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학교에서나 수학여행을 떠나면 맨 뒷좌석은 일진들의 몫이다. 이 다섯 개의 좌석은 모든 일진들이 탐내는 명당으로 그들은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왕좌의 게임도 불사한다. 그리고 그 바로 앞 줄은 그들을 따르는 부하들의 자리이다. 당신의 학창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보라, 그렇지 않은가. 전국의 일진들이 어디엔가 모여 이런 규칙을 정하고 대대로 이 전통을 전해주는 것도 아닐 텐데 어째서 시대와 지역을 가리지 않고 일진들은 항상 뒷좌석에 앉을까?
그 이유는 버스의 구조 때문이다. 한국 대형승합차의 맨 뒷좌석은 대개 다른 좌석들보다 조금 높게 설계되어 맨 뒷좌석에 앉은 승객들은 다른 승객들을 내려다볼 수 있다. 게다가 맨 앞좌석에는 대개 인솔자인 담임선생님이 앉기 때문에 기존 권력에 반항하는 학생일수록 선생님과 거리가 먼 뒷좌석을 선호하게 된다. 따라서 기성체제에 순응하지만 학생들 사이에서는 별다른 권력을 가지지 못한 모범생들은 담임선생님과 가까운 앞자리에 앉고 반항적이면서 또래들 사이에서는 우월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일진들은 선생님과 멀면서 또 학우들을 내려다볼 수 있는 맨 뒷좌석에 앉는다. (반면 선생님들이 동승하지 않고 뒷좌석이 솟아있지 않은 미국의 통학버스에서는 일진들이 대개 앞자리에 앉는다고 한다.)
이런 공간과 권력의 구조는 비단 수학여행 버스에 그치지 않는다.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권력자의 자리가 신하들이나 피지배계급보다 낮은 문화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심지어 통치자의 권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들의 물리적 자리도 높아진다. 이는 현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펜트하우스는 가장 높은 층에 짓지 않는가. 1층에 펜트하우스를 설치하는 시공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법정에서도 가장 큰 권위를 가진 판사는 피고나 원고, 혹은 배심원들보다 높은 자리에 있고 국회에서도 국회의장의 자리는 일반 의원들보다 높다. 건축 양식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고딕 양식과 전체주의 건축은 각기 다른 시대에 다른 집단의 주도로 탄생했지만 둘 다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존재를 억압하고 축소하고자 했고, 그와 같은 의도는 장대하고 획일적인 건물양식으로 실현되었다. 현재에도 그 앞에 선 이들은 움츠러드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이처럼 공간의 구조는 인간의 의식에 강력한 영향을 준다.
그래서 정치구조의 변화를 만들려고 했던 이들은 마찬가지로 그 권력이 머무는 공간도 변화시키려고 시도했다. 영국의 아서 왕이 봉건제도를 확립하며 자신의 기사들을 원탁에 배치했던 일이나 주변 경쟁 국가를 모두 물리치고 신바빌로니아의 절대 지배체제를 완성한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전례 없이 높은 건축물인 바벨탑을 지은 것, 그리고 가깝게는 조선왕조의 왕권을 부흥시키려던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한 것이 그 예이다. 왜냐하면 공간의 구조는 단순히 권력지형의 부산물이 아니라, 반대로 공간 자체가 사회권력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청와대의 시작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청와대의 이전 명칭은 경무대라고 불렸는데, 이는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궁 뒤편의 자그마한 언덕에 붙인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경무대는 경복궁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제 7대 조선 총독이었던 미나미 지로는 바로 이 곳에 총독관저를 지었다. 조선의 법궁을 내려다본다는 것은 바로 조선반도 전체를 내려다보는 셈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마치 버스 맨 뒷자리의 일진들마냥.
이후 경무대는 조선을 무력으로 지배한 권력자들의 안방으로 쭉 자리 잡았다. 일제가 패망한 이후 주한미군 사령관이, 뒤이어 이승만 대통령이 관저로 삼으며 이곳은 마치 과거의 왕궁처럼 아무나 접근할 수도 없고 함부로 다가설 수도 없는 곳으로 남아있었다. 심지어는 여당의 대표나 행정부의 장관들까지도 함부로 청와대에 들어설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이곳의 구조와 위치가 과거 국가를 무력으로 지배하던 이들의 목적에 맞게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설계사상부터가 반민주적인 공간에 들어선 인간이 민주적으로 행동하길 기대할 수 있을까.
그래서인지 몰라도 이후에 집권한 모든 대한민국의 지도자들은 비슷한 비극을 맞이했다. 그중에는 도덕적이라고 여겨진 독립운동가나 명문대를 나온 민주화운동가, 유능한 사업가, 서민 출신의 인간적인 정치인 혹은 신실한 종교인도 있었지만 모두 하나같이 권력을 남용하거나 그 힘으로 축재를 하다 들통나 역사에 오점을 남겼다.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래, 헌법이 여섯 차례에 걸쳐 고쳐 쓰이는 동안 모든 헌정 위기는 하나같이 청와대에서 발생했고 그 과정이 동일했다는 사실은 이 나라의 비극이 지도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강하게 암시한다. 과거의 한 글(링크)에서 나는 박근혜의 비극이 문재인 정부에서도 반드시 되풀이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왜냐하면 당시 분노하던 모두가 다음 권력을 누가 잡을지만 쳐다보고 있었지 이를 70년간 되풀이되던 권력의 구조적인 문제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지금의 문제도 구조적인 문제로 접근하지 않으면 이번 정부 역시 비극으로 끝날 것이다.
지난 70년간 청와대는 마치 블랙홀같이 현대 한국의 지도자들을 빨아들였다, 깊은 비극의 수렁으로. 마치 절대반지를 낀 스미골처럼 아무리 영민해 보이던 지도자들도 그 푸른 기와의 집에 한번 발을 들이고 나면 좀처럼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탐욕과 어리석음에 시나브로 젖어들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본 일부 사람들이 풍수를 언급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공간이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미신이 아닌 인지과학의 영역이다. 셰익스피어도 고개를 떨구고 주눅 들게 만드는 이 K-비극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의 권력구조를 바꾸는 것이 필요하고 마땅히 대통령의 의식에 영향을 주는 집무실이라는 공간 역시 바뀌어야 한다.
물론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 그 원인이 청와대의 구조 하나에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혹자는 유권자들의 미흡한 시민의식이 더 큰 문제라고 할 것이다. 허나 청와대라는 블랙홀에 빠진 것이 어찌 지도자들 뿐이랴. 해방 직후 대한민국 국민들은 민주공화제를 선택했지만 구 왕조의 일가였던 전주 이씨 출신의 이승만과 이기붕을 지도자로 선택했고 그들을 전하라는 이름 대신 각하라고 불렀지 않나. 그것이 경무대가 옛 경복궁 내에 자리 잡은 것과 아주 무관한 일일까. 놀랍게도 시민이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신민으로 종복하는 모습은 21세기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번 대선을 앞두고 무식하게 쌈박질하는 영화만 찍어내는 한 감독이 민주당 대선후보를 두고 "진정으로 백성 아픔 어루만져 줄 후보”라고 일컫는 것을 보라. 스스로 백성을 자처하는 우리의 의식 역시 청와대라는 공간에 지배당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물론 청와대의 위치를 바꾼다고 해서 우리나라의 권력구조의 문제점이 단번에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이는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니까.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대통령의 비극이 대한민국에서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며 그러기 위해서는 권력구조와 개헌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대통령의 집무실을 이전하는 것은 정치구조 개편이나 개헌에 비해서는 극히 쉽고 간단한, 그저 당선인의 의지만 있다면 실현될 수 있는 첫 출발이지 않은가. 그러니 장담하건대 지금 청와대 이전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정치구조 개편과 개헌에도 반대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집무실 이전이 불가하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면 아래에 쉽게 쓰인 좋은 글이 한 편 있으니 일독을 권한다.
....지금의 청와대 터는 조선 왕궁인 경복궁의 일부이자 뒤뜰이 있던 자리입니다. 자랑스런 문화유산의 일부입니다. 일제가 경복궁 일부 건물을 허물고 조선총독부 관사를 지었던 곳입니다. 나쁜 의도에서 비롯된 터입니다. 조선총독부 관저, 경무대에서 이어진 청와대는, 지난 우리 역사에서 독재와 권위주의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제왕적 대통령 문화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리고 국민 위에 군림하는 권력기관의 상징이었습니다. 대통령을 국민들로부터 철저하게 격리하는 곳이었습니다. 심지어 대통령 비서실조차 대통령과 멀리 떨어져서 대통령 비서실장이 대통령을 만나려 해도 차를 타고 가야하는 권위적인 곳이었습니다. 그 넓은 청와대 거의 대부분이 대통령을 위한 공간이고, 극히 적은 일부를 수백명 대통령 비서실 직원들의 업무공간으로 사용하는 이상한 곳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대통령은 대통령 비서실 직원들과도 철저히 격리돼있는 실정입니다.
이전에 따른 불편함도 있을 것입니다. 경호, 의전과 같은 실무적 어려움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호와 의전까지도 탈권위주의 시대에 맞게 달라져야 합니다. 잘못된 대통령 문화의 한 장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대통령 문화를 열겠습니다. 기꺼이 국민 속으로 들어가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대통령의 권위라고 믿습니다.
지금의 청와대는 개방해서 국민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때때로 국가적인 의전 행사가 열리면 국민들께 좋은 구경이 될 것입니다. 청와대를 국민에게 돌려드리면, 북악산까지 완전 개방이 가능해집니다. 국민들에게는 새로운 휴식의 명소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이제 대통령 집무실이 청와대라는 이름을 대신할 것입니다. 청와대는 더 이상 높은 권부를 상징하는 용어가 아니라, 서울의 대표적인 휴식 공간을 뜻하는 용어가 될 것입니다.
이로써 특권의 한 시대가 끝났음을 선언합니다.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옵니다. 늘 국민과 함께 하는 새 시대 첫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7년 3월 문재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