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한달동안 이준석 당 대표의 페이스북에는 총 89개의 포스팅이 올라왔다
- 그 중 여당을 비판하거나 여당의 비판에 대응한 것은 총 14개(15.7%)
- 반면 당내 특정 후보나 일부 당원들에 대한 공격은 총 30개(33.7%)
- 범여권에 속하는 안철수와 국민의당을 향한 공격은 총 13개(14.6%)
- 당 행사 홍보와 개인신변잡기에 대한 내용은 30개(33.7%)였고 정의당을 향한 공격도 2개(2.2%)를 차지했다*
2021. 8. 16.
통계로 보는 이준석의 속마음
역사, 그 생존의 교과서
국토가 길게 늘어진 탓일까, 일본에서는 시대가 바뀔 때마다 주요 세력이 둘로 나뉘어 큰 전투를 벌이곤 했다. 그 대표적 사건이 일본 열도를 동서로 나누어 붙었던 세키가하라 전쟁인데 전 일본의 주요 다이묘와 무장들이 대부분 출전하여 싸웠던, 그야말로 그 시대의 빅 매치였던 셈이다. 이 전투에서 패하는 진영에 줄을 잘못 서게 되면 영지를 삭감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칫하면 몰수, 혹은 가문이 모두 처형당하는 혹독한 결과를 낳았기 때문에 각 다이묘들은 신중히 진영을 택했다. 그리고 그런 전국시대 말기에 인상 깊은 족적을 남긴 두 가문이 있다. 바로 사나다와 시마즈가. 그들의 행보를 짧게 돌아보자.
#사나다 가문
가장 복잡한 상황에 처한 다이묘들 중 하나가 바로 사나다 마사유키였다. 본래 다케다 가문을 섬기던 그는 주인이 몰락하자 살아날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처음엔 오다 노부가나에게, 그가 죽고 난 뒤 호조 가문에, 뒤이어 도쿠가와에게 복속한다.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영지를 양도하라고 명하자 그는 명을 거부하고 전쟁에 나선다. 분노한 이에야스가 토벌대를 보내지만 전략가인 마사유키는 우에다 성에서 토벌군을 섬멸한다. 하지만 이 작은 다이묘가 일본 전역에서도 손꼽히는 도쿠가와에게 언제까지 저항할 수는 없는 법. 그는 둘째 아들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인질로 보내어 중재를 부탁하고, 히데요시는 마사유키의 장남과 도쿠가와의 가신의 딸을 결혼시키며 화해를 주선한다. 고맙게 받아들여야 할 제안이었지만 전투에서도 이기고 도요토미도 등에 업은 사나다 마사유키는 호기롭게 반발하며 나도 다이묘이고 저쪽도 다이묘인데 어째서 내가 급이 낮은 도쿠가와의 가신과 사돈을 맺겠느냐며 항의한다. 결국 이에야스는 신부를 자신의 양녀로 삼아 혼인을 맺는 것으로 이 석연찮은 중재안을 받아들인다.
그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동군을 이끌고 천하를 벌이는 전투를 벌인다고 하니 사나다 가문의 고민이 깊지 않을 수 없었다. 단순히 동군의 수장과 사이가 껄끄러우니 서군에 참가하기엔 가문의 존속과 미래가 달린 일 아닌가. 그래서 그는 결심한다. 도쿠가와 측과 사돈인 큰아들을 동군에 참가시키고 자신은 도요토미의 인질이었던 둘째 아들을 데리고 서군에 참가하기로. 어느 편이 이기든 가문을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분산투자지만, 자칫하면 한솥 밥을 먹던 아버지와 형제, 그리고 가문의 중신들이 전장에서 서로를 죽고 죽여야 했던 고통스러운 결정이었다
결과적으로 동군이 승리했지만 사나다 마사유키는 불과 소수의 병사로 이에야스의 아들이 이끄는 3만 8천 명의 군대의 발목을 잡아 그들이 세키가하라에 참전하는 것을 막는다. 동군 총 병력의 약 1/3에 달하는 이들이 전장에 도달하지 못하는 바람에 동군은 서군에 비해 수적 열세에서 싸워야 했고 화가 단단히 난 이에야스는 마사유키를 죽이려고 했지만 동군에서 싸운 사나다의 장남, 노부유키의 간청으로 아버지와 둘째 아들을 유폐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사나다 가문은 살아남았다. 도쿠가와의 삼엄한 감시에도 큰아들 노부유키는 유폐된 아버지와 동생에게 지속적으로 생활비를 보내고 그들이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그렇게 살아남은 사나다 가문은 우에다와 마쓰시로 번을 지배하며 막부 말기까지 존속했으며 폐번 이후에도 메이지 정부에서 현의 지사를 지냈고 세이난 전쟁에서 공을 세워 백작의 지위에 올랐다.
#시마즈 가문
임진왜란에서 활약하여 우리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남긴 시마즈지만 군공만으로 평가한다면 그들은 세키가하라에서 놀라운 활약을 보였다. 시마즈 가문은 사나다와는 반대로 도요토미 가문과 껄끄러운 관계여서 처음엔 동군에 합류하려고 했지만 영지가 서쪽 끝 규슈에 있었고 도요토미의 본거지인 오사카 성에 시마즈의 인질들이 잡혀있던데다 병사를 이끌고 이동하던 도중 서군의 대장, 이시다 미쓰나리가 거병하여 어쩔수 없이 서군에 합류한다.
이때 시마즈 본가는 형인 요시히사가 지키고 있었는데 동생 요시히로는 전공을 세우기 위해 형에게 지원을 요청하지만 요시히사는 단칼에 거절했고 그 결과 요시히로는 약 2천이 안되는 소수의 병력만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그러나 전투 내내 그는 거의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참전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미쓰나리가 직접 찾아와 출격을 부탁했을 때에도 딴소리를 하며 수수방관할 뿐이었다.
망부석처럼 서있던 시마즈의 용사들이 전장에서 활약한 것은 역설적으로 전투의 승패가 갈린 이후였다. 2시간여의 전투에서 서군이 패주하게 되고 시마즈의 본대도 포위당하게 되자 후방이 막힌 시마즈군은 불과 천오백의 병력으로 전방의 팔만이 넘는 동군의 본진을 돌파하기로 결정한다. 거의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이 작전은 놀랍게도 성공한다. 혼다 타다카츠나 이이 나오마사와 같은 쟁쟁한 명장들이 그들을 저지했지만 되려 부상을 입고 물러나고 요시히로는 본진을 뚫고 오사카에 들러 인질들을 구출해 영지로 돌아갔다. 생환한 인원은 불과 수십 명에 불과하고 조카 토요히사와 다수의 중신들이 전사했지만 대장 요시히로를 무사히 탈주시킨다는 전략적 목적을 달성했고, 또 패주한 소수의 군대가 승리한 대군의 정면을 뚫어 후퇴한 이 놀라운 사건은 시마즈 퇴각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동군의 정면을 돌파한 시마즈 요시히로는 도쿠가와의 본진을 지나치면서 이에야스에게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원치 않는 싸움을 시작했다 본국 사츠마로 돌아가지만 제 본심에 대해 훗날 바로 말씀드리겠다고. 요시히로는 살아서 영지로 돌아갔지만 형 요시히사는 조카를 포함한 가문의 누구도 그를 환대하지 말라고 지시했고 동시에 도쿠가와 측과 협상을 시작한다. 요시히사는 동생이 독단적으로 벌인 일이라 소수의 병력만이 참전했고 전투에서 사실상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피해는 동군이 무리하게 시마즈군을 포위 섬멸하려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니 양해해 달라고 화의를 청한다. 이에야스는 후환을 끊어놓고자 시마즈가 다스리는 사쓰마를 평정하고 싶었고 실제로 토벌령을 내리기도 했지만, 불과 천오백에 불과한 시마즈군의 활약을 목도한 터라 시마즈의 근거지로 쳐들어가는 것이 심히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그는 불과 일주일 만에 자신이 내린 토벌령을 철회한다. 그래서 시마즈 가문은 요시히로가 근신하는 것 외에 다른 처벌을 면하게 된다.
그렇게 살아남은 시마즈 가문은 사쓰마 번을 지배하며 막부 말기까지 번성하였는데 막말 사쓰마-죠슈동맹을 이끌며 도막파의 수장이 되어 결국 도쿠가와 막부를 몰아낸다. 시마즈의 놀라운 활약을 목도한 도쿠가와 이에아스는 죽으면서도 그들이 마음에 걸렸는지 자신의 시신을 사쓰마를 향해 묻어달라고 하였는데 그의 염려는 265년이 지나 결국 현실이 되었던 것이다.
역사는 현대를 비추는 거울일 뿐 아니라 현대인의 의식과 세계관을 형성하는 토대이기도 하다. 이번 정부에서 유난히 두드러지지만 과거에도 한국 정부가 납득할 수 없는 1차원적 외교를 펼쳐 국익을 갉아먹은 사건은 과거에도 여러 번 있었는데 나는 유권자들이 전략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점차 잃어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가장 큰 책임은 우리나라의 편협한 역사교육에 있지 않을까 한다. 우리의 교과서가, 그리고 그 교과서로 배운 대중이 역사를 바라보는 방식은 큰 틀에서 명분을 따지던 조선시대의 사대부들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은 너무나 편협하고 감정적이며 또한 비현실적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입만 산 병신외교로 이어진다.(링크)
만약 우리의 역사교육이 세키가하라의 두 인물들을 평가한다면 과연 어떻게 보았을까? 아마도 사나다 가문은 붕당에 휩쓸려 아비와 아들, 형과 동생이 총부리를 겨눈 비극의 동족상잔을 벌인 막장 집안으로, 시마즈는 유유부단하게 움직여 서군의 패배에 일조한 기회주의자들로 보지 않았을까. 실제로 우리의 역사교육은 명분만 강조하고, 또 그에 따른 별 역사적 의미도 없던 소규모의 항쟁만 조명한다. 그래서 고려든 조선이든 나라가 몰락하거나 위험한 시기를 배울 때면 어김없이 명분론과 항쟁이 교과서를 수놓는다. 물론 그중에는 임진왜란의 의병처럼 의미있는 무력투쟁도 있었지만 무신정권 몰락 후 삼별초의 항쟁이나 1930년대 이후 만주의 소규모 독립군 활동처럼 실제 역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한 사건들조차도 우리의 역사교육은 애써 의의를 부여하고 명분을 입혀 포장한다. 하지만 고려가 자주국으로 남을 수 있던 것은 고려 원종이 쿠빌라이가 왕위 계승 경쟁에서 이기는데 크게 기여한 외교술 덕이고* 전후 한국이 독립할 수 있던 것은 일본의 힘을 꺾어놓고 싶은 미국과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회복하고 싶었던 중국 측의 이해관계가 맞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나다와 시마즈의 역사를 배운 일본인과 삼별초와 조선의용대의 역사를 배운 한국인들이 국가적 위기를 마주했을 때 각각의 전략적 대응은 매우 다를 수밖에 없다. 일본인들은 마사유키나 요시히사처럼 자존심을 버리더라도 생존을 위해 전략적으로 투쟁과 협상을 번갈아가며 사용하겠지만 한국인들은 무지성으로 투쟁만 하면 된다고 믿는다. 불굴의 의지로 반항하고 대들고 싸우고 죽고 살해당하고 그래도 대들고, 그렇게 줄기차게 투쟁에 나서면 궁극적으로 소년만화와도 같은 승리가 알아서 찾아올 거라 믿는다. 그 의지를 지켜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명분과 혹독한 정신교육뿐이지 타협은 매국노 배신자들이나 꺼내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병신외교는 오늘날에도 그렇게 유구한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바로 절름발이 정신승리로 점철된 역사교육을 통해서.
오늘은 광복절이다. 우리는 독립의 기쁨과 의의만 기념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우리가 살아남았는지 실제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 유럽 대륙만 해도 몇천 개가 넘던 정치세력들은 불과 두 세기 만에 두 자릿수의 국가들로 통합되었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독립국가로 존속한 거의 대부분의 나라들은 생존을 위해 절박하게 투쟁한 역사이고 우리는 스스로의 노력과 더불어 지정학적 여건 덕에, 또 한 강대국의 전폭적 지원 덕에 격동의 세기에도 살아남아 독립국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이런 혜택은 머지않아 끝날 가능성이 크다. 지정학 전략가인 피터 자이한은 늘어나는 재정적자와 셰일가스의 발견, 그리고 라이벌이었던 소련의 붕괴로 미국이 국제사회에 이전처럼 깊숙이 개입할 이유가 사라졌으며 먼로주의로의 회귀는 이미 시작되었다고 지적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래 미국은 세계 시장의 개방, 자유무역, 항행의 자유, 그리고 군사적 안정을 보장하였고 그 결과 대다수의 약소국들이 사실상 정치에서 지정학적 요소를 고려할 이유를 없앴다. 오늘날 그 어떤 정치인도 자국의 안정적인 석유 수입을 위하 말라카 해협에 해상 군사력을 투사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소비시장의 확보를 위해 인도를 식민지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계는 미국의 세계의 경찰 역할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미국이 석유 때문에 중동문제에 개입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미국이 수십 년간 수입해온 석유 중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는 물량은 1/5이 채 되지 않았고, 그나마 그 절반은 사우디가 동맹국 미국에 비축한 분량이었다. 미국이 중동을 지키는 것은 동아시아 동맹국의 에너지 수급 때문이었는데 미국에 안보를 가장 의존하는 한국인들 조차도 미국의 중동 침공을 줄기차게 미 패권주의라며 비난했다.
미국의 유권자들은 점점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는 세계의 경찰놀이에 자신의 세금과 재정을 낭비하는 것을 꺼릴 것이며 그러기 시작하면 나머지 세계가 태어나 누려온 당연한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은 시대가 올 것이다. 그리고 여러 이유로 지금 내 세대는 죽기 전에 그 역사를 목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날이 오면 다시금 지정학은 국가의 생존과 번영에 가장 중요한 요소로 떠오를 것이며 전략적인 외교를 펴는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의 운명은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광복을 기념하던 바로 그날, 유라시아 대륙의 반대편에서 미국의 한 동맹국이 멸망했다. 휴전 직후 남한의 상황을 떠올리면 과연 우리가 아프가니스탄과 아주 다르다고만 할 수 있을까. 국제정치를 지배하는 것은 도덕 책이 아니라 피와 철과 돈이지만 우리는 그를 잊고 있다. 지금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가장 큰 복병은 경제도, 북한도, 사회정치나 지역 대립, 성별 갈등도 아닌, 심지어 출산율도 아닌 바로 이 지지리도 못난 병신외교라고 생각한다. 역사 교육을 처음부터 재고해 볼 때이다.
* * *
또 하나 안타까운 것은 일부 젊은 세대들까지도 이런 명분에 치우친 사고방식에 경도되어 있다는 점이다. 최근 이준석에 대한 논란에 대해 블로그에 달린 댓글들을 찬찬히 읽은 결과 몇몇 사람들은 이준석 사태에 대한 해답으로 젊은 남성들이 더욱 단결하여 자신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당 대표를 더 강하게 밀어줘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전 연령층에서 가장 소수인 세대가, 그리고 투표율이 가장 낮은 세대가, 심지어 세대 내에서도 남녀로 갈라진 집단이 일치단결해서 시마즈처럼 나머지 인구 장벽을 돌파하겠다는 발상은 무모함을 넘어 비장하기까지 하다.
1600년 세키가하라에서 요시히로가 전방으로 퇴각하기로 결정한 것은 서군이 패주하며 동군 병력의 상당수가 이미 전진하여 생각보다 본진의 방어가 느슨할테니 전방을 지키는 병력이 적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판단에 기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마즈 군은 거의 전멸했으며 다수가 살아남기 위해 두셋으로 구성된 자살조를 끝도 없이 투입해야 했다. 지금 젊은 남성들 역시 전방 돌파를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행동에 나서는 이유는 이것이 실현 가능한 작전이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옳고 이준석 대표가 틀린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미안하지만 세상은 그런 명분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한국의 유권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양분되어 있으며 이제부터 펼쳐질 선거는 세키가하라 전투처럼 양 당의 총력전이 될 것이다. 거기에서 실현 가능성을 계산해보지도 않은 작전은 자살작전이 아닌, 그냥 자살일 뿐이다.
*고려는 후계자 경쟁이 벌어지던 두 후보 중에서 쿠빌라이측을 찾아가 협상을 벌였고 이를 바탕으로 쿠빌라이는 자신의 정통성을 대내외에 알릴수 있었다. 이후 원나라는 고려 원종의 요구를 모두 수용해 고려에서 몽골의 군대와 다루가치를 철수하였고 고려인들이 국호와 사직을 보존하는 것을 허가했다. 게다가 자신의 막내딸을 원종의 아들과 혼인시켰는데 그의 사위 중 비 몽골인 출신은 충렬왕 단 하나였고 제국 내 그의 서열은 7위였다.
**대만과 조선은 태평양 전쟁 발발 시점 이전에 일본의 영토로 병합되었고 심지어 조선이 병합되던 당시의 일본은 서방의 동맹국이었다.
2021. 8. 13.
완장 찬 준초딩과 반장선거
2021. 8. 7.
이대남 그리고 테스토스테론의 저주
때때로 어떠한 현상을 이해하려면 표면의 존재가 아닌 부재를 살펴보아야 할 때가 있다. 세월호 사건을 추모하는 것은 인류애지만 그가 동시에 천안함 사건에 대해 입을 다문다면 그것은 정치인 것처럼. 최근 붉어진 한 양궁 선수에 대한 논란도 마찬가지다. 20대 남성들은 안산 선수가 sns에서 사용한 몇몇 단어들 때문에 분개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들이 화를 내는 진짜 이유는 지난 몇 년간 사회가, 그리고 주류 언론이 그들에게 엄격한 자가검열을 강요했는데 그것이 이중잣대였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지난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낸 한 선수는 자신의 팬들에게 "노무노무 고맙습니다"라는 포스팅을 올렸다가 공개적으로 사과를 했고 한 유명 유튜버 역시 해당 문구를 자신의 영상에 삽입했다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았다.
나를 포함하여 저들의 인터넷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윗세대들이 보기에 오조오억이나 웅앵웅이 뭐가 문제냐며 젊은 남성들을 타박하겠지만 그렇다면 노무노무는 왜 문제가 되었나, 그리고 왜 우리는 그때 침묵했던가. 이대남들이 분노하는 진짜 이유는 자신들의 말과 입이 억압당하고 검열당할 때 주류언론과 윗세대들이 소극적으로, 때때로 적극적으로 동조했다는 데에 있다. 따라서 이 현상을 이해하려면 표면의 웅앵웅을 볼 것이 아니라 그 이면의 부재를 보아야 한다. 그들의 표현의 자유에 무관심했던, 우리 여론과 관심의 부재를.
그리고 지금 이 젊은 남성들은 우리가 저질렀던 것과 동일한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그들 역시 표면의 현상에 집착하느라 수면 아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또다시 정치적 오판을 내리고 있다. 그리고 이 실수는 자신들을 더욱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 * *
공권력의 성추행을 고발하여 명성을 얻은 박원순 시장이 공권력으로 성추행을 저지르다 들통나서 자살하는 바람에 열린 보궐선거에서 오세훈 후보는 여당 후보를 57.5%대 39.2%라는 압도적인 차이로 누르며 시장직에 복귀했다. 불과 1년 전에 서울 시민들이 여당에 지배적인 의석수를 안겼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분명 이는 엄청난 변화였고 그 배경에 대해 다양한 분석이 나왔다. 그중 20대 남성들의 해석은 다분히 이색적이었는데, 오세훈 후보가 성평등 관련 질문들에 답변을 거부했는데 이런 반 페미니즘 선언이 유권자들의 전폭적 지지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런 그들의 독특한 세계관은 젊은 이준석이 제1야당의 당 대표가 되며 더욱 강화되었다. 반 페미니즘을 외치는 젊은 남성이 구체제의 인사들을 제치고 당의 얼굴이 되는 것을 보며, 집을 마련하는 것도 취직도 여의치 않았던 20대 남성들은 최초의 정치적 승리를 맛보았다. 하지만 인류사에서 가장 커다란 패배는 모두 작은 승리로부터 출발했다. 이 두 사건으로 이십 대 젊은 남성들은 오만이라는 함정에 빠졌다. 마치 그들이 너무나 사랑해 마지않는 당 대표의 페르소나가 된 것처럼. 그리고 누군가는 그들에게 경종을 울려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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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 대선 총 투표수 (연령별/성별) |
2021. 8. 4.
빨간구두
소녀는 엄숙하고 경건한 정소에도 굳이 그 빨간 구두를 신고 가지.
그 구두를 신으면 두 발이 저절로 춤을 추게 되고
영원히 춤을 멈출 수도 구두를 다시 벗을 수도 없게 돼
그런데도 소녀는 빨간 구두를 절대 포기하지 않아
결국 사형집행인이 나서서 소녀의 발목을 잘라냈지만
잘려나간 두 발은 빨간 구두를 신은 채 계속해서 춤을 췄어
억지로 갈라놔도 절대 떨어질 수 없는 게 있어.
집착은 그래서 숭고하고 아름다운 거야.
나,
이제야 내 빨간 구두를 찾았어.
사이코지만 괜찮아 中
paint by Egon Schiele
2021. 7. 24.
에드바르트 뭉크와 뱀파이어
모든 예술가에게 저마다의 뮤즈가 있다면 에드바르트 뭉크의 뮤즈는 바로 죽음일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뭉크가 5세가 되던 해에 죽었고 몇 년 뒤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워주던 큰누나마저 세상을 떠났다. 이어지는 비극을 견디지 못한 그의 여동생은 정신병에 걸렸으며 아버지는 가족이 파괴되는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광적으로 종교에 집착했다. 노르웨이의, 아니 근대 유럽의 최고의 화가 중 하나인 에드바르트 뭉크의 음울함은 죽음으로부터 탄생했다.
때때로 사랑은 트라우마를 치유하기도 하지만 뭉크의 운명은 불행히도 정반대였다. 그의 첫사랑은 자유분방한 사교계 인사로 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연애를 지향하던 보헤미안이었으며 동시에 치명적인 팜프파탈이었다. 자신을 사랑했던 남자들이 흘린 피 내음을 마치 향수처럼 온몸에 두른 그녀가 고작 스무 살짜리 풋내 나는 그림쟁이에게 만족할 리 없지 않은가. 6년여의 연애 기간 동안 뭉크는 그녀만을 바라보고 헌신했지만 그녀는 뭉크의 사랑에 오롯이 거짓으로 응답한다. 보헤미안 부인의 주위엔 늘 욕정에 불타는 남자들이 맴돌았고 그 가운데 뭉크의 순수한 사랑은 그녀에게 가벼운 키스나 갓 구운 마들렌만도 못한, 그저 작은 오락에 불과할 뿐이었다. 철저하게 농락당한 뭉크는 마침내 그녀를 떠나면서 일기에 그녀가 자신의 생의 향기를 영영 앗아갔다고 기록했으니 그에게 실연이란 마치 죽음이나 다름없었나 보다. 마치 어린 시절 어머니와 누이를 떠나보내던 것처럼.
그의 두 번째 사랑도 깊은 상처를 남긴다. 그는 다그니 유엘과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지만 자유연애주의자였던 그녀는 베를린에서 만난 뭉크의 동료이자 건축가인 스타니스와프 프시비셰프스키를 선택한다. 그야말로 잘못된 만남의 조연이 된 뭉크는 연인이 마음을 고쳐먹고 돌아오기를 기다렸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이 러브 스토리의 비극적 조연에 불과했다. 유엘과 프시비세프스키는 얼마 뒤 결혼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그녀를 놓지 못했던 뭉크의 영혼과 작품세계는 더욱 침전한다. 심연의 어둠으로. 첫사랑의 비극이 방종이었고 두 번째 사랑이 배신이었다면 세 번째 사랑의 비극은 집착이었다. 새 연인인 튤라 라르손은 그에게 깊이 집착하고 결혼을 강요했으며 대답을 회피하는 뭉크에게 자살하겠다며 협박한다. 한 손에 권총을 쥐고 죽겠노라며 울부짖는 연인을 말리다 실수로 총이 격발되고 말았다. 그녀의 가냘픈 손을 떠난 탄환은 화가인 뭉크의 왼손을 관통했고, 화약 내음, 폭발, 그리고 비명소리에 뒤이어 그의 손가락 하나가 허공으로 날아갔다.
이후 그는 평생토록 독신으로 살았다. 그가 사랑한 모든 여자들은 일찍 죽거나 그를 배신하거나 상처 입혔으며 그에게 애정과 사랑이란 이윽고 밀어닥칠 처절한 비극의 서막에 불과했다.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뭉크는 술에 더욱 의존했고 폭음을 거듭했으며 불안 증세가 더욱 악화되어 환각에 시달리게 된다. 그의 대표작 절규는 핏빛으로 물든 하늘이 질러낸, 그 찢어질듯한 비명소리에 공황에 빠져 귀를 틀어막은 자신의 모습을 그려낸 것인데 아마도 이는 비유나 은유가 아닌 뭉크가 실제로 겪은 환각이었을 것이다.
그런 뭉크가 처음으로 겪은 실연의 고통을 캔버스에 담아낸 것이 바로 맨 처음 소개한 이 작품이다. 한 여자가 엎어져있는 남자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다. 남자가 무슨 악몽이라도 꾼 것일까, 여자는 남자를 다독이고 있고 또 그들 위로 선명하게 붉은 머리카락들이 흐르고 있다. 힘없이 늘어진 그들의 머리와는 달리 그녀의 오른팔은, 그리고 그의 왼팔은 서로를 간절히 붙들고 있다. 사방에서 밀려오는 음울한 어둠을 밀쳐낼 힘도 의지도 완전히 잃은 두 연인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서로에게 절절하게 매달리는 것뿐인 양. 이 그림의 제목이 무엇일까? 사랑하는 연인들? 절망 속에서의 사랑?
작가는 이 그림에 뱀파이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러고 보니 남자의 뺨이 다소 창백해 보이지 않은가.
* * *
나를 처음으로 미술로 이끈 것이 바로 이 그림이다. 세상에는 서로가 서로를 부수는 사이가 있다. 하지만 대개 당사자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과거 스무 살을 갓 넘긴 나 역시 그런 파괴적인 관계의 한 가운데에서 허우적대고 있었고 철부지였던 나는 그 수렁에서 어떻게 헤어 나올지 알지 못했다. 아니, 사실 빠져나올 의지조차 없었다. 그녀가 나에게 뱀파이어였던 것처럼 나 역시 그녀의 목에 이를 박아넣고 있었으니까. 그러다 우연히 이 그림을 마주쳤고, 그 앞에 우두커니 서서 제목과 이미지를 번갈아 보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마치 지도도 나침반도 없이 황무지에서 헤매다 앞서 이곳을 지난 누군가의 흔적을 찾아낸 앳된 이방인처럼. 당시 길을 잃은 이가 나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던가. 그리고 그 작은 흔적들을 따라 다시금 걷고 또 넘어지고 또다시 절뚝이며 헤매고, 뭐 그렇게 어찌어찌하다 오늘날 여기까지 왔노라. 그러니 내일도 모레도 또 다른 이들의 자취를 따라 어찌어찌 살아가겠지. 당신들도 나도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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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s(1897) by Edvard Munch |
2021. 7. 22.
다른 신흥국은 금리를 올리고 있을까
한국의 통화정책을 미국과 비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냐는 질문이 있었는데 마침 한 보고서에서 여러 신흥국 중앙은행들의 통화정책에 대한 요약이 있어 간단하게 표로 정리했다. 우리는 선진국이 아닌 EM들을 하나로 묶지만 각각은 매우 다르다. 이들을 크게 둘로 나누면 저인플레이션 국가들과 고질적으로 높은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는 나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미 인상에 나선 신흥국들은 주로 후자에 속하는 그룹으로 대부분 1차 산업의 비중이 높고 수출품의 상당수가 원자재나 농산물이다. 그리고 위의 표에서 보다시피 한국은 여느 아시아 국가들처럼 낮은 인플레이션 그룹에 속한다. 그리고 그 나라들 중 단기간 내에 금리인상을 예고한 국가는 한국뿐이며 동시에 인상을 예고한 나라 중 CPI가 가장 낮은 나라 역시 한국이다. 한국은행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매파적인 중앙은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