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6. 6.

영화 기생충, 그리고 계급의 법칙 + 사족 3개


[아래 리뷰는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반지하에서 살며 지상을 꿈꾸다 지하로 추락해버린 한 가장과 가족의 이야기.

 
이 영화의 시작은 한 친구가 장남 기우(최우식)에게 재물복이 들어온다는 수석과 부잣집 과외자리를 선물하며 시작된다. 학벌위조로 시작된 과외는 장녀 기정(박소담)의 사이비 그림치료로 이어지고, 또 그녀는 운전기사를 모함해서 쫒아낸 뒤 아버지를 불러들인다. 마지막으로 이 셋은 음모를 꾸며 가정부를 쫒아내고 그 자리에 어머니를 들여놓는 것으로 부잣집 기생하기 작전을 완벽하게 마무리한다.
 
쫒겨난 가정부가 한밤에 찾아와 벨을 누르기 전 까지는.
 
집주인들이 집을 비운 사이 찾아온 그녀는 두고간 것이 있으니 꼭 좀 문을 열어달라며 애처롭게 부탁한다. 문을 열어주자 그녀는 어리둥절하는 기생충 가족들을 지나쳐 집안에 아무도 모르게 숨겨진 지하공간을 열어젖히며 영화의 후반부를 시작한다.
 
우리는 피라미드의 각기 다른 층에 속해있지만 한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절대 낮은 곳을 쳐다보지 않는다는 것. 기택의 시선도 그러하다. 반지하에 살며 창문 너머의 지상만을 바라봤지 온전한 지하의 삶을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마치 벤츠 뒷좌석에만 앉는 박사장이 반지하의 삶을 모르듯이. 자신의 발 아래를 돌아보지 못하는 것은 마치 물리법칙처럼 언제 어디서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된다. 전 우주적으로 항상 F=ma가 성립하듯 아래를 향한 시선은 늘 충격과 공포를 동반한다. 사채업자들에게 쫒겨 지하에서 4년간이나 은둔하며 살아 온 가정부의 남편을 보는 기택의 시선도 그러했다. 

영화의 전반부가 유쾌한 신분상승 스토리였다면 그 후반부는 비참한 계층갈등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지상vs반지하vs지하. 그리고 이는 사회계급에 관한 두번째 물리법칙과 함께 시작한다. 세상에는 우리를 더 낮은 곳으로 끌어 당기는 힘이 존재한다는 것. 마치 중력처럼. 가정부의 남편은 스스로 지상에서 지하로 내려왔으며 반지하에서 살던 기택(송강호)과 기우는 희망을 위해, 혹은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지하로 걸어 들어간다. 박사장(이선균) 역시 아들의 생일파티를 위해 운전기사 기택과 함께 계단 아래에 쪼그려 앉아 숨어있다. 상한 무말랭이 냄새를 폴폴 풍기는 그와 숨을 맞대고서.
 
이 무시무시한 중력은 기택의 가족이 한밤에 박사장의 집에서 탈출하는 신에서 시각적으로 극대화된다. 불과 몇시간 전까지 유명한 건축가 남궁뭐시기 선생이 지은 저택에서 로얄 살루트를 비우던 기택과 그의 가족들은 차고를 열고 나서자 마자 끝없이 아래로 내달린다. 마치 하늘에서 땅으로 자유낙하하는 빗줄기처럼. 처음엔 부잣집 주택촌 언덕길 아래로 내달리고 둑방 아래를 건너 계단길을 따라 전속력으로 끝없이 달려 내려가고 내려가고 내려간다. 하지만 그렇게 내려간 그들의 반지하는 비참한 현실로 가득하다. 누가 상선은 약수라 했던가. 높은 곳에서 내린 비는 미세먼지를 씻어내릴지 몰라도 낮은 곳에 모이면 똥물을 왈칵 솟게 만드는데. 젖은 라이터로 시끄먼 똥물 튄 담배에 어렵사리 불을 붙여 한 모금을 빨아들이는 딸 기정의 입가에서 소리없이 읽히는 한 마디는 참으로 시의적절하게 이 상황을 요약한다. "아이 씨발"

다음날 아침 일장춘몽에서 깨어나 체육관에서 눈을 뜬 기택은 더 이상 반지하의 삶에 안주할 수 없다. 벤츠를 몰고 대저택에서 온갖 고오급 위스키와 꼬냑을 들이켜 본 그는 더 이상 열두 캔에 만 원짜리 필라이트 맥주에서 행복을 찾지 못한다. 선악과를 깨물은 아담처럼 그는 자신의 몸에서 부끄러운 무엇인가를 느끼기 시작한다. 킁킁. 반지하의 냄새. 사장님 사모님들은 지하도로 내려가 지하철을 타고 나서야 만날 수 있는, 그 칙칙하고 꼬리꼬리한 냄새. 냄새는 마치 가난과도 같아서 혼자서는 느낄수가 없고, 또 숨길 수도 없다. 기택 뿐 아니라 기우/기정이가 그랬듯이. 그들은 그제서야 자신의 진짜 삶이 얼마나 서글프고 비참한지 깨닫는다.
 
하지만 중력을 거슬러 올라가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비극으로 끝났다. 심지어 경제지 1면을 장식한 박사장조차도 이 굴레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아들이 경기를 일으키며 쓰러져 죽을뻔 했는데도 "귀신 나온 집에 살면 사업이 잘된다"며 이사 나가기를 거부하다 이런 비극을 맞이하고 말았잖은가. 그가 만약 요새 핫한 한남 더 힐이나 아리팍 펜트하우스로 이사갔더라면 아무 탈 없이 잘 살았을터인데.(뭐 기생충 네 마리에게 뜯어먹히기야 하겠지만) 하지만 지하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행의 기운이 느껴지는 그곳에 박사장의 가족을 가둔 것은 더 위로 올라가고자 하던 그의 욕망이었다. 상류층의 사정마저 그럴진대 기택의 현실은 말할 것도 없다. 애시당초 반지하는 지상보다는 지하에 더 가까운 곳이었으니 더더욱.
 
이 영화의 마무리가 더욱 슬픈 이유는 감독이 엔딩신에서 넌지시 던지는 메세지에 있다. 이 세상에는 계급이 있고, 우리는 결코 그걸 뛰어넘을 수 없다는, 그 불변의 법칙. 예고없이 주말에 사장 아들 생일파티에 소환된 송강호는 이선균을 바라보며 그의 사생활을 입에 올린다, "사장님 가족을 사랑하시는군요"라고. 그렇게 아빠 기생충은 무의식적으로 사장님이 그토록 싫어하던 그 선을 슬쩍 넘고 말았고 불쾌감을 숨기지 못하는 이선균은 그에게 계급의 선을 일깨워준다. 대저택의 뜰을 호젓하게 바라다 보며 시작된 간밤이 어떻게 체육관에서 끝나버렸는지 또 사랑하는 가족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지 납득하지 못하던 송강호는 그제서야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깨닫는다. 그 모든게 바로 넘을 수 없는 계급의 선, 아니 벽 때문이었고 그는 억눌러왔던 분노를 터뜨린다.
 
sns에 뻔지르한 문구나 올려대는 아가리 낭만주의자들은 부자들도 싸구려 짜파구리를 먹는 신을 보며 "보라 민주주의 사회서 인간은 평등하다"라고 외칠 지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근대국가에서는 누구나 몇푼만 주면 짜파구리를 사먹을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거기엔 짜파구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는 사람과 끓이는 사람이 있다.(그러고 보니 조여정은 얄밉게 충숙에게 짜파구리 한 입을 안주더라) 이선균과 송강호는 둘 다 아빠고 가장이지만 한 쪽은 사장 아빠고 나머지 한쪽은 기생충 아빠다. 하나가 같지만 나머지 하나가 다르다면 그들은 결코 동등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계급사회에 살면서도 서로가 평등하다는 환상 속에 빠져있지 않은가. 이선균이 송강호에게 일깨워 준 그 "선"은 바로 계급을 의미하고 "냄새"는 손에 잡히지 않는 그 계급을 오감의 영역으로 끌어내 주는 일종의 신분증이었을 것이다. 아니 이 경우는 낙인이라고 하는게 더 맞겠다.
 
영화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기택의 가훈은 바로 안분지족이었다. 하지만 분에 넘치게 지상을 꿈꿨던 송강호는 결국 지하로 추락한다. 그리고 물리적 위치가 낮아질 수록 소통의 영역 또한 함께 줄어든다. 스마트폰과 무전기로 소통하는 지상, 무료 와이파이 존을 찾아야만 카톡이 되는 반지하, 그리고 19세기의 통신수단인 모르스 부호로-그것도 단방향으로만 소통할 수 있는 지하의 삶. 그리고 그런 아버지의 메시지를 받아본 기정은 또 한번의 비극을 예고한다. 간신히 집행유예로 풀려나 반지하로 돌아오고서도 여전히 지상을 꿈꾸며 영영 전해지지 못할 독백과 함께.
 
"아버지 저에게 계획이 생겼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 그 집을 사는 것입니다."
 
그의 이루어질 수 없는 계획은 반지하에서 지하로 추락한 송강호의 비극이 아들에게 또 다시 반복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마치 아버지가 자식에게 가난을 물려주듯이.
 
"아버지는 그냥 계단만 올라오시면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영영 지하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여전히 계급사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처럼.
 
 
"부디 그때까지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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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1)
봉준호 감독은 이전에도 밀폐된 공간에서의 계급간 갈등을 그려낸 적이 있다. 프랑스 만화를 원작으로 한 설국열차. 그 영화에서 주인공은 열차 앞칸으로 한걸음씩 나아가 맨 앞칸에 도달하지만 결국 전체 체제가 붕괴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그렇게 보면 단 한칸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되려 지하실로 추락하는 기생충의 스토리는 더욱 암울하고 더욱 비참해졌다. 설국열차가 개봉한 2013년에 비하면 2019년 현재 한국사회의 빈부격차는 더욱 확대되고 저소득층의 가처분소득과 일자리는 줄어들었으며 계층이동은 더욱 어려워졌는데 어쩌면 감독의 세계관이 후퇴하는 것은 이러한 현실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
 
그런 사회에서 생존할 유일한 방법은 꿈을 꾸지 않는 것이다. 지하실의 남자를 기억하는가. 그는 자발적으로 불안정한 지상의 삶을 버리고 지하로 숨어들었고 박사장에게 감사하는 삶을 충실히 살았기에 4년이나 살아남을 수 있었다. 반지하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송강호의 가족들에게, 그는 처음부터 여기서 태어나고 살았던 것 같다며 지하의 삶에 완벽하게 적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송강호 역시 숙주를 죽이고 나서 자발적으로 침전하여 지하의 삶을 받아들인다. 어쩌면 봉준호 감독은 계층이동이 거의 불가능해진 한국 사회에서는 포기하고 안주하는 것 만이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자조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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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족 2)
기생충은 쟁쟁한 경쟁작들을 물리치고 2019년 칸 영화제의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논란의 여지 없이 대중성까지 갖춘 이 영화는 상업적으로도 흥행하고 있다. 하지만 칸은 본디 영화의 대중성이나 성적보다 예술성과 정치적 색채에 높은 점수를 줘 왔다.(2005년 수상작이 화씨 9/11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따라서 봉준호 감독의 7번째 장편인 이 영화는 영화적 기교나 표현 뿐 아니라 내포한 메시지나 정치적 색채도 칸의 취향에 잘 맞아 의외의 대상을 수상한 것이 아닐까 한다.
 
이 근거없는 추측을 좀 더 확장한다면 계급사회와 거기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쉬운 비유와 상징들로 강조해서 보여준 것, 그리고 처음엔 두 피지배 계층이 숙주를 차지하기 위해 협력을 거부해서 서로 싸우지만, 마지막에 지배층인 박사장을 찌르는 신 등이 진보적 색채가 강한 서구의 영화인들의 입맛에 딱 맞았으리라.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그들의 위선과 가식을 읽는다. 영화는 반지하에서 사는 기생충 가족의 현실을 구질구질하게 묘사하지만, 70억 인류 중 절대 다수는 그보다도 더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 세계 중위권 가구 소득은 약 12,000달러 밖에 되지 않는데 비해 우리나라 고졸 1인의 평균임금은 그의 약 3배나 되고 이는 세계 상위 약 1% 안에 드는 상류층이다. 부르고뉴 산 와인을 마시고 이탈리아 장인이 한땀한땀 정성들여 만든 턱시도를 입고서 일등석 비행기를 타고 칸에 도착하는 품격있고 엘레강스하며 고매하신 영화인들은, 지구상에는 이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갈 수 있는 사람보다 가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평균적인 인류의 삶이 어떤지 가늠할 생각 조차 없는 그 상류층들은 자신만의 축제를 열어 빈민 뿐 아니라 (지구적 관점에서)중산층의 박탈감과 비극마저도 끌어다가 영화의 소재로 삼아 윤리적 우월감과 명성을 얻었다. 뭐 돈은 당연히 따라올 것이고.
 
여담이지만 어차피 사족으로 쓰는 글이니 덧붙이자면, 나는 2017년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도 그들의 이런 위선을 보았다. 수상자 중 하나였던 메릴 스트립은 연설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이민장벽을 우아한 어조로 비난했다. 하지만 그녀의 지적은 부당하다. 트럼프는 불법 이민자들을 막고 시민권자들의 권리를 보호하겠다고 했고, 실제로 그러고 있다. 그리고 그게 바로 대통령이 할 일이다. 아니면 뭐 국가 수장이 불법을 방임하란 말인가. 게다가 미 합중국의 대통령은 유엔사무총장이나 지구방위대가 아니다. 비록 열린 이민정책이 미국의 인재풀과 사회를 더욱 역동적으로 만들어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 혜택은 고루 배분되지 못했다. 자본가들은 더 나은 노동자들을 고용할 수 있겠지만 동시에 미국의 저소득 노동자들은 점점 뒤로 밀려나고 있다. 물론 나 역시 경제학적으로 그런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저소득층의 삶을 개선한다고 생각하지만 옳든 그르든 대중과 유권자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건 잘 빼입고 잘 배운 잘난 사람들끼리 지지고 볶는 귀족정이지.

되려 인종차별은 헐리웃에서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현상 아닌가. 미국의 소수인종에조차 속하지 못하는 아시안들의 눈에는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비흑인이 흑인에 대한 농담을 하면 sns에서 가루가 되도록 까이지만 안경 낀 동양인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은 위트넘치는 유머감각으로 받아들여진다. 또 원작에 엄연히 존재하는 소수인종 캐릭터들을 지워내기까지 하는데 닥터 스트레인지의 에인션트 원은 본디 아시아 계였지만, 아시아인이든 여성이든 똑같은 minor이니 상관 없다고 생각했는지 제작진은 백인 여자인 틸다 스윈튼에게 배역을 맡겼다. (just go on a trip~) 이런 인종 바꿔치기는 너무 흔해서 아예 화이트 워시라는 전문용어까지 존재한다.
 
영화 기생충에도 영화인들의 이런 위선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신이 있다. 바로 폭우가 쏟아지던 날 아들 기우가 비를 맞으며 계단에 서 있는 장면. 설정 상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한 그 장남은 $500짜리 크리스찬 디올 스니커즈를 신고 있다. 아마도 봉준호 감독은 배우 최우식에게 낡고 추리한 운동화를 신고오라고 지시했을 것이고 그는 신발장을 뒤져 한 10년 신었던 낡은 스니커즈를 골랐을 것이다. 빈곤과 열악한 환경을 강조하는 장면에서 비싼 신발을 신고 등장하는 이 장면은 아마 영화인들이 그들이 그려내려는 실제의 삶과 얼마나 괴리되어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신이 아닐까 싶다. (배우를 비난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와 별개로 그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너무나 훌륭하게 캐릭터를 소화해냈다.)

물론 수많은 혜택을 누리고서 이런 글을 쓰는 나 역시 그 위선자 대열의 끄트머리 어딘가에 서 있겠지만.

 
*      *      * 

 (사족 3)
본인은 어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봉준호 감독은 정치와 온전히 분리될 수 없는 감독이다. 그는 박근혜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렸고 정의당원일 뿐 아니라 자신의 영화 곳곳에 사회에 대한 비판을 숨기지 않았다. 영화 초중반 이선균의 대사, "코너링이 훌륭하시네요" 라는 대사에서 우병우 전 민정수석의 아들 병역비리를 연상하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영화에 담긴 메시지도 정치적 배경에 따라 변한다는 것.

살인의 추억에서는 공권력이 시민을 보호하기는 커녕, 위협하는 군사독재 시절의 폭력적이고 암울한 시대상을 담아냈고 괴물에서는 생태를 파괴하는 미군 그리고 그 앞에서 무력한 한국의 치안시스템을, 그리고 박근혜 정권시절 개봉된 설국열차는 하위계층이 반란을 일으키는, 다분히 혁명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주인공은 항상 순박하고 선량한 사람들이었으며 가장 최근 개봉된 옥자 역시 극악무도한 코쟁이와 다국적 자본이 착한 주인공을 위협하는 구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봉준호 감독은 자기 캐릭터들에게 기생충이라는 다소 경멸적인 타이틀과 함께 그들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파해쳤다. 서민이라고 착하기는 커녕, 돈 없으니 얼굴도 구겨지고 마음도 구겨지고 사기치고 삥땅치고 속여먹는 일에 별 죄책감도 없는, 남을 무시하면서도 자신은 무시당하기 싫어하는, 파렴치한 인간 군상의 진짜 얼굴을 영화에 담았다. 도대체 어떤 변화가 있었기에.

달라진 것은 봉준호 감독과 그를 둘러싼 주변환경이 아닐까. 자신이 지지하는 집단이 우리나라 정치의 헤게모니를 장악했고 자신과 친구들은 사회의 지도계층이 되었다. 그는 더이상 배곯고 춥고 힘들던 뜨내기 영화낭인이 아니라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세계에서도 최고의 감독 중 하나로 명실공히 인정받은 거물이다. 설국열차같은 계급사회의 저어기 뒤편에서 출발한 커티스 봉은 이제 1등석으로 올라와 운전기사 딸린 벤츠를 타는 봉 사장, 아니 감독님이 되었다. 세상이 뒤집어지길 바라는 것은 늘 하층민들이다. 양반네들과 가진자들, 그리고 봉 감독같은 사람들은 결코 세상이 뒤집히기를 바라지 않는다. 어쩌면 이 감독의 달라진 영화세계는 지배당하는 자에서 지배하는 자의 대열에 들어선 그의 위상을 반영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거장 봉준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저항하고 도전하는 젊은 날의 봉준호 자기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리라. 그가 이번 영화에서 박 사장을 칼로 찌른 기택을 기생충이라고 부르며 지하에 가둔 것은 이러한 두려움의 반영이라고 본다면 지나친 궁예질일까.   

댓글 9개:

  1. 뒤늦게 이곳을 알게 되어 역주행 중입니다. 딴지는 아니고, (사족 1)에서 설국열차 원작은 일본이 아닌 프랑스 만화라네요. 저도 (사족 2)에 동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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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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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저도 윗분처럼 뒤늦게 이곳을 알게되었는데 보물창고네요.크리스찬 디올에서 저는 글쓴이 분과 약간 생각이 다릅니다. 기우네 가족은 imf가 터지기 전에 맥락상 유추해보면 최소한은
    중산층에 삶을 영위했던것으로 보입니다. (글쓴이 분께서 말한 수직적인 계급) 기우가 디올 신발을 신고 꾸정물이 밀려오는 장면에서 imf때 대기업이 파산하고 줄줄이 도산했는데 기우또한 위(대기업)에서 내려오는 꾸정물로 인해서 중산층 삶을 영위하는 (크리스찬 디올 신발)이 오염되어버렸죠. 박사장네가 벨을 누른 순전히 갑작스러운 운이라는 이유로 기우네는 꾸정물을 덮어쓰는데 실제로 대기업의 imf도 갑작스럽게 파산해서 많은 중산층들이 꾸정물을 뒤집어 쓰게되죠. 그냥 저의 취중의견일 뿐이고 글이 너무 좋습니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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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 그러게요 그게 봉테일의 의도와 더 맞을수도 있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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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선생님 정말 실례되는 말이지만 혹시 이창동 감독의 버닝 보셨을까요....?
    한국영화에서 굉장히 독보적인 영화라고 생각을 하는데
    보셨다면 선생님만의 독창적이고 독자적인 해석을 읽어보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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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부끄럽지만 보려고 마음 먹었다 아직 못봤습니다. 보고 감상평을 쓰게 되면 꼭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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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선생님은 과연이 실타래들을 어떻게 풀어가고 재해석 할지가 굉장히 궁금했어요. 소통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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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그리구 예술,문학등 굉장히 섬세 하신분 같은데 리우군의 다락방이라는 영화 유튜버가 있는데 굉장히 퀄리티 높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선생님께 드리는 선물이 됬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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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감사합니다! 썸네일들만 봐도 흥미롭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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