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 25.

4.19혁명 세력은 어떻게 박사모가 되었나?

[먼저 불필요한 논쟁을 막기 위해, 정치인에게는 공과 과가 있고 공을 언급하는것이 과를 정당화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요새 5.18 관련 논쟁이 큰 이슈다. 거기에 따른 비상식적인 논쟁과 그 비상식때문에 묻힌 상식적인 문제제기와 같은 시끄러운 이슈들을 잠시 뒤로 하고, 모두가 간과하고 있는 모순적인 사실 하나를 끄집어보려고 한다.

87년 민주화 항쟁의 바로 앞에 등장하는 4.19 혁명, 그 1960년에 일어난 원조 민주화운동의 주역은 1925-1945년대생들로 바로 지금의 틀딱이라고 조롱받는 박사모 세대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초의 민주화 혁명을 이끌어 낸 세대가, 또 내전의 상흔이 다 낫지도 않은 시점에서 부정선거에 저항해 독재자를 물리친 그 분들이 어째서 또다른 독재자를 평생토록 옹호하고 팬클럽이 되어 그 딸 까지도 찬양하게 된 것일까? 참 아이러니하지 않나. 하지만 그 아이러니에 우리나라의 미래가 달려있다.

먼저 4.19혁명의 주체들과 현재의 박사모는 세대만 같지 같은 구성원들이 아니라고 생각할까봐 지역적 분석부터 시작하겠다. 4.19의 첫 도화선은 분명히 대구에서 시작되었다. 관제시위에 학생들을 동원하는 지침에 반발하여 대구의 고등학교 학생들은 2월 27일부터 시위를 벌였다. 구체적으로는 대구고, 경북고, 경북여고, 경북대사대부고, 계성고 등 8개 학교 총 1,200여 명이 이에 참여했다. 이후 서울 충남 광주 마산 등지에서도 시위가 일어났지만, 규모 면에서는 부산에서만 약 7800명의 중고등학생들이 시위에 나서는 등, 3.15 부정선거 전 까지 시위의 주도권은 경북경남의 학생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이후 선거 뒤 마산에서 눈에 최루탄을 맞아 사망한 고 김주열 학생(17세)의 시신이 떠오르자 마산을 중심으로 4월 11일부터 대대적으로 시위가 시작된다. 경상도 지역 중고등학교를 중심으로 한 시위는 이윽고 고려대학교 등 서울의 대학생들에게도 번졌고 전국, 전 세대의 시위로 번진 것이다. 1960년대 당시 중고등학생이었던 이들과 현재의 박사모는 세대적으로도 지역적으로도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호기심에 광화문 태극기 시위를 둘러보면 자신들이 4.19 민주화 운동의 주역 중 하나라고 주장하는 시위자들도 가끔 보인다.

독재자 이승만을 몰아낸 그들이 독재자 박정희를 응원하게 된 결정적 사건은 제 2공화국이 당대의 사회적 혼란을 전혀 통제하지 못했다는데서 출발한다. 자유당의 탄압으로 마이너 정당에 머물러 있던 민주당이 정권을 잡자, 그 둘은 신파와 구파로 나뉘어 정치싸움을 시작한다. 부패한 정부를 몰아낸 시민들은 이제 무능한 정부를 마주하게 되었고 정부는 민심과 동떨어진 정책들을 내놓게 된다. 예를 들면 국가예산이 부족하니 70만에 달하는 병력을 10만으로 감축하고, 부족한 전기를 북한에서 끌어 쓰는 대신 남한의 쌀을 북한에 수출하자는 등, 종전 후 7년밖에 안되는 시점에서 국민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정책들로 사회 혼란은 가중됐다.

그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제2공화국은 이승만 정권과 비슷한 악수를 두게 되는데 바로 민주당의 주도로 반공임시특례법과 데모규제법을 입안한 것이다. 이는 현재까지도 국가보안법의 일부에 편입되어, 집시법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전해지고 있다.(즉 국보법에는 민주당의 dna도 섞여 있다) 이처럼 시위로 탄생한 정부가 시위를 억압하는 아이러니를 보이자 민심은 장면 정권에 대해 등을 돌린다.

그 증거는 5.16 쿠데타 이후의 여론과 그 뒤에 미국의 감시로 치뤄진 제 5대 대통령선거에서 극명하게 들어난다. 국민들은 쿠데타 자체를 반기지는 않아도 4.19나 이후 12.12로 들어선 신군부를 대하던 것 과는 다르게 대규모 시위나 봉기로 대응하지 않았다. 또한 미국의 감시로 이전이나 이후의 선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공정하게 이뤄진 제 5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민주당 후보 윤보선을 누르고 당선되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민주당이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문제삼아 빨갱이라며 공격했고 이에 동조해 6.25당시 피해가 컷던 서울과 수도권 그리고 군인 표가 많은 강원도가 대거 윤보선을 뽑고, 진보적 지역이었던 전남과 경상도는 박정희를 뽑았다.

제 5대 대통령 선거 결과

당시 이승만의 부패로 행정조직이 와해되고 정치인들이 무능했던데에 비해 잘 짜여진 군대조직을 갖춘 군부는 무너진 국가시스템을 효율적으로 재건할 수 있었고 또 그 당시 낙후된 교육수준에 비해 장교들은 해외 유학생 수의 60%를 차지하는 등 상대적으로 더 엘리트였기 때문에 민심은 빠르게 박정희와 군부에게 몰렸다. 그 결과 4년 뒤 제 6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와 윤보선의 득표율은 51.4% vs 40.9%로 더 크게 벌어진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후 개헌과 부정선거를 통해 3선에 성공하고 종신집권까지 노리는 독재자가 된다.)

즉 원래 질문으로 돌아가보면 4.19 헉명세력들이 박정희에 대한 애정을 가지게 된 것은, 혁명 이후 집권한 제2공화국의 정치인들이 이승만과 다를바 없는 무능함과 부패를 보여줬기 때문이고, 그 이후 박정희와 군부가 혼란을 효과적으로 잠재우고 경제성장의 기틀을 잡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4.19 세대의 동기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역사가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젊은 세대들이 왜 여당에 대한 지지를 거두고 있는가? 민주당은 55년 전에 저질렀던 실책처럼 국민들이 자신들을 지지해서 전임 대통령을 밀어냈다고 생각한다. 이전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혐오를 자기에 대한 지지로 읽기 때문에 어느정도 비위와 부정부패를 저질러도 된다고 본다. 거기에 시위 덕에 집권한 정당이 시위를 억누르는 법안을 발의한 것을 보면, 현재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며 각종 매체를 검열하고 가짜뉴스를 탄압하겠다고 나서는 현 민주당의 모습이 정확하게 겹쳐 보이지 않는가.

30년전의 공으로 오늘의 과를 덮으려는 운동권들은 자신들보다 윗 세대의 그 복잡한 역사를 무시하고 단순화시킨다. 친일파와 이승만의 자유당, 5.16 군사정부 그리고 신군부, 신한국당, 새누리당, 자한당은 모두 똑같은 정체성을 가진 적폐세력이라고. 하지만 역사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저 정치세력들이 얼마나 서로 다른지 이해할 것이다.(되려 아이덴티티나 구성원의 변화 없이 이어져오는 것은 민주당이다, 당명도 잘 안바뀌는걸 보라) 그런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으니 민주화 선배들인 4.19세대가 박정희의 팬클럽이 된 것은 못배워서 그렇다고 본다. 또 그러니 20대 남성들이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는 이유를 못배워먹어서라고 생각하는 것 아닌가.

나는 4.19세대가 박정희의 독재와 사법살인을 비호하는 것이나, 아니면 박근혜의 정치적 비위를 옹호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변호하는 것이 아니다. 말머리에 밝혔듯 공과 과는 구분되어 평가해야하는 것이고 공으로는 과를 덮을수 없다. 다만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화혁명을 이뤄낸 18살의 앳된 소년들이 격동의 현대사를 겪으며 노쇠한 몸을 이끌고 55년만에 다시 광장에 나와 그 주름진 손으로 태극기를 흔들며 독재자의 딸을 응원하는 아이러니는 그들의 경험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한다.


게다가 그들의 경험이 나의 경험과 아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우리도 슬슬 느끼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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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민주화 시위를 벌이는 고등학생들. 이들은 오늘날의 틀딱이 되었다.

2019. 1. 13.

한국영화부도의 날(국가부도의날 후기)

최근 충무로가 왜 망작들로 가득한지 그 이유 중 하나를 극대화해서 보여주는 사례. 조금 과장을 보태면, 나는 국가부도의 날을 보면서 한국영화부도의 날을 예감했다.

먼저 이 영화의 왜곡을 파악하려면 실제 IMF사태가 어떻게, 그리고 왜 일어났는지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과 이 영화는 외환위기와 국내신용위기를 혼용하지만 그 둘은 다르다. 외환위기는 달러가 없어서 벌어진 일이고, 국내 신용위기는 원화가 없어서 벌어진 일이다. 후자의 문제는 정부가 원화를 발행하고 지급보증을 하면 해결될 문제지만 달러부족 문제는 독자적으로 해결이 힘들다. 특히나 고정환율제 아래서는. 고정환율제 아래서는 모든 나라가 주기적으로 외환위기를 겪는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프랑스나 영국같이 큰 나라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미국도 금태환을 고집하던 시절 동일한 위기를 겪었다. 그리고 한국이 외환위기를 처음 겪은 것도 아니다. 그 전엔 미 재무부 도움으로 연명했던 것 뿐이지.

따라서 외환위기는 당시 고정환율제를 펴던 한국이 반드시 겪었을 문제고, 그 핵심은 경상수지가 적자인 상황에서 달러가 모자라 수입 결제대금과 외채를 갚을 달러가 없어 생긴 문제다. 물론 그것이 국내 신용위기를 부르긴 했지만 엄연히 그 둘은 다르다. 따라서 해결책도 다르다.

태국과 말레이시아 필리핀 같은 나라들은 물론이고 홍콩처럼 금융선진국도 간당간당한 마당에 한국이 자체적으로 달러를 조달할 방법은 없었다. 애초에 그러니 위기라고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럴 때를 대비해서 IMF라는 조직이 존재한다. 이 구원투수는 위기에 등판해 필요한 달러를 제공해주는데 그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도로 탕진할텐데. 매주 20억달러씩 소모하는 나라에 550억달러를 빌려줘봤자 반년이면 똑같은 위기에 똑같이 처한다. 그래서 IMF 골목식당의 백종원처럼 근본적 솔루션도 같이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그들이 준 솔루션의 목적은 단 하나다. 한국이 자발적으로 해외자본을 끌어들일수 있게 국내시장을 개방하고 제도를 선진화하는 것이다.

대중은 당시 IMF의 조치가 가혹하고 불공평했다고 주장하지만 그건 바보같은 소리다. 앞서 말했듯 550억 달러로는 불과 27.5주, 즉 반년밖에 버티지 못하니 그동안 한국의 외환수급을 정상화하기 위해선 급진적인 대책을 쓸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돈을 더 빌려줘야하는 것이고 IMF의 한정된 자본으로 많은 나라를 구제하는데에 반하는 일이다. 물론 그에는 충격이 따른다. 하지만 애초에 그런 급박한 상황이라 IMF를 부른 것 아닌가. 누구한테 돈 맡겨둔것도 아니고 다른 해결방안도 없었으면서 너네가 돈 더 빌려주고 더 천천히 개혁했다면 더 편했겠지 않냐는 것은 홍탁집 아들이 백종원보고 한 1년쯤 가게영업 도와주면서 솔루션 달라는 것 만큼이나 멍청하고 뻔뻔한 요구다.

영화의 역사왜곡은 이를 부정하면서 출발한다. 한국은행의 수장은 총재인데 영화 시작부터 총재를 총장이라고 하는 것은 이 시나리오가 최소 아마추어 수준의 리뷰냐 조언도 받지 않았음을 보여준다.(개봉 후 인터뷰에서는 실명 거론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총장이라고 했다지만 경제수석 재경부 차관 한은 팀장 IMF 미재무부 차관 등 이외 모든 공식 직책과 회사명은 변경없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백퍼 뻥이다) 게다가 한팀장이 속한 통화정책팀은 외환과 거의 무관한 부서라 외환보유고가 언제 동나고 롤오버가 얼마나 되는지 정보가 전무한 부서다. 이와 같은 단편적인 사실을 틀린 것을 넘어 영화 후반부로 가면 본격 역사왜곡이 시작된다.

IMF는 답이 아니라며 유럽 중앙은행들에게 돈을 빌리자는데, 유럽 중앙은행들은 자국 은행에 돈 빌려주는 곳이지 외국에 돈 빌려주는데가 아니다. 당장 베트남이 한은에 돈좀 달라고 하면 한팀장(김혜수 역)은 빌려 줄건가. (한은이 일반 회사에 실사 나가는 것도 웃겼지만) 일반 종금사와 건설사들 대차대조표와 자산이 얼마나 부실했는지 속속들이 봐 놓고서 부실을 덮어놓자(파산시키지 말자)는 말은 괴랄한 논리다. 그건 부실기업의 부채를 정부가 떠안고 강제로 은행권에 전가시키자는 소리와 똑같은 말인데. 그래놓고 본인은 정부는 파산(모라토리움)하자고 주장하는 대목에서 실제 웃음이 나왔다. 한번 모라토리움을 선언하면 역사에 남아 잊혀질때까지 수십년간 국가와 모든 기업이 해외채권을 발행할 때 높은 가산금리를 내게 된다. 우리가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도 상대적으로 낮은 가산금리에 해외채를 발행한 여러 이유 중 하나는 IMF 당시에도 모라토리움을 선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은의 핵심부서인 통화정책팀장은 이를 모를 사람이 아니다. 물론 그 부서가 모라토리움을 논의할 자리도 아니지만 그런 오류는 너무 많아 생략한다.

특히 IMF실사단 뒤에 따라오는 미 재무부 차관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한팀장이 마치 비밀을 발견한 듯 극적으로 연출하는 신에서는 쪽팔릴 경이었다. 당시 재무부 차관은 IMF외 다른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러 왔을 뿐더러, 달러를 빌리면서 왜 미국이 껴 있냐니 MS워드를 왜 마이크로 소프트사에게서 사서 쓰냐는 이은재 의원이랑 뭐가 다른가. 에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간단하다. IMF 구제금융은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고 IMF는 (미국의)사익을 위해 한국에 불리한 조건을 내건거라고. 이런 말도 안되는 음모론은 필부들이 술잔을 나누며 안주거리로 삼을 잡설에 불과한데, 그걸 돈내고 2시간동안 들으러 극장에 갈 관객들이 뭐 얼마나 있었겠나. 이 영화는 헐리웃의 Big Short을 모방해서 만든 것 같은데 그 영화가 수작으로 뽑히는 이유는 일반인들이 잘 이해하지 못했던, 실제 금융시장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쉽게 객관적으로 풀어내서 그런 것이지 필부의 뇌피셜을 영화로 만들어서 뜬게 아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과거 국가부도의 과정을 본 것이 아니라 현재 한국영화가 어떻게 부도를 내고 있는지를 본 것 같다. 흔한 클리셰와 플롯의 반복, 나팔바지만큼이나 촌스런 평면적 캐릭터들, 관객 피곤하게 만드는 감정선의 강요, 그리고 무엇보다 전문적 시각의 부재.

이 영화가 다루는 것은 500년 1000년 전의 역사가 아닌 불과 19년 전의 대한민국 역사다. 당시 IMF를 겪고 극복한 금융관료들이 모두 살아있고 그 시절을 겪은 수많은 금융인들이 존재하지 않나. 감독이 고증에 힘써야 했던 부분은 한국은행 사무실과 로비와 같은 공간적 배경이 아니라 우리가 왜 IMF에 손을 벌릴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시대적 배경이다. 감독이 영화적 소재로 사용한 IMF의 경험은 모든 국민들이 공유하는 처절한 기억이고 역설적으로 소중한 공공재라고 볼 수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의 경험을 영화로 사유화할 때는 최소한 객관적 팩트를 전달해야한다는 윤리적 소명의식이 있어야 하는것 아닌가. 하지만 그는 공공자산을 가져다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설파하고 극장수입을 올리는데 유용했다. 사실상 국민 전체에 대한 배임이고 우리 아픈 기억을 통째로 횡령한 것이다. 이 점을 이해 못하는 감독이 계속 영화를 배설하는 이상 한국영화계는 부도의 날을 맞이할 것이다. 반드시.

2018. 12. 27.

(미정)

예전에 한번 파생상품을 샀다가 아주 큰 손실을 본 적이 있었다. 그 때문에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고 몇날 밤을 뒤척일 정도로 괴로웠다. 그 종목은 수 년간의 내 저축과 달콤한 희망을 삼킨 대신, 깡통으로 남은 잔고와, 꽁초가 수북히 쌓인 현관 옆 재떨이 그리고 투자 습관을 전부 뜯어고칠정도로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내 면전에 던져놓고 홀연히 (만기되어) 사라졌다.

이게 그 종목이 나에게 무슨 원한을 품고 저지른 일인가. 그럴리가 있나. 그냥 그 자산은 원래 폭락할 자산이었고, 잘못된 것은 제 값을 찾아간 그 자산이 아니라 거기에 돈을 투자하기로 결정한 나의 판단이었다. 스크린 속 반짝이는 그 종목코드를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며 "네가 어떻게 나에게 이러냐"라고 울부짖어봤자 개짖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 의미 없는 뻘짓이다. 그것은 원래 그리될 것이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때때로 누군가에게 배신감을 느끼며 어떻게 나에게 이러냐며 고통받지만, 이 역시 어리석은 짓이다. 그 사람은 원래 그럴 사람이었다. 어쩌면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때 부터, 아니면 적어도 작년 재작년 부터 그는 그런 사람이었지 간밤에 갑자기 짠 하고 변한게 아니다. 사람은 좀처럼 바뀌지 않으니까. 내 믿음을 져버렸다고 누군가를 비난하고 원망하는 일은 실로 어리석은 짓이다. 애초에 믿음을 준 것이 잘못이고, 그건 온전히 내 잘못인데.

그렇다고 지금 뭐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와 같이 식상한, 설날에 개그맨들이 한석규나 이명박 성대모사를 하는 것 처럼 진부한 넋두리를 늘어 놓으려는 것이 아니다. 세상 사는데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안 믿을 수 있겠는가. 다만 믿어야 할 사람과 그럴 수 없는 사람을 구분해야 하며, 또 우리는 그 사람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는지에 대해 적절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설령 그 믿음이 짓이겨지더라도 원망하지 말자. 애초에 그런 사람이 그런 짓을 했을 뿐이거늘. 마음은 쓰리지만 또 다시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는 상대를 비난해서는 안된다. 내 자신을 탓해야 한다. 밖으로 분노를 분출하고 다 잊어버리기 보단 내 안으로 삭히고 이 쓰린 감정을 하나하나 곱씹는게 이 괴물같은 세상으로부터 내일의 나를 보호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래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이 글의 제목을 무엇으로 지어야 할지 정하지 못한 채 헤메고 있다.

2018. 12. 17.

고 전 노무현 대통령을 추모하며.

여러 과오에도 불구하고 그가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정치인으로 남은 이유는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바로 그가 확고한 정치 철학을 가졌다는 것과, 또 그를 현실 정치에 접목시기키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는 점.

정치는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다. 박정희를 비롯한 국가주의자들은 민주주의보다 경제성장을 선택했고 문민정부는 과거사 청산과 민주주의 이념을 최우선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저 둘 중 하나를 칭송하고 다른 하나를 욕하는 사람들 역시 자신이 선택한 가치관에 맞는 사람을 지지하는 것이다. 그러한 잣대로 보면 노무현은 대중 그 자체를 선택했다. 그렇기에 때론 마키아벨리적으로 운영되는 시스템을 대통령이 앞장서서 공격하기도 했고, 또 사회를 가진 자와 못 가진자로 나누어 분열시킨다는 비난도 받았지만 어쨋든 그에게는 확고한 철학과 방향성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철학을 현실화하려면 무엇을 빼고 무엇을 더해야할지 치열하게 고민했던 사람이다. 세상에 미국과 FTA를 맺고 미군과 함께 군대를 파병하는 좌파가 어디 있는가. 하지만 고 노무현 대통령은 그랫다. 아마 그에게는 좌냐 우냐 하는 이념논쟁보다 자신의 철학을 현실정치에서 구현하는 것이 더 우선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뭐 최고의 복지는 일자리인데,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 FTA를 마다할 이유가 어디 있으랴. 영민한 정치가는 이렇게 우선순위를 구별할 줄 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는 매우 미숙했을지언정 분명 우리 사회가 적어도 한번은 필요로 했던 정치인이었다. 보수층은 그를 싸움닭 같은 대통령이라고 기억할 지 몰라도 필요할 때 보수적 가치와 정책을 가장 빨리 받아들인 대통령이 바로 그 아닌가. 지금도 노동계는 그를 신자유주의자로 분류한다.  
 
그의 방식이 세련되고 매끄러웠다고 할 순 없다. 별 경험이 없던 그 초보 운전자의 정책실수로 부동산은 폭등했고 빈부격차는 벌어지자 국민들은 피로감을 느끼며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를 성공한 대통령으로 평가할 수도 없다. 임기 말 그의 지지율은 거의 대국민 사과방송을 하던 박근혜 수준 까지 추락했고 17대 대선에서 그를 계승한 정동영 후보는 보수진영에게 더블스코어를 넘어 거의 트리플 스코어에 가까운 격차로 패배했다. 임기 내내 실험적 마인드로 좌충우돌하는 그 운전사에게 승객들은 휴지를 던지며 야유를 보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적어도 핸들을 잡은 그의 목적지를 모르는 승객은 없었다.
 
나는 참여정부의 여러 정책에 동의하지 않았고 남상국 사장을 자살시킨 일, 그리고 친인척 비리들 때문에 그가 정의롭다고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노무현의 정치가 사회의 가장 낮은 곳을 지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임기 말 사람들이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인터넷 밈을 유행시킬 때 조차 그는 "국민들이 살기 힘들면 대통령 욕도 좀 하고 그럴수 있는거지 뭘"이라는 태도를 잃지 않았다. 그의 서툰 정치가 빈부격차를 벌리고 젊은이들이 서울에 집을 마련하지 못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의 말 만큼은 국민들에게 위로를 주지 않았는가. (이를 립서비스와 쇼라고 한다면 다른 여의도 정치인들은 바보인가. 왜 안하나.) 한국인들은 오랫동안 정치인들이 국민 여러분이라고 외치면서도 정작 국민보다 경제나 안보, 혹은 민족을 더 앞에 내세우던 소통방식에 지쳐있었다. 처음으로 국민과 유권자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내세운 대통령. 어쩌면 대중은 그래서 노무현에게 그렇게 열광했던것 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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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6년 째 철학이 없는 청와대를 상대하고 있다. 박근혜는 운전대를 친구에게 내주고 조수석에서 졸다 쫒겨났고 문재인은 눈을 감고 운전하고 있다. 그 둘은 너무도 닮았다. 우파의 아이돌 박근혜는 수첩공주가 되어 박정희 오마주 정치를 폈고 좌파의 아이돌 문재인은 A4용지 왕자가 되어 노무현 오마주 정치를 편다. 그렇게 우리는 망자의 유령이 미래를 다스리는 나라에 살고 있다. 주사파 운동권 출신 비서실장이 라이방 선글라스를 끼고 미제국주의 맥아더와 박정희를 흉내내며, 테러방지법을 필리버스터로 막던 영웅들이 어느새 빌런이 되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법률에 사인하는 희극을 보고 있다. 거기엔 아무런 철학도 없고, 또 따듯함도 없다. 수시, 최저임금, 소득주도경제 등 애초에 약자를 위해 마련한 제도가 엇나가 약자의 목을 조르는데도 샴페인 좌파들은 교조적 이념에 집착한다. 마치 자신들의 목적은 노무현에게 물려받은 이념의 관철이지 국민의 삶이 아니라는 듯이. 그 와중에 가장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지고 있고 소외된 이들은 더욱 소외되고 있다. 그러니 가난한 이들이 어찌 분노하지 않겠는가. 아래 표를 보면 가장 힘든 계층의 사람들의 현 정권 지지율이 가장 낮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이 서민들을 대변한다고 자위한다. 결국 잘 먹고 잘 사는 40/50대 화이트칼라 운동권들이 빈민들의 가난까지도 훔쳐다 정치적 자산으로 쓰는 꼴이다. 정작 하는 일이라곤 사회적 자산을 젊은 20대 여성들에게 퍼부으며 열렬히 구애하는 것 뿐이면서. 마치 이태원 클럽에서 명함을 돌리는 유부남들처럼. 현 정부는 참여정부를 계승했다고 주장하지만 내 눈에 이 둘은 너무나 다르다. 만약 고 전 노무현 대통령이 이념을 위해 인민을 내팽겨 친 현 정부를 본다면 과연 뭐라고 할까.
 
 
 
 

2018. 12. 16.

오스카 와일드는 말했다.

이기주의란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내가 원하는대로 살라고 강제하는 것이라고.

2018. 12. 14.

착각에 빠진 운동권 피터팬들

최근 발표된 문재인 지지층의 분포를 보면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나이로 분류할 때, 문 대통령을 가장 강하게 지지하는 세대는 바로 40대고 반대로 가장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세대는 60대, 그리고 놀랍게도 20대가 그 뒤를 잇는다는 것. 보수를 외치며 홍준표의 발언에 열을 올리는 6070대를 보며 486운동권들은 “쉰내 나는 틀딱들”이라며 조롱했지만, 그들보다 두 배는 더 젊은 20대의 지지율은 오히려 60대에 가깝다. 스스로를 세련된 오빠라고 착각하는 40대 운동권들이여, 착각에서 깨어나라.
 
사람은 누구나 늙는다. 늙어가면서 성격도 성향도 가치관도 달라진다. 그건 1900년에 태어난 사람에게도, 2000년에 태어난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자연의 법칙이다. 그러나 유독486 운동권들은 자신은 그 법칙에서 벗어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정치적 입장이 다른 보수 계층을 보며 늙었다고 조롱하는 그들은, 자신들도 더 이상 젊은 계층이 아니라 꼰대에 속한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믿겨지지 않는다면 을지로에 서서 지나가는 신입사원에게 사내에서 회식과 야근을 강요하는 꼰대 상사가 몇 학번인지 물어보라.)
 
그리고 현재 우리가 목격하는 운동권의 좌충우돌 정치적 실험은 바로 이 착각에 기인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2030대 유권자들과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다고 믿지만, 그 둘이 공유하는 것은 박근혜 정부에 대한 분노 뿐이다. 그 분노가 해소되고 나자 두 세대는 찢어지기 시작했다. 미투를 외친 20대 여성들이 지목한 가해자들은 대부분 운동권 세대, 혹은 그 지지자들이었고, 그녀들을 달래기 위해 4050대 정치 지도자들은 2030대 남성의 몫을 뺏어다 여성들에게 선물했다. 88년도에는 북한에 우호적 태도를 보이는 것이 진취적이고 열린 사상으로 비춰졌지만 현재의 젊은 세대는 김정은의 집권 이후 벌인 군사 도발에 형제 친구들을 잃은 세대라 북한에 대한 반감이 강하다. 486세대는 자신의 머리 위에 빨간색 선을 그어놓은 뒤 이보다 나이가 많은 세대를 비정상이라고 규정지었다. 그리고는 나머지 "젊은 우리들"이 정상이라며 젊은이들 사이에 은근슬쩍 뭉개들어가려고 했지만, 그 모습은 미혼남녀 신입사원들 주말 모임에 어거지로 낀 부장처럼 어색하고 불편하다. 20대의 문재인 지지율이 초반 80%대에서 50%대로 폭락한 것은 바로 젊은 세대가 486들이 밀어붙이는 이념과 철학을 거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이에 대한 착각은 곧 시대에 대한 착각으로 이어지기 마련. 21세기에 정권을 잡은 그들은 체코가 체코슬로바키아였던 시절의 가치관을 고수하고 있다. 민족의 자주성을 회복하고, 외세를 배격하며,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시키는 것. 그러나 남북한은 이제 서로 동질감을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이질적으로 변했고, 수출액이 GDP의 70%에 달하는데 국수주의는 더 이상 우리에게 맞는 이념이 아니며 노동자들의 삶은 고임금 노동자와 저임금 노동자로 양분되었다. 박근혜가 21세기 한국을 1970년대의 철학으로 운영하는 우를 범했듯 운동권은 나라를 80년대의 철학으로 경영하고 있다. 그 결과가 좋을 리 있겠는가. 이 철이 덜 든 피터팬 운동권들의 괴상한 주택정책으로 집값은 폭등하고 급진적 노동시장 개입때문에 저소득층은 근로소득을 잃고 빈부격차는 벌어지고 있다. 이들의 가장 큰 피해자는 진보성향이 가장 강한 2030대들이다. 이렇게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이 가장 진보적인 세대의 뒷통수를 냅다 후려치는 일은 다분히 슬랩스틱류의 희극이지만 그를 가장 가까이서 삶으로 직접 견뎌내야하는 젊은이들에겐 비극일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시대를 착각한 이들은 잘못된 선악의 기준을 들이대기 시작했다. 반미/친미, 민족/반민족, 수시/정시, 정의/적폐, 네편/내편 등. 과거 민주화 vs 군사독재와 같은 이분법적 도식에 익숙한 486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선악의 이분법적 문제로 바라본다. 그러니 사실판단이 들어설 자리에 가치판단이 뱀처럼 또아리를 튼다. 친환경 에너지가 원자력 발전을 대체할 효율을 내는가? 와 같은 공학적 문제에 "원자력 에너지는 나쁘다"와 같은 도덕을 들이대곤 한다. 대중은 점점 "일 더하기 일은?" 이라는 물음에 "짝수는 나쁘니 답은 홀수다"와 같은 샴페인 좌파의 선문답에 지쳐간다. 게다가 이런 실패에 대한 반성조차 없지 않은가. 정책이 망해도, 돈과 청탁을 받다 걸려도, 성추문이 있어도 진정한 운동권은 반성하지 않는다. 쿨하게 이해하고 끝까지 연대할 뿐. 그 비위와 실패의 책임은 모두 지지자들의 몫이다. 이렇게 486들에게 뒷통수를 하도 맞아 조기탈모가 올 지경인 젊은세대가 주 지지층에서 이탈하고 있는데도, 운동권들은 눈을 감고 입을 모아 현실을 잊게해주는 주문을 외운다. 수리수리마수리 이모든게이명박근혜.
 
486들은 87년 항쟁을 주도하여 군사정권을 무너뜨렸지만 그 직후 자유 투표에서 국민들이 군사정권의 후신 노태우를 뽑았다는 좌절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1987년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지금, 이 배 나오고 머리 벗겨진 피터팬들은 대학생 시절의 낭만으로 돌아가 미완의 항쟁을 완성시키려 한다. 그것이 현재 486 운동권 정치의 본질이며 근본적으로 그들의 정치가 올드하고 과거지향적인 이유이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일로 나아가기 위해서 오늘을 산다. 조선시대 무덤이나 고려시대 무덤이나 시체이긴 마찬가지인데 이 486들은 자신들이 욕하는 박사모들과 무어가 그리 다른가.

그들이 젊었던 시절, 한 개그우먼은 "착각의 늪"이라는 노래를 냈다. 박색인 그녀가 아름다운 자신의 모습에 빠져들어 보라는 노래를 부르는 게 바로 개그포인트였는데, 나는 이 노래가 현재 운동권 세대의 시대착오적 모습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그녀의 노래는 대중에게 웃음을 줬는데 과연 운동권의 착각은 20대들에게 무엇을 주고 있는가.

 

2018. 9. 26.

지금이라도 집을 사라.

나는 지난 5년간 한국 부동산을 매수하라고 강력 권고했다, 2015년(링크)에도 그리고 2017년(링크)에도. 하지만 공급이 부족한 마당에 모든 사람이 집을 매수할 수는 없는 법인지라 몇년 전에 받았던 질문을 아직도 똑같이 받는다. "지금이라도 집을 사야하는가?" 내 대답은 아직도 똑같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당장 사라"

이것이 물론 쉬운 결정은 아니다. 서울 주요지역의 집값은 저점이던 2014년 대비 거의 2배 이상 올랐는데 그때보다 대출은 더 어렵고, 세금은 늘어났으며 정부가 집값을 잡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니 수억이나 되는 돈을 들이는 데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트레이딩은, 그리고 투자는 그런 당연한 감정들을 극복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유명한 펀드 매니저나 트레이더가 "마음 내키는대로 사고 팔았더니 어느새 부자가 되어 있더라"라고 하는 것을 보았는가. 동물적인 감각으로 투자한다는 것은 그냥 오랑우탄이나 침팬치같은 동물처럼 투자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분명 돈은 인간의 감정을 싫어한다.

따라서 다시 한번 경제 지표와 시장을 냉정하게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현재 집값은 고평가되어 있는가, 그리고 서울 시내의 주택공급은 충분한가. 아래의 데이터와 수치는 yes라고 대답하기 쉬운 그 통념을 산산히 부순다. 서울의 집값은 버블은 커녕 아직도 저평가 되어있고 공급은 여전히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1)주택 가격 평가


위의 차트는 서울시 내의 평균 주택가격을 대한민국 국민의 평균 가처분 소득으로 나눈 것이다. 지난 10년간 한국의 1인당 가처분 소득이 거의 50% 증가하는 동안 주택 가격은 고작 12%밖에 오르지 않았다. 이 지표를 보면 서울의 주택난이 극심하던 1980년대나 주택 가격이 빠르게 상승하던 2000년대 중반에 비하면 서울의 주택가격은 아직도 싸다. 게다가 평균소득이 오르면 고소득자의 수는 더욱 빠르게 늘어난다. 2007년 연봉 1억이 넘는 근로소득자는 10.1만 명에 불과했지만 2016년에는 무려 65.3만 명이 되었다. 고액연봉자가 살고 싶어하는 강남이나 마포, 용산, 성동구의 신축 아파트 가격이 2배 이상 뛰며 타 지역을 압도하는 데엔 이와 같은 배경이 있다. 사람들의 소득이 줄지 않는 이상 집값은 계속해서 상승할 것이다.



집값의 valuation을 비교할 또 다른 지표를 보자. 나는 개인적으로 특정 재화의 실질 가격을 평가할 때 통화량과 명목 가격을 종종 비교한다. 이는 통화량 증가에 따른 인플레이션 효과를 대략적으로 보정해주기 때문이다. 통화량 대비로 보아도 한국의 주택 시가총액은 전혀 고평가 구간에 들어가 있지 못하다.


2)주택 공급 평가

서울시의 주택 공급 수급을 평가할 때엔 아래의 표 하나만 기억하면 된다.

*수요
서울시 가구 수  : 385만 가구
+서울시 생활권 :   55만 가구
           합           : 440만 가구

*공급
서울시 주택 수  : 365만 채
그 중 아파트 수 : 165만 채
신축 아파트 수  :   65만 채

아주 소수의 상류층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은 서울 내 신축 아파트에 살고 싶어한다. 서울시의 인구가 줄었다고 하지만 그들은 자발적으로 서울을 떠난 것이 아니라, 부족한 주택 수로 인해 밀려난 것이다. 그렇게 서울시 밖에 살면서 시내를 오가는 사람들의 숫자는 156.3만 명, 약 55만 가구다. 이렇게 총 440만 가구가 저 65만 채의 신축 아파트를 차지하기 위해 쩐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 서울 부동산 시장의 현 상황이다.

구체적인 숫자를 따져 보면 앞으로의 전망은 더욱 암담하다. 흔히 사람들은 지은 지 15년이 넘으면 구축 아파트로, 40년이 넘으면 부수고 다시 지어야 할 재건축 대상 아파트로 분류한다. 따라서 매년 9.1만 채(365만 채/40년) 집을 새로 지어 줘야 서울 내의 주택 수급사정이 악화되지 않는데, 지난 10년간 이 숫자를 맞춘 적은 단 두 해 뿐이었다. 나머지 8년 동안 수급 사정은 계속 악화되어 온 것이고, 그 결과 서울시에는 미분양 주택이 거의 사라졌다.

서울시 미분양 주택 수

이러한 수급 불균형은 재건축/재개발을 막은 국토부의 어리석은 정책 덕분에 더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멍청한 정책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우리는 이미 겪은 적 있지만, 정책 설계자들은 집값 안정이라는 대의적 목표가 아니라 개인적 욕망에 따라 고집을 부리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링크)

*      *      *

이렇게 서울 내 주택 수요는 풍부한데 비해 공급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라면 어떤 대책을 써도 주택가격을 잡을 수 없다. 종부세를 비롯한 각종 세금을 매기면 가장 가난한 주택 보유자가 조세부담을 못 견디고 전세입자로 전락하여 전세수요가 늘어난다. 그렇게 되면 돈이 가장 많은 다주택자가 그 집을 사들여 전세를 돌리게 되니, 결국 주택 가격은 제자리로 돌아오고 소유구조만 악화될 뿐이다. 조선시대에 지대를 높이면 결국 지주가 아니라 소작농이 비싼 세금을 부담하게 되듯, 모든 사회적 비용은 가장 약자에게 전가되기 마련이니까.

또 금리를 올리거나 대출을 죄는 통화정책은 부동산 외의 여러 시장에 영향을 주게 된다.  지나치게 많은 시중 유동성 때문에 부동산이 폭등했다고 하지만, 그럼 이 통화량이 왜 주식시장, 상품시장, 혹은 떡볶이시장 학원수업료 등으로 흐르지 않고 부동산 시장에만 모이겠는가. 유동성은 마치 물과 같아서 가장 높은 수익률을 주는 곳으로 모이기 마련이고, 어리석은 정부 정책 덕에 마침 그게 부동산 시장이 되었을 뿐이다. 이를 막기 위해 유동성을 죄면 수익성이 가장 나쁜 시장에서 먼저 돈줄이 마른다. 부동산에서 돈을 퍼내도 어떻게든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부동산 시장에서 빠져나간 만큼을 채울 테니까. 내 생각에는 만약 정부가 그런 정책을 쓰면, 자영업 대출시장이 그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크다.

예를들어 전세대출을 금지했다고 치자. 그럼 새 전세금을 맞추지 못한 세입자는 월세로 전환할 것이고, 이렇게 월세수익이 올라가면 집주인은 저축은행에서 예금을 빼서 전세를 월세로 돌릴 것이다. 자금이 빠져나간 저축은행은 안정적인 부동산 담보 대출보다 어떻게 돈을 날려먹을지 모르는 자영업자 대출과 신용대출을 먼저 줄인다. 그중에서도 저소득자의 대출을 가장 먼저 줄일 것이다. 결국 줄어든 통화량은 어느 경로를 통해서든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타격을 입히게 되어있다.

그리고 이 정책의 가장 큰 비극이자 희극은 현 정부를 가장 지지하는 계층이 가장 큰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