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2. 18.

대한민국 외교, 처참한 실패

* 문재인 대통령은 12월 13일부터 3박 4일간 중국을 국빈 자격으로 방문했다. 현 정부의 지지율을 끌어내리는 두 약점-외교와 안보에 대해 중국이 가장 중요한 키를 쥐고 있는 만큼 , 청와대는 아마 해를 넘기기 전에 성과를 내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중국은 한국이 원하는 답을 주지 않았고, 마치 산타처럼 연말에 선물 보따리를 들고 오려던 문재인 대통령은 서류쪼가리와 사진 몇장만 들고 귀국해야 했다. 여러 논란을 빚은 이번 방중을 두고, 청와대는 120점짜리였다며 자평했지만 국민들의 평가는 냉정하다. 문재인의 지지율은 2.2%가 하락하며 다시 70%선 아래로 주저앉았는데, 이는 북한 도발이 멎은 이래 가장 큰 하락세이다.

* 외교는 의전에서 시작해서 의전으로 끝난다. 마치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상복에 관한 의전을 두고 자신의 목숨과 가문의 미래를 걸고 싸운 것 처럼, 외교의 승패는 의전으로 나타난다. 바로 그 의전에서 우리는 처참하게 패배했다. 한중 수교 이후 한국 대통령의 방중 행사는 항상 국가주석과 총리와 각각 한 번씩, 그리고 지방 지도부와 한번씩 만찬을 하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경우에 따라 지방 지도부와의 만찬이 생략되는 경우는 있어도, 총리와의 만남이 빠지는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는데 이번 방중에서는 처음으로 빠졌다. 중국에게 가장 구구절절한 러브콜을 보낸 문재인 대통령은 한중 수교 25년만에 가장 낮은 대우를 받고 돌아왔다.

* 그렇게 홀대받았는데 협상의 결과가 좋을 리도 없다. 사드 압박에 관한 부분은 지난 10.31 한중 합의에서 크게 나아진 것이 없고 공동 선언문 채택도 불발되었다. 더욱이 가장 중요한 중국의 대북억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답도 없었다. 미국의 통상 압박에 대항하여 공동 대응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과 같은, 고난이도의 다자외교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결국 문재인은 또 한번 중국이 발행한 공수표 몇 장만 들고 귀국했고 청와대는 방중 성과 브리핑에서 화려한 수식어와 형용사로 숫자들의 빈 자리를 메워야 했다.

* 애초에 이는 대등한 협상이 아니었다. 중국의 사드제제라는 카드는 애초에 없던 걸 만들어낸 것이고, 한국은 거기에 주권국가의 자위권을 걸었다. 이제 중국이 만약 관광을 넘 서비스업 전체, 혹은 제조업을 걸고 한국의 모든 순항미사일을 폐기하라던가, 아니면 F35 전투기의 도입을 막는다면 어찌할 것인가? 중국은 새로운 카드를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지만 남한은 나라의 주권이란 카드를 내미는 소모적 게임을 시작해야한다. 그 불리한 테이블에 자진해서 앉은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다. 그것도 울고불고 애걸복걸해서.

* 청와대와 여당 지지자는 "중국이 삐쳤으니 달래러 가는 것"이라고 표현했지만 이는 정신착란에 가까운 현실 인식이다. "달랜다"는 표현은 강자가 약자를 대할 때 쓰는 말이다. 아니면 적어도 관계가 동등하든가. 중국은 강자고 우리나라는 약자다. 약자가 화가 난 강자의 집앞에 찾아가는건 "달래"는 것이 아니라 "빌러"가는 것이다. 그렇게 치면 인조도 땅바닥에 아홉번 머리를 찧은 뒤 "내 시끄러워서 오랑캐놈들 자존심 한번 살려줬다" 하고 허세를 떨 것이다. 애초에 자위권이라는 삥을 뜯기고도  상대의 집에 찾아가 홀대를 당하는 마당에 외교와 협상, 그리고 성과를 논하는 것이 웃기는 일이다.

* 수행 기자들이 구타당한 사건에 두고 여당 지지자들은 기레기라 맞았다, 맞을 짓을 했다며 이 사건의 외교적 의미를 애써 축소하고 있다. 물론 중국에서 기자들 폭행은 가끔 있는 일이며 일부 기자들의 잘못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어쨋거나 그들은 대통령을 수행하는 기자단이다. 청와대 출입 기자들의 평소 행실과 무관하게 중국인들이 개패듯이 팬 사람은 청와대의 봉황과 무궁화와 무관하지 않다. 여기에 어찌 외교적 의미가 없다고 믿는가.

* 왕족의 권력 다툼을 다루는 한 인기 드라마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다. "왕이 자기 자신을 왕이라고 주장해야한다면 그는 왕이 아닌 것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스스로 홀대받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는 사실이 홀대받았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는 내실없는 회담에 별 관심도 없는 중국에게 매달려서 억지로 방중 스케줄을 잡은 외교 실무진의 잘못이다. 더욱이 노영민 주중대사의 이력을 보면 95년 환경운동으로 경력을 시작 한 뒤 단 한번도 외교에서, 그와 비슷한 분야에서도 경력을 쌓은 적이 없다. 이런 사람에게 맡길 정도로 어디 외교가 쉬운 일인가. 안보와 외교가 현 정부의 지지율을 갉아먹는데에는 이유가 있다. 얼른 다 잘라라.

2017. 12. 7.

네티즌보다 멍청한 경제기자들.

이전에도 여러번 지적했듯이 우리나라 경제지는 공짜로 뿌리는 광고찌라시 수준이고 경제기자들의 소양과 지식은 거의 쓰레기다. 경제기자를 하는데 필요한 스킬셋은 나이트 삐끼와 비슷한 것 같다. 둘다 창의성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늘 같은 말을 반복하고(경제가 위기다/형님 웨이터 박찬호입니다),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며(원화강세로 국가경쟁력 악화/오늘 물 정말 좋아요!) 무식하고 천박하기 짝이 없는데다가(가계부채 시한폭탄/제가 쌈박한 애들로 ㅋ 아시져?) 돈만 무지하게 밝힌다.(최고의 중소기업 ㅇㅇ, 알고보니 전면광고/아 형님 섭섭하게 왜이러실까)

이들이 어찌나 무식한지 이제는 네티즌들에게 댓글로도 까인다. 고금리와 고원화로 더블딥이 온다는 이 병신같다못해 참신하기까지 한 기사에 대한 네티즌들의 반응을 보라. 무슨 네이버 지식인도 아니고 댓글이 글쓴이를 가르쳐주고 있다니. 정치부 기자는 민주주의에 이바지하는 바라도 있지, 경제기자들은 도대체 기여하는 바가 뭔가. 심지어 스포츠 기자도 나름대로 머리를 써 가며 분석을 하는데 경제 기자는 그마저도 안한다. 하루바삐 AI로 대체되고 이 잉여인력은 건설경기 회복을 위해 노동판에 투입되길 바란다.


2017. 12. 1.

6년 5개월만의 금리 인상

* 오늘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25bp 인상하며 역대 최저금리의 시대를 마감했다. 금리 인상은 2011년 6월 이후 처음으로 이루어 진 것으로 중앙은행이 한국 경제가 오랫동안 싸워 온 디플레이션의 시대가 끝났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데에 그 의의가 있다.

* 그러면서도 금리 결정의 배경을 설명하는 중앙은행의 언어는 매우 부드러웠다. 현재 총재의 임기는 3월에 끝나는데 그 전까지 금리 인상은 없을 것을 시사했고, 신임 총재가 취임 첫 달에 금리를 움직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두 번째 인상은 아무리 빨라도 5월에나 이루어 질 것이다. 그런데 6월에 예정된 지방선거를 앞두고 금리를 올리기엔 정치적 부담이 있으니 미뤄질 가능성도 크다. 6월에는 금통위가 없으니 어쩌면 다음 인상은 7월에나 가능할 지 모른다. 결국 기준금리는 앞으로 반년간 제자리에 머무를 가능성이 크다.

* 나는 블로그에 단기 전망을 쓰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회사에서 할 일인데다, 트레이딩과 다른 투자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그런데도 굳이 한국은행의 금리 인상에 대해 언급하는 이유는 이것이 상징적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지난 몇년간 선진국의 경제발전에도 불구하고 세계 인플레는 낮게 유지되어왔다. 그리고 이는 (기술의 발전과) EM국가, 특히 아시아의 과잉투자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인플레 압력을 흡수시켜주던 아시아 국가 중에서 금리를 올리는 나라가 나왔다는 것은(혹은 올릴 정도로 경제가 성장하기 시작했다는 말은), 물가상승을 막던 범퍼가 얇아지고 있으며 내년의 인플레 압력은 어제보다 더 커질 것이라는 시그널이기도 하다.

* 다수의 외국계 은행 리서치는 내년에 연준이 금리를 올리는데 비해, 인플레는 여전히 낮게 유지되어 미국채 2-10년 수익률이 리세션 수준인 0에 이르를 것으로 전망한다.(JP 등) 나는 이들의 뷰가 빗나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재처럼 경기가 과열이 아닌데(혹은 GDP갭이 크게 플러스가 아닌데) 커브가 역전된다는 것은 Fed가 지나치가 금리를 올리는 실수를 저지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난 동의하지 않는다. 지난 10년간 가장 정확하게 경제를 전망한 조직이 바로 연준 아닌가. 지난 2011년 멍청이들이 디플레를 눈 앞에 두고 하이퍼인플레 타령을 할 때, 전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양적완화를 이어간 조직이 바로 연준이다. 당시 한국은행을 비롯한 주요 EM의 중앙은행 뿐 아니라 심지어 ECB도 금리 인상을 했는데 과연 누가 옳았는가? 또 몇년 뒤, 예전의 그 멍청이들이 이번엔 디플레로 지구종말이 올거라고 꽥꽥댈 때 과감하게 자산을 축소하고 금리를 올린 것도 연준이다. 과연 누가 옳았는가? 실수가 전혀 없던 것은 아니지만 지난 10년간 연준은 항상 옳았다. 다른 중앙은행과 민간은행들을 모두 제치고. 이렇듯 가장 우수한 경제전망 모델을 가진 연준이 내년에는 실수를 저지를 것이라고 주장한 다수의 셀사이드 리서치는 그 꽥꽥대던 멍청이 무리에 속해 있었다. 낙제생들이 모여서 전교1등이 이번엔 틀릴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그 낙제생 무리들이 틀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비단 나 하나는 아닌듯 싶다. (링크)

2017. 11. 29.

자애로운 노무현과 파렴치한 강남

몇년 전 재벌 2세 경영자가 한 노동자를 야구배트로 폭행하며 "한 대에 백만원 씩 준다."고 했던 충격적 사건이 있었다. 금권과 야만이 결합된 이 사건을 두고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속물적 농담을 주고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야 너라면 얼마 주면 맞을래?"

폭력앞에 희생되는 인간의 존엄을 돈으로 환산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니 만약 빠따 맛을 보는 대신 욕 한마디 듣는 것이라면 당신은 얼마를 부를 것인가? 만약 그 대가로 5억 10억을 준다면 자존감이 병적으로 넘치는 사람이나 재벌이 아니고서야 마다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욕죄의 처벌이 꼴랑 벌금 2백만원 뿐인데.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난 적이 있다.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2000년대 초반 참여정부는 강남을 "부패한 기득권자"라고 비난하며 지지율을 끌어모은 뒤, 그 지지를 강남 집값을 올리는데 모두 써버렸다. 노무현 행정부는 부동산 가격을 전무후무하게 폭등시켰고 그 가장 큰 수혜자는 단연코 강남이었다. 그때는 경제가 활황이었네, 강남 뿐 아니라 다 올랐네 하며 아는척 하지 마시라. 인간은 자기 취향에 따라 기억을 조작하고 안대를 끼고 아웅 할 지 몰라도 숫자와 데이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IMF이후 강남의 집값상승률이 경제성장률을 크게 앞선 적은 단 한번 뿐이었는데 그때가 바로 참여정부때였다. 또 그 시절에 강남 부동산은 전무후무한 독주를 이어갔다. 불패를 넘어 거의 폭주 수준이었다. 못 믿겠다면 데이터를 확인해 보라.

감사합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고 참여정부의 다음 세 가지 정책 때문이었다. 첫 번째, 낙인효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강남일대의 주민들을 기득권 층이라고 비난하며 부자라고 낙인을 찍었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뉴욕이나 LA, 도쿄의 잘사는 동네를 보면 부촌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주민과 지자체는 인프라를 구축하고 랜드마크 건물을 세우며 집안을 최고급 인테리어로 도배하는데에 천문학적인 돈을 썼다. 하지만 강남은 대통령이 친히 나서서 부자동네라는 타이틀을 달아준 곳이다. 그것도 공짜로. 내 집을 내 돈을 들여 새로 짓겠다고 해도 재산을 기부채납해야 하는 시대인데, 사랑받는 대통령이 나서서 온국민에게 강남은 부자들만이 살 수 있는 동네라며 무료로 광고해준 덕에 수도권과 지방 그리고 강북의 부자들은 좌고우면 하지 않고 강남 복덕방으로 직행했다.

두 번째, 지방에 막대한 땅 부자를 양산한 것. 우리가 흔히 이명박 정권을 두고 토목정권이라고 하지만 이는 참여정부 인사들이 섭섭해 할 소리다. 노무현 정부때 풀린 토지보상금이 약 100조로, 이전 정부들과 비교해서 약 2배 증가했다. 그 이후로 보상금이 그만큼 급증했던 적은 없었다. 이후 정부들은 예산증가폭이나 물가상승률에 맞추어 토지보상금을 올렸다. 이 막대한 보상금은 대부분 비강남 지역에 풀렸는데, 그럼 땅으로 부자가 된 사람들이 어디에 집을 사고 싶어하겠나.

세 번째, 강남 공급 억제책. 그러면서도 그들은 강남 집값을 잡겠다며 재건축의 바를 높이고 개발을 멈췄다.  강남의 저층지역을 개발해 공급을 늘리는 일은 재건축 초과이익환수제와 분양가 상한제와 같이 눈에 보이는 규제 뿐 아니라 은행의 창구지도나 허가요건을 높이는 등 비 가시적인 수단에 의해 막혔고 일부 정책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즉, 국가 최고 지도자가 나서서 강남3구를 부자동네라고 찍어주고 ,부자를 만들어 준 다음에, 공급 물량을 막은 셈인데 이는 주식시장에서 작전세력이 시세를 폭등시킬때 쓰는 방법과 정확하게 같다.

노무현 행정부는 이렇게 강남 주민들의 재산을 불려줬다. 압구정 48평 아파트는 노무현 취임 첫 날 부터 마지막 날 까지 5년간 10억이 올라 2배가 되었으니 강남 주민들은 토지 기부해서라도 공덕비를 세워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파렴치한 강남 주민들은 되려 그를 욕하고 미워한다. 자신들을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쌓은 나쁜 부자 취급해서 화가 났다고 하지만 강남이 참여정부 아래 누린 이득을 보라. 이것이야 말로 욕 한마디 듣고 수억을 받는 일 아닌가. 참여정부의 지지율은 임기 말에 폭락했는데, 여론과 기자들은 그 시절 정부의 최대 실책은 다름 아닌 부동산 정책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니 고 노무현 대통령은 강남을 때리며 얻은 지지율을 강남 부동산 올리는데 탕진했다고 할 수 있다. 몇몇 강남 사람들은 종부세로 세금이 크게 늘어났다고 항변 하지만, 집값 10억 올려주는데 그깟 푼돈이 대수인가. 은행에 10억을 맡기면 이자를 수천만원 주는데 참여정부는 수천만원을 줬더니 10억을 돌려줬다. 아아 그는 얼마나 자애로운 사람이었는가.  

오늘날에도 파렴치하고 은혜를 모르는 강남3구 주민들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뿐 아니라 그 후계자인 문재인 대통령까지 싫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 대통령은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설계한 김수현 수석을 등용하여 똑같은 시기에 똑같은 정책을 더욱 강하게 펴고 있다. 아 이 아름다운 사람. 그 덕에 문재인 취임 이후 이 지역의 집값 상승률은 타 지역을 압도하고 있다. 부디 어리석은 강남/송파/서초의 주민들이 하루바삐 두 대통령의 하해와 같은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성금을 모아 기념관이라도 세우길 바란다. 참고로 앞서 언급한 압구정 아파트는 문재인의 취임식 이후 10개월 간 22%가 올랐는데 이대로 가면 어쩌면 노무현의 사랑보다 그의 사랑이 더 커질 지도 모르는 일이다.

2017. 11. 25.

집을 당장 사라고 외친지 어언 3년

멍청이들의 정모: 2년 전, 공급부담으로 집값이 빠질거라는 전망을 한 기자와 거기에 달린 베스트 댓글들.


3년 전, 내가 집값이 5년 안에 2배로 오를거라고 예측했을땐 모두가 나를 비웃었다. 하지만 시장은 민주적이지 않고 또 다수결로 움직이지도 않는다. 2014년 7월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취임과 함께 디플레의 시대는 종언을 고했고 집값은 상승세로 돌아섰다. 내가 구매한 주택은 3년간 정확히 55% 상승했고 난 아직 상승세가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다. 부지런하지만 멍청한 김수현 수석과 컴플렉스에 사무친 김현미 장관의 거듭된 띨띨이 정책 덕에 서울시의 주택공급은 30년래 최악으로 치닫고 있고,  통화정책은 디플레를 넘어 인플레를 향해 가고 있으며 세계 경제의 상승세는 지난 10년 중 가장 견고하다. 해외 여행객 수는 2009년부터 단 한해도 빠지지 않고 증가하여 8년간 2.35배 증가했는데, 안해도 되는 여행에 돈을 쓰는 사람들이 살아야 하는 집에 돈을 덜 쓸까. 집값은 내 이전 전망보다도 더 크게 오를 것이다.

이 전망을 바탕으로 나는 집을 하나 더 샀다. 집값이 이정도 올랐으니 빠질 것이라고 우기는 인터넷 철부지들의 댓글과 기자들, 그리고 짝퉁 전문가들의 말을 듣지 마라. 전망은 맞을 수도, 때론 틀릴 수도 있는 것이지만 자기가 왜 틀렸는지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의 의견은 들을 가치가 없다. 본디 패배자들의 더 목소리가 큰 법인지라 인터넷과 신문에선 그들의 주장이 더 크게 들리지만 기억하라. 시장은 민주적이지 않다. 다수결에 의해 가격이 정해지는 것이라면 마세라티가 티코보다 싸게 팔렸을 것이다. 가격은 대중의 요구가 아닌 욕구에 의해 정해진다. 루저들이 입으로 뭐라고 머라고 떠들어대든, 그들에게 해외여행을 다닐 돈이 있고 더 좋은 집에 살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다면 비싼 월세를 낼 세입자는 늘 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집, 당장 사라.

2017. 11. 16.

대한민국 외교, 또 낙제

* 미국대통령이 25년만에 한국을 국빈 자격으로 방문했지만 그 성과는 미미했다. 트럼프는 국회에서 연설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아무런 메시지를 주지 않고도 감언이설을 늘어놓을 수 있는지를 보여줬을 뿐,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약속해 주지 않았다. 미국은 한국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해주지 않았고 문재인은 트럼프가 원하는 답을 주지 않았다. 이를 두고 WSJ은 한국은 못 믿을 파트너라고 평했다.

* WSJ의 판단은 정확했다. 트럼프는 유사시 전략적으로 중국을 봉쇄하는 포위망에 한국이 참여해 줄 것이냐는 질문을 던졌고 이 메시지는 미국의 인도-태평양 구상이라는 문구에 함축되어 있었다. 촌뜨기들이 외교를 담당하는 통에 우리 정부는 무슨 소린지도 모르고 이 문구를 공동 선언문에 포함해 발표했다가 후에 얼버무리는 촌극을 벌였다. 지난 한중 정상회담에서 혼자 박수치는 추태를 부려 시선을 끈 한국 외교계의 개그담당 김현철 경제수석은 "공동 선언문에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주어가 미국이므로 한국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는다"라며 2차 개그를 시도했다. 결혼식에서 주례는 신랑신부는 서로를 검은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사랑하겠습니까? 라고 물었고 신랑은 큰 소리로 네! 라고 대답했다. 결혼식이 끝난 후 신부 김현철은 기자회견을 열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으므로 신랑을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 라고 답한 셈이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했는데 이 빌어먹을 해프닝은 우리에게서 너무 가까운 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 의전은 개판과 굴욕의 연속이었다. 한국 대통령은 트럼프를 공항이나 청와대에서 맞이하는 대신 평택 미군기지에서 예방하는 파괴적 의전을 선보였다. 미군 기지는 국제법상 대사관 처럼 상대국의 관할지역이나 다름없는 지역이다. 아무 이유없이 아관파천식 퍼포먼스를 선보였으니 이는 파격 보다는 파괴라는 수식어가 더 잘 어울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 대통령은 또 한번 의전 굴욕을 당해야 했다. 사전 조율에서 트럼프의 dmz를 방문을 관찰시키지 못한 문재인은 정상회담 첫날, 떼를 써서 다음날 이른 아침에 일정을 잡았지만 트럼프는 기상상태를 핑계로 출발한 지 10분만에 돌아왔고 문재인은 꼭두 새벽부터 1시간이나 먼저 가서 기다리다 바람맞았다. 청와대는 국가 수반이 자국 영토에서 바람맞은 이 초유의 사건을 애써 축소하려고 들지만 이게 가려질 일인가. 유치원 선생님들도 소풍가기 전 날에 일기예보를 확인하는데 정말 실무자들이 안개때문에 대통령을 바람맞게 했다면 모가지를 날릴 일이다. 또 국회연설 일정이 촉박했다면 더 이른 시간에 미리 출발 했으면 될 것 아닌가. 바보 아니고서는 다 아는 일이다. 이는 결국 미국의 의중과 입장을 배려하지 않은 한국 측의 무리한 요구에 대해 미국은 중지를 펼쳐 화답한 셈이다. 최대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또 최소한의 성의와 함께.

* 유일한 성과라면 한국이 개발할 수 있는 미시일의 탄두 중량의 제한을 해제해 준 것과 미국의 전략무기를 판매를 확대한다는 것이다. 이 둘 모두 의미있는 선물이지만 25년만의 국빈 방문이라는 외교적 이벤트에 비해 소박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그마저 한국은 답례로 뭘 주지도 않았다. 강대국들도 돈주고도 못 구하는 미 전략무기를 판다는데 우리가 "사 주는" 것인가. 미국이 "팔아 주는" 것이지. 통상적으로 기브 앤 테이크가 기초 상식인 국제 외교계에서 파격을 거듭하는 천둥 벌거숭이 행보는 실제 선물에서도 들어난다. 국빈만찬 후 한국은 트럼프를 포함한 참석자들에게 돌솥과 놋수저 세트를 선물했다. 반대로 미국의 국빈만찬에서 트럼프가 리바이스 청바지를 줬다면 어땠을까. 한 네티즌은 "금수저에게 돌과 놋은 신기할지도"라고 평했지만 우리나라 흙수저들도 집들이 선물로 돌솥과 놋수저 한짝을 받으면 얼굴을 붉힌다. 이번 정권을 마치 종교처럼 여기는 일부 20대 여성들은 이런 똥센스를 적극 옹호하는데 부디 그들이 결혼할 때엔 혼수로 혼과 얼이 가득 담긴 돌솥세트 하나 덜렁 받길 바란다. 참고로 지난 러시아 순방때는 18세기 조선 보검을 돌려준 푸틴에게 답례로 종로에서 산 대나무 낚싯대를 줬다. 이를 기획한 것이 탁현민이라는데 그는 이런 선물 고르는 센스로 어떻게 여중생을 꼬셔서 섹스를 했을까?

* 언론은 트럼프의 방일과 방한을 비교하며 우리가 대일 외교전에서 앞섰다는 정신승리에 눈물겨운 노력을 들이고 있다. 하지만 실상을 뜯어보면 정 반대다. 한국이 찬밥 신세라면 일본은 햅쌀밥이다. 지금 백악관의 실질적 퍼스트 레이디는 이방카지 멜라니아가 아니다. 이방카는 아버지 만큼이나 사회적 영향력과 인맥 자금력을 갖춘 유력 인사고 멜라니아는 영어도 잘 못한다고 놀림받는 트로피 와이프 아닌가. 이방카를 일본에서 2박 3일 일정을 소화한 반면, 한국에는 1박 2일 일정조차도 오지 않았다 . 그 시간에 그녀는 집에갔다가 나중에 인도로 향했다. 미일 관계는 가츠라-테프트 조약을 맺은 이래로 가장 가까운 데 비해, 미국에게 한국은 인도랑 묶어서 도매금으로 처리해야 하는 못믿을 파트너 일 뿐이다. 잘 웃지 않던 멜라니아가 자신을 환영하는 한국 여고생들을 보며 활짝 웃었다고 한국 언론은 "급식외교의 쾌거"라는 손발 오그라드는 타이틀을 붙였는데, 기자들이야말로 급식이나 좀 더 처먹어라. 미국에선 입만 열면 발음 괴상한 모델이라고 조롱받고 일본에선 친딸도 아닌 이방카가 퍼스트 레이디 행세를 하는데 웃을 일이 뭐 있었겠나. 멜라니아가 웃다 입꼬리가 찢어지든 배꼽이 빠지든 이방카가 빠진 자리에 퍼스트레이디 외교를 펼칠 기회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 한일간 가장 다른 점은 회담 이후의 결과다. 미국의 이번 아시아 순방 아젠다는 두가지, 무역 적자 해소와 미국의 인도태평양 구상이었는데 트럼프의 정치적 목표는 아시아 국가들의 약속 보따리들을 모아 워싱턴에 풀어놓으며 지지율 반전을 노리는 것 이었다. 외교가 뭔지 모르는 급식들, 아니 이유식들은 정상회담 결과가 대통령끼리 만나 몇시간 쑥덕쑥덕 회의해서 나오는 것으로 알지만 실제로는 두 정상이 만나기 전에 이미 구체적 합의가 끝나고 정상들은 발표만 하는 얼굴마담 역할만 하는 것이다. 일본은 트럼프의 두 의제에 대해 완벽하고 가장 적극적인 답을 내놓았다. 두 나라의 정치 외교 군사 기술 산업 등 각 분야의 관료 실무진들이 서로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반면 한국은 무기분야 외에는 아무런 합의를 내지 못했다. 결국 국방부 외에는 미국과 제대로 소통하는 부서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번 트럼프 국빈방문에 있어 대한민국의 외교는 또 한번 낙제점을 기록했고 그 책임은 강경화 장관과 외교부에 있다. 강 장관은 만찬메뉴 선정에서부터 인도-태평양 구상 해명 기자회견까지, 외교부의 손을 벗어나 일어나는 일들이 많다고 투덜대지만 그건 애초에 본인이 비서 이상의 역할을 못하기 때문이다. 모질이 촌뜨기 들에게 외교 상식을 가르치고 고삐를 죄는 게 그들의 일이다. 그 일을 못하니 무능하다는 말을 듣는 것이다.

2017. 11. 13.

왜 대한민국의 청년 실업은 줄어들지 않는가?

청년 실업은 경제성장이 둔화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실패를 세계적 문제로 승화하는 이들에게 차가운 물 한잔을 권한다. 경제성장은 인당 GNI가 1만불이 넘으면 주저앉기 마련이고 3만불이 넘으면 대체적으로 3%에 수렴한다. 전 세계가 다 그런데 뭔놈의 저성장 고실업. 게다가 외환 위기 이래 우리나라의 실업률은 3%대로 안정적이었고 지난 5년간 취업자 수는 155만 명이 늘어나지 않았나. 남유럽 국가나 타 신흥시장과는 달리 한국에서 고실업은 일어난 적 없다. 일자리 수만 두고 보면 우리나라 전체의 고용시장은 아무 문제가 없다. 실업은 오로지 청년들만의 문제고 전반적 경제 상황과는 무관하다.

물론 청년실업 데이터를 보면 그 전망은 장미빛 보다는 똥색에 가깝다. 장미에서 추출한 향수 원액을 짙게 농축하면 똥냄새에 가깝다지만 이 숫자는 그냥 똥이다. 정부 발표 통계에 따르면 2012년부터 2016년까지 5년간 10-30대 근로자는 고작 2만여 명이 증가했는데, 50세 이상의 노동자는 무려 151만 명 증가하여 사실상 지난 5년 간의 취업시장을 50-60대가 독차지한 것이다. 2 대 151. 이런 스코어는 20대가 60대 할배들과 농구시합을 해도 만들기 어렵다. 게다가 새파랗게 젊은 것들이 무참하게 두들겨 맞는 쪽이라니. 이럴수가. 이렇게 대한민국의 고용시장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일자리를 두고 경쟁하고 있고 그 결과는 아버지의 승리로 귀결되는 모습이다. 기업들이 노쇠한 아버지를 선호하며 젊고 패기 넘치는 청년들을 외면하는 비정상적인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벌건 대낮의 태양 만큼이나 자명하다. 바로 청년 노동자들이 밥값을 못한다는 것.

92년생 지영씨를 고용하면 기업이 매 달 250만원의 생산성을 낸다고 치자. 그런데 그녀의 월급이 200만원이라면 기업은 지영씨를 열 명 스무 명 뽑는다. 노동시장에서 평균연봉이 올라가든 추가 노동자의 생산성이 낮아지든, 그 둘이 같아질 때 까지 뽑는다. 왜? 돈이 되니까, 그리고 보이지 않는 손이란 그렇게 작동하는 것이니까. 그런데 현실에서 일자리가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을 고용해서 투입해봤자 월급을 뽑아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물론 반대로 생산성 만큼의 월급을 준다고 하면 92년생 지영씨는 기분 나빠하며 면접장을 박차고 나갈테지만.

그러나 거시적으로 이런 실업은 장기간에 걸쳐 유지될 수가 없다. 정상적인 시장에서는 물건이 안 팔리면 가격이 내려가고, 그러면 수요가 증가해 수급이 맞게 된다. 고용시장도 마찬가지이다. 실업이 높아질 경우 임금이 내려가면서 기업의 고용 수요가 늘고 따라서 실업도 해소되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균형점에 도달하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경기가 불황일땐 단기적으로 실업률이 높을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청년 실업은 장기적으로 발생하고 있으며 현재 한국 경제는 불황과 거리가 아주 멀다. 청년들이 구직난을 겪는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중소기업들은 구인난을 겪고 있으니 청년들은 직업을 못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안 구하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우리의 핵심 질문은 왜 젊은 저숙련 신입 노동자들이 저임금을 받아들이지 않는지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3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매몰비용. 현재 취업시장에 뛰어드는 세대는 약 70%는 대학을 졸업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고용의 85%를 담당하는 중소기업 일자리의 상당수는 굳이 고등교육을 받은 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하위권 대학의 졸업자들 사이에서 두드러진다. 인기가 없는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은 자신의 4년 이라는 시간과 5천만 원이라는 등록금 투자가 취업에 별 도움이 안된다는 사실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한다. 비용만 보면 1류 대학이나 하위권 대학이나 동등하지 않은가. 본전 생각이 자꾸 떠올라 취업 눈을 낮추지 못하는 것이 아 아이들만의 잘못은 아니다. 투자에서 고작 수백만원의 손실에 손절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람 마음인데 하물며 20대의 전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학교 졸업장을 손절하겠는가.

두번째, 캥거루 족의 증가. 굶어죽는 대신 저임금 저숙련 일자리를 받아들여야 할 청년들이 버틸 수 있는 것은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처럼 고학력 실업난이 심했던 조선후기에 허생의 마누라는 고학력자 남편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나가서 상것들 처럼 밭이라도 갈라며 집밖으로 쫒아냈다. 허모씨(28세, 후암동, 고시생)에게 생활비를 대주는 부모가 있었더라면 그는 계속해서 실직자로 남았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한국처럼 자녀가 늦은 나이까지 부모님 집에 얹혀 살며 손벌리는 이탈리아 스페인 등 남유럽 국가의 청년 실업률은 EU 내에서 가장 높다.

세번째, 높아진 눈높이. 청년들은 단군 이래 최고 스펙을 자랑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단군 이래 가장 잘 먹고 잘 자란 세대다. 1990년대 강남의 초등학교 교실엔 영어를 할 줄 아는 학생이 하나 있을까 말까 였는데 이젠 시골 초등학교에도 원어민 선생님이 들어온다. 그들은 70-8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놀면서도 대학만 졸업하면 꿀빨면서 취직하지 않았냐며 부러워하지만 그 시절엔 바나나는 부잣집 애들이나 먹을 수 있는 귀한 과일이었고 고등학생들은 교련복을 입고 전직 군인 교사들에게 두들겨 맞으며 군사교육을 받는 부조리를 겪었다. 그렇게 자라 대학에 가면 학자금 대출 이런 혜택조차 없어서 부모가 소와 땅을 팔아 학비를 대야 했고 그 대학을 졸업해 취직하면 헝가리나 멕시코 노동자들과 엇비슷한 임금을 받았다. 그게 부럽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구로공단이나 동남아로 가시라. 현재 우리나라 청년들이 가장 호화스러운 삶을 살 수 있던 것은 본인들이 우수해서가 아니라 고숙련 고임금 노동자인 부모들이 그 모든 비용을 지불했기 때문이다. 회사로 치면 이제 그들은 부장의 월급으로 놀고먹다 신입사원의 연봉을 벌기위해 취직을 해야한다. 평생 강남에서 자란 20대는 강북으로 쫒겨나는게 당연한 일이고 아부지 카드로 해외여행 다니던 아들은 이제 부산으로 피서 가는 일도 부담스럽다. 하지만 곱게 자란 이 캥거루들은 이를 받아들이는 대신 세상이 부조리해서 그런거라며 투덜거리기를 택한다.

따라서 50, 60대들이 취업시장에서 20대들을 누르고 완승을 기록하는 이유도 명확하다. 상대적으로 아들딸 보다 학력 수준이 낮은 아버지 어머니들은 취업시장에서 눈높이를 높일 일이 없다. 게다가 뒤를 봐주는 부모가 있는 청년과, 부양해야할 가족이 주렁주렁 달린 부모 중 누가 더 절박하겠는가. 뿐만 아니라 가난한 개발 도상국에서 태어난 5060대는 남유럽 선진국 수준으로 자란 2030대가 꺼리는 직업을 기꺼이 택한다. 물론 아들과 아버지가 똑같은 일자리를 두고 경쟁하지는 않지만 위와 같은 과정을 거처 하청업체는 신입사원을 뽑는 대신 거래처 부장을 더 싼 연봉에 모셔오거나 아줌마 영업사원을 뽑는 것이다. 155만개 일자리 중 151만개를 휩쓴 실버 세대의 신화는 이렇게 씌여졌다.

나는 우리나라의 기업문화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 아니고 청년들이 그걸 못 견디는게 나쁘다는 소리를 하는 것도 아니다. 쓸모없이 상사 눈치를 보며 야근하는 비효율적 문화는 하루바삐 없어지는게 좋고 대졸 청년들이 졸업장을 찢어버리고 고졸자와 외노자와 어깨를 맞대고 일하는 것이 옳다는 소리도 아니다. 나는 선악에 대해 논의하려는 것이 아니라 경제학적으로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분석해 볼 뿐이다. 그리고 그 핵심은 기대와 현실의 불균형에 있다. 모두들 세계 일류 국가들과 경쟁하는 삼성 현대 LG SK를 바라보며 대학 학비를 대고 미래에 투자하지만 그들이 고용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너무나 미미하다. 대부분의 고용은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이 차지하고 있는데, 대기업과는 달리 이들 중소기업은 동남아 후진국과 경쟁하고 있고 자영업의 노동생산성은 OCED 최하위를 두고 박터지게 싸우고 있다. 여기서 미래에 우리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 지는 정치와 여론이 결정할 문제이다. 노동 집약적 산업과 동남아 스타일에서 탈피히여 중소기업들의 생산성을 강화하든 5060대가 늙어 죽을때까지 기다리든, 미래에 어떤 길을 택할지는 가치판단의 문제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오늘날의 문제가 무엇인지 그 실상부터 알아야 한다. 비록 그것이 인정하기 싫을 만큼 불편하고 시선을 맞추기 어려울 만큼 어글리 할 지라도.

2017. 11. 12.

평등을 외치는 돼지들, 그리고 안보타령을 읇는 얌체들

Global Rich List의 분석에 따르면 연봉이 3500만원이 넘는 사람은 지구상 70억 인구 중에서 상위 1%에 해당된다.(링크) 2016년 통계에 따르면 대한민국 근로자들의 평균 연봉(3,480만원)은 이미 이 수준을 넘어서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다수는 전세계 기준으로 최상위권이다. 만약 UN이 인류의 평등을 위해 지구상 상위권에 해당하는 한국인들에게 40%의 소득세를 걷어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한다면, 지금 평등을 외치는 한국인들은 그때도 계속해서 같은 주장을 펼치며 기꺼이 본 적도 없는 이들을 위해 소득을 바칠까? 아마도 그 날이 오면 그들은 현재 강남 주민들이 외치는 것과 똑같은 주장을 펼칠 것이다. 상위 1%의 배부른 돼지는 더 배부르기 위해 평등이란 가치를 도둑질해 정의의 용사 흉내를 낸다.

국경일이 되면 압구정 단지에는 태극기가 자동으로 걸리고 아파트 옆면에 프로젝션으로 대형 태극기 영상을 투사한다. 강남은 자칭 "안보 1번지"라고 주장하지만 이중국적자나 병역기피자 비율을 보면 아마 이 곳이 전국에서 1위일 것이다. 게다가 애초에 휴전선에서 가까운 파주나 국방부가 있는 용산 사람들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안전한 한강 이남의 강남구가 왜 허구한 날 안보타령을 읇는가? 정 걱정되면 군대라도 가고 반포 한강공원에 사드를 배치해달라고 청원운동이나 할 것이지. 이렇게 말과 행동이 어마어마하게 다른데 어떻게 그 이면에 안보 이외의 다른 목적이 없다고 생각하겠나.

우리는 돼지가 얌체들 보고 탐욕스럽다고 욕하고, 얌체가 돼지들보고 무임승차자라고 비난하는 촌극의 시대에 살고 있다. 찰리 채플린의 말 처럼, 이를 바라보는 외국인들의 눈에는 희극이지만 직접 겪는 우리들에겐 서글픈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아멘.

2017. 10. 30.

서민 정치인들과 진짜 서민.

  • 김현미 국토부 장관은 다주택자들을 향해 "집을 파시라"라며 강력한 메시지를 던졌지만 알고보니 본인이 2주택자임이 들어났다. 이에 대해 김 장관은 나머지 한 채는 은퇴용으로 쓰려고 마련한 것으로 투기목적이 아니라고 답했다.
  • 이기성 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은 8채의 주택을 보유해 공직자 중 1위를 차지했다는 비난에 대해, "모두 합해도 강남의 집 한채값도 안된다"고 해명했다.
  • 중기부 장관에 내정된 홍종학 후보자는 장모에게 압구정 집과 빌딩을 상속받고, 부인이 딸에게 편법으로 재산을 상속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는 홍 후보자가 이제껏 강력하게 비판해 온 부의 대물림의 전형적 사례라 내로남불이라는 비판이 거세다.
부가 죄악이요 가난이 정의가 아니니 이들이 가진 재산이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런데도 저들의 지지자들이 당황한 까닭은 알고보니 그들이 나와 다른 계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껏 나와 출신이 비슷한 줄 알고 밀어줬는데, 그가 물고 있던 수저는 내 것과는 색이 달랐다. 아뿔싸. 내 것 같은 똥색인줄 알았더니 똥 닮은 금색이로구나, 속았다.  속은 서민 지지자들은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목청을 높인다. 아니 키보드를 두드린다, 이놈의 쉐끼들. 싸늘해 진 지지자들의 여론을 마주하는 당사자들은 더욱 당황한다. 동지들 왜 이러오, 나 서민이오. 서민이 맞소. 이 자중지란을 두고 보수 일간지는 낄낄대며 조롱한다. 이 촌극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흥미롭게도 저 셋은 모두 강남에 연관되어 있다. 김현미는 강남 재건축을 콕 집어 지적하며 이들에 대한 적개심을 숨기지 않았고 이기성은 자신의 재산목록을 다 합쳐도 강남의 아파트 하나 만 못하다며 면죄부를 얻으려 했다. 홍종학은 평생 부의 세습을 반대하다가, 장모가 압구정 아파트를 준다니 덥썩 받았다. 바로 여기에서 그들이 생각하는 서민의 선이 어디에 있는지 엿볼 수 있다. 바로 한남대교와 영동대교 사이의 한강, 한마디로 강남.

2016년 기준 강남구의 인구는 약 56만명으로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1%수준에 불과하다. 서초구나 송파구를 포함해도 총 인구의 3%밖에 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서 인식의 차이가 발생한다. 늘상 사회 지도층들만 만나고 다니는 진보 정치인들은 강남3구를 제외한 나머지가 죄다 서민이라고 믿지만, 이 기준은 "진짜 서민"들의 눈높이와는 너무 다르다. 부의 피라미드에서 서민편 정치인들의 위치가 실제로 어딘지 그 좌표가 노출되자, 진짜 서민들은 그들이 결코 자신과 같은 층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네들이 어디있는지 보기 위해서는 서민들은 고개를 수직으로 꺾어 저 피라미드의 끝을 쳐다봐야 했고 실상 그 곳은 어깨를 맞대고 함께 욕하던 적폐 상류층(혹은 상류 적폐층)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알았다. 마치 동네서 껌좀 씹는다는 날라리가 우연히 독서실에서 자칭 학교 일진이라는 애를 만나 친해져서 담배 피고 미팅도 하고 수업도 째고 다녔는데, 알고보니 걔가 한성과학고 일진이라 나중에 연세대에 갔다는 소식을 들은 그런 기분일까. 현실 세상에서 이런 일이 생기면 껌 씹던 날라리는 어금니 꽉 깨물고 그 과학고 일진을 줘패러 간다. 여론도 마찬가지다. 진짜 서민들은 자칭 서민 정치인들을 패러 간다. 아니 패지는 못하니 뒤돌아서 인터넷에 악플을 단다. 과학고 학생이나 서민 정치인들이 뭘 잘못해서 화가 나는 것이 아니다. 나와 같은 편인 척 하며 내 호의를 넙죽넙죽 받아 처먹은 것이 분하고 고까운 것이다. 가재는 게편이랬더니 개가 게 행사를 했다. 초록은 동색이라 했지 언제 똥색이라 했느냐.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듯 예전의 지지율은 곧 악플로 돌변했다.

애초에 이 사단은 사람들을 부자와 서민으로 양분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심지어 수능에서도 1등과 꼴등 사이에 공식 등급이 9개나 있는데 하물며 사회계층이 두개 뿐이랴. 농촌 영농인 입장에선 도시 아파트 산다고 으스대는 것들이 상류층이고, 지방도시 사는 사람은 광역시 사는 사람을 질시하며, 광역시 주민들은 수도권 사람들을 기득권층으로 본다. 소주, 석고분진, 땀냄새 등 서민 내음 풀풀 풍기는 지옥철 1호선을 타고 퇴근하는 수도권 사람들은 관악산 넘어가기 전에 내리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며 위화감을 느끼지만 내린 이들은 또 외제차로 출퇴근 한다는 동기들을 떠올리며 짜증을 낸다. 이러한 계급 나누기는 마치 프렉탈 구조처럼 나누고 나누고 나누어도 계속 반복된다. 심지어 재벌모임에서도 급이 나뉜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 부자와 서민이라는 구도는 소규모 모임이라면 몰라도, 나라 차원에서는 존재 할 수 없는 그림이다. 게다가 애초에 "서민 정치인"이라는 말은 성립할 수 없다. 정치인이 될 정도로 잘 배우고 잘 먹고 힘있는 이를 "서민"으로 내려다 볼 사람은 평창동이나 한남동의 3층짜리 단독 주택에 살며 더 잘 배우고 더 잘먹고 더 힘센 극소수 사람들 뿐이고 그들은 대개 서민 타이틀을 달고 나오는 정치인들을 지지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신을 서민이라고 믿는 사람들이여. 자신을 서민이라고 포장하는 정치인들에게 속지 말지어다. 그들이 닳아 헤진 구두를 신고 나오든 낡은 가방을 들고 다니든 그들이 당신을 모르는데 당신은 그네들을 알 정도로 유명하고 힘 있는 사람이라면 명절 때마다 구두와 가방과 최고급 한우 세트와 에르메스 넥타이를 갖다 바치려고 대기표를 뽑는 사람들이 가득할 것이다. 그러니 애초에 빈티난다고 좋다고 지지하지 말고, 뭐 꼭 지지할거면 빈티가 알고보니 빈티지였다고 해서 빡쳐서 악플달지도 마라. 그들은 애초에 당신과 같은 리그에 있지도, 당신들의 이익을 대변하지도 않았다. 빈부격차가 가장 크게 벌어졌을때가 참여정부 시절 아니었던가.

2017. 10. 13.

찐따들을 위한 전시작전권 이전 논쟁 정리: 불가

지난 국군의 날 연설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전시작전권을 조기 이전하겠다고 밝히며 안보 불안에 불을 지폈다. 우리가 전혀 준비도 안된 상황에서, 더욱이 북한 이슈가 자신의 지지율을 갉아먹는데 저런 발언을 하는 것도 웃기지만 "작전권을 환수해야 북한이 우리를 더욱 두려워 한다."라니. 우리나라가 세계 최강 미군과 같이 싸우는 것 보다 독자적으로 싸우는 걸 더 무서워할거라는 이 기괴한 발상은 이토 준지의 만화 만큼이나 괴기스럽다. 혹시 살바도르 달리가 미술에서, 그리고 프란츠 카프카가 문학에서 초현실주의를 구현한 것 처럼 문재인 대통령도 정치에서 초현실주의를 시도하는 것인가. 하지만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과 일상의 삶은 그의 환상과 매우 다르며 국방은 절대로 초현실적 문제로 승화시킬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Q1. 작전권은 어떤식으로 행사할 수 있나?

전쟁시 작전권을 행사하는 문제에는 세가지 방안이 있다. 첫째, 한미가 각각의 군대를 지휘. 둘째, 한국이 한미 양 군을 지휘. 셋째, 미국이 한미 앙 군을 지휘. 먼저 첫번째 방안, 즉 하나의 적과 싸우는 두개의 군대가 따로 작전을 수행하는 것은 대단히 비효율적이다. 일례로 1차세계대전 당시 연합한 영국과 프랑스의 GDP는 독일의 거의 2배였지만 각자가 별도로 작전을 펼치는 비효율성 때문에 종전 직전 까지도 프랑스 영토에서 독일을 밀어내지 못했다. 그렇게 전쟁 중에도 자존심 경쟁을 하던 영국과 프랑스도 수백만명의 목숨을 잃고 나자 전쟁 말기에 연합사령부 창설에 합의할 정도로 지휘권 통합은 중요한 문제다. 두번째, 한국이 한미 양 군을 통제하는 방안은 아예 불가능하다. 미국의 자존심이 허용해주느냐의 문제를 떠나서, 한국군은 전쟁시 한반도에 전개될 핵심 전략무기를 운용할 능력이 없다. 최고 지휘권자가 가장 중요한 전략자원을 어떻게 사용할 줄 모르는데 어떻게 작전지시를 내리겠는가? 2번 역시 불가능한 대안이다. 결국 방안은 3번밖에 없다.

Q2. 전시작전권 환수는 주권의 문제다?

현재 합의에 따르면 유사시 한미 양국은 연합사령부를 창설하고 그 연합 사령부에 양 군의 지휘를 위임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게다가 모든 한국군이 연합사의 지휘를 받는 것도 아니고 후방을 담당하는 제 2군, 특수전사령부 그리고 수도방위사령부는 제외된다. 게다가 전쟁이 발발해서 연합사가 국군을 지휘하더라도 대한민국 정부가 실질적 통제권을 잃는다고 보기도 어렵다. 6.25 당시 이승만이 총참모장 정일권에게 국군이 미군보다 먼저 평양에 입성할 것을 지시하자, 유엔군의 직접 통제를 받는 상황에서도 제 2군단은 전선을 이탈, 방향을 틀어 평양으로 진격했다. 이 외에도 12.12 사태 당시 노태우가 전방 사단을 빼내는 등, 미군의 지휘권을 무시하고 한국군이 멋대로 지휘권을 행사한 사례는 드물지 않다. 현 시스템 이래서 대한민국 정부가 군사통제권을 가지지 못한다는 말은 현실을 모르는 백면서생들의 기우에 불과하다.

Q3. 우리는 작전권을 가져올 준비가 되었나?

아니다, 현재 각종 전략무기와 방위시스템을 미국에 의존하지 않고 한국이 직접 도입하려면 예산의 약 3%에 달하는 국방비 지출이 두배로 늘어나야하는데 이는 순수 복지예산을 전부 삭감해야 조달할 수 있는 금액이다. 게다가 이는 북한을 상대하는 상황만을 상정한 것이며 잠재적으로 중국이나 일본을 견제할 군사력을 확보해야한다면 그 지출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북한은 남한보다 인구는 1/2, 총생산은 1/48에 불과하다. 따라서 같은 군사적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북한의 남성은 군 복무 기간이 무려 10년에 달하는 데다, 여자도 5년간 군복무를 해야한다. 중국의 총생산은 남한의 10배고 일본은 3배이며 인구로는 중국이 남한의 28배, 일본이 2.4배다. 미군을 뺀다면 이제 우리가 북한의 처지로 전락할 차례다. 당신은 그럴 준비가 되었는가.

Q4. 작전권 환수가 동북아시아 정세에 미치는 영향은?

이건 교복마이 깃 세운 중딩의 가오잡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동아시아 주요국 남한의 군사작전권 독립은 당연히 주변 국가에게 영향을 주는데, 특히 일본의 평화 헌법 개정과 사실상 맞물려 있는 문제다. "주권국가" 일본이 군대를 보유 못하는 헌법을 유지하는건 미군이 공산국가 중러로부터 지켜주고, 자유진영 한국과는 사이가 나쁘지만 그 군대를 미군이 지휘하는 형식이라 가능했던것이다. 실제로 미국 입장에서 한국 전작권 이양 협상과 일본의 평화헌법 개정 허용은 같은 맥락에서 이뤄져 왔다. 우물안 개구리로 국내뉴스밖에 안보는 사람들은 절대 몰랐겠지만. 또 일본은 전범국가라 그런 것이고 우리는 자주국가라 전작권을 가져와야한단 도덕책 낭독하는 골빈소리도 집어치워라. 애초에 세상이 도덕책처럼 안되니 군대를 보유하는 것 아닌가. 일본이 재무장한다고 해서 남한이 할수 있는게 뭐 있나? 기분 나쁜 것은 기분 나쁜 것이고 안되는 일은 안되는 일이지 구한말 고종 수준의 국제정세 인식 가지고 21세기를 살아갈 순 없다.

Q4. 왜 전쟁부터 할 생각을 하나? 평화를 위해 주한미군을 철수하자.

간첩 신고는 111.

유아와 성인을 구분하는 차이 중 하나는 하고 싶은 것과 할수 있는 것을 구별하는데 있다. 대한민국 국민 중 누가 전작권도 가져오고 스텔스 전투기도 200대 쯤 도입하고 항공모함을 건조해 북한과 일본을 혼내주고 중국에게 큰소리 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그런 PC 게임용 판타지와 우리가 두발 딛고 서 있는 현실은 매우 다르다. 비용을 계산하지 않고 명분만 따지는 논쟁은 그저 소모적인 파티에 불과하다.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얼굴 앞에 인의예지를 따지던 정묘호란때의 척화파와 구한말 선비들이 겹쳐 보인다. 내년 쯤 이 멍청이들은 미국 학생들이 한국어를 배우지 않으니 우리도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지 말자고 주장하지 않을까. 화이팅.

2017. 10. 5.

미래를 예언한 영화들 1부 킹스맨과 브렉시트

대중의 영화취향을 들여다 보면 그들의 정치적 선택을 가늠할 수 있다. 사람들이 영화에 기대하는 바와 정치에 기대하는 것이 엇비슷하기 때문이다. 대중의 억압된 욕망을 해소시켜주며 돈을 끌어모으는 영화의 흥행방식은, 정치인들이 표를 끌어모으는 방식과 대단히 유사하다. 게다가 정치와 영화는 타겟층마저 똑같다. 누구나 극장에 갈 수 있듯 누구나 투표를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영국인들의 욕망이 투영된 이 영화, 킹스맨은 브렉시트의 전주곡이었다. 이제 그 노래를 다시 풀어보자.
맨 오른쪽이 평민 출신 주인공 에그시
영화는 잉글랜드 서민층의 신데렐라 스토리다. 주인공 에그시는 영국에서도 찢어지게 가난한 슬럼가 출신인데, 심지어 거기서도 골목대장 출신이나 범죄자 꿈나무도 아닌 그냥 찐따 똘마니로 나온다. 동네 깡패들에게 맞고. 엄마 남친 깡패 대장한테도 맞고. 맨날 맞는다. 그렇게 헬조선의 쌍팔년도 이등병처럼 쳐맞는게 일과였던 주인공은 갑자기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고 어쩌다 뭐 비밀 조직에 들어가게 된다. 거기서 금수저 도련님들을 만나지만 그들을 모두 제치고 구원자가 되어 폼나게 정장도 입고 스웨덴 공주한테 찐한 섹드립도 날리는, 출세한 개룡남에 등극한다. 이제까지의 스파이 첩보 액션영화가 영국의 젠틀한 젠틀맨들이나 피지컬이 우수한 몸짱들의 손에 이끌려왔다면, 킹스맨의 줄거리는 신박하게도 브리티쉬 찐따가 이끌어간다.(아메리칸 찐따가 주인공인 액션을 보고 싶다면 원티드를 보시라.) 잉글랜드 중하류충의 카타르시스는 마지막 장면에서 극대화된다. 서민들이 죽어가는데 자기들끼리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 한손에 샴페인 잔을 든 고오급 상류층 사람들의 머리가 폭죽처럼 차례차례 펑펑 터지는 그 장면을 보며, 참수된 귀족들의 머리를 들고 환호하는 프랑스 대혁명을 떠올리는 일이 어렵진 않으리라.

이 대한민국 아침드라마 급의 신분상승 스토리는 스케일을 키워 국제적으로 확대된다. 그리고 바로 여기가 이 영화의 셀링포인트다. 현실 국제무대에서 영국이 주연에서 쫒겨난 지 수십년이 지났는데 영화에선 인류를 구하는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뭐 이정도의 국뽕가지고 뭘,이라고 넘기기엔 미국인 악당에 묘사가 너무 적나라하다. 발렌타인 박사는 혀가 짧아 발음도 이상한 영어를 구사하는데다, 손님에게 정찬으로 맥도날드 감자튀김을 내 놓는 경박스러움 까지 갖췄다. 이 모두는 영국인들이 평소에 미국인들을 조롱할 때 쓰는 전형적 클리세들 아닌가. 이 잉글랜드의 아메리칸 까기는 교회 액션 신에서 절정을 이룬다. 미국 교회는 종교적 관용도 없고 유색인종, 성적 소수자를 다 사탄의 아들로 싸잡아 비난하는 광신도 집단으로 나온다. 그 미국인들은 발렌타인 박사의 조종으로 미치기 전에 이미 반쯤 미쳐있다. 감독이 왜 이 액션 신을 쇼핑몰이나 극장, 혹은 학교가 아니라 교회로 잡았는지 생각해 보시라. 스크린 저 너머로 영국인 감독이 미국인들을 향해 내미는 중지가 비치지 않는가.

결국 킹스맨은 앞서 말한대로 영국 중산층이 상류층에게, 그리고 미국인에게 느꼈던 컴플렉스를 적나라하게 해소하는 신분상승 판타지물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를 보며 가장 큰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사람들이 바로 브렉시트를 주도한 계층이라는 것이다. 마지막 투표함의 개표가 끝났을 때 영국인들은(그리고 전 세계인들은) 이 투표는 영국을 반으로 가른 계급투표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United Kingdum의 사실상 비주류에 속하는 웨일즈와 스코틀랜드, 그리고 중절모를 쓰고 거들먹거리길 좋아하는 런던의 잘난 젠틀맨들은 브렉시트에 반대한 반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잉글랜드 서민들은 영국이 EU를 떠날 것을 요구했다. 왜 그들은 영화속 에그시에게 열광하며 EU탈퇴를 주장했을까?

브렉시트 투표의 결과-노란색: 반대/파란색: 찬성
그 답은 영화 안에 있다. 영화 속에 간간히 비치는 몰락한 공장지대가 암시하듯 영국의 산업경쟁력은 후퇴하기 시작했고 그 자리를 금융과 같은 서비스업종이 메웠다. 영국이 21세기에 주력으로 삼은 이 신 사업에 자기자리 한켠을 차지하는 것은 고학력자 상류층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게임이었으며 수많은 고졸 에그시들은 고향의 작은 펍에 앉아 낮에는 공을 차고 밤에는 펍에 모여 에일 잔으로 테이블을 두들기는 것으로 분노를 해소해야 했다. 청년 실업률이 20%에 이르고 세계 GDP에서 영국이 차지하는 비율이 반세기만에 반토막나자 그들의 사회적 지위는 더욱 내려갔으며 이윽고 그들의 불만이 수면 위로 등장하게 된다. 성난 그들은 신분상승 포르노, 킹스맨을 보며 열광적으로 자위하는 동시에 현실세계에서 "강한영국"이 재건되길 원한다. 솔직히 그들은 브렉시트를 통해 어떻게 강한 영국이 되는지 별 관심이 없다. 그저 브렉시트를 추종하던 정치인들이 EU에서 탈퇴하면 영국이 더 부강해진다고 주장했으니 찬성표를 던진 것 뿐이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게 아니다. 관객이 킹스맨을 보고 나에게 저런 일이 일어날 확률을 계산한 뒤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듯, 대중도 브렉시트가 정말 좋은 것인지 생각하고 투표한 것이 아니다. 다만 막연하게 영국이 EU의 규제와 법령에 얽매이는게 싫다는 자존심 투표를 한 것이다. (그래서 투표 다음날, uk google의 최다검색어는 "what's brexit?"가 됐다) 전세계는 이를 두고 영국인들을 조롱했지만, 그들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투표 저변의 심리를 깨달아야 한다.

킹스맨이 제공한 카타르시스, 그리고 무기력한 영국에 대한 대중의 분노. 이 둘의 뿌리는 맞닿아있었으니, 이는 바로 꺾인 잉글랜드의 욕망이요, 침전하는 중하류층의 꿈이었다. 전세계인은 영화를 보며 머리가 터지는 불꽃놀이에 열광할 것이 아니라 왜 첩보 액션영화의 주인공이 제임스 본드에서 깡촌의 문제아로 바뀌었는지 눈치 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문제는 비단 영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서 어떤 영화가 트럼프의 당선을 예견했는지 보자.

대한민국의 부패의 근원을 공개합니다.

그건 바로 너.

딴데 돌아보지 마라. 대한민국 부패의 원흉은 바로 이 글을 읽는 당신이다. 만약 김기춘 일당이나 종북 좌파, 공무원들 혹은 재벌일가가 나올 줄 알았다면 당신은 부패한데다 머리까지 나쁜 꼴통이니 더 기분 상하기 전에 그냥 글 닫고 나가라. 나는 뭐 국민들이 투표를 잘 안해서, 혹은 시민들이 감시기능을 소홀히 해서 부패가 만연한다는 간접적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다. 그냥 당신이 썩어서 대한민국이 썩은 것이다.

99%의 사람들은 자기는 나름 성실하게 살아가는데 위정자들이, 혹은 가진 자들이 부패해서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윗대가리들은 죄다 썩었는데 아랫사람들은 청렴한 사회가 단 하나라도 있는지 예를 들어 보시라. 최순실과 박근혜의 윤리/도덕의식 수준이 대한민국 평균에 비교해 유난히 썩었나? 전혀 아니다. 당신도 똑같이 썩었는데 단지 무능해서 청와대에 들어갈 능력이 없던 것 뿐이다. 김영란법이 시작되니 파리 날리는 고급 음식점과 내가 접대를 안받으면 나라가 망한다고 지랄하는 기레기들을 보라. 또 상대가 사기업이라고 안심하고 네가 거래처 법카로 밥 얻어처먹는 건 배임이 아니라 관례라고 생각하는 당신의 뇌구조는 돈받고 깜방간 정치인들과 똑닮았다. 당신은 뇌물과 향응을 "안"먹은게 아니라 병신이라 "못"먹은 것이고 정치인들이 수억 수십억 먹는 동안, 거래처 영업사원이 당신에게 돼지갈비를 사준건 당신 능력이 꼴랑 5만원짜리라 그런거지 수만배 더 깨끗해서가 아니다. 절대 아니다.

세월호가 침몰했을때 많은 이들은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혼자 달아난 이준석 선장을 찢어죽이라고 욕했지만, 오늘도 길거리에 나가면 수많은 이준석을 만날 수 있다.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는 차들, 불법유턴, 오토바이 헬멧 미착용, 무단횡단. 새벽 1시에 강변북로에 가 보면 규정속도를 준수하는 차들이 거의 없다, 그들은 그렇게 달려 집에가서 이준석을 욕한다. 아마 이준석도 세월호 사고를 내기 전엔 당신네들과 똑같았을 것이다. 불법과적을 하고 회사돈을 개인적으로 유용했다고 유병언씨에게 무려 5억원의 현상금을 내걸고 마치 공비 잡아죽이듯 전국을 뒤지고 다니느라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 법인카드로 물건을 대량 구매하고 포인트는 자기가 챙기거나 거래처에게 명절 선물 얻어먹는 것은 뭐 그럴 수 있는 일인데 부자들이 떡값 돌리는 건 개쓰레기 취급을 한다. 이사람아. 재산 5억 모아놓고 5만원짜리 선물 타먹는 당신이나 5조 재산에 5억원 떼먹은 사람의 양심이 뭐 그리 다르겠나. 다른건 통장잔고 뿐이지.

또 강남 부동산으로 검색하면 나오는 인터넷 기사의 댓글란을 보라. 저 투기꾼들 때문에 내 인생이 개판이라는 발광이 태반이다. 부자들의 강남 부동산 투기를 신명나게 비난하던 이들은 곧 인터넷 창을 닫고 키움증권에 접속해 개잡주에 투기를 한다. "아 이 잡주는 필수재가 아니잖아!"라고 항변하면서. 옘병. 그럼 강남 부동산은 필수재냐. 강남구 인구는 전국민의 1%밖에 안되는데 강남에 살아보지도 않은 99%가 강남 부동산을 쳐다보며 침을 뱉는다. 어떤 이는 투기꾼들이 강남구 집값을 올리면 전국으로 퍼져 전국 집값이 오른다는 신박한 논리를 펴기도 한다. 97년 이래 강남 집값이 3-4배 뛰는 동안 담배값은 4.4배, 시내버스는 3배, 삼겹살 1근 가격은 4.52배가 뛰었는데, 그럼 강남의 몇몇 투기꾼이 대한민국의 상품가격과 통화량을 결정한단 말인가. 그럼 통화정책을 담당하는 한국은행은 뭐하러 남대문에 있나, 압구정에 있어야지. 결국 강남의 실질 가격은 대부분의 한국인과 전혀 상관이 없는데 남탓하기 좋아하는 멍청이들은 자기들이 집을 못 사는게 강남 투기꾼들 때문이라며 꽥꽥거린다. 이보소. 강남 집값이 반토막 나는 상황이 오면 당신과 당신 친구들은 이미 다 짤리고 한강에서 투신하고 있을거요.

대한민국의 부패가 없어지지 않는 것은 그 구성원들이 죄다 부패했기 때문이다. 역대 중국 왕조나 조선에서 끝없이 탐관오리들을 척결했는데도 불구하고 나라가 망하는 그날까지 부패가 끊이지 않았던 것은 딴 사람들이 죄다 고만큼 부패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청백리의 미담은 대부분 조작된 것으로, 뇌물먹던 김대감이 뇌물먹던 정판서랑 싸워 이겨서 역사에 자기 이름을 청렴한 김대감으로 기록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당신과 부패한 대중은 마치 마르지 않는 샘 처럼 부패한 고위공직자를 무한정 공급한다. 부는 지혜를 의미하지 않고 가난은 선을 대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제발 뉴스보며 자긴 깨끗한 척 도덕적 딸딸이좀 그만 쳐라. 역겹다.

드라마 구해줘-자기는 아닌 줄 아는 모두들

[나는 기독교인이다]

*    크리스찬들이 이 드라마에 반발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한국 기독교의 폐쇄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작중 구선원이라는 종교는 누가 봐도 기독교의 교리와 용어를 차용했고 포교의 방식이나 예베의 방식 역시 많은 교회의 모습과 대단히 유사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평소 프로불편러에 유난떨기 좋아하는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이 드라마를 비난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 드라마는 "이단"종교에 관한 것이며 "정통"인 자신들과는 전혀상관없는 이야기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기독교는 자신과 세세한 교리 하나만 달라도 악마로 매도하는 폐쇄적 종교이다. 기억하라. 기독교인들은 자신과 전혀 다른 불교나 유교와는 대화할 수 있지만 딱 1%가 다른 종교는 사탄으로 취급한다. 가장 극심한 종교전쟁은 같은 신을 믿으면서 이름만 야훼, 여호와, 알라라고 다르게 부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졌다.

*    하지만 애초에 이단이 아니었던 종교가 어디에 있나. 유대교에서 갈라진 예수는 거짓 선지자로 처형당했고 거기에서 가톨릭과 정교가 갈라졌으며 후에 이슬람교를 낳았다. 또 가톨릭은 신교의 목사들을 불태웠고 그 신교는 신대륙과 식민지로 퍼져나가 수많은 분파를 낳았다. 일부 사람들은 이단은 신도의 돈과 시간을 뺏고 거짓말을 한다고 하지만 세상 어떤 종교가 신자들에게 돈과 시간을 요구하지 않는가, 또 거짓말을 안 하는 종교가 어디있나. 가톨릭은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라고 구라를 쳤고 또 근 300여년간 지동설을 부정했다. 기독교의 거짓말이 듣고싶다면 목사님의 손을 이끌고 스미소니언 자연사 박물관에 가 보라. 이단은 여신도들을 성적으로 학대한다? 가장 많은 성폭행을 저지르는 것은 기독교 목사들이다. 더 나아가 기독교 목사들의 성범죄율은 모든 전문직 중 단연 1등이다.(링크) 결국 이단을 판별하는 조건은 단 하나다. 내가 믿는건 정통, 너가 믿는건 이단.

*    무신론자나 비종교인들은 자신들을 합리주의자라고 포장하며 종교인들의 맹목적 믿음을 조롱한다. 멍청이들. 우리 모두는 무언가를 믿는 종교인이다. 누구는 야훼를 믿고 어떤 이는 천수관음보살을 믿으며 다른 이는 조상신이나 풍수지리를 믿는다. 혹자는 자유대한민국을 믿고 몇몇은 진보의 가치를 믿으며 강원래는 황우석 박사를 믿었다. 맹목적인 믿음은 인간의 깊은 본능이고 모든 믿음은 맹목적이다. 아브라함은 그 믿음에 따라 아들 이삭을 죽이려하지 않았나. 다만 우리가 믿는 수많은 대상 중 아주 일부분이 종교로 분리될 뿐이다. 거기엔 아무런 논리적 잣대도 기준도 없다. 단지 관습에 따를 뿐. 결론적으로 우리 모두는 종교인이나 다름없다.

*     아마 이 드라마의 가장 큰 피해자 중 하나는 배우 박보검일 것이다. 그는 자신이 다니는 소수종파 교회의 여름캠프광고를 sns에 올려 대중의 비난을 한몸에 받았다. 일부 사람들은 아무런 비행도 저지른 적 없는 이 남자배우를 드라마의 구선원 신도들과 동일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는 아무런 논리적 연관성이 없다. 이 배우의 sns에 악플을 다는 우리나라 2030대가 헌법 1조 1항을 신나게 외워 대던 것이 불과 반년 전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헌법 20조 1항에는 모든 국민들이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고 되어있다. 자기 편한대로 각 조항을 취사선택 할 것이었다면 애초에 헌법은 왜 들먹였나. 하기사 그 난리를 쳐 놓고도 2030대 투표율은 가장 낮았다. 쪽팔리게. 뭐 세월호 추모예베에 가서 눈물 흘려놓고 세월호 굿은 샤머니즘이라 미개하다며 침 튀겨가며 욕하는 돌대가리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것이 비합리적이긴 하다만.

2017. 9. 25.

남녀의 사회적 진실 II-82년생 김지영

0. 우리가 성평등 문제를 바라볼 때 첫번째로 저지르는 실수는 양 성을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눈다는 것이다. 수컷은 가해자, 그리고 여성은 피해자. 하지만 과연 그런가? 이사하는 날 불려온 인부가 전부 아줌마라면 여자들은 이야 평등한 세상이다! 하고 좋아할까? 아님 업체에 항의전화를 넣을까. 남자 청소부가 여자화장실의 변기를 닦고 있다면? 옆집 아줌마는 의사라 돈을 버는데 아저씨는 무직으로 집안일을 하신단다. 여자들은 그집 아저씨를 백수라고 하지 않고 내조의 제왕이라고 불러주는가?
 
만약 성차별의 가해자가 오로지 남자들 뿐이라면 성평등은 남자들이 정신차리면 되는 일이고, 또 여자들이 합심하여 아들놈을 잘 교육시킨다면 한세대 만에 사라질 문제이다. 그러나 이 골칫덩이는 아직까지도 희대의 난제로 남아있다. 그 이유는 남자 뿐 아니라 여자들도 정신차려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도 결국 아들을 못 낳는다고 구박하는 것은 할머니고 막내아들을 편애하는 것은 어머니다. 성차별에 있어 가해자는 사회 전체이며 희생자는 남자와 여자 모두다. 물론 여자들이 더 많은 피해를 보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건 기울어진 운동장의 문제지 그 윗동네에 서 있는 사람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더 다친 성이 덜 다친 성을 문제의 근원으로 모는 일이 해결을 어렵게 만든다. 금성과 화성을 오가는 일 보다도 더.
 
1. 가사노동과 육아는 남녀가 공평하게 부담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가정 외의 책임 역시 공정하게 분배되어야 한다. 하지만 둘다 지켜지지 않는다. 요리와 빨래는 주로 여자의 몫이며 착한 남편은 이를 "돕는다". 반대로 그 집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것은 남자의 직업이며 여자들은 삼삼오오 모여 남편이 자기에게 선물한 백을 꺼내서 자랑하지, 자기가 남편에게 무슨 차를 사줬는지를 두고 자랑하지 않는다. 아내에게, 그리고 남편에게 다른 성역할을 강요하고 압박하는 것이 어찌 한 성의 문제인가. 남자와 여자(게이와 레즈비언과 트랜스젠더)를 포함한 사회 전체의 문제이다.
 
2. 사회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성차별이 지워지지 않는 핵심 이유는 성에 따라 부담하는 의무가 다르기 때문이다. 바로 군역. 우리나라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따르면 실질적으로 여자들은 국방의 의무를 지지 않는다. 하지만 의무의 면제는 필연적으로 권리의 박탈로 이어지며 여자는 군대를 갈 수 없을 정도로 신체적으로 열등하다는 차별은 병영의 담을 넘어 사회로 확산된다. 다음 사례를 보자. 모 의대 외과교수 A씨는 여학생들을 뽑지 않는다. "여자들은 신체적으로 약해서 힘든 외과의사가 맞지 않아." 몇몇 여자들은 자신은 외과의사를 하기에 체력적으로 부족하지 않다고 항변하나, 매번 남자 동기들에게 밀린다. 모 회사 B상무가 연말에 임원승진 후보자들을 심사하고 있다. 어느 회사나 일은 고되고 힘들다. 군대 역시 고되고 힘들다. 군필인 남자 후보와 헌법상 군대를 못갈정도로 나약한 여자 중 누가 승진에서 유리하겠는가? 권리와 의무는 동전의 양면처럼 완전히 붙어있다. 조선시대 노비들이 세금을 내지 않은건 특혜가 아닌 차별이었듯, 처음부터 군역을 이수할 기회를 박탈당한 여성들은 이어 사회 곳곳에서 차별과 싸워야 했다.
 
일부 페미니스트 여자들을 제외하면 많은 여자들이 그 차별을 묵과했다. 여자들을 보호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꼰대 남자들도 그 차별을 당연시한다. 그 둘 모두가 가해자다. 모든 차별은 득과 실을 동반한다.(대개 한쪽이 더 많은건 사실이지만) 명절때 남자아이들만 데리고 성묘에 가는 것과 아들들에게 재산을 더 많이 상속해주는 것은 같은 정확하게 같은 차별에서 나온다. 내가 꼰대 남성들 뿐 아니라 차별의 혜택을 계속해서 누리려는 여자들 역시 가해자라고 비난 하는 이유가 어기에 있다. 편견을 없앤다는 것은 단것만 삼키고 쓴것만 뱉는 것이 아니라 달던 쓰던 맵던 자시던 간에, 한 사람을 비틀어진 성역할 안에 가두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깨인 페미니스트들이 국방의 의무를 달라고 투쟁하는 것이다. 그들이 남성을 동경하는 톰보이라 군대에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모든 차별을 정복하고 섬멸하기 위해서.
 
3. 많은 사람들이 군대와 출산을 비교한다. 논리적으로 어떤 두 대상을 비교하려면 그 둘이 비슷한 속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엄마와 아빠, 버스와 자동차, 곶감과 배. 하지만 전혀 다른 대상은 비교하기가 어렵다. 셔먼 탱크와 아름다움, 산들바람과 목성의 위성 이오니아, 그리고 사회적 의무와 생물학적 기능. 그러니 저 둘은 애초에 비교할 것이 못된다. 임신이 사회적 의무라면 모를까. 하지만 신체 건강한 모든 여자에게 애를 둘 이상 낳지 않으면 징역형을 살아야 한다든지, 혹은 폐경기에 임박한 여자가 애가 없을 경우 국가가 강제로 임신을 명령하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그런 혐오스러운 주장을 하는 인간들과는 말도 섞고 싶지 않다. 의무와 자유를 비교할 정도로 멍청한 인간들과도 말 붙이기 싫은건 마찬가지고.
 
4. 한 여성의원이 남성의 역차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접힌 종이가 있다고 하자, 그 종이를 반듯하게 만들기 위해선 접었던 부분을 펴는 것 만으로 모자를 때가 있다. 때론 반대로 접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난 남성에게 역차별을 가해 여성의 권익을 보장하는데에 찬성한다. 물론 그 시작은 가장 큰 피해자인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82년생 지영씨지만 가장 부당하고 억울한 삶을 살아온 것은 22년생 할머니고 그 다음이 52년생 어머니일 것이다. 아마 현재 92년생 지영씨의 사정은 좀 더 나을 것이다. 차별에 대한 보상 역시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페미니즘이 뭔지도 모르면서 악에 받쳐 꽥꽥대는 가짜 여성인권주의자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진짜 피해자에 대한 보상은 마치 후순위 채권처럼 리스트의 저 아래에 있다. 나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당한 차별에 대한 댓가를 왜 저들이 타가는가. 그들은 권리에만 민감하다. 국민의 4대 의무중에서 한 것이라곤 교육 하나밖에 없으면서. 저리 멍청한 걸 보니 과연 그 하나라도 잘 이행했을까 의문이 든다.
 
종이를 반대로 접어주는 일은 인구 피라미드의 위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황혼 이혼을 쉽게 한다던지, 그 이후에도 여성이 재산 분할시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보호한다던지. 사회적 편견을 뚫고 올라온 여성의 고위직 승진을 우대한다던지. 가장 지독한 차별을 뚫고 살아온 피해자들을 제치고 2030대 여성부터 치료하는 현재의 성평등 정책은 분명 재고해볼 여지가 있다.(하지만 아예 안하는 것 보다 나으니 비판하지 않겠다.)
 
5. 이 소설인듯 소설아닌 소설같은 책의 소설적 요소는 첫 세 페이지에 몰려있다. 나머지는 진부하다 못해 곰팡이 냄새가 날 것 같은 클리셰들을 늘어놓다가 끝난다. 아침드라마에서 시청률이 가장 낮았던 장면들을 글로 옮긴다면 아마 이 소설이 되지 않을까. 출처를 잊었지만 누군가는 이 소설을 다음과 같이 단 한줄로 평가했다. 창작은 어려운데 자꾸 쉬운길로 가려고 한다고. 뭐 현실을 재구성한 것도 하나의 창작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현실도 때론 소설만큼이나 소설적이니까.
 
그 좋은 예로 트라팔가르 해전의 승장 호레이쇼 넬슨제독의 러브 스토리가 있다. 역사의 판도를 바꾼 그 해전에서 영국인들에게 승리라는 유산을 남긴 넬슨은 연인 엠마 해밀턴 부인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의무를 다했단 사실에 감사하오" 하지만 엠마를 비롯한 영국의 여성들은 영국의 찬란한 승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역사에서 조연에 머물러야 했다. 죽어가면서도 허세를 부린 넬슨이 자랑하던 그 의무라는 것은 오로지 남자들에게만 부여된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여성들은 그 다음 세기에도 식사가 끝나면 남자들이 위스키와 시가를 즐기며 정치를 논하는 자리에 끼지 못하고 홍차에 우유를 부어 마시며 뒷방에서 가쉽거리를 재잘거리는 자리에 머물러야 했다. 투표를 할 수 없던 것은 물론이고. 영국에서 여자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것은 그 다음 세기인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이다. 빅토리아 시대와는 달리 현대의 전면전은 모든 성인 남자들을 전선으로 빨아들였고 군수공장의 빈자리는 여성들이 메워야 했다. 전쟁이 끝난 후 20세기의 엠마들은 자신들이 짊어진 의무에 대한 응당한 보상을 요구했고, 처칠같은 꼰대들이 반대했지만 수백만명의 독일군도 물리쳤던 그들조차 치마 대신 머리띠를 두른 그녀들을 막을 수 없었다. 그렇게 의무를 다한 영국 여성들은 1928년부터 참정권을 따냈다. 당당하게. 그 앞에서 묻는다. 오늘날 한국의 여성들은 과연 어느 세기에 살고 있는가?

2017. 9. 21.

부는 어떻게 유전되는가?

A씨는 "최근 대출 받아 집 산 사람들 대부분 30년 상환 조건이다. 이를 달리 생각하면 앞으로 30년동안 소비할 것을 현재로 당겨 집값을 올린 것"이라며 "이론적으로만 따져보면 20년 동안은 집값이 멈춰야 맞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략)

E씨는 "서민들이 무리하게 대출 받아 집 산 이유는 집 없이 전세로 2년에 한번씩 이사하면서 돌아다니는 게 너무 힘들고, 주거 안정을 원했기 때문"이라며 "지난 정권에서는 사실상 '제로 금리'였기에 그때가 내집마련의 적기라고 생각해 집을 샀던 사람들도 많다"고 전했다.

위는 모두 실제 기사에서 발췌한 두 사람의 인터뷰이다.(링크) 30년간 A씨와 E씨의 인생이 어떻게 달라질까? 먼저 A씨는 30년간 현재 집값의 평균 약 6%의 월세를 내며 살 것이다. E씨 역시 평균 악 6%의 원리금을 상환하며 살아갈 것이다.* 비용을 지불하는 측면에서 둘의 차이는 거의 없다. 하지만 30년 뒤 E씨는 (낡았지만, 그래도)자가 주택을 가진 자산가가 된 반면 A씨는 세입자로 월세살이를 벗어나지 못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바로 자본주의의 특성 때문이다. 이 시스템 아래서는 자본 역시 하나의 생산요소가 된다. 독산동에서 압구정을 가는 사람이 버스를 배제하고 지하철로만 다닌다면, 버스와 지하철을 모두 이용하는 사람보다 앞서나갈 수 없듯 자본을 배제한 사람은 자본과 노동을 모두 사용하는 사람을 이기기 힘들다. 그리고 그 자본을 효과적으로 분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은행이다. 따라서 이 은행을 어떻게 이용하는 지에 따라 사람들의 부가 갈린다. 바로 위의 예에서도 노동수익률에만 의존하는 A씨가 세입자로 주저앉은데 비해 노동과 자본수익률 모두를 사용한 B씨가 더 많은 자산을 형성한 것 처럼.

하지만 오감에만 의지한 인간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듯, 사람은 자본이 중요한 생산요소라는 사실을 종종 망각한다. 그렇게 A씨는 동네 복덕방 앞에 앉아 훌쩍 올라버린 가격표를 손으로 탁탁 치며 "투기세력 때문에" 혹은 "세상이 썩어서" 집값이 이모양으로 올랐다며 분노를 터뜨린다. A씨를 욕하지 마시라.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 돌리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데 어떻게 A씨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지금이라도 빚을 내어 집을 살 수 있겠는가? 그는 잘못된 것은 내 판단이 아니라 오른 저 집값이라고 믿으며 정의가 구현될 그 날만을 기다릴 것이다. 자기가 모은 자본을 월세의 반도 안되는 이자를 주는 은행에 넣어두고서.

딱히 E씨가 더 똑똑해서 집을 산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우연히 목돈이 생겼을 수도 있고 아니면 E씨가 집값이 싼 동네서 살아온 터라 대출로 집을 사기가 더 수월했을수도, 혹은 은행에 취직해 대출에 대한 심리적 장벽이 더 낮았을 수도 있다. 우리 모두는 우연에 의해 A와 E로 인생이 갈렸다. 당위가 아닌 우연이 가른 이 팔자의 갭은 다소 가혹하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 차이가 자식에게도 유전된다는 것이다. 일요일 저녁 온가족이 모인 식사자리에서 부동산이 올랐단 소식을 접한 A씨는 짜증을 내며 노릿하게 구워진 굴비의 배를 젓가락으로 휘젓는다. 어린 아들이 눈앞에 있는걸 잠시 잊은 채 주택시장이 제정신이 아니다, 보나마나 폭락할 것이다, 나라경제가 얼마나 엉망인지 아냐며 온갖 악담을 퍼붓는다. 아버지의 눈치를 보던 아들은 두렵다. 집값이 무너질까 두렵고 우리나라도 일본처럼 망해갈까 두렵다. 그래서 그는 두가지를 의심없이 믿으며 자란다. 하나, 우리의 소원은 통일. 둘, 집값은 거품이다. 그런 아이가 자라서 또 다른 A씨가 된다. 그는 결혼해 주택담보대출로 집을 사는 대학 동기들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혹은 한심한 눈으로 쳐다본다. 쟤는 어쩌려고 겁없이 집을 사나, 이게 다 버블인데. 불쌍한 친구에게 맥주한잔을 사고 집에 들어와 와이프와 해외여행 계획을 세운다. 친구가 원리금을 상환할 동안 자기는 월세를 내고 남는 돈으로 차를 산다. 와이프 구두도 산다. 자고로 YOLO의 시대 아닌가. 시간이 흘러 월세계약이 만기되니 집주인은 세를 올려달라 한다. 그제서야 A씨의 아들은 집을 한번 사볼까 복덕방을 기웃거리지만 가격은 2년 전보다 더 올랐다. 이거 버블인데.. 주택시장 상투를 잡고 돈좀 빌려 달라며 찾아올 줄 알았던 친구는 오른 집값에 함박웃음을 짓고있고 기다리면 기회가 올 줄 알았던 시장은 나를 두고 내달리고 있다. 아들은 아버지의 입맛 뿐 아니라 말버릇도 닮았다. 그 역시 굴비의 배때지를 젓가락으로 파내며 중얼거린다. "그놈의 투기꾼들.."

반면 E씨는 금융시스템과 자본주의에 대해선 A씨 만큼이나 모르지만 단 하나는 알고있다. 소득 만으로는 집을 절대 살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이제 고작 중3밖에 안되는 딸의 손을 붙잡고 은행에 찾아가 청약통장을 만든다. 언젠가 이게 딸의 인생을 바꿔줄 로또가 될지 모르지 않는가. 다 큰 딸이 직장을 가지고 결혼을 하자 E씨는 그녀에게 전세로 살 바에는 집을 사라고 조언한다. 그는 어려운 자본 뭐 수익 그런 용어들을 쫙 빼고, 간결한 말 한마디로 자신의 딸에게 인생경험을 물려준다. 빚도 자산이다. 얘야, 빚을 져야 돈이 모인단다. 아버지가 집을 산 덕분에 한 집에서 쭉 나고 자란 딸 역시 2년마다 이사를 다닐 자신이 없다. 사랑하는 아버지도 괜찮다고 하지 않는가. 그녀는 용기를 낸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잡고 집으로 돌아가 주저하는 남편을 부추겨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집을 산다. 의외로 삶이 그리 팍팍해 지지도 않는다. 그저 월세 대신 은행에 이자를 낼 뿐이니까. 이대로 30년이 지나면 온전한 내 집이 생길 것이다. 이렇게 E씨의 딸은 E여사가 된다. 이처럼 부는 상속뿐 아니라 경험을 통해도 유전된다.

현재로는 이 고리를 끊는 길은 A씨의 아들과 E씨의 딸이 결혼하는 것 뿐이다. 하지만 그 길은 점점 좁아지고 있고, 또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라고 해도 결혼에 사랑 이외의 것을 따지는 일은 좀 슬프지 않나. 집을 무조건 사라는 것도 아니고 또 언제나 빚을 내 투자하는 것이 맞다는 것도 아니다.(물론 나는 지금은 그래야 한다고 믿지만) 그저 부의 증식을 막는 비뚤어진 금융 상식을 좀 걷어내자는 것이다. 월세를 내나 이자를 내나 동일한 지출이고, 갚을 수 있다면 빚을 터부시 할 필요는 없다. 낼 능력만 있다면 현금카드를 쓰나 신용카드를 쓰나 무관한 것 처럼. 집값, 버블, 폭락. 이세 단어를 30년째 관용어구처럼 붙여 쓰는 기래기들도 오바질 좀 그만해라. 니들이 설레발 칠 때마다 망했다면 지금쯤은 한반도를 넘어 화성까지도 파산했을것이다. 교육수준과 배경에 상관없이 금융시스템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어야 하고 누구나 올바르게 이를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현재와 같은 부의 세습이 조금이나마 줄어든다. 막말로 A씨가 원한다면 언제든 E씨가 될 수 있는 사회가 부동산 정책이 나올 때마다 분노하는 그룹과 환호하는 사람으로 양분된 사회보다 더 낫지 않은가.

*혹자는 위의 예시는 집값이 무한히 오를경우의 이야기고 빠질때 어쩔거냐라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집은 땅 위에 짓는다. 그리고 공급이 한정된 생산요소인 땅 위에 짓는 집값이 장기적으로 하락한다는 것은 인류 문명 자체가 하락한다는 소리와 같다. 혹은 인류는 잘 사는데 한국만 망하든가. 그게 걱정이라면 당신이 빚을 내 집을 사든 말든 별 차이가 없다.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문제니까. 좀 더 아는척 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은 일본의 사례를 들어 우리나라도 디플레에 빠질거라고 한다. 예전 글에서 밝혔듯이 일본은 정책적으로 디플레를 일으킨 것이며 우리의 상황은 일본과 매우 다르다. 단지 가까이 붙어있단 이유만으로 우리도 디플레를 겪을거라고 믿는 다면 되려 대한민국이 공산국가로 변할거라고 전망해야하지 않나. 우리랑 가까운 나라들 중에는 공산주의 국가들이 더 많으니까.

2017. 9. 15.

합리적 성주/강서구 주민과 이기적인 대중들

(나는 성주 혹은 강서구 주민이 아니다. 아 너가 니 동네 사람이라 이런 주장을 하는구나, 라고 생각하는 모지리들 때문에 미리 밝힌다.)

사드 배치에 반발하는 성주 지역민들과 장애학교 유치를 반대하는 주민들을 향한 비난이 거세다. 인터넷 기사를 클릭하면 다 하나같이 "지역이기주의의 추악한 단면" 이라는 투로 비난하는 아무 생각이 없는 기자들의 글 아래, 그 지역 주민들을 혹독하게 비난하는 댓글들이 주렁주렁 달렸다. 만약 저들이 댓글을 저장할 서버 저장장치를 만드느라 땀흘려 고생하신 엔지니어들과 기계의 감가상각을 떠올렸다면 댓글달기 전에 과연 내가 정당한 주장을 하는 건지 생각이라도 했을텐데.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사드는 안보에 관계된 자산으로 그 혜택은 온국민이 동등하게 누리고 장애우를 부양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의무니 당연히 사회 전체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하지만 현재 한국인들은 모두가 누리는 혜택의 비용을 소수인 특정 지역 주민에게 청구하고 있다. 그건 다수가 우르르 몰려가 소수를 삥뜯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깡패나 다름없는 짓을 저지르면서 거리낌이 없는 저 무리의 행태를 보면 사이코패스와 매우 유사하다.

또 엄밀히 따져보면 국가 안보를 위험에 빠트리고 가련한 장애우 부모들을 무릎꿇린건 자기동네에 사드와 특수학교 설치를 반대하는 저 주민들이 아니라, 저 둘을 내심 혐오시설로 취급하는 온 국민의 인식이다. 자칭 안보 1번지라구 뻐기고 다니는 강남구민들이 성주로 우르르 내려가 "여기가 국가안보의 성지로군요!"라며 땅과 집을 사들인다면, 그리고 온 국민이 장애학교를 훌륭한 주민편의시설로 여긴다면 당장이라도 해당 집값이 뛸 테니 지역주민들은 "유치를 환영합니다"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사비를 털어 축제라도 열 것이다. 당신네들이 사드와 장애학교를 꺼림칙하게 여기는데 저 주민들이 왜 이 시설들을 반기겠나? 사회의 인식이 그모양인게 과연 주민들의 잘못인가? 댓가없이 집값 땅값이 수천만원 떨어지는 걸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지 않았다고 인간 말종으로 매도하는 것은 정당한가?

일부 사람들은 사드는 해롭지 않고 장애학교는 집값을 떨어뜨리지 않는다며 주민들을 바보취급하지만 그러는 사람들이야말로 두개골 안에 뇌 대신 핑크색 브로콜리를 담고 다니는 진짜 바보다. 그렇게 무해하면 자기 동네에 설치하잔 소리는 왜 안하나? 게다가 유해하고 말고를 떠나 설치하는건 내 자유다. Not in my backyard because it is MY backyard, 공공시설을 지으면서 지자체의 의견을 무시하는 건 합당한가? 아무리 해가 없더라도, 그게 아리수 수돗물이든 미국산 쇠고기든 수십개를 먹어야 영향이  있다는 살충제 계란이든 뭐든, 내가 싫으니 싫다는 건데 왜 제3자들이 괜찮다며 내 턱밑에 억지로 들이대는가. 자기나 실컷 즐길 것이지. 특히 조희연 교육감은 장애인 교육은 양보할 수 없는 문제라며, 독박 쓰기를 거부한 주민들을 쓰레기로 몰아간다. 저새끼는 왜 남의 동네에서 지랄하는가? 그게 그리 급했으면 자기네 집에 지으면 되지 않나. 내가 보기에 옳은 일이면 아무 동네나 쳐들어가서 지멋대로 해도 되는건가? 대개 정의라는 탈을 쓴 괴물들이 가장 많은 폭력을 저지른다.

우리는 자신의 니즈는 정의로, 타인의 욕구는 더러운 탐욕으로 매도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게다가 자기들은 철저히 이기적이면서 남보고 이타적이지 않다고 비난하는 정신병 걸린 레밍들의 무리 한 가운데에 있다. 만약 성주/강서구 주민들을 비난하는 댓글들 통계를 내서 가장 많이 서명한 동네에 저 시설을 배치하기로 한다면 댓글란은 하루아침에 깨끗해질 것이다. 그제서야 저 주민들이 사탄의 자식들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보통 사람들이고 우리도 저들 만큼이나 이기적이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고. 성숙한 시민 시회라는건 남이 사는 동네에, 나조차 기피하는 시설을 지어놓고 그냥 참고 살라고 윽박지르며 여론몰이로 조리돌림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무식한 미개인들의 방식이다. 공공의 이익을 핑계로 소수에게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마우 부당하다. 그런 공리주의적인 관점이야말로 생산성이 낮은 약자들을 억압하고 학살해 온 가장 사악한 사고방식 아닌가. 부득이하게 국가의 이익을 위해 지자체가 원하지 않는 시설을 배치해야하는 경우라면 마땅히 그에 대한 보상이 뒤따라야 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 비용을 분담하는 것이 옳다.

어쩜 이런 당연한 소리를 하는 기자와 정치인들이 단 한마리도 없을까.

2017. 9. 11.

전세가 없어지지 않는 진짜 이유-미개한 정부와 현명한 시장

많은 사람들이 전세는 한국에만 있는 독특한 제도이고 사회발달과 함께 없어질 것으로 전망한다. 하지만 평균 전세액은 사상최고가를 경신하며 여전히 월세보다 두배는 더 많은 계약방식으로 없어지기는 커녕 더 흔해지고 있다. 전세가 없어질거라고 부르짖었던 사람들은 머쓱해하며 집값 상승이 재개되어 그런거라고 변명하지만 어디 그런가. 집주인이 집값 상승을 바라보고 전세계약을 한다면 세입자는 집값 하락을 바라보고 전세를 계약한다. 아니고서야 세입자는 은행 대출을 받아 집을 샀을테니까. 상승을 바라보는 사람 하나가 하락을 바라보는 사람 하나를 만나 거래를 하는데, 집값이 올라갈거라 믿는 사람이 많아 전세가 늘어난다는 말은 이 계약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한 어리석은 주장이다. 그리고 그 특성을 이해하면 우리 사회에서 전세가 없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저 크로마뇽인 같은 정부가 현대인으로 진화하기 전 까지는.

전세란 한마디로 세입자가 집주인에게 월세를 내지 않는 대신 집을 담보로 잡고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거래다. 따라서 전세금을 결정하는 요소는 다음과 같다. 월세, 시장금리 그리고 담보가치인 집값.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월세율과 시장금리이고 집값은 전세가가 주택가격의 70-80%을 넘지 않는 이상 이 거래에 별 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다* 따라서 월세가 동일할 경우 한국은행이 시장금리를 내리면 전세 가격은 올라간다. 같은 원금으로는 월세를 보충할만한 이자를 못 받기 때문에 원금을 더 받아서 맞춰야 하니까. 따라서 전세금의 트렌드와 한국은행 기준금리를 비교해보면 거의 동행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왜 집주인와 전세입자는 은행에 가서 돈을 빌리고 맡기는 대신 이런 복잡한 계약을 할까? 집주인이 전세를 놓는 대신 은행에 가서 돈을 빌리고 월세를 받는다면 더 큰 돈을 벌수 있다.(전월세 전환률 4%-은행 대출이자 3%) 물론 세입자 입장에서는 전세가 나쁠 것이 없다. 목돈을 은행에 맡겨봤자 2%의 푼돈만 받는데 비해, 4% 월세를 내야하니 얼마나 손해인가. 따라서 전세를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럼 애초에 집주인은 왜 은행으로 가지 않는가?

왜냐하면 애초에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금융시스템이 미개했던 시절, 은행의 대출은 일부 특권층에게만 열려있었고 이 시스템에 접근하기 위해선 연줄이 필요하기도 했다. 선진화 된 금융시스템이 없는 환경에서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대출시스템을 만들어 냈다. 현대의 언어로 말하자면 전세는 주택담보 p2p 대출인 것이다.

물론 이 시스템은 중앙화 된 효율적 금융 시스템이 있다면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나 접근 가능하며 공정한 금융 시스템이 존재해야 한다. 정부가 환율을 묶어둔 많은 개도국에서 달러 암시장을 흔하게 볼 수 있는 것 처럼, 정부가 시세를 무시하고 시장에 입김을 가하면 사람들은 자기들만의 공정한 시장을 창출해 낸다. 전세가 없어지기 어려운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미 사람들은 서로서로 집의 담보가치를 70-80%까지도 인정해주는 데 비해, 정부는 은행이 주택담보가치를 40%까지만 인정해주라고 지시했다. 참고로 파산하기 직전의 그리스 채권의 잔존가치가 이보다 더 높았다. 그럼 어떤 집주인이 자기 집을 망해가는 나라 국채수준으로 취급하는 은행에 가서 돈을 빌리겠는가? 게다가 정부는 다주택자에게 대출문턱을 조이고 있다. 다주택자들은 부자고 그들이야말로 부도가능성이 가장 낮은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진입장벽을 올리는 비효율적 시장이 어떻게 효율적으로 자생하는 전세시장을 집어 삼키겠는가. 이는 북한이 남한을 적화통일하는 일 보다 더 어렵다.

뿐만 아니라 정부 자체도 전세가 없어지길 원하지 않는다. 나의 부채는 누군가의 자산이므로 국가부채가 늘어난다는 것은 국가자산이 동시에 늘어난다는 것인데 금융원시인들은 대개 부채라는 차변만 보고 대변은 읽지 않는다. 그런 미개인들의 집합인 정부는 무턱대고 부채가 안 늘면 손뼉치고 좋아한다.(그들이 지향하는 세계는 부채가 없던 고조선 혹은 지금도 없는 보츠와나 같은 사회인가보다) 그런데 모든 전세를 금융시스템으로 편입하면 집주인들의 부채가 하루아침에 500조가 늘어나므로(동시에 세입자들의 자산도 500조 늘어나지만, 우리는 대차대조표의 왼쪽을 볼 줄 모르는 반푼이들 얘기를 하고 있으니까) 나라가 망한다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할 것이다. 따라서 정부조차 전세가 없어지길 바라지 않을 것이다.

전세는 멍청한 정부가 만들어 낸 공공시스템이 제 할일을 하지 못해 사람들끼리 스스로 만들어 낸 효율적 시스템이다. 범죄가 끊이지 않는 도시에서 경찰이 나서지 않으면 시민들이 스스로 자경단을 조직하는 것 처럼 전세는 주택시장의 금융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태어났다. 전세 시장은 금리와 월세 주택 가격에 따라 유기적으로 반영하며 세입자 집주인 모두에게 이익을 줄 뿐 아니라 멍청한 정부까지도 지속되길 원하는 시장이다. 효율을 무시하는 시장은 언제나 도태되는 법이다. 전세 시장은 정부를 비웃으며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이다.

* 참고로 집값상승에 대한 기대는 금리에 반영되지만 복잡하니 넘어가자
**이 외에 2차효과도 있으나 역시나 복잡하니 넘어가자

2017. 9. 10.

살인자의 기억법: 감독의 머리가 설현의 몸매보다 좋았어야

스릴러 영화는 잘 맞는 퍼즐이어야 한다. 그리고 좋은 스릴러의 반전이란, 마치 반쯤 맞추다 뒤집어 다르게 맞춰도 맞물리는 퍼즐 같아야 한다. 즉 이제까지 영화가 a를 범인으로 몰아가다 갑자기 b가 범인이라며 관객을 놀라게 하려면 영화를 처음부터 다시 풀어봐도 아귀가 맞아들어야 관객들에게 위화감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그 위화감과 어색함을 뭉텅이로 던져놓고 끝난다. 대개 머리가 나쁜 감독이 스릴러를 만들면 이런 결과가 나온다.

가장 큰 설정의 구멍은 주인공 설경구에게 있다. 설경구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자인 동시에 딸을 너무나 사랑하는 인간적인 아빠로 묘사되는데 이런 사이코패스이면서 동시에 휴머니즘이 가득한 캐릭터는 마치 영국식 중절모에 힙합바지를 입은 패션 만큼이나 난해하다. 납득할 만한 설명 없이, 정서장애로 남들 울 때 깔깔대고 웃는 주인공이 갑자기 딸 때문에 엉엉 우는 모습을 보고 어떻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 들겠나.

또 설경구는 나쁜 놈만 죽인다는 자신의 철칙을 가진 연쇄살인마인데 왜 지난 17년동안 살인을 멈추다 재개했는지, 재개한 뒤 왜 희생자들을 젊은 여자로 바꿨는지에 대한 납득할만 한 설명 없이 갑자기 모든 살인을 설경구가 했을수도 있다고 몰아간다. 게다가 본인은 그걸 믿고 자살까지 시도한다.(뭥미) 이 외에도 담배가게 아가씨에 대한 설정이 증발한 것이나 딴 모순들이 가득하지만 뭐 그런건 다른 영화들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수준의 오류니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기억상실로 인한 영화적 연출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메멘토가 보여줬고 영화적 장치로 착한 살인자가 나쁜 살인자를 죽이는 설정으로는 미드 덱스터가 있다. 그 둘을 적절히 섞은 소재부터 출발하는 이 영화는 마치 싸구려 중국산 퍼즐세트 같다. 어떤 조각은 서로 맞지 않고 쓰이지도 않으면서 유난히 큰 조각도 있었다. 설득력 있는 반전을 보여주기엔 퍼즐조각이 충분하지 않아 뻔한 스토리로 흘러가고 만 영화이다. 액션 영화나 로맨스 영화였다면 차라리 나앗겠지만 스릴러 영화의 묘미는 관객이 등장인물들과 별개의 입장에서 같은 단서들을 가지고 같이 추리해나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엉망인 설정 오류가 더욱 더 크게 느껴진다. 주인공의 딸 역할로 나온 설현의 몸매를 순간순간 카메라가 비추는 장면을 보며, 만약 감독의 머리가 설현의 몸매보다 나았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아무래도 그런 생각을 한 것이 나 하나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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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소설을 읽었다. 소설 속 김병수씨의 입을 빌려 영화에 대한 감상을 추가한다.

어떤 감독이 나의 이야기를 영화로 옮기겠다며 찾아왔다. 그의 말을 듣다 화가 났다. 이 작자는 보기에도 멍청하지만 실제로는 더 멍청하다. 그 쓸모없는 머리를 내리칠 둔기를 찾으러 가는 동안 나는 또다시 기억을 잃었다. 가장 해야할 일을 하지 못하다니. 내 알츠하이머가 그를 살려준 덕에, 그 감독은 덤으로 사는 인생 첫날에 하나의 문학을 학살했다. 재능은 좆도 없으면서 겉멋만 가득 든 영화감독들이 너무 많다. 그들 손에 희생당한 훌륭한 원작들은 더욱 많다. 하지만 나와 은희가 그 희생자 리스트 맨 위에 올라갈 줄이야. 그때 감독의 머리를 부숴 대나무 숲에 묻었어야 했다. 내가 못했다면 박주태라도 나섰어야 했다.

반드시 그랬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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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아직도 화가 가시지 않아 한줄 더 적는다. 우리나라 네티즌들은 아이돌 가수가 롹을 한다고 할땐 죽일듯이 달려들어 욕하면서 스턴트맨/무술감독 출신의 멍청이가 스릴러 영화를 만드는 건 내버려둔다. 이 훌륭한 작품을 유치뽕짝으로 타락시키다니. 중3 학생이 팬픽을 써도 이보단 나을 것이다. 원작 소설은 깡촌의 수의학자 김병수씨의 입을 통해서 풀어내는 것이 위화감이 들 정도로 독자와 철학적 질문을 주고받는데, 그걸 한마디도 못 알아들은 이 무식한 아저씨는 결국 지 장기대로 이 소설을 주먹이나 주고받는 삼류 깡패스토리로 전락시켰다. 박찬욱 감독대신 이 저능아가 메가폰을 잡았다면 올드보이는 제목이 "친누나와 교실에서"정도 되는 포르노가 되었을 것이며 반전스릴러, 식스센스는 "꼬마유령 캐스퍼"로 개작되었을 것이다. 현실에서 입이 걸은지라, 글에는 욕을 삼가는 편인데 못참겠다. 씨발.

2017. 9. 7.

대한민국 외교점수: 낙제

* 현 정부의 외교정책은 수준 이하다. 외교부 인턴만도 못한 현실인식을 가졌는데 어렵게 꼬인 국제문제를 다룰 능력이 있을 턱이 없고, 그런데도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 끝없이 나서니 패닉하며 갈팡질팡 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대북정책의 기조라고 밝힌 베를린 선언을 스스로 파기한 것이 그 단적인 증거다. 1차 핵실험을 한 것이 11년 전이고 북한의 핵개발이 이슈가 된 지는 30년이 넘었다. 지난 두달 동안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 달라진 것은 북한이 수십번 쏴올린 미사일과 5번이나 했던 핵 실험을 그만둘 거라고 믿은 바보들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는 것 하나뿐이다. 비극은 그 바보들이 우리나라의 외교안보정책을 드라이브 한다는 것이다.|

* 문재인의 베를린 선언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업적을 흉내낸 것이지만 그 결과는 명확하게 달랐다. 김 전 대통령의 선언은 북한의 우호적인 반응과 교류를 이끌어 낸 반면 이번 선언은 당사자 북한 뿐 아니라 우방국들에게까지 비웃음을 삿다. 선배가 여자친구에게 고백했을때 먹힌 세레나데를 그대로 흉내내어 불렀지만, 잘못된 시점에 잘못된 대상에게 잘못된 노래를 불렀다. 외교 담당자들이 통채로 잘못된 자리에 앉아있기 때문이다.

* 유엔 봉사기구에서 잡일하다 외교부 장관이 된 강경화 장관은 외국 정상들과 전화통화와 방문일정을 잡는 비서역할만 할 뿐, 실질적 외교 채널을 가동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의 우방인 러시아와 중국은 점점 북한의 핵에 덜 공격적인 멘트를 내놓는데 비해, 우리의 우방인 미국은 노골적으로 한국의 대화기조를 조롱하고 일본과의 관계는 최악이다. 21세기 신 냉전시대에 한국은 가장 위험하면서 취약한 고리로 전락했다. 외교전의 처참한 패배다.

* 안보 측면을 보자. 국군의 90%가 육군인데 이 조작을 통괄하는 국방장관은 해군출신, 합참의장은 공군출신이다. 게다가 안보가 긴급 사안이라면서 청와대는 아직 8개 군단장 자리 중 3개를 공석으로 비워두고 있다. 더욱이 국정원은 이미 대남 기관으로 전락한지 오래여서 북한 핵실험을 탐지하기는 커녕 북한이 중러에게 핵실험 계획을 사전 통보했는지 조차 파악 못하고 있다. 안보에는 구멍이 있다

* 그들의 한심한 현실감각을 보여주는 일화가 또 하나 있다. 지난 7월, 베를린에서 한중 정상회담이 열렸고 청와대는, "사드문제에 대해 차갑던 시진핑을 문재인 대통령이 '끈질기게 설득'하여 '전향적인 태도'를 이끌어 냈다"고 자평했다. 그 때, 김현철 보좌관이 손뼉을 쳐 모두를 당황하게 만들었는데, 이에 대해 김 보좌관은 “회담이 끝날 때 중국과의 관계가 풀려가는 것을 보고 경제문제도 풀리겠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고 해명했다.(링크) 그 이후 두달간 북한은 ICBM을 두번 발사하고 수소폭탄을 실험하는 등, 그 어느때보다도 숨가쁜 시간을 보냈고 북중관계는 더욱 가까워졌으니 시진핑이 한중 회담에서 어떤 자세를 보였는지 충분히 알 수 있지 않은가. 문제는 시큰둥한 시진핑을 붙잡고 앉아서 자기 주장만 반복하는걸 '끈질긴 설득'으로 보는 청와대의 외교전략 수준과 단호히 친북으로 돌아선 시진핑의 태도를 '전향적'이었다고 해석하는 그들의 아마추어적 현실인식 수준이다. 이 무의미한 회담은 기본적 외교 에티켓도 모르는 촌뜨기가 환각에 빠져 상대 정상에게 결례를 범하는 것으로 개그의 대미를 장식했다

* 현 시점에 문재인 대통령은 사절단을 대동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푸틴을 만나 대북 현안을 논의하고 있다. 북한 핵에 대해 중국보다 더 우호적인 러시아를 만나면서 성과를 기대하는 현실감각도 문제지만, 당근도 채찍도 없으면서 만나서 조르면 뭐라도 줄거란 어리석은 믿음이 더 큰 문제다. 그런 멍청한 태도로 정상회담에 임하니, 모든 우방국들이 북한에 가할 경제제제의 강도에 대해 논의하는 동안, 남한 혼자 뜬금없이 북러 경제특구 개발에 2조원을 투자하는 방안이나 검토하는 것 아닌가. 사실 이는 문재인 정부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는 이기적으로 굴면서 다른나라보고 도덕교과서처럼 행동하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미국은 인도주의적으로 우리를 도와야만 하고, 중국은 더 강한데도 남한을 존중하며 알아서 기어야하고 일본은 남한이 기분나쁠때 마다 계속 자존심 굽혀가며 사과해야 한다고 한다. 타인의 이익과 입장을 고려하지 못하는 것은 지능의 문제일까 극단적 편협함의 문제일까.

* 보수도 반성해야한다. 사실 문재인은 엉망으로 망한 대북문제를 계승해서 더 이상 망칠 것도 없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해 될것도 없다. 대북문제를 말아먹은 것은 보수다. 남한이 뭐라 하던 북중미 모두 콧방귀도 안뀌는 코리아 패싱은 이명박 정권에서부터 시작됐다. 김정은 체제로 넘어가던 북한은 남한의 전쟁의지를 태핑해보기 위해 천안함을 격침시켰지만 남한은 북한의 소행이 확실하지 않다며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북한은 대놓고 남한 영토를 포격해 민간인 사상자까지 나왔지만 남한은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남한이 아무리 얻어맞아도 반격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북한은 남한을 졔끼고 대미전략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 중요한 시점에서 국군 통수권자에게 전략적 조언을 해주어야 할 국정원장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은 서울시 체육회 부회장 출신의 원세훈이었다. 그리고 그 중요한 자리에 안보 비전문가를 앉힌게 바로 이명박이다. 참고로 이명박은 국군 최신 전차 흑표의 엔진의 수주를 기술력도 없는 국내기업에게 주라고 지시해서 우리나라 기갑전력의 공백과 국방예산 낭비를 초래했다. 아직도 안보는 보수에게 맡기란 소리가 나오는가.

* 햇볕정책이 의미가 있었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 시기는 이미 지나갔고 새로운 냉전의 시대가 도래했다. 박근혜의 개인적 목표가 그저 청와대로 돌아가 행복했던 어린시절을 추억하는 것에 불과했듯 문재인 정부는 모든 것을 참여정부 때로 되돌리는 것을 목표로 삼은 듯 하다. 이런 노무현 오마주 정치는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 정서적 만족감을 줄 지 몰라도 현실에는 맞지 않는다. 북한도 미국도 그리고 중국도 그 때로 돌아가기엔 너무나 먼 길을 왔으며 남한에겐 주변국을 강제할 힘도 없다. 아마추어들이 삼삼오오 앉아 자화자찬하며 셀카를 sns에 올리고 있는 동안, 일본은 멀어지고 미국은 안보 영수증을 청구했으며 북한은 우리의 코앞에 중지를 내밀었고 중국은 남한 기업의 팔을 비틀었다. 그 앞에서 대통령과 아마추어 외교라인은 왜 참여정부때 처럼 되지 않는가 자문하며 멍청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고 있지만 그런다고 문제가 자연스레 나아질 가능성은 없다. 이는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다. 심지어 정의당도 외교라인을 물갈이 하라고 주문하지 않는가. 예전에 유행했던 드라마 미생에서 주연을 맡은 고현정이 이런 대사를 했다. " 사람은 실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사람은 그래선 안됩니다" 외교라인도 마찬가지다, 얼른 다 잘라라.

2017. 8. 20.

김수현 수석 저, 부동산은 끝났다. 서평: 멍부의 변명

어디서부터 비판을 시작해야할까. 인과관계는 엉망이고 시장에 대한 기본적 이해도 전무하며 (멍청한 사람들의 전매특허인) 자신의 소망과 전망를 뒤섞은 주장까지 모든게 엉터리라 비난할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다만 부지런하게 국내외 데이터를 조사하고 참여정부 시절 정책의 흐름을 간결하게 정리한 것은 눈여겨볼 만 하다. 전형적인 멍부(멍청하고 부지런한)의 일처리 답다.

전반적으로 그는 일관되게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전혀 잘못되지 않았다며 온갖 통계를 들어 변명한다. 집값이 오른 것은 정책의 실패 때문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글로벌 유동성 과잉 때문이라며 되려 한국의 집값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집값은 더 내려야하며(싸지만 더 내려야 한다?) 안정적이지만 버블이 꺼질때의 파장이 클 것이라고 경고한다.(버블이 아니다. 하지만 없던 버블이 꺼질 수 있다!) 이런 논리적 자가당착은 책 후반부로 갈 수록 더 극심해진다. 공급을 늘려야 가격이 잡힌다는 시장론자들의 접근은 잘못되었다면서도 서울에 집은 모자른데 공급을 늘릴 곳이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모습은 블랙유머인지 멍청함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이 모두가 현 상황이 어떤지 데이터가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는데, 그를 무시한 과거의 실책을 합리화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촌극이다.

그러면서 김 수석은 자신의 실패를 가리기 위해 후임자들의 정책은 잘못되었다고 싸잡아 비난한다. 오세훈의 뉴타운 정책은 곳곳에서 소송과 반발에 직면하지 않았느나, 그리고 쫒겨난 철거민들을 어쩔 것이냐며 거세게 비판한다. 하지만 책이 출간된 지 6년이 지난 오늘, 부동산시장의 훈풍과 더불어 각종 뉴타운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는 현실에 비추어보면 저자의 비판이 한심하게 느껴진다. 굳이 신길 뉴타운의 소형 아파트가 520:1이라는 경이적인 경쟁률을 기록했다는 사실을 거론하지 않아도 은평, 용산, 옥수, 미아에 직접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도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천명이 살던 열악한 판자촌 대신 만명이 살 수 있는 깨끗한 아파트단지가 들어선 것을 두고 "서울시에 저렴한 거주지가 사라져서 문제다"는 요지의 주장을 펴는 대목에서는 모골이 송연해 질 지경이다. 이런 인간이 70년대부터 주택문제를 진두지휘했다면 청계천서부터 용산역까지 창녀촌과 판자촌이 가득했을것이다.

더욱이 집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는 지침이라며 하는 말은 더욱 가관이다. 부동산 신화를 믿지 말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이유 중 하나는 "집은 생활 수단이지 돈벌이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일단 1+1=2를 이해할 논리적 사고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주장과 후술된 근거가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 외에도 "집은 과시적 소비재가 아니다", "집은 오래 썻다고 고치는 물건이 아니다", "집은 이웃과 동네의 일부이다. 마을 만들기에 참여하자"는 지침에 이르면 과연 이사람이 정책입안자인지 종교지도자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정부는, 특히 민주주의 정부라면 국민의 수요와 욕망에 맞춰 그를 만족시키는 정책을 수행해야한다. 국민의 욕망과 가치관을 개조하려는 시도는 신정일치국가나 파시즘 독재국가에서나 이뤄질 일이다. 마을만들기 운운하는 대목에서 군사정권의 새마을운동이 떠오르는 것은 결코 비약이 아니다. 본인이나 판자촌에 살며 과시도 안하고 집도 고치지 말고 동네사람들과 "잘살아 보세" 노래나 부르며 살 것이지.

2차대전 초반 무패를 자랑하던 독일군의 기초를 마련한 상급대장 한스 폰 젝트는 이런말을 남겼다. "세상에는 네가지 유형이 있다. 그 중 멍청하고 부지런한 인간은 부하들과 작전을 위험으로 몰아넣으므로 당장 총살해야한다" 김수현 수석은 자료조사와 정책수립은 성실하게 수행하는 부지런한 인간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실패를 되돌아보고 반성할 줄 모르고 고집을 부리는 멍청한 사람이다. 그의 아둔한 머리가 그와 그 지지자들의 소망과 목표를 좌초시킬 것이다. 실제로 10년전 그의 멍청한 조언을 따랏던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됐다. 다른 글에서 언급했듯이 같은 상황에서 같은 사람들이 같은 베팅을 하고있다. 판돈만 두배로 올려서. 하지만 판돈을 올린다고 결과가 바뀌지 않는다. 아마 같은 결론이 나올 것이다. 멍청한 이들만 그것을 모를 뿐. 올바른 투자는 바보들과 같은 자리에 서지 않는 것이다. 이 책을 읽은 나의 결론도 그렇다. 집을 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