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5. 1.

오사마와 카투사, 그리고 2000년대 초반.

아직 꽃샘추위로 벌벌 떨던 그 200x년 2월 언제였나, 내 대학생 시절의 첫 공식 행사는 신입생 MT였다. 논스톱 시리즈를 보며 가졌던 캠퍼스 생활에 대한 환상은 첫날부터 산산히 부서졌다. 국가보안법으로 수배중인 한 학번 위 선배가 단상위로 나아가 "민중" "연대" "미제" "노동" "타도"와 같이 나팔바지마냥 촌스러우면서도 낭만따위는 쏙 빼낸 그 단어들로 숙연한 분위기를 만들던 바로 그 순간에. 이윽고 민중가요 강사님이 오셔서 바위처럼, 솔아솔아와 같은 노래와 함께, 요새 유치원에서도 안 가르칠 만한 유아적인 율동을 가르쳤다. 상상이 잘 안되면 우리나라 교회 청년부 예베를 상상해 보라.

이후 반 배정을 받아 처음보는 동기들, 그리고 선배들과 함께 방안에 동그랗게 모여 앉았다. 어색하게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던지고, 받으며 시간을 때우고 있을 때 한 진행요원이 와서 각 반은 개성있는 반이름과 재미있는 포즈를 정하라고 했다. 그때 말이 가장 많던 운동권 선배 하나가, "우리는 재미있게 팀 이름을 빈 라덴이라고 짓자!"라고 했다. 선배라고 해봤자 나와 서너살 차이 밖에 안 났지만 그 형은 벌써부터 탈모가 오기 시작한 탓에 훨씬 늙어보였고 우리는 아무런 반대를 못했다. 그런데 다른 형 하나가 빈라덴은 좀 그러니 딴 이름으로 하자, 욘사마와 이름이 비슷한 "오사마"는 어떠냐고 했다. 빈라덴이나 오사마나 뭐가 그리 다른지 모르겠지만 반미 운동권 학생들이 보기에도 테러리스트 이름을 재밌다고 반명으로 쓰기엔 부담스러웠는지 우리 반의 이름은 오사마가 됐다. 참고로 당시엔 미군 장갑차 하나가 여중생 둘을 차로 치고 간 사건 때문에 반미정서가 강했다.

이제 이름을 정했으니 포즈를 정해야하는데, 아까 그 선배가 주장하길, 우리 반 이름이 오사마니 그에 맞는 동작으로 정하자며 합장을 하고 가부좌를 틀었다. 신입생들이 뭐 발언권이 있나. 선배가 하자는 대로 해야지. 그래서 우리는 인도식 가부좌를 틀고, 동남아식 합장을 하면서 사우디 사람인 오사마의 이름을 외치며 반 사진을 찍었다. 우리는 그 날 천명이 넘는 엠티 참가자들 사이에서 단번에 가장 유명한 조가 되었다. 단과대의 전 과가 참여하는 엠티였으니 아마 이를 기억하는게 나 하나는 아니리라.

밤이 되자 반 사람들끼리 모여 앉아 술자리와 담화가 시작됐다. 너는 고향이 어디니, 대학에 왜 왔니, 꿈이 뭐니 등. 동기중 아주 현실적이고 똑똑한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가 난 돈벌고 싶어서 대학왔다고 하자, 운동권 선배들이 우우 모여들어 핀잔을 줬다. 한 선배 하나는 "너가 국립 서울대학교에 왔으면 민족을 위해 기여할 생각을 해야지 혼자 잘먹고 잘살겠다는건 이기적이고 창피한 짓"이라고, 정확하지 않지만 뭐 이런 뜻으로 그 친구에게 면박을 줬다. 그로부터 몇년 뒤 그 친구가 술자리에서 말하길, 자신은 그날 큰 상처를 받아서 이후로 반 행사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나는 친구에게 너한테 가장 심하게 면박 준 그형은 카투사 갔다가 후에 친미로 전향해서  지금 미국계 회사에 입사해서 본사 가고싶다고 노래를 부르는 중이라고 알려줬다. 우리는 그 "오사마" 포즈로 찍은 단체사진을 회사에 보내면 어떻게 될까와 같은 농담을 하며 키득키득 웃었다.

페미니즘. 요새 시끄러운 페미니즘 이슈가 그때도 있었다. 여학우가 있는 데서 스타나 축구 애기를 하는 것은 성폭력에 해당된다며 두 학번 위 여선배가 알려줬다. 그때 한 동기가 손을 들어 "그럼 여학우들이 남자 있는 데서 연예인이나 화장품 얘기 하는 건요?"라고 묻자 그 선배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것도 당연히 성폭력이지"라고 했다. 그때의 (자칭) 페미니스트들은 현재의 페미니스트들과 좀 달랐던 것 같다. 자의적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교정하려는 태도는 똑같지만 적어도 타인과 자신에게 같은 잣대를 들이대곤 했으니까. 뭐 우리 반만 그랬을 수도 있고.

반미는 그 시절을 운동권과 학생회를 지배하는 정서였다. 미선이와 효순이라는 두 중학생이 미군 장갑차를 미쳐 피하지 못하고 안타까운 사고를 당한 일이 있었는데, 거기에 솔트레이크 동계 올림픽에서 미국의 안톤 오노 선수가 김동성 선수를 실격시키고 메달을 딴 일이 겹쳐, 대학가에선 반미를 외치는 것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았고, 운동권 선배와 동기들을 그때를 틈타 자신들의 사상을 신입생들에게 퍼뜨렸다. 하지만 그 반미는 패션에 그쳤다. 군대에 가고 취직할때가 되자 그들은 입었던 옷을 벗고 갈아입듯 태도를 바꿨다. 신자유주의의 앞잡이라고 욕하던 고학번 선배(그 선배는 그걸 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가 연봉 잘주는 금융회사에 들어가자 그들은 쪼르르 달려가서 밥 얻어먹기에 바빳고 그 무리 중 가진자들을 욕하던 한 선배는 과외한 돈으로 명품 시계와 옷을 입고다녔다. 아, 그 선배가 서울대생, 민족 운운했던 그 선배다. 그 형은 카투사로 입대하며 "적을 알려면 적의 본진에 가야한다"는 명언을 남겼다.

그로부터 십수년이 지난 지금, 연말 모임에서 만나 각자 어떻게 사는지 이야기를 풀어내다 보니 참 묘했다. 반미를 외치던 선배 하나는 신자유주의자(=부자)의 딸 딸과 결혼해서 강남에 아파트 두고 외제차를 끌고 다나고, 미국인 수천명을 죽인 테러리스트의 이름을 웃으며 외치던 친구는 그 어묵 일베충은 싸이코패스라며 화를 냈다. 미국과 기득권을 가장 크게 욕하던 선배/친구들이 가장 그 기득권에 가깝게 살고 있거나, 혹은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어쩌면 욕심이 큰 사람일 수록 시기심도 강하고, 그 시기가 가진자들에 대한 분노가 되어 운동권으로 이끄는 것 같기도 하다. 얼마 전 임종석이 전선을 시찰하며 라이방 선그라스를 쓴 사진이 신문에 실렸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미 제국주의의 선봉 맥아더 장군이나 독재자 박정희의 이미지였는데, 그게 우연은 결코 아닐 것이다.

댓글 4개:

  1. 2001년 2월에 저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학과 행사랑 연을 끊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운동권이 멸종하기 전이라 다들 비슷했나 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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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와우~ 제가 신입생이던 때의 분위기를 정확히 기술하신 것 보니 아마도 같은 학번인가 봅니다ㅋㅋ
    관악 어딘가에서 마주쳤을지도 모르겠네요. NL 운동권들이 하는 말들이 얼마나 모순적이고 꽉 막혔으며, 혹은 그들이 얼마나 북한을 사랑하는 지를 직접 봤기에 저는 종북주의자들이 정말 있다고 믿어요.

    그리고 지금 페미라고 말하는 것들에 비하면 저 시절 페미들은 그나마 합리적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NL보다 이들이 나아보였던 이유가 이 글을 보고 다시 떠올랐습니다.

    부동산 가격 때문에 여기저기 검색하다가 이 블로그까지 오게 되었는데 통찰력 있는 동문을 만났 것 같아서 기분이 좋네요. 앞으로도 계속 방문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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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0년대 학번으로서 공감되는 부분이 많네요. 주인장분께서 이렇게 지식을 늘리고 혜안을 갖는 동안 전 뭐했나 반성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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