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5. 6.

서울은 왜 못생겼는가

[그 이유는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못생겼기 때문이다]

서울은 못생겼다. 이 도시의 민낯은 너무나 못생겨서 과연 규모 면에서 세계 상위권 도시 중 하나가 맞나 싶다. 그런데 서울은 지형적으로 멋지지 않기가 어려운 위치에 있다. 서울을 가로지르는 한강은 파리의 센 강 등, 여느 대도시의 강보다 거의 두배는 더 넓고 그 중심부에는 남산이 솟아있어 도시의 공간감을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자연은 서울에게 멋진 토대를 선사했는데 도시의 모습은 못생겼으니 그 이유는 분명 인간에게 있다.
 
 서울이 못생긴 이유는 자명하다. 다음의 두 스카이라인을 비교해보자. 확연하게 A가 낫고 B가 못났다는 인상을 줄 것이다.(만약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미적 감각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인간은 획일적으로 통일된 스카이라인보다 들쭉날쭉해서 역동감을 주는 선을 더 선호한다. 문제는 무엇이 서울의 스카이라인을 A가 아닌 B에 가깝게 만드냐는 것이다.

흔히 서울의 건축을 두고 "성냥갑 아파트", "하늘이 안보여 답답하다"고 한다. 그래서 공무원들과 환경단체들은 무분별한 고층 빌딩과 난개발이 도시경관을 해친다고 주장하지만 헛소리다. 혹시 맨하탄의 타임스퀘어나 홍콩의 센트럴 지역을 거닐어 본 적이 있는가. 그 공무원 나으리들과 고귀하신 환경단체 횐님들께서도 서울보다 훨씬 촘촘한 홍콩과 뉴욕의 스카이라인을 보며 백만불짜리 야경이라며 호들갑을 떨었을 것이다. 도시가 가진 미학과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은 아주 다르다. 그런데 인구 천만의 메트로폴리탄인 서울이 아름답지 않은 이유를 자연과 비교해서 찾는 것은 엔초비 파스타를 먹으며 얼큰한 맛이 부족하다고 투덜대는 촌뜨기들의 불평이다. 서울의 추함은 무분별한 개발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서울의 도시계획은 너무나 강압적이고 개발을 지나치게 통제한다. 서울시 건축의 다수를 차지하는 아파트를 놓고 보자. 대부분의 신축단지는 용적률 300%에 35층 이하의 규제를 받는다. 이 규제를 만족시키면서 사업성을 갖추려면 결국 모든 동을 똑같은 모양의 35층으로 지을 수밖에 없다. 88대로를 따라 성냥갑 아파트들을 늘어놓은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다.

혹자는 스카이라인은 규제때문이라 쳐도 획일적인 구조와 건축양식이 못생김의 핵심이라고 지적할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규제때문이다. 서울시 도시미관의 개선은 대부분 재개발/재건축을 통해 이뤄진다. 전쟁 직후 공구리에 대충 시멘트 부어 만든 집들을 부수고 1인당 GDP 3만불의 눈높이에 맞는 집들을 만드니까. 그런데 정부는 여기에 앞서 말한 규제 외에도 온갖 제한을 걸어 재건축을 막는다. 재건축을 하려면 먼저 서울시에 임대아파트로 새 집들을 무상으로 기부해야하고, 그 뒤에 분양되는 새 아파트는 분양가를 제한해 싸게 팔아야하며, 건설사가 비용을 분담하겠다고 조합원들에게 혜택을 주면 수주과열이라며 막는다. 은행에서 이주비를 빌려주는 것도 제한한다. 그래도 돈이 남으면 초과이익이라며 환수한다. 그래도 재건축 하겠다고 해도, 젠장, 인허가를 내주지 않는다. 이 모든게 실제로 서울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재건축 조합의 이익을 빨아가놓고는 남은 돈으로 도시 미관을 개선할 멋진 집을 지으라 한다. 하지만 디자인에는 돈이 든다. 순전히 서울시의 외관을 개선하기 위해서 수지타산이 맞지도 않는 외관 디자인에 수십억을 퍼부을 사람은 없다. 당신과 나와 그리고 재건축 조합을 포함한 우리 모두는 딱 그만큼 이기적이고 또 계산적이다. 현 재개발/재건축 규제는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시민들이 성냥갑 아파트만 짓도록 강제한다.

이 멍청한 규제의 꽃은 한강변 층고규제이다. 현재 서울시 도시계획에 따르면 한강 인접 아파트는 최고 층수를 15층으로 하고 있다. 이유는 한강 조망권을 더 많은 서울 시민들에게 제공하기 위해서. 하지만 한강이 보이는 세대수를 늘리려면 반대로 한강에 고층을 지어야한다. 한강변에 45층짜리 아파트를 지으면 모든 층이 한강을 볼 수 있지만, 15층 뒤에 30층, 또 그뒤에 45층 이렇게 계단식으로 짓는다고 해서 한강이 보이는 집의 수가 늘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줄어든다.(아래 그림 참조) 하지만 서울시는 오늘도 한강조망권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눠야 한다는 입바른 말을 하면서 멍청하게도 한강뷰 아파트의 수를 줄여, 더 소수의 사람들이 이 전망을독점할수 있게 해주고 있다.



건물 외벽에 하늘색으로 표시된 세대가 한강을 볼 수 있는 세대.
이처럼 강변에 저층을 지으면 한강을 볼 수 있는 세대수는 줄어든다.

그럼 왜 이런 규제가 존재하는가? 뭐 시민들이 그렇게 요구해서 그렇지. 그렇다면 시민은 왜 이런 규제를 요구하는가? 바로 시기심 때문이다. 한남 3구역 주민들은 강건너 반포 주민들이 재건축을 한다면 샘을 낸다, 또 청파동 주민들은 한남 재개발이 지연된다는 소식을 들으며 입꼬리를 씰룩 올린다. 눈치빠른 정치인들은 사람들의 그런 심리를 읽고 온갖 말도안되는 건축 규제들을 쏟아놓는다. 다른 도시에서는 낡아서 흉물이 된 건축물을 두고 보조금을 주면서까지 개발을 독려하는데 서울에서는 입주민들이 수천억을 모아 내서 멋진 건물로 다시 짓겠다는데 정부가 앞장서서 막는다, 동료 시민들이 막는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의 멱살을 잡고 내가 못살지언정, 네가 잘사는 꼴은 못 보겠다는 태도가 오늘의 건축 규제를 만들었다. 그 결과 서울 시민들은 소득수준과 아주 괴리된 주거환경에서 살게 되었다, 심미적 측면 뿐 아니라 기능적 측면까지도. 오늘 밤에도 서울에선 해가 지면 벤츠를 끌고다니는 박 모 변호사가 소달구지 몰던 시절에 지은 40년 된 재건축 아파트로 돌아가고 신나게 유럽여행을 다녀온 대학생 김모씨는 택시조차도 거부하는 후암동 언덕길을 캐리어를 질질 끌고 올라간다.

오늘도 사람들은 콘크리트 더미들을 오가며 이 도시의 건축가들과 건축주를 비난한다. 하지만 동시에 못생긴 건물을 만드는 제도를 박수치며 반긴다. 도시는 하나의 유기체와 같아서 하나가 전체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게 아니니, 서울이 하나의 괴물이라면 그 시민들 하나하나는 그 괴물을 구성하는 세포들이다. 이제까지 얼마나 많은 랜드마크와 도시계획들이 시민단체와 지자체의 얼토당토 않은 요구에 좌초했는가. 서울시 최초의 랜드마크로 63빌딩이 들어선 것이 1985년인데 그 이후 두번째 랜드마크로 롯데타워가 들어서는데 무려 30여년이 걸렸고, 세번째 랜드마크가 될 GBC는 4년째 승인조차 나지 않고 있다. 또 지난 달 서울시 건축위원회는 반포의 한 재건축 아파트가 제출한 설계안을 보고 스카이브릿지가 위압감을 준다는 이유로 통과시키지 않았다. 서울시의 건축이 못생긴 이유는 순전히 정치 때문이며 그 정치는 시민들이 낳았다. 서울이 누구를 닮아 못생겼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은 창 밖이나 공무원들의 서류철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마주하는 거울 속에 있다.

스카이브릿지가 "위압적"이어서 반려된 신반포 15차 재건축 아파트의 기존 투시도.

2019. 5. 2.

How politics can destroy you

내가 빠짐없이 보는 경제학자들의 글 리스트에는 폴 크루그먼의 이름이 항상 올라가 있다. 과거 2010년 연준이 양적완화를 이어나가자 수많은 금융업계 종사자들이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올거라며 비명을 지를 때, 그는 침착한 어조로 절대로 그럴 일은 없을 것이고 되려 디플레를 걱정해야한다고 주장한 소수 학자 중 하나였고 시간이 지나고 나자 그 판단이 정확했음이 밝혀졌다. 옳은 정책을 펼친 미국은 가장 먼저 불황에서 벗어났고 잘못된 선택을 한 나머지 세계는 아직도 저성장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다. 이 모든걸 정확하게 예측하고 진단한 이 구루는 자신의 글을 공짜로 인터넷에 올린다.

하지만 그랬던 그가 변했다. 트럼프가 대선에서 이긴 뒤로. 그의 블로그에는 경제에 관련된 글보다도 정치에 관련된 글이 몇배 더 많이 올라오며 그는 자신의 유려하면서도 독한 비평을 경제분석이 아닌 공화당에 더 많이 할애하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평소에 주장하는 경제정책을(재정지출 확대, 그리고 연준의 완화 스탠스 연장) 트럼프가 정확하게 시행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크루그먼은 트럼프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그의 본업이 민주당원이고 부업이 경제학자가 아닌가 싶기까지 하다.

심지어 최근의 포스팅(링크)에서 그는 자신을 공격하던 사람들의 비유를 그대로 들기까지 했다. (You don’t have to be a gold bug or even an inflation hawk to see these demands as deeply irresponsible. Indeed, they sound a lot like the “macroeconomic populism” that has repeatedly led to economic disaster in Latin America, with Venezuela the latest example.) QE를 펼치던 연준과 그를 옹호하던 크루그먼의 비난하던 니얼 퍼거슨은 이러한 통화적 이징이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가져올 것이고 남미의 많은 국가가 그와같은 전철을 밟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여기에 대하 크루그먼은 니얼 퍼거슨이 경제학자가 아니면서 경제정책에 대해 논한다고 조롱했고,  미국 경제가 명확하게 회복기에 있고 실업률이 충분히 낮아졌을때도 인플레이션이 없다면 굳이 통화긴축에 나설 이유가 있냐고 주장했다. 그랬던 그가 이번엔 진영을 바꿔 니얼 퍼거슨과 비슷한 주장을 내놓으며 남미국가인 베네수엘라의 예시를 들며 트럼프의 연준에 대한 압력을 비난했다!

물론 그때와는 경제적 상황이 매우 다르고 크루그먼의 주장처럼 연준의 독립성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정치평론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 경제평론의 날카로움이 무뎌진 것 또한 사실이다. 그 처럼 역사에 남을 석학들도 정치에 휘둘리면 총기를 잃는데, 나 같은 일반인들은 오죽할까.

2019. 5. 1.

오사마와 카투사, 그리고 2000년대 초반.

아직 꽃샘추위로 벌벌 떨던 그 200x년 2월 언제였나, 내 대학생 시절의 첫 공식 행사는 신입생 MT였다. 논스톱 시리즈를 보며 가졌던 캠퍼스 생활에 대한 환상은 첫날부터 산산히 부서졌다. 국가보안법으로 수배중인 한 학번 위 선배가 단상위로 나아가 "민중" "연대" "미제" "노동" "타도"와 같이 나팔바지마냥 촌스러우면서도 낭만따위는 쏙 빼낸 그 단어들로 숙연한 분위기를 만들던 바로 그 순간에. 이윽고 민중가요 강사님이 오셔서 바위처럼, 솔아솔아와 같은 노래와 함께, 요새 유치원에서도 안 가르칠 만한 유아적인 율동을 가르쳤다. 상상이 잘 안되면 우리나라 교회 청년부 예베를 상상해 보라.

이후 반 배정을 받아 처음보는 동기들, 그리고 선배들과 함께 방안에 동그랗게 모여 앉았다. 어색하게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던지고, 받으며 시간을 때우고 있을 때 한 진행요원이 와서 각 반은 개성있는 반이름과 재미있는 포즈를 정하라고 했다. 그때 말이 가장 많던 운동권 선배 하나가, "우리는 재미있게 팀 이름을 빈 라덴이라고 짓자!"라고 했다. 선배라고 해봤자 나와 서너살 차이 밖에 안 났지만 그 형은 벌써부터 탈모가 오기 시작한 탓에 훨씬 늙어보였고 우리는 아무런 반대를 못했다. 그런데 다른 형 하나가 빈라덴은 좀 그러니 딴 이름으로 하자, 욘사마와 이름이 비슷한 "오사마"는 어떠냐고 했다. 빈라덴이나 오사마나 뭐가 그리 다른지 모르겠지만 반미 운동권 학생들이 보기에도 테러리스트 이름을 재밌다고 반명으로 쓰기엔 부담스러웠는지 우리 반의 이름은 오사마가 됐다. 참고로 당시엔 미군 장갑차 하나가 여중생 둘을 차로 치고 간 사건 때문에 반미정서가 강했다.

이제 이름을 정했으니 포즈를 정해야하는데, 아까 그 선배가 주장하길, 우리 반 이름이 오사마니 그에 맞는 동작으로 정하자며 합장을 하고 가부좌를 틀었다. 신입생들이 뭐 발언권이 있나. 선배가 하자는 대로 해야지. 그래서 우리는 인도식 가부좌를 틀고, 동남아식 합장을 하면서 사우디 사람인 오사마의 이름을 외치며 반 사진을 찍었다. 우리는 그 날 천명이 넘는 엠티 참가자들 사이에서 단번에 가장 유명한 조가 되었다. 단과대의 전 과가 참여하는 엠티였으니 아마 이를 기억하는게 나 하나는 아니리라.

밤이 되자 반 사람들끼리 모여 앉아 술자리와 담화가 시작됐다. 너는 고향이 어디니, 대학에 왜 왔니, 꿈이 뭐니 등. 동기중 아주 현실적이고 똑똑한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가 난 돈벌고 싶어서 대학왔다고 하자, 운동권 선배들이 우우 모여들어 핀잔을 줬다. 한 선배 하나는 "너가 국립 서울대학교에 왔으면 민족을 위해 기여할 생각을 해야지 혼자 잘먹고 잘살겠다는건 이기적이고 창피한 짓"이라고, 정확하지 않지만 뭐 이런 뜻으로 그 친구에게 면박을 줬다. 그로부터 몇년 뒤 그 친구가 술자리에서 말하길, 자신은 그날 큰 상처를 받아서 이후로 반 행사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나는 친구에게 너한테 가장 심하게 면박 준 그형은 카투사 갔다가 후에 친미로 전향해서  지금 미국계 회사에 입사해서 본사 가고싶다고 노래를 부르는 중이라고 알려줬다. 우리는 그 "오사마" 포즈로 찍은 단체사진을 회사에 보내면 어떻게 될까와 같은 농담을 하며 키득키득 웃었다.

페미니즘. 요새 시끄러운 페미니즘 이슈가 그때도 있었다. 여학우가 있는 데서 스타나 축구 애기를 하는 것은 성폭력에 해당된다며 두 학번 위 여선배가 알려줬다. 그때 한 동기가 손을 들어 "그럼 여학우들이 남자 있는 데서 연예인이나 화장품 얘기 하는 건요?"라고 묻자 그 선배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것도 당연히 성폭력이지"라고 했다. 그때의 (자칭) 페미니스트들은 현재의 페미니스트들과 좀 달랐던 것 같다. 자의적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교정하려는 태도는 똑같지만 적어도 타인과 자신에게 같은 잣대를 들이대곤 했으니까. 뭐 우리 반만 그랬을 수도 있고.

반미는 그 시절을 운동권과 학생회를 지배하는 정서였다. 미선이와 효순이라는 두 중학생이 미군 장갑차를 미쳐 피하지 못하고 안타까운 사고를 당한 일이 있었는데, 거기에 솔트레이크 동계 올림픽에서 미국의 안톤 오노 선수가 김동성 선수를 실격시키고 메달을 딴 일이 겹쳐, 대학가에선 반미를 외치는 것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았고, 운동권 선배와 동기들을 그때를 틈타 자신들의 사상을 신입생들에게 퍼뜨렸다. 하지만 그 반미는 패션에 그쳤다. 군대에 가고 취직할때가 되자 그들은 입었던 옷을 벗고 갈아입듯 태도를 바꿨다. 신자유주의의 앞잡이라고 욕하던 고학번 선배(그 선배는 그걸 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가 연봉 잘주는 금융회사에 들어가자 그들은 쪼르르 달려가서 밥 얻어먹기에 바빳고 그 무리 중 가진자들을 욕하던 한 선배는 과외한 돈으로 명품 시계와 옷을 입고다녔다. 아, 그 선배가 서울대생, 민족 운운했던 그 선배다. 그 형은 카투사로 입대하며 "적을 알려면 적의 본진에 가야한다"는 명언을 남겼다.

그로부터 십수년이 지난 지금, 연말 모임에서 만나 각자 어떻게 사는지 이야기를 풀어내다 보니 참 묘했다. 반미를 외치던 선배 하나는 신자유주의자(=부자)의 딸 딸과 결혼해서 강남에 아파트 두고 외제차를 끌고 다나고, 미국인 수천명을 죽인 테러리스트의 이름을 웃으며 외치던 친구는 그 어묵 일베충은 싸이코패스라며 화를 냈다. 미국과 기득권을 가장 크게 욕하던 선배/친구들이 가장 그 기득권에 가깝게 살고 있거나, 혹은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어쩌면 욕심이 큰 사람일 수록 시기심도 강하고, 그 시기가 가진자들에 대한 분노가 되어 운동권으로 이끄는 것 같기도 하다. 얼마 전 임종석이 전선을 시찰하며 라이방 선그라스를 쓴 사진이 신문에 실렸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미 제국주의의 선봉 맥아더 장군이나 독재자 박정희의 이미지였는데, 그게 우연은 결코 아닐 것이다.

2019. 4. 21.

사바하-선과 악의 경계 그리고 호와 불호의 경계.

[일부 스포를 포함하고 있으나 영화 내 스토리 해석에 방점을 둔 글은 아닙니다.]
 
나는 대중의 평가와는 반대로 이 영화가 장재현 감독의 이전 데뷔작, 검은사제들보다 더 뛰어난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불교적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고 그곳은 절대악의 존재가 없는 세상이다. 이렇듯 사탄이나 악마가 없는 오컬트 스릴러의 세계는 마치 적군이 없는 전쟁영화처럼 참신하긴 해도 낯설 수 밖에 없다. 감독은 여러차례 영화 내 등장인물(해안스님-진선규 역)의 입을 빌려 관객들에게 이 점을 주지시키려 하지만, 수백 수천 편의 영화들을 통해 동서양의 각종 악마와 마물들에게 익숙해 진 스릴러 팬들은 이를 쉬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복선 회수가 안됐다" 혹은 "개연성이 부족하다"라는 비난은 그 뒤에 한 가지 질문을 담고 있다. "그래서 누가 나쁜놈인데!"
 
하지만 애초에 이 영화에 절대악은 없었다. 혜안스님이 말했듯, 애초에 악이라고 규정지을 대상은 존재하지 않으며 누구나 자신의 마음속의 번뇌가 악일 뿐이다. 이것이 태어나면 저것이 태어나듯 손가락을 여섯개 가진 두 존재가 탄생했던 것이지, 그 둘이 애초에 각각 빛과 어둠을 담당하도록 역할이 명확하게 나뉘어진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미륵이 악행을 저지르기도 하고 악행을 저지르던 나찰이나 뱀으로 보이는 "그것"이 선을 이루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영화 전체를 지탱하고 있는 불교식 세계관과 온전하게 일치한다.
 
감독의 지난 작품, 검은사제들은 헐리웃 영화 엑소시스트를 한국적 느낌으로 번역한 것에 불과했다면 이 사바하는 진정 한국판 오컬트적 세계관을 창작해 낸 영화라고 생각한다. 번역본과 창작본. 두 영화 사이에는 그만한 차이가 있으며 영화적 완성도를 보아도 나는 두 번째 작품을 더욱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기독교식 선악구분에 익숙한 대중들은, 더욱이 지난 작품이 그 이분법적 세계관에 똑 맞았기에, 장재현 감독의 새 작품이 낯설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외모만 봐도 영웅인지 빌런인지 구분되는 DC나 마블의 세계와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우리는 거기에 맞게 눈높이를 맞춰야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법칙이 결코 이진법으로 해석되지 않을진대 하물며 공포영화가 이분법에 머무를 이유 또한 없으므로, 언젠가 관객이 이 불교식 세계관이 가져다주는 공포에 익숙해지는 날이 오면 이 영화는 재평가 받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사실 천사와 사탄이 깔끔하게 나뉜 세상보다, 여래가 악마가 되고 뱀이 미륵으로 바뀌는 혼돈의 세계가 더 두려운 것 아니겠는가.

2019. 3. 25.

조선인들의 후예는 어떻게 기억을 왜곡시키는가

앞서 두 편의 글을 통해 특정 세대를 이해하려면 그 세대가 겪어온 역사를 함께 반추해보는 시각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역사라는 것이 각도를 달리해서 보면 다른 것들이 보이기 마련이니까요.
 
그런 면에서 이번엔 한국인들에게 가장 예민한 주제를 다뤄보겠습니다. 바로 우리들이 어떻게 일제시대의 기억을 왜곡하는지를요. 글을 읽고 나면 거세게 반발하는 분도 계실 터이고 식민사관, 혹은 일본의 대변인이냐고 비판, 아니 욕을 하실 분도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굳이 그런 논쟁을 벌이면서까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이 기억왜곡이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2019년 오늘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직계는 아닙니다만 제 큰할아버지가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셨던지라 역사관이 이상한 집에서 자란 것도 아니고, 또 저 역시 집안 어른들께 일제의 만행을 구전으로 전해들을 때마다 분노했던 한국인 중 하나입니다. 따라서 성인이 되고 다양한 사료를 접하면서도 현재와 같은 시각을 가지기까지 정말 많은 내적 갈등을 거쳐야 했습니다. 아래 주장에 대해 여러분들이 반박하고 화내시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의 저 역시 그랬을테니까요. 하지만 이 문제 만큼은 그때의 분노를 잠시 누르고 다시 침착하게 바라보려고 합니다. 부디 여러분들도 그리 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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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1991년에 방영된 여명의 눈동자라는 드라마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일제시대부터 6.25에 이르기까지의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하는 이 드라마는 비극의 역사를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그려낸 대하드라마로 당시 무려 5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크게 히트했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요새 방영됐다면 시청률 대박은 커녕 엄청난 파란을 야기하며 시청자 게시판을 악플로 도배한 채 조기종영했을 것이다. 이 드라마엔 병사들과 성관계를 하고 난 뒤 받은 군표를 모아 고향에 땅을 사겠다는 위안부나, 술에 취해 위안소를 찾는 조선인 병사, 생체실험 전문 731부대에서 조선인 마루타들을 관리하는 조선인 군인과 같은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재작년에 영화 군함도가 개봉될 당시, 필자의 눈에는 이 영화가 충분히 민족주의와 쇼비니즘으로 점철되어 있었는데도, 패배의식을 가진 조선인들이 등장하고 친일부역자들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네티즌들이 감독의 역사인식을 맹렬하게 비난했던 것을 생각하면 2016년의 대중들과 1991년의 시청자들 사이에는 상당한 간극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대체 그 25년동안 우리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답은 바로 한국인 구성이 바뀌고 있다는 데에 있다. 추산해보면 1991년 당시에는 일제시대에 일본인으로 태어난 한국인들이 전체 인구의 약 30%를 차지했지만 이 비율은 오늘날 한자리 수에 불과하다. 여기에 일제시대를 간접 경험했던 전후 베이비붐 세대를 포함하면 그 비율은 훨씬 더 벌어질 것이다. 즉 일제시대를 겪지 않은 국민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한국인 집단의 기억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그 변화의 방향이 역사적 사실과 점점 멀어지는 데에 있다. 단언컨대 우리의 기억은 왜곡되고 있다.
 
우리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2천만 조선인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변함없이 매 순간 한국인들의 독립을 염원했다고 믿고 싶지만 실상은 꼭 그렇다고만 볼수는 없었다. 일본인들이 1919년 3.1운동을 제압한 후 문화통치를 펼치며 한반도를 빠르게 근대화하자 조선인들은 일본의 헤게모니를 시나브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왜놈의 지배는 민족의 자존심에 굴욕을 안겼지만 동시에 구체제를 박살내고 조선을 빠르게 발전시켜 조선인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켰다. 한일합방 후, 총동원령이 내려진 1938년 이전까지 조선인들의 농업생산량, 공업생산량, 평균신장, 평균수명, 문해율은 빠른 속도로 개선되었고 이는 가장 민족주의적인 학자들도 부정하지 않는다. (물론 그들은 이 발전이 식민화의 과정에 따른 부산물일 뿐이었고 또 41-45년에 실시된 가혹한 수탈과 공출로 경제가 후퇴했음을 지적한다-이 또한 사실)
 
일본의 목적이 무엇이었던 간에 어쨋거나 1910년부터 1940년까지 30년간 조선은 빠르게 발전했다. 슬프게도 우리는 인간의 신념이 물질의 풍요 앞에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안다. 조선인들은 빠르게 일제에 동화되어갔고 총독부의 강요 없이도 진정한 의미의 내선일체를 요구하는 조선인들은 늘어갔다. 우리는 조선총독부를 일제의 무력통치기관이라고만 알고 있지만(사실이지만) 반대로 일본의 내각에서는 조선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기구이기도 했다. 일례로 총독부가 1929년 창씨개명 계획을 본국에 제출하자 일본 본토에서는 "외모도 비슷한데다 일본말도 완벽하게 하는 조선인들이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바꾸면 진짜 일본인들과 구별이 안된다"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심지어 훗날 일본의 총리에 오를 정도로 입지가 탄탄했던 사이토 마코토 총독조차도 본토 내각의 반대로 창씨개명을 성공하지 못했다.(이 요구는 전쟁에 조선인들 본격적으로 동원하기로 결정한 1940년대에 통과되었다.) 또 대만총독부와는 달리 조선총독부는 패망 직전까지도 재정적으로 자립하지 못하고 본국정부의 지원을 받았는데 이는 일본인들의 조선 진출을 위해 세제해택을 주는 동시에 피지배인들의 반발을 누르기 위해 조선인에게는 더 낮은 농지세를 매겼기 때문이다.(일본인 3% 조선인 1.3%**) 이에 대한 보완책 중 하나로 총독부는 조선의 양곡을 일본으로 수출할 계획을 세웠다. 우리 역사에는 이를 강압적 수탈로 기록하지만 일본 본토의 쌀 시세가 30% 더 비쌌던지라 이는 조선인들의 수입을 크게 개선했던 것은 사실이다. 당연히 일본 본토에서는 농민들을 중심으로 반발이 심했지만 이 역시 총독부가 밀어붙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군사적 성공은 조선인들의 민족적 자긍심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당시 여러 근대사학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193년 일본인들이 남중국해에서 생포한 영국과 미군 포로들을 잡아다 한성에서 행진시켰더니 길거리에 수많은 조선인들이 나와 감격하며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의 눈엔 일본인이 이룬 군사적 성과에 왜 조선인들이 감격하냐고 의문을 가질지 모르지만 이는 당시 조선인들 사이에 내선일체 정책이 어느정도 스며들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럴만도 한게 1910년 생 조선반도 출신 김말똥의 경우 태어날 때부터 일본신민으로 교육받고 자라지 않았던가.

게다가 일본은 조선인에게 일본인에 준하는 2등시민의 지위를 주었다. 2등이란 위치는 1등에 비교하면 기분 나쁜 자리지만 3등, 4등보다는 나은 자리 아닌가. 물론 차별이 공기처럼 만연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일제가 중국인들이나 동남아 피지배인들에게 강제한 법적 지위에 비하면 조선인들은 일제의 헤게모니 아래서 그래도 상위층에 속하는 집단이었다. 이는 우리가 의도적으로 주목하지 않는 만보산 오보사건 등으로 촉발된 화교 배척운동(실상은 학살) 에서도 들어난다. 만주에 진출한 조선인들과 현지 중국인들 간의 충돌이 있었는데 이때 조선 현지 신문들이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오보를 낸다. 이를 보고 분개한 조선인들은 중국인들에게 대대적으로 테러를 가하는데 이때 누적된 조선인들의 반중 감정은 이후 일본이 중일전쟁을 수행하는데 하나의 자산이 된다.**
 
이를 보면 많은 조선인들이 일제 치하 아래서 물질적 풍요를 누리거나 일부는 되려 일본의 헤게모니를 적극 활용해서 자신의 자긍심을 높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금의 관점에서는 피가 거꾸로 솟을 일이지만 우리는 구한말 조선인들의 패배의식을 기억해야한다. 자력으로 근대화에 성공하지 못하고 상국 청나라가 서양의 군대에 굴욕적으로 무릎꿇고 식민지로 전락하던 것을 목도한 당시 조선인들의 관점으로 시대를 바라보자. 그들에게 "자력으로 근대화에 성공했어야지!"라는 일갈은 아무 의미가 없는 공허한 외침이다. 고종이 자기 손으로 김옥균의 갑신정변을 엎었을 때 그 가능성은 이미 사라졌으니까.(사실 필자는 애초 그 전부터도 가망이 없었다고 보지만) 조선인에게 남은 선택은 아이가 아프면 굿이나 하던 1910년 이전의 미개한 조선을 그리워하거나 아님 일제체제에 협조해서 근대화를 이루거나, 그 둘 밖에 없었다.

35년이라는 시간은 정말 긴 시간이다. 아마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84년생 이하)은 그 35년의 시간을 아직 겪어보지도 못했을 지 모른다. 게다가 그 35년 중 마지막 4년을 제외한 나머지 31년의 기간 동안 지배체제가 지속적 발전을 가져다 줬다면, 정말 깨인 민족주의자나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을 가진 소수를 제외하면 어떠한 형태로든 일제의 통치 시스템에 적응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1991년의 시청자들 중 다수는 이런 현실을 기억하던 사람들이었다. 드라마를 보며 그들은 그랬을 것이다. "저 쳐죽일 놈들, 멀쩡한 아녀자를 위안부로 속여서 끌고가? 쯧쯧 근디 뭐 어쩌겠어 혀깨물고 그냥 죽을수도 없고. 이왕 그리된 거 군표라도 모아 부자로라도 귀향해야제" 혹은 "어케 동포들을 마루타로 다룬디야.. 하지만 그렇다고 나가 군복 벗고 그 실험체 중 하나가 될순 없잖여. 산 사람은 살아야지.." 하지만 25년의 시간이 흘러 일제를 겪었던, 혹은 간접적으로 경험했던 사람들은 점차 역사의 지평 저 너머로 사라져가고 스마트폰 세대가 여론을 주도한다. 이 2016년의 대중은 그 시대에 대해 외국인 만큼이나, 아니 사실 외국인보다도 더 무지하다. 단지 조선인이 같은 조선인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일본인에게 아첨하고 달라붙는 신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영화에 별점 테러를 가하며 감독의 역사인식을 힐난한다. 창피해서 감추고 싶은 기억은 한 세대의 죽음과 함께 대중의 기억 속에서 실제로 지워져가고 안락한 삶을 누리는 현대 한국인들은 우리의 도덕으로 조선인 생존자들을 재단한다. 그 사이에 대한제국과 대한민국 만큼의 격차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망각한 채.
 
사실 이런 기억왜곡은 1945년 해방부터 시작되었다. 동아시아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은 한 외국 친구는 필자에게 늘 일제시대를 colonial era라고 번역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로 삼은 것이 아니라 합병한 것이니까. 그럴 때마다 나는 "일본은 조선을 합병했지만 일본인들과 동등한 지위를 준 것은 아니니 실제로는 식민지라고 볼 수도 있다"며 내 어휘선택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앞서 지적한대로 일제가 타 식민지 국가들과 조선을 대하는 태도는 분명 달랐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한국인들이 역사를 주체적으로 기록하게 되자 별 이견 없이 지난 35년을 식민지배로 격하해서 기록했다. 이게 더 자존심 상하는 것 아닌가 싶지만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다. 식민지배는 당시 조선인들의 수동성을 강조하는 말로 일제와 우리를 철저하게 분리할 수 있지 않은가. 즉 나는 그 배경에 조선인들이 일제 지배에 일부 협조한 역사를 부정하고 철저하게 피해자의 입장으로 역사를 써내려가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있다고 본다.****
 
해방 75년의 역사는 어찌보면 우리의 기억을 왜곡해 온 역사이기도 하다. 이 왜곡의 노력은 민족 전체 뿐 아니라 개인 차원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2005년 당시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이 다음 대선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인 박근혜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 친일청산법을 도입했을때 새누리당 의원들 뿐 아니라 여당의 몇몇 핵심인사들이 친일후손임이 드나 크게 역풍을 맞았던 적이 있다. 열린우리당 의장 신기남 의원의 조부는 드라마에 늘상 등장하는 악질 조선인 순사였으며 친일청산법을 발의한 김희선 의원의 아버지도 친일파였으니 정작 이 법이 통과되면 여러 여당정치인들의 정치생명이 끝장날 터라 해당 법안은 파기되었다. 물론 친일파 후손들이 열린우리당에만 포진했을리는 절대 없다. 또한 앞서 언급한 정치인들이 뻔뻔해서 친일후손임을 숨기면서 친일청산법을 도입한 것도 아니다. 그저 본인들도 아버지 할아버지들이 일제시대에 무엇을 했는지 잘 몰랐을 뿐이다. 비슷하게 연예인 강동원도 조부가 친일파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사과하지 않았나. 이 글을 읽는 당신 중에서도 증조부/조부/외증조부/외조부 네 분 모두 일제시대에 무엇을 하셨는지 정확하게 아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해방과 동시에 그분들은 입을 다물었고 개인의 차원에서 묻어버린 기억의 공백은 왜곡된 역사가 들어설 여지를 남겼다. 나 역시 큰아버지의 자랑스런 독립운동 역사는 알지만, 증조부와 외증조부의 역사는 알지 못한다. 거기에 어떤 역사가 숨어있을지 전혀 알지 못하는 오늘의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불과 25년만에 대중들이 과거사를 재단하는 잣대가 얼마나 높아졌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높아진 잣대는 그만큼 집단기억이 왜곡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왜곡된 기억은 기록된 사실을 부정하고 변형한다. 이를 지적하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일본에서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피해자의 기억이 왜곡되는 만큼, 저들-가해자 역시 자신들의 기억을 왜곡시키고 있으며 이것이 시간이 갈 수록 한일간의 역사논쟁이 간극을 좁히기는 커녕 점점 더 커지는 이유이다.
 
이 글을 공개하는데에는 두가지 목적이 더 있다. 하나는 우리가 어떻게 기억을 왜곡시키는지 자각해서 조금이나마 이를 늦추고 싶다는 소망. 우리가 과거를 좀 더 객관적이고 합리적 태도로 바라보아야 편협한 민족주의에 경도된 중국이나 일본의 역사왜곡을 좀 더 우월한 입장에서 꾸짖을 수 있지 않을까?
 
두번째로는 우리가 더 다양한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어쩌면 앞서 언급한 우리 큰할아버지는 일본군들의 토벌을 피해 살아 남으셨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주에 자손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또 그 후손중 하나가 남한으로 건너와 정착했을지도 모른다. 그럼 우리가 대림동을 지나며 조선족들을 보며 눈을 흘길 때 나의 그 육촌 형제가 박차고 일어나 우리를 보고 손가락질 하며 "조선에 남아 일제에게 부역한 기회주의자들의 자손들이 잘먹고 잘산다고 독립운동가의 후손인 나를 괄시한다"며 분개할수도 있는 일 아닌가. 거기에 대고 "장첸같이 생긴 놈이 무슨 개소리냐" 라고 응수해서는 타자와의 역사적 인식의 간극을 절대 좁힐 수 없다.
 
우리는 마땅히 일본의 전쟁범죄를 기억하고 계속해서 분노해야한다. 하지만 적어도 한번 쯤은 타자를 잊고 우리 자신에게 초점을 맞춰보자. 앞서 살펴본 박사모, 운동권 세대와는 달리 일제시대 세대는 이미 대부분 죽고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세대의 관점으로 시대를 바라보기를 포기한다면, 우리는 과거사 논쟁이라는 다이달로스의 미로에 맨손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이다. 자력으로 거기에서 나올 길은 없다. 어쩌면 과거사 청산이나 친일 논쟁이 반백년이 넘도록 진전을 보이지 못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물론 여명의 눈동자에서 그 위안부는 억지로 끌려오긴 했고 731부대에서 근무하던 조선인 군인은 미군에 생물병기 정보를 넘기고 해당 무기를 무력화하는데 협조하는 등 이 드라마에도 민족주의가 만연하다. 하지만 군함도에 대한 논쟁은 민족주의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잊고 싶었던 사실이 등장해서임을 기억하자.
 
**오해를 없애기 위해 부연하면 민족주의자들은 이 정책을 조선 지주들의 협력을 얻기 위한 전략으로 본다. 별개의 얘기지만 대규모 자본이 필요한 광업 수업 등에 대해서는 총독부나 조선은행이 허가/대출제한 등으로 조선인들을 차별했다.
 
***또한 일본은 중국으로 진출하기 위해 조선인들의 민족적 자긍심을 적극 활용했다. 고구려는 한민족의 역사고 따라서 만주 역시 한민족의 생활 터전이라는 역사의식은 내선일체 시스템 아래 조선인(과 일본)이 만주로 진출해야할 정당성을 더해 주었다. 일제의 만주 점령지의 화폐제도를 조선은행과 한성은행이 운용했던 것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본다.
 
****이와 비슷한 역사왜곡은 해방 직후 한국 현대문학계에서도 보인다. 일제시대에 출세하려고 노력한 조선 청년들의 모습은 분명 그 시대의 흔한 사회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주제의 작품들은 해방 후 대거 친일문학으로 매도되어 한국 문학사에서 거의 숙청당하다시피 했다. 나는 여기에도 해방 후 일제에 협력한 기억을 지우고자 하는 의도가 담겼다고 본다.

중국몽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운동권

모두 아시다시피 문재인 대통령은 19대 대선에서 승리한 뒤 인수위원회를 꾸릴 시간도 없이 곧장 청와대와 행정부를 이어받았다. 따라서 내각과 청와대 인사명단은 상당히 빠르게 공표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긴 리스트 중 가장 놀라움을 준 부분은 바로 비서실장에 임종석을 앉힌 것일 것이다.

임종석은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전대협) 3기 의장출신으로 당시 임수경을 평양에서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전대협 대표로 보낸 일로 국가보안법에 의해 구속된 전력이 있는, 골수 운동권의 핵심멤버이다. 그런 인사가 청와대 비서실장에 올랐다는 사실 하나만 보아도 현재 정부의 철학이 어디에 기반하고 있는지는 의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비서실장이 어떤 자리인지 와닿지 않는다면 참여정부 시절의 비서실장이 문재인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된다.

그리고 1987년 민주화 운동권 세대가 이끄는 현 정부는 명확하게 친중노선에 올라탔다. 이는 문 대통령이 2017년 베이징대에서 "중국은 단지 중국이 아니라 주변국들과 어울려 있을 때 그 존재가 빛나는 국가이다. 높은 산봉우리가 주변의 많은 산봉우리와 어울리면서 더 높아지는 것과 같다, 중국몽이 중국만의 꿈이 아니라 아시아 모두, 나아가서는 전 인류와 함께 꾸는 꿈이 되길 바란다."라고 연설하며 공식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정치공학적으로만 본다면 이는 결코 수지타산이 맞는 일이 아니다. 미세먼지와 중국의 세련되지 못한 사드 보복으로 국내 여론이 크게 반중으로 돌아선 와중에 과도하게 친중노선을 타는 것은 국내정치에 부담을 줄 것으로 예상됐고, 또 실제로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부는 대통령 수반의 중국 혼밥논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친중노선을 고집했다. (외교적 측면을 보아도 마찬가지지만 주제에 벗어나는 일이라 생략)

이를 통해 현 정부의 친중 행보는 실리적인 이유보다 사상적, 철학적인 동기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현 정부가 그 어느때보다도 이데올로기에 의한 정책을 고집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와 같은 추정이 타당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운동권의 철학엔 중국이 자리잡았나?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시계를 1980년대로 되돌릴 필요가 있다. 우리의 상식과는 다르게 전후 북한의 경제성장률은 남한을 크게 앞질러 1960년대에는 북한의 공업생산량이 남한의 약 2.5배를 넘어선 적어도 있었다. 남한의 경제성장률이 북한을 앞지른 것은 1973년인데, 이 GDP는 (쉽게 설명하자면) 누적 자산이 아닌 매해 벌어들이는 소득의 개념임을 기억하자. 1953년 종전 이후 21년간 뒤져있던 소득이 앞서기 시작했다 해도 누적자산은 아직 한참 뒤진 것 처럼, 70년대 후반~1980년대 초에는 아직 남한이 북한보다 꼭 잘산다고 보기 어려웠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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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남한의 gdp비교

 하지만 문제는 이를 남한 주민들이 몰랐다는 데에 있었다. 소수를 제외하면 현재의 북한 주민들이 남한의 생활상에 대한 정보를 알지 못하는 것 처럼 당시의 남한사람들 역시 북한의 실상에 대해 알지 못한채 그저 헐벗고 굶주린 거지들의 나라로 알고 있었다. 그랬던 북한이 사실 남한과 동등하게, 어쩌면 더 잘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을때 사람들은 얼마나 큰 배신감을 느꼈을까?

이와같은 정보는 주로 대학가 운동권을 통해서 확산되었다. 물론 해당 자료들은 북한 당국에 의해 의도적으로 유포되었을테니 과장된 측면도 있었겠지만 남한정부가 북한실상을 왜곡하고 정보를 통제했던 것도 사실이기에 당시 이를 접한 대학생들이 배신감을 느끼며 돌아선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시대가 바뀐 지금 탈북민들이 남한의 TV프로에 나와 "속았다"라며 증언하는 것을 보면 당시 그들이 느꼈을 정서를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후 시대가 뒤집혔다. 남한은 빠르게 발전해서 부국이 된데 비해 공산권의 몰락과 함께 북한은 경제가 붕괴해 진짜 거지나라가 됐다. 운동권들은 정부가 북한의 실상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열심히 외쳤는데, 이런 젠장, 정부의 거짓말이 사실이 되어버렸다. 1990년대 들어 수많은 운동권 핵심인사들이 전향한데에는 이와같은 시대적 배경이 있는 것이다. 그중에는 자한당의 김문수나 바른미래당의 하태경과 같은 현직 정치인도 있었고 그 유명한 "강철서신"을 작성한 김영환도 있었다. (이는 82년생 김지영의 작가가 페미에서 전향한 수준의 사건임)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된 고 박종철을 고문한 이유가 운동권 선배 박종운의 행적을 찾기 위해서였는데 심지어 그도 전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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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후보로 나선 박종운. 하지만 한나라당 지분의 절반 이상을 민주화운동에 몸바친 김영삼과 상도동계가 가졌다는 것을 잊지말자)


북한은 물론이고 소련까지 붕괴하자 운동권의 이념도 함께 무너졌고 이처럼 대대적인 전향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향하지 않고 버틴 이들이 바로 오늘의 운동권 세력이다. 이들은 눈앞에서 자기 신념의 증거들이 무너지는데도 전향 대신 눈을 감아버리기를 택한, 가장 완고한 사람들임을 기억하자.

그런데 이 쇠심줄같은 고집을 가진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나타난다. 바로 중국. 체제경쟁에서 실패하고 무너진 북한(과 소련)을 대신하여 떠오른 공산주의 국가 중국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G2로 성장한다. 마치 하나님의 아들인 줄 알고 따랐더니 죽어버려서 망연자실한 신도들 앞에 그가 부활해 나타난 것처럼 운동권들은 중국이라는 새로운 메시아를 만난다. 그들은 자신이 젊은날에 선택한 이념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고집을 30년간 버리지 않았고, 그 오랜 믿음이 드디어 현실에서 증명된 것이다.

심리학적으로 사람은 어떤 보상을 얻는데 들인 시간과 노력이 클 수록 그 보상을 과대평가한다. 30년의 시간과 빨갱이라는 딱지, 그리고 시대착오적이라는 대중의 조롱을 견딘 운동권에게는 중국의 존재를 일반 대중보다, 심지어 평균적인 1987년세대보다도 더 크게 받아들일수 밖에 없다. 게다가 반미노선을 택한 이상 국제정치에서 기댈 세력이 중국말고는 없지 않은가. 비합리적으로 반미라는 전제조건을 단 그들에겐 기쁘게도 중국이 합리적인 선택일 수 밖에 없다.

샤를 드골이 그랬나, 모든 정치인들은 자신의 컴플렉스를 정의로 승화시킨다고. 운동권들의 중국에 대한 애착은 그런 컴플렉스의 연장선에 있다고 봐야 한다. 그들의 컴플렉스를 이해하지 못하고, 대신 합리적인 목적이 있다고 보면 극우들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그러니 그들의 "의도"를 확대해석해서 간첩이네, 빨갱이네 하는 것은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대학시절의 추억과 고난에 대한 보상심리로, 또 30년만에 대학동기들을 만나 "거봐 내말이 맞았잖아"라고 할수 있게 해줘서 마냥 중국이 좋은 것이지, 남한을 공산화하겠다는 모종의 음모를 가지고 합리적으로 움직인다고 보기 어렵다.(어쩌면 그들을 가장 합리적 존재로 바라보는 것은 박사모들 아닐까?)

하지만 이유와 의도가 어찌되었든 답은 정해져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외교를 맡은 그들의 중국몽은 30년째 깨지 않는 꿈의 일부고 또 그들은 앞으로도 그 꿈에서 깨어날 생각이 없는 가장 고집스런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 어떤 일이 있어도 그들의 외교 노선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다. 말은 거칠게 하면서도 필요할 때 친미와 신자유주의 노선을 택했던 참여정부와 문재인 정부가 비슷할 것이라고 보아서는 안된다.

그들의 고집은 세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 보다도 더.

4.19혁명 세력은 어떻게 박사모가 되었나?

[먼저 불필요한 논쟁을 막기 위해, 정치인에게는 공과 과가 있고 공을 언급하는것이 과를 정당화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요새 5.18 관련 논쟁이 큰 이슈다. 거기에 따른 비상식적인 논쟁과 그 비상식때문에 묻힌 상식적인 문제제기와 같은 시끄러운 이슈들을 잠시 뒤로 하고, 모두가 간과하고 있는 모순적인 사실 하나를 끄집어보려고 한다.

87년 민주화 항쟁의 바로 앞에 등장하는 4.19 혁명, 그 1960년에 일어난 원조 민주화운동의 주역은 1925-1945년대생들로 바로 지금의 틀딱이라고 조롱받는 박사모 세대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초의 민주화 혁명을 이끌어 낸 세대가, 또 내전의 상흔이 다 낫지도 않은 시점에서 부정선거에 저항해 독재자를 물리친 그 분들이 어째서 또다른 독재자를 평생토록 옹호하고 팬클럽이 되어 그 딸 까지도 찬양하게 된 것일까? 참 아이러니하지 않나. 하지만 그 아이러니에 우리나라의 미래가 달려있다.

먼저 4.19혁명의 주체들과 현재의 박사모는 세대만 같지 같은 구성원들이 아니라고 생각할까봐 지역적 분석부터 시작하겠다. 4.19의 첫 도화선은 분명히 대구에서 시작되었다. 관제시위에 학생들을 동원하는 지침에 반발하여 대구의 고등학교 학생들은 2월 27일부터 시위를 벌였다. 구체적으로는 대구고, 경북고, 경북여고, 경북대사대부고, 계성고 등 8개 학교 총 1,200여 명이 이에 참여했다. 이후 서울 충남 광주 마산 등지에서도 시위가 일어났지만, 규모 면에서는 부산에서만 약 7800명의 중고등학생들이 시위에 나서는 등, 3.15 부정선거 전 까지 시위의 주도권은 경북경남의 학생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이후 선거 뒤 마산에서 눈에 최루탄을 맞아 사망한 고 김주열 학생(17세)의 시신이 떠오르자 마산을 중심으로 4월 11일부터 대대적으로 시위가 시작된다. 경상도 지역 중고등학교를 중심으로 한 시위는 이윽고 고려대학교 등 서울의 대학생들에게도 번졌고 전국, 전 세대의 시위로 번진 것이다. 1960년대 당시 중고등학생이었던 이들과 현재의 박사모는 세대적으로도 지역적으로도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호기심에 광화문 태극기 시위를 둘러보면 자신들이 4.19 민주화 운동의 주역 중 하나라고 주장하는 시위자들도 가끔 보인다.

독재자 이승만을 몰아낸 그들이 독재자 박정희를 응원하게 된 결정적 사건은 제 2공화국이 당대의 사회적 혼란을 전혀 통제하지 못했다는데서 출발한다. 자유당의 탄압으로 마이너 정당에 머물러 있던 민주당이 정권을 잡자, 그 둘은 신파와 구파로 나뉘어 정치싸움을 시작한다. 부패한 정부를 몰아낸 시민들은 이제 무능한 정부를 마주하게 되었고 정부는 민심과 동떨어진 정책들을 내놓게 된다. 예를 들면 국가예산이 부족하니 70만에 달하는 병력을 10만으로 감축하고, 부족한 전기를 북한에서 끌어 쓰는 대신 남한의 쌀을 북한에 수출하자는 등, 종전 후 7년밖에 안되는 시점에서 국민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정책들로 사회 혼란은 가중됐다.

그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제2공화국은 이승만 정권과 비슷한 악수를 두게 되는데 바로 민주당의 주도로 반공임시특례법과 데모규제법을 입안한 것이다. 이는 현재까지도 국가보안법의 일부에 편입되어, 집시법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전해지고 있다.(즉 국보법에는 민주당의 dna도 섞여 있다) 이처럼 시위로 탄생한 정부가 시위를 억압하는 아이러니를 보이자 민심은 장면 정권에 대해 등을 돌린다.

그 증거는 5.16 쿠데타 이후의 여론과 그 뒤에 미국의 감시로 치뤄진 제 5대 대통령선거에서 극명하게 들어난다. 국민들은 쿠데타 자체를 반기지는 않아도 4.19나 이후 12.12로 들어선 신군부를 대하던 것 과는 다르게 대규모 시위나 봉기로 대응하지 않았다. 또한 미국의 감시로 이전이나 이후의 선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공정하게 이뤄진 제 5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민주당 후보 윤보선을 누르고 당선되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민주당이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문제삼아 빨갱이라며 공격했고 이에 동조해 6.25당시 피해가 컷던 서울과 수도권 그리고 군인 표가 많은 강원도가 대거 윤보선을 뽑고, 진보적 지역이었던 전남과 경상도는 박정희를 뽑았다.

제 5대 대통령 선거 결과

당시 이승만의 부패로 행정조직이 와해되고 정치인들이 무능했던데에 비해 잘 짜여진 군대조직을 갖춘 군부는 무너진 국가시스템을 효율적으로 재건할 수 있었고 또 그 당시 낙후된 교육수준에 비해 장교들은 해외 유학생 수의 60%를 차지하는 등 상대적으로 더 엘리트였기 때문에 민심은 빠르게 박정희와 군부에게 몰렸다. 그 결과 4년 뒤 제 6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와 윤보선의 득표율은 51.4% vs 40.9%로 더 크게 벌어진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후 개헌과 부정선거를 통해 3선에 성공하고 종신집권까지 노리는 독재자가 된다.)

즉 원래 질문으로 돌아가보면 4.19 헉명세력들이 박정희에 대한 애정을 가지게 된 것은, 혁명 이후 집권한 제2공화국의 정치인들이 이승만과 다를바 없는 무능함과 부패를 보여줬기 때문이고, 그 이후 박정희와 군부가 혼란을 효과적으로 잠재우고 경제성장의 기틀을 잡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4.19 세대의 동기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역사가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젊은 세대들이 왜 여당에 대한 지지를 거두고 있는가? 민주당은 55년 전에 저질렀던 실책처럼 국민들이 자신들을 지지해서 전임 대통령을 밀어냈다고 생각한다. 이전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혐오를 자기에 대한 지지로 읽기 때문에 어느정도 비위와 부정부패를 저질러도 된다고 본다. 거기에 시위 덕에 집권한 정당이 시위를 억누르는 법안을 발의한 것을 보면, 현재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며 각종 매체를 검열하고 가짜뉴스를 탄압하겠다고 나서는 현 민주당의 모습이 정확하게 겹쳐 보이지 않는가.

30년전의 공으로 오늘의 과를 덮으려는 운동권들은 자신들보다 윗 세대의 그 복잡한 역사를 무시하고 단순화시킨다. 친일파와 이승만의 자유당, 5.16 군사정부 그리고 신군부, 신한국당, 새누리당, 자한당은 모두 똑같은 정체성을 가진 적폐세력이라고. 하지만 역사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저 정치세력들이 얼마나 서로 다른지 이해할 것이다.(되려 아이덴티티나 구성원의 변화 없이 이어져오는 것은 민주당이다, 당명도 잘 안바뀌는걸 보라) 그런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으니 민주화 선배들인 4.19세대가 박정희의 팬클럽이 된 것은 못배워서 그렇다고 본다. 또 그러니 20대 남성들이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는 이유를 못배워먹어서라고 생각하는 것 아닌가.

나는 4.19세대가 박정희의 독재와 사법살인을 비호하는 것이나, 아니면 박근혜의 정치적 비위를 옹호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변호하는 것이 아니다. 말머리에 밝혔듯 공과 과는 구분되어 평가해야하는 것이고 공으로는 과를 덮을수 없다. 다만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화혁명을 이뤄낸 18살의 앳된 소년들이 격동의 현대사를 겪으며 노쇠한 몸을 이끌고 55년만에 다시 광장에 나와 그 주름진 손으로 태극기를 흔들며 독재자의 딸을 응원하는 아이러니는 그들의 경험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한다.


게다가 그들의 경험이 나의 경험과 아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우리도 슬슬 느끼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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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민주화 시위를 벌이는 고등학생들. 이들은 오늘날의 틀딱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