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6. 25.
매우 우려스러운 국토부 장관의 헛발질
* 다주택자가 집을 더 사는 것은 서민들의 주택부족과 전혀 상관없다. 어느 마을에 한 사람이 집을 백채 가지고 있다고 하자, 그럼 그 마을에서 99가구가 노숙자가 되는가? 아니다. 99가구가 집을 자가가 아닌 월세, 혹은 전세로 살 뿐이다. 한사람이 집을 1채를 사든 백채를 사든 만채를 사든 공급량만 충분하면 장기적으로 주택가격엔 아무 영향이 없다.
* 김현미 장관은 현 부동산 가격상승이 투기수요란 증거로 많은 신규구입자들이 다주택자라는 점을 든다. 하지만 그건 당연한 일이다. 정부가 중산층을 위해 규제를 완화하면 자산가인 다주택자도 사기 쉬워진다. 그리고 이 자산가들이 멍청이가 아니라면 수익을 얻기 위해(혹은 이자비용을 벌충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월세를 받고 그 집을 내어 줄 것이다.
* 만약 집값이 하루아침에 2배 뛰었다고 치자. 자산가들의 월세 수익은 반토막이 난다. 따라서 집을 팔고 다른 자산에 투자하는 것이 더욱 이득이다. 이런 현상은 월세 수익이 비슷한 위험성을 가진 다른 자산들의 수익과 같아질때까지 일어난다. 결국 현재의 집값과 월세는 자산가들의 주택구입수와는 무관하게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 따라서 집값을 떠올리는 힘의 핵심은 투기자본이 아니라 바로 월세다. 자산가들이 집을 사는 이유는 비트코인처럼 100에 사서 150에 빠져나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집을 사서 월세를 받으면 은행이자보다 훨씬 높은 수익을 얻기 때문이다. 실제로 집을 가장 많이 산 60대(2030대 자식들에게 사준 물량 포함)는 투자시 위험선호도가 가장 낮은 세대다. 가장 안전자산을 선호하는 세대가 부동산에 가장 많이 투자한 세대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참고로 2014/15년에 강남의 주요 지역의 월세 수익은 4.5%로 은행 대출이자 3%보다 월등히 높았고, 현재는 집값이 크게 올라 월세수익과 대출이자가 거의 같아진 수준이 되었다. 부동산 가격을 드라이브 하는 것은 한탕을 노린 투기가 아니라 기대수익률의 발란스를 맞춰주는 투자다. 무식한 김현미 장관은 이 점을 아예 무시하고 있다.
* 만약 강력한 대출 규제를 내놓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 피해는 서민들이 본다. 앞서 말한대로 집값을 떠받드는 핵심은 평당 3-10만원의 월세를 내는 세입자들이므로 집값은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월세는 세입자들의 소득에 달린지라, 집값이 반토막나면 이 저금리시대에 8%나 주는 고수익 자산이 되어 빚없이도 집 살 돈을 가진 자산가들이 달려들테니. 하지만 서민들은 대출 없이는 가격이 아무리 떨어져도 집을 살 수 없다. LTV를 강화하면 서민들은 영원히 자기 집을 사지 못하게 된다. 대신 집을 살 여유자금이 있는 자산가들은 더욱 부자가 된다.
* 만약 보유세를 강화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 피해 역시 서민 세입자들이 본다. 결국 보유세를 낼 여유가 있는 자산가들이 집을 소유하고, 보유세를 내지 못하는 계층은 월세입자로 전락한다. 그리고 시장에는 월세입자가 늘어났으므로 월세가 올라간다. 즉 세금은 세입자에게 자연스럽게 전가된다. 고율의 세금을 매기는 뉴욕의 부동산이 고수익을 주는 까닭이다.
* 만약 1가구 2주택, 혹은 그 이상 보유를 금지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주택난이 악화된다. 먼저 자산가들이 1주택 이상의 집을 팔아치워도 집값은 크게 낮아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3%의 월세를 낼지, 3%의 주택구매자금대출 금리를 낼지, 혹은 그 돈을 딴데 투자하여 3%의 수익을 얻을지 고민하고 있을 뿐이다. 즉 자산가들이 집을 팔아 집값이 낮아져 월세가 3.5%로 살짝 오르면 사람들은 3%의 대출이자를 물고 집을 살 것이다. 그러니 집값에는 큰 변화가 없다. 문제는 신규 분양이다. 집을 가진 가구는 집을 더 살수가 없고, 집을 가지지 못한 가구는 애초에 돈이 없으니 아파트를 새로 지어도, 살 사람이 거의 없다. 따라서 건설사들은 신규물량을 공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존의 주택은 계속 노후화된다. 하지만 사람들의 소득은 점점 늘어나 더 나은 주거환경을 원한다. 그러니 좋은 조건의 집들은 월세가 폭증하고 월세를 추가로 낼 여력이 없는 사람들은 나쁜 환경으로 몰려나간다. 결국 대부분의 서민들은 더 낡은 집에서 더 많은 월세를 내고 살아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규제로 신규공급이 없던 강남의 집값이 가장 빠르게 오른 것을 보라.
* 김현미 장관의 논리에 따르면 자동차를 가장 많이 사는 것은 렌트카 회사들이므로 대한민국 자동차 판매는 실수요가 아닌 투기수요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고 가난한 서민들도 에쿠스를 한대씩 몰고 다니려면 리스회사들을 죄다 규제해서 차를 한대이상 못사게 하면 된단 것이다. 하지만 리스회사들을 다 없애면 서민들은 삶에서 에쿠스를 탈 기회가 아예 없게 된다
결국 부동산 가격을 잡을 수 없는 이유는 현재 집값이 대한민국 평균 중산층의 생활 수준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되려 중산층의 소비수준에 비하면 현재 집값은 매우 싸다. 서울의 집값을 가처분 소득으로 나누면 역대 가장 낮은 비율을 보이는데다 대출제도도 그 어느때보다 유리했다. 많은 사람들이 1985년만 해도 월급쟁이가 돈을 모아서 강남에 집을 살 수 있었는데 지금은 안되지 않느냐고 항변하는데, 그 시절엔 강남은 중심지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지역엔 지하철도 현재처럼 잘 뚫린 도로들도 없어 대중교통으로 시내로 가는데 1시간씩 걸리곤 했다. 지금도 강남을 포함한 시내 중심가로부터 1시간 거리에 있는 외곽지역에는 직장인들이 돈을 모아 살 수 있는 집들이 많다. 게다가 은행에서 저금리에 대출도 잘 해준다. 지금 집을 안 산 사람들은 차도 굴리고 해외여행도 가고 좋은거 입고 먹고 놀고 즐기고 싶은데, 시내 중심가에 집도 한채 떡하니 있기를 바라는 놀부들이다. 그리고 집이 필요한데도 안사는 그들이야말로 집값이 빠지는데 베팅한 게으른 투기꾼들이 아닌가.
김현미 장관은 바로 그런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하려고 하지만, 경제를 왜곡하려는 그녀의 노력은 부자를 더욱 부자로, 빈자를 더욱 빈곤하게 만들 뿐이다. 병신같이.
이태원에서 밀려난 한 생산자에게
그대의 추억과 낭만을 지탱하기 위해선 다른 이들의 땀과 눈물과 손실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 그 누구도 타인에게 그런 희생을 강제할 순 없어요. 바로 그것이 당신의 감상이 철없는 이기심으로 읽히는 까닭입니다.
to 유은혜 Studio_KOTTBATT
2017. 6. 11.
부재의 의미, 그리고 정치.
그들은 그저 어질러진 검은 조각들에 불과했다. 의미없이 각지고, 찢어지고, 뾰족하게 날 선 검은 도형들. 그러나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윽고 흰 직사각형들이 온전한 모습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우리는 늘 존재를 본다. 검게 칠해지고 채워진 그 존재를. 반면 흰색은 공허한 여백이요 부재에 불과하다. 우리는 빈 것에 주목하지 않는다. 하지만 때때로 의미는 존재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재에 있기도 하지 않은가. 마치 이 그림이 그렇듯이.
세월호 뱃지는 정치적 아이콘이다. 세월호는 마음 아픈 사건이고 두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되는 비극이며 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일은 인도적 행위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정치가 없다. 하지만 그 뱃지가 정치적 코드로 해석되는 이유는 어쩌면 거기에 다른 죽음들에 대한 추모가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어떤 정치인들은 노란 뱃지를 달고 어떤 정치인들은 천안함 희생자들을 추모한다. 하나의 죽음에 가슴 아파하는 것은 보편적 인류애지만 다른 죽음에 눈을 감아버리는 것은 정치다. 이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존재가 아니라 부재를 보아야 한다. 마치 저 그림이 그렇듯이.
미술이 현실정치로부터 단절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미술관에서 정치를 떠올리는 나 자신이 왠지 편협하게 느껴진다. 아마 금호미술관에서 문준용 작가의 이름을 본 탓이리라. 좀 더 정확하게는 거기서 정치적 의미를 찾아낸 내 탓이겠지. 하지만 정치가 덧칠된 외투를 입은 작품도 충분히 감각적 충격을 건넬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것도 바로 같은 미술관에서, 5월의 어느 날 윤동천 작가의 대형 리본상 앞에서, 가슴이 먹먹해졌던 기분이 떠오른다.
십여년 전, 그날도 그랬듯이.
오늘도 산자는 죽은자의 흔적을 뒤적거리다 흐느끼며 운다.
2017. 6. 1.
슈즈트리 on 홍위병들의 블랙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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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예술과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술과의 어마어마한 차이. |
2017. 5. 30.
비트코인의 미래는 없다.
사람들은 비트코인이 새로운 통화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화폐가치의 본질이 무엇인지 망각한 주장이다. 단언컨대 100년뒤엔 비트코인은 오늘날 우표보다 무가치한 디지털 쓰레기로 전락할 것이다.
경제학에서 화폐의 기능은 세가지로 나뉜다. 교환, 저장 그리고 가치척도. 따라서 비트코인이 기존 화폐와 경쟁하려면 이 세가지 기능 면에서 적어도 한가지는 우월해야 한다. 먼저 교환과 저장에 있어 전산화 된 기존 화폐와 비트코인은 전혀 다를바가 없다. 어차피 서버에 숫자로만 기록되니까. 따라서 비트코인 추종자들이 말하는 구세대의 유물과 디지털 금화의 차이는 가치척도에 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중앙은행의 무분별한 정책에 따라 증발이 가능한 법정통화와는 달리 비트코인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늘어나므로 안정적 가치를 지닌다고 한다. 과연 그런가?
현실적으로 그들의 주장과는 완전 반대로 비트코인은 지구상 현존하는 그 어떤 법정통화보다도 가장 변동성이 심하다. 지난 2년간 비트코인은 약 1200% 폭등했는데 동 기간 달러는 약 4% 강해졌다. 가치가 안정적이라는 이야기는 "안 빠진다"는 뜻이 아니라 "안 변한다"는 뜻이다. 비트코인이 작년엔 5백불 올해는 2천불인데, 그 말은 작년엔 소나타 한대가 비트코인 6개였는데 1년만에 1.5개로 폭락했다는 말이다. 이런데 어떻게 제대로 된 가치척도의 수단이 되겠는가? 게다가 이렇게 가치가 심하게 변동하면 저장의 수단도 되지못한다. 달러와 미국채가 최고의 안전자산인 이유는 그게 항상 올라서가 아니라 그 가치가 크게 등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은퇴자에게 어제도 100이고 오늘도 100인 자산을 사라고 권유하긴 쉽지만 제정신으로 어제는 10이었는데 오늘 200을 가는 자산에 수십년 돈을 묶어두라고 조언하긴 어렵다. 비트코인 추종자들의 말이 맞다면 애초에 비트코인이 이렇게 폭등하지 말았어야 했다.
게다가 그들의 가장 큰 실수는 누가 통화의 안정적 가치를 지탱하는지를 망각한 것이다. 달러는 원화보다 더 안정적이고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통화지만 10불짜리 지폐를 가지고 우리나라 마트에 가봤자 살수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택시나 버스도 탈 수 없다. 원화보다도 더 훌륭한 달러를 가지고도 아무 경제활동을 할 수 없는 이유는 정부가 모든 거래를 원화로 하도록 강제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이런 법을 정한 이유는 독자통화를 쓰는게 수익을 가져다 주고(세뇨리지) 통화정책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할일없어서 귀찮게 원화지폐를 찍어대고 한국인들이 바보라서 더 좋은 달러대신 원화로만 거래하는 것이 아니다. 그 결과 원화에 대한 수요는 항상 있다. 원화값이 폭락해서 환율이 3000원에 이르면, 해외 교포들은 전재산을 팔고 귀국해서 3배 더 부자로 살 것이고 한류 팬들은 엑소 콘서트를 1/3가격으로 볼 수 있으며 해외 소비자들은 소나타를 티코가격에 살 수 있다. 따라서 애초에 원화가격은 1/3로 폭락하기 어렵고 또 그만큼 폭등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5년전에 비트코인이 무가치했던 것 처럼 비트코인은 내일모레 당장 언제라도 똥값으로 떨어질 수 있는데 그래도 비트코인만 쓰라고 강제할 정부는 없다. 어떤 정부가 무슨 이점이 있다고 세뇨리지와 통화정책을 포기하고 비트코인을 유일한 법정통화로 선언하겠는가. 게다가 이미 비트코인과 유사한 디지털 통화들이 속속들이 등장하는데 비트코인의 독점적 지위가 유지될 가능성도 매우 희박하다.
결국 비트코인은 온라인게임의 골드, 우표, nba농구카드, H.O.T 사인시디 등 이제껏 거처간 수많은 유사통화들과 하나도 다를게 없다. 온라인에서 거래된 역사는 리니지의 아덴이 더 오래되었고, 우표는 그 가치가 법적으로 보장되어있다. 글로벌 인지도는 nba농구카드가 더 유명하고 추종자들의 열정면에서는 H.O.T사인 시디가 단연 1등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게임의 서비스종료와 함께 온라인 게임머니는 흔적도 없이 지워졌고 이제 액면가100원짜리 우표는 90원에 거래된다. nba농구카드는 폐지가 된 지 오래며 H.O.T사인시디는 방안에 쳐박혀있다. 유행이 끝나면 비트코인의 말로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비트코인의 인기는 현대 통화정책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나왔다. 연준이 양적 완화로 달러를 찍어내자, 달러가치가 폭락하고 하이퍼인플레가 올 것을 두려워 한 사람들이 구조적으로 공급을 늘릴 수 없는 비트코인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이퍼인플레는 오지도 않았고 달러의 가치는 폭락하지도 않았다. 왜냐면 통화의 본질은 늘 손에 잡히는 금속물질과 종이지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신용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융 원시인들은 안정적으로 눈에 보이는 매개를 원했고 비트코인을 숭배하기 시작했다. 그럴거면 차라리 길가의 짱돌을 통화로 숭배할 것이지. 하지만 정부가 절대로 짱돌 본위제를 도입하지 않을 것 처럼 비트코인 본위제를 실시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로또를 사라.
2017. 5. 21.
문화계에 난입한 홍위병들
2. 한 흑인 여자가 하얀 테이블 위에 흰 족쇄로 묶여 있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참고로 사진의 제목은 Bon Appetit.
2017. 5. 6.
sns의 프로테스탄티즘
1. 성 상품화 금지
설리가 sns에 게시한 사진에 대한 기사나 섹시함을 강조한 광고의 티져 영상 아래에 달리는 댓글들을 보면 어김없이 나오는 비판들이 있다. "여성을 상품화" 혹은 "로리 컨셉의 성적 욕구 자극"을 시도 했다는 것. sns의 프로테스탄트들은 이와 같은 행위는 사악하고 따라서 반드시 근절되어야 하는 것 처럼 주장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걸그룹 보이그룹을 보며 열광한다. 여성 팬들이 엑소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이 시각적으로 "섹시"하기 때문이다. 정종철이 머리를 염색하고 춤을 춘다고 해서, 조정치가 랩을 하며 카메라를 노려본다고 해서 여성 팬들이 열광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남성 팬들은 트와이스의 성적 매력에 돈을 쓴다. 쯔위가 노출이 없는 옷을 입고 사나가 몸매를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서 남성들이 그들의 섹시함을 소비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들이 부르카를 써서 얼굴까지 가리고 같은 노래와 안무를 한다면 그렇게 큰 상업적 성공을 거뒀을까? 하지만 놀랍게도 설리의 사진에는 종교적 근본주의 수준의 검열잣대를 들이대던 snser들은 kpop가수들의 뮤직비디오엔 앞다투어 좋아요를 눌러댄다. (그들의 용어를 빌리자면) 개념을 빻은건 설리나 광고주가 아니라 걸그룹 보이그룹을 보며 헥헥대고 상의를 반쯤 벗어제낀 다니엘 헤니가 사라는 제품을 위해 지갑을 여는 본인들의 이중잣대다.
논의를 좁혀 논란을 "로리타 이미지"로 한정해보자. 미성년자를 성적으로 학대하는 것은 마땅히 처벌받아야 할 문제지만 그 범주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 샤이니가 "누난 너무 예뻐"라는 노래로 히트를 쳤을 때 멤버 5명 중 3명은 미성년자였다. 그럼 당시 그 노래를 소비하던 성인 여성(혹은 게이)들은 모두 미성년 성범죄자에 해당한다. 이는 왜 비난하지 않는가? 더욱이 욕망 그 자체, 혹은 이를 표현하는 행위를 곧장 범죄로 다루는 일에 신중해야 한다. 살인은 미성년 성범죄처럼, 혹은 그 이상의 사악한 행위이다. 그런데 고대전쟁에서의 살육이 영상의 주 소재를 이루는 영화 "300"은 국내에서만 300만명 가까운 관람객을 모았고, 연쇄살인마의 끔찍한 살인과정을 표현한 영화 "악마를 보았다"는 220만명이 자발적으로 관람했다. 성인 여성이 교복을 연상하는 옷을 입고 야릇한 표정을 지은 사진은 "미성년자의 성적 매력"을 표현했기 때문에 비난받아야 한다면, 실제로 살육장면, 혹은 살인자의 모습과 심리를 실감나게 묘사한 영화가 좋아서 보러간 저 사람들은 어떤 비난을 받아야 할까? 과연 로리타적 표현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다른 비윤리적 행위를 표현한 예술매체를 보며 일관된 기준을 적용했을까?
2. 외모지상주의
외모지상주의를 욕하는 모든 인간들은 다 위선자들이다. 그들은 피해자인 척 하지만 사실 가해자들이다. 그들이 만약 이국주가 선전하는 청바지를 사고, 김상호가 디제잉을 하는 클럽을 찾아간다면 외모 지상주의는 더이상 없을 것이다. 광고주들은 미인 모델을 쓰고 그들의 외적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왜? 소비자들이 외적 아름다움에 민감하니까. 회사 면접관들도 평가점수에 지원자들의 외모를 반영한다. 왜? 심지어 지원자들도 편의점이나 까페에 가면 알바생들의 외모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니까.(자영업자들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것이다) 그들은 당신의 외모지상주의적 행위에 수동적으로 반응할 뿐이다. 당신이 이쁜여자, 혹은 잘생긴 남자를 보며 헤헤거리지 않는다면 당신의 못난 외모가 차별받을 일도 없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타인이 내 내면의 가치를 몰라준다고 비난하면서 정작 자기는 남의 외면만 보는 위선자들이다. 사실 어쩔 수 없다. 보이지도 않는 내면을 어찌 볼 것이며,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마주치고 살아가는데 그들의 진면목을 보는데 일일히 시간을 낭비하겠는가. 그러니 남들을 외모지상주의로 비난하지마라. 당신도 그 중 하나니까.
3. 동물보호
강아지는 귀엽고 예쁘다. 나는 처음 보는 강아지라도 반나절을 질리지 않고 데리고 놀 수 있다. 너무 귀여우니까. 하지만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과 멍청한 박애주의를 아무데나 들이대는 것은 다르다. 현재 순종 강아지들은 대부분 인간의 눈에 예뻐 보이는 기형 개체들을 근친교배해서 낳은 결과물이다.(그래서 순종견은 유전병에 시달린다. 아는 수의사에게 물어보라) 그 뒤에도 그 개들을 거세하고 성대를 절개하며 인간들도 적응 못하는 좁은 공간에 쑤셔넣어 기르는 것은 전부 애견인들이다. 어떤 동물보호론자들은 악어가죽이나 모피코트를 입은 사람을 잔인하다고 부르는 무식을 뽐낸다. 그중 몇몇은 죽은 소의 시뻘건 살덩이를 고온에 구우는 사진을 좋다고 인터넷에 올려 욕먹기도 했다.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해도 동물을 죽이는 일에 동참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치약, 샴푸, 인슐린, 책 등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공산품에도 동물의 원료가 들어간다. 더 나아가 동물은 죽이면 안되고 식물은 죽여도 되는 법은 어디에 있는가? 정말 생명을 사랑해서 해치기 싫다면 가을에 떨어진 낙엽만 먹거나 아니면 자연사한 동물의 사체를 파먹어야 한다. 그도 싫다면 본인이 직접 광합성을 하던가. 최초의 진화 과정에서 동물세포가 식물세포와 다르게 분화한 특징은 다른 생명체의 에너지를 섭취한다는 점이다. 그런 동물중에서도 뭐든 다 먹을 수 있는 잡식성 포유류로 태어나 "생명을 사랑하니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겠다"고 주장하는 건 첫째, 위의 내용을 모르는 멍청이거나 둘째, 죽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따라서 아직 안 죽고 살아있는 생명보호론자들은 다 멍청이다.
어떤 생명보호론자들은 "어쩔수 없는 생명소비는 인정하되, 나머지 동물들의 행복권도 인정하자"라며 타협점을 제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의미없는 허언에 불과하다. 동물들의 행복을 늘리려면 인간의 행복이 아닌 수를 줄여야 한다. 지구상에는 70억의 인구가 300억마리 이상의 가축과 공존하고 있다. 이 가축 중 절대 다수는 가금류인 닭으로 250억마리를 차지하고 나머지 50억마리 이상의 가축은 대부분 포유류이다. 그리고 인간과 이 나머지 가축의 생활 가능 반경은 거의 같다. 즉 인간이 못살 땅에서는 가축도 못산다. 가축에게 더 많은 공간을 할애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생활 반경을 줄여야하는데 그러려면 필연적으로 인간의 수를 줄여야 한다. 즉 가축을 더 행복한 환경에서 키우려면 어떻게든 인간이 더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이 정책을 지지한 강력한 정치단체가 있었다. 바로 나치였다. 영화제작장에서 동물들의 촬영시간 제한, 동물학대 처벌 등 유럽에서 가장 선진화 된 동물보호법을 도입한 것은 바로 나치였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그들은 유대인들을 절멸시킬 게획도 함께 입안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snser들이 들이대는 프로테스탄티즘적 주장들은 일상 생활에서 통용될 수 없을 뿐 아니라 본인들도 그 규범에 따라 생활하고 있지 않다. (sns에 대한 내 편견일 수도 있지만) 그들은 생각하는 시간보다 사진을 올리고 댓글을 다는 시간이 월등히 많기 때문에 스스로 주장 안에 내재된 모순을 깨달을 시간도 없다. 그 결과 종교적 원리주의자들 마냥, 우르르 몰려다니며 마녀재판을 하고 희생자들을 사냥하러 다닌다. 그런 측면에서 이들을 신 프로테스탄트라고 일컫는 것은 적절한 은유적 표현이 아닐 수 없다.(자화자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