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4. 25.

일본은행은 어떻게 잃어버린 20년을 만들었는가?

많은 사람들은 일본이 고통스러운 침체기를 겪은 이유가 '과도한 버블을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인과관계를 잘못 분석한 것이며, 이번 글에서는 왜 일본이 그러한 침체를 겪었는지 분석해 보기로 한다.

일본이 과거 버블을 겪은건 사실이지만 이는 다른 나라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평범한 버블이었다. 주택시장의 상승 측면에서는, 2000년대의 영국이나 스페인의 주택버블이 훨씬 더 심각했으며 주식시장을 보면 다른 주요국의 주가가 더 급박하게 뛴 적도 많다. 중국 주식가격은 90년대 이래 일본보다 훨씬 더 빠르고 가파르게 상승했으며, PER을 놓고 버블을 측청한다면 450에 이르렀던 2000년대 나스닥이 훨씬 심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모든 나라들은 잃어버린 20년을 겪지 않았다. 따라서 일본이 유독 심한 버블을 겪은 것이 아니라면, 전세계서 유일하게 일본만이 겪은 '잃어버린 20년'의 원인이 버블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괴상하리만큼 잘못된 BOJ의 잘못된 금리정책에 있다.

White  : Nikkei255 Index
Orange: BOJ policy rate


 위 차트는 85년부터 92년까지 일본 주식시장(흰색)과 일본은행 정책금리(주황색)을 나타낸 것이다.  이전 80-86년의 일본 경제를 보면, CPI가 마이너스 수준으로 하락하며 인플레이션 압력이 사라지자, BOJ는 금리를 인하하여 완화적 통화정책을 유지한다. 그러나 80년대 후반으로 들어서며 인플레이션 압력이 다시 고개를 들자, BOJ는 아주 뒤늦게 89년에 이르러 금리를 올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문제는 금리인상이 "매우 부적절한 시기에", 게다가 "매우 부적절한 수준으로" 이루어지면서 발생하기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인플레이션 압력은 버블의 끝자락에서 가장 크기 마련이다. 그러나 버블의 마지막 시기엔 금리를 올릴 것이 아니라, 경착륙을 위해 완화적인 입장을 취해야 한다.  헌데 BOJ는 버블의 마지막 단계에서 금리를 공격적으로 올리는 우를 범한다. 일본 중앙은행은 89년 3월에 금리를 올리기 시작해 니케이가 고꾸라지기 시작하는 12월까지 금리를 150bps 올리며 돈줄을 죄었다. 끝없이 상승할 줄 알았던 주식시장과 자산시장이 하락하기 시작하자, 일본인들은 건전한 조정이 왔다며 환호했다. 그리고 이때 '일본은행의 왕자'로 불리던 미에노 야스시가 21대 BOJ총재로 취임하게 된다.

당시 일본의 실질금리(명목금리-인플레이션)만 놓고 보면 석유파동시기 이래로 가장 높은 수준으로 일본의 버블을 잡는데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42년차 정통 일은맨이었던 미에노는 '버블은 악'이라는 신념아래 자산시장에 치명타를 가하기로 결정한다. 주식시장이 반토막 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는 취임 후 9개월동안 금리를 200bps를 추가 인상한다. 시장은 비명을 지르고 경기는 급격히 위축된다. 이전까지 자산 인플레에 편승하지 못한 일본의 서민들은 미에노를 "의적"이라고 부르며 칭송하며, 무리하게 자산에 투자한 회사들과 금융기업들이 휘청거리는것을 "정의"라고 생각했다. 자산시장의 급격한 붕괴가 실물경제로 전이되기 전 까지는.

금융기업들의 자산가치가 빠르게 하락하자, 그들은 대출을 줄이고 채권을 회수하기 시작한다. 급격한 채권 회수로 신규대출이 어려워지자 기업들은 투자를 멈추고 연봉을 삭감한다. 그렇게 경제는 불황으로 접어든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으로 다운사이징에 들어간 경제들이 흔하게 겪는 단계지만, 일본의 경우는 그 강도와 폭이 너무 달랐다. 지나치게 빠르게 버블을 꺼트리는 바람에, 금융사들이 붕괴하기 시작했고 패닉과 공포는 더욱 확산되었다. 은행의 여신담당직원들은 채무기업의 건전성을 따질 것 없이 무조건 채권을 회수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른 흑자도산이 줄을 이었다. 자산시장이 건전한 조정 이상의 폭락을 겪는데도 불구하고 일본은행이 태도를 바꾸기는 커녕 되려 금리를 급격하게 인상하자 경제 회복에 대한 기대감은 자취를 감췄다. 비만에 이르렀던 일본경제에 대한 BOJ의 조치는 거의 처벌에 가까웠다. 식이조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굶기는게 그들의 대책이었고, 그 결과로 이제 경제는 기아에 시달리게 된다. 트라우마에 가까운 충격이 일본인들의 기억 속에 남게 되고 그 결과 "현금이 왕"이라는 디플레적인 마인드가 확산된다. 하지만 일본인들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Orange: Japan M2 growth YoY
White  : US M2 growth YoY
Green  : UK M4 growth YoY


BOJ는 이후 금리를 인하하지만, 금리를 급격히 올렸던 자신의 결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계속해서 자산버블과 인플레이션 압력을 언급한다. 그 결과 일본 금융사들은 다시한번 89-90년의 통화적 충격이 반복될 수 있다는 생각에 계속해서 신용을 줄인다. 위에서 보이듯이, 89년 이전 일본의 통화량 증가율은 영국이나 미국같은 다른 금융 선진국과 큰 차이가 없었는데(영국은 M2데이터가 없어 M4를 인용해 조금 높게 보임) 미에노 총재의 취임을 기점으로 통화량 증가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 매우 낮게 유지된다. 즉 '디레버리징'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시기들이 끝나고 나자  '일본 경제는 곧 일어날 것이다'라고 믿으며 투자와 확장을 재개한 기업들은 다 망하했고  '역시 현금이 왕'이라고 믿는 사람들과 기업들만이 살아남았다. 이젠 기업들과 국민들의 체질과 마인드가 디플레에 맞춰져버린 것이다.

결과적으로 괴기스러울정도로 급격한 일본은행의 기준금리 인상이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초래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BOJ가 이와 같은 자기파괴적 결정을 내린 데에는 정치적 동기가 작용한다. 일본은행은 독립성이 약해 흔히 '대장성 일본은행국'이라는 조롱섞인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골수 일본은행 출신이었던 미에노가 총재로 등극하자, 일본은행의 독립성과 힘을 과시하기 위해 과도한 긴축정책을 실시해 나라를 디플레이션으로 몰아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일본이라는 세계 2위의 경제가 침몰한 배경에는 관료조직의 밥그릇 싸움이 숨어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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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려스럽게도 현재의 한국은행이 처한 현실이 이와 매우 동일하다. 한국은행은 종종 "재경부 남대문 출장소"로 불리며 정부의 결정에 크게 휘둘린다. 그리고 현재 한국은행의 수장인 이주열 총재는 정통 한은 출신으로 미에노 총재와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지난 2년동안 디플레이션 현상들이 경제 데이터 상으로 나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주열 총재가 시대착오적인 성향을 지우지 않는데에 있다. 그는 취임 첫날부터 금리를 올릴 것으로 공언하며, 금리가 2.5%일 때부터 '이정도면 경제 부양하는데 충분하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디플레이션 위험이 없다고 호언장담했지만, 그의 주장과는 다르게 디플레이션 압력은 계속해서 커지고 있고, 다른 나라 중앙은행들은 이미 디플레와 싸우기 시작했다. 결국 정부와 국회가 한국은행의 팔을 꺾어 금리를 세차례 인하하긴 했지만, 마지막 금통위 기자회견에서도 총재는 호키시한 스탠스를 유지했다. 어쩌면 총재는 속으로 조직 독립을 위해 최선을 다해 싸우는 잔다르크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시장은 그를 시대착오적 돈키호테라며 조롱했다. 그리고 나는 미에노 전 일본은행 총재를 떠올렸다.

댓글 6개:

  1. 두번째 차트 이후 줄바꿈이 되어있지 않아서 문장이 차트 우측에 짜부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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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는 정상적으로 보이는데 어느 브라우저를 쓰시나요? 그걸로 수정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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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주인장님이 쓰신 글과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벌어질 상황을 비교하여 생각해보면, 코로나 이후 한국은행은 인플레이션이 조짐이 보일때 뒤늦게 금리를 올리기 시작할거고, 버블의 끝자락에서 과도하게 금리를 인상하는 우를 범하여 이로 인해 우리나라도 잃어버린 20년을 겪을 것 같다는 상상이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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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주가지수가 -50%인 상황에서 중앙은행이 계속 금리를 인상하는 것은 정책실수를 넘어선 미친 짓입니다. 그 미친짓을 또 벌인다면 우리도 일본처럼 될 수 있겠지만 다행히 일본이 훌륭한 반면교사가 되어준 덕분에 다른 중앙은행들이 그런 우를 범할 가능성은 극히 낮습니다.

      정책실기를 해도 다른 방향으로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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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그렇군요.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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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선생님. 지금 이 글과 비교해서 중국을 바라보면 중국은 통화정책을 과감하게 하지 못해서 잃어버린 20년에 들어가는게 아닌가라고 생각이 듭니다만, 선생님께서는 요즘 중국의 통화정책이나 경제를 어찌바라보시는지 상당히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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