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2. 18.

은수미는 무엇을 위해 기저귀를 입었나

이웃한 영국과는 달리 프랑스가 강력한 중앙집권적 왕권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외세의 위협 때문이었다. 인접한 정치세력들은 늘 프랑스의 비옥한 농토를 탐냈고 서유럽의 중앙에 위치한 프랑스는 끝없이 주변 국가들과 전쟁을 벌여야 했다. 그 결과 국왕은 점차 강력한 상비군을 지향하게 되었고 이는 귀족 세력을 억누르는 수단이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외부의 위협은 내부의 저항을 잠재울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따라서 통치자들은 때때로 이를 내부 정치에 활용하기도 한다. 북한이 종종 미국과의 전쟁 위험을 드높이는 것이나 반대로 과거 군사정권 시절 박정희나 신군부가 북한의 위협을 과장하던 것은 모두 내부의 반발을 무마시키고 독재를 강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외부의 적을 이용한 것이다. 이런 것이 비단 과거의 모습일까. 권력자들의 그런 비열한 시도는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민주당의 내로남불은 여기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2016년 2월 24일, 여당이 발의한 테러방지법을 저지하기 위해 민주당 의원들이 필리버스터에 나섰다. 총 38명의 의원들은 장장 192시간에 걸친 연설을 통해 헌법에 보장된 개인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고 목놓아 외쳤지만 그들의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테러방지법은 통과되었다.  이제 시대가 바뀌어 민주당은 여당이 되었고 국회에서 어떤 법도 독자적으로 통과시킬 수 있는 180석의 의석도 확보했다. 당시 필리버스터에 나섰던 의원들 중 상당수가 21대 국회와 지자체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당시 필리버스터에 참여했던 그 누구도 테러방지법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되려 테러방지법보다 훨씬 강력한 검열을 허용하는 n번방방지법 및 인터넷 검열감시법을 통과시켰다.

우리는 한때 자유를 외치던 이들이 등을 돌려 더욱 강력하게 자유를 억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촌극을 보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 17조는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고 명시하고 있으며 18조는 모든 국민은 통신의 비밀을 침해받지 아니한다고 적시되어 있다. 거기에 통신 사업자가 검열하는 것은 개인 간의 메시지가 아닌 게시판과 오픈방 뿐이니 헌법 18조를 위반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여당과 일부 언론의 주장은 기만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왜 더 제한적인 형태의 감시였던 테러방지법을 반대했는가.

과거 민주당은 테러방지법을 막기 위한 필리버스터에 나서며 장시간 연설을 이어갈 수 있도록 성인용 기저귀를 착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의원들 중에는 현 성남시장 은수미도 있었다. 그녀는 김광진 의원에 이어 3번째 주자로 필리버스터에 나서 10시간 18분에 걸친 연설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 사건을 계기로 무명의 비례대표 의원에서 전국구 스타로 떠오른 그녀는 그 유명세를 몰아 이재명의 뒤를 이어 성남시 시장직에 당선되었지만 오래지 않아 국제마피아파 조직원을 운전기사로 두고 자신의 선거캠프 인사들을 성남시 공공기관에 꽂아 넣은 데다 정치자금법 위반 수사기밀을 전달받는 대신 한 경찰관의 청탁을 들어준 혐의로 검찰에 기소되었다. 이 중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혐의는 유죄를 선고받았고 나머지 혐의들에 대한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전 국민의 통신을 감청하는 법안이 통과되는 동안 조폭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대장동을 지나던 그녀에게 다시금 묻겠다, 그날 당신이 입은 기저귀는 무엇을 위한 것이었냐고.*


*실제로 은수미 시장이 당시에 성인용 기저귀를 착용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민주당의 끈질긴 노력을 상징하던 것이 기저귀였기에 은유적 의미로 명시하였다.    



  

합리적인 백신과 합리적이지 않을 자유

합리적인 백신 

투자의 세계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위험, 혹은 리스크라고 부르는 모든 것의 본질은 불확실성을 의미하며 우리가 바라는 초과수익률은 바로 그 미지의 영역으로부터 나온다. 아무리 가치평가 모델을 정교하게 다듬어도 그 불확실성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매 순간 불완전한 정보를 바탕으로 가급적 합리적일 결정을 내리도록 노력한다. 세상은 언제나 불안정하고 우리의 정보는 항상 불완전하다.

그리고 이는 투자뿐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에 적용되는 법칙이다. 백신을 맞을 것인지, 맞지 않을 것인지를 선택하는 일도 그러하다. 우리는 mRNA 방식의 백신에 대해 온전히 알지 못하지만 현재까지 드러난 데이터로만 보면 백신을 맞는 것이 맞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다. 델타 변이의 감염재생산지수는 약 5.08로 최근 6개월간 mRNA 방식의 백신을 접종한 사람의 수가 80% 이하가 된다면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이 코로나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코로나의 치명률은 1-2%에 달하는 반면, 백신접종자 중 사망자들의 비중은 자연사망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심지어 FDA의 통계조사에 따르면 mRNA방식의 백신을 접종한 집단의 사망자(2명)보다 플라시보 약을 투여한 집단의 사망자가(4명) 더 많았지만 이는 자연상태의 사망률과 비슷하다.(링크)

반면 백신은 점막을 통한 감염을 100% 막아주지는 않지만 항체를 형성해 혈관을 통한 감염을 높은 확률로 막아주기 때문에 중증화/치사율을 크게 낮춘다. 따라서 6개월 내에 mRNA 계열 백신을 올바르게 접종한 사람의 치사율은 일반 독감 수준에 근접하게 내려오고 이런 효과는 성인뿐 아니라 12-17세의 청소년에게도 나타나기 때문에 세계 각국 정부는 모든 성인과 청소년에게 백신 접종을 권장하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mRNA가 불완전하고 검증되지 않은 기술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전쟁이 얼마나 과학기술을 빨리 발전시키는지 간과한다. 우리가 4차 산업혁명이라고 부르는 기술들-인터넷 네트워크, 인공지능, 컴퓨터, 무선통신, 원자력 등의 첨단 기술은 대부분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탄생하지 않았나. 그리고 지금 인류는 코로나를 상대로 세계대전을 벌이고 있다. 집계를 시작한 1949년 이후 매년 낮아지던 인류의 사망률은 지난해 처음으로 반등하였는데, 이는 1968년의 홍콩 독감도, 월남전도, 공산권의 기아를 불러일으킨 소련의 붕괴 때에도 없던 일이다. 전 세계에서 공식적으로 약 500만 명, 비공식적으로는 약 1500만 명이 코로나로 사망했는데 연간 사망자로 환산하면 이는 이미 1차 세계대전을 아득히 뛰어 넘어 2차 세계대전에 가까운 수준이다. 주요 선진국들은 국제적으로 공조하여 백신 개발과 생산에 필요한 엄청난 자본과 자원들을 백신 제조사에 우선적으로 공급하였고 그 결과 첫 코로나 백신은 CDC의 예상보다도 몇 달 앞선 2020년 11월에 개발되었다. 이런 전폭적 지원은 임상실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스라엘 정부는 mRNA 방식의 백신을 접종한 900만 국민들의 생체 데이터베이스를 제조사 측과 공유하기로 합의했고 현재 미국에서만 약 2억 명, 전 세계적으로 약 40억 명의 사람들이 백신을 맞았다. 그 결과에 대한 통계도 몇번의 구글 검색으로 쉽게 접할 수 있다.

물론 백신은 완전하지 않다. 그리고 먼 미래에 mRNA 백신의 숨겨진 부작용이 새로 등장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다른 제반여건 역시 변할 수 있다. 하지만 다시 말하건대 세상에 완전하고 확실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이 그렇다고 믿을 뿐이지. 현재까지 수십억 건의 데이터로 미루어 보면 백신을 접종했을때의 이득이 그렇지 않을 때의 이득보다 훨씬 크기에 나는 백신을 맞았고 부스터 샷도 맞을 계획이다**. 만약 검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두려움을 느껴야 한다면 당신은 다이어트 보조식품이나 성형외과의 상담실장 앞에서 공포에 벌벌 떠는 편이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백신사망 검색어 트렌드: 사람들은 기존의 검증된 방식으로 제작된 구 독감백신(20년 10월) 접종시기나 백신 접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던 21년 3월에 백신사망에 대한 검색 빈도가 더 높았다. 이는 백신사망에 대한 두려움이 다분히 비합리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합리적이지 않을 자유

인간은 비합리적인 존재이다. 제네시스의 가성비가 더 나을지 몰라도 우리는 벤츠를 탐하고, 또 별다른 기능이 없는 에르메스의 백을 욕망한다. 그렇기에 정부가 모든 국민들이 완전하게 합리적일 것을 강제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자 비인간적인 조치이다. 우리에겐 합리적이지 않을 자유가 있다. 그 대상이 미국 소고기이든 북한 핵이든 백신이든 간에. 

무엇보다 시민들에게 합리적인 선택을 강요하는 정부는 이제껏 과연 얼마나 합리적으로 행동했나. 전 세계 다른 나라들에 비해 우리나라가 뒤늦게 확진율과 치명률이 동시에 치솟는 것은 명백한 방역시스템의 실패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세 가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하나, AZ와 얀센 백신이 델타 변이에 취약하기 때문에 부스터 샷을 놓기 전까지 위드 코로나에 나서지 말았어야 했고, 둘, mRNA 백신을 맞은 사람들의 돌파감염률이 다른 나라보다 높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교차접종과 제조사의 가이드라인을 어긴 접종이 백신의 효율을 떨어뜨렸으며, 셋, 코로나 발발 이후 2년이 지나도록 중증 환자를 전문적으로 치료할 시설을 충분히 확보하지 않았기에 세계가 리오프닝에 나서는 동안 우리는 끙끙대며 델타변이와 싸우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첫 번째와 두 번째 실수는 방역보다 정치논리를 우선적으로 내밀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내년 3월 대선에 앞서 여당에게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문재인 정부는 여러 차례에 걸쳐 때이른 위드코로나 방침을 발표했고 이미 8월부터 확진자가 폭증하여 불안 조짐을 보였는데도 불구하고 청와대는 강경하게 위드 코로나를 밀어붙였다 이 지경에 이르렀다. 그뿐만 아니라 정부는 상반기에 백신 수급 일정이 원활하지 않은데도 공식 접종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무리해서 2차 접종분을 1차로 전용했다 백신이 모자라 접종 간격을 8주로 일괄 연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은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CDC와 백신 제조사인 화이자-바이오엔텍에 따르면 부스터 샷은 2차 접종 후 최소 6개월 뒤에 맞을 것을 권고하는데 우리나라 질병관리청은 이 기간을 절반으로 단축해 3개월 뒤부터 부스터 샷을 맞도록 권하고 있다. 내가 아는 한 이렇게 빨리 부스터 샷을 맞으라고 권고하는 정부는 오로지 한국뿐이다. 저번에는 백신의 물류일정에 사람을 맞추더니 이제는 정치일정에 사람을 맞추고 있다. 문재인은 이 비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작년 초, 코로나에 합리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던 것은 우리나라 만이 아니었고, 사실 이는 어쩔 수 없던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행히도 일찍이 메르스를 겪은 한국은 나름 합리적인 매뉴얼이 존재했고 확진자의 수가 극소수일 때 그들을 밀접 추적하여 동선을 파악하는 것은 방역에 매우 효과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임기 말년까지 아무것도 이룬 게 없어 실적에 미친 대통령이 여기에 K-방역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확진자의 수가 방역시스템이 추적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자 방역망에는 구멍이 뚫리기 시작했고 일관성이 없던 국경 통제와 방역지침은 확산세를 막는데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질병관리청은 쓸모없어진 기존의 방침을 버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각하가 치적으로 달아둔 K-방역이니까. 그 덕에 우리는 아시아에서 인구대비 일일 확진자가 가장 많은 나라가 되었다.

코로나가 터지자 자유와 인권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던 서구의 많은 나라조차도 계엄령에 가까운 락다운 조치들을 내려야 했고, 각국의 시민들은 방역이라는 공공의 목표가 개인의 자유와 충돌할 때 그 적절한 균형이 어때야 하는지 열띤 논쟁을 시작했다. 위험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마스크를 쓰지 않을 자유가 중요하다는 사람부터, 집단방역이라는 목표를 위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헌법이 허락한 범주 내에 있다는 주장까지 다양한 논의가 오갔다. 하지만 그 가운데 자유도 잃고 방역도 망한 나라가 있다. 바로 대한민국. 그 나라의 대통령이 한 일이라곤 개인의 자유를 무제한적으로 희생시키고, 방역을 핑계로 정부의 권한과 예산을 막대하게 늘리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K-방역의 본질이다.   


*아주 기초적인 옵션평가 모델에서는 이 불확실성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많은 이론들이 그렇듯 이는 어디까지나 가정에 불과하고 금융시장은 불확실성을 완벽하게 소거하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번의 큰 위기로 배웠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6개월 안에 세계 80% 이상의 인구에게 백신을 접종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백신을 맞는다고 COVID-19가 사라질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한다. 계속해서 새로운 변이는 등장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점점 치명률이 낮은 변종이 지배종이 될 것이라고 한다.

2021. 12. 3.

탄넨베르크 전투와 대선

비스마르크 사후 독일은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매우 불리한 입장에서 1차 세계대전을 치르게 되었다. 서부의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동부의 러시아를 동시에 상대해야 했던 독일은 빠르게 영프 연합군을 몰아낸 뒤 동부전선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늘 그렇듯이 무책임한 소망은 잔혹하게 배신당하기 마련이다. 러시아는 독일 수뇌부의 예측보다 빠르게 더 많은 병력으로 독일을 침공했다. 전체 80만 병력 중 약 절반이 북서전선군으로 편성되어 독일의 정신적 고향이었던 동프로이센으로 진격했는데 이를 방어할 독일 측의 병력은 고작 15만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에 당황한 군부는 서부전선의 병력을 차출해서 동부로 파병했지만 병력이 전장에 제때 도착할 확률은 매우 낮았다. 결국 탄넨베르크 인근에서 힌덴부르크 장군이 이끄는 독일 방어군 15만이 홀로 러시아 군과 조우하게 된다.

놀랍게도 이 전투는 독일 측의 압승으로 끝났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승리의 단초는 러시아 지휘부 내부의 불화로부터 나왔다. 러시아군은 전체 병력을 1군과 2군으로 나누어 각각 렌넨캄프와 삼소노프에게 맡겼는데 불행히도 이 둘은 개인적으로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를 알아챈 독일군은 두 장군이 서로 유기적으로 협조하지 않을 것을 알고* 각개격파에 나섰다. 독일군은 고작 1개 사단으로 1군을 견제하면서 나머지 병력으로 전력이 약화된 2군을 포위하여 공격에 나섰고, 군단장 삼소노프는 렌넨캄프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바로 직전까지 격전을 벌인 끝에 전략적 요충지를 점령한 1군은 굳이 무리한 기동을 꺼렸다. 독일군의 예상대로 렌넨캄프가 삼소노프의 요청을 묵살하고 움직이지 않는 동안 독일군은 2군을 섬멸하고 뒤이어 재빠르게 병력을 이동해 1군마저 포위하여 분쇄했다. 서부전선에서 출발한 보충 병력이 도착하기도 러시아 주력 부대를 모두 격퇴한 것이다.  

삼소노프와 렌넨캄프 둘 중 누구에게 이 처참한 패배의 원인이 있을까? 삼소노프는 자신의 2군이 무너지면 나머지도 후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1군이 자신을 지원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판단했을 것이고, 렌넨캄프는 삼소노프가 독단적으로 공세를 취해 포위를 자초한 것이 패배의 원인이라고 주장했을 것이다. 수많은 부대가 얽히고섥힌 전장에서는 이와 같은 내부적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명령을 하달하고 부대 간의 우선순위를 조율할 명령체계가 중요한 것이다. 둘 중 어느 한쪽의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누구에게 명령권이 있었는지 따져봐야 한다. 

지난 몇 주간 야당은 이와 유사한 갈등을 겪고 있다. 삼소노프와 렌넨캄프가 40만의 북서전선군을 둘로 나누어 싸우듯 정권교체를 갈망하던 지지자들도 둘로 나누어 각자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편들고 상대를 공격하고 있다. 하지만 이 논쟁의 핵심은 누가 옳은지가 아니다, 대신 누가 우선권을 갖는지가 핵심이다. 그리고 당헌 74조에 당무우선권을 명시한 국민의힘을 포함하여 모든 정당은 모든 대선에서 대선후보가 한시적으로 당권을 우선적으로 행사하도록 허용하고 있다. 따라서 선준위 인선에 대한 모든 권한은 사실상 대선후보가 가지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도 대선후보에게 있는 셈이다. 내가 문재인의 정치를 반대한다고 해서 문재인의 법을 어기는 것이 정당화될 수 없듯 대선후보가 행사하는 권한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어깃장을 놓는 것은 결코 올바른 처신이라고 볼 수 없다.

과거에도 후보로 선출된 대선주자와 당대표가 충돌을 빚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당권과 대권을 분리하자는 박근혜 전 대표의 주장을 정면 반박하며 당무우선권을 내세웠고 바로 지난 대선 때도 대선 직전 지지율 결집을 위해 홍준표 후보가 정우택 비대위원장의 반발을 묵살하고 당무우선권을 발동해 탈당파의 복당을 허용하고 친박 인사들의 사면을 결정했다. 그런 과거의 사례에 비하면 현재 선대위 구성의 자유는 당무우선권을 논하지 않아도 전적으로 후보의 권한에 속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른 무한한 책임 역시 후보 본인에게 있다. 

다음 대선은 세대와 세대가, 그리고 진보와 보수가, 또 부패한 좌파와 그를 혐오하는 반대 계층이 서로 맞붙는 총력전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야권은 그 도덕적으로 타락한 문재인 정부와 최전선에서 맞서 싸운 검찰총장을 대선후보로 임명했다. 그가 정치적 신인이고 여러 실수도 저지르긴 했지만 그를 최전방 지휘관으로 앉힌 이상 그의 명령체계를 존중해 줘야 하지 않나. 하지만 이상하게도 대중 선거에서 이겨본 적이 없는 이준석과 정치 경험이 가장 미비한 사람들이 가장 앞장서서 그의 정치적 미숙함을 공격하는 아이러니를 보고 있다. 그리고 이제 이들은 훈수를 넘어 적극적으로 깽판을 치고 있다. 그 결과 대선 역사상 처음으로 대선 후보가 선대위도 자기 뜻대로 꾸리지 못하는 것과 당대표가 선거운동을 포기하는 것을 목도하게 되었다. 문재인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드는 동안 이준석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당을 만들었고 이는 두고두고 그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탄넨베르크 전쟁은 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삼소노프는 포위되어 부대가 섬멸되는 것을 보며 전장에서 곧장 자살했고 렌넨캄프는 도보로 달아날 정도로 처참하게 패배하여 귀국했지만 이등병으로 강등된 뒤 군적을 박탈당했다. 반면 이 경이적인 승리를 이끈 힌덴부르크는 국민적인 영웅으로 등극해 전후 독일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렇다, 약 3천만 명의 인명피해를 낳은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에게 권력을 이양한 바로 그 파울 폰 힌덴부르크의 탄생이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히틀러

  

*과거 삼소노프와 렌넨캄프는 러일전쟁에 참전했는데 당시 탄광을 지키던 삼소노프가 레넨캄프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부하는 바람에 그의 부대는 악전고투 속에 비참하게 패퇴해야 했다. 패전 후 포로들을 교환하던 펑텐 역에서 렌넨캄프를 마주친 삼소노프가 먼저 주먹을 날렸고 사병들이 보는 가운데 두 장교는 진흙탕에서 몸싸움을 벌였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일본군에 파견된 한 독일군 대위가 이 현장을 목격했는데 그가 바로 탄넨베르크 전쟁에서 작전참모를 맡았던 막스 호프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 수뇌부는 1군과 2군의 공조가 원활하지 않을 것을 확신했고 그래서 이렇게 과감한 작전을 편 것이라고 한다. 물론 이 주장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

**이 글을 작성하는 동안 윤석열 후보와 이준석 대표 간의 회동에서 김종인을 총괄선대위원장직으로 선출하고 사실상 선거의 전권을 줬다는 보도가 올라왔다. 부디 대선까지 윤석열 후보의 정치적 미숙함과 이준석 대표의 찌질함은 더이상 보지 않기를 바란다.

2021. 12. 2.

쪼다 이준석

차원이 다른 찌질함, 할 말을 잃었다.

2021. 11. 22.

넷플릭스 지옥, 그리고 잡담들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가 그랬나, 주입식 교육에 익숙한 한국인들은 다양한 컨텐츠를 선보일 수 없을 것이라고. 아마 그 말을 넷플릭스 CEO가 들었다면 소리내어 HAHA 웃었을 것이다. 한국 감독과 제작진은 DP에 이어 오징어게임이라는 넷플릭스 사상 최고의 흥행작을 낳았고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켰다. 그런 오징어게임을 2위로 밀어낸 것은 지난주 공개된 지옥이었다. 

사실 드라마의 연출은 다소 미흡하고 일부 에피소드들의 개연성은 떨어진다, 하지만 연상호의 스토리텔링의 정수는 특수한 상황에서 등장인물들이 겪는 아이러니와 모순을 그리며 빛을 발했다. 두 아이를 키우는 미혼모 박정자는 난데없이 찾아온 죽음을 행운이라고 부른다. 하루 종일 일해도 사랑하는 아이들을 제대로 돌볼 수가 없는, 그런 비루한 삶에 찾아온 행운. 자식들을 위해 힘겨운 삶을 이어가던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 죽음도 기꺼이 받아들인다. 자신의 죽음을 중계하는 대가로 30억을 주겠다는 냉혈한들에게 굽신거리며, 울부짖는 아들을 되려 혼내는 그녀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연필 한 자루 훔치지 않고 착하게만 자라온 정진수. 하지만 신은 그에게 지옥을 선고한다. 그것은 신의 장난일까, 장난의 신일까. 우리가 도덕과 규율을 따르는 것은 그것이 정의롭고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벌의 기준이 공정하지 않다면 어떨까. 학창 시절 수학선생님이 "오늘이 21일이지? 21번 나와서 이 문제 풀어봐"라고 외칠 때 21번은 자신이 정신봉으로 맞을 그날의 운명을 결코 공정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정의란 그래서는 안된다. 그래서 정진수는 결심한다. 신의 장난을 살짝 비틀어 정의로 만들겠노라고. 그렇게 그는 예정된 죽음을 받아들인다. 무작위로 찾아온 자신의 죽음이 그래도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데 이바지했다고 믿으며. 

형사 진경훈은 법과 질서를 믿는다. 자신의 아내를 무참히 난도질한 범인이 10년 만에 심신미약으로 풀려났지만 남편은 그에게 복수하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법과 질서를 믿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필사적으로 정진수를 추적하고 의심한다. 왜냐하면 그는 진경훈이 믿는 법과 질서를 위협하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죽음을 목전에 둔 정진수는 그를 양자택일의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당신은 이제 법 혹은 질서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고. 법을 택하면 사회적 질서가 무너질 것이고 질서를 택하면 자신의 신념을 지탱해 온 법을 어기게 된다. 정진수는 그에게 자유 의지에 따라 선택하라고 했지만 사실 애초에 그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법이 하나 뿐인 딸을 심판하게 둘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신이 정진수에게 잔인한 장난을 친 것처럼 신의 반열에 오른 정진수 역시 진경훈에게 짓궂은 장난을 던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를 처참하게 죽인 살인자를 산 채로 불태운 딸, 진희정. 그녀가 살인자의 단말마가 울려 퍼지는 한 가운데 울며 웃는 장면은 소름 끼칠 정도로 슬펐고 또 아름다웠다.


*               *               *

신의 고지를 받은 희생자들은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숨는다. 가장 고통스러운 처지에 놓인 것은 본인이지만 사후 가족들이 겪을 핍박과 박해를 피하기 위해 그들은 달아난다, 그리고 증발한다, 그리고 삶의 마지막을 아무도 없는 산골짜기에서 외로이 맞이한다. 가족도 친구도 없이 홀로. 

그들을 보며 에이즈환자들을 떠올렸다. 후천적 면역결핍증이 성적으로 방종하거나 동성애자, 마약중독자들 사이에서 퍼진다고* 믿는 대중들의 시선 때문에 양성 판정을 받은 이들은 종종 숨곤 한다. 하지만 모든 환자들이 지옥에 갈 죄를 지어 걸린 것은 아닐 것이다. 때때로 억울하게 병에 걸린 이들도 있을 것이고 그중에는 갓난아기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들을 도덕적으로 타락했다고 낙인찍으며 특정 종교는 그들의 존재 자체를 죄악으로 치부한다. 

한번 고지를 받으면 언제고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그들. 그리고 죽음의 과정은 매우 고통스럽고 외로우리라. 또 죽음 너머의 업보는 온전히 가족들의 몫이다. 주변의 따가운 시선과 사회적 매장, 그리고 과격단체의 폭력은 초자연적인 존재나 HIV 바이러스가 아닌 우리 인간들이 같은 인간에게 가하는 폭력이나 마찬가지이다. 지옥은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 누군가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               *               *

공교롭게도 드라마가 공개된 시점에 한국에서 끔찍한 사고가 발생했다. 위층의 남자가 아랫집 여성들을 대상으로 성추행과 협박을 거듭해 경찰이 출동했는데, 남편과 남자 경찰이 1층 현관으로 내려간 틈을 타서 범인인 위층 남자는 아래로 내려와 아내의 목을 칼로 찌르고 그 칼로 딸 역시 난도질했다. 그 자리에 한 여경이 있었지만 그녀는 달아났고 범인을 제압한 것은 1층에 있던 남편이었다. 드라마 내의 진경훈 형사가 겪은 것과 비슷한 사건이 실제로 벌어진 것이다. 

드라마의 후반부 내내 이어진 김현주의 액션 신이 매우 불편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화면에서 신체적 전성기를 훌쩍 넘긴(작중 시점은 2027년) 여자 변호사가 삼단봉을 휘두르고 테이저 건을 쏘며 신체 건장한 깡패들을 여럿 제압하는 동안 우리의 현실에서는 훈련을 받은 젊은 20대 여경 하나가 범인을 두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고 말았다. 드라마와 현실 사이에는 크나큰 괴리가 있다. 일부 PC 주의자들은 성별 간의 차이가 전적으로 사회문화적 학습에 기인한다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의도적으로 컨텐츠에서 남녀 간의 성 역할을 뒤섞으라고 압박하고 있고 이에 굴복한 현대의 창작자들은 개연성을 무너뜨려가면서까지 액션신을 여성 캐릭터들로 채우고 있다. 

이는 또 다른 폭력이다. 그들이 원더우면 아류의 히어로 영화들을 한 해에 수천 편을 쏟아낸다고 해서 평균 여성들의 근력이 자동으로 향상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미디어를 통해 자신들의 왜곡된 이념을 대중에게 주입한다, 그리고 그에 맞추어 현실을 개조하려고 한다. 여경의 채용 확대를 위해 체력검정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내려갔으며 그로 인한 수많은 문제점들은 묵살되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피가 튀고 뼈가 부러지는 것은 가상의 이미지에 불과하지만 자신들의 비틀린 생각을 강요하는 폭력은 현실이다. 어느 쪽이 더 해로울까. 

이 비극은 [여경] 때문에 벌어진 것이 아니다. 그 자리에 장미란이나 여자유도 메달리스트 정보경 선수가 있었다면 다른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참사를 부른 것은 자질이 부족한 사람을 여자라는 이유로 해당 보직에 배치한 잘못된 시스템이다. 그리고 공권력이 힘을 잃으면 가장 먼저 희생되는 것은 약자들이다. 그 이념주의자들의 그런 왜곡된 믿음이 인천 논현동에서 두 명의 여성 피해자를 낳았다. 역설적으로 결과적 평등을 외치는 여성주의의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여성이었던 셈이다. 



*나는 그런 선입견이 사실인지 아닌지 모른다. 

2021. 11. 18.

여의도 정치를 반기는 유권자는 없다

한국 정치에서 2021년은 그 이전 해와는 매우 다른 한 해로 기억될 것이다. 21대 총선에서 처참하게 참패한 야당은 절치부심하여 김종인과 여권 인사들을 영입하고 비주류였던 30대이자 바른미래당 계열인 이준석을 당 대표로 내세운 결과 보궐선거에서 압승하고 내년 대선을 앞두고 오차 범위 밖 지지율을 확보하는 등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그 중심에 윤석열과 오세훈이 있다면 그 반대편에는 마치 폭등하는 주식시장에서 혼자 하한가를 친 주식처럼 얼굴을 한껏 찌푸린 두 남자가 있다. 바로 홍준표와 유승민. 무엇이 그들을 정치 여정을 셀트리온처럼 시퍼렇게 물들였는가. 

오세훈과 유승민, 그리고 윤석열과 홍준표의 정치 여정은 매우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오세훈은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계기를, 유승민은 박근혜 탄핵을 주도하며 보수당의 몰락을 촉발했고 둘 다 바른미래당의 주축이었다. 홍준표와 윤석열은 둘 다 타협하지 않는 꼬장꼬장한 강골 검사인 것도 똑 닮았고 두 사람 모두 문재인을 몰아붙여 지지자들의 사랑을 얻었다. 하지만 각자의 운명은 너무나 달랐다. 오세훈이 10년 만에 서울 전 구에서 과반을 득표하며 서울시장직에 복귀한 것과는 정반대로 유승민은 당내 경선에서 한 자리수 지지율로 탈락했다. 홍준표는 이변을 일으켜 경선 초기의 격차보다 근소한 차이로 2위에 올랐지만 자신이 당 대표를 두 번 그리고 대선 후보를 한번 맡았던 당에서 한때 문재인의 칼이었던 남자를 상대로, 더욱이 당원 투표에서 버림받아 패배했다. 

유승민과 홍준표의 운명을 망친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여의도식 계산 때문이었다. 유승민은 21대 총선에서 험지 서울 대신 연고지인 대구에 출마하겠다는 의사를 여러 차례 밝혔지만 TK의 유권자들은 냉담했고, 그가 주판을 꺼내 승산이 없다는 계산을 마쳤을 때 비로소 유승민은 불출마 선언과 함께 자유한국당과의 합당을 결정했다. 선거를 앞둔 미래통합당은 그의 결정을 높이 평가한다고 했지만 그 말을 누가 믿을까. 함께 탈당을 결정한 김무성이 이미 자한당으로 복당했고 자신의 의석마저도 확보할 가능성도 희박했는데. 그리고 같은 선거에서 홍준표 역시 당의 수도권 험지 출마 제안을 거절하고 탈당해 보수의 안전지대인 대구 수성구에 출마했다. 한때의 대선후보가 탈당해서 안전빵이나 노리는 꼴이라니, 마음 졸이며 야당의 의석 수 하나하나를 손으로 세어가던 지지자들이 그 모습을 결코 좋게 볼 리가 없었다.     
 
반면 오세훈과 윤석열은 여의도식 정치가 가장 기피하는 길을 걸었다. 오세훈은 87년 6공화국이 들어선 이래 단 한 번도 보수가 의석을 확보하지 못한 광진구 을에, 그것도 상대가 정치신인 고민정이라 이겨도 본전이고 패배할 경우 엄청난 조롱거리가 되어 재기가 불투명한데도 불구하고 그 독배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그리고 임기가 고작 1년 남짓한 서울시장 보궐선거에도 출마했고, 끝끝내 그는 화려하게 부활했다. 윤석열 역시 박근혜 정부의 인사들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잡아넣은 덕에 문재인과 여당 지지자들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기수를 뛰어넘어 검찰총장의 자리에 올랐으나 그는 전임/후임자와는 달리 청와대에 영합하지 않고 여당 관계자들의 비리를 원칙대로 수사해 조국과 추미애의 정치인생을 끝장냈다. 이 두 사람에 대한 평가는 엇갈릴 수 있으나 오세훈과 윤석열이 편하게 갈 수 있는 길을 마다하고 험한 길을 택했다는 사실에 이견을 낼 사람은 없을 것이다. 즉 그 둘은 여의도의 정치인이라면 결코 택하지 않을 선택을 한 사람들이다.

연애 경험이 부족한 모태솔로들은 언제 어디서나 이성의 혼을 쏙 빼놓는 연애의 기술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녀는 바보가 아니다. 당신이 잔머리를 굴리고 어장관리에 나서는 것을 바라보는 그녀들의 눈빛은 차갑게 식기 마련이다. 그리고 홍준표와 유승민이 유권자들을 상대로 픽업아티스트를 자처하며 여의도의 셈법을 따지고 주판을 튕기는 동안 오세훈은 묵묵히 당의 험지 출마 요구에 응했고 윤석열은 자신에게 검찰총장이란 영예를 안긴 문재인을 상대로 전력을 다해 싸웠다. 무엇보다 보수층 지지자들이 윤석열을 택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이 과반을 훌쩍 넘고 여당이 폭주하는 동안 유승민은 잠행에 들어갔고 홍준표는 자신의 금배지를 찾아 떠났으며 중도층은 여전히 민주당에 표를 던졌다. 그동안 보수 유권자들과 서민과 김경률, 권경애, 진중권과 같이 문재인 정부와 대립해 온 인사들은 외로운 싸움을 계속해야 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묻는다, 그때 당신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지난 19대 대선에서 야당의 핵심 지지층은 홍준표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고 그 결과 탄핵정국에서 불리한 상황에서도 홍준표는 안철수를 제치고 2등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홍준표는 자신의 지지자들의 마음을 얻는데 실패했다. 바로 그놈의 여의도식 정치 때문에. 그리고 불과 4년 뒤 정치 지형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홍준표를 가장 지지하던 6070대는 그를 버리고 윤석열을 택했고 반대로 문재인을 가장 지지했던 2030대 유권자들은 당내 경선에서 홍준표를 택했다. 한때의 동지들이 적이 되고 한 때의 안티들이 팬이 된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단 하나의 질문이다. 우리가 가장 절박하게 싸우던 그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는가.

그리고 진보도 보수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윤석열이 아니었다면 지금 중도층이 가장 선호하는 대선주자는 바로 조국이었을거라는 사실이다. 

*               *               *

이와 같은 논리는 이준석에게도 적용된다. 그는 혁신 보수를 표방하지만 그의 정치는 결코 새롭지도, 젊지도 않다. 그의 정치는 철저하게 당내 영향력을 넓히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고(링크) 세련되지도 못하다(링크). 그는 마치 모범생이 공식을 외워 수학 문제 풀어내듯 철저하게 여의도식 정치를 하고 있는데 과연 새 인물이 구 정치를 재탕하는 것을 새 정치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의 기대와는 정 반대로 그가 표방하는 정치는 그가 들고 온 비단 주머니의 워딩과 디자인처럼 너무나 올드하고 구태의연하다.

하지만 그의 진짜 문제는 뚜렷한 철학이 없다는 점이다. 경선 최종라운드에 오른 네 명의 후보는 모두 확고한 철학이 있다. 윤석열은 진영논리에서 벗어난 법치주의, 홍준표는 정통보수정치, 유승민은 우파적 경제/안보와 진보적 복지, 그리고 원희룡은 보수의 틀 안에서 민주화를 추구하고 있다. 하지만 이준석의 정치 철학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준석의 모호한 정치철학은 그의 삶의 궤적과도 이어져 있다. 애초에 한 사람의 가치관과 신념은 그 사람이 걸어온 삶으로부터 나오지 않는가. 금융권에서 트레이딩으로 살아남은 나와, 삼성전자에서 10여년을 일해온 친구, 외길 검사의 길을 걸어온 선배, 그리고 외교가에서 일하는 후배 등 각자의 삶에서 이룬 성취는 현재의 가치관을 대변한다. 우리가 정치인들의 말보다 과거의 행적에 집중하는 이유이다. 이준석은 과연 어떤 길을 걸어왔는가. 박근혜의 키즈로 정치를 시작하기 전 그의 이력은 거의 전무하다. 그리고 정치에 뛰어든 이래 그의 가장 큰 자산은 바로 젊음이었고, 그는 이를 무기로 자신을 받아준 정치인들을 무차별로 공격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박근혜, 그리고 안철수 이후 당내의 여러 중진들, 심지어 대선 후보를 공격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의 정치철학은 무엇일까? 바로 여의도 정치 그 자체가 아닐까. 다른 정치인들이 자신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여의도의 셈법을 따지지만, 사회생활의 첫 발을 여의도에서 내디딘 이준석에겐 여의도는 하나의 배틀그라운드이고 정치공학은 그저 그 서바이벌의 룰일뿐이다. 왜 살아남아야 하는지, 살아남아서 무엇을 할 건지 비전도 철학도 없다. 다만 그 게임을 열심히 플레이할 뿐. 

지난 5년간 우리는 삶에서 정치 외에 아무런 사회경험이 없는 운동권 인사들이 어떻게 행정과 입법을 망가뜨렸는지 여실히 보았다. 그리고 우려스럽게도 이준석은 그들과 대단히 유사한 경로를 걷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를 지지하되 비판적인 시각을 놓아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2021. 10. 31.

과연 누가 부채를 늘리고 있을까: 너나 잘하세요

태초에 아담과 하와가 있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선지 몰라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대차대조표를 작성할 회계 능력을 함께 주었다고 한다. 단둘이 있는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자신의 갈비뼈를 현물로 출자하여 하와라는 독립법인을 설립하였지만 의결권은 가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와는 선악과를 우연히 습득하여 자신의 대차대조표에 사과라는 자산을 반영했다 아담에게 무상으로 지급하였고 아담은 이를 이전소득이라 기록했다. 그리고 화폐경제가 시작되었다. 둘 사이에서는 빈번하게 화폐가 오갔으며 그들은 자신의 대차대조표에 금융자산과 금융부채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밖에 없는 에덴동산에서 그 둘의 순부채가 동시에 증가할 수 있을까?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누군가의 부채는 다른 이의 자산이기에 한쪽의 부채가 증가했다면 다른 한쪽의 자산도 함께 증가하게 된다. 그렇기에 둘의 순 부채가 동시에 증가할 수는 없다. 에덴동산에 아담과 하와가 있다면 한반도에는 정부와 민간이 있다*. 그런데 그들의 거래내역을 뜯어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왜냐하면 정작 부채를 급격하게 늘리고 있는 것은 민간이 아닌 정부며, 사실상 정부부채를 충당하는 것은 가계의 예금이기 때문이다.** 작년 한 해동안 가계부채가 급격하게 증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예금과 채권 투자 잔액은 더욱 빠르게 늘어 약 285조가 증가했고, 그 결과 순부채는 약 120조가 감소했다. 반면 정부부채는 약 120-240조***가 늘었는데 과연 무분별하게 부채를 늘리는 쪽은 누구일까?  

따라서 진심으로 높은 부채비율이 걱정됐다면 정부는 국민들을 겁박할 것이 아니라 반성문을 써야 했다.(비록 필자는 코로나 기간 동안 강력한 정부 지출을 지지하지만) 하지만 우습게도 우리는 급격하게 순부채를 늘리는 정부가 순부채를 줄이는 가계를 상대로 부채가 과도하다며 대출을 금지하는 장면을 목도하고 있다. 새로운 수장이 이끄는 금융위는 이두박근에 힘을 가득 주고 장첸을 쥐어박던 마동석처럼 폭력적으로 은행 창구의 셔터를 쾅 하고 닫으면서 무분별한 부채증가를 막아야 한다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고 있다. 하지만 친절한 금자씨가 만약 금융시장에 대한 이해도 깊었다면 금융위원회 로비를 찾아가 이렇게 외치지 않았을까? 너나 잘하세요. 

만약 채권자가 돈을 융통하지 못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응당히 채무자의 자금을 회수할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채권자는 가계고 채무자는 정부다. 그러니 정부의 펀딩이 원활하게 될 리가 없다. 채권시장 관계자들의 말에 따르면 한국은행은 이달 들어 여섯 차례의 입찰 중 다섯 번이나 발행 예정액을 채우지 못했고 국고채의 발행을 담당하는 PD들의 어려움도 가중되고 있다고 한다. 자기의 전주의 돈줄을 죄는 정부의 바보 같은 행태가 당분간 바뀌지 않을 것이니 이와 같은 정부의 자학적 슬랩스틱 개그도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돈을 빌린 채무자가 돈을 빌려준 채권자 보고 빚좀 내지 말라고 윽박질러놓곤 다음날 다시 찾아와 돈 좀 빌려달라고 애걸하기를 반복하는 것이 최근의 채권시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부채로 유지되는 경제를 바꾸어야 한다면서도 내년에도 대규모의 채권 발행을 예고한 멍청한 정부가 있고, 반대쪽엔 대출이 막혀 중도금과 전세금을 구하기 위해 자금을 인출하는 가계가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 애 먼 고생을 반복하다 결국 삼삼오오 모여 새빨개진 얼굴로 말없이 담배만 뻑뻑 피우는 채권부서 친구들이 있다. 정부는 유동성을 줄여 부동산 시장을 안정시키려고 하지만 공급이 부족한 특정 재화의 가격을 안정시키겠답시고 전체 유동성을 죄는 것은 채권시장 뿐 아니라 주식시장과 내수, 특히나 코로나로 재무구조가 크게 악화된 서비스업과 자영업자들에게 사약이나 다름없으리. 

지금이야 위통약을 집어먹는 것이 채권 담당자들 뿐이겠지만 얼마 안가 더 많은 사람들이 제산제와 아스피린을 찾게 될 것이다. 그들 모두에게 내 작은 위로를 건넨다. 부디 그대들의 고통이 오래가지 않기를.



*외국인도 있지만 편의를 위해 제외한다.
**이런 현상은 미국과 유럽을 포함한 거의 대다수의 나라에서도 발생했다.
***연금충당부채나 지방공기업을 포함하느냐에 따라 집계가 약간씩 다른데 순수정부부채만 계상할 경우 약 125조, 광의의 부채를 모두 포함할 경우 240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