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로부터 중앙집권시스템이 갖춰졌고, 또 유교식 국가관에 익숙한 우리에겐 다소 어색한 개념이지만 강력한 왕권을 갖추지 못했던 봉건 유럽에서는 돈이 없으면 왕도 파산하고 자산을 저당잡히곤 했다. 시대에 따라 다소간의 변화는 있었지만 왕과 신하들의 관계도 일종의 계약이라고 볼 수 있었고 전쟁을 일으키려고 해도 영주였던 신하들이 병력을 보내주지 않으면 제대로 된 군대도 소집하지 못할 정도로 왕의 위상은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무지왕 존(John Lackland)의 수모가 그 대표적 예인데,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해 영지를 잃어 재정이 악화되는데도 그는 계속해서 새로운 전쟁을 일으키다 파산위험에 처하자 귀족들에게 세금을 더 징수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귀족들이 반발해서 군사반란을 일으켜 런던을 포위하자 존 왕이 항복하며 자신의 권한을 제한하는 문서에 서명하게 되는데, 이것이 영국이 민주주의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하는 마그나카르타이다.** 이후 삼권분립이 정립된 근대국가에서도 세금을 걷는 권한은 국민들의 대표인 국회가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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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아는 역사이야기를 갑자기 꺼낸 이유는 우리가 조만간 마주할 경제현실이 저 무지왕 존이 겪었던 것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월가는 우한폐렴이 창궐한 시점부터 지속적으로 그 영향을 과소평가하고 있지만 이 바이러스가 경제는 물론이고 사회적으로도 어떠한 타격을 줄 지 아무도 그 끝을 모른다. 투자은행들은 계속해서 성장전망을 수정하고 있지만 그들의 전망이 하향되는 속도보다 사태가 악화되는 속도가 더 빠르다. 이 바이러스가 얼마나 더 퍼질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경제를 전망하나. 이코노미스트들도 월급을 받으니 밥값하려고 억지로 고통스럽게 숫자를 짜내는거지 솔직히 죄다 무의미한 가정에 근거한 엉터리 전망이라 주말 내내 보고서를 읽다 그냥 때려치웠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 내가 더욱 귀기울여 듣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시장의 가격이고 다른 하나는 가장 똑똑한 경제학자들의 글이다. 전자는 저번 글(링크)에서 언급한 대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고, 후자의 사례 중 하나로 폴 크루그먼의 기고를 종종 찾아보곤 한다. 최근의 글 두편(1 / 2)에서 그는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현재의 상황을 매우 비관적으로 보고 있고 통화정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재정정책, 그것도 매우 강력한 재정지출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 역시 통화정책으로는 시장의 공포를 잠재울 수 없으며 과감한 재정정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링크)
현재 미국의 10년 채권금리는 0.75%로 잃어버린 20년을 마주한 당시 일본 수준으로 하락했는데, 전세계에서 가장 탄탄했던 미국의 성장전망이 저렇다면 다른 나라들은 굳이 분석해 볼 필요조차 없다. 그리고 시장은 중앙은행이 2008년 리만사태때 만큼이나 강력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믿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시장의 패닉이 멎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물론 통화정책의 한계는 0%가 아니라 상상력과 중앙은행의 의지 뿐이니 연준이 더욱 놀라운 조치를 취할 수도 있고 그들은 이에 대한 연구도 해왔지만 비전통적인 방법에는 늘 정치적 반대와 마찰이 따른다. 연준이 첫 QE를 실시할 때 얼마나 많은 멍청이들이 하이퍼인플레이션 운운하며 반대했는가. 따라서 신속하게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재정정책밖에 없다.
하지만 마그나카르타에 서명한 존 왕이 겪었던 고통을 현재의 행정부도 겪고 있다. 세수감소가 예견되는 상황에서 재무부가 지출을 늘리려면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문제는 공화당은 과거 오바마 행정부의 지출한도를 증액해주지 않아 정부가 셧다운 되도록 방임한 적이 있으며 다분히 그에 대한 보복적 성격으로 민주당은 트럼프 행정부를 3년간 두번이나 셧다운시켰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 내의 정치성향도 과거보다 훨씬 더 양극화되었고 또 대선을 앞둔 터라 정치적 마찰이 더 심할텐데 과연 민주당이 장악한 하원이 쉽게 재정지출 확대를 승인할 수 있을까. 참고로 2008년 리만이 파산한 직후 부시행정부가 제시한 구제금융법안을 하원이 부결시키면서 S&P가 사상 최대의 일중 폭락을 기록한 적이 있다. (공교롭게도 그때 반대표를 던진 공화당 의원 중 하나가 현재의 부통령인 마이크 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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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보다 훨씬 더 양극화 된 미국 |
미국인들은 자국 정치인들을 멍청하고 이기적이며 어리석다고 하지만 문재인이 당선되고 강경화가 외교부장관을 맡는 한국인의 눈에는 적어도 미국의 정치인들은 정쟁으로 나라를 파산시킬 얼간이들이 아니다. 그리고 트럼프는 영민하고 추진력을 갖춘 대통령으로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정책을 관철시킬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전에 언급한 대로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며 또 낙관적 결과가 보장된 것도 아니다. 아마도 시장은 좀 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낼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전에 말했듯이 좋은 투자자가 되려면 가장 비관적인 순간에 낙관적일 수 있어야 한다. 트럼프가 자리를 지키는 한 미국은 또다시 공황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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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원이 구제금융법안을 부결시킨 날의 S&P500 |
*정확히는 Ministry Of Economy and Finance
** 그러나 이후 왕의 요청으로 교황이 무효를 선언하고 절대왕정 시대에는 사실상 사문화되는 등, 그 의의는 후대에 과장되었다고 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