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씨는 "최근 대출 받아 집 산 사람들 대부분 30년 상환 조건이다. 이를 달리 생각하면 앞으로 30년동안 소비할 것을 현재로 당겨 집값을 올린 것"이라며 "이론적으로만 따져보면 20년 동안은 집값이 멈춰야 맞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략)
E씨는 "서민들이 무리하게 대출 받아 집 산 이유는 집 없이 전세로 2년에 한번씩 이사하면서 돌아다니는 게 너무 힘들고, 주거 안정을 원했기 때문"이라며 "지난 정권에서는 사실상 '제로 금리'였기에 그때가 내집마련의 적기라고 생각해 집을 샀던 사람들도 많다"고 전했다.
위는 모두 실제 기사에서 발췌한 두 사람의 인터뷰이다.(링크) 30년간 A씨와 E씨의 인생이 어떻게 달라질까? 먼저 A씨는 30년간 현재 집값의 평균 약 6%의 월세를 내며 살 것이다. E씨 역시 평균 악 6%의 원리금을 상환하며 살아갈 것이다.* 비용을 지불하는 측면에서 둘의 차이는 거의 없다. 하지만 30년 뒤 E씨는 (낡았지만, 그래도)자가 주택을 가진 자산가가 된 반면 A씨는 세입자로 월세살이를 벗어나지 못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바로 자본주의의 특성 때문이다. 이 시스템 아래서는 자본 역시 하나의 생산요소가 된다. 독산동에서 압구정을 가는 사람이 버스를 배제하고 지하철로만 다닌다면, 버스와 지하철을 모두 이용하는 사람보다 앞서나갈 수 없듯 자본을 배제한 사람은 자본과 노동을 모두 사용하는 사람을 이기기 힘들다. 그리고 그 자본을 효과적으로 분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은행이다. 따라서 이 은행을 어떻게 이용하는 지에 따라 사람들의 부가 갈린다. 바로 위의 예에서도 노동수익률에만 의존하는 A씨가 세입자로 주저앉은데 비해 노동과 자본수익률 모두를 사용한 B씨가 더 많은 자산을 형성한 것 처럼.
하지만 오감에만 의지한 인간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듯, 사람은 자본이 중요한 생산요소라는 사실을 종종 망각한다. 그렇게 A씨는 동네 복덕방 앞에 앉아 훌쩍 올라버린 가격표를 손으로 탁탁 치며 "투기세력 때문에" 혹은 "세상이 썩어서" 집값이 이모양으로 올랐다며 분노를 터뜨린다. A씨를 욕하지 마시라.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 돌리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데 어떻게 A씨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지금이라도 빚을 내어 집을 살 수 있겠는가? 그는 잘못된 것은 내 판단이 아니라 오른 저 집값이라고 믿으며 정의가 구현될 그 날만을 기다릴 것이다. 자기가 모은 자본을 월세의 반도 안되는 이자를 주는 은행에 넣어두고서.
딱히 E씨가 더 똑똑해서 집을 산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우연히 목돈이 생겼을 수도 있고 아니면 E씨가 집값이 싼 동네서 살아온 터라 대출로 집을 사기가 더 수월했을수도, 혹은 은행에 취직해 대출에 대한 심리적 장벽이 더 낮았을 수도 있다. 우리 모두는 우연에 의해 A와 E로 인생이 갈렸다. 당위가 아닌 우연이 가른 이 팔자의 갭은 다소 가혹하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 차이가 자식에게도 유전된다는 것이다. 일요일 저녁 온가족이 모인 식사자리에서 부동산이 올랐단 소식을 접한 A씨는 짜증을 내며 노릿하게 구워진 굴비의 배를 젓가락으로 휘젓는다. 어린 아들이 눈앞에 있는걸 잠시 잊은 채 주택시장이 제정신이 아니다, 보나마나 폭락할 것이다, 나라경제가 얼마나 엉망인지 아냐며 온갖 악담을 퍼붓는다. 아버지의 눈치를 보던 아들은 두렵다. 집값이 무너질까 두렵고 우리나라도 일본처럼 망해갈까 두렵다. 그래서 그는 두가지를 의심없이 믿으며 자란다. 하나, 우리의 소원은 통일. 둘, 집값은 거품이다. 그런 아이가 자라서 또 다른 A씨가 된다. 그는 결혼해 주택담보대출로 집을 사는 대학 동기들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혹은 한심한 눈으로 쳐다본다. 쟤는 어쩌려고 겁없이 집을 사나, 이게 다 버블인데. 불쌍한 친구에게 맥주한잔을 사고 집에 들어와 와이프와 해외여행 계획을 세운다. 친구가 원리금을 상환할 동안 자기는 월세를 내고 남는 돈으로 차를 산다. 와이프 구두도 산다. 자고로 YOLO의 시대 아닌가. 시간이 흘러 월세계약이 만기되니 집주인은 세를 올려달라 한다. 그제서야 A씨의 아들은 집을 한번 사볼까 복덕방을 기웃거리지만 가격은 2년 전보다 더 올랐다. 이거 버블인데.. 주택시장 상투를 잡고 돈좀 빌려 달라며 찾아올 줄 알았던 친구는 오른 집값에 함박웃음을 짓고있고 기다리면 기회가 올 줄 알았던 시장은 나를 두고 내달리고 있다. 아들은 아버지의 입맛 뿐 아니라 말버릇도 닮았다. 그 역시 굴비의 배때지를 젓가락으로 파내며 중얼거린다. "그놈의 투기꾼들.."
반면 E씨는 금융시스템과 자본주의에 대해선 A씨 만큼이나 모르지만 단 하나는 알고있다. 소득 만으로는 집을 절대 살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이제 고작 중3밖에 안되는 딸의 손을 붙잡고 은행에 찾아가 청약통장을 만든다. 언젠가 이게 딸의 인생을 바꿔줄 로또가 될지 모르지 않는가. 다 큰 딸이 직장을 가지고 결혼을 하자 E씨는 그녀에게 전세로 살 바에는 집을 사라고 조언한다. 그는 어려운 자본 뭐 수익 그런 용어들을 쫙 빼고, 간결한 말 한마디로 자신의 딸에게 인생경험을 물려준다. 빚도 자산이다. 얘야, 빚을 져야 돈이 모인단다. 아버지가 집을 산 덕분에 한 집에서 쭉 나고 자란 딸 역시 2년마다 이사를 다닐 자신이 없다. 사랑하는 아버지도 괜찮다고 하지 않는가. 그녀는 용기를 낸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잡고 집으로 돌아가 주저하는 남편을 부추겨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집을 산다. 의외로 삶이 그리 팍팍해 지지도 않는다. 그저 월세 대신 은행에 이자를 낼 뿐이니까. 이대로 30년이 지나면 온전한 내 집이 생길 것이다. 이렇게 E씨의 딸은 E여사가 된다. 이처럼 부는 상속뿐 아니라 경험을 통해도 유전된다.
현재로는 이 고리를 끊는 길은 A씨의 아들과 E씨의 딸이 결혼하는 것 뿐이다. 하지만 그 길은 점점 좁아지고 있고, 또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라고 해도 결혼에 사랑 이외의 것을 따지는 일은 좀 슬프지 않나. 집을 무조건 사라는 것도 아니고 또 언제나 빚을 내 투자하는 것이 맞다는 것도 아니다.(물론 나는 지금은 그래야 한다고 믿지만) 그저 부의 증식을 막는 비뚤어진 금융 상식을 좀 걷어내자는 것이다. 월세를 내나 이자를 내나 동일한 지출이고, 갚을 수 있다면 빚을 터부시 할 필요는 없다. 낼 능력만 있다면 현금카드를 쓰나 신용카드를 쓰나 무관한 것 처럼. 집값, 버블, 폭락. 이세 단어를 30년째 관용어구처럼 붙여 쓰는 기래기들도 오바질 좀 그만해라. 니들이 설레발 칠 때마다 망했다면 지금쯤은 한반도를 넘어 화성까지도 파산했을것이다. 교육수준과 배경에 상관없이 금융시스템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어야 하고 누구나 올바르게 이를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현재와 같은 부의 세습이 조금이나마 줄어든다. 막말로 A씨가 원한다면 언제든 E씨가 될 수 있는 사회가 부동산 정책이 나올 때마다 분노하는 그룹과 환호하는 사람으로 양분된 사회보다 더 낫지 않은가.
*혹자는 위의 예시는 집값이 무한히 오를경우의 이야기고 빠질때 어쩔거냐라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집은 땅 위에 짓는다. 그리고 공급이 한정된 생산요소인 땅 위에 짓는 집값이 장기적으로 하락한다는 것은 인류 문명 자체가 하락한다는 소리와 같다. 혹은 인류는 잘 사는데 한국만 망하든가. 그게 걱정이라면 당신이 빚을 내 집을 사든 말든 별 차이가 없다.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문제니까. 좀 더 아는척 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은 일본의 사례를 들어 우리나라도 디플레에 빠질거라고 한다. 예전 글에서 밝혔듯이 일본은 정책적으로 디플레를 일으킨 것이며 우리의 상황은 일본과 매우 다르다. 단지 가까이 붙어있단 이유만으로 우리도 디플레를 겪을거라고 믿는 다면 되려 대한민국이 공산국가로 변할거라고 전망해야하지 않나. 우리랑 가까운 나라들 중에는 공산주의 국가들이 더 많으니까.
2019년 10월 지금 이 글을 봅니다.
답글삭제글을 쓰진 시점보다 훨씬 벌어진 것만 같은 자산 양극화의 두 갈래길 위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네요.
앞으로 대한민국의 개인경제는 어떤 방향으로 변화하고, 분열될지 걱정이 됩니다. 적어도 대한민국이 자유시장경제체제와 자본주의 아래 계속 될 것을 신뢰한다면, 적어도 내 집 한 채 없이 YOLO하다 골로 가는 패착을 하지는 않겠죠.
믿을수 없을 정도로 좋은글...복잡한 숫자나 이론 없이도 자본주의의 속성과 인간의 속성을 잘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5번째 읽었는데 정말 감탄밖에 안나오네요.
답글삭제주인장님이라고 부르고 싶으나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선생님이라고 자연스레 나오게 됩니다. 이 블로그에 있는 글을 반복해서 모두 읽고 있습니다. 보면 볼수록 감탄밖에 안나옵니다. 많은 글 써주세요 감사합니다
답글삭제금융교육이 특히나 부재한 한국에서는 저렇게 자본주의를 도제식으로밖에는 배울 수가 없죠.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제가 할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답글삭제이 글 보고 집산 사람은 대박 났겠네요. 이 때만 해도 서울에 집 살 수 있는 시기였는데 훠훠
답글삭제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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