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 방문한 이들은 두 가지에 놀라게 된다. 대개 역사가 오래된 도시는 구조가 엉망인데 파리는 한국의 왠만한 신도시보다도 더 잘 정돈되어 있다는 것. 해질녘에 개선문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면 자신의 발 아래를 중심으로 곧게 뻗은 방사형 도로들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야경을 볼 수 있다. 사실 이는 대혁명 이후 반복적인 시민봉기에 시달린 정부가 적은 수의 대포로도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한 설계라고 하지만, 그런 섬뜩한 배경을 잊고 보면 이런 도시구조야말로 파리를 파리답게 만들어 준 것이다. 현재의 파리는 조르주 외젠 오스만 시장의 손에 재탄생한 셈이나 다름 없는데 그는 임기 내내 파리 전체 면적 중 거의 절반의 구조물을 부수고 다시 지었다고 한다. 고작 몇백 몇천 세대에 불과한 재개발이 십수년 씩 걸리는 것을 보면 이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것도 수틀리면 왕과 귀족의 목을 뎅강 쳐내는 혁명의 도시에서.
두번째 놀라운 점은 대부분의 건물과 도시구조가 1850년대 이후 거의 바뀌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파리 구도심에는 6층 이상의 건물을 지을 수 없으며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다시 짓거나 개보수하려고 해도 문화재관리당국의 심사와 허가를 받아야 한다. 한 다큐에서는 개축허가를 받는 과정에서 문화재관리국의 심사를 받아야 하고 전문가가 현장을 방문해 계단의 난간이 아르누보시대의 양식이니 보존하라고 지시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인간의 건축기술은 100층 따윈 가볍게 넘길 정도로 발전했는데 도시 전체를 나폴레옹시대의 기준에 맞추고 있으니 파리의 거주여건이 좋을 수 없다. 평균적인 파리 시민은 소득의 약 1/3을 월세로 지불하고 있으며 1-3평 밖에 되지 않는 하녀방조차도 약 500-1000유로의 월세를 내야 한다고 한다. 이러니 인구가 집중될 수 없고, 인구가 모이지 않으면 혁신도 없다. EU내에서 프랑스의 경제적 위상은 나날이 하락하고 있으며 이제 유럽의 경제적 리더는 프랑스가 아닌 독일이라고 보는 시각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없다. 한때 런던과 경쟁하던 파리의 금융가 역시 순위에서 밀려나 제네바나 토론토 뿐 아니라 심지어 서울보다도 순위가 아래다. 파리를 예술의 도시라고 하지만, 예술계와 미술품시장에서도 파리의 위상은 런던이나 뉴욕과 비교할 수 없다. 이게 무슨 굴욕인가. 과연 이런 현상이 파리의 낡은 도시구조와 무관한 일일까.
당시 오스만 시장의 도시계획은 분명 혁신적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19세기가 아니다. 당시부터 경쟁하던 도시들 뿐 아니라 베이징, 도쿄, 홍콩에서 마천루들이 속속들이 올라가는 데도 파리와 시민들은 미래로 나아가는 대신 과거의 영광에 머무르기를 택했다. 파리에서 시작된 대혁명은 상퀼로드와 삼색기와 함께 전 유럽으로 뻗어나갔고 미국을 비롯한 수많은 나라의 이념적 토대가 되지 않았는가. 심지어 전제적 독재국가인 북한조차도 공식명칭에 인민이라는 두 글자를 박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거의 모든 근대국가는 프랑스 대혁명의 직계, 혹은 방계 후손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은 그 영광의 시대와 영영 작별해야 했다. 보불전쟁에서는 처참하게 패해 황제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히고, 1차세계대전에서는 적의 영토에 한걸음도 진출하지 못한채 자국 영토가 쑥대밭이 되도록 방어전만 펼쳤으며 2차 세계대전에서는 6주 만에 파리를 점령당했으니. 그렇게 무참하게 무너진 프랑스인들의 시선이 자꾸만 과거로 향하는 것을 어리석다고만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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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프랑스의 영광은 나폴레옹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동시에 그는 영광의 시대를 영영 끝장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남자를 황제로 출세한 코르시카의 촌드기 정도로 기억하지만 그는 혼자의 힘으로 한 시대를 열어젖힐 만큼의 군사적 재능을 지닌 천재였다. 그를 워털루에서 쳐부순 아서 웰즐리는 자신과 나폴레옹을 비교하는 기자의 질문에 "현재에도, 과거에도, 언제라도, 최고의 전략가는 나폴레옹일 뿐이오"라고 답했고 전쟁론을 집필한 클라우제비츠는 그를 가르켜 "전쟁의 신 그 자체"라고 평했다. 그와 그가 이끄는 혁명군을 꺾기 위해서 온 유럽이 총 7차례에 걸쳐 연합을 결성해야 했으며 그는 거의 대부분의 전투에서 적들을 철저하게 분쇄했다. 그는 총 68회의 전투 중에서 60회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러시아에서 후퇴하기 전까지 그가 패한 것은 고작 3번에 불과했다. 오늘날까지 프랑스인들이 기억하는 프랑스의 영광은 거의 대부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지휘봉 끝에서 탄생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바로 그때문에 몰락한다. 나폴레옹의 군사적 재능이 너무나 뛰어났던 탓에 프랑스는 연합을 결성하고 적을 회유하거나 분열시키는 외교적 노력에 소극적이었고 결국 전 유럽이 그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다. 간단한 외교적 노력으로도 풀 수 있는 문제를 두고도 그는 걸핏하면 군대를 동원해서 전쟁을 일으켰으며 상대에게 패배의 치욕을 안겼다. 어찌 보면 그의 몰락을 촉발한 러시아 원정 역시 불필요한 군사작전 중 하나였다. 하지만 거듭된 승리과 믿을 수 없는 전과는 그가 적들을 가벼이 보게 만들어 이 무모한 도박판에 앉게 만들었으며 결국 그 한번의 패배는 혁명군의 몰락을 가져왔다.
무엇보다도 그의 치명적 실수는 프랑스에게 호되게 당한 다른 유럽의 열강들이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독일의 통일을 방기하게 만들었다는 데에 있다. 자신의 이웃에 강력한 정치세력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는 주변국가들의 방해 탓에 독일은 본디 수백개의 크고 작은 공국과 도시국가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나폴레옹의 패전 이후 전후체제를 논하던 빈 회의에서 동맹군은 프랑스를 견제할 목적으로 39개 국가와 자유시로 구성된 독일연합을 탄생시키기로 했고 이후 1871년 프러시아가 이들을 통합하고 독일제국을 세운 이래 프랑스는 단 한번도 독일을 넘어서지 못했다. 독일 통일과정에서 일어난 보불전쟁과 두 번의 세계대전은 큰 관점에서 독일이 유럽의 맹주 자리를 프랑스에게서 빼앗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나폴레옹의 군사적 천재성은 결국 본인과 당시의 프랑스 뿐 아니라 현재의 프랑스를 몰락시킨 것이나 다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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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친필 사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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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백치 아다다 같은 캐릭터로 전락했지만 본디 박근혜의 별명은 선거의 여왕이었다. 그녀가 1997년 이회창의 권유로 정치를 시작한 이래 그녀는 거의 모든 선거에서 본인이나 자신이 지지한 후보들을 승리로 이끌었다. 2004년 탄핵과 차떼기 역풍으로 한나라당이 공멸할 상황에 처했을때 그녀는 당대표를 맡아 천막당사를 차리고 낡은 이미지를 지닌 후보들을 쳐내고 새로운 정치 신인들을 등용하여 예전의 당세를 회복하기도 했다. 심지어 2008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명박의 계파가 주도하던 공천심사에서 박근혜측 후보들을 대거 탈락시키며 공천학살을 일으키자 친박계 의원들은 탈당하여 친박신당을 창당하여 여당후보를 누르고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특정 정치인의 이름을 딴 팬클럽이 원내교섭단체까지 이루는 한국 현대사에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이후 그녀는 18대 대선에 출마해 87년 헌법 이래 최초로 과반이 넘는 득표율로 승리하여 다시금 선거의 여왕이라는 타이틀을 증명했다. 혹자는 그녀의 성공을 아버지의 후광이라고 폄하한다. 그러나 박정희에겐 세 자녀가 있었지만 나머지 둘은 정계 가까이에도 가지 못했고 김대중 김영삼 등 한국 현대사의 수많은 거물정치인들이 있지만 그들의 2세들 중 정치인으로 성공한 것은 박근혜 뿐이다. 그녀를 미워하는 사람도, 정치적 행보를 비판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녀가 선거때마다 보여준 저력을 폄하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비극은 선거에서 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생긴 오만함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녀가 유일하게 탄핵을 당한 대통령이 된 것은 그녀가 전무후무한 범죄를 저질러서가 아니라(지금 정부에서 보다시피), 보수대통령이 공격당할 때 사상 최초로 보수세력이 지원사격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과거 한나라당을 재건할 때와는 다르게 그녀는 20대 총선을 앞두고 정적인 친이계 의원들 뿐 아니라 자신을 따르지 않는 비박계 의원들을 공천에서 대거 배제하는 악수를 두었고 그 결과 새누리당은 의석의 과반을 확보하는데 실패했다. 이어 자신의 정책을 비판한 유승민 원내대표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등, 당청간의 갈등을 악화시켜 이후 그녀에 대한 탄핵투표가 실시되자 새누리당 내부에서도 찬성표가 대거 쏟아져 탄핵안이 통과되는 결과를 낳았다. 거기에 기고만장한 우병우가 조선일보와 싸우는 바람에, 섹스비디오, 세월호인신공양설, 최순실 300조 등과 같이 자극적 뉴스들이 퍼져나갈 때 보수여론은 그녀를 감싸기는 커녕 함께 공격했다. 이것이 얼마나 큰 결과를 초래했는지 상상하려면 현 문주당 정부가 악정을 거듭해도 한결같이 빨아주는 진보언론의 역할을 떠올려 보면 쉽다.
결국 전쟁의 신이 전쟁만 하다 망했듯 선거의 여왕도 자기 맘대로 선거를 하다 망한 셈인데, 그 여왕폐하께서 총선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어제, 갑자기 지지자들에게 옥중서신을 보냈다. 자신의 존재를 숨기는 것이 중도표를 모으는데 유리할텐데 왜 목소리를 냈는지 궁금해서 그 편지를 찬찬히 읽어보다 잊혀진 그녀의 별명을 떠올렸다. 현 보수층은 박근혜 탄핵에 찬성한 사람들과 반대한 사람들의 어정쩡한 연합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은가. 태극기세력은 민주당과 문재인 만큼이나 보수세력 내의 탄핵찬성파를 증오하는데, 과연 그들이 총선까지 마찰 없이 견고한 연합을 유지할 수 있을까? 20대 국회의 초선의원 중에는 친박계가 많고 아마 그들 중 다수는 공천에서 탈락할 가능성이 높다. 그 과정에서 반드시 반발이 있을 것이며 공천에서 탈락한 이들은 으레 그렇듯 분당하거나 우리공화당같은 극우당으로 분열될 가능성이 크다. 박근혜는 아마 중도표를 약간 잃더라도 자신을 빌미로 연합에 반대하는 극우세력을 막는게 자신에게 좀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지 않았을까. 6차 대프랑스동맹군에게 패한 나폴레옹은 엘바 섬으로 유배됐지만 탈출해 다시 황제로 복귀했다 95일만에 쫒겨나 더 먼 세인트헬레나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리고 평생 영애로 불리다 한 끗 차이로 영어의 몸이 된 박근혜는 구속된 지 약 2년여 만에 다시 여의도 정계에 승부수를 던졌다. 이 편지 한장이 그녀의 워털루 전투가 될지 아니면 선거의 여왕이라는 이름값을 다시금 증명할지 흥미롭게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