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2. 23.

누가 여의도 텔레토비를 죽였나


2012년 제 18대 대선을 앞둔 무렵 여의도 텔레토비라는 정치풍자코너가 있었다. 혹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분들은 지금이라도 찾아보기를 강력하게 권한다. 내가 이제부터 늘어놓을 진지한 얘기에 비하면 이건 다시 봐도 진짜 웃긴데다가 이제부터는 다수의 스포가 있으니까. (링크)

정치인과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무자비한 풍자와 유머는 그 사회가 선진화되어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 중 하나다. 사회가 미개할 수록 지도자에 대한 풍자를 허용하지 않는다. 전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미합중국 대통령 트럼프를 미국의 언론이 대하는 자세와 가장 가난한 북한의 지도자 김정은을 보도하는 조선중앙통신을 비교해 보라. 그런 의미에서 여의도 텔레토비는 분명 우리나라 정치가 한단계 성숙해졌다는 기념비적인 코너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다시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방송계가 진보적 편향을 가지고 있다는 통념을 까부술 정도로 캐릭터 간 패러디와 비꼼의 균형을 맞춘 것을 느낄 수 있다. 혹자는 그렇지 않다고 하긴 하지만 특정 정치세력을 일방적으로 미화하지도 않았으며 무엇보다 당시 대통령이던 이명박과 유력 대선주자였던 박근혜의 패러디가 주를 이루는 것을 편향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정치패러디의 초점은 당연히 살아있는 권력이어야하지 않겠나. 특히 TV 대선공개토론에서 통진당 이정희가 박근혜를 매섭게 몰아붙이자 그 직후 편성된 화에서는 [또]가 [구라돌이]를 피해 숨어서 무서워하며 벌벌떠는 등 참으로 시의 적절한 패러디로 큰 인기를 끌었다.

반장선거 공개토론회에서 구라돌이에게 극딜당하는 또

"듣보잡인줄 알았던 구라돌이가 그렇게 무서운 줄 몰랐어요"
당시 박근혜를 상징하는 [또]라는 캐릭터가 지나친 쌍욕을 일삼고 [화나](문재인)와 [구라돌이](통진당)에게 얻어맞는 장면을 두고 당시 새누리당 국회의원 하나가 이의를 제기했다. 텔레토비 제작진은 이에 위축되기는 커녕 [또] 배역을 맡은 배우 김슬기가 울먹거리며 "저기. 제가요 하는 일이 이거 밖에 없거든요. 제 첫 직장이고, 아직 학자금 대출도 갚아야 되는데. 앞으로 욕 많이 안 할게요." 라는 대사를 읊는데서 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새누리당은 어쩔수 없다고 포기한 것인지 아니면 받아들인것인지 모르지만 별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되려 18대 대선에서 이 캐릭터를 활용한 홍보운동까지 펼쳤다.

이런 분위기는 분명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17대 대통령인 이명박은 윤석렬의 수사팀이 자기 친형의 비리를 조사하는데 아무런 개입을 하지 않았고 16대 대통령인 노무현은 지지율이 떨어지고 인터넷에서 자신을 비난하는 여론이 높아지는데도 "먹고 살기 힘들면 대통령 욕도 하고 그런거지 뭘!" 이라며 엄숙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 그때와는 전혀 다른 시대에 살고 있다. 검찰청의 여려 검사들은 살아있는 권력인 대통령 측근의 비리를 수사하다 지방으로 귀양을 떠났고 한 남자 방송인은 대통령의 이름에 존칭을 붙이지 않고 "문재인씨"라고 불렀다고 여론의 뭇매를 맞고 사과를 해야 했다. 대통령과 여당은 체고존엄의 지위에 올라 이제 우리는 그의 이름조차 함부로 부를 수 없다. 문득 김남주시인의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술자리에서도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비판을 꺼내면 일베 소리를 듣는다. 그러니 사람들이 웃고 즐길 정치 풍자도 없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누가 여의도 텔레토비를 죽였나.

나는 특정 세력을 지지하지 않고 어떤 정치인이 대한민국 사회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유주의, 자본주의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세가지 원칙에 가장 부합하는 후보들을 지지하고 표를 던질 뿐이다. 다만 거기에 한가지 더 바라는 것이 있다면 여의도 텔레토비같은 정치풍자 프로가 부활해서 분장한 개그맨들이 살아있는 권력을 희화화하고 까는데 대통령이 화를 내는 대신 방청객 자리에 앉아 함께 웃으며 박수치는 모습을 보길 바란다. 그러다 꽁트가 끝나고 나면 무대로 나와 포옹 한번 하는 것이 훨씬 더 쿨하고 멋지지 않나. 조선시대 후기에도 양반들을 까는 판소리들의 가장 큰 후원자들은 바로 양반들이었다는데, 우리가 그래도 조선시대보다 나은 시대에 살아야 하지 않을까.

댓글 13개:

  1. 검찰이 이명박 2~3년 차(2009~2010년)에 이상득 비리를 조사했어도 과연 이명박이 가만히 있었을까 의문이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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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러게요. 하지만 적어도 법무부장관 시켜서 검찰들 귀양보내고 검찰총장 공개 협박하고 그러진 않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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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좌파가 판치는 문화계, 홍위병 못지 않은 친노/친문의 온라인 장악이 여권 정치인을 개그 소재의 터부로 만들어 버린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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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장담하는데 10년 뒤엔 위 사회 현상을 주제로 논문이 쏟아져나올 듯 합니다. 정치학과 사회학과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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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민주당 홍위병 프레임질에 점점 설 자리가 좁아져서 소설 '광장'의 명준이처럼 부채의 사북자리에 선 느낌. 정말 숨막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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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 이게 다 문재인 덕분이다

    아이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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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박근혜 정부부터 문재인 정부까지 좌우의 자리만 스왑했을 뿐
    결국 똑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는 것 같아 답답하네요

    앞으로 우리나라의 정치제도가 어떻게 바뀌어야 이게 해결될 수 있을까요?
    말로는 내각제, 4년중임제, 제왕적 대통령제 완화 등 말이 많이 나오는데
    어떤 것이 옳은 방향인지 솔직히 개인적인 판단이 안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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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예전에 종 북 울리면서 종북몰이도 재밌었고
    NLL파 외치면서 김무성 정상회담 폭로도 꿀잼이고
    그땐 고등학생인 제가 봐도 재밌는데 요즘 정치풍자 개그는
    너무 재미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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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j 이재현 회장이 밉보여서 지병악화돼도 감옥에서 안빼준건 새누리당 근혜씨의 독기였죠 그래서 인천상륙작전, 국제시장도 찍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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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간만에 폭풍 업뎃이시네요 선생님
    선생님 예측대로 우환폐렴 심각해지네요 선견지명 대단히 훌륭하십니다
    각자도생인데 여튼 건강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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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한폐렴덕에 약속 취소되어서 그동안 밀린 글 싹 다 퇴고하고 업로드했네요. 꼭 건강 조심하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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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선생님 항상 글잘보고있습니다.
    많이 배우고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질문좀 드리고싶은데 가능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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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에고 댓글을 지금 봤네요. 이메일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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