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 25.

조선인들의 후예는 어떻게 기억을 왜곡시키는가

앞서 두 편의 글을 통해 특정 세대를 이해하려면 그 세대가 겪어온 역사를 함께 반추해보는 시각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역사라는 것이 각도를 달리해서 보면 다른 것들이 보이기 마련이니까요.
 
그런 면에서 이번엔 한국인들에게 가장 예민한 주제를 다뤄보겠습니다. 바로 우리들이 어떻게 일제시대의 기억을 왜곡하는지를요. 글을 읽고 나면 거세게 반발하는 분도 계실 터이고 식민사관, 혹은 일본의 대변인이냐고 비판, 아니 욕을 하실 분도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굳이 그런 논쟁을 벌이면서까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이 기억왜곡이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2019년 오늘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직계는 아닙니다만 제 큰할아버지가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셨던지라 역사관이 이상한 집에서 자란 것도 아니고, 또 저 역시 집안 어른들께 일제의 만행을 구전으로 전해들을 때마다 분노했던 한국인 중 하나입니다. 따라서 성인이 되고 다양한 사료를 접하면서도 현재와 같은 시각을 가지기까지 정말 많은 내적 갈등을 거쳐야 했습니다. 아래 주장에 대해 여러분들이 반박하고 화내시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의 저 역시 그랬을테니까요. 하지만 이 문제 만큼은 그때의 분노를 잠시 누르고 다시 침착하게 바라보려고 합니다. 부디 여러분들도 그리 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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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1991년에 방영된 여명의 눈동자라는 드라마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일제시대부터 6.25에 이르기까지의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하는 이 드라마는 비극의 역사를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그려낸 대하드라마로 당시 무려 5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크게 히트했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요새 방영됐다면 시청률 대박은 커녕 엄청난 파란을 야기하며 시청자 게시판을 악플로 도배한 채 조기종영했을 것이다. 이 드라마엔 병사들과 성관계를 하고 난 뒤 받은 군표를 모아 고향에 땅을 사겠다는 위안부나, 술에 취해 위안소를 찾는 조선인 병사, 생체실험 전문 731부대에서 조선인 마루타들을 관리하는 조선인 군인과 같은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재작년에 영화 군함도가 개봉될 당시, 필자의 눈에는 이 영화가 충분히 민족주의와 쇼비니즘으로 점철되어 있었는데도, 패배의식을 가진 조선인들이 등장하고 친일부역자들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네티즌들이 감독의 역사인식을 맹렬하게 비난했던 것을 생각하면 2016년의 대중들과 1991년의 시청자들 사이에는 상당한 간극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대체 그 25년동안 우리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답은 바로 한국인 구성이 바뀌고 있다는 데에 있다. 추산해보면 1991년 당시에는 일제시대에 일본인으로 태어난 한국인들이 전체 인구의 약 30%를 차지했지만 이 비율은 오늘날 한자리 수에 불과하다. 여기에 일제시대를 간접 경험했던 전후 베이비붐 세대를 포함하면 그 비율은 훨씬 더 벌어질 것이다. 즉 일제시대를 겪지 않은 국민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한국인 집단의 기억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그 변화의 방향이 역사적 사실과 점점 멀어지는 데에 있다. 단언컨대 우리의 기억은 왜곡되고 있다.
 
우리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2천만 조선인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변함없이 매 순간 한국인들의 독립을 염원했다고 믿고 싶지만 실상은 꼭 그렇다고만 볼수는 없었다. 일본인들이 1919년 3.1운동을 제압한 후 문화통치를 펼치며 한반도를 빠르게 근대화하자 조선인들은 일본의 헤게모니를 시나브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왜놈의 지배는 민족의 자존심에 굴욕을 안겼지만 동시에 구체제를 박살내고 조선을 빠르게 발전시켜 조선인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켰다. 한일합방 후, 총동원령이 내려진 1938년 이전까지 조선인들의 농업생산량, 공업생산량, 평균신장, 평균수명, 문해율은 빠른 속도로 개선되었고 이는 가장 민족주의적인 학자들도 부정하지 않는다. (물론 그들은 이 발전이 식민화의 과정에 따른 부산물일 뿐이었고 또 41-45년에 실시된 가혹한 수탈과 공출로 경제가 후퇴했음을 지적한다-이 또한 사실)
 
일본의 목적이 무엇이었던 간에 어쨋거나 1910년부터 1940년까지 30년간 조선은 빠르게 발전했다. 슬프게도 우리는 인간의 신념이 물질의 풍요 앞에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안다. 조선인들은 빠르게 일제에 동화되어갔고 총독부의 강요 없이도 진정한 의미의 내선일체를 요구하는 조선인들은 늘어갔다. 우리는 조선총독부를 일제의 무력통치기관이라고만 알고 있지만(사실이지만) 반대로 일본의 내각에서는 조선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기구이기도 했다. 일례로 총독부가 1929년 창씨개명 계획을 본국에 제출하자 일본 본토에서는 "외모도 비슷한데다 일본말도 완벽하게 하는 조선인들이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바꾸면 진짜 일본인들과 구별이 안된다"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심지어 훗날 일본의 총리에 오를 정도로 입지가 탄탄했던 사이토 마코토 총독조차도 본토 내각의 반대로 창씨개명을 성공하지 못했다.(이 요구는 전쟁에 조선인들 본격적으로 동원하기로 결정한 1940년대에 통과되었다.) 또 대만총독부와는 달리 조선총독부는 패망 직전까지도 재정적으로 자립하지 못하고 본국정부의 지원을 받았는데 이는 일본인들의 조선 진출을 위해 세제해택을 주는 동시에 피지배인들의 반발을 누르기 위해 조선인에게는 더 낮은 농지세를 매겼기 때문이다.(일본인 3% 조선인 1.3%**) 이에 대한 보완책 중 하나로 총독부는 조선의 양곡을 일본으로 수출할 계획을 세웠다. 우리 역사에는 이를 강압적 수탈로 기록하지만 일본 본토의 쌀 시세가 30% 더 비쌌던지라 이는 조선인들의 수입을 크게 개선했던 것은 사실이다. 당연히 일본 본토에서는 농민들을 중심으로 반발이 심했지만 이 역시 총독부가 밀어붙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군사적 성공은 조선인들의 민족적 자긍심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당시 여러 근대사학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193년 일본인들이 남중국해에서 생포한 영국과 미군 포로들을 잡아다 한성에서 행진시켰더니 길거리에 수많은 조선인들이 나와 감격하며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의 눈엔 일본인이 이룬 군사적 성과에 왜 조선인들이 감격하냐고 의문을 가질지 모르지만 이는 당시 조선인들 사이에 내선일체 정책이 어느정도 스며들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럴만도 한게 1910년 생 조선반도 출신 김말똥의 경우 태어날 때부터 일본신민으로 교육받고 자라지 않았던가.

게다가 일본은 조선인에게 일본인에 준하는 2등시민의 지위를 주었다. 2등이란 위치는 1등에 비교하면 기분 나쁜 자리지만 3등, 4등보다는 나은 자리 아닌가. 물론 차별이 공기처럼 만연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일제가 중국인들이나 동남아 피지배인들에게 강제한 법적 지위에 비하면 조선인들은 일제의 헤게모니 아래서 그래도 상위층에 속하는 집단이었다. 이는 우리가 의도적으로 주목하지 않는 만보산 오보사건 등으로 촉발된 화교 배척운동(실상은 학살) 에서도 들어난다. 만주에 진출한 조선인들과 현지 중국인들 간의 충돌이 있었는데 이때 조선 현지 신문들이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오보를 낸다. 이를 보고 분개한 조선인들은 중국인들에게 대대적으로 테러를 가하는데 이때 누적된 조선인들의 반중 감정은 이후 일본이 중일전쟁을 수행하는데 하나의 자산이 된다.**
 
이를 보면 많은 조선인들이 일제 치하 아래서 물질적 풍요를 누리거나 일부는 되려 일본의 헤게모니를 적극 활용해서 자신의 자긍심을 높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금의 관점에서는 피가 거꾸로 솟을 일이지만 우리는 구한말 조선인들의 패배의식을 기억해야한다. 자력으로 근대화에 성공하지 못하고 상국 청나라가 서양의 군대에 굴욕적으로 무릎꿇고 식민지로 전락하던 것을 목도한 당시 조선인들의 관점으로 시대를 바라보자. 그들에게 "자력으로 근대화에 성공했어야지!"라는 일갈은 아무 의미가 없는 공허한 외침이다. 고종이 자기 손으로 김옥균의 갑신정변을 엎었을 때 그 가능성은 이미 사라졌으니까.(사실 필자는 애초 그 전부터도 가망이 없었다고 보지만) 조선인에게 남은 선택은 아이가 아프면 굿이나 하던 1910년 이전의 미개한 조선을 그리워하거나 아님 일제체제에 협조해서 근대화를 이루거나, 그 둘 밖에 없었다.

35년이라는 시간은 정말 긴 시간이다. 아마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84년생 이하)은 그 35년의 시간을 아직 겪어보지도 못했을 지 모른다. 게다가 그 35년 중 마지막 4년을 제외한 나머지 31년의 기간 동안 지배체제가 지속적 발전을 가져다 줬다면, 정말 깨인 민족주의자나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을 가진 소수를 제외하면 어떠한 형태로든 일제의 통치 시스템에 적응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1991년의 시청자들 중 다수는 이런 현실을 기억하던 사람들이었다. 드라마를 보며 그들은 그랬을 것이다. "저 쳐죽일 놈들, 멀쩡한 아녀자를 위안부로 속여서 끌고가? 쯧쯧 근디 뭐 어쩌겠어 혀깨물고 그냥 죽을수도 없고. 이왕 그리된 거 군표라도 모아 부자로라도 귀향해야제" 혹은 "어케 동포들을 마루타로 다룬디야.. 하지만 그렇다고 나가 군복 벗고 그 실험체 중 하나가 될순 없잖여. 산 사람은 살아야지.." 하지만 25년의 시간이 흘러 일제를 겪었던, 혹은 간접적으로 경험했던 사람들은 점차 역사의 지평 저 너머로 사라져가고 스마트폰 세대가 여론을 주도한다. 이 2016년의 대중은 그 시대에 대해 외국인 만큼이나, 아니 사실 외국인보다도 더 무지하다. 단지 조선인이 같은 조선인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일본인에게 아첨하고 달라붙는 신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영화에 별점 테러를 가하며 감독의 역사인식을 힐난한다. 창피해서 감추고 싶은 기억은 한 세대의 죽음과 함께 대중의 기억 속에서 실제로 지워져가고 안락한 삶을 누리는 현대 한국인들은 우리의 도덕으로 조선인 생존자들을 재단한다. 그 사이에 대한제국과 대한민국 만큼의 격차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망각한 채.
 
사실 이런 기억왜곡은 1945년 해방부터 시작되었다. 동아시아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은 한 외국 친구는 필자에게 늘 일제시대를 colonial era라고 번역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로 삼은 것이 아니라 합병한 것이니까. 그럴 때마다 나는 "일본은 조선을 합병했지만 일본인들과 동등한 지위를 준 것은 아니니 실제로는 식민지라고 볼 수도 있다"며 내 어휘선택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앞서 지적한대로 일제가 타 식민지 국가들과 조선을 대하는 태도는 분명 달랐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한국인들이 역사를 주체적으로 기록하게 되자 별 이견 없이 지난 35년을 식민지배로 격하해서 기록했다. 이게 더 자존심 상하는 것 아닌가 싶지만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다. 식민지배는 당시 조선인들의 수동성을 강조하는 말로 일제와 우리를 철저하게 분리할 수 있지 않은가. 즉 나는 그 배경에 조선인들이 일제 지배에 일부 협조한 역사를 부정하고 철저하게 피해자의 입장으로 역사를 써내려가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있다고 본다.****
 
해방 75년의 역사는 어찌보면 우리의 기억을 왜곡해 온 역사이기도 하다. 이 왜곡의 노력은 민족 전체 뿐 아니라 개인 차원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2005년 당시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이 다음 대선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인 박근혜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 친일청산법을 도입했을때 새누리당 의원들 뿐 아니라 여당의 몇몇 핵심인사들이 친일후손임이 드나 크게 역풍을 맞았던 적이 있다. 열린우리당 의장 신기남 의원의 조부는 드라마에 늘상 등장하는 악질 조선인 순사였으며 친일청산법을 발의한 김희선 의원의 아버지도 친일파였으니 정작 이 법이 통과되면 여러 여당정치인들의 정치생명이 끝장날 터라 해당 법안은 파기되었다. 물론 친일파 후손들이 열린우리당에만 포진했을리는 절대 없다. 또한 앞서 언급한 정치인들이 뻔뻔해서 친일후손임을 숨기면서 친일청산법을 도입한 것도 아니다. 그저 본인들도 아버지 할아버지들이 일제시대에 무엇을 했는지 잘 몰랐을 뿐이다. 비슷하게 연예인 강동원도 조부가 친일파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사과하지 않았나. 이 글을 읽는 당신 중에서도 증조부/조부/외증조부/외조부 네 분 모두 일제시대에 무엇을 하셨는지 정확하게 아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해방과 동시에 그분들은 입을 다물었고 개인의 차원에서 묻어버린 기억의 공백은 왜곡된 역사가 들어설 여지를 남겼다. 나 역시 큰아버지의 자랑스런 독립운동 역사는 알지만, 증조부와 외증조부의 역사는 알지 못한다. 거기에 어떤 역사가 숨어있을지 전혀 알지 못하는 오늘의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불과 25년만에 대중들이 과거사를 재단하는 잣대가 얼마나 높아졌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높아진 잣대는 그만큼 집단기억이 왜곡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왜곡된 기억은 기록된 사실을 부정하고 변형한다. 이를 지적하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일본에서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피해자의 기억이 왜곡되는 만큼, 저들-가해자 역시 자신들의 기억을 왜곡시키고 있으며 이것이 시간이 갈 수록 한일간의 역사논쟁이 간극을 좁히기는 커녕 점점 더 커지는 이유이다.
 
이 글을 공개하는데에는 두가지 목적이 더 있다. 하나는 우리가 어떻게 기억을 왜곡시키는지 자각해서 조금이나마 이를 늦추고 싶다는 소망. 우리가 과거를 좀 더 객관적이고 합리적 태도로 바라보아야 편협한 민족주의에 경도된 중국이나 일본의 역사왜곡을 좀 더 우월한 입장에서 꾸짖을 수 있지 않을까?
 
두번째로는 우리가 더 다양한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어쩌면 앞서 언급한 우리 큰할아버지는 일본군들의 토벌을 피해 살아 남으셨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주에 자손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또 그 후손중 하나가 남한으로 건너와 정착했을지도 모른다. 그럼 우리가 대림동을 지나며 조선족들을 보며 눈을 흘길 때 나의 그 육촌 형제가 박차고 일어나 우리를 보고 손가락질 하며 "조선에 남아 일제에게 부역한 기회주의자들의 자손들이 잘먹고 잘산다고 독립운동가의 후손인 나를 괄시한다"며 분개할수도 있는 일 아닌가. 거기에 대고 "장첸같이 생긴 놈이 무슨 개소리냐" 라고 응수해서는 타자와의 역사적 인식의 간극을 절대 좁힐 수 없다.
 
우리는 마땅히 일본의 전쟁범죄를 기억하고 계속해서 분노해야한다. 하지만 적어도 한번 쯤은 타자를 잊고 우리 자신에게 초점을 맞춰보자. 앞서 살펴본 박사모, 운동권 세대와는 달리 일제시대 세대는 이미 대부분 죽고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세대의 관점으로 시대를 바라보기를 포기한다면, 우리는 과거사 논쟁이라는 다이달로스의 미로에 맨손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이다. 자력으로 거기에서 나올 길은 없다. 어쩌면 과거사 청산이나 친일 논쟁이 반백년이 넘도록 진전을 보이지 못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물론 여명의 눈동자에서 그 위안부는 억지로 끌려오긴 했고 731부대에서 근무하던 조선인 군인은 미군에 생물병기 정보를 넘기고 해당 무기를 무력화하는데 협조하는 등 이 드라마에도 민족주의가 만연하다. 하지만 군함도에 대한 논쟁은 민족주의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잊고 싶었던 사실이 등장해서임을 기억하자.
 
**오해를 없애기 위해 부연하면 민족주의자들은 이 정책을 조선 지주들의 협력을 얻기 위한 전략으로 본다. 별개의 얘기지만 대규모 자본이 필요한 광업 수업 등에 대해서는 총독부나 조선은행이 허가/대출제한 등으로 조선인들을 차별했다.
 
***또한 일본은 중국으로 진출하기 위해 조선인들의 민족적 자긍심을 적극 활용했다. 고구려는 한민족의 역사고 따라서 만주 역시 한민족의 생활 터전이라는 역사의식은 내선일체 시스템 아래 조선인(과 일본)이 만주로 진출해야할 정당성을 더해 주었다. 일제의 만주 점령지의 화폐제도를 조선은행과 한성은행이 운용했던 것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본다.
 
****이와 비슷한 역사왜곡은 해방 직후 한국 현대문학계에서도 보인다. 일제시대에 출세하려고 노력한 조선 청년들의 모습은 분명 그 시대의 흔한 사회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주제의 작품들은 해방 후 대거 친일문학으로 매도되어 한국 문학사에서 거의 숙청당하다시피 했다. 나는 여기에도 해방 후 일제에 협력한 기억을 지우고자 하는 의도가 담겼다고 본다.

댓글 8개:

  1. 가볍게 댓글을 썻다가 삭제하고 다시씁니다. 2015년에 쓰신 유동성과 부동산 글 타고 우연히 들어왔는데 여긴 완전 보물창고수준이네요. 개인적으로 근대사에 관심이 많아서 이런 객관적인 사실이 궁금했는데, 갈증이 많이 해소되었습니다. 특히 만주의 독립운동가 후손 조선족 상상 부분은 글쓴이님의 위트에 감탄했습니다.! 훌륭한 인사이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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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과찬이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게 평가해주시니 글로 제 생각을 남기는 보람이 있네요. 이상하게 원 계정으로 접속이 안되어 익명으로 남깁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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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대학 선후배들과 역사인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가장 답답함을 느꼈던 부분이 바로 조선=피해자, 일본=가해자 등식이었네요. 민족주의 성향이 아닌 그룹이었음에도 '제국의 위안부' 한 페이지도 읽어보지 않은 채 박유하 교수를 비판하는 지인들 마저 있었죠. 사회현상과 역사 모두 다면적인 관점에서 살펴야 마땅한데 식민통치 시기에 관해서만큼은 글공부 했다는 사람들마저 이성을 잠재우고 괴물을 깨우는 모습에 적잖이 실망했었지요. 오랜 벗을 만난 기분으로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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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제 오랜 경험으로는 지능의 문제입니다. 타인의 시각과 제3자의 입장에서 헤아려보는 것은 높은 차원의 지적 능력을 필요로하는 것이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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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살면서 이렇게 잘 정리한 글을 못봤습니다. 그만큼 멍청한 사람들이 이 주제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떠들었단 거겠죠. 근데 이 글이 널리 퍼지는 걸 생각하면 또 암담합니다. SNSer들이 난리칠게 눈앞에 선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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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헉..제가 질문드렸던건 관련 내용을 추가적으로 알아볼수있는 소스가 있는지 물어본것인데...
    그건 이제 괜찮고요
    최근에 역사에 관심이 생겨서 세계대전이나 독일사을 공부해보려했는데
    반일 감정도 그렇고 그런 와중에 이 블로그의 글들을 보니 국사를 먼저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더불어서 일본사도요.읽으면 읽을 수록 생각할 거리 공부할 거리가 늘어나는거같아서 정말 좋아요
    항상 감사합니다..이제 막 대학생이 된 사람한테는 무지성에 휩쓸리지않고 합리적인 태도로 문제를 바라보는 법을 배울 수 있는곳이 희귀하다고 생각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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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앗 그렇군요. 마땅히 생각나는건 없지만 관심이 생기시면 자연스레 관련서적을 찾아보시게 될겁니다. 학생이시면 수업을 들어보세요. 그런데 이미 흥미를 가진 상태서 들으시면 더더욱 재미있을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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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인간은 자기가 보고싶은 면만을 확대재해석하는 부분에선 인종,나라불문 똑같았네요. 최근 파친코라는 드라마에서 일본사람은 나쁜놈이고 한국사람은 착한사람이라는 프레임이 비치는데 느끼는바가 크네요. 그리고 확실히 여명의 눈동자는 지금 방영할 수 없는 주제인 것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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