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2.

그래, 대통령을 증원하자

그렇지 않은가? 매년 대선 후보로 10명에 가까운 후보들이 난립하지만 대통령 정원은 단 1명 뿐이다. 지대를 혁파하기 위해서는 대통령 정원을 대폭 늘려야 한다. 게다가 대통령은 경쟁상대가 없기 때문에 폭리를 취하고 깽판을 쳐도 소비자들은 어쩔 수 없이 대통령의 정책을 받아들여야 한다. 밀턴 프리드먼의 가르침에 따르면 대통령 정원을 늘려야 한다. 아니, 되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제도가 더 낫다는 것 아닌가.

말도 안되는 헛소리라고? 그렇게 볼 수도 있지. 하지만 모든 분야에 정부가 반강제적으로 정원만 늘리면 만사형통이라는 용산의 한심한 인식은 어떻고? 대통령을 증원하자는 말을 비웃기 전에 저 멍청한 관료들의 입부터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관치로 시장경제를 대체하겠다며 나대는 저들이야말로 스탈린주의자들이며 빨갱이들이다.



2024. 11. 10.

윤석열의 기괴한 사과와 눈먼 관료들의 정부

윤석열의 기자회견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한 동료가 대통령의 장광설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결국 '씨발 미안하다고 이 새끼들아' 이거네" 그는 대선까지만 해도 적극적으로 윤석열을 지지했던 사람이었다.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의 기자회견을 보며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 평론가의 지적대로 허리를 90도로 숙이는 형식과, 변명이 덕지덕지 붙은 사과의 내용 사이에는 커다란 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회견 내내 보여준 저렴한 어투와 고압적인 태도는 우리에게 불쾌감을 안겼다.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품격 있는 리더의 겸손한 모습이지 결코 그 반대가 아니다. 하지만 정말 당황스러운 것은 그들이 이 회견이 국민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별로 새로운 일이 아니다. 임기 내내 그들의 정무감각은 처참하게 박살 나 있고 현실 인식은 기괴할 정도로 어긋나 있었으니까. 집권 후 반환점을 도는 시점에 대통령실과 여당이 17%라는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든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윤석열과 그 보좌관들이 거듭해서 이런 오판을 내리는 것이 나는 그들이 관료 출신이라는 그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현실감각의 부재, 권위주의적인 태도, 개저씨라는 단어를 연상케 하는 후진 매너 등 관료로 오래 지낸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이 이번 정부에서 유독 강하게 드러난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대통령부터가 사상 최초로 관료 출신이고 원내대표도 관료, 당 대표도 관료, 심지어 당의 사무총장과 초대 비서실장까지도 모두 전직 관료로 꽉꽉 채워졌지 않은가. 군부독재가 끝난 1987년 이후 관료들이 이렇게까지 정치의 요직을 독점한 적은 없었다. 까라면 까는 사람들,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 일 처리를 설득과 합리가 아닌 권위와 서열에 의존하는 사람들, 서류 결재 외에는 별 전문성이 없는 사람들, 그렇게 혁신이나 발전과 가장 거리가 먼 관료들로 수뇌부를 구성하고서 사회를 모조리 개혁하겠다는 대통령의 포부는 비참한 착각에 불과하다.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왜 제임스 뷰캐넌,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루트비히 폰 미제스 등과 같은 수많은 철학자, 정치학자들과 경제학자들이 관료제의 비합리와 비효율성을 비판했겠는가. 

한 언론사의 분석에 따르면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후 약 2년간 공식 연설에서 자유라는 단어를 약 1000번가량 사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내 경험상 금융시장에서 이렇게까지 심한 관치로 시장경제를 왜곡시킨 정부는 단연코 없었다. 현재의 정부와 여당은 자신들이 반시장적이라고 비난했던 이전 정권 못지 않게 반시장적이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국정농단의 사전적 의미를 다시 써야 한다고 일갈했는데, 국립국어원은 그보다 먼저 대통령이 이해하는 자유의 의미부터 다시 정의해야 할 것이다. 윤석열은 후보 시절부터 밀턴 프리드먼의 저서와 주장을 자주 인용했다. 그런데 이 경제학자는 관료조직은 시장과 달리 경쟁에 의해 효율적으로 운영되지 않기 때문에 자원을 낭비하고 경제성장에 해가 된다고 주장했고 또한 관료주의적 이해관계에 얽혀 왜곡될 수 있는 정부의 규제를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나. 하지만 윤석열과 그의 관료출신 부하들은 정확하게 프리드먼이 하지 말라던 짓들을 거듭했다. 그러니 나라의 경제와 한국 금융시장의 성적들이 좋을 턱이 없다. 자본과 시장은 사회주의자들을 싫어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무능하고 권위적인 관료들도 혐오하니까.

과감하게 나선 기자회견에서 좋지 못한 평가를 받은 윤석열 대통령은 오늘 직접 주재한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임기 전반기에는 민간의 자유와 창의를 최대한 보장하는 민간 주도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했다"라고 자평했지만 그와 그의 관료 쫄따구들은 단 한 번도 민간에게 주도권을 이양한 적이 없었다. 용산과 세종시는 공매도 금지를 포함하여 온갖 기괴한 규제들을 쏟아냈으며 각종 대통령의 해외순방 일정에 맞춰 일방적으로 기업의 오너들을 질질 끌고 다녔고, 민간 기업의 수주 성과까지 가로채 정권의 치적 홍보에 동원했다. 관이 그 어느 때보다도 민간을 지배하는 이런 행태는 객관적 지표로도 드러난다. 동아일보가 한 리서치 회사에 의뢰하여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올해 30대 기업의 신규 사외이사 중 관료 출신은 약 47%로 이번 정부 들어 크게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70대 기업으로 범위를 확대해도 결과는 비슷하여서 판검사와 고위 관료 출신의 비율은 41%로 전년 대비 약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사외이사가 경영진을 견제/감시하지 못하고 사실상 합법적 로비나 뇌물을 전달하는 통로로 전락한 현실을 감안하면 기업이 어디에 돈을 뿌려야 득을 보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셈이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주제 사라마구는 한 소설에서 갑자기 사람들의 눈이 멀어버리는 일이 벌어지면 정부가 얼마나 폭력적으로, 또 작은 권력을 가진 소수의 집단이 얼마나 야만적으로 변할 수 있는지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마찬가지로 권력을 쥔 고시 출신의 관료들은 지난 2년  반 동안 현실에 대한 얕은 이해만 가지고서도 경제와 시장을 제 입맛대로 뜯어고치겠다는 야만적 시도를 거듭해왔다. 하지만 그들은 사회의 단기적 문제를 해결하지도, 국가에 장기적 비전을 제시하지도 못했다. 그들의 눈은 멀어 있다. 그렇기에 관료들의 정부는 실패할 것이다.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난다. "두려움 때문에 그녀는 눈길을 얼른 아래로 돌렸다. 도시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부패한 진보 사상가들에 이어 무능한 보수 관료들이 후퇴시킨 나라는 우리에게 닥친 현실이며 당신과 나는 계속해서 그들의 실패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안타깝게도.    

2024. 10. 21.

악법이 말아먹은 국장

이사의 충실의무를 강화하는 문구를 상법개정에 포함하는 것을 가장 강하게 반대한 측이 재계와 법무부라는 보도가 있었다. 이 문제를 놓고 벌인 좋은 토론이 있어 아래에 소개한다. 


여러 법조인들의 의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상법의 문구가 다른 여타 선진국들에 비해 느슨하거나 가벼운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에버랜드 전환사채 사건을 두고 대법원이 기존주주들에게 손실을 끼쳐도 회사 법인에게 해를 끼친게 아니면 괜찮다는 판결을 내리면서 재벌들의 국장서 돈 빼먹기 게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법률가들은 이것이 온전히 적법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현실을 위해 법이 있는 것이지, 법에 현실이 맞춰야 하는 것이 아니다. 토론에서 반대 측에 선 권재열 교수는 상법체계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반대한다지만, 엉망인 법을 지키자고 자본시장을 망가뜨리는 행동이 과연 정당한가. 애초에 상법과 자본시장법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자본시장이 이렇게 크게 왜곡될 이유도 없었다. 허술한 법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시장과 경제를 희생양으로 삼겠다는 법학자의 오만과 무지에 침을 뱉으라. 

정치철학은 rule of law(법의 지배)와 rule by law(법에 의한 지배)의 차이를 강조한다. 이 둘은 매우 비슷하게 들리지만 전혀 다른 의미를 내포한다. 전자는 공평무사하고 합리적인 시스템을 의미하지만 후자는 권력자가 제멋대로 법을 휘두르는 것을 의미하는데 서양의 정치철학은 그 출발서부터 이 둘을 엄격하게 구분했다. 당나라 시절의 제도를 본딴 고시출신들의 법무부와 권재열 교수와 같은 사람들은 자본시장이 어떻게 되든 그건 내 알바 아니고 일단 악법도 법이니 너희도 소크라테스처럼 독배를 마시라며 자본시장의 입에 사약을 밀어넣고 있는데, 자신들의 태도가 저 두 문구 중 어느 쪽에 서있는지 되돌아보길 바란다. 

2024. 10. 19.

밸류없, 무능 그 잡채

새로 상법개정안이 공개되었다. 이딴걸 플랜이라고 들이밀며 자본시장의 거버넌스가 개선될 것이라며 주식을 사라는 정부와 경제관료들은 백치이거나 사기꾼들이다. 무능한 것일까, 부패한 것일까. 

뭐든 당장 전부 잘라라. 




2024. 10. 10.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

 

돈 버는 것 외에는 별다른 재주가 없는 나는 작가였던 적도, 작가가 될 만큼의 재능을 가졌던 적도 없지만 늘 그들을 동경했다. 늦은 시간까지 사무실에 홀로 남아 손익을 정리하다, 창밖 먼 곳에서 차분히 반짝이는 불빛을 바라보는 그런 심정으로 그들을 선망했다. 그러던 중에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소식을 들었으니 얼마나 놀랐던지. 문득 예전에 누군가 쓴 문구가 떠올랐다, "문학 만이 나에게 구원을 준다" 동경하는 이들의 위대한 성취에 왠지 모르게 울컥하여 거듭 찬사를 보낸다. 짝짝짝.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



2024. 10. 3.

왜 밸류업은 실패했는가: 고졸 6등급 과외하기


서학 개미들이 주로 미국 시장에 투자하다보니 크게 착각하는 것이 있는데, 우리나라 주식시장은 미국 대비 성적이 저조한 것이 아니다. 그냥 절대평가로도 형편없는 것이다. 미국 외에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처참한 성적을 보이고 있으니까. 전 세계의 주식시장 중에서 우리나라보다 성적이 나쁜 곳은 방글라데시, 라트비아, 멕시코, 에콰도르, 슬로바키아 이 다섯 나라뿐인데 그나마 비슷한 체급인 멕시코는 저점에서 40%가량 반등했다 하락했으니 그야말로 코스피는 세계 최악의 주식시장인 셈이다. 그 배경으로 금투세의 영향을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상당수의 국가들은 이미 자본이득세를 시행하고 있으며 작년에도, 또 재작년에도 코스피의 성적이 변변찮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설득력이 약하다. 게다가 올해 초에는 예상 밖의 반도체 특수도 있지 않았나. 따라서 전쟁이 난 중동보다도, 심지어 경제제제를 맞은 러시아보다도, 그리고 ELS 사태를 촉발한 홍콩 지수보다 더 크게 비명을 지르는 우리나라 주식시장이 전하는 메시지는 자명하다. 밸류업 프로그램이 망하고 있다는 것. 

사실 이 프로젝트의 실패는 널리 예견된 일이었다.(링크) 이미 10년 전에 실패한 계획을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똑같이 밀어붙였으니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 아닌가. 만약 당신에게 밸류업이 성공할 수도 있다고 조언했던 금융계 지인이 있었다면 그는 아주 멍청하거나 당신의 친구가 아니니 손절하라. 지난 대선에서 시장경제를 중시한다던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기가 차게도 그와 그의 경제관료들은 지난 2년간 온갖 반시장적 정책들을 밀어붙이며 투자자들과 찌질한 기싸움을 벌였으니 매우 당연한 결과이다. 관치로 망가진 밸류에이션을 관치로 고치겠다는 이들의 병든 철학이 좋은 결과를 낼 가능성은 없었다.  

구체적으로 들여다볼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주요 금융사들에게 배당을 확대하지 말라며 꼬장을 부리던 정부와 규제당국은 갑자기 태도를 돌변해 이젠 배당을 늘리라며 윽박지르고 있고, 기업의 자율성을 존중하겠다더니 난데없이 제품 가격을 올린 소비재 회사를 비난하며 세무조사에 들어갔다. 또 언제는 은행들 보고 대출을 늘리라고 했다가, 아니 늘리지 말라고 했다가, 아니 다시 늘리라고 했다가, 도로 늘리지 말라고 했다가, 아 다시 늘리라고 했다 갑자기 버럭 화를 내며 줄이라고 하기를 반복하지 않나. 십수 년간 멀쩡히 팔리던 ELS 상품을 난데없이 틀어막고 리스크 관리를 건전하게 해 온 은행과 보험사에게 부실 자산을 떠안으라고 강매하는 등, 그 어느 때보다도 광적인 시장개입을 거듭하고 있다. 관치(官治)를 넘어선 광치(狂治)의 영역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기업들의 지배 구조를 개선하겠다는 자신들의 공약을 철저히 배신했다. 과거 에버랜드 전환사채 사건부터 최근의 LG에너지솔루션의 물적분할까지, 이사회가 다수 주주들의 이익에 반하는 결정을 내리며 자본시장에 큰 악영향을 끼친 사례가 명명백백히 존재하는데도 여당과 정부는 당초 약속들을 뒤집어 이런 배임행위들을 금지하는 개정안에 반대했다. 정부의 상법 개정안이 통과되어도 여전히 재벌들은 물적분할에 나설 것이며 대다수 주주들이 가지고 있던 우량주들은 허울만 좋은 지주회사로 전락하여 밑도 끝도 없이 주가가 희석되는 것을 겪을 것이다. 되려 그들이 빨갱이라고 비난하던 야당과 한겨레 언론이 더 친시장적인 상법 개정안을 지지하는(링크) 이 기현상을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재벌 사회주의자들과 친북 사회주의자들 간의 웅장한 대결?   

정부의 시장경제에 대한 몰이해는 엉성하게 구성된 밸류업 인덱스에서도 드러난다. 많은 많은 리포트들이 지적했던 것처럼 이 지수에는 수많은 문제점들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많은 투자자들을 화나게 했던 것은 불과 얼마 전까지도 주주들의 뒤통수를 치며 주머니를 털어먹으려던 불건전한 회사들을 다수 포함했다는 것이다. 지수가 발표된 날 인덱스에 속한 주식들이 주식시장 평균보다 더 하락한 데에는 어이없는 종목 구성을 보고 투자자들이 크게 실망한 탓도 크다. 밸류업 프로그램이 눈속임이고 반쯤은 사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정부 스스로 자인한 셈이니까.

이 프로젝트의 실패를 단순히 정부와 관료들의 무능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거머리처럼 사기업의 이윤을 빨아먹는 일에 일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자신의 (잘못된) 정책을 위해 상장된 금융사들에게 부실 자산을 떠넘기거나 손실을 강제하고 있으며 그 비용들은 모두 주주들이 진다. 해마다 인사철이 되면 단 한번도 기업을 경영해 본 경험이 없는 수백 명의 낙하산들이 북한의 오물 풍선처럼 각 기업들과 협회들에 우수수 내려온다. 이 백치스러운 퇴직 관료들은 무수한 직간접적인 비용을 초래하며 그 부담은 모두 민간영역으로, 돌고 돌아 해당 섹터의 주주들 앞으로 청구된다. 그런 전관들의 거의 유일한 효용은 오로지 정부나 규제당국을 상대로 펼치는 로비에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시장질서를 어지럽히는 부수적 효과를 낸다. 물론 그 비용은 모든 자본시장 참여자들의 몫이다. 한국의 자본시장이 빈사상태로 내몰릴 정도로 피를 빠는 거머리들의 명단에는 정부와 각료들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다.

표면적으로 어떤 이유를 내세우든 정부가 새 주식 인덱스를 내놓은 것은 관이 무엇이 좋은 주식인지 찍어주겠다는 의도를 다분히 내포한 것이다. 하지만 어떤 회사가 우량한지 판단하는 것은 시장의 영역이지, 세종시에서 멍 때리는 관료들의 일이 아니다. 평생 이윤을 추구해 본 적이 없는 집단이 전 세계 자본들이 모두 모여 경쟁하는 시장을 가르치려고 나대는 것은, 마치 수능 6등급의 고졸 낙제생이 아이비리그 입시를 가르치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그들은 오늘도 왜 성적이 오르지 않냐며 머리를 벅벅 긁으며 미중 갈등이 문제다, 중동전쟁이 문제다, 모 회사의 보고서가 문제다, 라며 한심한 핑계를 늘어놓지만 정작 중국보다도, 이스라엘보다도, 기술주 비중이 더 높은 대만의 주식시장보다도 더 못난 것이 바로 코스피 아닌가. 이게 다 무자격 고졸 낙제생이 오만한 태도로 금융시장을 주물럭거리다 망쳐놓은 탓이다. 

경제관료들은 괴상한 망상에 빠져 있다. 야,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다, 우리가 좋은 주식들을 찍어주면 주식시장이 오르지 않을까? 아야, 너 정말 에이스구나. 오늘도 이 수능 6등급들은 삼삼오오 모여앉아 서로 이게 정답이네 너 똑똑하네 주접을 떨지만 그들 앞에 놓인 성적표는 너무나 처참하다. 세계 꼴등. 이는 전혀 놀라울 일이 아니다. 생뚱맞은 인덱스 하나 내놓는다고 주가가 오르는 일 따윈 애초에 기대할 수 없었으니까. 정부의 역할은 그저 자본시장의 룰을 공정하게 세우고, 자본시장의 피를 빠는 거머리들과 도둑들만 속아내면 주가는 자연스럽게 펀더멘털을 따라가게 되어있다. 싫다면 허튼짓을 벌일 시간에 그냥 배민이나 뛰고 편의점 가서 알바나 해라. 차라리 그것이 국가 경제와 금융시장에 더 기여하는 길일 테니까.


2024. 9. 21.

IMF의 기억-기재부는 어떻게 나라를 파산시켰는가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하자 국제사회는 이 침략국의 자산을 동결하고 대대적인 경제 제제를 가했다. 그리고 금융시장의 수많은 전문가들과 저명인사들이 러시아의 경제가 머지않아 파탄에 이르러 부도를 낼 것이라고 예상했다. 너무나 자명한 일 아닌가. 하지만 놀랍게도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했을 때도, 심지어 유가가 마이너스로 폭락하던 코로나의 한가운데서도 이 동토의 나라는 파산하지도, 국가부도의 날을 겪지도 않았다. 모스크바는 외환위기를 겪지 않았다. 호들갑을 떨던 이들이 정수리를 벅벅 긁으며 머쓱해해할 무렵, 국제금융을 연구하는 경제학자들은 차분한 어조로 이렇게 설명했다. "자유로운 변동환율제 아래서 외환위기를 겪는 나라는 드물다"

반대로 고정환율제를 유지하거나 외환시장에 무리하게 개입하던 나라들은 어김없이 위기를 겪었다. 러시아보다 더 자원이 많았던 남미의 나라들이나, 더 부유했던 선진국들도 예외는 없었다. 영국, 멕시코, 아르헨티나, 폴란드, 브라질 등 선진국과 후진국을 가리지 않고 모두 외환위기를 겪었다. 그리고 그 리스트의 끝자락에는 우리나라의 이름도 있다. 왜 전쟁을 겪지도, 경제 제제를 맞지도 않았던 한국은 외환위기를 겪어야 했던가. 이 문제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이십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같은 구조적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자 IMF의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끄집어내보자, 당시 경제관료들은 어떻게 나라를 파산시켰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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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기 앞서 먼저 과거와는 달리 오늘날의 한국의 펀더멘털은 비교적 건강하기 때문에 같은 방식의 외환위기가 올 가능성은 낮으니 97년과의 비교가 잘못된 인상을 전달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글은 관료제와 시스템에 대한 비판이지, 구성원 개개인에 대한 비난이 아니다. IMF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대부분의 공직자들은 매우 성실하게 업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조직 자체의 문제로 이들의 노력의 합은 빈번하게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때로는 파멸적 결과를 가져오곤 했다. 그런 폭주를 견제하지 못한 것은 구조적인 문제이지 대다수 공무원들이 사악하고 부패해서가 아니다. 조직이 무능한 것이다, 개개인이 아니라. 어떤 관점에서는 그들 역시 이 비합리적인 조직의 희생자들이기도 하다.  

1997년 외화보유고가 바닥을 드러내고 국가적 위기를 야기한 그 배경을 두고 우리는 한국이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기 때문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이는 근본적 원인이 아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대외적 환경, 미국의 급격한 금리 인상이나 일본의 버블 붕괴 때문에 한국이 유탄을 맞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악화된 대외적 여건도 물론 중요한 요인이지만 원래 거시환경은 좋다가 나쁘기도, 나쁘다가도 좋기도 하는 것 아닌가. 97년 이전에도, 또 이후에도 대외여건이 훨씬 나빠진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우리나라가 부도 위험에 처한 것은 오로지 그때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달랐던 것인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 핵심은 비탄력적인 환율에 있었다. 당시 한국의 경상수지 적자가 누적되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의 경제관료들은 정무적인 이유로 낮은 환율을 고집했다. 당시의 기사들과 여러 시장 참가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외환시장의 일과는 기재부(당시 공식 명칭은 재정경제원)의 눈치를 살피는 일로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무역수지가 적자를 찍든 해외송금액이 줄든 늘든, 관에서 내려라 하면 내리는 것이고 오르라 하면 오르는 것이 환율이었던지라 대부분의 금융기관들은 관의 눈치를 살피며 거래를 했지 경제지표들을 분석하지 않았다. 애초에 펀더멘털을 무시했던 것은 환율을 결정하는 관료들이었다. 경제 부처에서 청와대를 거쳐 정치권에 입문하는 것은 당시에도 매우 인기 있던 출세 루트였던 터라, 많은 관료들은 대통령실의 눈치를 보며 정책들을 짰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주요 경제적 성과로 OECD 가입과 국민소득 1만 불 달성을 내세웠기 때문에 낮은 환율을 선호했고, 청운의 꿈을 꾸며 청와대를 바라보던 경제 부처의 여러 고위직들은 이에 동조하여 아주 무리하게 낮은 환율을 유지했다. 이런 선택은 이후 아래 몇 가지 사안과 맞물려 큰 재양을 초래했다.

문민정부의 등장과 함께 기재부는 세계화라는 표어 아래 여러 개혁적 조치들을 내놓았는데, 그중 가장 이해하기 어렵고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 것은 규모가 작고 전문 인력들이 미비했던 소규모 단자회사(단기자금회사)들을 대거 종금사(종합금융회사)로 전환시키고 그들에게 외환 조달과 여수신까지 허용한 일이다. 오늘날로 치면 러시앤캐시나 듣보잡 저축은행 같은 회사에 면허를 모두 몰아줬다고나 할까. 이 단자회사들은 본디 지방에서 주로 사채업을 하던 회사들이었는데, 하루아침에 난데없이 외화를 조달해 국내에 풀 수 있는 특혜가 주어졌으니 그 기회를 이용하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국내에서도 생소했던 종금사들이 해외 금융시장에서 어떻게 외환을 조달하겠는가? 여기에 전직 기재부 관료들이 등장한다. 당시에는 경제관료들이 퇴임 후 각종 금융사의 임원으로 가는 것이 지금보다도 더 흔하던 시기였는데, 이들을 가장 적극적으로 영입했던 기관들 중 하나가 바로 종금사였다. 90년대 중반에 강남 아파트 한 채에 해당하는 연봉을 받고 재취업한 전직 관료들은 시중은행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관이 누우라면 눕고 서라면 서던 시중은행들은 부실한 그들의 회사에 외화를 공급했다. 즉 시중은행들이 높은 대외 신인도를 바탕으로 해외에서 달러를 조달하고 나면 위험관리도 안 되고 자본도 부실한 종금사들이 전관들을 비롯한 여러 루트를 동원해 가져간 것이다. 그들은 이를 영향력이라고 하지 않고 영업력이라고 불렀다.

정부가 새 업종에 특혜를 주고, 우후죽순 생긴 신생 종금사들이 경제관료들을 뽑아가며, 그렇게 빳빳한 새 명함을 든 고개 뻣뻣한 전관들이 시중은행과 국책은행에서 달러를 뽑아다가 돈을 버는 조선식 창조경제 일자리는 처음에는 그럭저럭 돌아갔다. 특히 반도체 특수와 맞물렸던 당시에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1996년 D램 가격이 폭락하자 낮은 환율을 고집했던 한국은 이제껏 본 적이 없는 규모의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하게 된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환율이 치솟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관료들은 외환시장에 대한 통제를 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리석으면서도 오만했던 그들은 세 번째 실수를 저질렀다. 사실 우리가 외화부족 사태를 겪은 것은 97년이 처음이 아니었는데, 과거 최소 4번 이상의 위기를 겪었지만 그때마다 일본에서 차관을 도입하거나 미국 재무부의 협조를 받아 문제없이 고비를 넘겨왔기에 기재부는 이번에도 문제없이 넘어갈 수 있다고 자신했다. 한반도가 이념대결의 장이 된 이후 미국은 위기 때마다 구원투수로 등장하여 남한의 경제를 구제해 주었기에, 그 타성에 젖은 한국의 관료들은 이번에도 우방국이 이 위기를 그냥 넘기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당시 클린턴 대통령은 미국의 경제를 부흥시키겠다는 슬로건을 내세워 현역이었던 부시를 물리치고 백악관에 들어서지 않았던가. 오랜 저성장을 끝내기 위해 이 젊은 대통령은 동맹국들이 불공정 무역을 일삼는 것을 더는 좌시하지 않았다. 미국 상무부와 재무부는 불평등한 무역조치들과 비관세 장벽을 폐지할 것을 요구했고 미국 기업들이나 상품을 차별하는 조치를 내놓는 동맹국들에게 기존의 특혜를 제공하지 않거나, 더 나아가 상응하는 조치를 가하겠다고 통보했다. 냉전 이후 바야흐로 정치가 아닌 경제논리가 워싱턴을 지배하던 시대였다. 게다가 당시 한국 정부는 미국의 북한 핵 시설 폭격을 저지하고 제네바 핵 협상에서 배제되는 등 관계가 매우 나빴기 때문에 미국의 호혜적 지원을 기대하기 아주 어려웠다. 그것도 비정상적으로 낮은 환율과 부실한 제도로 실시간으로 외화를 탕진하는 한국의 사정을 고려하면 더더욱. 하지만 여전히 경제관료들은 미국이나 일본이 한국에 돈을 퍼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공무원들의 사고 구조는 늘 그렇게 삼엽충 화석처럼 굳어있는 법이니까. 따라서 정부는 구제금융이 필요하지 않냐는 시장과 외신의 질문에 코웃음을 치며 큰소리를 쳤다. 그들의 이 근거 없는 자신감은 이후 (마찬가지로 근거 없는) 배신감으로 돌변해 IMF 막후에 미국의 음모가 있었다는 피해 망상의 근원이 되었다. 

하지만 사태가 급격히 악화되자 한국에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하지만 IMF와의 협상 과정에서도 이 관료들은 납득하기 어려운 꼬장을 부렸다. 부실의 핵심이 된 종금사들을 모두 일괄 정리하라는 협상단의 요구를 거절하곤 한국 정부와 공동 실사 후 선별적으로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끝까지 부실의 핵심이었던 종금사를 감싸고돌았다. IMF가 요구했던 관치금융의 철폐, 자본시장 개방, 노동/금융시장 개혁 등은 글로벌 스탠더드로 선진화의 필수조건일 뿐 아니라 자본을 끌어오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였는데도 불구하고 이 관료들은 끝까지 한국식 관치 시스템을 유지하겠다며 똥고집을 부렸다. 누가 같은 핏줄 아니랄까 봐 북쪽 동무들처럼 벼랑 끝 전술을 펼치는 한국 관료들을 보며 IMF와 막대한 자금을 출자했던 미국의 실무자들은 한숨을 내쉬었고, 이를 보고받은 미 재무부 장관은 격분하며 이런 태도를 보이는 나라를 구제할 방법은 없다며 조기 지원을 반대했다. 하지만 펜타곤과 주한미군 사령관까지 나서서 구원을 요청하고 한국 역시 상황이 더욱 심각해져 가용 외화보유고가 20억 불 아래로 떨어져 불과 일주일도 버티기 어려워지자 양 측은 개혁안에 합의했고 IMF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결국 나라를 외환위기라는 폭풍 속으로 밀어 넣은 것은 무능한 경제관료들이었다. 물론 방만한 경영과 무분별한 차입에 의존한 대기업과 금융사들의 잘못도 있지만 원가가 만원인 국밥을 나라가 오천 원에 팔라며 돈을 대주다 끊어서 식당들이 부도났다면, 국밥 장사를 하던 사장님들이 문제일까? 아니면 비정상적인 이유로 돈을 대주다가 끊은 나라가 문제일까? 게다가 기업들과 금융기관은 그 값을 치렀다. 우리나라 30대 대기업 중 거의 대부분이 부도를 냈거나 자회사를 매각했고 당시만 해도 5대 은행으로 불리던 조흥은행, 상업은행, 제일은행, 한일은행, 서울은행이 모두 인수되거나 합병되어 사라졌으니까. 그렇게 비싼 대가를 치룬 탓에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의 대기업들의 부채비율은 상당히 낮은 편이며 대형은행들 역시 매우 탄탄한 재무제표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나라를 파산으로 몰아간 경제관료들과 정부 조직은 어떻게 되었을까? 결과적으로 아무런 처벌이나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한국은행이 외환위기의 가능성이 있다며 23차례나 기재부와 청와대에 보고를 올렸지만 모두 묵살됐으며 KDI 역시 97년 3월에 외환위기의 가능성을 시사하며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보고서를 발간했지만 기재부는 이 보고서의 발간을 막고 이미 발행된 부수를 회수하기까지 했다. 이를 진두지휘한 강경식 경제부총리와 기재부 출신의 김인호 경제수석은 직무유기와 직권남용으로 기소되었지만 결과적으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또 외환위기를 악화시킨 종금사들이 1995~1996년에 무더기로 허가가 난 배경 역시 핵심 의혹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밝혀진 것 없이 국정조사가 마무리됐다. 또 종금사 허가 때문에 책임지고 처벌받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고작 6급에 불과했던 자금시장과 주무관에게도 다수의 종금사들이 무려 천만 원이 넘는 금품을 제공했다는 사실(링크)로 미루어 볼 때, 많은 사람들이 그 배경에 뭔가 석연찮은 동기가 있었을 것이라고 의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건국 이래 최대의 환난이라고 했던 IMF는 이렇게 발생했다. 기재부가 변화한 거시환경에 눈을 감고 저환율을 밀어붙이고, 무자격 부실회사들이 무분별하게 단기외채를 쌓는 것을 적극적으로 조장하였으며, 그렇게 문제가 터지자 다른 기관의 입을 틀어막고서, 달라진 국제관계를 무시한 채 관행적 대외원조에만 매달리다 사태가 최악으로 치달은 것이 바로 IMF의 본질이다. 그 가운데 경제관료들은 정치권에 줄을 대거나 민간 금융사에 낙하산으로 내려가 전관 대접을 받으며 출세를 노렸고, 이미 그렇게 출세한 그들의 선배들은 그 연줄을 한껏 이용해 국가정책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대로 비틀었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국가 부도의 길이었다. 그러다 나라가 망할뻔하자 그들은 전국민 가스라이팅에 나섰다. 순진한 국민들은 무분별한 해외여행에 나섰던 과거를 반성하고 금모으기 운동에 나서며 국산품을 애용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확보한 외화는 당시 정부가 외환시장에서 바보같이 탕진하던 금액의 불과 며칠 치 밖에 되지 않았다. 환란의 주범으로 몰린 경제관료들은 자신들은 불을 끄는데 실패한 소방수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지만, 무리한 환율조작에 나서다 나라를 홀랑 태워먹은 그들이 방화범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에게 책임이 있다는 말인가.

그렇게 가스라이팅에 몰두하다 진심으로 자신이 선의의 피해자라고 믿게 된 과천의 사고뭉치들은 결국 새로운 세계관을 구축했다. 바로 탐욕스러운 양키 금융가들이 의도적으로 아시아 외환위기를 촉발하여 결과적으로 한국의 자산을 싸게 샀다는 것. 게다가 IMF의 배후에는 미국이 있었기에, 일본이 우리를 도와주려 했지만 양키들이 일본의 원조를 막고 한국의 외채 상환을 독촉했으며, 또 한국에 호의적이었던 IMF가 강경하게 돌아서도록 막후에서 조종했다는 민족주의적 음모론이 등장했다. '그래 내가 국가를 부도낸 것이 아니라 미국이 나로 하여금 부도를 내도록 조종했다, 이거야.' 하지만 그런 견해에 동의하는 학자들은 거의 없다. 이는 현실도피를 위한 애처로운 망상에 불과하다. 계속해서 인위적 환시 개입의 위험성을 강조하고, 과도한 관치금융과 비정상적 리스크를 진 국내 금융기관의 위험성, 그리고 폐쇄적인 자본시장으로 인한 국제수지 불균형에 대해 끊임없이 경고한 것은 바로 미국이었다. 그 모든 조언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하다 부도를 낸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정부 자신이었다. 실제로 외환위기가 터지기 불과 1년 전 금융연구원이 주최한 한 세미나에서 MIT의 뤼디거 돈부쉬 교수가 당국자들에게 환율시장을 통제하는 정책의 잠재적 위험성을 경고한 적이 있었는데 한국 관료들은 거기에 "한국의 금융시장은 성숙하지 못해 이렇게 통제해야 합니다."라고 답했다. 하지만 그 이듬해 돈부쉬 교수가 지적한 바로 그 이유로 한국은 국가부도에 내몰렸으니, 미개한 것이 한국의 금융시장이었을까 아니면 한국의 관료들이었을까. 

그들의 뒤틀린 세계관은 미 로버트 루빈 미 재무부 장관과의 일화를 기억하는 방식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과거 루빈 장관이 골드만 삭스의 회장으로 있던 시절 그가 과천 기재부 청사에 방문할 일이 있었는데, 원래 장관이나 차관과의 면담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둘 다 각기 개인 사정을 이유로 자리를 비웠고 따라서 루빈은 과천 청사의 비상계단을 걸어 오르락내리락 하며 뺑뺑이를 돌다 고작 과장 하나를 만나고는 돌아갔다고 한다, 그렇게 수모를 당한 루빈 장관이 이후 한국과의 IMF 협상에서 그가 거칠게 나온 배경이다,라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었다. 그 일화를 거듭 언급하는 관료들의 의식 저변에는 우리가 귀한 분인 줄 몰라뵙고 의전에 실패했기 때문에 한국을 도와주지 않은 것이라는 너무나 김치스러운 사고방식이 깔려 있다. 하지만 관료들이 금융사들 법카를 빌려다가 그를 풀코스로 모셨어도 결과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참고로 당시 한국의 외화보유고는 2011년에 관료들과 국내언론이 그렇게 비웃고 멸시하던 그리스보다도 훨씬 더 작았고 기업들의 부실은 더 심각했으니까. 부패하고 도태된 조직문화의 수호자들답게 그들은 IMF의 원인을 접대와 의전에서 찾았다, 발전된 선진국의 시스템에서는 민간 영역의 인사가 공공 부문의 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우는 대신에.   

하지만 실제 구제금융의 배경은 관료들의 망상과는 매우 달랐다. 당시 아시아에서만 해도 한국뿐 아니라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가 구제금융을 신청했으며 게다가 우리에게 지원된 패키지는 역사상 최대 규모로 IMF가 과거 영국에 지원한 액수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그러니 여차하면 추가 출자가 필요할 수도 있던 상황에서 최대 출자국인 미국의 협의 없이 IMF가 막대한 자금을 쓸 수는 없었기에 쩐주인 미국 재무부 차관이 함께 파견된 것이다. 게다가 당시 그들이 요구했던 포괄적인 구조조정과 경제개혁은 매우 교과서적인 내용들로 낙후된 한국 경제의 생산성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했던 사안들이었다. 자본잠식에 빠져도 연줄만 잘 대면 화수분처럼 대출이 나오던 금융과 과도한 중복투자, 연공서열로 돌아가던 종신고용제, 그리고 불투명하게 관치가 판치던 금융시장이 오늘날까지 지속되었다면 현재 대한민국의 경제적 위상은 어땠을까? 관료들은 당시 미 재무장관이 월가 출신이어서 약탈적인 투자회사들의 입장을 관철시켰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IMF 지원 결정 이후에도 추가 대출을 꺼리던 JP모건과 시티은행에 압박을 넣어 한국이 낮은 금리로 달러를 조달하게 도운 것은 바로 그 루빈이었다. 물론 IMF의 처방에도 흠결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잘못된 정책과 개입으로 경제를 파탄내 놓고서도, "나는 금융사 법카로 룸싸롱에서 마이웨이나 부르며 하던 대로 할 테니, 너희는 얌전히 돈만 두고 가라" 라는 요구를 들어줄 상대는 없다. 나라가 파산한 것은 관의 도덕적 해이가 파산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관료들은 한국이라는 방구석에서만 통하던 자신들의 여포짓이 해외에 먹히지 않으니 해묵은 자본주의 음모론으로 메타버스를 구축하고 그것이 외환위기의 배경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작년 크레디트 스위스라는 대형 금융사가 붕괴했지만 스위스는 망하지 않았다. 2008년 리만과 메릴린치가 파산하며 금융시장이 붕괴했지만 미국은 망하지 않았다. 무리하게 빚을 내고 투자를 했다가 회사가 망하는 것은 그 회사의 문제지만 그렇다고 나라가 같이 파산하는 것은 국가의 문제다. 제도의 문제다. 외환위기의 배경을 뜯어보면 무분별하게 부실을 키운 기업들의 파산 이전에 외화보유고를 탕진하고, 부실을 키우라고 적극적으로 독촉했으며, 문제 제기를 막은 기재부와 관료들이 있었다. 그 결과 한국은 전쟁을 겪거나 금융제제를 얻어맞은 나라조차도 겪지 않았던 외환위기를 겪어야 했다. 하지만 정부와 관료들은 참사를 초래한 자신들의 역할을 의도적으로 축소하였고 우리가 기억 속에서도 그들이 저지른 참사는 재정경제원이라는 이름과 함께 시나브로 지워졌다. 그래서 여전히 그들을 견제장치는 마련되지 않았다. IMF 구제금융 그 이후 25년, 기업들은 혁신을 이뤘고 은행들의 대차대조표는 훨씬 더 건전하다. 97년 이후 한국경제는 구조적인 문제점들을 상당 부분 개선했다. 하지만 환란의 주범인 기재부는 거의 바뀌지 않았으며 여전히 똑같은 구조적 문제들을 안고 있다. 마치 구제금융을 신청하던 그날이 어제인 것처럼. 우리는 과연 IMF를 극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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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사건을 다시금 끄집어내어 사실관계를 정리한 이유는 이것이 아직도 끝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IMF 구제금융을 받아 개혁안을 수용한 일은 당시 많은 기재부 고위공직자들의 자부심에 큰 상처를 남겼는데, 이후 관가에는 독특한 철학을 가진 부류가 탄생했다. 그들의 신념은 환율주권이란 단어로 요약된다. 풀어서 이야기하면 한 나라가 자신의 환율을 결정하는 것은 주권의 영역이라는 것. 그러나 환율이라는 것은 달러화와 원화의 거래비율을 의미하고, 이를 결정하는 것이 한국 정부라면 반대로 미국 정부에게는 주권이 없어야 한다는 우스꽝스러운 결론에 도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믿음이 과천에, 뒤이어 세종에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이 믿음은 외환위기가 어리석은 관료들의 처참한 정책 실패가 아니라 외국의 투기세력으로 인해 촉발된 일이라는 생각을 내포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관을 개혁하고 견제할 것이 아니라 되려 우리 관료들의 권한을 강화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정부의 시스템은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그렇게 늘린 권한으로 이 신흥 사이비 종교의 신도들은 여전히 크고 작은 사고를 치고 다닌다. 리만사태 전후로도,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금융시장 밖의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구체적으로 사례를 열거하면 끝도 없다. 특히 거시환경이 급변할 때마다 그들은 엄청난 실패를 저질렀다. 2000년대 대표적 환율주권론자였던 강만수와 최중경 듀오는 수출을 위해 높은 환율을 유지하는 것이 한국의 주권이니까 한국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해서라도 환율을 방어하겠다며 무제한으로 달러를 사다 수조 원의 손실을 내고 항복하더니, 얼마 후 리만사태로 금융시장이 불안정해지자 갑자기 돌변해서 이번엔 낮은 환율을 유지하는 것이 한국의 주권이라며 막대한 달러를 시장에 내다 팔다 또 위기를 맞는다. 붕괴의 진원지에 있던 연준조차도 경제적 여파를 가늠하지 못해 사력을 다하고 있던 순간 법대 학부 출신의 장관까지 나서서 이제 곧 환율이 안정될 것이라며 큰소리를 치며 정부는 미네르바라는 전문대 나온 무직 블로거와 영혼의 맞다이를 벌였지만 환율이 하루 세 자리수 씩 오르자 처참하게 패배했고, 그러자 그들은 다분히 보복적인 의도로 그를 기소했다. 죄명은 명예훼손과 허위사실유포. 하지만 실제로 허위사실을 적극적으로 뿌리던 것은 바로 경제부총리를 비롯한 경제관료들 아니었던가.

바닥에 떨어져 짓밟힌 체면을 살리기 위해 그들은 또다시 언론 플레이와 대국민 가스라이팅에 나섰다. 당시 연준은 금융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미국 내의 자산 가격뿐 아니라 미국의 기관들이 보유한 해외자산의 가격도 안정시켜야 한다고 판단했기에 여러 신흥국들의 외화스왑라인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당시 연준 의장이었던 버냉키의 회고록에 이 과정이 서술되어 있는데, 당시 미 금융기관들의 익스포저가 얼마나 되는지에 따라 선별하여 브라질 싱가포르 멕시코 4개국과의 통화스왑을 일괄적으로 발표했다고 한다. 연준이 비슷한 경제규모를 가진 네 신흥국들과의 스왑라인을 같은 금액으로 결정해서 같은 날에 발표한 것을 고려하면 이 프로그램에 한국 정부의 역할이나 기여도는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뉴스를 접한 기재부는 이게 웬 떡이냐며 마이크와 기자들 앞으로 달려가 아, 이게 쉽지 않은 일인데 우리가 노력한 한국 경제외교의 쾌거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리고 이 허풍은 두고두고 그들의 발목을 잡는다.

앞서 거시환경이 급변할 때마다 기재부가 크게 삽질을 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최근에도 거시환경이 크게 변했다. 그러자 경제관료들은 파블로프의 조건반사처럼 삽질을 시작했다. 연준이 급격한 금리 인상에 나서며 달러화가 강세를 보이자 그들은 선제적으로 외환시장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당시 환율은 1200원보다도 낮았던 데다, 전 세계적으로 달러가 크게 강세였으며 결정적으로 한국의 무역수지가 건국 이래 최대 적자폭을 기록했던 시점이기에 그렇게 낮은 환율에서 펼치는 정부의 매도 개입은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하지만 어디 그깟 경제지표가 나라님의 발목을 잡을 소냐. 한국은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외환보유고를 퍼부었는데, 그들이 이후 1년간 환시 개입에 쓴 규모가 코로나 당시에 시장안정에 투입된 보유고의 무려 5배에 달했다.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는지 옆 나라 일본의 사례와 비교해 보자. 일본중앙은행의 경우 연준의 첫 금리 인상 이후 외환시장 개입에 나선 것은 불과 네다섯 차례뿐인데 그 모두 환율이 현재보다 현격하게 높은 수준에서 이루어졌으니 일본의 환시 개입은 시가평가 기준으로도 모두 큰 이익을 본 셈이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 같은 기간 거의 매달 매도 개입에 나설 정도로 아주 빈번하게 시세조작에 나섰는데 그마저도 대부분을 올해 상반기 말 기준보다도 낮은 환율에 팔아버렸으니 상당히 큰 평가손을 본 것으로 추정된다. 시장개입은 시장이 비이성적으로 움직이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로 제한되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의 금융관료들은 아주 빈번하게 시장개입에 나서 비이성적인 결과를 초래하니 당연한 결과이다.   

그리고 과거의 허풍이 만기 된 어음처럼 돌아왔다. 그들도 기억력은 있는지라 이렇게 계속 달러를 퍼붓다 외화보유고를 거덜 냈던 과거의 사례들을 떠올렸다. 따라서 그들은 보유고를 쓰지 않고도 개입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때 과거 통화스왑이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연준이 스왑라인을 열어준 것은 국제금융시장이 극심한 패닉에 빠져있을때 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한 위한 것이지, 너희 마음대로 펀더멘털로부터 벗어나서 환율조작을 하라고 지원해 주는 프로그램이 절대 아니다. 마치 실업급여는 부득이하게 해고된 실직자들을 위한 것이지, 몇 달 일하다 자발적으로 잘려서 여행비로 흥청망청 쓰라고 있는 프로그램이 아닌 것처럼. 게다가 지금은 미국이 유동성을 흡수하려고 애쓰고 있을 때라 리만이나 코로나 시기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기에 연준이 통화스왑을, 그것도 무모하게 환시 조작에 나선 한국에게 열어줄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였다. 하지만 한번 시작된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는 법. 과거 통화스왑을 마치 FTA와 같은 경제외교의 성과처럼 포장했으니 이제 와서 통화스왑이 안된다면 경제외교를 못했다는 말 아닌가. 그래서 경제관료들은 마치 실업급여 부정수급자들처럼 계속해서 연준과 미국 재무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려야 했다. 이를 바라보는 미국 재무부와 연준의 눈에 한국 관료들이 얼마나 한심해 보였을까. 실제 배경이나 제도의 취지도 모르고 예나 지금이나 관료들이 불러주는 대로 기사를 쓰던 국내 언론들도 마치 통화스왑이 마치 매달리면 될 것도 같다는 식으로 보도했는데 이는 무척이나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국제정세에 무지한 채 타성에 젖어 미국과 일본의 직접 지원에 매달리던 97년의 재경원과 22년의 기재부는 매우 닮아 있었다. 

데자뷰가 느껴지는 것이 어디 그뿐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부실한 PF를 살려보겠다고 관치금융의 주먹을 휘두르다, 집값이 오르니 이젠 마치 조현병 환자처럼 반대쪽 주먹을 휘두르는 금융위, 금감원, 기재부, 그리고 대통령실의 전직 기재부 출신의 관료들. 기자회견 이후 돌아서는 그들의 뒷모습에서 종금사를 감싸고돌던 과거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 나 하나뿐은 아닐 것이다. 무역수지가 빠르게 적자로 돌 때, 불가능한 정책목표에 매달리며 국가자원을 소진하고, 소수의 이익단체들을 비호하기 위해 비합리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 다른 시대, 다른 상황에 같은 실수가 반복되는 것은 명확하게 구조적 문제가 있음을 의미한다. 내가 이 블로그에서 여러 차례 정부의 시장개입을 비난하는 것은 그들이 꾸준하게 실패하는 역사를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역사 속에서 가장 큰 실패는 당신과 나의 유년 시절의 비극을 낳았다. 안타깝게도 정부의 한심한 개입은 외환시장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정부의 거듭된 실패는 기재부의 칸막이를 넘어, 교육부, 국토교통부, 보건복지부 등 사실상 정부의 전 영역에서 발생하고 있다. 기재부가 야심 차게 추진하던 밸류 업은 코스피 다운으로 나타나는 중이고 국토부는 주택 공급에 10년 넘게 실패하고 있으며, 필수 의료를 살리겠다던 보건복지부는 성형외과 개원의들이 아닌 필수과 전공의들이 파업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무능한 관료들이 사방에서 나라를 파산시키고 있다.

옛말에 잘못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고 했던가. 현대사회에서 잘못된 정책은 전쟁보다도 무섭다. 그것이 IMF에서 우리가 얻은 진짜 교훈이다. 이젠 정부와 관료들이 주도하는 경제모델은 성공할 수 없다. 오늘날의 시스템은 더 이상 고작 학부 나와 십수 년 전에 행시 붙은 게 인생 업적의 전부인 비전문가들이 순환보직을 돌다 몇 날 야근한다고 해서 운영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나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는 더더욱. 하지만 이 뒤처진 관료조직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권력을 확장해가며 민간을 지배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무슨 무슨 개혁안이라는 이름으로. 하지만 관 주도의 성장 모델은 이미 지난 세기에 한보와 조흥은행과 함께 파산했다. 정부와 관료조직은 결코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없다. 되려 그들은 가장 시급한 개혁의 대상이다. 그러니 제발 좀 가만히 있으라. 또 삽질하다 외환위기 같은 것이나 터뜨리지 말고. 명심하라. 당신들이 정말로 개혁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도태된 자기 자신뿐이다. 




위의 내용은 이제까지 언론에 공개된 내용과 개인적인 의견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2024. 8. 10.

니케이 폭락과 매미

8월의 첫 주는 트레이더들에게 참으로 고통스러운 한 주였다. 월요일 장 개장 이후 니케이 지수가 버블이 터졌던 1987년 이후 최악의 폭락을 연출하더니, 바로 다음날 사상 최대 폭으로 상승하며 모두를 충격에 빠트렸다. 이럴 줄 모르고 그날 하필 친척 동생과 식사를 잡았던 터라 몇 번이나 시간을 늦춘 끝에 간신히 약속 장소에 내 멍멍한 얼굴을 드리밀 수 있었다. "주식이 왜 이렇게 폭락했어요?" 금융권 진로를 희망한다던 그 똘망똘망 한 눈이 던진 그 단순한 질문에 나는 멍한 눈으로, 아 이게 엔케리라는 게 있는데 그게 청산이 되어서, 혹은 기술주 실적이 기대만큼 좋지 못해서, 라며 전문용어를 섞어가며 웅얼웅얼 읊었지만 내심 그 어느 것도 폭락의 진짜 이유라고 믿지 않았다. 우라까이를 남발하는 싸구려 경제기사와 방송에 얼굴 내밀며 젠체하기 바쁘신 저 전문가 호소인들이 지목하는 폭락의 원인들이야 많지만, 동시에 그것들을 반박할 충분한 근거들도 존재하니까. 

아마도 진짜 원인은 시장 전체가 과도한 자기 확신과 집단사고에 빠져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기술주의 실적이 과거의 페이스만큼 개선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며, 또 소비의 둔화 없이 이렇게 빠른 금리인하가 펼쳐질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하지만 시장은 그 드문 확률이 실현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렇게 단일대오를 유지하며 밀어붙이던 무리들에서 갑자기 한둘씩 이탈하기 시작하자 시장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마치 칸나이 평원에서 한니발에게 포위당해 학살당하던 로마군처럼. 장이 열리고 닫히기까지 그 몇 시간 동안 트레이더들은 자신들이 철석같이 믿었던 여러 상관계수들이 무참하게 갈려나가는 것과 롱과 숏으로 이루어진 여러 자산군들이 통계적으로 극히 희귀한 수준까지 튀어 오르는 것을 멍하니 지켜 보다 다급하게 손절에 나섰다. 그렇게 자비를 구걸하던 투자자들의 손절이 끝나고 나자, 시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 반등하고야 말았으니 손실을 낸 이는 물론이고 수익을 낸 트레이더에게도 참으로 고통스러운 한 주였다.


*               *               *


이렇게 지수의 등락에 따라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벌겋게 달아오르기를 반복하다 지쳐 가까운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오던 길이었다. 1층 엘레베이터 현관 앞 자동문이 닫히자 갑자기 파드닥 하고 바닥에서 무언가가 튀어 오르다 천장에 부딪쳐 떨어졌다. 이미 니케이에 한차례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게 뭐야 그냥 매미였다. 여름이 저물어가듯, 그리고 하나의 사이클이 저물어가듯 숨이 멎어가는 매미 한 마리가 날개를 파닥거리며 생의 끝자락에서 발버둥치고 있는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참으로 안쓰러워 "땅속에서 평생을 보낸 네가 그래도 마지막은 하늘을 보며 맞아야지"라는 생각으로 후후 불어 자동문밖으로 내보냈다. 그런데 웬걸. 밖에 나가자마자 이 죽어가던 매미새끼가 발악하듯 날개를 파닥거리며 다시 현관으로 들어와 온 힘으로 조명을 들이박고 또 바닥으로 나자빠지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 미련한 시키가. 나는 다시 손을 휘휘 저어 자동문을 열면서 숨을 후후 불어 매미를 밖으로 내보냈지만 이 파고다 공원 할배마냥 고집 센 매미는 또 문이 닫히기 전에 실내로 들어와 천장 조명으로 돌진하기를 두어 번 반복했다. 하. 그래 내가 포기한다. 네가 이겼다. 네 맘대로 죽어라,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본능이란 본디 그런 것이다. 심리학자 존 달리와 빕 라타네는 한 가지 실험을 계획했다. 미리 섭외한 몇 명의 연기자와 피실험자 하나를 같은 방에 앉히고 그들에게 설문지를 작성하도록 한 뒤에 방에 연기를 흘려보냈다. 물론 섭외된 연기자들은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설문지를 작성하기로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피실험자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두리번대다 다른 이들이 침착하게 앉아있는 것을 보며 불안해하면서도 자신도 똑같이 앉아 착실히 설문지를 채워나갔다. 계속해서 스며드는 연기에 고통스러워하며 콜록거리면서도. 반면 대조군에서 혼자 방안에 있던 피실험자들은 연기가 발생하자마자 밖으로 달려나갔다고 한다. 죽어가면서도 죽을힘을 다해 빛을 들이박는 것이 매미의 본능이듯, 사방에서 위험 신호가 번쩍이는데도 가장 붐비는 포지션을 택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본능이다. 우리 인간은 홀로 살아남기보다 함께 죽기를 소망한다. 하지만 트레이더들은 어떻게든 살아서 수익을 내야 하는 존재아닌가. 그러니 나와 당신은 계속해서 본능을 거슬러 싸워야 한다. 그 일은 참으로 고통스럽다. 그러니 이 주가 어찌 고통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휴, 그리고 딸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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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6. 30.

19세기 청전철폐와 21세기 공매도금지

친정을 선포한 고종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전임자 대원군의 흔적들을 지우는 일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도입했던 여러 제도를 폐지하거나 되돌리면서 명목상의 이유로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이는 상투적 수사에 불과했다. 그러다 이 미욱한 왕은 큰 사고를 친다. 당시 청나라의 화폐를 수입하는 것이 직접 화폐를 주조하는 것보다 비용이 더 낮았기에 대원군은 청전(淸錢)을 국내로 수입해 쓰기 시작했고 이제는 민간 거래뿐 아니라 세금 납부까지 모두 이 화폐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국고의 재정 역시 대부분 청전으로 비축되어 있었다. 그런데 고종은 육조판서는 물론이고 의정부 정승들과의 단 한마디 상의도 없이, 또 아무런 유예기간도 없이 하루아침에 이 청전의 사용을 금지한다. 난리가 난 것은 백성들 만이 아니었다. 하루아침에 국고에 수납된 청전 300만 냥이 휴지가 되자 조정이 쓸 돈이 없었으니 1주일 만에 조선은 파산에 내몰렸다. 졸지에 셀프로 거지가 된 고종이 재정을 담당하던 호조판서에게 물었다. "국고에 돈이 얼마나 남았는가?" 호조판서는 김세균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급한 지출과 사용이 금지된 청전을 빼고 나면 딱 800냥이 남습니다." 500년간 이어진 조선은 이제 단 1주일 만에 파산의 위기에 내몰렸다. 어떤 멍청한 왕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실수를 인정하고 자신의 칙령을 거두어들이는 대신 청전철폐의 당위성을 강조하며 조정 대신들에게 대안을 마련해 오라며 윽박질렀다. 고종은 말했다. "청나라 돈 때문에 날이 갈수록 물건은 귀해지고 돈은 천해져 지탱할 수가 없다. 백성들의 상황을 생각하면 비단 옷과 쌀밥도 편안하지 않다. 청전은 혁파되어야 하며 모든 세금은 반드시 상평통보로 거두라" 하지만 정작 백성들에게 인플레보다도 더 큰 고통을 안긴 것은 멍청한 왕의 독선적인 개혁이었고 나라 경제가 큰 혼란에 빠진 동안 그는 여전히 비단 곤룡포를 입고 쌀밥에 12첩 반상까지 곁들여서 아침 점심 저녁으로 처먹고 가베(커피)로 입가심까지 했다. 결국 대신들은 조정의 지출을 벌충하기 위해 세금을 추가로 징수하고 나라가 보유한 자산을 팔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 막대한 재정적자를 메꿀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고종은 떠 환곡까지 팔아 치우기로 결정한다. 환곡은 흉년이 들어도 다음 해 농사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백성들에게 종자나 곡식을 꿔 주는 일종의 보험이었는데 고종은 이를 털어 모자란 돈을 마련하라고 지시한다. 영의정 이유원이 반대했다. "환곡은 예기치 못한 재난에 대비하기 위해 만든 것인데, 이를 모두 돈으로 바꾸는 것은 원대한 계책이 아닌 듯 하옵니다." 하지만 고종은 고집을 꺾고 청전폐지를 유예하는 대신 조선의 몇 안 되는 복지제도를 털어먹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뻘짓에 뻘짓을 거듭하면서도 그는 백성을 핑계로 들었다. "(청전폐지가)참으로 백성에게 이롭다면 나라 재산에 손해가 나더라도 무슨 해로움이 있겠는가" 근데 정작 나라 재산을 거덜내고 백성에게 큰 해를 끼친 것은 자신의 급진적 조치가 아니었던가.

비슷한 사건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다. 2023년 11월 한국의 금융당국은 불법 공매도의 폐해가 매우 크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공매도를 전면 금지하겠다는 전격적 조치를 발표했다. 금융위기가 아닌데 공매도를 전면 금지한 것은 국내에서도 전례가 없던 일이고 해외의 사례도 거의 없다. 하지만 규제 당국의 의지는 확고했다. 불법 공매도의 폐해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하지만 금감원이 압수수색을 펼친 결과 적발한 사례는 그런 비상조치가 과연 필요했는지 의구심을 낳았다. 규제당국은 먼저 두 외국계 증권사의 지난 몇 년 치 거래내역을 모두 뒤져 총 540억 원의 불법 공매도 사례를 적발했는데, 국내 주식시장의 하루 평균 거래량이 20조 원이 넘는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흐르는 강에 콜라 한 캔을 부은 것처럼 미미한 숫자에 불과하다. 그래서일까. 금감원은 추가로 공매도 상위기관 14곳을 조사하여 1500억여 원의 불법 공매도 사례를 적발한다. 하지만 동기간 국내 주식시장 거래량이 총 몇 경원에 달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여전히 별 의미가 없는 수치에 불과했다. 

게다가 적발된 상당수의 사례들은 단순 실수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금감원의 자체 발표에서도 입증되었다. 보도자료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례들은 시스템 미비 때문에 발생했는데, 구체적으로 입력 실수나 대차물량의 중복 계산, 혹은 수기입력 과정에서 차입수량을 잘못 입력했거나 빌린 주식의 규모가 확정되기 전에 매도 주문을 제출하는 등, 대부분이 단순 착오나 실수에 의한 것으로 시세조종이나 미공개 정보의 이용 등 불공정거래와 연계된 혐의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당국의 의지는 확고하다. 그들은 이미 적발된 두 회사에 역대 최대의 과징금을 때리겠다고 예고하고 있다. 

이 비정상적인 당국의 조치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공매도 금지는 정치적 목적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추측했다. 심지어 해외통신사인 블룸버그조차 4월 총선을 목적으로 내놓은 조치라는 평가를 내렸다. 저명한 칼럼니스트 윌리엄 페섹은 한국의 어이없는 조치를 두고, 이것이 바로 MSCI가 한국을 선진국 지수에 포함하지 않은 이유다, 윤석열 정부가 MSCI 승격을 확보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여 대대적으로 홍보하다 총선 전에 목표 달성이 어렵자, 갑자기 뒤통수를 쳤다고 평가했다(링크). 투자계의 구루인 짐 로저스 역시 이 조치는 명백한 실수고 아주 어리석은 짓이라며, 정부가 이런 짓을 벌이기 때문에 한국은 금융 중심지가 될 수 없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혹평이 어디 언론뿐이겠는가. 금융시장의 평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발표 직후 매수 사이드카를 발동했던 주식시장은 바로 다음날 반대쪽 사이드카를 걸며 이 전대미문의 병신 놀음에 화려한 병신굿으로 화답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선진국 대열에 끼워달라고 매달리던 한국의 규제당국이 갑자기 돈키호테로 돌변하여 자살골을 넣으면서도 그들은 투자자를 보호하겠다는 핑계를 댔다. 하지만 앞서 지적했듯 전수조사로 적발된 공매도의 규모는 극히 미미했고 그마저 대부분 단순 실수로 드러났다. 오히려 정부의 난데없는 조치로 출렁인 금융시장의 시가총액의 변화가 적발된 공매도의 규모보다 몇백 배가 더 컸으니 투자자들에게 고통을 안긴 것은 공매도가 아닌 바로 금융당국이나 다름없다. 마치 구한말 조선 백성에게 혼란을 안긴 것이 청전이 아니라 고종의 청전철폐 조치 그 자체였던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에 빙의한 금융당국은 실수를 인정하기는커녕 시장과 기싸움을 벌이며 압수수색의 범위를 크게 늘렸다. 하지만 이 사태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구한말 고종만큼이나 무능하고 미개한 한국 규제당국과 정부-여당이 금융시장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는 것.    

그리고 그 대가는 무척이나 혹독하다. MSCI는 최근 연례 시장 접근성 평가에서 플러스’(+)에서 개선이 필요한 ‘마이너스’(-)로 바꿨으니 시간의 문제라고 여겼던 선진국 지수 편입은 아예 없던 일이 된 셈이나 다름없다. 무엇보다 정부가 시장접근성을 보장하겠다는 신뢰를 정면으로 어겼기 때문에 차후 공매도가 재개되고 정부의 스탠스가 바뀌더라도 MSCI 측은 계속해서 의구심을 가지고 한국을 선진국 지수에 편입하는 것을 소극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2008년 처음으로 한국이 선진국 지수로의 편입을 신청한 이후 오랫동안 우리 금융인들은 우리나라의 주식시장이 선진국으로 분류되기를 기다려왔다. 그것이 실제 외국인 투자자들의 순유입을 야기하지 않는다고 해도, 상징적인 의미가 있기에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그 역사적 순간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기재부는 마지막 빗장이었던 외환시장의 접근성을 열어주는 전격적 조치를 취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어떤 멍청한 아마추어 무리들이 금융계에 우우 몰려들더니 그 소망을 제멋대로 갈아다가 자신들의 비루한 정치적 야망을 위한 거름으로 썼다. 그러고서도 여당은 총선에서 참패했으니 그 무리들은 목표를 이루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병신들을 봤나. 이 덜떨어진 고종의 DNA를 이어받은 이들은 우리나라가 왜 후진국인지 국내외의 모든 사람들에게 피부로 깨닫게 만들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고 오히려 잘한 조치라고 항변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올 초 한 대담에서 연초부터 외국인들의 주식 매수 자금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 공매도를 금지한 것이 잘한 조치라고 평가했는데 그 모습은 청전을 폐기한 뒤 치졸한 변명으로 일관했던 고종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130년 전의 전의 조선이 그랬던 것과 똑같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금융시장을 어지럽히는 건 덜떨어진 관료들의 관치금융과 멍청한 규제들이다.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인은 일일 거래대금이 20조가 넘는 시장에서 실수로 몇백 주 어치 매도 주문을 낸 실무자들이 아니라, 바로 미개한 당신들에게 있다. 이 사태는 21세기 한국의 금융시장에서 가장 큰 흑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 금융시장의 진정한 호러는 이것이 밀턴 프리드먼의 저서를 즐겨 읽고 시장경제와 자유주의를 중시하겠다는 보수정부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이다.


*               *               *


결국 6월의 마지막 날까지 공매도 금지는 해제되지 않았고 MSCI는 한국의 선진국 지수 편입을 불허했다. 지난 정부에서 진보 지식인들이 추태를 부리고 자신의 밑바닥을 보이며 몰락했던 것과 같이 이번 정부에서도 우리는 여러 지식인들의 추락을 보고 있다. 공개적으로 공매도 금지에 반대한 김주현 금융위원장을 제외하면 현 정부의 경제학자/금융계 출신 인사들은 모진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앉은 김소영은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자신이 강단에서 제자들에게 했던 발언들을 다시금 떠올리며 부끄러워하기를 바란다. 이복현 금융감독위원장은 자신의 경험과 능력을 벗어나는 과분한 직분에 앉고서도 그 이상의 욕심을 부리느라 절대로 좋은 평가를 줄 수 없었는데, 이번 사태로 또 하나의 큰 업보를 쌓았다. 그리고 김동조 대통령실 비서관. 한때 트레이더였던 그가 이 공매도 조치가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부당한지 모를 리가 없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를 막지도, 그렇다고 비서관 직을 사임하지도 않았다. 트레이딩보다 블로거로서 두각을 나타낸 그는 Hubris라는 필명을 사용하곤 했는데,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이 단어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성공으로 인해 교만해져서 남의 말에 귀를 막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다 판단력을 잃게 되는 것" 그리고 이 필명은 이름값을 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마지막 회사를 그만둔 후 그는 한 포스팅에서 자신의 거시경제 전망이 틀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자찬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트레이더가 그처럼 이른 나이에 트레이딩을 그만두는 것은 오로지 한 가지 경우 뿐이다. 그러니 이 얼마나 오만한 착각이었던가. 그리고 그의 부끄러운 닉네임처럼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은 깊디깊은 Hubris의 늪에 빠져있다.

왼 가슴에 오른손을 얹고 고백컨대 2024년판 병신오인방이 쓰이지 않는 단 하나의 이유는 아직 5명을 다 모으지 못했기 때문이다.  




(위의 모든 내용은 작성자 개인의 주관적 의견임을 밝힙니다) 


2024. 6. 8.

멸망을 이끈 대한제국의 고종, 그리고 대한민국의 세종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근대 이전부터 크게 벌어졌던 조선과 일본의 잠재력을 감안한다면 조선이 성공적으로 개혁을 이루어 독립을 유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개화의 기회가 있었더라도 조선은 실패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의 지도자였던 고종에게는 그럴 의지도 역량도 없었으니까. 여러 대중매체들이 그를 비운의 개혁군주로 묘사하는 것과는 반대로 고종은 조선이 전쟁 한 번 없이 멸망하게 된 중요한 원인들을 제공했다. 그의 여러 실정과 잘못된 조치로 국가의 재정은 더욱 빈곤해졌고, 그는 몸소 나서서 관직을 팔며 부패를 권장했으며, 국제정세에도 어두워 외교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단적인 예로 조선이 마지막으로 근대화를 이룰 수 있던 마지막 기회였던 갑오개혁을 무산시키고 부패한 적폐 세력인 민씨 척족을 등용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고종 그 자신이었다. 또 근대적 의회 시스템과 헌법을 도입하자던 독립협회를 군대를 동원해 해체하고 개화파 인사들을 체포한 것도 고종이었으며 이때 체포되어 고문을 당한 사람 중에는 이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도 포함되어 있었다. 심지어 고종의 밀서를 받아 헤이그에 파견된 특사 중 한 명인 이위종까지도 당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동시에 이를 야기한 고종의 부패와 무능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으니 더 볼 것이 있으랴. 구한말-일제강점기에 독립을 이끈 많은 민족지도자들이 거의 만장일치로 입헌군주제 대신 공화정을 지지한 데에는 고종과 왕실에 대한 좌절에 가까운 실망이 큰 몫을 했다.

고종은 서구식 제복을 입고 미국에서 수입한 캐딜락을 타고 커피를 마시며 영국 건축가가 설계한 서구식 건물에 살았지만 정작 자신의 의식과 국가의 시스템을 개혁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근대화의 핵심은 권력을 분산하고 국가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바꾸는 데에 있었지만 반대로 권력을 강화하고 싶었던 이 아둔한 군주는 무려 반세기에 걸친 자신의 재임 기간 동안 온힘을 다해 전제적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 결과 대한제국의 통치제도는 되려 조선 전기보다도 크게 후퇴한 1인 전제 군주정으로 돌아갔다. 다만 나라가 그를 유지할 힘이 없었을 뿐. 미개한 시스템의 정점에 있던 고종은 어떻게 보아도 개혁의 대상이었지, 결코 주체가 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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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 년이 넘게 지난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중앙정부와 거기에서 일하는 관료들은 늘 숨 가쁘게 이런저런 개혁안을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그중 대다수는 변화하는 환경과 민간의 수요를 맞추어 따르는 대신 엉뚱한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정부와 관료들이 통제의 끈을 놓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마치 조선시대 고종이 그랬듯이. 거창한 구호로 시작된 개혁안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하나의 철학으로 귀결된다. 정부가 통제를 잘 해서 발전하겠다. 그리고 그 기저에 놓인 철학만큼이나 쉰내 나는 디자인의 hwp 문서의 핵심은 거창한 포부와 그럴듯한 문구로 치장된 앞이 아니라 뒤에 있다—따라서 이런저런 규제와 지도를 강화하겠다, 그래 우리 관료들이. 관료조직이 대개 요지부동이듯 정권이 바뀌어도 이런 구태는 변하지 않았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더하다. 고작 2년 밖에 안된 이번 정부에서도 자본시장 선진화 방안, 밸류업 프로그램, 금융개혁, PF 연착륙 대책 등. 이런저런 방안들이 나왔지만 그 세부내역은 필요한 개혁이나 시장경제와 질서를 강화하는 것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정부의 감독 권한과 영향력을 극대화하는 방안으로 채워져있다. 정부가 마련한 개혁안들 중 국가의 간섭을 줄이고 민간의 영역을 확대-강화하는 것이 뭐 하나라도 있는지 찾아보라.

이런 방식으로 진행된 개혁이나 프로젝트의 실패 사례는 수두룩하게 많다. 최경환이 이끌었던 초이노믹스의 증시 정책은 가장 보수적인 인사들조차도 고개를 저을 정도로 완전한 실패로 끝났고, 수십 년째 동북아 금융허브를 외쳤지만 금융도시로서의 서울의 순위는 10년 전보다 되려 내려갔으며 그사이 십여 개의 외국계 금융사들이 서울에서 철수했거나 사업 규모를 크게 축소했다. 금융계는 그 주된 원인으로 글로벌 기준 어긋난 비합리적 규제들과 관료들의 조선식 갑질을 꼽는다. 여러 차례 밀어붙였던 경제자유구역과 각종 동북아 xx 중심지 정책은 모조리 다 실패해 이제는 그저 그런 신도시들 사이에서 그 흔적만 간신히 남았으며 그 가운데 엄청난 예산과 자원, 그리고 인력이 소모되었다. 비단 이것이 경제정책이나 금융에 국한된 문제랴. 산업이나 통상, 혹은 건설이나 심지어 문화 예술이나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모두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정부에 이어 이번 정부도 주택공급에 나서고 있지만 민간의 손발을 규제로 꽁꽁 묶어두고 정부가 나서서 주택을 공급하겠다는 방안은 애초에 성공할 수가 없었기에 주거안정의 골든 타임은 이미 지났다. 안타깝지만 이 외에도 21세기 들어 국가가 주도한 대형 프로젝트나 개혁안은 거의 대부분이 실패해 성공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국가가 아니면 리드할 수 없던 소수의 토목사업이나 비영리 정책을 제외하면.

이런 실패가 거듭되는 이유는 대한민국의 체급이 이제는 정부가 주도하는 계획으로 이끌 수 있는 규모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나라의 전체 GDP 규모가 20억 불 남짓하던 시절에야 소수의 유능한 관료들이 효율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기업들을 윽박질러 국가의 발전방향을 세우는 것이 가능했지만 같은 방식으로 2조 달러를 바라보는 경제를 운용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하다. 50년 전만 해도 민간의 경쟁력이 열악했기에 가장 우수한 인력들이 정부로 모여들었으나, 이제 똑똑하고 진취적인 인재들은 더이상 행시를 보지 않는다. 오늘날의 관료조직은 두뇌를 독점하지도 못하고 민간에 비해 경쟁적이지도 않은, 뒤처진 조직이 되었다. 당신이 일하는 분야에서 같이 일해본 관료들을 떠올려보라. 과연 그들이 민간을 이끌고 발전방향을 제시할 깊이와 전문성이 있는 사람들인지.

하지만 그럴수록 그들의 통제 욕구는 더욱 강해진다. 관료조직의 전문성과 효율성이 민간에 비해 뒤처질수록 이 기관들은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자신들의 권력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조선 말기에 나라를 통치할 능력을 상실한 고종이 역설적으로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더욱 왕권을 강화하고 개혁을 억눌렀던 것처럼. 심지어 관료들은 민간의 자유로운 발전을 허용하는 것을 일종의 위협으로 여기기도 하는데, 그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가상자산이 각광을 받던 시기 법무부 장관은 거래소를 폐쇄하겠다고 겁박했고 당시 금융위원회 위원장은 가상화폐에 투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어른들이 올바른 투자를 가르쳐 줄 의무가 있다며 어리석으면서도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이는 같은 시기 미국의 하원이 "우리는 가상화폐의 내재가치에 논할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가상화폐를 자유롭게 거래하는 일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이 옳은지를 두고 논의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던 자유주의적 관점과 완벽하게 대비된다. 이에 힘입어 얼마 전 SEC는 비트코인을 기초자산으로 하는 ETF를 승인했는데, 이와 반대로 코인의 거래를 금지한 국가로는 이집트, 이라크, 중국, 카타르, 오만,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방글라데시 등이 있다. 우리나라 관료들의 평균적 의식은 OECD보다 저 아프리카 나라들에 더 가깝다. 그들의 이런 후진적이고 극단적인 통제 성향은 최근 직구 금지 사태를 통해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관료들은 미국과 EU와 같은 선진시장의 인증 제도를 인정하지 않고, 반드시 한국의 인증을 별도로 받아야 하며 그렇지 못할 시 반입을 금지할 것이라는 규제를 내놓았다가 거센 역풍을 맞았다. 각 나라마다 배타적인 인증 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과거 소품종 대량생산의 시대에 수입 공산품의 수가 적던 산업화 시절에나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많은 나라들은 서로의 인증을 인정해 주는 협약을 맺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관료들은 그런 노력은 게을리하면서도, KC 인증을 찍는 권한을 강화하는 쪽으로 규제를 만들어 나간다. 그래, 우리 관료들의 권력은 바로 거기에서 나오니까. 하지만 전 세계에서 이런 뒤떨어진 시스템과 철학으로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그 결과 오늘날 여러 분야에서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여러 장애물들을 보면 그 끝에는 꼭 관료들이 있다. 식약처, 금감원, 과기부, 정통부, 기재부, 법무부, 관세청, 국세청, 보건복지부 등 규제가 규제를 낳고 규제의 본 목적은 사라지고 이제는 규제 그 자체를 위한 규제만 남아 복지부동인 관료들이 시장과 기싸움을 벌이고 민간에 갑질하는 모습만 가득하다. 규제.규제.규제. 규제는 관료들의 가장 소중한 자산이다. 정부는 늘 새 규제를 도입하며 해외의 사례를 들먹이지만 그 반대의 사례는 단 한차례도 본 적이 없지 않은가.

직구규제를 발표하는 인상적인 표정의 이정원 국무조정실 국무2차장

대개 경제발전이 더디고 후진 나라일수록 관료들이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발전한 나라일수록 정부와 관료들의 역할이 작다. 전자의 대표주자가 중국이고 그 반대편에는 미국이 있다. 2020년 말, 중국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인이었던 마윈은 "미래의 시합은 혁신의 시합이어야지 감독 당국의 (규제) 기능 경연 시합이어서는 안된다"라며 규제당국을 거세게 비판했고 당국은 강도 높은 보복에 나섰다. 그 결과 마윈이 계획했던 사상 최대 규모의 IPO는 취소되었고 뉴욕에 상장되었던 알리바바의 주가는 폭락을 거듭했다. 반대로 미국에서는 국가 기관인 NASA가 주도하던 우주탐사를 민간 기관인 스페이스 X가 대체했다. 그 과정에서 스페이스 X는 NASA를 상대로 소송까지 걸기도 했지만, 미 정부의 관료들은 괘씸하다며 민간의 발전을 가로막거나 견제하기는커녕 제도를 개선하고 협조에 나섰다. 이런 철학의 차이 때문일까. 한동안 안정되었던 두 나라의 시가총액의 비율은 이후 점차 벌어지기 시작했고 달러 기준으로 보면 그 격차는 더욱 두드러진다. 관료의 계획경제가 이끄는 나라와 시장경제가 이끄는 나라, 어느 시스템이 더 우수한지는 이미 명확하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나라의 관료들은 중국을 지향하는가, 미국의 모델을 지향하는가.

이런 논의를 할 때마다 대한민국의 관료제를 예찬하는 사람들은(대개 공무원들이다) 우리 행정부에 얼마나 우수한 고학력 능력자들이 많은데 일부의 실패 사례로 전체를 재단하냐며 항변한다. 하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정부의 실패는 대부분의 분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현상이지 일부의 문제가 아닌데다가, 관료제에서는 개개인의 능력보다 조직의 구조가 그 효율성과 아웃풋을 결정한다. 그리고 한국의 정부 조직은 공부를 잘하는 인재들을 바보로 만드는 일에 특화된 조직이다. 그래서 독특하게도 우리나라 정부는 아래로 갈수록 효율적이고 생산적인데 반해, 직급이 올라가고 상위 조직으로 갈수록 비합리적이고 멍청하게 퇴화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당신들은 과거 산업시대 발전을 이끈 선배들보다 뛰어나지도, 그렇다고 사명감이 더 크지도 않지 않은가. 나는 여러 번 관료들이 민도를 거론하며 관료 주도형 통제 모델을 옹호하는 것을 보았는데, 선진국과 비교하면 그들과 우리의 민도의 차이보다 관료들의 의식수준의 차이가 더 크게 벌어진다고 생각한다. 특히 고위직일수록. 게다가 일반 국민들의 수준과 관료들의 격차는 구한말 이래 지금이 가장 적고, 앞으로도 계속 줄어들 것인데, 언제까지 시대착오적인 선민사상에 젖어 민간과 시장을 통제하려 들 것인가.

세종특별시는 그 이름에 걸맞게 대한민국 관료제가 처한 기형적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행정에 특화된 특별시를 자처하면서도 이 도시의 구조는 기괴하기 짝이 없다. 세종시와 가장 가까운 KTX 역은 오송역인데 여기에서 택시를 타고 아주 한참을 달려야 세종시 정부청사에 도착한다. 그 뒤에도 여러 부서를 방문하려면 발이 아프도록 주차장을 가로질러 뛰어야 한다. 점심이라도 먹으려 외부로 나가려면 더욱 그렇고. 그러려면 대중교통이라도 좋아야 하는데 차로 다니기에도, 버스를 타기에도 여러모로 불편하다. 택시 숫자마저 모자르다고 한다. 게다가 이곳은 기존의 도시를 확장해서 지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각종 인프라도 턱없이 부족하다. 많은 공무원들이 KTX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기 위해 (다시 택시를 타고) 오송역 플랫폼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오가고 있고 아직 때묻지 않은 젊고 능력 있는 사무관들은 이 정체된 도시에서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다 함께 시나브로 침전하고 있다. 이건 실패한 도시다. 세상에 공항은 물론이고 기차역 하나 없이 고립된 수도가 있던가? 갈라파고스 세종. 그리고 도시가 고립된 만큼 거기에서 일하는 관료들도 세상과 고립되어 점차 도태되다 이제는 심지어 자신이 얼마나 뒤떨어졌는지조차 모르는 단계에 이르렀다. 관료를 위한, 관료에 의한, 관료의 도시가 이렇게 비효율적인 설계로 실패했다면 그들이 그리는 한국의 미래도 별반 다르지 않지 않을까. 세종시가 그렇게 된 것은 정치권 때문이라고? 그래, 그런 이유도 있지. 하지만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에서 민주적 통제를 받지 않는 행정부가 있던가? 어공이든 늘공이든 그들이 국회와 국민들을 설득할 능력이 없다면, 그들의 권한도 대폭 축소해야 한다.

오래전 이건희는 기업은 2류 관료는 3류 정치는 4류라고 했다. 이제 세계에서 순위를 다투는 우리나라 기업은 감히 말하건대 1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관료와 정치의 수준은 과거보다 후퇴했으니 4류와 5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정부가 내놓는 개혁안이란 결국 5류의 눈치를 보는 4류가 1류를 선도하겠다고 나대는 꼴이다. 그들은 개혁의 대상이지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없다. 고종은 기나긴 재위 기간 동안 여러 개혁을 시도했지만 애초에 미개한 전제 군주정과 개화는 양립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세계적으로 밸류체인이 통합되고 경쟁하는 시대에 관치와 선진화는 양립할 수 없다. 중세의 제도인 과거제를 모방한 행시로 선발된 인사들로 꽉꽉 채워진 관료조직이 자신의 전근대적 권한은 강화하면서 이미 선진사회와 경쟁하는 민간을 선도하겠다는 계획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백여 년 전 고종이 죽어야 조선이 살 수 있었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이제는 세종시의 권력이 죽어야 한국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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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까운 친구들과 선후배들은 세종시의 여러 부처에서 관료로 일하고 있다. 그리고 가까운 가족들 중 몇 분도 경제 부처나 규제에 관련된 조직에서 오랫동안 일하다 퇴직하셨다. 의심할 나위 없이 그들은 사명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성실히 일하던 인재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현실을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니며, 또 관료제와 조직에 대한 이런 비판들이 그들 개개인에 대한 비난으로 오도되어 사기를 더욱 낮춘다는 점도 알고 있다. 민간에 비해 턱없이 낮은 보수, 걸핏하면 들어오는 비난의 여론, 적체된 승진에다가 암울한 지방근무까지. 물론 관료조직을 개혁하는 일은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열악한 환경을 개혁하는 일도 포함해야 한다. 

개혁의 방향은 관료들의 권한을 제한하고 처벌은 강화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에 처우를 대폭 개선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관료들에겐 지나치게 많은 권력과 지나치게 적은 보수가 주어지는데, 이러면 관료들이 정치인이나 이권을 제공하는 집단/단체/회사에게 회유될 가능성이 커지고 권력에 대한 욕구가 매우 강한 사람들이 남는다. 이는 국민 모두에게 크게 해가 된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관료제의 개혁은 그들의 연봉부터 대폭 상향하는 것과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2024. 4. 21.

모에화 된 라오콘-이윤성

1863년 에두아르 마네가 신작 [올랭피아]를 공개하자 관객들은 크게 분노했다. 기존의 회화에서 여성의 누드를 그릴 때에는 대부분 신화적 인물을 통해서 성스럽게 표현했는데 마네는 대놓고 창녀로 추정되는 여성의 누드를 그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새 작품은 르네상스 미술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였던 [우르비노의 비너스]의 구도와 도상을 차용했으니, 대놓고 비너스를 창녀로 바꿔 그린것 아닌가. 기법 면에서도 엄격한 인체비례와 정확한 원근법을 십계명처럼 따르던 기존 회화와는 달리 비례도, 원근법도 맞지 않는 거친 붓질로 나체를 그렸으니 보수적인 기존의 관객들과 미술계가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잘난 상류층 나으리들께서 한데 모여 헐벗은 여자의 그림을 점잖게 관음 하기 위해서는 누드화들이 성스럽게 표현되어야 했는데 마네는 대놓고 창녀를 거칠게 표현했으니 그들이 어찌 찔리지 않았을까. 이 발칙한 작가는 그렇게 유산계급의 위선과 가식을 적나라하게 꼬집었다.

이윤성-Laocoon

오늘날 이윤성의 작품들 바라보는 관객들의 마음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서양화를 전공했던 그는 미술학도들이 연습하고 배우던 고전미술의 소재들을 차용하면서도 이를 일본 만화의 기법들로, 또 매우 선정적으로 표현한다. 이번에 공개된 신작들의 소재 역시 그리스 신화-라오콘에서 따온 것인데, 헬레니즘 시대에 제작된 동명의 조각이 미켈란젤로나 엘 그레코를 비롯한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기에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이다. 그리고 작가는 발칙하게도 본래 남성인 라오콘과 그 두 아들을 여자로 바꾸어 그렸다. 이를 모에화라고 하던가. 그뿐만 아니라 본디 고귀한 인간의 정신을 표현했다는 라오콘을 야하게 뒤틀다니. 이 아이콘이 미술사에서 가치는 위상을 고려하면 이 얼마나 발칙한 시도인가. 흑백으로만 묘사된 이미지와 100호를 넘어서는 커다란 크기로 인해 작품의 섹슈얼한 요소들은 한층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이를 일본 망가처럼 표현했으니, 아무리 전시장이라지만 이 그림들을 쳐다보고 있기가 왠지 부끄럽다. 그리고 그를 통해 관람객들은 자신의 가식을 깨닫는다. 비너스나 아프로디테의 누드를 실컷 보고 즐기던 작자들이 마네의 누드 앞에서 얼굴이 벌게지며 화를 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는지 알 것도 같다. 

리히헨슈타인과 무라카미 다카시는 기존의 미술계가 낮추어보던 카툰이나 망가도 훌륭한 현대미술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들을 따라하는 무수한 아류들이 뒤를 이었다. 아트페어에 가면 터줏대감처럼 늘 있는, 비슷비슷하게 쉽고 귀여운 이미지를 공장처럼 찍어내놓고 와닿지 않는 해설만 주절주절 달아둔 채 평론가들과 수집가들의 눈에 들기 위해 아양을 떠는 그림들.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쉽게 입고 버리는 SPA 브랜드의 옷을 팔겠다고 억지웃음을 짓는 점원들을 마주하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이윤성의 작품은 발칙하게도 우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되묻는다. 왜, 유럽 미술관에 걸린 누드화들 앞에선 셀카 찍어 인스타에 올리더니 이건 못 올리겠어? 뒤샹이 모나리자로 섹드립을 날릴 때엔 꺅꺅 거리며 멋있다고 하더니 모에화 된 라오콘은 마음에 안들어? 뭐 네 눈에 고전은 고상하고 망가는 좀 없어보여? 하지만 고만고만한 취향을 가진 부자들의 눈에 들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귀여운 척 애교를 떠는 뻔한 그림들보다 도발적 질문을 던지는 그의 작품이 훨씬 더 매력적이지 않은가. 마네의 올랭피아가 그랬던 것처럼.

더욱이 우리는 문화계의 홍위병들이 몰려다니며 멋대로 예술을 재단하고, 밥줄이 간당간당한 예술가들이 그게 두려워 자아 검열을 펼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야말로 한국판 문화대혁명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작가들은 얌전한 모범생이 되어 논쟁적이지 않은 작품들만 내놓고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 예술이 그렇게 고분고분했던가. 반 고흐, 쿠르베, 세잔, 피카소, 뒤샹 등 미술사에 이름을 남긴 많은 작가들이 세상에 등장했을 때 그들은 모두 당시 미술계를 지배하던 주류에 반기를 들던 악동들이었다. 그래서일까. 요즘 들어 특히 이윤성 같은 발칙한 작가들을 만나는 것이 반갑게 느껴진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마네의 다른 작품,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관람객의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걸어야 했다고 한다. 심기가 불편한 관객들이 자꾸 우산으로 그림을 훼손하려 했기 때문이랬던가. 그리고 아마 이윤성의 전시회에도 이처럼 심기가 불편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미술의 지평을 개척하고 넓힌 것은 얌전한 모범생들이 아닌 짖궂은 악동들이었다. 거듭된 자기검열과 과도한 PC의 시대에 이윤성의 작품들은 이렇게 말하는듯 하다. 이게 불편해? 그럼 병원에 가, 미술관에 기웃거리지 말고.

좌: 이윤성의 라오콘                        우: 바티칸 미술관의 라오콘 

2024. 4. 13.

레임덕과 데드덕의 경계에서

얼마 전 학창시절 가까웠던 친구들을 만나 저녁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병원에서 의사로 일하는 친구가 연신 술을 들이켜며 정부 정책을 비판하기 시작했고, 그 바통을 이어받아 연구원으로 일하는 친구가 핏대를 세우며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현 정부를 강력하게 지지하던 친구들이었다. 나 역시 덩달아 이 정부의 금융정책들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따지며 논쟁에 뛰어들었다. 그런 우리의 대화를 들으면서도 조용히 잘 익은 고기를 착착 집어먹던 변호사 친구가 다음의 한 마디로 대화를 정리했다. "거봐 내가 말했잖아, 검사 애들이 그렇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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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대선은 음주운전자와 초보운전자가 맞붙은 선거였다. 그리고 국민들은 고심 끝에 아무런 정치 경험이 없던 초보운전자의 손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버스의 핸들을 꼬옥 잡아 쥔 이 초보운전자는 혹시 자신이 운전에 천부적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닐까 착각하기 시작했고 이윽고 엑셀과 브레이크를 마음대로 밟기 시작했다. 조수석에 앉은 그의 보좌관들도 맞다, 운전은 이렇게 하는 것이라며 연신 박수를 쳤다. 물론 그들 역시 운전 경험은커녕 면허조차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 초보운전자는 좌회전을 했다 우회전을 했다 길을 잘못 들어 유턴을 하기를 반복했고 조수들은 전방이나 내비게이션, 혹은 승객들을 바라보는 대신 운전자의 표정만 살피고 있었다. 급가속과 급정거를 반복하는 이 초보운전자의 서툰 운전 덕에 승객들은 멀미를 하기 시작했고 기사에게 항의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기사와 그 보좌관들은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소리를 쳤다. "야 인마, 꼬우면 네가 기사해"

대통령실은 이런 묘사에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 총선에 임하는 유권자들이 느꼈던 감정은 위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2 대 108, 임기가 불과 2년 밖에 지나지 않은 여당이 선거에서 참패한 이유는 그만큼 야당의 후보들이 훌륭했기 때문이 아니라 대통령실의 현실 인식과 태도에 심각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에서 행정부는 입법이나 사법부보다도 훨씬 강력한 권한을 가졌다. 삼권분립이라고 하지만 한 쪽이 나머지 두 쪽보다 월등하게 큰 비대칭적 구조라고 할까. 중간선거가 대통령에 대한 찬반투표의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는 배경에는 이런 역학관계가 있다. 따라서 이번 선거에서 유권자들이 1번을 찍은 이유는 야당과 진보진영의 철학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이런 행정부의 독선에 브레이크를 밟기 원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몇몇 평론가들은 몇몇 형편없는 야당의 후보들이나 조국의 부상을 두고 정치지형의 한계나 유권자들의 수준을 논하지만 나는 그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투표장에 나온 사람들은 그저 대통령의 오만함과 독선을 막고 싶었을 뿐이다. 그 브레이크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는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고. 

그 대통령실이 어떤 태도로 국정을 꾸려나갔는지 돌아보자. 정치경력이 전혀 없었던 대통령은 자신이 잘 알던 검사들을 등용했고 그렇게 각 요직은 전문성이 없는 사람들로 채워졌다. 내가 거듭해서 비판했던 금감원장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대통령이 직접 추진하던 정책들은 완전히 잘못된 현실 인식에 기반한 경우가 많았다. 윤석열은 은행들의 독과점이 서민 이자 부담의 원인이라며 카르텔을 혁파할 것을 주문했지만 지방은행과 저축은행 등 사실상 100개가 넘는 금융기관들이 경쟁하는 여수신 시장에서 독과점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또 대통령실은 높은 사교육비의 원인이 교육 카르텔에 있다며 이를 타파하기 위해 엄정한 수사를 주문했지만 실제 적발된 사례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균형재정을 위해 R&D 예산을 줄였다고 발표하자 과학계가 반발했는데, 정부는 여기에도 카르텔이 있다며 칼을 빼들었다.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도 경험도 없던 이 선무당들은 각 업종을 넘나들며 사람을 잡기에 바빴다. 한 대통령실 인사는 검사 시절 해당 분야를 수사해 본 적이 있기에 전문성이 있다고 했는데 그 말은 전과자가 자신이 검찰수사를 받아보았으니 형사법 변호사 일도 할 수 있다는 말만큼이나 허황된 착각이다. 이렇게 용산 선무당들은 우우 몰려다니며 오늘은 여의도, 내일은 대치동을 돌아다니며 생사람 잡기를 반복했는데, 그리고서도 잘못을 인정하기는 커녕, 사실 수사를 해보니 네가 나쁜 사람이기에 잡았다라는 태도로 일관하기 일쑤였다.

이런 초보운전자들에게 정무감각이 있을 리가 없었다.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대통령은 유죄판결을 받은 지 3달도 채 되지 않은 김태우를 사면한 뒤 곧장 보궐선거에 내보냈다. 총선을 불과 반년도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별 가망도 없어 보이는 구청장 한 석을 노려보기 위해 전국구 지지율을 통째로 희생시키는 얼토당토 없는 베팅이 실패하자 대통령실은 무리한 승부수를 던지기 시작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도 한국을 MSCI 선진국 지수에 넣어달라고 떼를 쓰던 금융당국은 편입이 불발되자 놀랍게도 공매도를 전면 금지한다는 조치를 들고나왔다. 위기가 아닌 상황에서 공매도를 전면 금지한 사상 초유의 사태를 놓고 대내외 금융기관에서는 거센 비난이 이어졌고 시장에서는 하루 만에 매수 사이드카가 걸렸다 바로 다음날 매도 사이드카가 걸리는 촌극이 이어졌다. 십수 년간 애쓴 시장의 신뢰와 선진국 지수 편입 가능성을 깨끗하게 날려버리고도 대통령실은 주가와 지지율을 올리는데 실패했다. 마지막으로 꺼낸 의대 증원이라는 카드도 마찬가지였다. 선거를 코앞에 두고 정부는 갑자기 당장 내년부터 의대 정원을 65%나 늘리겠다고 발표했으나 2천 명이라는 수치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산출되었는지 합리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이에 반발하여 전공의들과 대형병원 의사들이 파업에 나섰는데도 정부는 주먹구구식으로 대응하고 겁박만 거듭했을 뿐 파업에 대비한 효과적인 백업 플랜을 준비하지도 않았다. 이 모든 사회적 비용을 야기한 것은 다름 아닌 정부 자신이었고 그 뒷배경에는 대통령실이 있었다. 더욱 비참한 점은 그 비용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지지율은 오르기는커녕, 되려 크게 낮아졌다는 것이다. 

아마 대통령과 그 참모들은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그렇다 치자, 그렇다고 우리가 저런 범죄자들보다 우리가 못하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현재 운전대를 잡고 있는 것은 당신들이지 이재명이나 조국이 아니다. 국민들은 이재명이나 조국을 택한 것이 아니라, 무능한데다 오만한 당신들에게 제동을 거는 것일 뿐이다. 게다가 당신들이야말로 그들을 닮아가지 않는가. 현 정부에서 계속해서 여러 인사 문제가 논란이 되었는데, 거기에 직접적 책임이 있는 인사비서관 이원모와 법률비서관 주진우는 뻔뻔하게도 텃밭인 강남과 해운대에 공천 신청을 했다. 지지율을 열심히 갉아먹은 장본인들이, 나머지 지역구들이 망하든 말든 나만 금배지 달면 된다는 당신들과 대선에서 패배하고도 정치적 책임을 지기는커녕 계양에 출마한 이재명이나 매한가지 아닌가. 

게다가 대통령은 배우자에 대한 의혹을 해명할 기회를 걷어차며 자신에게 남아있던 마지막 정치적 자산을 불태웠다. 영부인이 당선 후에도 명품백을 선물로 받은 일이 드러난 뒤에도 그는 사과하기를 거부했으며 제2 부속실을 설치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도 않았다. 이후 계속해서 이 사건의 본질은 불법 촬영과 정치공작이라며 가스라이팅을 시도하는 대통령실의 모습은 비리 의혹이 드러난 후에도 아직 법적 결론이 나지 않은 사안이라 법무부 장관을 사퇴하지 않겠다며, 되려 검찰개혁을 강하게 외치던 조국의 모습처럼 치졸하고도 초라했다. 과거 이를 두고 한동훈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국민이 볼 때 공정한 척이라도 하고 그러려면 일단 걸리면 가야 되는 것이지, 걸리고서도 "아니 그럴 수 도 있지" 하고 성내는 식으로 나오면 안 되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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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일대 심리학자 어빙 재니스는 집단사고라는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응집력이 강한 집단의 구성원들은 어떤 판단을 내릴 때 만장일치를 이루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좀처럼 반론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아예 잘못된 결론을 도출할 위험성이 있다" 그 대표적 케이스로 언급되는 것이 바로 하버드를 졸업한 엘리트들로 구성된 케네디 행정부가 설계한 피그스만 작전이다. 각 분야의 전문가와 뛰어난 에이스들이 설계한 이 작전은 과도한 낙관론을 바탕으로 불가능한 작전목표를 구상했기에 시작과 동시에 삐걱거리다 처참하게 실패했다. 그리고 윤석열과 대통령실의 인적 구성은 어빙 교수가 언급한 집단사고에 빠질 전제조건에 부합한다. 

나는 여전히 이 정부의 성공을 간절히 바란다. 사실 우리는 늘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모든 정부의 성공을 바라야 한다. 설령 우리가 지지하지 않는 정부여도. 이번 총선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레임덕과 데드덕의 경계를 오가다 간신히 살아남았다. 총선의 패배가 대통령실에게 있는 것은 아는지 선거 직후 총리와 대통령 비서실 전원이 사표를 제출했다고 한다. 유권자들은 대통령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준 셈이나 다름없다. "이 길이 맞아 인마 꼬우면 너가 기사 해" 라고 외치던 검사 윤석열에게 국민은 대통령 윤석열이 될 마지막 기회를 허락한 것이다. 대통령실이 그 서늘한 함의를 깨닫기를 바랄 뿐이다. 

2024. 2. 13.

Adarashi Fantasy-최경태

구글 검색창을 열고 최경태 작가를 검색해 보자. 아, 그전에 성인인증부터. 사람들이 붐비는 지하철이나 사무실이라면 화면을 가릴 것을 강력히 권한다. 변태로 매장당하고 싶지 않다면. 20세기에 마광수가 있었다면 21세기에는 최경태가 있다고 할까. 아니 비교조차 할 수 없지, 그의 그림 앞에서는 마광수조차도 얌전한 모범생으로 보일 지경이니까. 그가 표현했던 소재들은 사회적 통념이나 규범을 훨씬 뛰어넘어 있었다. 오죽하면 표현의 자유를 금과옥조처럼 떠받드는 미술계에서도 찬반 여론이 첨예하게 대립했을까.  

1957년에 태어나 뒤늦게 미대를 졸업한 그가 민중화가로 제대로 활동해 보기도 전에 군부정권은 무너졌고 운동권의 시대 역시 막을 내렸다. 동시에 함께 연대하며 투쟁했던 사람들은 시나브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민주화 운동 경력을 스펙으로 삼아 출세 가도에 나섰고 어떤 이들은 일상으로 돌아가 집과 차를 샀다, 그리고 민중화가 노선의 막차를 탄 그만 덩그러니 남아 붓을 들었다 조각칼을 들었다 하며 방황하다 칩거를 시작했다. 그렇게 4년간 웅크려있다 새 밀레니엄이 시작되자마자 그는 세상으로 다시 뛰쳐나왔다. 헐벗은 소녀들과 함께.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가장 센세이셔널 한 포르노그래피 작가는 이렇게 탄생했다.

민중예술에서 포르노그래피로 급격히 전향한 그 배경을 두고 많은 평론가들이 다양한 해석을 덧붙였지만 그는 자신의 변신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 나라에서 화가에게 하지 말라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김일성을 그리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포르노를 그리는 것이었다고. 그리고 전자의 시대가 끝났기에 그는 후자를 택했다고. 작가는 "그래, 나는 포르노가 좋다"라고 외치며 엄청나게 센세이셔널한 작품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보고 있노라면 마광수 따위는 수줍은 새색시같이 느껴지는 그런 작품들을. 그러면서도 그는 사회와 정치를 향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김영삼이 3당 합당으로 대통령선거에 나서자 그는 김영삼의 선거 포스터와 포르노 사진들을 합성해 색정시대라는 작품을 내놓았고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을 당했던 해에는 하체를 노출한 채 다리를 벌린 여성을 작게 그려 넣고 큰 글씨로 "씹새끼들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 가결"이라고 적은 작품을 그렸다. 또 다른 작품에선 개 목걸이를 목에 걸고 팔걸이의자에 교복 차림으로 앉은 여학생의 이미지 위에 "우파 정당 한나라당은 자폭하라"라는 구호를 크게 적어 넣었다.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 공권력이 일일히 정해주던 시대를 살아온 그에게 포르노그래피란 나는 내가 꼴리는 대로 살겠다는 정치적 반항과 저항의 도구와도 같았다.

그는 결국 2001년 개인전을 연 후 음화전시 혐의로 기소되었다. 항소를 거쳐 대법원까지 간 끝에 그는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그의 작품 31점이 압수되어 소각되었다. 당시 그의 전시회 타이틀이 "여고생-포르노그라피2"였으니, 입버릇처럼 표현의 자유를 외치던 미술계와 평론가들조차도 둘로 나뉘어 격렬한 논쟁을 벌일만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 덕분에 최경태 작가는 가장 유명한 포르노그래피 작가가 되었고 이후에도 그는 서정적이면서도 폭력적이고, 도발적이며 변태라고 불릴만큼 센세이셔널한 그 작품세계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한 동료 작가는 그를 두고 이렇게 평가했다고 한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쭉 한결같이 개기는 건 (최)경태 뿐이야"

최경태 작가가 유죄판결을 받은 지 대략 20년이 지났다. 마지막 군사정권의 수장도 죽었고 공권력의 검열과 탄압은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한지 오래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사회는 더욱 자유롭고 관대하게 변했을까. 잊힌 이 작가의 옛 작품들을 다시금 둘러보고 있노라면 불편한 현실을 깨닫는다. 더 이상 자를 들고 치마 길이를 재는 경찰은 없지만 익명성 뒤에 숨어 남의 옷차림을 재단하고 린치를 가하는 인터넷 자경단의 숫자와 영향력은 전례 없이 커졌다. 국민들의 사상을 검열하고 주입하던 이들은 모두 죽고 없지만 이제 우리는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핑계로 서로가 서로를 단속하고 검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거기에 위화감을 한가득 끼얹은 것은 한때 작가와 연대하며 공권력에 대항하던 운동권 정치인들의 오늘날 모습일 것이다. 작가가 21세기에도 숨가쁘게 표현의 자유를 외치며 공권력에 뻐큐를 날리는 동안 586, 아니 이제 686 정치인들은 권위주의로 무장하고 자신들이 몰아냈던 권력자들이 했던 것과 똑같이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법안을 지지하고 사회적 린치를 조장하며 성적 폭력을 묵인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작가는 억압당하는 민중을 강간당한 여성들로 표현했는데, 그 작가를 지지한다면서 동시에 실제로 어린 여성들의 속옷 안에 손을 쑤셔 넣기에 바빴던 정치/문화계 진보 인사들의 민낯들은 이 아이러니의 표상 그 자체였다. 

그래서일까. 자칭 진보적이라 자처하던 사람들이 헤게모니를 잡아 더욱 억압적인 사회를 만들었던 그 시점에 작가는 창작의 의욕을 잃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꼴려야 그릴 수 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라고 토로했다. 2021년 2월 어느 날, 곡기를 끊고 막걸리만으로 연명하던 그는 차가운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표현의 자유가 무엇이고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지, 그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누구고 또 그 경계는 누가 정하는 것인지. 온갖 질문들을 던지고 억압자들에게 꼴리는 대로 뻐큐를 날리던, 가장 센세이셔널 했던 작가 최경태는 그렇게 우리의 곁을 떠났다.  


기자: 포르노가 더 이상 불법이 아니고 성적인 측면에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다면 작가님은 더 이상 (여고생을) 그리지 않는다는 것인가요?

작가: 예, 그리지 않을 겁니다.


2008년 Adarashi Fantasy전시 작 중에서. 
(그나마 덜 센세이셔널한 작품)


2024. 2. 9.

청진기와 6펜스, 그리고 아비트라지

병에 걸린 한 남자가 신에게 애원하며 이렇게 빌었다고 한다. '하나님 이 병에서 낫게 해주신다면 집을 팔아 그 돈을 모두 바치겠습니다' 얼마 안 가 그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고 그는 건강을 회복했다. 그러자 남자는 갑자기 거액의 돈을 기부하기가 아까워졌다. 못된 생각을 하면서도 신의 벌을 받기가 두려웠던 그는 다음과 같은 꾀를 내었다. 바로 매수자에게 그 집을 시세의 1/100에 불과한 금화 한 닢에 파는 대신, 기르던 고양이 한 마리를 금화 99개에 사야 한다는 조건을 다는 것. 매수자는 상기된 표정으로 기괴한 소리를 꺼내는 집 주인과 거래하는 것이 꺼림직했지만 그래도 원하던 집을 시세보다 약간 싸게 사는지라 이 계약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집을 판 그 남자는 신이 나 교회로 달려가 금화 한 닢을 바치고 이렇게 말했다. '전 약속대로 집 판 돈을 모두 바쳤습니다 하나님' 

트레이더라면 여기서 훌륭한 아비트라지의 기회를 포착할 것이다. 고양이와 집의 가격은 반드시 왜곡될 것이니까.* 그런데 우리 현실에도 이런 기괴한 거래가 진짜로 존재한다고 한다. 바로 대한민국의 의료시장. 우리나라의 병원에서 필수의료는 바로 집이 되고, 반복된 보험진료나 비보험 항목은 고양이가 된다. 이 시스템을 이해하려면 보험과 비보험이 어떻게 다른지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건강보험 시스템은 모든 의료 행위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보험과 비보험. 필수적인 의료 서비스는 보험으로 분류하여 나라가 일방적으로 가격을 정하지만 꼭 필요하지 않은 서비스인 미용/성형 등은 비보험으로 분류하여 병원이 자율적으로 가격을 정할 수 있다. 보험으로 분류된 의료 서비스는 국민건강보험 재정에서 그 비용을 부담하는데 대략 70-80%를 보험에서 부담하고, 치료를 받은 개인은 나머지 20-30%를 낸다. 이 비율은 몇몇 항목의 경우 10% 미만에 불과한 경우도 있다.  

엄격한 고정가격제를 도입하는 여느 시장이 그렇듯이 의료시장에서도 가격의 왜곡으로 인한 문제점이 발생한다. 보험 진료는 복지의 성격을 띠기 때문에 개인이 부담하는 비중이 극히 낮은데, 심지어 그 가격조차도 비용의 대부분을 지불하는 정부가 정하므로** 보험 진료의 수가는 늘 과도하게 낮다. 따라서 필수적인 진료를 보는 병원은 다음 두 가지 행위로 손실을 보전해야 한다. 하나는 추가 비용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 보험 진료를 대량으로 하거나, 임의로 가격을 책정할 수 있는 비보험 진료를 끼워 파는 것. 집을 싸게 팔면서 망하지 않으려면 고양이도 비싸게 팔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환자도 이 시스템에 만족했다. 다른 나라였다면 약 10-15만 원어치 청구서를 받았을 진료를 단돈 만 원으로 받을 수 있으니 안 갈 이유가 없다. 목이 칼칼해서, 콧물이 나서, 그냥 회사가 가기 싫어서, 등 오만가지 이유로 한국인들은 병원으로 달려간다. 안 가는 것이 바보다. 구체적 사례를 살펴보면 더욱 이해가 쉽다, 2017년 이전 시장에서 결정된 MRI 촬영의 비급여 가격은 대략 60-70만 원 선이었다. 하지만 2018년 MRI를 보험 진료로 포함하자 심평원은 해당 진료행위의 가격을 약 27-29만 원으로 고정했고, 그중 환자가 직접 내는 금액을 그 절반도 되지 않는 8-17만 원으로 책정했다. 가격이 내려가면 수요량은 증가한다. 2017년 140만 건에 불과하던 MRI 촬영 건수는 코로나로 병원 이용이 어려운 2020년에도 무려 354만 건으로 폭증했고 이에 따라 MRI‧초음파 검사 진료비 역시 2018년 1,891억 원에서 2021년 1조 8,476억 원 10배 가까이 뛰었다.

그렇게 병원과 환자의 이해관계가 맞아 수요공급 곡선은 새로운 평형점에 도달했다. 한국인들의 연간 진료 횟수가 OCED 평균 대비 약 2.5배에 달하는 수준에서. 그렇다면 그 비용은 누가 지불하고 있을까? 바로 건강보험료였다. 공공기금이 고양이를 비싸게 사주니 집을 싸게 파는 의사도 집을 싸게 사는 환자도 모두가 만족하며 미소 짓는 것이 대한민국 의료시스템의 본질이다. 

그런데 이렇게 어찌어찌 해서 어영부영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던 이 기형적 시스템이 갑자기 붕괴하기 시작했다. 문재인케어로 보험의 영역이 급속히 확장되자 흑자를 기록하던 건강보험이 갑자기 큰 폭의 적자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이조차도 정부가 물가 상승률을 훨씬 상회하는 속도로 건강보험률을 올린 결과다. 이렇게 막대한 지출에도 불과하고 시민들은 병원을 이용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언제부턴가 대학병원 응급실은 환자들을 돌려보내기 시작했고, 엄마들은 백화점의 샤넬 매장 대신 소아과를 향해 오픈런을 뛰기 시작했으며, 동네에선 미용이 아닌 진짜 피부과 진료를 하는 병원들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참고로 동기간 경제활동 인구가 계속 증가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고령화로 인한 영향은 이에 본격적으로 반영되지도 않았다) 그렇다, 대한민국의 의료시스템은 잘못되어 있다

정부와 대중들은 의사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주장하지만 나는 그 주장에 의문을 품는다. 물론 한국의 국민당 의사 수는 OECD 평균보다 낮으니 다소 늘어나야 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수치는 10년 전에 비하면 다른 나라들보다 빠르게 개선되고 있고, 특히 서울의 경우 의사들의 수는 OECD 평균보다도 훨씬 높은데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느끼는 의료 서비스의 질은 과거보다 악화되었으며 그 추세는 서울이라고 다르지 않다. 따라서 문제의 원인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의사의 수가 부족하기보다 그 배분이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 두 가지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2024년 의료수가 인상률
첫 번째로 의료 수가의 왜곡이 커졌다. 이전부터 한국의 의료 수가는 다른 나라들보다 크게 낮았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지속적으로 물가 상승률, 혹은 병원을 운용하는데 필수적인 월세나 최저임금이 오르는 속도에 비해 수가는 현격하게 천천히 인상되었고 이 불균형은 매해 지속적으로 누적되었다. 특히 2021년 이후 기록적인 물가 상승률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의료 수가를 낮게 유지해 이 왜곡은 더더욱 커졌다. 따라서 의료시장의 참가자들은 필수진료의 수익성이 개선되기는 커녕 점점 더 악화될 것이라 예측했을 것이고, 따라서 병원의 경영진은 응급실이나 외과와 같은 필수의료에 대한 투자를 줄였을 것이다. 이런 그들의 결정은 지극히 합리적이다. 고양이를 끼워파는 집의 가격이 적정 가격보다 낮을수록 고양이는 반드시 비싸져야 하고, 그를 비싸게 사는 기금은 더욱 빠르게 고갈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괴리가 커질수록 사람들은 고양이를 거래하지, 집을 거래하지 않는다. 

두 번째는 미용시장의 급격한 성장을 들 수 있다. 미용시장의 수요는 국내뿐 아니라 관광객을 통해 국외에서도 빠르게 유입되고 있어 기존 시장의 의료 인력을 빠르게 빨아들이고 있다. 게다가 미용시장의 경우 대부분의 진료가 시장가격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집-고양이 문제의 영향을 적게 받는다. 그 결과 지난 몇 년간 필수진료과에서 이탈하는 의사들의 숫자가 빠르게 늘어나 이제 약 1/4에 달하는 의사들이 미용 혹은 연관 업종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현재 의료시장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 두 가지 사안을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첫 번째 문제는 의료 수가를 시장가격에 맞게 재조정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고, 두 번째 문제의 경우 미용시장을 의사 외 다른 의료인들에게 일부 개방하면 된다. 의사들은 의사가 아닌 의료인이 미용기기를 다룰 때 발생할 수 있는 잠재적 부작용을 우려하지만, 지금처럼 필수의료과에서 의사가 급격히 유출될 때 발생하는 부작용이 더 크지 않은가. 따라서 다른 나라들처럼 미용시장을 일부 개방하는 것이 적은 사회적 비용으로 더 큰 부작용을 방지하는 방안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 의대 정원을 늘리는 것은 빨라야 10년 후에 영향을 미치지만 이 방안들은 즉각적으로 의료시장의 구멍을 보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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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된 수가를 방치하면서 급격히 성장하는 미용 의사의 수요를 일반 의사의 공급으로 대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고양이/미용 의사와 필수의료 의사 간의 격차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추가로 공급되는 의사는 대부분 고양이/미용 의사로 빠진다. 이는 순수 필수의료만 담당하는 대학병원의 응급의학과 전공의 모집률이 매년 빠르게 하락하는 현실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현상은 고양이 의사가 더 이상 빼 먹을 것이 없거나, 혹은 미용시장의 공급이 포화되어 비급여 수가가 빠르게 하락하는 시점까지 지속될 것이다. 그런데 전자의 경우 건보재정의 파탄을 의미하고, 후자의 경우 미용시장의 수요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어 좀처럼 포화에 이르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필수의료 서비스의 수가와 자가 부담률을 높이고 낮은 난이도의 미용시술의 의사가 아닌 의료진에게 개방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현재의 시스템에서 단순히 의사만 늘린다고 의료 서비스의 소비자들이 만족하지 못할 것이라는 실증적 증거도 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서울의 인구 천 명당 의사의 수는 3.6명으로 OECD 평균을 상회하고 여기에 한의사까지 포함할 경우 4.1명으로 OCED 내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하게 된다. 여기에 인구밀도까지 고려하면 서울의 의료접근성은 가장 높은 수준임을 시사하는데, 이는 별다른 예약 없이도 대부분의 진료과에서 예약 없이 병원을 찾아갈 수 있다는 우리의 경험과도 일치한다.
그렇다면 서울시민들은 의사의 수가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할까? 그렇지 않다. 의대 증원을 지지하는 서울시민들의 비율은 84.1%로 전국 평균 84.3%과 별 차이가 없었고 오히려 인구 천 명당 의사 수가 가장 부족한 충청이나 세종, 강원이나 제주보다도 높았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의 천 명당 의사의 수는 OECD 평균 보다 빠르게 증가하는데 반해(+13% vs +8%) 같은 기간 의사의 수를 늘려야 한다는 여론은 낮아지기는커녕 되려 크게 높아졌다.(84% vs 69%) 이는 시민들이 느끼는 의료 시스템의 공백이 단순히 의사의 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질에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빠르게 늘린 의사들의 수가 지방의 의료공백을 메워 전국 모든 지자체의 의사 수가 서울과 비슷해진다고 해도 국민들은 여전히 의료 서비스의 불만을 가질 것이다. 지금 서울 시민들이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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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의대 증원을 반대하지 않는다. 어쩌면 의료인의 수가 좀 더 늘어나는 것이 합리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로 당장 정원의 2/3을 늘려야 할 정도로 의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그 부족을 여실히 느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과들은 우리가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으며 아주 소수의 과를 제외하고는 예약조차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정말 응급한 상황에서 의료 서비스를 찾을 때가 되어서야 우리는 그 부족을 느낀다. 응급실에서, 대학병원에서, 그리고 수술실에서. 정상적인 시장 상황이라면 우리는 얼굴에 울쎄라 써마지를 받을 때보다 응급실이나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을 때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할 것이다. 하지만 국가가 설계한 이 의료시스템은 정확하게 반대로 작동한다. 이 경우를 우리 금융인들은 시장이 왜곡되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대개 가격이 엄격하게 통제된 시장에서 나타난다.

인위적인 가격통제로 인해 경제주체들이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은 대한민국에서 매우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다. 비슷한 사례로 한국전력을 들 수 있다. 지난 몇 년간 전력 생산단가는 급격히 상승했지만 공급가격이 통제되어 있어 한전은 매년 기록적인 수준의 적자를 내야 했다. 이 구조에서 양적완화를 한다고 해서 한전의 시총이 삼성전자만큼 커지지 않는다, 전력회사의 숫자를 늘린다고 적자가 해소되는 일 역시 발생하지 않는다. 이 회사의 주가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왜곡된 가격을 바로잡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매일 퇴행하는 의료시스템의 저변에는 왜곡된 의료수가가 있다. 이 왜곡된 가격이 존재하는 한,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의사들은 필수의료 대신 피부미용과 고양이를 파는 의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의사의 수를 늘린다고 해서 그 격차는 결코 줄어들 수 없다. 

서머셋 몸은 고갱을 모티프로 하여 달과 6펜스라는 소설을 썼다. 여기에서 달은 이상의 세계를 의미하고 6펜스는 세속의 현실 세계를 의미한다. 소설에서 한때 주식 브로커였던 찰스 스트릭랜드는 6펜스를 버리고 달을 찾아 타히티까지 찾아갔지만 거기에서 나병에 걸렸다. 죽어가는 삶의 마지막 기간 동안 그는 영혼을 쏟아부어서 최후의 걸작을 그리지만, 완성된 그림은 그의 죽음과 함께 잿더미로 사라지고 만다. 한국의 의료시스템은 필수 의료를 담당하는 의료진들에게 스트릭랜드 처럼 6펜스 따위는 잊어버리고 달을 쫓아 청진기를 들고 타히티만큼 외진 바이탈과 수술실로 향하라고 한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는 스트릭랜드 같은 괴짜나 슈바이처 같이 고결한 사람은 몇 없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6펜스를 찾아 고양이와 미용의 세계로 떠났다. 일부 사람들은 왜 의료계에는 청진기를 들고 달을 바라보는 스트릭랜드가 없냐며 의사들의 도덕성을 비난한다. 하지만 내 눈에 그들의 도덕성에는 별문제가 없다. 마치 아비트라지 기회를 포착한 트레이더들이 최대한의 수익을 내기 위한 합리적 선택을 하는 것처럼 그들도 마찬가지의 경제적 판단을 내렸을 뿐이다. 만약 그들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면 70만 원짜리 MRI를 남의 돈으로 공짜로 찍는 시스템을 박수 치고 찬성하는 일반 대중의 도덕성 역시 지탄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환자를 살리는 의료 행위에 낮은 수가를 책정한 이 시스템이야 말로 가장 사악한 악마라는 것이다. 



*집을 팔려는 사람들은 반드시 고양이를 구해야 한다, 집을 사려는 사람들은 늘 고양이를 팔고 싶어한다. 따라서 둘이 지불하는 고양이의 가격은 반드시 벌어지게 된다. 이 때 집을 팔려는 사람과 집을 사려는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고양이를 사고파는 계약을 맺는다면 그는 아무런 위험부담 없이 수익을 얻을 수 있다.

**엄밀히 말해 가격을 부담하는 것은 건강보험공단이고 가격을 정하는 것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지만 둘 다 정부의 일부인 보건복지부의 관할이다.




2024. 2. 5.

신과 함께, 그리고 정의와 함께

태초로부터 정의(Justice)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철학의 가장 중요한 물음 중 하나였다. 그리고 최초의 사상가들과 철학자들이 등장한 이후 몇천 년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의를 선과 악이라는 절대적이고 이분법적인 개념으로 구별해왔다. 선한 존재가 행하는 것이 곧 정의이며, 또 그 존재는 정의를 행하기 때문에 선하다는 것. 따라서 정의를 논하는 것은 어떤 것이 더 신의 뜻에 더 맞는지를 논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태생적으로 태고의 철학은 종교와 가까이 맞닿아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신과 그의 대리인들이 다스리던 세계가 붕괴한 이후 인간 중심의 세계관이 문명의 주류로 자리 잡자 사람들은 시대에 맞는 새로운 관념을 찾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선악의 개념을 버리고 자신들의 편리와 행복을 정의의 기준을 삼기 시작했다. 이렇게 퍼지기 시작한 공리주의는 구성원들의 행복의 합을 극대화하는 것이 정의의 기준이라는 원칙을 내세웠다. 이는 18세기 말 당시 퍼지기 시작하던 자본주의적 가치관과도 대체로 일치했기에 서구사회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20세기 초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사람들은 서구사회의 한계를 경험했고 동시에 공리주의가 온전한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문제점 역시 깨달았다. 가장 유명한 공리주의자, 제러미 벤담의 경우 사회 전체의 행복을 개선하기 위해 소수의 불량배나 부랑아들을 가둘 수용소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는데, 이런 사회시스템은 가장 극적으로 구현한 것이 바로 나치였다. 국가권력을 장악한 그들은 한 명의 장애인을 보조하는데 사회적 비용이 과도하게 지출되기 때문에 그를 제거하는 것이 다수의 행복을 증진시킨다고 생각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그렇게 독일이 지배하던 유럽 전역의 소각로에서는 수도 없이 많은 장애인들과 정신질환자들, 동성애자들이 불타며 비누와 카펫, 그리고 한 줌의 재로 사라지고 말았다.

번역: 한 명의 유전병 환자를 위해 국가는 매일 5,50마르크의 비용을 지불한다
/ 그 5,50마르크는 한 건강한 가족이 하루를 살 수 있는 돈

전후 정의에 대한 논쟁은 이런 시대적 배경으로부터 출발했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도 했던 존 롤스는 해묵고 비틀린 공리주의 파편 위에 몇 가지 원칙을 재정비하여 새로운 정의론을 완성했다. 그는 정의의 개념에 무지의 베일이라는 일종의 사고실험을 도입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천국에서 한데 모여 회의를 연다고 가정하자, 그들은 자신이 부자로 태어날지 혹은 가난한 구두공의 아들로, 아니면 자폐인으로 태어날지 알 지 못한다. 어떤 사회적 지위나 배경을 가질지 모르는 상태에서 사회구성원들이 동의할 수 있는 시스템이 정의롭다는 것이다. 그의 정의론을 대입한다면 공리주의적 관점으로 장애인을 학살하던 나치의 사회시스템은 정의롭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태어나기 전 무지의 베일 상태에 있었다면 장애인으로 태어나 학살당할 수도 있는 그 시스템에 합의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는 이론이 아닌, 우리가 본능적으로 느끼는 잣대이기도 하다. 호모 사피엔스가 신이라는 존재를 창조하기도 전에 영장류들은 흑과 백, 선과 악, 아와 비아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철학자들이 공리주의라는 개념을 도입하기 전부터 사회적 동물인 우리는 개인이 아닌 공동체의 이해득실을 따져가며 규범을 마련했다. 롤스가 태어나기 전에도 인간은 공감능력을 발휘해 수천 년, 혹은 수만 년 동안 장애를 가진 개체들을 돌보고 먹여 살렸다. 철학자들이 발견하고 정의 내리기 한참 전부터 이 잣대들은 우리의 본능에 내재되어 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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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장애인 자식을 가진 한 유명인이 촉발시킨 논쟁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본능적으로 느끼는 정의의 기준과 그의 해명이 상충하기 때문이다. 당사자들과 그 추종자들은 해당 사건을 철저하게 흑백의 관점으로 끌어내리려 한다. 상대가 유죄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나쁜 사람이며, 따라서 내가 행하는 것은 정의롭다. 선 혹은 악 만이 존재할 수 있는 이진법의 세계에서 나의 정당함을 입증하는 것은 곧 상대의 불의를 증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유명인이 선고가 나온 바로 그날 대중에서 자신의 입장을 공개한 것은 해당 교사의 유죄판결이 곧 자신의 무죄판결과 동일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우리의 세상은 0과 1로만 이루어진 곳이 아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그 둘에게만 국한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 유명인은 언어폭력을 저지른 교사를 교육계에서 퇴출시켰기에 자신의 행동이 정당했다고 믿겠지만 동시에 그는 여러 장애우들과 그 부모들에게서 헌신적인 태도로 일하던 유능한 교사를 앗아갔다. 그는 장애를 가진 자신의 아들을 일반 학급에 편입하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는데, 그 결과 다수의 아이들이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덩치도 더 큰 자폐아에게 폭행을 당했다. 그리고 본인의 해명에 따르면 이런 일은 새 학교에서도 반복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의 공리주의적 본능은 그의 행동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무지의 베일 뒤에서도 이 불편한 기분은 가시지 않는다. 설령 우리의 아이가 자폐아로 태어난다고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멀쩡한 아이들이 그에게 지속적으로 얻어맞거나 노출된 성기를 보고 트라우마를 가지는 시스템에 찬성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옳지 못하다. 내가 설령 장애인으로 태어났어도 그런 제도는 옳지 못한 것이다. 그와 그의 아내는 자신의 아이에게 장애가 있기 때문에 학교와 사회 전체에게 무제한적인 이해와 인내를 요구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무제한의 인내는 부모조차도 보여줄 수 없다. 입장을 바꾸어 아들이 자기보다 더 나이가 많고, 더 힘이 세고, 더 자폐가 심한 학우들과 같은 반이 되어 폭행을 당할 때에도 그들은 자녀의 고통을 인내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런 요구는 매우 이기적이고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그의 작품들을 좋아한다. 그가 창작한 등장인물들은 매우 단순했다. 나쁜 놈은 나쁘고 착한 놈은 무슨 짓을 벌이더라도 결국 착하게 끝난다. 그래서 그럴까. 그는 이 복잡한 사람들이 다양한 사안으로 얽힌 이 문제를 자꾸 선악이라는 이진법적 시각으로 접근한다. 상대는 유죄판결을 받은 죄인이고 그를 상대하는 나는 엄청난 고통을 받았다고. 물론 나는 발달장애를 겪는 아들을 가진 그의 아픔과 상처에 공감한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보다 덩치가 큰 자폐아에게 맞아야 했던 아이들과, 그 성기를 보고 놀랐을 여자아이들과, 소송에 시달리며 폭력 교사라는 자괴감에 시달렸을 선생과, 따르던 선생님을 잃고 덩그러니 놓인 다른 장애우들과 또 그들을 눈물로 보살피며 탄원서를 쓰던 다른 부모들에게도 공감한다. 그렇기에 나는 안타까운 그의 결정과 행동을 비판할 수밖에 없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신이나 다름없는 것처럼 아이들 역시 부모에게는 신일 것이다. 장애가 있는 아이라면 더더욱. 세상 모두가 야훼에게서 등을 돌려도 아브라함이 그래서는 안 되는 것처럼 부모와 아이의 관계도 그럴 것이다. 그야말로 신과 함께.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신은 정의롭지 않다. 더욱이 그 아이가 상처입히고 괴롭히는 이들도 누군가에게 소중한 신 아니었던가. 자식을 신처럼 여기며 편들어 주겠다는 아비의 부정을 누가 뭐라 하겠나, 다만 정의까지도 알뜰살뜰 챙기겠다는 그의 무모한 이기심과 과도한 욕심에 혀를 끌끌 찰 뿐이지. 

2024. 2. 4.

코리아 디스카운트와 죽지도 않고 또 온 각설이

2014년 7월 박근혜 행정부의 경제 구원투수로 등장한 정치인 출신의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곧바로 기업의 사내유보금에 새로이 과세를 하겠다는 정책을 내놓았다. 당시 주요 대기업들은 투자도 배당도 하지 않으면서 사내에 과도한 현금을 쌓아두고 있었는데 이와 같은 정책은 두 가지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예측되었다. 하나는 거시경제적으로 기업들이 보유한 잉여 현금이 이전되는 과정에서 정부는 추가 세수를 확보하면서도 투자와 소비가 증가할 것이었고, 재무와 가치평가 측면에서는 기업들이 비합리적인 현금보유성향*이 지나치게 쌓아두는 것이야말로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기 때문에 한국 주식이 재평가될 수 있다는 기대가 고개를 들었다. 

그 후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사라졌을까. 바로 이듬해 한 건설회사와 의류회사가 합병하면 시너지가 날 것이라는 주장과 함께 회사를 합쳤고, 최경환을 등용한 청와대는 여전히 기업들에 낙하산 인사들을 내려보내고 영향력을 행사하다 그중 몇몇이 유죄판결을 받고 구속되었다. 정권이 바뀌고 나서도 뒤가 구린 신주배정과 전환사채의 발행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기존 주주들의 이익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기형적인 물적분할과 기업공개는 봇물 터지듯이 이어졌다. 그 중 가장 무분별하게 분할과 공개에 나섰던 몇몇 회사들의 오너들은 뻔뻔하게도 자신들이 대한민국의 기업인들을 대표한다며 대중들에게 얼굴을 드리밀고 있다. 정상적인 주주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에서는 그 대신 머그샷을 찍었어야 할 바로 그 사람들이.  

그로부터 10년 뒤, 정부는 또다시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겠다며 PBR이 1.0이하인 기업들에게 적극적인 주주환원 조치를 요구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고 있다. 절름발이 자본시장에서 고전하던 투자자들은 오랫동안 기다려오던 그 조치들을 반기며 매수 버튼을 두들기고 있지만 과연 올해는 이 지긋지긋한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과거의 유물이 되는 원년이 될 수 있을까. 오랫동안 감언이설에 속아 온 우리는 기대와 회의가 뒤섞인 복잡한 심경으로 이를 지켜보고 있다.

지난 몇몇 글에서 한국 주식들이 제값을 받지 못하는 주요 원인들로 기형적 지배 구조와 비정상적 상속세를 비판했다. 하지만 이 어마어마한 주식 할인 파티의 주범이 어찌 둘뿐이겠는가. 그 세 번째 독 사과는 바로 업종과 분야를 가리지 않는 관치의 DNA를 들 수 있다. 따라서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영구적으로 해소될 수 있는지는 이 세 가지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 재벌들의 잘못된 거버넌스와 상속세는 법률을 보완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현 행정부와 여당은 현 국회 회기 내내 손가락이나 빨면서 놀다가 막판에 개고기 법안이나 통과시키는 것으로 21대 국회의 임기를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선거를 앞두고 황급히 주식시장 저평가 대책 방안을 발표하겠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지만 정작 우려되는 것은 이 정부의 대안이라는 것이 관이 민간의 의사결정에 더욱 깊숙이 개입하는, 즉 관치를 강화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 현상은 특히 금융주에서 두드러진다. 한국의 금융사들, 특히 금융 지주사들이 낮은 PBR를 가진 이유는 이 관치가 가장 만연한 업종이 바로 금융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모든 정부는 금융사들의 영업형태부터 순이익, 배당, 인사, 성과금 등 전분야에 걸쳐 무제한적 개입을 일삼았다. 밀턴 프리드먼의 저서를 읽고 시장경제를 존중한다는 현 정부라고 해서 달라진 것은 조금도 없었다. 어떤 면에서는 지난 정부보다 그 개입의 정도가 더 심해지기도 했다. 나 역시 현 정부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미개하고 무분별한 금융정책을 지적했고, 보수언론들 역시 여러 차례 윤석열 정부의 반시장적 행태를 비판한 바 있다.(링크1 링크2 링크3) 관이 제 입맛대로 민간의 팔을 비틀어 생긴 디스카운트를, 다시금 팔을 반대로 비틀어 해소하겠다는 발상은 우매하면서도 우스꽝스럽다.  

현 정부는 출범 당시 코스피를 MSCI 선진국 지수에 편입하는 것을 국정과제 중 하나로 삼았다. 아마도 총선 전에 그 목표를 달성해서 자신의 업적으로 내세우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그런 야심찬 계획은 난관에 부딪쳤고 대신 정부는 난데없이 공매도를 전면 금지하는 삽질을 터뜨려 한국의 금융시장이 왜 여전히 후진국으로 분류되는지 세계 투자자들에게 몸소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고개를 돌려 올바른 관치금융으로 관치금융의 저평가를 해소하겠다는 정부24판 피식 쇼를 벌이고 있다. 잊을 때만 되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거지 떼처럼 그들은 깡통을 두드리며 이번에는 믿어주십쇼를 외치지만, 우리는 그들의 말이 아니라 행동을 보아야 한다. 여당이 추진하는 상법 개정안은 여전히 주주 비례의 원칙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여러 물적분할과 주식공개를 막지 못할 것이고, 지지리도 인기 없는 대통령실은 상속세를 개편할 정치력이 없으며, 출신 학교와 기수를 따져가며 퇴임 후 낙하산 자리만 학수고대하는 세종시 공수부대들은 관치를 그만 둘 생각이 전혀 없다. 그렇게 정부와 관료들은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단순한 방조범이 아닌 공동정범이 되었다. 따라서 나는 당분간 인기를 끌 이 각설이 쇼가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의 원년이 될 것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10년 전의 각설이들이 그러하였듯이.   

하지만 이를 회의적으로 볼 일만은 아니다. 코로나 이후 개인 주식투자자들의 수는 크게 증가하였고, 이후 몇 차례의 문제적 유상증자와 주식공개를 통해 유권자들은 자신들의 주주 가치가 어떻게 훼손되고 있는지 여실히 경험했다. 그로 인해 주주비례의 원칙을 제도적으로 보전해달라는 대중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고 따라서 지난 대선에서 여당과 야당은 모두 이를 공약으로 내세워야 했다. 그런 적이 또 있던가. 지금의 대통령실과 관료들은 어설픈 품바쇼로 그러한 요구를 적당히 다독이고 넘기려 하지만 유권자들은 진정으로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할 제도와 법의 개선을 요구할 것이다. 나는 그 날이 머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번이 아니라면 다음에서라도.   

2010년 이후 KOSPI PBR


2024. 1. 20.

재벌로 태어나서, 그리고 개고기로 태어나서.

재벌로 태어나서

다음은 실제로 대한민국의 상장사들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1 A 회사는 오너의 자녀들에게 승계를 진행하던 기간에 아무런 신제품이나 사업전략을 내놓지 않았다. 같은 기간 해당 산업은 커다란 지각변동을 겪고 있었는데, 그 중요한 시점에 A사는 5년 여가 넘는 시간 동안 아무런 전략을 발표하지 않았고, 당연히 기업의 실적과 주가는 곤두박질쳤다. 해당 회사가 정상적 영업을 재개한 것은 공교롭게도 승계가 마무리된 다음이었고 이후 A사는 공격적인 마케팅과 신제품 출시를 통해 이전의 실적과 주가를 회복했다.

#2 B 회사의 여러 사업 부문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B' 사업부문 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 회사는 해당 부문의 영업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고 따라서 회사 전체 실적도 크게 감소했다. 심지어 업계에는 B사가 이 분야의 사업을 접을 계획이라는 루머가 돌았지만 B사는 그 루머를 적극적으로 반박하지 않았을뿐더러 세간의 의혹을 증폭시킬 만큼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이후 B사는 2세의 승계에서 핵심적인 연결고리가 되었고 승계 이후 정상적인 영업을 재개하였다.

#3 C 회사는 불가피한 사건으로 충당금을 쌓아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는데, 이에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충당금을 발표하여 시장에 충격을 안겼다. 해당 분기에 실적이 크게 개선되었을 거라는 시장의 기대는 여지없이 배신당했고 보수적인 관점을 적용할 때 향후 충당금을 추가적으로 쌓아야 할 수도 있다는 사측의 발표로 인해 주가는 크게 떨어졌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실제 발행한 비용은 그보다 훨씬 작았고 그 사이 승계에 유리한 결정들이 일어났으며 이후 주가는 다시 손실을 회복했다.  

위의 회사들이 어떤 회사들인지 굳이 알아내려고 애를 쓸 필요는 없다. 각각의 사례는 한 회사들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적게는 두셋, 많게는 네다섯 회사들에서 각각 벌어졌던 유사한 사건을 하나로 합친 것이니까. 되려 이런 사례들이 손꼽힐 만큼 드물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아직도 한국 시장을 잘 모르는 것이다. 가업승계에 직면한 한국 회사에 투자할 때에는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는 것은 기초 상식에 가깝다. 기업들의 지배 구조에 가장 정통하고 그 내막을 속속들이 파악하여 수익을 내는 사모펀드나 행동주의 펀드의 리더들이 한  목소리로 상속세 개편을 지적하는 데에는 이와 같은 배경이 있다. 

나는 코리안 디스카운트의 원인이 바로 잘못된 재벌 시스템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 취지의 글을 작성한 지 거의 10년이 지났지만(링크) 시장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재벌들은 소수의 지분 만으로 회사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툭하면 배임과 횡령 혐의가 헤드라인을 장식한다. 그렇다, 아직도 우리는 재벌들이 죽어야 주가가 오르는 나라에 살고 있다. 이 디스카운트의 원인이 재벌들에게 있다는 사실은 명확하지만, 그 해결책을 논의하는 것은 조금 더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상속세율은 OECD 국가들 중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하는데 여러 유럽 국가들이 직계존속에게 가업을 상속할 경우 상당 폭의 세제감면 혜택을 주거나, 미국 등에 트러스트나 재단을 통해 절감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있는데 비해 우리나라에는 그런 제도가 사실상 전무하다. 그렇기 때문에 늘 승계 시즌만 되면 재벌들은 무리해서 배임과 비리를 저지르거나 상속세를 줄이기 위해 주가를 뺄 강한 유인동기가 생긴다. 그 과정 속에서 기업의 지배 구조는 더욱 왜곡되고 재벌들의 이해관계와 회사의 이해는 더욱 벌어지게 되기에, 다음 세대에서도 오너들은 더 강한 비위를 저지를 인센티브를 가진다.

이 시스템을 고치기 위해서는 당근과 채찍을 모두 갖추어야 한다. 위의 상속세 개편을 당근이라면, 채찍은 이사회가 소액주주들을 포함한 주주들의 이익를 보호하도록 상법을 개정하고 처벌을 강화하는 것이다. 채찍만 만들고 당근이 없다면 재벌들은 편법 상속의 이익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강한 형량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비위를 저지를 것이며*, 채찍이 없다면 재벌들은 기존의 편법도 누리고 당근도 사각사각 챙겨 먹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많은 투자자들은 이념으로 나뉘어 둘 중 한 쪽만 지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상속세가 이론적으로 주가에 영향을 줄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수많은 실례들을 애써 무시하고 있고, 또 상법 개정보다 상속세 개편이 중요하다고 믿는 쪽은 상대를 좌파 빨갱이로 몰아가며 논의를 후퇴시키고 있다. 나는 빨갱이도 아니며, 상속받을 회사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다만 몇몇 한국 주식을 보유한 소액주주의 한 사람으로서 상속세와 상법 개정 둘 다 추진하는 것이 내 이익에 부합한다고 생각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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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고기로 태어나서

한승태 작가는 자신의 체험을 담은 노동 에세이, "고기로 태어나서"에서 닭, 돼지, 개와 같은 가축들의 사육, 도축, 유통 과정을 담담하면서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그중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수평아리들을 가득 담은 바구니들은 10단 높이로 쌓았다. 마구잡이로 쌓았기 /때문에 바구니의 층과 층 사이에 끼어 눈이나 내장이 튀어나온 채 죽어있는 병아리들이 즐비했다. 병아리의 눈알은 푸른빛이 도는 검은색에 크기가 손톱만 한데 꼭 눈구멍에 블루베리가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오래 놔두면 깔린 병아리들은 압착기로 모양을 낸 것처럼 커다란 덩어리로 뭉쳐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전히 살아 있는 병아리가 있어서 살덩어리 속 어딘가에서 약하게 삐약대는 소리가 울렸다. 그런 바구니를 뒤집으면 거대한 살덩어리가 마치 스팸 한 캔을 통째로 빼낸 것 같은 모양으로 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구역질 나는 광경이었다. 바닥에는 병아리 한두 마리가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런 녀석들은 껌처럼 납작하게 찌부러져서 피부를 통해 몸속 장기의 윤곽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였다.

또 작가는 돈육 농장에서 일했던 경험을 아래와 같이 묘사한다.

비명에도 차이가 있었다. 사람이 잡아들 땐 비명이라기보다는 여유롭게 도움을 청하는 느낌으로 운다. 꼬리를 자를 때에는 이보다 강렬하지만 잠깐 운다. 자돈들이 가청 주파수의 한계치에 다다를 만큼 소리를 지를 때는 거세할 때다. 거세를 하는 이유는 카스트라토 합창단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웅취라고 부르는 수컷 특유의 비린내를 줄이고 육질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다. 꼬리나 이빨 자르는 돼지를 위해서 필요할 수 있다고 항변해 볼 여지가 조금은 있지만 거세는 오직 고기의 맛을 좋게 하려고 실시한다....수컷은 뒷다리를 옆구리에 붙도록 바싹 당겨 잡으면 항문 아래가 불록 튀어나온다. 작업을 쉽게 하려면 고환이 선명하게 튀어나오도록 손에 힘을 줘야 하는데 이때 힘 조절을 못 하면 거세에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너무 꽉 누르면 안 돼. 그러면 내장 튀어나와. 내장 튀어나오면 끝이야." 팀장은 튀어나온 부위를 11자로 자른 다음 과환을 잡아 뜯어냈다. 붉은색과 보라색이 섞인 이 작은 살덩이는 피자 치즈처럼 길게 늘어났는데 돼지의 비명 소리가 최고조에 이를 때는 바로 이 순간이었다. 자돈은 호두만 한 입을 쩍쩍 벌리고 돈사 밖에서도 들을 수 있을 만큼 소리를 질러댔다. 거세를 마친 자돈은 소독약을 바른 다음 해부학적으로 한결 더 가까워진 자매들 곁으로 돌려보냈다.

다소 그로테스크한 묘사로 가득 찬 그의 에세이는 고기로 태어나 도축되고 가공되어 우리 밥상 위에 오르는 과정이 얼마나 잔인하고 끔찍한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책을 덮은 뒤 아무리 배가 고파도 곧장 황금올리브나 족발(대)를 주문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게 다른 사람들이 BBQ에 전화를 거는 것을 막을 권리가 있을까. 얼마 전 국회가 통과시킨 개고기 특별법이 위험한 이유는 그 논지를 사실상 무한대로 확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경험에 따르면 개 농장과 닭/돼지 농장의 운영방식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돼지는 개만큼이나 지능이 높다, 닭을 도축하는 것은 개를 도축하는 것만큼이나 정서적 충격을 안긴다. 그렇다면 채식주의자들이 모든 고기 특별법을 발의한다면 어떤 근거로 반대할 것인가.

동물주의자들은 개고기를 금지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보편타당한 정의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많은 사례들을 보면 주로 유목 민족의 전통을 가진 사회가 개고기를 터부시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몇몇 문화 인류학자들은 사냥과 목축이 생활의 기반이었던 유목민들에게 개는 필수 자산이었기에 그런 터부가 생긴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흥미롭게도 중국에서도 개고기를 먹지 않기 시작한 시기는 약 6세기로 북방 유목민들이 중원으로 남하한 이후이고 만주족이나 몽골인들 역시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반면 인구밀도가 높고 주기적으로 기근에 시달렸던 농경민족의 경우 개고기를 먹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유럽 역시 인도 아대륙이나 중국, 아메리카 대륙 등에 비해 목축의 비중이 높았기에 자연스럽게 개고기를 꺼리는 문화가 자리 잡은 것 아닌지 추측해 본다.

반대의 경우로 우유가 있다. 유목 민족들은 소나 양의 젖을 먹는 문화에 매우 익숙하지만 농경 중심의 사회에서는 짐승의 젖을 먹는 것을 매우 역겨운 일로 치부했다. 흥미롭게도 이런 경향은 유전적으로도 발현되는데 전통사회에서 개고기를 먹었던 나라들의 경우 대체로 유당불내증을 가진 성인들의 비율이 높은 경우가 많다. 일례로 한국인의 경우 약 75%의 성인은 우유를 마시면 탈이 나곤 한다. 그렇다면 실리적으로, 또 상식적으로도 인간이 짐승의 젖을 빨아먹는 일부터 금지해야 하는 것 아닐까?

결국 개고기 논쟁은 옳고 그름이나 논리의 문제가 아닌 유권자들의 호오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몇몇 문화권은 개고기를 혐오하는 사람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금지한 것이고 그 대상은 문화권에 따라 돼지고기나 소고기, 혹은 생선이나 말이 되기도 한다. 보편적 공감대 아래 특정 생활양식을 금지하는 것은 어디서나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현재 한국 사회에서 개고기 금지법이 사회적 합의에 이르렀는가. 아니다, 이 특별법에 찬성하는 여론은 불과 57%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나는 이를 악법이라고 생각한다. 

상당 기간 국회에서 공전하던 이 법안은 김건희 여사가 해당 법안을 지지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여당이 전향적 태도를 보이며 통과되었다고 한다. 근래 영부인 중에서 가장 젊고 가장 활동적인 커리어를 가진 영부인이 등장하자 사람들은 큰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인기는 곧 추락했다. 물론 본인의 여러 실책도 한몫했겠지만 정상적인 사회라면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악의적 루머가 큰 역할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만약 그녀에게 비리나 문제가 있다면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이전 유력자들을 탈탈 털어 복수하는 한국 정치의 특성 상 그 진실은 몇 년 뒤에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난 그것을 파헤치는 것이 우리 사회가 당면한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여당과 협의해 상법을 개정하는 것보다 개고기 특별법을 통과시킨 일이 더 시급했던가. 또 고작 국민의 57%의 찬성 만으로 온 국민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과연 정당할까. 만약 그것이 옳다면 유권자들에게 개고기보다 부정평가가 더 높은 현 정부는 무엇이 되는가. 또 과반의 지지 만으로 오천만 유권자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옳다면, 부정평가가 60%나 달하는 영부인 한 사람의 자유를 철저히 제한하자고 주장한다면 그때 그들은 무슨 명목으로 반대할 것인가.  




*특히 회사의 경영에 강력하게 개입할 수 있는 오너의 입장에서는 현행법을 우회하여 회사의 값어치를 떨어뜨릴 무궁무진한 방법들이 있다. 애초에 신의를 다한 무능과, 영악하지만 사악한 행동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그러나 대통령은 상법 개정보다 상속세 개정을 설명하는데 훨씬 많은 시간을 할애했기에 논쟁을 촉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