죄송합니다 송구스럽습니다 각하 소리가 들린지 한참이 지났을까. 이윽고 문이 열리자 얼굴이 벌개진 김 장관이 바쁜 걸음으로 걸어나오고 무거운 얼굴의 노영민 비서실장이 그 뒤를 따랐다. 노 실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사무관에게 한마디를 던진다. "내일까지 청와대 포함 다주택 고위공직자들 명단 작성해서 보고해." 평소엔 눈치없던 그 사무관조차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서둘러 대답한다. "네 실장님."

다음날 아침, 다주택 보유자 명단을 받아 첫 부분을 읽던 노 실장의 동공이 잠시 흔들린다. [1. 노영민 2주택자, 반포 1채 청주 1채] 분노가 폭발한 그는, 충분히 위협적이면서도 대통령집무실까진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사무관을 다그친다. "야 이놈새끼야. 왜 내가 맨 위에 올라가있어?" 성실하지만 다소 센스가 부족한 이 사무관은 이렇게 대답한다. "명단을 작성할 땐 서열순으로 하라고 배웠습니다" 하. 오랫동안 학생운동을 이끌어 본 그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놈은 언젠가 큰 사고를 칠 놈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시간이 없다. 그는 검은색 플러스펜을 꺼내 자신의 이름을 직직 지우고선 이렇게 말한다, "이 명단에 있는 사람들과 면담시간 잡아서 다시 보고해. 단독면담형식으로, 당장 오늘 오후부터." 

그렇게 면담이 시작됐다. "아니 은 위원장님. 왜 세종시 주택은 안 파시는 겁니까?" "실장님 그게 제가 안 팔려는게 아니고.. 코로나 때문이라 그런지 이게 잘 팔리지를 않습니다요." "얼마에 내놓으셨는데요?" 위원장은 움츠려든 목소리로 대답한다. "oo억에 내놨습니다." 노 실장은 손수 남보라색 바탕의 호갱노노 앱을 켜고 바로 그저께 직힌 실거래가를 눈앞에 들이밀며 소리친다 "위원장님 지금 장난하십니까? 아니 로얄동 15층이 oo억에 거래됐는데 그 가격에 호가를 내는게 안팔겠다는 것과 무어가 다릅니까!" 우물쭈물하는 상대의 변명을 연신 끊고 울려퍼지는 그의 호통소리는 문 밖에 앉은 사무관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수도 없이 많은 고위공직자들이 청와대 비서실장과 독대하는 시간을 가졌고 방에서 나온 당사자들은 어김없이 입 밖으로 새어나가려는 ㅆ발음을 힘겹게 입술에 힘을 주어 참아가며 발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하루종일 독대를 마친 노영민 실장이 물었다. "명단에 있는 사람 모두 면담 했지?" 충혈된 눈의 사무관이 대답한다 "네" "그럼 불가피한 사람 제외하고 서약서 빠짐없이 받은거 맞지?" 관료주의에 충실한 사무관은 스스로 매를 번다. "실례지만 실장님꺼 아직 안주셨는데요" 그 눈치없는 한마디에 반쯤 감겨있던 노 실장의 눈이 매섭게 불타오르며 커진다. "이놈새끼야 시발 팔어! 판다!! 나도 판다고!!! 그러니 나가!!!" 영문도 모르고 혼나 황급히 달아나는 사무관의 뒤를 바라보던 비서실장은 곧 집무실 책상 위에 엎드린다. '마누라에겐 뭐라고 하지...' 하지만 국보법 위반으로 지명수배를 당하던 중에도 기지를 발휘해 도주한 덕에 노꾸라지라는 별명까지 얻은 그 아닌가. 그는 번개같이 일어나 세종시의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어어 김국장, 나 청와대 노실장이야. 잘 지내? 아직도 조세쪽에 있지? 거 시간 되면 오늘 같이 저녁이나 하지"  

다음날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나타난 노영민 실장은 민정수석, 사회수석 앞에서 한참 너스레를 떤다. "내가 또 머리가 비상하잖아? 이렇게 하면 된다니까" "아니 실장님. 진짜 이게 사실입니까? 반포 아파트 매매차액이 12억인데 양도소득세가 650만원 밖에 안되는게 가능합니까?" 노 실장은 종이를 꺼내 도표를 그리기 시작한다. "그래! 자 봐, 청주를 먼저 팔고 응? 그 다음에 반포를 팔면 이게 세금 3억이 650만원으로 준다니까? 게다가 아파트 두 채를 판 돈으로 새로 똘똘한 한 채를 사면 현재 오른 시가가 취득가액이 되니까 미래에 낼 양도소득세까지 대폭 절감되는거라고" "와 역시 실장님! 머리가 비상하십니다!" 보도자료를 작성하던 사무관은 잠시 일을 멈추고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도통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아마 우리 중 그 누구든 그 자리에 있었어도 마찬가지였으리라. 다만 노 실장이 사무관의 책상 위에 두고 간 종이에 반포라는 두 글자만이 크게 적혀 있었을 뿐이다. 잠시 후 사무관이 작성한 보도자료가 춘추관에 모인 기자들에게 전달되었고 얼마 안가 각 언론사의 헤드라인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청와대 다주택 고위공직자들 집 판다]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 반포아파트 매물로 내놔]

식사 후 사무관이 타다 준 믹스커피를 마시고 노곤하게 기지개를 펴던 노 실장에게 전화 한통이 걸려온다. [사랑하는 여보님] 한껏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받은 노 실장과는 달리 아내는 분노와 공황을 한데 모아 소리를 지른다. "야 이 화상아, 너 미쳤어?? 뭐? 반포 집을 팔어? 당신 혹시 청와대에서 치매 옮았어?" 노 실장은 짐짓 점잖은 척 품위있게 대답한다. "아 이 여편네가 무슨 소리야. 그건 올해 안에만 팔면 된다니까." 아내는 짜증섞인 목소리로 되묻는다"그럼 이 뉴스 속보는 뭔데?" 네이버 뉴스페이지를 켜서 헤드라인을 읽던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몇분간 정지화면처럼 얼어있던 그는 간신히 입을 열어 다급히 사무관을 찾는다 "야!! 이 새끼 어디갔어!" 공직자들의 주택처분동의서를 정리하고 보도자료를 만드느라 홀딱 밤을 샌 탓에 엎드려 자던 사무관이 곧장 집무실로 튀어들어왔다. "야 이 새끼야. 이 보도자료 니가 낸거 맞아? 내가 언제 반포를 판댔어!!" 예고했던대로 성실하지만 눈치는 없는 사무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실장님 어제 분명 집 파신다고 하시고 아까 낮엔 반포.." 사무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고성이 다시금 터져나왔다. "야 이 미친놈아 너 일부러 이러지? 혹시 미통당 쁘락치냐? 세상에 어느 다주택자가 비싼 집을 먼저 팔아, 너는 시발 집도 안사봤냐?" 사무관은 위축된 가운데 이것 만큼은 떳떳하다는 투로 대답한다. "네 저는 전세라서.." 분을 못이긴 노실장은 다시 고함을 질렀다. "야 시발 나가, 나가!! 나가!!!" 학창시절 따르던 운동권 선배에게 첫사랑을 뺏긴 이래 그렇게 절규한 것은 처음이었으리라.

그 사이에 그가 반포 집을 처분한다는 기사는 계속해서 올라왔고 그때마다 마누라에게 걸려오는 전화는 그의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었다. 그는 침착하게 이 상황을 아내에게 설명하고자 마음 먹는다. "여보.. 저 이왕 기사가 나갔고 내 체면도 있고 하니.." "뭐 체면? 평생 땡전 한푼 못 벌어본 인간이 체면? 야 너 그 돈이 어떤 돈인줄 알아? 너 국회의원 한답시고 적금 깬거, 내가 니 사무실에 직접 신용카드 단말기 가져다 놓고 감사기관들 안면몰수하고 쭉 불러다 책팔아 채워넣은 돈이야. 니가 뒷돈도 잘 안 들어오는 야당 의원이나 할때 내가 홍의원 와이프한테 직접 전화해서 그쪽 비서관으로 우리 아들 꽂아 넣으며 마련한 돈인데, 뭐 니 체면 때문에 그 돈을 세금으로 날려? 내가 너 세금 벌어오라고 그 자리 보냈지 세금 내라고 보낸줄 아냐? 너 진짜 쪽팔린게 뭔지 보여줘? 내일 조간 헤드라인에 현직 비서실장 마누라가 집에서 분신자살했다는 속보 뜨게 해줄까?? 당장 물러! 물러!!" 노 실장은 이미 아내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다시금 호소해본다. "아니 그래도 이러면 내가 뭐가 돼.. 여보 제발.." 하지만 그의 아내는 단호하다. "야야. 그건 모르겠고 난 김의겸네 와이프처럼 못 살아, 차라라 안 살아. 나 지금 가스밸브 열었어. 야 너 반포 팔거면 빨리 말해, 지금 붙 붙이게" 그는 어렵사리 아내를 진정시키고 전화를 끊는다.

잠시 후 청와대 비서실은 짤막하게 정정보도를 냈지만 그 정정된 한 줄은 이전 23건의 부동산 대책보다도, 수백 건의 대통령의 부동산관련 발언보다도 더 큰 파장을 일으켰다. 청와대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고 비서실장은 또다시 웃음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무엇을 똘똘한 반포의 대지지분 13평 재건축 아파트에 견줄까. 노모를 팔고 아내를 팔 지언정 흑석만은 못 팔겠다던 김의겸 선생도 금뱃지에 혹해 흑석의 1+1 상가건물을 파는 우를 범했는데, 명철한 우리의 노영민 선생은 자신의 체면도, 당의 지지율도 심지어 청주의 유권자들도 버려가면서까지 똘똘한 한채를 거머쥐었다. 더욱이 청주 아파트를 매각한 뒤 여론에 못이기는 척 하며 반포를 팔아 1가구 1주택 장기특별공제까지 챙겼으니 어찌 감탄하지 않으랴.  

숱한 양심의 압박과 여론의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1주택 실거주자보다도 더 적은 세금을 납부한 노영민 선생. 평범한 수식어로는 그의 스킬을 묘사하기엔 턱없이 부족하지 않은가. 그의 절세는 단순한 기(技)를 넘어 예(藝)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아름답다고 표현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으니 나는 그를 절세미인(節稅美人)이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돌이켜보면 작년 영혼의 몰빵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신 흑석 김의겸 선생의 뒤를 따른 수많은 투자자들이 돈방석에 앉지 않았나. 올해 재테크의 핵심은 절세라는 것을 친히 깨우쳐주신 절세미인 노영미인. 오늘 그가 보여준 절세법은 두고두고 내 마음 속에 남을 것 같다.


환하게 웃는 모습마저도 아름다운 남자, 절세미인 노영미인



*본 글은 전적으로 작가의 상상력에 의존한 것으로 사실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2020. 5. 22.

미래를 예언한 영화들 3부 조커와 2020년 미 대선

1부: 킹스맨과 브렉시트 (링크)
2부: 주토피아와 트럼프 (링크)

앞의 두 편의 글은 영화가 대중의 어떤 욕망을 자극했고 또 그 욕망이 어떤 정치적 선택을 가져왔는지를 분석했지만, 이번에는 조금 관점을 바꿔서 특정 정치성향을 가진 지지자들이 일반적인 대중, 즉 유권자들을 얼마나 잘못 파악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또한 앞의 두 글은 사후 분석인데 비해 아래의 글은 올해 11월에 예정된 미국 대선에 관한 글이므로 반년 뒤 어떤 결과가 나올지 흥미를 가지고 지켜보길.

 히스 레저가 아닌 그 누가 감히 조커를 연기할 수 있을까. 하지만 호아킨 피닉스는 그런 염려를 단번에 잠재우며 자신만의 캐릭터를 완성했고 이 영화는 영화평론가들 사이에서 뿐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커다란 성공을 이뤘다. 주연배우의 연기는 물론이고 스토리, 음향, 영상 등 이 영화는 말 그대로 완벽했다. 단 하나, 엉성한 사회비판을 제외한다면.

미국정치를 잘 몰라도 이 영화가 트럼프와 공화당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뉴욕(고담시티)의 가장 후미지고 외진 곳에서부터 시작한다. 폭력이 난무하고 쓰레기가 사방에 널린, 국가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가난한 동네. 그 곳에서 돈은 교환이나 가치척도의 수단이 아닌 생존의 필수품이기에 당장 일자리를 잃으면 다음날 끼니마저 굶어야 하는 삶. 거기서 태어난 평범한 정신병자 아서 플렉이 온 도시를 뒤흔드는 비범한 빌런으로 변화한데엔 두가지 촉매가 있었다, 바로 권총과 정신상담. 아서의 동료는 그에게 호신용으로 권총 한 자루를 건네는데 결국 그는 그 총 때문에 직업을 잃어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된다. 또 고담시는 복지예산을 삭감하는데 그로 인해 아서의 정신상담이 중단되게 되어 그는 더이상 정신약을 처방받지 못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공화당과 민주당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주제 아닌가. 공화당 지지자들은 총기소유의 자유를 종교적 신념처럼 지지하는데, 영화에서 주인공이 정신적 문제를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쉽게 총을 손에 넣고 결국 네 건의 살인을 저지르는 것을 보여주는 데에는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정신상담이 중단되는 것은 ACA, 일명 오바마케어와 연관되어 있다. 오바마케어의 존치는 지난 대선에서 뜨거웠던 논쟁거리로 반대론자들은 이 법이 사실상 정부의 재정을 악화시키고 보험사의 비용을 증가시켜 결국 국민들에게 부담만을 안겨준다는 이유로 폐지를 주장했는데 반해 민주당은 저소득층을 의료의 사각지대에 방치해서는 안된다며 반드시 필요한 제도라고 항변했다. 그리고 이 영화가 의료복지가 축소된 이후의 세상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보라.

공화당에 대한 비판은 토마스 웨인이 등장하며 정점에 이른다. 여러 기업체를 거느린 CEO출신에다 장신이고 공격적 언행을 일삼는 그는 누가 보아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판박이다. 특히나 여자문제가 복잡하고 무례하며 자기중심적이걸 보면 이 의혹은 확신이 된다. 그는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아서에게 펀치를 날리고 그를 모욕하여 그를 조커로 만드는 결정적 원인들 중 하나를 제공한다. 이처럼 정치적 편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토드 필립스 감독은 그가 결국 조커의 추종자중 하나에게 살해되는 것을 보여주며 트럼프 대통령에게 은유같은 저주를 퍼붓는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조커라는 괴물이 탄생하게 된 것은 그를 방치한 잘못된 사회구조 때문이며 바로 공화당과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은 미국을 고담시로 만들 것이라는 경고를 담고 있다.(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실질적 주인공은 조커가 아닌 트럼프다) 문제는 영화를 만든 이들의 인식이 너무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데에 있다. 만약 아서 플렉이 실존한다면 그는 2016년 대선에서 누구를 찍었을까? 통계에 따르면 그는 트럼프에게 표를 던졌을 것이다. 인종, 성별, 소득수준, 최종학력 그리고 연령에 따른 트럼프 지지율을 보면(링크) 아서 플렉은 이 다섯가지 카테고리 중 연령을 제외한 다른 모든 카테고리에서 트럼프의 지지층과 일치한다. 그런 마당에 영화를 보며 아서에게 공감한 미국의 빈민층들이 과연 감독의 정치적 메시지에 공감했을까? 이 샴페인 좌파 감독이 조금이나마 현실감각이 있었더라면 아서 플렉은 이민자 가정 출신의 박사학위를 가진 고학력 20대 흑인 여성이었을텐데.
교육수준이 낮을 수록 트럼프에 대한 지지도가 높다
왜 현실의 아서 플렉은 트럼프를 지지하는가. 영화 속 아서의 비극이 일자리를 잃으며 시작했던 것처럼 미국의 빈민층은 값싼 중국산 제품과 불법 이민자들에게 밀려 일자리를 잃었다. 실업의 비극을 가져온 것은 38구경 권총이 아닌 세계화다. 또 미국의 중하류층에게 위화감을 안기는 것은 억만장자이면서도 싸구려 야구모자를 쓰고 맥도날드를 먹는 트럼프가 아니라 수백만 불짜리 대저택에 살고 제트기를 타고 다니면서도 지구온난화의 위험성을 설파하는 엘 고어나, 빈부격차를 줄이자고 외치면서 편당 수백만달러를 받고 페라리를 모는 헐리웃 배우들 같은 리무진 리버럴들이다. 그들이 기아와 빈곤을 논하며 자선파티에 모여 우아하게 브르고뉴산 와인을 따를때 트럼프는 코카콜라를 마시며 옥스포드 사전따위를 필요로하지 않는 하류층들의 언어와 트위터로 유권자들과 소통한다. 저질 농담들과 함께, 때때로 어법도 틀려가면서. 미국의 상류층들이 트럼프를 경멸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하류층들은 그를 사랑한다.  

비벌리힐즈나 웨스트우드 혹은 베니스 해안가에 사는 서부의 리버럴들은 미국의 평균적인 유권자들에 대해 너무나 무지하다. 지난 대선에서 힐리러가 패배한 것은 미국의 유권자들이 멍청하거나 인종차별주의자여서가 아니라 그녀와 그녀가 이끄는 민주당에 아무런 비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당시 힐러리의 대선공약이 무엇인지 떠올려보라. 아마 그녀 자신도 자신의 공약이 무엇인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그녀는 주요 쟁점사안에 대해 입장을 여러번 바꿨다) 힐러리를 비롯한 민주당은 유권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몰랐고 따라서 자신들이 무엇을 보여줄 지도 몰랐다. 반면 트럼프의 공약이 무엇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지 않았나, 그를 지지하든 지지하지 않든 간에. 그는 세계화가 진행되며 미국의 자본가들이 생산기지의 이전과 해외투자로 더욱 부자가 될 동안 미국의 노동자들이 직장을 잃고 새로운 아서 플렉으로 전락하는 것을 꿰뚫어보았고 따라서 리쇼어링 정책을 들고나왔다. (사업으로 인생의 부를 일군 사람이 리쇼어링 정책이 경제적 관점에서 효율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모를거라 생각하지 마라.) 그리고 영화 조커는 트럼프와는 달리 진보주의자들이 아직도 그 무지 속에 갖혀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아서 플랙의 망상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리버럴들의 망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서에게 예쁜 여자친구가 존재하지 않았듯, 좌파들이 생각하는 공화당이 야기한 카오스 또한 없었다. 지피지기는 물론이고 자기가 왜 졌는지 아직도 모르는 민주당은 다음 대선에서도 또 패배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맨하탄의 남단에서 빨간색 IRT Seventh Avenue Line를 타면 월스트리트를 지나 섬의 북쪽 끝에 도달하고, 거기에서 버스를 타면 조커가 춤추던 계단이 있는 브롱크스까지 갈 수 있다. 호아킨 피닉스는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을 연기하는 대가로 약 450만 달러의 출연료를 받았는데 이는 미국의 상위 약 0.05%에 해당하는 소득이다. 토드 필립스 감독은 이 영화를 찍으며 단순한 히어로 시리즈가 아니라 사회고발의 메시지를 담고 싶었겠지만, 그가 기획한 이야기와 실제 현실은 아서 플렉과 호아킨 피닉스의 수입 만큼이나 달랐다. 테슬라 S모델과 함께 배우고 가진 자들의 힙해보이는 패션아이템으로 전락한 리버럴리즘과 민주당이 과연 올해 대선에서 다시금 미국 대중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을까.

2020. 5. 21.

미래를 예언한 영화들 2부 주토피아와 트럼프

대중의 영화취향을 들여다 보면 그들의 정치적 선택을 가늠할 수 있다. 그 이유는 1부(링크)에서 설명했으니 생략하자.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고작 디즈니 만화영화가, 그것도 발랄하고 귀여운 토끼가 주인공인 애니메이션이 어떻게 트럼프가 힐러리를 누르고 미국의 대통령이 될 것을 예언했을까.
주토피아의 주인공 주디, 그리고 격분한 트럼프
경찰이 되는 것이 꿈이었던 주디는 각고의 노력 끝에 경찰 뱃지를 달게 된다. 하지만 딱 봐도 강력한 남성미를 뿜뿜 풍기는 포유류들이 가득한 경찰서에서 작고 가녀린 그녀에게 진짜 사건을 맡기는 사람은, 아니 동물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우연히 몇몇 동물들이 갑자기 이성을 잃고 야만적으로 돌변하는 사건을 추적하게 되었고 파트너 닉의 도움으로  함께 수사를 펼친다. 몇번의 실패와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그들은 이 사건의 이면에 모종의 음모가 숨겨져 있음을 찾아낸다. 그것은 바로 시장의 비서였던 작은 양 벨웨더가 육식동물들을 문젯거리로 만들어 사회에서 배제하기 위해 그들이 이성을 잃고 본성을 드러내게 만드는 약물을 사용했다는 것. 주디와 닉은 교묘한 연기로 벨웨더의 음모를 밝히고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된다.

귀여운 주디의 외모와 재치넘치는 위트 덕에 놓치고 지나가기 쉽지만 사실 이 애니메이션은 사회 구성원들의 생물학적 차이에 주목하고 있다. 애초에 주디에게 경찰다운 일이 주어지지 않는 것도 그녀가 생물학적으로 토끼이기 때문이었고 닉이 자신의 꿈을 버린것도 영악한 여우였기 때문이다. 하울링을 따라 하는 늑대들도, 느리게 일을 처리하는 나무늘보도, 시기심 많은 양도, 시장인 사자도 모든 등장인물들의 본성을 결정짓는 것은 바로 생물학이고 그들의 DNA이다. 애니메이션은 주디의 입을 빌려 그 점을 명확하게 지적한다.(링크) 포식자들에게는 그들의 유전자에 각인된 포악한 사냥의 본성이 존재하고 그것이 문제의 원인이었다고.

독특하게도 주토피아에서는 핍박받고 탄압당하는 쪽이 강한 포식자다. 음모를 꾸민 벨웨더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초식동물들)는 늘 무시당하지, 그래, 육식동물들은 힘이 세. 하지만 포식자와 피식자의 비율은 1:10이야, 사회 구성원의 90%가 공공의 적에 대항해 뭉친다고 생각해봐. 아무도 그들을 막을 수 없어"(링크) 자연상태에서는 피식자가 아무리 많아도 포식자를 누를 수 없다. 라이온킹에서 미어캣 열마리가 사자 심바를 학대하는 장면이 나온다면 누가 공감할 수 있을까. 하지만 민주주의 아래서는 다르다. 다수결에 의해 통제되는 주토피아에서 약하고  남성성의 반대편에 서 있는 양이 유전적으로 더 강인한 야수들을 핍박하고 통제하는 것, 그것이 이 서사의 핵심이다. 이 애니메이션은 교묘하게도 우리로 하여금 맹수가 보잘것 없는 피식자들에게 학대당하는 것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만든다.

이 애니메이션이 미국에서 연령대를 가리지 않고 큰 인기를 끈 데에는 귀여운 주디의 외모 뿐 아니라 약자가 강자를 억압하는 아이러니한 서사가 미국의 주류 대중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점에 주목해야 한다. 오늘날의 미국인들을 떠올려 보자, 그들에겐 안되는 것도 많고 말하지 말아야 할 것도 많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같은 소득수준에서도 인종에 따라 교육열이 다른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함부로 지적해서는 안된다. 심지어 어린 침팬치 수컷과 암컷들조차 성에 따라 좋아하는 장난감이 다르지만 미국의 PC들은 그와 같은 생각은 관습적 성역할을 고착화시키는 잘못된 관념이라고 주장한다. 그렇게 fireman, policeman과 같은 단어는 fire fighter, police officer로 대체되었고, 남미에서 건너오는 불법이민자를 막자는 지극히 합법적인 주장을 펼치려면 무식한 텍사스 레드넥이라는 비난을 견뎌야만 했으며, 중국에서 건너온 코로나를 중국코로나라고 부르는 것은 인종차별적이라는 비난을 듣게 되었다. 어휴 피곤해.

미국의 주류 백인들은 급격하게 늘어나는 이민자들의 숫자로 인해 계속해서 자신들의 권리가 줄어드는 데에 큰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말과 행동을 과도하게 구속하는 PC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이 극장에서 이 애니메이션을 봤을때 무엇을 느꼈을까? 주토피아는 현대 인간사회와 너무나도 유사하고 유전적 차이가 존재하는 다양한 동물들이 혼재된 도시는 다양한 인종의 용광로인 미국과 닮았다. 영화 초반부터 여러 동물들이 등장하는 추격 신을 떠올려보라. 파키스탄인이 우버를 몰고, 유태인 사업가가 승객으로 탑승하며 그 옆을 한 아시안 비즈니스맨이 바쁘게 뛰어가고 또 베네수엘라에서 온 대학생이 파트타임으로 커피를 내리는 뉴욕의 일상과 닮아있지 않은가. 이성을 갖춘 동물들의 사회, 종에 따라 각자 다른 본성을 지닌 동물들, 그리고 그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 약점이 되는 곳. 미국 어린이들에게 주토피아는 판타지 만화였지만, 어른들에게는 현실을 모방한 우화였다. 이에 열광한 미국인들이 불과 몇개월 뒤의 대선에서 입으로는 힐러리를 찍겠다고 응답하면서도 실제론 트럼프에게 표를 던진 사실(링크)과 무관하지 않다.

감독 바이런 하워드는 한 인터뷰에서 이 애니메이션이 기존의 동물 의인화 애니메이션과는 다른 작품이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영화의 대표 OST에서부터 확연하게 드러난다. 도입부에서 주디는 "In Zootopia, anyone can be anything!"이라고 외치지만 결국 영화는 "Try everything"으로 마무리된다. 당신의 배경과 상관없이 뭐든지 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같은 외침으로 출발한 영화가 그저 시도나 해보라는 무책임한 말로 마무리된다는, 그런 비관적인 전개를 발랄하게 포장한 것 뿐이라면 지나친 비약일까. 결국 생물학적 본성을 극복한 것은 끽해야 주인공인 주디와 닉 뿐이고, 주목받지 못하는 기타 모든 조연들은 그들의 DNA에 따라 살아가지 않는가. 심지어 주디의 부모조차도. 참고로 주토피아의 줄거리는 원래 더 어두운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밝고 희망적인 분위기로 바꾸라는 경영진들의 주문때문에 현재처럼 밝고 쾌활한 내용으로 바뀌었다고 하니 내 짐작이 근거없는 억측만은 아닐 것이다.

본디 더 어두웠던 주토피아의 스토리 라인

사족1: 애초에 이 글을 구상한 것은 4년 전이지만 제목만 써두고 내 게으름 덕에 완성하지 못할뻔 한 수십개의 빈 글 중 하나였다. 하지만 최근 미래를 예언한 세번째 영화가 나온 덕에 귀찮음을 이겨내고 두번째 편을 완성했다. 그런 의미에서 세번째 글은 미래가 실현되기 전에 미리 올리련다. 

사족2: 주디 너무 귀여움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