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4. 11.

금호미술관 영아티스트전

기분이 들뜬 탓인지 아니면 날씨 탓에 집중력이 흐트러져인지 전시 주제와 상당히 동떨어진 감상들만 마음에 남았다. 

그래도 감상은 감상이니까.


노은주 작가


노은주 작가는 파괴된 콘크리트와 철근을 마치 정물화처럼, 혹은 초현실주의처럼 그려냈는데 이는 바니타스적 정물화를 연상시킨다. 바니타스는 화려한 장신구와 황금 그리고 만개한 꽃과 함께 해골이나 꺼져가는 촛불 시들어가는 꽃을 배치하여 삶의 허무함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정물화인데, 당시의 사회가 전염병과 또 30년전쟁으로 인한 대량학살에 시달렸던 것을 생각한다면 그 염세주의의 배경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으리라.

해골과 꽃다발이 있는 바니타스 정물, 아드리안 판 위트레흐트

당시 정물화의 가장 인기 있는 소재는 과일이나 꽃이었는데 이는 이 오브제들이 풍요 혹은 화려함을 상징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신흥 계층이었던 부르주아와 유한계급은 자신의 풍요를 과시하고 싶어 했기에 이런 꽃과 과일 그림들을 거실에 걸어두곤 했다. 농경 기반의 사회에서 보리나 밀 대신 재배한 과일과 꽃은 늘 가장 사치스러운 오브제였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꽃과 과일 따위로 현대의 풍요를 나타낼 수 없다. 과일보다 자극적이고 비싼 음식은 수도 없이 널렸으며 이젠 꽃 자체보다 그것이 어느 플라워샵에서 왔는지가 더 중요하다. 양재동 비닐하우스의 장미 한 송이의 가격과 니콜라이 버그만의 장미 한 송이의 가격은 아주 다르지 않은가. 그렇다면 16-17세기의 정물 화가들이 21세기에 태어났다면 그들은 무엇을 그렸을까? 청담동을 한 바퀴 돌고 난 뒤 아마 샤넬이나 롤렉스를 그리지 않았을까? 아니면 에르메스나 파텍필립?

주기적으로 기근을 겪고 굶어죽던 중세 유럽의 서민들에게 과일과 꽃이 사치재였던 것처럼 우리에게 명품이 그렇다. 우리는 샤넬을 원한다. 롤렉스를 욕망한다. 아름다워서? 천만에. 그 사치재들이 값나가는 진짜 이유는 쓸모없는 게 희소하기 때문이다. 물건을 들고 다니기에 백팩만큼 편한 게 어디에 있는가. 하지만 에르메스나 샤넬은 백팩을 만들지 않는다. 왜? 백팩은 너무나 실용적이기 때문이다. 실용성은 우아하지 못하다, 아름답지 못하다, 그리고 우아하지 않고 아름답지 않은 것은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사실 이 모순을 설명하기엔 롤렉스가 더 적합하다. 쿼츠시계는 물론이고 0.1밀리 초보다도 더 정확한 핸드폰을 두고 굳이 불편한 기계식 시계를 고집하는 허영 가득한 저 남자들의 왼쪽 손목을 보라. 그들은 아침마다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맞추겠답시고 그 작은 기계장치의 조그마한 나사를 돌리느라 시간을 허비한다. 21세기에 사는 이들이 18세기의 선조들과 같은 불편을 누리기 위해 수백 수천만 원을 쓰고 있지 않은가. 이처럼 실용성은 그 자체로서 심미성의 적이다. 

또 샤넬과 롤렉스가 생산라인에 포드주의를 도입해 한 해 수백만 개의 제품을 대량생산하면서 판매 가격을 혁신적으로 낮춘다면 그대들은 더 이상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아름다움은 절대로 대량생산될 수 없다. 모두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름답지 않다. 이러니 쓸모가 없는 것에 수천만 원을 쓰는 것 보다 더 유혹적인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리고 명품 브랜드들은 이러한 인간의 본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내 말이 의심스럽다면 주말 아침에 백화점 앞에 길게 줄 선 남녀들을 보라. 

이런 현상은 동물들에게도 나타난다. 공작의 화려한 꼬리와 사슴의 뿔, 그리고 수사자의 갈기는 생존에 방해가 되지만 대신 이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여 성선택에서 유리하다. 이성에게 "나는 이런 쓸모없는 것을 달고서도 살아남을 정도로 강인한 개체다"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인간의 꼬리털, 뿔, 갈기는 17세기에는 꽃과 과일이었지만 21세기엔 유라시아 대륙 서쪽 끝에서 제작된 가죽 바구니와 금속수갑이 되었다. 이런 상념을 마음에 품고 17세기의 해골을 오늘날의 콘크리트 더미로 치환한 노은주 작가의 그림을 보며 비어있는 캔버스 한편에 놓인 샤넬과 롤렉스를 상상해본다.



문이삭 작가

사물을 해체하고 재조립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은 이전에도 많은 작가들을 통해 다루어졌기 때문에 이런 시도가 새롭게 다가오지는 않았고 내가 이 작가의 배경과 그 의도를 몰라 작품에 공감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 원인이 작가에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전 조영남 위작 사건(링크)으로 드러났던 것처럼 이미 대중과 현대미술의 괴리는 너무나 벌어져 이젠 양측이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운 경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나는 대중에 가까운 사람이니 내가 교감할 수 없는 작가나 작품의 경우 내 이해와 고찰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왜 현대미술을 이해하기 어려울까? 물론 그 발전사를 모르고서는 납득할 수 없는 맥락이 존재하기 때문도 있지만 그게 유일한 이유는 아니리라. 중세-르네상스 미술과 대중의 관계를 보자. 당시 그림에 숨겨져있던 수많은 도식들, 그리고 종교적 상징과 그 배경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만찬도 단순한 저녁 모임 인증샷에 불과하다. 그 시대의 그림을 정확하게 읽어내려면 오늘날의 현대미술 못지않게 수준 높은 배경지식이 있어야 한다. 반면 당시의 대중은 어땠을까. 기초교육 따윈 없이 유년/청년기의 대부분을 생존을 위한 노동으로 보냈던 이들은 현대인에 비해 지식수준이 현격하게 낮았다. 대다수는 문맹이었고 성직자들이 읽어주지 않으면 성경의 내용조차 이해하지 못해 무엇이 신성모독인지 분간할 능력조차 없었다. 귀족이 아닌 신흥 브루주아 계급이라고 뭐 그리 달랐을까. 그들과 미술의 거리는 현재 우리들이 겪는 간극만큼이나 멀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와 그들 사이의 결정적 차이가 있다. 바로 시간. 중세-근대에는 볼거리가 많지 않았다. 아주 부유한 왕과 귀족조차도 광대의 쇼나 무용수들의 공연을 매일 볼 수는 없었기에 시각적으로 즐길 거리라곤 예술가들이 제작한 회화나 조각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림 앞에 앉아 감상하고 사색하고 고찰할 시간이 월등히 많았다. 과학과 자본의 발달로 인해 회화의 경쟁자들이 우후죽순 늘어나기 전까지는. 유한계급이 늘어나며 오페라나 연극도 함께 성장했으며 풍부한 수요는 더 많은 공급을 불러일으켰다. 인쇄기술의 발달은 사람들의 볼거리를 폭발적으로 늘렸고 영상기술-대중문화-인터넷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혁명은 그에 기름을 부었다. 아마 21세기의 일반인이 10분 안에 접할 수 있는 볼거리의 양은 근대 이전 그 어떤 왕이나 파라오, 혹은 황제가 평생 본 것보다도 많을 것이다. 

그런 마당에 사람들이 미술에 더 많은 시간을 쏟을 리가 없다. 더 가까이 앉고 더 친근하게 붙고 더 세심히 바라보아야 느낄 수 있던 것들을 찾아볼 시간이 없다. 넷플릭스, 유튜브, 그리고 네이버 웹툰. 미술의 경쟁자들은 너무나 막강해서 어쩌면 작가들 본인들조차 저 세 가지 매체에 쏟는 시간이 더 클지도 모른다. 그에 따라 미술의 방향도 점점 바뀌고 있다. 오래 보아야 이해할 수 있는 작품에서 순간적인 인상만으로도 관객의 시선을 사라잡을 수 있는 방향으로. 나 역시 그런 관객의 하나일 뿐이니 작품 너머에 있는 작가와 마주 앉아 작품을 매개로 두런두런 이야기하고 그의 생각과 미술 세계를 엿볼 시간을 내어주지 못한다. 

그렇게 우리는 늘 시간이 없다. 타인을 이해할 시간이, 사색에 잠길 시간이, 누군가를 생각할 시간이, 행복을 추억할 시간이, 그리고 사랑할 시간이 없다. 현대의 자본주의적 사회는 그런 삶을 무척이나 권장하고 예찬한다. 효율이란 이름 아래 그런 여백 같은 시간들은 종종 거세되곤 한다. 하지만 그런 시간들이 없다면 도대체 삶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2021. 4. 10.

0.7%의 확률

나는 트레이더다. 세상에 고작 0.7%의 확률에 베팅하는 바보 같은 트레이더는 없다. 사실상 그건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니까. 그러나 비참하게도 지난 몇 주간 나는 그 멍청한 확률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매달리고 무릎 꿇고 애원해야 했다. 0.7%이라니. 이 얼마나 하찮은 숫자인가.

절대적인 절망 앞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희망에 더더욱 매달리게 된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하게. 청천벽력이라는 말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던 그 소식을 처음 전해 들은 금요일 오후, 나도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 그 희망들을 잔인하게 잘라냈다. 날개가 있는 것은 추락하기 마련이니 희망을 품은 우리들은 결과를 받아본 순간 더욱 절망할 것이다. 그들이 의지할 사람은 나뿐이니 적어도 나만큼은 그 순간 더 절망해선 안되었다. 기업이 재무제표에서 잔존가치가 얼마 남지 않은 악성부채를 상각하듯이 나 역시 0.7%의 희망을 철저히 지워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돈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막상 겪어보니 어마어마한 의미가 있더라. 예상하지 않았던, 상상조차 해보지 않은 완전하고 절대적인 절망 앞에서 비극을 약간이라도 막을 방법은 돈에 의지하는 것 외엔 없었다. 얼마 전 의사가 내게 심부전증이 의심된다고 했는데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그날 내 심장이 그랬던 것 아닐까. 제멋대로 날뛰는 심박을 애써 무시하고 최악의 경우를 모면할 비용을 계산했다. 반쯤 마비된 머리로 어떻게 그 숫자를 도출했는지 모르겠다. 애초에 그 계산이 맞는지도 모르겠지만.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많은 것들이 몰락했다. 미국채는 폭락에 폭락을 거듭했고 빌황의 펀드는 하루아침에 파산했으며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여당의 지지도는 보궐선거에서 25개 구 모두에서 패배하리만큼 떨어졌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 무엇도 나보다 더 빨리 침몰하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0.7%란 확률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신에게 애원하는 것과 동시에 희망을 버리기를 반복하는것, 또 반복해서 숨을 쉬고 밥을 먹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신이 내 기도를 들었는지 한낱 인간인 나로서는 알 길이 없고, 버렸다고 생각한 희망은 문득문득 고개를 쳐들어 나를 더욱 괴롭혔으며 밥은 먹는 족족 체했고 별일 없이도 숨을 헐떡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이 글을 쓸 수 있기를 얼마나 간절히 간절히 바랬던가. 암울하게 글을 시작했지만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을 정도로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0.7%의 확률이 나를, 그리고 우리를 구원했다. 사실 담당자가 몇몇 특이사항을 간과하는 바람에 그 확률을 잘못 전한 것이라고 했다. 화가 나기는커녕 울음이 터져 나오도록 기뻤다. 지난 몇 주간 나는 삶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가장 혹독한 방법으로 깨닫고 있었으니 지금 그 고통에서 해방된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었다. 처음 전화를 받던 날이나 마지막 날이나 여전히 시장에서는 여러 가격들이 어지러이 점멸하고 있었고, 창밖에선 봄이랍시고 벚꽃이 피고 지고 있었으며 누군가는 가장 끔찍한 지옥에서 엉금엉금 기어돌아왔다. 

이렇게 나는 일상으로 복귀했다. 삶에서 최악의 비극은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이고 언젠가는 반드시 (또) 겪을 것이며 궁극엔 나도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삶은 미쳐 생각지도 못한, 참으로 창의적인 방법으로 우리에게 비극을 선사하곤 한다. 그저 주식이 좀 빠지고 오른다고 기분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앞차가 끼어든다고 빵빵대며 부잣집 친구 놈이 전화해서 자기자랑을 늘어놓는 것을 듣는 이 삶은 얼마나 평온한가. 내 일상이 또다시 부서지기 전 남은 시간 동안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쓰고, 보고, 느끼고, 웃고, 만나고, 나누고, 사랑하겠다고 다짐한다.

2021. 3. 13.

도조 히데키와 아스트라제네카

일본제국의 희생자는 중국인이나 한국인만이 아니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서 총 280-310만 명의 일본군이 전사했는데 그중 거의 절반에 가까운 120-150만 명은 아사, 혹은 기아로 인한 질병으로 죽은 것으로 집계된다. 가장 많은 일본군을 죽인 것은 미국의 함포사격도, 장개석이나 모택동도 아닌 바로 일본제국의 장군들인 셈이다. 무능한 지휘관은 적보다 무섭다는 말이 이보다 더 잘 맞을 수 있을까.

메이지유신 이래 내전을 거쳐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끈 경험 많은 군대와 장교들이 어떻게 그렇게 타락했는지 알 수 없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군 수뇌부는 세계 전사에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게 무능하고 부패했다. 예를 들면 제대로 된 보급계획 없이 정글로 수십만 명의 부대를 밀어 넣으면서 사령관인 무다구치 렌야는 "일본인들은 초식동물이라 길가의 풀을 먹으며 진군하면 된다"라고 주장했고, 한 장군은 가미카제 작전으로 수도 없는 젊고 경험 있는 조종사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뒤 자신은 위궤양을 핑계로 군 수송기에 창녀들과 위스키들을 가득 담고 온천 휴양에 나섰다. 자국 군인들을 소모품으로 여긴 것은 나치나 스탈린도 마찬가지였지만 일본 군부는 병사들이 소모품이란 개념조차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전시내각의 총리, 도조 히데키가 있었다. 관동군 장교 출신인 그는 특유의 정치 감각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총리 자리에까지 올랐는데 태평양전쟁에서 처참한 지휘능력을 보여준 최악의 상급 지휘관들은 대부분 도조 히데키의 파벌이거나 그의 손으로 임명된 사람이었다. 이 처참한 비극을 한 사람의 책임으로 몰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하나를 뽑으라면 단연 그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오명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일본군의 항복을 금지하고 무의미한 자살 작전을 옥이 부서진다는 은유로 미화하며 죽음을 종용한 이 괴물은 정작 자신의 목숨은 끔찍이 아꼈다.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 천황이 아무런 조건 없이 연합군에게 항복하자 당시 군부대신이었던 아나이 고레치카는 천황의 명에 따라 항복문서에 조인한 뒤 전통적 방식으로 할복자살하였고 천황의 항복 명령을 받아든 몇몇 고급장교들도 마찬가지로 그의 뒤를 따랐지만 도조 히데키는 멀쩡히 살아있었다. 전쟁에서 아들과 남편을 잃은 수많은 유족들과 미망인들이 그에게 죽으라며 편지를 보냈고 심지어 그를 대면한 영관급 장교 한 명도 그의 면전에 대고 죽으라고 했지만 그는 미군이 도쿄에 입성하는데도 죽기를 거부하며 꿋꿋이 살아있었다.

천황이 항복한 지 한 달 가까이가 지난 9월 11일, 맥아더 사령관은 도조 전 수상을 포함한 전범들을 모두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날 아침에 그의 자택에 헌병들이 들이닥친다. 그는 전범으로 체포되면 사형될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제서야 죽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도조는 자살하며 군복을 갖춰 입지도 못했고 사무라이의 방식으로 할복하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총알이 빗맞아 자살에 성공하지도 못했다. 무사도를 종교처럼 떠받들던 일본군의 수장이 그마저 똑바로 못하다니. 신념처럼 공기반/소리반을 외치던 박진영이 알고 보니 음치라고 해도 JYP의 연습생들조차 당시 일본인들만큼 당황하진 않았으리라. 결국 도조 히데키는 자신이 악 받쳐 죽이라고 명령했던 미군 병사의 피를 수혈받아 살아난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여러 문서들을 보면 1944년 일본 군부는 자신이 이미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 수뇌부는 병사들의 자살 작전을 강요하는 바람에 사상자의 대다수가 전쟁 후반부에 발생했다. 표면적 이유는 천황제의 유지와 태평양전쟁 이전 일본의 영토를 보존하는 것이었지만 그들의 전후 행적을 보면 가장 큰 관심사는 자신들의 전범 기소 여부였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수십만 병사들을 굶겨 죽였으며 더 나아가 1억 국민들에게 천황과 자신을 위해 죽을 것을 명령한 셈이다. 이오지마의 바위섬에서 먹을 것이 없어 포로와 전사자들의 인육을 뜯어먹으며 동굴에서 연명하다 결국 미군의 화염방사기에 불타 죽은 병사들을 두고 옥처럼 부서졌다고 예찬하던 도조 히데키, 그의 마지막이 베를린을 탈출하라던 보좌관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자살했던 히틀러의 최후보다 추잡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런 내로남불 때문이리라. 

*               *               *

그리고 우리는 도조 히데키의 정신을 이어받은 정부를 보고 있다. 나는 백신 전문가가 아니지만 그래도 다수의 구성원들이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맞는 것이 맞지 않는 것보다 우한코로나로 인한 피해를 줄이는 데 더욱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최초의 백신인 제너의 종두법보단 훨씬 안전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과학적으로 옳건 그르건 국민들은 AZ를 불신하고 있다. 그 공포의 근원이 합리적인가를 두고 따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든 공포는 비합리적이기 마련이니까(링크). 훌륭한 정치 지도자는 어떻게 그 비합리적인 공포를 잠재울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과 여당의 대응은 너무나 실망스럽다. 문 대통령은 첫 접종이 시작되던 날 마포구 보건소에 방문해 접종 장면을 지켜보았고 선거개입으로 재판 중인 김경수 경남 도지사는 모의 접종 훈련에 참여해 빈 주사기를 구경하다 왔다. 그러고서 국민들에게 불안해하지 말고 AZ를 맞으라는데 누가 그 말을 믿겠는가. 한국에서 발병하지도 않은 허구의 광우병에도 기겁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데 실제로 발생하는 부작용과 아나필락시스를 걱정하지 말라는 말은 대중에 대한 모욕이자 조롱이다. 

도조 히데키가 자국의 젊은이들의 육신을 죽인 것은 식량과 보급 없이 미군의 함포사격과 폭격이 이어지는 남태평양의 정글 속으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린 날이지만, 그들의 정신을 죽인 순간은 바로 그가 자살에 실패한 날이었다. 마지막까지 구차하게 살아남으려던 그의 비굴한 최후는 일제가 강요하던 전체주의와 무사도, 그리고 천황에 대한 믿음이 한편의 허황되고 조잡한 사기극에 지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코로나가 처음 발발한 후 문재인 대통령과 여당은 수도 없는 실책을 저질렀다. 국경 봉쇄에 실패했으며, 지나치게 일찍 경제활동을 재개했고, 백신이 나오기도 전에 의료진들과 싸움을 시작했다가 역풍을 맞았다. 방역수칙은 계속해서 엿가락처럼 변형되어 이젠 외우기조차 어렵고 정부는 K백신의 홍보에 열을 올리느라 세계 11위권의 경제대국이 백신 접종은 100위권 밖으로 밀려나 리투아니아나 페루보다도 뒤져 있다. 코로나의 극복 과정에서 정부가 보여준 역할은 태평양전쟁의 일본 군부만큼이나 무능하고 한심하고 처참했다. 그리고 청와대는 이 방대한 희극서사의 화룡점정을 찍었다. 너희는 최전방에 서서 AZ맞아라 나는 후방에서 화이자 맞을게, 라고 외치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라. 식민지와 본토의 청년들을 사지로 몰아넣던 도조 히데키의 모습과 소름끼치도록 일치하지 않는가.

세계최초로 접종을 거부한 채 남의 백신접종을 구경하는 국가지도자


2021. 1. 3.

고루한 비관론자를 위한 해는 없다(No year for old bears)


KOSPI지수

보통 시장의 변곡점이 아닐 때엔 시장이나 경제에 대한 글을 잘 올리지 않는데, 작년을 돌이켜보니 총 25개의 시장 관련 포스팅 중 15개를 위의 두 달 사이에 올렸다. 주가가 큰 폭으로 폭락한 1월의 마지막 금요일, 나는 이 공포가 크게 번질 것이라고 전망했고(링크) 이후 대부분의 글은 시장이 어떻게 패닉하고 있는지, 또 어떻게 진행될지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제 베어마켓이 끝났다는 포스팅(링크)을 올린 것이 4월 3일이니 사실상 작년의 투자실적의 거의 대부분은 저 60여 일을 어떻게 보냈는지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후에도 여러 글을 통해 시장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봄에는 겨울을 생각하면 안되고 번개는 같은 곳에 두번 떨어지지 않기 마련이니까. 그 생각은 2021년에도 변함이 없다. 올해 시장은 전형적인 회복기 패턴을 따를 것이라 생각한다. 기업들은 대대적으로 구조조정에 나설 것이고, 그로인해 기업들의 생산성과 실적이 크게 개선될 것이며 또한 생존자들의 마켓쉐어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을 목도할 것이다. 반면 시장 심리가 아직 취약하기 때문에 작은 헤드라인에도 발작을 일으키는 날도 겪을 것이고, 또 이례적인 환경에서 과도하게 오른 종목들이 반대로 조정을 주도하는 순간도 있으리. 하지만 그 뒤에 강력한 성장회복세가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단지 시기의 문제일 뿐.

매일 매시 매분의 가격 움직임에 집착하는 트레이더들은 종종 큰 흐름을 망각하곤 한다. 갑자기 주가가 순간적으로 1%라도 내려가면 다시 폭락이 들이닥친 것 마냥 패닉 하기 마련이고 주가가 또 그만큼 반등하기라도 하면 호황이 찾아온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그렇게 우리는 하루에도 몇번씩 조증과 울증을 발작적으로 겪는다. 하지만 커다란 조류 앞에서 수면의 잔물결은 쉬이 잊혀지듯 큰 트렌드 앞의 작은 가격움직임도 그렇게 될 것이다. 내 전망은 작년 4월 3일과 다르지 않다. 최악의 순간은 이미 예전에 지나갔으며 향후 몇년간 경제는 2020년에 잃어버린 성장을 어느정도 만회할 것이다. 동시에 전 세계 중앙은행들과 정부의 전례 없는 적극적인 조치로 시장안정에 대한 발판은 그 어느 때보다도 탄탄하며 무엇보다 빠른 유동성의 증가가 자산시장을 성장시킬 것이다. 그리고 그 끝에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남겠지. 늘 그랬듯이. 

과거의 패턴을 보면 위기 직후 12-24개월 내에 주식시장은 10-20%의 조정을 겪곤 했다. 그날이 오면 우리가 잠시 덮어두었던 지난 3월의 비관론들이 다시 고개를 들고 목소리를 높일 것이지만 누차 말했듯 우리는 모두가 비관적일 때 낙관적일 수 있어야 하며 또한 반대가 될 수 있어야 한다. 큰 그림에서 과거를 보면 위기가 온전히 지나간 뒤 연간으로 주식시장이 큰 폭으로 하락한 예는 무척 드물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고루한 비관론자를 위한 해는 없다고.

2020. 12. 23.

황제 네로의 시, 그리고 문준용의 예술

율리우스-클라우디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코스. 우리에게 이런 길고 과장된 이름보다 폭군 네로라는 악명이 더 친숙한 그는 스스로를 빼어난 예술가라고 생각했다. 네로 황제는 그리스 문화에 흠뻑 빠진 나머지 무대를 온통 그리스 식으로 꾸민 뒤 직접 무대에 올라 시를 읊고 노래와 연기를 선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심지어 그리스를 너무나 동경한 나머지 속주였던 이 지역에 대한 세금까지 감면해 주었다. 

그렇게 그리스에 강박적으로 심취했던 그가 올림픽에 끼어들지 않을 리 없다. 그리스의 211회 올림픽은 서기 65년에 개최될 예정이었는데, 이 대회에 참가자로 출전하기로 마음먹은 네로는 정무를 제쳐두고 피나는 각종 예술 공연과 스포츠를 연습했지만 기대한 만큼 기량을 향상시킬 수 없자 황제의 이름으로 명령을 내려 올림픽을 2년 미뤄 67년에 개최하도록 했다. 그 올림픽에 출전한 황제는 음악 연주를 포함한 7개의 종목에서 우승했지만, 한 역사학자는 네로의 연주와 발성, 그리고 그가 작성한 시는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야유를 보내거나 공연장을 떠나면 목숨이 위태로웠기 때문에 관객들은 억지로 환호를 보냈다고 기록했다. 체육 경기에서 네로의 상대 선수는 황제를 이길 시 사형당할 것이란 협박을 받았고 심지어 전차 경기에서 네로는 전차에서 굴러떨어져 중도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심판진은 유권해석을 통해 황제에게 월계관을 수여하기도 했다.

한 번의 그리스 순회공연에서 총 1808개의 상을 받았다고 전해지는 그는 반란군에 의해 쫓겨 자살하는 순간에도 "훌륭한 예술가인 내가 죽는구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자신의 정치적 능력에 절망하는 가운데서도 스스로의 예술성만큼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던 그, 네로는 진심으로 자신을 황제이기 이전에 예술가였다고 믿었던 것이다.

*               *               *

네로는 과연 훌륭한 예술가였을까. 동시대를 살아간 타키투스는 그의 재능이 형편없었다고 기록했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없지는 않다. 무엇보다 폭군 네로의 악행이 원로원과 이후 기독교인들에 의해 과장되었다는 지적과 그가 그리스의 문화예술을 후원한 공을 분리해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어쨌든 그의 노래와 시를 접해볼 수 없는 우리가 네로의 예술가적 기질을 평가할 수 없는 일 아닌가. 하지만 네로의 공연을 지켜본 동시대의 평론가와 관객들이라고 황제를 평가할 수 있었을까. 더욱이 붉은 망토를 두르고 황금색 투구를 쓴 로마 근위대가 자신을 날카롭게 노려보며 허리춤에 찬 검을 매만지고 있는데. 네로는 자신을 황제보다 예술가라고 믿었지만 그의 예술성을 지탱하던 것은 바로 군대와 황제의 권력이었다. 

지금 우리는 바로 이 아이러니를 마주하고 있다. 대통령의 아들 문준용 씨는 파라다이스 재단과 서울시에서 각각 3천만 원과 1400만 원의 지원금을 받아 코로나가 확산되는 가운데에서도 전시회를 열어 논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는 아버지의 권력과는 무관하게 자신은 작품성으로 인정받은 예술인이라고 항변했다. 하지만 누가 이를 증명할 수 있겠는가. 그는 항상 청와대 비서실장의 아들, 제1야당 대표의 아들, 국회의원의 아들, 그리고 당선인의 아들이었는데. 매우 폐쇄적이면서도 취약한 문화예술계에서 이처럼 강력한 배경을 지닌 작가를 비평할 배짱을 가진 평론가나 화랑은 존재하기 어렵다. 있다고 해도 곧 사라질 것이다. 마치 네로의 노래에 얼굴을 찡그리고 야유를 보내다 끌려나간 이름 없는 한 로마의 시민처럼. 예술가로서의 네로가 단 한번도 황제의 권력으로부터 벗어나 비평받아본 적이 없듯 작가 문준용 역시 한번도 아버지의 후광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작품 활동이나 비평을 업으로 삼지 않는 나는 그저 관객에 불과하니 문준용의 예술성을 평가할 위치에 있지도 않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그와 비슷한 배경을 가진 미술학도들과 작가들은 내 주변에도 수도 없이 많지만 누구나 문 씨와 같은 기회를 얻은 것은 아니라는 것. 또한 나는 좋은 예술, 혹은 나쁜 예술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단지 잘 팔리는 작가와 안 팔리는 작가가 있을 뿐이지. 그런데 고작 만 38살의 신진작가가 판화를 250장이나 찍어내면서 장당 $600에 파는 것은 적잖이 당황스럽다. 국내외에서 비슷한 시세를 가진 다른 작가들의 이력이 어떤지 한번 찾아보기를 권한다. 시장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의 첫 작품을 본 것은 아직도 꽃가루가 흩날리던 2017년 5월의 봄날이었다. 새로운 계절과 함께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며 우리의 마음은 공정과 정의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있었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새로운 한 발을 내디딜 거라 믿었다. 사실 그랬지. 다만 그 한 걸음의 방향이 반대였을 뿐. 삼청동을 거닐던 나는 예술에서 정치를 읽어내는 것을 보며 나 자신이 편협한 것은 아닌지 부끄러워했지만(링크) 그 순간 예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정치와 맞닿아있었다. 


나는 율리우스 포프처럼 기술에 의존하는 예술도 훌륭한 예술이라고 믿고, 예전에 내가 박원순의 서울시가 설치한 슈즈트리를 옹호한 것(링크) 처럼 정치적 배경과 작품은 분리해서 평가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나의 불편함이 편협한 마음에서 나온 것일까 두려워 아끼는 몇몇 평론가들의 문준용 작가에 대한 평을 찾아보았고 그 결과는 아래와 같다. 그리고 그의 작품을 기억하는 나의 인상도 아래와 크게 다르지 않다.



2020. 11. 29.

위에 민쥔. 세상에서 가장 슬픈, 그리고 비싼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정치지도자는 누구일까. 그 물음에 우리는 아마 콧수염을 기른 독일(오스트리아)인이나 러시아(그루지아)인을 떠올리겠지만 정답은 마오쩌둥이다. 통계가 존재하지 않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흔히 그의 치세 아래서 약 3천만에서 최대 1억 명의 사람들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국공내전,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그리고 천안문사태까지. 여느 아시아 나라들의 근대화가 대개 그러했듯 중국의 근현대사도 피와 총탄 그리고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리고 광기의 시대로부터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말수가 적다. 와전된 말 한마디, 혹은 동료들 사이의 작은 오해가 온 마을을 도살장으로 둔갑시키곤 하던 시대였으니까. 말을 아끼고 생각을 숨기고 감정을 감추는 것, 그것이 가장 기초적인 생존법이었던 시대를 목도한 이 작가는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그 시대상을 그려냈다. 

작가가 밝혔듯이 그의 대부분의 작품은 자화상에 가깝다. 그리고 그의 그림 안에서 위에 민쥔은 필사적으로 웃는다.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온 몸을 고통으로 배배 꼬면서도, 물에 빠져 죽어가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심지어 죽음을 마주하는 그 순간에도 그는 죽을 힘을 다해서 웃는다. 웃음이 광기와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가장 훌륭한 도구라 그런 것일까. 웃는 얼굴에 침도 못 뱉는다는데 설마 총알을 박아 넣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고통과 절규가 숨겨지는 것은 아니다. 손으로 저 심연과도 같이 어두운 입을 가리고 다시 그림을 보라. 어쩌면 그것이 작가가 우리에게 진정으로 보여주고 싶은 모습 아닐까.


"위에 민쥔의 작품은 특유의 표정과 풍자를 통해 타인과 소통하려는 의지로 가득 차 있다"

-리시엔팅


그의 작품이 런던이나 뉴욕의 경매에 올라온 지도 벌써 이십여 년이 훌쩍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부자연스러운 웃음을 띠고 있다. 나는 너는, 그리고 세계는 그의 불편한 함박웃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외면한다. 그 저변의 시대상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거부한다. 이제 그의 웃음은 너무나 흔해 마치 하나의 패션이나 캐릭터상품으로 전락했고 가장 슬픈 웃음을 띤 작품은 가장 비싼 가격에 팔리고 있다.

바로 전 세기만 해도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최고의 가치라고 외치던 자유진영은 이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일당독재국가를 경제파트너로 받아들였고 전체주의와 타협했다. 자본과 물자는 끊임없이 중국의 국경을 넘나들지만 자유와 이념은 그렇지 못하다. 죽의 장막은 아직도 실존하며 새로운 도약을 이끈 구글과 아마존조차도 그를 걷어내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 장막의 뒤켠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했던 비극은 서서히 잊혀지면서도, 다른 형태로 되풀이되고 있다. 그리고 위에 민준은 그 불편한 현실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인간은 웃는 동물이라고. 그리고 인간이 짐승으로 돌변하는 시대에 그는 더더욱 웃어야 했다. 우리는 기술과 다양성이 지배하는 21세기가 이전의 시대와는 아주 다르다고 믿고 있지만 과연 그럴까. 슬프게도 이번 세기에도 위에 민쥔의 발작 같은 웃음은 멈추지 않을 것만 같다.  

김창열, the path

 

언뜻 단색화의 열풍에서 살짝 비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김창열을 빼놓고 한국의 현대미술사를 논하긴 어려우리라. 회화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조차 '아 그 물방울' 하고 알아차릴 정도로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 이미지는 그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고 이 화가는 한때 자신의 문패에 이름 대신 물방울을 그려넣었다고 한다.

물방울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냐고 가벼이 대답했지만 젠체하는 평론가들과 관객들은 수고를 아끼지 않고 억지로라도 의미를 찾아내곤 한다. 아마 각각의 해석은 다르겠지만 모두가 어떤 대조를 읽어내지 않았을까. 누군가는 수천 년을 이어온 상형문자와 순간적으로 사라질 물방울 사이에서, 어떤 이는 평면과 입체 사이에서, 또 누군가는 철저한 관념의 세계인 서예와 사실적으로 묘사된 이미지 사이의 선명한 대비를 읽었을 것이다. 마치 평안남도에서 태어나 파리에 정착한, 조부에게 서예를 사사받고 현대화가로 살아온 그의 삶과도 같이.

최근 갤러리현대에서 그의 개인전이 열렸다. 1929년 생인 이 노화가의 나이와 올해 작품활동이 뜸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어쩌면 올해가 그의 마지막 전시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부디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1972년 파리에서 한 무명의 화가가 세수를 하다 그만 캔버스에 물을 튀기고 만다. 어지럽고 좁은 아틀리에에 세면장이 따로 있을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그는 다급하게 캔버스의 물을 닦으려다 순간 물방울이 햇빛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는 것을 본다. 김창열의 물방울이 태어난 것은 찰나에 불과했지만 그의 예술세계는 마치 작품에 그려진 문자처럼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

[2021년 1월 5일 김창열 화백이 작고하셨다는 보도를 접했다. 아니기를 바랬건만. 그저 부디 편히 쉬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