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5. 22.

미래를 예언한 영화들 3부 조커와 2020년 미 대선

1부: 킹스맨과 브렉시트 (링크)
2부: 주토피아와 트럼프 (링크)

앞의 두 편의 글은 영화가 대중의 어떤 욕망을 자극했고 또 그 욕망이 어떤 정치적 선택을 가져왔는지를 분석했지만, 이번에는 조금 관점을 바꿔서 특정 정치성향을 가진 지지자들이 일반적인 대중, 즉 유권자들을 얼마나 잘못 파악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또한 앞의 두 글은 사후 분석인데 비해 아래의 글은 올해 11월에 예정된 미국 대선에 관한 글이므로 반년 뒤 어떤 결과가 나올지 흥미를 가지고 지켜보길.

 히스 레저가 아닌 그 누가 감히 조커를 연기할 수 있을까. 하지만 호아킨 피닉스는 그런 염려를 단번에 잠재우며 자신만의 캐릭터를 완성했고 이 영화는 영화평론가들 사이에서 뿐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커다란 성공을 이뤘다. 주연배우의 연기는 물론이고 스토리, 음향, 영상 등 이 영화는 말 그대로 완벽했다. 단 하나, 엉성한 사회비판을 제외한다면.

미국정치를 잘 몰라도 이 영화가 트럼프와 공화당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뉴욕(고담시티)의 가장 후미지고 외진 곳에서부터 시작한다. 폭력이 난무하고 쓰레기가 사방에 널린, 국가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가난한 동네. 그 곳에서 돈은 교환이나 가치척도의 수단이 아닌 생존의 필수품이기에 당장 일자리를 잃으면 다음날 끼니마저 굶어야 하는 삶. 거기서 태어난 평범한 정신병자 아서 플렉이 온 도시를 뒤흔드는 비범한 빌런으로 변화한데엔 두가지 촉매가 있었다, 바로 권총과 정신상담. 아서의 동료는 그에게 호신용으로 권총 한 자루를 건네는데 결국 그는 그 총 때문에 직업을 잃어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된다. 또 고담시는 복지예산을 삭감하는데 그로 인해 아서의 정신상담이 중단되게 되어 그는 더이상 정신약을 처방받지 못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공화당과 민주당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주제 아닌가. 공화당 지지자들은 총기소유의 자유를 종교적 신념처럼 지지하는데, 영화에서 주인공이 정신적 문제를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쉽게 총을 손에 넣고 결국 네 건의 살인을 저지르는 것을 보여주는 데에는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정신상담이 중단되는 것은 ACA, 일명 오바마케어와 연관되어 있다. 오바마케어의 존치는 지난 대선에서 뜨거웠던 논쟁거리로 반대론자들은 이 법이 사실상 정부의 재정을 악화시키고 보험사의 비용을 증가시켜 결국 국민들에게 부담만을 안겨준다는 이유로 폐지를 주장했는데 반해 민주당은 저소득층을 의료의 사각지대에 방치해서는 안된다며 반드시 필요한 제도라고 항변했다. 그리고 이 영화가 의료복지가 축소된 이후의 세상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보라.

공화당에 대한 비판은 토마스 웨인이 등장하며 정점에 이른다. 여러 기업체를 거느린 CEO출신에다 장신이고 공격적 언행을 일삼는 그는 누가 보아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판박이다. 특히나 여자문제가 복잡하고 무례하며 자기중심적이걸 보면 이 의혹은 확신이 된다. 그는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아서에게 펀치를 날리고 그를 모욕하여 그를 조커로 만드는 결정적 원인들 중 하나를 제공한다. 이처럼 정치적 편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토드 필립스 감독은 그가 결국 조커의 추종자중 하나에게 살해되는 것을 보여주며 트럼프 대통령에게 은유같은 저주를 퍼붓는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조커라는 괴물이 탄생하게 된 것은 그를 방치한 잘못된 사회구조 때문이며 바로 공화당과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은 미국을 고담시로 만들 것이라는 경고를 담고 있다.(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실질적 주인공은 조커가 아닌 트럼프다) 문제는 영화를 만든 이들의 인식이 너무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데에 있다. 만약 아서 플렉이 실존한다면 그는 2016년 대선에서 누구를 찍었을까? 통계에 따르면 그는 트럼프에게 표를 던졌을 것이다. 인종, 성별, 소득수준, 최종학력 그리고 연령에 따른 트럼프 지지율을 보면(링크) 아서 플렉은 이 다섯가지 카테고리 중 연령을 제외한 다른 모든 카테고리에서 트럼프의 지지층과 일치한다. 그런 마당에 영화를 보며 아서에게 공감한 미국의 빈민층들이 과연 감독의 정치적 메시지에 공감했을까? 이 샴페인 좌파 감독이 조금이나마 현실감각이 있었더라면 아서 플렉은 이민자 가정 출신의 박사학위를 가진 고학력 20대 흑인 여성이었을텐데.
교육수준이 낮을 수록 트럼프에 대한 지지도가 높다
왜 현실의 아서 플렉은 트럼프를 지지하는가. 영화 속 아서의 비극이 일자리를 잃으며 시작했던 것처럼 미국의 빈민층은 값싼 중국산 제품과 불법 이민자들에게 밀려 일자리를 잃었다. 실업의 비극을 가져온 것은 38구경 권총이 아닌 세계화다. 또 미국의 중하류층에게 위화감을 안기는 것은 억만장자이면서도 싸구려 야구모자를 쓰고 맥도날드를 먹는 트럼프가 아니라 수백만 불짜리 대저택에 살고 제트기를 타고 다니면서도 지구온난화의 위험성을 설파하는 엘 고어나, 빈부격차를 줄이자고 외치면서 편당 수백만달러를 받고 페라리를 모는 헐리웃 배우들 같은 리무진 리버럴들이다. 그들이 기아와 빈곤을 논하며 자선파티에 모여 우아하게 브르고뉴산 와인을 따를때 트럼프는 코카콜라를 마시며 옥스포드 사전따위를 필요로하지 않는 하류층들의 언어와 트위터로 유권자들과 소통한다. 저질 농담들과 함께, 때때로 어법도 틀려가면서. 미국의 상류층들이 트럼프를 경멸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하류층들은 그를 사랑한다.  

비벌리힐즈나 웨스트우드 혹은 베니스 해안가에 사는 서부의 리버럴들은 미국의 평균적인 유권자들에 대해 너무나 무지하다. 지난 대선에서 힐리러가 패배한 것은 미국의 유권자들이 멍청하거나 인종차별주의자여서가 아니라 그녀와 그녀가 이끄는 민주당에 아무런 비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당시 힐러리의 대선공약이 무엇인지 떠올려보라. 아마 그녀 자신도 자신의 공약이 무엇인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그녀는 주요 쟁점사안에 대해 입장을 여러번 바꿨다) 힐러리를 비롯한 민주당은 유권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몰랐고 따라서 자신들이 무엇을 보여줄 지도 몰랐다. 반면 트럼프의 공약이 무엇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지 않았나, 그를 지지하든 지지하지 않든 간에. 그는 세계화가 진행되며 미국의 자본가들이 생산기지의 이전과 해외투자로 더욱 부자가 될 동안 미국의 노동자들이 직장을 잃고 새로운 아서 플렉으로 전락하는 것을 꿰뚫어보았고 따라서 리쇼어링 정책을 들고나왔다. (사업으로 인생의 부를 일군 사람이 리쇼어링 정책이 경제적 관점에서 효율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모를거라 생각하지 마라.) 그리고 영화 조커는 트럼프와는 달리 진보주의자들이 아직도 그 무지 속에 갖혀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아서 플랙의 망상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리버럴들의 망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서에게 예쁜 여자친구가 존재하지 않았듯, 좌파들이 생각하는 공화당이 야기한 카오스 또한 없었다. 지피지기는 물론이고 자기가 왜 졌는지 아직도 모르는 민주당은 다음 대선에서도 또 패배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맨하탄의 남단에서 빨간색 IRT Seventh Avenue Line를 타면 월스트리트를 지나 섬의 북쪽 끝에 도달하고, 거기에서 버스를 타면 조커가 춤추던 계단이 있는 브롱크스까지 갈 수 있다. 호아킨 피닉스는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을 연기하는 대가로 약 450만 달러의 출연료를 받았는데 이는 미국의 상위 약 0.05%에 해당하는 소득이다. 토드 필립스 감독은 이 영화를 찍으며 단순한 히어로 시리즈가 아니라 사회고발의 메시지를 담고 싶었겠지만, 그가 기획한 이야기와 실제 현실은 아서 플렉과 호아킨 피닉스의 수입 만큼이나 달랐다. 테슬라 S모델과 함께 배우고 가진 자들의 힙해보이는 패션아이템으로 전락한 리버럴리즘과 민주당이 과연 올해 대선에서 다시금 미국 대중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을까.

2020. 5. 21.

미래를 예언한 영화들 2부 주토피아와 트럼프

대중의 영화취향을 들여다 보면 그들의 정치적 선택을 가늠할 수 있다. 그 이유는 1부(링크)에서 설명했으니 생략하자.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고작 디즈니 만화영화가, 그것도 발랄하고 귀여운 토끼가 주인공인 애니메이션이 어떻게 트럼프가 힐러리를 누르고 미국의 대통령이 될 것을 예언했을까.
주토피아의 주인공 주디, 그리고 격분한 트럼프
경찰이 되는 것이 꿈이었던 주디는 각고의 노력 끝에 경찰 뱃지를 달게 된다. 하지만 딱 봐도 강력한 남성미를 뿜뿜 풍기는 포유류들이 가득한 경찰서에서 작고 가녀린 그녀에게 진짜 사건을 맡기는 사람은, 아니 동물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우연히 몇몇 동물들이 갑자기 이성을 잃고 야만적으로 돌변하는 사건을 추적하게 되었고 파트너 닉의 도움으로  함께 수사를 펼친다. 몇번의 실패와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그들은 이 사건의 이면에 모종의 음모가 숨겨져 있음을 찾아낸다. 그것은 바로 시장의 비서였던 작은 양 벨웨더가 육식동물들을 문젯거리로 만들어 사회에서 배제하기 위해 그들이 이성을 잃고 본성을 드러내게 만드는 약물을 사용했다는 것. 주디와 닉은 교묘한 연기로 벨웨더의 음모를 밝히고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된다.

귀여운 주디의 외모와 재치넘치는 위트 덕에 놓치고 지나가기 쉽지만 사실 이 애니메이션은 사회 구성원들의 생물학적 차이에 주목하고 있다. 애초에 주디에게 경찰다운 일이 주어지지 않는 것도 그녀가 생물학적으로 토끼이기 때문이었고 닉이 자신의 꿈을 버린것도 영악한 여우였기 때문이다. 하울링을 따라 하는 늑대들도, 느리게 일을 처리하는 나무늘보도, 시기심 많은 양도, 시장인 사자도 모든 등장인물들의 본성을 결정짓는 것은 바로 생물학이고 그들의 DNA이다. 애니메이션은 주디의 입을 빌려 그 점을 명확하게 지적한다.(링크) 포식자들에게는 그들의 유전자에 각인된 포악한 사냥의 본성이 존재하고 그것이 문제의 원인이었다고.

독특하게도 주토피아에서는 핍박받고 탄압당하는 쪽이 강한 포식자다. 음모를 꾸민 벨웨더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초식동물들)는 늘 무시당하지, 그래, 육식동물들은 힘이 세. 하지만 포식자와 피식자의 비율은 1:10이야, 사회 구성원의 90%가 공공의 적에 대항해 뭉친다고 생각해봐. 아무도 그들을 막을 수 없어"(링크) 자연상태에서는 피식자가 아무리 많아도 포식자를 누를 수 없다. 라이온킹에서 미어캣 열마리가 사자 심바를 학대하는 장면이 나온다면 누가 공감할 수 있을까. 하지만 민주주의 아래서는 다르다. 다수결에 의해 통제되는 주토피아에서 약하고  남성성의 반대편에 서 있는 양이 유전적으로 더 강인한 야수들을 핍박하고 통제하는 것, 그것이 이 서사의 핵심이다. 이 애니메이션은 교묘하게도 우리로 하여금 맹수가 보잘것 없는 피식자들에게 학대당하는 것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만든다.

이 애니메이션이 미국에서 연령대를 가리지 않고 큰 인기를 끈 데에는 귀여운 주디의 외모 뿐 아니라 약자가 강자를 억압하는 아이러니한 서사가 미국의 주류 대중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점에 주목해야 한다. 오늘날의 미국인들을 떠올려 보자, 그들에겐 안되는 것도 많고 말하지 말아야 할 것도 많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같은 소득수준에서도 인종에 따라 교육열이 다른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함부로 지적해서는 안된다. 심지어 어린 침팬치 수컷과 암컷들조차 성에 따라 좋아하는 장난감이 다르지만 미국의 PC들은 그와 같은 생각은 관습적 성역할을 고착화시키는 잘못된 관념이라고 주장한다. 그렇게 fireman, policeman과 같은 단어는 fire fighter, police officer로 대체되었고, 남미에서 건너오는 불법이민자를 막자는 지극히 합법적인 주장을 펼치려면 무식한 텍사스 레드넥이라는 비난을 견뎌야만 했으며, 중국에서 건너온 코로나를 중국코로나라고 부르는 것은 인종차별적이라는 비난을 듣게 되었다. 어휴 피곤해.

미국의 주류 백인들은 급격하게 늘어나는 이민자들의 숫자로 인해 계속해서 자신들의 권리가 줄어드는 데에 큰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말과 행동을 과도하게 구속하는 PC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이 극장에서 이 애니메이션을 봤을때 무엇을 느꼈을까? 주토피아는 현대 인간사회와 너무나도 유사하고 유전적 차이가 존재하는 다양한 동물들이 혼재된 도시는 다양한 인종의 용광로인 미국과 닮았다. 영화 초반부터 여러 동물들이 등장하는 추격 신을 떠올려보라. 파키스탄인이 우버를 몰고, 유태인 사업가가 승객으로 탑승하며 그 옆을 한 아시안 비즈니스맨이 바쁘게 뛰어가고 또 베네수엘라에서 온 대학생이 파트타임으로 커피를 내리는 뉴욕의 일상과 닮아있지 않은가. 이성을 갖춘 동물들의 사회, 종에 따라 각자 다른 본성을 지닌 동물들, 그리고 그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 약점이 되는 곳. 미국 어린이들에게 주토피아는 판타지 만화였지만, 어른들에게는 현실을 모방한 우화였다. 이에 열광한 미국인들이 불과 몇개월 뒤의 대선에서 입으로는 힐러리를 찍겠다고 응답하면서도 실제론 트럼프에게 표를 던진 사실(링크)과 무관하지 않다.

감독 바이런 하워드는 한 인터뷰에서 이 애니메이션이 기존의 동물 의인화 애니메이션과는 다른 작품이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영화의 대표 OST에서부터 확연하게 드러난다. 도입부에서 주디는 "In Zootopia, anyone can be anything!"이라고 외치지만 결국 영화는 "Try everything"으로 마무리된다. 당신의 배경과 상관없이 뭐든지 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같은 외침으로 출발한 영화가 그저 시도나 해보라는 무책임한 말로 마무리된다는, 그런 비관적인 전개를 발랄하게 포장한 것 뿐이라면 지나친 비약일까. 결국 생물학적 본성을 극복한 것은 끽해야 주인공인 주디와 닉 뿐이고, 주목받지 못하는 기타 모든 조연들은 그들의 DNA에 따라 살아가지 않는가. 심지어 주디의 부모조차도. 참고로 주토피아의 줄거리는 원래 더 어두운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밝고 희망적인 분위기로 바꾸라는 경영진들의 주문때문에 현재처럼 밝고 쾌활한 내용으로 바뀌었다고 하니 내 짐작이 근거없는 억측만은 아닐 것이다.

본디 더 어두웠던 주토피아의 스토리 라인

사족1: 애초에 이 글을 구상한 것은 4년 전이지만 제목만 써두고 내 게으름 덕에 완성하지 못할뻔 한 수십개의 빈 글 중 하나였다. 하지만 최근 미래를 예언한 세번째 영화가 나온 덕에 귀찮음을 이겨내고 두번째 편을 완성했다. 그런 의미에서 세번째 글은 미래가 실현되기 전에 미리 올리련다. 

사족2: 주디 너무 귀여움 ㅠㅠ 

2020. 5. 18.

요코 이야기와 위안부, 그리고 정의연

최근 정의기억연대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위안부 피해자 중 가장 많이 대외활동을 하던 이용수 할머니가 정의연 대표 윤미향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촉발된 이 사건은, 그동안 정의연에 지급된 막대한 후원금이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었을 뿐 아니라 실제 피해자에게 지급되기는 커녕, 사적으로 유용되고 심지어 횡령한 혐의까지 있어 우리 모두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공적 자금인 정부의 보조금과 사적 후원금으로 운용되어온 정의연은 마땅히 모든 혐의에 대해 해명해야하고, 그 과정에서 편법/불법 사건이 있었다면 당연히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비판은 결코 여기서 멈춰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개인의 비극을 공공재로 여긴, 전후 한국사회가 겪는 수많은 마찰들 중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               *

혹시 요코이야기라는 책을 기억할까. 한때 한국 사회에서, 특히 미주 한인 커뮤니티 내에서 아주 뜨거운 이슈가 되었던 이 수필은 11살의 요코가 일본의 패망 이후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도피하는 과정에서 겪은 것을 서술한 자전적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책이 출간되자 한국인들은 크게 반발했다. 조선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일본인 처녀가 조선인에게 강간당하는 이야기, 공산주의자들이 일본인들을 조직적으로 찾아내 박해하고 학살하는 이야기 등이 실려있는데 이것이 마치 조선인들을 가해자-일본인을 피해자로 그리고 있어 한국인들의 분노를 촉발했다.

분명 역사에서 조선은 피해자고 일제는 가해자였다. 일부 일본 극우사학자를 제외한다면 이를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구도를 개개인에게 투영할 때 논쟁이 발생한다. 집단적 사고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조선이라는 국가가 피해자라는 사실은 모든 조선인들이 피해자였다는 것과 동의어가 되고, 또 모든 일본인들은 나쁜 가해자라는 명제로 귀결되지만 그것은 결코 사실일 수 없다. 모든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이 피해자와 가해자로 딱딱 나뉠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여기가 바로 두 나라의 역사적 감정이 충돌하고, 또 합의에 이르지 못하는 지점이다.

내선일체 운동 아래 일본은 조선인들에게 일본인에 준하는 권리를 약속했고 그에 따라 많은 조선인들은 일본인들과 평등한 지위를 가지가 위해 노력했다. 따라서 우리가 해방 이전 문학이나 2000년대 이전의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었듯, 악인이 아니더라도 일제 부역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수많은 조선인이 존재했다. 특히 1910년 이후 출생한 조선인들은 태어날 때 부터 일본인으로 나고 자랐으니 그들에게 있어 국가에 대한 충성은 일본제국을 의미했고, 상당수는 자신이 배운 그대로를 따랐다. 하지만 해방이 찾아오자 모두가 약속이나 한듯 독립운동가가 되었으며 그런 기만은 시간이 지나며 역사적 사실로 둔갑했다.(링크) 그렇게 모든 조선인들은 피해자로 둔갑했다. 그와 함께 조선인이 가해자였던 기억들 역시 삭제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우리의 역사교과서에서 1927년 화교배척운동이나 평양화교학살사건, 그리고 전후 미군정 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판정된 조선인들의 기록은 모두 지워졌다. 아마 역사에 특별히 흥미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위의 사건들은 모두 처음 듣는 이야기일 것이다. 만약 평양에서 학살된 중국인의 후예나 태평양전쟁시 필리핀의 조선족 군무원들이나 군인에게 학대를 당한 연합군 병사들의 후손이 우리에게 너희의 교과서는 왜곡되어 있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뭐라고 대답할까. 조선은 피해자니 조선인들에 의한 가해의 역사는 배울 필요가 없다고?

이처럼 개인의 역사를 모두 뭉뚱그려 민족의 역사로 해석한다면 요코의 비극은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녀는 일본인이니까. 설령 강간을 당하고 목숨을 빼앗겨도 쇼비니즘에 빠진 한국인들의 국민감정 앞에 그녀는 절대 희생자들의 자리에 앉을 수 없다. 이처럼 개인을 부정하고 민족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는 그 태도야말로 우리가 혐오하고 경멸하는 바로 일본 극우들의 태도와 정확하게 닮아있지 않은가. 심지어 그들이 피해자의 증언을 부정하는 방법까지도 똑같다. 한국의 많은 시민단체들은 작가 가와시마 요코가 11살 무렵이던 60년 전의 기억이 정확하지 않고, 그 증언에 세부적인 오류가 있다는 점-당시에는 인민군이 조직되기 전이었고, 요코가 증언한 대나무 숲이 함흥 일대에는 자생하기 어렵다는 등을 지적하며 진술에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단편적인 기억의 오류를 빌미로 핵심사건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본의 극우세력이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을 트집잡아 부정하는 것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하지만 피해자를 규정하는 것은 국적이 아니지 않은가. 요코와 위안부 모두 똑같은 전쟁 피해자고 그 사실은 현해탄의 어느 편에서든 바뀌지 않는다.
 
이런 쇼비니즘적 사고는 타 집단의 희생자들 뿐 아니라 우리편에게도 비극을 안긴다. 사람들이 정의연에 분노하는 이유는 마땅히 소수의 사람들과 단체가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돌아가야 할 보상을 마치 자기것인 양 남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뿐 우리 역시 정의연과 비슷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나. 2015년 일본과의 위안부 합의는 과거 전쟁범죄에 대한 포괄적인 배상이 아니라 생존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사안이기에, 이 합의를 받아들일지는 오로지 그녀들이 결정할 문제였다. 하지만 많은 한국인들은 그녀들에게 묻기도 전에 반대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윤미향이 이끄는 정의연은 그 돈을 받으면 창녀가 되는 셈이라며 피해자들을 회유했다. 결과적으로 위안부 생존 희생자들 47명 중 절대 다수인 36명이 차후 지원사업을 받아들였던 것과는 반대로 국민의 66.7%는 위안부 협상을 반대했고 이 사건은 한일관계뿐 아니라 실제 피해자들에게도 큰 상처를 남겼다. 당시 많은 피해자들은 생활고를 겪고 있었고 그들의 평균연령은 87세나 되었는데 그러면 도대체 어쩌라는 것인가. (불과 5년이 지난 지금 27명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이제 고작 20명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라.) 애초에 원고는 47명의 위안부였고 피고는 일본정부였던 재판에서 일제시대를 겪지도 않은 국민 대다수가 갑자기 방청객의 자리에서 원고석으로 난입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실제 피해자들은 조연으로 밀려났다. 이처럼 그들의 비극을 공공재로 삼아 사유화 한 것은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 당사자들과 협의 없이 일본과의 협상에 나선 박근혜 행정부나 정의연, 그리고 일반 국민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앞서 말했듯이 이 모든 태도는 전체주의적 사고로부터 비롯되었다. 개인과 전체를 분리하지 못하고 한 사람의 비극을 진영으로 판단하며 개인의 비극을 공유하는 쇼비니즘적인 태도는 도덕적으로 잘못되어 있을 뿐 아니라 갈등의 해결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일본 대사관 앞에서 책 요코이야기를 태우던 개량한복을 입은 민족주의자와 이마에 욱일기를 두르고 위안부를 부정하는 일본의 극우가 만났다고 하자, 그 둘이 합의에 이르는 길은 어느 한 쪽의 죽음 뿐이다. 과연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이 과거사가 매듭되는 것일까. 결코 아닐 것이다. 한일 양국에서 누군가는 희생자의 아픔을 사유화하는 것을 넘어 상업화했고 그런 비극은 좋은 비즈니스가 되었다. 정의연이 지난 4년간 거두어들인 기부금 수입은 50억에 육박하는데 이는 국내 프로야구 연봉순위 5위인 SK 이재원 선수의 지난 4년간 수입보다도 많다. 우리는 위안부 문제를 이용수 할머니 개인의 문제가 아닌 민족적 문제로 여겼고 정의연은 단순히 아군이라는 이유로 모든 면죄부를 받아왔다. 아니고서야 어떻게 30여 년간 회계장부를 저렇게 엉망으로 작성했는데도 단 한번의 지적없이 그 대표가 국회의원까지 되었겠는가. 

요코이야기를 쓴 작가 가와시마 요코는 1933년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태어났고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는 1927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같은 땅에서 같은 시기에 태어난 두 소녀의 삶은 B52 폭격기의 굉음과 덴노헤이카라는 외침이 뒤섞이기 시작하며 함께 망가지기 시작했고 전쟁의 시대는 그녀들에게 반백년이 지나도 씻어낼 수 없는 상처와 트라우마를 안겼다.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서로를 죽였고 탱크에 짓이겨지고 포격에 불타버린 수천만 구의 주검 앞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아픔을 술회하는 것은 흰 쌀밥에 고깃국과 함께 하나의 사치가 되었다. 매일 밤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그네들을 겁탈한 것이 몇 천 번 즈음 되었을까. 생의 마지막 장에서 죽음을 마주한 그들이 악몽의 기억들을 어렵사리 꺼냈을 때 그녀들의 가슴을 가장 아프게했던 것은 아마도 그런 일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외치는 무리들이었을 것이다. 그 두 소녀들 사이에서, 어떤 이는 누구의 아픔이 더 큰지를 따졌고, 어떤 이는 편가르기에 나섰으며 어떤 이는 그녀들을 내세워 큰 돈을 벌었다. 그녀들은 아직도 민족과 국가 앞에 개인이 지워지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비극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2020. 5. 12.

이준석, 실패한 갬블러

 
난 인터넷 커뮤니티나 페북을 잘 하지 않는다. 읽을 가치가 없는 글들에 너무 많이 노출되는 것도 싫고 또 멍청한 소리에 발끈해서 반박하느라 정작 훌륭한 글을 읽고 사색할 시간을 빼앗기는게 아까워서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미처 피하지 못하고 읽었다가 분노한 적이 딱 두번 있었는데, 한번은 아빠찬스를 쓰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왕세자 문준용님의 글이었고 나머지 한번은 박근혜와 밥먹고 지니어스 출연한게 인생의 최대 업적이신 이준석 최고위원님의 어제자 포스팅이다. 이 글을 단톡방에 두번이나 올려 억지로 읽게 만든 A야, 반드시 복수할테다.
 
민주주의에서 타인의 권리를 제한하는 것은 대단히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야 한다. 단순히 경제적, 혹은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누군가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사악한지 궁금하다면 80%가 넘는 지지율을 기록한 나치가 자국의 소수파 시민들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떠올리길. 그리고 최근 정치색 강한 이들의 단톡방을 뜨겁게 달구는 21대 총선 재검표 논란 역시 그 대표적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논란은 대개 진영논리의 연장선상에 있기 마련이다. 민주당 지지자는 200석도 넘었어야 할 결과가 불과 180석 밖에 안 나왔는데 무슨 조작이냐 할 것이고, 또 보수 지지자들은 작년 여름의 광화문 집회와 커다란 규모의 반조국 시위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이 대승을 거둔 것은 상식에서 벗어난 일이라고 믿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이 문제는 진영의 논리도 아니며 상식/비상식의 문제도 아니다. 심지어 실제 조작이 있었냐, 아니냐의 문제도 아니다. 단지 선거인과 후보자의 권리 문제일 뿐이다.
 
우리나라 공직선거법 222조(링크)와 223조(링크)는 선거인과 정당, 그리고 후보자가 선거의 효력이나 당선에 관하여 이의가 있는 경우, 당해 선거구선거관리위원회위원장을 상대로 소를 제기할 수 있는 권한과 절차를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선거소송이냐 당선소송이냐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해당 조문들은 결과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의 권리를 명확하게 보장하고 있고 나머지 조문들을 읽어보아도 그 권리를 제한하는 경우는 없다. 따라서 누군가에게 법이 당신에게 보장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려면 훨씬 더 설득력 있는 근거를 바탕으로 설득에 나서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선거가 조작되었다기보다 주먹구구식으로 운용되던 선관위의 한심함이 드러난 것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생각을 재검표를 요구하는 이들에게 강요할 권리가 내게는 없다. 그런 권한 따윈 대한민국 누구에게도 없다. 
 
하지만 이준석은 반대파를 설득하기는 커녕 윽박지르고 있다. 자신의 주장에 반대하려면 정치생명을 걸고, 유튜브를 걸고, 또 뭐 페북 아이디를 걸라고 하는데 그는 유권자들을 대변하는 정치인이지 갬블러가 아니다. 게다가 무리하게 판돈을 올려 블러핑으로 상대를 죽이려는 것이야말로 허풍센 멍청이들이 자멸하는 흔한 클리셰 아닌가. 게다가 그는 경찰수사관이나 검사나 판사가 아니라 이번 21대 총선에서 (또) 떨어진 한 후보에 불과한데 자신이 투개표 절차의 적합성 여부를 뭘 어떻게 입증한단 것인가. 정작 본인은 선거법도 똑바로 몰라서 공개토론회에서 망신당한 주제에. 당장 포털에 특정 제과회사 이름이 들어간 단어를 검색하면 빵 사진보다 선관위 사진이 더 많은데, 그럼 이준석은 선거과정중 위법적인 행위나 규정위반이 아예 없었다는데에 자신의 삼족을 멸하는 멸문지화를 걸 수 있겠나. (대신 나는 내 남은 정치생명과 파리바게트 포인트 카드를 걸겠다.)
 
그는 아마 미통당이 무너진 후 자신이 새로운 구심점이 될거란 희망에 가슴이 벌렁벌렁 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애초에 보수가 무너진 것은 우병우와 김기춘 같은 꼰대들이 다양한 목소리에 귀를 닫고 국민들을 일방적으로 가르치며 계도하려고 들었기 때문인데 이준석이 보이는 태도는 그들과 똑닮았기 때문이다. 아니면 혹시 박근혜 키즈였던 이준석이 명맥이 끊어진 진박의 계보를 잇기 위해 불통 타이틀을 승계하려는 것은 아닐까.
 
NBA에서 Rookie는 데뷔한 해에 훌륭한 성적을 낸 신인에게 주어지는 타이틀이다. 하지만 만년 중고 신인신세를 못 벗어나는데다, 경험도 없고 실적은 더더욱 없으며, 정치철학도 없는데다 유권자들과 맨날 쌈박질까지 벌인다면 그 루키의 미래는 대단히 어둡다. 심지어 이렇게 조언해 줄 측근조차 없다는 것이 그의 암담한 미래를 암시한다. 데뷔에 실패한 많은 루키들이 종종 스포츠 해설자로 전향하던데 혹시 이준석의 재능도 차라리 그쪽에 있지 않을까.
 
 
요새 가장 핫한 빵.JPG
 
 

2020. 5. 10.

주식은 어째서 강한가 (by Paul Krugman)

요새 우리가 가장 빈번하게 받는 질문은 "어째서 실물경제는 이렇게 엉망인데 주식은 강한가"일 것이다. 거기에 대해 폴 크루그먼의 짧은 글이 있으니 한번 읽어보기를 권한다.(링크) 이 글의 핵심은 주식시장은 실물경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들에게 다음의 간단한 한가지 사고실험을 해보도록 하자.


1. 우한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전세계인을 모두 죽고 단 한명이 살아남았다고 하자, 그런데 우연히 인류 유일의 생존자가 파웰 연준의장이었다고 가정하자. 이 처참한 비극의 과정에서 연준은 1,524,231번째 양적 완화에 나설 것이고 세계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을 넘어 무로 돌아가겠지만 S&P500 지수는 0이 되기는 커녕 더 오를수도 있다. 100을 만들지 100,000,000을 만들지 그것은 순전히 파웰의 마음에 달렸다.

2. 사실 당신은 닥터 스트레인저다. 영화와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당신이 외과의사가 아니라 기업의 회계사, 혹은 GDP를 산정하는 한국은행의 직원이라는 점이다. 인피니티 스톤을 모두 모은 타노스가 어떤 힘을 발휘해서 지구의 시간을 멈췄다고 한다. 하지만 특별한 능력을 가진 당신만은 그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성실한 당신은 회사로 출근해 2분기 재무제표, 혹은 GDP 통계를 작성하고 있다. 당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의 경제활동이 멈췄으니, 이번 분기 실적은 전분기 대비 -100%가 될 것이다. 이런 젠장할. 이런 끔찍한 지표는 인류 역사를 넘어 백악기 대멸종이래 처음일 것이다. 하지만 당신의 활약으로 타노스의 마법이 풀리고 사람들이 다시 활동을 시작하게 되면 3분기 GDP는 전분기 대비 무한대의 성장을 기록하게 된다. 하지만 당신을 제외한 아무도 이를 알지 못한다.


우리가 처한 상황은 1과 2의 복합적 현상과 같다. 세계 주요 경제는 전면적 셧다운에 들어갔지만 아직 죽지 않은 파웰은 공격적인 양적완화를 시행했고 셧다운이 풀리고 나면 닥터스트레인져의 장부 뿐 아니라 많은 국가와 기업의 장부가 그와 비슷해 질 것이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사람들이 코로나의 상흔을 기억하리라는 것과, 또 수많은 가계/기업들이 락다운 기간동안의 비용지출로 인해 파산할 수도 있다는 것. 하지만 정부가 각종 구제책을 내놓아 이를 막는다면 위의 사례와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경제는 나쁜데 주식시장은 좋다는 아이러니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전제를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다. 처참하게 망가진 GDP와 미국의 실업률을 내세우며 왜 주식시장은 하락하지 않냐며 고성을 지르는 것은 수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역시 금융은 다 사기야! 라는 자기위안도 당신의 수익률을 개선시키지 않는다.

1973년 피셔 블랙과 마이런 숄즈, 그리고 로버트 머튼은 옵션의 공정가격을 계산할 수 있는 방정식을 정립해서 1997년에 노벨상을 받았지만, 그 수식에 따라 산정한 옵션가격은 시장가격과 크게 차이나지 않았다고 한다. 정작 시장을 우습게 알았던 그들이 만든 펀드는 당시 역대 최대규모로 파산했다. 우리는 늘 시장을 앞서나갈 수 있다는 믿음을 잃지 말아야하지만 동시에 시장이 충분히 효율적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를 인정하고 시장이 무엇을 프라이싱하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트레이딩과 투자의 알파요, 오메가이다.

부자가 되고 싶다면 보지 말아야할 영화, Big Short

[영화 Big Short에 대한 감상은 과거에 한차례 올린 적이 있으니(링크) 본문을 읽기에 앞서 먼저 읽기를 권한다]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두가지 카타르시스를 판다. 대중들이 동경하는 월가의 고소득 뱅커들은 사실 인성 빻은 멍청이들이자 사기꾼일 뿐이라는 것, 그리고 (똑똑한 당신이라면) 그들의 헛점을 노려 큰 돈을 벌 기회가 수시로 찾아온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부자가 되고 싶은 이들은 이 영화를 보지 말아야 한다. 그 환상은 무척이나 잘못되어 있으니까.
 
금융권은 매년 대학 졸업자들 중 가장 똑똑하고 명석한 사람들을 뽑기 위해 애쓰고 그들중 가장 돈에 대한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 승진하며, 또 가장 훌륭한 시스템을 가진 회사만이 살아남는다. 그리고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기 위해 애쓴다, 낮에도 그리고 밤에도. 뭐 그러다 비도덕적인 일을 저지르다 감방에 가기도 하지만. 그리고 금융시장은 그들중 가장 뛰어난 사람에게 돈을 몰아준 뒤, 다시 게임을 시작하는 곳이다. 따라서 당신이 그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있다면 시장이 아닌 자신이 바보가 아닌지를 먼저 의심해야 한다. 명심하라, 당신은 천재도 아니고 또 금융시장에 타고난 천재란 없다. 타고난 일중독자만이 있을뿐.

트레이더가 보기에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마크 바움(스티브 카렐)의 팀원들이 자신에게 CDS를 매도한 도이치의 세일즈 지레드 베넷(라이언 고슬링)을 불러 항의하는 장면이다. 모기지 시장의 붕괴에 베팅했던 그들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기초자산이 박살나는데 어떻게 MBS의 가격이 오를 수 있냐면서. 지레드는 침착하게 그들에게 이렇게 받아친다. "당신들은 이 시스템이 거대한 사기극이라는 데에 베팅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 시스템을 믿고 있지 않냐." 사실 MBS 가격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은 은행들의 양심이 불량이어서가 아니라, 당시 연준이 7개월동안 금리를 325bp나 급격하게 인하해서 모든 채권 가격이 올랐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시점부터는 파산위험이 금리하락분을 상쇄해서 가격이 하락하는 것이 맞았겠지만, 부동산시장의 붕괴에 베팅한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모두가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믿었지 않은가. 그런 은행들이 매기는 시가평가가 하락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애초에 시장이 비합리적라는데에 베팅한 이들이 시가평가가 잘못됐다고 항의하는 것 또한 비합리적인 일이다.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 기억해야하는 것은 투자은행의 로비에서도 쫒겨나던 얼치기들이 베팅을 잘해서 수억달러를 버는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시장을 거슬러 베팅하기로 결정한 마크 바움의 팀원들이 실사를 펼치는 장면이다. (그는 가상의 인물이지만) 실제로 수천개의 모기지를 기반으로 한 CDS를 매입하기로 결정하면서 그 모기지 집 주인들, 부동산 중개업자, 모기지 세일즈, 세입자들을 찾아가 일일히 면담했고 심지어 그들 중 하나인 스트리퍼를 만나기까지 했다. 그는 평생 살면서 자신이 마주칠 일도 없던 사람들을 일일히 찾아가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조롱을 참아가며 실사를 마친 뒤 베팅에 나섰다. 99대 1의 베팅을 하기 위해서는 남들의 99배의 노력이 필요한 법이다.
 
시장에 맞선 베팅기회는 십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인데다 그 기회를 포착하려면 백배의 노력이 필요하다. 나머지 시간은 시장에 순응한 이의 몫이다. 지난 한달간 개미들이 세번째로 많이 사들인 종목이 코스피 인버스인데 우리 한국 시장에 마이클 베리와 마크 바움 꿈나무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마이클 베리는 비관론이 최고조일 때가 아니라 낙관론이 팽배할 때 시장을 거슬러 베팅했고, 마크 바움은 시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접 자기 발로 뛰어 밝혀낸 뒤 행동에 나섰다. 악재가 터진 뒤 시장이 붕괴한 뒤에 방구석에 앉아 신문기사 몇개 읽고 인버스를 사는 것은 Big Short이 아닌 그저 small gamble일 뿐이다.

2020. 5. 5.

착한 건물주, 못된 정부 그리고 빵구난 지준

착한 시리즈가 유행이다. 우한코로나 때문에 경기가 나빠지자 정부가 앞장서서 임대료를 인하하는 착한 건물주 운동을 선도하더니, 이제는 또 사지도 않은 물건의 대금을 미리 납입하라는 착한 소비자 운동을 외치고 있다. 그러면서 정작 정부는 4월 건보료를 예정대로 걷었고 6월 1일 기준으로 부과될 종부세의 공시지가를 십여년만의 최고치로 올렸으며 공기업/공무원들의 임금을 줄이거나 그러라고 압박하고 있다. 이 얼마나 파렴치한 짓인가. 타 경제 주체들에게 착해질 것을 요구하면서 정작 본인은 반대로 행동하다니. 임대료를 내리는 건물주가 착하다면, 기회를 틈타 세금을 더 올리는 정부는 못된 정부인가.

윤리적으로 무차별한 경제활동에 착하다는 도덕적 평가를 내리는 것이 얼마나 한심한지 논하기에 앞서 우리가 걱정해야할 것이 있다. 바로 연달아 빵구나는 지준이다. 지준이란 지급준비금의 약자로 은행들이 중앙은행에 예치해야하는 지급준비금적립액의 적수를 의미한다. 모든 은행은 고객 예금의 일정 부분을 중앙은행에 예치해서 자신들이 고객의 예금인출에 대비할 능력이 있음을 증명해야하는데, 간단히 말해 모든 은행은 매달 특정 날짜에 중앙은행에 특정 금액을 예금해야한다. 만약 이를 못 맞추면? 우리 세련된 금융인들은 이를 전문용어로 빵구났다고 하는데 자금부에 오래 계신 분들이라면 이 용어를 듣자마자 문득 조인트가 얼얼해지는, 그런 트라우마를 불러 일으키는 마술적 단어라고나 할까.

아마 다른 사람들은, 심지어 금융시장에 있는 많은 사람들도 이 시스템이 어떻게 운용되고 돌아가는지 별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올해는 지준이 금융시장의 주목을 받은 적이 두번이나 있다. 올해 1월에 사상최대의 지준적수가 대량으로 발생했으며 이어 4월에 다시 한번 빵구가 났다. 상세한 내용을 공개된 자리에 쓰기엔 적절하지 못하지만(과거 경제전망을 맞췄다는 이유로 미네르바를 색출해 기소한 무시무시한 나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길), 아마 각각의 날짜로 기사를 검색해보면 대충의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 뒤의 실상은 기사에 설명된 것 보다 더 심각했다고 생각하길. 그러나 그 원인은 분명하다. 정부의 실패. 2020년이 시작한 지 고작 4달밖에 안되었는데 그 중 지준이 빵구난게 벌써 두 달이다. 그리고 두번 모두 정부가 시장에서 대규모로 자금을 환수하거나 지급일정을 바꾸며 벌어진 일이다. 열심히 일하는 기재부/한은 사무관들에겐 미안하지만 이는 순전히 그들의 잘못이다. 또 그런 일이 벌어진 배경은 블로그에 쓸 수 없으니 지인들이 있다면 한번 물어보시라.

작년 미국에서 9월 그리고 12월에 일어난 대규모 단기자금시장과 비슷한 일이 올해 1월 4월에 한국에서 벌어졌지만, 그 배경은 판이하게 다르다. 정부의 정책실패로 인한 이 지준부족사태는 현재 한국경제에서 벌어지는 일의 축소판이다. 정부는 시장에 과도하게 개입하고 있으며, 정책이 필요한 순간에도 가장 멍청한 방법으로 정책을 펴고 있다. 빵구난 지준처럼 올해는 세수도 빵구나고 정부보조금도 틀어지는 등 각종 정책이 빵구나는 해가 될 것이지만 관료주의와 정치에 가려, 그 실수들을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될 것이다.

내일이 바로 5월의 지준일이다. 또다시 지준이 빵구나는 일도, 또 정부가 못된 짓을 하는 것도, 그러면서도 경제주체들에겐 착하기를 강요하는 것도 보지 않기를 바라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런 합리적인 나라에 살고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