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1. 26.

인간의 마음, 그리고 너의 마음.

인간의 마음은 합리적이진 못해도 매우 논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에게 인간의 마음이 논리적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때때로 행동의 원인이 그 결과로부터 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몇번의 데이트를 거치며 가까워 진 그녀가 갑자기 돌아선 이유는 마지막 저녁식사에서 그가 어떤 실수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전에 그가 자신의 음식 취향을 기억하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실망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응답이 없는 핸드폰을 쥐고 그는 마지막 데이트에서 무엇을 잘못했는지 되짚어보며 술잔을 기울이겠지만, 원인을 발견하지 못한채 인간의 마음은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말 것이다.

*  *  *

모든 사람은 어떤 누군가를 원하기 때문에 그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들을 평생토록 반복한다. 내가 볼 수 없는 다른 이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은 낚시를 하는 일과 같다. 마치 가느다란 낚시대 끝에, 더 가느라단 낚시줄 하나를 드리우고 저 수면 아래 깊은 곳의 물고기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리는 것 같이. 그녀의 마음이 나의 바늘 근처에 있는지, 아니면 무심하게 지나치고 있는지, 혹은 그에 입맞추기 위해 기다리는 중인지 수면 위 만을 쳐다 보는 나는 전혀 알 수가 없다. 그저 낚시줄과 수면이 닿아있는 그 작은 점을 하염없이 응시하며 나의 마음속에 그녀의 마음을 그려볼 뿐.

*  *  *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리고 그로 인해 내가 고통 받는다고 해도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내가 그들을 만나기도 전 부터 그들의 호불호는 정해져 있었으며 나는 단지 그들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아니었을 뿐이다. 그것이 그들의 잘못일 수는 없다. 요는 내가 왜 그들에게 맞는 사람이 아닌가의 문제일 뿐이며, 또 나는 왜 가질 수 없는 것을 욕망하는가의 문제일 뿐이다. 그 댓가가 매우 혹독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인간의 마음은 아마 내가 가장 오랫동안 관심을 가진 분야일 것이다. 십수년 전, 수능을 공부하던 시절에도 나는 프로이트의 저서들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아마도 상대의 마음을, 그리고 나의 마음을 통제하고 싶은 욕망에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15년이 지나도록 나는 타인의 심리는 물론이고 나의 마음마저도 움직이지 못한다. 마치 중학생이 F=ma라는 물리법칙을 배웠다고 해서 공을 골대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듯, 나는 블랙박스 같은 인간의 마음 앞에 여전히 무기력하다. 하지만 아주 조금. 정말 아주 조금 그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마음의 번잡함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감사한다.

2015. 11. 24.

힌덴부르크 오멘

힌덴부르크 오멘은 금융시장의 기술적 분석법 중 가장 끔찍한 폭락을 암시하는 신호이다. 이 시그널 자체가 시장의 붕괴를 예고하다 보니, 역사적으로 고작 십수번밖에 등장하지 않았는데, 그중 대표적인 사례가 1929년의 대공황과 2008 리만사태 직전이었다. 두번 모두 증권시장은 역사에 영원히 남을 만큼의 폭락을 겪었고 수많은 은행원들의 자살을 가져왔다.

이 시그널의 이름은 한 비행선 사고에서 따 온 것이다. 비행기 여행이 대중화 되기 전, 항공운송수단으로 비행선이 이용되었는데 이 때 비행선을 띄우는 기체로 수소가 사용되었다. 쉽게 폭발하는 수소를 한가득 채우고 다녔으니, 작은 불꽃에도 비행선 전체가 폭발하는 사고가 종종 일어났고 그중 가장 끔찍했던 사고가 바로 힌덴부르크호의 사고였다. 1937년 5월 7일 힌덴부르크호가 폭발했고 수많은 탑승자가 사망했다.

힌덴부르크 비행선의 이름은 1차대전 직후 바이마르 공화국(현재의 독일) 대통령이었던 파울 본 힌덴부르크로부터 따 온 것이다. 전쟁영웅이었던 그는 국민의 인기를 바탕으로 대통령 자리에 오른뒤 자신의 통치를 위해 히틀러의 부상을 방치했다.(사실 그는 히틀러가 유일하게 두려워 한 인물이었다) 그가 죽은 후 히틀러는 뉘렌베르크 전당대회, 장검의 밤과 같은 이변을 일으킨 뒤 독일의 지배자가 되고 인류 역사상 최단기간 중 최다인원이 사망하게 되는 세계 2차대전을 일으킨다.

"무기여 잘있어라"로 스타덤에 오른 미국 작가 어네스트 헤밍웨이가 자주 가던 아바나의 바에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남긴 낙서가 있다. 모히또 한 잔을 마시며 수많은 이름들 하나하나를 읽어내려가다 Hindenburg라는 이름을 발견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하르마겟돈이나 라그나로크와 같은 의미로 쓰인다는 것을 알까?

2015. 11. 23.

master

자네는 너무 특이해서 프로페션은 될수 없겠군.

하지만 마스터는 될수 있겠어.

.

-마스터 키튼 중에

2015. 11. 2.

왜 일본은 군국주의로 흐르는가

외교는 결국 전략이다. 그리고 가장 유명한 전략가 손자는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다. 그럼 우리는 대 일본외교에 있어 얼마나 상대를 알고있는가. 우리가 동북아시아의 외교 무대에서 일본을 이기기 위해서는 그들의 동기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16세기 이후, 일본은 단 한번도 한반도 보다 군사적으로(경제적으로도) 열세에 놓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인류 역사에서 수도 없이 반복된 수순에 따라 강대한 일본의 지배자 도요토미는 약한 조선을 침략했고 그로부터 약 300년 뒤 일본은 결국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두 사건은 양국 사이에 깊은 감정의 골을 만들었다. 그러나 개와 원숭이 같았던 두 나라는 화해 할 새도 없이 냉전의 논리아래 강제로 손을 잡을 수 밖에 없었다. 중국과 소련의 위협이 존재하는 한 생존의 문제가 과거의 앙금보다도 중요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불편한 관계의 두 나라의 군사력을 키우면서도 서로 싸울 수 없게 만드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바로 두 나라의 군사력을 비대칭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육군을 육성하고 일본은 해공군을 강화한다면 한국은 일본열도에 상륙할 수가 없고, 일본은 바다에서 한국을 누를 수 있으나 한반도에 상륙시킬 육군이 없다. 따라서 두 나라는 아무리 서로가 미워도 싸울 수가 없다. 하지만 두 나라의 군사력을 합치면 미군의 지원아래 소련이나 중국에 대항할 만한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 미국은 이와 같은 군사적 제한 뿐 아니라 제도적 제한까지 완비했다. 한국군의 작전권은 미군에게 있으니 자체적으로 일본을 침공할 수 없고(혹은 시도하더라도 부대이동과 재배치에 대한 정보가 한일간의 전쟁을 원하지 않는 미군에게 흘러들어갈 수 밖에 없고) 일본은 평화헌법에 의거하여, 전쟁행위 자체를 할 수가 없다. 이렇게 지난 60년간 두 나라의 군사충돌의 길은 실제적으로, 그리고 제도적으로도 막혀있어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가 중동문제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동안 한일 앙국의 균형은 깨지게 되고, 그 방아쇠는 한국이 먼저 당겼다. 일본의 경제가 주춤할 때 계속해서 성장한 한국은 연안 해군 수준에 머물러 있던 해상 전투력을 급속도로 신장시켰다. 동아시아 최대 규모 상륙 강습함인 광개토대왕함과 한국 최초 이지스 함인 세종대왕함을 진수하는 등, 20년 전에 비해 질적 양적 성장을 거듭했다.* 뿐만 아니라 제도적 제약도 풀려가고 있다. 이미 평시 작전 통제권은 한국측이 가지고 있으며 현재 미군이 가진 전시 작통권도 한국정부의 의지만 있다면 언제든지 돌려받을 수 있다.**

따라서 일본 입장에서는 과거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군국주의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 해군력의 절대 우위, 즉 해상에서 병력수송 자체를 봉쇄할 규모의 해군력의 확충과 한국정부가 일방적으로 전쟁을 선포할 상황에 대비해 좀 더 적극적인 군사활동이 가능하도록 평화헌법을 고쳐야 할 압박을 받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일본은 위와 같은 정치/군사 분야 뿐 아니라 문화 측면에서도 위협을 느끼고 있다. 8090년대만 해도 문화적으로 일본문화는 한국에 대해 절대 우위에 있었다. 한국의 청소년들은 일본 만화와 음악에 열광했으며 일본 영화와 배우들은 한국에서 쉽게 인기를 얻었다. 현재 이와 같은 관계는 역전됐다. 한국은 일본의 가수나 영화배우를 알지 못하지만, 일본인들은 소녀시대 카라와 같은 한국 아이돌 그룹을 알고 있고 한국 배우들이 나오는 드라마를 시청하고 있다. 과거 조센징이라고 부르며 멸시하던 한국의 문화가 "한류"라는 이름으로 인기를 끄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군사 정치적 위협보다 더 큰 불안감을 조장한다.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한국의 해군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한국이 작전권을 가져가는 것이 일본에 어떤 영향을 주는 지 보다 일상생활에서 느껴지는 문화적 힘의 역전이 더 피부에 와 닿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일본이 과거사에 대해 사과 하기는 더욱 어렵다. 과거 8090년대 동북아시아에서 일본이 압도적 우위를 보일 때엔 일본정부가 관대하게 유화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었지만(무라야마 담화, 고노 담화) 당장 중국과 한국이 일본의 지위를 앞지르거나 위협하는 입장에서는 그와 같이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다. 국민들은 예전과 같이 강한 일본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으며 정치인들은 그 소망을 만족시켜주며 표를 얻고 있다.

따라서 아베는 과거사에 대해 사과하지도, 군국주의를 포기하지도 않을 것이다. 일본의 사과를 듣기 위해서는 일본을 굴복시키거나 한국의 경제군사력이 과거 수준으로 후퇴해야만 한다. 하지만 전자는 가까운 시일 안에 일어나기 힘들고 후자는 우리가 원하는 길이 아니다. 그렇다면 군국주의의 포기와 사과만을 요구하는 한국측의 태도는 한일간의 대화를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만약 일본에게 뭔가를 요구할 것이라면 다른 옵션을 줄 필요도 있다. 일본이 과거사를 정리하지 못해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한국이 다른 형식의 배상이나 이권을 요구해도 일본이 들어줄 여지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일본은 동아시아 나라들의 반대로 중국이 부상하기 전 엔화를 아시아의 기축통화로 만드는 데 실패했으며 UN에 엄청난 분담금을 내면서도 상임이사국 진출에도 실패하고 있다.)

나는 여기서 일본의 입장을 변호하려는 것도, 도덕적 당위성이나 정의를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엄청난 살육을 저지른 지 70년 밖에 안된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이 주변국의 비난과 압력에도 불구하고 재무장을 시도하려는 동기에 대해 분석해 볼 뿐이다. 마치 형사가 수사에 앞서 범죄자의 살인 동기를 살펴보듯, 일본이 군국주의를 포기할 수 없는 배경을 파악하는 것이 그들을 마주한 협상 테이블에서 이기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전략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세종대황함이니 광개토함의 실제 전투수행 능력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이 있다. 하지만 그 중 가장 비판적인 의견을 받아들이더라도, 과거에 비해 해군의 전투능력이 크게 향상된건 사실이다.
**한미 양국은 전시작전권을 이양하기로 합의했지만, 한국측의 요구로 두차례나 연기했으며 마지막 협정에 따라 사실상 무기한 연기되었다.

2015. 10. 13.

그는 돌아 볼 것이다.


하지만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는,


별것 아닌 그 초라한 세상이

곁에 남은 유일한 친구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2015. 9. 6.

그들이 말하는 표현의 자유


영국 모 일간지 에디터의 주장에 따르면 왼쪽의 만평과 오른쪽의 화보는 매우 다르다. 다른이가 믿는 종교의 선지자를 벗겨놓고 희롱하는 그림은 표현의 자유로 존중 받아야 하지만, 오른편은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저급한 사진으로 지탄의 대상이 된다고 한다. 놀랍게도 그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이 많은지, 첫번째 삽화를 실은 일간지를 위해 거리를 행진했던 사람들은 표현의 자유가 무엇인지 대해 입을 다물었고 결국 한국의 모 잡지사는 해당 발행본 전량을 회수하여 폐기하여야 했다.

마호멧을 벗겨놓은 그림과 여자를 납치하는 연출사진 중 왜 하나는 표현의 자유가 되고, 다른 하나는 파렴치한 사진이 되는가? 왜 그들은 샤를리 앱도가 총탄 세례를 받기 전에 모욕을 멈추고 발행분을 전량 회수하라고 주장하지 않았는가? 연출 사진이 문제가 된다면 왜 그들은 양들의 침묵 같은 영화가 식인을 권장하고 홍보하고 있다고 비난하지 않는가? 어떠한 기준에서도 그들은 이중잣대를 들이댔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이를 처음으로 보도한 잡지는 바로 코스모폴리탄이었다. 그들은 주로 연예인들의 근황이나 그들의 스캔들, 익명 여성의 섹스경험담 등과 같은 소프트 포르노적 컨텐츠를 주로 다룬다. 포르노 산업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으로는 래리 플린트를 들 수 있다. 그는 자신의 포르노 사업이 제제를 받자, "왜 월남전의 잔인하고 끔찍한 사진은 저널리즘이 되고 여성의 신체는 포르노로 규제 받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며 표현의 자유에 대해 우리들이 고민해보아야 할 생각의 지평을 넓혔다. 코스모폴리탄이 포르노 잡지인 허슬러보다 형편없는 것은 노출수위 하나뿐이 아닐지도 모른다.

2015. 8. 17.

프리다와 디에고.



깊고 지독한 사랑은 한 사람의 영혼을 갈가리 찢어놓기도 한다. 그리고 때때로 예술은 그와 같은 고통 속에서 만개한다.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의 관계와 그들의 예술도 그러했다. 교통사고로 심하게 다친 프리다는 병상에 누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이 때 디에고가 그녀의 멘토가 된다. 프리다는 21살 연상인 디에고를 신처럼 여기며 따랐지만 그는 끊임없이 다른 여자들과 추문을 일으켜 척추가 부서진 그녀의 가슴까지 박살내곤 했는데, 심지어 그 상대 중에는 프리다의 친동생인 크리스티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프리다는 끝없는 남편의 방종에 괴로워 하면서도 그에게서 독립할 수 없는 어린아이 같은 여자였다. 그녀에겐 처절한 아픔을 그림으로 게워내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디에고는 프리다에게 그림을 그릴 기술과 감정, 둘 모두를 전해준 셈이다.

디에고는 바람둥이였지만 프리다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여러 여자를 만나면서도 프리다가 진실한 영혼의 동반자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신의 외도에 지친 프리다가 다른 애인을 두기도 하고 심지어 동성애까지 하자 그는 화를 내며 이혼을 통보했지만, 얼마 못가 그는 그녀를 잊지 못하고 다시 프리다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조용히 고향 코요아칸으로 돌아가 프리다가 죽는 그날까지 그녀의 곁을 지킨다.

죽을만큼 갈망하면서도 차지할 수 없던 남자를 사랑한 프리다와, 수도 없이 많은 여자를 스쳐가면서도 한 여자를 놓지 못했던 디에고. 프리다의 그림세계를 설명하면서 디에고를 빼 놓을순 없으며 디에고의 삶을 이야기하며 프리다라는 이름을 이름을 빠뜨릴 수는 없다. 그 둘은 살아서 뿐 아니라 미술사가들의 기억 속에서도 늘 함께 할 운명이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교묘하게 기획된 것 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둘의 전시회가 한국에서 동시에 열렸다.(프리다 칼로: 소마미술관. 디에고 리베라: 세종문화회관) 하지만 그 전시회에는 상대 전시회에 대한 특별한 설명이나 안내도, 혹은 있을 법한(그러나 정작 했다면 유치했을것 같은) 이벤트도 없어, 마치 다툰 뒤 냉전중인 연인의 모습처럼 서늘했고 어색했다. 어제가 디에고 전의 마지막 날이었으니 그 누구보다도 운명적이었던 부부화가의 두 전시회는 두달여간 각자 뚱하게 열려있다 어색함을 남긴 채로 마무리 된 셈이다.

평생 바람을 피워댄 주제에 먼저 이혼을 통보했던 디에고가 1년만에 프리다에게 돌아가던 날, 아마도 그는 잡초같이 못생긴 꽃다발을 들고 넓적한 얼굴에 능글맞은 웃음을 띄워 미안함을 감추며 프리다의 병실에 들어섰을 것이다. 그리고 그 둘은 멀찍이 떨어져 앉아 어색한 시간을 보냈겠지. 한참 후에 디에고가 나직한 목소리로 '당신이 너무나 그리웠소'라는 말을 꺼낼 때까지.

어쩌면 이 어색한 두 전시회의 컨셉은 바로 그 순간을 기리는 것 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