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9. 3.

박서보와 국립현대미술관

우리나라의 여러 미술관 중에서도 내가 국립현대미술관을 가장 좋아하는 데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중 하나는 [국립]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품위와 엄격함을 유지하면서도 대중들에게 친절함을 잃지 않는 그 자상함에 있지 않을까 한다 . 그리고 지난달 막을 내린 박서보의 전시회는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 전시회는 특이하게도 작가의 그림을 역순으로 전시했는데, 아마 이는 아래 설명할 모종의 이유 때문이리라.

미술에는, 특히 그 감상에는 정답따윈 존재하지 않으니 이를 내 멋대로 해석해보려 한다. 1950/60년대의 우리 할아버지/할머니들이 그랬던 것 처럼 박서보 역시 황폐하고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나 서구를 동경하는 분위기에서 자랐을 것이다. 한끼를 먹으면 다음 끼니는 굶어야 했고 자고 일어나면 동네의 누군가가 죽어나가던, 우리가 정말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 머리 노오란 백인들의 문화는 동경의 대상이었으리라. 대다수의 1세대 한국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서구의 화풍을 모사하는 것으로 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 기술은 모방할 수 있어도 영혼은 베낄 수 없어 그런 것일까. 다른 선후배/동료 작가들이 그러했듯 그 역시 내적 갈등을 겪은 끝에 전통적 화풍으로 회귀한다.

내가 금융에 적을 두기 전, 고 이만익 선생님을 뵙고 인터뷰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한국에서 서양화풍을 곧잘 따라해 '너는 미술에 재능이 있다' 라는 말 한마디에 겁없이 파리로 떠났지만 거기에서 자신은 개성이 없는 아시아 변방의 한 그림장이에 불과했다고. 그러다 결국 그는 한국의 전통미술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다고 한다. 박서보 역시 이와 비슷한 단계를 거쳤다. 그는 1960년대 초기 파리에 머물며 당시 유행하던 엥포르멜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다.

원형질(原形質) No. 18-64, 1964년 작
하지만 그 역시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한 한계를 느꼈으리라. 막걸리에 파전을 즐기던 우리가 파리의 어느 하우스파티에 초대받아 와인과 치즈를 대접받을 때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 불편함을 느끼는 것 처럼, 애초에 파리지앵으로 태어나지 못했던 그 역시 어느 순간 엥포르멜이라는 단어부터 표현기법까지, 그 모든 것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 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이후 그의 작품에선 점차 한국적 정취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유전질(遺傳質) No.2-68, 1968년 작
그가 단색화로 나아가기 전, 당시 유행하던 팝아트적인 느낌에 오방색을 입힌 60년대 후반의 작품은 그런 내면의 갈등을 넌지시 비추고 있다. 스윙스같은 토종 랩퍼들이 아무리 흑인 흉내를 내고 혀를 돌려 꼬아봐도 빌보드 힙합 레이블에 이름을 올리기는 커녕 흉내쟁이에 불과한 취급을 받듯, 그 시절 파리에 머물던 1세대 화가들도 아마 비슷한 감정을 느꼈으리라. 그래서 그들 중 많은 수가 한국 고유의 미적 세계로 회귀한다. 아마 이 작품은 그 시발점이 아니었을까.

묘법 No.991004 / No.000321, No.000327
이후 그는 한국의 전통적인 색채를 이용해서 자신만의 단색추상화 세계를 구축한다. 더 나아가 작품의 재료로 자연친화적인 닥종이를 사용하면서 단순히 색채로 뿐 아니라 철학적으로도 그는 더욱 깊게 전통적 미학의 세계로 파고든다. 그렇게 그는 한국의 단색화의 대부로 불리며 한국의 현대미술을 주도하는 작가 중 하나로 굳건히 자리잡았다. 
묘법(描法) No.180503, 2018년 작
묘법(描法) No.071208, 2007년 작
앞서 말했듯이 이 전시는 독특하게도 작가의 작품을 시대적 역순으로 전시하고 있다. 한국은 더이상 세계 예술계에서 듣도 보지도 못한 무명의 국가가 아니라 작지만 한편으론 선명하게 자신의 자리를 잡은 신생국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 예술가들은 대중예술뿐 아니라 현대미술이나 클래식 그리고 무용에서도 모방을 넘어 그 수준을 한단계 높이는데 일조하고 있다. 그 덕에 BTS가 개량한복을 억지로 입고 춤을 추지 않아도, 싸이가 자신의 신곡에 자진모리 장단을 넣지 않아도, 조수미가 '내 발성의 힘은 김치덕분'이라는 뭐 그런 국뽕적 요소를 강조하지 않아도 그들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동시대 문화와 잘 어우러진다. 그런 오늘날의 눈높이로 볼 때 1세대 화가들의 전통적 미학에 대한 집착은 살짝 고루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지칠줄 모르는 수행자 역시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다시 한번 자신의 화풍에 변화를 주었다. 그는 형광색이나 밝은 파스텔 톤, 혹은 도발적인 핑크 등 전통적인 한국의 색채에서 벗어나 마치 마크 제이콥스 같은 명품브랜드들과 콜래보레이션이라도 할 것 같은 세련된 색채로 자신의 작품 영역을 확장했다. 여든 여덟살의 노작가의 변신 치고는 꽤나 파격적이지 않은가.

그리고 그 만큼이나 시계열의 강박에서 벗어나 세련된 현대작들을 먼저 배치하여 관객의 흥미를 이끄려 노력한 국립현대미술관 기획자들의 신선한 발상에도 박수를 보낸다. 현대미술사를 전공한 그들은 이 전시회를 기획하면서 박서보의 전성기 시절의 작품들, 칙칙하고 올드하지만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작품들을 앞에 배치하고 싶은 유혹들을 수도 없이 느꼈을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 정석적인 전시회의 공식에서 벗어나 아흔을 바라보는 작가의 현대적인 감각의 새 작품들을 전면에 배치한 것은 우리와 같은 아마추어 관람객들이 현대미술에 조금이라도 더 매력을 느끼길 바라는 소망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요란한 단어들의 조합 없이는 예술을 설명하지 못하는 일부 미술평론가들이나 불친절한 작가들과는 달리, 그들은 우아하면서도 친절한 태도로 손을 내밀어 우리를 현대미술의 세계로 안내하고 있다.

#MMCA, ♡MMCA

댓글 2개:

  1. 저도 2주전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박서보 선생님의 작품을 감상했습니다. 작품을 다 감상하고 나오면서 운좋게 박서보선생님을 뵐 수 있었는데요.
    박서보선생님이 이런 저런 말씀을 하셨는데 저는 이말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현대사회는 스트레스로 가득찬 사회이다. 현대 미술은 현대인의 스트레스를 예술작품이 습자지처럼 흡수하는 역할을 해야한다. 과거 미술이 그림을 통해서 어떠한 뜻을 대중에게 전달하려고 했다면 현대미술은 그 반대가 되어야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포스팅 감사합니다. 전시회 다니면서 한작가가 4~5가지 스타일 작품을 시기별로 변화시키면서 성장했다는 것에 큰 깨달음을 느낀 하루였습니다.

    답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