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5. 6.

sns의 프로테스탄티즘

오늘날 사회 여론의 큰 축은 sns상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인스턴트식으로 소비되는 매체의 특성 답게, sns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주장들을 보면 단편적인 선악구분과 흑백논리의 잣대를 적용하는 것을 종종 보곤 한다. 그래서 결국 많은 주장들은 엄격한 도덕주의적 잣대를 들이밀곤 하고, 그 결과 실생활에서 아무도 지키지 않는 새로운 윤리규범을 탄생시킨다. 나는 그들을 sns상의 프로테스탄트라고 부른다. 이 신프로테스탄티즘을 뜯어보기로 하자.

1. 성 상품화 금지
설리가 sns에 게시한 사진에 대한 기사나 섹시함을 강조한 광고의 티져 영상 아래에 달리는 댓글들을 보면 어김없이 나오는 비판들이 있다. "여성을 상품화" 혹은 "로리 컨셉의 성적 욕구 자극"을 시도 했다는 것. sns의 프로테스탄트들은 이와 같은 행위는 사악하고 따라서 반드시 근절되어야 하는 것 처럼 주장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걸그룹 보이그룹을 보며 열광한다. 여성 팬들이 엑소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이 시각적으로 "섹시"하기 때문이다. 정종철이 머리를 염색하고 춤을 춘다고 해서, 조정치가 랩을 하며 카메라를 노려본다고 해서 여성 팬들이 열광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남성 팬들은 트와이스의 성적 매력에 돈을 쓴다. 쯔위가 노출이 없는 옷을 입고 사나가 몸매를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서 남성들이 그들의 섹시함을 소비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들이 부르카를 써서 얼굴까지 가리고 같은 노래와 안무를 한다면 그렇게 큰 상업적 성공을 거뒀을까? 하지만 놀랍게도 설리의 사진에는 종교적 근본주의 수준의 검열잣대를 들이대던 snser들은 kpop가수들의 뮤직비디오엔 앞다투어 좋아요를 눌러댄다. (그들의 용어를 빌리자면) 개념을 빻은건 설리나 광고주가 아니라 걸그룹 보이그룹을 보며 헥헥대고 상의를 반쯤 벗어제낀 다니엘 헤니가 사라는 제품을 위해 지갑을 여는 본인들의 이중잣대다.

논의를 좁혀 논란을 "로리타 이미지"로 한정해보자. 미성년자를 성적으로 학대하는 것은 마땅히 처벌받아야 할 문제지만 그 범주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 샤이니가 "누난 너무 예뻐"라는 노래로 히트를 쳤을 때 멤버 5명 중 3명은 미성년자였다. 그럼 당시 그 노래를 소비하던 성인 여성(혹은 게이)들은 모두 미성년 성범죄자에 해당한다. 이는 왜 비난하지 않는가? 더욱이 욕망 그 자체, 혹은 이를 표현하는 행위를 곧장 범죄로 다루는 일에 신중해야 한다. 살인은 미성년 성범죄처럼, 혹은 그 이상의 사악한 행위이다. 그런데 고대전쟁에서의 살육이 영상의 주 소재를 이루는 영화 "300"은 국내에서만 300만명 가까운 관람객을 모았고, 연쇄살인마의 끔찍한 살인과정을 표현한 영화 "악마를 보았다"는 220만명이 자발적으로 관람했다. 성인 여성이 교복을 연상하는 옷을 입고 야릇한 표정을 지은 사진은 "미성년자의 성적 매력"을 표현했기 때문에 비난받아야 한다면, 실제로 살육장면, 혹은 살인자의 모습과 심리를 실감나게 묘사한 영화가 좋아서 보러간 저 사람들은 어떤 비난을 받아야 할까? 과연 로리타적 표현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다른 비윤리적 행위를 표현한 예술매체를 보며 일관된 기준을 적용했을까?

2. 외모지상주의
외모지상주의를 욕하는 모든 인간들은 다 위선자들이다. 그들은 피해자인 척 하지만 사실 가해자들이다. 그들이 만약 이국주가 선전하는 청바지를 사고, 김상호가 디제잉을 하는 클럽을 찾아간다면 외모 지상주의는 더이상 없을 것이다. 광고주들은 미인 모델을 쓰고 그들의 외적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왜? 소비자들이 외적 아름다움에 민감하니까. 회사 면접관들도 평가점수에 지원자들의 외모를 반영한다. 왜? 심지어 지원자들도 편의점이나 까페에 가면 알바생들의 외모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니까.(자영업자들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것이다) 그들은 당신의 외모지상주의적 행위에 수동적으로 반응할 뿐이다. 당신이 이쁜여자, 혹은 잘생긴 남자를 보며 헤헤거리지 않는다면 당신의 못난 외모가 차별받을 일도 없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타인이 내 내면의 가치를 몰라준다고 비난하면서 정작 자기는 남의 외면만 보는 위선자들이다. 사실 어쩔 수 없다. 보이지도 않는 내면을 어찌 볼 것이며,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마주치고 살아가는데 그들의 진면목을 보는데 일일히 시간을 낭비하겠는가. 그러니 남들을 외모지상주의로 비난하지마라. 당신도 그 중 하나니까.

3. 동물보호
강아지는 귀엽고 예쁘다. 나는 처음 보는 강아지라도 반나절을 질리지 않고 데리고 놀 수 있다. 너무 귀여우니까. 하지만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과 멍청한 박애주의를 아무데나 들이대는 것은 다르다. 현재 순종 강아지들은 대부분 인간의 눈에 예뻐 보이는 기형 개체들을 근친교배해서 낳은 결과물이다.(그래서 순종견은 유전병에 시달린다. 아는 수의사에게 물어보라) 그 뒤에도 그 개들을 거세하고 성대를 절개하며 인간들도 적응 못하는 좁은 공간에 쑤셔넣어 기르는 것은 전부 애견인들이다. 어떤 동물보호론자들은 악어가죽이나 모피코트를 입은 사람을 잔인하다고 부르는 무식을 뽐낸다. 그중 몇몇은 죽은 소의 시뻘건 살덩이를 고온에 구우는 사진을 좋다고 인터넷에 올려 욕먹기도 했다.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해도 동물을 죽이는 일에 동참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치약, 샴푸, 인슐린, 책 등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공산품에도 동물의 원료가 들어간다. 더 나아가 동물은 죽이면 안되고 식물은 죽여도 되는 법은 어디에 있는가? 정말 생명을 사랑해서 해치기 싫다면 가을에 떨어진 낙엽만 먹거나 아니면 자연사한 동물의 사체를 파먹어야 한다. 그도 싫다면 본인이 직접 광합성을 하던가. 최초의 진화 과정에서 동물세포가 식물세포와 다르게 분화한 특징은 다른 생명체의 에너지를 섭취한다는 점이다. 그런 동물중에서도 뭐든 다 먹을 수 있는 잡식성 포유류로 태어나 "생명을 사랑하니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겠다"고 주장하는 건 첫째, 위의 내용을 모르는 멍청이거나 둘째, 죽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따라서 아직 안 죽고 살아있는 생명보호론자들은 다 멍청이다.

어떤 생명보호론자들은 "어쩔수 없는 생명소비는 인정하되, 나머지 동물들의 행복권도 인정하자"라며 타협점을 제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의미없는 허언에 불과하다. 동물들의 행복을 늘리려면 인간의 행복이 아닌 수를 줄여야 한다. 지구상에는 70억의 인구가 300억마리 이상의 가축과 공존하고 있다. 이 가축 중 절대 다수는 가금류인 닭으로 250억마리를 차지하고 나머지 50억마리 이상의 가축은 대부분 포유류이다. 그리고 인간과 이 나머지 가축의 생활 가능 반경은 거의 같다. 즉 인간이 못살 땅에서는 가축도 못산다. 가축에게 더 많은 공간을 할애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생활 반경을 줄여야하는데 그러려면 필연적으로 인간의 수를 줄여야 한다. 즉 가축을 더 행복한 환경에서 키우려면 어떻게든 인간이 더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이 정책을 지지한 강력한 정치단체가 있었다. 바로 나치였다. 영화제작장에서 동물들의 촬영시간 제한, 동물학대 처벌 등 유럽에서 가장 선진화 된 동물보호법을 도입한 것은 바로 나치였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그들은 유대인들을 절멸시킬 게획도 함께 입안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snser들이 들이대는 프로테스탄티즘적 주장들은 일상 생활에서 통용될 수 없을 뿐 아니라 본인들도 그 규범에 따라 생활하고 있지 않다. (sns에 대한 내 편견일 수도 있지만) 그들은 생각하는 시간보다 사진을 올리고 댓글을 다는 시간이 월등히 많기 때문에 스스로 주장 안에 내재된 모순을 깨달을 시간도 없다. 그 결과 종교적 원리주의자들 마냥, 우르르 몰려다니며 마녀재판을 하고  희생자들을 사냥하러 다닌다. 그런 측면에서 이들을 신 프로테스탄트라고 일컫는 것은 적절한 은유적 표현이 아닐 수 없다.(자화자찬)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