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희망을 가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물론 새로운 총리의 취임은 양국에게 손해인 현재의 긴장관계를 해소할 계기가 될 수 있겠지만, 한일관계를 위기로 몰아넣은 근본적 원인을 바꾸지는 못한다. 사실 일본을 오른쪽으로 몰아가는 것은 바로 우리 대한민국이며 우리의 외교정책은 이런 역학구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아마추어들이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틀린 한일관계를 아베의 개인적 성향에서 찾아왔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아베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는 A급 전범용의자로 분류되었던 극우계지만 동시에 아베는 친한파였던 아베 신타로의 아들이기도 하다. 그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는 재일교포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여 그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고 그 친밀한 관계 때문에 선조가 한국계라는 루머까지 있었다. 그 영향을 받아 그가 처음 일본의 총리로 취임했던 2006년, 아베는 첫 방문지로 한국을 꼽았고 그 해 10월의 방문에서 현직 일본총리로는 최초로 국립현충원을 참배했다. 또한 그의 아내, 아키에는 유명한 한류 팬으로 휴대전화 배경화면에 배용준의 사진을 저장하고 일주일에 한번씩 한국어 과외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으니 일본내 극우파에서 아베를 도래인(한국인)의 후손이라며 비아냥대는 것도 당연하다. 현재의 모습과 참으로 놀라운 대조를 이루지 않나. 이런 사례가 고작 아베 뿐일까. 무역분쟁을 취재하던 한국 기자들이 일본의 카메라를 사용하는 것을 지적하고, 한국 협상단에게 의도적으로 무례를 범한 고노 다로 외무대신(현 방위대신)역시 친한파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 고노 요헤이는 (공식적으로는)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바로 그 고노 담화의 주인공으로, 당시 관방장관이었던 그는 약 20개월간 조사를 거쳐 일본군이 위안부 동원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이처럼 No Japan운동의 주적 두명은 모두 한때 친한파, 적어도 지한파였던 이들이다. 하지만 지난 십여년의 세월은 그들을 반한파로 돌려놓고 말았다. 거기에 과연 우리의 역할이 전혀 없었을까. 국제 외교사를 살펴보면 적국 온건파의 입지를 악화시키는 것은 바로 아군의 강경파였다. 북한의 유화적 대외정책을 주도하던 외교라인의 숙청을 불러온 것은 대북문제에서 강경일변도의 정책을 펴던 조지 부시와 공화당이었고 2차 세계대전에서도 영국과 협상을 준비하던 히틀러로 하여금 3천여대의 루프트바페를 동원해 런던을 폭격하게 만든 것은 주전파 윈스턴 처칠 아니었나. 강경일변도로 나서는 상대에게 유화적 태도를 고집하는 것은 간첩밖에 없다. 그런 관점에서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자. 2000년 이전엔 문제가 되지 않던 욱일기는 갑자기 나치의 하켄크로이츠와 동급이 되었으며, 해방직후 반민특위가 지정한 반민족행위자는 688명에 불과했지만 그로부터 60여년 뒤인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는 모두 4,339명을 친일파로 분류했다. 지난 10년간 우리는 일본이 점점 극우적 민족주의에 가까워져간다고 비난했지만 정작 우리가 같은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과거 두편의 글을 통해 아베는 극우로 흐를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하나는 경제적 이유(링크), 또 하나는 한국(과 중국)이 일본의 두려움을 자극하고 있기 때문에(링크). 그리고 이러한 역학관계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후임 스가 총리는 아베노믹스를 계승할 것을 천명했고 한국과 중국의 잠재적 위협은 5년 전에 비해 더욱 커졌다. 몇몇 언론들은 스가 총리의 내각 인사 중 지한파/친한파를 언급하며 전향적인 관계를 점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희망은 실망만을 남길 것이다. 개인적 배경만 두고 본다면 아베와 고노보다 더 한국에 우호적이었어야 할 일본 정치가는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둘은 모두 부친의 노선을 버리고 강강파로 전향했다. 이처럼 선대의 정치적 유산을 중요시하는 일본 정계에서 지한파/친한파의 아들들이 전후 최악의 한일관계를 이끌었다는 사실은 중요한 시사점을 남긴다. 양국의 역학관계는 불과 한 세대만에 친한파를 반한파로 만들 정도로 극심한 마찰을 빚어내고 있다.
우리는 분명히 일본을 오판하고 있다. 그렇기에 합리적인 전략을 세우고 있지도 못하다. 다시 말하지만 국가 간의 외교는 지도자 개인의 취향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힘의 논리와 실리를 좆는 게임이론에 따라 이루어진다. 명분이나 개인의 호불호에 따라 국가정책을 정하는 것, 그런 병신외교를 펴는 것은 대한민국 뿐이다. 그런 병신외교가 대한제국에 어떤 운명을 안겨주었는지 잊어선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