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27.

미개한 환율정책, 그리고 단호한 통화정책

우리나라에는 통화정책만 존재하지 환율정책이란 괴상한 정책수단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금융을 교과서로만 배운 것이다. 그렇다, 우리나라에는 그 괴상한 환율정책이 존재한다. 하지만 물가의 안정과 지속 가능한 성장을 목표로 삼는 통화정책과는 달리 환율정책에는 별다른 원칙도, 철학도 없으며 따라서 비용은 명확한데 반해 실익은 매우 불투명하다. 이런 정책을 미개하다는 말 외에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연초만 해도 1200을 하회하던 환율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함께 상승세를 거듭했고 이에 정부는 대량의 달러를 풀어 환율을 낮추려 했다. 1분기 말부터 2분기 말까지 우리나라의 외화보유고는 약 300억 달러가 급감했는데 이 중 거의 대부분이 1200원 초반 수준에 달러를 매도하는데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1400원이 넘는 환율을 마주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보다 무려 15%나 낮은 수준에 외화보유고를 풀기로 결정한 사람은 국회에 불려가지도 않았고 책임을 지지도 않았으며 국민들에게 사과하지도 않았다. 이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시장의 향방을 알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장기적인 적정 수준의 가격이 얼마인지 추정할 수는 있다. 연초의 경제지표들을 보면 그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당시의 환율 수준이 균형가격이라고 말하긴 어려웠다. 투자금은 계속해서 대한민국을 떠났고 무역수지는 적자로 돌아서기 시작했으며 다른 주요국 통화들 역시 약세를 지속했다. 하지만 정부는 터무니없이 낮은 수준에 터무니없이 많은 외환보유고를 푸는 터무니없는 판단을 내렸다. 문제는 그런 개입은 지속 가능하지도 않고 국제수지 및 국내의 불균형을 악화시켜 경제 전반에도 악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왜 이런 미개한 정책을 펴다 외화보유고를 털어먹었을까*. 이는 그들이 무능하면서도 오만하기 때문이다. 지난 1년간 원자재 가격과 금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급변했고 한국을 둘러싼 경제환경도 크게 달라졌다. 하지만 무능한 정책결정자들은 그런 거시환경의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다.(이런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더 힘든 일 아닌가) 그저 원숭이처럼 재작년에도 그 이전에도 환율의 상단이 1200원이었으니 이번에도 비슷하겠거니 하며 멍청하고 게으른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게다가 무역수지와 자본수지가 모두 적자를 찍는 나라의 통화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일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근본적으로 루나를 풀어 테라의 값어치를 달러에 페그하겠다는 권도형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이만한 액수를 풀다니, 그들은 진심으로 자신들이 시장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믿었나 보다. 게으르고 멍청한 데다 오만하기까지 한 사람들이 내린 판단이 어떻게 좋은 결과를 가져왔겠나. 권도형이 여러 개미들의 가상자산을 깨끗하게 지워버린것처럼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며 유지해 온 외환보유고의 상당액이 몇 주 몇 달 만에 대한민국의 계좌에서 빠져나갔다.

지난 목요일, 일본 중앙은행은 엔 약세에 제동을 걸기 위해 대대적 개입을 단행했다. 한국과 일본은 모두 무역적자에 시달리고 있고 미국의 빠른 금리 인상으로 자국 통화가 달러 대비 절하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이 연초부터 지속적으로 외화보유고를 소진한 것에 반해 일본은 환율이 25% 상승한 후 대대적인 개입에 나섰다. 둘 중 어느 쪽이 한정된 외화자산을 더 효과적으로 사용했는지, 둘 중 어느 나라의 경제가 균형점에 더 빨리 도달할지 굳이 분석해 볼 필요가 있을까. 한국의 대중문화는 이미 일본을 넘어섰는데 한국의 관료들은 어찌 딴따라만도 못한 수준에 머물러 있을까.

작년 정부는 한국 시장을 MSCI 선진국 지수에 포함하고자 다방면으로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그 이유는 한국의 주식시장이 작아서도, 거래량이 모자라서도, 안보환경이 불안정해서도 아니었다. 바로 국제표준에 맞지 않는 후진적인 제도 때문이었다. 이처럼 많은 경우 우리나라가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대개 미개한 관료들 덕이다. 세계 1위의 반도체 회사를 만든 사람이 괜히 한국의 관료들을 3류라고 지칭했겠는가. 

문제는 그 관료들의 어리석은 짓이 가져온 비용들은 늘 우리 일반 국민들에게 청구된다는 점이다.


*               *               *


하지만 모든 관료가 그런 것은 아니다. 이제껏 여러 차례 한국은행의 줏대도 없고 원칙도 없는 통화정책을 비난했지만 이창용 총재가 이끄는 한국은행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전의 글에서 밝힌 대로(링크) 현재의 환경이 과거와 다르다면 중앙은행은 성장과 일자리를 희생시키더라도 인플레를 먼저 잡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정책결정권자 입장에서 매우 어렵고도 고통스러우면서도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인데 이창용 총재는 이에 대해 명확한 시그널을 내놓았다.  

중앙은행이 언변을 모호하게 할 때와 명확해야 할 때가 서로 다르다고 생각한다. 모호해야 할 때 명확하고 명확해야 할 때 모호하다 결정적인 순간에 좌고우면하던 전임자들과는 사뭇 달리 이창용 총재는 시장과 대중들에게 현 상황에서 통화정책의 우선순위가 무엇이고, 또 그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노련하면서도 군더더기 없이 설명했다. 자산 시장은 그의 명쾌한 발언들을 꺼릴지 모르나 정책결정자가 올바른 데이터와 합리적 근거를 바탕으로 자신감 있게 정책을 설명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워낙 불확실한 시대인지라, 미래에 그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 우리는 가장 어려운 순간에 가장 훌륭한 중앙은행장을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견해지만 올해 소진한 외환보유고는 전체 외환보유고의 10% 미만으로 외환위기를 촉발할 수준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하지만 당국자들이 이런 멍청한 판단을 계속한다면 먼 미래에도 안전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2022. 9. 24.

choc promo (by Sound Providers)

 


주식은 주식일 뿐이고 시장은 시장일 뿐이니 너무 일희일비하지 마세요.

터부 요기니, 그리고 노회.

2003년 베니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도 성대한 비엔날레가 열리던 그 해 여름. 한 동양 여성이 산마르코 대성당 광장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빨갛게 물들인 머리에 경극이나 가부키를 연상시키는 짙은 화장을 한 그녀는 곧 옷을 벗어던지기 시작했고 빨간 속옷만 입은 채 관객들 사이로 걸어 들어가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무척이나 기괴하면서도 에로틱하지만 또 어딘가 서글픈 그녀의 춤사위는 비엔날레를 찾아온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사실 정식으로 초대받지도 못했던 이 무명의 신인은 단번에 가장 유명한 한국 아티스트가 되었으니, 바로 낸시랭-터부요기니가 탄생하던 순간이었다.

여전히 사회에 엄숙주의가 만연하던 시절 미술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시절의 화가란 마치 선비나 계룡산의 도사와도 같은 것이었고 그런 이들과 결탁한 인사동의 화랑들은 카르텔을 형성하며 온 힘을 다해 퇴보하던 중이었다. 그러니 어찌 낸시랭이 이뻐 보였겠나. 젠체하던 이들은 겉으로는 그녀를 관대하게 대하는 척하면서도 그녀의 예술을 저급한, 마치 인스턴트식품과도 같다며 은근히 까내리고 있었다. 그녀가 그런 평단의 분위기를 몰랐을까. 낸시랭은 대중들과 평단에 굴복하기는커녕 근엄한 예술의 성지와도 같던 예술의 전당에 나타나 입던 바바리를 벗어던지고 다시금 비키니 차림의 육신을 대중 앞에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본 대중들은 그녀를 비난하기 바빴지만, 세상에 얌전히 순응하기만 하는 예술이란 게 어디에 있는가. 그녀는 계속해서 위선을 권위로 덮은 예술계와 관음적인 관객 모두에게 당차게 중지를 내밀었다. 

보수적이고 젠체하는 평론가들 앞에 그녀가 비키니 차림으로 등장한지 어느덧 20여 년이 지났다. 더운 여름이 가시기 시작했던 지난 8월 말 그녀의 개인전이 열린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허나 그녀의 전시를 둘러보고 난 뒤 나는 적잖이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 모두와 싸우며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펼치던 낸시랭은 온데간데없고 과거의 영광을 답습하거나, 지나간 작가들의 작품에 올라타거나, 혹은 미디어 아트나 NFT와 같이 한 물 가기 직전의 진부한 트렌드에 영합한 작품들을 보게 될 줄이야. 내가 기억하던 그녀는 결코 그럴 작가가 아니었는데,라고 중얼거리며 전시장을 나서야 했다. 어쩌면 그녀는 지쳤던 것이 아닐까. 대중의 손가락질과 싸우느라, 또 개인적인 아픔을 이겨내느라 더 이상 싸울 힘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김빠진 그녀의 작품을 바라보는 일은 마치 아버지 정수리에 난 흰머리를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서글픈 일이었다..     

하지만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여전히 몇몇 작품은 충분히 도발적이었더라. 인터넷 홍위병들과 PC라는 신을 섬기는 광신도들이 창작자들의 입을 틀어막는, 마치 중세 암흑기와도 같은 이 끔찍한 시대에 그녀가 아니라면 누가 이런 작품을 내놓을 수 있었을까. 그녀는 여전히 권태를 깨부수는 작가였고 또 충분히 도발적인 아티스트였다. 그런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어 얼마나 반가웠던지.

낸시랭_Bubble Coco Woonwoodocheop_캔버스에 유채_112.1×162.2cm_2022

낸시랭_Picnic on the plum tree_캔버스에 유채_162.1×909.9cm_2022


*그리고 그녀는 노래방 기기로 보랏빛 향기를 불렀다.

2022. 9. 23.

불쾌한 인플레이션의 시대 (III) - 파월은 21세기 볼커가 될 수 있을까

불쾌한 인플레이션의 시대 (I) (링크)
불쾌한 인플레이션의 시대 (II) (링크)

지난 8월 말 잭슨홀에서 파월은 매우 간결하면서도 명확한 메시지를 시장에 던졌다. 인플레이션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연준은 계속해서 강력한 조치를 취할 것이고 그로 인해 다소간의 고통이 뒤따르는 것조차도 감내할 것이라고.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경제의 과열을 방치하던 미국의 중앙은행(링크)이 이렇게 급격하게 돌아선 이유는 무엇인가. 작년 상반기 연준은 인플레의 주원인이 일시적으로 지연된 공급에 있다고 보았고 따라서 그 때문에 수요를 억제하는 것은 디플레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지난 사반세기 동안 인플레를 잠재우는 일보다 디플레로부터 경제를 끄집어내는 것이 더욱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연준은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디플레보다 인플레의 위험을 선택했던 것이다.  

하지만 판데믹의 여운이 모두 가시고 난 뒤에도 공급은 여러 측면에서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고 반면 수요는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올랐다. 5% 중반에서 안정될 것이라고 믿었던 미국의 물가는 9%를 넘기며 2차 석유파동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고 연준은 빅 스텝을 넘어 자이언트 스텝에 나서게 되었다. 그와 같은 노력의 결과 월별 CPI 변동률은 0%에 근접했고 미국의 장기 cpi 기대치 역시 2% 대로 안정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월은 인상의 고삐를 늦추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의 바로 옆에서는 가장 좋은 친구였던 중앙은행에게 뒤통수를 거하게 맞고 폭락하는 주식시장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 하지만 그의 변심에는 이유가 있다.

이전에 언급했던 것처럼(링크) 현재의 인플레이션은 장기적으로 유지될 가능성이 높고 이와 싸우는 중앙은행은 경제를 오랫동안 짓누를 것이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대로 실업률이 높아지더라도 중앙은행은 반드시 기대인플레이션을 안정시켜야만 한다. 경기가 어렵다고 섣불리 금리를 인하하거나 부양책을 사용하게 되면 기대인플레이션이 다시 고개를 쳐들 것이고 이런 사이클이 반복되면 경제는 반드시 심한 불황을 겪게 된다. 따라서 단기간의 경제적 고통을 감내하더라도 지속적이고 꾸준하게 긴축정책을 시행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그때와 같은 상황에 놓였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중앙은행들은 올바른 정책을 택할 수 있을까.

1979년 연준 의장으로 취임한 폴 볼커는 두 자릿수가 넘는 인플레이션을 잠재우기 위해 금리를 급격하게 올렸다. 그리고 그로 인해 경제가 빠르게 꺾이고 실업률은 급등했지만 여전히 인플레는 낮아지지 않았다. 물가와 싸우던 연준이 긴축정책을 이어가자 농부들은 트랙터를 몰고 연준 본부 앞에 몰려와 가두시위를 벌였고 중고차 딜러들은 차 키들을 관에 넣어 연준에 보내며 강력하게 항의했다. 여론의 압박을 이기지 못한 연준은 거의 15%에 달하는 물가 상승률을 보면서도 17%가 넘던 기준금리를 700bp나 인하해야 했고 이는 스태그플레이션을 악화시켰다. 이렇게 오락가락하던 연준은 1981년에 들어서야 과감하면서도 단호한 정책을 펼 수 있었다. 미국 경제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불황을 마주하는데도 불구하고 기준금리를 20%까지 올리며 마침내 기대 인플레이션을 안정시켰다 하지만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당시 60% 후반의 지지율을 기록했던 레이건 행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과* 10년이 넘는 시행착오 끝에 중앙은행 내에서도 단호한 정책에 대한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방공개시장위원회의 점도표(2022년 9월) 

과연 지금은 어떨까.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암묵적으로 연임이 보장되었던 연준 의장의 임기는 옐런의 시대에 처음으로 단임으로 끝났고 파월 역시 첫 임기 이후 교체될 뻔 했다 가까스로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간밤에 발표된 점도표를 보면 위원들 사이에서 2024년의 금리 전망에 대해 큰 이견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는 연준 내에서 파월이 볼커처럼 고통스러운 금리 인상을 이끌어 갈 수 있을지 의문을 남긴다. 무엇보다 레이건과는 달리 현재 바이든의 지지율은 재선에 실패한 도날드 트럼프나 카터 만큼이나 낮은데 그런 행정부가 여론의 압박으로부터 연준을 얼마나 보호할 수 있을까.

게다가 몇몇 보고서에 따르면 행정부가 재정적자를 크게 유지하는 한 긴축적인 통화정책 만으로는 인플레이션을 잠재우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현재의 행정부가 인플레이션과 싸우겠다고 주장하면서도 쉽사리 급격한 긴축에 나서지 못하는 것은 유권자들의 표를 고려하기 때문인데, 이 가운데 과연 파월은 볼커가 될 수 있을까.

지난 30여년간 경제가 어려워질 때마다 중앙은행이 공격적으로 금리를 인하할 수 있었던 것은 인플레이션 기대가 매우 낮고 안정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인플레이션을 안정시켰던 여러 조건들은 매우 크게 돌아섰거나 영영 사라졌다. 그런 환경에서는 중앙은행은 더이상 당신의 친구가 아니다. 통화정책은 경제 전반에 걸쳐 무차발적인 영향을 미치는데 현재의 인플레이션 압력이 노동시장에 기인한다면, 중앙은행은 가장 경직적인 노동시장에 영향을 줄 때까지 금리를 올려야 한다. 즉 사람들의 소득이 깎이고 일자리를 잃을 때까지, 또 고령의 노동자들이 가난해져서 은퇴를 미루도록 중앙은행은 긴축을 지속해야만 한다. 과연 우리는 그 고통스러운 인플레이션의 시대를 맞이할 준비가 되었는가.    

아마도 올해 말을 기점으로 중앙은행들은 중립금리에 도달하거나 넘어서게 될 것이니 따라서 우리는 인플레이션과의 대결에서 전반전을 막 끝낸 셈이다. 그리고 그 전반전은 투자자나 중앙은행에게 너무나 쉬운 경기나 다름없었다. 투자자들은 부채를 늘리면 돈을 벌었고 중앙은행이 금리인상은 자산 가격의 하락을 가져와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그 후반전은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싸움이 될 것이다. 부채는 투자자들의 발목을 잡을 것이고 금리는 이제 자산가격 뿐 아니라 우리의 소득과 소비에 타격을 가할 것이다. 대중들은 "자산 가격 잡으라고 금리를 올리랬지, 내 월급을 잡으라고 금리를 올리랬나"며 불만을 터뜨릴 것이고 중앙은행이 필요한 인상을 거듭할 때마다 그 반발은 점차 거세질 것이다. 코로나는 우리에게 실제적인 생존의 위협을 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런 경제적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되려 더욱 부자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인플레이션을 마주하고 있다. 세계대전 이후 최초로 세계 사망률을 증가시킨 코로나에 비하면 별것 아닌, 마치 천연두처럼 지난 세기에 멸종된 줄 알았던 인플레의 위협과 싸우기 위하여 사람들은 가난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중앙은행의 대응 여부에 따라 이 후반전은 아주 길어질 수도, 혹은 빠르게 끝날 수도 있다. 과거에 이와 같은 시대가 어떤 양상으로 펼쳐졌는지 첫 글의 마지막 문단을 다시금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친다.

[인플레이션의 초입에서는 당신이 무엇을 사는지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많은 빚을 냈는지에 따라 수익이 정해지고 당신의 근로소득이 휴지가 되는 것을 겪을 것이다. 그렇게 인플레이션의 초반부를 지나고 나면 이윽고 하반기가 시작될 것고 시대의 막바지를 향해 달릴수록 각 중앙은행들이 뒤늦게 인플레이션에 대응하기 위해 금리를 올리는 것을 겪을 것이다. 디레버리징의 시대가 오겠지만 그 시기를 완벽하게 맞춰 적응하는 투자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니 대부분의 투자자들은 포트폴리오가 레버리지 된 채 새로운 후반전을 맞이하겠지. 그제야 투자자들은 자신이 어떤 자산을 샀는지에 따라 포트폴리오의 수익률이, 더 나아가 자신의 생사가 엇갈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레이건 이후 집권 100일 차에 그보다 더 높은 지지율을 기록한 미국 대통령은 없었다.  


*               *               *


퇴고를 하고 나서 다시 읽으니 의도에 비해 지나치게 암울한 이야기만 늘어놓은듯하여 한 가지 희망적 사례를 들어보려고 한다. 히피 문화가 한 풀 꺾이고 비틀스가 해체하고 난 뒤의 미국은 건국 후 가장 음울한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주식시장의 성장은 멈추었으며 인플레이션은 지속적으로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을 위협했으며 변덕을 부리는 연준의 금리 탓에 경기의 부침은 더욱 커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신과 창조를 거듭하는 기업들은 계속해서 탄생하였고 몇몇은 오늘날까지 뉴욕 거래소에 상장될 정도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바로 세계에서 가장 비싼 기업에 오른 애플이다.      

2022. 8. 28.

글, 그리고 폭력

 


오히려 글을 쓴다는 것은 일정 부분 타인의 정신과 감성을 지배하는 욕구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폭력성을 내재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행간을 따라 읽는 이의 정신은 조작된다. 육체의 하중으로 누르는 게 아니라 언어의 하중으로 누른다. 글은 내밀한 지배욕의 소산이다.


그리고 나는 그 폭력을 너무나도 사랑한다.


written by 하헌기

painted by egon schiele

2022. 8. 15.

가격의 시대

 


책방에서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고전과 명작들이 싼값에 팔리고 시대는커녕 한 계절조차도 살아남지 못할 책들이 비싼 값에 팔리고 있다. 이런 것이 비단 책뿐인가. 우리 삶에 필수적인 것들은 너무나 싼값에 팔리는데 비해 없어도 잘 살 쓸데없는 것들은 터무니없이 비싼 값에 팔리고 있다. 가격은 가치가 아니고 데이터는 지식이 아니며 또 지식은 지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영혼이나 지혜도 담기지 않은 엑셀과 모델을 돌려 튀어나오는 숫자를 가격이 아닌 가치라고 일컫는 우리는 얼마나 오만한가.

우리는 가격이 가치를 꿀꺽 삼켜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 바야흐로 값의 시대다. 가치 따윈 증발하고 그 자리에 희멀겋게 남겨진 소금기 마냥 가격만 남은 시대에 살고 있다. 나 역시 중요하지 않은 일을 하느라 중요한 일을 할 시간이 없는, 그런 모순에 빠진 흔한 바보에 불과하다. 그러면서도 좀처럼 이 어리석음을 끊어내지 못한다. 그 대가가 무척이나 혹독하리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The empire of lights 

paint by René Magritte

2022. 7. 31.

진짜 진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나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입니다. 똑바로 읽어도 우영우 거꾸로 읽어도 우영우. 기러기 토마토 스위스 인도인 별똥별 우영우. 하지만 내가 이상한 변호사라고 불리는 것은 자폐가 있거나 행동이 어눌해서가 아닙니다. 자폐아라고 하지만 나는 서울대학교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한 천재니까요. 한번 보기만 해도 모두 기억하는데 어떻게 일반인들이 저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중간고사든 변호사 시험이든 제게는 오픈 북이나 다름없어요. 게다가 저는 무척 창의적인 변호사에요. 신참인데도 불구하고 경력이 십 년이 넘는 베테랑 변호사들마저도 간과하는 쟁점을 파악하고 즉흥적으로 법정에서 변론에 나서도 훌륭하게 해내는 슈퍼스타입니다. 필드 위에 손흥민이 있다면 법정에는 저 우영우가 있는 셈입니다. 기러기 토마토 스위스 인도인 별똥별 우영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전히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무척이나 모순적인 존재니까요. 아마 여러분들도 느끼고 있을 거에요. 제 능력은 로스쿨에서나 변호사 시험을 치르는데 대단히 유리해요. 이건 장애가 아니라 사실상 초능력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어쩌면 서울법대 창설 이래 최고의 천재인지도 모릅니다. 물론 약간의 핸디캡이 있습니다. 펭수를 좋아하던 김정훈 씨나 지적 장애를 가진 신혜영 씨에 비하면 아주아주 사소한 장애이지요. 게다가 사회생활도 잘하고 직장에서는 최고의 능력자입니다. 또 얼굴까지 아주 예쁜 변호사입니다. 그래서 사내연애도 합니다. 회사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남자 직원이랑요. 심지어 사실 나는 회장님의 숨겨둔 자식이지요. 천재도 아니고 로스쿨도 못 가고 회장님 자식도 아니고 사내 훈남과 연애도 못하는 여러분들은 정말로 이런 저를 보며 동정심을 느끼십니까? 그것 참 신기한 일이네요. 아니 이 경우 이상하다고 하는 게 맞겠습니다. 

존재뿐만이 아닙니다. 제 말과 행동에도 모순이 있습니다. 저는 소덕동을 관통하는 도로의 공사를 막아달라는 사건을 맡아 승소했습니다. 왜냐하면 소덕동은 매우 아름다운 곳이기 때문입니다. 오래된 팽나무가 마을을 내려다보고 서로 돕고 웃는 이웃들이 어울려 지내는 아름다운 동네이지요. 그런 소덕동을 개발하겠다니요. 절대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그 공사를 좌초시켰어요. 아주 뿌듯한 일입니다. 이제 신도시 거주자들은 교통체증에 시달릴 것이고 이미 몇 년간 진행된 공사를 정지시킨 덕에 세금도 낭비되고 말았습니다. 무엇보다 소덕동에 거주하는 총 2513가구 중 과반이 넘는 1557가구가 개발사업에 찬성하며 보상금을 받기를 원했지만 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소덕동을 대표해서 이 일을 막았습니다. 아, 모르셨습니까? 저는 신도시에 어마어마한 땅과 건물을 가지신 최한수 이장님의 변호사입니다. 법무법인 한바다에 수임료를 내는 건 지역 유지이신 이장님이지 저 소덕동 주민들이 아닙니다. 아마 저분들은 길도 좁고 교통도 열악하고 인프라도 부족한 이 시골 동네에서 평생 사시겠지요. 네 그렇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깡촌은 계속해서 깡촌으로 남아있어야 합니다. 물론 저라면 여기에 안 살겠지만요. 여기엔 김밥집 배민도 안되고 고래인형 까페도 없어요. 그렇게 저와 부자 이장님은 소덕동의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나겠다며 어리석게도 토지보상금을 바랬던 저 1557가구의 주민들에게 따끔한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내 사정이 되면 다른 이야기입니다. 어릴 적 살던 강화도가 개발되어 친구 아버지가 보상금을 받았는데 형들이 모두 가져갔다고 합니다. 모처럼 대박이 터졌는데 그 행운을 자기들이 챙기려 하다니. 정말 나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나, 기러기 토마토 스위스 인도인 별똥별 우영우는 기지를 발휘해 그 돈을 되찾아옵니다. 네 친형들을 법정에 세우고 함정에 몰아넣어야 할 정도로 돈은 중요해요. 이건 내 돈이니까요. 돈은 매우 중요해요. 우애를 지키겠다고 돈을 포기하는건 어리숙한 바보예요. 이제 동동삼씨는 그렇게 받은 보상금으로 내 친구 동그라미에게 서울 역세권에 번듯한 신축 아파트도 사주고 비싼 도시의 물가도 걱정하지 않도록 생활비도 넉넉하게 대줄 수 있어요. 음? 지금 1557가구의 소덕동 주민들 이야기를 왜 꺼내는 겁니까? 당신은 지금 본 사건과 전혀 연관성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는 말 못 들어 보셨습니까?? 뒷통수 맞고 싶습니까?  

어린이들은 지금 당장 놀아야 한다는 개똥철학을 설파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참. 기억나십니까? 제가 첫 의뢰를 수임 받았을 때 의뢰인은 저를 못 미더워 했어요. 하지만 정명석 변호사님께서 이 몸이 서울대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라는 것을 알려줬어요. 그제서야 의뢰인은 저에게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로도 궁지에 몰릴 때면 나는 서울대 로스쿨 수석이라는 타이틀을 곧잘 써먹었습니다. 이처럼 간판의 힘은 대단합니다. 보기보다 많은 것을 설명해 주거든요. 나이키나 애플이 브랜드 마케팅에 열을 올리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저의 학부 친구들과 로스쿨 동기들은 오랜 시간 동안 남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대와 로스쿨에 왔어요. 물론 그렇게 공부해 봤자 읽기만 하면 다 기억하는 저를 이길순 없었지만요. 

어린이는 놀아야 합니다. 하지만 맨날 노는 어린이는 좋은 성적을 낼 수 없어요. 네 그렇습니다.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다고 해서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변호사는 될 수 없어요.(어린이 해방군 여러분들은 저 같은 천재가 아니잖아요?) 의사도 될 수 없어요.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지는 건 어려워요. 남들이 부러워하는 동네에 집을 사는 것도 힘들어요. 인스타에 멋진 사진들을 올리는 삶을 살 수도 없어요. 물론 그렇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배우들은 촬영이 끝나면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고층 아파트로 돌아가요. 이젠 서울대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해도 사기 힘든 집입니다. 작가들은 "어린이는 놀아야 합니다"라는 대사를 쓰고 작업하던 노트북을 덮자마자 나서 지인들에게 전문직들과 소개팅을 좀 주선해 달라고 카톡을 보냅니다. 이왕이면 서울대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한 사람이라면 좋겠어요. 물론 답장은 없어요. 시청자 여러분들도 이 드라마를 보는 이유는 나, 이상한 우영우가 변호사라서에요. 이상한 고졸경리 우영우. 이상한 쿠팡맨 우영우. 이상한 백수 우영우. 이런 드라마였다면 벌써 망했어요.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한국 드라마는 주로 세속적 욕망을 자극해요. 그걸 아주 잘합니다. 그래서 재미있어요. 근데 우리들은 참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우영우라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수퍼맨을 창조해놓고 거기에 장애를 한 스푼 얹은 뒤 장애인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요. 그리고 일반 장애인들이 겪지도 않을 상황을 가정해서 사회가 부조리하다며 따끔하게 일침을 가해요. 형들을 고소해서 보상금을 타내는 이야기를 하다, 돈 많은 이장 아저씨가 보상금을 받고 싶다는 동네 주민들의 의사를 묵살하는 이야기를 미화합니다. 나보고 서울대 로스쿨을 나온 천재라고 동네방네 광고할 때는 언제고, 또 곧장 자식을 서울대 보내려고 애쓰는 부모님들을 악당으로 그려요. 갑자기 판자촌이 아름답다며 재개발을 막던 박원순 아저씨나 특목고를 없애자면서 뒤로 자기 아들 둘은 특목고에 보낸 조희연 아저씨 냄새가 나요. 킁킁. 제 이름은 우영우, 앞에서 읽어도 뒤에서 읽어도 똑같지만 드라마는 그렇지 않아요. 앞에서 볼 땐 재미었는데 뒤에서 보니 제작자의 욕망과 컴플렉스를 얄팍한 도덕적 우월감으로 덮어 사회에 일침을 가하겠다는 의도로 범벅되어 있어요. 정말 이상해요. 아. 그래서 제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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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의 이야기를 다루는 드라마에 딴죽을 걸자면 한도 끝도 없지. 게다가 사회경험도 적고 이해도 얕은 작가들이 작품에서 드러내는 철학적 빈곤이 뭐 어제 오늘의 이야기도 아니니까. 게다가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다큐가 아니다. 하지만 오락영화와 드라마를 양산하는 작가와 감독들이 자꾸 그 선을 넘나드는 시대에 관객과 시청자들에게만 오버하지 말라고 주문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니 나도 그 선을 넘어 다큐라는 돋보기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들여다보련다. 

서울대 로스쿨, 젊은 직원들조차도 수 억의 연봉을 받는 로펌, 그리고 회장님의 숨겨둔 자식이라는 설정까지 이 드라마는 대중들의 세속적 욕망을 한껏 자극하는 장치들로 점철되어 있다. 하지만 정작 매 화에서 작가는 그 세속적 욕망을 부정하는 사건들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우리가 이 드라마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그 점에 있지 않을까. 토지보상은 드라마에서 뜻하지 않은 횡재를 의미하는 클리셰나 다름없다. 이 드라마에서는 그 사건이 두 번 등장하는데 작가는 이에 대해 이상하리만큼 모순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그 차이는 바로 관찰자의 시점에 있다. 삼형제의 난에서는 작가는 보상의 수령자의 시각에서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고 소덕동 이야기에서는 보상금 수령자가 내가 아닌 제3자니까. 우리의 불편함은 입장에 따른 작가의 태도가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에 있다. 우리가 돈을 욕망하는 것은 더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동그라미와 아버지의 입을 빌려 그 욕망을 표출한다. 하지만 수령자가 내가 아닌 타인이 되니 작가는 갑자기 도덕이라는 몽둥이를 꺼내 그들의 욕망을 매섭게 후려치기 시작한다. 마치 시기심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더 나아가 작가는 소덕동을 마치 인디언 보호구역이나 민속촌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묘사한다. 그곳에서 소덕동 주민들은 잘 꾸며진 어항의 관상용 물고기들처럼 도시에서 온 관광객들이 보기 좋도록 정겨운 시골 마을을 연출한다. 하지만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던가. 인디언들도, 또 구한말의 오지 주민들도 지하철과 24시간 편의점, 영어유치원 그리고 신선배송 서비스를 누릴 수 있다면 얼마든지 반길 것이다. 소덕동이 개발되지 않는다면 몰락하는 1차 산업에 종사하는 대다수 주민들에게 그런 편의는 허락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가는 그 사람들의 삶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마치 주말에 차를 몰고 용인 민속촌을 방문한 관람객의 시선으로 #대박핫플 #소덕동을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언제 다시 들릴지 모르는 그 관광지를 보존하기 위해 주민들의 미래를 나락으로 보내는 일조차 서슴지 않는다. 그런 시각은 오로지 자신의 옛 추억을 재현하기 위해 오징어 게임을 열어 455명의 지원자들을 폭력과 죽음으로 몰아넣은 오일남의 정서와도 이어져있다.   

작가의 모순적 시각은 드라마가 설파하는 교육관에서도 드러난다. 작가는 시스템의 정점에 있는 서울대 로스쿨과 고학력 고소득자들인 변호사를 소재로 삼아 시청률을 올리면서도 그 위치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과 경쟁에 부정적인 낙인을 찍는다. 나 역시 경쟁적인 한국 사회가 바람직한지 의문이지만, 이런 과열된 경쟁은 대중들이 가진 욕망의 결과일 뿐이지 결코 원인이 아니다. 물론 내신 5등급인 학생이 2년제 전문학교를 졸업해 소덕동 인근의 빌라에서 살며 중소기업에 다녀도 행복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밋밋한 스토리는 대중의 욕망을 자극하지 않는다. 인기 드라마에는 마치 흙탕물을 일으키는 미꾸라지처럼 대중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무엇인가가 꿈틀대야 하는 법. 그래서 작가는 스토리에 서울대 로스쿨과 고소득자들이 모인 로펌, 그리고 회장님의 숨겨둔 자식을 담았다. 그것들을 욕망하지 않는 이가 어디에 있으랴. 우리 모두는 같은 것을 바라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경쟁이 발생한다. 이를 부정하려면 욕망 또한 부정해야 하는데 제작자와 작가는 대중들의 그 욕망에 기생하면서도 그 결과물은 부정하는 이중적 태도를 취하고 있지 않은가. 앞에서 읽어도 뒤에서 읽어도 똑같고 솔직한 우영우와는 달리 드라마 너머로 보이는 작가가 앞과 뒤가 무척이나 다르다고 느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과거 권위주의의 시절, 정부는 영화와 드라마 제작자들에게 창작물에 정부가 원하는 이데올로기적 메시지를 넣도록 강요했다. 하지만 그런 메시지들이 이야기의 개연성이나 핍진성을 무너뜨리면서 등장하자 되려 설득력은 반감이 되고 시청자들은 종종 그 메시지들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곤 했다. 오늘날 이 이념적 강압은 진영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관객들의 눈은 마치 쫑긋 세운 강아지의 귀와 같아서 작가가 완력을 쓰는 순간 그 의도를 기민하게 알아채곤 한다. 작가나 감독 혹은 배우가 이념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에게도 표현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그대들에게도 그럴 자유가 있으니까. 하지만 평균적인 대중들보다도 교육 기간이나 사회문제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은 사람들이 따끔하게 일침을 놓겠다며 송곳과 대본을 들고 사회의 이곳저곳을 푹푹 찔러대는 것은 정의감이 아닌 도덕적 우월감을 내보이고 싶은 욕망으로부터 나온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의 욕망이 다른 욕망을 저열하다며 훈계하는 웃기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니 작가들은 이제라도 마음을 다잡고 차분히 앉아 훌륭한 오락 TV 드라마를 만드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이 드라마는 정말로 잘 만든 오락 드라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