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7. 26.

현 20대는 "가장" 힘든가? -헬조선의 헬철부지들

굳이 자세한 뜻을 풀이해주지 않아도 어떤 의미인지 파악할 수 있는 단어가 있다. 헬조선. 그리고 그 단어를 만들어 낸 20대들은 자신들이 모든 대한민국 국민 중 가장 고통스러운 세대라고 주장한다. 그들 주장의 허구와 내재된 유아성, 그리고 그 위험성을 분석해 보자.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1. 단군이래 최고스펙을 갖췄는데도 취직이 어렵다.
2. 그러니 자산을 축적하기가 어렵다.
3. 따라서 연애 결혼, 그리고 출산과 육아가 힘들다.
4. 이 모든게 사회구조 탓이며 기성세대의 잘못이다.
5. 따라서 이런 구조를 개혁하는 것은 정당하다.

자 ,1번부터 시작해보자. 그들이 단군 이래 최고 스펙을 갖춘건 사실이다. 하지만 역대 어느 세대가 취업 당시에는 선배/부모에 비해 최고스펙을 갖추지 않았던가. 1인당 GDP가 장기적으로 늘 최고값을 경신하는 것 처럼 구성원들의 능력이 경신하는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그들이 고 스펙을 가지게 된 것은 본인의 노력 뿐 아니라 부모 세대가 자식의 교육에 투자를 아끼지 않은 덕분이기도 하다. 그 투자금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5060대, 그 꼰대세대가 자신을 위한 소비를 아낀 데서 나온 것이다. 이 투자는 교육 뿐 아니라 의식주와 같은 생활 수준 전반에 걸쳐 이루어졌다. 20년 전만 해도 잘난 서구문물의 상징이었던 맥도날드 햄버거는 이제 싸구려 패스트푸드로 전락했고, 먹고 입는 것 만을 보면 이제 서울의 1020대들과 뉴욕 런던의 젊은이들 사이에는 거의 차이가 없다. 이렇게 현 세대는 단군 이래 가장 호화스러운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저숙련 노동집약적 직업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따라서 해당 분야 산업들은 노인 빈곤층, 혹은 동남아시아 등의 EM에서 온 노동자들로 채워져 있다. 그들은 "부모 세대가 배곪고 노예같이 일했다고 나까지 그래야 하느나!"라고 항변한다. 하지만 지금은 윤리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측면을 보는 것이다. 핵심은 기업이 20대가 원하는 연봉을 줄 만큼 그들의 생산성이 높지 않기에 청년 실업률이 높은 것이다. 정리하자면, 대한민국 산업은 저숙련 노동자와 고임금 대졸자들을 둘다 필요로 하는데 현재 20대들은 대부분 교육에 거액을 투자하고 높은 생활 수준을 누려온 결과 저숙련 노동자가 되기를 거부한다. 따라서 노동집약적 산업의 구인난과 대졸자들의 구직난이 동시에 발생했다. 노동시장이 폐쇄된 완전 경쟁시장이라면 노동집악적 산업의 임금이 오르거나 대졸자들이 굶어죽기전 요구임금을 낮춰야 하지만, 우리나라는 저임금 외국인 노동자를 수입하고 20대는 취업대신 고임금 고숙련 노동자인 부모세대에게 의존하는 것으로 해결하고 있다.

2. 따라서 이들은 자산을 축적하기 어렵다고 주장하지만 역대 20대가 자산을 축적할 수 있었던 시대는 없었다. 게다가 자산을 축적하기 힘든건 그들의 높은 소비성향 때문이지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아니다. 일례로 해외여행객 수를 보면 1990년에 연 150만명에 불과했던 내국인 출국자 수는 2016년 현재 2,238만명으로 15배나 증가했다. 어떤 이는 이러한 통계를 일부 상류층의 이야기로 평가절하하려고 하겠지만 1년 출국자 수가 인구의 40%가 넘는다는 것은 일부의 이야기일 수 없다. 국민 전체의 생활수준과 소비성향이 올라간 것이다. 게다가 금융서비스 접근성을 보자. 90년대 이전만 해도 은행권에서 대출을 잘 받기 위해서는 개인적 친분이 필요할 정도로 금융서비스는 소수에게만 허용된 것이었지만 이젠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주택담보대출을 신청할 수 있다. 대출을 받아 집을 사는 대신 해외여행을 가고 선진 사람들과 비슷한 수준의 식문화를 즐기는 것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자산 축적을 하지 못한 것은 그들의 선택에 따른 결과일 뿐이지 사회구조적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3. 연애가 힘들다는건 개소리고 결혼이 힘든건 성비 불균형 때문이며 출산육아가 힘든건 소비성향이 높아서이다. 현 20대는 역대 가장 연애를 많이 하는 세대다. 첫경험 연령이 낮아지는 것이나 결혼전 성관계 파트너 횟수만 봐도 이전 세대와 현격한 차이를 보이지 않는가. 결혼이 힘든건 8090년대에 광범위하게 벌어진 여아낙태로 성비 불균형이 극심하게 벌어진 탓이다. 출산과 육아는 과거가 더 힘들었다. 과거와는 달리 이젠 아이를 낳고 나면 조리원에도 가야하고 산모는 살도 빼느라 고생해야하고 애를 영어유치원에도 보내면서도 자신이 과거에 누리던 문화적 생활 수준을 영위하느라 힘든 것이다.

4. 그들은 이 모든 것이 사회, 혹은 윗 세대 때문이라고 불평하지만 이는 모두 본인이 선택한 결과일 뿐이다. 만약 본인들에게 저런 선택을 하도록 압력을 가한 것이 사회라는 변명을 한다면 그들은 먼저 자신의 자유 의지를 부정해야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게 바로 저들이 주장하는 바이다. 우리가 미성년자에게 법적 의무를 부여하지 않는 것은 미성숙한 판단 능력을 가진 이에게 성인의 책임을 묻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무가 없다면 권리도 없다. 현 20대들은 이 모든 선택의 기로에서 본인들이 내린 결정의 책임을 사회, 혹은 부모에게 전가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저들을 미성숙하다고 부르는 핵심 이유다.

5. 따라서 그들이 주장하는 개혁은 대단히 위험하다. 그들의 목적은 공정하면서도 효율적인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전가할 희생자를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득세는 한푼도 내지 않으면서 재정의 배분을 요구하고, 본인에게 투자하는 대학등록금이 비싸단 이유로 정부에게 보조금을 요구하면서 대학생 유흥비, 핸드폰 요금 지출, 배낭여행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수익자가 비용을 부담하지 않는 사회 구조는 효율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잘못되어 있다.

20대들에게는 우리가 가지지 못한 장점이 많다. 그들은 이미 사회 권력구조에 적응한 3040대와는 달리 성차별 노동시장의 왜곡 일상에 만연한 부정부패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아직 본인이 성인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자각하고 있지 못하다. 박근혜 탄핵에 앞서 가장 적극적으로 정치적 의견을 개진했으면서도 투표율은 여전히 최저를 찍었고, 현 세대의 어려움을 알아달라고 외치면서 정작 자신들은 다른 세대를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지금 "우리땐 더 힘들었어"와 같은 꼰대류 잔소리를 하자는 것도 아니고 "너보다 힘든 사람 많으니 불평하지 마라"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너희들처럼 남들도 다 힘드니까 네 밥값은 너 스스로 알아서 하라는 말이 하고 싶었다. 즉 성숙한 민주사회의 구성원 노릇을 하라는 얘기다. 아니면 닥치고 참정권을 내놓던가.

2017. 7. 22.

환각제 먹은 조세정의

저들이 외치는 바에 따르면 납세자의 거의 절반은 소득세를 한푼도 내지 않으면서도 열심히 일하고 교육받은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들이 소득 절반을 내는게 조세 정의라고 한다.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라면 이걸 어떻게 정의라고 부르겠는가? 요새 대마초 LSD등 향 정신성 약물들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데 생각보다 복용자들이 많은게 틀림없다.

2017. 7. 18.

정신병자도 대학교수를 하는 나라, 싱가포르.

비록 독재와 언론탄압으로 "서방의 북한"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지만 싱가포르는 분명히 훌륭한 복지시스템을 가진 나라로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캐치프레이즈가 가장 잘 어울리는 나라이다. 얼마나 복지가 좋은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사람에게 대학교수라는 직책을 맡기기까지 했다. 그 수혜자는 놀랍게도 한국인인 신장섭이란 사람인데 오늘 이재용 재판의 증인으로 불려나와 자신의 정신지체를 뽐내 많은 금융인들의 동정심을 얻었다. 각박한 경쟁으로 휴머니즘이 사라져가는 오늘, 이런 이에게도 교수라는 직업을 준 싱가포르의 복지시스템에 찬사를 보내며 가슴아픈 그의 장애를 돌아보도록 하자.

그는 재판에서 삼성물산 합병 뒤에 주가가 15%정도 반등했으므로 결과적으로 주주들에게 이득이었으며 국민연금의 결정은 합리적이라고 주장했다. 이건희가 혼수상태에 빠진 뒤 삼성물산의 주가는 고점에서 5.5만원이 폭락한 뒤 합병직후 고작 2만원 반등했다.(그리고 이후 계속 폭락했다) 일단 왜 건설회사가 옷만드는 회사와 합병했는가라는 질문은 접어두기로 하자. 그건 이 장애우에게 너무나 어려운 질문이니까. 안타까운 일은 신장섭씨는 30% 폭락과 15%반등 중 어떤것이 더 큰 쪽인지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유아는 말을 배우기 전부터 숫자의 대소를 헤아리는 능력을 가지게 되므로, 이분은 적어도 만3세 미만의 지적능력을 가진 것으로 분석된다. 그가 만약 한국에 살았다면 분명 보이스 피싱의 희생자가 되었을 것이다. 5.5만원을 주고 2만원을 받는 것을 이익이라 생각하는 지능을 가졌으니까. 이런사람이 먹고 살 수있는 환경을 마련해 준 싱가포르라는 나라의 시스템이 참 대단하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 우리는 삼성 오너 역시 다시 평가할 팔요가 있다. 저런 지적장애가 있는 사람에게 증언을 부탁한 것은 이재용측 변호인이었는데 알고보니 그동안 그는 삼성경제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이제까지 이재용은 지분도 거의 없으면서 수백조짜리 회사를 거져 먹으려고 하는 금융범죄자인줄 알았는데 뒤에서 이런 선행을 하고 있었다니 참으로 감동스럽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신장섭씨 논리에 따르면 자신이 구속되고 나서 삼성전자가 1년도 안되어 2배로 뛰었으니, 그가 삼성의 수장이 되어 주주들에게 가장 잘한 일은 구속됐다는 것 아닌가. 영어의 몸이 되어 불편한 와중에도 주주들과 국민들에게 재벌이 회사에 끼치는 영향이 어떤지 온몸으로 강조해준 그의 희생정신이 참으로 놀랍다.

혹자는 신장섭이 학자로써의 기본적 양심을 잊고 명명백백한 사실을 부정하는 증언을 했다고 분개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리 부패했기로소니 어찌 -30%보다 +15%가 좋다라고 주장하겠는가. 사람들이 그 말같잖은 소리를 믿어줄거라고 기대하든, 아니면 본인이 진실로 그리 믿든 그는 분명 정신지체를 가지고 있다. 이런 장애인을 돌봐준 싱가포르 국립대학과 이재용이 존경스럽다. 진심으로.

2017. 7. 9.

Stay foolish. Stay leveraged.

최근 몇달간 금융시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은 이유는 새롭게 업데이트 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빚을 내고 자산을 사라. 그보다 더 좋은 투자 방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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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만이 터진 이래 수많은 비관론이 대두했지만 지난 10년의 성취를 보자. 미국 경제는 완전 고용에 거의 도달했으며 유럽과 일본은 완연한 회복세에 들어섰고 아시아 및 다른 EM의 경제들도 반등하기 시작했다. 태생적으로 음울한 성향을 가진 이들과 자산시장의 랠리를 놓쳐 배아픈 놀부들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주식시장이 현재 버블 상태이며 고통스러운 폭락을 눈앞에 두고 있다며 경고하지만 그들과 그들의 말을 들은 투자자들은 조만간 하나하나 거리로 나앉게 될 것이다. 

저 곰탱이(bear: 비관론자)들의 논리는 주식의 밸류에이션이 리만 직전과 비슷하게 높아졌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식은 아직 매우 싸다. 왜냐하면 내 기준에서 리만 이전의 경제는 버블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미 주택시장 버블때문에 일어났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역대 수많은 버블의 사례를 보면, 한번 버블이 꺼지고 나면 가격이 다시 버블수준에 도달하기까지 짧게는 십수년(나스닥), 길게는 수십년(유가)이 걸렸다. 어떤 상품은 수백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이전 가격을 회복하지 못했다.(튤립) 그러나 미국 부동산이 2007년 최고치를 회복하는데엔 불과 6년밖에 걸리지 않았으며 현재는 역대 최고치를 다시 경신하고 있다. 따라서 진짜 버블기를 찾아 그 시절의 주식과 현재를 비교해보자. 큰 거품은 대체로 상품가격의 베어사이클에 온다. 왜냐하면 상품시장은 보통 12-18년을 주기로 반복되는데, 불사이클에서는 중앙은행이 높게 찍히는 cpi를 잡느라 금리를 높게 유지해 좀처럼 버블이 생기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버블이라고 부를 수 있던 시기는 8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였고 당시의 주식 밸류에이션은 현재보다 크게 두배가량 더 높았다.

성경에 이르길, 태양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모든것이 아주 똑같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약세론자들은 어제와 같은 오늘이 반복될 것이라 믿으며 또 한번의 침체가 임박했다고 믿겠지만 가라앉고 있는 것은  그들의 통장 잔고이다. Stay foolish. Stay leveraged. 빚을 내라. 그리고 자산을 사라. 그리하지 않으면 당신은 수십년을 기다려야 다음 버블사이클을 보게 될 것이다.

2017. 6. 25.

매우 우려스러운 국토부 장관의 헛발질

김현미 신임 국토부 장관의 취임사가 화제다.(링크) 그녀는 다주택자들의 주택 구매가 늘어난 것으로 볼 때, 최근의 부동산 상승은 투기 움직임 때문이라며 사실상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장담컨대 노무현때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전쟁은 성공하지도 못할 뿐더러 서민을 더욱 힘들게 하고 적군인 자산가들을 더욱 부자로 만들어 줄 것이다. 그 이유를 아래에 간단하게 정리했다.


* 다주택자가 집을 더 사는 것은 서민들의 주택부족과 전혀 상관없다. 어느 마을에 한 사람이 집을 백채 가지고 있다고 하자, 그럼 그 마을에서 99가구가 노숙자가 되는가? 아니다. 99가구가 집을 자가가 아닌 월세, 혹은 전세로 살 뿐이다. 한사람이 집을 1채를 사든 백채를 사든 만채를 사든 공급량만 충분하면 장기적으로 주택가격엔 아무 영향이 없다.


* 김현미 장관은 현 부동산 가격상승이 투기수요란 증거로 많은 신규구입자들이 다주택자라는 점을 든다. 하지만 그건 당연한 일이다. 정부가 중산층을 위해 규제를 완화하면 자산가인 다주택자도 사기 쉬워진다. 그리고 이 자산가들이 멍청이가 아니라면 수익을 얻기 위해(혹은 이자비용을 벌충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월세를 받고 그 집을 내어 줄 것이다.


* 만약 집값이 하루아침에 2배 뛰었다고 치자. 자산가들의 월세 수익은 반토막이 난다. 따라서 집을 팔고 다른 자산에 투자하는 것이 더욱 이득이다. 이런 현상은 월세 수익이 비슷한 위험성을 가진 다른 자산들의 수익과 같아질때까지 일어난다. 결국 현재의 집값과 월세는 자산가들의 주택구입수와는 무관하게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 따라서 집값을 떠올리는 힘의 핵심은 투기자본이 아니라 바로 월세다. 자산가들이 집을 사는 이유는 비트코인처럼 100에 사서 150에 빠져나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집을 사서 월세를 받으면 은행이자보다 훨씬 높은 수익을 얻기 때문이다. 실제로 집을 가장 많이 산 60대(2030대 자식들에게 사준 물량 포함)는 투자시 위험선호도가 가장 낮은 세대다. 가장 안전자산을 선호하는 세대가 부동산에 가장 많이 투자한 세대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참고로 2014/15년에 강남의 주요 지역의 월세 수익은 4.5%로 은행 대출이자 3%보다 월등히 높았고, 현재는 집값이 크게 올라 월세수익과 대출이자가 거의 같아진 수준이 되었다. 부동산 가격을 드라이브 하는 것은 한탕을 노린 투기가 아니라 기대수익률의 발란스를 맞춰주는 투자다. 무식한 김현미 장관은 이 점을 아예 무시하고 있다.


* 만약 강력한 대출 규제를 내놓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 피해는 서민들이 본다. 앞서 말한대로 집값을 떠받드는 핵심은 평당 3-10만원의 월세를 내는 세입자들이므로 집값은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월세는 세입자들의 소득에 달린지라, 집값이 반토막나면 이 저금리시대에 8%나 주는 고수익 자산이 되어 빚없이도 집 살 돈을 가진 자산가들이 달려들테니. 하지만 서민들은 대출 없이는 가격이 아무리 떨어져도 집을 살 수 없다. LTV를 강화하면 서민들은 영원히 자기 집을 사지 못하게 된다. 대신 집을 살 여유자금이 있는 자산가들은 더욱 부자가 된다.


* 만약 보유세를 강화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 피해 역시 서민 세입자들이 본다. 결국 보유세를 낼 여유가 있는 자산가들이 집을 소유하고, 보유세를 내지 못하는 계층은 월세입자로 전락한다. 그리고 시장에는 월세입자가 늘어났으므로 월세가 올라간다. 즉 세금은 세입자에게 자연스럽게 전가된다. 고율의 세금을 매기는 뉴욕의 부동산이 고수익을 주는 까닭이다.


* 만약 1가구 2주택, 혹은 그 이상 보유를 금지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주택난이 악화된다. 먼저 자산가들이 1주택 이상의 집을 팔아치워도 집값은 크게 낮아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3%의 월세를 낼지, 3%의 주택구매자금대출 금리를 낼지, 혹은 그 돈을 딴데 투자하여 3%의 수익을 얻을지 고민하고 있을 뿐이다. 즉 자산가들이 집을 팔아 집값이 낮아져 월세가 3.5%로 살짝 오르면 사람들은 3%의 대출이자를 물고 집을 살 것이다. 그러니 집값에는 큰 변화가 없다. 문제는 신규 분양이다. 집을 가진 가구는 집을 더 살수가 없고, 집을 가지지 못한 가구는 애초에 돈이 없으니 아파트를 새로 지어도, 살 사람이 거의 없다. 따라서 건설사들은 신규물량을 공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존의 주택은 계속 노후화된다. 하지만 사람들의 소득은 점점 늘어나 더 나은 주거환경을 원한다. 그러니 좋은 조건의 집들은 월세가 폭증하고 월세를 추가로 낼 여력이 없는 사람들은 나쁜 환경으로 몰려나간다. 결국 대부분의 서민들은 더 낡은 집에서 더 많은 월세를 내고 살아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규제로 신규공급이 없던 강남의 집값이 가장 빠르게 오른 것을 보라.


* 김현미 장관의 논리에 따르면 자동차를 가장 많이 사는 것은 렌트카 회사들이므로 대한민국 자동차 판매는 실수요가 아닌 투기수요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고 가난한 서민들도 에쿠스를 한대씩 몰고 다니려면 리스회사들을 죄다 규제해서 차를 한대이상 못사게 하면 된단 것이다. 하지만 리스회사들을 다 없애면 서민들은 삶에서 에쿠스를 탈 기회가 아예 없게 된다


결국 부동산 가격을 잡을 수 없는 이유는 현재 집값이 대한민국 평균 중산층의 생활 수준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되려 중산층의 소비수준에 비하면 현재 집값은 매우 싸다. 서울의 집값을 가처분 소득으로 나누면 역대 가장 낮은 비율을 보이는데다 대출제도도 그 어느때보다 유리했다. 많은 사람들이 1985년만 해도 월급쟁이가 돈을 모아서 강남에 집을 살 수 있었는데 지금은 안되지 않느냐고 항변하는데, 그 시절엔 강남은 중심지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지역엔 지하철도 현재처럼 잘 뚫린 도로들도 없어 대중교통으로 시내로 가는데 1시간씩 걸리곤 했다. 지금도 강남을 포함한 시내 중심가로부터 1시간 거리에 있는 외곽지역에는 직장인들이 돈을 모아 살 수 있는 집들이 많다. 게다가 은행에서 저금리에 대출도 잘 해준다. 지금 집을 안 산 사람들은 차도 굴리고 해외여행도 가고 좋은거 입고 먹고 놀고 즐기고 싶은데, 시내 중심가에 집도 한채 떡하니 있기를 바라는 놀부들이다. 그리고 집이 필요한데도 안사는 그들이야말로 집값이 빠지는데 베팅한 게으른 투기꾼들이 아닌가.


김현미 장관은 바로 그런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하려고 하지만, 경제를 왜곡하려는 그녀의 노력은 부자를 더욱 부자로, 빈자를 더욱 빈곤하게 만들 뿐이다. 병신같이.

이태원에서 밀려난 한 생산자에게



자연 상태에서는 모든 식물들이 생존 경쟁을 벌입니다. 그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면 도태되는게 대자연의 법칙이죠. 어쩔 수 없습니다. 햇볕이 잘 드는 양지와 영양분과 물은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안타깝게도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람들이 편하게 찾을수 있는 공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여기가 모두가 좋아하는 가게였다면 아무도 당신을 쫒아내지 않았겠죠, 행여 쫒겨나도 갈 곳이 많았을거에요. 쓸모없는 것을 만드는 생산자들에 관심을 보이고 안전하게 보호할 의무를 누가 지녀야 할까요?  당신도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예쁘지 자라지 않은 저 가게 앞의 잡초들을 돌보지 않잖아요. 그러면서도 정작 본인은 소비자들과 지역 주민들이 자신의 제품을 억지로 구매하고, 가게에 헐값에 공간을 제공하고, 당신을 강제로 사랑해 줄 것을 요구하는건 파렴치한 일이죠. 당신이 비유로 든 식물계에서는 그것을 기생이라고 부릅니다.

그대의 추억과 낭만을 지탱하기 위해선 다른 이들의 땀과 눈물과 손실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 그 누구도 타인에게 그런 희생을 강제할 순 없어요. 바로 그것이 당신의 감상이 철없는 이기심으로 읽히는 까닭입니다.

to 유은혜 Studio_KOTTBATT
재美난학교 포럼 1회

2017. 6. 11.

부재의 의미, 그리고 정치.


그들은 그저 어질러진 검은 조각들에 불과했다. 의미없이 각지고, 찢어지고, 뾰족하게 날 선 검은 도형들. 그러나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윽고 흰 직사각형들이 온전한 모습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우리는 늘 존재를 본다. 검게 칠해지고 채워진 그 존재를. 반면 흰색은 공허한 여백이요 부재에 불과하다. 우리는 빈 것에 주목하지 않는다. 하지만 때때로 의미는 존재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재에 있기도 하지 않은가. 마치 이 그림이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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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뱃지는 정치적 아이콘이다. 세월호는 마음 아픈 사건이고 두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되는 비극이며 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일은 인도적 행위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정치가 없다. 하지만 그 뱃지가 정치적 코드로 해석되는 이유는 어쩌면 거기에 다른 죽음들에 대한 추모가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어떤 정치인들은 노란 뱃지를 달고 어떤 정치인들은 천안함 희생자들을 추모한다. 하나의 죽음에 가슴 아파하는 것은 보편적 인류애지만 다른 죽음에 눈을 감아버리는 것은 정치다. 이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존재가 아니라 부재를 보아야 한다. 마치 저 그림이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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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 현실정치로부터 단절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미술관에서 정치를 떠올리는 나 자신이 왠지 편협하게 느껴진다. 아마 금호미술관에서 문준용 작가의 이름을 본 탓이리라. 좀 더 정확하게는 거기서 정치적 의미를 찾아낸 내 탓이겠지. 하지만 정치가 덧칠된 외투를 입은 작품도 충분히 감각적 충격을 건넬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것도 바로 같은 미술관에서, 5월의 어느 날 윤동천 작가의 대형 리본상 앞에서, 가슴이 먹먹해졌던 기분이 떠오른다.



십여년 전, 그날도 그랬듯이.

오늘도 산자는 죽은자의 흔적을 뒤적거리다 흐느끼며 운다.



위, by 프랑스와 모를레
아래, by 윤동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