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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9. 3.

박서보와 국립현대미술관

우리나라의 여러 미술관 중에서도 내가 국립현대미술관을 가장 좋아하는 데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중 하나는 [국립]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품위와 엄격함을 유지하면서도 대중들에게 친절함을 잃지 않는 그 자상함에 있지 않을까 한다 . 그리고 지난달 막을 내린 박서보의 전시회는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 전시회는 특이하게도 작가의 그림을 역순으로 전시했는데, 아마 이는 아래 설명할 모종의 이유 때문이리라.

미술에는, 특히 그 감상에는 정답따윈 존재하지 않으니 이를 내 멋대로 해석해보려 한다. 1950/60년대의 우리 할아버지/할머니들이 그랬던 것 처럼 박서보 역시 황폐하고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나 서구를 동경하는 분위기에서 자랐을 것이다. 한끼를 먹으면 다음 끼니는 굶어야 했고 자고 일어나면 동네의 누군가가 죽어나가던, 우리가 정말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 머리 노오란 백인들의 문화는 동경의 대상이었으리라. 대다수의 1세대 한국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서구의 화풍을 모사하는 것으로 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 기술은 모방할 수 있어도 영혼은 베낄 수 없어 그런 것일까. 다른 선후배/동료 작가들이 그러했듯 그 역시 내적 갈등을 겪은 끝에 전통적 화풍으로 회귀한다.

내가 금융에 적을 두기 전, 고 이만익 선생님을 뵙고 인터뷰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한국에서 서양화풍을 곧잘 따라해 '너는 미술에 재능이 있다' 라는 말 한마디에 겁없이 파리로 떠났지만 거기에서 자신은 개성이 없는 아시아 변방의 한 그림장이에 불과했다고. 그러다 결국 그는 한국의 전통미술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다고 한다. 박서보 역시 이와 비슷한 단계를 거쳤다. 그는 1960년대 초기 파리에 머물며 당시 유행하던 엥포르멜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다.

원형질(原形質) No. 18-64, 1964년 작
하지만 그 역시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한 한계를 느꼈으리라. 막걸리에 파전을 즐기던 우리가 파리의 어느 하우스파티에 초대받아 와인과 치즈를 대접받을 때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 불편함을 느끼는 것 처럼, 애초에 파리지앵으로 태어나지 못했던 그 역시 어느 순간 엥포르멜이라는 단어부터 표현기법까지, 그 모든 것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 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이후 그의 작품에선 점차 한국적 정취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유전질(遺傳質) No.2-68, 1968년 작
그가 단색화로 나아가기 전, 당시 유행하던 팝아트적인 느낌에 오방색을 입힌 60년대 후반의 작품은 그런 내면의 갈등을 넌지시 비추고 있다. 스윙스같은 토종 랩퍼들이 아무리 흑인 흉내를 내고 혀를 돌려 꼬아봐도 빌보드 힙합 레이블에 이름을 올리기는 커녕 흉내쟁이에 불과한 취급을 받듯, 그 시절 파리에 머물던 1세대 화가들도 아마 비슷한 감정을 느꼈으리라. 그래서 그들 중 많은 수가 한국 고유의 미적 세계로 회귀한다. 아마 이 작품은 그 시발점이 아니었을까.

묘법 No.991004 / No.000321, No.000327
이후 그는 한국의 전통적인 색채를 이용해서 자신만의 단색추상화 세계를 구축한다. 더 나아가 작품의 재료로 자연친화적인 닥종이를 사용하면서 단순히 색채로 뿐 아니라 철학적으로도 그는 더욱 깊게 전통적 미학의 세계로 파고든다. 그렇게 그는 한국의 단색화의 대부로 불리며 한국의 현대미술을 주도하는 작가 중 하나로 굳건히 자리잡았다. 
묘법(描法) No.180503, 2018년 작
묘법(描法) No.071208, 2007년 작
앞서 말했듯이 이 전시는 독특하게도 작가의 작품을 시대적 역순으로 전시하고 있다. 한국은 더이상 세계 예술계에서 듣도 보지도 못한 무명의 국가가 아니라 작지만 한편으론 선명하게 자신의 자리를 잡은 신생국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 예술가들은 대중예술뿐 아니라 현대미술이나 클래식 그리고 무용에서도 모방을 넘어 그 수준을 한단계 높이는데 일조하고 있다. 그 덕에 BTS가 개량한복을 억지로 입고 춤을 추지 않아도, 싸이가 자신의 신곡에 자진모리 장단을 넣지 않아도, 조수미가 '내 발성의 힘은 김치덕분'이라는 뭐 그런 국뽕적 요소를 강조하지 않아도 그들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동시대 문화와 잘 어우러진다. 그런 오늘날의 눈높이로 볼 때 1세대 화가들의 전통적 미학에 대한 집착은 살짝 고루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지칠줄 모르는 수행자 역시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다시 한번 자신의 화풍에 변화를 주었다. 그는 형광색이나 밝은 파스텔 톤, 혹은 도발적인 핑크 등 전통적인 한국의 색채에서 벗어나 마치 마크 제이콥스 같은 명품브랜드들과 콜래보레이션이라도 할 것 같은 세련된 색채로 자신의 작품 영역을 확장했다. 여든 여덟살의 노작가의 변신 치고는 꽤나 파격적이지 않은가.

그리고 그 만큼이나 시계열의 강박에서 벗어나 세련된 현대작들을 먼저 배치하여 관객의 흥미를 이끄려 노력한 국립현대미술관 기획자들의 신선한 발상에도 박수를 보낸다. 현대미술사를 전공한 그들은 이 전시회를 기획하면서 박서보의 전성기 시절의 작품들, 칙칙하고 올드하지만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작품들을 앞에 배치하고 싶은 유혹들을 수도 없이 느꼈을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 정석적인 전시회의 공식에서 벗어나 아흔을 바라보는 작가의 현대적인 감각의 새 작품들을 전면에 배치한 것은 우리와 같은 아마추어 관람객들이 현대미술에 조금이라도 더 매력을 느끼길 바라는 소망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요란한 단어들의 조합 없이는 예술을 설명하지 못하는 일부 미술평론가들이나 불친절한 작가들과는 달리, 그들은 우아하면서도 친절한 태도로 손을 내밀어 우리를 현대미술의 세계로 안내하고 있다.

#MMCA, ♡MMCA

2019. 6. 10.

Das Parfum


이 소설을 통독한 것은 단 한번 그것도 십여년 전 내 이십대 중반 언젠가였지만 아직도 머릿속에 또렷하게 그려지는 한 장면이 있다.

냄새를 가지지 못하고 태어난 아이, 그루누이.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향기를 지닌 한 소녀의 내음이 너무 탐이나 그를 빼앗고자 한다. 그녀를 죽여서라도. 이런 음모를 감지한 그녀의 아버지는 온갖 트릭을 동원하여 그녀를 도시로부터 대피시켰다. 뒤늦게 그녀의 자취를 좆아 그루누이는 성 밖에 나서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그토록 강렬한 열정을 느낀 것은 그녀가, 아니 그녀의 향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는 성문앞에 서서 침착하게 그녀의 행적을 가늠해본다. 모든 흔적과 증거가 그녀가 동쪽으로 향했다고 증언하고 있었다. 단 하나 그의 후각을 제외하고는.

서쪽에서부터 그녀의 미세한 내음을 맡은 순간 그는 주저없이 그 방향으로 내달린다. 천가지 이정표와 만가지 증거들이 동쪽을 향하고 있었지만. 단 하나, 그의 코가 반대편을 가르키자 그는 주저없이 말머리를 틀었다.


*                   *                   * 


그 옛날의 내가 그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으로 기록한 부분은 전혀 다른 페이지였지만 한참의 세월이 지난 지금 나는 그 장면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그리고 내 자신에게 물었다. 내가 만약 그루누이였다면 나는 그토록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까?  내 커리어에서 지난 십년은 확신을 부수고 당위를 분쇄해가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여기까지 온 내가 어찌 나에 대한 그런 강한 믿음을 가지겠냐만은. 내 어찌. 감히.

2019. 6. 6.

영화 기생충, 그리고 계급의 법칙 + 사족 3개


[아래 리뷰는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반지하에서 살며 지상을 꿈꾸다 지하로 추락해버린 한 가장과 가족의 이야기.

 
이 영화의 시작은 한 친구가 장남 기우(최우식)에게 재물복이 들어온다는 수석과 부잣집 과외자리를 선물하며 시작된다. 학벌위조로 시작된 과외는 장녀 기정(박소담)의 사이비 그림치료로 이어지고, 또 그녀는 운전기사를 모함해서 쫒아낸 뒤 아버지를 불러들인다. 마지막으로 이 셋은 음모를 꾸며 가정부를 쫒아내고 그 자리에 어머니를 들여놓는 것으로 부잣집 기생하기 작전을 완벽하게 마무리한다.
 
쫒겨난 가정부가 한밤에 찾아와 벨을 누르기 전 까지는.
 
집주인들이 집을 비운 사이 찾아온 그녀는 두고간 것이 있으니 꼭 좀 문을 열어달라며 애처롭게 부탁한다. 문을 열어주자 그녀는 어리둥절하는 기생충 가족들을 지나쳐 집안에 아무도 모르게 숨겨진 지하공간을 열어젖히며 영화의 후반부를 시작한다.
 
우리는 피라미드의 각기 다른 층에 속해있지만 한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절대 낮은 곳을 쳐다보지 않는다는 것. 기택의 시선도 그러하다. 반지하에 살며 창문 너머의 지상만을 바라봤지 온전한 지하의 삶을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마치 벤츠 뒷좌석에만 앉는 박사장이 반지하의 삶을 모르듯이. 자신의 발 아래를 돌아보지 못하는 것은 마치 물리법칙처럼 언제 어디서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된다. 전 우주적으로 항상 F=ma가 성립하듯 아래를 향한 시선은 늘 충격과 공포를 동반한다. 사채업자들에게 쫒겨 지하에서 4년간이나 은둔하며 살아 온 가정부의 남편을 보는 기택의 시선도 그러했다. 

영화의 전반부가 유쾌한 신분상승 스토리였다면 그 후반부는 비참한 계층갈등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지상vs반지하vs지하. 그리고 이는 사회계급에 관한 두번째 물리법칙과 함께 시작한다. 세상에는 우리를 더 낮은 곳으로 끌어 당기는 힘이 존재한다는 것. 마치 중력처럼. 가정부의 남편은 스스로 지상에서 지하로 내려왔으며 반지하에서 살던 기택(송강호)과 기우는 희망을 위해, 혹은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지하로 걸어 들어간다. 박사장(이선균) 역시 아들의 생일파티를 위해 운전기사 기택과 함께 계단 아래에 쪼그려 앉아 숨어있다. 상한 무말랭이 냄새를 폴폴 풍기는 그와 숨을 맞대고서.
 
이 무시무시한 중력은 기택의 가족이 한밤에 박사장의 집에서 탈출하는 신에서 시각적으로 극대화된다. 불과 몇시간 전까지 유명한 건축가 남궁뭐시기 선생이 지은 저택에서 로얄 살루트를 비우던 기택과 그의 가족들은 차고를 열고 나서자 마자 끝없이 아래로 내달린다. 마치 하늘에서 땅으로 자유낙하하는 빗줄기처럼. 처음엔 부잣집 주택촌 언덕길 아래로 내달리고 둑방 아래를 건너 계단길을 따라 전속력으로 끝없이 달려 내려가고 내려가고 내려간다. 하지만 그렇게 내려간 그들의 반지하는 비참한 현실로 가득하다. 누가 상선은 약수라 했던가. 높은 곳에서 내린 비는 미세먼지를 씻어내릴지 몰라도 낮은 곳에 모이면 똥물을 왈칵 솟게 만드는데. 젖은 라이터로 시끄먼 똥물 튄 담배에 어렵사리 불을 붙여 한 모금을 빨아들이는 딸 기정의 입가에서 소리없이 읽히는 한 마디는 참으로 시의적절하게 이 상황을 요약한다. "아이 씨발"

다음날 아침 일장춘몽에서 깨어나 체육관에서 눈을 뜬 기택은 더 이상 반지하의 삶에 안주할 수 없다. 벤츠를 몰고 대저택에서 온갖 고오급 위스키와 꼬냑을 들이켜 본 그는 더 이상 열두 캔에 만 원짜리 필라이트 맥주에서 행복을 찾지 못한다. 선악과를 깨물은 아담처럼 그는 자신의 몸에서 부끄러운 무엇인가를 느끼기 시작한다. 킁킁. 반지하의 냄새. 사장님 사모님들은 지하도로 내려가 지하철을 타고 나서야 만날 수 있는, 그 칙칙하고 꼬리꼬리한 냄새. 냄새는 마치 가난과도 같아서 혼자서는 느낄수가 없고, 또 숨길 수도 없다. 기택 뿐 아니라 기우/기정이가 그랬듯이. 그들은 그제서야 자신의 진짜 삶이 얼마나 서글프고 비참한지 깨닫는다.
 
하지만 중력을 거슬러 올라가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비극으로 끝났다. 심지어 경제지 1면을 장식한 박사장조차도 이 굴레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아들이 경기를 일으키며 쓰러져 죽을뻔 했는데도 "귀신 나온 집에 살면 사업이 잘된다"며 이사 나가기를 거부하다 이런 비극을 맞이하고 말았잖은가. 그가 만약 요새 핫한 한남 더 힐이나 아리팍 펜트하우스로 이사갔더라면 아무 탈 없이 잘 살았을터인데.(뭐 기생충 네 마리에게 뜯어먹히기야 하겠지만) 하지만 지하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행의 기운이 느껴지는 그곳에 박사장의 가족을 가둔 것은 더 위로 올라가고자 하던 그의 욕망이었다. 상류층의 사정마저 그럴진대 기택의 현실은 말할 것도 없다. 애시당초 반지하는 지상보다는 지하에 더 가까운 곳이었으니 더더욱.
 
이 영화의 마무리가 더욱 슬픈 이유는 감독이 엔딩신에서 넌지시 던지는 메세지에 있다. 이 세상에는 계급이 있고, 우리는 결코 그걸 뛰어넘을 수 없다는, 그 불변의 법칙. 예고없이 주말에 사장 아들 생일파티에 소환된 송강호는 이선균을 바라보며 그의 사생활을 입에 올린다, "사장님 가족을 사랑하시는군요"라고. 그렇게 아빠 기생충은 무의식적으로 사장님이 그토록 싫어하던 그 선을 슬쩍 넘고 말았고 불쾌감을 숨기지 못하는 이선균은 그에게 계급의 선을 일깨워준다. 대저택의 뜰을 호젓하게 바라다 보며 시작된 간밤이 어떻게 체육관에서 끝나버렸는지 또 사랑하는 가족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지 납득하지 못하던 송강호는 그제서야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깨닫는다. 그 모든게 바로 넘을 수 없는 계급의 선, 아니 벽 때문이었고 그는 억눌러왔던 분노를 터뜨린다.
 
sns에 뻔지르한 문구나 올려대는 아가리 낭만주의자들은 부자들도 싸구려 짜파구리를 먹는 신을 보며 "보라 민주주의 사회서 인간은 평등하다"라고 외칠 지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근대국가에서는 누구나 몇푼만 주면 짜파구리를 사먹을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거기엔 짜파구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는 사람과 끓이는 사람이 있다.(그러고 보니 조여정은 얄밉게 충숙에게 짜파구리 한 입을 안주더라) 이선균과 송강호는 둘 다 아빠고 가장이지만 한 쪽은 사장 아빠고 나머지 한쪽은 기생충 아빠다. 하나가 같지만 나머지 하나가 다르다면 그들은 결코 동등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계급사회에 살면서도 서로가 평등하다는 환상 속에 빠져있지 않은가. 이선균이 송강호에게 일깨워 준 그 "선"은 바로 계급을 의미하고 "냄새"는 손에 잡히지 않는 그 계급을 오감의 영역으로 끌어내 주는 일종의 신분증이었을 것이다. 아니 이 경우는 낙인이라고 하는게 더 맞겠다.
 
영화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기택의 가훈은 바로 안분지족이었다. 하지만 분에 넘치게 지상을 꿈꿨던 송강호는 결국 지하로 추락한다. 그리고 물리적 위치가 낮아질 수록 소통의 영역 또한 함께 줄어든다. 스마트폰과 무전기로 소통하는 지상, 무료 와이파이 존을 찾아야만 카톡이 되는 반지하, 그리고 19세기의 통신수단인 모르스 부호로-그것도 단방향으로만 소통할 수 있는 지하의 삶. 그리고 그런 아버지의 메시지를 받아본 기정은 또 한번의 비극을 예고한다. 간신히 집행유예로 풀려나 반지하로 돌아오고서도 여전히 지상을 꿈꾸며 영영 전해지지 못할 독백과 함께.
 
"아버지 저에게 계획이 생겼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 그 집을 사는 것입니다."
 
그의 이루어질 수 없는 계획은 반지하에서 지하로 추락한 송강호의 비극이 아들에게 또 다시 반복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마치 아버지가 자식에게 가난을 물려주듯이.
 
"아버지는 그냥 계단만 올라오시면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영영 지하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여전히 계급사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처럼.
 
 
"부디 그때까지 건강하세요"

 
 
*      *      *

 
(사족 1)
봉준호 감독은 이전에도 밀폐된 공간에서의 계급간 갈등을 그려낸 적이 있다. 프랑스 만화를 원작으로 한 설국열차. 그 영화에서 주인공은 열차 앞칸으로 한걸음씩 나아가 맨 앞칸에 도달하지만 결국 전체 체제가 붕괴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그렇게 보면 단 한칸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되려 지하실로 추락하는 기생충의 스토리는 더욱 암울하고 더욱 비참해졌다. 설국열차가 개봉한 2013년에 비하면 2019년 현재 한국사회의 빈부격차는 더욱 확대되고 저소득층의 가처분소득과 일자리는 줄어들었으며 계층이동은 더욱 어려워졌는데 어쩌면 감독의 세계관이 후퇴하는 것은 이러한 현실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
 
그런 사회에서 생존할 유일한 방법은 꿈을 꾸지 않는 것이다. 지하실의 남자를 기억하는가. 그는 자발적으로 불안정한 지상의 삶을 버리고 지하로 숨어들었고 박사장에게 감사하는 삶을 충실히 살았기에 4년이나 살아남을 수 있었다. 반지하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송강호의 가족들에게, 그는 처음부터 여기서 태어나고 살았던 것 같다며 지하의 삶에 완벽하게 적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송강호 역시 숙주를 죽이고 나서 자발적으로 침전하여 지하의 삶을 받아들인다. 어쩌면 봉준호 감독은 계층이동이 거의 불가능해진 한국 사회에서는 포기하고 안주하는 것 만이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자조하는지도 모른다.
 
 
*      *      * 
 
 
 (사족 2)
기생충은 쟁쟁한 경쟁작들을 물리치고 2019년 칸 영화제의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논란의 여지 없이 대중성까지 갖춘 이 영화는 상업적으로도 흥행하고 있다. 하지만 칸은 본디 영화의 대중성이나 성적보다 예술성과 정치적 색채에 높은 점수를 줘 왔다.(2005년 수상작이 화씨 9/11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따라서 봉준호 감독의 7번째 장편인 이 영화는 영화적 기교나 표현 뿐 아니라 내포한 메시지나 정치적 색채도 칸의 취향에 잘 맞아 의외의 대상을 수상한 것이 아닐까 한다.
 
이 근거없는 추측을 좀 더 확장한다면 계급사회와 거기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쉬운 비유와 상징들로 강조해서 보여준 것, 그리고 처음엔 두 피지배 계층이 숙주를 차지하기 위해 협력을 거부해서 서로 싸우지만, 마지막에 지배층인 박사장을 찌르는 신 등이 진보적 색채가 강한 서구의 영화인들의 입맛에 딱 맞았으리라.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그들의 위선과 가식을 읽는다. 영화는 반지하에서 사는 기생충 가족의 현실을 구질구질하게 묘사하지만, 70억 인류 중 절대 다수는 그보다도 더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 세계 중위권 가구 소득은 약 12,000달러 밖에 되지 않는데 비해 우리나라 고졸 1인의 평균임금은 그의 약 3배나 되고 이는 세계 상위 약 1% 안에 드는 상류층이다. 부르고뉴 산 와인을 마시고 이탈리아 장인이 한땀한땀 정성들여 만든 턱시도를 입고서 일등석 비행기를 타고 칸에 도착하는 품격있고 엘레강스하며 고매하신 영화인들은, 지구상에는 이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갈 수 있는 사람보다 가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평균적인 인류의 삶이 어떤지 가늠할 생각 조차 없는 그 상류층들은 자신만의 축제를 열어 빈민 뿐 아니라 (지구적 관점에서)중산층의 박탈감과 비극마저도 끌어다가 영화의 소재로 삼아 윤리적 우월감과 명성을 얻었다. 뭐 돈은 당연히 따라올 것이고.
 
여담이지만 어차피 사족으로 쓰는 글이니 덧붙이자면, 나는 2017년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도 그들의 이런 위선을 보았다. 수상자 중 하나였던 메릴 스트립은 연설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이민장벽을 우아한 어조로 비난했다. 하지만 그녀의 지적은 부당하다. 트럼프는 불법 이민자들을 막고 시민권자들의 권리를 보호하겠다고 했고, 실제로 그러고 있다. 그리고 그게 바로 대통령이 할 일이다. 아니면 뭐 국가 수장이 불법을 방임하란 말인가. 게다가 미 합중국의 대통령은 유엔사무총장이나 지구방위대가 아니다. 비록 열린 이민정책이 미국의 인재풀과 사회를 더욱 역동적으로 만들어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 혜택은 고루 배분되지 못했다. 자본가들은 더 나은 노동자들을 고용할 수 있겠지만 동시에 미국의 저소득 노동자들은 점점 뒤로 밀려나고 있다. 물론 나 역시 경제학적으로 그런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저소득층의 삶을 개선한다고 생각하지만 옳든 그르든 대중과 유권자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건 잘 빼입고 잘 배운 잘난 사람들끼리 지지고 볶는 귀족정이지.

되려 인종차별은 헐리웃에서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현상 아닌가. 미국의 소수인종에조차 속하지 못하는 아시안들의 눈에는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비흑인이 흑인에 대한 농담을 하면 sns에서 가루가 되도록 까이지만 안경 낀 동양인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은 위트넘치는 유머감각으로 받아들여진다. 또 원작에 엄연히 존재하는 소수인종 캐릭터들을 지워내기까지 하는데 닥터 스트레인지의 에인션트 원은 본디 아시아 계였지만, 아시아인이든 여성이든 똑같은 minor이니 상관 없다고 생각했는지 제작진은 백인 여자인 틸다 스윈튼에게 배역을 맡겼다. (just go on a trip~) 이런 인종 바꿔치기는 너무 흔해서 아예 화이트 워시라는 전문용어까지 존재한다.
 
영화 기생충에도 영화인들의 이런 위선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신이 있다. 바로 폭우가 쏟아지던 날 아들 기우가 비를 맞으며 계단에 서 있는 장면. 설정 상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한 그 장남은 $500짜리 크리스찬 디올 스니커즈를 신고 있다. 아마도 봉준호 감독은 배우 최우식에게 낡고 추리한 운동화를 신고오라고 지시했을 것이고 그는 신발장을 뒤져 한 10년 신었던 낡은 스니커즈를 골랐을 것이다. 빈곤과 열악한 환경을 강조하는 장면에서 비싼 신발을 신고 등장하는 이 장면은 아마 영화인들이 그들이 그려내려는 실제의 삶과 얼마나 괴리되어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신이 아닐까 싶다. (배우를 비난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와 별개로 그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너무나 훌륭하게 캐릭터를 소화해냈다.)

물론 수많은 혜택을 누리고서 이런 글을 쓰는 나 역시 그 위선자 대열의 끄트머리 어딘가에 서 있겠지만.

 
*      *      * 

 (사족 3)
본인은 어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봉준호 감독은 정치와 온전히 분리될 수 없는 감독이다. 그는 박근혜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렸고 정의당원일 뿐 아니라 자신의 영화 곳곳에 사회에 대한 비판을 숨기지 않았다. 영화 초중반 이선균의 대사, "코너링이 훌륭하시네요" 라는 대사에서 우병우 전 민정수석의 아들 병역비리를 연상하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영화에 담긴 메시지도 정치적 배경에 따라 변한다는 것.

살인의 추억에서는 공권력이 시민을 보호하기는 커녕, 위협하는 군사독재 시절의 폭력적이고 암울한 시대상을 담아냈고 괴물에서는 생태를 파괴하는 미군 그리고 그 앞에서 무력한 한국의 치안시스템을, 그리고 박근혜 정권시절 개봉된 설국열차는 하위계층이 반란을 일으키는, 다분히 혁명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주인공은 항상 순박하고 선량한 사람들이었으며 가장 최근 개봉된 옥자 역시 극악무도한 코쟁이와 다국적 자본이 착한 주인공을 위협하는 구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봉준호 감독은 자기 캐릭터들에게 기생충이라는 다소 경멸적인 타이틀과 함께 그들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파해쳤다. 서민이라고 착하기는 커녕, 돈 없으니 얼굴도 구겨지고 마음도 구겨지고 사기치고 삥땅치고 속여먹는 일에 별 죄책감도 없는, 남을 무시하면서도 자신은 무시당하기 싫어하는, 파렴치한 인간 군상의 진짜 얼굴을 영화에 담았다. 도대체 어떤 변화가 있었기에.

달라진 것은 봉준호 감독과 그를 둘러싼 주변환경이 아닐까. 자신이 지지하는 집단이 우리나라 정치의 헤게모니를 장악했고 자신과 친구들은 사회의 지도계층이 되었다. 그는 더이상 배곯고 춥고 힘들던 뜨내기 영화낭인이 아니라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세계에서도 최고의 감독 중 하나로 명실공히 인정받은 거물이다. 설국열차같은 계급사회의 저어기 뒤편에서 출발한 커티스 봉은 이제 1등석으로 올라와 운전기사 딸린 벤츠를 타는 봉 사장, 아니 감독님이 되었다. 세상이 뒤집어지길 바라는 것은 늘 하층민들이다. 양반네들과 가진자들, 그리고 봉 감독같은 사람들은 결코 세상이 뒤집히기를 바라지 않는다. 어쩌면 이 감독의 달라진 영화세계는 지배당하는 자에서 지배하는 자의 대열에 들어선 그의 위상을 반영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거장 봉준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저항하고 도전하는 젊은 날의 봉준호 자기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리라. 그가 이번 영화에서 박 사장을 칼로 찌른 기택을 기생충이라고 부르며 지하에 가둔 것은 이러한 두려움의 반영이라고 본다면 지나친 궁예질일까.   

2019. 4. 21.

사바하-선과 악의 경계 그리고 호와 불호의 경계.

[일부 스포를 포함하고 있으나 영화 내 스토리 해석에 방점을 둔 글은 아닙니다.]
 
나는 대중의 평가와는 반대로 이 영화가 장재현 감독의 이전 데뷔작, 검은사제들보다 더 뛰어난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불교적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고 그곳은 절대악의 존재가 없는 세상이다. 이렇듯 사탄이나 악마가 없는 오컬트 스릴러의 세계는 마치 적군이 없는 전쟁영화처럼 참신하긴 해도 낯설 수 밖에 없다. 감독은 여러차례 영화 내 등장인물(해안스님-진선규 역)의 입을 빌려 관객들에게 이 점을 주지시키려 하지만, 수백 수천 편의 영화들을 통해 동서양의 각종 악마와 마물들에게 익숙해 진 스릴러 팬들은 이를 쉬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복선 회수가 안됐다" 혹은 "개연성이 부족하다"라는 비난은 그 뒤에 한 가지 질문을 담고 있다. "그래서 누가 나쁜놈인데!"
 
하지만 애초에 이 영화에 절대악은 없었다. 혜안스님이 말했듯, 애초에 악이라고 규정지을 대상은 존재하지 않으며 누구나 자신의 마음속의 번뇌가 악일 뿐이다. 이것이 태어나면 저것이 태어나듯 손가락을 여섯개 가진 두 존재가 탄생했던 것이지, 그 둘이 애초에 각각 빛과 어둠을 담당하도록 역할이 명확하게 나뉘어진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미륵이 악행을 저지르기도 하고 악행을 저지르던 나찰이나 뱀으로 보이는 "그것"이 선을 이루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영화 전체를 지탱하고 있는 불교식 세계관과 온전하게 일치한다.
 
감독의 지난 작품, 검은사제들은 헐리웃 영화 엑소시스트를 한국적 느낌으로 번역한 것에 불과했다면 이 사바하는 진정 한국판 오컬트적 세계관을 창작해 낸 영화라고 생각한다. 번역본과 창작본. 두 영화 사이에는 그만한 차이가 있으며 영화적 완성도를 보아도 나는 두 번째 작품을 더욱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기독교식 선악구분에 익숙한 대중들은, 더욱이 지난 작품이 그 이분법적 세계관에 똑 맞았기에, 장재현 감독의 새 작품이 낯설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외모만 봐도 영웅인지 빌런인지 구분되는 DC나 마블의 세계와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우리는 거기에 맞게 눈높이를 맞춰야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법칙이 결코 이진법으로 해석되지 않을진대 하물며 공포영화가 이분법에 머무를 이유 또한 없으므로, 언젠가 관객이 이 불교식 세계관이 가져다주는 공포에 익숙해지는 날이 오면 이 영화는 재평가 받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사실 천사와 사탄이 깔끔하게 나뉜 세상보다, 여래가 악마가 되고 뱀이 미륵으로 바뀌는 혼돈의 세계가 더 두려운 것 아니겠는가.

2019. 1. 13.

한국영화부도의 날(국가부도의날 후기)

최근 충무로가 왜 망작들로 가득한지 그 이유 중 하나를 극대화해서 보여주는 사례. 조금 과장을 보태면, 나는 국가부도의 날을 보면서 한국영화부도의 날을 예감했다.

먼저 이 영화의 왜곡을 파악하려면 실제 IMF사태가 어떻게, 그리고 왜 일어났는지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과 이 영화는 외환위기와 국내신용위기를 혼용하지만 그 둘은 다르다. 외환위기는 달러가 없어서 벌어진 일이고, 국내 신용위기는 원화가 없어서 벌어진 일이다. 후자의 문제는 정부가 원화를 발행하고 지급보증을 하면 해결될 문제지만 달러부족 문제는 독자적으로 해결이 힘들다. 특히나 고정환율제 아래서는. 고정환율제 아래서는 모든 나라가 주기적으로 외환위기를 겪는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프랑스나 영국같이 큰 나라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미국도 금태환을 고집하던 시절 동일한 위기를 겪었다. 그리고 한국이 외환위기를 처음 겪은 것도 아니다. 그 전엔 미 재무부 도움으로 연명했던 것 뿐이지.

따라서 외환위기는 당시 고정환율제를 펴던 한국이 반드시 겪었을 문제고, 그 핵심은 경상수지가 적자인 상황에서 달러가 모자라 수입 결제대금과 외채를 갚을 달러가 없어 생긴 문제다. 물론 그것이 국내 신용위기를 부르긴 했지만 엄연히 그 둘은 다르다. 따라서 해결책도 다르다.

태국과 말레이시아 필리핀 같은 나라들은 물론이고 홍콩처럼 금융선진국도 간당간당한 마당에 한국이 자체적으로 달러를 조달할 방법은 없었다. 애초에 그러니 위기라고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럴 때를 대비해서 IMF라는 조직이 존재한다. 이 구원투수는 위기에 등판해 필요한 달러를 제공해주는데 그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도로 탕진할텐데. 매주 20억달러씩 소모하는 나라에 550억달러를 빌려줘봤자 반년이면 똑같은 위기에 똑같이 처한다. 그래서 IMF 골목식당의 백종원처럼 근본적 솔루션도 같이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그들이 준 솔루션의 목적은 단 하나다. 한국이 자발적으로 해외자본을 끌어들일수 있게 국내시장을 개방하고 제도를 선진화하는 것이다.

대중은 당시 IMF의 조치가 가혹하고 불공평했다고 주장하지만 그건 바보같은 소리다. 앞서 말했듯 550억 달러로는 불과 27.5주, 즉 반년밖에 버티지 못하니 그동안 한국의 외환수급을 정상화하기 위해선 급진적인 대책을 쓸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돈을 더 빌려줘야하는 것이고 IMF의 한정된 자본으로 많은 나라를 구제하는데에 반하는 일이다. 물론 그에는 충격이 따른다. 하지만 애초에 그런 급박한 상황이라 IMF를 부른 것 아닌가. 누구한테 돈 맡겨둔것도 아니고 다른 해결방안도 없었으면서 너네가 돈 더 빌려주고 더 천천히 개혁했다면 더 편했겠지 않냐는 것은 홍탁집 아들이 백종원보고 한 1년쯤 가게영업 도와주면서 솔루션 달라는 것 만큼이나 멍청하고 뻔뻔한 요구다.

영화의 역사왜곡은 이를 부정하면서 출발한다. 한국은행의 수장은 총재인데 영화 시작부터 총재를 총장이라고 하는 것은 이 시나리오가 최소 아마추어 수준의 리뷰냐 조언도 받지 않았음을 보여준다.(개봉 후 인터뷰에서는 실명 거론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총장이라고 했다지만 경제수석 재경부 차관 한은 팀장 IMF 미재무부 차관 등 이외 모든 공식 직책과 회사명은 변경없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백퍼 뻥이다) 게다가 한팀장이 속한 통화정책팀은 외환과 거의 무관한 부서라 외환보유고가 언제 동나고 롤오버가 얼마나 되는지 정보가 전무한 부서다. 이와 같은 단편적인 사실을 틀린 것을 넘어 영화 후반부로 가면 본격 역사왜곡이 시작된다.

IMF는 답이 아니라며 유럽 중앙은행들에게 돈을 빌리자는데, 유럽 중앙은행들은 자국 은행에 돈 빌려주는 곳이지 외국에 돈 빌려주는데가 아니다. 당장 베트남이 한은에 돈좀 달라고 하면 한팀장(김혜수 역)은 빌려 줄건가. (한은이 일반 회사에 실사 나가는 것도 웃겼지만) 일반 종금사와 건설사들 대차대조표와 자산이 얼마나 부실했는지 속속들이 봐 놓고서 부실을 덮어놓자(파산시키지 말자)는 말은 괴랄한 논리다. 그건 부실기업의 부채를 정부가 떠안고 강제로 은행권에 전가시키자는 소리와 똑같은 말인데. 그래놓고 본인은 정부는 파산(모라토리움)하자고 주장하는 대목에서 실제 웃음이 나왔다. 한번 모라토리움을 선언하면 역사에 남아 잊혀질때까지 수십년간 국가와 모든 기업이 해외채권을 발행할 때 높은 가산금리를 내게 된다. 우리가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도 상대적으로 낮은 가산금리에 해외채를 발행한 여러 이유 중 하나는 IMF 당시에도 모라토리움을 선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은의 핵심부서인 통화정책팀장은 이를 모를 사람이 아니다. 물론 그 부서가 모라토리움을 논의할 자리도 아니지만 그런 오류는 너무 많아 생략한다.

특히 IMF실사단 뒤에 따라오는 미 재무부 차관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한팀장이 마치 비밀을 발견한 듯 극적으로 연출하는 신에서는 쪽팔릴 경이었다. 당시 재무부 차관은 IMF외 다른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러 왔을 뿐더러, 달러를 빌리면서 왜 미국이 껴 있냐니 MS워드를 왜 마이크로 소프트사에게서 사서 쓰냐는 이은재 의원이랑 뭐가 다른가. 에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간단하다. IMF 구제금융은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고 IMF는 (미국의)사익을 위해 한국에 불리한 조건을 내건거라고. 이런 말도 안되는 음모론은 필부들이 술잔을 나누며 안주거리로 삼을 잡설에 불과한데, 그걸 돈내고 2시간동안 들으러 극장에 갈 관객들이 뭐 얼마나 있었겠나. 이 영화는 헐리웃의 Big Short을 모방해서 만든 것 같은데 그 영화가 수작으로 뽑히는 이유는 일반인들이 잘 이해하지 못했던, 실제 금융시장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쉽게 객관적으로 풀어내서 그런 것이지 필부의 뇌피셜을 영화로 만들어서 뜬게 아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과거 국가부도의 과정을 본 것이 아니라 현재 한국영화가 어떻게 부도를 내고 있는지를 본 것 같다. 흔한 클리셰와 플롯의 반복, 나팔바지만큼이나 촌스런 평면적 캐릭터들, 관객 피곤하게 만드는 감정선의 강요, 그리고 무엇보다 전문적 시각의 부재.

이 영화가 다루는 것은 500년 1000년 전의 역사가 아닌 불과 19년 전의 대한민국 역사다. 당시 IMF를 겪고 극복한 금융관료들이 모두 살아있고 그 시절을 겪은 수많은 금융인들이 존재하지 않나. 감독이 고증에 힘써야 했던 부분은 한국은행 사무실과 로비와 같은 공간적 배경이 아니라 우리가 왜 IMF에 손을 벌릴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시대적 배경이다. 감독이 영화적 소재로 사용한 IMF의 경험은 모든 국민들이 공유하는 처절한 기억이고 역설적으로 소중한 공공재라고 볼 수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의 경험을 영화로 사유화할 때는 최소한 객관적 팩트를 전달해야한다는 윤리적 소명의식이 있어야 하는것 아닌가. 하지만 그는 공공자산을 가져다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설파하고 극장수입을 올리는데 유용했다. 사실상 국민 전체에 대한 배임이고 우리 아픈 기억을 통째로 횡령한 것이다. 이 점을 이해 못하는 감독이 계속 영화를 배설하는 이상 한국영화계는 부도의 날을 맞이할 것이다. 반드시.

2017. 6. 25.

이태원에서 밀려난 한 생산자에게



자연 상태에서는 모든 식물들이 생존 경쟁을 벌입니다. 그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면 도태되는게 대자연의 법칙이죠. 어쩔 수 없습니다. 햇볕이 잘 드는 양지와 영양분과 물은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안타깝게도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람들이 편하게 찾을수 있는 공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여기가 모두가 좋아하는 가게였다면 아무도 당신을 쫒아내지 않았겠죠, 행여 쫒겨나도 갈 곳이 많았을거에요. 쓸모없는 것을 만드는 생산자들에 관심을 보이고 안전하게 보호할 의무를 누가 지녀야 할까요?  당신도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예쁘지 자라지 않은 저 가게 앞의 잡초들을 돌보지 않잖아요. 그러면서도 정작 본인은 소비자들과 지역 주민들이 자신의 제품을 억지로 구매하고, 가게에 헐값에 공간을 제공하고, 당신을 강제로 사랑해 줄 것을 요구하는건 파렴치한 일이죠. 당신이 비유로 든 식물계에서는 그것을 기생이라고 부릅니다.

그대의 추억과 낭만을 지탱하기 위해선 다른 이들의 땀과 눈물과 손실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 그 누구도 타인에게 그런 희생을 강제할 순 없어요. 바로 그것이 당신의 감상이 철없는 이기심으로 읽히는 까닭입니다.

to 유은혜 Studio_KOTTBATT
재美난학교 포럼 1회

2017. 6. 11.

부재의 의미, 그리고 정치.


그들은 그저 어질러진 검은 조각들에 불과했다. 의미없이 각지고, 찢어지고, 뾰족하게 날 선 검은 도형들. 그러나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윽고 흰 직사각형들이 온전한 모습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우리는 늘 존재를 본다. 검게 칠해지고 채워진 그 존재를. 반면 흰색은 공허한 여백이요 부재에 불과하다. 우리는 빈 것에 주목하지 않는다. 하지만 때때로 의미는 존재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재에 있기도 하지 않은가. 마치 이 그림이 그렇듯이.

*     *     *

세월호 뱃지는 정치적 아이콘이다. 세월호는 마음 아픈 사건이고 두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되는 비극이며 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일은 인도적 행위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정치가 없다. 하지만 그 뱃지가 정치적 코드로 해석되는 이유는 어쩌면 거기에 다른 죽음들에 대한 추모가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어떤 정치인들은 노란 뱃지를 달고 어떤 정치인들은 천안함 희생자들을 추모한다. 하나의 죽음에 가슴 아파하는 것은 보편적 인류애지만 다른 죽음에 눈을 감아버리는 것은 정치다. 이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존재가 아니라 부재를 보아야 한다. 마치 저 그림이 그렇듯이.

*     *     *

미술이 현실정치로부터 단절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미술관에서 정치를 떠올리는 나 자신이 왠지 편협하게 느껴진다. 아마 금호미술관에서 문준용 작가의 이름을 본 탓이리라. 좀 더 정확하게는 거기서 정치적 의미를 찾아낸 내 탓이겠지. 하지만 정치가 덧칠된 외투를 입은 작품도 충분히 감각적 충격을 건넬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것도 바로 같은 미술관에서, 5월의 어느 날 윤동천 작가의 대형 리본상 앞에서, 가슴이 먹먹해졌던 기분이 떠오른다.



십여년 전, 그날도 그랬듯이.

오늘도 산자는 죽은자의 흔적을 뒤적거리다 흐느끼며 운다.



위, by 프랑스와 모를레
아래, by 윤동천

2017. 6. 1.

슈즈트리 on 홍위병들의 블랙리스트

서울역 앞에 설치된 슈즈트리에 대한 비판이 거세다. 대중은 흉물스러운 오브제를 철거하라고 주장하고 기자들은 자극적 타이틀로 이를 부추기고 있다. 시민들은 대통령을 탄핵시키고 정권을 바꾼 터라 한껏 자신감에 차 있으며 집단행동을 정치 외의 영역으로 확대하려든다. 진중권, 반이정과 같은 미술 평론가들이 대중들을 제지하지만 그들은 듣지않고 자기들끼리만 의견을 교환하며 자기확신을 강화하고 있다.
 
우리는 물리학을 영화 인터스텔라로 배우고 경제학을 다음 아고라 게시판에서 배우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해당 분야에 수십년을 바쳐 연구한 전문가들의 의견은 조롱을 덕지덕지 달고 묻히기 마련이다. 왜? 이해하기 어려우니까. 그런 글들은, 자기표현을 권장하는 sns에 익숙해져 배우려기보다 가르치기를 즐기는 대중들에게 맞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에 그네들의 태도가 왜 반달리즘인지 길게 설명하는 것은 또하나의 헛된 노력이 될 것이다. 어느 서점에 가던 미학에 대해 쉽게 쓰여진 책 한권쯤은 있고 나는 진중권씨보다 더 쉽게 쓸수가 없으므로.
 
따라서 그냥 대중들의 주장을 따른 비슷한 사례를 상기해보련다. 가깝게는 박근혜 김기춘의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그렇다. 서울시 예산에는 예술작품에 할당된 항목이 있고 그 일부가 공공 설치미술에 투자되는데, 내 취향에 맞지 않는걸 만드는 작가에겐 단 몇달간의 기회도 주지 말아아하는 것 처럼(그리고 그걸 기업이 후원할리도 없으니 그는 결국 창작을 접든가 굶어죽어야 하는 것 처럼) 박근혜 정부의 눈에는 좌편향 문화인들이 그랬다. 정부 돈으로 사회질서를 어지럽히고 친북성향을 가진 문화인사들에게 왜 국가지원금을 주냐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기 취향에 어긋난 슈즈트리를 철거하라는 사람들은 박근혜 김기춘의 취향대로 작성한 블랙리스트에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실제 예술과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술과의 어마어마한 차이.
 
보다 완벽한 사례로 나치의 퇴폐예술이 있다. 화가시절의 히틀러의 작품들은 참 예쁘다. 파스텔톤의 색채로 표현한 평화로운 풍경이 캔버스를 가득 메우고 있으니,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린 사람이 수천만명을 죽일 수 있었나 싶기도 하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그는 화가로 실패했다. 동시대 미술계는 이미 "예쁜 그림"을 넘어서서 회화의 표현을 다변화하고 그 영역을 확장하고 있었는데 그는 여전히 수백년전의 지루한 "예쁜그림"에 경도되어 있었다. 그가 정치인으로 성공하여 집권한 뒤, '흉측한' 그림을 그리던 화가들의 작품을 모두 압수하여 "퇴폐미술전"이란 테마로 전시했는데, 역설적으로 이는 20세기 초의 최고 미술전시로 남았다. 이후 막스 에른스트나 케테 콜비츠같은 당시 생존화가들의 작품 뿐 아니라 피카소나 뭉크의 작품들도 같이 불태워졌다. 공공조형물에서 추한 작품은 배제해야한다고 주장하는 한국 대중들의 취향과 태도는 히틀러와 똑같이 닮았다.(그리고 "한마음 한뜻"을 강조하는 전체주의적인 사상도 똑같이 닮았다.)
 
또한 대중들은 자기 세금이 들어갔으니 자기 취향에 안 맞으면 철거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일견 옳은 말인데 내생각에 그럼 모든 공공조형물은 이건희나 이재용의 취향대로 만들거나 강남구에만 세워야 한다. 그리고 2030대들은 지방세를 거의 내지 않으니 가장 많은 세금을 내는 5060대 취향에 맞춰 매일 트로트 콘서트나 열어야 하지 않을까? 또 지방세에는 담배세와 취등록세도 있는데 비흡연자들이나 집을 사고팔지 않은 사람들은 이번 논의에서 좀 빠져야 할 것 같다. 이런식의 사고방식이 옳은지는 모르겠지만.
 
번외로 진중권씨를 비롯한 예술평론가들이 대중의 반달리즘을 막으려면 좀 다른 전략을 써야했다. 미적분학조차 배운 적도, 배울 생각도 없는 사람에게 선형대수를 가르칠 수 없듯 예술에 관심도 없는 사람들에게 이 현상이 왜 문화탄압인지 가르쳐봤자 씨알도 안 먹힌다. 대신 대중들은 예술에 대한 기준이 없다는 부분을 파고들어야 한다. 슈즈트리의 미학을 예찬하며 이 작품의 사회적 의미와 조형적 아름다움을 강조한 뒤 이를 이해 못하는 사람들은 현대미술을 모르는 무식한 원시인이라고 깔아뭉개야한다.(게다가 그건 사실이다) 대중들은 슈즈트리와는 비교도 안되게 혐오스러운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을 보기 위해 아귀같이 미술관으로 달겨들며 슈즈트리보다 더 정신 사나운 잭슨 폴록의 작품이 수천억원에 거래되자 앞다투어 작품 이미지들을 자기 블로그에 올린다. 당장 내일이라도 찰스 사치가 저 작가의 작품을 자기 콜렉션에 넣으면 대중들은 벌떼같이 몰려들어 슈즈트리 앞에서 인증샷을 찍고 작가를 팔로우 할 것이다. 찰스 사치까지 가지 않아도, 딱 열명의 예술평론가가 신문에 기고해서 이걸 이해 못하는 사람들을 폄하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리나라 대중들의 예술인식 수준은 딱 그정도밖에 안되니까.
 
얼마 전 배우 송강호는 jtbc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블랙리스트라는 것은 소문만으로도 그 힘을 발휘한다, 그런게 있다는 말을 들으면 모든 제작자들과 배우들이 작품을 고를때 이걸 정부가 좋아할까 생각해보며 자기검열에 나서게 된다고. 그의 말처럼 검열은 창의를 제한하는 가장 위험한 예술가의 독이다. sns에서 활개치는 저 홍위병들은  몇만원 내고 구입한 미술전 티켓과 블로그 포스팅을 완장으로 차고 안 이쁜 예술에 테러를 가하며 진중권씨 글에 악플을 단다. 송강호가 지적한 것처럼 이제 설치미술작가들은 예쁜걸 좋아하는 대중의 취향을 고려해 자기검열에 나서게 되리라. 분명한 반달리즘이다.
 
오천년의 역사를 가진 문화대국 중국이 변방의 작은 나라 한국의 문화를 수입하는 나라로 전락하게 된 데에는 홍위병들의 힘이 컷다. 붉은 완장을 찬 어리고 젊은 청년들이 앞다투어 자기 취향에 맞지 않은 문화예술품들을 파괴하고 문인들과 예술가들을 꿇어앉혀 집단 린치를 가했다. 그런 검열은 오늘날까지 계속된다. 그 결과 중국의 대중문화는 한국의 TV프로와 영화를 베끼기에 급급하고 중국인들은 가로수길에서 커피한잔을 마시기 위해 비행기를 타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검열은 문화를 파괴한다. 한 예술품에 대해 자신의 감상을 표출하는 것과 비난하는 것, 그를 넘어 철거를 논하는 것은 과연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신중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아멘.

2017. 5. 21.

문화계에 난입한 홍위병들


    
 
1. 여자의 다리가 트렁크 밖으로 묶인 채 나와있고 한 남자가 트렁크에 손을 얹고 담배를 피우고 있다.
2. 한 흑인 여자가 하얀 테이블 위에 흰 족쇄로 묶여 있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참고로 사진의 제목은 Bon Appetit.
 
둘 모두 여성에 대한 폭력을 표현한 사진이지만 sns에서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첫번째 사진을 본 사람들은 "성폭력을 표현하다니 개념이 썩었다"는 반응을 보이며 거칠게 비난했고 해당 잡지는 사과와 함께 발행본을 회수하여 폐기해야 했다. 두번째 사진을 찍은 David LaChapelle의 전시는 성황을 이루었고 snser들은 자랑스럽게 해당 전시회를 다녀온 사실을 자랑하기에 바빳다. 이처럼 모순된 대중의 반응은 세가지 무지로부터 나온다.
 
 
첫째, 예술 자체에 대한 인식 부족
 
양들의 침묵은 식인을 권장하는 영화가 아니며 대부는 조직폭력과 청부살인을 홍보하는 영화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데이빗 라샤펠의 작품도 백인들에게 흑인 여성을 맛있게 먹으라고 권유하는 사진이 아니고, 맥심의 사진 작가도 여자를 묶어서 트렁크에 넣도록 부추기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소재만 보고 작가의 표현에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댄다면 얼마나 많은 노벨문학상을 취소해야할 것이며 또 얼마나 많은 오르셰 미술관의 소장품을 불살라야 할 것인가. 어린이들이 읽는 동화에도 시체 성추행(백설공주), 살인(장화홍련전), 식인(헨젤과 그레텔), 장애인 비하(혹부리 영감), 동물학대(흥부와 놀부) 등 비 도덕적인 컨텐츠가 가득하니 전부 다 폐기해야 한다. 결국 우리의 작품목록은 초라해지고 예술가들의 캔버스는 빈곤해지게 된다. 이를 막기 위해 예술은 몰상식한 반달리스트와 끊임없이 싸우며 발전했다. 여성의 음부를 확대하고 동성애를 그린 쿠르베가 그랬고, 벗은 여자들과 피크닉을 즐기는 신사들을 그린 마네가 그랬다. 뒤샹은 사람들이 소변을 보는 변기를 작품으로 출품했고, 데미안 허스트는 더 나아가 자신의 소변을 작품에 활용했다. 그러나 이들은 또라이로 기억되는 대신 예술사에 미술의 지평을 넓힌 화가들로 기록되었고 오늘날에도 많은 작가들이 그 뒤를 잇고 있다. 그러나 대중은 이와 같은 노력에 찬 물을 끼얹으며 편집자가 첫번째 사진을 폐기처분하도록 압박을 가했다. 이는 또하나의 반달리즘에 불과하다. 차라리 '진부한 오브제나 클리세를 사용했다'고 비판한다면 모를까.
 
둘째, 메시지에 대한 이해 부족
 
백번 양보해 예술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정당하다고 하자. 그럼 왜 사람들은 맥심 잡지에 던지던 돌을 라샤펠에게 던지지 않는가? 이 작품이 주는 충격을 공감할 수 있게 작품을 좀 변형해 보자. 한 한국인 여성이 나체로 식탁위에 묶여 눈물을 흘리고 있고, 그녀 위에 욱일승천기가 그려져 있다고 상상해보자. 제목은 일어로 "맛있게 드십시오". 만약 이런 작품이 한국에서 공개되었다면 아마 한국인들은 미술관에 돌을 던지고 라샤펠과 협업한 명품 브랜드들의 불매운동을 벌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러지 않는다. 왜냐하면 작품에 담긴 메시지를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작가가 왜 핑크나 아쿠아블루, 혹은 모델의 피부 톤이 아니라 하얀 색을 썼겠는가? 그것도 작가는 이것이 의도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식기까지 모두 흰색으로 칠했다. 이래도 작품의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흑백 인종갈등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외계인이거나 맹인이다. 그런데도 대중이 라샤펠의 작품에 분노하지 않는 이유는 그 속에 담긴 메시지를 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읽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않은 것이다. 대부분은 미술관에 셀카를 찍고 블로그 포스팅을 하러가지, 작품을 읽으러 간 것이 아니니까.
 
셋째, 사대주의.
 
앞서 맥심 표지사진에 대한 논란은 영국의 한 코스모폴리탄 에디터로부터 나왔다. 우리나라 대중이, 자기 독자들에게 여자의 오르가즘을 판별하는 기술따위나 알려주는 것이 직업인 사람에게 예술과 표현에 자유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 이유는 그가(혹은 그녀가) 서구 잡지의 에디터이기 때문에 그렇다. 도대체 맥심과 코스모폴리탄이 뭐가 그리 다르길래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도덕적 설교를 늘어놓는가?? 반면 파격적인 라샤펠의 작품에 같은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 이유는 작가가 서구 문화권에서 성공한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만약 라샤펠이 첫번째 사진을 찍고, 맥심 표지에 두번째 사진이 등장했다면 대중의 반응은 180도 달랐을 것이다.(물론 그가 찍었다면 저렇게 촌스럽진 않았으리라) 대중들은 예술을 판별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존재한다고 믿으면서도, 본인이 이를 판별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권위에 쉽게 의존한다. 그들은 특히나 영어 혹은 불어를 쓰는 금발머리 백인은 그 권위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믿는것 같다. 
 
한국의 경제가 발전하며 대중들의 문화소비도 늘어났다. 사람들은 예술에 더 많은 시간과 돈을 쓰고 있지만, 이를 이해하는데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따라서 대중의 인식과 이해는 300년 전 수준에 머물러 있다. 문제는 문화소비가 늘어나며 대중들이 스스로 예술을 이해할 소양을 갖췄다고 착각하며 작가와 작품에 사회적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무지와 무관심으로 무장한 이들이 갑자기 예술계에 난입하여 도덕적 잣대와 다수의 취향, 정치적 메시지 등의 채점표를 만들어 작품 검열에 나서기 시작했다. 멀게는 조영남의 대작사건에서부터 가깝게는 서울역 고가도로의 설치미술까지, 이 문화계의 홍위병들이 중세의 눈으로 현대를 심판하며 시대에 역행하는 모습을 여러차례 봐 왔다. 문화계 인사들과 예술인들은 늘어나는 작품과 티켓판매 실적, 그리고 sns 팔로워 수를 보며 콧노래를 흥얼거릴 것이 아니라 대중과 각을 세우며 싸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들을 뒤를 따라다녔던 대중은 곧 앞서나가 당신들에게 무엇을 만들고 그리고 쓸지 지시할 것이다. 그들에겐 당신들은 자신의 취향을 맞춰줘야 하는 영화배우나 가수나 다름 없으니까. 그때에 이르면 미술계는 마치 청소년관람가 영화만 남은 밋밋한 영화제처럼 죽어있을것이다.

2016. 6. 6.

디케의 저울에 올려진 화투장

아침에 집을 나서며 어머니와 조영남의 작업방식이 정당한지 아닌지에 대해 현관에 서서 30분간 아야기하다 나왔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미술평론가 반이정씨의 논평이 있으니 이를 먼저 읽어보기를 권한다.(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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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4일, 검찰의 간단한 입장 발표가 언론에 보도되었다. 검찰은 "조 씨가 대작 화가인 송모(61) 씨에게 똑같은 그림을 배경만 조금씩 바꿔서 여러 점을 그리게 한 뒤 이를 고가에 판매한 것은 금전적 이득을 얻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대작 화가가 그린 그림을 자신의 작품인 것처럼 판매한 것은 불특정 다수의 구매자를 속인 행위라는 게 검찰의 판단이다. (중략) 조 씨는 검찰 조사에서 '팝아티스트로서 통용되는 일인 줄 알았다'고 진술했으나, 이 사건이 불거지기 이전에는 조 씨가 자신을 팝아티스트라고 표현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안다"라고 밝혔다.

이 인터뷰에서 검찰은 "화가의 그림"의 범주를 제멋대로 규정하고 있고 더 나아가 팝 아티스트 범위를 스스로 정의하고 있으며(스스로 팝 아티스트라고 한 적이 없으니 조씨는 팝 아티스트가 아니다), 그에 따른 법 집행을 예고했다.  

예술인들은 아테네와 법복입은 사람들 앞에 조영남을 방치했다. 다수의 신문 사설은 조영남을 비난하는 화가들의 인터뷰를 실었고 몇몇 미술인들은 '그는 예술가들의 고뇌를 욕보였다'고 성토했다. 그들은 조영남이 미웠을 것이다. 아마도 조영남같이 쉽게 언론의 주목을 받고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아트테이너들 모두가 미울 것이다. 어쩌면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사람들의 편견, 그리고 자기 내면의 감정들과 싸워가며 예고, 미대를 졸업하여 십수년간 작품활동을 이어와도 미술계 한켠에 자기 자리를 만들기 쉽지 않은 현실이 더욱 그들을 그렇게 몰아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영남이 미워, 그의 화투장을 변호해주지 않은 덕분에 우리는 "무엇이 그림인가"를 논할 주도권을 (미술에 대해)가장 무식한 검찰과 대중들에게 내주고 말았다.

미술인들은 (조영남이 아닌)그의 작품들을 대신해 법원에 서서, "변기 하나 사다가 제목 하나 붙이고 출품한 마르셀 뒤상보단 더 작품제작에 관여했다"고 해주지 않았고, "라파엘로도 자기 작품에 조수가 얼마나 기여했는지 밝히지 않았으니, 그도 사기죄에 해당하는가."라고 반문하지 않았으며 "표현기법 뿐 아니라 소재선정과 아이디어같은 컨텐츠도 현대미술의 핵심인데, 왜 자기 손으로 직접 윤전기를 돌리고 표지디자인을 하지 않는 소설작가들의 책은 대작이 아닌가"라는 의문들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 결과 무엇이 미술인지 (아무리 관대히 봐줘도)대충 5분에서 10분쯤 고민해 보았을 법조인들이 국가 공권력을 동원하여, 심지어 그런 고민을 해봤는지도 매우 의심스러운 대중이 여론몰이를 통해 미술과 화가를 통제하게 만들었다. 이제 모든 미술인들은 가만히 앉아서 자신의 그림이 합당한 미술인지 아닌지 법원과 SNS의 판결을 기다려야할 지도 모른다.(아마 일부 국회의원은 그림 뒷편에 조수의 작품 기여도를 명시하고 이를 문화관광부 산하기관에서 검증받는 '조영남법'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나치가 집권하던 1937년, 독일 뮌헨의 호프가르텐 회랑에서 '퇴폐예술전시회'가 열렸고, 32개의 독일 미술관에서 압수한 650점의 미술작품이 전시되었다. 당시 나치는 올바른 미술을 정의한 뒤, 이에 어긋나는 모든 기타 현대 미술, 그리고 유대인 화가들의 작품을 '퇴폐예술'이라고 규정지은 뒤 이를 억압했다. 이 전시회에는 에드바르트 뭉크나 파블로 피카소같이 대중들에게 유명한 이들 뿐 아니라 막스 베크만, 막스 에른스트,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파울 클레, 케테 콜비츠처럼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수많은 화가들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후 38년 5월 31일에는 '퇴폐예술품 압수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으며 이 새 법률에 따라 베를린 중앙 소방서 마당에서 1004점의 회화와 3825점의 그래픽이 소각되었고 그 외에 규모를 알수 없는 상당수의 작품들이 은닉되거나 해외로 유실되었다.


예술계 인사들은 미술에 대한 평가를 제복입은 이들에게 위임했을때 과거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기억해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