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9. 25.

남녀의 사회적 진실 II-82년생 김지영

0. 우리가 성평등 문제를 바라볼 때 첫번째로 저지르는 실수는 양 성을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눈다는 것이다. 수컷은 가해자, 그리고 여성은 피해자. 하지만 과연 그런가? 이사하는 날 불려온 인부가 전부 아줌마라면 여자들은 이야 평등한 세상이다! 하고 좋아할까? 아님 업체에 항의전화를 넣을까. 남자 청소부가 여자화장실의 변기를 닦고 있다면? 옆집 아줌마는 의사라 돈을 버는데 아저씨는 무직으로 집안일을 하신단다. 여자들은 그집 아저씨를 백수라고 하지 않고 내조의 제왕이라고 불러주는가?
 
만약 성차별의 가해자가 오로지 남자들 뿐이라면 성평등은 남자들이 정신차리면 되는 일이고, 또 여자들이 합심하여 아들놈을 잘 교육시킨다면 한세대 만에 사라질 문제이다. 그러나 이 골칫덩이는 아직까지도 희대의 난제로 남아있다. 그 이유는 남자 뿐 아니라 여자들도 정신차려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도 결국 아들을 못 낳는다고 구박하는 것은 할머니고 막내아들을 편애하는 것은 어머니다. 성차별에 있어 가해자는 사회 전체이며 희생자는 남자와 여자 모두다. 물론 여자들이 더 많은 피해를 보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건 기울어진 운동장의 문제지 그 윗동네에 서 있는 사람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더 다친 성이 덜 다친 성을 문제의 근원으로 모는 일이 해결을 어렵게 만든다. 금성과 화성을 오가는 일 보다도 더.
 
1. 가사노동과 육아는 남녀가 공평하게 부담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가정 외의 책임 역시 공정하게 분배되어야 한다. 하지만 둘다 지켜지지 않는다. 요리와 빨래는 주로 여자의 몫이며 착한 남편은 이를 "돕는다". 반대로 그 집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것은 남자의 직업이며 여자들은 삼삼오오 모여 남편이 자기에게 선물한 백을 꺼내서 자랑하지, 자기가 남편에게 무슨 차를 사줬는지를 두고 자랑하지 않는다. 아내에게, 그리고 남편에게 다른 성역할을 강요하고 압박하는 것이 어찌 한 성의 문제인가. 남자와 여자(게이와 레즈비언과 트랜스젠더)를 포함한 사회 전체의 문제이다.
 
2. 사회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성차별이 지워지지 않는 핵심 이유는 성에 따라 부담하는 의무가 다르기 때문이다. 바로 군역. 우리나라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따르면 실질적으로 여자들은 국방의 의무를 지지 않는다. 하지만 의무의 면제는 필연적으로 권리의 박탈로 이어지며 여자는 군대를 갈 수 없을 정도로 신체적으로 열등하다는 차별은 병영의 담을 넘어 사회로 확산된다. 다음 사례를 보자. 모 의대 외과교수 A씨는 여학생들을 뽑지 않는다. "여자들은 신체적으로 약해서 힘든 외과의사가 맞지 않아." 몇몇 여자들은 자신은 외과의사를 하기에 체력적으로 부족하지 않다고 항변하나, 매번 남자 동기들에게 밀린다. 모 회사 B상무가 연말에 임원승진 후보자들을 심사하고 있다. 어느 회사나 일은 고되고 힘들다. 군대 역시 고되고 힘들다. 군필인 남자 후보와 헌법상 군대를 못갈정도로 나약한 여자 중 누가 승진에서 유리하겠는가? 권리와 의무는 동전의 양면처럼 완전히 붙어있다. 조선시대 노비들이 세금을 내지 않은건 특혜가 아닌 차별이었듯, 처음부터 군역을 이수할 기회를 박탈당한 여성들은 이어 사회 곳곳에서 차별과 싸워야 했다.
 
일부 페미니스트 여자들을 제외하면 많은 여자들이 그 차별을 묵과했다. 여자들을 보호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꼰대 남자들도 그 차별을 당연시한다. 그 둘 모두가 가해자다. 모든 차별은 득과 실을 동반한다.(대개 한쪽이 더 많은건 사실이지만) 명절때 남자아이들만 데리고 성묘에 가는 것과 아들들에게 재산을 더 많이 상속해주는 것은 같은 정확하게 같은 차별에서 나온다. 내가 꼰대 남성들 뿐 아니라 차별의 혜택을 계속해서 누리려는 여자들 역시 가해자라고 비난 하는 이유가 어기에 있다. 편견을 없앤다는 것은 단것만 삼키고 쓴것만 뱉는 것이 아니라 달던 쓰던 맵던 자시던 간에, 한 사람을 비틀어진 성역할 안에 가두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깨인 페미니스트들이 국방의 의무를 달라고 투쟁하는 것이다. 그들이 남성을 동경하는 톰보이라 군대에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모든 차별을 정복하고 섬멸하기 위해서.
 
3. 많은 사람들이 군대와 출산을 비교한다. 논리적으로 어떤 두 대상을 비교하려면 그 둘이 비슷한 속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엄마와 아빠, 버스와 자동차, 곶감과 배. 하지만 전혀 다른 대상은 비교하기가 어렵다. 셔먼 탱크와 아름다움, 산들바람과 목성의 위성 이오니아, 그리고 사회적 의무와 생물학적 기능. 그러니 저 둘은 애초에 비교할 것이 못된다. 임신이 사회적 의무라면 모를까. 하지만 신체 건강한 모든 여자에게 애를 둘 이상 낳지 않으면 징역형을 살아야 한다든지, 혹은 폐경기에 임박한 여자가 애가 없을 경우 국가가 강제로 임신을 명령하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그런 혐오스러운 주장을 하는 인간들과는 말도 섞고 싶지 않다. 의무와 자유를 비교할 정도로 멍청한 인간들과도 말 붙이기 싫은건 마찬가지고.
 
4. 한 여성의원이 남성의 역차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접힌 종이가 있다고 하자, 그 종이를 반듯하게 만들기 위해선 접었던 부분을 펴는 것 만으로 모자를 때가 있다. 때론 반대로 접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난 남성에게 역차별을 가해 여성의 권익을 보장하는데에 찬성한다. 물론 그 시작은 가장 큰 피해자인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82년생 지영씨지만 가장 부당하고 억울한 삶을 살아온 것은 22년생 할머니고 그 다음이 52년생 어머니일 것이다. 아마 현재 92년생 지영씨의 사정은 좀 더 나을 것이다. 차별에 대한 보상 역시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페미니즘이 뭔지도 모르면서 악에 받쳐 꽥꽥대는 가짜 여성인권주의자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진짜 피해자에 대한 보상은 마치 후순위 채권처럼 리스트의 저 아래에 있다. 나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당한 차별에 대한 댓가를 왜 저들이 타가는가. 그들은 권리에만 민감하다. 국민의 4대 의무중에서 한 것이라곤 교육 하나밖에 없으면서. 저리 멍청한 걸 보니 과연 그 하나라도 잘 이행했을까 의문이 든다.
 
종이를 반대로 접어주는 일은 인구 피라미드의 위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황혼 이혼을 쉽게 한다던지, 그 이후에도 여성이 재산 분할시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보호한다던지. 사회적 편견을 뚫고 올라온 여성의 고위직 승진을 우대한다던지. 가장 지독한 차별을 뚫고 살아온 피해자들을 제치고 2030대 여성부터 치료하는 현재의 성평등 정책은 분명 재고해볼 여지가 있다.(하지만 아예 안하는 것 보다 나으니 비판하지 않겠다.)
 
5. 이 소설인듯 소설아닌 소설같은 책의 소설적 요소는 첫 세 페이지에 몰려있다. 나머지는 진부하다 못해 곰팡이 냄새가 날 것 같은 클리셰들을 늘어놓다가 끝난다. 아침드라마에서 시청률이 가장 낮았던 장면들을 글로 옮긴다면 아마 이 소설이 되지 않을까. 출처를 잊었지만 누군가는 이 소설을 다음과 같이 단 한줄로 평가했다. 창작은 어려운데 자꾸 쉬운길로 가려고 한다고. 뭐 현실을 재구성한 것도 하나의 창작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현실도 때론 소설만큼이나 소설적이니까.
 
그 좋은 예로 트라팔가르 해전의 승장 호레이쇼 넬슨제독의 러브 스토리가 있다. 역사의 판도를 바꾼 그 해전에서 영국인들에게 승리라는 유산을 남긴 넬슨은 연인 엠마 해밀턴 부인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의무를 다했단 사실에 감사하오" 하지만 엠마를 비롯한 영국의 여성들은 영국의 찬란한 승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역사에서 조연에 머물러야 했다. 죽어가면서도 허세를 부린 넬슨이 자랑하던 그 의무라는 것은 오로지 남자들에게만 부여된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여성들은 그 다음 세기에도 식사가 끝나면 남자들이 위스키와 시가를 즐기며 정치를 논하는 자리에 끼지 못하고 홍차에 우유를 부어 마시며 뒷방에서 가쉽거리를 재잘거리는 자리에 머물러야 했다. 투표를 할 수 없던 것은 물론이고. 영국에서 여자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것은 그 다음 세기인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이다. 빅토리아 시대와는 달리 현대의 전면전은 모든 성인 남자들을 전선으로 빨아들였고 군수공장의 빈자리는 여성들이 메워야 했다. 전쟁이 끝난 후 20세기의 엠마들은 자신들이 짊어진 의무에 대한 응당한 보상을 요구했고, 처칠같은 꼰대들이 반대했지만 수백만명의 독일군도 물리쳤던 그들조차 치마 대신 머리띠를 두른 그녀들을 막을 수 없었다. 그렇게 의무를 다한 영국 여성들은 1928년부터 참정권을 따냈다. 당당하게. 그 앞에서 묻는다. 오늘날 한국의 여성들은 과연 어느 세기에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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