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0. 2.

두 번의 세계대전, 그리고 오늘날 우리

양차 세계대전은 정확하게 반대의 이유로 발발했다. 1차 세계대전 이전 유럽은 외교의 황금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100여 년간 예외적으로 평화로운 시기를 보냈다. 물론 크리미아 전쟁이나 보불전쟁 같은 군사적 사건들이 일어났지만 이전의 유럽의 전쟁들에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국지적인, 작은 전쟁에 불과했다. 오랜 평화를 누린 유권자들은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완전히 잊었고 그래서 자국의 지도자들이 전쟁을 선포하는 순간 그들은 마치 축구 경기라도 시작되는 것처럼 웃는 얼굴로 열광하며 황제와 왕에게 키스를 보냈다. 축축한 참호, 피와 화약 냄새가 가득 배긴 흙 내음, 그리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포격의 굉음으로 대변되는 이 지옥의 서막은 바로 거기서 갈려나갈 사람들의 환호로 시작되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이었다. 

빌헬름 2세가 개전 선언을 하자 모자를 벗어 환호하는 독일인들

반대로 2차 세계대전은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나 깊었기 때문에 일어났다. 1938년 독일은 체코 내에서 독일인 거주민이 다수를 차지하는 주데텐란트를 병합하겠다며 대규모의 군대를 체코의 접경에 배치했다. 또다시 독일과의 전면전을 벌일까 봐 전전긍긍 했던 프랑스와 영국은 무솔리니에게 부탁해 히틀러가 협상장에 나오도록 설득했고, 체코 영토의 30%와 500만의 인구를 독일에 넘기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뮌헨 협정을 체결했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독일인들이 히틀러와 나치의 공세적 대외노선이 옳다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는 계기를 제공했고 이로써 히틀러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강화되어 전쟁의 불씨를 키우는 꼴이 되었다. 몇몇 사학자들은 만약 연합군이 히틀러가 집권 초기에 벌였던 여러 도발에 과감하게 맞대응했더라면 그와 나치는 실각했거나 군부의 반발로 2차 세계대전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 시대의 평화를 가져왔다며 히틀러와의 합의문을 꺼내든 체임벌린,
그리고 이로부터 불과 11달 뒤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한다.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이 그것 하나뿐일까. 1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을 결정한 각 주요국들의 왕족들은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당시 영국 국왕은 하노버 왕가의 핏줄이었던 조지 5세였는데 그는 영국에 적대적인 정책을 고수하다 전쟁을 선포한 빌헬름 2세의 사촌이었다. 또 반대편 전선에서 독일에 선전포고를 선언한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는 그의 7촌 사촌이었으니 1차 세계대전은 다름 아닌 바로 혈연 간의 전쟁이었다.* 반면 2차 세계대전은 핏줄이 다르다는 이유로 불필요한 전쟁을 선포하고 학살을 벌였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스탈린의 폭압적인 정치에 반발하여 독일군을 해방군으로 반겼지만 아리아인들은 슬라브 계열의 민족들을 진정한 동맹으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우크라이나에서 나치가 벌인 만행들은 우크라이나 민족이 차라리 스탈린이 낫다며 돌아서게 만들었고 동유럽 각지에서 파르티잔들의 테러가 이어졌으며 그 결과 안 그래도 어려웠던 동부전선의 보급과 병력 수급에 차질을 주었다. 게다가 나치는 당장 전쟁에 투입할 물자와 병력이 모자란 순간에도 유대인을 절멸시키는데 철도와 인력을 우선 배정하였으니, 적어도 동부전선에서는 핏줄은 전장의 헤게모니를 온전히 지배했다. 

두 세계대전의 차이는 그뿐이 아니다. 전쟁 발발의 이유가 비교적 명확한 2차에 비해 1차 세계대전의 발발 원인은 불분명하다. 사라예보 사건이 그 단초를 제공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도에서 어디에 있는지 알지도 못할 보스니아의 한 도시에서 세르비아인 암살자가 저무는 오스트리아의 황태자를 저격한 일이 어떻게 유럽의 반대쪽에서 독일이 영국과 프랑스와 싸우게 만들었는지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1차 세계대전의 발발원인을 연구한 케임브리지의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클라크는 이를 설명하는데 697페이지나 할애하면서도 여전히 아리송했던지 이 책의 제목을 몽유병자들(sleep walkers)이라고 지었다. 연구자인 자신이 보기에도 마치 전 유럽이 몽유병에 걸린 것처럼 전쟁으로 걸어들어갔다고.     

이처럼 인류가 저지른 가장 끔찍한 두 전쟁은 전혀 다른 이유로, 전혀 다른 배경으로, 또 전혀 다른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역사적으로 인류는 너무 평화로워서, 혹은 너무 불안정해서 전쟁을 벌였고, 핏줄이 다르기 때문에, 혹은 같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벌였다. 지도자의 자신감이 너무 넘쳐서, 때로는 두려움이 지나쳐 전쟁을 벌이기도 했고 어떤 경우에는 통합을 위해서, 또 다른 경우에는 분열을 위해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래도 싸우고 저래도 죽이는 것이 인류인가. 마치 자신을 태우고 강을 건너는 개구리를 쏘아 자기 자신마저도 죽고 마는 전갈처럼 전쟁은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튀어나오는 인류 집단의 본능적 행위와도 같다.   

그리고 오늘을 돌아보자. 당신과 나는 전쟁을 겪어본 적이 없으며 전쟁을 겪었던 우리의 할아버지들은 시나브로 사라지고 없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민족주의자들과 파시스트들 그리고 맹목적인 광신도들이 채우고 있다. 젊은 세대부터 중장년까지 역사에 무지하며 이념에 가득 차, 상대가 역사에 무지하고 이념만 따진다며 비난하고 있다. 갈등은 늘어나고 있으며 사람들의 이해의 폭은 점점 줄어가며 계급 간의 대립은 너무나 첨예하다. 비단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몇몇 낙관주의자들은 세계가 경제적으로 긴밀히 연결 되어 있기 때문에 전쟁을 벌일 유인동기가 약하다고 주장하지만, 20세기 초 유럽인들 역시 정확하게 같은 주장을 펴며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어떠했는가. 그리고 다시금 묻는다. 당신과 내가 죽기 전에 우리는 전쟁을 피할 수 있을까.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확신한다. 다만 그 전쟁의 포성이 우리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을지 자신하지 못할 뿐.



*대조를 위해 생략했지만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지원하고 러시아가 범슬라브주의를 이끈 원동력은 민족주의였다. 

2023. 9. 29.

서울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왜 우리는 서울을 발전시켜야 하는가

다른 세계 주요 대도시와 비교하면 서울의 이상한 특징 하나가 두드러진다. 바로 선진 도시 중에서 인구밀도가 매우 높은데도 불구하고 도시의 평균 용적률이 매우 낮다는 것. 이런 공간구조를 가진 다른 도시들은 대개 후진국인 동남아시아나 인도, 혹은 파키스탄에 있으니 서울과는 산업구조나 그 배경이 완전히 다르다. 가장 잘 사는 도시이면서도 그 구조는 못 사는 도시들과 비슷하다니, 조금 극단적인 비유를 들자면 이는 마치 삼성이나 테슬라의 본사가 구로공단 공구상가에 입점한 것이나 포르쉐를 모는 의사가 후암동 반지하에 사는 것처럼 어색하고 낯설다. 분명 서울은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

이런 기형적 구조가 유지되는 이유는 사회가 도시계획을 어떻게 정할지 합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장이 바뀔 때마다, 또 정부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마스터플랜이 등장하고 이전의 계획은 곧장 폐기된다. 정책의 방향성이 없고 일관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서울에는 아직도 군사정권 시절에 지은 성냥갑 아파트들이 아직도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많은 지역의 개발계획이 20년 가까이 공전하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는 어떤 도시를 만들어갈지 합의하지 못했다. 우려스러운 것은 이 논의의 대부분을 도시계획에 대한 이해가 일천한 비전문가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중 많은 이들이 서울이라는 도시의 발전을 억제하고 더 나아가 해체하고 싶어 한다. 박원순 시장으로 대표되는 진보 진영은 1970년대의 후진적 공동체 사회를 지향하며 서울의 개발을 억눌러왔고, 지방에 적을 가진 정치인들과 유권자들은 쇠락하는 자기 지역구의 인위적 부흥을 위해 강제로 서울의 기능을 떼어 지방으로 보내고 있다. 일부 젊은 세대는 서울이 너무 과밀화되어 집값이 비싸기 때문에 서울을 해체해야 한다고 믿으며 어떤 사람들은 서울만 발전하는 것은 불공평하기 때문에 서울을 억제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 주장들은 한데 모여 국토균형 발전이라는 슬로건으로 예쁘게 포장되었고 이제는 그 자체가 정의가 되었다. 어떤 정책을 당위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성숙한 논의는 사라지고 순환 논리의 오류만 남는다. 서울의 확장을 막아야 한다, 왜? 서울은 확장되면 안되니까. 하지만 역사적 사례들을 종합해서 보면 서울의 기능을 축소하고 해체하는 것은 천문학적인 비용을 초래하면서도 경제성장을 막고 우리들의 생활수준을 퇴보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

에드워드 글레이저는 자신의 저서, 도시의 승리에서 도시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예찬했다. 실제로 인류 문명의 거의 모든 발견과 진보, 그리고 문화적 성취는 도시에서 이루어졌지 않은가. 인류 문명의 태동은 메소포타미아의 도시들로부터 출발하였고 서구문명의 근간 역시 에게해 인근의 도시국가로부터 출발했다. 중세와 근대에도 거의 대부분의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대도시에 거주하며 서로의 견해와 아이디어를 교류하면서 혁신과 발전을 촉진했고 이런 추세는 현대까지 이어진다. 세계의 헤게모니를 주도하는 미국의 테크 산업과 금융은 실리콘 밸리와 뉴욕으로 대표되는데 이 두 도시는 미국 전역에서도 인구밀도가 가장 높다.* 물론 도시가 인류 발전을 주도하게 된 요인에는 이런 단순히 인구수뿐 아니라 교육시스템, 거주 인프라, 그리고 자유로운 문화적 배경 등이 함께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 유무형의 인프라가 도시와 무관할까. 신과 왕의 권위에 짓눌리던 중세 유럽인들이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준다고.

이 관점에서 서울과 대한민국의 미래를 살펴보자. 한국의 1인당 GDP는 이미 3만 5천 달러에 달해 중진국의 함정을 벗어났고  한국의 여러 산업과 기업들은 이제 세계무대에서 다국적 회사들과 경쟁하고 있다. 우리의 경제구조는 노동집약적 저부가가치 산업에서 벗어나 반도체, 배터리, 전기차, 모바일 등 고부가가치 제조업에서부터 문화 예술을 포함한 서비스 산업으로 확장되었다. 이들 산업에 가장 중요한 자원은 자본도 천연광물도 에너지도 아닌 바로 사람이다. 우리의 미래는 이들을 모으고 연결하는 것에 있는 것이지, 분산하고 흩뿌리는 것에 있지 않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는 오로지 서울만이 그 인프라를 모두 갖추고 있다. 

반대로 도시를 쪼개 분산하는 것은 막대한 비용의 증가와 인프라의 쇠퇴를 가져온다. 도로, 철도, 문화시설, 그리고 민간 상업시설들의 비용 대비 편익은 인구가 감소할 때 지수적으로 감소한다. 인구 천만의 도시에 지하철 노선을 10개 설치하는 것과 인구 백만의 도시 10개에 지하철 노선을 각각 하나씩 설치하는 경우를 비교해 보라. 인구 천만의 도시에는 대형 공연과 전시가 수백 회씩 열리지만 인구가 반 토막으로 줄면 문화행사는 반이 아니라 1/10로 줄어든다. 더욱이 인구가 줄어들 것이 매우 확실한 상황에서 멀쩡히 기능하는 대도시의 기능을 억제하겠다고 아무런 인프라가 없는 산간 오지에 막대한 예산을 퍼붓는 것은 가장 확실하게 국가예산을 낭비하면서도 사회의 비효율을 극대화하는 길이다.    

이미 우리는 지방분산의 실패를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행정부를 비롯하여 국민연금, 한국전력, 도로공사, 한국거래소와 같은 공사들을 각 지방으로 이전한 결과 무엇이 나아졌는가. 십수 년간 수십 조원의 예산을 투입했지만 행정은 훨씬 더 비효율적으로 변했고 재직자들의 만족도 역시 크게 떨어졌다. 세종시와 지방의 공사 본부의 고위직들은 하나같이 대면회의를 금요일 오후에 서울에서 잡으려고 실무자들을 닦달질하고 있고 그렇게 시달리던 직원들은 매주 금요일 KTX 플랫폼에서 서울을 오가느라 무의미하게 몇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이렇게 막대한 비용과 비효율을 감내하여 얻은 것이라곤 시골 토호들의 늘어난 재산과 쓸데없이 늘어난 교통량뿐이다. 

몇몇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서울의 과밀을 해소해야 한다고 믿는 이유는 아마도 서울의 주택 공급의 부족이 출산율의 감소를 가져온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서울에 집이 모자라면 집을 더 지으면 될 일이다. 서울의 평균 용적률은 고작 1.5-1.7배로 최대 5-10배에 이르는 다른 경쟁 도시들에 비해 형편없이 낮다. 구체적으로 보면 싱가포르의 경우 도심의 용적률을 25베, 맨하탄과 홍콩은 15배, 런던 도심은 5.5배까지 허용한 데에 비해 서울은 주거용 건축물에  그 반의 반도 안되는 1.5-2배라는 매우 낮은 용적률을 적용하고 있다.(법적으로 3배까지 허용되지만 그렇게 허가가 난 주거건물은 소수에 불과하다) 이렇게 대지를 세분화하여 엄격하게 용도를 지정하는 제도는 일제시대였던 1930년에 처음 도입되어 현재와 같은 개념은 1970년대에 완성되었다고 알려졌다. 이후 약간의 변경은 있었지만 큰 틀은 그대로 이어져왔다고 할 수 있다. 즉 서울의 도시계획은 지난 세기의 낙후된 건축기술에 기반하여 짜였는데, 우리는 이를 21세기에도 그대로 적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규제들은 서울의 주거환경을 크게 악화시켰다. 서울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인구당 주택 수는 꼴찌이고 노후 주택의 수나, (일반 대중들이 선호하지 않는) 연립 및 다세대 주택의 비율도, 그리고 노후 아파트의 비율도 단연코 1등이다. 현재의 규제와 정책은 마치 사람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도시를 가장 살고 싶지 않게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도시의 주거환경이 선진국의 대도시들 보다 인도나 베트남의 도시들을 닮은 이유는 우리가 인도나 베트남 만큼 못 뒤떨어졌던 시절에 만든 규제와 제도를 금과옥조처럼 떠받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인도나 베트남만큼 후진적인 인식을 지닌 유권자들이 있다. 그들은 기껏 돈을 써가며 홍콩이나 싱가포르, 런던과 뉴욕의 마천루들을 돌아보며 멋지다며 인스타에 올릴 인증샷을 박고 나서 다시 서울로 돌아와 마닐라의 다세대 주택만도 못한 노후주택들의 개발을 규제하는 정치인을 찍는다. 우리나라가 처한 진짜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우리나라가 21세기에도 노동집약적 저부가가치 제조업에 집중하겠다면 서울이라는 고밀화 된 도시는 꼭 필요한 것은 아닐지 모른다. 차라리 인구를 공단 주변으로 고르게 분배하고 노동자들의 수를 늘리는데 나라의 모든 역량을 투자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박통 시대의 구닥다리 산업 모델로 돌아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런 방식으로 현재의 경제규모를 유지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저출산은 분명 한국 경제에 장애가 되겠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발전을 가로막는 후진적이고 미개한 정책,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이다. 세계에는 인구증가율이 극히 낮거나 마이너스로 접어들었는데도 여전히 경제성장을 구가하는 나라와 도시들이 여럿 있지만, 자국의 도시를 해체하고 인프라를 망가뜨리면서 성장하는 나라는 단 하나도 없다. 자원도 없고 자본도 없던 나라였던 한국은 사실상 인적자원 하나로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어냈다. 1970년대 한국의 경제규모는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콩고와 비슷했지만 현재는 이탈리아 캐나다와 비슷하고 한국의 기업들은 대만 일본 독일 등과 경쟁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미래를 택할 것인가. 인구가 줄어들더라도 도시를 중심으로 발전을 지속하는 네덜린드나 벨기에 혹은 여타 도시국가들을 지향할 것인가, 아니면 인구밀도만 높고 도시의 인프라는 형편없는 후진국형 모델을 지향할 것인가.  

한때 대학가에는 대기업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주장하던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그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이 나라에 반도체나 배터리, 전기차를 만드는 회사가 없었더라면 노동자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그런데 아직까지도 서울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믿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서울의 기능과 조직들을 해체하고 분해해서 전국에 흩뿌려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자신들이 지방으로 밀려날 차례가 되면 곧장 머리에 띠를 두르고 길거리로 뛰쳐나오곤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의 미래는 단순한 노동자들의 수 보다 우수한 인적 자원들을 어떻게 모으고 연결시킬지에 달렸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도시가, 특히 서울이 반드시 필요하다. 대한민국이 더 발전하기 위해선 서울의 발전을 억누를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집중해야 한다. 인구가 줄어들 것이라고 예측한다면 더더욱. 우리의 미래를 위해 해체해야 할 것은 서울이 아니라, 바로 저들의 후진적인 인식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통신기술을 발달로 사람들이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치 한 곳에 모여있는 것처럼 교류할 수 있기에 굳이 도시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다른 인간들과 직접적으로 마주치고 교류하기를 원한다. 줌이 발달했으니 친구들과 만나 술 한잔 기울이는 대신 각자 앱을 열고 마시면 된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메타버스가 발달했으니 클럽이나 바에 가지 않아도 집에서 AR고글을 끼고 불금을 보내는 사람도 없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런 히키코모리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젋은이들이 친구들과 커뮤니티를 찾아서, 중장년들이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 노인들이 편리한 인프라와 의료시설을 위해 도시를 선호하듯 현재의 과학기술은 결코 도시를 대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댓글에 쓴 내용을 본문에 추가: 청년층의 높은 실업률의 주 원인 중 하나는 학력과잉으로 인한 노동시장의 불균형입니다. 모두들 대학을 졸업해서 폼나는 대기업 사원증을 목에 걸고 싶어하지만 아직 우리나라의 고용의 대부분은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고용이 유지되는 지속일자리의 80% 이상은 제조업이 차지고 있는데 그 중 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젊은이들이 기피하는 일자리입니다. 그래서 해당 산업들은 구인난을 겪지 않나요? 일자리가 없는게 아니라 구직자들의 눈높이와 현실이 안 맞는겁니다.

청년층의 실업률을 낮추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젋은층이 현실을 직시하고 공장 가서 볼트와 너트를 조이거나 좋좋소에 취직하거나, 혹은 혁신과 경쟁이 계속되어 새로운 세계적 기업이 생기는 겁니다. 그리고 후자를 위해서는 도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저는 젊은이들이 공장에 가는 것보다 새로 탄생할 뉴 삼성, 뉴 네이버에 다니는게 더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도시에 집중해야 한다고 믿고요.

지방으로 인구를 분산한다고 전체 일자리가 늘어날 지는 심히 의문이지만(전 아니라고 봅니다) 생긴다고 하더라도 그 저임금의 일자리들은 과잉학력으로 인한 불균형에 직면한 젊은세대의 목마름을 채워주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로요.  

2023. 9. 26.

허생전 2023 (feat. 주택공급 활성화 방안)

(생략)변 씨는 본래 원희룡 장관과 잘 아는 사이였다. 원희룡이 당시 국토부 장관이 되어 변 씨에게 주택수급 문제를 해결할 인재가 없는가를 물었다. 변 씨가 허생의 이야기를 하였더니 원 장관은 깜짝 놀라면서 "그인 이인이야. 자네와 같이 가 보세"라고 답했다. 밤에 원 장관은 보좌관들도 다 물리치고 변 씨만 데리고 걸어서 허생을 찾아갔다. 변 씨는 원 장관을 문밖에 서서 기다리게 하고 혼자 먼저 들어가서, 허생을 보고 원 장관이 몸소 찾아온 연유를 이야기했다. 허생은 못 들은 체하고 "당신 차고 온 소주나 어서 이리 내놓으시오" 했다. 변 씨는 원 장관을 밖에 오래 서있게 하는 것이 민망해서 자주 말하였으나, 허생은 대꾸도 않다가 야심해서 비로소 손을 부르게 하는 것이었다. 원 장관이 방에 들어와도 허생은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않았다. 원 장관은 몸 둘 곳을 몰라 하며 나라에서 주택 공급 방안을 마련코자 하는 뜻을 설명하자 허생은 손을 저으며 막았다.


“밤은 짧은데 말이 길어서 듣기에 지루하다. 너는 지금 무슨 벼슬에 있느냐?”

“국토부 장관이오.”

“그렇다면 너는 대통령의 신임 받는 각료로군. 내가 인허가 절차를 막는 규제들을 선별하면, 네가 의회에 아뢰어 일괄적으로 폐지할 수 있겠느냐?”

원 장관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 생각하더니,

“어렵습니다. 제 이(第二)의 계책을 듣고자 하옵니다.” 했다.

“나는 원래 ‘제 이’라는 것은 모른다.”


하고 허생은 외면하다가, 원 장관의 간청에 못 이겨 말을 이었다.


"타 OCED국가들과는 달리 조선은 대규모 자본과 법인이 거주용 부동산 산업이나 리츠에 진출하기가 어려워 민간 임대시장에서 규모의 경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너는 조정에 청하여 대형 리츠회사들이 주거용 부동산을 공급할 수 있게 허용해 줄 수 있겠느냐?"

원 장관은 또 머리를 숙이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어렵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것도 어렵다, 저것도 어렵다 하면 도대체 무슨 일을 하겠느냐? 가장 쉬운 일이 있는데, 네가 능히 할 수 있겠느냐?”

“말씀을 듣고자 하옵니다.”

"서울은 세계적인 도시로 성장했지만 평균 용적률이 고작 160%에 불과해 500-1500%의 용적률을 가진 다른 국제도시에 비하면 도시계획의 효율성이 턱없이 낮다. 이로 인해 직주근접이 가능한 주택의 수가 크게 모자라 핵심지의 주택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몇 시간씩 걸쳐 출퇴근 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는 비효율이 이어진다. 서울 핵심지를 고층으로 개발하면 양질의 주택 수를 공급할 수 있는 동시에 교통량은 줄고, 또 활용할 수 있는 대지의 면적은 되려 넓어져 공원과 도로와 같은 인프라를 갖출 수 있다. 그러기 위해 비합리적인 층수 규제와 용적률 제한을 과감하게 풀고 성냥갑 시멘트 아파트를 재건축하도록 더 강력한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한다. 이렇게 제도와 규제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정부 예산을 쓰기는커녕 인허가 과정에서 세수 수입은 되려 증가할 것이고 더욱이 이명박 정부에서 그랬던 것처럼 강남을 비롯한 핵심지의 주택공급이 크게 늘어나 상급지부터 주택 가격이 장기적으로 안정될 것이다."

원 장관은 힘없이 말했다.

“안 그래도 부자감세라고 욕을 먹는데 재건축까지 대거 풀어주면 토건족이라는 비난을 누가 감당하려 하겠습니까"


허생은 크게 꾸짖어 말했다.


"부자감세가 무엇이란 말이냐? 상속세율과 소득세율이 OECD 평균을 훌쩍 뛰어넘는데다 세금을 전혀 내지 않는 면세자 비율은 40%가 넘어 주요 국가 중 가장 높은데 무엇이 부자감세인가. 그렇게 걷은 세금을 가지고 아무런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아 누구도 살고 싶어하지 않을 수도권 변두리의 맹지에 갑자기 수만 세대의 집을 짓겠다는 계획이 더 큰 재정의 낭비 아닌가. 그뿐만 아니라 지자체와 행정부가 인허가권을 무기로 삼아 이미 인프라가 갖춰진 지역의 민간 주택 공급은 틀어막아놓고, 비효율적이고 방만한 공기업 LH에게 사업을 맡겨 설계도 엉망인데다 철근도 숭숭 빠진 공공 주택을 건설하는 짓을 과연 주택 공급 활성화 방안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야말로 진정 토건족스러운 짓 아닌가. 게다가 현재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PF 사업장은 인기가 없어 사업성이 나오지 않는 것인데 그런 엉망인 사업들을, 게다가 거주용 부동산도 아닌 PF들을 일괄적으로 구제해 주겠다는 것을 딴에 주택 공급 활성화 방안이라고 한단 말이냐? 내가 세 가지를 들어 말하였는데, 너는 한 가지도 행하지 못한다면서 그래도 신임 받는 국토부 장관이라 하겠는가? 너 같은 자는 칼로 목을 잘라야 할 것이다.”

하고 좌우를 돌아보며 칼을 찾아서 찌르려 했다. 원희룡 장관은 놀라서 일어나 급히 뒷문으로 뛰쳐나가 도망쳐서 관저로 돌아갔다.


이튿날, 다시 찾아가 보았더니, 집이 텅 비어 있고, 허생은 간곳이 없었다.




2023. 8. 10.

노무현의 뇌물보다 무서운 가출

2023년 8월 10일, 법원은 정진석 의원이 과거 노무현 대통령에 관한 허위사실을 주장했다는 혐의로 징역 6개월 실형을 선고했다. 이는  검찰의 구형이 벌금 500만 원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판결이었는데, 이러한 판결을 내린 배경에 대해 법원은 "정진석 의원의 글 내용은 악의적이거나 매우 경솔한 공격에 해당하고, 그 맥락이나 상황을 고려했을 때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보호받을 수도 없다"라고 부연했다." 이어 "유력 정치인인 정 의원은 구체적 근거 없이 거칠고 단정적인 표현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 부부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했다"라고 밝혔다.


문제가 되었던 정진석 의원의 발언은 아래와 같다.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씨와 아들이 박연차 씨로부터 수백만 달러의 금품 뇌물을 받은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은 뒤 부부 싸움 끝에 권 씨는 가출하고 혼자 남은 노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 이것이 이명박 때문이란 말인가. 


논란이 되었던 위의 발언에서 사실로 인정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 권양숙 씨와 아들이 박연차로부터 금품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가 드러남
  • 그로 인해 노무현 대통령이 검찰 조사를 받음
  • 노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음

사실관계가 확인되지 않아 허위사실로 여기지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 부부 싸움
  • 권 씨의 가출
  • 노 대통령이 밤에 혼자 남음

그리고 이로 인해 정진석 의원은 명예훼손으로는 아주 이례적으로 실형 6개월의 형을 받았다. 그리고 법조인이 아닌 나로서는 법원이 정진석 의원에게 실형을 선고한 것이 합당한지 섣불리 판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군사독재자들의 피붙이들과 다름없이 부당한 뇌물을 받은 그 가족들과, 부부 싸움과 가출을 주장한 정 의원 중에서 누가 노무현의 명예를 더 많이 실추시켰는지 쉽게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 그가 그렸던 정치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               *               *

지난 2018년 경기지사 TV 토론에서 당시 이재명 후보는 "친형을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키려고 했느냐"라는 질문에 "그런 일이 없다"라고 답했지만 이후 그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형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는 것을 검토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그는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당선무효에 해당하는 벌금 300만 원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2020년 7월 대법원은 "돌발적 질문에 대해 자기방어적으로 답변한 것은 적극적으로 허위사실을 유포한 것으로 볼 수 없다"라는 논리로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 했고 이런 판결이 나오는 과정에서 김만배와 가까운 사이로 차후 화천대유의 고문으로 활동한 권순일 대법관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링크)  

게다가 지난 몇 번의 선거에서 우리는 몇몇 정치인들과 일부 방송인들이 자신의 정적이나 반대 진영 인사들에 대해 매우 모욕적인 루머를 퍼뜨린 사실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중에는 유력 대선후보의 아내가 술집 작부 출신이라는 주장이나 여자 정치인의 섹스 비디오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던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누구도 징역형을 선고받은 이는 없었다. 거짓말이 거짓말이 아니게 되고, 똑같은 허위사실도 무죄가 되던 마당에 느닷없이 정진석에게 실형이 선고되었으니, 여당이 법원이 감정적이고 편향적이라며 반발하는 것도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대한민국의 사법 시스템을 믿으려 한다. 그러니 법원이 이제부터라도 유권자들의 눈과 귀를 흐리는 거짓 주장에 단호히 대처하기로 결정했다면 그 일관성을 엄정하게 유지하기를 바란다. 또다시 권순일이 주장한 것처럼 소극적인 거짓말은 거짓말이 아니라는, 그리고 뇌물보다 가출이 더 무겁다는, 그런 궤변을 듣는 괴로운 일은 없기를 바란다.

2023. 7. 6.

아직 쓰이지 않은 글

시장에 대해 글을 쓰지 않는 것은 시장이나 경제에 대한 내 전망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그 외의 주제에 대해서도 글을 쓰지 않는 것은 순전히 내 게으름 때문이다. 그렇게 머릿속에서 맴돌기만 할 뿐 아직 쓰이지 않은 글들은 하나둘씩 늘어만 가는데 곰곰이 돌이켜보니 나 자신마저도 뭘 쓰려고 했는지 잊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더라, 그래서 노트와 기억을 더듬어 언제고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글들의 제목이라도 적어두련다.  



에세이(가제)
20세기 뮬란과 21세기 페미니즘
교포, 자이니치 그리고 조선족
달과 6펜스, 그리고 이건희 콜렉션
AI와 현대미술
저출산과 배부른 캥거루들
대한제국을 몰락시킨 고종, 그리고 대한민국의 관료들
조커와 투페이스, 그리고 이재명과 윤석열 
성난사람들, 그리고 양극화 된 정치
투자에 실패한 이들을 위하여
서글픈 레트로의 시대
전쟁사의 가장 기발한 전투들
용서하지 않는 사회


감상문
건축학개론
헤어질결심
D.P

(2023.7.6 업데이트)

2023. 3. 19.

오만한 멍청이들과 크레디트 스위스

본인은 현재 언급되는 금융사들의 재정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으며 아래 글은 모두 현재 언론에 보도된 내용이나 해당 회사가 발표한 재무자료, 혹은 누구나 접근 가능한 금융시장의 데이터에 의존한 자료에 개인의 견해를 얹은 것임을 밝힙니다. 

무엇인가가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 누구도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낙관론을 펼치는 사람들이나, 확신에 찬 비관론을 펼치는 사람들이나 모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다만 확실한 것은 무엇인가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진앙은 167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적 투자은행인 크레디트 스위스로부터 출발한다.

낙관론을 펼치는 몇몇 은행 애널리스트들은 이 회사의 대차대조표는 탄탄하며 충분한 유동자산을 보유했기 때문에 과도한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시장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현재 크레디트 스위스의 PBR은 불과 0.13에 거래되고 있는데 이는 주요 투자은행들은 물론이고 이름이 알려진 금융사들 중에서도 가장 낮은 비율이다.  어쩌면 이는 투자자들이 그들의 대차대조표를 온전하게 신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암시하는지도 모른다. 또 이 숫자를 현재 시장에서 거래되는 신용부도스왑에 대입하면 CS의 파산 확률을 추산 할 수 있고 그 수치는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파이낸셜 타임즈의 보도에 따르면 이에 대응하여 스위스 중앙은행과 스위스 금융 규제 기관, 그리고 스위스의 다른 대형은행인 UBS는 발 빠르게 CS를 인수할 준비를 하고 있다. 실리콘밸리 은행이 파산한 지 불과 일주일이 지났을 뿐인데 세계적 은행 하나가 또 금융시장의 도마 위에 올라온 것이다. SVB의 실패는 테크와 스타트업에 집중한 은행이 리스크 관리를 엉망으로 하는 바람에 터진, 해당 은행 고유의 문제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고금리 아래서 버티기 어려운 산업은 테크 하나가 아닐뿐더러 자신이 어떤 리스크를 짊어졌는지 모르는 기관과 투자자가 비단 SVB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투자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경계심을 높여야 한다. 

절대 오해하지 마라. 나는 인버스에 몰빵하는 것을 권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가진 금융주를 모두 매도하라는 뜻도 아니다. 다만 현재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은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던 멍청이들이 그 오만함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뿐이다. 각 나라의 중앙은행들과 정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신속하게 대응에 나서고 있으니 이번에는 파산의 상처가 빠르게 아물 수도 있다. 혹은 인플레이션 압력 때문에 정부와 중앙은행의 대응이 원하는 만큼의 효과를 내지 못할 수도 있다. 아니면 앞서 언급한 두 개의 시나리오를 빠르게 오갈 수도 있다. 심지어 2008년 리만 위기에서도 먼저 파산한 베어스턴스 은행이 인수되고 나서 시장은 두 달간 약 15% 랠리 하기도 하지 않았나. 여하튼 지금은 호가 창을 가득 채울 만큼 부푼 에고와 과도한 자기 확신을 바탕으로 시장과 싸울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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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번 언급했듯 금리를 올리면 무엇인가가 무너진다. 그리고 가장 무모하고 멍청한 놈이 먼저 무너지곤 한다. 그러니 잠시 그 멍청이들의 명단을 읊어보자. 금융 시스템의 기초나 화폐금융에 대한 이해가 전무했던 권도형은 자신이 통화 시스템을 대체할 알고리즘을 개발했다고 허풍을 떨었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열역학 법칙을 뛰어넘을 수는 없듯 대단한 알고리즘과 뛰어난 블록체인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통화이론의 기본 원칙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평생 경제나 금융을 공부해 본 적이 없던 너드 프로그래머들과 제도권 밖의 사기꾼들, 그리고 과도하게 대범했던 투자자들은 기존의 금융을 비웃으며 자신만의 금융 시스템을 창조했다. 하지만 권도형이 주장했던 루나 생태계와 스테이블 코인의 가치는 역설적으로 자신들이 가장 업신여기던 중앙은행의 지원에 기반했던 사업이었고, 중앙은행이 유동성을 거둬들이기 시작하자 가장 먼저 붕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규제와 시스템을 준수하던 기존의 체계를 미개하게 여기던 오만한 투자자들은 울부짖으며 방향을 180도 바꾸어 자신들이 멸시하던 중앙정부와 은행에 보호와 사후 처리를 애걸하고 있다. 2022년 5월의 루나 사태는 첫 번째 멍청이들의 몰락을 의미했다.

두 번째 몰락은 샘 뱅크먼 프리드의 FTX였다. 앞서 상장된 종목 하나가 파산한 것이었다면 이는 거래소가 통째로 몰락한 사건이었다. FTX는 거래소를 자청하면서도 동시에 자사의 코인을 발행해 유통한 참가자였고 또 동시에 코인 펀드를 운용한 이해 당사자이기도 했다. 창시자 SBF는 이렇게 통정매매와 내부자거래, 시세조종을 거듭하면 큰 돈을 벌 수 있는데 기 금융시스템이 엄격한 권한/직무분리에 집착하는 것을 두고 제도권의 투자자들과 펀드들을 크게 비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거듭한 결과 해당 거래소의 담보 자산은 거의 대부분 자기 자신이 발행한 코인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신뢰성이 손상되자 빠르게 뱅크런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거래소가 통째로 파산하는 바람에 FTX가 발행한 코인에 투자한 투자자는 물론 해당 코인을 사지도 않았지만 FTX에 자산을 보유한 사람들까지 자신의 돈을 모두 날려야 했다. 앞서 루나 사태가 특정 증권의 파산이었다면 FTX의 파산은 크립토 세계의 은행의 파산이나 다름없었다. 

세 번째 몰락은 드디어 제도권 금융기관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실리콘 밸리 은행은 본디 세상을 바꿀 천재 창업가들을 주로 상대하던 은행이었다. 클라우드 컴퓨팅, 인공지능 프로세스, 양자컴퓨터 등에 비하면 안전자산이라는 채권이라는 상품은 얼마나 재미없고 따분하고 쉬운가. 그래서 그들은 1% 중반 밖에 안되는 금리에 채권을 사기로 결정했다. 그것도 만기가 아주 긴 채권을 아주 많이. 채권이라는 것은 안전한 자산이기 마련인데 관리할 리스크 따위가 있을까. 하지만 작년은 바로 그 채권금리 때문에, 전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기업의 주가도, 최첨단 테크 기술을 보유한 전도유망한 회사의 주가도 폭락을 거듭했다. 은행의 CFO들은 자신이 무엇에 투자하는지, 어떤 리스크를 짊어졌는지 안다고 착각했지만 실제로 그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결국 그들은 코로나 사태 이후 첫 번째로 파산한 은행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리고 리스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현재 많은 투자자들은 코로나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경제에 충격이 가해질 경우 중앙은행과 정부가 어떻게 대응하는지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그들의 어리석음은 권도형이나 샘 뱅크먼, 혹은 실리콘밸리 은행의 CFO들에 비견될 만큼 막대하고 무모하다. 지난 2020년에는 하나, 이미 미국이 금리를 인하하는 사이클에 있었고, 둘, 세계경제가 기나긴 시간 동안 디플레 압력 아래 있었고, 셋, 충격이 경제적 원인이 아니라 공중보건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중앙은행과 정부는 대담한 부양책에 나설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2020년 이전과 정확하게 정반대의 지점에 있다. 급격하게 금리를 인하하고 양적완화에 나서는 기준은 시장이 경험한 것보다 훨씬 더 높고 대규모 부양책과 구제책을 마련하는 것에 대한 정치적 반대는 훨씬 더 강하다. 수익을 내지 못하는 테크 회사들이나 쓰레기 같은 알트 코인들이 금리 인상을 선 반영하며 랠리를 이어가는데 정작 루나, FTX, SVB와 가장 흡사한 자산은 바로 그들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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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오만한 멍청이들은 현 정부 안에도 있다. 경상수지가 최악의 적자를 기록하는데도 외화보유고를 지속적으로 풀어 자신들이 원하는 환율 수준을 맞출 수 있다고 믿는 멍청이와, 검사였던 자신이 나서면 모든 금융기관을 살려줄 수 있고 또 그것이 옳다고 믿는 멍청이, 그리고 금융 시스템의 건전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시점에 대통령이 말 몇 마디 했다고 더 부실하고 빈약한 자본을 가진 참가자들을 허용하겠다는 멍청이. 그 멍청이들은 반드시 실패할 것이며 그 해악은 우리나라 경제와 시장에 커다란 상흔을 남길 것이다. 

이들은 오만하게도 자신들의 배경이 좋기 때문에 자신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영역에 적극 개입해서 성과를 낼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그들의 사고방식에 맞춰 이렇게 이렇게 조언하겠다. 권도형은 스탠퍼드를 졸업했고 샘 뱅크먼은 공학의 꽃인 MIT를 졸업했으며 현재 어려운 순간을 맞이하고 있는 크레디트 스위스에는 서울대보다 훨씬 더 이름 높은 명문대의 졸업생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그들도 실패하지 않았나. 그러니 당신들도 잘 모르는 분야에 오만하게 나서지 말고 할 줄 아는 것이나 잘 해라. 능력에 걸맞지 않은 야망은 늘 무언가를 망치는 법이다.

2023. 3. 18.

고장난 기억들과 지정학, 그리고 한일회담

대한민국은 지정학적으로 너무나 불리한 위치에 있다. 알다시피 우리는 대외무역에 크게 의존하는 나라이고 그 대부분은 바다를 통해 이루어진다. 만약 어떤 정치 세력이 제주도 남쪽 항로를 봉쇄한다면 대한민국의 경제와 사회는 그 즉시 무너질 것이다. 따라서 이 나라가 수백 년 뒤에도 독립국가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둘 중 하나가 반드시 필요하다. 자유무역과 항행의 자유를 보장하는 패권국이 계속해서 세계를 지배하거나, 혹은 우리가 스스로 태평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거나. 현재 우리는 다행히 전자의 세상에 살고 있다.

자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 만약 미국이 쇠퇴하는, 적어도 압도적인 해군력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을 가정한다면, 그래서 항행의 자유가 더이상 보장되지 않는 시대가 온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경제에서 교역비중이 차지하는 비중이 낮았던 나라들도 교역로를 봉쇄당하면 무너지곤 했는데 한국이야 말해 무엇하리. 따라서 한국은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무역로를 보호할 교두보를 확보해야 한다. 그 후보로는 두 지역이 있다. 중국의 동부 해안가, 혹은 규슈를 포함한 일본의 남부 지방. 전자의 경우 상대가 너무나 막강한데다 내륙 세력으로부터 긴 해안지역을 지켜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후자의 선택 만이 남는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국력이 역전된 것은 아무리 보수적으로 잡아도 고려 초기 이후로 보이는데 그 이후 단 한 번도 한반도의 생산량이나 인구는 일본을 앞서본 적이 없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현재 한반도의 육군은 일본열도보다 앞서 있으며* 이는 두 지역의 GDP가 역전된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런 불균형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따라서 한반도의 정치세력이 장기적으로 독자 생존하려면 현재의 군사적 우위가 다시 역전되기 전에 어떻게든 이 기회를 활용해야 할지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미국이 쇠퇴하는 순간 우리 역시 위기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런 쓸데없는 가정을 꺼내는 이유는 우리의 대외전략이 현실과 국제정세에 맞춰서 이루어져야지, 특정 국가에 대한 호불호를 따라가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꺼내는 이야기 역시 그런 관점에서 읽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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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 금나라는 북송의 제안으로 협공을 펼쳐 요나라를 멸망시켰지만 이후 송나라는 약속을 어기고 되레 금의 내분을 조장하는 등 공작을 펼쳤다. 이에 금나라 황제는 분노하며 수도인 개봉을 포위하였는데 금군은 12만에 이르렀지만 도성 수비군은 고작 3만 명에 불과한 데다 송의 형편없는 전투력은 이미 잘 알려진 터라 수도에는 불안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 가운데 혜성과도 같이 구원자가 등장했으니 그의 이름은 곽경이었다. 그는 자신이 음양오행의 이치와 도술에 통달할 사람이라 도술의 힘으로 금군을 섬멸할 수 있다며 호언장담을 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당당했던지 그를 만난 황제는 단번에 그를 도성 수비의 총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그는 한날한시에 태어나 사주가 같은 7,777명의 민간인을 선발하여 육갑신병이란 이름을 붙이고 그들에게 흰 옷을 입히고 매일 하늘에 기도하며 부적에 물을 뿌리는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가만히 사주를 따져보던 곽경은 오늘이 길일이라며 갑자기 육갑신병의 총 출전을 명했다.

제대로 된 전투훈련도 받지 않은, 체격이나 군 경험이 아닌 오로지 사주팔자 하나로 선발된 고작 7천여 명의 부대였지만 용한 도사의 비술로 거칠고 야만적인 유목군대의 정예군을 무찌를 수 있다고 진심으로 굳게 믿은 황제와 고관대작들은 기대어린 눈으로 그의 출전을 반겼다. 이윽고 성문이 열리고 흰옷을 입은 육갑신병은 용감하게 금군 기병대를 향해 돌진했다. 사막과 초원, 그리고 얼어붙은 유라시아의 대지를 넘나들며 온갖 적들과 싸운 금나라 군대였지만 이런 이상한 군대를 마주하기는 처음이었다. 그들은 적잖이 당황했지만 곧 칼과 창을 뽑아 이들을 맞이했다. 잠시 후 육갑신병들의 흰 옷은 모두 빨갛게 물들었고 그들의 사지는 찢어져 사방에 널려 있었으며 송의 수도 개봉은 함락되어 불타고 말았다. 

많은 한국인들은 이 육갑신병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 이름을 닮은 찰진 욕을 떠올리며 비웃겠지만 과연 우리에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주문을 되뇌지만 실제 역사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들의 현실인식은 이 주문을 외우면 자동으로 자주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믿는 휘종만큼이나 처참하게 왜곡되어 있고, 부적을 태우며 죽창가를 부르던 곽경을 지도자 자리에 앉힐 만큼 어리석다. 과연 우리에게 미래가 있을까.

위안부 합의와 강제징용 배상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딱 그렇다. 12년 만에 처음으로 일본에서 열린 한일 단독회담은 지난 몇 년간 악화일로를 걸어온 두 나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그간 양 국이 첨예하게 대립했던 외교적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자리였다. 여러 자극적인 보도와 헤드라인에 경도된 몇몇 사람들은 이번 외교 합의를 비난하지만 그들은 애초에 우리가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뭘 얻을 수 있고 어떤 비용을 치러야 하는지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저 일본을 진심으로 증오하는 마음만 가지면 상대가 벌벌 떨며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마땅히 들어줄 것이라 기대한다. 마치 육갑신병에 의지하던 개봉의 시민들처럼. 그리고 나는 이를 병신외교라고 부르기로 했다.(링크) 이제 그 병신외교가 아닌 현실의 눈으로 사태를 다시금 돌아보자. 우리가 이길 수 있던 싸움이었던가.  

먼저 징용공 문제의 핵심을 살펴보자. 여운택 씨는 과거 일본제철의 공장에 동원되어 열악한 근무환경 속에서 고된 노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패전 후 해당 회사가 임금을 전혀 지급하지 않았으니, 밀린 임금과 손해보상을 지급하라며 일본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하지만 일본 법원은 해당 사건은 공소시효가 지났고 신일본제철은 일본제철과 다른 법인이기 때문에 배상의 당사자가 아닌 데다 해당 청구권은 한일 정부가 맺은 1965년의 합의로 종결되었다는 논리로 이를 기각했다. 이는 당시 일제가 동원한 일본인 노동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던 전후 일본 정부의 일관된 원칙이었다. 이에 여 씨와 다른 세 명의 원고는 동일한 내용의 소송을 한국 법원에 제기하였다. 법원은 1심과 2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지만 놀랍게도 2012년 대법원은 원고 승소 취지의 파기환송 판결을 내렸고 이에 따라 19년 대구법원은 일본 기업에게 배상책임을 물으며 국내 일본 기업의 자산을 동결하고 압류 절차를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이에 반발하며 한국에 대해 다분히 보복성을 띈 무역제재를 가했다. 이에 대응해 한국 정부는 지소미아를 종료할 것을 검토하고 WTO에 일본의 무역보복을 제소하기로 결정했다. 

애초에 이 문제는 대한민국 법원의 판결이 국제적 정당성, 혹은 강제성을 갖췄는지의 문제였다. 만약 베트남이 특별법을 제정하여 월남전 당시 인명/재산피해를 입은 민간 피해자들에게 한국 정부에게 변상하라고 판결하고 당시 정부에 군수물자를 납품했던 삼성전자의 자산을 동결하고 매각한다면 우리는 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또 네덜란드 정부가 하멜이 작성한 표류기를 근거로 조선 정부를 이어받은 대한민국 정부는 (현대 네덜란드 법 기준으로) 네덜란드 인을 불법적으로 억류하고 강제로 노역을 시킨 피해를 하멜의 후손들에게 배상하라며 징벌적인 추징금을 매긴다면 우리는 이를 흔쾌히 수락할 수 있을까. 국제법 전문가들은 대한민국이 존재하기 이전에 벌어진 사건을 두고, 대한민국 법원이 그 법의 적용 범위를 국외로 확대하여 외국기업에 적용한 것은 국제법과 관례에 크게 어긋난다는 사실을 지적했지만 평양 주석궁을 방불케 할 정도로 글로벌 기준은 따위는 개나 줘버린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자들과, 역사는 잘 모르겠지만 역사를잊은민족에게미래는없다는 주문 만큼은 자다가도 외울 수 있다던 대중들은 그런 문제 제기를 철저하게 묵살한 채 죽창가를 드높여 불렀다. 이 문제에 있어 한국은 마치 북한 만큼이나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다. 

게다가 우리의 현실 인식은 크게 뒤틀려 있다. 한국은 1965년 합의에서는 강제징용과 식민지배 등을 다룬 것이지 당시 드러내지 않았던 위안부 성 노예 문제는 포함되지 않았다는 주장으로 2015년 위안부 합의를 새로 맺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과거 책임을 인정하고 한국 정부가 세운 재단에 일본 정부가 예산 100억 원을 출연하여 희생자들의 명예와 존엄, 그리고 마음의 상처를 회복하는 데 쓰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그 합의를 비난하며 부정한 것은 바로 한국이다. 지난 정권에서 한국은 이 합의를 먼저 파기하겠다고 선언했다가 임기 말 또 이를 번복하기까지 했다. 그랬던 대중들은 이제 강제징용 합의가 왜 위안부 합의보다 후퇴했냐며 비난하고 있다. 하지만 2015년과 비교한다면 하나. 강제징용은 명백하게 한일협정에 포함된다는 것, 둘. 외교적 영향력을 강제할 힘을 가진 미국이 당시와는 반대로 일본의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는 점, 셋. 양국 간의 외교적 합의를 이미 번복한 전례가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번 합의안 이상의 결과를 기대하기는 대단히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대중들의 도덕의식 역시 크게 잘못되어있다. 2018년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을 받은 원고는 모두 15명인데 그중에는 정부 합의에 찬성하는 유가족들과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두 뒤섞여 있다. 하지만 국내 여론과 대중들은 두 집단의 의견을 균형 있게 받아들이지 않고,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만을 선택적으로 보도했다. 이 문제는 위안부 합의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당시 일본 정부와 위안부 합의를 협상하던 정부는 네 차례에 걸쳐 생존 피해자들에게 협상 내용과 과정을 설명했고, 당시 기준으로 생존한 46명의 할머니 중에서 36명의 피해자들이 일본이 지급한 화해기금을 수령했으며 이미 사망한 분들의 유족 중 35명이 기금을 받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하지만 대중들은 그런 사실은 철저하게 무시한 채 당시 정부의 합의안을 비난하기만 했다, 외교부가 피해자들과의 협의 없이 합의했다는 거짓 뉴스를 사실로 믿었다. 왜? 그래야만 자신들의 민족적 자존심이 채워졌을테니까. 정작 희생된 것은 피해자들이었지만 위안부 피해와 1도 상관이 없던 대중들이 실제 희생자들의 아픔을 공공재로 치환하여 희생자들에게 합의금을 거절하라는 압박을 가했다. 오로지 자신의 민족적 자존심을 위해서. 희생자들을 착취한 것은 비리로 얼룩진 윤미향과 정의연만이 아니었다. 

이 회담의 결과가 최선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면 한국 정부가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일개 사법부의 구성원이라는 작자가 오만하게도 건국하는 심정으로 선고문을 썼다며 외교분쟁을 촉발했던 순간 당신들은 런던 올림픽의 축구 경기나 보고 있었다. 향후 사태가 악화되는 것을 피하고자 행정부는 대법원에 접근해서 선고를 지연시켰는데, 유권자들은 이를 사법 농단이라고 부르며 대통령을 탄핵시켰다. 미국이 한국 편을 들어준 위안부 합의도 반대했다. 한국이 일방적으로 일본 기업의 재산을 동결/압류하겠다고 발표할 때 당신들은 조국을 따라 죽창가를 부르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불매운동을 시작했다. 현재 정부의 조치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사태가 이렇게까지 악화될 동안 도대체 무엇을 했는가. 질 수 밖에 없는 분쟁을 시작한 것은 바로 당신들이다. 

*               *               *

그렇다면 아무런 결론을 내지 않고 질질 끄는 선택도 있지 않았나. 마치 이전 정권들이 그랬듯이.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다. 푸틴이 무리한 계획에 따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유로, 구소련제 무기와 장비의 사용연한이나 러시아의 고령화를 고려하면 자국의 군사력이 정점을 지나고 있는 반면, 우크라이나는 군사개혁에 나서고 서방의 지원을 받아들이는 등 강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두 나라 사이이의 군사적 격차가 점차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분석도 있다. 그리고 비슷한 모래시계가 동아시아에서도 돌아가고 있다. 현재 미군이 추진하는 국방개혁은 2030년 이후에나 완성되는데 그 시점이 지나고 나면 중국이 미국의 봉쇄를 무력으로 돌파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중국의 인구와 경제성장률이 이미 정점을 찍고 둔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대륙이 대만을 삼킬 마지막 기회는 향후 5-10년뿐이다. 최근 미국의 고위 장성이나 전략국제문제연구소들이 가까운 시일 안에 양안 전쟁이 재발하는 것을 염두에 둔 분석을 내놓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런 사태가 벌어지면 한반도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전문가들은 중국이 미군의 역량을 분산하기 위해 북한을 이용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북한이 전례 없는 과감한 도발이나 군사행동에 나서면 한반도 내의 미군 병력과 전략 자산은 발이 묶일 것이고 그때 중국이 대만을 침공한다면 미군은 나뉜 전력으로 대응에 나서야 한다. 얼마 전 CSIS에서 중국의 대만 침공을 가정한 워게임 분석에서 한국의 지원을 배제한 것은 이런 상황을 가정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처럼 미국의 입장에서 한반도는 그저 여러 전장과 요충지 중 중 하나일 뿐이다. 한국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과대평가하지만 지난 70년 동안 한반도 내에서 미군의 배치는 점점 후방으로 후퇴하고 있으며 전략무기와 병력 역시 점차 축소되고 있다. 바이든의 취임사나 연두교서를 분석해 보아도 미국 대외전략의 최우선 목표는 중국을 억제하는 것이고 북한은 중국에 대한 레버리지, 혹은 부수적 문제로 언급된다. 그리고 중국을 압박하는 주 전선은 어디까지나 태평양 진출의 교두보인 남중국해가 될 것이다. 현재 미군의 주력은 동아시아의 북쪽에 치우쳐 있는데 이 중 상당수는 산둥성의 미사일은 물론이고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의 방사포의 사정거리 내에 있다. 이런 전제조건들을 감안하면 전략적 유연성을 위해 미군은 전략자원들을 유사시 고립될 수 있는 남한보다는 후방의 요새화된 기지로 재배치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반면 미군의 자원을 독점하기를 희망하는 일본은 워싱턴을 설득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일본은 입장을 번복하고 적국인 북한과 민족적 유대감을 느끼는 한국은 신뢰하기 어려운 파트너이기에 미국의 대전략에서 한국의 비중을 낮추고 일본을 주 동맹국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주장은 오바마가 아베 신조의 팔을 비틀어 내놓은 위안부 협정을 한국과 한국 국민들이 발로 차버렸을 때 더욱 설득력을 얻었다. 워싱턴은 이미 한국과 일본이 영원히 화해하지 못하고 반목할 경우, 무엇보다 유사시 미국이 동맹국들의 협력이 절실한 순간에 한일 양 국이 대립할 경우 미국이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하는지 답을 내기 시작했다. 지정학적으로 미국이 한국을 버리고 일본을 택하는 것은 가능할 수 있어도 반대의 경우는 불가능하다. 시간은 결코 우리의 편이 아니다.

각종 안보 협의체들이 빠르게 구성되고 작동하기 시작한 시점에 한국이 강력한 우방국 중 하나인 일본과 같은 테이블에 앉는 것은 우리들의 국익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역시 최악의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가정하며 대외전략을 개편하고 있는데, 만약 한국이 일본과 반복하는 믿을 수 없는 파트너로 남게 된다면 미국은 일본의 재무장을 강력하게 요구할 수 밖에 없고, 이미 그 초기 단계를 지나고 있다. 인구와 경제가 한국의 3배가 넘는 일본이 대규모로 육군을 재건하게 되면 한국의 미국에 대한 레버리지는 더욱 떨어진다. 이 외에도 한미일 군사협력이 절실한 수도 없이 많은 이유들이 있다. 거기에 반대할 세력은 중국과 북한, 그리고 러시아 뿐이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한일 양 국이 강제징용 합의를 발표하자 UN 사무총장은 긍정적 교류와 미래지향적 대화를 환영한다고 밝혔고 EU 대외관계청 역시 즉시 성명을 내어 두 나라 간의 긴밀한 협력은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지역을 유지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핵심 축이라고 평가했다. 워싱턴의 백악관 역시 한일 양 국의 결정을 즉각 환영하며 윤 대통령을 국빈으로 초청했고 미 상원 역시 초당적으로 이번 조치를 반긴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는 날카롭게 대립하는 민주당과 공화당이 같은 목소리를 낸 몇 안 되는 사안 중 하나였다. 반면 중국은 이 합의를 미국의 압력으로 이루어진, 피해자의 기대와는 어긋나는 합의라고 폄하했고 북한은 이번 합의를 굴욕 회담이라며 노골적으로 폄하했다. 이번 회담을 반대하고 정부의 조치를 욕하는 미개한 21세기 선조와 고종들이여, 지금 당신의 목소리가 어느 쪽에 가까운지 돌아보라. 

*               *               *

서강대 사학과 임지현 교수는 저서 기억전쟁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화 강철비에서 곽도원은 "남북이 대결로 치달아 수백만 명의 희생한 식민지의 아픈 역사를 되풀이해선 안된다"라고. 그의 어조는 너무도 결연해서 희생자 수백만 명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권위적인 수치로 느껴진다. 하지만 아시아-태평양 전쟁사의 대가 존 다우어의 통계는 다르다. 그는 2차 세계대전에서 희생된 조선인 사망자 수를 약 7만 명으로 추정한다....UN의 통계에 따르면 당시 아시아에서는 1500만 명 의 사망자를 낸 중국의 희생이 가장 컸고, ....인도네시아는 기아와 영양실조 질병 등으로 약 300만 명이 사망했다....1945년에 대기근을 겪은 베트남에서는 통킹과 안남에서만 100만 명이 굶어죽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12만 5천명, 필리핀은 12만 명, 인도에서는 약 18만 명이 제2차 세계대전 중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정작 수백만 명의 희생자를 낳은 것은 식민지의 역사가 아니라 북한과 중국의 군대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대중들의 기억은 시나브로 조작되어 6.25의 희생자 수를 일제에 덮어 씌웠고 가장 많은 한국인을 죽인 범인은 김일성과 마오쩌둥에서 은근 슬쩍 도조 히데키로 갈아치웠다. 그리고 북한이나 중국은 우리에게 배상을 하지도, 사과를 하지도 않았다. 일본의 목에는 미국이라는 목줄이 채워져 있지만 북한과 중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건국 이래 일본 정부는 대한민국 국민을 단 한 명도 죽이지 않았지만 중국과 북한은 약 삼백만 명의 사망자와 실종자를 야기했다. 후자의 위협을 막기 위해 전자와 협력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일이다. 나는 아직까지 [역잊민미]를 외치는 사람 중 역사적으로 가장 많은 대한민국 국민을 죽인 이가 누구인지 제대로 이야기하는 이를 보지 못하였다.  

2018년 평창 올림픽에서 지난 정권은 북한에게 밑도 끝도 없는 구애를 펼쳤다. 그 결과 천안함의 폭침을 주도한 김영철과 지금도 틈만 나면 남한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김여정이 특급 VIP 대우를 받으며 평화의 상징인 올림픽에 얼굴을 내밀었는데, 이런 평화 회담이 성공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을까. 그 질문에 실제 역사는 매우 부정적으로 답했다. 하지만 역사를 잊은 국민들은 문재인 정부에게 압도적으로 높은 지지율을 보냈고 스스로 안보에 민감하다고 밝혔던 2030대 역시 약 85%의 지지율을 보냈다. 그리고 어떤 결과를 낳았던가. 그리고 그때와 정확하게 같은 사람들이 일본과의 협정에 문제가 있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낸다. 혹시 그들의 현실 인식에 뭔가 하자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고 보니 사기꾼 도사에게 속아 육갑신병에게 국방을 맡긴 북송의 황제와 고관대작들도 자신들의 판단력이 정상이라고 믿지 않았던가. 금나라 기병의 칼에 그 아둔한 머리가 썰리고 그들의 창에 가슴이 꿰뚫리기 전까지는.


이 글을 모든 방구석 비스마르크들과 한국판 육갑병신들에게 바친다. 


*엄격하게 육군으로 한정할 경우

2023. 3. 14.

덤 앤 더머, 그리고 뱅크런

지난 1년간 가상화폐 시장에서 벌어졌던 수많은 사건과 사고들은 지난 수백 년간 금융 시스템이 겪은 성장과정을 압축해서 보여주었다. 재화나 서비스를 거의 생산하지 못하는 생태계를 바탕으로 코인을 달러에 페그 하겠다고 나섰던 권도형, 부실한 자기자본으로 부실한 자기자산을 거래하다 파산한 FTX, 그리고 어리석고 욕심 많은 개미들의 종잣돈을 털어간 수많은 러그풀 등, 서부 개척시대를 방불케 하던 사이버 무법지대에서 발생한 이 일련의 사건들은 학교에서 배운 각종 규제와 시스템이 왜 필요한지를 몇 번의 붕괴와 막대한 손실로 모두에게 일깨워 주었다.

현재 시장을 뜨겁게 달구는 실리콘밸리 은행의 경우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이 은행은 과도한 레버리지나 위험자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너무 많이 산 채권 때문에 파산에 이르렀다. 금리가 오르면 채권 가격이 빠지고 그렇게 되면 손실이 난다는 매우 기초적인 사실을, 엄청난 규모로 간과한 탓에 회사는 큰 손실을 내어 예금자와 투자자들의 불신을 샀고 뱅크런이 발생했다. 이런 작은 은행은 대형 금융기관에게 적용되는 각종 규제들을 적용받지 않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무분별한 대차대조표를 운용하다 사달이 난 것이다.* 

금리 인상 후 첫 제도권 금융기관의 파산을 겪은 미 정부는 과감한 조치를 선제적으로 내놓았다. 아시아 시장이 개장하기 전, FDIC는 금액과 무관하게 모든 예금을 보장한다고 발표했고 연준은 새로운 기금을 조성하여 담보를 제공하는 금융기관에 적절한 시장금리에 1년간 대출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한 노력과는 반대로 자금경색을 겪는 금융기관에 유동성을 공급하겠다는 조치는 모순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한번 시작한 뱅크런은 좀처럼 멈추기 어렵고, 또 금융 시스템 자체가 위협받게 되면 그 피해가 막대하기 때문에 연준과 미 정부는 이처럼 과감하게 선제적 대응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조치가 뱅크런을 초기에 차단할 수 있을지, 또 미국의 금융 시스템은 얼마나 튼튼한지, 그리고 좀처럼 꺾이지 않는 마음을 가진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려는 연준의 노력과 위의 조치들이 어떻게 상호작용을 일으킬지 현재로서는 함부로 예단하기 어렵지만 백여 년에 걸쳐 수많은 부침과 사고를 겪으며 내구성을 강화한 현대 금융 시스템은 그 역할을 보여줄 것이며, 또 진화하고 발전하여 다시 미래에 새로운 도전을 맞이할 준비를 마칠 것이다. 물론 살아만 남는다면.

그리고 한국에는 덤앤 더머가 있다. 저번에는 PF 전수조사에 나서겠다며 자금경색을 야기한 선무당이 등장하더니(링크), 이번에는 금융 시스템이 흔들리는 가운데 은행의 설립 조건을 완화하겠다는 금융위가 있다. 지난 3월 2일 날 발표한 보도자료(링크)에서 그들은 선진국의 참고 사례로 실리콘밸리 은행을 소개했다. 그렇다, 바로 지난 주말 파산한 그 은행이다. 자신들이 자랑스럽게 소개한 회사가 곧장 파산하자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긴급 간담회를 열어 해당 사건이 금융 시스템 전반의 위기로 번지지는 않을 것이라며 시장을 다독였는데 회사 하나도 똑바로 못 보는 화상이 바다 건너 나라의 복잡한 금융시장을 무슨 근거로 예측할 수 있을까. 이런 희극은 계속된다.

금융은 반드시 규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규제는 규제 당국의 영향력을 보여주기 위해서나, 기초적인 시가평가도 이해하지 못하는 담당자들의 면피를 위해서가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금융사들 간의 투명하고 공정한 경쟁을 촉발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현업에서 느끼는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반대로 나아가고 있다. 그 모습은 격변하는 금융시장의 전광판 앞에서 한국의 두 금융 수장이 덤 앤 더머를 자처하며 서로 질세라, 열심히 슬랩스틱 코미디를 펼치는 장면으로 대변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슬랩스틱 쇼가 계속 지속된다면 우리는 머지않아 관람료로 상당히 비싼 비용을 치르게 될 것이다. 

금리를 올리면 늘 무엇인가가 무너진다. 어쩌면 이는 인플레를 잡는 과정에서 필수 불가결한 단계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적자를 내는 기업에 투자하는 것을 무모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내재가치를 측정할 수 없는 자산을 비싸게 사는 것에 익숙하며, 비용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를 거쳐왔다. 은유로 표현하자면 주식도 주택도 채권도 배당주도 가치주도 신흥국도 선진국도, 모든 자산이 공평하게 하락했던 작년의 금융시장은 그 시기가 지속될 수 없다는 첫 번째 경종과도 같았다. 그리고 이제 우리 앞에는 고통스러운 선택 만이 남아 있다. 그 가운데 가장 현명한 선택을 하도록 우리는 중앙은행에게 독립성을 허용하고 전문 인력들을 제공한 것 아닌가. 그러니 우리 아무런 경험도 식견도 없는 두 덤 앤 더머는, 한국식으로 표현한다면 우리 영구와 땡칠이는 본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어려운 금융시장에 손대다 체면만 깎아먹지 말고 그냥 금융 범죄자들이나 열심히 잡아넣는 것이 경제에 이바지하는 길임을 명심하길 바란다.


*반면 각종 규제를 적용받는 대형 금융기관들의 경우 유동성 비율이나 위험자산의 비중 등을 면밀하게 관리하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SVB의 문제가 금융권 전반으로 확산될 가능성은 낮다고 분석한다. 

2023. 2. 17.

적은 혼노지에 있다, 레고랜드가 아니라

몇몇 분들이 왜 현 정부의 외교정책에 대해 비판하지 않냐고 묻는데 내 생각에 현 정부의 외교 전략과 현실 인식에는 별문제가 없다. 물론 정치/외교 경험이 부족한 대통령의 몇몇 실수가 두드러지긴 했지만 이 사건들이 국익이나 우방국들과의 관계에 주는 영향은 극히 미미할 것이다. 기념일에 여자친구를 순대국밥집에 데려가는 것이 결코 세련된 일은 아니지만, 전 여친과 술을 마시거나 혹은 바람을 피우다 걸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 아닌가. 다만 일의 경중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만이 그 둘을 구분하지 않는다. 인과와 사실관계를 이미지로 판단하는 우를 범하면 문제의 본질에서 멀어지게 된다. 지금은 그깟 해프닝보다 훨씬 시급하고 심각한 문제들이 산재해 있으니까. 특히 금융분야에 있어 그렇다.

현 금융 규제 당국자들의 인식은 매우 잘못되어있다.* 작년 가을, 신용경색이 발생하자 많은 논평들과 정치인들이 강원도의 결정을 비난했지만 그들은 사건의 일부만 바라보고 있다. 역사적으로 통화정책을 긴축적으로 운용할 때에는 늘 무엇인가가 무너졌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근 100여 년 만에 가장 빠른 속도로 긴축이 일어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니 레고랜드 사태 없이도 신용경색은 반드시 일어났을 것이다. 강원도의 어리석은 결정은 신용경색의 불씨를 당겼지만 이미 불쏘시개는 사방에 널려 있었으며 인근에는 담배꽁초를 던지는 부주의한 사람들로 가득했으니까. 게다가 레고랜드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해외시장에서도 신용스프레드가 급등하지 않았나.

그러나 일말의 사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많은 정치인들과 당국자들은 모든 책임을 그 작은 테마파크에 몰아넣은 뒤 반성하기는 커녕 심판자, 혹은 구원자를 자처하고 있다. 그런 파렴치한 모습은 여야를 가리지 않지만 정치인들이야 유권자들의 의식을 반영하는 아바타에 불과할 뿐이다. 그리고 대중은 종종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지 않는가. 그러니 전문가가 아닌 정치인들과 대중들에 대한 평가는 잠시 미루어두기로 하자. 지금은 어리석은 결정을 반복하는, 전문성이 없는데도 전문가를 자처하는 돌팔이들부터 비난할 때이다. 

대표적으로 이복현 금감원장을 들 수 있다. 그는 지난 7월 취임 직후부터 부동산 PF에 대한 전수조사에 나서며 대대적 감사를 예고했는데(링크) 현실적으로 금융당국의 이와 같은 겁박은 자금시장을 경색시키기 마련이고, 대개 이런 사태는 우량과 비우량을 가리지 않고 진행된다. 작년 말 계속된 금리 인상과 겹쳐 자금시장은 급격하게 얼어붙었고 자금조달의 통로를 잃어버린 재무담당자들은 2020년보다도 더 큰 어려움에 직면했다. ABCP를 필두로 회사채, 더 나아가 일부 은행들까지도 자금 확보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자 금감원장은 단기금융시장과 회사채 시장을 안정시키겠다며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언제는 부동산 관련 대출을 엄격하게 보겠다더니, 이제는 금융사들의 팔을 비틀어 부동산 대출 익스포져를 가진 회사와 기관들에게 돈을 대주라고 겁박하는 꼴이란.

원론적으로는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레버리지를 꺼트리는 것은 선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 신용경색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내놓을 조치가 아니다. 이는 마치 뇌혈관이 터져 응급실에 실려온 환자에게 운동 부족이 근본적 원인이라며 집까지 뛰어서 돌아가면 살이 빠지며 나을 것이라는 처방만큼이나 어리석고 위험한 일이다. 또 그는 이렇게 항변할지도 모른다, 무분별한 PF들의 레버리지를 꺼트리기 위한 것이지 건실한 회사들까지 자금경색을 겪게 하려는 것은 아니었다고. 하지만 모든 금융시장은 연결되어 있다. 자본이 잠식된 리만 브라더스가 망하자 나머지 우량 금융사들도 자본조달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지 않았나. 이런 현실을 몰랐던 초짜의 좌충우돌 체험 삶의 현장 금감원장 편은 안 그래도 고통받던 자금시장에 염산을 뿌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레버리지를 엄격하게 제한하겠다던 그의 정책은 몇 개월 후 금융기관의 레버리지를 적극 밀어붙이겠다는 자신의 말로 반박된 셈이니, 금감원장으로 취임한 후 약 반년간 그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 나선 정신분열적인 행태를 거듭한 셈이다. 

이런 금융시장에 대한 몰이해와 아마추어리즘은 흥국생명 콜옵션 사태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링크) 투자자들은 암묵적으로 흥국생명이 이 달러 채무를 갚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그 신뢰를 배반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자금시장이 경직된 상황에서 그와 같은 결정의 여파가 어떨지 여느 금융기관에 갓 출근한 신입사원도 쉽게 짐작할 수 있던 일인데 금감원은 이례적으로 바로 다음날 보도자료를 통해(링크) 별 영향이 없을 것이라는 설레발을 쳤다. 하지만 결과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여느 돌팔이들의 처방들이 그러했듯이. 결국 흥국생명은 1주일도 안되어 해당 결정을 번복해야 했다. 이 외에도 공개하기 어려운 여러 사안들에 대해 금융 당국이 보여준 어처구니없는 결정이 더 있었고 그 서사는 위의 사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런 후진적 행태는 이복현이나 금감원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현재 정부에서 금융/경제 정책을 담당하는 상당수의 당국자들은 전기세나 교통비와 같은 공공요금부터 통신비, 대출이자, 배당, 환율과 같이 거시 상황과 시장경제에 의해 결정되어야 하는 가격까지 통제하려고 들고 있다. 그 모습은 집값을 제멋대로 정하려고 덤비던 지난 정부의 철학과 정확하게 맞닿아 있다. 김현미와 김수현의 철학이 해롭고 어리석었던 것처럼 현재 규제 기관들의 상황인식과 대응은 미개하고 또 무척이나 해롭다. 따라서 나는 지난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반대했던 바로 그 이유로 현 정부의 규제당국을 비난한다.**

이복현은 본디 검사 출신으로 금융 관련 수사에 특화된 사람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난 몇 년간 이해할 수 없는 여러 금융사건들이 사회적 이슈로 번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일부 조폭들이 회사를 설립해 상장사를 인수하거나, 주가조작 정황을 보고도 당국자들이 수사에 나서지 않거나, 혹은 일부 자금이 정치권으로 흘러들어간 직간접 증거들이 있다. 그중엔 심지어 금감원의 일부 전현직 인사가 연루된 일들도 있었다. 한 금감원 검사역이 라임 조사 계획을 룸살롱에서 청와대 행정관에게 넘겨주고(링크) 해당 문서는 바로 라임의 핵심 인물인 김봉현에게 전달되었다. 또 수천억에 달하는 고객들의 투자금을 털어먹은 옵티머스의 한 고문은 "(전관 고문단과 고교 동창 인맥 덕에) 금감원이 VIP 대접을 해준다"라고 말하는 녹취록이 공개되기도 했다. 정치권과 금감원, 금융인들이 유착된 범죄를 두고 우리가 검사 출신의 금감원장에게 기대했던 것은 그 범법자들을 잡아 금융시장 질서와 신뢰를 회복해달라는 것이었지 금융기관들이 누구에게 대출을 해줄지 무엇에 투자할지 컨설팅을 해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냉정하게 당신은 그럴 능력도 자격도 없지 않은가.

금융은 반드시 규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때때로 시장은 실패한다. 따라서 규제는 시장경제가 적절하게 작동하기 위해 효율과 자유로운 경쟁을 담보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현재의 규제 당국자들은 오로지 관(官)은 치() 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미개한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과거와는 달리 관은 우수한 인재를 독점하지도 못하고 있고 전체 GDP 중 민간이 차지하는 비중은 비교할 수없이 거대하게 커진 데다, 한국의 금융시장은 글로벌 금융시장과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다. 그런 현대 한국에서 관료들이 민간과 시장을 지도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무척이나 어리석은 일이다, 평생 주석궁에 살면서 손에 쥐어본 것이라곤 쿠바산 시가와 반쯤 빈 로얄 살루트 뿐인 김정은이 생전 처음 보는 방직공장에 현장지도랍시고 나서서 이것저것 훈수를 두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누가 그랬던가. 바보가 소신을 가지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고. 우리는 그 고집 센 바보들이 시장은 선도하려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이복현 금감원장이 있다. 하지만 금융의 세계에서는 시장이 곧 검사이자 판사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겸허한 마음으로 판결을 기다리는 일개 피의자에 불과하다. 시장은 늘 잘못된 판단을 내린 트레이더나 수익을 내지 못하는 기업, 혹은 비효율적인 정부를 심판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피고인 이복현과 당국자들은 시장이 과거 김현미와 김수현에게 어떠한 판결을 내렸는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일본인들이 종종 사용하는 "적은 혼노지에 있다"라는 속담은 아케치 미쓰히데가 모반을 일으켜 혼노지에 머물던 오다 노부가나를 참살한 사건에서 유래된 것으로 적은 내부에 있다는 말을 의미한다고 한다. 오늘도 철딱서니 없는 규제 당국자들은 비난할 대상과 적을 찾아 사방을 들쑤시고 있다. 이게 다 공매도 세력 때문이다, 욕심 많은 금융기관이, 혹은 투기세력 때문이다, 그리고 레고랜드 때문이다, 어쩌구 저쩌구.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한국 금융시장의 왜곡을 야기하는 적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혼노지에 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바로 아마추어들의 오만함이다.  


(기사가 첨부되지 않은 위의 내용과 특정 인물에 대한 평가는 개인의 의견임을 밝힙니다)


*비판의 대상은 각 금융 규제당국의 수장과 후진적 관료조직에 국한된다. 각 규제 기관에서 일하는 많은 실무자들은 우수한 인재들이며 때때로 존경스러울 만큼 강력한 사명감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글은 그런 우수한 인력들을 올바르게 활용하지 못하는 수뇌부와 조직구조를 비난하는 것이지 전체 모든 구성원을 싸잡아 비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반면 경제/통화정책의 두 수장은 나름 훌륭하고 착실하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많은 정부 관료들이 하는 일이 그렇듯 일을 잘할수록 주목받기 어렵고 못하는 사람들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그들의 성과가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한다. 


2023. 1. 14.

유시민의 타인을 고문할 자유

 전 방송인 유시민(63세)은 김어준이 TBS에서 하차한 배경을 두고 "현 정부는 자기 자유만 자유라고 하면서 반대 진영 사람들의 자유는 없앤다"라고 비판했다. 뒤이어 그는 이제 기존의 언론은 이해집단의 일부가 되어 공론장이 아닌 자기 이해를 관철하는 정보 유통기업이 되었고 따라서 이해관계로부터 벗어나 정보를 해설해 주는 방송이 필요하다며 김어준의 유튜브 채널에 구독과 좋아요, 그리고 알람 설정을 부탁한다고 했다. 

언론인으로서 책임과 역할을 충실히 이행한 사람을 아무런 이유 없이 공영방송에서 쫓아내는 것은 분명히 자유를 억압하는 일이다. 하지만 김어준이 어디 그런 언론인인가. 그가 진행한 뉴스공장은 지난 보궐선거를 앞두고 오세훈이 (땅투기의 목적으로) 내곡동의 생태탕 집을 방문했다고 주장했고, 대선에 앞서 당시 야당 후보의 배우자를 유흥주점에서 봤다는 주장을 검증 없이 내보냈다가 고발을 당하기도 했다. 두 사건 모두 명백한 허위사실이었고 또 선거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던 사건들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이태원 사고에 대해서도 허위사실을 유포하여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제재를 받지 않았나. 거기에 저널리즘이나 언론인의 사명, 혹은 윤리의식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시민은 이 일이 자유를 억압한 것이라고 정의 내렸다.

그렇다면 그가 옹호하는 자유란 도대체 무엇인가. 대중에게 거짓말을 할 자유, 정치적 중립성을 왜곡할 자유, 범죄가 들통나 자살한 성범죄자를 옹호할 자유, 야당후보의 배우자를 술집 접대부라고 모욕할 자유, 뇌물을 받을 자유, 남의 자식은 못 가게 막으면서 내 자녀들만 특목고에 보낼 자유, 그리고 이 모든 행위가 들통나도 사과하지 않을 자유. 그가 외치는 자유란 바로 이런 것이다. 하지만 그 길고 긴 리스트 중 가장 무서운 것은 바로 타인을 고문할 자유 아닐까. 

1984년 가을, 시위를 주도하던 학생들은 캠퍼스에서 네 명의 무고한 시민들을 붙잡아 학생회관에 감금하여 폭행을 시작했다. 그들은 피해자들의 옷을 벗겨 속옷만 입힌 채 폭행을 가해 온몸에 멍이 들었으며 순번을 정해 교대로 폭행에 나서는 등 가혹한 고문을 가했다. 피해자들을 여자화장실로 데려가 세면대에 물을 가득 채우고 얼굴을 물속에 처넣기도 했는데 한 피해자는 이때 이가 심각하게 부러져 한동안 음식을 먹을 수 없었고, 또 한 피해자는 지나치게 심한 폭행으로 상태가 급속도로 나빠지자 응급실로 실려갔으며 이후 심각한 정신분열증에 시달렸다. 피해자 중 하나였던 전기동 씨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은 프락치가 아니고 법대 교수님을 뵙기 위해 캠퍼스에 방문했던 지라 가해자들에게 이 사실을 교수님께 직접 확인해 보라고 했지만 그들은 전 씨의 증언이 맞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는데도 고문을 멈추지 않았다. 이에 대해 전 씨는 오히려 자신이 프락치가 아니면 그들의 고문행위가 더 큰 문제가 될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계속해서 폭행과 협박을 가한 것으로 보인다고 증언했다. 당시 핵심 수뇌부 중 하나였던 유시민은 스스로 "감금에 찬동했으며 폭행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고 직접 조사에 나서기도 했다"라고 인정했다.   

그리고 이 사건을 대하는 유시민의 태도는 놀랄 만큼 전두환과 닮아 있다. 그는 78학번으로 당시 고학번인데다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을 거쳐 복학생 협의회의 대표를 맡아 운동권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자신은 직접 폭행을 하거나 지시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마치 발포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주장하던 전두환의 비겁한 모습처럼. 또 무고한 시민들을 감금하고 끔찍하게 고문을 가한 배경을 두고 독재에 항거하던 특수한 상황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는데, 바로 그 독재야말로 북한과의 군사적 대립이라는 특수한 상황이라는 핑계로부터 탄생한 것 아닌가. 물론 몇 명의 시민을 물고문한 것과 수백 명을 죽음으로 내 몬 것은 결코 같지 않다. 하지만 수백만을 죽인 북한과 맞섰다고 수백 명을 죽인 죄가 없던 일이 될 수 없듯, 신군부에게 저항한다는 핑계로 무고한 시민을 고문해 인생을 망가뜨린 것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겠는가. 

한국 현대사의 끔찍한 과거 중 일부인 고문기술자 이근안은 자신은 자유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일했던 애국자라고 주장했다. 그가 고문했던 피해자들 중에는 진짜 간첩이나 반국가단체 소속의 인물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을 사랑하기 때문에 전두환의 독재에 반대했던 사람들, 혹은 아예 무고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범죄자로 기억하지 애국자로 기억하지 않는다. 1984년 관악산 캠퍼스의 학생회관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다. 그 피해자 중 정부의 프락치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고 그들은 가해자들과 똑같은 일반 시민들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곧 정의라고 믿던 학생들은 이근안이 남영동에서 가하던 것과 똑같은 고문을, 또 훗날 동지 박종철 군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것과 똑같은 고문을 스스럼없이 가했다. 그로부터 4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날의 가해자들 중에서 가장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들만이 남아 금배지를 달고 여의도를 오가는 동안 피해자들은 기초생활수급자로 전락하여 빈곤한 생계에 시달리고 있다. 그리고 그 사건으로 인해 실형을 살았던 유시민은 젠체하는 태도로 우리들에게 자유가 무엇인지 가르치려고 들고 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스스로를 래디컬 자유주의자라고 칭했다. 그러나 수많은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이 그렇듯 대개 래디컬리스트들은 자신이 믿는 가치와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마치 믿음 소망 사랑을 외치던 예수의 이름 아래 이교도의 목을 자르고 몸통을 말뚝에 박아 죽이던 십자군이 그랬듯이. 마찬가지로 노무현이라는 신을 믿는 한 비뚤어진 근본주의자 노친네가 주장하는 자유는 분명 우리가 이해하는, 또 대한민국 헌법에 기록된 자유와 매우 다르다. 앞서 언급한 민간인 고문 사건 이후 실형을 선고받은 유시민은 항소이유서를 작성했는데 그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법과 양심을 모두 지킬 수 없다. 이 경우 양심을 따라야 하기에 나는 반독재운동을 지켜가기 위해 언제라도 기꺼이 (의심스러운 사람들을) 연행 및 감금 조사를 하겠다" 그리고 유시민은 여전히 현재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또 그의 눈에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사람들이 보인다. 그래서 그는 서슴지 않고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모략하고, 스스로 궤변임을 알면서 궤변을 늘어놓는다. 그래도 그의 양심은 찔리지 않는다. 1984년의 학생회관에서 고문당하던 피해자들을 차갑게 내려다보던 마치 그때처럼. 그러니까 지금 이 육십 넘은 노인이 주장하는 자유란, 내뜻대로 타인을 고문할 자유를 뜻하는 것이다. 



*그가 폭행에 직접 가담했거나 지시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피해자 전기동 씨는 당시 현장에 있던 이들 중 가장 연장자로 사건을 주도한 사람이라고 주장했다.