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5. 2.
How politics can destroy you
하지만 그랬던 그가 변했다. 트럼프가 대선에서 이긴 뒤로. 그의 블로그에는 경제에 관련된 글보다도 정치에 관련된 글이 몇배 더 많이 올라오며 그는 자신의 유려하면서도 독한 비평을 경제분석이 아닌 공화당에 더 많이 할애하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평소에 주장하는 경제정책을(재정지출 확대, 그리고 연준의 완화 스탠스 연장) 트럼프가 정확하게 시행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크루그먼은 트럼프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그의 본업이 민주당원이고 부업이 경제학자가 아닌가 싶기까지 하다.
심지어 최근의 포스팅(링크)에서 그는 자신을 공격하던 사람들의 비유를 그대로 들기까지 했다. (You don’t have to be a gold bug or even an inflation hawk to see these demands as deeply irresponsible. Indeed, they sound a lot like the “macroeconomic populism” that has repeatedly led to economic disaster in Latin America, with Venezuela the latest example.) QE를 펼치던 연준과 그를 옹호하던 크루그먼의 비난하던 니얼 퍼거슨은 이러한 통화적 이징이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가져올 것이고 남미의 많은 국가가 그와같은 전철을 밟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여기에 대하 크루그먼은 니얼 퍼거슨이 경제학자가 아니면서 경제정책에 대해 논한다고 조롱했고, 미국 경제가 명확하게 회복기에 있고 실업률이 충분히 낮아졌을때도 인플레이션이 없다면 굳이 통화긴축에 나설 이유가 있냐고 주장했다. 그랬던 그가 이번엔 진영을 바꿔 니얼 퍼거슨과 비슷한 주장을 내놓으며 남미국가인 베네수엘라의 예시를 들며 트럼프의 연준에 대한 압력을 비난했다!
물론 그때와는 경제적 상황이 매우 다르고 크루그먼의 주장처럼 연준의 독립성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정치평론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 경제평론의 날카로움이 무뎌진 것 또한 사실이다. 그 처럼 역사에 남을 석학들도 정치에 휘둘리면 총기를 잃는데, 나 같은 일반인들은 오죽할까.
2019. 5. 1.
오사마와 카투사, 그리고 2000년대 초반.
아직 꽃샘추위로 벌벌 떨던 그 200x년 2월 언제였나, 내 대학생 시절의 첫 공식 행사는 신입생 MT였다. 논스톱 시리즈를 보며 가졌던 캠퍼스 생활에 대한 환상은 첫날부터 산산히 부서졌다. 국가보안법으로 수배중인 한 학번 위 선배가 단상위로 나아가 "민중" "연대" "미제" "노동" "타도"와 같이 나팔바지마냥 촌스러우면서도 낭만따위는 쏙 빼낸 그 단어들로 숙연한 분위기를 만들던 바로 그 순간에. 이윽고 민중가요 강사님이 오셔서 바위처럼, 솔아솔아와 같은 노래와 함께, 요새 유치원에서도 안 가르칠 만한 유아적인 율동을 가르쳤다. 상상이 잘 안되면 우리나라 교회 청년부 예베를 상상해 보라.
이후 반 배정을 받아 처음보는 동기들, 그리고 선배들과 함께 방안에 동그랗게 모여 앉았다. 어색하게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던지고, 받으며 시간을 때우고 있을 때 한 진행요원이 와서 각 반은 개성있는 반이름과 재미있는 포즈를 정하라고 했다. 그때 말이 가장 많던 운동권 선배 하나가, "우리는 재미있게 팀 이름을 빈 라덴이라고 짓자!"라고 했다. 선배라고 해봤자 나와 서너살 차이 밖에 안 났지만 그 형은 벌써부터 탈모가 오기 시작한 탓에 훨씬 늙어보였고 우리는 아무런 반대를 못했다. 그런데 다른 형 하나가 빈라덴은 좀 그러니 딴 이름으로 하자, 욘사마와 이름이 비슷한 "오사마"는 어떠냐고 했다. 빈라덴이나 오사마나 뭐가 그리 다른지 모르겠지만 반미 운동권 학생들이 보기에도 테러리스트 이름을 재밌다고 반명으로 쓰기엔 부담스러웠는지 우리 반의 이름은 오사마가 됐다. 참고로 당시엔 미군 장갑차 하나가 여중생 둘을 차로 치고 간 사건 때문에 반미정서가 강했다.
이제 이름을 정했으니 포즈를 정해야하는데, 아까 그 선배가 주장하길, 우리 반 이름이 오사마니 그에 맞는 동작으로 정하자며 합장을 하고 가부좌를 틀었다. 신입생들이 뭐 발언권이 있나. 선배가 하자는 대로 해야지. 그래서 우리는 인도식 가부좌를 틀고, 동남아식 합장을 하면서 사우디 사람인 오사마의 이름을 외치며 반 사진을 찍었다. 우리는 그 날 천명이 넘는 엠티 참가자들 사이에서 단번에 가장 유명한 조가 되었다. 단과대의 전 과가 참여하는 엠티였으니 아마 이를 기억하는게 나 하나는 아니리라.
밤이 되자 반 사람들끼리 모여 앉아 술자리와 담화가 시작됐다. 너는 고향이 어디니, 대학에 왜 왔니, 꿈이 뭐니 등. 동기중 아주 현실적이고 똑똑한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가 난 돈벌고 싶어서 대학왔다고 하자, 운동권 선배들이 우우 모여들어 핀잔을 줬다. 한 선배 하나는 "너가 국립 서울대학교에 왔으면 민족을 위해 기여할 생각을 해야지 혼자 잘먹고 잘살겠다는건 이기적이고 창피한 짓"이라고, 정확하지 않지만 뭐 이런 뜻으로 그 친구에게 면박을 줬다. 그로부터 몇년 뒤 그 친구가 술자리에서 말하길, 자신은 그날 큰 상처를 받아서 이후로 반 행사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나는 친구에게 너한테 가장 심하게 면박 준 그형은 카투사 갔다가 후에 친미로 전향해서 지금 미국계 회사에 입사해서 본사 가고싶다고 노래를 부르는 중이라고 알려줬다. 우리는 그 "오사마" 포즈로 찍은 단체사진을 회사에 보내면 어떻게 될까와 같은 농담을 하며 키득키득 웃었다.
페미니즘. 요새 시끄러운 페미니즘 이슈가 그때도 있었다. 여학우가 있는 데서 스타나 축구 애기를 하는 것은 성폭력에 해당된다며 두 학번 위 여선배가 알려줬다. 그때 한 동기가 손을 들어 "그럼 여학우들이 남자 있는 데서 연예인이나 화장품 얘기 하는 건요?"라고 묻자 그 선배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것도 당연히 성폭력이지"라고 했다. 그때의 (자칭) 페미니스트들은 현재의 페미니스트들과 좀 달랐던 것 같다. 자의적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교정하려는 태도는 똑같지만 적어도 타인과 자신에게 같은 잣대를 들이대곤 했으니까. 뭐 우리 반만 그랬을 수도 있고.
반미는 그 시절을 운동권과 학생회를 지배하는 정서였다. 미선이와 효순이라는 두 중학생이 미군 장갑차를 미쳐 피하지 못하고 안타까운 사고를 당한 일이 있었는데, 거기에 솔트레이크 동계 올림픽에서 미국의 안톤 오노 선수가 김동성 선수를 실격시키고 메달을 딴 일이 겹쳐, 대학가에선 반미를 외치는 것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았고, 운동권 선배와 동기들을 그때를 틈타 자신들의 사상을 신입생들에게 퍼뜨렸다. 하지만 그 반미는 패션에 그쳤다. 군대에 가고 취직할때가 되자 그들은 입었던 옷을 벗고 갈아입듯 태도를 바꿨다. 신자유주의의 앞잡이라고 욕하던 고학번 선배(그 선배는 그걸 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가 연봉 잘주는 금융회사에 들어가자 그들은 쪼르르 달려가서 밥 얻어먹기에 바빳고 그 무리 중 가진자들을 욕하던 한 선배는 과외한 돈으로 명품 시계와 옷을 입고다녔다. 아, 그 선배가 서울대생, 민족 운운했던 그 선배다. 그 형은 카투사로 입대하며 "적을 알려면 적의 본진에 가야한다"는 명언을 남겼다.
그로부터 십수년이 지난 지금, 연말 모임에서 만나 각자 어떻게 사는지 이야기를 풀어내다 보니 참 묘했다. 반미를 외치던 선배 하나는 신자유주의자(=부자)의 딸 딸과 결혼해서 강남에 아파트 두고 외제차를 끌고 다나고, 미국인 수천명을 죽인 테러리스트의 이름을 웃으며 외치던 친구는 그 어묵 일베충은 싸이코패스라며 화를 냈다. 미국과 기득권을 가장 크게 욕하던 선배/친구들이 가장 그 기득권에 가깝게 살고 있거나, 혹은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어쩌면 욕심이 큰 사람일 수록 시기심도 강하고, 그 시기가 가진자들에 대한 분노가 되어 운동권으로 이끄는 것 같기도 하다. 얼마 전 임종석이 전선을 시찰하며 라이방 선그라스를 쓴 사진이 신문에 실렸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미 제국주의의 선봉 맥아더 장군이나 독재자 박정희의 이미지였는데, 그게 우연은 결코 아닐 것이다.
2019. 4. 21.
사바하-선과 악의 경계 그리고 호와 불호의 경계.
2019. 3. 25.
조선인들의 후예는 어떻게 기억을 왜곡시키는가
중국몽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운동권
임종석은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전대협) 3기 의장출신으로 당시 임수경을 평양에서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전대협 대표로 보낸 일로 국가보안법에 의해 구속된 전력이 있는, 골수 운동권의 핵심멤버이다. 그런 인사가 청와대 비서실장에 올랐다는 사실 하나만 보아도 현재 정부의 철학이 어디에 기반하고 있는지는 의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비서실장이 어떤 자리인지 와닿지 않는다면 참여정부 시절의 비서실장이 문재인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된다.
그리고 1987년 민주화 운동권 세대가 이끄는 현 정부는 명확하게 친중노선에 올라탔다. 이는 문 대통령이 2017년 베이징대에서 "중국은 단지 중국이 아니라 주변국들과 어울려 있을 때 그 존재가 빛나는 국가이다. 높은 산봉우리가 주변의 많은 산봉우리와 어울리면서 더 높아지는 것과 같다, 중국몽이 중국만의 꿈이 아니라 아시아 모두, 나아가서는 전 인류와 함께 꾸는 꿈이 되길 바란다."라고 연설하며 공식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정치공학적으로만 본다면 이는 결코 수지타산이 맞는 일이 아니다. 미세먼지와 중국의 세련되지 못한 사드 보복으로 국내 여론이 크게 반중으로 돌아선 와중에 과도하게 친중노선을 타는 것은 국내정치에 부담을 줄 것으로 예상됐고, 또 실제로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부는 대통령 수반의 중국 혼밥논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친중노선을 고집했다. (외교적 측면을 보아도 마찬가지지만 주제에 벗어나는 일이라 생략)
이를 통해 현 정부의 친중 행보는 실리적인 이유보다 사상적, 철학적인 동기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현 정부가 그 어느때보다도 이데올로기에 의한 정책을 고집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와 같은 추정이 타당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운동권의 철학엔 중국이 자리잡았나?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시계를 1980년대로 되돌릴 필요가 있다. 우리의 상식과는 다르게 전후 북한의 경제성장률은 남한을 크게 앞질러 1960년대에는 북한의 공업생산량이 남한의 약 2.5배를 넘어선 적어도 있었다. 남한의 경제성장률이 북한을 앞지른 것은 1973년인데, 이 GDP는 (쉽게 설명하자면) 누적 자산이 아닌 매해 벌어들이는 소득의 개념임을 기억하자. 1953년 종전 이후 21년간 뒤져있던 소득이 앞서기 시작했다 해도 누적자산은 아직 한참 뒤진 것 처럼, 70년대 후반~1980년대 초에는 아직 남한이 북한보다 꼭 잘산다고 보기 어려웠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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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남한의 gdp비교 |
하지만 문제는 이를 남한 주민들이 몰랐다는 데에 있었다. 소수를 제외하면 현재의 북한 주민들이 남한의 생활상에 대한 정보를 알지 못하는 것 처럼 당시의 남한사람들 역시 북한의 실상에 대해 알지 못한채 그저 헐벗고 굶주린 거지들의 나라로 알고 있었다. 그랬던 북한이 사실 남한과 동등하게, 어쩌면 더 잘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을때 사람들은 얼마나 큰 배신감을 느꼈을까?
이와같은 정보는 주로 대학가 운동권을 통해서 확산되었다. 물론 해당 자료들은 북한 당국에 의해 의도적으로 유포되었을테니 과장된 측면도 있었겠지만 남한정부가 북한실상을 왜곡하고 정보를 통제했던 것도 사실이기에 당시 이를 접한 대학생들이 배신감을 느끼며 돌아선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시대가 바뀐 지금 탈북민들이 남한의 TV프로에 나와 "속았다"라며 증언하는 것을 보면 당시 그들이 느꼈을 정서를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후 시대가 뒤집혔다. 남한은 빠르게 발전해서 부국이 된데 비해 공산권의 몰락과 함께 북한은 경제가 붕괴해 진짜 거지나라가 됐다. 운동권들은 정부가 북한의 실상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열심히 외쳤는데, 이런 젠장, 정부의 거짓말이 사실이 되어버렸다. 1990년대 들어 수많은 운동권 핵심인사들이 전향한데에는 이와같은 시대적 배경이 있는 것이다. 그중에는 자한당의 김문수나 바른미래당의 하태경과 같은 현직 정치인도 있었고 그 유명한 "강철서신"을 작성한 김영환도 있었다. (이는 82년생 김지영의 작가가 페미에서 전향한 수준의 사건임)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된 고 박종철을 고문한 이유가 운동권 선배 박종운의 행적을 찾기 위해서였는데 심지어 그도 전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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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후보로 나선 박종운. 하지만 한나라당 지분의 절반 이상을 민주화운동에 몸바친 김영삼과 상도동계가 가졌다는 것을 잊지말자) |
북한은 물론이고 소련까지 붕괴하자 운동권의 이념도 함께 무너졌고 이처럼 대대적인 전향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향하지 않고 버틴 이들이 바로 오늘의 운동권 세력이다. 이들은 눈앞에서 자기 신념의 증거들이 무너지는데도 전향 대신 눈을 감아버리기를 택한, 가장 완고한 사람들임을 기억하자.
그런데 이 쇠심줄같은 고집을 가진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나타난다. 바로 중국. 체제경쟁에서 실패하고 무너진 북한(과 소련)을 대신하여 떠오른 공산주의 국가 중국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G2로 성장한다. 마치 하나님의 아들인 줄 알고 따랐더니 죽어버려서 망연자실한 신도들 앞에 그가 부활해 나타난 것처럼 운동권들은 중국이라는 새로운 메시아를 만난다. 그들은 자신이 젊은날에 선택한 이념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고집을 30년간 버리지 않았고, 그 오랜 믿음이 드디어 현실에서 증명된 것이다.
심리학적으로 사람은 어떤 보상을 얻는데 들인 시간과 노력이 클 수록 그 보상을 과대평가한다. 30년의 시간과 빨갱이라는 딱지, 그리고 시대착오적이라는 대중의 조롱을 견딘 운동권에게는 중국의 존재를 일반 대중보다, 심지어 평균적인 1987년세대보다도 더 크게 받아들일수 밖에 없다. 게다가 반미노선을 택한 이상 국제정치에서 기댈 세력이 중국말고는 없지 않은가. 비합리적으로 반미라는 전제조건을 단 그들에겐 기쁘게도 중국이 합리적인 선택일 수 밖에 없다.
샤를 드골이 그랬나, 모든 정치인들은 자신의 컴플렉스를 정의로 승화시킨다고. 운동권들의 중국에 대한 애착은 그런 컴플렉스의 연장선에 있다고 봐야 한다. 그들의 컴플렉스를 이해하지 못하고, 대신 합리적인 목적이 있다고 보면 극우들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그러니 그들의 "의도"를 확대해석해서 간첩이네, 빨갱이네 하는 것은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대학시절의 추억과 고난에 대한 보상심리로, 또 30년만에 대학동기들을 만나 "거봐 내말이 맞았잖아"라고 할수 있게 해줘서 마냥 중국이 좋은 것이지, 남한을 공산화하겠다는 모종의 음모를 가지고 합리적으로 움직인다고 보기 어렵다.(어쩌면 그들을 가장 합리적 존재로 바라보는 것은 박사모들 아닐까?)
하지만 이유와 의도가 어찌되었든 답은 정해져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외교를 맡은 그들의 중국몽은 30년째 깨지 않는 꿈의 일부고 또 그들은 앞으로도 그 꿈에서 깨어날 생각이 없는 가장 고집스런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 어떤 일이 있어도 그들의 외교 노선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다. 말은 거칠게 하면서도 필요할 때 친미와 신자유주의 노선을 택했던 참여정부와 문재인 정부가 비슷할 것이라고 보아서는 안된다.
그들의 고집은 세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 보다도 더.
4.19혁명 세력은 어떻게 박사모가 되었나?
요새 5.18 관련 논쟁이 큰 이슈다. 거기에 따른 비상식적인 논쟁과 그 비상식때문에 묻힌 상식적인 문제제기와 같은 시끄러운 이슈들을 잠시 뒤로 하고, 모두가 간과하고 있는 모순적인 사실 하나를 끄집어보려고 한다.
87년 민주화 항쟁의 바로 앞에 등장하는 4.19 혁명, 그 1960년에 일어난 원조 민주화운동의 주역은 1925-1945년대생들로 바로 지금의 틀딱이라고 조롱받는 박사모 세대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초의 민주화 혁명을 이끌어 낸 세대가, 또 내전의 상흔이 다 낫지도 않은 시점에서 부정선거에 저항해 독재자를 물리친 그 분들이 어째서 또다른 독재자를 평생토록 옹호하고 팬클럽이 되어 그 딸 까지도 찬양하게 된 것일까? 참 아이러니하지 않나. 하지만 그 아이러니에 우리나라의 미래가 달려있다.
먼저 4.19혁명의 주체들과 현재의 박사모는 세대만 같지 같은 구성원들이 아니라고 생각할까봐 지역적 분석부터 시작하겠다. 4.19의 첫 도화선은 분명히 대구에서 시작되었다. 관제시위에 학생들을 동원하는 지침에 반발하여 대구의 고등학교 학생들은 2월 27일부터 시위를 벌였다. 구체적으로는 대구고, 경북고, 경북여고, 경북대사대부고, 계성고 등 8개 학교 총 1,200여 명이 이에 참여했다. 이후 서울 충남 광주 마산 등지에서도 시위가 일어났지만, 규모 면에서는 부산에서만 약 7800명의 중고등학생들이 시위에 나서는 등, 3.15 부정선거 전 까지 시위의 주도권은 경북경남의 학생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이후 선거 뒤 마산에서 눈에 최루탄을 맞아 사망한 고 김주열 학생(17세)의 시신이 떠오르자 마산을 중심으로 4월 11일부터 대대적으로 시위가 시작된다. 경상도 지역 중고등학교를 중심으로 한 시위는 이윽고 고려대학교 등 서울의 대학생들에게도 번졌고 전국, 전 세대의 시위로 번진 것이다. 1960년대 당시 중고등학생이었던 이들과 현재의 박사모는 세대적으로도 지역적으로도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호기심에 광화문 태극기 시위를 둘러보면 자신들이 4.19 민주화 운동의 주역 중 하나라고 주장하는 시위자들도 가끔 보인다.
독재자 이승만을 몰아낸 그들이 독재자 박정희를 응원하게 된 결정적 사건은 제 2공화국이 당대의 사회적 혼란을 전혀 통제하지 못했다는데서 출발한다. 자유당의 탄압으로 마이너 정당에 머물러 있던 민주당이 정권을 잡자, 그 둘은 신파와 구파로 나뉘어 정치싸움을 시작한다. 부패한 정부를 몰아낸 시민들은 이제 무능한 정부를 마주하게 되었고 정부는 민심과 동떨어진 정책들을 내놓게 된다. 예를 들면 국가예산이 부족하니 70만에 달하는 병력을 10만으로 감축하고, 부족한 전기를 북한에서 끌어 쓰는 대신 남한의 쌀을 북한에 수출하자는 등, 종전 후 7년밖에 안되는 시점에서 국민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정책들로 사회 혼란은 가중됐다.
그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제2공화국은 이승만 정권과 비슷한 악수를 두게 되는데 바로 민주당의 주도로 반공임시특례법과 데모규제법을 입안한 것이다. 이는 현재까지도 국가보안법의 일부에 편입되어, 집시법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전해지고 있다.(즉 국보법에는 민주당의 dna도 섞여 있다) 이처럼 시위로 탄생한 정부가 시위를 억압하는 아이러니를 보이자 민심은 장면 정권에 대해 등을 돌린다.
그 증거는 5.16 쿠데타 이후의 여론과 그 뒤에 미국의 감시로 치뤄진 제 5대 대통령선거에서 극명하게 들어난다. 국민들은 쿠데타 자체를 반기지는 않아도 4.19나 이후 12.12로 들어선 신군부를 대하던 것 과는 다르게 대규모 시위나 봉기로 대응하지 않았다. 또한 미국의 감시로 이전이나 이후의 선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공정하게 이뤄진 제 5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민주당 후보 윤보선을 누르고 당선되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민주당이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문제삼아 빨갱이라며 공격했고 이에 동조해 6.25당시 피해가 컷던 서울과 수도권 그리고 군인 표가 많은 강원도가 대거 윤보선을 뽑고, 진보적 지역이었던 전남과 경상도는 박정희를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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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대 대통령 선거 결과
당시 이승만의 부패로 행정조직이 와해되고 정치인들이 무능했던데에 비해 잘 짜여진 군대조직을 갖춘 군부는 무너진 국가시스템을 효율적으로 재건할 수 있었고 또 그 당시 낙후된 교육수준에 비해 장교들은 해외 유학생 수의 60%를 차지하는 등 상대적으로 더 엘리트였기 때문에 민심은 빠르게 박정희와 군부에게 몰렸다. 그 결과 4년 뒤 제 6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와 윤보선의 득표율은 51.4% vs 40.9%로 더 크게 벌어진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후 개헌과 부정선거를 통해 3선에 성공하고 종신집권까지 노리는 독재자가 된다.)
즉 원래 질문으로 돌아가보면 4.19 헉명세력들이 박정희에 대한 애정을 가지게 된 것은, 혁명 이후 집권한 제2공화국의 정치인들이 이승만과 다를바 없는 무능함과 부패를 보여줬기 때문이고, 그 이후 박정희와 군부가 혼란을 효과적으로 잠재우고 경제성장의 기틀을 잡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4.19 세대의 동기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역사가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젊은 세대들이 왜 여당에 대한 지지를 거두고 있는가? 민주당은 55년 전에 저질렀던 실책처럼 국민들이 자신들을 지지해서 전임 대통령을 밀어냈다고 생각한다. 이전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혐오를 자기에 대한 지지로 읽기 때문에 어느정도 비위와 부정부패를 저질러도 된다고 본다. 거기에 시위 덕에 집권한 정당이 시위를 억누르는 법안을 발의한 것을 보면, 현재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며 각종 매체를 검열하고 가짜뉴스를 탄압하겠다고 나서는 현 민주당의 모습이 정확하게 겹쳐 보이지 않는가.
30년전의 공으로 오늘의 과를 덮으려는 운동권들은 자신들보다 윗 세대의 그 복잡한 역사를 무시하고 단순화시킨다. 친일파와 이승만의 자유당, 5.16 군사정부 그리고 신군부, 신한국당, 새누리당, 자한당은 모두 똑같은 정체성을 가진 적폐세력이라고. 하지만 역사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저 정치세력들이 얼마나 서로 다른지 이해할 것이다.(되려 아이덴티티나 구성원의 변화 없이 이어져오는 것은 민주당이다, 당명도 잘 안바뀌는걸 보라) 그런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으니 민주화 선배들인 4.19세대가 박정희의 팬클럽이 된 것은 못배워서 그렇다고 본다. 또 그러니 20대 남성들이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는 이유를 못배워먹어서라고 생각하는 것 아닌가.
나는 4.19세대가 박정희의 독재와 사법살인을 비호하는 것이나, 아니면 박근혜의 정치적 비위를 옹호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변호하는 것이 아니다. 말머리에 밝혔듯 공과 과는 구분되어 평가해야하는 것이고 공으로는 과를 덮을수 없다. 다만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화혁명을 이뤄낸 18살의 앳된 소년들이 격동의 현대사를 겪으며 노쇠한 몸을 이끌고 55년만에 다시 광장에 나와 그 주름진 손으로 태극기를 흔들며 독재자의 딸을 응원하는 아이러니는 그들의 경험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한다.
게다가 그들의 경험이 나의 경험과 아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우리도 슬슬 느끼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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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민주화 시위를 벌이는 고등학생들. 이들은 오늘날의 틀딱이 되었다.
2019. 1. 13.
한국영화부도의 날(국가부도의날 후기)
최근 충무로가 왜 망작들로 가득한지 그 이유 중 하나를 극대화해서 보여주는 사례. 조금 과장을 보태면, 나는 국가부도의 날을 보면서 한국영화부도의 날을 예감했다.
먼저 이 영화의 왜곡을 파악하려면 실제 IMF사태가 어떻게, 그리고 왜 일어났는지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과 이 영화는 외환위기와 국내신용위기를 혼용하지만 그 둘은 다르다. 외환위기는 달러가 없어서 벌어진 일이고, 국내 신용위기는 원화가 없어서 벌어진 일이다. 후자의 문제는 정부가 원화를 발행하고 지급보증을 하면 해결될 문제지만 달러부족 문제는 독자적으로 해결이 힘들다. 특히나 고정환율제 아래서는. 고정환율제 아래서는 모든 나라가 주기적으로 외환위기를 겪는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프랑스나 영국같이 큰 나라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미국도 금태환을 고집하던 시절 동일한 위기를 겪었다. 그리고 한국이 외환위기를 처음 겪은 것도 아니다. 그 전엔 미 재무부 도움으로 연명했던 것 뿐이지.
따라서 외환위기는 당시 고정환율제를 펴던 한국이 반드시 겪었을 문제고, 그 핵심은 경상수지가 적자인 상황에서 달러가 모자라 수입 결제대금과 외채를 갚을 달러가 없어 생긴 문제다. 물론 그것이 국내 신용위기를 부르긴 했지만 엄연히 그 둘은 다르다. 따라서 해결책도 다르다.
태국과 말레이시아 필리핀 같은 나라들은 물론이고 홍콩처럼 금융선진국도 간당간당한 마당에 한국이 자체적으로 달러를 조달할 방법은 없었다. 애초에 그러니 위기라고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럴 때를 대비해서 IMF라는 조직이 존재한다. 이 구원투수는 위기에 등판해 필요한 달러를 제공해주는데 그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도로 탕진할텐데. 매주 20억달러씩 소모하는 나라에 550억달러를 빌려줘봤자 반년이면 똑같은 위기에 똑같이 처한다. 그래서 IMF 골목식당의 백종원처럼 근본적 솔루션도 같이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그들이 준 솔루션의 목적은 단 하나다. 한국이 자발적으로 해외자본을 끌어들일수 있게 국내시장을 개방하고 제도를 선진화하는 것이다.
대중은 당시 IMF의 조치가 가혹하고 불공평했다고 주장하지만 그건 바보같은 소리다. 앞서 말했듯 550억 달러로는 불과 27.5주, 즉 반년밖에 버티지 못하니 그동안 한국의 외환수급을 정상화하기 위해선 급진적인 대책을 쓸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돈을 더 빌려줘야하는 것이고 IMF의 한정된 자본으로 많은 나라를 구제하는데에 반하는 일이다. 물론 그에는 충격이 따른다. 하지만 애초에 그런 급박한 상황이라 IMF를 부른 것 아닌가. 누구한테 돈 맡겨둔것도 아니고 다른 해결방안도 없었으면서 너네가 돈 더 빌려주고 더 천천히 개혁했다면 더 편했겠지 않냐는 것은 홍탁집 아들이 백종원보고 한 1년쯤 가게영업 도와주면서 솔루션 달라는 것 만큼이나 멍청하고 뻔뻔한 요구다.
영화의 역사왜곡은 이를 부정하면서 출발한다. 한국은행의 수장은 총재인데 영화 시작부터 총재를 총장이라고 하는 것은 이 시나리오가 최소 아마추어 수준의 리뷰냐 조언도 받지 않았음을 보여준다.(개봉 후 인터뷰에서는 실명 거론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총장이라고 했다지만 경제수석 재경부 차관 한은 팀장 IMF 미재무부 차관 등 이외 모든 공식 직책과 회사명은 변경없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백퍼 뻥이다) 게다가 한팀장이 속한 통화정책팀은 외환과 거의 무관한 부서라 외환보유고가 언제 동나고 롤오버가 얼마나 되는지 정보가 전무한 부서다. 이와 같은 단편적인 사실을 틀린 것을 넘어 영화 후반부로 가면 본격 역사왜곡이 시작된다.
IMF는 답이 아니라며 유럽 중앙은행들에게 돈을 빌리자는데, 유럽 중앙은행들은 자국 은행에 돈 빌려주는 곳이지 외국에 돈 빌려주는데가 아니다. 당장 베트남이 한은에 돈좀 달라고 하면 한팀장(김혜수 역)은 빌려 줄건가. (한은이 일반 회사에 실사 나가는 것도 웃겼지만) 일반 종금사와 건설사들 대차대조표와 자산이 얼마나 부실했는지 속속들이 봐 놓고서 부실을 덮어놓자(파산시키지 말자)는 말은 괴랄한 논리다. 그건 부실기업의 부채를 정부가 떠안고 강제로 은행권에 전가시키자는 소리와 똑같은 말인데. 그래놓고 본인은 정부는 파산(모라토리움)하자고 주장하는 대목에서 실제 웃음이 나왔다. 한번 모라토리움을 선언하면 역사에 남아 잊혀질때까지 수십년간 국가와 모든 기업이 해외채권을 발행할 때 높은 가산금리를 내게 된다. 우리가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도 상대적으로 낮은 가산금리에 해외채를 발행한 여러 이유 중 하나는 IMF 당시에도 모라토리움을 선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은의 핵심부서인 통화정책팀장은 이를 모를 사람이 아니다. 물론 그 부서가 모라토리움을 논의할 자리도 아니지만 그런 오류는 너무 많아 생략한다.
특히 IMF실사단 뒤에 따라오는 미 재무부 차관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한팀장이 마치 비밀을 발견한 듯 극적으로 연출하는 신에서는 쪽팔릴 경이었다. 당시 재무부 차관은 IMF외 다른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러 왔을 뿐더러, 달러를 빌리면서 왜 미국이 껴 있냐니 MS워드를 왜 마이크로 소프트사에게서 사서 쓰냐는 이은재 의원이랑 뭐가 다른가. 에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간단하다. IMF 구제금융은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고 IMF는 (미국의)사익을 위해 한국에 불리한 조건을 내건거라고. 이런 말도 안되는 음모론은 필부들이 술잔을 나누며 안주거리로 삼을 잡설에 불과한데, 그걸 돈내고 2시간동안 들으러 극장에 갈 관객들이 뭐 얼마나 있었겠나. 이 영화는 헐리웃의 Big Short을 모방해서 만든 것 같은데 그 영화가 수작으로 뽑히는 이유는 일반인들이 잘 이해하지 못했던, 실제 금융시장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쉽게 객관적으로 풀어내서 그런 것이지 필부의 뇌피셜을 영화로 만들어서 뜬게 아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과거 국가부도의 과정을 본 것이 아니라 현재 한국영화가 어떻게 부도를 내고 있는지를 본 것 같다. 흔한 클리셰와 플롯의 반복, 나팔바지만큼이나 촌스런 평면적 캐릭터들, 관객 피곤하게 만드는 감정선의 강요, 그리고 무엇보다 전문적 시각의 부재.
이 영화가 다루는 것은 500년 1000년 전의 역사가 아닌 불과 19년 전의 대한민국 역사다. 당시 IMF를 겪고 극복한 금융관료들이 모두 살아있고 그 시절을 겪은 수많은 금융인들이 존재하지 않나. 감독이 고증에 힘써야 했던 부분은 한국은행 사무실과 로비와 같은 공간적 배경이 아니라 우리가 왜 IMF에 손을 벌릴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시대적 배경이다. 감독이 영화적 소재로 사용한 IMF의 경험은 모든 국민들이 공유하는 처절한 기억이고 역설적으로 소중한 공공재라고 볼 수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의 경험을 영화로 사유화할 때는 최소한 객관적 팩트를 전달해야한다는 윤리적 소명의식이 있어야 하는것 아닌가. 하지만 그는 공공자산을 가져다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설파하고 극장수입을 올리는데 유용했다. 사실상 국민 전체에 대한 배임이고 우리 아픈 기억을 통째로 횡령한 것이다. 이 점을 이해 못하는 감독이 계속 영화를 배설하는 이상 한국영화계는 부도의 날을 맞이할 것이다.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