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6. 7.

7년만의 경상수지 적자 속에 숨겨진 함의

7년 만에 경상수지가 적자를 기록했다. 표면적으로는 매년 4월마다 돌아오는 외국인 투자자들의 배당소득 유출 때문이라 예상하지 못했던 바는 아니고 배당이 없는 다음 달에는 흑자로 다시 돌아설 것이다. 하지만 세부 내역을 뜯어보면 현재 경제상황을 좀 더 엄중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먼저 외인 배당 유출 규모는 작년보다 줄어들었다고 하나, 이는 환율이 올라온 결과로 내 분석이 맞다면 지난 10년 중 재투자율이 가장 낮다. 많은 투자자가 배당으로 현금을 받으면 그 돈으로 재투자에 나서는데 외인 투자자들에게 한국 주식이 그닥 매력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그리고 국제수지 중에서 상품수지는 점점 나빠질 가능성이 매우 크고 여행수지 적자폭은 확대되고 있으며 해외 직접투자/증권투자는 예년에 비해 큰 폭으로 늘어나고 있다.

물론 아직도 경상수지 흑자폭이 GDP의 4%에 달해 IMF시절은 물론이고 2008/09년의 금융위기 상황과는 거리가 아주아주 대단히 멀고, 국제수지는 늘 평형을 이뤄야 하는데 한쪽의 흑자가 계속해서 누적되는게 꼭 좋은것 만은 아니다. 이 점을 고려해서도 우려스러운 것은 한국인들도 외국인들도 국내자산에 투자를 줄이고 해외투자를 늘린다는 점인데, 금융/자본수지 적자 자체보다 그 배경이 더 큰 문제다.

우리나라에서는 두 가지 파업이 일어나고 있다. 하나는 최저임금으로 인한 저소득 저생산성 노동자들의 강제파업. 정부는 시간당 생산성이 8,500원에 미달하는 노동자가 일을 하는 것을 불법으로 만들어 그들을 강제로 파업시켰다. 세상에 오천원짜리 물건을 만원을 주고 사는 사람이 없는 것 처럼, 오천원짜리 생산성을 가진 노동자를 만원을 주고 고용할 기업은 없다. 폐업을 하고 말지. 사실 이걸 파업으로 분류해야할지 모르겠다만, 어쨋거나 이 파업의 여파는 몇년간 급증한 실직자와 실업률로 극명하게 드러난다.

두 번째 파업은 바로 자본파업. 지금 우리나라 GDP의 주요 요소 중 가장 악화되는 것은 투자다.(I) 4분기 이동평균으로 볼 때 지난 50년동안 투자가 현재보다 나빳던 적은 딱 네번 뿐이다. 오일쇼크, IMF, IT버블 붕괴 그리고 리만사태. 경제성장률이 반토막나면서 악화되는 가장 큰 이유는 민간투자가 망가지고 있어서이다. 신문은 대기업들이 몇십조를 투자하고 수만명을 고용한다고 헤드라인을 뽑지만 죄다 공염불이다. 그저 클럽에서 여자를 꼬시는 한량의 멘트처럼 진심이 결여된 립서비스에 불과하다. 대한민국에서는 노동자 뿐 아니라 자본까지 파업하고 있다.

이런 현상이 벌어진 배경으로 여당 지지자들은 대외환경을, 야당 지지자들은 정책실패를 들며 끊임없는 입싸움을 하고 있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개선될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한국 경제는 지난 21세기 들어 가장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올해는 MSCI rebalancing 때문에 코스피를 팔아야하는 타이밍에 배당이 이루어져서 재투자율이 낮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재투자율은 2011년 이래 꾸준히 낮아졌다.

2019. 6. 6.

영화 기생충, 그리고 계급의 법칙 + 사족 3개


[아래 리뷰는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반지하에서 살며 지상을 꿈꾸다 지하로 추락해버린 한 가장과 가족의 이야기.

 
이 영화의 시작은 한 친구가 장남 기우(최우식)에게 재물복이 들어온다는 수석과 부잣집 과외자리를 선물하며 시작된다. 학벌위조로 시작된 과외는 장녀 기정(박소담)의 사이비 그림치료로 이어지고, 또 그녀는 운전기사를 모함해서 쫒아낸 뒤 아버지를 불러들인다. 마지막으로 이 셋은 음모를 꾸며 가정부를 쫒아내고 그 자리에 어머니를 들여놓는 것으로 부잣집 기생하기 작전을 완벽하게 마무리한다.
 
쫒겨난 가정부가 한밤에 찾아와 벨을 누르기 전 까지는.
 
집주인들이 집을 비운 사이 찾아온 그녀는 두고간 것이 있으니 꼭 좀 문을 열어달라며 애처롭게 부탁한다. 문을 열어주자 그녀는 어리둥절하는 기생충 가족들을 지나쳐 집안에 아무도 모르게 숨겨진 지하공간을 열어젖히며 영화의 후반부를 시작한다.
 
우리는 피라미드의 각기 다른 층에 속해있지만 한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절대 낮은 곳을 쳐다보지 않는다는 것. 기택의 시선도 그러하다. 반지하에 살며 창문 너머의 지상만을 바라봤지 온전한 지하의 삶을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마치 벤츠 뒷좌석에만 앉는 박사장이 반지하의 삶을 모르듯이. 자신의 발 아래를 돌아보지 못하는 것은 마치 물리법칙처럼 언제 어디서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된다. 전 우주적으로 항상 F=ma가 성립하듯 아래를 향한 시선은 늘 충격과 공포를 동반한다. 사채업자들에게 쫒겨 지하에서 4년간이나 은둔하며 살아 온 가정부의 남편을 보는 기택의 시선도 그러했다. 

영화의 전반부가 유쾌한 신분상승 스토리였다면 그 후반부는 비참한 계층갈등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지상vs반지하vs지하. 그리고 이는 사회계급에 관한 두번째 물리법칙과 함께 시작한다. 세상에는 우리를 더 낮은 곳으로 끌어 당기는 힘이 존재한다는 것. 마치 중력처럼. 가정부의 남편은 스스로 지상에서 지하로 내려왔으며 반지하에서 살던 기택(송강호)과 기우는 희망을 위해, 혹은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지하로 걸어 들어간다. 박사장(이선균) 역시 아들의 생일파티를 위해 운전기사 기택과 함께 계단 아래에 쪼그려 앉아 숨어있다. 상한 무말랭이 냄새를 폴폴 풍기는 그와 숨을 맞대고서.
 
이 무시무시한 중력은 기택의 가족이 한밤에 박사장의 집에서 탈출하는 신에서 시각적으로 극대화된다. 불과 몇시간 전까지 유명한 건축가 남궁뭐시기 선생이 지은 저택에서 로얄 살루트를 비우던 기택과 그의 가족들은 차고를 열고 나서자 마자 끝없이 아래로 내달린다. 마치 하늘에서 땅으로 자유낙하하는 빗줄기처럼. 처음엔 부잣집 주택촌 언덕길 아래로 내달리고 둑방 아래를 건너 계단길을 따라 전속력으로 끝없이 달려 내려가고 내려가고 내려간다. 하지만 그렇게 내려간 그들의 반지하는 비참한 현실로 가득하다. 누가 상선은 약수라 했던가. 높은 곳에서 내린 비는 미세먼지를 씻어내릴지 몰라도 낮은 곳에 모이면 똥물을 왈칵 솟게 만드는데. 젖은 라이터로 시끄먼 똥물 튄 담배에 어렵사리 불을 붙여 한 모금을 빨아들이는 딸 기정의 입가에서 소리없이 읽히는 한 마디는 참으로 시의적절하게 이 상황을 요약한다. "아이 씨발"

다음날 아침 일장춘몽에서 깨어나 체육관에서 눈을 뜬 기택은 더 이상 반지하의 삶에 안주할 수 없다. 벤츠를 몰고 대저택에서 온갖 고오급 위스키와 꼬냑을 들이켜 본 그는 더 이상 열두 캔에 만 원짜리 필라이트 맥주에서 행복을 찾지 못한다. 선악과를 깨물은 아담처럼 그는 자신의 몸에서 부끄러운 무엇인가를 느끼기 시작한다. 킁킁. 반지하의 냄새. 사장님 사모님들은 지하도로 내려가 지하철을 타고 나서야 만날 수 있는, 그 칙칙하고 꼬리꼬리한 냄새. 냄새는 마치 가난과도 같아서 혼자서는 느낄수가 없고, 또 숨길 수도 없다. 기택 뿐 아니라 기우/기정이가 그랬듯이. 그들은 그제서야 자신의 진짜 삶이 얼마나 서글프고 비참한지 깨닫는다.
 
하지만 중력을 거슬러 올라가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비극으로 끝났다. 심지어 경제지 1면을 장식한 박사장조차도 이 굴레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아들이 경기를 일으키며 쓰러져 죽을뻔 했는데도 "귀신 나온 집에 살면 사업이 잘된다"며 이사 나가기를 거부하다 이런 비극을 맞이하고 말았잖은가. 그가 만약 요새 핫한 한남 더 힐이나 아리팍 펜트하우스로 이사갔더라면 아무 탈 없이 잘 살았을터인데.(뭐 기생충 네 마리에게 뜯어먹히기야 하겠지만) 하지만 지하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행의 기운이 느껴지는 그곳에 박사장의 가족을 가둔 것은 더 위로 올라가고자 하던 그의 욕망이었다. 상류층의 사정마저 그럴진대 기택의 현실은 말할 것도 없다. 애시당초 반지하는 지상보다는 지하에 더 가까운 곳이었으니 더더욱.
 
이 영화의 마무리가 더욱 슬픈 이유는 감독이 엔딩신에서 넌지시 던지는 메세지에 있다. 이 세상에는 계급이 있고, 우리는 결코 그걸 뛰어넘을 수 없다는, 그 불변의 법칙. 예고없이 주말에 사장 아들 생일파티에 소환된 송강호는 이선균을 바라보며 그의 사생활을 입에 올린다, "사장님 가족을 사랑하시는군요"라고. 그렇게 아빠 기생충은 무의식적으로 사장님이 그토록 싫어하던 그 선을 슬쩍 넘고 말았고 불쾌감을 숨기지 못하는 이선균은 그에게 계급의 선을 일깨워준다. 대저택의 뜰을 호젓하게 바라다 보며 시작된 간밤이 어떻게 체육관에서 끝나버렸는지 또 사랑하는 가족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지 납득하지 못하던 송강호는 그제서야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깨닫는다. 그 모든게 바로 넘을 수 없는 계급의 선, 아니 벽 때문이었고 그는 억눌러왔던 분노를 터뜨린다.
 
sns에 뻔지르한 문구나 올려대는 아가리 낭만주의자들은 부자들도 싸구려 짜파구리를 먹는 신을 보며 "보라 민주주의 사회서 인간은 평등하다"라고 외칠 지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근대국가에서는 누구나 몇푼만 주면 짜파구리를 사먹을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거기엔 짜파구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는 사람과 끓이는 사람이 있다.(그러고 보니 조여정은 얄밉게 충숙에게 짜파구리 한 입을 안주더라) 이선균과 송강호는 둘 다 아빠고 가장이지만 한 쪽은 사장 아빠고 나머지 한쪽은 기생충 아빠다. 하나가 같지만 나머지 하나가 다르다면 그들은 결코 동등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계급사회에 살면서도 서로가 평등하다는 환상 속에 빠져있지 않은가. 이선균이 송강호에게 일깨워 준 그 "선"은 바로 계급을 의미하고 "냄새"는 손에 잡히지 않는 그 계급을 오감의 영역으로 끌어내 주는 일종의 신분증이었을 것이다. 아니 이 경우는 낙인이라고 하는게 더 맞겠다.
 
영화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기택의 가훈은 바로 안분지족이었다. 하지만 분에 넘치게 지상을 꿈꿨던 송강호는 결국 지하로 추락한다. 그리고 물리적 위치가 낮아질 수록 소통의 영역 또한 함께 줄어든다. 스마트폰과 무전기로 소통하는 지상, 무료 와이파이 존을 찾아야만 카톡이 되는 반지하, 그리고 19세기의 통신수단인 모르스 부호로-그것도 단방향으로만 소통할 수 있는 지하의 삶. 그리고 그런 아버지의 메시지를 받아본 기정은 또 한번의 비극을 예고한다. 간신히 집행유예로 풀려나 반지하로 돌아오고서도 여전히 지상을 꿈꾸며 영영 전해지지 못할 독백과 함께.
 
"아버지 저에게 계획이 생겼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 그 집을 사는 것입니다."
 
그의 이루어질 수 없는 계획은 반지하에서 지하로 추락한 송강호의 비극이 아들에게 또 다시 반복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마치 아버지가 자식에게 가난을 물려주듯이.
 
"아버지는 그냥 계단만 올라오시면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영영 지하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여전히 계급사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처럼.
 
 
"부디 그때까지 건강하세요"

 
 
*      *      *

 
(사족 1)
봉준호 감독은 이전에도 밀폐된 공간에서의 계급간 갈등을 그려낸 적이 있다. 프랑스 만화를 원작으로 한 설국열차. 그 영화에서 주인공은 열차 앞칸으로 한걸음씩 나아가 맨 앞칸에 도달하지만 결국 전체 체제가 붕괴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그렇게 보면 단 한칸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되려 지하실로 추락하는 기생충의 스토리는 더욱 암울하고 더욱 비참해졌다. 설국열차가 개봉한 2013년에 비하면 2019년 현재 한국사회의 빈부격차는 더욱 확대되고 저소득층의 가처분소득과 일자리는 줄어들었으며 계층이동은 더욱 어려워졌는데 어쩌면 감독의 세계관이 후퇴하는 것은 이러한 현실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
 
그런 사회에서 생존할 유일한 방법은 꿈을 꾸지 않는 것이다. 지하실의 남자를 기억하는가. 그는 자발적으로 불안정한 지상의 삶을 버리고 지하로 숨어들었고 박사장에게 감사하는 삶을 충실히 살았기에 4년이나 살아남을 수 있었다. 반지하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송강호의 가족들에게, 그는 처음부터 여기서 태어나고 살았던 것 같다며 지하의 삶에 완벽하게 적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송강호 역시 숙주를 죽이고 나서 자발적으로 침전하여 지하의 삶을 받아들인다. 어쩌면 봉준호 감독은 계층이동이 거의 불가능해진 한국 사회에서는 포기하고 안주하는 것 만이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자조하는지도 모른다.
 
 
*      *      * 
 
 
 (사족 2)
기생충은 쟁쟁한 경쟁작들을 물리치고 2019년 칸 영화제의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논란의 여지 없이 대중성까지 갖춘 이 영화는 상업적으로도 흥행하고 있다. 하지만 칸은 본디 영화의 대중성이나 성적보다 예술성과 정치적 색채에 높은 점수를 줘 왔다.(2005년 수상작이 화씨 9/11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따라서 봉준호 감독의 7번째 장편인 이 영화는 영화적 기교나 표현 뿐 아니라 내포한 메시지나 정치적 색채도 칸의 취향에 잘 맞아 의외의 대상을 수상한 것이 아닐까 한다.
 
이 근거없는 추측을 좀 더 확장한다면 계급사회와 거기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쉬운 비유와 상징들로 강조해서 보여준 것, 그리고 처음엔 두 피지배 계층이 숙주를 차지하기 위해 협력을 거부해서 서로 싸우지만, 마지막에 지배층인 박사장을 찌르는 신 등이 진보적 색채가 강한 서구의 영화인들의 입맛에 딱 맞았으리라.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그들의 위선과 가식을 읽는다. 영화는 반지하에서 사는 기생충 가족의 현실을 구질구질하게 묘사하지만, 70억 인류 중 절대 다수는 그보다도 더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 세계 중위권 가구 소득은 약 12,000달러 밖에 되지 않는데 비해 우리나라 고졸 1인의 평균임금은 그의 약 3배나 되고 이는 세계 상위 약 1% 안에 드는 상류층이다. 부르고뉴 산 와인을 마시고 이탈리아 장인이 한땀한땀 정성들여 만든 턱시도를 입고서 일등석 비행기를 타고 칸에 도착하는 품격있고 엘레강스하며 고매하신 영화인들은, 지구상에는 이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갈 수 있는 사람보다 가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평균적인 인류의 삶이 어떤지 가늠할 생각 조차 없는 그 상류층들은 자신만의 축제를 열어 빈민 뿐 아니라 (지구적 관점에서)중산층의 박탈감과 비극마저도 끌어다가 영화의 소재로 삼아 윤리적 우월감과 명성을 얻었다. 뭐 돈은 당연히 따라올 것이고.
 
여담이지만 어차피 사족으로 쓰는 글이니 덧붙이자면, 나는 2017년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도 그들의 이런 위선을 보았다. 수상자 중 하나였던 메릴 스트립은 연설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이민장벽을 우아한 어조로 비난했다. 하지만 그녀의 지적은 부당하다. 트럼프는 불법 이민자들을 막고 시민권자들의 권리를 보호하겠다고 했고, 실제로 그러고 있다. 그리고 그게 바로 대통령이 할 일이다. 아니면 뭐 국가 수장이 불법을 방임하란 말인가. 게다가 미 합중국의 대통령은 유엔사무총장이나 지구방위대가 아니다. 비록 열린 이민정책이 미국의 인재풀과 사회를 더욱 역동적으로 만들어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 혜택은 고루 배분되지 못했다. 자본가들은 더 나은 노동자들을 고용할 수 있겠지만 동시에 미국의 저소득 노동자들은 점점 뒤로 밀려나고 있다. 물론 나 역시 경제학적으로 그런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저소득층의 삶을 개선한다고 생각하지만 옳든 그르든 대중과 유권자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건 잘 빼입고 잘 배운 잘난 사람들끼리 지지고 볶는 귀족정이지.

되려 인종차별은 헐리웃에서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현상 아닌가. 미국의 소수인종에조차 속하지 못하는 아시안들의 눈에는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비흑인이 흑인에 대한 농담을 하면 sns에서 가루가 되도록 까이지만 안경 낀 동양인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은 위트넘치는 유머감각으로 받아들여진다. 또 원작에 엄연히 존재하는 소수인종 캐릭터들을 지워내기까지 하는데 닥터 스트레인지의 에인션트 원은 본디 아시아 계였지만, 아시아인이든 여성이든 똑같은 minor이니 상관 없다고 생각했는지 제작진은 백인 여자인 틸다 스윈튼에게 배역을 맡겼다. (just go on a trip~) 이런 인종 바꿔치기는 너무 흔해서 아예 화이트 워시라는 전문용어까지 존재한다.
 
영화 기생충에도 영화인들의 이런 위선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신이 있다. 바로 폭우가 쏟아지던 날 아들 기우가 비를 맞으며 계단에 서 있는 장면. 설정 상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한 그 장남은 $500짜리 크리스찬 디올 스니커즈를 신고 있다. 아마도 봉준호 감독은 배우 최우식에게 낡고 추리한 운동화를 신고오라고 지시했을 것이고 그는 신발장을 뒤져 한 10년 신었던 낡은 스니커즈를 골랐을 것이다. 빈곤과 열악한 환경을 강조하는 장면에서 비싼 신발을 신고 등장하는 이 장면은 아마 영화인들이 그들이 그려내려는 실제의 삶과 얼마나 괴리되어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신이 아닐까 싶다. (배우를 비난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와 별개로 그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너무나 훌륭하게 캐릭터를 소화해냈다.)

물론 수많은 혜택을 누리고서 이런 글을 쓰는 나 역시 그 위선자 대열의 끄트머리 어딘가에 서 있겠지만.

 
*      *      * 

 (사족 3)
본인은 어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봉준호 감독은 정치와 온전히 분리될 수 없는 감독이다. 그는 박근혜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렸고 정의당원일 뿐 아니라 자신의 영화 곳곳에 사회에 대한 비판을 숨기지 않았다. 영화 초중반 이선균의 대사, "코너링이 훌륭하시네요" 라는 대사에서 우병우 전 민정수석의 아들 병역비리를 연상하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영화에 담긴 메시지도 정치적 배경에 따라 변한다는 것.

살인의 추억에서는 공권력이 시민을 보호하기는 커녕, 위협하는 군사독재 시절의 폭력적이고 암울한 시대상을 담아냈고 괴물에서는 생태를 파괴하는 미군 그리고 그 앞에서 무력한 한국의 치안시스템을, 그리고 박근혜 정권시절 개봉된 설국열차는 하위계층이 반란을 일으키는, 다분히 혁명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주인공은 항상 순박하고 선량한 사람들이었으며 가장 최근 개봉된 옥자 역시 극악무도한 코쟁이와 다국적 자본이 착한 주인공을 위협하는 구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봉준호 감독은 자기 캐릭터들에게 기생충이라는 다소 경멸적인 타이틀과 함께 그들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파해쳤다. 서민이라고 착하기는 커녕, 돈 없으니 얼굴도 구겨지고 마음도 구겨지고 사기치고 삥땅치고 속여먹는 일에 별 죄책감도 없는, 남을 무시하면서도 자신은 무시당하기 싫어하는, 파렴치한 인간 군상의 진짜 얼굴을 영화에 담았다. 도대체 어떤 변화가 있었기에.

달라진 것은 봉준호 감독과 그를 둘러싼 주변환경이 아닐까. 자신이 지지하는 집단이 우리나라 정치의 헤게모니를 장악했고 자신과 친구들은 사회의 지도계층이 되었다. 그는 더이상 배곯고 춥고 힘들던 뜨내기 영화낭인이 아니라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세계에서도 최고의 감독 중 하나로 명실공히 인정받은 거물이다. 설국열차같은 계급사회의 저어기 뒤편에서 출발한 커티스 봉은 이제 1등석으로 올라와 운전기사 딸린 벤츠를 타는 봉 사장, 아니 감독님이 되었다. 세상이 뒤집어지길 바라는 것은 늘 하층민들이다. 양반네들과 가진자들, 그리고 봉 감독같은 사람들은 결코 세상이 뒤집히기를 바라지 않는다. 어쩌면 이 감독의 달라진 영화세계는 지배당하는 자에서 지배하는 자의 대열에 들어선 그의 위상을 반영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거장 봉준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저항하고 도전하는 젊은 날의 봉준호 자기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리라. 그가 이번 영화에서 박 사장을 칼로 찌른 기택을 기생충이라고 부르며 지하에 가둔 것은 이러한 두려움의 반영이라고 본다면 지나친 궁예질일까.   

2019. 5. 6.

서울은 왜 못생겼는가

[그 이유는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못생겼기 때문이다]

서울은 못생겼다. 이 도시의 민낯은 너무나 못생겨서 과연 규모 면에서 세계 상위권 도시 중 하나가 맞나 싶다. 그런데 서울은 지형적으로 멋지지 않기가 어려운 위치에 있다. 서울을 가로지르는 한강은 파리의 센 강 등, 여느 대도시의 강보다 거의 두배는 더 넓고 그 중심부에는 남산이 솟아있어 도시의 공간감을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자연은 서울에게 멋진 토대를 선사했는데 도시의 모습은 못생겼으니 그 이유는 분명 인간에게 있다.
 
 서울이 못생긴 이유는 자명하다. 다음의 두 스카이라인을 비교해보자. 확연하게 A가 낫고 B가 못났다는 인상을 줄 것이다.(만약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미적 감각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인간은 획일적으로 통일된 스카이라인보다 들쭉날쭉해서 역동감을 주는 선을 더 선호한다. 문제는 무엇이 서울의 스카이라인을 A가 아닌 B에 가깝게 만드냐는 것이다.

흔히 서울의 건축을 두고 "성냥갑 아파트", "하늘이 안보여 답답하다"고 한다. 그래서 공무원들과 환경단체들은 무분별한 고층 빌딩과 난개발이 도시경관을 해친다고 주장하지만 헛소리다. 혹시 맨하탄의 타임스퀘어나 홍콩의 센트럴 지역을 거닐어 본 적이 있는가. 그 공무원 나으리들과 고귀하신 환경단체 횐님들께서도 서울보다 훨씬 촘촘한 홍콩과 뉴욕의 스카이라인을 보며 백만불짜리 야경이라며 호들갑을 떨었을 것이다. 도시가 가진 미학과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은 아주 다르다. 그런데 인구 천만의 메트로폴리탄인 서울이 아름답지 않은 이유를 자연과 비교해서 찾는 것은 엔초비 파스타를 먹으며 얼큰한 맛이 부족하다고 투덜대는 촌뜨기들의 불평이다. 서울의 추함은 무분별한 개발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서울의 도시계획은 너무나 강압적이고 개발을 지나치게 통제한다. 서울시 건축의 다수를 차지하는 아파트를 놓고 보자. 대부분의 신축단지는 용적률 300%에 35층 이하의 규제를 받는다. 이 규제를 만족시키면서 사업성을 갖추려면 결국 모든 동을 똑같은 모양의 35층으로 지을 수밖에 없다. 88대로를 따라 성냥갑 아파트들을 늘어놓은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다.

혹자는 스카이라인은 규제때문이라 쳐도 획일적인 구조와 건축양식이 못생김의 핵심이라고 지적할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규제때문이다. 서울시 도시미관의 개선은 대부분 재개발/재건축을 통해 이뤄진다. 전쟁 직후 공구리에 대충 시멘트 부어 만든 집들을 부수고 1인당 GDP 3만불의 눈높이에 맞는 집들을 만드니까. 그런데 정부는 여기에 앞서 말한 규제 외에도 온갖 제한을 걸어 재건축을 막는다. 재건축을 하려면 먼저 서울시에 임대아파트로 새 집들을 무상으로 기부해야하고, 그 뒤에 분양되는 새 아파트는 분양가를 제한해 싸게 팔아야하며, 건설사가 비용을 분담하겠다고 조합원들에게 혜택을 주면 수주과열이라며 막는다. 은행에서 이주비를 빌려주는 것도 제한한다. 그래도 돈이 남으면 초과이익이라며 환수한다. 그래도 재건축 하겠다고 해도, 젠장, 인허가를 내주지 않는다. 이 모든게 실제로 서울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재건축 조합의 이익을 빨아가놓고는 남은 돈으로 도시 미관을 개선할 멋진 집을 지으라 한다. 하지만 디자인에는 돈이 든다. 순전히 서울시의 외관을 개선하기 위해서 수지타산이 맞지도 않는 외관 디자인에 수십억을 퍼부을 사람은 없다. 당신과 나와 그리고 재건축 조합을 포함한 우리 모두는 딱 그만큼 이기적이고 또 계산적이다. 현 재개발/재건축 규제는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시민들이 성냥갑 아파트만 짓도록 강제한다.

이 멍청한 규제의 꽃은 한강변 층고규제이다. 현재 서울시 도시계획에 따르면 한강 인접 아파트는 최고 층수를 15층으로 하고 있다. 이유는 한강 조망권을 더 많은 서울 시민들에게 제공하기 위해서. 하지만 한강이 보이는 세대수를 늘리려면 반대로 한강에 고층을 지어야한다. 한강변에 45층짜리 아파트를 지으면 모든 층이 한강을 볼 수 있지만, 15층 뒤에 30층, 또 그뒤에 45층 이렇게 계단식으로 짓는다고 해서 한강이 보이는 집의 수가 늘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줄어든다.(아래 그림 참조) 하지만 서울시는 오늘도 한강조망권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눠야 한다는 입바른 말을 하면서 멍청하게도 한강뷰 아파트의 수를 줄여, 더 소수의 사람들이 이 전망을독점할수 있게 해주고 있다.



건물 외벽에 하늘색으로 표시된 세대가 한강을 볼 수 있는 세대.
이처럼 강변에 저층을 지으면 한강을 볼 수 있는 세대수는 줄어든다.

그럼 왜 이런 규제가 존재하는가? 뭐 시민들이 그렇게 요구해서 그렇지. 그렇다면 시민은 왜 이런 규제를 요구하는가? 바로 시기심 때문이다. 한남 3구역 주민들은 강건너 반포 주민들이 재건축을 한다면 샘을 낸다, 또 청파동 주민들은 한남 재개발이 지연된다는 소식을 들으며 입꼬리를 씰룩 올린다. 눈치빠른 정치인들은 사람들의 그런 심리를 읽고 온갖 말도안되는 건축 규제들을 쏟아놓는다. 다른 도시에서는 낡아서 흉물이 된 건축물을 두고 보조금을 주면서까지 개발을 독려하는데 서울에서는 입주민들이 수천억을 모아 내서 멋진 건물로 다시 짓겠다는데 정부가 앞장서서 막는다, 동료 시민들이 막는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의 멱살을 잡고 내가 못살지언정, 네가 잘사는 꼴은 못 보겠다는 태도가 오늘의 건축 규제를 만들었다. 그 결과 서울 시민들은 소득수준과 아주 괴리된 주거환경에서 살게 되었다, 심미적 측면 뿐 아니라 기능적 측면까지도. 오늘 밤에도 서울에선 해가 지면 벤츠를 끌고다니는 박 모 변호사가 소달구지 몰던 시절에 지은 40년 된 재건축 아파트로 돌아가고 신나게 유럽여행을 다녀온 대학생 김모씨는 택시조차도 거부하는 후암동 언덕길을 캐리어를 질질 끌고 올라간다.

오늘도 사람들은 콘크리트 더미들을 오가며 이 도시의 건축가들과 건축주를 비난한다. 하지만 동시에 못생긴 건물을 만드는 제도를 박수치며 반긴다. 도시는 하나의 유기체와 같아서 하나가 전체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게 아니니, 서울이 하나의 괴물이라면 그 시민들 하나하나는 그 괴물을 구성하는 세포들이다. 이제까지 얼마나 많은 랜드마크와 도시계획들이 시민단체와 지자체의 얼토당토 않은 요구에 좌초했는가. 서울시 최초의 랜드마크로 63빌딩이 들어선 것이 1985년인데 그 이후 두번째 랜드마크로 롯데타워가 들어서는데 무려 30여년이 걸렸고, 세번째 랜드마크가 될 GBC는 4년째 승인조차 나지 않고 있다. 또 지난 달 서울시 건축위원회는 반포의 한 재건축 아파트가 제출한 설계안을 보고 스카이브릿지가 위압감을 준다는 이유로 통과시키지 않았다. 서울시의 건축이 못생긴 이유는 순전히 정치 때문이며 그 정치는 시민들이 낳았다. 서울이 누구를 닮아 못생겼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은 창 밖이나 공무원들의 서류철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마주하는 거울 속에 있다.

스카이브릿지가 "위압적"이어서 반려된 신반포 15차 재건축 아파트의 기존 투시도.

2019. 5. 2.

How politics can destroy you

내가 빠짐없이 보는 경제학자들의 글 리스트에는 폴 크루그먼의 이름이 항상 올라가 있다. 과거 2010년 연준이 양적완화를 이어나가자 수많은 금융업계 종사자들이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올거라며 비명을 지를 때, 그는 침착한 어조로 절대로 그럴 일은 없을 것이고 되려 디플레를 걱정해야한다고 주장한 소수 학자 중 하나였고 시간이 지나고 나자 그 판단이 정확했음이 밝혀졌다. 옳은 정책을 펼친 미국은 가장 먼저 불황에서 벗어났고 잘못된 선택을 한 나머지 세계는 아직도 저성장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다. 이 모든걸 정확하게 예측하고 진단한 이 구루는 자신의 글을 공짜로 인터넷에 올린다.

하지만 그랬던 그가 변했다. 트럼프가 대선에서 이긴 뒤로. 그의 블로그에는 경제에 관련된 글보다도 정치에 관련된 글이 몇배 더 많이 올라오며 그는 자신의 유려하면서도 독한 비평을 경제분석이 아닌 공화당에 더 많이 할애하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평소에 주장하는 경제정책을(재정지출 확대, 그리고 연준의 완화 스탠스 연장) 트럼프가 정확하게 시행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크루그먼은 트럼프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그의 본업이 민주당원이고 부업이 경제학자가 아닌가 싶기까지 하다.

심지어 최근의 포스팅(링크)에서 그는 자신을 공격하던 사람들의 비유를 그대로 들기까지 했다. (You don’t have to be a gold bug or even an inflation hawk to see these demands as deeply irresponsible. Indeed, they sound a lot like the “macroeconomic populism” that has repeatedly led to economic disaster in Latin America, with Venezuela the latest example.) QE를 펼치던 연준과 그를 옹호하던 크루그먼의 비난하던 니얼 퍼거슨은 이러한 통화적 이징이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가져올 것이고 남미의 많은 국가가 그와같은 전철을 밟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여기에 대하 크루그먼은 니얼 퍼거슨이 경제학자가 아니면서 경제정책에 대해 논한다고 조롱했고,  미국 경제가 명확하게 회복기에 있고 실업률이 충분히 낮아졌을때도 인플레이션이 없다면 굳이 통화긴축에 나설 이유가 있냐고 주장했다. 그랬던 그가 이번엔 진영을 바꿔 니얼 퍼거슨과 비슷한 주장을 내놓으며 남미국가인 베네수엘라의 예시를 들며 트럼프의 연준에 대한 압력을 비난했다!

물론 그때와는 경제적 상황이 매우 다르고 크루그먼의 주장처럼 연준의 독립성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정치평론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 경제평론의 날카로움이 무뎌진 것 또한 사실이다. 그 처럼 역사에 남을 석학들도 정치에 휘둘리면 총기를 잃는데, 나 같은 일반인들은 오죽할까.

2019. 5. 1.

오사마와 카투사, 그리고 2000년대 초반.

아직 꽃샘추위로 벌벌 떨던 그 200x년 2월 언제였나, 내 대학생 시절의 첫 공식 행사는 신입생 MT였다. 논스톱 시리즈를 보며 가졌던 캠퍼스 생활에 대한 환상은 첫날부터 산산히 부서졌다. 국가보안법으로 수배중인 한 학번 위 선배가 단상위로 나아가 "민중" "연대" "미제" "노동" "타도"와 같이 나팔바지마냥 촌스러우면서도 낭만따위는 쏙 빼낸 그 단어들로 숙연한 분위기를 만들던 바로 그 순간에. 이윽고 민중가요 강사님이 오셔서 바위처럼, 솔아솔아와 같은 노래와 함께, 요새 유치원에서도 안 가르칠 만한 유아적인 율동을 가르쳤다. 상상이 잘 안되면 우리나라 교회 청년부 예베를 상상해 보라.

이후 반 배정을 받아 처음보는 동기들, 그리고 선배들과 함께 방안에 동그랗게 모여 앉았다. 어색하게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던지고, 받으며 시간을 때우고 있을 때 한 진행요원이 와서 각 반은 개성있는 반이름과 재미있는 포즈를 정하라고 했다. 그때 말이 가장 많던 운동권 선배 하나가, "우리는 재미있게 팀 이름을 빈 라덴이라고 짓자!"라고 했다. 선배라고 해봤자 나와 서너살 차이 밖에 안 났지만 그 형은 벌써부터 탈모가 오기 시작한 탓에 훨씬 늙어보였고 우리는 아무런 반대를 못했다. 그런데 다른 형 하나가 빈라덴은 좀 그러니 딴 이름으로 하자, 욘사마와 이름이 비슷한 "오사마"는 어떠냐고 했다. 빈라덴이나 오사마나 뭐가 그리 다른지 모르겠지만 반미 운동권 학생들이 보기에도 테러리스트 이름을 재밌다고 반명으로 쓰기엔 부담스러웠는지 우리 반의 이름은 오사마가 됐다. 참고로 당시엔 미군 장갑차 하나가 여중생 둘을 차로 치고 간 사건 때문에 반미정서가 강했다.

이제 이름을 정했으니 포즈를 정해야하는데, 아까 그 선배가 주장하길, 우리 반 이름이 오사마니 그에 맞는 동작으로 정하자며 합장을 하고 가부좌를 틀었다. 신입생들이 뭐 발언권이 있나. 선배가 하자는 대로 해야지. 그래서 우리는 인도식 가부좌를 틀고, 동남아식 합장을 하면서 사우디 사람인 오사마의 이름을 외치며 반 사진을 찍었다. 우리는 그 날 천명이 넘는 엠티 참가자들 사이에서 단번에 가장 유명한 조가 되었다. 단과대의 전 과가 참여하는 엠티였으니 아마 이를 기억하는게 나 하나는 아니리라.

밤이 되자 반 사람들끼리 모여 앉아 술자리와 담화가 시작됐다. 너는 고향이 어디니, 대학에 왜 왔니, 꿈이 뭐니 등. 동기중 아주 현실적이고 똑똑한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가 난 돈벌고 싶어서 대학왔다고 하자, 운동권 선배들이 우우 모여들어 핀잔을 줬다. 한 선배 하나는 "너가 국립 서울대학교에 왔으면 민족을 위해 기여할 생각을 해야지 혼자 잘먹고 잘살겠다는건 이기적이고 창피한 짓"이라고, 정확하지 않지만 뭐 이런 뜻으로 그 친구에게 면박을 줬다. 그로부터 몇년 뒤 그 친구가 술자리에서 말하길, 자신은 그날 큰 상처를 받아서 이후로 반 행사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나는 친구에게 너한테 가장 심하게 면박 준 그형은 카투사 갔다가 후에 친미로 전향해서  지금 미국계 회사에 입사해서 본사 가고싶다고 노래를 부르는 중이라고 알려줬다. 우리는 그 "오사마" 포즈로 찍은 단체사진을 회사에 보내면 어떻게 될까와 같은 농담을 하며 키득키득 웃었다.

페미니즘. 요새 시끄러운 페미니즘 이슈가 그때도 있었다. 여학우가 있는 데서 스타나 축구 애기를 하는 것은 성폭력에 해당된다며 두 학번 위 여선배가 알려줬다. 그때 한 동기가 손을 들어 "그럼 여학우들이 남자 있는 데서 연예인이나 화장품 얘기 하는 건요?"라고 묻자 그 선배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것도 당연히 성폭력이지"라고 했다. 그때의 (자칭) 페미니스트들은 현재의 페미니스트들과 좀 달랐던 것 같다. 자의적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교정하려는 태도는 똑같지만 적어도 타인과 자신에게 같은 잣대를 들이대곤 했으니까. 뭐 우리 반만 그랬을 수도 있고.

반미는 그 시절을 운동권과 학생회를 지배하는 정서였다. 미선이와 효순이라는 두 중학생이 미군 장갑차를 미쳐 피하지 못하고 안타까운 사고를 당한 일이 있었는데, 거기에 솔트레이크 동계 올림픽에서 미국의 안톤 오노 선수가 김동성 선수를 실격시키고 메달을 딴 일이 겹쳐, 대학가에선 반미를 외치는 것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았고, 운동권 선배와 동기들을 그때를 틈타 자신들의 사상을 신입생들에게 퍼뜨렸다. 하지만 그 반미는 패션에 그쳤다. 군대에 가고 취직할때가 되자 그들은 입었던 옷을 벗고 갈아입듯 태도를 바꿨다. 신자유주의의 앞잡이라고 욕하던 고학번 선배(그 선배는 그걸 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가 연봉 잘주는 금융회사에 들어가자 그들은 쪼르르 달려가서 밥 얻어먹기에 바빳고 그 무리 중 가진자들을 욕하던 한 선배는 과외한 돈으로 명품 시계와 옷을 입고다녔다. 아, 그 선배가 서울대생, 민족 운운했던 그 선배다. 그 형은 카투사로 입대하며 "적을 알려면 적의 본진에 가야한다"는 명언을 남겼다.

그로부터 십수년이 지난 지금, 연말 모임에서 만나 각자 어떻게 사는지 이야기를 풀어내다 보니 참 묘했다. 반미를 외치던 선배 하나는 신자유주의자(=부자)의 딸 딸과 결혼해서 강남에 아파트 두고 외제차를 끌고 다나고, 미국인 수천명을 죽인 테러리스트의 이름을 웃으며 외치던 친구는 그 어묵 일베충은 싸이코패스라며 화를 냈다. 미국과 기득권을 가장 크게 욕하던 선배/친구들이 가장 그 기득권에 가깝게 살고 있거나, 혹은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어쩌면 욕심이 큰 사람일 수록 시기심도 강하고, 그 시기가 가진자들에 대한 분노가 되어 운동권으로 이끄는 것 같기도 하다. 얼마 전 임종석이 전선을 시찰하며 라이방 선그라스를 쓴 사진이 신문에 실렸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미 제국주의의 선봉 맥아더 장군이나 독재자 박정희의 이미지였는데, 그게 우연은 결코 아닐 것이다.

2019. 4. 21.

사바하-선과 악의 경계 그리고 호와 불호의 경계.

[일부 스포를 포함하고 있으나 영화 내 스토리 해석에 방점을 둔 글은 아닙니다.]
 
나는 대중의 평가와는 반대로 이 영화가 장재현 감독의 이전 데뷔작, 검은사제들보다 더 뛰어난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불교적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고 그곳은 절대악의 존재가 없는 세상이다. 이렇듯 사탄이나 악마가 없는 오컬트 스릴러의 세계는 마치 적군이 없는 전쟁영화처럼 참신하긴 해도 낯설 수 밖에 없다. 감독은 여러차례 영화 내 등장인물(해안스님-진선규 역)의 입을 빌려 관객들에게 이 점을 주지시키려 하지만, 수백 수천 편의 영화들을 통해 동서양의 각종 악마와 마물들에게 익숙해 진 스릴러 팬들은 이를 쉬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복선 회수가 안됐다" 혹은 "개연성이 부족하다"라는 비난은 그 뒤에 한 가지 질문을 담고 있다. "그래서 누가 나쁜놈인데!"
 
하지만 애초에 이 영화에 절대악은 없었다. 혜안스님이 말했듯, 애초에 악이라고 규정지을 대상은 존재하지 않으며 누구나 자신의 마음속의 번뇌가 악일 뿐이다. 이것이 태어나면 저것이 태어나듯 손가락을 여섯개 가진 두 존재가 탄생했던 것이지, 그 둘이 애초에 각각 빛과 어둠을 담당하도록 역할이 명확하게 나뉘어진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미륵이 악행을 저지르기도 하고 악행을 저지르던 나찰이나 뱀으로 보이는 "그것"이 선을 이루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영화 전체를 지탱하고 있는 불교식 세계관과 온전하게 일치한다.
 
감독의 지난 작품, 검은사제들은 헐리웃 영화 엑소시스트를 한국적 느낌으로 번역한 것에 불과했다면 이 사바하는 진정 한국판 오컬트적 세계관을 창작해 낸 영화라고 생각한다. 번역본과 창작본. 두 영화 사이에는 그만한 차이가 있으며 영화적 완성도를 보아도 나는 두 번째 작품을 더욱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기독교식 선악구분에 익숙한 대중들은, 더욱이 지난 작품이 그 이분법적 세계관에 똑 맞았기에, 장재현 감독의 새 작품이 낯설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외모만 봐도 영웅인지 빌런인지 구분되는 DC나 마블의 세계와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우리는 거기에 맞게 눈높이를 맞춰야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법칙이 결코 이진법으로 해석되지 않을진대 하물며 공포영화가 이분법에 머무를 이유 또한 없으므로, 언젠가 관객이 이 불교식 세계관이 가져다주는 공포에 익숙해지는 날이 오면 이 영화는 재평가 받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사실 천사와 사탄이 깔끔하게 나뉜 세상보다, 여래가 악마가 되고 뱀이 미륵으로 바뀌는 혼돈의 세계가 더 두려운 것 아니겠는가.

2019. 3. 25.

조선인들의 후예는 어떻게 기억을 왜곡시키는가

앞서 두 편의 글을 통해 특정 세대를 이해하려면 그 세대가 겪어온 역사를 함께 반추해보는 시각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역사라는 것이 각도를 달리해서 보면 다른 것들이 보이기 마련이니까요.
 
그런 면에서 이번엔 한국인들에게 가장 예민한 주제를 다뤄보겠습니다. 바로 우리들이 어떻게 일제시대의 기억을 왜곡하는지를요. 글을 읽고 나면 거세게 반발하는 분도 계실 터이고 식민사관, 혹은 일본의 대변인이냐고 비판, 아니 욕을 하실 분도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굳이 그런 논쟁을 벌이면서까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이 기억왜곡이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2019년 오늘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직계는 아닙니다만 제 큰할아버지가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셨던지라 역사관이 이상한 집에서 자란 것도 아니고, 또 저 역시 집안 어른들께 일제의 만행을 구전으로 전해들을 때마다 분노했던 한국인 중 하나입니다. 따라서 성인이 되고 다양한 사료를 접하면서도 현재와 같은 시각을 가지기까지 정말 많은 내적 갈등을 거쳐야 했습니다. 아래 주장에 대해 여러분들이 반박하고 화내시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의 저 역시 그랬을테니까요. 하지만 이 문제 만큼은 그때의 분노를 잠시 누르고 다시 침착하게 바라보려고 합니다. 부디 여러분들도 그리 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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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1991년에 방영된 여명의 눈동자라는 드라마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일제시대부터 6.25에 이르기까지의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하는 이 드라마는 비극의 역사를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그려낸 대하드라마로 당시 무려 5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크게 히트했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요새 방영됐다면 시청률 대박은 커녕 엄청난 파란을 야기하며 시청자 게시판을 악플로 도배한 채 조기종영했을 것이다. 이 드라마엔 병사들과 성관계를 하고 난 뒤 받은 군표를 모아 고향에 땅을 사겠다는 위안부나, 술에 취해 위안소를 찾는 조선인 병사, 생체실험 전문 731부대에서 조선인 마루타들을 관리하는 조선인 군인과 같은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재작년에 영화 군함도가 개봉될 당시, 필자의 눈에는 이 영화가 충분히 민족주의와 쇼비니즘으로 점철되어 있었는데도, 패배의식을 가진 조선인들이 등장하고 친일부역자들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네티즌들이 감독의 역사인식을 맹렬하게 비난했던 것을 생각하면 2016년의 대중들과 1991년의 시청자들 사이에는 상당한 간극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대체 그 25년동안 우리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답은 바로 한국인 구성이 바뀌고 있다는 데에 있다. 추산해보면 1991년 당시에는 일제시대에 일본인으로 태어난 한국인들이 전체 인구의 약 30%를 차지했지만 이 비율은 오늘날 한자리 수에 불과하다. 여기에 일제시대를 간접 경험했던 전후 베이비붐 세대를 포함하면 그 비율은 훨씬 더 벌어질 것이다. 즉 일제시대를 겪지 않은 국민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한국인 집단의 기억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그 변화의 방향이 역사적 사실과 점점 멀어지는 데에 있다. 단언컨대 우리의 기억은 왜곡되고 있다.
 
우리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2천만 조선인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변함없이 매 순간 한국인들의 독립을 염원했다고 믿고 싶지만 실상은 꼭 그렇다고만 볼수는 없었다. 일본인들이 1919년 3.1운동을 제압한 후 문화통치를 펼치며 한반도를 빠르게 근대화하자 조선인들은 일본의 헤게모니를 시나브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왜놈의 지배는 민족의 자존심에 굴욕을 안겼지만 동시에 구체제를 박살내고 조선을 빠르게 발전시켜 조선인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켰다. 한일합방 후, 총동원령이 내려진 1938년 이전까지 조선인들의 농업생산량, 공업생산량, 평균신장, 평균수명, 문해율은 빠른 속도로 개선되었고 이는 가장 민족주의적인 학자들도 부정하지 않는다. (물론 그들은 이 발전이 식민화의 과정에 따른 부산물일 뿐이었고 또 41-45년에 실시된 가혹한 수탈과 공출로 경제가 후퇴했음을 지적한다-이 또한 사실)
 
일본의 목적이 무엇이었던 간에 어쨋거나 1910년부터 1940년까지 30년간 조선은 빠르게 발전했다. 슬프게도 우리는 인간의 신념이 물질의 풍요 앞에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안다. 조선인들은 빠르게 일제에 동화되어갔고 총독부의 강요 없이도 진정한 의미의 내선일체를 요구하는 조선인들은 늘어갔다. 우리는 조선총독부를 일제의 무력통치기관이라고만 알고 있지만(사실이지만) 반대로 일본의 내각에서는 조선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기구이기도 했다. 일례로 총독부가 1929년 창씨개명 계획을 본국에 제출하자 일본 본토에서는 "외모도 비슷한데다 일본말도 완벽하게 하는 조선인들이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바꾸면 진짜 일본인들과 구별이 안된다"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심지어 훗날 일본의 총리에 오를 정도로 입지가 탄탄했던 사이토 마코토 총독조차도 본토 내각의 반대로 창씨개명을 성공하지 못했다.(이 요구는 전쟁에 조선인들 본격적으로 동원하기로 결정한 1940년대에 통과되었다.) 또 대만총독부와는 달리 조선총독부는 패망 직전까지도 재정적으로 자립하지 못하고 본국정부의 지원을 받았는데 이는 일본인들의 조선 진출을 위해 세제해택을 주는 동시에 피지배인들의 반발을 누르기 위해 조선인에게는 더 낮은 농지세를 매겼기 때문이다.(일본인 3% 조선인 1.3%**) 이에 대한 보완책 중 하나로 총독부는 조선의 양곡을 일본으로 수출할 계획을 세웠다. 우리 역사에는 이를 강압적 수탈로 기록하지만 일본 본토의 쌀 시세가 30% 더 비쌌던지라 이는 조선인들의 수입을 크게 개선했던 것은 사실이다. 당연히 일본 본토에서는 농민들을 중심으로 반발이 심했지만 이 역시 총독부가 밀어붙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군사적 성공은 조선인들의 민족적 자긍심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당시 여러 근대사학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193년 일본인들이 남중국해에서 생포한 영국과 미군 포로들을 잡아다 한성에서 행진시켰더니 길거리에 수많은 조선인들이 나와 감격하며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의 눈엔 일본인이 이룬 군사적 성과에 왜 조선인들이 감격하냐고 의문을 가질지 모르지만 이는 당시 조선인들 사이에 내선일체 정책이 어느정도 스며들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럴만도 한게 1910년 생 조선반도 출신 김말똥의 경우 태어날 때부터 일본신민으로 교육받고 자라지 않았던가.

게다가 일본은 조선인에게 일본인에 준하는 2등시민의 지위를 주었다. 2등이란 위치는 1등에 비교하면 기분 나쁜 자리지만 3등, 4등보다는 나은 자리 아닌가. 물론 차별이 공기처럼 만연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일제가 중국인들이나 동남아 피지배인들에게 강제한 법적 지위에 비하면 조선인들은 일제의 헤게모니 아래서 그래도 상위층에 속하는 집단이었다. 이는 우리가 의도적으로 주목하지 않는 만보산 오보사건 등으로 촉발된 화교 배척운동(실상은 학살) 에서도 들어난다. 만주에 진출한 조선인들과 현지 중국인들 간의 충돌이 있었는데 이때 조선 현지 신문들이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오보를 낸다. 이를 보고 분개한 조선인들은 중국인들에게 대대적으로 테러를 가하는데 이때 누적된 조선인들의 반중 감정은 이후 일본이 중일전쟁을 수행하는데 하나의 자산이 된다.**
 
이를 보면 많은 조선인들이 일제 치하 아래서 물질적 풍요를 누리거나 일부는 되려 일본의 헤게모니를 적극 활용해서 자신의 자긍심을 높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금의 관점에서는 피가 거꾸로 솟을 일이지만 우리는 구한말 조선인들의 패배의식을 기억해야한다. 자력으로 근대화에 성공하지 못하고 상국 청나라가 서양의 군대에 굴욕적으로 무릎꿇고 식민지로 전락하던 것을 목도한 당시 조선인들의 관점으로 시대를 바라보자. 그들에게 "자력으로 근대화에 성공했어야지!"라는 일갈은 아무 의미가 없는 공허한 외침이다. 고종이 자기 손으로 김옥균의 갑신정변을 엎었을 때 그 가능성은 이미 사라졌으니까.(사실 필자는 애초 그 전부터도 가망이 없었다고 보지만) 조선인에게 남은 선택은 아이가 아프면 굿이나 하던 1910년 이전의 미개한 조선을 그리워하거나 아님 일제체제에 협조해서 근대화를 이루거나, 그 둘 밖에 없었다.

35년이라는 시간은 정말 긴 시간이다. 아마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84년생 이하)은 그 35년의 시간을 아직 겪어보지도 못했을 지 모른다. 게다가 그 35년 중 마지막 4년을 제외한 나머지 31년의 기간 동안 지배체제가 지속적 발전을 가져다 줬다면, 정말 깨인 민족주의자나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을 가진 소수를 제외하면 어떠한 형태로든 일제의 통치 시스템에 적응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1991년의 시청자들 중 다수는 이런 현실을 기억하던 사람들이었다. 드라마를 보며 그들은 그랬을 것이다. "저 쳐죽일 놈들, 멀쩡한 아녀자를 위안부로 속여서 끌고가? 쯧쯧 근디 뭐 어쩌겠어 혀깨물고 그냥 죽을수도 없고. 이왕 그리된 거 군표라도 모아 부자로라도 귀향해야제" 혹은 "어케 동포들을 마루타로 다룬디야.. 하지만 그렇다고 나가 군복 벗고 그 실험체 중 하나가 될순 없잖여. 산 사람은 살아야지.." 하지만 25년의 시간이 흘러 일제를 겪었던, 혹은 간접적으로 경험했던 사람들은 점차 역사의 지평 저 너머로 사라져가고 스마트폰 세대가 여론을 주도한다. 이 2016년의 대중은 그 시대에 대해 외국인 만큼이나, 아니 사실 외국인보다도 더 무지하다. 단지 조선인이 같은 조선인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일본인에게 아첨하고 달라붙는 신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영화에 별점 테러를 가하며 감독의 역사인식을 힐난한다. 창피해서 감추고 싶은 기억은 한 세대의 죽음과 함께 대중의 기억 속에서 실제로 지워져가고 안락한 삶을 누리는 현대 한국인들은 우리의 도덕으로 조선인 생존자들을 재단한다. 그 사이에 대한제국과 대한민국 만큼의 격차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망각한 채.
 
사실 이런 기억왜곡은 1945년 해방부터 시작되었다. 동아시아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은 한 외국 친구는 필자에게 늘 일제시대를 colonial era라고 번역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로 삼은 것이 아니라 합병한 것이니까. 그럴 때마다 나는 "일본은 조선을 합병했지만 일본인들과 동등한 지위를 준 것은 아니니 실제로는 식민지라고 볼 수도 있다"며 내 어휘선택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앞서 지적한대로 일제가 타 식민지 국가들과 조선을 대하는 태도는 분명 달랐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한국인들이 역사를 주체적으로 기록하게 되자 별 이견 없이 지난 35년을 식민지배로 격하해서 기록했다. 이게 더 자존심 상하는 것 아닌가 싶지만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다. 식민지배는 당시 조선인들의 수동성을 강조하는 말로 일제와 우리를 철저하게 분리할 수 있지 않은가. 즉 나는 그 배경에 조선인들이 일제 지배에 일부 협조한 역사를 부정하고 철저하게 피해자의 입장으로 역사를 써내려가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있다고 본다.****
 
해방 75년의 역사는 어찌보면 우리의 기억을 왜곡해 온 역사이기도 하다. 이 왜곡의 노력은 민족 전체 뿐 아니라 개인 차원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2005년 당시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이 다음 대선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인 박근혜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 친일청산법을 도입했을때 새누리당 의원들 뿐 아니라 여당의 몇몇 핵심인사들이 친일후손임이 드나 크게 역풍을 맞았던 적이 있다. 열린우리당 의장 신기남 의원의 조부는 드라마에 늘상 등장하는 악질 조선인 순사였으며 친일청산법을 발의한 김희선 의원의 아버지도 친일파였으니 정작 이 법이 통과되면 여러 여당정치인들의 정치생명이 끝장날 터라 해당 법안은 파기되었다. 물론 친일파 후손들이 열린우리당에만 포진했을리는 절대 없다. 또한 앞서 언급한 정치인들이 뻔뻔해서 친일후손임을 숨기면서 친일청산법을 도입한 것도 아니다. 그저 본인들도 아버지 할아버지들이 일제시대에 무엇을 했는지 잘 몰랐을 뿐이다. 비슷하게 연예인 강동원도 조부가 친일파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사과하지 않았나. 이 글을 읽는 당신 중에서도 증조부/조부/외증조부/외조부 네 분 모두 일제시대에 무엇을 하셨는지 정확하게 아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해방과 동시에 그분들은 입을 다물었고 개인의 차원에서 묻어버린 기억의 공백은 왜곡된 역사가 들어설 여지를 남겼다. 나 역시 큰아버지의 자랑스런 독립운동 역사는 알지만, 증조부와 외증조부의 역사는 알지 못한다. 거기에 어떤 역사가 숨어있을지 전혀 알지 못하는 오늘의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불과 25년만에 대중들이 과거사를 재단하는 잣대가 얼마나 높아졌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높아진 잣대는 그만큼 집단기억이 왜곡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왜곡된 기억은 기록된 사실을 부정하고 변형한다. 이를 지적하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일본에서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피해자의 기억이 왜곡되는 만큼, 저들-가해자 역시 자신들의 기억을 왜곡시키고 있으며 이것이 시간이 갈 수록 한일간의 역사논쟁이 간극을 좁히기는 커녕 점점 더 커지는 이유이다.
 
이 글을 공개하는데에는 두가지 목적이 더 있다. 하나는 우리가 어떻게 기억을 왜곡시키는지 자각해서 조금이나마 이를 늦추고 싶다는 소망. 우리가 과거를 좀 더 객관적이고 합리적 태도로 바라보아야 편협한 민족주의에 경도된 중국이나 일본의 역사왜곡을 좀 더 우월한 입장에서 꾸짖을 수 있지 않을까?
 
두번째로는 우리가 더 다양한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어쩌면 앞서 언급한 우리 큰할아버지는 일본군들의 토벌을 피해 살아 남으셨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주에 자손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또 그 후손중 하나가 남한으로 건너와 정착했을지도 모른다. 그럼 우리가 대림동을 지나며 조선족들을 보며 눈을 흘길 때 나의 그 육촌 형제가 박차고 일어나 우리를 보고 손가락질 하며 "조선에 남아 일제에게 부역한 기회주의자들의 자손들이 잘먹고 잘산다고 독립운동가의 후손인 나를 괄시한다"며 분개할수도 있는 일 아닌가. 거기에 대고 "장첸같이 생긴 놈이 무슨 개소리냐" 라고 응수해서는 타자와의 역사적 인식의 간극을 절대 좁힐 수 없다.
 
우리는 마땅히 일본의 전쟁범죄를 기억하고 계속해서 분노해야한다. 하지만 적어도 한번 쯤은 타자를 잊고 우리 자신에게 초점을 맞춰보자. 앞서 살펴본 박사모, 운동권 세대와는 달리 일제시대 세대는 이미 대부분 죽고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세대의 관점으로 시대를 바라보기를 포기한다면, 우리는 과거사 논쟁이라는 다이달로스의 미로에 맨손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이다. 자력으로 거기에서 나올 길은 없다. 어쩌면 과거사 청산이나 친일 논쟁이 반백년이 넘도록 진전을 보이지 못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물론 여명의 눈동자에서 그 위안부는 억지로 끌려오긴 했고 731부대에서 근무하던 조선인 군인은 미군에 생물병기 정보를 넘기고 해당 무기를 무력화하는데 협조하는 등 이 드라마에도 민족주의가 만연하다. 하지만 군함도에 대한 논쟁은 민족주의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잊고 싶었던 사실이 등장해서임을 기억하자.
 
**오해를 없애기 위해 부연하면 민족주의자들은 이 정책을 조선 지주들의 협력을 얻기 위한 전략으로 본다. 별개의 얘기지만 대규모 자본이 필요한 광업 수업 등에 대해서는 총독부나 조선은행이 허가/대출제한 등으로 조선인들을 차별했다.
 
***또한 일본은 중국으로 진출하기 위해 조선인들의 민족적 자긍심을 적극 활용했다. 고구려는 한민족의 역사고 따라서 만주 역시 한민족의 생활 터전이라는 역사의식은 내선일체 시스템 아래 조선인(과 일본)이 만주로 진출해야할 정당성을 더해 주었다. 일제의 만주 점령지의 화폐제도를 조선은행과 한성은행이 운용했던 것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본다.
 
****이와 비슷한 역사왜곡은 해방 직후 한국 현대문학계에서도 보인다. 일제시대에 출세하려고 노력한 조선 청년들의 모습은 분명 그 시대의 흔한 사회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주제의 작품들은 해방 후 대거 친일문학으로 매도되어 한국 문학사에서 거의 숙청당하다시피 했다. 나는 여기에도 해방 후 일제에 협력한 기억을 지우고자 하는 의도가 담겼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