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1. 10.

너희는 죽창가 나는 덴노 헤이카

나루히토 천황에게 공손하게 인사하는 이낙연 총리
이낙연 총리는 나루히토 천황의 즉위식에 참석하여 그를 덴노 헤이카(천황 폐하)라고 부르고 일본 기자들과의 회견에서 일본어로 문답을 진행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베를 만난 자리에서 문재인의 친서를 전달했지만, 요미우리 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아베는 그의 친서를 그 자리에서 읽어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외교적 관례에 따르면 정상 간의 친서는 그 자리에서 열어보는 것이 관례라고 하는데 아베는 한국과 정상회담을 열 생각이 없음을 강하게 표현한 셈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정상회담 요구가 거절당하자 즉석에서 아베에게 요청해 즉흥적으로 열린 11분 간의 대담.
 
하지만 여기에서 그친다면 병신외교의 종주국이라고 불릴 수 없다. 아베의 강력한 시그널에도 불구하고 문재인은 아세안 정상회의에서 아베의 옷깃을 잡으며 예정에 없던 정상회담을 요구했다. 그 결과 소파 위에서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약 11분간 대담이 이루어졌는데 이를 사진으로 남겨 줄 기자들 조차 없어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직접 찍어서 언론에 배포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일본 측은 산케이 신문을 통해 협의되지 않은 사진을 무단으로 올렸다며 한국 측에 강한 불만을 표명했다고 한다.
 
캬. 병신외교란 바로 이런 것이다. 자신이 이길수도 없는 상대를 있는 힘껏 빡치게 해놓고 이에 대해 걱정하는 목소리는 모조리 다 토착왜구라고 몰아붙이며 국민들에게 죽창가를 뿌린다. 그러면서 동시에 유일한 우방 미국에게는 지소미아를 폐기하겠다며 자해공갈을 펼친다. 결국 고립무원에 빠진 정부는 남몰래 일본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민다. 외교부 실무자를 일본에 여러번 보내다 안되니 통역장관을 보내보기도 하고 결국 국가의전서열 2위인 총리가 대통령의 친서를 가져갔지만 문전박대를 당하다, 대통령이 직접 대화좀 하자고 애원하는 것. 이게 바로 병신 외교의 진수다.
 
정부와 여당 지지자들은 우리보다 일본의 타격이 더 심하다며 애써 정신승리를 부르짖지만, 만약 그렇다면 왜 우리나라 정부가 저렇게 매달리는지 설명해 보라. 문재인 대통령의 모친상 자리에 일본은 아베의 짤막한 조의를 전달했을 뿐, 친서를 보내지도 대화의 메시지를 보내지도 않았다. 그렇게 거절당했는데도 정상들 모인 자리서 애기좀 하자고 옷깃을 붙잡는 것은 장삼이사들의 대화법이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정상이 취할 태도가 아니다. 국제사회는 우리의 이런 행동을 보며 배를 잡고 웃고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정부의 고위급들이 외교에 대해 얼마나 안이하고 한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다시 한번 엿볼 수 있었다. 그들에게 외교란, 대화를 할 생각도 없는 상대에게 줄 것도 없으면서 그저 붙잡고 끈질기게 내 주장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면 기적이 일어나 상대가 굴복하고 천하를 갖다바칠 것이라고 믿는 것 같다. 비슷한 일이 2017년 7월에도 벌어졌기 때문이다.(링크) 당시 사드 문제로 한중간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을때, 청와대는 문재인 대통령이 시진핑 주석을 끈질긴 태도로 설득해서 전향적인 태도를 내놓았다며 자평했는데 아마 외교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장면이 얼마나 한심한 지 머릿속에 쉬이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상대에 내 주장을 끝없이 반복하는 것은 자폐아들도 할 수 있다. 그것은 끈질긴 것이 아니라 멍청한 것이다. 그리고 저 멍청함의 대가는 그를 뽑은 국민들의 몫이다. 전향적인 태도를 보였다던 시진핑은 아직도 사드제제를 해제하지 않았고 한국 연예인들은 중국에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지 못하다. 일본이 원하는 징용공문제에 대한 해답를 내지 않는 한 아베는 문재인과 정상회담을 열지 않을 것이다. 매달려도 소용없다. (이 운동권 무리들이 젊은 시절 어떻게 연애를 했는지 안봐도 뻔하다.)
 
국민들에게 죽창가를 부르짖으면서 본인은 덴노 헤이카(천황폐하)를 외치는 그들.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겠다더니 아베 총리의 소매를 붙잡고 예정에도 없던 대담을 구걸하는 대통령. 김포와 인천에서 출발하는 일본행 비행기는 다시금 한국 관광객들로 가득 차있고 no japan을 외치던 소비자들은 11월 일본차들을 대량으로 구매했다. 예전에 읽었던 한 연구조사에서 한국인들의 지능지수가 유대인에 이어 세계 두 번째라고 했던 것 같은데 내 기억이 틀렸나 보다, 두 번째가 아니라 두 자리라고 했던가. 

부동산, 어디까지 오르나

내가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분양가상한제가 실시되었다. 이제 서울 부동산의 공급은 끝났다. 청약로또를 바라보며 분양가상한제를 외치는 이 머리 나쁜 사이코패스들의 바람과는 반대로 조합들은 재건축/재개발 사업을 지연할 것이고 저들은 비명을 지르게 될 것이다. 나는 거기에 일말의 동정도 하지 않겠다. 남의 재산을 빼앗아 자신의 배를 불리는 것이 정의라고 믿는 이들에게 응당한 댓가가 돌아가는 것 뿐이지 뭘. 이제 뭐가 남았는가? 그래 너희들 하자는 대로 다 해보자. 자신의 미래를 자신의 손으로 망치는 당신들을 나는 지지한다.

좌: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가 득표한 지역[빨간색] 문재인이 득표한 지역[초록색]                                                              우: 분양가 상한제 실시 지역
(투표 좀 잘하지 그랬어요 강남거주민님들)
하지만 그런 악당들은 소수고, 대부분의 선량한 사람들은 이 부동산 폭등이 정책실수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에 정부노선의 수정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한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이 정부는 절대로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현재 부동산 정책을 설계하고 집행하는 김수현, 김현미, 박원순 등. 80년대 운동권/좌파였던 그들은 대학생 시절부터 고수해 온 친북적 성향을 단 한번도 버린 적이 없다. 80년대에는 그럴 수도 있었다. 남이나 북이나 독재자 아래서 자유가 없기는 매한가지고 북한이 더 잘 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소련이 무너지고 북한이 빈민국으로 전락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신념을 버린 적이 없었지 않았는가. 그럴 사람들은 전부 전향했지. 무려 35년동안이나 그릇된 신념을 품으면서도 "나는 틀리지 않았다"고 믿는 사람들인데 그런 그들이 서울 부동산이 고작 두 배 올랐다고 자신들의 정책 실수를 인정할까? 늙은 개에게는 새로운 기술을 가르칠 수 없고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저들은 결코 노선을 변경하지 않을 것이다. 노빠꾸 상남자들 킵고잉. 캬.

그렇다면 부동산은 얼마까지 폭등할까? 현재의 부동산 정책이 바뀌려면 2022년 대선과 서울시장 선거에서 민주당이 모두 패배해야 한다. 그럴 확률이 얼마나 될까? 게다가 설령 그런 일이 벌어져도 개정된 법들을 다시 다 되돌리고 재건축/재개발 조합들이 사업을 진행하는데엔 아무리 빨라도 5년이 걸린다. 즉 현재의 주택부족은 2027년까지 100% 확정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는 적정가격을 산출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다. 사막에서 조난당한 사람에게 생수 한 병을 100만원에 팔면서 적정가격을 논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이제 아파트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중산층들은 고통스러운 경주를 시작해야한다. 5년 전만 해도 강남의 중형평수 소형단지를 알아보던 사람들은 작년에 마용성으로 임장을 다녀야 했고, 이제는 마용성도 놓치고 태어나 처음 들어본 지역들의 부동산을 기웃거려야 한다. 그 과정에서 현실에 먼저 순응하고 눈을 낮춰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살아남을 것이고 그러지 못한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인내해야만 한다.(전에 작성한 글에서 말했듯, 당신이 40을 넘지 않았다면 인내도 좋은 선택일 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하지만 그래도 예측이 우리의 일이니 간단한 계산을 해보려고 한다. 먼저 경기도에 공급하는 신혼주택단지와 2기 3기 신도시가 서울의 집값을 얼마나 잡을 수 있을까? 먼저 가장 먼저 완공될 GTX-A가 들어서는 지역을 중심으로 역산해보겠다. 서울의 25평 대신 용인 수지, 일산 등의 25평에 사는 것은 어느정도 값어치를 가질까? 어려울 게 없는 간단한 계산이니 직접 해보기를 권한다. 먼저 서울과 수도권의 집을 비교하는 사람들의 평균 소득은 최저임금보다 훨씬 위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의 소득을 시급 만원으로 잡자. 그리고 수도권으로 이사가게 되면 평균 출퇴근 시간이 약 45분 증가한다고 가정하면 하루 1.5시간. 따라서 25평의 주 수요자인 맞벌이 가정은 둘이서 합해 하루에 3시간을 통근에 쓰게 되는 것이다. 시급 만원으로 계산하면 하루 3만원의 비용이 든다. 여기에 GTX요금 4천원을* 더하면 4만 6천원(30,000+4,000x2명x2왕복). 그리고 한달 30일 중 약 27일(휴일에도 서울로 외출할 수 있으니)동안 이 비용을 낸다고 계산하면 그들은 약 월 124.2만원을 지불하게 된다. 1년이면 약 1,490만원이 되고 이를 매매가격의 월세수익률 4.5%로 나누어주면 3.31억, 여기에 서울거주 프리미엄 20%를 감안하면 3.97억, 거의 4억에 가까운 금액이 나온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시간당 기회비용   : 10,000
통근시간 증가       : 1.5시간(왕복)
GTX 통근비용       :   8,000 (왕복)
평균 가구원 수      :      2명
하루 가구 지출      : 46,000 [(10,000*1.5+8,000) x 2]
월 비용(27일)        :    124.2만원
연 비용(12달)        : 1,490.4만원 (A)
월세수익률(신축) :       4.5%       (B)
매매가격 환산       : 33,120만원 (A)/(B)
서울 프리미엄20%: 39,744만원

따라서 상대적으로 출퇴근이 용이한 강동이나 영등포, 혹은 관악구의 25평 아파트의 가격보다 4억 이상 저렴해야 GTX-A노선의 아파트들은 비교우위를 가지는 셈이다. 현재의 가격을 보면 동남권을 대체할 용인수지의 25평 가격이 대략 3.9억, 서북권을 대체할 일산/고양의 25평 가격이 약 2.5-2.7억으로 아직 4억의 차이에 미치지 못한다. 즉 GTX가 들어서는 지역의 집값을 훨씬 더 떨어뜨려야 서울의 수요를 분산하기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정치적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여당의 텃밭의 집값을 폭락시켜 서울의 집값을 잡는다는 정책은 애초에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2,3기 신도시 계획들은 서울의 수요를 대체하지 못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으니 서울의 수요공급에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경기도권의 물량은 계산에 넣을 필요가 없다. 그리고 서울시의 주택 수급상황은 지난 30년간 가장 최악의 상태로 치닫고 있다.(링크) 따라서 보수적으로 생각해도 주택시장은 2006/07년보다 과열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세/매매 비율은 지난 저점을 갱신할 가능성이 크다.(아래 그림) 그리고 정말 운이 좋아 2022년에 정권이 교체되어 2027년에 수급부담이 해소되기 시작한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수급부족에도 불구하고 아주 보수적으로 향후 전세가 상승률이 지난 1년 평균 수준(1.5%)이라고 감안하면 2027년의 전세가격은 현재보다 약 12.65% 상승할 것이며 전세/매매 비율이 지난 저점에 도달하려면 매매가격이 현재보다 약 75% 오를 것이다. 아멘.
전세/매매 비율 변화

수식만 보면 학을 떼는 물리울렁증 환자조차도 아는 공식, F=ma를 낳은 근대물리학의 아버지 아이작 뉴턴. 하지만 그런 천재 조차도 런던의 주식시장에 뛰어들었다 전재산의 거의 전부를 날리고 말았다. 마크 파버의 분석에 따르면 뉴턴은 18세기 당시 대표적 버블이었던 남해회사에 비정상적 투자를 했다고 한다. 그는 1720년 초, 회사의 주가가 뛰기 전 주식을 매입해서 불과 3개월 만에 두배 가까이 차익을 보고 매도했다. 하지만 그의 추천으로 주식을 샀지만 팔지 않았던 친구들이 더 큰 수익을 보자, 초조해진 그는 전재산을 들고 상투를 잡았다. 얼마간 더 오르던 회사의 주가는 곧 폭락을 시작하게 되고 뉴턴은 거의 파산상태에 몰려 주식을 전량 처분하고 만다. 그가 잠시마나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가 파산하기까지는 1720년 2월부터 11월 말까지, 고작 1년도 걸리지 않았다.이후 그는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지만, 인간의 광기는 계산할 수 없다"는 명언을 남겼다고 한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는 이런 저런 수치를 들어 집값의 미래를 가늠해보지만 서울에 보금자리를 찾지 못해 밀려나는 사람들의 공포와 시장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분노하는 멍청이 정치인들의 어리석음의 깊이는 측정할 수 없다. 내가 젊은 날을 부동산에 베팅한 것은 내 영민함을 믿어서가 아니라 저들의 멍청함을 굳게 믿기 때문이다. 천재 뉴턴은 자신이 거인의 어깨에 서 있었기 때문에 멀리 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는데, 그 말을 인용하자면 나는 저 멍청이들의 반대편에 서 있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노라고 답하리라. 멍청이들 화이팅!

뉴턴의 남해 주식 투자 시점































*이마저도 너무 낮아 GTX 운용은 대부분 적자가 될 것이다.
**이는 내 독창적인 분석이 아니라 다른 여러 글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임을 밝힌다.
***혹자는 리만 전 금융버블기보다 더 과열될 수 있느냐고 묻겠지만 미국이나 유럽의 주택/주식시장을 보라. 이미 그런 일이 벌어진 지 수년이 지났다.

2019. 11. 9.

인공지능과 인간의 공존 2

불특정 다수에게 글쓴이의 주장이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았다면 그건 글을 잘 못썼다는 반증이다. 그 글도 마찬가지다. 다시 읽어보니 그냥 지우고 새로 쓰고 싶지만 여러 답글까지 달려있으니 놔두고 다만 몇가지를 보충해서 다시 정리해 보려고 한다.
 
*          *          *

답글 중에 한 의사로 추정되는 분이 답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셨다. "의사의 진료는 단순한 지식의 적용이 아니라 인간의 오감을 동원하는 복잡한 작업이다. 따라서 이를 AI로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오래걸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AI가 대체하게 될 것은 쉽고 단순한 작업들일 것이다." 이것이 가장 흔한 통념이겠지만, 난 정확하게 반대로 생각한다.

의사를 예로 들어보자. 그분의 주장대로 의사는 오감을 사용해서 진료를 한다. 밀다가 갑자기 저항이 감소하는 느낌, 촉감, 밀다가 연부조직 아래로 뼈가 만져지는 감각 등. 하지만 이런 물리적인 측정은 기계가 인간을 넘어선 지 오래되었다. 인간이 조직을 만지며 "부드럽다" "피부가 마르고 거칠다" 와 같은 감각에 의존할 때, 기계는 피부의 표면거칠기가 타 피부조직보다 x% 높다, 환자가 통증을 느끼기 시작하는 압력이 xx PSI로 평균치의 1.97SD에 해당한다, 등 수치화 된 데이터를 소숫점 수십자리까지 뽑아낼 수 있다. 간단하게 인간 의사가 맨손과 고무줄만 가지고 환자의 혈압을 측정한다고 생각해보라. 그가 평생 혈압측정만 해왔다고 해도, 그는 중국산 싸구려 혈압측정기보다 못한 성적을 낼 수밖에 없다.

거기에 진료기록들의 DB를 구축한다면 현대의 로봇의사는 인간의사 보다 더 정확한 촉진, 청진, 시진을 수행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그 구현비용이 너무나 비싸기 때문이다. 알파고 같이 수천 억원을 투자해서 로봇의사를 하나 생산하느니, 그냥 의대를 설립하고 양질의 의사들을 육성하는게 훨씬 싼데 뭐하러 로봇의사를 만드나. 다시 말하지만 인간 뇌의 우수성은 효율성에 있다.

하지만 기술의 발달은 로봇의사의 생산비용을 낮출 것이다. 만약 1대의 로봇의사의 비용이 수백억 수준으로 낮아진다면, 그는 어떤 의사를 가장 먼저 대체할까? 존스 홉킨스 대학의 최고 심장외과 의사? 아니면 저어기 강원도 산골에서 할머니들 감기약 지어주시는 김선생님. 당연히 전자 아닌가.  AI와 기술의 발달은 고숙련 고임금 노동자를 가장 먼저 대체할 것이다. 존스 홉킨스 대학의 최고 심장외과의 K씨는 이전까지는 전세계에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고난이도의 수술로 수백만 달러의 연봉을 받았지만 그와 같은, 혹은 그보다 더 나은 기술을 가진 로봇의사들이 십수대 등장하면 다른 의사들과 똑같은 평범한 환자의 진료를 시작해야한다. 물론 연봉도 깎일 것이고.

이와 같은 일들이 산업혁명 시대에도 존재했다. 남들보다 시력이 두배 좋은 측량기사나 근력이 두배나 강한 건설노동자들은 각자의 시장에서 어마어마한 프리미엄을 누렸지만, 광학장비의 발달과 기중기 등의 개발은 그들이 누리던 독점적 지위를 없애버렸고, 그들의 소득은 평범한 노동자들보다 그저 약간 더 나은 수준으로 추락했다. 그리고 이제 기계가 육체노동시장의 엘리트들에게 불러온 변화를 이제 AI가 지식노동시장에 가져올 것이다. 나는 트레이더지만 AI가 등장한다고 해서 금새 나를 대체할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보다 연봉이 훨씬 높은 포트폴리오 매니저나 헷지펀드 트레이더들을 먼저 대체하겠지. 금융 뿐 아니라 의사나 법률시장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번면 저소득층이 받을 타격은 그다지 크지 않을 것이다. 맥도날드를 예로 들어 보자. 키오스크자체는 기술적으로 이미 20세기 후반에 완성되었지만 그 후 수십년이 지나도록 온전히 도입되지 않았다. 이 기계가 보편화 된 것은 오바마와 민주당이 미국의 최저임금을 올려 인건비가 장비값보다 비싸지고 난 후 부터였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나. 하지만 미국에서는 실업자가 늘어나기는 커녕 감소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기계보다 인간을 쓰는게 싼 일자리들이 널려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숙련 저소득 노동자일 수록 다른 직종으로 이직하는 것이 쉽다. 키오스크의 도입으로 맥도날드에서 해고된 P군은 쉽게 도미노 피자의 배달부로 재취업할 수 있고, (키오스크를 도입한 뒤) 해고되지 않고 남은 맥도날드의 노동자들은 생산성의 향상으로 임금이 올라가 더 많은 피자를 시켜먹어 도미노 피자의 수요는 늘어났다. 이런 연쇄 과정은 산업혁명 이래 200년간 이어진 변화고 그 결과 하층 노동자들의 삶은 극적으로 개선되었다. 러다이트는 분명히 틀렸다.

하지만 우리는 또다시 신종 러다이트들을 보고 있다. 저소득 육체 노동자들은 AI와 자동화가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고소득 지식 노동자들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이 팔짱을 끼고 AI테마주를 검색하고 있지만, 기업이 비싼 AI를 도입한다면 이는 몸값 비싼 고소득자를 대체하기 위함이지, 싸구려 노동자들을 갈아치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물론 저소득 육체 노동자들도 다수 해고되겠지만, 그들은 금새 일자리를 찾을 것이다. 맥도날드에서 패티를 뒤집는 데에 별 다른 기술이 필요한 것이 아니듯, 그들은 또 그저 그런 저숙련 노동을 필요로하는 일자리를 찾을 것이다. 세상에는 기계보다 싼 일자리가 많으니까.

*          *          *

하지만 그 의사분이 주장한 대로 우리는 로봇의사를 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이 비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사람 의사에게 진료를 받을 때 우리는 단순히 병의 진단과 처방 뿐 아니라 정신적인 위로를 함께 받는다. 본인이 큰 병에 결렸거나, 혹은 그런 가족을 둔 사람이라면 의사의 따듯한 말들-괜찮아요, 곧 나을 겁니다, 이런 인간적인 위안과 얼마나 의지가 되는지 알 것이다. (로봇의사에게 이런 위안 기능까지 넣는다면 개발비용은 훨씬 더 비쌀 것이다.) 마찬가지로 AI가 나보다 투자실적이 더 낫더라도 내 상사들이 나를 AI로 대체할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손실이 커도 AI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 불러서 항의할 수는 없지 않은가. AI의 최종 소비자는 결국 인간이고 그는 비합리적이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온전히 AI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2019. 10. 31.

사회주의 정부의 좋은 예

각 재화의 가격을 시장이 아닌 정부가 자기 마음대로 정하려고 드는 것이 사회주의가 아니면 무엇이 사회주의인가. 시장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깽판치는게 도대체 정부가 할 일인가.

트레이더나 운용역들은 대개 성격이 더럽다. 회사 내에서도 그들이 성질부리는 것을 다소간 용인해 줄 정도로. 그리고 그들이 성질부리는 것은 대부분 시장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샀는데 내리고, 팔았는데 오르고. 기다리는데 안오고. 나도 뭐 때때로 성질부리곤 하긴 하지만, 뭐 시장이 내 마음대로 되는게 정상인가. 그래야 할 이유가 뭐 하나라도 있나. 최대한 감정을 죽이고 냉정하게 분석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지.

현재 정부는 무능한 트레이더들의 모습을 똑 닮았다. 강남의 아파트는 평당 얼마여야 한다는 자기 혼자만의 괴상한 믿음을 가지고 그 믿음에 반하는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그런데 그 구성원들조차도 퇴근 뒤 강남복덕방으로 달려가지 않나. 자신의 욕망 하나도 통제 못하는 인간들이 남의 욕망을 통제하겠답시고 칼춤을 추고 있다.

그 마무리가 어찌 좋겠나.

2019. 10. 30.

탕탕절과 중력절

우리는 역사적 인물에 대해 고인모독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우리가 이순신장군을 두고 "최고 지휘관이 최전선에서 총맞아 죽는게 과연 올바른 리더쉽인가"라고 평가한다고 이눔새끼! 나라를 위해 몸바친 분에게 예끼!라고 말할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역사적 인물에 대해 공과 과를 냉정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으며, 이는 그들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박정희와 노무현 둘 다 당신들의 친구나 선배가 아닌 역사적 인물이고 따라서 그들에 대한 공과 과를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누군가에게 그들은 친구나 선배일 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누군가 그들을 평가할 때 고인모독이란 죄명을 들이대는 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역사적 인물이 아닌 일개 필부로 격하하는 것이다.) 박정희는 독재하며 자기 수하들을 경쟁시키다 경쟁에서 밀려난 김재규에게 총 맞아 죽었다. 노무현은 깨끗한 정치인 흉내를 냈지만 자기 형 아내 딸이 모두 돈 받은게 드러나자 자책하며 자살했다. 그들의 죽음의 원인은 각자의 비리에 있었지, 좌빨간첩들이나 수꼴보수신문이 죽인 것이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대중들은 자신들이 마치 박정희와 형님동생 하던 사이인 마냥, 혹은 노무현의 싸이 일촌이라도 되는 것 처럼 행동한다. 박정희가 총 맞아 죽은 날을 탕탕절이라고 부르거나, 노무현이 투신한 날을 중력절이라고 부르면 갑자기 노발대발하며 인륜과 도덕을 들이민다. 그렇게 치면 모든 위인들은 다 죽고 없는데 뭐 고인모독에 안걸릴게 뭐가 있나. 누군가는 독재자가 암살당한 날을 기념할 수도 있는 것이며 또 다른 누군가는 돈 받은 형을 보호하기 위해 남을 자살로 몰아간 사람이 같은 방법으로 자살한 것을 업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 극성 지지자들은 이를 고인모독이라며 핏대를 올리며 비난하지만, 그 고인은 당신의 절친이나 가족이 아니라 역사적 위인들이다. 그들에 대한 평가의 자격은 국민 모두에게 있는 것이지 당신들이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나는 내 주변 누군가가 탕탕절이라는 말을 쓰는 것과 중력절을 기념하는 것 모두 그들의 정치적 입장을 존중한다.

학창시절 유행했던 YS 지우개
마찬가지로 나는 표현의 자유를 옹호한다. 종교에 대한 모독을 제외한다면 표현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되는 것이 건전한 사회라고 생각한다. 노태우가 자신을 보통사람이라고 지칭했던 것이나, YS가 자기를 희화화한 캐릭터 문구용품을 허용한 것이나, 노무현 대통령이 국민들이 스트레스 받으면 대통령 욕도 할수 있고 그런거지 뭘! 이라며 일갈했을때 그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아 노태우시절엔 박수를 보내기엔 너무 어렸구나.)마찬가지로 표창원 의원이 국회에 박근혜를 희화화하는 더러운 잠을 걸었을 때, 나는 그를 지지했다. 패러디의 수준이 너무나 1차원적이고 유치하다는 점을 비판했지, 민주주의 사회에서 비웃을 만한 짓을 한 정치인들은 언제나 비웃음을 당하는게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놀랍게도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던 무리들이 갑자기 엄숙주의에 빠져서 권위를 내세우는 기행을 마주하고 있다. 탕탕절은 괜찮지만 중력절은 인간쓰레기들이나 쓰는 용어고, 여자대통령의 누드를 전시하는 것은 패러디지만 남자대통령이 애니매이션에서 상의를 벗고 있는 것은 패륜이라는 그 이중잣대는 적잖이 당황스럽다. 아래의 두 예시를 보자, 한국 정치를 모르는 이들에게 1번은 표현의 자유로 보장받아야 하지만 2번은 절대 허용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그들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우물거릴것이다.


사람마다 표현의 자유를 어디까지 허용할 지 그 기준은 다를 수 있지만 적어도 그 기준은 진영과 상관없이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다이다이 맞짱을 뜨면서 맨주먹만 쓸지, 연장도 허용할 지, 아니면 총이나 바주카포 같은 걸 써도 되는지 그 기준은 다양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길다란 일본도를 들고 나왔다면 적어도 상대가 품 속에서 자그마한 회칼을 꺼내는 것을 비난해서는 안되는 것 아닌가. 우스꽝스럽게도 이러한 내로남불이 헌법으로 자리잡은 나라가 있다. 바로 조선인민공화국. 그 괴상한 나라에서는 체고존엄 자국 지도자의 사진을 집집마다 걸어놓고 액자에 먼지가 앉아서는 안된다고 하지만, 정작 본인들은 심심할 때마다 남의 나라 대통령들 사진을 인형에 붙이고 불태우고 칼로 베고 뭐 그런다. 자신과 상대에게 같은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높은 도덕의 문제인 동시에 지능의 문제이기도 하다. 뭐 머리나쁜 사람들에게 이런 애기를 백날 하면 뭐하나, 재는 나쁘니까 당해도 싸고 우리편은 착하니까 그러면 안된다며 유아들의 니편내편 놀이 말곤 할줄 아는게 없는데.
 

2019. 10. 27.

인공지능과 인간지능의 공존

먼저 나는 AI를 전공하지도 않았고 그 분야에 종사하지도 않는 비전문가임을 밝힌다. 하지만 내연기관을 설계/제작하지 않아도 그 특성을 이해한다면 운송업의 미래를 가늠해 볼 수 있듯 나 역시 AI가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바꿀지 예측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뭐, 틀리면 할수없고.

최소한 생명체의 진화과정을 이해한다면 AI가 인간의 뇌와 아주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뇌 역시 복잡하게 연결된 수억 개, 어쩌면 그 이상의 논리회로에 따라 학습하고 판단하고 창조한다. 일반적인 유아가 학습하는 방식은 머신러닝과 아주 다르지 않다. 인간의 독자적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창조성 역시 조만간 AI로 대체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뇌는 적어도 두가지 측면에서 AI보다 열등하다.* 바로 망각이 이루어진다는 점과 감정, 편향 등으로 인해 논리적 사고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그 둘은 수억 년에 걸친 진화 과정에서 우리의 뇌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마련된 장치다. 망각은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정보를 메모리에서 삭제하는 것과 같고, 감정이나 편향은 특정 조건 아래서 우리가 뇌의 특정 기능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분노하거나 흥분할 경우 발생하는 아드레날린은 근육에 산소와 포도당의 공급을 늘리고 통증을 덜 느끼게 한다. 우리의 뇌는 한정된 에너지와 용량을 가지고도 최대한의 성능을 발휘하도록 진화되었다.

따라서 우리 뇌의 가장 큰 강점은 효율성이다. 예전에 언급했듯이(링크)  인간을 꺾은 바둑머신 알파고를 개발하는데 수천 억을 썼고 유지하는데도 연 수백 억의 비용이 들지만 바둑 두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 반면 커제나 이세돌은 바둑 뿐 아니라 어우 짜증나 라고 옆사람에게 말하기도 하고 직접 운전해서 귀가하는데다 노래하고 글쓰고 스타크래프트도 할 수 있지만 그에 들어가는 에너지라곤 고작 몇백g의 탄수화물과 지방, 단백질 그리고 몇몇 무기물과 비타민 뿐이다. 물론 알파고에 이런 모든 기능을 추가할 수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또 다시 수백 명의 전문기술자를 고용해야 하고 데이터 저장용량을 확장해야 하며 전력공급을 대폭 늘려야 한다. 애초에 인간의 기술로 만들어진 기관과 분자 수준에서 재조합된 생명체의 에너지효율은 차원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인공지능이 인간 뇌의 효율을 따라잡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일부 사람들은 저학력 노동자들의 미래를 걱정하지만, 이렇게 비싼 돈과 운영비를 들여 개발한 인공지능은 저학력자들을 대체하는것 보다 고학력자들을 위협할 가능성이 크다. 그 실마리는 과거의 사례로부터 찾을 수 있다. 영국의 엔지니어들이 증기나 전력을 동력원으로 사용하는 기계의 발명하자, 최고 숙련공 인간 노동자들과 기계 간의 대결이 심심찮게 벌어졌다. 마치 우리가 오늘날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을 지켜보던 것 처럼. 기계는 인간의 몸이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엄청난 괴력을 보여주었고 얼마 안가 노동시장에서는 우수한 신체능력에 대한 값어치가 폭락했다. 남들보다 두배의 힘을 가진 육체 노동자가 남들보다 크게 대접받을 곳이라곤 이제 UFC경기장이나 올림픽 투포환 경기장 뿐이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의 두려움과는 달리 난 인공지능으로 인한 대량실업 따위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산업혁명기의 노팅엄이나 요크셔의 공장들을 떠올려 보라. 기계들과 컨베이어벨트가 도입되자 러다이트를 필두로 대다수의 저숙련 인간 노동자를은 기계가 인간의 일자리를 집어 삼켜 모두 굶어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도끼와 망치를 꺼내 기계들을 부수고 다녔지만, 그로부터 300년이 지난 지금, 실업률은 되려 낮아지고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은 어마어마하게 개선되었다. 왜냐하면 여전히 공장에는 특정 업무에 특화된 기계를 도입하는 것 보다 그냥 인간의 노동력을 사용하는 것이 더 저렴한 공정들이 널렸기 때문이다. 인공지능도 마찬가지 길을 걷게 될 것이다. AI에게 밥그릇을 뺏기는 것은 십수년 간 공부해서 고소득을 올리는 전문직들이지 인공지능의 개발/운영비용 본전도 안나올 다수의 저숙련 직무는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다소간 형태야 바뀌겠지만.

게다가 인공지능의 또다른 한계는 그 엔드유저 역시 인간이라 비합리적이라는 데에 있다. 오늘도 전 세계에서는 불완전한 인간 운전자들이 매일 수만 건의 교통사고를 내며 매일 약 3천 명을 죽이고 있지만, 대중은 자율주행 차가 옆 차를 긁은 사건에 더욱 경악한다. 인간은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공포영화를 보면서 동공이 수축되고 근육이 경직되는 공포를 느끼면서 인류 역사상 수백만 명을 넘어져 죽게 만든 길거리의 돌뿌리를 보면서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이렇게 사용자인 인간이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합리적인 인공지능의 효용은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미국에서는 앤드류 양이라는 대만계 후보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경선에서 큰 돌풍을 가져오고 있다. 그는 미국의 대형 IT기업들이 AI와 자동화로 미국인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대량실업에 직면할 것이니 그들에게 세금을 걷어 모든 국민들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겠다고 주장했다. 뭐 각자 생각은 다르겠지만 적어도 난 대량실업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계를 되돌려 1875년 코네티컷의 한 농장을 상상해 보자. 앤드류라는 한 마부가 주장하길, 자동차라는 놈은 말과는 달리 지치지도 않고 수백 마일을 달리고 발굽을 갈고 접종을 할 필요도 없으니, 이 기계가 도입되고 나면 마부 뿐 아니라 대장장이, 건초판매업자, 등등이 모두 실직자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윽고 포드 T형이 1500만 대나 생산될 동안 미국의 실업자는 되려 줄어들었다. 마부와 대장장이들은 채찍과 모루를 버리고 포드의 공장에 재취업했고 건초를 팔던 사람은 이제 타이어를 팔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마부의 아들은 코네티컷 주를 벗어나 본 적 없는 아버지와는 달리 휴가철마다 대륙횡단열차를 타고 캘리포니아부터 시카고까지 마음껏 다닐수 있었다. 기계는 결국 우리의 자유를 확대했다. 산업혁명이 인간의 신체적 한계를 확장하는 사건이었다면, 인공지능은 인간의 두뇌를 넘어서는 사건이고 이는 대량 실업은 커녕, 일반 노동자들의 삶을 크게 개선할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당연히 연산속도도 차이가 나는 것 처럼 보인다. 47,964.61^988,17.554와 같은 수학연산은 AI는 커녕, 간이계산기조차 인간의 뇌 보다 빠르니까. 하지만 사칙연산이 아닌 다른 다양한 정보처리에서도 과연 그럴까. 예를들어 아이유와 신봉선의 사진을 보여주며 누가 더 아름다운 얼굴인지 판별하는데 딥러닝으로 학습한 AI가 과연 인간의 뇌보다 빠를까? 기본적으로 뇌에서의 정보처리 역시 전기신호로 이루어지는데. 여전히 AI가 더 빠를 것이라 생각하지만 아는 바가 없어 잘 모르겠다.

지독한 대중의 지독한 오류

사람들은 좌파의 내로남불을 비난하지만, 그들 역시 지극히 이중적이다. 영리한 이들은 조국처럼 그 간극을 파고 들어 이익을 취하고 현명한 사람들은 그런 대중의 특성을 잘 활용해서 공공의 선을 이룩하겠지만 내 재주는 그 이중성을 꼬집어내서 조롱하는 것, 딱 그 선에 멈춰있다. 그리고 이는 내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일 것이다. 자 이제 또 이 고약한 취미를 풀어볼까.


1. 최저임금과 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내 또래들 중 최저임금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이들은 대부분 IT업계에 종사하고 있다. 댓글로 경제학자들의 기고나 외신의 논평을 붙여줘도 그들과의 논쟁은 늘 "사람의 노동력에 그정도 값을 못 주냐"며 경제학이 차지해야할 영역에 도덕을 쑤셔넣으며 끝나곤 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들은 택시업계가 타다와 분쟁을 시작하자 돌연 태도를 바꾸어 뒤쳐진 노동자들은 도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엇이 가슴 따듯한 그 인본주의자들을 냉철한 신자유주의자들로 탈바꿈시켰나.

대다수 사람들의 의견과는 반대로 나는 우리나라 택시가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교통 시스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1인당 GNI 대비 택시값을 고려하면 가장 저렴한 축에 속할 뿐더러 택시 요금 체계는 수요가 많은 시간에 빙빙 돌지 않도록 설계되어있다. 물론 나 역시 늦은 밤 연달아 승차를 거부당하거나 괴팍한 택시기사와 논쟁이 붙을 때면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주먹을 불끈 쥔 적이 한 두번이 아니지만 여전히 우리나라 택시는 완벽하지 않아도 상당히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2호선을 제외하고 죄다 적자인 지하철을 생각해보라) 당신이 택시를 거지같다고 느끼는 이유는 사실 당신이 거지같은 요금을 내기 때문이다. 당신이 봉천동에서 신사역까지 10만 원씩 내고 택시를 부른다면 그대를 모시기 위해 집 앞에 택시가 줄을 설 것이며 기사는 흰색 장갑에 턱시도를 입고 하차하는 당신의 문까지 열어줄 지 모른다. 서비스는 가격에 비레하니까. 못믿겠다면 이번 크리스마스 이브에 강남역 사거리에서 오만원짜리 네장을 꺼내고 봉천동 이십만원! 을 외쳐보라, 대한민국에 당신을 거부할 택시는 없다.

이미 가격 대비 극한의 효율을 보이는 택시업계에 타다가 뛰어들자 운수노조는 크게 반발했다. 대중과 언론은 그들을 자기 밥그릇을 위해 시대에 역행하는 악당으로 묘사하지만, 도대체 타다가 무슨 시대적 변화나 혁신을 가져왔는가. 그냥 돈 많은 IT업계 자본가가 목돈 뚜드려 박아 적자를 메우고 여객운수법을 우회하기 위해 디젤 SUV를 동원한 것을 제외하면 기존의 택시와 다를 바가 하나 없다. 타다의 서비스에 비해 요금이 저렴한 것은 대주주가 남의 돈을 끌어다 신명나게 손실을 내는 덕분이지 혁신 때문이 아니다. 게다가 나 역시 타다를 애용하지만, 그러면 그럴 수록 기존 택시들의 효율성에 대해 더욱 감탄하게 된다. 먼 거리를 갈 수록, 바쁜 시간대일 수록 타다는 항상 기존 택시보다 느리다. 어떻게 아무런 인센티브가 없는 월급제 기사들이 목구멍이 검찰총장인 기사들보다 더 효율적으로 길을 찾고 운전하겠나. 쿠팡의 손실이 매출에 비례해서 늘어나듯, 타다의 손실 역시 그리할 것이다. 대주주들이 무엇인가가 잘못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대중은 돈많은 부자가 택시기사들을 죽음의 경쟁으로 내모는 것을 보며 도태된 노동자들은 망해야 한다고 외치고, 운수노조가 택시요금을 인상하라고 주장할 때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가로젓는다. 하지만 당신들이 매년 두자릿 수로 최저임금을 옹호한다면 왜 5년에 한번 택시요금이 인상하는 것에 그리 야박하게 구는가. 택시기사들도 노동자 아닌가. 셔츠 위에 니트를 입고 sns에 아름다운 글빨로 최저임금을 예찬하던 좌파 IT 종사자들이 갑자기 신자유주의자가 되어 운수노조를 씹는 이유는 단 하나다. 자기 돈이 나가니까. 남의 돈으로 올리는 최저임금은 정의로운 것이고 내 돈 나가는 택시요금은 동결되어야 한다는 주장엔 논리도 지능도 정당성도 없다. 그냥 멋있어 보이고 싶으면서도 빈티나는 구두쇠 멍청이가 한명 있을 뿐.


2. 분양원가 공개와 노동원가.
집값이 오를 때마다 현대교육을 덜 받은 멍청이들이 늘상 외치는 단어가 있다. 분양원가 공개. 지금 집값이 오르는 이유는 (정부가 멍청한 정책을 써서 그런것이 아니라) 건설사들이 원가를 뻥튀기해서 턱없이 높은 분양가를 매기기 때문이다, 그러니 공사비 지출 내역을 상세하게 공개하고 나면 분양가를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다. 쓰면서도 한숨이 나오는 이런 멍청한 주장을 펼치는 똥멍청이들에겐 매가 답이다. 하지만 무식한데 용감하면 위험하다고, sns를 둘러보다 보면 그런 똥멍청이들의 주장에 넘어가는 또다른 똥멍청이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달려있다.

그 저변에는 모든 물건은 제 값을 주고 팔아야지, 수요가 늘어난다고 해서 제 값 이상의 가격을 매기는 것은 사악하다는 믿음이 끼어 있다. 현대사회가 시민들에게 교육의 의무를 부여하는 것은 원시시대와 별반 차이 없는 뇌를 학습시켜 현대사회에 걸맞는 구성원으로 만들기 위함인데, 저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분명히 교육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이니 감방에 보내야 하지 않을까. 만약 같은 논리를 그들의 노동시장에 적용해 보자. 4인 가구가 하루에 필요로 하는 칼로리는 약 8,000Kcal이고 수분은 대략 7-8L 밖에 되지 않는다. 거기에 몇몇 무기질과 비타민을 더하면 대충 한 끼 식비는 교도소나 학교의 식비보다 쌀 것이다. 어차피 모든 공교육은 무료니 빼고 사람이 필요로 하는 최소 거주공간 등등을 계산하면 그들의 제공하는 노동력의 원가를 산출할 수 있다.(대충 계산해보면 한달에 75만원이 채 안된다.) 이런 노동원가의 수준으로 삶을 꾸리는 노동자는 거의 없다. 그렇다면 노동의 원가는 설국열차에서 프로틴 바나 처먹는 식생활 기준으로 계산되어야 하고, 그보다 더 많이 소비하는 우리 모두는 사치와 허영의 삶을 사는 것인가? 만약 사측이 저런 노동원가를 제시하면서 당신의 월급을 깎겠다고 하면 그게 깎아 지겠는가. 하지만 토지정의연대 같은 조직에는 이런 머리 나쁜 미친놈들이 가득하다. 저들이 노동을 팔고 주택을 사는 입장이라 다행이지 이 인간들이 만약 주택을 팔고 노동을 사는 건설사 사장이었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졌겠는가.


3. 기회주의자들의 평등
사회주의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아마도 평등의 추구가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여러 심리학 실험에서도 증명된다. 심지어 인간 뿐 아니라 긴꼬리원숭이조차도 분배와 평등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현대의 인간은 그 평등의 영역을 선택적으로 적용한다. 평등을 외치는 모든 사람들은 "나보다 잘 사는 사람과의 평등"을 외치지 그 반대를 외치진 않는다. 진보성향을 지닌 노원구나 일산 덕양구의 주민들 역시 지구촌 상위 10%안에 드는 부유층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가난하고 못사는 동남아나 아프리카의 사람들과 평등을 외치지 않는다. (그러면서 세계시민정신을 배반한 트럼프는 가열차게 깐다) 물론 청담동이나 대치동 주민들도 이건희 앞에서는 평등을 외칠 것이다.

결국 평등을 외치는 사람들은 참으로 아름다운 미사여구로 사람들을 삥 뜯는 달건이들이나 다름없다. 재산을 n등분 하는 바운더리를 교묘하게 설정해서 자기들에게 더 많은 몫이 돌아가도록 설계하는 그 기회주의자들이야 말로 현대판 타짜다. 그들의 그럴싸 한 sns포스팅들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호구를 찾아 화투를 챡챡챡 섞는 고니의 싸다구를 짝짝짝 후려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믿는다. 평등을 외치는 목소리가 강할수록 탐욕적인 속물들이라고. 평등을 더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강남에 등기치고 싶어하고 렉서스나 벤츠를 몰고 싶어하며 자녀들은 미국의 명문사립에 보내고 싶어하는 가장 지독한 속물들이다. 내가 우러러 볼 평등이란 자신보다 가난한 사람들과 자신의 것을 나누는 이들 뿐인데 그런 사람들은 죄다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나머지 잔챙이들은 죄다 냄새나는 꾀죄죄한 기회주의자들일 뿐.




앞서 말했듯이 나는 이런 멍청이들을 보고 조롱하고 경멸하고 비웃는 데에 큰 즐거움을 느끼는 변태니 뭐 어쩌겠는가. 계속 이렇게 낄낄거리고 웃다 화내다 울어야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